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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소명을 깨우는 전도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을 넘어서

by 김선일2023-04-24

우리 모든 인생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소명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관심과 취향, 은사가 더욱 선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복음전도는 이러한 더 큰 이야기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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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영혼구원은 전도의 언어가 아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전도의 또 다른 말이 구령사역인데, 왜 영혼구원이 전도가 아니란 말인가? 만일 전도가 개인의 영혼이 죽은 뒤에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그러한 의미로 영혼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신을 나누는 이원론은 성경적 사상이 아닐뿐더러, “영혼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러한 내세주의적 구원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신자가 죽은 뒤에도 그리스도의 품에서 영원히 거하며,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는 것은 확실히 믿는 바다. 내세 중심의 개인주의적 전도 이해는 영혼구원의 진정한 의미도, 또한 전도사역의 깊은 차원에도 이르지 못한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제국 아래서 흩어져 소외와 배척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책이다. 특히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순종과 선한 행실에 힘쓰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최종 결과가 영혼구원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1:9).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베드로가 영혼구원을 믿음의 출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혼구원은 신자들이 현세의 고난을 감당하며 인내와 정절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삶이다. 고난과 유혹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려는 “육신”의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일터에서(2장), 가정에서(3장)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삶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영혼의 구원이다. 따라서 영혼구원은 (자연스럽게 전도의 열매를 수반할 수 있지만) 전도의 언어라기보다는 성화의 언어이자 제자도의 언어다. 


복음주의 운동은 회심과 전도의 중심성을 일깨운 소중한 유산을 계승해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전도를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이나 사후천국행에 머무르게 하거나, 혹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라는 복음의 더 큰 비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교회 갱신 운동인 선교적 교회론을 제안한 레슬리 뉴비긴은 근대 서구사회가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고 세속화, 이교화한 것은 바로 복음이 공적 영역으로부터 후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이 내면의 평안과 사후의 위안을 위한 사적 영역에 머물고, 과학과 소비주의가 삶의 지식과 의미를 채워가자 사람들은 기독교의 역할과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실천은 그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telos)에 부합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실천이다. 따라서 전도활동은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내용과 실천을 담아야 한다. 복음전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전도가 어떠한 신학적 패러다임 안에 있느냐와 관계된다. 전도가 육체로부터 분리된 인간 영혼을 우주 저 너머의 다른 세계인 천국으로 가게 하는 것이라는 신학 안에 있다면, 아마도 내세 지향의 개인적, 이원론적 복음전도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러나 전도가 창조세계를 지으시고 죄로 인해 부패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치유하시고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케 하는 것이라면 전도는 좁은 의미의 영혼구원 그 이상의 메시지와 사역을 담아야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으로의 초대, 또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응답하는 삶인 제자도로의 초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종종 전도는 기독교 신자를 만드는 것이며, 제자도는 신자가 된 다음에 주어지는 옵션처럼 취급되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음을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셨다. 그것은 기존의 생활방식에 평안과 위안을 제공하는 보조수단으로서의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전환하라는 요청이었다.


전도와 깊은 관련을 지니는 단어로 “중생”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등이 있다. 이 단어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나 제자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단어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더 큰 목적에 필요한 조건으로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3-5).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해서라고 말한다(고후 5:17-19). 따라서 복음전도는 일차적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더 큰 목적과 소명을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복음전도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선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된 가치와 더 큰 목적을 갖고 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청지기적인 삶을 살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소명을 깨우는 전도’는 오늘날의 자아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적 해법이 될 수 있다. 현대인에게 좋은 삶의 기준을 나누는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다. 이에 근거해서 성윤리는 개인 성향의 문제가 되었고, 인간의 사회적 활동은 취향이 중심 원리가 되었다. 자아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자아실현이 인생의 목적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향과 취향은 절대 존중되어야 할 성역이다. 개인의 선택과 성향, 자유와 취향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과 취향이 무엇인지부터 혼란스럽다. 나는 이러한 문화 자체가 사실상 근대 서구의 자율적 개인주의라는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허상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한다. 


개인이 홀로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지 혼란스럽다. 당장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많은 이들이 개인의 다양한 주체성을 표현하고 추구하기보다, 타인의 욕망을 따라서 욕망하고, 유행과 풍조에 예민하며 세태에 뒤처지지 않으려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SNS에 보정되고 설정된 이미지를 올리며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으려 애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취향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가?


이와 비교할 때, 약 400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첫 항목은 인생의 목적에 대해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내놓는다.


문: 사람의 첫째 되는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 문답은 놀랍게도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깊이 심취하는 동시에,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과 즐거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과 세계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활동(“먹든지 마시든지”)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자 기준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충분히 수용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우리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각 개인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민족과 계급에 종속되지 않는 개인의 소중함과 존엄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자아중심주의와 취향의 세계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인에게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더욱 크고 견고한 소명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소명과 목적이 없으면 인생은 방향을 잃는다. 변덕스러운 개인의 성향과 취향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은 원래 설계된 고유한 궤도에 안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망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못을 박는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한 망치의 고유한 목적이 불확실해지면, 망치는 때로 기물을 파괴하거나 심지어는 생명을 살상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망치는 좋은 건축을 위한 도구로 쓰일 때 그 고유한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모든 인생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소명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관심과 취향, 은사가 더욱 선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복음전도는 이러한 더 큰 이야기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좌절과 낙심에 빠진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인생을 설계하시고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 안에서 은사와 소명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또한 부족한 것이 없고 강한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선포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각종 선한 일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해야 한다. 


소명은 의무나 강요가 아니다. 소명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유효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존엄한 인간적 삶의 조건이다. 그 조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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