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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2일] 불신앙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2023-04-04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태복음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

한 악당이 자기와 함께했던 친구들을 차례로 죽이고 갱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비 오는 어느 날, 보스가 된 이 악당은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옛날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을 죽인 과거를 후회하고 눈물을 훔친다. 이런 장면을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심찮게 본다. 나름 고뇌하는 악인은 사람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투영한다. 그러나 악당의 그런 눈물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이다. 먹이를 잡아먹으면서 흘린다는 저 악어의 눈물은 곧 자기가 짓밟은 정적 앞에서 흘리는 위선자의 눈물이요 거짓된 슬픔의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지키려는 본능과 처한 상황이 짓누르는 두려움에서 예수님을 배신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베드로는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이 생각났고, 대제사장의 집을 나가서 대성통곡했다. 우리는 성경의 문맥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가 정말 주님을 부인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두려움에 질려 엉겁결에 나온 그 행동마저도 통곡하며 회개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가룟 유다 역시 베드로 못지않게 회개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가장 배역한 인물로 여겨진다. 둘은 비슷한 행동을 했음에도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의 거래로 팔려서 잡혀 온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워서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로마당국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유대 전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서서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베드로처럼 지켜보면서 “스스로 뉘우쳤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했다(마 27:3). 여기서 쓰인 헬라어 ‘메타멜로마이’는 ‘뉘우치다/괴로운 마음을 갖다/후회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뉘우친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은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세겔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가롯 유다는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는 여인에게 날 선 비판을 가했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지 쓸데없는 일에 허비하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지금 같았으면 가룟 유다는 아마도 여인과 예수님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도 요한은 실상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한때 동료요 친구였던 요한의 이 말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실상 돈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을 자기에게 맡기면 거기서 몰래 돈을 훔쳐 갈 수 있는데, 여인이 그만한 가치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나의 죄성을 반대로 정의감으로 표출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드디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온갖 유익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이 자칭 메시아는 곧 십자가에 죽을 것이란 불길한 이야기(“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만 하고,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이기를 자청한다. 유능하고 돈 많고 권세 많은 메시아를 생각했건만,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마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 때에 (여인의 향유 옥합 사건 이후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4-16).


여인이 드린 향유 옥합은 가롯 유다가 계산한 대로 300데나리온이다. 당시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일년 치 급여다. 지금 돈으로 약 3,000만 원 한다고 가정하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은 30세겔을 받았는데, 이 가격은 120데나리온이다. 향유 옥합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다. 지금 돈으로 한 1,000만 원 넘을 돈이다. 분명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러나 평생 일 안 하고 먹고 놀 수 있는 그런 돈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작 1,000만 원에, 그래도 그동안 3년 반이나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팔아넘겼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자기 양심을 팔고 받은 값이 1,000만 원이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가룟 유다는 팔아버린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고 자기 양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랬더니, 제사장들의 말을 보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 27:4).가룟 유다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오늘 분명히 자기가 “무고한 자의 피를 팔았고 그것이 죄”라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면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에게 가야 한다. 그런데 유다는 유대인들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제대로 믿지 않았다. 가룟 유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메시아는커녕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실제로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반대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양심을 다시 찾으려 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보자. “그때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린 것을 보고 뉘우쳐 은화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정말 큰 죄를 지었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하고 대답하였다. 유다는 그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나가서 목매달아 자살하였다”(마 27:3-5).


가룟 유다는 자기가 은 30냥에 판 스승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동시에 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대목을 묵상해 보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이다(“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팔았으니”). 가룟 유다의 삶은 끝까지 난센스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팔아넘긴 그분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양심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것이 아니다. 끝까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가룟 유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회개는 양심의 가책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 사이의 용서로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면 안 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게 신앙인이다. 


가룟 유다는 용서를 구하고 양심을 되찾으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갔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너의 죄, 네가 당하라”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유다는 은 30세겔을 성전에 던져놓고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철저한 인본주의이고 불신앙이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 또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22:3).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이전에 자신의 영을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에게 먼저 팔았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 예수님에 대한 증오, 그리고 돈을 훔쳐 가는 죄, 자신의 죄를 정의감으로 가장한 이중적 생활, 이런 모든 것이 사탄에게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가룟 유다의 위치를 생각해 보라. 그는 인간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권인 열두 제자에 뽑힌 사람이다.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아는 모든 인류에게 계속해서 기억되는 아름다운 축복의 자리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했다. 3년 반이나 직접 보고 들은 말씀을 그 위기의 순간에 기억해 내지 못했다. 산상수훈도, 주기도문도, 용서함에 대한 말씀도, 십자가에 대한 예언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 한 구절이라도 기억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탄에게 미혹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


정확히 가룟 유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가롯 유다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서 회개했다면, 그가 메시아를 팔았어도 하나님은 그를 틀림없이 용서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그 현장을 지휘한 백부장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이렇게 실토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명령에 따라 형을 집행하여 메시아를 살해한 그를 하나님이 용서하셨을까? 당연하다.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는 구원받았는데, 다른 한편의 강도는 왜 구원을 못 받았을까? 구원받은 강도는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지만, 다른 한편의 강도는 끝까지 불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베드로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인정했기에 그분의 용서하심과 치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불신앙이다. 


베드로는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다. 주님도 베드로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게 주님과의 교제라는 것이고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애초부터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사랑이 없으면 다시 돌아갈 곳도 없고, 일어설 수도 없다. 불신앙이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불신앙은 항상 불순종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은 우리가 순종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권세, 능력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거나, 게을러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용하지 않거나, 반항심에 사로잡혀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요, 이름은 있으나 불순종하는 자이다.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가운데 주신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종의 삶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오늘 하루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자.


나의 삶에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부분을 찾아내자. 내 안에 숨어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것들을 찾아내자. 내 안에 자라는 가라지를 찾아내자. 그리고 기도하자. 주여, 태워 주옵소서. 불신앙을. 불순종을. 주여, 드러나지 않은 교묘한 것들도 태워 주옵소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 둘 다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회개한 베드로만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세상에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죄인과 그렇지 않은 죄인밖에 없다. 실제적인 의인은 없다. 의인의 칭호, 자녀의 칭호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씌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이다.


이번 주간,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진실한 고백과 참된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주님, 예수님을 부인하고,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은,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빌라도도, 군중도, 로마 군인도 아닌, 바로 저,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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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