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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왜 이단에 끌리는가?

일탈적 전도에 관하여

by 김선일2023-03-13

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나는 신이다’가 화제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기괴한 행각이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사람들이 다들 갖는 의문은 ‘왜 학력도 높고, 우월한 조건의 사람들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고 볼품없는 교주와 그 무리에게 이끌렸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은 과거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동양으로부터 온 이단성의 종교단체들이 주류사회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제기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서구사회에서 인본주의 세속화의 가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한국의 정통 기독교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는 통일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경우다. 세계 최강의 문명국가로 자부하는 미국의 백인들이 동양의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에서 온 어느 여성의 “원리강론” 공부 모임에 참석하며 결국에는 통일교의 총체적 회심자(total converts)로 변모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었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존 로플랜드와 로드니 스타크는 통일교로 개종한 이들 21명을 인터뷰하고 수집한 자료를 통해 그들이 일탈적인 종교단체로 개종한 과정을 연구한 논문, “세상의 구원자 되기: 일탈적 관점으로의 개종 이론”(“Becoming a World-Savor: A Theory of Conversion to a Deviant Perspective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30, 1965: 862-875)를 발표했다. 


그 개종자들은 대체로 개신교 배경의 백인이고, 평균 35세 이하였으며, 일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대부분은 중하위 계층으로서 미국의 지방 소도시 출신들이었다. 로플랜드와 스타크는 심층 연구를 통해 이들이 통일교로 개종하게 된 과정을 다음 일곱 가지의 축적된 요인으로 설명했다.


• 절실한 긴장적 상황의 지속 

• 문제해결의 종교적 선택 

• 구도자적 정체성 형성

• 인생의 전환 시점에서 이단과의 조우

• 애정적 유대관계의 형성

• 외부 사회적 관계의 약화 내지 부재

• 집중적 교제를 통한 총체적 회심  


위의 일곱 가지 요인들 가운데 앞의 셋은 그 개종자들이 기존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이단 종교와 접촉하게 되는 배경적 혹은 소질적 요인들(predisposing factors)이고, 뒤의 넷은 이단으로 들어서게 되는 상황적 요인들(situational factors)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요인들을 ‘나는 신이다’에서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제보자이자 피해자인 메이플 씨가 직접 진술한 서사에서도 조명해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 방송의 선정성과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메이플 씨에 대한 2차 가해를 우려하는 소리도 있지만, 흉악한 사이비종교의 권력에 저항하여 자신을 공개한 주체적 선택에 존중과 응원을 보내는 것이 가장 필요한 도움이라고 본다.)


첫째로, 개종자들은 대부분 상당한 삶의 긴장을 오랫동안 경험한다. 긴장이란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긴장의 구체적 이유는 경제적 실패, 가족관계의 좌절, 성적인 죄책감,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신체적 장애, 종교적 혼란 등으로 다양하다. 이단의 성공적 포교에는 이러한 긴장적 상황들이 미리 조성된 경우가 많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홍콩에서 자란 메이플도 가족의 불화, 학교에서의 따돌림, 쾌락적인 생활로 인한 허탈감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깊이 경험했다. 


둘째로, 종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위와 같은 문제들은 이단으로 빠진 이들만이 겪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심리치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해결(복지나 돌봄 지원)을 통해서 긴장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적 용어로 세상을 정의하는 방식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어서 심리치료나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정보와 지식으로부터는 소외되거나 차단된다. 메이플은 홍콩에서 포교하던 JMS 신도에게 포섭당한다. 당시는 이미 교주가 흉악한 성범죄자로 감옥에서 형을 치르고 있던 시기였는데도, 아마도 외국인으로서 이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세뇌된 것 같다.


셋째, 구도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긴장적 상황에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대체물(미디어, 육아, 술, 성 등)에 몰입한다. 그러다가 남은 선택지가 종교밖에 없지만, 기존 종교는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만족할 만한, 즉 인생과 세계에 대한 조화로운 설명을 제공하는 새로운 교회나 종파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메이플의 경우에 당시에 삶의 좌절에서 벗어나고자 JMS 포교자에게 전화를 걸어 산다는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계속 물었다고 한다.      


넷째, 이단과의 만남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한다. 이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통일교 개종자들은 원리강론을 접하기 직전이나 혹은 거의 동시에 자신들의 인생에서 전환점을 느꼈다고 한다. 전환점이란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규범이 폐기되고 새로운 삶의 체제로 대체되는 것이다. 실직, 이민, 진학(의 실패)은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메이플은 JMS 집회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듣고 감격하며, 술, 담배, 이성에 빠졌던 과거를 용서받고 깨끗이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다섯째, 이단 신도들과의 애정적 유대감이 형성된다. 이단의 포섭을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 가르침을 듣고는 이상하며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기에게 친절을 베푸는 신도들의 설명을 듣고 서서히 가르침에 동화된다고 한다. 이단의 피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처음에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환대와 돌봄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메이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애정적 유대관계는 자신의 상식적 판단과 이단의 가르침 사이에 간극을 해소해주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형성케 한다. 


여섯째, 이단 밖의 사회적 유대관계는 약해지거나 없어진다. 기존의 가족이나 친구 관계가 강하면 일탈적 회심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단으로의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회심 과정을 점검하고 평가해 줄 외부인들과 차단된다. 메이플은 새롭게 발견한 신앙생활에 충실하고자 한국으로 온다. 기존의 가족 및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JMS 무리에 둘러싸인다.


일곱째, 집중적인 교제를 통해서 총체적 회심자가 된다. 이단으로의 개종은 구술적 회심(verbal conversion)으로 시작해서 총체적 회심(total conversion)으로 발전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집중적인 교제가 필요하다. 메이플은 한국에 와서 노래와 방송으로 재능을 바쳐 헌신한다. JMS에서는 다른 이단들에 비해서 춤, 노래, 운동 같은 감각적 경험이 더욱 부각된다. 게다가 ‘월명동’이라는 곳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이러한 다감각적이고 빈번한 경험과 교제는 인생과 세계의 모든 순간순간을 이단의 세계관 안에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정렬시키게 만든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로플랜드와 스타크의 연구는 나중에 미국에서 활동한 불교의 소수종파로 개종한 이들이나 네덜란드에서 통일교에 빠진 청소년들을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사실 두 사회학자의 연구는 사회적으로 저급하게 인식되는 이단 종교에 빠지게 된 여러 요인을 추적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단계적 분석은 종교적 회심에 공통된 과정을 설명하는 문을 열었다. 종교적 회심 여정에 대한 분석에서 가장 권위 있는 루이스 램보(Lewis Rambo)의 7단계 회심 이론이나 기독교 선교학자 앨런 티펫(Alan Tippet)의 인류학적 회심 과정 이해보다도, 로플랜드와 스타크의 일탈적 회심 분석이 더욱 선구적인 연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회심의 과정들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이러한 회심의 과정이 인간의 자아와 관계를 더욱 건강하고 견고하게 정립하게 해줌으로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지, 아니면 사이비 집단의 교주와 교리에 맹목적 충성을 하게 하여 개종자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기와 파탄으로 몰고 가는지가 다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왜곡과 변질, 그리고 개종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 계속 가해지고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할 수 없는 덫에 걸려들고 만다.


지금은 비록 많은 이들이 사이비종교의 경악스러운 악행에 공분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외로움과 지적인 혼란이 깊어지는 이 시대의 흐름은 이러한 일탈적 전도의 유혹이 암약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적이고 건강한 회심과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여 이단 사이비의 유혹에도 견고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필자는 몇 년 전에 신천지에 빠져들던 한 신실한 중년의 부부를 상담하여 거기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적이 있다. 그 부부는 학력에서나 사회적 경력에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의 반열에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주변으로부터 본이 되는 신앙의 인품으로 칭찬받던 이들이었다. 어느 날 필자와의 통화에서 “너무도 귀한 비밀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흥분해서 말할 때부터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만나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천지의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필자가 신천지가 의심된다고 하자 절대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기에, 그다음에 만났을 때 신천지의 증거 자료들을 보여주자 충격을 받으며 곧바로 신천지와 단절했다. 좋은 결과로 끝났지만, 당시에 필자는 이 정도의 학력과 경력을 가진 이들도 이단의 가르침에 깊숙이 매료될 정도라면 누구도 이러한 공격과 유혹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소질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일탈적 전도의 원인을 성찰했다.         


첫째, 이단들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체계를 제공한다. 그에 비해서는 한국 교회에서의 설교와 교육이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무지한 자가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신앙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단 혹은 유사 이단적 가르침에 매혹되기 쉽다. 종교학자 이정은은 신천지가 기성 교인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것은 그들의 “교리적 경쟁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신천지와 기성교회의 ‘보상-교환’ 체계 비교 연구” 「종교와 문화」 29호, 2015: 153-184). 그는 기존에 종교를 선택하는 이유로 제시된  세뇌, 박탈, 보상, 일탈 이론은 수요자 측면이지만, 교리적 경쟁력은 공급자 측면에서 유효한 종교적 서비스라고 말한다. 필자가 도와준 그 부부도 매일 새벽기도를 참석하며 성경을 더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신천지의 “짝 풀이”에 기반을 둔 성경 해설은 그들에게 비로소 성경 진리의 비밀로 인도하는 지름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우리 교회들도 이처럼 정교한 성경 해설을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 대안일까? 성경의 말씀을 알기 쉽게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는 노력은 당연히 큰 유익을 준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관이다.     


둘째, 이단적 가르침의 매력은 철저히 주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는 데 있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주숭배로 이어지는 신화적 구성은 이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포승줄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은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적잖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사실이며, 이것이 사람들을 허황된 이단적 교리에 솔깃하게 만드는 맹아로 기능할 수 있다.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해도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세계관 안에 있는 한, 사람들은 더욱 절묘하게 꿰어 맞추는 “말씀풀이”에 목마를 수 있다. 이는 학력과 무관하게 많은 신자에게 퍼져있다. 정통 기독교가 제공해야 할 교리적 경쟁력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와 일반은총을 긍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인류 역사의 정의로운 종말론적 변혁을 소망하는 세계관이다. 성경적 정통 기독교는 현세를 부정하는 내세주의나,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분하는 도피주의,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비주의를 배격한다. 성경의 교육도 역사적이며 공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해야 한다. 


셋째, 이단은 고통에 대한 착시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리고 오직 포교라는 목적을 위해서 잠재적 개종자들에게 다정다감한, 그러나 위장되고 병리적인 공동체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고통을 마주하고 수용하며, 인간의 고통 한복판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하나님을 믿는다. 고통당하신 성자 하나님과의 연대는 다른 고통 받는 이들과의 연대로 이어진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만연하며,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 기독교 공동체는 단순한 삶을 즐거워하고 일상의 은총에 감사하며, 종말의 소망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며 보듬는 공동체여야 한다. 좀 더 느리고, 좀 더 소박하고, 좀 더 진실한 실천과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단단하게 빚어져야 한다.

  

넷째, 이단은 착시적 보상뿐 아니라, 이단을 떠나거나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을 경우의 형벌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을 맹목적 추종에 젖게 만든다. 여기서 위계적이고 착취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종교개혁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됨”이라는 복음적 핵심을 회복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소명을 받았고, 교회는 성령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도록 격려하고 섬기는 공동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한 백성이 되어 상호적이고 수평적인 공동체로 부름받았다. 지금도 일부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이며, 가부장적인 관행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불충이며 교인들을 탈-교회나 이단의 위험에 노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느 베테랑 산악 구조인에 따르면, 사람들이 등산하다가 조난당하는 이유는 너무 많이 가서가 아니라 “충분히”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산에서 길을 찾는 이들이 1,000미터를 더 간 뒤 나오는 길로 가야 하는데, 500미터, 700미터 정도만 간 뒤 나타난 길로 들어서다 결국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 사이비의 위험에 노출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복음적 신앙을 충분히 배우지 않고 성경적 세계관에 천착함 없이, 주술적인 종교성과 신비주의적 세계관으로 뒤범벅이 된 허술한 성경교육과 세계관은 이단이라는 샛길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더 깊은 신앙의 깨달음을 공유하며 그리스도의 용서와 환대를 이루는 공동체로 더 충분히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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