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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동성애는 죄’라 하지 않는다고 다음 세대가 교회에 오는 건 아니다
by J. D. Greear2023-02-17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경시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유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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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지도자와 동성애에 대해서 앤디 스탠리(Andy Stanley)가 언급한 내용,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조언이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022년 노스포인트 교회(Northpoint Church)에서 열린 드라이브 콘퍼런스(Drive Conference)에서 처음 나온 말인데, 이후 그 교회의 오프라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러나 유튜브와 이곳저곳에 게시된 내용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그 메시지의 요지를 접할 수 있다. 


이것[동성애]이 다음 세대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모든 부분에서 관련이 있습니다. … 다음 세대의 눈에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 교회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동성애자….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합니다. … 동성애자들은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목사입니다. 목사와 선지자는 전혀 다릅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아무 데나 들어가서 진실 폭탄을 투하하고, 마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서 또 진실을 투하하면 됩니다. … 그러나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끕니다. 우리는 속도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방향을 설정하고 속도를 모니터합니다. 목사는 속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나도 “동성애 정죄 구절”(clobber passages)을 잘 압니다. 알겠지요? 우리는 그 구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 다음 세대 전도는 물 건너가는 겁니다.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목사는 누군가로부터 불필요하게 교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노스포인트 교회도 또 스탠리 목사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그들을 취재한 누군가가 보도했다. 그러나 노스포인트도 스탠리 목사도, 수많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의 전통적인 결혼과 성윤리를 지지한다는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드라이브 콘퍼런스에서 있었던 스탠리 목사의 말을 볼 때, 그들의 침묵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스탠리 목사가 뭐라고 했던가? 목사 개인이 또는 교회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교회로부터 소외시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스포인트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음”이 아니라, 단지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을 뿐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무엇인 진실인지는 스탠리 목사만 알고 있으며, 나는 그가 조만간 입장을 밝히길 바란다. 노스포인트에서 지도자를 뽑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후보자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당연히 확인하지 않을까? 행여라도 동성애자로 확인되는 경우라면 지도자로 뽑지 않을 건 자명하지 않은가? 


논증을 위해, 그 교회가 정말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간주하자. 즉, 성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은 결혼이라는 맥락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존재하며 다른 모든 형태의 성은 다 죄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교회가 이런 믿음을 주저하면서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을 찾고 있는 LGBT+에게 장애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스탠리의 사역이 내게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거의 십오 년 전에 사도행전 15:19을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출입문에 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이방인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깊이 감명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내가 담임하는 서미트교회(The Summit Church)에서 나는 그 말을 자주 반복한다.


스탠리에게 동성애는 단지 이겨야 할 문화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에 관한 것이다. 관계가 진리보다 우선한다고 그는 종종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곤 하는데, 진리를 희생하자는 게 아니라 단지 관계를 진리 앞에 놓자는 의미라고 말이다. 어려운 대화일수록 커피 테이블에서 이루어져야지 결코 독단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또는 거만하게 무대에서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건하고 성경을 믿으며 신실한 우리 교회 교인 중에는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성인 자녀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복음이 전파되는 다른 교회로 떠난 부모들도 있지만, 거기서도 그 주제는 결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스탠리가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교회였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들이 복음을 믿고 계속 교회를 다닐 수만 있다면, 동성애 문제는 차라리 얼마 간은 거론되지 않는 게 좋아요.”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경시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유익할까? 동성애 문제를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충실할 수 있을까? 그게 과연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까? 


좋은 부분: 선교사처럼 생각하기


좋은 것부터 시작하자. 첫째,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가르침의 어려운 부분을 소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처음부터 꺼낼 필요는 없다. 때때로 회의론자나 구도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의 특정 부분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그리스도의 주장, 정말로 그가 주님이신지, 정말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에 관한 문제만 씨름하도록 합시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관해서 확신하게 되면 그때 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도록 하지요.” 우리에게 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말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도 모든 가르침을 한꺼번에 제시하지는 않으셨다(요 16:12).


둘째, 21세기 미국에서 목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전달된 신앙의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이교적으로 변질해가는 문화를 다루는 선교사로서 책임까지 짊어져야 한다.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초대 교회의 복음전도)에서 기독교 변증가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선교사”와 “정통의 옹호자”를 구분한다. “진정한 기독교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탈 사이의 격차를 최대화하려고 애쓰는 정통의 옹호자에 비해서, 변증가(선교사)는 자신과 잠재적 개종자 사이의 격차를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린이 설명하듯, 교회에는 이 두 역할이 다 필요하다. 동남아시아에서 무슬림 선교사로 사역할 때 나는 끊임없이 두 개의 모자를 번갈아 써야 했다. 복음이 이슬람과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슬람이 제기하는 질문을 복음의 다리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대화에서 어떤 모자를 써야 하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유명한 주장처럼 오늘날 서양의 목사는 선교사의 기술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단순히 교리만 수호하면 되는 교구 담당자가 아니다. 목사 겸 선교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단지 부도덕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초대로 들려야 한다. 


나쁜 부분: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문제


지금까지만 보면 내가 스탠리의 접근 방식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공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실제적인 문제와 두 가지 성경적인 문제를 제시하겠다.


1. 실제적인 문제


동성애에 대해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접근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1990년대라면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한, 나도 입 다물고 있겠다”라는 태도로 교회에 오는 구도자가 가능했다.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접근 방식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다. 교회에 오는 모든 불신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로 자신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첫째, 전 세계 그리스도인은 2,000년 동안 이성애 결혼의 신성함을 일관되게 믿어왔다 (돈 포트슨 및 롤링 그람의 설문 조사 참조). 둘째,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며, 설혹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라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의 입장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셋째, 기독교인을 편협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 된 미디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내용을 대중에게 상기시킨다. 


교회에 오는 대학생과 젊은 전문직 종사자가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유이다. 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그들이 차차 알게 될 더러운 작은 국가의 비밀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는 바를 이미 알고 있고, 따라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동성애를 증오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 나는 도덕적 우위가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 어떤 영감을 기대하며 내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나는 복종을 요구할 수준의 권위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정말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토록 혐오스럽고 편협한 존재라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팀 켈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배자 믿음”이다. 그들이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주장을 고려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인 조치는 우리가 진짜로 무엇을 믿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다. 비록 상대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과 존엄과 명예로 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 안에 있는 이 동성애라는 어색한 코끼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따라올까? 동성애 문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구도자마저 역사적인 교회와의 의미 있는 연합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침묵하는 “패배자” 역할을 할 것이다. 왜 그들이 굳이 혐오스럽고 편협한 사람이 되는 걸 고려하겠는가? 


얼마 동안은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가르침, 실생활 수업,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에 계속 참여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성경 읽기, 소그룹 모임 또는 심방을 통해 이 주제가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당신이 목사로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분명히 혼란 속에 상처받고 화를 내며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동성애자와 첫 커피 타임을 가질 때, 성윤리 선언문부터 꺼내 들고 그 모든 조항에 사인하라고 요구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처음 시간에 그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것과 앞으로도 아예 꺼내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맨해튼에서 삼십 년을 목회하며 수천 명의 세속적 회의론자와 접촉한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비생산적이다. 역사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진, 완전히 다른 왕국에서 온, 또 완전히 다른 권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예 인정하는 게 좋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친 우유 몇 잔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미친 암소를 사서 키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서 다니엘이 취한 접근 방식이었고 아테네에서 만나는 바울의 접근 방식이다. 다니엘은 “그러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니”(단 2:28)라는 말로 변증을 시작했다. 아테네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는 “너희 조상들이 믿던 신에게로 돌아가서 너희가 양육받은 도덕성을 다시 받아들이라”가 아니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이것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 대부분이 틀렸다. 그러나 나는 저기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제단을 보았다. 나는 오늘 그가 누구인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한다”(행 17:23).


2. 성경적 문제


(1) 십자가의 거슬림을 제거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빼앗는 일이다


기독교 선교사가 믿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묵살 내지 부인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대사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동성에 이끌리는 사람도 다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또한 결혼의 신성함을 포함하여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19:3-12).


바울은 우리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를 풍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는 거슬림을 극복하기 위해 얼버무리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듣는 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을 의지했다. 아무리 복음을 매력적으로 포장해도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전 2:14). 바울이 만약에 그 시대의 인기 있는 지혜와 웅변으로 복음을 더 듣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우리 시대에는 개성을 찬양하고 동성애의 죄성을 경시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는 훨씬 더 많은 열렬 청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는 십자가의 능력은 사라졌을 것이다(고전 2:4).


십자가 설교의 중심에는 회개가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한 회개는 참으로 공격적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무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거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붙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과 경쟁하는 모든 것에서 기꺼이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할리우드의 연예계에서 일하던 동성애자 베켓 쿡은 (앤디 스탠리가 내게 추천한 책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요구가 그의 영혼에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를 설명한다. “내가 평생 들었던 교훈은 나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다. 


[자아가] 이미 죄로 부패했는데 왜 거기에 진실해야 합니까? [섹슈얼리티 선택에 관한] 모든 생각은 자아를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나의 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와 나의 욕망을 올려놓고 숭배합니다. 그렇기에 내게 진실하다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회개는 단지 대체 성(alternate sexualities)의 배후에 있는 전제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전체 정신을 뒷받침하는 전제인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압니다”라는 전제의 부인을 의미한다.


뉴욕의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문학 및 여성학 교수로 일하던 중에 복음을 처음 접한 레즈비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회개의 진정한 초점은 동성애 또는 다른 특정한 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동성애자에게만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를 불쾌하게 하는 공격이다. 


이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따르고 있는가?”는 그리 시급한 질문이 아니다. 진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한 사람이라면, 어떤 특정 사안을 놓고 포기하는가의 문제는 훨씬 덜 중요해진다. 


섹슈얼리티, 성 문제를 이슈에서 제외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가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고민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다음 세대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잃었다. 교회는 차고 넘치는데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될 말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마 7:23)가 된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마 7:13-14)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다. 생명의 문은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주장만큼이나 좁고, 자기 부인만큼 어렵고, 또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힘들다. 일단 당신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나서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중에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훨씬 덜 중요해진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게 음란물에 대한 욕망, 명성을 갈구하는 마음 또는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건 관계없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에 온전히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내 의지에 대한 완전한 죽음을 필요로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선언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10).


동성애라는 죄가 바울이 나열한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건 단지 “동성애 정죄 구절”이 아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의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금 세대에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불친절이 될 것이다(겔 33:8).


바리새인이 모세의 율법을 오용하여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 것처럼 이 구절도 오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잘못은 말씀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다. 모세가 말했듯이, “율법은 단지 빈 말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생명입니다”(신 32:47).


이 문제에 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게 친절이 아니다. 진짜 친절함은 명확함이다.


선교사와 옹호자를 구분한 그린의 말로 돌아가서, 교회는 선교사와 정통 옹호자 모두가 다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다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 리차드 러벌리스(Richard Lovelace)는 이것을 우리 몸의 적혈구와 백혈구 숫자와 비교했다. 백혈구가 너무 많아도(백혈구 증가증) 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적혈구가 너무 많아도(적혈구 증가증) 죽는다. “적혈구”(전도 열정)로만 충만한 교회가 되려는 것은 “백혈구”(교리적 충실도) 중심의 교회가 되려는 것만큼이나 건강하지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교리적 충실도와 전도 열정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다. 성경에 충실할수록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커지기에 교리적 충실성은 자연스럽게 전도 열정을 낳는다. 출석 교회가 추구하는 교리적 충실도가 전도하려는 당신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올바른 교리를 배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성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넘치게 되고, 무엇보다 긴급한 전도 열정에 불타게 된다. 


(2)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어두움이 이기지 못한 빛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 1:5, 14). 요한은 진리 앞에 은혜를 두었는데,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스탠리가 상기시켜 주듯 예수님은 은혜로 인도하신다. 진리를 말씀하실 때도 먼저 은혜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가까이 끌어주신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로 충만하여 불신자가 그의 주위에 쉬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으려는 우리 교회 주변에는 왜 불신자들이 모이지 않는 건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로 가득하셨기에 모든 종류의 죄인이 하나가 되어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일제히 외쳤다. 예수님은 겉멋에 빠진 구도자(would-be seekers)라면 외면할 수밖에 만드는 어려운 말씀을 하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조차 그분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시는지에 관해서 어리둥절하게 만드셨다(마 19:25).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다.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하게 완전히 진리로 가득한 사람, 또 완전히 은혜로운 사람이었다. 진리와 은혜라는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본질 안에서 다투기는커녕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하지 않았다면, 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은혜롭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자는 은혜 없는 진리를 좋아한다. 자유주의자는 진리 없는 은혜를 좋아한다. (비록 복음적 의미에서 은혜는 율법의 설교를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갖춰야 한다. 근본주의자보다 더 진리로 충만해야 하고, 자유주의자보다 더 너그러워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그럴 때만 그분처럼 세상을 이기기 위해 그들을 다시 세상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는 건 교묘하며 애매모호하게, 유행에 따라서 포장한 복음을 통해서가 아니라고(물론 상황화가 중요하긴 하다) 요한은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 생명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 극복한다(계 12:11). 즉, 우리가 메시지와 삶을 통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권세, 그분보다 더 가치 있는 소유물이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드러낼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이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헤롯 앞에 선 세례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동침하는 죄, 즉 왕족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는 성적 난잡함을 지적했다. 헤롯은 요한의 머리를 잘랐고, 마태는 요한의 지적이 처형 명령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 중에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세례 요한, 이 사람아, 좀 살살 말하지 그랬어. 왜 그렇게 딱 까놓고 말을 해? 개방 결혼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인정한다”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건 지혜롭지 않아. 그러지만 않았다면, 자네 사역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도 날아가지 않았을 거 아니야? 게다가 누가 알아? 헤롯하고 궁정 사람들의 마음도 다 사로잡았을 수도 있잖아? 결국 성적인 죄를 설교하겠다는 당신 고집 때문에 전도의 기회를 놓친 거야. 헤롯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책임질 건데?”

 

그런데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은 뭘까?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다니엘은 다리오 왕 외에 누구라도 기도하면 처형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다니엘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바로 그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오, 다니엘, 창문 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어! 성경에 꼭 창문을 열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어.” 


그러나 다니엘은 지금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창문을 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Godship)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문화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 구속력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예전처럼 기도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의 후퇴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물론 그 문제를 굳이 꺼내지 않고 또 전혀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은 얼마든지 일관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창문을 모두 닫고 방안에서 조용히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코 사자의 입을 막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LGBT+ 커뮤니티의 선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런 주제에 관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그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빛이 숨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야기 하나로 마무리하자. 


몇 년 전, 한 레즈비언 커플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두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언이 필요합니다. 몇 달 전 예배가 끝날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목사님과 같이 기도했는데요.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교회를 출석하면서 매주 만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아내까지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내가 목사님에 관해서 조사를 했고, 이 교회가 동성애가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는 그 교회 안 갈 거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원한다면, 그래 좋아. 하지만 다른 교회를 찾자고. 우리를 받아주는 교회 말이야.’ 그래서 아내가 랄리에서 자유주의 교회를 하나 찾았고, 우리는 같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한 달 정도 참석하고 나는 아내에게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서미트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게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서미트교회로 가거나, 우리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없는 이 자유주의 교회를 계속 다니거나. 나는 아내한테 말했어요. ‘당신도 원하는 대로 해. 난 하나님이 계신 교회로 갈래.’” 


그녀는 세례를 요청했고 결혼 관계를 끊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반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녀의 전 아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전 아내가 말했다.


아내가 세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집을 비운 어느 주말에 용기를 내서 당신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당신이 동성애 주제를 꺼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게 이 편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소리지. 동성애에 집착한 사람들, 한 십 분만 듣자. 저 인간이 말하는 온갖 혐오스러운 말을 잘 정리해서 아내한테 말하자. 이 교회는 결코 우리가 다닐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자.’


지난 오 년 중에 아마도 내가 동성애라는 주제 하나만을 놓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거 같다. 그녀가 온 바로 그 주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 십 분쯤 지나니까, 내가 ‘혐오’라고 제목을 붙인 난에 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날 설교는 내가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사랑에 넘치는 반동성애 메시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게 다 진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시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주 후, 우리는 그녀가 세례의 물가에 서서 외치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을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 때문에 메시지를 바꾸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나와 내 파트너에게는 항상 분명했습니다.”


이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어야 할 때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사자의 입을 막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움츠리지 말자


내기 이 글을 쓰는 건 앤디 스탠리의 사역을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최종 평결을 내리기 위한 게 아니다. 스탠리와 나는 둘 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최종 판결은 그날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의도는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가 불신앙으로 물러서지 말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시대에 외친 말씀을 우리는 우리 세대에 외치자는 것이다.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노라(행 20:27). 우리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람을 훈계하였노라(행 20:31).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며, 마침내 믿음의 경주를 마쳤노라(딤후 4:7).



원제: Downplaying the Sin of Homosexuality Won’t Win the Next Genera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다음 세대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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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 D. Greear

J. D. 그리어는 노스캐롤라이나 랄리더럼에 있는 The Summit Church의 선임 목사이며,  Essential Christianity(The Good Book Company, 2023), Gospel(B&H, 2011), Stop Asking Jesus Into Your Heart(B&H, 2013), Jesus, Continued(Zondervan, 2014)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