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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우리가 단지 물질이 아닌 아홉 가지 증거
by Thaddeus Williams2023-01-17

체적인 물질세계의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연 추상적 사고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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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당신이 생각하는 신이 고안한 기계 같은 존재라면, 지금 당신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패러디된 그림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떠올려보라. 하나님의 손이 아담의 손을 향해 뻗어있다. 그들의 손끝은 1인치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6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가 있기 바로 몇 초 전의 순간을 미켈란젤로가 창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고 있는 무심한 아담,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에 드러난 불꽃, 영감, 또는 결의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거대한 뇌를 닮은, 해부학적 정밀함으로 인상 깊게 채색된 적갈색 싸개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각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손가락을 뻗는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이 벽화에는 신학적 진리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합리적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채우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이 생각해 낸 대상은 (나는 지금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합리적 의식을 이식시킨 존재, 즉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종(species)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 열역학, 그리고 주기율표를 고안해 내신 분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죽은 눈을 가진 자동화 기계(automatons)가 아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은, 하나님의 손가락 터치 이후에 태어난 존재이다. 


당신이 이성적 창조자에 의해서 창조된 아홉 가지 증거


바로 이 순간에도 당신은 인간이 단지 생각 없는 물질 덩어리 이상임을 증명하는, 최소한 아홉 가지를 하고 있다. 


1. 선택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당신이 선택하는 절대 지성(Mind)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이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미 있는 선택이 기계 같은 결정론에 의해 (또는 무작위 양자 비결정론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 세계로 환원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유를 그런 식으로 환원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모든 논쟁은 단지 생물학적 기계가 때는 비자발적 윙윙거림으로 축소될 것이다. 


2. 도덕성


의식은 사실(있는 그대로의 것)만이 아니라 가치(되어야 하는 것)도 다룬다. 선과 악과 같은 규범적 가치들이 단순한 서술적 사실로만 채워진 물질세계에서 나올 수 있을까? 되어야 함(ought-ness) 같은 비물질적 실재가 물질적 있음(is-ness)의 토양에서 생겨날 수 있는가? 돈 드릴로(Don Delillo)는 소설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서 이렇게 묻는다. 


특정 지역에서 그들은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분자 단위로까지 추적할 수 있다. …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 선과 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열정, 시기, 증오? 그거 다 그냥 뉴런의 엉킴에 불과한 거 아닌가? … 살인을 부르는 분노는 또 어떤가? 살인마라면 무시무시한 분노가 있겠지. 범죄도 엄청났을 거고. 그런데 그 분노를 세포와 분자로 환원시키면 어떻게 될까? 


3. 비물리적 법칙


물질적인 것은 물리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마음은 비물질적 논법에 따라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추이적 논법을 생각해보라: A = B이고 B = C이면 A = C이다. 이 법칙이 물리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화학적 구성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거 진화 과정 어느 지점에서 추이 법칙, 비모순율 또는 여타 논리적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는 말인가? 


4. 의미체계 


물리적 세계는 구문 세계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이 화면에서 읽고 있는, 물리적 구문으로 로드된 이 글을 살펴보라. 여기에는 화학적 구성과 더불어 공간적 위치, 그리고 반짝이는 화면에 구불구불한 특정 모양으로 배열된 검은색 픽셀로 가득하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구문 이상이다. 이 글은 철학자가 “의미체계”(semantics)라고 부르는, 즉 물리적 구문을 통해 전달되지만 환원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5. 창의성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아름다움이든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주황색 태양이든, 의식은 창의력을 드러낸다. 캔버스나 도화지 위의 모든 걸작, 모든 노래, 시, 연극, 춤 또는 저녁 식사까지, 이 모든 것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기계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가 단지 휘몰아치는 화학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6. 지향성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미켈란젤로의 걸작이 당신의 뇌 속에서 물리적인 통증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시스티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티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의식은 어떤 것에 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인 물질세계의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연 추상적 사고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을까?


7. 주체성


물리적 세계는 과학의 객관적인 범주 “그것”(It)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에는 객체성(it-ness)뿐 아니라 결코 환원할 수 없는 나(I-ness), 즉 주체성, 일인칭 관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날개 달린 생물, 박쥐에 대해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과학책이 한 권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지만 그 책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유명한 질문, “박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에는 결코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어둠 속을 날아가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저녁 식사로 선택된 불쌍한 곤충을 잡으러 전속력으로 급습하는 건 또 어떤 느낌일까? 물리적 세계의 의식 없는 “객체성”에 근거해서 어떻게 ‘주체성’과 ‘주관성’을 탐구할 수 있겠는가? 


8. 목적성


물리적 세계의 “그것”을 철학자들은 비목적론적(nonteleological)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것은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수은을 담아놓은 비커는 ‘내 목표는 574도에서 끓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온도에서 끓을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목적을 가진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매우 비합리적인 이유인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물리적 세계의 목적 없는 ‘그것’(it-ness)이 과연 의식 세계의 목적성(for-ness)을 생성할 수 있을까?


9. 유의미성


의식은 실제 의미와 접촉하고 그것을 생각한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에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거기에는 단지 입자나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탐구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가 담겨있다. 의식 세계의 유의성의 차원, 즉 우리의 존재 이유(why-ness)가 그냥 있음(mere is-ness)의 물리적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우주에는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없고, 무자비한 무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도킨스의 말은 맞을까?


믿음은 다윈의 의심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단지 물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물질세계의 의식 없는 “그것”이 선택 능력(this-or-that-ness), 도덕적 가치(ought-ness), 논리적 법칙(therefore-ness), 의미체계(what-ness), 지향성(about-ness), 창의성(awe-ness), 주체성(I-ness), 추상성(what-it’s-like-ness), 목적성(for-ness), 유의미성(Why-ness)까지 다 낳았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거야말로 실로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정작 다윈도 이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등 동물의 마음에서 발전한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확신이라는 게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지, 믿을 수나 있는 건지에 관한 끔찍한 의심이 항상 일어납니다. 원숭이 마음에 든 확신을 누가 믿겠습니까? 설혹 어떤 확신이 원숭이한테 들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본질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으로 볼 때, 인간의 기원은 생각 없는 물질이 아니라 생각하는 창조주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신뢰할 수 없는 물리적인 생존 메커니즘으로 무시될 게 아니라, 초월적인 진리의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아는 메커니즘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자신이 만든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창조주의 타자성 안에, 우리가 사유하는 근거가 있다. 우리의 자유, 도덕성, 논리, 의미, 창의성, 개성, 경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신 6:4-9).


당신의 사고하는 능력은 멍청한 의식 없는 힘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낭비하지 말라.



원제: 9 Proofs You’re More Than Matt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인간의 기원은 생각 없는 물질이 아니라 생각하는 창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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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haddeus Williams

사디어스 윌리암스(PhD, Vrije Universiteit, Amsterdam)는 캘리포니아 Biola 대학에서 조직신학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그의 저서 Confronting Injustice without Compromising Truth: 12 Questions Christians Should Ask About Social Justice (Zondervan, 2020)는 베스트 셀러이다. Trinity Law School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L'Abri Fellowships에서 세계관 연구, 워싱턴 D.C.의 Blackstone Legal Fellowship 및 Federalist Society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