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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칼 트루먼(Carl Trueman)과 복음적 지성
by Thomas Kidd2021-11-11

칼 트루먼이 주창하는 세 번째 방법을 “신실한 현실주의(faithful rea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학적이고 문화적 헌신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정통의 길을 따라야 하겠지만, 예의를 갖추고(civil)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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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우리 시대 가장 흥미로운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로브시티 칼리지(Grove City College)의 교수이자, 그 탁월한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 문화적 기억상실과 표현적 개인주의(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 Cultural , Expressive Individualism)’와 ‘성 혁명으로 가는 길(Road to Sexual Revolution)’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현재 미국에서 소용돌이치는 양 극단, 탈진실 수용주의(woke accommodationism)와 미친 트럼프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전통주의 기독교인을 위한 제3의 길을 제안한다. 그가 주창하는 세 번째 방법을 “신실한 현실주의(faithful rea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학적이고 문화적 헌신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정통의 길을 따라야 하겠지만, 예의를 갖추고(civil)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를 지켜보는 세속 세계가 정통적 가치관에 헌신하는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퍼스트 씽즈(First Things, 역자주: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주의 지향의 종교 저널)에 게재한 “복음주의 엘리트의 실패”라는 제목의 긴 형식의 글을 통해서 트루먼은 이 세 번째 방법을 설명했다. 그 글에는 논의할 게 한두 가지 담긴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가장 관련성이 높은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바로 역사학자 마크 놀(Mark Noll)과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 내가 노터데임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나의 고문이었다)의 업적과 유산에 대해서 트루먼이 논의한 부분이다. 


1990년대 중반, 정통 기독교인의 지적이고 학문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고 수호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이 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한 역사학자 마크 놀과 조지 마즈던은 기독교 정신에 대한 용감한 사례를 만들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놀은 미국 복음주의가 지적 신뢰성이 결여된, 그래서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만 집착함으로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지성인의 경멸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적 표준의 결여(lack)는 교회를 다니는 지성인들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놀이 그 책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세대주의와 문자적 육 일 간의 천지창조였는데, 이런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의 차원(canons of reason)에서 방어가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엄격한 정통 기독교 신앙에도 필요하지 않다는 게 놀의 주장이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지나친 근본주의를 지양하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함으로 기독교 설파를 목적으로 삼은, 대표적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가 꼽은 베스트셀러이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부르던 구절을 그대로 제목으로 붙여서 발표한 한 연구 논문을 통해서 마즈던이 등장했다. 그의 주장이 바탕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고등 교육 기관의 대다수가 설립 기원을 기독교에 두고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사실 그가 이미 과거에 발표했던 연구이기도 하다. 마즈던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교양을 갖춘 기독교 경멸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다름 아니라 신앙이 지성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든다고 그들이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 건설적인 사례를 통해서 마즈던은 기독교 학자가 자신의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학문적 담론의 규범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사려 깊고 정직한 학문적 동참까지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달리, 놀과 마즈던은 정통 기독교 신앙의 전인격적(full-blooded) 확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의 주장과 달리, 나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표준이 애초에 비판 자체를 넘어선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결코 지적 엄격함을 훼손하지도 않을뿐더러 학문적 표준과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1990년대 당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건, 당시 대학 교육을 받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 같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하나 같이 지성과 동떨어진 신앙이야말로 가치 없는 것(disqualifying)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놀과 마즈던은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신앙인에게도 얼마든지 자기비판이 가능할 뿐 아니라, 또한 지지할 수 없는 신념도 버릴 수 있기에, 신앙을 가지고도 현대의 지적 생활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즈던과 놀의 주장이 있은 지 채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마치 고대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철저한 정직함과 성실함만 갖추면 학문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 및 주요 기관에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지금 돌이켜서 보면 순진한 생각이다. 오늘날 고등 교육은 대체로 탈진실한(woke) 이들의 영역이다. 아무리 뛰어난 생화학자이거나 또는 미노스(Minoan) 문명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인종과 섹슈얼리티 또는 심지어 성별에 대한 문화적 정통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가 학문적 능력과 세심한 연구 같은 고려 사항보다 고용 및 재임 과정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대학에서 마즈던의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르치는 중에 트루먼은 오늘날 엘리트 학계와 기업 문화의 편협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학생들이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분명히 트루먼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점점 더 과거 세대의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더불어 나에게는 여전히 예리함과 역사적 방법의 황금 표준인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서술도 (비극적이지만) 이제는 약간 구식처럼 보인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들의 작품은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복음주의자들에게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복음주의 역사는 활동가 중심으로, 도리어 반복음주의적 방식으로 쓰였다. 그 결과 일부 기독교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혐오는 이제 미국 복음주의자에 대한 연구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대체했다. 


마즈던은 또한 트루먼이 잘 설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그럼에도 그것만으로 이미 아주 길다), 현대 아카데미에 관해 비판적이다. ‘터무니없는 생각’과 ‘미국 대학의 영혼(Soul of the American University)’에서 마즈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양성에 대한 노골적인 맹신(commitment)에 관해서 현대 세속 아카데미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문화적 관점의 소산임을 인정하고, 보다 더 다양한 관점과 경험의 포함이야말로 활기찬 학문의 특징이라면, 왜 학계는 솔직한 기독교인을 배제하는지, 마즈던은 질문한다. 기독교인(또는 유대인과 같은 다른 전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 학문의 테이블에 같이 앉으면 안 되는가? 마즈던은 이미 1990년대에 학문적 “다양성”이 결코 이데올로기까지 포용할 정도로 다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짧은 순간 동안,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에 대한 마즈던의 요구는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더 많은 기독교적 관점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낼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관한 비평적이면서 감탄을 자아내는 전기로 미국의 학술 역사가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가 주관하는 미국사 부문 밴크로프트 상(Bancroft Prize)을 수상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기독교 역사가가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책으로 그런 상을 받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2000년대 초반에는 베일러(Baylor)대학에서 만든 “2012 비전”이 시작되었다. 이 비전에서 베일러대학은 적어도 매우 광범위한 종류의 기독교 정통에 대한 분명한 헌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연구에 집중하는 대학이 되겠다는 비전을 밝히고 있다. 그 비전이 초래한 운명(fate)은 또 다른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겠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리더십 변화와 풋볼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성폭행 스캔들은 비전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전반적 신뢰는 고사하고, 특히나 기독교의 명확성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는 데에 베일러대학이 제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겠다는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트루먼은 학계에서 엘리트를 제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성경 연구, 윤리학, 심리학, 사회사업 등의 분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례를 통해 얼마든지 뒷받침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전통주의 기독교인과 엘리트 학계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 트루먼이 제안한 것처럼 흑백 논리로 설명된다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건 내가 마즈던의 제자이기에 갖는 약간의 의구심일 수도 있다.) 아무튼 트루먼은 일반적인 세속적 학문적 지표에서조차 좋은 점수를 받는 뛰어난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를 포함한 엘리트 학술 매체에서 책을 출판했다. 따라서 기독교 학자로서의 그의 부인할 수 없는 신뢰성은 이러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학계를 신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학적 또는 문화적 문제 때문에 교수직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취업 시장이 사실은 훨씬 더 어려운 진짜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트루먼, 나, 놀, 마즈던 그리고 다른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작업이 정상적인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대학 언론에서조차 우리의 작업을 종교사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출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려면 최소한 충족해야 할 학문적 기준이 있다는 건 상식이다. 물론 나도 잠재적 고용주뿐 아니라 언론 및 저널의 익명 독자로부터 미묘하면서도 공공연한 형태의 반기독교적 편협함을 접하곤 했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신앙이 학문적 성공을 가로막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트루먼이 지적했듯이, 진짜 문제는 당신이 지배적인 세속 학계를 혐오스러운 그 무엇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단지 전통주의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시카고 대학의 지구 물리학자인 도리언 애벗(Dorian Abbot)은 최근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현행 학문적 규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MIT 초청 강연이 취소되었다. 보장된 임기(tenure) 때문에 해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대학은 여전히 주류 이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이제 막 학계에 발을 들인 예비 학자들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문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없거나, 또는 있다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신의 연구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라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텍사스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가톨릭 신자 마크 레그너러스(Mark Regnerus)는 2012년 감히 동성 부모가 키운 자녀의 번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연구를 출간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대적인 괴롭힘과 수치심에 이어 조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장된 임기가 있었기에 그런 폭풍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1994년에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를 통해서 발표한 ‘루터의 유산: 구원과 영국의 개혁자(Luther’s Legacy: Salvation and English Reformers, 1525-1556)처럼 신앙이나 개인의 신념이 굳이 문화 전쟁을 촉발할 필요가 없는 많은 분야와 주제가 있다. 다양한 고백적 관점에서 종교사에 대해 글을 쓰고 옥스포드나 예일(마즈던이 조나단 에드워드 전기를 출판한 곳)과 같은 최고의 세속 언론을 통해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의 예는 다양하게 인용할 수 있다. 


언론과 저널이 학계 및 언론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예를 들어, 도리언 애벗)의 출판 작업을 중단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경우에 따라 비록 미묘하지만 이미 그런 경우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통주의자뿐 아니라 세속화된 사회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글이 가능한 한 세속 언론을 통해 계속해서 출판되어야 한다. 많은 기독교 학자가 특히 기독교 출판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트루먼의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를 출판할 세속 언론은 거의 없다(크로스웨이와 같은 일부 기독교 언론은 여전히 그런 책을 출판할 것이다. 너무도 감사하다!).


기독교 학자 중 일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속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출판함으로써 세속 엘리트 학계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능한 한 그런 방식을 취하는 데에는 길고도 독특한 기독교 전통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그리고 C. S. 루이스(C. S. Lewis)와 같은 기독교 지식인 지도자는 당시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독특한 기독교적 목소리를 유지했다. 물론 당시가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더 기독교적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본격적인 기독교적 지성의 증거는 신학적이고 문화적 타협을 하지 않는 한, 최대한 세속 학계를 통해서 일하는 기독교 학자들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탈기독교 서구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와 관용의 원칙에 대하여 우리 문화가 표면적으로 표현하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학문과 문화의 구석구석에까지 기독교적 지성을 증거하는 문이 계속 열려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왕국을 건설하는 데 우리의 학문적 기여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마스 힐에서 있었던 바울의 증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학계라는 숲속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의 목소리가 항상 있어왔다. 할 수 있는 한, 우리 세대에서도 그 증인의 역할을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자. 




원제: Carl Trueman and the Evangelical Min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마스 힐에서 있었던 바울의 증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학계라는 숲속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의 목소리가 항상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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