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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도시를 복음으로 환대한 기독교 변증가, 팀 켈러
by 이춘성
2024-05-16
팀 켈러, 1950.9.23. - 2023.5.19 환대, 복음을 담는 빈 그릇 기독교윤리학자 크리스틴 폴(Christine D. Pohl)은 타인을 위해 빈 공간을 남겨 두는 것을 환대라고 정의했다.[1] 이 정의는 그녀의 독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이어져 온 환대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환대의 개념은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사랑채’라는 공간이 있어 손님을 위한 방을 구별해 왔다. 사랑채는 대문 옆에 위치하여 손님이 드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 독채를 말한다.신약성경에서도 사랑채와 유사한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날 밤, 누가복음 2:7에서 언급된 카탈리마(κατάλυμα, katalyma)가 바로 그 공간이다. 사실 카탈리마는 오랫동안 ‘여관’으로 번역되어서 그 원래 의미와 달리 이해되었던 대표적인 오용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거처를 구하는 모습을 표현한 많은 그림이나 연극 속에는 요셉 가족을 박대하는 야박한 숙박업소 주인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카탈리마는 실제로는 중산층 이상의 집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손님을 위한 작은 방(게스트 룸)을 의미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을 주고 묵을 여관이나 호텔 방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사랑방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랑방을 둘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집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요셉과 마리아를 환대할 수 있는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이름 없는 가난한 가족이 비좁은 자기 집으로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 그리고 곧 태어날 태아였던 예수님을 환대했던 것이다. 그 집은 너무 가난해서 사랑방을 둘 여력조차 없었고, 가축을 따로 구별해서 기를 축사도 없어 주방 옆에서 가축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기 예수님은 바로 이곳, 이름 없는 가난한 가족이 가족 중 누군가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마련해준 환대의 빈 공간에서 태어나셨던 것이다.성경은 환대를 남는 방이 있는 경우에만 할 수 있는 선택과 기호에 따른 자유로운 영역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 가득 찬 곳에서도 반드시 비워둬야 하며, 가난한 이의 빈 공간이나 바쁜 이의 짧은 여가 속에서도 베풀어야 하는, 당위와 규범의 윤리로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실체인 예수님이 이러한 환대 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이 베푼 환대의 빈 공간 안으로 처음 오셨기 때문이다. 환대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이다. 크리스틴 폴은 기독교 환대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환대의 신비는 아주 평범한 활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저는 종종 거룩한 땅을 걷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안에서 우리가 환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수록 생명과 희망, 은혜를 위한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되었습니다.[2]팀 켈러의 세속 도시를 향한 환대환대라는 주제를 떠올리면, 흔히 낯선 사람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크리스틴 폴의 말처럼 환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는 낯선 사람들에게 생명과 희망, 은혜의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했듯,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 이상 더 큰 환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년 동안 복음을 담는 빈 그릇인 환대의 원래 목적에 충실했던 한 인물을 떠올리라면, 작년 이맘때쯤 돌아가신 팀 켈러 목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분을 떠올리실 분도 계시겠지만, 팀 켈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이 그가 30년 넘게 사역한 뉴욕과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켈러는 뉴욕의 빈민이나 노숙자, 9/11 테러 이후 심리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사역도 했지만, 그의 주된 사역은 세속적이며 회의적인 뉴욕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혹시 이러한 사역 대상의 특수함 때문에 그의 복음 전도 방식 또한 특수한 방식일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이는 큰 오해다. 켈러의 복음 전도는 성경이 가르쳐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던 그 보편적인 방식, ‘환대’였기 때문이다. 더 많은 생명과 희망, 은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환대의 원리는 켈러의 복음 전도와 기독교 변증의 가장 확실한 목적이자 이유였다. 팀 켈러의 환대가 뉴욕이 아닌 한국에서도 필요한 이유 어떤 분은 켈러가 뉴욕의 지성인들에게 베푼 지성적 환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질문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먹고 자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내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굶주림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영혼의 양식이 결핍되어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교회는 먹거리와 주거의 안정을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일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산업화를 이룩했지만, 1990년대 초반 산업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후부터 한국의 자살률은 급격하게 치솟아, 2008년 이후로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유독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에는 하루 평균 36.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또한, 건국대학교 이관후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초저출산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학자가 한국의 초저출산의 원인이 극도의 경쟁 문화에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4] 이것은 1990년대 이전의 생존을 위한 경쟁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현재 한국 사회의 극도의 경쟁 문화는 산업화 동안 우리가 소홀히 해 왔던, 정의, 도덕, 진리의 빈 공간에 타락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들어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산업화의 성공으로 인해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경험한 자본과 소비 문화는 현대의 한국인들로 하여금 조금의 결핍에도 견딜 수 없는 심각한 허기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를 채우기 위해, 오늘날 한국의 모든 세대는 심각한 경쟁과 극도의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가장 큰 미덕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다음 열차를 기다려도 된다고, 여행의 참된 목적은 열차에 오르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 모두가 진정한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속 승객처럼 목적지 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의 시민들과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목적,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이 대한민국에도 필요한 핵심 이유이며, 켈러의 기독교 변증이 갈바를 모르는 현대인을 위한 진정한 환대인 이유이다. 팀 켈러와 함께하는 삶의 목적을 찾는 여정, 기독교 변증 켈러는 약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문화와 예술이 번성하고 금융과 IT 등 최첨단 산업이 집중된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설국열차”식의 극단적인 경쟁 문화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세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목적지 없는 여행처럼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은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켈러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뉴욕 맨해튼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재활용 박스에 버려진 낡은 옷과 신발을 걸친 채, 거리 한복판에서 자신감 넘치게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언뜻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주변에서는 이런 켈러의 시도에 바보짓이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구원자라는 주장을 하지 말고, 기독교를 일종의 인문학화하여 거부감 없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라고 충고했다. 또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관용적인 종교라고 선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켈러는 이 모든 충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롱받는 낡고 오래된 옷을 벗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낡은 옷을 입고 우스꽝스럽게 걷는 켈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옷장 속 깊이 숨겨 둔 옛 옷을 꺼내 입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팀 켈러가 지난 30년 동안 뉴욕에서 보여준 복음 변증의 역사이고 기적이었다.켈러의 복음 전도는 포스트모던 세상이 재활용 박스와 옷장 깊숙이 처박아 둔 삶의 목적, 윤리, 도덕, 진리와 같은 낡은 가치들을 되살리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는 뉴욕 맨해튼에 세운 리디머 교회를 통해 이러한 사역을 20년 넘게 해왔으며, 이런 그의 노력은 2008년에 출판된 The Reason for God(살아있는 신)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성과로 이어졌다. 사실, 기독교 변증의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 The Reason for God의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 이유는, 이것이 20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프란시스 쉐퍼, C. S. 루이스, G. K. 체스터튼 등이 쓴 책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켈러의 책 속에는 17세기에 살았던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3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기반한 변증은 켈러의 변증과 저작의 뼈대에 해당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켈러의 기독교 변증은 정말 낡을 대로 낡은, 그야말로 먼지 풀풀 나는 오래된 과거였다. 그런데 켈러는 이것을 21세기 현대인을 위한 오래된 미래로 바꾸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 기적의 비결을 한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목사의 소명첫째는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켈러의 목사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그는 The Reason for God의 성공 후에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켈러의 전기 Timothy Keller: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Formation(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을 쓴 콜린 핸슨에 따르면, 켈러는 그의 변증에 대한 피드백을 주의 깊게 검토한 후에, 새로운 연구를 바로 시작하였다. 당시 켈러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고, 대장암에서 갓 회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2004년부터 버지니아 대학교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결성한 도그우드 펠로십(Dogwood Fellowship)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헌터를 통해서 세속화 이론의 대가인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 현대 덕 윤리의 대가인 철학자 알래스데이어 매킨타이어, 신 프로이트 심리학자이며 사회 비평가인 필립 리프, 종교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 등 세계적인 학자들의 작업을 접하고 읽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찰스 테일러의 역작 A Secular Age을 두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이러한 열정과 연구의 결실로, 켈러는 2016년 Making Sense of God(답이 되는 기독교)을 출간하였다. 이 새로운 변증서는 그의 첫 저작과 비교할 때 방법론은 비슷하나, 윤리학과 도덕철학 부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켈러는 그의 새로운 변증서를 통해서 삶의 목적과 윤리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전의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미 시도한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켈러는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다양한 철학, 문학, 심리학, 과학, 비평 이론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뉴욕의 청중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꽉 막힌 잔소리가 아닌 매우 중요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사실임을 성공적으로 설득하였다. 또한 그가 죽기 6개월 전에 출판된 호주 출신 철학자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이 쓴 세속적 사회와 문화 비평 이론에 대응해서 성경을 통해 사회를 비평하기 위한 이론서인 Biblical Critical Theory을 투병 가운데 미리 읽고, 이 책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기까지 하였다.이러한 연구자로서의 모습은 켈러를 전문 학자로 오해받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켈러는 매주 설교를 하고 교회의 실무를 책임져야 하는 바쁜 현직 담임 목사였다. 그는 매주 설교를 고민하고, 성도들을 만나며, 교회의 크고 작은 일과 행정 절차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뉴욕 맨해튼 중심에서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성도들을 위해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매일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코로나 시기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와 함께한 시편 묵상을 여러 사람과 온라인으로 나누었다. 또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에도 성실하였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어느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그는 단 한 번도 휴가지에서 온전히 쉼을 누린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에 앉아 있을 때도, 한 손에는 휴가 후에 만날 구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전할 메시지와 관련된 책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켈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글을 남겼다. 아마도, 그를 쉴 수 없게 만든 것은, 그가 목사라는 소명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켈러는 목사라는 소명 의식으로 세속의 방황하는 영혼들을 끝까지 환대하였던 것이다. 그 결실이, 그의 두 권의 기독교 변증서였다.복음을 위한 여백둘째로 켈러는 항상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빈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겸손과 열린 태도는 켈러의 사망 직후에 그를 추모하는 수많은 반응과 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작년 5월 19일 켈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 것과 동시에, 미국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인 뉴욕 타임스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성공회 여자 신부인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 리더가 어떠해야 하는지 나에게 보여 주었다"라는 제목의 컬럼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하였다.[5] 그 내용을 보면, 팀 켈러는 자기와 다른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친절했으며, 그들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존중과 친절함이 무신론자의 논리보다 더 빛나는 논리가 되어 그의 설교를 듣고, 그를 만났던 불신자들을 복음으로 설득하고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티시 해리슨 워런은 보수적인 신학의 장로교 목사이며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켈러와 대화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이러한 차이로 무시당하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팀 켈러의 가장 큰 매력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손한 인격과 환대의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켈러의 매력은, 그가 사망한 후 석 달 뒤인 8월 15일에 열린 추모 예배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추모 예배의 장소는 리디머 교회가 아닌 뜻밖에도 로마가톨릭 성당인 뉴욕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이었다. 그 이유는 그를 추모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개신교 장로교인만이 아닌 로마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자유주의자, 불신자 등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켈러는 죽음을 통해서도 복음을 담는 환대의 빈 그릇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팀 켈러를 추모하며마지막으로, 팀 켈러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정확히 1주년이 되는 5월 19일은, 한국의 많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정해서 기념하는 주일이다. 아마도 그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그를 일생의 영적인 스승으로 기리는 물결이 마치 들불처럼 번져갈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켈러는 자신의 추모 일이 위대한 스승과 신앙의 영웅을 칭송하는 날로만 기억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끝까지 세상과 세속 도시를 복음으로 환대하였듯,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세속 도시의 낯선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통해 생명과 희망, 은혜의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기독교 변증의 환대를 실천해 주기를 원하지 않을까?1. Christine D. Pohl, Making Room: Recovering Hospitality as a Christian Tradition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9), xiii. 2. Ibid. 3. https://www.koreaherald.com/view.php?ud=202312260006074. https://koreanchristianethics.com/저장소/15745. https://www.nytimes.com/2023/05/28/opinion/tim-keller-appreciation-christianity.html
질문 잘하기: 신학자의 모델, 마리아처럼
by Matthew Lee Anderson
2024-05-14
질문은 위험한 일이다. 근대에 들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질문 자체를 두려워했던 신앙의 선배와 달리 질문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질문을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세상에 중립적인 질문은 없다. 질문은 들판에서 비누 거품을 날리며 노는 놀이가 아니다. 질문은 지적 생활의 기본 방식이며, 그만큼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의 방향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을 증언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 의지, 생각, 심지어 육체까지 더 가까이 가도록 하거나 아니면 거기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두 번의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발표와 더불어서 두 번의 질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1장에서 우리는 질문이 내포한 위험과 함께 좋은 질문이 가져다주는 약속을 만난다. 첫 번째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가랴 제사장의 회의적인 질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가 던지는 경건하고 신실한 질문이다.사가랴의 회의주의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났을 때, 누가는 그 제사장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다”(눅 1:12)고 말한다. 천사의 발표는 사실상 자녀가 없어 슬픔에 잠긴 이 남자에게 최고의 소식, 가장 좋은 소식의 하나이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14절).하지만 사가랴의 질문은 회의적으로 들린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8절). 사가랴는 결국 이 말로 인해 징계를 받는다. 사가랴의 신분을 상기시킨 가브리엘이 말한다. “보아라,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20절).겉으로만 보면 사가랴의 질문은 매우 합리적인 거 같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담긴 내용과 형식을 보면 그가 책망을 받은 이유가 어느 정도 밝혀진다. 누가가 사가랴의 질문에 사용한 문법은 킹제임스성경이 “내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산뜻하게 번역한, 창세기 15:8에 있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을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5절에서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6절). 따라서 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질문은 단지 자기가 땅을 차지할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가랴의 질문의 중심을 차지하는 건 선명한 불신앙이다. 사가랴의 지금 상황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맡았던 역할을 잠재적으로 재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이 성공한 바로 그 지점에서 사가랴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대한 확실한 약속과 더불어 앞으로 그가 그 땅을 “소유”할 거라는 다소 모호한 미래까지 믿었던 아브라함과 사가랴의 차이가 발생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이를 낳을 거라는 말을 듣고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반면에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로마서 4:17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증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러난 바로 그 능력이다(롬 4:17; 8:11). 사가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질문이 드러내는 것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가랴는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신뢰성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질문 때문에 징계를 받은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하나님의 길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위는 벌을 받아야 한다. 가브리엘은 사가랴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천사가 앞에 있고 또 그 천사는 사가랴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보냄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믿지 않았다(눅 1:19-20).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말씀 이상의 어떤 표준에 따라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말씀이 스스로를 진리로 증거하는 자기 인증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겸손해 보이지만 근거 없는 불신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사가 왔을 때 사가랴는 성전 대제사장이었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 앞에서는 늙은 나이가 출산에 장애가 될 수 없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천사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신뢰성에 대한 사가랴의 의심은 계속된 질문과 이런저런 말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가랴의 질문은 모든 질문이 다 옳지 않음을 분명히 상기시킨다. 세상에는 냉소주의와 의심을 키우는 태도와 그것을 반영하는 질문 방식이 있다.사가랴의 경우에, 그가 쌓은 학문과 훈련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의 실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믿기 위해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가랴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에 대한 추가적인 확신까지 원했던 건, 노골적인 불신앙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마리아, 신학자의 모델하지만 누가가 성육신에서 질문을 묘사하는 방법이 사가랴의 회의주의로 끝나지 않는다. 사가랴가 들었던 비슷한 천사의 발표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만의 질문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인다.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첫인사, “은총을 받은 자”라는 말에 마리아는 매료되었다. 누가는 마리아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용어를 사용한다(눅 1:28). 첫째, 그는 철학자가 그러하듯이 마리아를 당황한 사람(ESV, “심각하게 혼란에 빠진”)으로 묘사한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오로지 여기에만 나오지만,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작품에서 혼란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런 다음 누가는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을 마리아가 했다고 말한다. 즉 마리아는 천사의 선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려고 노력했다(29절).마리아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천사지만(30절), 누가복음 다른 곳에 천사가 나타나는 경우를 보면, 동산에 계신 그리스도(22:43)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가는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말한다(12절; 2:9, 24:5). 마리아가 당황했을지는 모르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대신에 그녀는 질문을 한다. 혼란을 헤쳐나감으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1:34). 그녀의 질문이 종종 사가랴의 질문 방식으로 번역되곤 하지만, 누가가 사용한 그리스어는 정확하다. 사가랴가 원했던 것은 천사의 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사가랴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천사가 사가랴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천사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녀는 천사의 말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미래 시제 동사 “이뤄질까”를 사용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사실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다. 그렇기에 그 말씀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한 독립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가랴의 질문이 의심을 나타내는 반면, 마리아의 질문은 믿음을 드러낸다.더욱이 마리아가 질문하는 건 두려워서가 아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순응하기 위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어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는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따르기 위한 준비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굴복함으로 질문을 완성한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창세기에서 하와는 뱀의 속임수 앞에서 질문하기를 꺼렸고,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반면에 마리아는 천사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리아의 질문은 기독교 신자에게 패러다임이 된다. 최소한 질문하는 마리아는 신학자를 위한 신약성경의 모델이다(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신학자이다). 성경 공부를 사랑하는 마리아는 이미 천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해하기 위해 믿었고, 순종하기 위해서 이해했다. 자신의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는 모든 질문에 자유로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계시가 자신과 이 세상에 유익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질문 평가우리는 질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지 예배 방식이 등장한다. 아벨의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의 예배는 그렇지 않았다. 누가복음 1장에는 두 가지 탐구 방식이 나온다. 하나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다. 5세기 시리아 신학자 사루그의 야곱(Jacob of Sarug)은 이렇게 썼다. “보시오, 그대 신중한 사람이여, 세상에는 유익한 탐구가 있는 반면에 의심으로 인해 해를 끼치는 질문도 있습니다. 또한 질문을 던지나 진리의 편에 서므로 멸시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는 반면에 단지 논쟁하는 자, 자신의 말로 인해 결국에는 망하는 자가 있습니다.” 질문 속에 숨은 신실함을 식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사가랴는 자신의 방대한 지식의 정교한 과시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 그가 가졌던 두려운 불안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이 성경을 파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전혀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소한 순간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와 말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붙타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를 목표로 하는 질문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가랴는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소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한 책망이다. 사가랴가 던진 불신앙의 질문이 누가가 그에 대해서 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다. 누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6절)고 말한다. 그리고 요한이 태어났을 때, 사가랴는 천사의 지시에 따라 아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렸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다”(64절). 사가랴가 던진 어리석은 질문은 평소 신실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찾아온 하나의 돌발상황이었다. 누가가 이를 기록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처럼 질문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가랴처럼 질문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문의 기술을 습득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마음이 워낙 깊어서 뚫을 수 없는 심연이며, 어둠과 속임수, 그리고 자기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날 하나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마음이 찔렀듯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찌를 때, 우리는 종종 말씀 앞에서 혼란과 불확실성, 그리고 주저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마리아처럼 신실함과 믿음으로 말씀 앞에서, “주님,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이까?”라고 질문하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이다. 그래야만 우리도 마리아와 함께,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라고 말할 준비가 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은 독자는 Matthew Lee Anderson이 쓴 Called into Questions: Cultivating the Love of Learning Within the Life of Faith (Moody, 2024)를 읽기 바란다. 출처: Mary, Model Theologian: Learning to Question Well
중년의 제자도
by 박혜영
2024-05-13
사람 사이를 이해하고 목회를 하는 데 격려 상담이라는 책이 크게 도움 되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은 두 겹의 모습입니다. 속모습에는 두려움이 있지만, 겉모습에는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방어막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한 교회에서 오랜 기간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해도 상대방 속에 있는 그 두려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피상적인 곳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완전 솔직해지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지적한다는 게 이 책의 장점입니다. 해결책은 상대방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격려라고 합니다. 그러한 격려만이 상대방의 방어막을 뚫고, 두려움에 도달하여,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답니다.저는 이를 체면 차리는 문제와 연관시킵니다. 체면을 차리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 중년 이상의 분들은 더 그렇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온 중년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지적입니다. 중년은 그 영혼이 세상에 엮여 산 지 꽤 되니까, 그만큼 살아있는 신앙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세상에 산 세월만큼 세상 사람이 되었을 테니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중년의 제자도’는 체면을 얼마나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제 나름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특히나 중년 이상 분들이, 체면을 차리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역시 그 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뭐 했느냐는 말을 듣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이 나이가 되어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체면이라는 방어막을 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어막이 쳐진 상태에서도 경건의 훈련을 받을 수 있지만, 성경공부로 깨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서로 체면을 차리는 범위 안에서는 아무리 교제를 나누어도 신앙이 깊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피상적인 곳이 되고 맙니다. 피상적인 교회는 다시 피상적인 중년 교인을 배출합니다. 그러면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피상적인 신앙은 그 기도를 들어보면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전형적인 말로 기도하지요. 전형적인 말이란 이런 것입니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는 시민들을 보여주는 방송에 무슨 말이 나올지, 리포터가 어떤 곳에 서 있을지 우리는 보지 않아도 다 압니다. 화창한 봄이 되어 첫 휴일이 되면, 헬리콥터에서 무슨 방송국 아무개입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장면을 머리에 그리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알 수 있을까요? 전형적인 모습이요 진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말은 형식에 안정감을 주고 무난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말을 하고, 좋은 내용을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이 없는 겁니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게 전형적인 말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체면을 차리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안정감을 주고, 부담스럽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깊이가 없습니다. 서로 하나 되지 못하지요.이러한 전형적인 말과 기도가 언제 조금 깨어집니까? 힘든 일을 당했을 때입니다. 이때 교인들은 기도 제목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도제목은 내놓지만, 자기를 내놓지는 않습니다. 기도할 만한 몇 교인들에게 기도제목을 알리는 것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고 만족하고 맙니다. 물론, 기도제목을 말하는 것도 큰 일입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놓는 일까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속을 건드리는 해결책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있어야 온전한 기도제목이 됩니다.왜 이래야 할까요? 그래야 진실한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말로 자신의 두려움을 내놓지 않고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있을까요? 진실한 교제에서 기도응답이 나오는 것이지, 기도제목 자체에서 응답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 건 그 문제만 달랑 해결하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문제를 통해서 너의 두려움을 보고, 너의 자존심을 보고, 너의 체면이 얼마나 굳은 것인지 보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곤경을 벗어나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힘든 일을 통해서 내 고집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 고집을 보고, 그 두려움을 보고, 그 어리석음을 보았다면 하나님께서 살 길을 주실 것이라 믿어도 좋습니다.
그들이 현관문을 두드릴 때,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여호와...
by Justin Taylor
2024-05-10
다음은 ESV Study Bible 부록에 있는 자료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것에 대한 간략한 개요이다. 이 자료는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과 대비하여 실려 있다. ESV의 허락을 받아 싣는다. 1.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의 유일한 진짜 이름, 곧 하나님을 식별할 수 있는 이름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라고 믿는다.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나온다. • 하나님 (Hb. ‘elohim; 창 1:1),• 전능하신 하나님 (Hb. ‘El Shadday; 창 17:1),• 주님 (Hb. ‘Adonay; 시 8:1),• 만군의 주님 (Hb. yhwh tseba’ot; 삼상 1:3).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GK. Patēr; Matt. 6:9). 그리고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전 1:3).2. 삼위일체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고 또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므로 삼위일체를 비성경적이라고 믿는다.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것이 사실이지만(사 44:6; 45:18; 46:9; 요 5:44; 고전 8:4; 약2:19), 성경에서는 세 위격을 다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 아버지 (벧전 1:2),• 예수님 (요 20:28; 히 1:8), 그리고• 성령 (행 5:3-4).이 각각의 세 위격은 다 하나님의 속성을 갖는다. 다음과 같다. • 편재하심 (시 139:7; 렘 23:23-24; 마 28:20),• 전지하심 (시 147:5; 요 16:30; 고전 2:10-11),• 전능하심 (렘 32:17; 요 2:1-11; 롬15:19), 그리고• 영원하심 (시 90:2; 히 9:14; 계 22:13).더욱이, 세 분은 각각 우주 창조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셨다. • 아버지 (창 1:1; 시 102:25)• 아들 (요 1:3; 골 1:16; 히 1:2), 그리고• 성령 (창 1:2; 욥 33:4; 시 104:30).성경은 하나님 안에 삼위일체가 있음을 가리킨다(마 28:19; 참조 고후 13:14).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 확증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3. 예수님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은 여호와에 의해서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대천사 미가엘로 창조되었으며, 비록 그가 능력이 있지만 한 단계 아래의 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며(요 1:1; 8:58; 참조, 출 3:14)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한 본성을 갖고 계시다(요 5:18; 10:30; 히 1:3).실제로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 예수님이 여호와와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사 43:11을 딛 2:13과 비교; 사 44:24을 골 1:16과 비교; 사 6:1-5을 요 12:41과 비교).예수님 자신이 천사들을 창조하셨고(골 1:16; 참조, 요 1:3; 히 1:2, 10) 그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셨다(히 1:6).4. 성육신여호와의 증인은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고 믿는다.이것은 성육신하신 예수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참조 빌 2:6-7)는 성경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이다. “충만”이라는 단어(Gk. plērōma)는 총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신성”(Gk.theotēs)은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와 속성을 가리킨다.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와 속성을 육체 안에서 구현하신 총체이시다.실제로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셨다(마 1:23; 참조, 사 7:14; 요 1:1, 14, 18; 10:30; 14:9-10).5. 부활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오로지 영적인 부활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한 영이 아니라 살과 뼈로 된 몸을 갖고 계심을 주장하셨다(눅 24:39; 참조, 요 2:19-21).예수님은 여러 차례 음식을 먹음으로써 부활 후에 자신이 진정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셨다(눅 24:30, 42-43; 요 21:12-13).이 사실은 그를 육체적으로 만진 제자들에 의해 확증되었다(마 28:9; 요 20:17).6. 재림여호와의 증인은 재림이 1914년에 이미 일어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미래의 재림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일 것이며(행 1:9-11; 참조 딛 2:13), 전우주적 차원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흔들림이 뒤따를 것이다(마 24:29-30).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재림하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계 1:7).7. 성령여호와의 증인은 성령이 별개의 인격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힘이라고 믿는다.그러나 성경적으로 성령은 인격의 세 가지 주요 속성을 다 갖고 있다.• 마음 (롬 8:27),• 감정 (엡 4:30), 그리고• 의지 (고전 12:11).더욱이 성령을 지칭할 때 인칭 대명사가 사용된다(행 13:2).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인격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한다. • 가르치심 (요 14:26),• 증언하심 (요 15:26),• 위임하심 (행 13:4),• 명령을 내리심 (행 8:29).• 중재하심 (롬 8:26).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다(마 28:19).8. 구원여호와의 증인은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조직(즉 그들의 종교)과의 연합, 그 조직의 규칙에 대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그러나 성경적으로 규칙에 대한 순종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복음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갈 2:16-21; 골 2:20-23). 구원은 신자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베푸심(은혜)에 기초한다. 선행은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 열매나 결과이다(엡 2:8-10; 딛 3:4-8).9. 두 종류의 구원받은 백성여호와의 증인은 두 종류의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고 믿는다. (1) 기름부음 받은 반열 (144,000명), 이들은 천국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 (2) “다른 양들” (나머지 신자들), 이들은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천국의 운명이 기다린다(요 14:1-3; 17:24; 고후 5:1; 빌 3:20; 골 1:5; 살전 4:17; 히 3:1).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새 땅에서도 거할 것이다(벧후 3:13; 계 21:1-4).10. 비물질적 영혼여호와의 증인은 인간이 비물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영혼”은 단순히 사람 안에 있는 생명력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력은 몸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영혼”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이 용어의 핵심 의미 중 하나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살아남는 인간의 비물질적 자아이다(창 35:18; 계 6:9-10). 믿지 않는 자들은 의식적인 재난 속에 있지만(마 13:42; 25:41, 46; 눅 16:22-24; 계 14:11), 신자들은 천국에서 의식적인 행복 속에서 살 것이다(고전 2:9; 5:6-8; 빌 1:21-23; 계 7:17; 21:4).11. 지옥여호와의 증인은 지옥이 영원한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평범한 무덤이라고 믿는다. 악인은 멸망한다. 즉, 의식이 없어짐과 동시에 영원히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지옥은 의식적이고 영원한 고통이 있는 실제 장소이다(마 5:22; 25:41, 46; 유 7; 계 14:11; 20:10, 14).출처: The 11 Beliefs You Should Know about Jehovah’s Witnesses When They Knock at the Door
바울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과 다르다?
by Donny Ray Mathis II
2024-05-09
어느 날 저녁,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교회는 바울의 복음이 초래하는 수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하는 어느 목사의 영상을 보았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을 많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에 비하면 사실 내가 받은 충격은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에 대한 이런 식의 생각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바울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사회적, 윤리적” 복음과 모순되는 예수님에 관한 “신학적” 이야기를 새로 만든 걸까?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일단 공통 기반을 구축하면 더 쉽게 불일치를 좁힐 수 있다. 한번 솔직해져 보자. 사실 복음주의자는 의도치 않게 예수님보다 바울에게 더 큰 초점을 둘 수 있다. 바울의 서신서는 일반적으로 복음서 속 서사보다 더 직접적이고 문자적이며 또 논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누구나 더 관심을 두는 성경 속 장르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자신만의 “경전 속 경전”을 만드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의미는? “두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은 간접적으로 접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파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설교하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그러한 메시지는 확실히 마가가 예수님의 설교를 요약한 내용과 일치한다(막 1:14-15).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절은 마가가 그 자신에게 전달된 목격담을 요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간접적이라는 면에서 바울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이 과연 “사회적, 윤리적”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이라고 정의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마가복음의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가는 1장 1절(“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에, 그러니까 사실상 제목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이 제목에서 마가는 “복음”을 다름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또는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유대인과 로마인의 왕 칭호)로 묘사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마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제1 세기 로마 세계에서 “복음”(euangelion)이라는 용어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전기적 서술이 아니었다. 당시 복음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터에서 신들이 준 승리뿐만 아니라 신성한 통치자의 탄생, 권력 상승, 신성한 권력자가 내리는 법령(예: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칭송하는 프리에네 비문) 등을 의미했다. 동사 euangelizō(“나는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칠십인역, 특히 이사야서(예: 사 40:9-10; 52:7-10)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로 생활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고 계심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의 우상을 숭배하는 통치자를 타도하시고 당신의 통치를 확립하셨다. 마가는 서문에서 이사야 40:3을 인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그를 왕의 통치에 들어가도록 했는지, 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복음”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복음은 바울의 복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5:3-11에서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가 어떻게 구약의 이야기를 성취하는지 강조한다.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두 복음” 주창자들이 바울의 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사람들)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해 부활의 역사성을 확증한다. 로마서 11:1-7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이 선지자들의 약속의 성취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고, 그 결과 예수님이 왕으로 즉위하실 것이다. 왜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고 했을까? 바울과 예수님이 피차 동의한다면, 바울은 굳이 왜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바울은 총 60번에 걸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가운데 6번만 “나의/우리의”라는 수식어를 추가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이 왕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심판을 포함하고(롬 2:16),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가능하게 하며(롬 16:26), 신자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방법(고후 4:3; 살전 1:5)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예는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를 예수님의 메시지와 차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바울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복음”을 27번이나 사용한다. 이와 같은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그가 전파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가 전파한 복음과 같다는 그의 이해를 반영한다(행 15:22-30). 게다가 바울은 마가복음 1:1, 1:14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예: 롬 15:19)과 “하나님의 복음”(예: 살전 2:2)을 사용한다. 바울에게 계시된 복음(갈 1:11-12)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곧 예수님의 왕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계획과 일치한다(마 24:14; 26:13; 막 13:10; 14:9; 눅 24:44-49).예수님과 바울의 통일된 복음은 오늘날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까?먼저, 우리는 행여라도 내가 바울을 너무 좋아해서 예수님과 경쟁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 사이에 편향성이 있는 건 아닌지 또 특정 장르와 저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건 아닌지도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표현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의 개념과 언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과 메시지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완벽하게 계시하신 통일성 있는 말씀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에 66권의 책을 맡겼고, 초대교회는 이 모든 책을 기독교 정경이라는 테두리 안에 나란히 두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신 계시의 일부를 풀겠다는 교만에 빠져서 인간의 이성을 높여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남겨진 이성을 소위 말하는 성경적 논쟁에 악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더 중시하는 오류에 빠질 것이다. 출처: Did Paul Preach a Different Gospel than Jesus?
그리스도 중심 설교? 그리스도 형상 설교?
by 고상섭
2024-05-08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구약 내러티브 본문에서 과도하게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지나치게 자의적인 신학이라 비판한다. … 쿠루빌라가 보기에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의 잠재적인 문제점은, 구약을 성급하게 신약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 속에서 개별적인 구약 본문의 특정한 요지가 해석자에게서 소홀히 취급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결국 구약 본문에 대한 온전한 설교를 통해서 해석자가 청중에게 충분히 드러내야 하는 해당 본문만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는, 과도한 신학적 해석 속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이다.”[1] 최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브라함 쿠루빌라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달라스 신학교 설교학 교수를 엮임했고, 현 남침례신학교 설교학 교수로 제직하면서 피부과 의사를 동시에 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를 제시한다.“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매우 다르다. 이 두 접근 사이의 주요 차이는 후자가 모든 구절, 구약 문단에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찾지만, 그리스도 형상적 읽기는 하나님의 정경적 목적에 맞추어(롬 8:29) 모든 문단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그리스도의 형상-에 관한 암시적 묘사를 발견하는 것이다.”[2]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Christ)와 ‘형상’(Icon)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든 이 단어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데 있다는 말이며, 고린도후서 3:18과 로마서 8:29 등을 근거로 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 비판 쿠루빌라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브라이언 채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D.A. 카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구속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경의 목적은 단순히 그런 그림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설교는 특정 텍스트의 특정한 메시지를 강해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메시지와 신자들의 삶을 서로 연결하는 언어적 사건”이라 설명한다.[3] 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말하는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명제도 비판한다. “모든 성경 장르는 구속사적 논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경 해석 역사는 삶의 변화를 위한 설교의 풍요롭고 교훈적인 전통을 지지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성경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개별 텍스트의 윤리적 강조점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4] 정말,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쿠루빌라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를 빈약하게 하고, 본문을 약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그리스도 형상 설교로 전환해야 하는가? 필자는 쿠루빌라의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 설교’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 1)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설교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독자의 변화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감을 목표로 삼는다. 특히 쿠루빌라는 프랑스 철학자 폴 리꾀르가 말하는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자기의 성경해석 방법으로 수용했다. 총신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는 “쿠루빌라의 본문 앞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설교 방법론에서 설교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설교는 본문 뒤의 세계만이 아니라 본문 앞의 세계를 비추는데, 여기에 본문이 투사하는 세계는 청중들을 향한 미래-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5] 여기서 말하는 ‘본문 앞에 세계’라는 말을 쿠루빌라의 다른 저서 본문의 특권에서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용어로 설명했고,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말은 성경 텍스트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의도’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한다. 만약 닭싸움을 시도하는 닭의 주인이 자신이 닭이 다른 닭을 물어뜯고 이길 때는 기분이 좋다가 자기 닭이 물리고 살이 찢기면 자신도 닭과 함께 극도의 분노로 치닫는다는 글을 읽는다면 텍스트 안의 세계는 닭이나. 사육사의 사건 또는 닭싸움을 위해 걸린 판돈, 그리고 치열하게 응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텍스트 뒤편의 세계는 텍스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당시의 상황들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닭싸움을 하는 글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2024년의 지금의 독자들이 동일하게 느끼는 무엇에 관한 것이다. 즉, 닭이 이기면 함께 기뻐하고, 지면 함께 우울해지는 닭싸움을 하는 주인이 느끼는 남성적 자존심이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세계이다. 이솝우화에도 길거리에서 뼈다귀를 발견한 개가 다리를 건너다 개울물을 내려다보고서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려 짖다가 자기 뼈다귀까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는 이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를 설명한다. “이 우화는 어떤 개와 뼈다귀, 그리고 개울물과 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우화는 단순히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우화의 저변에는 자족하면 어리석은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통렬한 교훈이 담긴 세계를 재현하면서 독자들도 그러한 만족의 지혜를 따르도록 안내한다.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해석학적 진행의 개념적 프레임을 제공한다.”[6]쿠루빌라는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계’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의 본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보편타당한 원리를 통해 삶의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독자는 단순한 텍스트의 의미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 즉 보편타당한 신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 문단 신학 아브라함 쿠루빌의 설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문단 신학’(Pericopal theology)이라는 개념이다. ‘문단’이라는 말은 성경 본문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교회 상황에서 설교나 예전을 위해 다룰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분량을 의미한다. “성경은 쪼갤 수 없는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상 덩어리로 구성된 것은 분명 아니다. 또 성경의 방대한 내용이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다양한 장르와 수없이 많은 문단 속에서도 이 추상적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7]설교할 때 목회자는 모든 성경을 한 번에 본문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매번 설교를 위해 일정한 본문을 다루게 된다. 쿠루빌라는 텍스트가 청중의 삶의 변화를 위해 말하는 적용을 그 일정한 본문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단순히 의미론적 차원에서 단락을 구분하여 이를 설교의 기본단위로 보고 거기에서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을 설교의 핵심 재료로 삼기보다는, 기능적/화용적 차원에서 설교의 단위를 구분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 문단에서 성경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행하는 바를 신학적 추동력으로 삼아서 이를 설교의 주요소로 삼는다.”[8]쿠루빌라는 문단 신학을 통해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설교하는 각 문단은 그리스도 형상의 한 일면을 닮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전체 그리스의 형상 중에서 한 일부분을 닮아간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 성경을 다 설교하고 듣고 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문단의 세계가 그리는 부분이 그리스도 형상의 일면을 나타낸다면, 통합된 본문 앞의 세계(즉, 각 문단이 투사하는 세계의 조각들을 모두 합친 것, 혹은 달리 표현하면 성경의 모든 문단의 신학 종합)는 완전한 그리스도 형상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각 문단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그들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한 문단, 한 문단, 한 설교,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9]‘그리스도 형상 설교’ 비평 김대혁 교수는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라는 논문에서 쿠루빌라 설교에서 아쉬운 점 중의 하나를 자칫하면 단순히 ‘모범적 설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각 문단에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는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치 전체 그림이 없이 퍼즐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전체 성경에서 보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내용이 없다면 모범적 설교가 될 우려가 크다. …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개별 본문의 독특성을 경시했다면, 그 반대로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는 정경보다는 개별 본문의 구체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김대혁 교수의 지적처럼 쿠루빌라의 ‘문단 신학’의 약점은 성경 전체가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담고 있고, 각 문단은 그리스도의 형상 중의 일부분을 가진다면, 전체 성경의 온전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명확한 큰 그림이 없는 것이고, 각 문단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떤 인격의 어떤 부분이 전체 그림 중의 어느 부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또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고 각 문단은 그 전체 중의 일부라는 말도 명확한 성경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늘 설교하는 본문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는가? 어쩌면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모든 본문에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이라는 용어도, 성경의 텍스트와 오늘의 상황을 이어주는 ‘초자연적 의미’ 즉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텍스트 앞에 펼쳐진 세상’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이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려는 변화와 적용을 강조하게 되는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어떤 변화를 염두에 두고 변화를 촉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어서 그 인격을 만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라면 묵상할 때 반드시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묵상하는 목적이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교제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삶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의 만남을 통해 사랑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지, 노력하고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변화가 따라오는 것인데, 쿠루빌라의 이론처럼 변화를 강조하게 되어, 순서를 바꾸게 되면 자칫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적용이 곧 ‘그리스도 형상 설교’이다서두에서 제시했던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추구하는 모든 설교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지적이다. 쿠루빌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그리스도를 드러냈지만 적용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면 설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긴 했지만 삶에서 아무런 적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팀 켈러도 이런 적용이 없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 깊은 목소리를 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박사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본문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중심 설교 중에는 해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건전하고 고무적이지만 그 본문이 우리가 평일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에 와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기 전까지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10]팀 켈러도 단순히 구속사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설교를 추구하지 않았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복음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즉 칭의가 성화의 동기가 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이다. 팀 켈러는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를 ‘그리스도 중심 적용’으로 돌파했다.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배웠지만, 팀 켈러의 설교는 소위 구속사 설교가 비판을 받는 적용을 강화함으로써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독자적으로 다른 영역의 설교이다. 팀 켈러는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칭의를 말한다. ‘모든 것’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이 복음이 모든 것에 연결될 때 삶은 변화된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 센터처치에서도 복음을 자존감, 유머, 인간관계와 같이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은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와 일맥상통하고, 진정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요 ‘구속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팀 켈러는 설교란 진리를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진리를 마음에 와닿게 잘 전달하는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설교의 두 가지 과업이라면, 이 둘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쇠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 성경적인 정확성과 그리스도 중심성은 바울에겐 동일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11]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일 없이는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정감’(affection)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는데, 사람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삶의 변화는 ‘정감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 정감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선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참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의 불쌍함을 자극할 수도 있고, 나눔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나눔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모두 감정의 변화에 불과하다. 의지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나누는 삶으로 변화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트러져야 한다. “설교에서 우리는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정감 안에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것을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 합리적인 주장이나 교리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함을 포기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12]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만 돌아오면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정감의 변화가 아닌 감정의 변화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정감이 변화될 때 삶은 변화되는데 그 정감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가 필요하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필수적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형상을 이루려면 “그리스도 형상적 해석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성경의 모든 문단은 함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신그리스도의 형상의 한 면을 모범적으로 묘사한다.”[13]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추구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고, 팀 켈러처럼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신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삶에 적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른바 도덕적, 율법적 설교와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이 한창일 때 교회의 상황을 설명한다. 모두 동일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그 핵심에는 “잘못된 분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퍼거슨이 말하는 ‘잘못된 분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사역을 서로 분리하여 전할 수 있다. … 복음의 혜택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마치 그분을 떠나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과 그분을 분리할 수는 없다. … 마치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혜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혜택을 그분과 분리하기 쉽다.”[14]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분리는 ‘칭의와 성화의 분리’를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려면 먼저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하고 그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모든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스도 형상을 따르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분리’를 가져와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형상을 추구할 수도 있다. 결국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말하는 설교의 최종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한계점은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비판은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가진 한계를 팀 켈러는 ‘적용’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쿠루빌라가 말하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는 설교의 목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쿠루빌라는 각 문단이 하나씩의 그리스도를 드러낸 윤리를 나타내고 그 윤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을 때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한 번에 하나씩 윤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경험할 때, 삶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다. 설교의 첫 번째 초점은 삶의 변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사랑하면 삶은 변화된다. 삶의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그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히 순종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임을 알려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20:3)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 명령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20:2).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힘은 우리를 위해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가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살을 선포할 때, 그 은혜가 동기가 되어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의 결과가 바로 ‘그리스도 형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쿠루빌라가 비판하는 ‘앙상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자신의 설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 형상 설교’는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1. 이승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이후 아브라함 쿠루빌라의 그리스도 형상적 설교,” 설교 한국, 18(2023), 9-41.2.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203.3. 같은 책, p.399. 4. 같은 책, p.401.5.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 6.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73. 7. 같은 책, p.149. 8.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복음과 실천신학, 60(2021), 11-44.9. 아브라함 쿠루빌라, 설교의 비전, p.197.10. 데니스 존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80. 11.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37.12. 같은 책, p.218.13. 아브라함 쿠루빌라, 본문의 특권, p.437. 14.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57.
칼뱅의 편지에서 찾아내는 그의 신학 발전
by Christopher Osterbrock
2024-05-07
중요한 인물의 편지 연구는 시간의 간격이나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관행이다. 종교개혁 사상가 사이에서는 단연 장 칼뱅(1509-64)의 편지가 가장 사랑받는다. 칼뱅의 편지는 그의 내면의 묵상을 드러낸다. 그는 친구나 교인들과 관계 가운데서 편지를 씀으로써 자기 성찰의 한 형식으로 이를 활용했다.칼뱅의 편지 중 특정 시기(흔히들 말하는 1538-41년의 스트라스부르 시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신학 발전을 검토할 수 있다.칼뱅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편지는 아예 쓰지 않았다. 이러한 함의는 세 가지 특별한 윤곽, 곧 우정과 교회와 믿음의 연합하는 능력에 대한 칼뱅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우정칼뱅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하나님을 아는 체험적 지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연합의 본질이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일종의 개인 수도원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칼뱅은 정기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특별히 사역 중에 생긴 고립이 가져다준 낙담을 이기는 힘을 얻었다. 스트라스부르 시절 그가 느꼈던 고립감은 인내할 힘을 주는 우정이라는 측면을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는 것임을 더 깊은 차원에서 깨달았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형제자매들 맺는 깊은 우정과 하나님과의 상호 연합이야말로 삶에서 더 큰 만족감을 누리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요소가 빠진 세상의 우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그를 믿는 신자들이 서로 싸워서 찢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점을 표현했다.교회(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있고 윌리엄 파렐이 뉴샤텔에 있을 때) 제네바 양 떼를 섬기는 기능적인 목자였던 칼뱅은 자신과 파렐이 축복의 전달자로서 제네바 사람들을 각자의 교회를 섬기는 다른 목회자들과 결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하고 우호적인 애정으로 말이다.칼뱅이 부재중에도 제네바 교회에 조언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에 대해 느꼈던 친밀감과 청지기직에 대한 영적 의무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그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멀리 있으면서도 감독자로서 그들을 가르치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얼마든지 보기에 따라서 뻔뻔스러운 영적 권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내용을 썼다. “먼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무엇이든지 먼저 그 문제를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때 조금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다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그의 편지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거리나 물질적 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행사하는 진실한 영적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칼뱅은 편지를 통해서도 친교의 유대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에게 교회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었다. 그러한 연결이 가능했던 건 신앙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개념 때문이었다. 믿음의 연합칼뱅에게 믿음이란 “신자 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주어진 선물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삶과 하나님의 섭리라는 손길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숙한 차원에서 체험되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신앙의 형제자매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친교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기회가 되는 대로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서로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제네바 회중 및 가까운 친구들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칼뱅은 그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원했다. 비록 거기에는 펜과 종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단지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특별한 애정”이 요구하는 만큼 지속적인 교제를 원했다.칼뱅은 이런 교제를 통해 드러내는 믿음과 관련하여 교회에 관한 어떤 기대를 표명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사랑의 교감, 비록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뱅은 이렇게 썼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증거로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서로 연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촉구했다.제네바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칼뱅은 편지를 나누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한 신학 원칙을 견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셔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이끌어가시는 연합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라면 누구나 모든 가능한 선한 형태로 그 연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칼뱅과 동료 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는 편지 교환을 통해서 교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친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종종 개인적인 신앙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공동체는 다 함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비록 (성찬식 같은) 지역별로 이뤄지는 관행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전체 공동체의 일부로서 자리를 잡는다. 비록 칼뱅은 작은 프랑스 난민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지만, 칼뱅과 부써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상대방의 통찰력을 즐기는(앞서 언급한 파렐과 제네바 회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기초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에 기초를 둔다. 이들의 편지는 각자가 간직한 개인 경건을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지역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성도들 사이의 친교에 대한 개념을 확증한다. 편지 쓰기를 통한 성화훈련으로서의 편지 쓰기는 칼뱅이 자기 말과 소명을 성찰하면서 제네바 사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와 그 너머로까지 우정을 꽃피우는 데에까지 도움을 주었다.스트라스부르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꾸준히 편지를 썼기에 칼뱅은 제네바로의 귀환이 순조로울 수 있었다. 더불어서 유럽 전역에 퍼진 개혁파 사역과의 파트너십이 열매를 맺는 것도 가능했다. 칼뱅은 부써에게 그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서 얻은 혜택과 명예에 대해서 자신이 결코 “무신경하지 않다”라고 말했다.스트라스부르 편지는 칼뱅이 개인적 사역의 혼란 속에서 견디게 한 힘이었고 또한 그가 풍부한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수단이었다. 이런 유익은 칼뱅 개인뿐 아니라 미래의 제네바 공동체에도 유익이 되었다. 비록 칼뱅이 성경의 정경을 위해서 글을 쓴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편지라는 틀에서 볼 때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칼뱅의 편지를 연구하고 거기에 담긴 그의 사상을 신학적인 이점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뭔가를 “훔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칼뱅이 편지 교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식했던 믿음으로 연합된 공동체 유대를 계속 이어가는 당사자이다. 비록 칼뱅과 몇백 년이라는 시간으로 떨어져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Christopher Osterbrock, “The Spiritual Utility of Calvin’s Correspondence During the Strasbourg Years,” Themelios 49, no. 1 (April 2024)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출처: Read John Calvin’s Mail to Discover His Theological Development
죽음의 청소
by 양혜원
2024-05-06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미국으로 유학 갈 때 슈트케이스 두 개를 들고 떠났는데, 일본 생활까지 포함해서 6년 반 만에 귀국할 때는 배로 부쳐야 할 만큼 짐이 늘었다. 그로부터 4년 반이 흐르고 나니 포장 이사를 맡겨야 할 만큼 짐과 가구가 늘어버렸다. 아무래도 이사를 위한 짐 정리는 평소의 정리와는 다르게 좀 더 강도가 높다. 내가 기껏 포장비까지 내고 챙겨간 짐이 결국 안 쓰는 물건이나 쓰레기는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짐을 줄여 이사 견적도 좀 싸게 받을 요량으로, 서랍 하나하나까지 다 뒤지면서 정리를 해나갔다. 한 번씩 정리해서 진작에 버린 것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서류와 노트, 입지 않는 옷, 쓰지 않는 그릇, 읽지 않을 책, 꺼내보지도 않는 기념품 등이 제법 많았다.쉬운 일은 아니었다. 버리는 쪽에 뒀다가 다시 가져가는 쪽에 뒀다가 하면서 망설이기를 여러 차례. 미국으로 유학가서 처음 핸드폰을 개통할 때 받은 서류에는 현지에서 살아갈 준비가 이제 되었다는 당시의 설렘이 담겨 있고, 일본에서 국내로 이사할 때 받은 이사 업체와의 계약서는 어찌어찌 2년간 구르다 보니 일본어로 일 처리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뿌듯했던 마음이 담겨 있다. 하물며 박사 시험 볼 때 썼던 노트들은 어떠하랴. 그 노트들을 보면 학교 도서관에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앉아서 하루에 한 권씩 해치워 가며 박사 시험공부를 하던 때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이렇게 하나하나 추억하다 보면 짐 정리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만, 마침 그 무렵 중고 서점에서 사 들고 온 두 권의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평소에도 더 이상 책꽂이에 다 꽂지 못할 만큼 책이 늘어나면 중고 서점에 내다 팔고, 그렇게 생긴 몇 푼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사서 나오기도 하는데, 두 권의 정리 길잡이 책도 그렇게 손에 넣게 된 책들이다.한 권은 데스클리닝(death cleaning)에 대한 책이었다. 데스클리닝이란, 남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죽기 전에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스웨덴의 관습인데, 마당이 딸린 큰 주택에 살다가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나이 지긋한 스웨덴의 할머니가, 모아 둔 편지에서부터 정원 도구까지 하나하나 처분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하고는 규모가 다른 생활을 하신 분이라 그 내용을 나에게 다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정리에 동기 부여는 잔뜩 해주었다. 그냥 이사 준비가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데스클리닝이라니, 제법 엄숙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 함께 사 온 또 다른 책은, 데스클리닝의 디귿도 안 하고 갑자기 죽은 쉰넷의 중년 남성이 남긴 짐을 정리하면서 그 여동생이 쓴 일본의 책이었다. 콘도 마리를 낳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리의 고수 일본인도 케바케(케이스바이케이스)인 듯, 이 오빠는 정리를 안 하는 차원을 넘어서 쓰레기와 동고동락하며 살다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혼자 집에서 죽었다. 데스클리닝을 안 했을 때 남은 사람이 보게 되는 광경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면에서 이 책도 역시 열심히 청소하자는 쪽으로 동기 부여를 해주었다. 하지만 좀 과도했던 것일까. 평소에도 정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책으로 의미까지 부여받으니 일에 속도가 붙었고, 한번 버리기 시작하니 마음도 홀가분해져, 그래 싹 정리하자, 하는 기분으로 밀어붙였다. 만유인력이 작용하는 이 세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어서 한번 발동이 걸리니 손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눈이 갔고, 어느새 철거의 단계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원래 어머니가 사셨다가 잠시 내가 들어와 살게 된 집인데, 어머니가 사실 때 설치한 주방 싱크 쪽 보조 등이 진작에 고장이 나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었건만, 나는 무슨 강박적 미니멀리스트라도 된 것처럼, 내 정리의 완성도를 한층 더 올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혀 그것을 철거하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죽다 살았다. 데스클리닝에 고무되어 죽음으로 나를 클리닝할 뻔한 것이다. 아, ‘적당히’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과 함께 쓰여서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적당히’를 몰라요, 하는 말처럼 어디에서 멈출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도 함의하는 말이다. 그날 나는 그 ‘적당히’를 몰라서 나까지 청소해버리는 데스클리닝의 끝판을 볼 뻔했다. 사실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산다고 딱히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 물건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가는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갑자기 죽은 그 오빠의 경우, 일본 문화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여동생에게 큰 폐를 끼쳤지만, 오빠가 데스클리닝을 하지 않고 산 덕분 또는 탓에, 사이가 좋지 않아 30여 년 거리를 두었던 오빠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이 여동생의 몫으로 남았다. 썩 반가운 흔적은 아니었어도, 냉장고에 남은 여러 종류의 장아찌를 치우며 오빠가 의외로 장아찌를 담가 먹는 남자였다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까지 취업을 위해서 썼던 이력서를 보면서 오빠가 얼마나 많은 자격증을 땄는지를 알았으며, 벽에 붙여 놓은 여러 장의 가족사진을 보면서 오빠에게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고, 그 쓰레기통 같은 집에서도 같이 살던 초등학생(일본에서는 소학교 학생) 아들을 위해 거북이와 물고기를 키우는 아빠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오빠가 혼자 쓰러져 죽은 그 작은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여동생은 그동안 만나지 않고 살던 오빠와 제대로 이별할 수 있었다. 스웨덴 할머니는 데스클리닝을 해도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잉마르 베리만 같은 사람을 꼽았는데, 그가 하나도 정리를 하지 않고 산 덕분에 후대를 위해 많은 연구 자료를 남겼다고 했다. 베리만 같은 사람에 비하면 그 오빠가 남긴 것은 연구거리는커녕 오롯이 민폐지만, 여동생은 그 경험으로 책 한 권을 남겼으니, 나름 자료라면 자료 아닐까. 이 여동생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긴 유품이 너무 많아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자신의 짐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하는데, 사실 나의 어머니도 너무 버릴 줄 모르는 분이라 본가에 다녀오고 나면 정리 강박이 한 번씩 발동하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짐을 좀 정리하시라고 여러 번 종용드렸지만,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나 가고 난 다음에 니들이 버리든 어쩌든 마음 대로 해라, 라는 말로 응대하신다. 그래, 큰이모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할 때 사촌 언니들이, 정리하다 보면 어디에서 현금이 나오고 보석 반지도 나오고 하는 통에 그냥 마구 가져다 버릴 수도 없어 애를 먹었다고 했는데, 나도 나중에 엄마 짐을 정리하면서 돈이든 추억이든 또 무엇을 건질지 어찌 알랴. 남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편지 한 장, 사진 한 장까지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무탈하게 장수한 스웨덴 할머니, 그리고 잔재주는 많지만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해 이혼당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생활보호대상자가 되고 건강은 상할 대로 상해버려 중년의 나이에 돌연사한 일본의 남자. 데스클리닝은 이처럼 데스와 클리닝 사이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이다. 그래도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마 8:20), 전도 여행을 나서는 제자들에게는 돈은 물론이고 여벌 옷도 챙기지 말라고 하셨으니(막 6:8-9), 클리닝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역시 마음을 돌아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정리를 하다 보면 지금 내가 쌓아놓고 있는 물건들에서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박사 공부할 때 썼던 노트는 추억도 추억이고, 언젠가 강의나 연구에 필요할 것 같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하는 마음으로 남아 나를 과거에 묶어 두는 물건일 수도 있다. 라떼의 기나긴 이야기는 거기에서 나오고, 아무도 듣지 않는 독백 속에 스스로 갇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물건이 오히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물건이 될 수 있다면, 그 물건은 조금 더 오래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추리고 추린 나의 추억 박스에는 곧 입대를 앞둔 아들을 임신했을 때 썼던 산모 수첩, 그리고 죽어서 태어난 둘째 아들의 산모 수첩이 아직도 있다. 이런 물건들은 클리닝하지 않고 그냥 두고 가도 좋지 않을까. 이번 이사에도 이 추억 박스는 그대로 나와 함께 새집으로 간다.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3) ‘선교’
by 문대원
2024-05-03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세 번째 키워드는 선교(mission)입니다. 제3차 로잔대회의 공식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은 선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복음화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그를 대적하여 반역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타락한 인류를 자신과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선교는 교회가 감당하는 여러 가지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선교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사랑과 구원을 알기 원하시고, 그에게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은 편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선교의 핵심인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변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시대에는 공적 영역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고 설득하는 변증이 중요한 전도의 방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진리(특별계시)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일반계시)를 총체적으로 연구하여 선포할 때 변증적인 전도가 가능합니다.로잔 운동은 그 시작부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협력적 관계임을 강조해왔습니다. 로잔 언약 제5항은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라고 고백합니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한다고 빵을 주지 않는 선교사는 없을 것이고, 복음을 도외시하고 빵만 주는 선교사도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궁극성”(ultimacy)이라는 개념이 “우선성”(priority)라는 개념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선교사역에서 항상 첫 번째 임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순서를 논쟁하는 것보다 이 두 가지가 지향하는 동일한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선교 사역의 목표는 소망 없는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선교사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타내야 합니다. 선교사는 깨어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복음의 힘을 적용해야 합니다. 동시에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교사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를 시대적 상황에 민감한 형태로 증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항상 지역 문화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헤르만 바빙크를 읽기 위한 다섯 가지 원칙
by N. Gray Sutanto
2024-05-02
2023년에 헤르만 바빙크의 Christianity and Science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고 그의 사상에 관한 문헌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욱 많은 독자가 그의 신학 그리고 그가 대표하는 신칼빈주의 전통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1] 그러나 Reformes Dogmatics(개혁파 교의학), Christianity and Science, Philosophy of Revelation 등으로 대표되는 바빙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절대로 만만치 않다. 그의 글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문제는 그가 배경으로 하는 19세기 및 20세기 유럽 학문이 독자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바빙크 저술의 방대함은 잠재 독자들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의 급속한 진화와 성장을 실시간으로 겪은 사람이 바빙크였기에, 그의 저작은 21세기 독자들에게 매우 귀중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며 보편성(catholicity)을 목표로 모든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 반대자들과 벌인 학문 논쟁에도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돌입했다. 당시 사상가들의 올바른 부분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인용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바빙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고작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라도 서슴없이 비판을 던지곤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빙크는 당시의 상황에 비춰서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했음에도 오늘날 시각에서 바빙크의 실제 관점이 어디에 들어있는지 파악하는 데에 독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바빙크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함께 다뤄지지 않는 특정 미덕을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성경적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에 대한 추구와 이 정통이 현대 시대의 문제에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 그 사실을 보여주는 능력. (2) 공정한 시각으로 반대파의 글을 읽고 그들을 비판하는 능력. (3) 주요 문제의 양면을 보고 이를 넘어서 더 큰 통합을 향해 나아가려는 비전. (4) 성경의 권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교회사 전반에 걸쳐 일어난 교리 발전에 대한 공정한 평가. 바빙크 독서가 주는 도전과 더불어서 그를 이해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을 고려할 때, 가장 좋은 바빙크 독서 방법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함정을 피하면서 글을 읽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다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1. 맥락을 설정하라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지금 읽겠다고 손에 든 책이 바빙크의 전체 저작물 안에서 차지하는 맥락과 위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의 저작물은 크게 다음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1) Kampen의 신학대학원 재직 기간과 그 전까지의 저작물(1883-1902)과 (2)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시절(1902-21)의 저작물이다. 초기 작품은 주로 다양한 신학 주제에 대한 짧은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개혁파 교의학 초판에서 절정에 달했다.[2]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의 말년은 개혁 신학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예를 들어, Christian Worldview(1904)는 철학의 세 가지 주요 영역, 즉 형이상학(존재 연구), 인식론(지식 이론), 윤리학(도덕적 삶에 관한 연구)에 대한 신학적 함의에 관한 내용이다.[3] Christianity and Science는 같은 해에 출판되었는데, 세계관에 관한 소책자의 자매 편이자 또한 기독교 대학을 위한 일종의 선언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 자연과학, 종교, 인문학 전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유익함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바빙크는 계시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는 이런 관점을 1908년 스톤 강연에서 깊이 있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나중에 Philosophy of Revelation으로 출판되었다. 바빙크는 이 기간에 끊임없이 성찰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개혁파 교의학은 확실히 그의 대표작이지만,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심리학과 종교과학에 관한 부분이 추가된 2판이 증보판으로 나왔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생각과 씨름했고, 192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록 열매를 맺지는 못했지만) 본문에 대한 추가 수정과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빙크의 신학적 견해에 대한 간결하고 성숙한 진술을 원하는 독자라면 The Wonderful Works of God(1909)와 Guidebook for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1913)을 포함한 그의 후기 저작을 보는 게 좋다. 이는 각각 평신도와 학생을 위해서 쓰였으며, 여기에는 보다 많은 독자에게 신앙의 깊이를 “전달”하고 싶어 한 바빙크의 열망이 담겨있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은 바빙크의 전체 저작에 입문하려는 새로운 독자에게는 최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2. 개혁주의 보편성을 준수하라바빙크는 건설적인 신학 저술에 관해서 의도적으로 개혁주의 보편성 접근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특정 인물을 인용하는 경우에 한 구절에서는 그의 신학을 끊임없이 비판하다가 다른 구절에 가서는 도리어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Wolter Huttinga는 이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에, 심지어 자신이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빙크는 항상 깊은 공감을 표시하기 때문에 독자는 바빙크가 논의 중인 저자의 의견에 실제로 어느 정도나 동의하는지 궁금할 수 있다. 바빙크를 읽을 때 종종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이지?”라고 궁금할 수 있다. 바빙크가 표현한 형태로만 보면, 가장 명백한 이단조차도 매혹적으로 들릴 수 있다. 바빙크 자신도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종종 “거기에도 크고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고 고백한다. 비록 나중에 보면 그게 바빙크 자신의 의견이 아닐 때도 말이다. 바빙크의 지성이 추구하는 종합적 특징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실 무엇이 바빙크 신학이라는 맥락에 속하는지, 또 어떤 것은 아닌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기가 어렵다.[4]독자는 심지어 바빙크가 가장 문제가 많은 작가들에게서조차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서) 항상 선하고 참된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내가 에든버러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에 만난 한 사람은 바빙크를 “탐욕스러운 진공 상태”라고 부르며 그의 글을 읽는 것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바빙크는 자신이 인용하는 사상가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조차도, 그들로부터 최대한 좋은 점만 찾아서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점이 바빙크를 일관성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도리어 너그러움을 가지고 다양한 사상가를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 개혁적 기독교가 참으로 보편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종종 우연한 방식일지라도 시대를 초월한 모든 철학과 가치 속에는 필연적으로 개혁신학과 공명하는 측면이 있음으로 드러난다. 개혁주의 신학은 참으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Cory Brock은 바빙크가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라고 주장한다.[5] 예를 들어, 그가 살았던 시기의 “철학 체계”로 눈을 돌려보자. 바빙크는 “칼뱅주의”의 중심 노선이 “칸트의 도덕적 원칙” 속에,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철학” 속에 그리고 실제로 ‘의지의 비결정론’을 부정하는 19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 체계’ 속에 스며있다고 주장한다.[6]그렇다고 개혁주의 신학이 모더니즘과 결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시대의 철학을 수용하고 전유할 수 있는 칼뱅주의야말로 19세기 철학과 대화하는 데에도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적 시녀로 사용했던 경향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학에는 특정한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 신학은 어떤 철학 체계에도 반드시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도리어 선험적으로나 또는 아무런 비판 없이 플라톤이나 칸트의 철학에 우선권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학은 자신만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며, 그 기준에 따라서 어떤 철학이든 테스트하고, 진실하고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7]기독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영속적이거나 자연적인 철학은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그 어떤 세상 철학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8]그러므로 독자는 바빙크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출처를 같이 사용하더라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가 특정 사상가를 참고했다고 해서 거기에 완전한 동의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빙크가 누군가를 특정한 용도로 활용한 게 그 사람에 대한 전적 승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함으로 우리는 바빙크가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3. 바빙크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바빙크는 일반적으로 (1) 성경적 주석, (2) 교리의 역사적-신학적 발전 추적, 그리고 (3) 해당 교리를 현대에 맞게 신선하고 규범적으로 표현할 것이라는 특별한 삼중 접근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개혁 윤리 조직에 대한 바빙크의 의도적인 설명을 살펴보자. 1. 우리는 성경의 자료를 모아 죄, 중생, 성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에 관해 가르치는 모든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2. 그리고 교회, 특히 개혁 교회가 이런 자료를 다루는 방식을 주의 깊게 조사해야 한다…. 3. 마지막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규범적인 방식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동시에 우리 시대에 적용해야 하며, 특히 윤리적 교리를 완성할 방법까지 제시해야 한다.[9]이러한 구조는 그의 윤리학과 교의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염두에 두면 독자는 나무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중에도 숲을 바라보는 전체적 시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성경 자료에 대한 조사와 특정한 역사적 사상가 및 운동에 대한 평가가 도움이 되지만, 주어진 주제에 대한 바빙크의 건설적인 진술을 보려면 해당 부분을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한다. 바빙크의 이런 독특한 패턴은 책임 있는 신학자라면 단순히 낡은 것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1895년판 개혁파 교의학 서문에서 그는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교의학을 발전시키려는 목표가 개혁주의 보편성의 정의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고대라는 이유만으로 고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개혁주의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교의 신학의 저작물은 무엇이 참되고 타당했는지를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여전히 참되고 타당한지를 기술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10] 따라서 그는 의도는 교리의 발전과 현대의 맥락을 모두 고려하여 자신만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4. ‘유기적’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라앞의 원리에 이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유기체의 개념을 잡아야 한다. “유기적(organic)”이라는 개념은 유기체가 다양한 부분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심” 또는 “통합”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관찰에 근거한다(예: 심혈관계는 심장에 의해 통합되어 몸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바빙크는 이 아이디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데, 그건 창조물 속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통일성과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한 구조화 장치이다.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 따라 바빙크는 창조가 수많은 영역에서 다양성 내의 통일성(unities-in-diversities)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삼위일체 자아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은 독특한 의미에서 다양성 속의 통일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적 존재는 단순하고 따라서 결코 부분들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은 유비적 복제물이고,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통일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바빙크는 우주의 다양한 측면을 계속해서 “유기체”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주 전체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된 유기체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법칙은 단일 유기체이며, 지식은 과학의 유기체라는 등의 설명이다. 이 유기적 동기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유한 존재인 인간을 묘사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인 것처럼, 또한 절대적 수준에서 다양성 내의 통일성인 것처럼, 인류도 원자 수준의 개인들이 모인 집합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머리 아래에서 만들어진 연합체(a corporate entity)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쓴다.오직 인류만이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서, 하나의 머리 아래에 연합하여 온 땅에 퍼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사장으로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말이다. 실로 그것은 온전히 완성된 형상이요, 하나님의 가장 뚜렷하고 놀라운 형상이다.[11]인간을 묘사하는 바빙크의 유기적인 방식은 계시, 성경과 그 영감, 언약, 윤리, 죄의 기생적 성격, 교회 등 신학의 다양한 주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글 속에 담긴 유기적 동기를 찾아보라. 바로 그 곳에서 당신은 바빙크의 건설적인 목소리를 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5. 전체적 사고를 추구하라아브라함 카이퍼와 마찬가지로 바빙크는 획일성, 일방성 또는 잘못된 이분법을 사상의 역사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로 본다.[12] 획일성은 모든 다양한 창조 현상을 하나의 이념이나 사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고, 범신론은 모든 것을 신성한 것으로 축소하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차이를 적절히 구별하기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 일방성도 심각한 오류이다. 역사주의는 한 시대나 민족 집단을 황금 시대로 특권화하고, 비슷하게 발전된 다른 문화와 지적 삶이 다른 시대와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유주의는 수평 관계, 이웃사랑과 윤리적 삶을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바람에 올바른 종교마저 거부하게 만드는 해악을 끼친다. 또한 종교 광신주의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면서 엄격한 개인적 경건만을 행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방성은 세 번째 오류, 즉 잘못된 이분법의 발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경우에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옵션이 전부이다. 반드시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이분법이 아니다. 대신에 창조 질서가 주는 풍요로움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이 점이 바로 Christianity and Science에서 바빙크가 과학주의나 급진적 경험주의에 대해 제기하는 일종의 비판이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주의는 인간이 데이터를 분리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파악이 가능한 기계와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는 일방성이며 속임수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과학자도 사람이고, 그들이 아무리 “사실”에 대해 “중립”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들 또한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전제 또는 가정을 몰래 숨기는 경우가 많다. “어디서나 생명은 철학보다 앞선다.”[13] 과학자들의 중립성 주장 뒤에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방적이고 비현실적인 설명이 깔려 있으며, 그런 식의 일방적인 인류학은 일종의 획일성을 낳기도 한다. 인간의 단지 그들의 관찰 대상인, 감각적 인지 능력을 가진 물질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경험 데이터만으로는 이런 사실 자체를 증명할 수 없다).바빙크는 통합의 관점이 부족하거나 “이원론”이라는 등의 이유로 특정 입장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독자들에게 어떤 추론이나 관찰의 패턴을 쉽게 거부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대신 특정 통찰력이 과연 전체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통합 가능한지를 검토하라고 촉구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생각과 삶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실제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지혜를 더 풍성하게 키운다. 우리가 더욱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접근 방식에서 바빙크의 지향점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의 논의가 어디로 흘러갈지 훨씬 더 쉽게 예측하고 이해할 것이다. 바빙크를 읽자바빙크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심 있고, 여유가 넘치지만 동시에 열정의 독서가로 만들어 줄 것이다. 또한 양극화를 피하고 자신의 신념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나와 다른 사상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하는, 일종의 원칙에 입각한 유연성을 개발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최고의 신칼뱅주의 신학자, 바빙크의 책을 읽으려고 할 것이다. 바빙크를 읽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의 책은 고통을 보상하고도 남을 유익을 선물할 것이다. 톨레 레게(Tolle lege)!1. Herman Bavinck, “Christianity and Science,” trans. and ed. N. Gray Sutanto, James Eglinton, and Cory Brock (Wheaton, IL: Crossway, 2023); Cory Brock and N. Gray Sutanto, “Neo-Calvinism: A Theological Introduc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3). 2. 초기의 이 논물들은 그 일부가 다음에 들어 있다: Herman Bavinck, “Essays on Religion, Science, and Society,” trans. Harry Boonstra and Gerrit Sheeres, ed. John Bol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3). 이 두 편이 더 중요하다: Herman Bavinck, “The Catholicity of Christianity and the Church,” trans. John Bolt,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7 (1992): 220–51; and Herman Bavinck, “Common Grace,” trans. Raymond C. Van Leeuwen,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4, no. 1 (April 1989): 35–65. 3. For a further introduction to 바빙크의 “Christian Worldview”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을 참고하라: “RTS Washington DC: Dr. Gray Sutanto ‘Bavinck's Christian Worldview,’”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January 25, 2020, YouTube Video, 2:33, https://www.youtube.com/watch?v=6VZKgOxQTBE&t=153s; and N. Gray Sutanto, “Bavinck’s Christian Worldview, Context, Classical Contours, and Significance,” in “Reformed Faith and Practice” 5 (2020), 28–39. 4. Wolter Huttinga, “Participation and Communicability: Herman Bavinck and John Milbank on the Relation Between God and the World” (Amsterdam: Buijten & Schipperheijn Motief, 2014), 78. 5. Cory Brock, “Orthodox Yet Modern: Herman Bavinck’s Use of Schleiermacher”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6. Bavinck, “Future of Calvinism,” in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 17, trans. Geerhardus Vos (1894): 22. 7.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609. 8. 바빙크의 보편성(catholicity)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Neo-Calvinism: A Theological Introduction,” chap. 3; Cory Brock and N. Gray Sutanto, “Herman Bavinck’s Reformed Eclecticism: On Catholicity, Consciousness, and Theological Epistemology,”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70 (2017): 310–32. 9. Herman Bavinck, “Reformed Ethics, vol. 1, Created, Fallen, and Converted Humanity,” ed. John Bol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9), 29–30. 10. Herman Bavinck, “Foreword to the First Edition (volume 1) of the Gereformeerde Dogmatiek,”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45, trans. John Bolt (2010): 10. 11.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576. 12. 특별히 다음을 보라: Abraham Kuyper, “Uniformity: The Curse of Modern Life,” in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 ed. James Bratt (Grand Rapids, MI: Eerdmans, 2008), 19–44. 13. Bavinck, “Christianity and Science,” 108. 출처: 5 Principles for Reading Herman Bavin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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