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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세대를 위한 복음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2-05-14
“4050세대, 영적으로 안녕한가?”와 논제가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야기들 A(40대 남)는 5년 전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설교를 들을 때마다 몇 번 씩 마음에 부대낌을 느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아내가 아이들 양육에 교회만큼 좋은 데가 없다며 권유하는데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를 다녔지만, 담임목사가 기업의 오너 같고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처럼 보여 한동안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사를 하면서 옮긴 교회는 다행히 교회의 철학과 목사의 메시지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따금 공공연하게 정치 집회를 하는 목사들과 그런 목사들을 옹호하는 교인들을 볼 때면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갈등을 겪곤 한다. 모태신앙인 B(50대 여)씨는 평생 열심히 즐겁게 교회생활을 해 왔다. 가족 중에 목회자들도 있어서 교회와 목사들의 세계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그 역시 언제부터인가 편향된 정치 메시지가 늘어나는 설교 시간이 고역이 되었다. 정치적인 발언이 계속 강단에서 흘러나오자 견디기 힘들어진 B는 10년이나 다닌 교회를 뛰쳐나왔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과 같은 정치적 입장의 설교를 듣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백하게 성경본문에 충실한 말씀을 듣고 싶었다. 그는 또한 종종 교회에서 경험한 불합리한 일처리나 은혜로 문제를 덮는 방식도 불편했다. 세상에서 상식과 정의의 기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교회는 여전히 현실과 담쌓고 사는 것 같아 그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C(40대 여)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서 입시 위주의 교육보다는 지역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생태 교육이나 독서교육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한다. C는 종교적 배경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매우 낯설고, 종종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공동체 운동에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그들이 자신과 같은 교육관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말이 통한다고 느꼈다. 하루는 인근 사찰로 문화유산 탐방을 가보자는 조심스러운 제안에 그들이 흔쾌히 응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TV에서 보던 불상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과격한 교인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 후로 교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역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목사의 교회에 조심스럽게 출석하기 시작했다.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재직 중인 D(가명 50대 남)는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 80년대 학번으로 대학 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 까닭에 기독교는 가진 자의 종교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쩌다보니 그리스도인 배우자를 만나긴 했지만 교회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 40대에 이르러 (친구인 필자의 권유도 듣고)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는 필자에게 딸이 교회에서 특송하는 동영상도 보내주며 훈훈한 대화도 나눴다. 그런데 얼마 전 통화에서 D는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장 출석을 못하기도 했고, 성인이 된 자녀들과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즐거움도 희석됐다. 더 중요한 점은 신앙생활을 해야 할 뚜렷한 동기를 못 찾겠다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갱년기에 접어들고 후반 인생도 준비해야 하는데 내 인생의 치열한 고민에 무심한 교회는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한다. 위의 사례들이 4050세대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경험과 판단이 전부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실망과 불편함이 동일하진 않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적 성향도 조금씩 달랐다. 중요한 점은 이들 모두 교회 언저리를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언저리 밖으로 떨어져 나갔거나, 혹은 언저리에서 고민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교회 언저리 안으로 들어오는 이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혹은 느꼈던) 교회에 대한 불편함도 최근 조사에서 나타난 대로 교회의 배타성과 물질주의, 이기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교회에게 기대하는 바도 약자를 도우며 사회에 모범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늘 제기돼 왔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다만, 4050 세대의 비종교화와 교회에 대한 실망이 최근 코로나 팬데믹 상황과 대선을 거치며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의 복음한국 사회의 허리인 4050세대는 생산성과 소비여력뿐 아니라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유연성도 매우 높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으로 민주화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공공성의 진보에 민감하다. 또한 경제 성장기를 경험했기에 안정적인 삶을 희구하는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에도 익숙하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에서 필자는 4050세대와 소통하는 ‘공공의 복음’과 ‘일상의 복음’을 구상해 본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온 세상을 향한 좋은 소식이다. 그의 몸 된 교회 또한 존재하는 방식이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전하고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 우리 사회의 공공적 과제에 좋은 소식이었는가? 한편으로 교회가 우리 사회의 공적 과제들에 전혀 무심하지 않았다는 항변에도 일리는 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 시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위한 구제도 강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회봉사 관련 업무에 종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교회가 공공선에 기여하는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이는 비단 이미지 메이킹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필자의 친구인 50대 남성은 교회가 보여주기 행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4050은 아니지만 최근에 회심했던 한 20대 남성은 교회의 구제는 그들만의 홍보를 위한 자기만족적 활동으로 보였다고 한다. 선한 의도에서 실천을 한 이들에게는 억울한 소리겠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벤트성으로 보이는 그러한 구제 활동을 보면서, 복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마땅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의 복음은 중요하지만 교회가 사회봉사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 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회적 봉사 활동은 반사체이기 때문이다. 더욱 근본적인 발광체는 복음으로 인해서 변화된 성품의 공동체일 것이다. 교회가 복음에 기초한 온유와 겸손의 성품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교회의 모든 선한 실천과 노력들도 가려지는 일식 현상이 일어날 뿐이다. 미국의 조사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기독교에 가장 수용적이 되는 경우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배려하고 돕는 모습을 볼 때라고 한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2019: 185). 이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의 습속을 재형성하는 차원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가 우리의 성품과 가치를 더욱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깊은 과제인 것이다. 일상의 복음그 다음으로 4050세대의 상황에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일상의 복음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4050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집단적 중산층을 형성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또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일과 가정, 인간관계, 그리고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를 경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안정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의미가 있을지, 배우자 및 자녀들과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고 다른 이들과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할지와 같은 일상의 문제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중년의 과제들은 치열한 가치관의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다. 이러한 일상의 문제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어떠한 선택으로 안내하는가? 종종 ‘오직 복음’이나 ‘본질’을 부르짖는 소리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일상의 구체적인 문제와 복음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만하고 불안하여 공부도 게을리 하는 아이를 둔 부모를 위한 복음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고, 성경읽기와 기도하기를 강요하면 아이의 삶이 복음적으로 변화가 될까? 이러한 종교적 형식만을 (혹은 경건의 모양만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실속 없는 본질환원주의다. 복음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관계,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낸다. 먼저 부모는 하나님께 맡기신 양육의 사명을 개인적 욕망이나 무관심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자신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의 성향과 은사를 발견해서 사랑과 책임으로 양육하며,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하고 일관된 훈육도 제공해야 한다. 복음적인 공동체의 조언과 지원도 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자녀양육만이 아니다. 일, 관계, 문화 등에서 복음은 적용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복음과 복음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인가? 복음은 우리 삶과 연결되어야 들린다. 복음은 유일하지만, 사람들의 실존적 상황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만큼 복음은 풍성하고 깊이 있다. 앞에서 소개한 4050세대의 사람들은 비록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그들의 일상을 위한 복음을 듣고 싶어 한다. 복음이 그들의 실제적 삶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궁금해 한다. 교회 배경이 없던 40대 여성 C는 차를 타고 가다 한 교회 건물에 부착된 현수막의 “해석되어야 해결됩니다”라는 짧은 문구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같은 문구를 무심하게 지나쳤던 필자에 비해서 인생의 의미에 관한 영적 의미를 더욱 진지하게 찾고 있는지 모른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그 메시지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4050세대
비종교화
탈종교화
탈교회
복음과삶
일상의복음
공공의복음
복음의공공성
4050세대, 영적으로 안녕한가?
by 김선일
2022-05-07
최근 조사에서 한국 교회의 호감도가 천주교와 불교에 비해서 현저히 낮게 나온 결과가 적잖이 충격을 주고 있다. 국민일보와 코디연구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서 발표한 기독교의 대국민 이미지 조사의 종교별 호감도에서 개신교는 25.3퍼센트로 천주교(65.4%)나 불교(66.3%)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종교별 이미지에서도 천주교는 진정성, 헌신, 희생 등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고, 불교는 상생이나 포용 등을 떠오르게 하지만, 개신교는 배타적, 물질적, 위선적이라는 이미지가 주로 나타났다. 대략 예상은 했지만 막상 통계 수치로 나오니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랫동안 매번 제기돼 왔던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최근 코로나와 대선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된 모습을 보인다. 사진 제공: 지앤컴리서치 그런데 이번 지앤컴 조사뿐 아니라 지난해 발표된 한국갤럽의 한국 종교에 관한 조사에서도 필자가 공히 주목하는 지표는 연령대별 응답, 특히 40대와 50대의 종교성이다. 지앤컴 조사에서 주목해야 할 세부 지표는 연령대별 응답 양상이다. ‘한국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0대 79.8퍼센트, 50대 80.4퍼센트로, 60세 이상의 69.9퍼센트보다 훨씬 높았고, 20대의 77.1퍼센트보다도 높게 나왔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코로나 전후 호감도에서도 같은 패턴을 보인다. 40대와 50대는 “나빠졌다”는 응답이 각각 60.2퍼센트와 59.7%퍼센트로, 마찬가지로 60세 이상의 38.6퍼센트, 20대의 54.5퍼센트보다 높다. 특히 지난 3월 대선 전후로 교회에 대한 호감도가 나빠졌다는 응답에서도 40대는 33.2퍼센트, 50대는 32.3퍼센트로 다른 연령대(20대 15%, 30대 26.6%, 60세 이상 17.9%)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부정적이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에서는 2030세대에 비해 4050세대가 더욱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최근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0대는 코로나 이후 교회에 대한 호감도에서는 40~50대와 동조하는 반면, 대선 이후 호감도에서는 20대와 40~50대 중간에 있다.) 2021년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현황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40대와 50대의 비종교화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가 발표된 당시 20대의 비종교화가 중점적으로 보도되었으나, 세부 지표를 보면 오히려 그에 못지않게 40대와 50대의 ‘종교 이탈율’은 심각했다. 한국의 전체 종교인 비율은 2014년 50퍼센트에서 2021년 40퍼센트로 10퍼센트포인트나 하락했다. 그 가운데 20대에서 종교를 믿는 인구의 비율은 22퍼센트이고, 나머지 78퍼센트가 비종교인으로서 다른 연령대를 압도한다. 따라서 20대의 비종교화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하다. (30대의 종교인 비율은 30퍼센트, 40대는 32퍼센트, 50대는 43퍼센트, 60세 이상은 59퍼센트이다.) 여기서 종교인 수치만 보면 40대와 50대는 20대보다 꽤 큰 차이로 높기 때문에 여전히 종교 친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14년도의 결과와 비교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종교 이탈율’ 최고는 4050세대20대의 종교인 비율은 2014년의 31퍼센트에서 2021년 22퍼센트로 9퍼센트포인트가 하락했고, 30대는 38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8퍼센트포인트가 하락했다. 반면, 40대는 2014년 51퍼센트에서 32퍼센트로 무려 19퍼센트포인트나, 50대도 60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17퍼센트포인트가 하락함으로 20~30대와 격차를 보였다. 60대는 68퍼센트에서 59퍼센트로 9퍼센트포인트로 떨어졌으니 상대적으로 하락폭은 덜하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비종교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종교 이탈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와 50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 세대에서의 ‘비종교’ 인구 비율은 20대와 30대가 가장 높지만, ‘탈종교’ 인구 비율은 40대와 50대가 더욱 높다. 2014년 조사에서는 과반수이상이 종교 인구였던 40대와 50대의 탈종교화가 가속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종교인의 과거 신앙 경험을 묻는 질문에서도 1984년 이후 조사 때마다 개신교 이탈자가 가장 많다고 하니, 종교 이탈자가 기독교에서 덜 나왔을 개연성도 없다. 이러한 양상은 이번 지앤컴 조사에서 나타난 한국 교회에 대한 4050세대의 부정적 인식 상승과도 유사해 보인다. 이 두 조사에서 나타난 4050대의 탈종교화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려할 때, 이들이야말로 최소한 복음 사역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음세대 선교에 대한 긴박감은 자주 고취되는데 비해, 현재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허리이자 인구 비중도 가장 높은 4050세대는 의외로 선교적으로나 목회적으로 소외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년 세대라고도 통칭될 수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사회적, 재정적 안정을 이루며 교회 활동과 봉사에서도 가장 많은 기여를 하리라는 기대를 받곤 했다. 과거에 목회자들끼리 ‘개척교회는 40-50대 집사 다섯만 핵심 멤버로 있으면 지속가능하다’는 경험칙을 농담으로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처럼 회중의 ‘기둥’과 같던 이들의 신앙생활이 수동적이 되고, 심지어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흐름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사실 생애 여정에서 40대와 50대는 종교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기여야 한다. 젊을 때는 한창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며, 개인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문화의 유혹도 넘쳐나는 시기여서 전통적인 교회오빠, 교회누나들 외에는 대체로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곤 한다. 그러나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사회와 직장에서의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지며 건강에도 이상신호가 켜지는 중년의 위기는 종교에 대한 관심과 의존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미국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음주의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구도자 교회’ 열풍도 그 시기에 중년이 된 베이비부머 세대가 교회로 귀환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미국의 베이비부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부터 피임약이 승인되기 전인 1962년까지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젊은 시절에 1960년대의 자유 민권운동과 대중문화의 폭발적 성장을 경험했다. 높은 사회적, 문화적 의식을 갖춘 그들은 성인이 되어 사회의식과 문화적 감각이 부재한 교회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이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중년에 이르러 외로움, 중독, 자녀 및 배우자와의 관계, 인생의 의미 등을 놓고 고민하게 되었고, 이들의 필요에 구도자 교회들이 응답하면서 미국의 종교지형에 변화를 일으켰다. 인생의 더 깊은 의미와 새로운 관계에 대한 필요가 비단 서구인뿐 아니라 도시 문명과 개인주의 사회의 중년 세대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이것이 사회학자 웨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의 표현대로 종교, 혹은 교회로 돌아오는 ‘구도자의 세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현재 한국의 4050세대에게서 일어나는 탈종교화와 교회에 대한 실망은 일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한국의 세대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한 사회학자 최샛별에 따르면, 40대와 50대는 동일 세대로 묶이지 않는다. 그는 한국의 세대를 88만원 세대, X세대, 베이비붐 세대, 산업화 세대로 분류하는데, 현재의 40대는 X세대에 속하고 50대는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게 된다. X세대(1970-1979년생)는 경제적 풍요와 정서적 안정을 누린 세대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반면에 베이비붐세대(1950-1969년생)는 전통적 가치관을 내재화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한 이들이다. 필자는 최샛별 교수의 베이비붐세대 연령 범위(20년)는 지나치게 확대되었다고 본다. 어쨌든, 현재의 50대는 베이비붐세대의 후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40대와 50대가 세대 상 구분이 될 수도 있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을 체감하며 자랐다. 따라서 인간 존중과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도 높은 세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전례 없는 디지털화와 고령화의 사이에 ‘낀 세대’로서 실생활의 불안과 고민도 안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고 유연하다. 40대는 2030세대의 문화적 코드를 공유할 수 있는 기성세대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회적 봉사에 더 많은 기여를 해주길 기대한다. 이러한 요구는 4050세대에서도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필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순히 교회의 봉사 활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정성이 왜곡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의 사회를 위한 활동 총량이 타종교에 비해 뒤처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나타난 공공의식과의 불협화음, 정치적 편향성은 교회가 대변하는 복음의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과 복음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으리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4050세대에게도 인생의 깊은 위로와 궁극적 비전을 마땅히 제시할 수 있음에도, 교회의 사회문화적 상식과 공감능력 부재가 이들의 영적 조망권을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 복음은 모든 세대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그들의 관심과 필요에 응답하고 더욱 근본적인 해답을 줄 때 복음 앞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청년 세대를 향한 복음 사역의 헌신자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년 세대는 한국 교회를 든든히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늘 교회의 곁에 있을 것으로 여겨온, 또한 노년과 청년을 잇는 4050의 중년 세대는 영적으로 안녕하신가? 아무래도 지금 우리는 교회와 복음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져 가고 있지 않은지 면밀히 살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4050세대를 위한 복음을 찾아서’를 주제로 4050세대의 이야기 속에서 복음과의 만남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4050세대
종교이탈율
비종교인구
탈종교
베이비붐세대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by 김선일
2022-03-2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가입 국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발표하는 ‘더 나은 삶 지표’(Better Life Index)는 11개 항목을 기준으로 삶의 질과 만족도를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시민참여·안전·주택·교육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은데 반해, 환경·건강·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워라밸”)·수입에서는 평균을 훨씬 밑도는 점수를 얻었다. 이중 우리나라가 수년째 최하위권에 속하는 항목은 놀랍게도 공동체 지표다. 2015년부터 지속적으로 조사 대상 국가들 중에서 그야말로 꼴찌를 차지하다가 가장 최근의 조사에서는 세 나라를 제치고 부상(?)했으나 여전히 최하위권이다(41개국 중 38위).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80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는 OECD 평균인 91퍼센트보다 낮은 수치다. 사회적 연대의 약화는 경제적 위기와 관계적 고립을 불러일으켜 삶의 만족도를 저하시킨다고 이 조사는 말한다. 전통적으로 두레, 향약, 품앗이 같은 이웃 공동체가 강했던 이 나라에서 사회적 관계의 급속한 와해는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이제 정점을 지나고 있긴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고립된 생활은 기본값이 되었고, 온라인 공간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메타버스는 현실적인 가상공간에 나와 또 다른 이들이 아바타라는 유사한 수평적 관계로 참여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같은 신념과 취향을 공유하는 연대감이 집단에 대한 의무적 소속감을 빠르게 대체해 간다. 연대감을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모여서 친소관계를 쌓을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곳에서 신념을 공유하며 공동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등산스타그램에는 술, 김밥, 산악회 장면은 없고 커피, 패션, 등산화 같은 각자의 취향을 더 드러낸다. 모두가 한 테두리 안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팔을 걸고 이합집산’하기 때문에 지시나 주장으로 공동체를 결속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각종 팬덤으로 모인다. 문화, 정치적 셀럽에 대한 팬덤뿐 아니라 취미와 관심사를 나누는 팬덤 커뮤니티들도 많다. 공감은 팬덤을 찾는 연료이며, 커뮤니티는 팬덤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다(2022 트렌드 노트, 57-59).우리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근본적 관계는 가족이다. 가족 간 분화가 증가했다는 서구 사회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족의 형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그 형태는 유연해야 하고 구속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족이라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가족적 의무감보다는 심리적 동반의식이 더 중요해졌다. 가족의 소중함은 개인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가장 끈끈한 결속체인 가족에 대한 이와 같은 변화된 인식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기성세대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 부모 또한 자녀의 미래에 대한 반영구적인 의무감보다 이제는 자신의 제2인생에 대해서 더욱 진지한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로 바뀌고 있다(2022 트렌드 모니터, 98-102).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몇 년간 가장 대표적인 준거집단인 가족, 회사, 교회까지도 관계와 공동체의 진화를 겪고 있다. 진화란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소속과 연대의 의미도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취향과 자기존중의 문화에서 얼리 버드들이 선제적으로 트렌드를 끌어가는 듯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전체 문화를 지배하는 양식으로 확산되진 않았다고 본다. World Value Survey 2020년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생존 가치’(Survival Values) 대 ‘자기표현 가치’(Self-Expression Values)에서 ‘생존 가치’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같은 유교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 홍콩, 대만보다 낮고 일본과는 꽤 큰 차이를 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보다도 떨어진다(아래 그림). 원래 한국 사회는 집단적 위계주의가 강한 문화이며, 가족적 유대감은 대부분의 조직에서도 권장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 ‘가족 같은 회사’ 등의 끈끈한 연대는 가족, 일터, 교회까지도 지배해 왔다. 지금도 연줄 문화의 체취는 슈퍼개인의 옷으로 바꿔 입는 와중에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 문법의 전환기는 교회의 선교적 전진기지가 세워져야 할 지점이다. 생활의 모든 선택 기준이 개인의 미세한 욕구에 맞춰 파편화되고, 끼리끼리의 연대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공감력을 기르는 일은 구성원들의 급선무가 되었다(트렌드 코리아 2022, 191). 선거 때마다 우리 사회는 세대 간, 성별 간, 정체성 집단 간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다. 어느 사회나 이러한 갈등을 겪지만, 한국 사회의 파편화는 취약해진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는 것 같다. 사회적 유대감이 약화되고 신념과 취향의 간극이 벌어지는 시대에 이 간극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계의 방안을 제시하는 존 리비의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온오프 공간 모두에서 확장하는 초대의 힘을 제안한다(전자책, 21/152). 영향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데. 정직성, 역량, 선의는 신뢰의 공동체를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한다(전자책, 37/152). 코로나 이전부터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공유하고 경험하는 살롱문화나 ‘남의집 프로젝트’와 같은 작은 모임들은 시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비록 더디더라도 코로나 이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유예된 관계적 욕구를 다시 복원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시대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공동체와 모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군중 속의 개인으로 순응하는 표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기독교적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를 깊이 탐색해야 한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의 저자 크리스틴 폴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적 실천 네 가지를 감사, 약속, 진실함, 손대접으로 보았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존재를 감싸고 있음을 믿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약속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바탕이다. 진실함은 상호 신뢰의 원천이다. 손대접은 테두리 밖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맞이하는, 그래서 사회적 유대가 와해되어 가는 이 시대에 저항하는 급진적 실천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계층화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귀족으로부터 평민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 됨을 경험하는 실천으로 제국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어느 곳보다 역사적으로 이처럼 새로운 연대로서의 관계를 위한 가장 강력한 유산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이라는 복음의 유산이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수평성과 개방성을 회복한다면,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가 개인이 자기들의 삶에서 안고 있는 과제들을 해석하며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그들을 인도한다면, 관계 결핍의 시대에 교회의 선교적 잠재력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은 성직 계급이나 교회 건물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장소와 개인의 공간에서 이웃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실천을 통해 구현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이미 구역, 셀그룹, 소그룹, 목장, 가정교회 등의 축적된 공동체적 연륜과 경험이 있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와 같은 기존의 공동체적 역량을 세상 속에서의 작고 진실한 관계에 헌신하도록 성도들을 격려하고 공동체를 연습하게 하며(공동체의 문화는 연습을 통해 체화된다),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서 선교적 공동체로 담대히 나아가도록 후원하는 것이다. 이전 글: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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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by 김선일
2022-03-19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부쩍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근엄하고 진지하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던 이 용어가 깃털처럼 가볍게 쓰인다. 과거처럼 학계나 교회에서가 아니다. 대중문화에서 앞 다투어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예 아이돌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세계관을 갖추는 일이 필수라고 한다. 아이돌 멤버들에게 세계관은 하나의 기본 사양이 되었다(‘2022 트렌드 노트’, 129) 전형적으로는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그에 대한 세계관적 해석이 다양하게 시도된다. BTS의 한 멤버가 초월적 존재이며 다른 멤버들은 그 존재의 여섯 인격체라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인기를 끈다. 이러한 가설이 성립되려면 그에 부합되는 세계관이 설정되어야 한다.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인 SM은 SMCU(Culture Universe) Origin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내보이면서 세계관을 통한 이야기 전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영상의 내레이션은 창세기를 연상시키듯 “태초에”(In the beginning)로 시작되며, 그 동안 종교와 과학이 점유하던 세계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무의식에 담겨진 신화적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다고 한다. 놀이가 된 세계관세계관은 우주적 판타지만을 다루지 않는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킹덤’은 조선 시대 좀비물에서 후속작 ‘킹덤: 아신전’에 이르러 조선 북방으로 무대를 옮기며 역병을 부른 허구의 풀 생사초의 기원을 찾는다고 해서 세계관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나아가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우주나 국경과 같은 거대 영역만이 아니라 생활세계에도 적용된다. 개그맨 3인이 만든 유튜브 ‘피식대학’은 그들이 각기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서 산악인협회, 올림픽국가대표, 대선 등을 코믹하게 풍자한다. 판타지보다는 패러디에 가깝고 비전의 스케일도 작지만 그들 각자가 현실과는 다른 세계와 캐릭터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세계관 놀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세계관은 하나의 허구 세계를 설정하고 그 세계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촘촘히 만들어 구조를 갖춘 다음, 그 세계관에 부합하는 노래, 캐릭터, 밈 등의 콘텐츠들이 개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유행처럼 사용되는 세계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worldview가 아니라 우주라는 뜻의 universe이다. 관점을 의미하는 ‘세계관’은 관행적으로 쓰일 뿐 문자적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일리는 만무하고, 오히려 현실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과 구상이다.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관으로 꼽히는, 우주를 구하는 히어로들의 총 집합체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가 대표적이다. BTS와 SMCU의 세계관도 유니버스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이는 상상과 유희의 세계다. 서로 다른 우주, 다른 행성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들이 결국에는 통합된 유니버스에서 만난다는 설정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세계관의 확장뿐 아니라 세계관의 통합은 더욱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인간은 모든 실타래가 맞춰지는 서사의 종결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과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이 허구적 세계관의 발상은 평행우주론과 같은 과학적 가설과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가져다주었고, 이제 가상현실 기술은 우리의 상상을 확대시키는 세계관적 콘텐츠를 요구하게 됐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크고 작은 세계를 설정하는 이 욕구는 현실의 결핍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현실 속에서 우울해하고 좌절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비록 가상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웃고 즐기며 소통할 수 있는 동반자들과 연대한다. 세계관과 내러티브의 동행내러티브는 세계관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다. 내러티브와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이야기는 내러티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서술한다면, 내러티브는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지는지를 말한다. 우리가 내레이션을 할 때 화자의 시점을 곁들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일인칭 내러티브라고 하지 일인칭 이야기라고 말하진 않는다. 이야기가 표현된 내용 자체라면 내러티브는 자기만의 틀로 내용뿐 아니라 신념과 가치를 내포한다. 내러티브에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꼭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내러티브의 골격이라면, 여기에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파생된다. 비트코인이 경제계를 강타한 이유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의 인물이 금융 중앙통제시스템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적 상호연결을 기획한다는 내러티브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새로운 세계를 발효시키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트렌드 코리아 2022’, 412-413). 지금까지 세계관과 내러티브에 대해서 간단하고 투박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기독교가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은 있는가? 기독교는 세계관 및 내러티브와 얼마나 가깝다고 생각되는가? 아마도 당신이 경험해 온 신앙의 관습에 따라서 그 거리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신앙을 교리적 명제나 규칙으로 배우고 표현해 왔다면 세계관과 내러티브는 다소 어색할 수 있다. 1980∼90년대에 한국 교회에 기독교 세계관 학습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세계관은 많은 교회들과 선교단체에서 가르치는 주요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 학습은 상상과 내러티브와 비전으로보다는 기독교 교리의 하위 주제로서 ‘인지적 관점’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이 관점은 세상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이해보다는 판단에 더 많이 사용된다. 오늘의 세계관 열풍은 그와는 결이 다르다. 앞서 말했듯, 이 세계관은 상상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세계를 해석하며 밈을 전파하며 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서사-해석-공유-놀이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 세계관의 사람들이러한 세계관과 내러티브 현상은 비록 정교한 소비 자본주의의 기획으로 설계된 틀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허구적이고 사실상은 일시적 쾌락으로 소비되는 세계관 놀이와 다르다.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을 갈망하나 그 초월은 현실에 도래하는, 그리고 현실을 변혁하는 완성을 지향한다. 사도 바울은 고대 1세기에 주변의 야만족들과 비교해서 우월한 로마제국의 시민의식을 지닌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선언하면서, 그 하늘의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을 따라 아름답게 변화시키리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관의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이어야 한다. 상상과 내러티브는 기독교 신앙을 생동감 있게 경험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오늘날 신앙의 언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장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위로와 용기를 위한 신앙의 언어는 물론 필요하지만, 더 큰 이야기와 세계의 궁극적 변화에 대한 소망을 견고하게 품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효용성에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검증의 늪에 빠질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선명한 세계관과 탄탄한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상상과 비전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나 J.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대표적인 세계관 판타지다. 탄탄한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 내러티브는 삶의 문제들을 곡진하게 파고든다. 팀 켈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묘사하는 언어가 오늘날의 다양한 문제들과 소통하며 가장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억압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는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터 언어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우리를 의롭게 하신 법정의 언어가, 수치심과 거절된 감정으로 씨름하는 이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추방과 귀향의 언어가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말이다(‘팀 켈러의 센터처치’, 280). C. S. 루이스가 고대의 신화들이 공통적인 양식과 영향력을 끼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참된 신화라고 했듯이, 성경적 세계관은 많은 상상의 세계관들이 있으나 유일하게 초월과 현실을 통합하고 역사를 완성하는 참된 세계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세계관을 오늘의 삶을 변혁시키는 내러티브로 해석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위로와 소망을 나누는 공동체다. 이전 글: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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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톨킨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
by Elliot Clark
2022-03-16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국경을 이루는 검은 티자 강 루마니아 국경 도시 시게투마르마치에이(Sighetu Marmatiei) 외곽, 흑 티서(Black Tisza) 강이 가로지르는 우크라이나 쪽에 캐러밴 한 대가 어둠속에 정차해 있다. 이 차량 전조등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떠나온 가족이다. 이들의 탈출 여정은 느리고, 매우 조심스럽다. 자동차들이 15킬로미터나 길게 늘어서 있다. 일부는 추운 날씨 속에서 이미 하룻밤을 여기서 보냈다. 이들은 안전한 시게트[‘시게투마르마치에이’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로 건너가기만 바랄 뿐이다. 이 국경을 건너기만 하면, 이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루마니아 북부 지역의 침례교회들과 오순절교회들이 난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런 일은 우크라이나의 서부와 남부 지역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의 검문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루마니아 교회에 난민을 위해 마련된 침구들 (사진 제공: Gabriel Michnea)유엔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최소 200만의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 국적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를 떠났다. 그 중 절반 이상은 폴란드로 피했지만, 수십만 명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로도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오데사가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웃나라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접경지대를 따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몰려들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동유럽 전역의 교회들이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친 난민 행렬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 탈바꿈한 이 교회들은 음식과 쉼터와 교통을 제공하고, 구원의 희망이 되어 주고 있다. 다음은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난민 사역을 담은 현장 풍경이다. 몰도바 키시너우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발발하자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에 있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교회의 미하이 치사리(Mihai Chisari) 목사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있는 친구 선교사를 대피시키려고 오데사로 떠났다. 그러나 국경지역 팔랑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 난리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곧 깨달았다. 수천 명이 대피하고 있었다. 몰도바 정부가 다 감당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치사리 목사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밴 하나를 렌트했다. 그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두 시간을 운전해서 팔랑카로 다시 돌아갔다. 이 국경지역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이란 사람들과 오데사에 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었다고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치사리는 그들을 키시너우에 데리고 가서 교회 건물 안에서 쉼터를 제공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 교회가 무슬림으로 절반이 채워질 것이라고는 내 인생에서 결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초기부터 그의 교회가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섬긴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마고 데이 교회는 나이지리아, 카메룬, 에티오피아, 네팔, 인도 유학생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했다. 그들은 하룻밤이나 이틀 밤을 묵고 다음 장소로 계속해서 이동해 갔다.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로 우크라이나 여성들과 아이들이다. 이마고 데이 교회는 이들에게 식사와 의복, 위생용품을 제공한다. 건물에 샤워 시설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이 가정집을 오픈했다. (서른 시간을 차 안에서만 보냈다면 분명히 당장 샤워부터 하고 싶을 것이라고 치사리 목사는 귀띔한다.) 난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언어 장벽이 있긴 하지만, 이마고 데이 교회는 그들의 정서적, 영적 필요를 채워 주려고 한다, 교인들 가운데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 가운데 있는 난민 가족들을 방문할 때 자녀들을 데려간다. 아이들이 예배당에서 함께 노는 동안 어머니들은 모여서 기도한다.난민을 돌보는 이마고 데이 교회의 신자들 (사진제공: Mihai Chisari)이 교회 교인들은 또한 난민들이 다음 여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여 피난길에 오른 이방인들을 가까운 도시나 나라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해 주고 있다. 힘을 합친 지역 교회들이 피난 경로를 짜고 물적 지원과 서류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탈출한 노예들에게 피신 경로와 안전 가옥을 제공했던 19세기 미국의 노예해방 운동 네트워크와 거의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음 장소로 떠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 난민들도 있다. 지난 두 번의 주일을 지나는 동안에 이마고 데이 교회의 난민을 위한 섬김은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제는 예배를 위한 번역도 제공하고 있다. 여러 언어로 된 전도지도 만들었다. 이 전도지는 전쟁의 해악을 친구에게 신중하게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은 마음이 힘듭니다. 그들은 러시아는 악당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이런 악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는 바로 우리의 죄라는 사실입니다.”루마니아 시게투마르마치에이전쟁이 발발한 일요일 아침 가브리엘 미크네아(Gabriel Michnea) 목사는 밤에 2시간밖에 못 잔 채로 그의 작은 루마니아 교회 성도들 앞에 섰다. 그는 국경을 넘어 홍수같이 밀려들어오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도울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동기부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밤새도록 했다. 가브리엘 목사는 성도들에게 헌신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람들을 위해,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입니다.” 그 날 오후에 시게트의 이 베다니 침례교회는 행동에 나섰다. 남성 팀은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유아용 침대, 매트리스, 담요, 수건을 모았다. 이 교회는 지하실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배당도 난민 쉼터로 바꾸었다.베다니 침례교회 지하실 난민 쉼터에 머물고 있는 엄마와 아이 (사진제공: Gabriel Michnea)베다니 침례교회가 수용한 난민 120명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목사의 아내인 보스야 포티아크(Vosya Potiak)였다. 보스야는 임신 6개월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던 도시 크리초보(Krychovo)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녀는 우크라이나에 남아 사람들을 섬기기로 한 남편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여기 베다니 교회에서 보스야는 동료 난민들을 위한 번역과 봉사를 쉬지 않고 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의 다른 많은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시게트의 교회들은 난민들을 받아주고 먹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난민들에게 주유비를 제공하여, 인근 도시에서 주거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부다페스트나 프라하 같은 더 먼 도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있다. 가장 최근에 미크네아 목사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함께 차량을 몰고 우크라이나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루마니아 북부의 교회들은 협력하여 기름, 밀가루, 물 같은 기부품목을 트럭에 실어 국경을 넘어 운송하고 있다. 이들은 이 물품들을 받을 우크라이나 목회자 네트워크를 (비밀 장소에서) 확인한 다음,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 지역 도시들로 가서 물품들을 나눠주는 일을, 곧 인도주의적이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 미크네아 목사는 그의 성도들이 이 위기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기뻐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돕고자 한다.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모인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미크네아 목사는 지난 2주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지금은 우리가 그간에 설교해 온 것을 행동에 옮길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는 대로 살고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선을 행하기에 완벽한 시간입니다” 세상의 빛무료 급식소이건 따뜻한 잠자리이건, 임시 진료소이건, 기도의 집이건, 아니면 인생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이건, 교회는 지친 난민들을 위한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다. 그것은 교회 건물들이 최고의 숙소나 가장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새 창조의 아름다움은 그가 구원하신 사람들과 그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교회가 어둠 가운데 빛이 되는 사명을 완수함에 따라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목적을 행하고 계신다. 루마니아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하이 치사리 목사는 오늘의 어둠 가운데서도 이미 희망의 여명을 보고 있다. “저는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원제: Churches as Waystations on the Refugee Road from Ukrain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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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도바교회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
by Jamie Dean
2022-03-15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일주일 만에 복음주의 교회 개척 목사인 벤 레이어는 폴란드의 시에들체 자택에서 전화를 받았다. 국경에서 가까운 폴란드 교회의 목사가 현재 자신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돌보고 있는데 주일에 누군가 그를 대신해 설교하러 와줄 수 있겠냐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레이어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한 장로가 난민들로 가득 찬 건물에 교인들이 매트리스와 용품을 준비하고 있는 국경 인근의 교회에 두 차례의 예배 설교를 위해 방문하였다. 이 장로가 폴란드어로 설교할 때, 몇몇이 그의 설교를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그리고 현장에 있는 소수의 미국인을 위해 영어로 통역했다. 레이어 목사는 악화되는 위태로운 기간의 사역에 대해 “혼란하다. 모두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폴란드의 교회들은 한계에 대해 알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들인 이 나라 인구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레이어 목사는 그 수치가 약 0.2퍼센트(일부 추정치보다 약간 낮음)라고 생각한다. 그는 종종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2퍼센트가 아니라 0.2퍼센트”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소수인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낮은 수치이다. (우크라이나의 복음주의 교인 수는 이 나라 인구의 4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가 제공하는 중동 국가들의 수치와 비교하면 폴란드의 복음주의 교인 수가 얼마나 적은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복음주의 교인 수가 폴란드와 비슷하다.“우리 도시에는 8만 명이 살고 있고, 우리는 40명 정도입니다” 그의 교회 성도들에 관해 레이어 목사는 말한다. “이곳에는 여기로부터 40마일 이내에 다른 [복음주의] 교회는 없습니다. 좀 더 가야 한 20명 정도가 있는 또 다른 교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21년간 폴란드에서 사역하고 있는 미국인인 레이어 목사는 이 사역을 위한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는 것이 “폴란드 동부 지역의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한다.이런 현실은 평화로운 시기에 늘 목회를 위한 도전이 된다. 거기엔 언제나 더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시에 새로운 도전이 늘었다고 레이어 목사는 말한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는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여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분주해진 사역지난 2주간의 혼란 가운데 2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난민 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탈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인구의 약 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 난민들 중 100만 명 이상이 폴란드로 넘어왔다.또 다른 100만 명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이들 중 다수는 시민들이 러시아로부터의 잠재적인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서부 도시 르비우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기독교 교회와 학교, 선교단체들은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르비우에 있는 우크라이나 침례신학교 야로슬라프 피즈 총장은 신학교가 수업을 진행하던 곳에서 하룻밤 사이에 피난민을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5일 만에 확 늙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첫 주말까지 신학교는 700명 이상의 난민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전쟁이 멈춰지는 큰 기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현재의 위기에 대하여 한 영상에서 말하였다.전쟁이 시작된 지 2주째, 폭격이 더 끔찍해짐에 따라 끝은 보이지 않았다. 수요일, 우크라이나 관리들은 마리우폴의 한 산부인과 병원이 잔혹하게 폭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민간인에 대한 공격과 더 많은 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난민들이 르비우 같은 도시에 있는 피난처를 떠나 이웃한 폴란드와의 수 마일에 걸친 국경을 넘게 되었다.우크라이나인 가족 7명이 국경에서 서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레이어 목사의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보낸 스무 시간을 포함하여 서른여섯 시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야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어린아이 넷과 그녀의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교회의 집사인 그녀의 남편은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18세에서 60세 사이의 수백만 명의 다른 남자들과 함께 뒤에 남았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안야의 아버지는 61세였기 때문에 피난에 동행할 수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동유럽을 가득 메운 난민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거의 전부다. 위기가 시작된 이후 레이어는 60세 미만의 우크라이나 남성을 만나본 적이 없다며 “여성, 어린이, 나이든 남자만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많은 난민들이 폴란드를 거쳐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일부 교회들은 가족들이 단기간 머물다가 이동하는 것을 보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다리고 있다.불확실한 미래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Piotrkow Trybunalski)의 복음주의 교회 목사인 다니엘 크리스턴은 난민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그의 교회 성도들은 추운 겨울 동안 이미 엄청난 난방비를 지불하지 못했다.“난방비를 지불할 방법이 없는데도 건물에 난방을 하고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1993년부터 복음주의 교회에서 섬겨온 이 폴란드인 목사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들의 접근 방식은 ‘우선 사람들을 돕고 비용은 나중에 걱정하자’는 것이었다고 말한다.교회가 도와준 가족 중 하나는 12살 아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싱글맘이다. 교회는 최소 한 달 동안 다섯 개의 게스트룸 중 한 곳에서 이 가족을 돌보기로 약속했다. 폴란드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난민들은 이미 이곳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교회의 성도들과 연락을 통해 들어온다. 어떤 이들은 교인 가정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대부분은 곧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만 크리스턴 목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현재로서는, 그들은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섬기며 예배드리고 있다. 그는 “어제 우리는 폴란드인만큼 많은 우크라이나인과 예배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가 꽉 찼어요.”현재의 희망시에들체(Siedlce) 출신의 레이어 목사는 우크라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다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힘든 폴란드 동부의 작은 교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개되는 상황 가운데 악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반응에 감동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우리를 다른 나라로 보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라고 우크라이나 여성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또한 이번 위기가 더 많은 폴란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만들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다. 인근 군부대 소속 전투기들이 마을 상공을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어 전쟁이 폴란드로 번지지나 않을지 염려하고 있다. 그는 주일에 교회가 꽉 찼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레이어 목사는 앞으로 오랫동안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전쟁의 초기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사역이 영원히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원제: Churches in Poland Stretch to Serve Ukrain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우크라이나전쟁
동유럽복음주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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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복음주의교회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by 김선일
2022-03-12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단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앞당겨진 온라인 생활의 본격화와 더불어 떠오른 버즈워드(buzzword)였다. 지난 2021년은 메타버스의 원년이라 할 만큼 메타버스는 게임과 경제적 투자 대상으로뿐 아니라 미래의 일상을 위한 필수 코드로 성큼 다가왔다. 물리적 세계 너머의 세상을 뜻하는 메타버스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경험하는 물리적 세계를 대체하는 실제를 가리키는 총괄적 용어라 할 수 있다. 메타버스의 지경이 더욱 확대될수록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 느꼈던 거리와 감각을 가상세계에서 진짜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대면세계에서만 가능한 거의 모든 활동을 비대면에서도 현실과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과 전망이 일시적 유행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메타버스가 말하는 변화를 실현해 주는 기술의 발전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메타버스 경제의 주축이라 할 NFT(대체불가토큰)의 제도화도 난망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버스가 사이버공간과 증강현실의 확대와 연관된 새로운 트렌드라는 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트렌드 서적들에서 주목하는 현상은 실재감테크와 다중자아(부캐)의 출현이다.실재감테크최근에 떠오른 광고 모델 ‘로지’는 가상인간이다. 서울 출생 22세 여성으로 설정된 로지는 늙지도 않고 학폭 등의 논란도 일으킬 걱정 없이, 지난해에 광고 계약 건수 8건에, 협찬은 100건이 넘고, 수익은 15억 원에 이른다. 전에도 사이버 가수 아담이 있었지만, 로지는 훨씬 더 실재에 가까운 모델로 나타났다. 3D 그래픽으로 구현되어 한눈에 봐도 사이버 캐릭터였던 아담에 비해, 로지를 처음 동영상으로 봤을 때는 그냥 실제 사람인줄 알았고 나중에 가상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랐다.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는 2022년의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시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완전한 실재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실재감테크를 꼽는데, 이는 현실과 가상,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혼합하는 메타버스의 중요한 특성이다(357). 이 책은 실재감테크를 메타버스에 국한하지 않고 다중감각 SNS, 라이브커머스 등에 연결시키지만 현재의 일반적인 용례는 이 모든 경험을 메타버스라는 범주에 귀속시키는 추세다. ‘트렌드 코리아 2022’는 실재감테크의 세 가지 요소를 다중감각, 동시성, 체험성이라고 말한다(359-364). 먼저 다중감각이란 예를 들어 옷가게에서 제품의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음악이나 자연의 소리를 전달하는 청각과 식물 향기를 통한 후각 등의 여러 감각들을 상호작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성은 현실의 시간과 동일한 흐름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라이브커머스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인간 소통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보인다. 셋째로 체험성이란 현실의 움직임과 유사한 체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비대면이라 할지라도 현장에서 학습을 받는 것과 같은 생생한 환경을 기술적으로 조성해 준다면 한결 효과적일 것이다. 이러한 실재감테크가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신체 오감이 경험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뇌가 외부의 자극을 전기신호를 통해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경험을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통해서 하게 해주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현재의 답답하고 고립된 비대면 세계를 혁신적으로 확장해 줄 것이다. 가령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자.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넘게 날아가서 긴 줄을 기다리고 북적대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봐야 하는데, 내 집에서 최첨단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하고 편안하고 쾌적하게 루브르 박물관을 거닐 수 있다면? 물론 긴 여행의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또 다른 가치들을 많이 있지만, 그림 관람이라는 목적만을 놓고 본다면 꽤 매력 있는 경험이지 않을까? 다중자아: 부캐의 전성시대‘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는 메타버스에서 현실과 가상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TV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 방송인 유재석은 지미유, 유산슬로 여러 캐릭터들을 선보이면서 대중에게 부캐라는 개념을 각인시켰다. 메타버스는 사람들이 현실의 유일한 자신과는 또 다른 자아들을 구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라이프 트렌드 2022, 176). 영화 ‘인셉션’을 보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꿈속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와 공간을 구축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메타버스는 이처럼 자기가 설정하는 세계에서 새롭게 표현되는 자아를 만들 수 있다. 현재 대중이 접근 가능한 메타버스 플랫폼들에서도 자기의 생김새, 옷모양, 닉네임을 스스로 만들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싸이월드가 메타버스의 전조였다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다중자아의 표현이 훨씬 신장된 기술력을 통해서 현실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메타버스에서 여러 부캐들을 만들며, 또 다른 자아의 실현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칫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한 피상적 위로에 그칠 수 있다. 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 저자 김용섭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세계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10-20대가 제한된 조건을 극복하고 주도권을 쥐고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제페토, 로블록스, 이프랜드, 게더타운과 같은 메타버스 서비스들은 단순히 놀이 공간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공간이라는 것이다(179). 앞으로 메타버스는 게임과 경제뿐 아니라, 교육 및 종교 영역에서도 새로운 자아들이 참여하는 매일의 플랫폼이 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실재감테크와 다중자아라는 측면에서 메타버스는 교회에 어떤 효능성을 줄 것인가? 메타버스와 교회교육, 예배를 연계시키는 시도는 계속 나오고 있고, 관심 또한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의 효능성은 현실적 기술 발전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 팬데믹이 진정세를 보이게 되면 당분간 그야말로 ‘실재감’을 실제로 경험하려는 보상욕구가 높아지고, 더불어 메타버스 기술의 실질적 발전도 더디어지면 관심의 버블이 꺼질 우려가 크다. 메타버스의 세계는 부캐와 아바타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예배에 메타버스를 접목할 경우 나의 부캐나 아바타로 참여하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24)가 될까? 따라서 필자는 메타버스를 준비하는 교회의 태도는 새로운 메타버스 서비스를 강박적으로 좇기보다는, 향후 메타버스의 세계를 디자인할 수 있는 세계관과 그곳에서 나를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와 자아의 개발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재의 다음 글에서 살펴 볼 세계관과 내러티브 놀이라는 트렌드는 메타버스의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본래 현실 세계를 그 이상의 세계적 조망에서 해석하고 살아가는 존재다. 기독교 전통을 보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나라와 지상 나라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영적 통치와 세속 통치의 두 왕국론을 설파했다. 메타버스를 이러한 신학 전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세상 그 너머를 바라보는 상상력에서 그리스도인은 뛰어난 내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성령은 그의 나라를 섬기는 소명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다. 필자는 메타버스를 통해서 다중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풍성한 활용과 연결되리라 본다. 지금까지는 나의 다른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는 영역이 현실에서 무척 제한되었다면, 메타버스는 은사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리라 기대한다. 메타버스의 시대를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가 준비할 것은 첨단 기술을 기웃거리는 것보다, 새로운 플랫폼에 적합한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구상하며, 사람들이 각자의 건강한 자아와 은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리라. 자아와 은사의 재발견과 정립은 지금 당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전 글: •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메타버스
메타버스세계관
메타버스와교회의미래
현실과가상
두왕국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by 김선일
2022-03-05
그리스도인을 위한 재테크 전문 작가였던 고 래리 버켓(Larry Buckett)이 생전에 쓴 소설 토르 음모(The Thor Conspiracy)를 보면 21세기 미국에서 환경주의 독재 정부가 탄생하여 환경보호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이 나온 1995년 당시에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현실감을 느끼진 못했다. 더군다나 그때 한국의 상황에서 환경론자들이 독재 권력을 쥔다는 상상은 너무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 그와 같은 환경 권력까지는 아니지만 친환경적, 생태적 삶의 규범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태세의 전환이다. ‘라이프 트렌드 2022’의 저자 김용섭은 2022년의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의 현상으로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의 부상을 꼽는다. 다른 트렌드 서적들이 주로 개인주의나 메타버스에 주목하는 반면 김용섭은 독특하게 전망하는 트렌드 서적 중에서 이러한 생태적 삶의 양식을 가장 중요하게 꼽는다. 특히 현재의 MZ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서 환경 문제에 관한 민감성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 기성세대에게는 좋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던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동의 생존 과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친환경적 민감성은 인류 공동의 과제로 그 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이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된 주제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은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근본적으로 기후 위기와 인간의 생태계 파괴로 말미암았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재앙적 바이러스의 발발은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약물 백신이 아니라 ‘생태 백신’이라고 한다. 즉 사람이 동식물의 서식지에 함부로 침입하지 않고, 그러한 침입과 고갈을 유발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사실 이제는 ‘환경’이라는 용어보다 ‘생태적’(ecological)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확하다. 환경이 여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다른 동식물 세계를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뉘앙스를 띤다면, 생태라는 말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일체로서의 의미로서 인간도 거대한 생명 체계의 일부라는 겸손한 의식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생태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은 갈수록 고조되어 오다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보편적인 삶의 양식을 변화하는 동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 전반의 친환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김용섭은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 아니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베터 노멀’(better normal)이라고 부른다. 환경친화적 트렌드는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고립과 마스크 착용이 기본 값이 되어버린 코로나 시대의 삶은 맑은 공기와 자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가드닝과 비거니즘은 베터 노멀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한다. 최근에 새로 문을 열거나 리모델링을 하는 백화점들은 상점으로 꽉 채우던 공간에 넓은 실내 가든을 조성한다. 가드닝과 반려 식물은 사람들의 고급 취미가 되었고, 채소와 과일만 먹는 사람을 뜻하는 비건(vegan)은 식습관뿐 아니라 옷과 주거에도 영향을 주며 ‘올라운드 비거니즘’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는 “동물 착취 반대와 채식에서부터 기후 위기와 탄소 배출, 일회용 플라스틱과 미세 플라스틱 등을 비롯한 환경 문제, 생태계 파괴, 인권과 차별 문제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트렌드다(‘라이프 트렌드 2022’, 102). 일상에서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는 방식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일회용 용기를 덜 쓰거나, 조깅이나 산책을 하면서 길가의 쓰레기를 수고하는 플로깅(plogging)과 같은 활동에서부터, 탄소배출과 자원 낭비를 가속화시키는 새로운 제품에 대한 무한 선호에 제동을 걸고 기존의 옷이나 가방 등을 수선해서 쓰는 서스테이너블 패션(sustainable fashion)이 등장한다. 이는 빈티지 패션이라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과제가 되었다.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데 물이 얼마나 소비되는지도 꼼꼼히 따져 본다. 청바지 한 벌을 생산하는 데 물이 6,814리터, 티셔츠 한 벌에는 2,7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은 산업 폐수가 된다. 물뿐 아니라 면화나 케시미어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도 엄청나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후와 환경의 위기는 직면해야 할 생존의 문제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환경오염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고민 없이 살아가며 결정하는 모습은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젊은이들에게는 지구에 민폐를 끼치는 오염 엘리트로 비쳐진다. 기업 경영에서도 E-Environmental(환경), S-Social(사회적 기여), G-Governance(지배구조)를 뜻하는 ESG가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과 건강성을 가늠하는 주요한 핵심 척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위장된 환경 친화적 허세를 부리는 기업은 오히려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로 더 큰 불신을 받게 될 것이다. 한 화장품 회사가 “Paper Bottle”이라는 종이 화장품 패키지를 홍보했는데, 사실 종이 패키지에는 플라스틱이 소량 들어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자기네 제품을 친환경적인 것으로 어설프게 홍보함으로 인해 기만적 위장술로 더 질타를 받은 것이다(‘라이프 트렌드 2022’, 139). 친환경적 삶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숙고를 요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 삶 전반에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는 생태적 감수성과 교회는 얼마나 가까운가? 위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과 사회문화적 변화에 교회는 익숙한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엡 1:23)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구를 살리자는 친환경적 실천을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구원이 죽어서 우주 먼 곳 어딘가에 있는 천국으로 이동하고, 이 땅은 멸망하여 영원 폐기될 운명이라고 믿지 않는 한, 이 땅을 돌보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영원토록 유효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다(계 21:1-2).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은 절박하고 엄중하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도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 21).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보존과 돌봄의 책임을 지닌 청지기이다. 복음중심적 신앙은 신자들로 하여금 영혼의 구원과 교회 활동에 집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의 책임과 역할을 회복하게 한다. 일찍이 복음주의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는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The 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이라는 책을 통해서 구원받은 인간의 생태계 위기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 바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반향은 복음주의권에서 널리, 오래 퍼지지 못했다. 만일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들이 환경 문제에 대한 당사자 의식을 결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개인주의적, 기복주의적, 내세주의적 구원과 복음이라는 잘못된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병들어 가고 있다면, 그와 같이 병든 지구에서 건강한 교회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는 선교학자 하워드 스나이더가 그의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 ‘구원은 치유된 창조세계다’(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The Ecology of Sin and Grace)의 서문에서 제기한 질문이다(이 책의 우리말 역간 제목은 ‘피조물의 치유인 구원: 땅과 하늘의 이혼을 극복하는 죄와 은혜의 생태학’).온전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생태적 감수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로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한다. 생태적 감수성은 약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 있는 연민으로 이어진다. 많은 교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구제에 참여한다. 그러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해 주는 구제도 중요하지만, 고통과 빈곤을 증가시키는 오늘날의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에 대한 근원적 책임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른다고 볼 수 없다. 생태적 감수성과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은 복음적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이다. 이전 글: •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생태적감수성
새하늘과새땅
생태주의와교회
창조세계에대한책임
생태적삶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
by Vasyl Ostryi
2022-02-27
지난 며칠 사이에 에스더서의 사건이 우크라이나의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한 민족을 말살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졌고, 하만의 손에 그 도륙을 실행할 수 있는 면허장이 주어진 그 위기가 우리 앞에 도달했다. 교수대는 세워졌고, 우리는 지금 그 아래 서 있다. 전쟁 발발을 기정사실이라고 말하는 세계 언론의 소리를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들어야 하는 사회가 어떤 분위기일지, 이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나라에서 쏟게 될 피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몇 주 사이에 거의 모든 선교사가 우크라이나를 떠났다고들 한다. 서방 국가들은 자국 대사관 직원과 국민에게 이 나라를 뜨라고 했다. 수도 크이우의 거리에 인적이 현저히 줄고 있다. 관료들, 사업가들,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임박한 전쟁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서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할까? 어디로? 아내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르핀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크이우에서 멀지 않은 이 도시에서 우리는 이르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이곳 주민들을 돌볼 것이다. 이르핀 교회는 2016년부터 내가 목회자로 동역하고 있는 교회다.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하여 우리는 식량과 의약품과 연료를 비축했다. 이런 걸로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준비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여섯이다. 우리는 딸 넷을 키우고 있다.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대학까지 매일 대중교통으로 통학하는 16살 딸이 가장 걱정되었다. 언론은 러시아가 침공하면 이동통신이 끊길 것이고, 대중교통도 마비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고맙게도 대학생 딸아이의 수업은 이제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크이우에서 벨라루스 국경까지는 150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그래서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통해 공격할 가능성도 높다[이 글은 러시아의 본격적인 침공이 개시되기 전인 2월 24일에 쓰인 글입니다_역자]. 이 지역 언론은 피난가방을 꾸려 두라고 권고하고 있다. 나도 아이들에게 각자 3일치 정도의 배낭을 챙기라고 일러두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배낭을 챙기는 건 곧 즐거운 휴가나 여행을 의미했다. 그래선지 6살, 8살 두 딸이 계속 묻는다. “아빠, 어디로 갈 거야?” 처음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에도 안 갈 거야.”교회가 할 일전쟁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은 곳에서,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위기의 시간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평화의 시간에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4년에도 이런 위기를 겪었다. 그때 많은 교회들이 부패하고 권위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독립광장에 기도 천막이 세워졌고, 그리스도인들이 따뜻한 식사와 뜨거운 차를 나눠주었으며, 교회들은 문을 활짝 열어 군경에 쫓기는 시위대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그렇지만, 공공연하게 야누코비치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시위대를 비난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또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코끼리를 못 본 체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듯이 침묵하며 지내는 교회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교회들과 부패한 권력자들을 지지했던 교회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서 신망을 잃었다. 반대로, 시련의 시대에 국민과 함께한 교회들은 사회로부터 가장 높은 신뢰를 얻었다. 이 나라를 위한 우리의 싸움확신하건대 교회는 영적 투쟁의 장이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선포했고, 매일 밤 함께 모여 하나님께 간구했다. 3일 연속으로 도시에 불이 꺼졌을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모여야 했지만,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더욱 엄숙해졌다. 금식기도 주간을 함께하면서 우리 내면에 버티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우리는 확신과 평화를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엄중한 시간에, 우리 교회는 또한 섬김의 장이기도 하다. 평상시 주일에 1,000여명이 모이는 우리 교회는 최근에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다. 지혈대 사용법과 지혈법, 붕대 감는 법, 기도[氣道] 확보법을 배웠다. 이건 걸 배운다고 우리 교인들이 의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를 통해 우리 교인들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웃을 돌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응급처지 교육을 받을 거라고 내가 처음 발표한 날, 한 형제가 내게 말했다. “제가 왜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도 떠날 계획이었다. 군인도 아니고,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니, 떠날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는 이 나라에 남아 부상당한 사람들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자 한다. 위급 상황이 되면 교회 시설은 피난처로 전환될 수 있다. 우리 교회에는 괜찮은 지하실이 있다. 난방 설비를 들여 놓을 준비도 되어 있다. 야전병원 부지로도 기꺼이 제공할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응팀을 꾸리고 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우리는 연료, 식량, 부상자 치료 물품 같은 전략 물자를 내놓을 준비도 되어 있다. 의사, 정비사, 배관기술자 교인 정보도 모아 두었다. 단수 상황에 대비하여 우물을 갖고 있는 교인도 알아 두었다. 남아서, 기도할 것이다우리 가족도, 우리 교회도 남기로 결심했다. 이 위기가 끝나면,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도움이 절실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주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처럼 싸우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 싸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노약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줄 것이다. 아픈 사람들을 돌볼 것이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그리스도의 소망과 그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할 것이다.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에스더처럼 기도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께서 오래 전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하셨던 것처럼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내실 것이라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것이다. 남아서, 우크라이나의 교회가 주께 의탁하게 해 달라고, 이웃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원제: To Stay and Serve: Why We Didn’t Flee Ukra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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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by 김선일
2022-02-26
근래에 일상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높아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자기만의 시간이 대폭 늘어나면서 일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과제가 강요되었다. 우리의 삶을 성장시키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나 경험이 아니라 하루하루 반복되는 습관과 실천이라는 깨달음도 덤으로 주어졌다. 슈퍼개인의 시대는 이제 삶의 질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 자기 발전을 위한 시간과 습관 관리는 진정한 슈퍼개인이 되는 과정이다. 김난도와 공저자들은 이를 가리켜 ‘바른생활 루틴이’라고 부른다(트렌드 코리아 2022, 327).루틴 열풍루틴(routine)은 습관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둘 다 규칙적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습관이 무의식적 반복을 포함한다면, 루틴은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을 갖고 삶을 통제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트렌드 코리아 2022, 333). 바른생활을 위한 루틴으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셀프바인딩, 즉 자기 묶기이다. 셀프바인딩이란 다이어트나 공부 등의 목표를 세워 놓고, 중도에 이탈하지 않도록 벌금이나 보상 체계를 세우거나 타이머를 통한 시간 관리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각성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카카오 프로젝트 100’은 스스로 계획(책 읽기, 일기 쓰기, 운동하기 등 무한히 다양하다)을 세워 놓고 일정 금액을 예치해 놓은 다음 일정대로 실천하면 예치금을 돌려받지만, 계획된 과제를 제시간에 못 마친 경우에는 금액을 차감하는 형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일의 과제를 수행하면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 주듯이, 성인들도 자신에게 필요한 독서나 취미, 자기계발의 상황을 감독하고 인증해 주는 프로그램과 앱을 통해서 도장을 받는 스탬핑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열’정을 ‘품’은 ‘타’이머라는 의미의 ‘열품타’ 앱이나 ‘스터디윗미’(Study with Me) 앱은 가상 독서실 역할을 한다. 이러한 셀프바인딩과 스탬핑 방식은 회사에서 직원들의 업무를 측정하는 데도 사용된다. 재택 근무 시대에 직원들의 인터넷 방문과 근무 여부, 집중도를 체크하는 보스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과 논란도 있지만, 직원들은 개인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러한 실질 업무 감독 프로그램에 대해서 의외로 수용성을 보인다고 한다.온라인 리추얼 바른생활 루틴이 습관화되고 정례화되면 리추얼(ritual) 곧 의례로 발전한다. 원래 의례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가 구성원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통과하게 하는 특별한 절차를 말한다. 예를 들어, 국가주의 시대에 우리는 국기의 게양식과 하강식을 통해서 전 국민이 날마다 의례를 경험했다. 학교에서도 모든 중요한 행사에서는 국민의례를 먼저 가졌다. 제사는 한 집안의 가장 대표적인 의례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의례의 효력이 약해지고 있는데, 인간은 의례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동기부여를 얻는다. 이러한 의례의 결핍 지점에 개인의 자기 계발을 위한 온라인 리츄얼이 파고들고 있다. 예를 들어, ‘밑미’(MeetMe)라는 리츄얼 메이커는 글쓰기, 생각정리, 차마시기, 피아노 연주기록 같이 60개가 넘는 다양한 유료 리추얼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신청을 받는다. 밑미의 홈페이지를 보면 스스로를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고유하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리추얼이라는 용어가 온라인에서 개인의 차원으로 사용되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회고를 위한 기록이와 같은 루틴의 개발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보듬으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큰 성과나 이벤트가 없어도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찰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루틴의 중요한 결과물이 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해서 시선을 모으려는 브이로그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자신을 돌아보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공간인 블로그가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블로그는 개인의 회고와 정리를 위한 공간이면서 상호 방문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경험, 생각, 감정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공간이다. 이러한 기록은 블로그, 또는 다이어리를 통해서 서사와 비하인드 스토리의 형식으로 남겨지고 전달된다(2022 트렌드 노트, 166),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은 ‘그냥 하지 말라’에서 앞으로는 우리가 남긴 모든 종류의 기록들이 그 사람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메시지이자 브랜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상의 복음위와 같은 일상의 돌봄과 개발은 기독교 공동체의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가톨릭의 성직주의적 수도원적 영성 추구와는 평범한 일상에서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자 한다. 청교도들은 주일 이후에 소그룹으로 모여서 주일의 말씀을 요약하고 각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집담회’(conference)를 실천하며 영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몇 년간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집담회를 통해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말씀에 따르는 삶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Joanne Jung, Godly Conversation : Rediscovering the Puritan Practice of Conference).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도 속회, 신도회, 연합신도회 등의 조직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상호 격려하고 돌보아 주는 일상의 영적 관리 체계를 갖추었다. 교회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체화시키는 성스러운 루틴을 격려하는 곳이기도 하다. 큐티(QT)와 신앙의 필요에 따른 소그룹은 영적 루틴 관리의 장소이자 만남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교회는 바른생활 루틴이를 양산하는 경험과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신의 일상을 의미 있게 관리하고 성찰하는 일은 오롯이 혼자만의 역량으로 가능하지 않다. 루틴 관리와 회고적 기록이 자기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위함이라면, 이는 더욱 상호 책임감 있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건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일상에 대한 상호책임의 공동체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종교적인 목적의 공동체뿐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영역인 취미, 배움, 봉사를 위해서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와 소그룹들이 보완된다면 선교적 접촉의 영역도 더욱 넓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개신교회의 전통은 아니지만, 예수회의 창시자 성 이그나티우스가 제안한 ‘성찰의 기도’(prayer of examen)는 일상의 영적 회고와 성찰을 위해서 우리도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원이다. 성찰의 기도는 하루를 끝내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오늘의 모든 경험과 사건들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하루의 회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기억하며 감사하기, 2)하루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기, 그리고 3)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기뻐하시는 요구대로 살지 못한 것을 고백하기이다. 이 기도의 취지는 우리의 단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점검 없이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어떠한 습관과 루틴이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매일을 돌아보고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상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능력 있는 자아성장의 플랫폼일 것이다. 이전 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복음중심적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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