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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처치 그 후, 하나님 공동체의 시작
by 서나영
2024-05-20
팀 켈러, 1950.9.23. - 2023.5.19 한 개인이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때로는 크고 작은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며,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하는 길고 머나먼 여정이다. 그러나 이 고단한 길이 진짜 어려운 이유는 ‘더불어’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낯선 사람, 비열한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나를 배신하고 해치려는 원수들이 항상 주위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는 더불어 산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 나의 가족으로, 나의 동료로, 나의 이웃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의 성장은 고달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상적으로 묘사된 신앙의 삶과 공동체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 성경 속 초대교회를 동경하며, 말씀에 근거한 새 판을 짜면 건강한 공동체를 이뤄 행복하고 낭만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꿈꾼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망상일지도 모른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이 쉽다거나, 자연스럽게 서로 희생하는 삶으로 전환된다고 암시하는 장면은 없다. 초대교회의 신앙 모습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타락했고 여러 갈등을 안고 있었으며 지금의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계시록 2, 3장). 성경 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집과 무지와 불순종의 연속을 보라. 우리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무엇보다 조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과 기능의 분담, 리더가 임명되고 필요한 물품들과 안전한 장소를 갖추어야 한다. 기록을 하고 예산을 세우고 지출에 대해 정확한 계산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관계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고백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세상 문화를 받아들이는 정도와 시각이 다르며 갈등과 싸움을 유발한다.팀 켈러는 아마 공동체에 닥칠 번거로운 세부 사항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가 쓴 센터처치는 그의 30년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신학적 비전과 열매 맺는 사역의 실제에 대해 공유한다. 이 책은 800페이지라는 충분한 지면을 할애해 교회라는 공동체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결해야 하는지를 끈기 있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어려워진 포스트모던 사회 문화 속에서 ‘문화적 상황화가 필수가 되었음’을 조심스럽지만 일관되게 주장하며, 한 사람이 교회생활뿐 아니라 교회 그 자체로서 가정과 일터에서의 일상생활에서의 펼치는 총체적 헌신의 거룩한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우리를 설득한다. 센터처치가 명작인 이유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열한 고민 속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맥락과 도시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던지는 그의 자신감 있는 어조의 문장들은 우리를 크게 도전한다.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열매 맺는 복음의 삶을 위해서는 이전 교회 역사 속에 없던 ‘넓은 이해의 폭이 필요하다’는 외침, 각 도시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외침, 문화를 대하는 교회마다의 입장에 대해 넓게 이해하고 서로 다른 유형의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외침, 한 사람이 문화 가운데 선교사로 세워질 때 ‘관계의 진실성’을 장착하고 명확한 반문화적 가치로 정결한 삶으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외침, 말씀과 행동이 함께 가는 실천 노하우와 방법론을 연구하라는 외침, 나는 그의 모든 제안이 큰 외침으로 들린다. 팀 켈러의 외침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룸에 있어 구체적인 영역들을 꼼꼼하게 다룸에서 그 진정성이 드러난다. 중요한 많은 내용 중에 작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점들을 찾아 이어보고자 한다. 1. 한 사람이 생명력 있는 교회 되게우리는 ‘한 사람’에서 시작해야 한다. 팀 켈러는 제도적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마침내 한계점을 인정하고, ‘한 사람’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로서 “단지 구분되고 분리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 개개인의 한 사람이 세상 문화 한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며, 창조적 형태로 모인다”는 것이다(502-503). 여기서 제도적 교회는 한 사람을 그 사람이 속한 세상에서 ‘유기적’ 교회 공동체의 리더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갖춰 목양적 지원의 주체가 된다. 팀 켈러는 이 일을 이루어 갈 때 겪을 수많은 시행착오를 우려했지만, 우리에게 오만하지도, 비난하지도, 좌절하지도, 순진하게 생각하지도 말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주장을 조금도 꺾지 않는다.이 한 사람은 단지 교회의 파견인 개념이 아니고, 교회 안의 개인 신자의 개념도 아니다. 교회의 예배와 훈련 가운데 형성된 믿음과 영성을 가지고 의도하지 않아도 어디에 있건 자신의 정체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내는 한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한 사람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유기적 교회로서의 새로운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뤄가며 복음을 맥락화하여 전하는 선교사로 세워지는 것이다. 복음의 생태계는 그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도시 속에 연결된다. 이 한 사람은 어디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 한번 ‘한 사람’이 처한 문화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교회는 최선을 다해 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이에 각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있는 작은 가지와 같이 문화의 바람을 맞아야 한다. 새로운 순이 나오기를 소망하면서 기다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작디작은 감격스러운 한 사람을 사랑하자.2. 균형의 이해: 들음에서 시작하기‘센터처치’라는 제목은 극단으로 향하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다양한 태도들’을 한데 모아 중심에 붉은 원으로 센터를 그려 넣은 도식에서 따온 제목이다. 쉽게 말하면 중심을 잃지 말고 균형을 잡으라는 뜻이다. 교회가 문화를 배척하고 문화를 변화시키려 하면 안 된다는 입장, 문화에 열려 있는 입장, 문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 문화를 변혁하자는 입장 등 다양한 신념들에게 정중앙에 있는 센터를 가리킨다. 여기서 균형이라는 것은 단순히 좋은 모델들의 장점을 결합하고, 약점들을 피하며 극단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에 있는 입장들을 중앙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이들이 이 균형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쓸 것을 제안한다. 팀 켈러의 주장들을 종합해 새롭게 재정의해 보자면,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나와 완전히 다른 관점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태도’를 말한다. 동시에 ‘내가 그토록 소중히 지키는 관점의 약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회개로 나아가는 태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들고 원치 않는 에너지를 써야 하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할 수도 있다. 최근 청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시청했다. 정치, 성평등, 경제 수준, 소수자에 대한 다양한 사상을 가진 열두 명의 시민이 자신의 사상을 숨긴 채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이야기다. 자유롭게 논의해서 리더를 뽑고 적정한 세금을 걷으며, 일정 기간 수익 활동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 식자재를 결정하고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과정을 연상하게 한다. 젊은이들의 생각을 훔쳐보려던 의도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공동체가 놓치고 있는 예상치 못한 중요한 메시지들을 봤다. (1) 양극단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함께 사랑하며 공존할 수 있다는 것, (2) 인격적인 대화를 바탕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오만과 극단적 고집을 피할 수 있다는 것, (3) 서로 눈을 보고 이야기하며 자주 모이는 것이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4) 사랑과 긍휼에는 사상적 다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 등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관점을 변호하다가 그 관점의 사람들을 크게 이해하게 되는 지점이었다.또 다른 예로, 요즘 출판업계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대화집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시장통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서부터 고집스럽게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인터뷰까지, 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가들이 오늘날 이렇게 각광을 받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연기 미학을 깊이 연구하는 배우들의 인터뷰집에서 한 배우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다가 상대방에게 말했다. 요즘은 서로의 연기와 작품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데 “내 작품을 보았을 뿐 아니라 뒷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사람은 듣는 태도에 마음이 열린다.‘잘 들으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소중이 쌓아 올린 가치관을 몇 개 무너뜨리라는 것도 아니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뜻이다. 들음으로써 내 생각 안에 거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죄의 문제를 보라는 말이다. 들음으로써 상대방의 약함과 강함을 이해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는 뜻이다. 들음으로써 나만의 복음의 맥락화를 더 견고하게 하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듣고 배움으로 좋은 복음의 습관을 형성하기를 바래 본다. 균형을 이해하는 일은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3.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디폴트로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기본값으로 놓아야 한다. 한 사람이 유기적 교회가 되고, 교회가 균형 잡힌 문화관으로 폭 넓게 들으며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복음전략이 기도가 되게 하고 문화 속에서 순결한 신부로 버티는 모든 순간이 찬양이 되게 하라는 말이다. 기독교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보이는 성장을 추구하고자 하는 탐욕의 일이 쉽게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개인 내면의 영성 형성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를 이어가며 틈틈이 한 사람의 내면적 진정성을 논하고 있다. 짧다고 간단한 언급이라고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보다 앞서는 것은, 만약 그것이 성경을 가르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헌신과 봉사라도, 우상이 된다. 센터처치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기도 같은 책들과 같이 읽어야 하며, 기도와 순종으로 진리를 찾아내야 하는 보물 지도와도 같다.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생생히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일상생활에서 그의 사랑과 긍휼과 정의를 실천하고,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우상과 죄를 볼 수 있고 다룰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길이 때로는 이해 가지 않아도 친밀감과 믿음으로 따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의 삶이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공동체를 꿈꾸며 서 있다. 녹록지 않은 그 성장의 장으로 그렇게 또 나를 밀어 넣는다. 그러함에도 더불어, 함께 갈 이유, 그것은 복음의 본질 때문이다. Soli Deo gloria.
세속 도시를 복음으로 환대한 기독교 변증가, 팀 켈러
by 이춘성
2024-05-16
팀 켈러, 1950.9.23. - 2023.5.19 환대, 복음을 담는 빈 그릇 기독교윤리학자 크리스틴 폴(Christine D. Pohl)은 타인을 위해 빈 공간을 남겨 두는 것을 환대라고 정의했다.[1] 이 정의는 그녀의 독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이어져 온 환대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담고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환대의 개념은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사랑채’라는 공간이 있어 손님을 위한 방을 구별해 왔다. 사랑채는 대문 옆에 위치하여 손님이 드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 독채를 말한다.신약성경에서도 사랑채와 유사한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날 밤, 누가복음 2:7에서 언급된 카탈리마(κατάλυμα, katalyma)가 바로 그 공간이다. 사실 카탈리마는 오랫동안 ‘여관’으로 번역되어서 그 원래 의미와 달리 이해되었던 대표적인 오용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거처를 구하는 모습을 표현한 많은 그림이나 연극 속에는 요셉 가족을 박대하는 야박한 숙박업소 주인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카탈리마는 실제로는 중산층 이상의 집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손님을 위한 작은 방(게스트 룸)을 의미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을 주고 묵을 여관이나 호텔 방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사랑방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랑방을 둘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집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요셉과 마리아를 환대할 수 있는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이름 없는 가난한 가족이 비좁은 자기 집으로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 그리고 곧 태어날 태아였던 예수님을 환대했던 것이다. 그 집은 너무 가난해서 사랑방을 둘 여력조차 없었고, 가축을 따로 구별해서 기를 축사도 없어 주방 옆에서 가축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기 예수님은 바로 이곳, 이름 없는 가난한 가족이 가족 중 누군가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마련해준 환대의 빈 공간에서 태어나셨던 것이다.성경은 환대를 남는 방이 있는 경우에만 할 수 있는 선택과 기호에 따른 자유로운 영역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 가득 찬 곳에서도 반드시 비워둬야 하며, 가난한 이의 빈 공간이나 바쁜 이의 짧은 여가 속에서도 베풀어야 하는, 당위와 규범의 윤리로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실체인 예수님이 이러한 환대 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이 베푼 환대의 빈 공간 안으로 처음 오셨기 때문이다. 환대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이다. 크리스틴 폴은 기독교 환대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겼다. 환대의 신비는 아주 평범한 활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자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저는 종종 거룩한 땅을 걷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안에서 우리가 환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수록 생명과 희망, 은혜를 위한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되었습니다.[2]팀 켈러의 세속 도시를 향한 환대환대라는 주제를 떠올리면, 흔히 낯선 사람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크리스틴 폴의 말처럼 환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는 낯선 사람들에게 생명과 희망, 은혜의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했듯,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는 것 이상 더 큰 환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년 동안 복음을 담는 빈 그릇인 환대의 원래 목적에 충실했던 한 인물을 떠올리라면, 작년 이맘때쯤 돌아가신 팀 켈러 목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분을 떠올리실 분도 계시겠지만, 팀 켈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이 그가 30년 넘게 사역한 뉴욕과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켈러는 뉴욕의 빈민이나 노숙자, 9/11 테러 이후 심리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사역도 했지만, 그의 주된 사역은 세속적이며 회의적인 뉴욕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혹시 이러한 사역 대상의 특수함 때문에 그의 복음 전도 방식 또한 특수한 방식일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이는 큰 오해다. 켈러의 복음 전도는 성경이 가르쳐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던 그 보편적인 방식, ‘환대’였기 때문이다. 더 많은 생명과 희망, 은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환대의 원리는 켈러의 복음 전도와 기독교 변증의 가장 확실한 목적이자 이유였다. 팀 켈러의 환대가 뉴욕이 아닌 한국에서도 필요한 이유 어떤 분은 켈러가 뉴욕의 지성인들에게 베푼 지성적 환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질문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먹고 자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이내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굶주림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영혼의 양식이 결핍되어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교회는 먹거리와 주거의 안정을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일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산업화를 이룩했지만, 1990년대 초반 산업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후부터 한국의 자살률은 급격하게 치솟아, 2008년 이후로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유독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에는 하루 평균 36.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3]또한, 건국대학교 이관후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초저출산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학자가 한국의 초저출산의 원인이 극도의 경쟁 문화에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4] 이것은 1990년대 이전의 생존을 위한 경쟁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현재 한국 사회의 극도의 경쟁 문화는 산업화 동안 우리가 소홀히 해 왔던, 정의, 도덕, 진리의 빈 공간에 타락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가 들어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산업화의 성공으로 인해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경험한 자본과 소비 문화는 현대의 한국인들로 하여금 조금의 결핍에도 견딜 수 없는 심각한 허기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를 채우기 위해, 오늘날 한국의 모든 세대는 심각한 경쟁과 극도의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가장 큰 미덕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다음 열차를 기다려도 된다고, 여행의 참된 목적은 열차에 오르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 모두가 진정한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 속 승객처럼 목적지 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의 시민들과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목적,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이 대한민국에도 필요한 핵심 이유이며, 켈러의 기독교 변증이 갈바를 모르는 현대인을 위한 진정한 환대인 이유이다. 팀 켈러와 함께하는 삶의 목적을 찾는 여정, 기독교 변증 켈러는 약 3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문화와 예술이 번성하고 금융과 IT 등 최첨단 산업이 집중된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설국열차”식의 극단적인 경쟁 문화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세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목적지 없는 여행처럼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들은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켈러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뉴욕 맨해튼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재활용 박스에 버려진 낡은 옷과 신발을 걸친 채, 거리 한복판에서 자신감 넘치게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언뜻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다. 주변에서는 이런 켈러의 시도에 바보짓이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구원자라는 주장을 하지 말고, 기독교를 일종의 인문학화하여 거부감 없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라고 충고했다. 또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관용적인 종교라고 선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켈러는 이 모든 충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롱받는 낡고 오래된 옷을 벗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낡은 옷을 입고 우스꽝스럽게 걷는 켈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옷장 속 깊이 숨겨 둔 옛 옷을 꺼내 입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팀 켈러가 지난 30년 동안 뉴욕에서 보여준 복음 변증의 역사이고 기적이었다.켈러의 복음 전도는 포스트모던 세상이 재활용 박스와 옷장 깊숙이 처박아 둔 삶의 목적, 윤리, 도덕, 진리와 같은 낡은 가치들을 되살리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는 뉴욕 맨해튼에 세운 리디머 교회를 통해 이러한 사역을 20년 넘게 해왔으며, 이런 그의 노력은 2008년에 출판된 The Reason for God(살아있는 신)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성과로 이어졌다. 사실, 기독교 변증의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 The Reason for God의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 이유는, 이것이 20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프란시스 쉐퍼, C. S. 루이스, G. K. 체스터튼 등이 쓴 책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켈러의 책 속에는 17세기에 살았던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3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기반한 변증은 켈러의 변증과 저작의 뼈대에 해당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켈러의 기독교 변증은 정말 낡을 대로 낡은, 그야말로 먼지 풀풀 나는 오래된 과거였다. 그런데 켈러는 이것을 21세기 현대인을 위한 오래된 미래로 바꾸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 기적의 비결을 한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목사의 소명첫째는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켈러의 목사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그는 The Reason for God의 성공 후에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켈러의 전기 Timothy Keller: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Formation(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을 쓴 콜린 핸슨에 따르면, 켈러는 그의 변증에 대한 피드백을 주의 깊게 검토한 후에, 새로운 연구를 바로 시작하였다. 당시 켈러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고, 대장암에서 갓 회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2004년부터 버지니아 대학교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결성한 도그우드 펠로십(Dogwood Fellowship)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헌터를 통해서 세속화 이론의 대가인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 현대 덕 윤리의 대가인 철학자 알래스데이어 매킨타이어, 신 프로이트 심리학자이며 사회 비평가인 필립 리프, 종교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 등 세계적인 학자들의 작업을 접하고 읽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찰스 테일러의 역작 A Secular Age을 두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이러한 열정과 연구의 결실로, 켈러는 2016년 Making Sense of God(답이 되는 기독교)을 출간하였다. 이 새로운 변증서는 그의 첫 저작과 비교할 때 방법론은 비슷하나, 윤리학과 도덕철학 부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켈러는 그의 새로운 변증서를 통해서 삶의 목적과 윤리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전의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미 시도한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켈러는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다양한 철학, 문학, 심리학, 과학, 비평 이론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뉴욕의 청중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꽉 막힌 잔소리가 아닌 매우 중요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사실임을 성공적으로 설득하였다. 또한 그가 죽기 6개월 전에 출판된 호주 출신 철학자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이 쓴 세속적 사회와 문화 비평 이론에 대응해서 성경을 통해 사회를 비평하기 위한 이론서인 Biblical Critical Theory을 투병 가운데 미리 읽고, 이 책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기까지 하였다.이러한 연구자로서의 모습은 켈러를 전문 학자로 오해받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켈러는 매주 설교를 하고 교회의 실무를 책임져야 하는 바쁜 현직 담임 목사였다. 그는 매주 설교를 고민하고, 성도들을 만나며, 교회의 크고 작은 일과 행정 절차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뉴욕 맨해튼 중심에서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성도들을 위해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매일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코로나 시기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와 함께한 시편 묵상을 여러 사람과 온라인으로 나누었다. 또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에도 성실하였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어느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그는 단 한 번도 휴가지에서 온전히 쉼을 누린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에 앉아 있을 때도, 한 손에는 휴가 후에 만날 구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전할 메시지와 관련된 책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켈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글을 남겼다. 아마도, 그를 쉴 수 없게 만든 것은, 그가 목사라는 소명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켈러는 목사라는 소명 의식으로 세속의 방황하는 영혼들을 끝까지 환대하였던 것이다. 그 결실이, 그의 두 권의 기독교 변증서였다.복음을 위한 여백둘째로 켈러는 항상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빈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겸손과 열린 태도는 켈러의 사망 직후에 그를 추모하는 수많은 반응과 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작년 5월 19일 켈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 것과 동시에, 미국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인 뉴욕 타임스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성공회 여자 신부인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 리더가 어떠해야 하는지 나에게 보여 주었다"라는 제목의 컬럼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하였다.[5] 그 내용을 보면, 팀 켈러는 자기와 다른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친절했으며, 그들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존중과 친절함이 무신론자의 논리보다 더 빛나는 논리가 되어 그의 설교를 듣고, 그를 만났던 불신자들을 복음으로 설득하고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티시 해리슨 워런은 보수적인 신학의 장로교 목사이며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켈러와 대화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이러한 차이로 무시당하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팀 켈러의 가장 큰 매력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손한 인격과 환대의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켈러의 매력은, 그가 사망한 후 석 달 뒤인 8월 15일에 열린 추모 예배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추모 예배의 장소는 리디머 교회가 아닌 뜻밖에도 로마가톨릭 성당인 뉴욕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이었다. 그 이유는 그를 추모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개신교 장로교인만이 아닌 로마가톨릭, 성공회, 감리교, 자유주의자, 불신자 등 다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켈러는 죽음을 통해서도 복음을 담는 환대의 빈 그릇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팀 켈러를 추모하며마지막으로, 팀 켈러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정확히 1주년이 되는 5월 19일은, 한국의 많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정해서 기념하는 주일이다. 아마도 그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그를 일생의 영적인 스승으로 기리는 물결이 마치 들불처럼 번져갈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켈러는 자신의 추모 일이 위대한 스승과 신앙의 영웅을 칭송하는 날로만 기억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끝까지 세상과 세속 도시를 복음으로 환대하였듯,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세속 도시의 낯선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통해 생명과 희망, 은혜의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기독교 변증의 환대를 실천해 주기를 원하지 않을까?1. Christine D. Pohl, Making Room: Recovering Hospitality as a Christian Tradition (Grand Rapids, MI; Cambridge, 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9), xiii. 2. Ibid. 3. https://www.koreaherald.com/view.php?ud=202312260006074. https://koreanchristianethics.com/저장소/15745. https://www.nytimes.com/2023/05/28/opinion/tim-keller-appreciation-christianity.html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3) ‘선교’
by 문대원
2024-05-03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세 번째 키워드는 선교(mission)입니다. 제3차 로잔대회의 공식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은 선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복음화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그를 대적하여 반역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타락한 인류를 자신과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선교는 교회가 감당하는 여러 가지 사역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선교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사랑과 구원을 알기 원하시고, 그에게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은 편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그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선교의 핵심인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변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시대에는 공적 영역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고 설득하는 변증이 중요한 전도의 방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진리(특별계시)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일반계시)를 총체적으로 연구하여 선포할 때 변증적인 전도가 가능합니다.로잔 운동은 그 시작부터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협력적 관계임을 강조해왔습니다. 로잔 언약 제5항은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라고 고백합니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한다고 빵을 주지 않는 선교사는 없을 것이고, 복음을 도외시하고 빵만 주는 선교사도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궁극성”(ultimacy)이라는 개념이 “우선성”(priority)라는 개념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선교사역에서 항상 첫 번째 임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순서를 논쟁하는 것보다 이 두 가지가 지향하는 동일한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선교 사역의 목표는 소망 없는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서 선교사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타내야 합니다. 선교사는 깨어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복음의 힘을 적용해야 합니다. 동시에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교사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를 시대적 상황에 민감한 형태로 증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는 항상 지역 문화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로잔 ‘대위임령 현황’의 네 가지 주제
by Trevin Wax
2024-04-29
올해 9월, 로잔운동이 주최하는 제4차 세계복음화 국제 대회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오천 명의 참가자가 한국에 모일 것이다. (동시에 수천 명이 위성 사이트를 통해 이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올해는 존 스토트가 주도하여 작성된 로잔언약을 발표한 제1차 로잔대회의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문서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전 세계 복음주의자를 하나로 만드는 구호로 남아 있다. (이 선언문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인용문을 참조하라.)대위임령 현황로잔운동이 전 세계 백 명이 넘는 기고자가 작성한 수십 개의 차트, 그래프, 그리고 에세이로 구성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를 이번 주에 발표했다. 현재의 추세에 비추어 세계의 기독교를 바라보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드러내는 복음주의 선교 노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다중 기고자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이 보고서도 여러 형태가 혼재되어 있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환상적인 에세이가 있고, 새로운 지평을 열기보다는 현 상황을 요약하는 중점을 둔 에세이도 있다.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는 에세이도 몇 편 있고, 더불어 로잔언약을 확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학 영역으로 방향을 트는 글도 있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다음 네 가지 주요 주제, 즉 현대 세계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는 선교의 네 가지 측면을 발견했다.1. 다중 중심 선교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실린 이 그래프는 1900년에서 2050년까지 기독교 지역 분포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고 유럽과 북미에서 쇠퇴한다는 사실 은(이미 마크 놀과 필립 젠킨스 등등이 지적했다) 이제 비밀도 아니지만, 이 그래프는 변화의 중요성을 포착한다. 다른 게 아니라, 2050년에는 아프리카가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것이 타문화 선교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Decio de Carvalho, Larry 및 Stephanie Kraft, Stephen 및 Rosemary Mbogo가 쓴 에세이 “다중 중심 글로벌 선교(Polycentric Global Missions)”는 오늘날 선교 노력의 방향이 “모든 사람에서 모든 곳으로”라는 측면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Allen Yeh의 중요한 작업을 기반으로 한다. 점점 더 우리는 전통적인 지리적 범주를 뒤집는 전도와 사회 사역의 협력을 목격하고 있다. 같은 국가 내 다양한 교차 문화 선교사에 관한 Bong Rin Ro, Babu Karimkuttikal Verghese, 그리고 Fenggang Yang가 쓴 “아시아의 부상”을 포함한 여러 에세이에서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확인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도 선교사의 60퍼센트 이상이 인도 내에서 일하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 집단에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관계적, 재정적 협력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2. 조직의 재건에세이를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북반구에서 발생하는 (종교 조직을 포함한) 제도에 대한 신뢰의 약화로 인해서 복음 전도의 효율성이 방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Andrew Love, Kevin Muriithi Ndereba, Mary Jo Sharp는 복음의 객관적인 진리 주장에 대한 종교적 다원주의의 도전을 제시한다. 그들의 훌륭한 에세이에 이어서 제자도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정직함과 성실성(integrity)을 제시하는 Manfred Kohl, Lazarus Phiri, Efraim Tender의 글이 따라온다. 많은 교회 지도자의 위선과 일부 교회와 조직의 부패를 애도하면서, 이 저자들은 하나 같이 다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정직함과 성실성을 나타내는 데에서 실패하거나 우리의 삶 전체와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일관성을 드러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결코 복음을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진리라는 주장을 높이 들고 도덕적 상대주의의 구름을 뚫고 나가기를 열망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말이 아니라 조직의 건강함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정직하고 성실한 개인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는 이 보고서가 기독교 조직의 건전성과 부패가 많이 드러난 최근 이후의 재건을 강조한 점에 감사한다. 3. 인구통계의 변화이 보고서에 있는 차트의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북부에서 남부로의 기독교 이동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의 다른 추세(전 세계 이주율, 난민, 디아스포라 선교 등)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증가하는 인도와 중산층이 정체된 중국, 그리고 전 세계에서 눈에 띄게 생계 수준의 빈곤이 감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출산율이 감소하고 기대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현재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미치는 인구 고령화의 도래이다. 교회는 (다른 세계와 비교할 때) 매우 젊은 아프리카와 점점 더 노령화되는 유럽, 북미, 아시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변화는 시간의 스냅숏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부름을 받은 선교 지역을 살펴보라. 이런 자료는 복음 사역을 계획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더불어서 미래를 계획하는 데에 지혜를 더해준다. 4. 인류학과 디지털 세상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신학적 도전은 인류학이다. 인간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보고서는 신기술, 가상의 정체성, 성적 행동, 의학적 개입에 비추어 인류 문제를 다룬다. 몇몇 에세이는 트랜스휴머니즘, 인공지능, 젠더와 섹슈얼리티, 생명공학, 유전자 편집 같은 주제에 중점을 둔다. 인류학적인 과제에 대한 후속 조치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주제는 디지털 생활에 관한 섹션이다. 온라인 연결,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의 최근 발전에 대한 성찰, 인간의 자기 인식과 “디지털 공동체”의 디지털화가 교회와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주제를 다룬 대부분의 에세이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우상 숭배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는 인류가 처한 도전과 더불어서 인류의 독창성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동시에 조망한다. 이 모든 에세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도록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내가 깨달은 점이 있다. 디지털 시대의 사역(성경연구 참여 증가, 제자도 훈련, 교회 모임 등)은 오늘날 세상에는 자주 전시되는 환원주의, 물질주의, 기술이 초래한 인간의 평면화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그리는 인류의 모습이 주는 강력하고 전체적인 이해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 9월 서울에서 열리는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갈 협력의 열매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진다. 모든 좋은 은사를 가지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가 왕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열정과 긍휼을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4 Themes in Lausanne’s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그리스도인은 체외수정 배아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by Joe Carter
2024-04-19
지난달 앨라배마 대법원은 체외수정(IVF) 클리닉에서 생성되거나 보관된 냉동 배아는 주법에 따라 아이로 간주한다고 판결했다. 이 뉴스는 낙태 반대 운동의 확실한 승리이자 미국 전역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충분히 기뻐할 가치가 있는 소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앨라배마와 다른 주에 있는 수많은 낙태 반대 입법자들은 이 결과에 열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판결이 IVF 산업에 미칠 영향 때문에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한 공화당 주 상원의원 래리 스터츠는 IVF가 가져다준 “도덕적 진퇴양난”을 인정하는 한편, 폐기된 배아는 사용되었거나 보관되는 배아에 비해서는 “매우 작은 비율”이라고 말했다. 스터츠의 말이다. “한 주기에 수정될 수 있는 난자 숫자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입법화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도덕성 여부가 아니라 의료 행위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낙태 절차의 보호를 위해 낙태 찬성 의원이 사용하는 IVF 관행을 낙태 반대 의원이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서 똑같은 논점으로 말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식 기술에 대한 수용은 IVF가 가져다준 깊은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와 씨름하는 대중의 능력보다 이미 한참 더 앞서가고 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냉동 배아 상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더더욱 그렇다. IVF라는 복잡하고 감정적인 주제를 제대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갖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해야만 하는 당사자가 경험하는 깊은 고통과 서러움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임과의 싸움은 가슴 아프고 고립된 경험이며, IVF에 대한 결정은 종종 많은 토론과 기도 후에 내려진다. IVF에 내포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주제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공감하는 마음은 신중한 윤리적 숙고의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희망이라는 현실에 기초를 둔 상태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에 대한 이해와 대응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IVF로 생성된 배아의 특성 이해우리가 다루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과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질문이다. IVF를 통해 만들어진 냉동 배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생명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꼭 학문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삶과 존엄성, 그리고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먼저, 필수 용어부터 명확하게 하자. 낙태 반대자 또는 생명 옹호자(pro-life)는 임신부터 자연사까지 인간의 생명이 법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기에 속하며, 이 입장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설득하고 싶어 한다. 이제 IVF를 통해 생성된 냉동 배아의 특성을 살펴보자.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에게 나는 냉동 배아라는 존재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는 발달의 가장 초기 단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생명이다. 이 생명은 지금 자궁 밖에서 가사 상태(suspended animation)에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와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겠다.IVF로 생성된 냉동 배아는…1. 인간 생명이다불행하게도, 내가 주장하는 정의에서 가장 분명한 진술 부분이 가장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WORLD는 최근 앨라배마에서 근무하는 불임 의사 브렛 데이븐포트를 인터뷰했다. 그는 낙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아 성장 7일째부터 생명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믿지 않으며, 여성의 자궁 밖에서 시작된 생명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낙태를 반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해 수많은 미국인이 데이븐포트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생물학자들이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는 특정 유형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연관된 질문이 서로 뒤엉켜 있다. 특정 존재는 언제 “인간”이 되는가? 그리고 그 존재(being)의 존재함(existence)은 언제부터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정자가 인간의 난자와 수정함으로 성장과 기능적 활동 및 죽음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변화가 가능한 독특한 인간으로 창조되는 순간에 인간의 삶은 시작한다. 이것을 “수정 관점”이라고 한다. 수정은 흔히 임신이라고도 불리며,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임신 순간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생물학 분야에서 이러한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Issues in Law & Medicine에 발표된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058개 학술 기관의 생물학자들에게 인간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 질문했을 때, 96퍼센트(5,577명 중 5,337명)가 수정 견해를 긍정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볼 때, 데이븐포트의 견해와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해 그와 동의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고서의 내용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조사한 두 연구에 따르면 수정 관점은 공중 보건 및 IVF 전문가가 보유한 가장 대중적인 관점이었다.”수정 관점은 단지 상식적인 견해가 아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한 선도적인 과학적, 그리고 경험적 관점이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의미인지 이 구절이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학자가 매우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 왔다. 오늘 내용과 관련해서, 굳이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 용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동의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과연 이 용어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는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는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확인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는 근거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인간 그룹에도 같은 배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오늘날 낙태 반대 그리스도인은 이 위험한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3. 발달의 가장 초기 단계에 있다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 발달은 인간의 수명에 걸쳐서 발생하는 연대순 과정을 설명한다. 이 과정은 인간이 존재하게 될 때(수정)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방해를 받지만 않는다면 발달 단계는 일반적으로 태아기(출생 전 단계), 유아기(신생아부터 1세까지), 유아기(1-5세), 아동기(3-11세), 청소년기(12-18세), 성인기(18세 이상) 등 광범위한 범주를 거쳐 진행된다. 모든 배아는 태아기 단계에 있다. 이 배아 단계는 수정 시점부터 임신 8주 말까지 이어지며, 이때 발달 상태가 태아 단계로 전환된다. 한때 배아로 묘사되었던 생명이 태아로 바뀐다. 항상 인식되어온 발달이 내포하는 광범위한 단계에 비해서 각 단계가 내포하는 도덕적 가치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기에 그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와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나서야 인간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더 넓은 범위의 인간 발전에까지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대부분의 이교 문화에서는 모든 성인이 똑같은 삶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아이들의 생명은 별로 가치가 없었으며,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일 권리가 있었다. 기형을 갖고 태어난 신생아는 아예 인간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버려졌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이교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그러한 견해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AD 313년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생아 보호법을 시행했고, AD 374년 발렌티니아누스는 영아살해를 금지했다.안타깝게도 태아기 인간을 보호하는 법률은 뒤처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임신 후기에 태아를 죽인다는 생각은 근거를 잃고 있으며, 미국 성인의 대다수(56%)가 낙태의 합법화 여부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임신 기간을 꼽는다. 물론 생명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은 발달의 모든 단계에 걸친 생명의 신성함을 믿는다.4. 자궁 밖 가사 상태에서 살아 있다가사는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의 중요한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 배아의 경우에 이 상태는 배아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극도로 낮은 온도의 냉동 보존 과정을 유지함으로 이뤄진다. 이 상태에서 배아는 인간 발달의 정상적인 단계를 계속할 수 없다. 단지 이 과정 덕분에 정상적인 거주지인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도 배아 단계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냉동 보존 이전까지 자궁 밖에서 존재하는 배아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IVF를 통해 배아를 생성하면 이것이 가능해졌다. 그럼 이것이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변화시키는가? 전혀 아니다. 윤리학자인 크리스토퍼 톨레프슨의 말이다. “위치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 원칙과 관련하여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단지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 배아가 자궁 내에서 시작했든, 시험관으로 세포 분열을 시작했든, 앨라배마 대법원이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보육실’이라고 부른 냉동 정체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있든 관계없이, 배아는 여전히 인간이다.” 톨레프슨의 요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임신 초기 단계의 낙태에는 반대하면서도 IVF 클리닉에서 죽는 아이들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낙태 반대”를 천명하는 많은 사람의 동기가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임신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니, 더 가능성이 높은 건 낙태를 반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배아가 어디 있는가 하는 위치의 문제가 배아의 도덕적 지위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 이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와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진술의 일부를 바탕으로, 그것이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의 도덕적 고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자. 논쟁을 단순화하기 위해 성경에 뿌리를 둔 두 가지 전제만 사용하겠다. (1) 모든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롬 14:8; 시 100:3), (2)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창 1:27).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낙태 반대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 진술은 다음과 같다.1. 생명이 수정 시점부터 시작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는, 심지어 압도적인 경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다. 따라서 생명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굳이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특정한 생물학적 인간이 있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수정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증거부터 제시되어야 한다. 2. 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3. 성경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속하며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발달 단계에 따른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신 예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겪은 발달 단계 중 하나님이 유독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떤 특정한 단계의 생명이 있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배아 단계를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는 시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 청소년이나 성인의 물리적 위치가 그의 도덕적 지위를 바꾸지 않는 것처럼, 배아 단계의 인간이 있는 위치도 그 인간이 도덕적 고려나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네 가지 주장을 바탕으로 우리는 IVF로 만든 냉동 배아가 다른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도덕적 고려 사항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따라, 그들에게도 의심할 여지 없는 두 가지 자연권, 즉 계속 살아갈 권리와 방해받지 않고 생물학적 발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첫 번째 자연권에 대해서는 일부 예외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고의적인 살인과 같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러 생명을 상실하지 않는 한 사람은 생명권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배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두 번째 권리에 대한 예외는 드물고 매우 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나아가는 아이와 같이, 누구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자연적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의사가 사춘기 차단제 등을 사용하여 그러한 변화를 완전히 억제할 수 있다면, 아무리 부모의 동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시도를 극도의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아가 다음 발달 단계 (태아, 출산, 유년기 등)로 진행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도 극도의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권리를 가장 많이 침해하는 사람들은 정작 인간의 복지에 가장 관심이 있거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 즉 친부모와 불임 의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권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까지 취약한 인간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법적 보호는 도덕적 의무만큼 명확하고 명백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낙태를 반대하는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 주장에 동의해야 한다고 믿는다.1. 보호 대상으로서 인간의 지위는 절대적이거나 또는 재정의될 수 있다. 2. 절대적이라면, 생물학적 나이, 성별, 민족, 능력에 관계 없이 모든 개인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제공되는 모든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3. 재정의 대상이라면, 정의를 통제하는 누군가가 필연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생사 통제권을 갖게 된다. 다른 말로, 강자가 약자를 통제하고 노예화할 수 있다.4. 따라서 그러한 권한을 강자에게 부여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임신부터 자연사까지 인간 보호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채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자신을 “생명 옹호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연 생식을 통해 생성되었든 IVF를 통해 생성되었든 관계없이 모든 배아에까지 법적 보호를 확대해야 한다. 새롭고 또 오래된 문제IVF로 만들어진 냉동 배아를 둘러싼 논의는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과 인간 생명에 대한 문제를 직면하도록 도전한다. 그것은 사실 아주 오래된 문제의 새로운 형태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전에 미국의 많은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낙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거나 또는 특정 조건에서는 합법적 낙태를 받아들였다. 남침례교 총회는 나중에 Roe v. Wade 판결로 성문화된 특정 조건을 들먹이며, 거기에 부합할 때는 심지어 낙태를 합법화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낙태의 끔찍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생명의 신성함에 헌신한 신자들이 태아를 옹호하면서부터였다.오늘날 IVF로 만들어진 수십만 개의 냉동 배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비슷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지금 지혜를 구하는 마음, 진리에 참여하는 마음, 그리고 모든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정신을 가지고 냉동 배아라는 복잡한 문제를 헤쳐 나가려는 진정한 생명 옹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수정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순종할 용기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절실하다. 그렇게 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경외롭고 경이로운 존재로 만드신 창조주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ow Christians Should Think About IVF-Created Embryos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문대원
2024-04-05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두 번째 키워드는 ‘복음주의’입니다.근대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과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그 역사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역과 교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 복음주의를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영국 스털링 대학의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 교수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네 가지 핵심 요소로 규정했습니다. 이른바 “베빙턴의 사각형”이라 불리는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징은 성경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으로서 로잔의 공식 문서들은 이 네 가지 복음주의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성경주의(biblicism)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관으로, 고등비평에 기반한 자유주의 신학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자 절대 권위로 강조하며,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기적과 부활을 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로잔 언약 2항은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임을 강조합니다. 로마가톨릭과 WCC가 타 종교 안에도 구원의 은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대조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단언합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유일한 신인(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회심주의(conversionism)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회심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바른 교리를 머리로 믿는 지성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전인적인 경험입니다. 마닐라 선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전도에 있어서 절대 필요하며,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나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합니다.행동주의(activism)는 아직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전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판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합니다. 로잔 언약 6항은 “우리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중에서 전도가 최우선이다”라고 강조합니다.19세기 이후로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D. L. 무디, A. T. 피어슨, R. A. 토레이 같은 복음주의 부흥사들은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형집회를 열었는데, 이들의 사역은 당시 교회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례로, “케임브리지 7인”(The Cambridge Seven)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젊은 선교사들은 무디의 부흥집회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깨닫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미국과 영국의 사회, 교회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확산하는 방식 또한 달랐습니다.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없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사회에서 분리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개혁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국 사회의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클래펌회(Clapham Sect)는 투철한 복음주의자 윌리엄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1) ‘세계’
by 문대원
2024-03-13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네 개의 키워드가 필요합니다. 바로 (1) 세계 (2) 복음주의 (3) 선교 (4) 운동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앞으로 총 4회에 걸쳐서 각각의 키워드가 가진 신학적, 선교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세계”라는 키워드를 살펴보겠습니다. 세계(world)는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위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창 12:3).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시내 산에서 선포된 율법의 전문(前文)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온 세계는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분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책임을 받았습니다(출 19:5-6).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은 성경이 기록된 방식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그 경전이 창시자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 쿠란은 무함마드가 사용했던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유교의 경전 십삼경(十三經)은 공자가 사용했던 중국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지만,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세계 모든 종교 중에서 유일하게 창시자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기록된 경전입니다. 헬라어는 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언어가 아니라,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공통어(lingua franca)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은 처음부터 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복음이 특정한 언어와 문화에 뿌리내린 진리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위한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 예일 대학의 라민 사네(Lamin Sanneh) 교수는 “성경 번역은 교회의 태생적 특징(birthmark)이자,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benchmark)이다. 왜냐하면 자국어 성경 없이는 현지 교회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다른 종교와 대비되는 기독교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독교에는 다수의 중심(center)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모든 종교에는 특정한 지리적 중심이 있습니다. 가령, 이슬람의 중심은 메카이고, 유대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힌두교의 중심은 인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다수의 중심을 가진 다중심적(polycentric) 종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를 중심 거점으로 해서 발전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 캔터베리, 비텐베르크, 취리히, 제네바 등 여러 지역이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앤드류 월스, 필립 젠킨스, 데이나 로버트와 같은 세계 기독교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이 한 방향이 아니라 다방향(multi-directional)으로 전파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상세하게 살펴보면, “복음의 서진(西進)”이나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과 같은 단순화된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선교 운동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에 도착하기 1세기 전에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도와 일본, 중국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계 여러 지역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하였고, 복음을 위해서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갔던 수많은 선교사의 헌신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 신앙 운동이 되었습니다.1974년에 시작된 로잔 운동은 당시 부상하던 세계 기독교의 현실을 자각하며 비서구권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목했습니다. “선교의 새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우리는 기뻐한다. 서방 선교의 주도적 역할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하나님은 신생 교회들 중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위대하고도 새로운 자원을 불러일으키신다”(로잔언약 8항). 국제로잔위원회는 리더십 구성과 참가자 선정에 있어서 현재 세계 교회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의 프로그램 위원장은 홍콩 출신의 패트릭 펑(Patrick Fung, 국제 OMF 대표)이 맡고 있으며, 다수의 아시아 선교학자와 선교 리더들이 신학 위원회와 프로그램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로잔대회를 통해서 세계 기독교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무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by Joe Carter
2024-02-16
지난 십 년간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인구통계 항목인 “무교(Nones)”가 꾸준히 비율을 높이며 두각을 나타냈다.“무교”는 종교 정체성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기존의 종교 전통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음을 나타낸다. 퓨(Pe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무교라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 17퍼센트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또 20퍼센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63%)는 단지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 없음”을 선택했다.무교 가운데 69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31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종교를 가진 미국 성인의 45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55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교는 남성(51%)과 여성(47%)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지난 50년간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0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28%)이 무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세계가 처한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종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담론 분야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교의 부상을 신앙 포기와 무종교(irreligiosity)의 증가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억할 점은 무교가 우리 주변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했다. 나디아 윌리엄스는 Cultural Christians in the Early Church(초기 교회의 문화 그리스도인)에서 이 용어가 지칭하는 이들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만, 외적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내적 생각과 동기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주변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윌리엄스의 책이 짚어주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문화적 기독교를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그것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이와 관련된 현상이며 오늘날 자신을 무교라고 규정하는 많은 미국인은 단지 수십 년 전의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유행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정체성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의 고백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는 건, 그 종교가 주장하는 명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들이 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로 무교인 사람이 가장 자주 제기하는 게 다름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다. 무교의 무려 60퍼센트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무종교를 지향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각각 83%와 78%),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단지 절반 미만(48%)이 같은 대답을 했다. 무교 중 상당수(47%)가 종교 단체에 대한 혐오가 비종교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답했다. 약 3분의 1(30%)은 종교인으로부터 겪은 나쁜 경험을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무교의 55퍼센트가 종교 단체나 종교인(또는 둘 다)을 자신들이 비종교적인 주요 이유로 언급했다.믿음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단지 추론에만 기반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기에 이런 결과는 놀랍지 않다. 팀 켈러는 인간의 지식에는 (1) 합리적/지적, (2) 경험적/직관적, (3) 사회적/실용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서 (1) “그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고” (2) “그것이 우리의 내적 경험과 일치하며” (3)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진짜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적어도 교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확고하고 활동적인 신자’에서 ‘완전한 불신자’로 변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 번째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며,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큼은 거의 확고하게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특히 종교나 정치처럼 사회 현상에 대한 믿음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실용적 측면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형의 믿음을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유행을 타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즉, 내용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클링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십대들이 점점 더 LGBTQ+라고 선언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양성애, 섭식 장애, 성전환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급증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행동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동료들에 의해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기를 얻고 널리 채택되기를 원하는 믿음, 즉 기독교의 믿음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과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참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 복음주의 신앙이 유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한다.기독교는 미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행하는 믿음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유행하는 믿음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꼬리표를 별 부담 없이 “그리스도인”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족히 또 한 번의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독교가 유행하는 믿음이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향수에 젖기 쉽다. 그러나 유행이 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율은 언제나 높았다. 나의 논제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과거에 상당수의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유가 단지 유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무교의 급부상도 철저한 무종교성의 증가 때문이라기보다는 항상 존재했던 무언가가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에 이전에 유행했던 특정 믿음을 더 유행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바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힘든 도전과 함께 상당한 기회를 함께 제공한다. 더 많은 위선을 통한 더 나은 도덕성먼저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했을 때 기독교 도덕은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물론, 기독교 도덕의 상당 부분, 즉, 인종 평등의 경우에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무시받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초기에 기독교의 도덕 원칙(특히 성과 관련된 원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높게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 결과 도덕 나침반뿐 아니라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예언서, 산상수훈, 바울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인정되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명확한 틀을 제공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존경심은 특정 행동을 억제하고 성경적 원칙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반대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도덕의 지위가 쇠퇴함에 따라 죄악된 행동에 대한 외부 제한도 그에 상응하여 침식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부패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28절)을 허용한 사회에 생길 비극이 무엇일지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사회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는 순간, 개인은 한때 통제되었던 충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던 것은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도덕 표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1973년에는 미국인의 절반 미만(43%)이 혼전 성관계를 지지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결혼 외의 성관계를 반대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불법적인 성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언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용어의 정의상 위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이 (최소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그렇다면 이런 식의 위선이 대안보다 더 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라메쉬 포누루가 주장한 것처럼 위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공 표준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그 표준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품위 있고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선은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해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이런 식의 위선을 선호해야 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에서 무교 상태로 전환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기독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에 오늘날처럼 외부의 장애물이 많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생계를 잃을 염려 없이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딤전 2:2)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기독교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으며 무교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과거 문화적 기독교 시대의 위선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 이전이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아예 무교인 사람들이 기독교의 도덕을 사용해서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전례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염소 판별기다행히도 심각한 도전과 함께 기회도 찾아온다. 이전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무교가 됨으로써 누가 “염소”인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된 신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마 7:21-23).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 25:31-33).미래에 염소들은 예수님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염소 판별기”가 1776년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누가 “염소”인지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리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심지어 도덕적인 삶도 살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염소였던 것이다(요 3:3).만약에 그런 염소 판별기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한참 전에 유행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도덕성의 쇠퇴는 수십 년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 매 단계에서 유행에 이끌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염소를 식별하고 그들을 진짜 믿는 양과 분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는 다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사실상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 존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확실한 전도 대상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무교 현상을 일종의 자체 식별이 가능한 염소 판별기라고 생각하자.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양들 사이에 숨어서 거듭나지 않은 염소로 남아 있던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짜 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도가 훨씬 더 쉽게 되었다. (아무 목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또는 단편 소설 계시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물어보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게 쉬운지 아니면 독선적이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듭나지 않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전도하는 게 쉬운지 말이다.)무교의 약 44퍼센트(무신론자의 73퍼센트 포함)는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종교를 가질 시간이 없어서 비종교를 택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필요를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종교 정체성의 새로운 변화는 전도를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기독교에서 훨씬 더 정직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무교로의 전환은 복음을 나누기 위한 보다 명확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이 잠재적으로 문화적 가식의 장벽 없이 복음의 진리를 듣는 데 더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기회이다. 이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양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데, 그 결과는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과 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부는 좋은 땅에 심겨진다. 이 비유에서 무교는 문화적 기독교라는 가시가 제거된 땅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복음이 역사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복음의 씨앗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뿌리고, 그중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 맺기를 믿는 것이다. 동시에 무교의 부상은 교회 내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화적 형태의 기독교를 장려하는가? 우리 교회가 삶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가? 무교의 증가는 교회가 제자를 삼는 핵심 사명(마 28:19-20)을 다시 다짐하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유행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기회이다. 무교의 증가를 보며 실망해서도 또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 전도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전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앙을 삶에서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더 신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더 큰 열매를 주실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고전 3:6),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진리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대답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원제: ‘Nones’ Have Always Been with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대회와 대회 사이에 ‘운동’이 있습니다
by 문대원
2024-02-0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대규모 국제 선교대회의 시의성과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이나 되는 선교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15-20년마다 열리는 로잔 대회(Lausanne Congress)를 일종의 국제 이벤트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로잔 운동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라면 선교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다들 인정할 것입니다. 일례로,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사역했던 필자는 미국 단체가 설립한 국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섬겼습니다.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부룬디로 떠났지만,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아와 임산부를 위한 사역, 낙후 지역 식수 개선 사업, 현지 교회 건축 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수많은 필요가 있는 선교지에서 순전히 영적인 사역만을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과 더불어, 취약 계층을 돌보는 사역,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사역,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 등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 책임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역은 선교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선교 현장에서 가장 의미 없는 질문은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입니다. 복음과 빵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선교의 범위가 광대하고 선교지의 필요는 다양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한 연합과 협력은 필수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1792년에 출간된 그의 책 ‘이교도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에서 대륙별로 세계 선교 현황을 제시하며, 전 세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 현황과 전략을 논의하는 국제 선교대회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1810년에 이러한 선교대회가 열리기를 희망했는데, 그의 제안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개신교 최초의 국제 선교대회는 아니었습니다. 1888년 런던 선교대회(Centenary Missionary Conference)와 1900년 뉴욕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가 있었지만, 에든버러 대회는 이전 대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선교회(총 160개)가 참여했습니다. 에든버러 대회에 참석한 1,200명의 대표단은 각각의 선교회에서 선정했는데, 이는 세계 교단의 기구적 연합이 아니라 실제 선교사들의 협력 사역을 꿈꾸었던 의장 존 모트(John Mott)의 비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에든버러 선교대회에는 총 8개의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1)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복음 전파, (2)현지 교회와 현지 지도자, (3)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육, (4)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메시지, (5) 선교사 준비, (6) 선교회 본부, (7) 선교와 정부의 관계, (8) 연합을 위한 노력. 에든버러 대회 이후에도 활발하게 사역을 이어간 8개의 위원회는 선교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불리는 19세기를 지나온 당시 선교 지도자들이 세계 복음화에 대한 어떤 비전과 전략을 품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이 세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담대한 비전을 선포한 에든버러 선교대회는 국가와 교단을 넘어선 새로운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영국 성공회교회, 독일 루터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같은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시대에서 국가를 넘어선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 시대로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든버러에 모인 선교 지도자들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920년 창설)이나 국제연합(United Nations, 1945년 창설)보다 훨씬 전에 전 세계가 하나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창했습니다. 보스턴 대학의 데이나 로버트(Dana Robert) 교수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선교사들이 에든버러 선교대회를 통해서 국제화(internationalism)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가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선교 사역의 이해와 접근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구 교회와 현지 교회가 상호 존중 가운데 동반자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었습니다.로잔 대회는 15-20년마다 열리는 국제 이벤트가 아닙니다. 앞선 대회와 다음 대회 사이에 100회가 넘는 다양한 규모의 국제 포럼과 협의회(consultation)가 열리는데, 12개의 권역(regions)과 27개의 이슈 네트워크(issue networks)로 변화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선교 전략과 신학적 성찰이 공유되었습니다. 교회개척, 성경번역, 도시선교, 디아스포라, 비즈니스, 어린이, 장애인, 사회정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선교 협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될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연합체가 로잔 운동입니다.
로잔 운동, 그 시작은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_01
by 문대원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가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에서 열립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로잔 운동(Lausanne Movement)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시작되었을까요? 로잔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이라는 문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 로잔 언약은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전도의 본질, 교회와 전도, 전도와 문화 등 선교에 대한 성경적 정의와 현재 상황, 향후 과제를 복음주의 관점에서 기술했습니다. 로잔 언약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발표된 공식 문서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로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과 20세기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이 역사적인 선교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세계 150개국에서 모인 2,4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은 이 문서에 서명했습니다.제1차 로잔대회가 열렸을 당시 세계 교회는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큰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 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1968년에 열렸던 WCC 웁살라 대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정치·경제·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로 규정하며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약화시켰습니다.이러한 시대적 도전 앞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정통 신학을 확립하고, 이에 근거한 선교 운동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74년 제1차 로잔대회가 열리게 된 목적이었습니다. 1920년대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 이후 주류 사회와 거리를 두었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를 통한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연합하고자 한 것입니다.한국에서는 로잔 언약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복음의 총체성’을 강조한 선교 문서라고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미국에서는 로잔 언약을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한 ‘복음주의 선교 문서’로 이해합니다. 로잔 언약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주창된 자유주의 선교 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반증(反證)이었습니다. 로잔 언약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천명했습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우리는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식의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거부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종교간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가 선교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WCC의 입장과 명확한 차이를 보입니다.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드와이트 무디, 20세기 빌리 그레이엄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교수는 “근대 선교 운동은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맺은 최고의 열매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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