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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바라보는 눈을 간직하라
by Adam Ramsey
2019-12-10
강한 불빛이 비치면 잠시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칫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당면하는 상황들이 때로는 강렬한 빛처럼 다가와서 현실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직면한 난관으로 인해 현실 속에 빠진 나머지,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조차 잃어버리기 쉽다.개척한 교회가 건강하게 안정되고 질적 양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놓치고,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몰입될 수 있다(참조, 고후 4:16-18).이러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목회 사역을 위한 방법과 전략, 자원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방안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과 긴장 속에 있다. 이러한 방안들에는 당장 사용하여 가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론 적인 것이 많다. 필요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들로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정보가 온라인에 홍수처럼 넘쳐나기에 필요한 것을 검색하다가 지쳐버릴 지경이다.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눈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목회자의 눈을 들여다보곤 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론적인 내용을 담은 수많은 문자와 이메일을 접할 때마다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목회자의 눈을 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반응하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너무 먼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놓여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인도하고 계시는데도 말이다.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님, 내 눈에 영원을 각인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소망에 가득 찬 기대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구속의 은혜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소망으로 인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고한 기대를 하는 것이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전에 밀려오는 설렘의 순간처럼.노래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울리는 강렬한 박자처럼. 떠오르는 태양처럼.성경 말씀의 마지막 장은 우리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낙심하지 않음’과 ‘영원을 생각하는 것’을 연결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후 4:16-18).교회 개척의 초기에 있든지 오랜 시간 교회 사역을 하고 이제는 마무리를 향하여 가고 있든지, 우리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목회를 하고 어떤 전략을 사용하든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을 전하기로 한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피곤함에서 생기를 되찾기까지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후 4:16).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한다(벧전 5:1-4). 다시 말하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되면 우리는 피곤하게 될 것이다.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친절함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우리의 자녀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시험이다.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좌절은 우리 몸을 상하게 한다.매주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일은 많은 힘을 쏟게 한다.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필연적으로 피곤함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올바르게 목회하기 위한 피곤함은 성령의 부재를 알리는 표시가 아니다. 은혜의 보좌에 때를 따라 나아가며(히 4:16) 매주 안식할 수 있는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유가 있다.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하고 복음적인 목회를 하면서도 피곤함은 경험될 수 있다. 피곤하다는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목회에서 느끼는 피곤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패한 자아를 의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피곤함이다. 우리의 소망을 자신의 경험과 이상에 두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둘 때 진정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피조물과 그분의 백성들이 나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의미만은 아니다(롬 8: 19:22), 일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지속적인 힘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죽음도 이기신 그분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기억하고 살기를 원하신다.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인 만큼, 내일 당신이 겪을 어려움도 이겨내도록 돌보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으신다.상함에서 치유받기까지우리가 지금 당하는 환란은 미래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고후 4:17)을 예비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에 정직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목회의 어려움을 축소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의 소망을 최대화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큰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모든 것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배신과 비방의 말들과 실망스럽고 비열한 짓들, 실패와 함께 찾아오는 불안 등으로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극복할 때 영광의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에게 어두운 날이 다가올지라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날은 아니다. 영원성의 시각으로 볼 때 어려움은 우리를 괴롭힐 힘을 잃는다.현재의 어려운 순간을 보장된 미래를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불안은 기도로 바뀌고, 지친 마음은 용기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어려움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꺼리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며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가장 선하신 방향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어려움 하나하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는 구름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구름이 아무리 가려도 태양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지”하고 말이다.영원을 보는 시각우리는 잠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후 4:18).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영광의 날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이 기뻐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그러니 우리에게 다가올 확정된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영광의 기념일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뵙게 될 그 날을 상상해 보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그 순간에 당신은 그분의 사랑을 느낄 것이다.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찬란한 영광을 그분 안에서 경험할 것이다. 만일 그 순간 당신이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경험했던 최악의 순간이 떠올랐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이 둘을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확실한 기대를 품고 다가올 날을 맞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어디로 나아갈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더라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준비시키는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알고 있다. 그 약속으로 우리가 걸어가게 될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울 것이다.가는 길에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의 약속을 믿는 한 지금의 고난을 기쁘게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빨리 영예로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날이 올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Future Is Brighter Than You Think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소망
기대
생기
치유
에드워즈
영원한세계
설교 후에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by Dave Harvey
2019-11-26
설교자에게 있어 설교의 결론부는 조마조마한 순간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연구한 것을 온 열정을 다해 강해의 홍수 속에서 30–45분 내내 청중에게 쏟아부었다. 10–20시간에 걸친 설교 준비 시간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고, 설교자는 지금 차에 올라타 집으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매우 지쳐 있다.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말이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강단 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이는 내 경험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 설교자로 섬기면서, 설교 직후에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경계를 늦추지 말라설교는 우리의 대적에게 매주 싸움을 거는 행위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고 말한다. 죄인들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중략]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으로부터 낚아채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설교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바꾸시고, 그들이 대적들의 지배로부터 탈출하도록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에 대한 사단의 생각은 확고하다.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사단의 총에 달린 조준용 십자선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물론 연구, 묵상, 기도를 통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설교자들이 보호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설교를 마치고 나면 설교자는 탈진하여 텅 빈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설교자는 이제 폭격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육신의 옛사람도 당신을 노린다. 설교는 많은 유혹을 의미하는데,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쓰신다는 교만이 있겠고, 또한, 당신을 쓰시지 않는 것 같을 때 느껴지는 정죄감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잠 10:19), 우리는 많은 말을 쏟아 내어 설교 한 편을 전한다. 사람이 설교를 전할 때면 오류들이 넘치도록 생겨나게 마련이다. 일정 기간 설교를 해 본 사람이라면 실수가 없는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 약점들이 예배를 마친 주일 오후에 아주 친근한 방문자의 모습으로 찾아와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 문을 열어 주면 집으로 쳐들어와 당신의 평강을 해치고 당신 눈앞에서 당신의 설교를 왜곡할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고, 정죄감도 일어날 것이다. 마치 그날 전한 설교 전체가 완전히 엉망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설교 직후에 설교를 평가하면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 후에는 육신의 옛사람 및 사단으로부터 동시에 오는 공격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군인들이 적의 맹공격에 대비하듯, 우리 역시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공격 전에, 공격 중에, 그리고 공격을 당한 후에는, 언제나 복음의 좋은 소식으로 달려가라. 설교는 당신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관한 것임을 기억하라. 인류 역사에 있어, 너무 엉망인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힘을 완전히 가려 버렸던 설교는 없었다. 주님은 위대한 분이므로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자의 어리석은 말은 잊고 당신 자신의 영원한 말씀을 기억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정말 당신이 하는 설교의 질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가? 착각하지 말라. 주일 오후마다 이 사실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라.설교를 마치면, 공격에 대비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실수보다 크신 분임을 기억하라. 2. 당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공격을 받는 중에는 우리 영혼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정죄하는 생각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며 당신 마음의 문을 쾅쾅 두드릴 것이다. 또는 스스로를 높이는 생각들, 즉 당신의 자기애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올라 당신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롬 12:3)을 품어 스스로를 높이게 된다. 그런 순간이 오면, 당신 영혼의 목소리를 죽여야 한다. 설교의 결과를 주님께 맡겨 드림으로 당신의 영혼을 잠잠케 하라. 당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 당신의 생각을 고정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잠잠케 하라. 자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한 메시지에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당신의 설교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라. 정죄감이 든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사 55:11). 당신이 전하는 설교는 정확하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만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당신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내 형제 같은 목회자들이여, 당신을 덮친 적의 공격을 무시하고 탁월한 것들에 생각을 고정하라(빌 4:8).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설교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시편 말씀이다(46:10). 이렇게 해야 비난과 칭찬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이 한 설교를 하나님께 맡긴 후에는 마음의 쉼을 누리라.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려 보라. 내 경우, 설교 후에 다시 힘을 얻기까지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리곤 한다. 그 시간에 나는 책을 읽고, TV를 보거나, 잠을 청하기도 한다. 자녀들이 더 어렸을 때에는 아이들과 놀아 주면서 내 주의를 교회로부터 돌리고 에너지를 다시 충전시키곤 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한 번 하는 것은 여덟 시간의 육체노동과 맞먹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몸과 영혼을 보살펴서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 다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칭찬의 말을 건져 내기 위해 낚시질하지 말라설교를 하고 나면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흠모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때문에, 설교자는 칭찬의 말을 찾아 낚시질을 해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설교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 다시 말해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양해 줄 수 있는 반응을 끌어내는 유도 질문들을 던지고 싶어진다. 나도 셀 수 없이 많이 해 본 일이다. 옆구리를 찔러 받아 내는 칭찬만큼 피상적인 것도 없다. 칭찬의 말을 고대하며 낚싯줄을 드리웠다가 낚싯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비판’의 물고기가 걸려 올라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 낚시를 할 때는 어떤 고기를 낚을지 전혀 알 수가 없음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낚시질 이면에 숨은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설교 전달 행위에 너무나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설교가 잘 전달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마치 설교가 어떻게 “느껴졌는지”가 하나님이 하시던 일, 하실 일에 대한 측정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기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우리 자신을 떠받치고자 한다. 일반 성도들이 직장에서 십 년 동안 받는 격려의 말들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 달이면 받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 낚시질을 멈추라. 칭찬의 말이 들려올 땐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제발, 자기 설교 팟캐스트는 듣지 말라. 자기가 한 설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주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최소 15시간에서 20시간을 그 설교 준비에 쏟았다는 것은 이미 자기 설교에 대해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정말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경험 많은 다른 목회자들 또는 성도들 중에서 당신의 인정을 갈구하지는 않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이들에게 부탁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건설적인 피드백을 달라고 부탁하라. 피드백이 오면,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 스펄전의 불만족 이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3세기 동안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족스러웠던 설교를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아마 한 적이 없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이가 ‘설교자의 황제’로 불렸던 그 사람이다. 스펄전이 자기 설교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똑같은 인간에 불과한 당신과 나 같은 이도 그리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때를 대비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Things Not To Do After You Preach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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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결과
건설적피드백
스펄전의불만족
교만해질 땐 ‘바닥’을 생각하라
by Tim Keller
2019-11-21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한 지 42년의 시간이 지났다. 슬프게도, 함께 시작했던 많은 목회자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에 그 걸음을 멈추었다. 내 생각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사역을 완주하지 못했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어느 누구도 교만을 통해 그 길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은 목회자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신학과 사역을 훈련받았던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운 이끄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신학적 훈련과 사역의 삶은 되려 목회자를 교만으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한다.이 글에서는 사역 중 우리를 교만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목회자들이여,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1. 신학적인 지식첫째는 신학적인 지식이 가져오는 자만심이다. 당신은 어쩌면 ‘바울이 신학적인 지식이 교만을 이끈다고 언급한 것은 과장된 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른 본문에서도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8:1–2)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신학적인 지식과 교만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제사 음식으로 쓰인 고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자만하게 되었다. 즉 진리를 아는 지식이 그들을 우쭐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이 가진 신학적 지식과 통찰력에 뿌듯해하며 점점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다.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진리와 당신의 관계가 단순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으로만 이어질 때마다, 당신은 사탄의 손아귀에 빠지게 된다. [중략] 진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채 연구를 하는 순간, 당신은 마귀의 희생양이 된다. 만약 성경을 연구할 때에 지도와 검수를 받아 겸손해지는 과정이 없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지 않거나, 혹 하나님이 당신을 인내해 주신 사실에 감동이 없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이루신 구원 사역의 아름다움을 놀라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강단에 서 있을 때나 혼자 연구하는 시간에 주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열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만하기 쉬운 상태이다. 이를 피하려면,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가 갖는 힘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 아닌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로 접근했던 사람들의 특징을 설명한다. 그 한 가지는, 그들이 ‘영적인 고집쟁이’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영적인 고집쟁이’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닌 교리 간의 차이에도 격하게 논쟁하고, 성경 해석이나 최근의 신학적 쟁점에 대해 자신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영적인 고집쟁이들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를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가 아닌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해 버린다. 이들은 결국 지적 자만과 그가 속한 신학 집단의 지지에 의해 교만에 빠지게 된다. 2. 거짓된 정체성두 번째 교만은 사역 중에 형성된 거짓된 정체성에서 발생한다. 목회자가 사역을 개인의 성취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사역의 부흥까지도 오직 자신이 지닌 역량의 결과로 바라보게 된다. 만약 이러한 시각으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다면, 이는 ‘능력있는 목회자’라는 거짓 정체성에 빠져든 것이다.거짓 정체성이 부르는 교만은 다음의 네 가지 모습으로 요약된다.성공에 대한 자부심사람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당신의 설교를 들을 때,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의 교회를 떠날 때에는 그것을 사적인 공격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비판에 대한 경계비판을 극도로 경계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사역은 거짓 정체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비판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목회자인지를 궁금해 한다. “당신의 설교는 별로 좋지 않아요. 목사님이 설교를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와 같은 비판이 들려올 때, 이를 마치 개인적인 공격처럼 듣는가? 만일 그렇다면 비판이 올 때 당신은 충격을 받고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것이다. 비판은 당신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거나 혹시 당신이 비판을 무시할 경우엔 그것으로부터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두려움에 대한 짓눌림거짓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두려움에 굴복당하는 비겁한 모습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비겁함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진정한 비겁함으로, 곧 복잡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비겁함과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를 무언가로 불쾌하게 하거나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가질 만한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는 비겁함이 이에 해당한다.두 번째는 가짜 비겁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너무 거슬리거나 심히 가혹하여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도록 하는 비겁함으로, “보라, 나는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행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행위는 사역과 당신을 동일시할 때 나타난다.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 안에 있음을 보여 준다. 비교에 대한 질투당신이 거짓된 정체성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마지막 신호는 비교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이다. 동료 목회자를 통한 교회의 부흥을 바라보며 시기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 목회자가 자신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혹 신학적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은근하게 무시하고 있던 경우라면 당신의 질투는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비교하며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다는 거짓 정체성에서 비롯된 교만일 수 있다.3. 사역 안의 위선당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이야기하는 방법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척하면서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그리고 크리스천이 얼마나 훌륭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자의 삶은 이를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은 사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과 실제로 친밀해야만 하거나 아니면 친밀한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며, 마치 당신이 실제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말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믿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는 당신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날 밤, 주님은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3:21). 여기서 보인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했다.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떡을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 유다는 영향력 있는 사역자였다. 하지만 내적으로, 그의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내면의 삶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삶을 더 가꾸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 에서 비록 유다가 구원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역의 유산을 원치 않는다.하지만 여기에서 위선이 시작된다. 사역은 당신을 더 나은 크리스천이 되도록 하거나 아니면 더 나쁜 크리스천이 되는 길로 인도한다. 사역을 통해 당신은 고집스러운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더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역은 당신으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강권하며 연약함 가운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즉, 사역은 당신을 주님께로 인도하거나 혹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유다의 예처럼, 당신이 가꾸는 삶이 무엇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교만을 극복하라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까?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바울의 상황을 기억하라. 바울은 자신에 대해 진정한 사도가 되기엔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과 선생들을 만났다. 바울은 스스로에게 사도로서의 자격이 분명하게 있다고 반박했는데, 이는 우리가 예상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모든 자격 요건의 조항을 뒤집어 버린다. 그가 갖춘 신학적인 지식, 위대한 성공 혹은 겉으로 드러나는 완벽한 삶을 자랑하는 대신에, 바울은 자신이 경험했던 모욕과 고난 그리고 쫓겨났던 경험을 자랑한다.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와 함께 하심을 주장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무릎 꿇도록 행하신 모든 일들을 바라보라고 우리에게 권면한다. 목회자들이여, 당신의 교만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생각해 보라.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곳까지 하나님이 당신을 이끄신 모든 방법들을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 더 바짝 붙어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실패와 낙심 그리고 연약함이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에 못 박도록 하라.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참된 목회자가 되어 결승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Ministry Can Make You Conceited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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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교만
바닥
마틴로이드존스
바울
고린도후서
신학적인지식
거짓된정체성
위선
이제 더 이상 불평 금지!
by Larry Osborne
2019-11-12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당회 모임 하나를 기억한다.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한 대형 교회 목회자의 강연을 들은 후에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로 막 돌아왔을 때였다. 그 목회자는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고유한 도전과 어려움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다.그 강연을 요약하자면, 목회 사역은 가장 힘든 일이며, 위태로운 일이 끝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의 적은 악의 전형이며, 음흉하고, 사나우며, 궁극적으로 속이는 자이다. 우리는 오해받기 쉽고, 우리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다. 우리의 보상은 대부분 나중에 온다. 그리고 우리는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기를 요구받는다.그때 나는 목회의 아주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기에, 그의 말은 내 관심을 끌었다. 시편 73편의 아삽처럼, 목회 사역 자체가 가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을 때였기 때문이다.그 다음의 당회에서, 나는 그 강연자가 한 말을 당회원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기도를 요청하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실제로 나는 그저 약간의 공감과 이해를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연민을 구하는 부분에 이르기도 전에, 당회원들 중의 한 명이 내게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그 장로는 베트남 전쟁이 있을 때 세 번이나 복무하고 은퇴한 해병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게 싸웠고 전쟁의 공포와 대학살을 직접 경험했다. 더군다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다. 영웅에 대한 환영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내 말은 연민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멈추게 한 것은 옳았다. 나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불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회의 난관과 중압감에 대하여 불평할 권리도 없었다. 물론 목회 사역에 나름의 도전과 어려움이 있지만, 베트남이나 팔루자 전장에서의 복무와 비교하면 식은 죽 먹기이다. 사실, 원죄가 인간에게 생긴 이래로, 모든 일은 난관과 어려움 투성이였다. 잡초가 없는 정원은 없듯이 말이다.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그는 나의 사과를 잘 받아들였다. 그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목회가 마치 훌륭한 특권이라기보다 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목회의 난관과 짐에 대한 불평을 다시는 공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불평하지 않기”라고 부른 규칙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기로 했다. 그것은 다음의 성경 말씀과 지침을 기억하는 것에 근거한다. 1. 리더십은 선택 사항이다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을 평생의 제자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자로 부르셨다. 하지만 공적 리더십은 선택 사항이다. 나는 공적으로 목회 사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이 사역을 공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할 수 없다면, 물러나거나 잠시 중단하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책임을 맡을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더욱 잘 섬김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목회는 “즐거움으로” 그리고 “근심으로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히 13:17). 그것은 난관이 어렵지 않은 척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고 우울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겨도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러면 그분이 섬김을 제대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독자의 자질을 나열할 때, 디모데에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적용하라고 말했다(딤전 3:1-7). 그리고 예수님이 섬김의 리더십의 길을 가르칠 때, 그것이 모든 사람에 해당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호소하셨다(마 20:25-28). 이것을 놓치지 말라. 리더십 역할에서 섬기는 것이 선택 사항임을 이해하는 한, 나는 불평할 것이 없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2. 섬김의 리더십은 종처럼 취급받는다는 의미이다나는 섬김의 리더십 개념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종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좀 다른 문제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진정으로 말씀하셨다.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은 종처럼 취급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이다.종이 주인을 위해 하는 일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주인은 드물다. 사실, 대부분의 주인들은 특권 의식을 가지고 종들을 대한다. 그래서 성도들 중 누군가가 나를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거나 내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으면 놀라지 말아야 한다. 목회 사역은 섬김의 영역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내가 살고 섬기겠다고 선택한 영역이다. 3. 우리의 보상은 오고 있다나는 육상 선수로서 ‘지옥훈련’(hell week)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할 수 있었다면 그 주간을 건너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간은 한 시즌 전체 게임의 전초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리고 간절함으로 해마다 계속 참여했다. 같은 방식으로 나는 목회의 일부인 ‘지옥훈련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내일의 약속으로 평가하는 법을 말이다. 주님은 그분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셨다(히 12:2). 바울은 다가올 영원한 영광의 빛에 비추어서 그의 난관과 박해를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으로 여겼다(고후 4:17). 그리고 강박에 눌려서나 혹은 이기적인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리고 간절함으로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은 목자장이 나타날 때에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벧전 5:1-4). 4. 고난은 특권이다목회 사역의 난관을 매우 웅변적으로 토로한 그 목회자의 강연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목회는 종종 힘든 소명이며, 위험한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목회는 소심한 사람이 감당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들은 한탄해야 하는 문제가 아님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영광을 돌릴 무언가가 있다. 예수님에게 고난은 저주가 아니었다. 수용되어야 하는 귀한 영예였다. 그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기셨다는 뜻이다(빌 1:27-30).목회 리더십에 기쁨이 없고 그것이 점점 짐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의 영적 패러다임이 잘못되었다는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리더십은 짐이 아니다. 목회 리더십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특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분이 나를 아들로 그리고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내가 상상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돌보고 먹이는 일을 나 같은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완전히 불가사의한 일이다.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과분하고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해 내가 타당하게 응답하는 길은 목회의 가장 캄캄한 계곡을 지나는 중에도 기쁨과 감사로 가득찬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더 이상 불평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이를 잘 지키는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eading with Joy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불평
특권
보상
제자
사역자
리더십
섬김
종
설교자여, 전인적으로 적용하라
by Matthew Harmon
2019-10-29
설교문을 작성할 때, 깊이 있고 정확한 요점을 들어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적용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흔히 본문을 힘들게 해석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마친 후에야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문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만, 그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듣는 자들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처럼 말씀을 듣고 믿는 일은,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회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져오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속적인 신앙의 성장을 이루는 원인이 된다(갈 3:1-5). 따라서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는 그들이 말씀을 듣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고후 3:17-18).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죄인을 흑암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신다(골 1:13-14).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히 반영하며 살아가게 하신다(엡 4:17-24).그러므로 성경의 특정 본문을 청중에게 적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는 일이란 설교 준비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물론 우리는 설교문을 작성하며 훌륭한 적용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습관에 빠지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더욱 ‘실제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다 못해, 성경 본문에 반응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적용을 급하게 준비할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기독교 신앙이 근거하고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메시지는 예컨대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율법주의에 기초한 자기 의를 추구하게 만들 수 있고, 그와 달리 올바른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기준을 스스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낙심한 자들에게는 그 절망을 더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경우이든, 본문을 적용하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치는 결과만을 낳는다. 그 진정한 목적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전인(entire being)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적용을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전인적인 차원의 적용을 위한 네 가지 질문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마 22:34-40). 이런 점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적용 역시도 청중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계명을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아래에 소개되는 네 가지 질문은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전인적인 차원의 적용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1.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기를 원하실까?하나님은 신자가 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셨다(고전 2:16).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생각하던 대로 사고하려는 유혹을 받는다(엡 4:17-19).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요구하신다(롬 12:1-2). 올바른 설교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주변 세상에 대한 그릇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게 한다.2.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실까?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 진리가 우리의 생활을 빚어내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믿지 않고 단순히 지적 수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되 이내 뿌리가 없어 넘어지고 마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눅 8:5-15). 이런 사람의 문제는 이해의 결여가 아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눅 8:15). 올바른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거짓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 참된 믿음을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그뿐 아니라 비신자에게 도전하여 불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요청한다.3.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기를 원하실까?이 질문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우리 행동의 근원이라고 파악한, 갈망, 의향, 감정, 의지의 결합인 ‘정서’(affections)의 변화를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그분 자신을 갈망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서 멀어질 때 악한 일을 갈망하게 된다. 올바른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악된 갈망, 의향, 감정 등을 드러낸다. 그리고 경건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정서가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지향하도록 만든다.4.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실까?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실제로 믿는 내용 그리고 갈망하는 대상을 올바로 회복시키면, 자연히 우리의 행동에도 실질적인 변화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행동과 관련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주기도 한다(롬 12:9-17). 그러나 수많은 본문은 그보다 덜 직접적인 지침을 제공하며, 구속사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해 주의 깊게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올바른 설교는 죄악된 활동이라든가 하나님의 방식에서 벗어난 행동 패턴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의 진리를 실천하도록 하여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표현될 수 있도록 돕는다.청중을 위해 적용의 모범을 보여 주기우리는 설교 시간을 통해서든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와 나눌 때마다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전인적인 적용을 보여 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1. 위에서 소개한 질문을 설교 시간에 분명히 제시하라본문 해설에서 적용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될 때, 위의 질문 가운데 한두 가지를 던지며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시는지 실제로 보여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매번 설교 때마다 모든 질문을 곧이곧대로 사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경우 설교가 불필요한 형식을 과시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각 질문을 설교 곳곳에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2. 해당 본문이 네 가지 질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라대체로 한 본문은 네 가지 질문이 다루는 적용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해당 본문의 메시지가 (야고보서 1장 19-27절에서와 같이)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거짓말이나 그릇된 믿음 혹은 악한 동기를 지적하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악된 행동을 낳게 만드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또는 해당 본문이 우리의 믿음이나 갈망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면, 그러한 내적 상태가 어떻게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야기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3. 네 가지 질문이 추구하는 전인적인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적용을 준비하라간혹 우리가 다루는 본문이 네 가지 질문의 적용을 분명히 다루고 있지 않을지라도 청중의 마음이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먼저 해당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을 취하여 우리가 그 가르침을 실제로 믿는 일에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후에 바로 그 실패가 드러내는 우리의 갈망에 대해 설명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참된 행동은 그와 어떻게 다를지를 묘사함으로써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적용할 수 있다.한 사람의 인생에 참된 변화를 가져오시는 분은 성령이다. 그런데 그 변화를 위해 그분이 사용하시는 주된 도구는 다름 아닌 올바른 설교와 적용이다. 이에 우리는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말씀을 적용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청중도 성경을 읽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할 것이기 때문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In Your Preaching, Aim for Holistic Applica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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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적인변화
피할 수 없는 비판, 어떻게 대처할까?
by Guy M. Richard
2019-10-24
리더십을 맡아 섬겨 본 자라면, 죽음과 세금만이 인생에서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비판’이다. 리더십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리더십의 역할이 공적일수록, 비판도 잦아지고 불공평해지며 그만큼 더 불쾌해진다. 그러나 결국 전장에서 적군이 퍼붓는 공격을 감당하며 그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더라도 진격을 해야 할 책임은 지휘자에게 있다.이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답변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비판을 다 피하면서 주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그분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비판에 대비할 수 있을까?’이다. 그래야만 비판이 찾아왔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 어떻게 그 공격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지를 알고 준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그 힌트를 다음 구절에서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전 7:21-22).첫 번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듣는 비판 중에 어떤 내용은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거짓된 비난과 악의를 담고 있는 험담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런 비판은 한시도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이는 거짓된 비난에 아무 대꾸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사역의 진정성을 지키고 리더십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비난에 대응해야 할 때도 있다. 사도 바울도 가끔씩 그렇게 대응했다. 특히 고린도후서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그동안 신실하게 수행했던 사역이 자칭 사도라고 높이는 사람들의 험담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그는 분명하게 대응했다(고후 11:5-6; 12:11). 그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자신의 사역을 변호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된 비난이 우리에게 쏟아질 때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런 비방을 굳이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런 비방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넘어뜨리게 하고 내면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집어삼키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는 그런 말을 무시하며 전혀 듣지도 않는 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비판이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라는 데 있다. 적어도 일부분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비판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비판도 그리 건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그런 비판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기보다, 또 그리하여 당사자를 세워 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단순히 그 사람을 공격하려는 마음에서 행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상대의 흠을 지적하려는 태도와 무례한 말투로 표현되곤 한다. 물론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그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표현되는 비판 정신과 거친 말투까지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강의안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에서 전도서 7장 21-22절에 대한 매우 유익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 제목은 ‘감긴 눈과 닫힌 귀’(The Blind Eye and the Deaf Ear)이다. 거기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의 귀를 닫고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비난과 해로운 비판이 주어질 때는 그 내용을 듣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는, 아니 최소한 그 파괴적인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감긴 눈’과 ‘닫힌 귀’로 대응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처를 아예 받지 않고자 사람들을 피해 홀로 고립된 상태에 처하거나 또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잘못된 방법으로 그 비판에 대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두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역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비판에 담겨진 파괴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그 내용을 마음에 두지 않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스펄전이 말한 ‘감긴 눈’과 ‘닫힌 귀’를 갖추어 그런 비판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두 번째로 전도서 7장 본문은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22절은 우리 각자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타인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을 받을 때, 우리 역시 그런 자세로 타인을 대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 비판을 받을 때 함께 비판하고 상처를 받은 대로 상처를 돌려주며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될 말까지 쏟아 놓으며 화를 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비판한 그 사람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까지 감수하게 된다. 심지어는 우리의 직장이나 리더십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훌륭한 리더라면, 작은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세 번째로 이 본문은 모든 비판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비판이 얼마나 과장되고 가혹하게 들리든, 거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된 비방이나 악의가 서린 험담은 예외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감긴 눈’과 ‘닫힌 귀’로 응수하며 무시해야 할 내용이 많은 비판에도 우리가 새겨들으며 마음에 담아야 할 교훈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스펄전은 그와 같은 비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지는 칭찬보다 ‘훨씬 더 커다란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내뱉는 칭찬은 우리를 자기만족에 빠뜨리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비판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분명 우리 모두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가령 우리의 리더십과 그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우리의 노력이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 주며 격려하는 칭찬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과한 격려나 무분별한 칭찬은 오히려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너무 과한 비판도 좋지 않다. 그런 비판은 우리의 마음을 쇠약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에 대해 골몰하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격려와 비판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와 빈도가 알맞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 간구하도록 하자. 비판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려를 받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비판이 찾아올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간직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비판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to Handle Criticism번역: 장성우
목회
난관
비판
대비
스펄전
관대
진실
칭찬
격려
거짓 선생의 일곱 가지 특징
by Colin Smith
2019-10-15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 베드로는 “만일,” “그러니까” 또는 “하지만”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베드로의 표현은 언제나 분명하고 명확하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끊임없는 문제를 야기했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선지자 행세를 하는 이들을 돌로 쳐야 했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삶에 재앙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도”라는 말에 주목하라. 교회에게 쓰는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에 나와 소위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지역 교회 회중에 속해 있는 교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순수한 교회는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게 되어 있다. 워렌 워스비(Warren Wiersb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단은 위조품 제작자이다 [중략] 그는 거짓 사도(고후 11:13)가 가르치는 거짓 복음(갈 1:6-9)을 통해 거짓 그리스도인들을(고후 11:26) 만들어낸다 [중략] 하나님께서 진실된 신자들을 심으시는 곳마다(마 13:38) 사단은 자신의 위조품들을 심는다.”진품인가 위조품인가?가짜 기독교를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을까?베드로후서 1장은 진품 신자들에 대해, 2장은 위조품 신자들에 대해 논한다. 이 두 장을 맞대어 놓고 읽으면, 진품 신자와 위조품 신자들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1. 근원이 다르다—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디서 오는가?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1:16)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지어낸 말을 가지고”(2:3) 너희로 이득을 삼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진실된 선생은 그의 가르침의 근원을 성경에 두나, 거짓 교사는 자기 자신의 재능에 의지한다. 거짓 선생은 자기 메시지를 임의로 지어낸다. 2. 메시지가 다르다—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진실된 선생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1:3)라고 말한다. 거짓 선생들에게 예수는 그저 가장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2:1)한다. ‘가만히’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포착하기 매우 어렵게끔 일어난다. 거짓 선생은 당신의 삶을 바꿔줄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지만 그들의 말을 주의하여 들어 보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도 그만인 것임을 알 수 있다. 3. 위치가 다르다—당신이 듣는 그 메시지가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는가?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1:4) 피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짜 그리스도인을 묘사하길,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2:19)고 한다. 진실된 신자는 썩어질 것을 피하나 위조품 신자는 그것의 종이 된다. 4. 성품이 다르다—그 메시지가 어떤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가? 참된 신자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반면(1:5) 거짓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긍과 타인에 대한 비방으로 특징지어진다(2:10). 이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지닌 이들이다(2:14). 그들은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2:10)이기도 하다. 이것이 위조품 신자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5. 다르게 호소한다—그 메시지를 왜 들어야 하는가? 진실된 선생은 성경에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중략]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1:19).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진실된 선생은 그분의 말씀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생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2:18). 그러므로 진실된 선생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라 말하는가?”라고 묻지만 거짓 선생은 “사람들이 뭘 듣기 원하는가? 육신의 정욕에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라고 묻는다. 6. 열매가 다르다—그 메시지가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가? 진실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앎에 있어 부지런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1:8). 위조품은 “물 없는 샘”(2:17)이라 했는데 이는 정말 황당한 그림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겠다고 장담하나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7. 결과가 다르다—그 메시지가 당신을 인도하는 그 궁극적 지점이 어디인가? 가장 충격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인데, 진실된 신자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1:11) 받으나 거짓 신자에게는 “임박한 멸망”(2:1)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2:3).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사역을 했다고 하는 ‘많은’ 이들이 나올 것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중략]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실 것이라 하셨다. 이들이 누구일까? 베드로가 이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실을 알라베드로의 경고인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2:1)를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를 적용해야 할까? 첫째, 베드로의 명확한 선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년 교회 안으로 많은 멋진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그중 일부는 교회에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들은 정말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우리만큼이나 그리스도가 필요하므로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이들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둘째, 불신자들은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교회 안의 위선과 모순을 지적하는 일에 매우 능하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기 위해 그들은 흔히 “교회 안에서 위선자들을 많이 봤어요” 같은 이유를 내세우곤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 일부가 위선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위조품 때문에 진품을 못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베드로의 말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런 것이다. “당연히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교회에 유익이 아닌 해를 끼치는 선생들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서 도대체 무얼 기대합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지나치게 순진하시군요. 위조품 때문에 진품을 못 믿겠다니 말입니다.” 다음 번에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베드로후서 2장 1절을 보여 주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7 Traits of False Teachers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진품
워렌워스비
성품
참스승
거짓스승
위조품
수동적 목회자들이 가진 교만에 관하여
by Kyle Gregory
2019-10-10
겸손해 보이는 목회자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 교만의 형태가 하나 있다. 겸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수동적인 목회자의 모습이다. 겸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목회자는 보통 가장 먼저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가장 먼저 자신의 성급함을 사과하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젊고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도 기쁘게 사역의 책임을 나눌 기회를 주며, 자신이 개인적으로 죄와 씨름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양떼들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는 사람들이 다가가기 쉽도록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고, 모든 질문을 경청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다고 시인하기도 한다.하지만 겸손해 보이는 이 모든 형태들이 실제로 교만한 목회자 안에 있을 수 있다. 이들이 겸손해 보이는 이유는 거짓으로 소통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화시켜 놓은 목회자의 모습을 스스로 구현해 내야 한다고 여기는 수동성이다.나는 아직 젊지만 이미 내 안에서 이러한 교만의 형태를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목회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회자의 수동성은 공동체 전체를 심각하게 기만하는 죄가 될 수 있다.수동적 목회자수동적 목회자들이 모두 교만하지는 않다. 그들은 진정으로 권위가 회중에게 있기를 원할 수도 있고, 스스로 권위적인 모습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목회자는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탈진 상태에 빠져 회중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교만에 의해서든지 태만에 의해서든지, 수동적인 목회자의 문제는 때로 양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며 또한 모두를 기만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지도자가 양떼를 치는 대신(벧전 5:2), 양떼들이 좋아하는 초장으로 힘없이 따라가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잘 배울 수는 있지만, 바른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있다(딤전 3:2). 건전한 교리를 촉구한다고 하지만(딤전 6:2), 그저 좋은 생각을 제안하는 식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계속 지키도록 감독(히 13:17)하는 일과 가르치는(딤전 4:16) 일을 할 때, 양떼들이 듣기 원하는 것만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만일 우리가 베드로 사도를 만났다면, 그가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 얼마나 유혹을 받았는지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담대한 면이 있었지만 성급했고, 동료의 칭찬을 듣는 것도 좋아했다. 당신이나 나만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다. 의심이 든다면, 그가 빌라도의 여종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를(막 14:66-72) 살펴보라. 혹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방에 들어오자 그가 방에서 빠져 나감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사건(갈 2:11-14)을 점검해 보라. 그랬던 사람이, 성령의 감화를 받았을 때는, 장로들에게 얼마나 담대하게 권면하고 촉구했는지를 들어 보라.“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이 구절에서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는 말을 주목해 보자. 이는 그림 언어로서,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면 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양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보통 멀리 보지 못하고, 급하며, 분별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이리저리 헤매기를 잘하고, 변덕스러우며, 위험이 있으면 잘못된 길로 달아나기를 잘한다. 하지만 목자들은 양에게 이러한 취약한 모습이 있다고 경멸하지 않는다. 목자들은 양떼를 능동적으로 돌본다. 그들은 주변의 위험을 고려하고, 새로운 초장으로 가는 길을 생각하며, 약한 양을 돕고, 해코지하는 양들을 따로 떼어 놓으며, 새끼 양을 돌보고, 천적이 나타나는지를 경계하며 지켜본다. 하지만 숫양이 순순히 잘 따르도록 인도할 뿐만 아니라, 암양을 위하여 하프를 연주하고, 새끼 양을 도닥거려 주며 수동적으로 양떼들이 원하는 일을 해 주었다고 하여 자신의 모든 책임을 완성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양이 필요한 양식을 얻도록, 그리고 안전하고 건강하도록 감독한다. 혹시라도, 양을 잃고 목자장에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 앞에서 “그런데 양떼들이 절벽 근처의 초장을 정말로 좋아했습니다!”라고 변명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감독한다.특별한 감독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명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이는 감독자가 되려면 여느 감독처럼 하지 말고, 의지와 열심 및 특히 모범을 보이는 바른 감독자의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목회자가 특별한 감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보면, 목회자를 목자로, 성도들을 양떼로 비유하는 그림 언어는 우리의 이해를 돕는 데 많은 유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를 보면서 “나는 그의 모범을 따르기 원한다. 나도 위험이 있는지 지켜보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목자처럼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위임받았지만 자신이 양떼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본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목회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양떼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희생적 사랑을 통해 권위를 실천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조금 다른 비유인 합창단 지휘자의 모습을 통해 지도자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그리고 특별한 감독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자. 어떤 지휘자는 누군가가 틀린 음정을 내고 있는데도 연습을 중단시키고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지휘자는 음악을 작곡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는 단지 음악을 읽을 수 있고, 자신감과 명료함으로 지도하기만 하면 된다. 베이스의 음이 잘못되었는데도 그것을 교정하지 못하는 수줍은 지휘자는, 작곡자가 작곡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며 끊임없이 거만을 떠는 지휘자와 똑같이, 지휘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은 너무 수동적이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합창단 전체가 당하는 고통은 별반 다름없다.이와 같이 너무 수줍고 수동적이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못하는 지도자는, 경건하지 않은 지배력으로 독재하는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권위주의자는 초기에 눈에 띄게 공동체에 손상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조용히 따르기만 하는 꼭두각시 지도자는 공동체에 장기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위로부터 오는 칭송을 구하라요약하면, 지도자의 권위는 자신감과 겸허함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감독과 모범의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깊이 필요로 해야 한다.하지만 인간으로서 이것을 완벽하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대장 목자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마음을 채우고 그가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변화되도록 돕기 위해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같은 말씀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수동적 목회자는 그가 갈망하는 칭찬을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며 칭송을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칭송은 종말에 대장 목자가 주실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며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여, 언젠가는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영광의 왕에 의해 입증되고 판결받으며 보상받을 것을 고대하며 살고, 가르치며, 인도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Passivity is Prideful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수동적목회자
특별한감독
칭송
지도자의권위
자신감과겸허함
겸손의모습
보상
복음과 그 결과를 분리하지 말라
by 고상섭
2019-10-01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오늘날 설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한 가지는 ‘복음과 그 결과를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틴 루터도 동일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믿음만으로(by faith alone) 구원받지만, 단지 믿음만 남는 믿음으로(by a faith that remains alone)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행을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설교는 복음과 그 결과를 혼동하고 분리시킨다. 팀 켈러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복음이 무엇인지’와 ‘복음이 무엇을 일으키는지’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 리차드 러브레이스가 지적하기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하나님의 받아주심)가 성화(실제의 도덕적 삶)의 기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의 삶에서는 자신의 성화에 근거하여 칭의를 이루려고 한다.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어. 그러므로 나도 바른 삶을 살아야지”라는 생각의 흐름은 복음과 그 결과가 바르게 연결될 때에 일어난다. 그러나 복음과 그 결과가 분리되면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나타난다. “나는 바른 삶을 살고 있어.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 주실 거야” 이와 관련하여,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혜택을 분리하지 말라”라고 언급하며 존 오웬의 책을 인용한다.존 오웬의 저서 중에서 미국 신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죄 죽임의 교리>이다. 다른 저작인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과 교제>도 있지만, 유독 <죄 죽임의 교리>를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실용적인 마차를 신학의 말 앞에 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오웬도 청중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죄 죽임에 관해서만 아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중략]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사역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퍼거슨의 이야기는 복음과 그 혜택, 즉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혜택을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신 그 은혜의 칭의가 감사를 낳고, 그 감사로 인한 자연스러운 순종이 성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심)의 선행에 대한 이해 없이 죄를 죽이는 행위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성화에 근거하여 칭의를 추구하려는 역방향적인 오류를 낳는다.만약 설교자가 칭의에 대한 선포 없이 “여러분, 죄를 죽여야 합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둘째, 말씀을 읽으십시오. 셋째, 순종하십시오!”라는 식의 선포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혜택을 복음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또한 성도를 은혜 없는 율법주의로 인도할 것이다. 퍼거슨은 죄를 죽이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팀 켈러도 <탕부 하나님>에서 한 경영학 교수의 강의를 예로 든다. 그 교수는 윤리 경영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불법이 아닌 건강한 방법으로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고, 또한 회사의 도덕적 행보에 대한 자부심이 직원들의 업무 능률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팀 켈러는 만약 복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심각한 오해에 이른다고 조언한다. 결국 해당 기업의 목적은 윤리 경영 그 자체가 아니라 더 높은 이윤 창출이다. 혜택을 바라보고 윤리적으로 경영하는 것, 이는 결코 복음의 삶이 아니다. 팀 켈러는 그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 복음 안에서의 삶이라고 설명한다.복음을 설교하라 싱클레어 퍼거슨도 설교자의 최대 관심사는 복음의 혜택이 아닌 복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할 때 또는 들을 때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인가? 아니면 다른 것, 이를테면 죄를 극복하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법 혹은 복음을 통해 받는 혜택인가?” 그분 안에서의 영적인 복은 그분 자체를 소유할 때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2-4절을 설교하는 방식을 살펴보자.“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만약 이 구절로 설교할 때 “여러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라고 선포한다면, 그리고 듣는 성도가 “오늘부터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지”라고 결심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 인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지 못하는 실패에 좌절할 수 있다. 둘째, 만약 인간적인 노력으로 남을 낫게 여기는 일에 성공한다면, 자기 자신을 썩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교만이 싹틀 수 있다. 모두 복음의 혜택(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을 복음보다 앞세울 때 생기는 오류이다.바울은 이렇게 선포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분이 하나님의 권위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나를 구원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선포될 때 그 혜택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종교는 “나는 선한 삶을 살았어.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실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받아 주셨어.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아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어떤 행위를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하신 그 복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복음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게 된다. 우리의 설교는 어떠한가?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설교자여, 복음의 혜택이 아닌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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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현장에서 오래 견디려면
by Michael Osborne
2019-09-17
열왕기상 19장 4절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외침에 익숙한 목회자가 많을 것이다. 엘리야가 이제는 더 이상 못견디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외침 말이다. 엘리야는 왜 그토록 괴로움에 휩싸였을까? 바로 전에 그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지 않았던가(왕상 18:20-46)? 물론이다. 하지만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라면, 엘리야에게 찾아 온 것과 같은 권태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굉장했던 주일이 얼마나 자주 우울한 월요일이 되고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매달 목회직을 그만두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통념처럼 되었다. 상황이 그 정도로 끔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복음적 목회자들이 간혹 월요일에만 우울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다고 느낀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저임금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하며, 우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욕 상실을 느끼며 사역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며, 위기와 갈등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런 목회자들의 몸은 강단에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가슴은 복음의 열정으로 더 이상 뛰지 않는다. 목회를 30년 하는 동안 엘리야와 같이 사역을 떠나고 싶고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은 적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아직 목회직에 남아 있다. 나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찬 예식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세 가지 핵심적인 결심이 나를 목회직에 계속 남아 있도록 도와주었다. 첫째, 목회 중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어리석게도 이 부분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복음주의 목회자 알랜 레드패스(Alan Redpath)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항상 위기 속에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위기의 한 가운데 처해 있든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든지, 혹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든지 말이다.” 목회자들은 아주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들을 마주 대하여야 하고, 대적 마귀 그리고 육적인 것과 매일 대립하며 갈등한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 자신도 깨진 혹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목회 사역에는 난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예견한 목회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노스햄튼의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들과 그들의 목회적 돌봄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차이와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악한 이 세상에서 종종 겪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해 전에, 나는 교단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나는 잠깐 대회장을 둘러 보고 “여기 모인 목회자들은 모두 정서적으로 어떨까?” 궁금해졌다. 즉흥적으로 나는 그 생각을 트윗으로 바꾸고 컨퍼런스를 해시태그해서 내보냈다. 그 트윗의 내용은 이랬다. “천 명의 목회자들이 이번 주 총회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마음이 상하고, 외로움을 느낄 거 같습니까?” 금방 수많은 트윗 팔로워들이 생겼다. 컨퍼런스 장소에서 내 트윗을 본 여러 목회자들이 다가와서 내게 감사를 표현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군가가 자기들의 마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둘째,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기초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역자들이 자신을 편하게 느끼고 (감히 말하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몇 해 전 멘토가 내게 말해준 것처럼,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목회를 해야 한다. 우리가 되기 원하는 모습으로 목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은 1732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롯 안의 사기꾼, 혹은 남자의 고뇌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The Crook in the Lot: Or, the Sovereignty and Wisdom of God Displayed in the Afflictions of Men)라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거기에서 보스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설계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약함과 투쟁과 실패 조차도 말이다.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믿음으로 무장하면, 우리는 목회를 느긋이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강점에 집중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도 있다.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시편 기자처럼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세속 문화는 크고, 근사하며, 매끈한 사람을 좋아하고, 작고 평범하며 신실한 사람을 폄하한다.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세속 문화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다. 셋째, 목회 사역을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목회는 홀로 할 수 없다. 도우미가 필요하고 친구들이 필요하다.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크게 외쳐도, 목회자 대부분은 메시아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쨋든지 신학교 학위와 올바른 신학, 은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의 도움과 성도들이 협조만 하면 우리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외로운 사람들 중의 한 부류라는 것은 사실이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의 약 70퍼센트가 가까운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2009년 릴리 기금(Lilly Endowment)의 지원으로 진행된 세 개의 기독교 교단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다른 목회자들과의 친구 관계가 부족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친밀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참석하지 않으려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목회자들이 이런 점을 주의하지 않는 한, 목회는 그들에게 고립을 주는 과제가 될 뿐이다. 나는 전형적으로 내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알고, 좋아하며, 수긍하며, 웃게 만들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친구가 되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어떤 소그룹에 속해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점과 실패까지도 알고 있는 다섯 명의 남성들과 매주 수요일에 만난다. 신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 목회자와 한 달에 한번씩 점심 식사를 한다. 나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친교를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이지 사역을 나 스스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의 문제 중의 하나는 자초한 고립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왕상 19:10,14)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신실한 사람들 칠천 명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았다고 소식을 전했다(18절).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결심으로, 나는 목회가 도전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기쁨을 공급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과 영, 말씀과 약속,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목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과 더불어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가 목회 현장에서 오래 사역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Ministry for the Long Haul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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