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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시작하는 인종차별 가면 벗기기
by Gene Joo
2020-06-29
마스크를 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나는 이 행진의 목적이 인종차별이라는 마스크를 벗기기 위한 것(unmask)이라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꼈다.흔히들 흑인 민권 운동(civil-rights movement,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 흑인이 주도하여 시민권 신청과 인종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을 인종적 불의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하나의 변곡점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이 인종차별이 정복되기는 커녕, 그동안 인종간에 집단적 의식의 그림자 뒤로 후퇴한 채 오히려 정의와 평등에 대항해 끝없는 게릴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요즘 들어 인종차별이 끼치는 독은 그 어느 때보다 유해하고 교활한데, 그것은 훨씬 더 교묘한 형태로 그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COVID-19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다름 아닌 무증상자로 인한 감염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몇 달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그럴듯한 거부 이유로 포장돼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 정체를 규명하고 제거하는 게 매우 어렵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가 극에 달했던 안티벨럼 시대(Antebellum South, 1781–1860)에 동조하거나 짐 크로우 법(Jim Crow,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인종차별을 강제했던 미국 남부의 법)을 옹호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인정하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일까? 오늘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인종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정할까? COVID-19처럼 인종차별도 제대로 처리되고 추적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규명되고 또 진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정의롭지 않은 시스템에 의존해서 인종차별자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결코 시스템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백과 더불어 회개가 따라야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지난 주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가면을 벗기고 나로 하여금 내 평생 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또아리 틀고 있던, 거기에 있는지 나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죄와 쓴 뿌리를 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구호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이다. 최근의 경험과 과거 여러 사건들을 통해 국가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흑인의 생명이 종종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과연 이런 흑인의 생명이 나한테도 정말로 중요한가? 이론적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그렇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나 다 내재적인 가치, 고귀함 그리고 존엄함을 갖는다. 그러나 정말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이 구호를 최근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내가 겪었던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함께 나눠보도록 하자. 가면 아래서나는 대부분의 이웃이 동양인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웃 중에는 푸에르토리코인, 쿠바인 그리고 도미니카인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의 피부는 검었다. 어디를 가나 나는 “치노(Chino, 중국인을 부르는 스페인어)”라는 말을 들었다. 네 살 때 나는 치노가 내 이름인 “진(gene)”을 뜻하는 스페인어인줄 알았고, 어머니한테 어떻게 저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을 아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 호칭이 사람들이 나를 놀리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었고, 이 기억은 아직까지도 수치심과 분노와 관련한 나의 가장 오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고, 나는 급기야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어머니는 앞으로 절대로 남미 아이들 또는 흑인 아이들과 놀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우리집은 그 즉시 주민의 40 퍼센트가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열한 살 때 LA를 휩쓸었던 폭동 뉴스를 부모님과 같이 보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코리아타운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 사람의 가게가 타겟이 되어 약탈당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드니 킹(Rodney King)을 때린 건 백인 경찰인데 왜 흑인들이 한국 가게를 공격하는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왜냐하면 흑인은 나쁜 인간들이거든.” 어떤 뉴스는 무기로 무장하는 어느 한국 가게 주인의 모습을 방송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뉴욕 콜럼버스 서클에서 옷가게를 했는데, 나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아빠, 만약에 뉴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아빠도 총을 사서 흑인들을 쏠 거에요?” 아버지의 대답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하지.” 아버지의 그 대답은 나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나는 그날 밤, 우리 부모님을 나쁜 인간들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했다.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나는 말 그대로 흑인 문화 속에 풍덩 빠져서 살았다. 나와 친구들은 살해당한 래퍼 투팍과 비기(Tupac and Biggie)의 죽음을 애도했고, 우리는 또 힙합 그룹인 우탱(Wu Tang)과 갱스타(Gang Starr)를 우상시했다. 칼 카니(Karl Kani) 청바지를 엉덩이에 대충 걸쳐 입고 돌아다녔고, 또한 팀버랜드(Timberlands) 옷을 입고 락 음악에 몸을 흔들었다. 고스트패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새 앨범에 사인을 받기 위해 유니언 스퀘어에 있는 버진 메가스토어(Virgin Megastore)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어서 고스트패이스 킬라 앞에 섰을 때, 그는 나를 보고는 눈을 돌리더니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당황했고 상처받았으며 무엇보다 분노했다. 쿵푸와 샤올린 절에 관한 그 유명한 랩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시아인 팬을 그렇게 단숨에 무시할 수 있는가? 콜럼비아에서 미국 역사를 전공한 나는 4학년 때 “미국 내의 인종 그리고 피부색”이라는 한 학기 세미나를 들었다. 백인 여학생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급우와 교수는 다 흑인이었다. 한 학기 내내 아시아인에 대한 단 한 장의 읽기 과제물도 없었다. 나는 교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그의 대답이 충분히 명확하게 들렸다. 내가 그 교수로부터 들었던 대답, 그리고 내가 살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들에 비춰 볼 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마냥 이런 기억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만났던 흑인들은 나로 하여금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만들었다. 나는 한번도 내 흑인 친구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거나 또는 무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 속에는 인종에 대한 잠재적인 어떤 선입관이 있었고, 그것은 시시때때로 수면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회를 본 흑인 배우 크리스 락(Chris Rock)이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의 다양성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한 예다. 아시아인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해야 고작 우스개 코메디거리로만 등장하는 게 현실이니까. 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온라인 토론에서 스타이베산트(Stuyvesant) 학교에 흑인 학생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학생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미디어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반응했던 방식이 또 하나의 예다. 무엇보다 경찰이 정말로 잔인하게 흑인 커뮤니티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에 떠올랐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흑인을 향해 진심 어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비극이고 누가 봐도 부당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수백만 가지의 불의가 난무하지 않는가? 왜 이번 건만 그렇게 더 특별하고 중요하게 취급받아야 하는 건가? 그러나 진짜로 이기적인 내 마음에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가 흑인들한테 중요한 존재가 아닌데, 왜 저들이 내게 중요한 존재여야 한단 말인가?박해받는 자들을 항햔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지난 주의 사건은 나로 하여금 한번 더 나의 무감각함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님은 부드럽지만 강하게 나의 가면을 벗겼다. 하나님은 내가 누리는 특권 때문에 아예 눈이 멀어버려 이제는 불의를 보고서도 내 속에 겸손함과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죄가 여전히 얼마나 견고하고 추악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지난 주일 가족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은 공교롭게도 착한 사마리아인(눅 10)에 대한 것이었다. 여섯 살이 된 아들에게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금 맞아서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네가 지금 맞아서 피를 흘리면서 땅에 누워서 죽어가고 있어. 너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려. 좀 있다 한 사람이 더 왔는데, 그 사람도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좀 있다가 너랑 진짜 사이가 안 좋은 원수가 오는 게 아니겠니? 당연히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안 가고 너를 구해줬어. 우리 예수님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잠시 나는 맞아서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내 아들의 모습과 그 옆에 있으면서도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간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내 아들의 연약한 몸뚱아리가 피를 흘리면서 땅에 엎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내게 불의의 희생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 한구석을 보도록 허락했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죽어갈 때, 또한 그 자리에서 분명 뭔가를 할 수 있었을 토우 타오(Tou Thao)와 같은 아시아인 경찰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나로 하여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왜 흑인의 생명이 내게도 중요한가? 내가 그들에게 중요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행진을 할 때, 너무도 깊은 내 죄, 인종차별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나는 울기 시작했다. 결코 앞으로는 나의 흑인 형제 자매와 관련해서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희생자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아마드 아베리(Ahmaud Arbery)!, 브레나 테일러(Breonna Taylor)!,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내 눈물이 바뀌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울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나는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진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기 전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면서 그 속에 숨은 인종차별과 죄를 놓고 먼저 회개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나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서로에게 자신의 실패와 차가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흑인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더 진심으로 애통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더 잘 배우며 그들 곁에 더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에게만 두어야 한다. 불의를 증오하는 예수님은 언젠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함으로 진정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Unmasking Racism, Starting with Me번역: 무제
문화
사회_이슈
인종차별
선한_사마리아인
흑인의_인권
LA_폭동
코로나바이러스와 취소 문화
by Abdu Murray
2020-06-10
‘취소’.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회활동이 중지된 지금 이 단어는 과거 그 어떤 단어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영화 개봉, 콘서트, 심지어 스포츠 전체 시즌이 COVID-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취소되고 있다. 그런데 이 취소라는 단어는 최근 들어 사회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어떤 행사를 취소하는 경우가 아니라 사람을 취소(제거)할 때 쓰는 경우다. 한때는 문화적으로 수용되는 어떤 생각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갖는 경우, 그에 관한 근거와 건전한 논지를 바탕으로 토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가 문화적으로 다수가 선호하는 생각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거나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취소(삭제)한다. 욕을 하거나 어떤 특정한 딱지를 붙이거나 또는 아예 인신공격을 해서 눌러 버린다. 음악가의 경우라면, 콘서트를 보이콧 한다. 운동선수라면, 그 사람의 유니폼에 불을 지르고 그 영상을 SNS에 올린다. 집단의 생각을 모욕한 사람은 이제 사회적 죄인이며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중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받도록 만든다. 여기서 기억할 점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을 논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말하고 있다. 최대한 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 그 존재가 사라지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취소될 것이다. 취소 문화와 동양 문화동서양 두 가지 문화를 다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서구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이 얼마나 동양적인지를 목격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나서 자랐지만 나의 혈통과 성장 배경은 중동 지역이어서 올리브 오일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는 개인 권리, 즉 개인이 무엇을 믿고 어떤 말을 하고 또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중요시했다. 한 개인의 어떤 특정한 말과 믿음 그리고 행동 여부가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는 그 속에 잠재된 장점은 언제나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동양과 중동(이 두 지역을 통틀어 “동양”이라 부르겠다)에서는 집단이 더 중요하다. 동양에 사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믿음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 동양 문화는 “명예-수치 문화”다. 모든 개인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명예를 가져다주어야 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하고 또 믿어야 한다. 진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진리가 공동체에 수치를 가져다준다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숨겨야 한다. 이제는 무죄/유죄와 명예/수치의 혼합된 형태가 서양과 동양 전부를 휩쓸고 있다.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와 무죄/유죄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집단적인 명예/수치 사고방식은 쇠퇴해왔다. 그런데 취소 문화의 도래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명예/수치 사고방식이 서구에서도 점점 더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의 취소 문화는 기존 동양에 있던 명예-수치 사고방식의 21세기형 서구 버전이다. 수백 년간 이런 문화에 익숙한 동양인이 아직까지는 이 분야에서 뛰어나지만, 서양인들도 무섭게 따라붙고 있다. 취소 문화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은 한 학생의 입학이 결국은 최소되었는데, 그 이유가 그 학생이 16살 때 쓴 부적절한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잘못을 뉘우치고, “나는 이제 전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스크린샷에 드러난 어렸던 시절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썼지만, 하버드는 결국 그의 입학을 거부했다. 물론 그 학생이 했던 말은 매우 부적절했다. 그러나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버드에 의해 취소되었고, 더 중요한 것은 수없이 많은 트위터에서도 최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밈(meme, 인터넷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은 그 사건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이 인간의 인생 전체를 끝장내고자 한다.”COVID-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봄 방학을 맞아 마이애미로 여행을 간 몇몇 대학생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중 몇 명의 실명이 뉴스 매체로 알려졌다. “코로나? 걸리면 걸리는 거지, 뭐”와 같은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발언 때문에 행여나 이 학생들이 미래에 어떤 회사에도 취업하지 못하고 아예 “취소”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취소 문화에서 하나의 잘못은 영구적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낙인이 되는데, 그것은 비난이 단지 잘못된 행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수는 이제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고 인간 자체를 수치스러운 존재, 그렇기에 취소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얼마나 동양적 사고란 말인가? 줄리엣 노벰버(Juliet November)는 과거 동양과 서양이 달랐던 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서구적인 방식에서 볼 때,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는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다. 그러나 동양의 명예-수치 방식에서 볼 때,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사회적 눈에 비추어 내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해 단지 잘못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사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님과 취소 문화서구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의도는 좋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성이 떨어지는 분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곤 한다. 그런데 현대의 서구 사회가 점점 더 예수님이 살았던 고대 문화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은 예수님이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상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실성이 있다. 부모에게 절연 당하고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쫓겨난 맹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은 맹인으로 태어난 한 젊은이를 만난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 계기는 예수님이 진흙을 눈에 발라서 그 젊은이의 시력을 치유했기 때문이었다(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했다”). 바리새인들에게 심문을 받았을 때, 그 청년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이 너무도 두려웠기에 예수님이 아들을 고쳤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아들에게 물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 9:22). 출교,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수치였다. 그들의 아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본 그는 사회적으로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바리새인 앞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또 냉소적으로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자신을 고쳤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에 도전하는 그를 참을 수 없었고, 회당에서 출교시킴으로 공동체에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수치를 주었다. 회당에서 출교당한 사실은 이제 그 젊은이의 정체성을 결정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그를 취소해 버렸다.부당하게 당한 수치를 긍휼하게 여긴 예수님은 그 젊은이를 찾았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권세로,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밝혔다. 그는 청년의 육체적 시력뿐 아니라 영적인 시력까지도 회복시켰다(요 9:39). 예수님은 수치로 가득한 그의 정체성을 영광된 정체성으로 바꾸었다. 예수님은 위선자들에 의해 부여된 일시적인 사회적 영예를 오직 하나님만이 부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영예로 대체했다.예수님은 취소된 자를 사랑한다취소 문화에서 우리의 존재는 가장 최근에 저지른 실수에 의해서 정의된다. 사회적인 회복은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러나 취소되었다는 것으로 피해자가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모든 취소된 인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많은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세리, 열심당원, 창녀들 말이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취소하지 않았고(요 20:27),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도 취소하지 않았으며(요 18:27), 이복 형제 야고보가 믿음을 거부할 때에도 취소하지 않았다(요 7:5).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의 찬송가는 우리의 죄와 수치, 순전함과 명예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주님은 공정하고 친절하다온유한 사람은 그의 길을 배울 것이다그리고 모든 겸손한 죄인은그가 베푸는 은혜의 방법.자기 자신의 선함을 위해그는 내 영혼을 수치심에서 구해주었다.나의 죄책감 크고 커도, 그는 용서한다구속주의 이름으로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수치에 분노로 반응할 때,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와 은혜로 응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니 내가 누군지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 세상 문화는 결코 그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오늘날 일시적, 문화적 오만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나사렛 출신의 중동 순회 설교자로부터 배워야 하는 이유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celed: How the Eastern Honor-Shame Mentality Traveled Wes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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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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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지혜
by Michael Sacasas
2020-05-01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다. 매일 바쁘게 살다 보면 이런 사실을 잊곤 한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종종 당황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러 나라가 지난 몇 달 동안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우리는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세상에 살게 되었고, 일상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는 못쓰게 되어 버린 옛 습관과 일상 대신에 새로운 일상의 습관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시간도 예상치 못하게 왜곡되는 듯하다.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위기는 우리의 옛 습관이나 행동, 또는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정을 질서 있게 통제하고 시간을 잘 관리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이 지장을 받는 일은 전례 없는 것이다. 이 사태로부터 많은 사람이 교훈을 얻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지금은 또한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삶에서 디지털 기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모바일 기기와 그야말로 없는 곳이 없는 무선 네트워크로 인해, 과거에는 데스크탑 컴퓨터를 켜서 가끔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이제는 우리의 삶 전체 영역으로 확대되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 삶을 뒤덮음으로 말미암아 개인정보의 특성, 시민 사회의 건강성, 노동의 가치, 인공 지능 기술의 발전 상황, 인류 번영의 조건 등에 관한 윤리적, 법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인 질문까지 하고 있다. 서로 물리적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합당하고도 거센 사회적 압력 때문에, 이제 우리 대부분은 사람들과 연락하고 매일의 업무를 지속하기 위해 디지털 도구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디지털 도구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이러한 불확실성과 염려의 시대에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고도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우리가 쓰는 앱이나 기기에 이미 많이 설치되어 있고, 코로나19 상황을 추적 및 감시하여 그 확산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디지털 감시 장비를 탑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이러한 논의를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한 것은 분명하나,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도 우리가 평상시처럼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에 좀 더 초점을 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이제 정보를 취득하고 사람들과 연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리라는 것이다.우리의 건강 문제에 직결된 위기의 때에는 우리 자신,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게 해 준다. 적은 노력으로도 우리는 전 세계의 대표적인 전염병 학자들, 바이러스 전문가들, 그리고 전문 의료 인력들의 견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상황이나 국제 보건 기구들, 각 지역의 의료 및 응급 시설에 관련된 상황도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몸의 건강과 우리 사회의 건강에 잠재적으로 독이 되는 가짜 정보 역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공포감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거나 확인되지 않은 치료법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보건 관계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 바이러스의 기원을 논하거나, 이 바이러스의 치명적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이러한 정보의 지형도를 탐색할 때는 당연히 지혜가 필요하다. 디지털 미디어 사용자들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금은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로 둘러싸인 이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위험은, 우리가 아무리 조심하여 건전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만 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최신 정보를 찾아 미친 듯이 뉴스피드(news feed)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불난 집 구경을 멈추기 힘든 것처럼, 뉴스 확인을 멈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SNS는 강박적으로 뭔가에 참견하는 것을 조장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의지할만한 지도도 없이 모두가 출구를 찾으려 애쓰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 위험이 더 커진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보를 습득하고자 하는 갈망이 너무 크면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감정적으로 압도해버릴 수도 있다.정보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면 당연히 좋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지자체에서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섬길 수 있을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을 감당키 위해서는 좋은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나 더 좋은 정보가 있다고 해서 염려가 해소되거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끔찍하리만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정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지금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면 디지털 기기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기도로 두려움과 염려를 다루도록 해보라. 매일 특정 시간에만 최신 뉴스를 확인한다거나, 필요한 경우 뉴스피드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아침에 믿을만한 몇몇 뉴스를 신속히 훑어본 후 곧바로 일과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전문 의료인이나 응급 대책반이 아니라면 코로나19 바이러스 환자 수를 세세하고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내가 입법이나 정책 전문가가 아니라면 바이러스 해법에 대해 논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들에 대한 뉴스를 계속 읽을 필요는 없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만 취득하는 지혜이다. 상식에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정보를 너무 많이 취득하는 것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영상(screen)에 의지하고 있다. 많은 교회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디지털 도구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교제하는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은 사실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정 기간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는(socially)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제 디지털 방식으로 서로 연결하는 일에 아주 익숙하다. 문자, SNS, 또는 페이스타임(FaceTime) 같은 앱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인 부분이 되었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용 빈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상호 격리의 시기인 지금 화상 회의(videoconferencing) 프로그램들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다른 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와 목소리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그러한 위로를 잘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교제를 위해 오랜 시간 디지털 수단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사람은 영과 육의 전인적인 필요가 채워질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피조물이다. 다른 피조물들처럼 우리에게도 육체가 주어졌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가 육신의 감옥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육신은 우리 인성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상으로 듣는 설교를 통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예배드릴 그 날, 서로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할 그 날, 다시 한번 성찬의 떡과 잔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을 맛볼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또한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재발견하게 된다. 외로움이 사람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고독은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한 것이다. 너무 오래, 우리는 서로 피상적으로 연결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고 진정한 고독을 추구하지 못했다. 만일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통해 우리가 디지털 소통 기술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Pandemics, Digital Media, and Anxiety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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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by John Piper
2020-04-18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 침묵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 어디를 펴도 위기상황과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위기의 상황에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목소리는 풀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소리는 화강암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것은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마 7:24).그분의 목소리는 참될 뿐 아니라, 모든 상황에 있어서 완벽하게 지혜롭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5). 그분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실 때, 그 생각은 확고하고, 흔들릴 수 없고, 영원히 선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삼하 22:31). 요즘 같은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소중하고 달콤하기도 하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하나님의 말씀은 일생의 달콤함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흔들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말씀은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준다.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그리고 그 달콤함은 지금과 같은 혹독한 섭리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비밀을 배운 자에게는 참으로 그러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멈출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주권 역시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비밀이다. 사실 우리의 영혼을 보호해주시는 차원을 넘어서, 죽는 순간에도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꿈꾸며 평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 11:22). 그분의 섭리는 달콤하고도 쓰라리다. 나오미가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시점은 그녀의 상황이 막 변하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지금은 하나님을 감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보내신 쓰라리고 아플 때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엡 1:11). 하나님은 말 그대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자연은 주권적이지 않다. 사탄은 주권적이지 않다. 죄악 된 인간은 주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그것들 모두를 다스리신다(눅 8:25; 욥 1:12; 2:6; 행 4:27-28). 따라서 우리는 욥과 함께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하나님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로움 가운데 그것을 뜻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운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부터 흘러나온다(엡 1:11). 모든 뜻이 지혜이다. 모든 뜻에 목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향해서, 그 모든 뜻이 자비하시다. 그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자비로운 경종(警鐘)이다(계 22:17).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1-24)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oronavirus and Christ: ‘Behold The Kindness and Serity of God’번역: 김종진(개혁된실천사)***존 파이퍼의 신간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 한국어판 e-book을 4월 21일 TGC코리아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2020년 1월 11일, 중국 우한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처음 보고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1일에 마침내 팬데믹을 선언했다. 불확실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존 파이퍼는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Coronavirus and Christ)에서 온 세계 독자들에게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독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믿는 자들을 위해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성취하시고자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주권자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존 파이퍼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가지 성경적 답변을 제공하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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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시대 던져야 할 두 질문
by Joe Carter
2020-04-03
지난 며칠간 워싱턴주 주지사는 시애틀(Seattle) 지역에서 250명 이상 규모의 모임을 금지했다. 켄터키주 역시 교회들의 주일예배 모임 자제를 부탁했으며, 뉴욕주 주지사는 뉴로쉘(New Rochelle) 지역 근교 1마일의 감염 통제를 위해 주 방위군(National Guard) 투입을 요청했다.미국 전역에 걸쳐 학교와 대학들은 문을 닫고 의회에서는 상하원 의원들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고 있다. 주식 시장은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파장은 가장 작은 유기체인 바이러스 하나로 인해 시작되었다.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실제 감염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이러스로 인해 미국 전역을 불확실성(uncertainty)으로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불확실성의 종류불확실성이란 불완전한 정보나 미지의 정보를 토대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내리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다. 1921년에 출판한 책 ‘Risk, Uncertainty and Profit’에서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는 불확실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잠재적인 결과를 미리 아는 경우,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나올 확률도 아는 경우이다.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을 “위험”(리스크, risk)이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불확실성은 측정하거나 그 양을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잠언 27장 1절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한다.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에 있어 단순한 위험, 즉 측정 가능한 종류의 불확실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는 것은 부상이나 사망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의 불확실성, 다시 말해 위험은 수량화할 수 있고 그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기에 수많은 사람이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운전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불확실성은 수량화할 수 없기에 우리를 마비시키고 두렵게 만들어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불확실성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한 국면이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 삶에서 지혜롭고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의 힘과 책임감이 커질수록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더 복잡해지고 더 어려워지며, 또한 더 많아진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 질문했던 다윗 왕다윗 왕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늘 사람들의 사연과 요구를 듣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무엘하 전반에 걸쳐, 우리는 다윗이 뭔가를 결정할 때 전혀 복잡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간단한 것, 즉 분명한 이해를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다윗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또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삼하 21:2–4)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질문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윗이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복잡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질문을 통해 정보를 얻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미국의 경영 전문가인 W. 에드워즈 데이밍(W. Edwards Deming)은 “자료 수집의 최종 목적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뭔가를 추천하고자 할 때 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복잡한 질문보다는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료를 수집하고, 우리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데 있어 더 도움이 된다.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다섯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지 말라개인적이든 전 세계적이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갈 때는 너무 먼 미래까지 아우르는 결정을 삼가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고, 지금이 우리의 영적인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가정해보라. 광범위하고 복잡한 질문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이번 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질문을 통해 초점을 좁혀갈 수 있다. 위의 경우 인생 전반의 문제에서 한 주(week)로 좁힐 수 있었다. 우리 문제에 대해 소규모의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이번 주에는 뭘 할까?”처럼 작고 즉각적인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질문을 던지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지?”와 같이 더 큰 질문에 답하는 법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번 주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방법은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것이라 결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더 큰 변화로 이끌 수도 있다. 다른 아이들을 일정 기간 맡아 양육하는 위탁 부모(foster parent)가 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겠다.2. 영향을 주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결정하라정보 수집의 주요 목적은 의사 결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의견 수렴을 위한 정보와 의사 결정을 위한 정보를 혼동하곤 한다. 한 예로 합당한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정말로 국가적 재난인지 아니면 언론이 괜한 공포감을 부추기는 것인지 알아보는 데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SNS에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데에는 그런 정보가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각 개인이 어떻게 이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 도움이 되는 질문은 “공포감에 빠지지 않고 바이러스가 더 퍼지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질문의 범위를 이런 식으로 좁혀가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평상심 유지하기, 사람 많은 곳 피하기, 손 씻기 등에 이르는 소소한 개인적 행동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3.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지 결정하라자신에게 던져야 할 가장 단순한 질문은 “슬기롭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이다. 잠언 13장 16절은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슬기로움(prudence)은 첫째, 주의 깊고 지혜로운 사리판단, 둘째, 경솔하게 행하거나 말하지 않음, 셋째, 주어진 달란트와 자원을 잘 활용함, 넷째,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지략과 지혜를 수반한다. 불확실성 앞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슬기로움의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지식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4. 불확실성으로 인해 바보가 되지 말라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미래를 위한 저축의 일환으로 주식 시장에 투자한다. 투자 전략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저점에 매수하고 고점에 매도하라”나 만기보유(buy-and-hold) 같은 이미 그 유효성이 증명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원칙들을 자랑스레 말하곤 한다. 하지만 퇴직 적립금을 깨서 투자한 주식의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대규모 손실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식 시장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그렇게 경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바뀐 게 뭐지?”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해야 한다. 내 투자 원칙이 바뀌었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졌나, 다시 말해 현금이 필요한 시기가 더 빨리 닥친 것인가? 단기 불확실성의 정도 외에는 바뀐 것이 없다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5. 작은 질문을 큰 질문 두 개에 연결하라불확실성을 핑계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명령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하는 작은 질문은 궁극적으로 큰 질문 두 개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 이 결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가? 둘째, 이 결정이 나의 이웃 사랑을 담아내는가?두 질문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함께 섬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 그리고 그의 피조물 모두에게 다윗 왕이 했던 그 작은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sking Small Questions in an Age of Uncertainty번역: 이정훈
불확실성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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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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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N번방에 나타난 악의 심리학
by 노승수
2020-03-28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보도된 “포르노 산업”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도색 잡지, 음란 컴퓨터 프로그램, 성인용 유선 방송, 나체 쇼, 음란 연극, 음란 비디오, 성행위 보조 기구 등을 위해 쓴 돈이 약 80억 달러이며, 이 중 7억 5천만 달러 내지는 10억 달러 정도가 음란 전화비용으로 지출되었다고 보도했다. 20년도 더 된 통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실태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에서 N번방, 박사방 등을 만들어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만든 음란물을 공유한 일당이 붙잡혔다. 여기 가입자만 30만 명이라고 하니 앞서 소개한 리포트가 국내에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미성년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소녀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서 그것으로 돈벌이한 자들이나, 관음증처럼 그것을 보려고 수십 수백만 원을 내고 기웃거린 남자들이나 모두 지탄받아 마땅하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N번방 가입자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자이며 직분 자일 것이라는 점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으로 인해서 이런 범죄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을 것은 쉽게 예상된다. 성은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힘든 욕망이며 가장 사회화될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던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내를 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 아내나 남편이 있더라도 원만한 성생활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범죄를 부르는 내면의 심리가 무엇이며, 신자는 무엇으로 이것을 예방하고 벗어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심리를 잘 보여주는 연구 조사가 하나 있다. 미국 보스턴 지역의 성 구매 남성 101명과 비 구매 남성 101명을 대상으로 각각 두 시간씩 면접 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성 구매자들은 비 구매자들과 비교하여 성매매 여성의 감정 상태를 예측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였고, 여성들의 실제 느낌과 벗어난 감정 상태를 표현했다. 이것은 성 구매자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성매매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들의 호색적인 특징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방 운영자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어린 여성들을 유인한 후 그들의 주민등록증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인들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으로 그녀들을 수렁에 몰아넣었다. “협박”으로 대표되는 그의 성격적 특성은 이런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관계 방식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띠고 있다. 성이 사디즘과 마조히즘과 같은 변태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 역시 이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스캇 팩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마귀의 핵심적인 심리를 자기애라고 밝혔다. 자기애란 소통은 없이 타인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필요를 채우는 일종의 “인간 소비”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타인과 하나님은 그저 자기 욕망의 대상이며 소비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가 N번방 사태를 관통한다. 그 30만 명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 것이다. 자기 딸 같은 아이를 보고도 공감과 소통의 반응은 없이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형태가 도덕적 무감각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단지 금욕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서 넘어져도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된 지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지닌 성적 지향과 에너지들을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목적이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이바지하지 않는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제대로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이 삶에 반영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신앙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가 사람 편에서의 삼위일체적인 구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곳에 우리는 성자 예수를 통해서 초대받은 것이다. 성부와 성자 간 사랑의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중재하시는 성령의 연합을 따라 우리도 성자 예수와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 성부와 사랑의 교제에 초대를 받았다.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께서도 관계적 존재이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셨다(요한복음 3:35, 15:9, 17:23). 성자도 성부를 사랑하신다(요한복음 14:31). 그렇게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는 사랑의 관계에 계셨고 우리를 그 관계로 초대하셨다.(요한복음 15:9) 성부와 성자의 이런 사랑의 관계는 성령의 중재를 통해서 드러난다(누가복음 3:22). 성적 문제들은 대부분 관계적 위기에서 비롯된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죄가 성적인 무질서였다. 원래 성적 에너지는 관계적 에너지다. 동시에 다른 것으로도 쉽게 변환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운동으로도 성 에너지는 발산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에너지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적 에너지다. 단지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온몸과 온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확장과 실천이 그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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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를 어떻게 섬길까?
by 옥성득
2020-03-27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화 바람과 함께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면서 20세기 국제 질서가 바뀌었다. 100년이 지난 올해,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유행하는 세계적 전염병(pandemic) ‘코로나19’는 21세기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과 미국에서 맹위를 떨치며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먼저 경험한 중국과 한국의 사례를 주시하며, 특히 한국을 모델로 삼아 지역을 봉쇄하는 등 사태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전염병으로 문명사의 전환기를 맞이한 오늘, 한국의 방역 모델이 세계에 통한다면, 과연 전염병을 대처하는 한국 교회 모델도 세계 교회에 통할 수 있을까?한국의 투명하고 민주적인 항바이러스 모델지난 2주 동안 각국의 정치 지도자나 방역 책임자들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중국과 한국 중 어느 쪽을 모델로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올림픽에 매달려 환자 수를 은폐한 것으로 의심되는 일본은 의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언론 통제, 환자 인권 무시, 도시의 강제 봉쇄를 통해 환자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은 보편적 의료 보험과 발달한 기술을 이용하여 대량의 신속한 검사와 투명한 정보 공개를 했다. 그리고 초중고 임시 휴교, 대학 온라인 강의, 교회 온라인 예배, 상가 폐쇄 등의 비약물적 대응을 병행하면서 우수한 의료진과 시설을 통해 완치자를 늘려 의료 체계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이 방역의 주체로 위생 수칙을 지키고,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공유하게 된 재난에 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사재기를 하지 않고, 방역에 자원봉사로 나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는 국민 생명 보전과 경제 활동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준비(의료 보험, 의료시설, 의료진, 방역 관료)와 기술(IT 산업, 의학기술)과 국민 의식의 3박자가 들어맞아야 하므로, 다른 나라에서 바로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선의 모델이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는 당장 손쉬운 것, 강력한 정부의 통제와 봉쇄에 의존하는 중국식 모델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모델을 배우기 위해서 발 벗고 뛰어오고 있다. 만일 한국이 없었다면 세계는 국가주의 모델로 가면서 자유와 민주, 경제 안정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 팬데믹 시대에 세계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다.위생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이로써 지난 150년간 주도권을 잡아 온 서구의 오리엔탈리즘(Western Orientalism)과 그를 모방한 일본의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일본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한국과 중국을 바라보는 동아주의 Pan-Asianism)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과거 한국을 소개한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의 Korea, The Hermit Nation(1882)과 1883년 로웰(Percival Lowell)의 Chosőn the Land of Morning Calm(1883)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인 일본과 비교하면서 한국을 우물 안의 은둔국, 잠자는 미개국으로 비하했다. 정치는 불안하고, 관리는 타락했고, 경제는 가난 속에 정체되었고, 사람들은 더럽고 게으르며 미신적이라고 묘사했다.일본은 이를 모방하여 야만과 불결의 땅 한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만들어 계몽하면 근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일본 작가는 1898년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와 시궁창에서 돼지가 노는 서울의 불결한 이미지를 대조했다. (사실 서울은 이듬해 도쿄보다 먼저 전차를 개통시키면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던 때였다.) 이제 그런 제국주의의 시대 위생 오리엔탈리즘의 시대는 역전되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일본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가 위생 후진국이 되었지만, 한국은 전염병 방역 체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 △1898년 일본 화가가 그린 서울의 왜곡된 모습과 2020년 서울의 드라이브 스루 선별 진료소세계 기독교 시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1984년 전후에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북반구의 기독교 인구를 능가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 시대가 열렸다.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동한 탈서구 기독교(post-Western Christianity)의 한 무게 중심인 한국 기독교가 과연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지구촌과 세계 기독교에 희망이 될 수 있을까?일부 교회는 예배나 기도회를 지속하면서 바이러스 차단의 훼방꾼 이미지를 심기도 했다. 정부가 온라인 예배를 권고하자, “술집은 영업하는데 왜 교회만 문을 닫아야 하는가?”라며 교회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사설 영업소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우리는 자영업자랑 똑같아. 예배 몇 번 건너뛰면 문 닫아야 해"라고 말하는 자칭 자영업자 목사도 있다.그러나 다수의 교회는 위생 수칙을 준수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적극적인 디아코니아 사역에 나섰다. (1) 유명한 대형교회들이 앞장서 수양관을 경증환자 입원시설로 제공했다. (2) 많은 교회가 방역진과 의료진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커피와 빵을 대접했다. (3) 대전의 한 교회는 대구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속옷을 제공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제작한 마스크를 제공했으며, 교인 중에 월세를 내지 못하는 자들을 파악해서 도왔다. (4) 평택의 한 교회는 마루 공방에서 수제 마스크 수천 개와 손 세정제 수백 개를 제작해서 지원했다. (5) 상가의 방역 지원, (6) 외국 유학생에게 마스크 전달 등을 했다. 또한 교회 간의 코이노니아 사역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분당의 어떤 교회는 700개 미자립 교회의 월세를 대납하기로 했으며, 많은 교회가 작은 교회의 온라인 예배 시설과 방송을 지원하는 등 교회가 하나 된 모습을 보였다.이제 재난은 밀려오고 세계적 전염병은 토착화하면서 주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전도와 예배만 영적인 일로 여길 것이 아니다. 사회와 세상의 치유, 방역, 자비 사역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바이러스와 싸우는 영성으로 교회 내의 성범죄, 성차별, 세습, 설교 표절과 전투하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부조리한 악과 싸우는 정의의 십자군들도 양성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방향은 교회 성장을 위해서였다. 이제 팬데믹 시대에 새로운 선교적 교회 모델을 세계 기독교 앞에 내어놓자. 건물을 짓는 해외 선교가 아니라, 세상과 세계 교회를 살리는 영적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한국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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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진정한 공교회를 생각할 때
by 정요석
2020-03-26
여러 언론 매체들이 불교계의 스님 환자는 한 명도 없다고 보도했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성남의 어떤 교회를 비롯해 많은 확진자가 나온다고 했다. 왜 불교와 천주교보다 개신교에 확진자들이 많이 나올까? 그 이유를 개신교 교회는 목사 개인의 운영으로 인해 전체적인 통제가 취약하지만, 불교의 사찰과 천주교의 성당은 중앙에서 통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분석했다. 불교계 대표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총 3번에 걸쳐 모든 법회와 행사를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전국 24곳의 교구 본사와 각 사찰이 잘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조계종은 불교 최대 명절인 초파일 행사 일정을 4월 30일에서 5월 30일로 한 달간 연기했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강력한 반대와 논쟁이 있었겠지만, 국가적 재난극복이란 차원에서 결단이 이루어졌고, 모든 사찰이 중앙의 결정에 따르고 있다.한국 천주교는 236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전면 중단했다. 3월 19일에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지역 상황에 맞춰 교구장의 재량에 따르면서도 정부 방침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초중고교 개학일인 4월 6일 즈음 미사 재개 일정을 정하기로 했다. 이런 중앙의 결정을 일반 성당들이 잘 따르고 있다.이에 비해 개신교는 개별 교회의 권한이 강해서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재정의 어려움을 겪는 소규모 교회들은 주일에 헌금을 걷기 위해 주말 예배를 거행하는 비율이 높다고 덧붙였다. 어떤 언론은 지방 정부가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에 전화해서 소규모 교회들의 임대료 납부를 도와서 주말 예배가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식까지 전했다.개신교에 중앙 조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총회와 노회가 있다. 총회와 노회에서 정한 결정을 각 지교회들은 충실히 잘 따르고 있다. 문제는 개신교가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된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등으로 나뉘었고, 각 교파는 또 여러 교단으로 나뉘었다. 한국의 대표적 교파인 장로교는 무려 2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많은 교단의 총회와 노회에서 정부 방침에 협조할 것을 결정해도, 다른 교파와 교단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개신교 전체가 비난을 받게 된다.천주교는 다른 교파와 교단이 없다. 천주교에서 이단이 나와도 교파와 교단으로 형성되지 않고 개인 몇 명의 문제로 국한된다. 그런데 개신교는 신천지와 같은 이상한 집단이 수십만 명의 규모로 성장하기까지 한다. 별의별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파와 교단들이 존재하고, 이들에 대하여 다른 교파와 교단이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7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와 큰 물의를 일으킨 성남 은혜의강교회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소속인데, 이 연합회는 명칭 그대로 교회들이 독립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직체이므로 강한 영향이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건전한 교단들은 소속된 교회에게 바른 내용의 결정을 전달하고, 지교회들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한 정부의 7대 수칙도 잘 따르고 있다. 그런데 건전하지 못한 일부 교회들, 즉 정상을 벗어난 일부 지교회들과 목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개신교의 부끄러운 점은 지교회들 간에 재정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지교회들이 천주교처럼 평균을 이루지 못하고, 개교회주의가 되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정부의 주일 예배 제한에 대하여 적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이 반발하는데, 반발하는 대부분은 정부의 7대 수칙을 잘 따르는 분들이다. 정부가 문제 삼는 것은 이렇게 잘 따르는 교회들이 아니라, 정부 방침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의 몇몇 교회들이다. 전염병이라는 것은 슈퍼 전파자 몇 명만 있으면 지역감염수준으로 빠르게 퍼진다. 게다가 신천지 집단이나 몇몇 교회처럼 밀접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슈퍼 전파자들이 대거 양산되어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다.정부의 주일 예배 제한을 종교탄압이라며 반발하는 일부 목사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러기에 앞서 개신교의 분열과 조직의 질서가 없는 것에 대하여 반성해야 한다. 정부는 천주교와 불교 등과 대화할 때는 연락할 중앙 기관이 분명하지만, 개신교는 특정할 수 없어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어느 교파, 어느 교단에 연락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개신교는 늘 교파와 교단으로 이루어진 연합기관을 만들어 정부 등을 상대해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연합기관마저 분열되고 있다. 이권과 권력과 이념에 빠져 통일된 공신력을 확보한 연합기관을 갖지 못한 것이다. 개신교는 천주교를 개혁하겠다고 나왔지만, 최소한 교파와 교단의 분열과 교회 간의 빈부 격차 면에서는 천주교보다 못하다.코로나19 감염 방역을 위해 정부는 교회들에 소독액과 분무기 등을 제공하고, 각 교회의 주일 예배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정부의 도움 없이 개신교 자체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개신교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행정과 재정 능력이 부족하고, 의지 자체도 약하다. 개신교는 정부가 교회에 내린 여러 지침에 대하여 비판과 변호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탈한 몇몇 교회들을 자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개선방법을 찾고자 골몰해야 한다. 개신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행정 능력과 신뢰받는 연합기관을 갖추지 못하면 유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할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큰 교회들에게 작은 교회들을 도와주라고 당부했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정부가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7대 수칙을 지키는지 살피기 이전에 개신교가 자체적으로 교회들을 점검하고 안내한다면 개신교는 사회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일반인은 일그러진 교회들도 똑같은 교회로 여긴다. 우리에게 억울한 면이 있지만, 우리의 관점보다 그들의 관점에 서서 그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응하려고 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와 사랑을 가진 신자들이 이웃을 넉넉하게 대하는 자세일 것이고, 이런 노력이 쌓일 때 개신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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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팬데믹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가
by Glen Scrivener
2020-03-22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군중 사이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몇 세기만에 서구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을까?이 질문은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책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How Did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o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에 달린 부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성장 요인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그중 한 요인이 바로 전염병이다. 정말로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군중 사이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발흥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전염병의 확산에 교회가 얼마나 눈에 띄게 대처해 왔는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여기서 나는 지난 역사에서 일어난 네 번의 팬데믹, 즉 세계적인 전염병 현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면서,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현상에 대처해 왔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 각각의 사례를 살펴볼 때 (혹시 현시대와 상황 속에 우리 스스로 적응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을 통해 다시금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고양되는 변화가 있길 소망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용기 있게 희생을 감수하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간 모습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랑도 바로 그와 같이 큰 희생을 요구한다. 더불어 우리 자신이 병을 옮기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이 시대엔 저들이 보여 준 지혜가 더욱 사려 깊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난 역사를 살펴볼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끄셔서 바른 적용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시길 구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심령도 깨어나 믿음, 소망, 사랑을 추구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작금의 팬데믹을 겪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시선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지혜를 올바로 발휘하게 되길 소망해 본다.1.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Dionysius)주후 16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 전염병이 발생했다(혹자는 이에 대해 천연두라고 추정한다). 약 15년간이나 지속된 그 병은 제국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스타크의 추정에 의하면, 당시 기독교 인구는 4만 5천 명 정도였고, 이는 전체 인구의 0.08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미약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확산에 대한 교회의 대처는 세상의 칭송과 커다란 호응을 얻어내었다.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보고서를 남겼다.“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형제 중 대부분은 끝없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다른 이들만 생각하였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맡아 온갖 필요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섬기다가 때론 저들과 함께 평온한 행복을 바라며 이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다름 아닌 이웃의 병환을 짊어지며 기꺼이 그 고통을 끌어안다 자기들까지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가 그처럼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료하다 환자들을 따라 죽거나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했다.”이렇듯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끌어안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흡사했는데, 이는 교회 밖에 있던 다른 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글을 이어갔다.“그런데 이교도의 모습은 완전 달랐다. 그들은 누군가 병들어 아프기 시작하면 멀리 떠났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도 도망쳤다. 죽음을 맞이할지 몰라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거나 누구와도 사귀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의를 기울였으나, 그들이 죽음을 피해 달아나기는 쉽지 않았다”(유세비우스 교회사 7권 22장 7-10절).전염병은 죽음과 같은 인생의 귀로를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우리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약하고 덧없는 존재일 뿐임을 알려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염병은 반문화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2세기 당시 교회도 그러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며 저들의 칭찬을 얻고 그들로 하여금 회심케 만들었다. 이와 같은 모습이 한 세기 후에 다시 펼쳐지게 된다.2.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Cyprian)스타크의 추정에 의하면, 주후 251년 기독교 인구는 120만 명에 조금 못 미쳤는데, 이는 제국 전체에서 1.9퍼센트 정도에 해당했다. 2세기 때와 비교하면 놀라운 성장이었지만, 여전히 교회는 제국의 마이너 그룹에 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또 다른 전염병이 발생해 교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그 전염병은 아마도 홍역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데,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질병이었음에도 사망률은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았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여러 마을이 버려졌고, 어떤 마을은 영원히 발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로마의 군대와 기간 시설은 전반적으로 쇠퇴했다. 바로 이 시련의 한복판에서 또 다시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은 이렇게 기록했다.“이 무섭고 치명적인 유행성 역병이 우리 가운데 정의로운 사람을 찾아내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니 이 얼마나 시기적절하고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든, 동족 간에 마땅히 그래야 하듯 서로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일이든 [중략] 의사가 환자를 버리지 않고 돌보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전염병은 우리를 ‘수색한다’. 우리 안에 (자기만 보호하려는) 육신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를 희생하려는) 성령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3세기에 발생한 그 전염병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 즉 성령에 이끌려 앞선 주인이 걸어가신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자들을 세상에 드러내었다.그리스도인의 치사율은 일반인의 치사율보다 훨씬 낮았다(단지 10퍼센트 정도의 치사율을 보였다. ‘단지’라고 하기엔 그조차 안타까운 수치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환자를 돌보는 자의 입장에서는 감염될 위험에 처하는 결과를 낳았고, 감염된 자의 입장에서는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죽음에 노출시킴으로써 더 풍성한 생명을 누렸다.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더욱 강해졌다. 더욱 강력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더욱 많은 수가 생존했다. 그 회복력도 더 강했는데, 다름 아닌 죽음 앞에서도 확고한 소망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공동체로서도 더 강해져서 각자가 직면한 고통을 통해 서로에 대한 결속이 더욱 끈끈해졌다.이처럼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한 소외된 운동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주후 300년경에 이르러 6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로드니 스타크는 전염병 확산이 그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는 답변을 제시한다.3.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14세기부터 흑사병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불과 5년 만에 유럽 인구 절반이 사라졌고, 그중 도시 지역은 감염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러한 역병은 이어지는 세기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했는데, 1527년 비텐베르크를 강타한 전염병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에 수많은 자가 도망갔다. 그러나 루터와 당시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남아서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 마태복음 25장 41-46절을 자신들의 지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 있어 누구도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도움을 받고자 할 때 기꺼이 그를 돕고 거들어 줘야 할 책임을 안고 있다.”루터는 도망가는 일이 용인되던 당시의 상황을 언급한다. 그는 자기 의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고 타인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다만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이제 우리만 몇몇 집사들과 더불어 남았으나, 그리스도 역시 함께 계시므로 우리만 남았다고 해선 안 되겠지요. 저 옛 뱀, 살인자, 죄악의 장본인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승리하실 거요. 그분의 발꿈치를 저가 얼마나 상하게 하였든 말이요. 다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며”(1527년 8월 19일자 편지).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사고 속에 사탄과 그리스도가 얼마나 뚜렷이 대조되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며(여기서 루터는 창세기 3장 15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염병 배후에 있는 자로 인식되고 있다.그와 달리 그리스도는 훨씬 더 강력한 분으로, 훨씬 더 현재 상황 속에 깊이 관여하는 분으로 인식된다. 그분은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이들 가운데 계시면서, 또한 아픈 자들 가운데도 계신다(마 25장). 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교회가 이겨 마침내 거머쥘 승리 가운데도 계신다. 그 승리에는 전염병에서 회복되는 일처럼 작은 의미의 ‘구원’ 사건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루터와 카타리나는 살아남아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 주었다.4. 런던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1850년대까지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유한 도시였으며 인구도 2백만 명을 넘었다. 그러다가 1854년에 콜레라가 발생하며 런던 시민들의 마음에 공포감이 조성되었다.당시 스무 살밖에 되지 않던 찰스 스펄전은 뉴파크스트리트 교회(New Park Street Chapel)의 목사로 부름을 받아 영국의 수도로 가게 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전염병이야말로 자기 자신과 런던이라는 도시를 알아갈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가 되었다고 회고한다.“우리의 마음이 민감하게 각성되는 때가 있다. 바로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을 때이다. 내가 처음으로 런던에 왔을 때,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였는지 떠오른다. 콜레라가 무서울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가볍게 조소하며 설교를 듣는 이가 거의 없었다.”스펄전은 그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한 사람을 방문하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그는 자신의 사역을 심히 반대하던 자였다고 한다.“그 사람은 생전에 나를 늘 조롱하던 자였다. 더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에 대해 위선자라고 하며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닌 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음의 화살을 맞게 되자, 곧바로 나를 찾으며 상담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자리하지 못했다. 비록 입술로는 그 사실을 고백하진 않았더라도 말이다.”세상의 기반은 늘 흔들리고 위태롭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종종,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는 폭풍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스펄전은 당시 전염병이 수많은 이들을 휘몰아쳐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를 찾아 도망치게 만드는 폭풍이라고 생각했다.오늘 우리는 어떠한가분명 이 시대는 이전과는 다르다. 그 차이가 있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가령 현대식 병원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문적으로 특화된 의료 시스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또 앞선 세대는 환자를 돌보며 그 병이 어떻게 전염되는지에 관한 지식도 거의 갖추지 못했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심지어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을 옮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사랑하려는 대상에게 병을 옮기기보다 차라리 자가 격리하는 편이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사랑이라면 말이다.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줘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세계 시장은 불확실하며, 우리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하시리라는 믿음 가운데 유일한 반석 되시는 그분을 세상에 전파하며 영화롭게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가며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아무쪼록 하나님이 이 시련의 때, 다시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 나라를 넓혀 가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길 기도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sponding to Pandemics: 4 Lessons from Church Hi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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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코로나19’가 주는 여덟 가지 교훈
by Mark Oden
2020-03-20
이탈리아 세 번째 도시인 나폴리는 내가 현재 거주하며 사역하고 있는 곳이다. 나폴리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이동이 폐쇄된 이탈리아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교회 예배를 포함하여 대규모 집회가 금지되었다. 결혼식, 장례식, 세례식 등 공적 모임이 모두 취소되었다. 학교와 극장, 박물관과 체육관 등 모든 공공장소가 문을 닫았다. 아내와 나는 방금 전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계산대 앞에서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이탈리아는 최근 ‘코로나19’ 누적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모두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18일 현재 확진자 35,713명, 누적 사망자 3,000명, 역주). 그 결과, 이탈리아 정부는 전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외출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대응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 답이다. 한편 우리는 이 폭풍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님,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우기 원하시나요?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려 하시나요?”라고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여덟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 인간의 취약성이번에 세계적으로 찾아온 위기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18일 현재 8758명 사망, 역주). 세계 모든 나라의 정부는 이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국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말았다.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하고 전파력이 더 빠른 바이러스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러한 위협에 처한다면, 과연 인류의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쓰러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시편 기자의 말이 진실하게 들린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혹은 ‘코로나19’]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이러한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이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은혜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2. 인간의 평등성‘코로나19’는 민족이나 나라의 국경에 상관없이 퍼지고 있다. 그것은 중국 바이러스가 아니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는 바이러스다. 아프가니스탄, 벨기에, 콜롬비아, 덴마크, 프랑스, 미국 등 150 여 개국에서 발생했다. 우리 모두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17). 우리의 피부색, 언어, 억양, 문화의 다름은 이 유행병의 눈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세계 각국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바이러스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똑같은 존재이다.고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인한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모두 완전히 평등하며 말할 나위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3. 통제력 상실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 잘 통제되기를 원한다. 운명을 다스리고 주도하고 싶어한다. 오늘날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중요한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현실이다. 가정의 난방이나 보안 시스템을 원격 조정할 수 있으며, 핸드폰 앱에서 손가락으로 몇 번만 클릭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지 송금을 할 수 있고, 운동과 약으로 몸의 건강 상태도 조절할 수 있다.하지만 삶이 그렇게 잘 통제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일을 경험하면, 어쩌면 그것이 거품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여기 이탈리아 당국은 이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 대책으로 학교를 폐쇄했다가 개방하고 이제는 다시 폐쇄하고 있다. 우왕좌왕 하는 당국이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 지 모두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우리는 어떤가? 살균제 스프레이로 무장하고 감염 위험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행동들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가? 단지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일 뿐이다.4. 소외되는 고통우리 교회의 성도 한 분은 며칠 전 이탈리아 북부를 방문했다. 나폴리로 돌아온 그녀는 직장 동료들과의 저녁식사 모임에서 제외되었다. 최근 북부 지방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 모임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위험지역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코로나 바이러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분명히 이러한 거리두기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나폴리 중심에 있는 한 레스토랑 주인은 최근 검진을 받았다. 그는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는데, 비교적 건강한 상태지만, 이웃사람들의 꺼리는 반응 때문에 슬퍼졌다고 말한다. 한 신문은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보다 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족을 대하는 방식이다”(Il Mattino, March 2, 2020).제외됨과 소외됨은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소외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들은 이 경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으며, 그들이 살던 마을을 지나가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다(레 13:45 참조).5. 두려움과 믿음의 다른 점현 위기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는 두려움에 휩싸이기가 매우 쉽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감염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널려 있다. 컴퓨터의 키보드, 들이 마시는 공기,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구석구석, 모든 것이 우리를 감염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공포를 느끼는가?이 위기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이다. 믿음은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어떤 무명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예수님만 이 상황을 다스리시고, 이 폭풍 속에서 우리를 잘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당부하신다.6.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필요성세계적인 위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이 때 스스로 무용지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나라와 도시를 관리하고 있는 당국을 위해 기도하자.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자. 확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집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기저질환이 있고 연로한 고위험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자.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새 창조로,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눈물과 아픔이 없을 곳(계 21:4)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7. 헛되고 헛된 삶“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현실의 삶에 몰두해 있다 보면, 균형적 관점을 잃기 쉽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람과의 만남과 각종 계획들, 일과 소망 사항들, 가정생활과 휴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과 긴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상 가운데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아마도 이번의 위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게 하는 듯하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하고 어떤 것이 헛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듯하다.이 위기는 삶에서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중요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나 새로운 주방시설이나 인스타그램은 내 생존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8. 우리의 소망어떤 면에서, “‘코로나19’를 맞이한 현 상황 속에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미 더 치명적이고 확산이 빠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경고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피할 수 없도록 모든 사람들을 공격한 바이러스 말이다. 이 바이러스는 그냥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는 죄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유행병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이 바이러스에 당면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성경말씀은 ‘죄’라 불리는 바이러스로 감염된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병자들과 함께 살면서, 방역복을 입지도 않고, 우리와 같이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 같은 음식을 드셨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아버지 하나님에게서도-제외되고 소외된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병든 세상에 이 바이러스 해독제를 주시고자, 우리를 치유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자.“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Things the Coronavirus Should Teach U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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