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이슈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세상은 놀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 이유
by 김형익
2021-04-08
세상에는 놀랄 일이 가득하다. 매일 전해지는 크고 작은 뉴스들은 정말 우리를 많이 놀라게 한다. 어쩌면 너무 많이 놀라서 놀람둔감증이라는 자기보호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30세 이상이 된 사람들 대부분은 20년 전인 2001년 9월 11일의 911 테러 뉴스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벌써 두 달 동안 미얀마의 쿠데타 세력에 의해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한다. 이 중에는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비슷한 사건의 뉴스들도 있다. 유아 학대 사건이 그중 하나인데, 그 부모들의 비정함과 폭력성에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뿐인가? 전도유망하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던 정치인들의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 뉴스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사건과 뉴스를 접할 때, 놀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거듭되는 실망감을 느끼곤 한다.연초에는 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인 장혜영 씨에 대한 당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사건 이후 장 의원이 밝힌 입장문의 한 부분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하고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출처: 중앙일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 성추행 드러낸 장혜영의 용기). 이런 솔직한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너무나 많은 정치인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이 가진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의 유능함이나 교양과 상관없이 성추행 관련 사건들을 터뜨리지 않았는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도 없다. 당장 서울과 부산, 우리나라 제1의 도시와 제2의 도시가 보궐선거로 시끌벅적한 것도 바로 그 종류의 사건들 때문이 아닌가? 또 이런 문제가 비단 정치인들에게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니다. 대학 교수, 학교 교사, ‘심지어’라고 말하기도 미안할 만큼, 목사들에게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고 있으니 말이다. 두 해 전부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N번방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일에 연루된 사람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소위 ‘멀쩡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랬을거야”라고 주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장 의원이 물은 대로, 그들 다수는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 유명 정치인이고, 대학 교수이며 목사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놀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그들은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를 물었다. 뉴스기사에서 그녀의 질문을 읽었을 때,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이 그토록 빈번하게 동일한 일에서 부끄럽고 참혹한 실패를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진작에 물었어야 하는 질문을 그녀가 정직하게 던졌구나 하고 느꼈다. 정말 솔직하고 진지한 질문이 아닌가?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런 정치인, 교수, 교사, 목사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터지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고,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종류의 뉴스를 보면서 마치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는 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놀라서도 안 된다. 죄의 유혹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야 어찌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들 앞에서, 마치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놀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보이는 세상의 모습에 놀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아담의 범죄가 온 인류에게 미친다고 말하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인간이 배운 지식, 인간이 쌓아 올린 교양과 일정 기간 동안 보여주던 도덕성 그리고 아무리 잘 다듬어진 성품이라도 그것들을 가지고 죄로 인한 자신의 부패성을 제거하거나 씻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죄책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죄로 말미암은 오염, 부패한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패한 죄의 본성은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 일생에 걸쳐 거룩함을 입어가게 된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범죄 사건을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다윗도 넘어졌다. 그러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다(고전 10:12). 그래서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어떤 성인군자가 성추행을 범했다는 뉴스를 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신자는 감당할 수 없는 지나친 기대를 사람에게 두지도 않는다. 이제 다시 그녀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그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그녀가 찾기를 원하는 답은 무엇이겠는가? 성경을 떠나서 우리는 그 답을 얻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내면까지 다 그럴듯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인간의 실존이고 딜레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 눈앞의 여성뿐 아니라 누구를 향해서든지 그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는 장치는 풀리고 만다. 더구나 눈앞의 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위, 교양, 체면이라는, 어느 정도의 제어장치를 작동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은밀한 자리에서까지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비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은밀하고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있고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느낄지라도, 눈앞의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즐거워할 때’ 말이다.”그녀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이 로마서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 세상은 결코 이 답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 그리고 죄가 인간에게 미친 부패성—죄의 오염—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특히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범하는 사건들을 들을 때에도 놀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죄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법과 제도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차별 없는 사회,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사회,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하지만, 언제나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에, 예루살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했던 말씀에 그 이유가 담겨져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2:19, 17:9).”
문화
사회이슈
놀람둔감증
아담
다윗
부패성
죄의오염
성추행
성폭력
미얀마
애틀랜타 혐오 살인 사건을 애통해하면서
by Julius Kim
2021-03-25
나는 오늘 처음으로 애틀랜타 지역의 스파 세 곳에서 죽임을 당한 여덟 명의 이름을 모두 들었다.다오유 펭현정 그랜트순자 김폴 안드레 미셸순 C. 박샤오지에 탄엘라이나 애슐리 연용 A. 유 이 이름들은 익숙한 만큼 또한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의 내력이나 배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것 하나는 있다. 이 여덟 명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놀랍고도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목숨은 이제 무모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내 사랑하는 가족들도 이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어 또한 슬프다. 내가 사는 곳은 그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져 있고 거기서만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는 남일 같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인 내 아내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들의 나이와 비슷하다. 18세와 20세인 내 딸들은 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아시아인에 대한 괴롭힘, 차별, 폭력 등의 인종차별을 당한 3,800명에 속할 수도 있었기에 불안과 걱정이 밀려온다. 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섭리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아내와 두 딸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이 명단에 있는 여덟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내 마음을 다독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너무나도 내 개인의 일처럼 느껴지고 너무 고통스럽다.성경은 하늘 아버지께서 알고 정하지 않으시면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진리를 가르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영원무궁하며 변하지 않는 분이며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정의 그리고 선과 진리이시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4).그래서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들어 있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고 통치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거나 믿을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절망에 빠질 것이다.'기독교 강요'의 특히 통찰력 있는 한 부분에서 존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평안과 자유를 준다고 말한다. “이전에 그를 압박했던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뿐만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중략] 그분의 위안을 말하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권능으로 모든 것을 유지하시고 권위와 뜻으로 통치하시며 지혜로 다스리시므로 그분이 정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1.17.10).칼빈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심지어 어두운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지혜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참새가 날아가고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 없이 되어지는 것은 없다(마 10:26-33)는 진리에 복종하면서 위로와 평안을 찾았다.고통하지만 칼빈은 또한 죄와 그 결과가 계속 우리 마음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알았다.성적 중독에 포로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개인에 의해 살인이 촉발된 것은 사실일지라도 이러한 변태적 행위가 아시아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그래서 살인을 이끈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유색인종, 특히 여성을 비인간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현실과 씨름해야 한다. 그 다음 이 사악한 행위를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봐야만 한다. 개별적 사건뿐만 아니라 상황적 맥락 모두를 살펴봐야 한다.그렇게 보면 내가 느끼는 고통은 피해자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과 편견의 고통을 겪은, 다르다는 이유로 비인간화되거나 무시되는 수치를 당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1871년 중국계 미국인이 몰매를 맞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아시아계에 대한 반감의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해 왔다. 내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고통과 수치심을 느꼈다.더욱이 상관관계가 항상 인과관계와 같지는 않으며,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란 범인의 어린 시절과 그의 죄악된 행동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따라서 더 많은 정보가 나오고 해석되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데 주의하고 싶지만, 살인자들이 조지아와 캘리포니아 출신이며 나와 비슷한 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기도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나의 신념은 내가 고통 속에서도 기도하게 만든다. 내 친구 마크 브르홉(Mark Vroegop)이 그의 책 “Weep with Me: How Lament Opens a Door for Racial Reconciliation”에서 가르쳐주듯이, 성경 중 특히 시편에 나오는 슬픔의 언어는 내 영혼의 깊은 신음 소리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슬픔의 기도는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고통의 기도는 신뢰로 이어진다. 눈물, 사랑, 단결은 오해, 불신, 상처를 치유해준다.”그래서 나는 우는 자들과 함께 계속 울고자 한다(롬 12:15). 이념이 아닌 긍휼로 시작할 것이다. 상처받고 무너진 이들을 계속 예수님 발 앞으로 이끌고, 복음을 통해 치유와 회복으로 이끌고자 한다. 우리가 함께 … 애통해할 수 있을까?내 주변의 모든 죄와 망가짐으로 인해 나는 복음이 필요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애통의 기도를 올리면서, 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걱정으로 호소할 뿐만 아니라, 온전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와 수치를 모두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나를 의롭게 하시고 양자 삼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좋은 소식에 나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 순례 여정은 고통으로 표시되지만, 신뢰와 순종으로 그분과 함께 계속 동행하고자 한다.이제는 어떻게 할까?이 비극을 내 안에서 처리하고 돌아보면서,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원한다. 종말론적 순례자로서 모든 부족, 언어, 민족, 국가의 형제자매들과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서 잔치를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의 어려운 여정을 고대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한 목소리로 새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 내 가족 특히 내 딸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과 걱정을 쫓아낸다는 것을 알도록 돕고 싶다.나는 더디 말하고, 빨리 듣고, 더디게 화 내기를 원한다. 특히 인종 차별의 역사와 고통,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그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지 이해하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려고 노력할 때 더욱 그러하다. 친절은 회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너무 지나친 자만과 절망이 기도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결국,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품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그런 다음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커짐에 따라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보화를 사용하여 가정과 교회, 기관과 지역 사회에서 더 많은 복음의 충실함과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한다. 마라나타. 오시옵소서 주 예수님.원제: Reflections on the Killings in Atlant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문화
사회이슈
인종차별
비인간화
마라나타
혐오살인
애틀란타
차별
편견
고통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맞아도 될까요?
by Keith Kauffman
2021-02-05
아담의 죄는 모든 피조물에게 파괴적인 저주를 불러왔다. 아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땅은 결코 쉽게 소출을 내어주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의 정원을 관리하라는 사명도 이제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피조계에 대한 인간의 통치는, 아담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순종한 순간 깨어지고 손상되었으며 불완전해졌다. 그러나 저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존재한다. 노동과 지식으로 아담은 여전히 땅에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종종 실패를 경험하지만 결국에는 성공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고 타락한 창조 세계가 우리의 첫 조상인 인류를 압도하고 질식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생계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생의학 연구의 장점이나 백신의 유익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삶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기술과 의학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 된다. 그리고 의학과 기술을 활용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에 비춰볼 때, 분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선물로서의 백신백신은 인간의 면역 체계와 인간의 몸이 위험한 병원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생물학적 의학 연구를 적용함으로써 얻어낸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몸이 위험한 이물질을 인식하고 기억했다가, 새로운 전투를 해야 하는 경우 그 경험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다. 백신은 환자에게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유기체의 양을 제공하여 신체가 실제 위험한 유기체를 만나기 전에 면역학적 기억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의 면역 체계는 단지 적의 모든 작전이 적힌 플레이북(역자 주: 미국의 미식축구에서 모든 상황에 필요한 플레이를 다 기록해서 선수들에게 지급하는 책) 한 권을 받은 게 아니다. 이제 당신의 면역 체계는 백신을 통해 적이 당신의 몸을 상대로 수행하려는 각각의 모든 플레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면역 체계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초기 인류가 농작물에서 더 나은 수확량을 얻기 위해 농업 기술을 배웠듯이, 연구자들은 타락이 초래한 또 다른 측면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백신의 유용성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타락이 끼친 영향에 맞서기 위한 다른 시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노력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생의학 연구도 수많은 암울한 날을 보내야만 했다. 백신은 때때로 불필요한 사망을 초래했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특정 백신 때로는 백신 자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작년에 우리는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COVID 백신의 유효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할 지 궁금해한다. 공개적으로 의문이 제기된 백신을 맞아야 할까? 백신이 너무 성급하게 개발된 것은 아닐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잘못된 지름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백신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낙태아의 줄기 세포나 조직 사용처럼,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생명 윤리적인 문제는 없는 걸까? 나는 COVID 연구원으로서 이러한 질문 중 일부에 답할 수 있다. 내가 백신과 관련해 어떻게 할 지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공유해야 한다.분열그리스도의 지체의 일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신과 관련한 결정이 우리를 분열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 분열은 얼마든지 가능한 큰 유혹이다. 이 전염병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기에, 다른 누군가가 그렇지 않은 것을 볼 때 화를 낸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는 백신을 맞는데 다른 교인이 안 맞는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질 수 있다.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바이러스 성 돌연변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나는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은 내 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만약에 내가 백신의 일부 측면이 성경적 원칙과 상충된다는 확신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는다면, 나는 백신을 맞는 다른 형제 자매의 결정을 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백신 문제와 같이 개인의 양심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 이런 식의 판단주의(judgmentalism)는 분명하고 위험한 죄다. 성령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관계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사랑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감염된 사람에게서 나온 바이러스 입자가 떠다니는 위치까지도 결정하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섬긴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일련의 공유된 태도, 추구, 확신, 경험 또는 정치적 신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연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무슨 라이온스클럽(편집자 주: 지녁 사회 봉사를 위해 조직된 실업인 연합 모임)이나 적십자 또는 구세군 회원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 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일 뿐이다. 백신이 제공하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해결책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해결책을 제공한다.흔히 듣는 질문에 대한 대답1. 너무 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백신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코로나19 백신 개발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그렇다고 꼭 필요한 과정을 생략한 것은 전혀 아니다. 백신 진행이 빨랐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모든 백신은 여러 임상 시험 단계를 거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1단계가 완료되기 전에 2단계 테스트(trial)를 시작하지 않는다.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야 하는 다음 단계가 들어가기 전에 일단 첫 번째 단계의 결과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의회로부터 받은 자금과 시험 시기에 대한 규제 감소로 기업은 여러 단계 시험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즉, 보통 몇 년이 걸리는 모든 임상 시험 단계를 몇 달 안에 완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개발하는 백신과 관련한 질병을 가진 자원 봉사자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드문 질병의 경우, 임상 시험을 완료하기에 충분한 자원자를 찾는 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경우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규모 임상 시험을 채우기에 충분한 자원자를 확보하는 데 고작 몇 주 또는 몇 달이 걸렸을 뿐이다. 2. 왜 공직자 중에서 백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코로나 전염병 이슈가 마치 하키 경기에서 각 팀이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점유하려는 하키 퍽(puck)으로 전락한 지난 몇 달 간, 양당(편집자 주: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인 게임은 극에 달했고,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두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백신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백신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3. 이번에 나오는 백신은 다른 백신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mRNA 백신은 무엇인가? 위험하지는 않은가? 대부분의 백신은 면역 반응을 높이고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제와 함께 약화된 유기체 또는 해당 유기체의 특정 단백질을 주입하는 것이다. 모더나(Moderna) 및 화이자(Pfizer) 백신은 세포에 단백질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청사진을 포함한 mRNA 조각을 주입하여 작동하는 방식이다. 세포가 mRNA를 흡수하면 COVID를 유발하는 유기체로부터 특정 단백질을 만든다. 그렇게 되면 면역 체계는 침입자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한 기억이 만들어진다. 투입된 mRNA는 세포 내에서 빠르게 분해되고 백신 접종 직후 몸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면역 상태는 지속된다. 다양한 연구 목적으로 지난 수십 년간 mRNA를 사용해왔고, 그에 관한 생물학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4. 백신과 관련한 기독교의 윤리적 문제는 없는가?생의학 연구에서 기독교인이 우려하는 가장 큰 윤리적 고려 사항 두 가지는 줄기 세포와 낙태아의 조직 또는 세포 사용이다. 이러한 주제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러나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낙태아의 조직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법률에 의거해서 그 사실을 반드시 알려야만 한다. 모더나와 화이자 백신은 낙태아의 세포주(cell lines)를 사용하지 않는다. 낙태아의 세포주를 생산에 사용하는 다른 백신이 개발 중에 있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찬반 양쪽 모두의 주장을 다 들었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백신 중에는 낙태아의 세포주를 사용하여 개발된 것이 많이 있다(예: MMR, 대상 포진, 수두). 5.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내 차례가 되면 나는 백신을 맞을 것이다. 연구는 믿을 수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백신을 맞지 않아야 할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나는 의학적인 이유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사람을 한 명 이상 알고 있으며, 또 비슷한 경우를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나는 백신을 맞을 수 없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지구에 퍼져있는 모든 바이러스 입자를 통제하신다. 이 위험한 질병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백신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천연두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백신을 통해 코로나19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길 기도한다. 알림: 이 글 속의 의견은 저자 개인의 생각이며 국가 공인 알레르기 및 질병 관리 센터, 국가 건강청 그리고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이 글은 단지 기독교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점을 밝혀둔다. 백신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는 의사를 만나서 들을 것을 권고한다.원제: The COVID Vaccine and Christian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회이슈
COVID-19
코로나백신
복음과백신
하나님의주권
mRNA백신
문화
건강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
by 정요석
2021-01-05
2007년 10월 가수 B씨와 간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A양은 간통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다음해 1월 간통죄의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10월 간통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 후 2013년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던 유부남 C와 여자 D는 간통으로 사법연수원으로부터 파면과 정직의 징계를 받았는데, 유부남 C가 이에 불복하여 간통죄의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다.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하여 2015년 2월 26일 형법 제241조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간통죄는 “헌법상 보장되는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한다.”라며 7대 2로 위헌 판결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결혼과 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변화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중요시하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간통행위에 대하여 이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비록 비도덕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그다지 크지 않거나 구체적 법익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없는 경우에는 국가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 형법의 추세고,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되고 있다.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형벌을 통하여 타율적으로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론지었다.그로부터 4년이 지나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제1항(의사낙태죄)이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판결하였다. 네 명의 재판관이 불합치, 세 명의 재판관이 단순위헌, 두 명이 합헌 의견을 내었다. 네 명의 재판관은 “자기결정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다. 자기결정권에는 여성이 그의 존엄한 인격권을 바탕으로 하여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활 영역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고, 여기에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임신상태로 유지하여 출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불합치의견을 내었다. 세 명의 재판관은 “임신 제일삼분기에 이루어지는 안전한 낙태에 대하여 조차 일률적, 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라고 단순위헌의견을 내었다.이에 반하여 두 명의 재판관은 “출생 전의 생성 중인 생명을 헌법상 생명권의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생명권의 보호는 불완전한 것에 그치고 말 것이므로, 태아 역시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태아가 모체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에게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소멸시킬 권리, 즉 낙태할 권리가 자기결정권의 내용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라며 합헌 의견을 내었다. 이들은 모자보건법이 다섯 가지의 정당화 사유 때에 낙태를 허용하여 여성의 인간 존엄을 배려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다섯 경우는 아래와 같다.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이처럼 현행 법률은 낙태를 무조건 금지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허용하고 있다.2015년 2월 기준으로 미국의 50개 주 중 21개 주는 간통을 여전히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 주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간통죄를 유지하는 것은 간통한 자들이 이혼소송을 당할 때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하도록 하는 이유가 크다. 미국의 간통에 대한 민사 소송의 판결과 사회적 비난은 매우 엄격하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1973년 1월에 7대 2로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시하였다. 그리고 2015년 6월에는 미시건,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 주의 항소법원이 판시한 동성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14조의 평등 원칙에 따라 동성결혼이 헌법적 권리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5년 2월 26일에 간통죄를, 그리고 2019년 4월 11일에 낙태죄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과연 언제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릴까?미국이 낙태죄 폐지에서 동성결혼금지법이 폐지되는 데까지 42년이 걸렸는데, 아마 한국은 이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것 같다. 이유는 한국이 국제화(?)의 물결에 크게 동참하고 있고, 무엇보다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0조에 근거하여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각 영역에서 존중하는 형태로 판결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이 동성결혼에도 적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참고로 헌법 제1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이고, 제2항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이다.믿음이 이성보다 우선적인 내적인식원리고, 성경이 법률과 전통과 문화와 학문보다 우선적인 외적인식원리라고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간통죄와 낙태죄와 동성결혼금지법이 성경에 합치된다고 여길 것이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간통과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지 찾아보는 일은 살인과 도둑질이 옳다고 쓰인 성경 구절을 찾아보는 것만큼 어렵다. 네덜란드의 성경학자인 핌 프롱크(Pim Pronk)는 게이임에도 성경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교회가 간통과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국가의 제도와 법과 문화가 제정되고 형성되면 우리나라는 사랑과 효율과 평안이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시대가 흐를수록 힘들어진다. 국민들은 헌법 제10조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옳은 의미로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견에 따라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는 데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이란 단어의 의미도 갈수록 개인 중심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앞으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과 과잉금지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사람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존재기 때문이다. 요사이 별의별 종류의 내용과 주장으로 이뤄진 유튜브 시청에 사람들이 쏟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려운 자신의 귀를 시원케 해줄 유튜버들을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구독하고 있다. 젊을수록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고, 개인주의적이고, 사랑과 정보다 법률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지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듣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소견과 숱한 스승들의 주장이 허망한 것임을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양심 소리를 듣게 되며 우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때 그들은 법과 제도와 문화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된다. 인생은 만만치 않고, 사회와 국가는 그들의 논리대로 평안하게 효율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사회와 국가는 다수결로 흘러가며 옳은 방향을 잃기 쉽다. 이때 우리가 쉬지 않고 전한 성경 말씀은 이들이 잊고 있었고 일부러 가리고 있던 본성의 감각을 일깨우게 되며, 사회의 제도와 법 제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음행자를 통한히 여기지 않으며 쫓아내지 않자 크게 책망하였다. 바울은 음행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음행자들이나 탐심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사는 것이므로 우리가 이들을 사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밖에 나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신자들은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속여 빼앗는 악을 행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외칠 때 동시에 교회 내부의 순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낙태와 동성애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습과 재정 횡령과 성적 일탈을 한다면 세상은 너희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함으로(신 5:32-33)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서로 교제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자신의 물건을 필요한 자에게 풍성하게 나누고, 사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물질과 정성으로 동참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고, 주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의 오용을 이겨내는 길은 매사를 성경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고, 매사를 자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위해서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화
사회이슈
간통죄
헌법재판소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
헌법제10조
생명권
낙태죄
동성결혼금지법
‘전파’와 ‘공개’를 통해 살피는 복음생태학
by 김돈영
2020-12-19
아침마다 확인하는 숫자가 심상치 않다. 요 며칠 언론에서는 연일 집단 감염 사례를 언급하며 확진자 수가 심상치 않음을 보도한다. 정부에서는 더 크게 확산하지 않도록 철저한 마스크 착용과 모임 자제 등 방역을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다. 상황에 따라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격상하는 등 강제적인 조치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저 지금 검사받고 왔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마디, ‘검사’라는 짧은 단어에서 전해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뭔가를 물어볼 여유도 없다. 머릿속은 멍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사무실 직원 한 명이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후배도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나 또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후배는 엊그제 일 때문에 간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다. 물론 마스크를 썼고 별다른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손을 맞댄 것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고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별일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며 여러 상황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배가 음성으로 판정받는다면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은 사라진다. 하지만 양성의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감염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상황이 머리에 그려진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며칠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다. 내 상황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와 함께 했기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도 하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실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 누가 사람을 만나러 다니겠는가, 누가 감염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전파하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염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전파자일 것이다.‘전파자’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하기에 더욱 그렇다.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등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전달하는 시간이 좀 더 많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과 신학적인 지식, 삶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 등 다른 이의 신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그런데 문제는 내가 전달하는 것이 바른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바른 것을 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애쓰고 노력할 뿐 완전하지는 않다. 아니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바르지 않은 것, 복음에서 벗어난 것을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바이러스 전파자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바른 신앙에 서 있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크건 작건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에서부터 자주 다니는 마트와 커피숍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전파하는 것이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 바른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수시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 말이다. 내게 있는 것이 전파된다신앙의 점검은 언제나 성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다른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갈 1:7)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 무게중심을 그리스도가 아닌 곳으로 슬쩍 옮기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인 양, 숨겨진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이 호들갑 떤다. 지금껏 없었던 것이라고 방법을 제시한다. 세련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옮긴 정도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다. 단 0.001만큼이라도 옮겼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일 것이다. 올바른 복음은 순도 100%,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한 ‘다른 복음’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다른 모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끝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을 뿐이다. 무증상 감염자일 뿐이지 감염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구별할 수 없는 것, 무게중심이 그리스도에게서 살짝 옮겨진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필 수밖에는 없다. 나를 확인하고, 주위를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유명한 누군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온라인과 유튜브에 쏟아지는 정보와 설교자들의 설교를 무턱대고 믿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매 주일 듣는 설교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교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누구라도 바른 복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들은 말씀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바울의 말이 정말로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행 17;11)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바른 복음 앞에 서기 위해서 말이다.어떻게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가?로마서 3장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난 것을 하나씩 개혁하는 것이다. 죄인의 생활을 정리하고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돌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시간, 그 유효기간이 너무도 짧다는 사실이다. 머지않아 또 집을 나가는 불량한 자녀라는 것이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한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죄인을 살리신 이의 법은 ‘오직 믿음의 법’(롬 3:27)이며,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롬 3:28)하고 의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지지 않도록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바울은 말한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도록,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로서 말이다. 바른 것을 가지고 바른 영향을 끼치는 선한 전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동선이 공개된다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딜 갔었더라’ 하는 것이다. 동선이 공개되는 것이다. 감염자는 그의 동선을 파악한다. 동선을 파악하여 다른 감염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역하는 것이다. 동선이 밝혀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고 큰일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감추었던 비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에게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 있다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분에 맞게 행동했는지, 거짓으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행적을 감추거나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불법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느 곳을 다녀야 하는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스스로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동선이 매일 같이 공개된다면 어떻겠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가? 아니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지금껏 다녔던 곳의 발걸음을 끊고, 그 흔적을 서둘러 지울 것인가? 누군가 보고 있기에, 동선이 드러나기에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면 스스로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어떤 다스림을 받는가?동선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식하는 것인가? 사람들의 이목, 그동안 만들어 온 이미지, 체면 등 주변을 의식하는 것이다. 공개하는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세상의 눈에 통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면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사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해 다녔든지 모든 행적이 투명한 유리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실내에 있든지 실외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혼자서 있든지 말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오픈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숨길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에 나만의 비밀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오래전 보았던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의 주인공 트루먼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일상이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기에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행동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행동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겠는가. 혼자 있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보는 눈을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고, 나만 아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우리의 모습이 트루먼 쇼의 주인공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완전히 공개된 공간, 드러난 동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선포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있어야 한다. 날마다 매 순간 계속되어야 한다. 내 입술의 선포로, 내 믿음의 고백으로 말이다. 그럴 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하며 나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결단했던 요셉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동선이 공개되어 돌아올 비난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의 심판을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만 한다.날마다 발버둥을 치다감사하게도 음성으로 판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가 되지 않았고, 숨기고 싶은 ‘동선 공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상황을 인식하고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언제라도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동선이 공개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코로나19의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말이다.그리스도인으로서 ‘전파자’가 되는 것과 ‘동선 공개’는 그 시한이 없다. 이 땅에서 숨을 쉬는 순간까지는 날마다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파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남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한 삶이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어진 마땅한 일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말씀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 날마다 발버둥을 치자!
사회이슈
집단감염
전파자
동선공개
다른복음
무증상감염자
트루먼쇼
음성판정
찾아가는 진리 vs 찾아오는 진리
by 정요석
2020-12-05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회를 떠나 10년간 방황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삼국지, 수호지와 같은 역사 소설을 읽으며 다양한 리더십에 관해서 배웠지만, 정작 깨달은 것은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허무감은 점점 심해졌다. 그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했는데 찾지 못하고, 중학교 졸업 무렵에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진리를 찾아 불교에 입문하였고, 대학교에 가서도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청년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열심을 내었다. 그때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요사이 ‘현각’과 ‘혜민’이라는 두 명의 스님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나와 동년배이자 같은 법명의 현각 스님은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장차 신부가 되길 꿈꾸며 성장했다. 하지만 신정론(神正論)의 의문을 갖던 중 16살의 동갑내기 사촌이 사고로 죽는 것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믿음에서 출구를 찾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 중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을 곰곰이 따져보면 결론은 결국 ‘하느님’과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신 앞에 홀로 던져진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수긍이 갔지만 결국 그 진리란 신을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멈칫했다.”그 후 현각은 “진리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오직 참선과 수행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에게 큰 감명을 받았고, 보스턴의 유명한 교회 목사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머슨의 “진리란 우리 안에 있다”라는 말에 심취하였다. 1989년 9월, 그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던 중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3년 후인 1992년 9월에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출가했다.현각은 기독교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진리와 구원을 얻고자 했다. 그는 아직도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득도하기 위해 여전히 하안거와 동안거라는 3개월간의 고행과 참선을 한다. 스스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이고, 자기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자력 구원의 모습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혜민 스님은 무소유를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풀(Full)소유’임이 드러나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현각은 혜민에 대하여 “그는 단지 사업자/배우뿐입니다. 진정한 참선하는 경험이 완전 없다고 합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2008년에 조계종 승려가 된 혜민의 비판 중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지난 12년 동안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는 기록이 승적에 없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스스로 진리를 찾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에 90일 동안 한 곳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한다.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리를 향한 치열한 정진이 적었다는 뜻이다. 현각이 혜민을 비판하는 것은 혜민의 풀소유 문제도 있지만, 하안거와 동안거로 대변되는 치열한 구도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거나,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다. 사람 중 마음에 떠오르는 순간적인 생각까지도 통제할 자가 어디에 있는가?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도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말하였다. 실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조차도 살인과 간음에 해당한다.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기에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로움에 이르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갈 3:10) 말한다. 외형적으로는 모든 율법을 늘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까지 모든 것을 늘 지킬 자는 아무도 없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저주하셨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도다.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롬 3:10-15). 사람들의 악독함이 얼마나 심하면 긍휼함이 풍성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8명을 빼고 모두 홍수로 죽게 하셨겠는가?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 나온다.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지, 절대로 선한 것이 나와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막 7:20-23).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다(고전 2:9). 타락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과 구원에 대하여 마음으로 개념조차도 갖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로 그 생명과 구원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시므로 우리가 깨닫는 것이지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생명과 구원을 알게 된다(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중학교 이후 10년 동안 허무함에 빠진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허무가 밀려오면 공부도, 운동도, 어떤 것도 즐겁지 않고 의미가 없었다. 허무감은 피부를 벗기고 뼈를 깎는 고통만큼 심하였고, 잡히지 않는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은 미혹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27살 늦은 가을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내가 찾은 줄 알았는데, 신앙생활을 할수록 그리고 성경을 알수록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두꺼운 미혹의 벽을 깨부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심어주셨다. 나는 한계가 분명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며 전적으로 그분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함이 내 마음에 가득 했던 허무함을 내쫓았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 8:20). 인생의 관찰력이 있는 자라면 인생이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은 자가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가장 복된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는 것이다.기독교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생명과 진리가 있다. 그것을 받은 신자들은 진리와 구원을 누리기 위해 그리고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진지한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 길마저도 우리의 의지와 행위로 걷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도우심으로 이룬다. 그렇기에 우리는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 모른다. 신자들은 성화의 길에서 종종 좌절하고 죄를 짓지만, 그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며 끝내 걷게 하신다(롬 8:28-30). 우리는 먼지와 같은 존재이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분을 영원토록 찬송하자!
문화
사회이슈
현각
혜민
쇼펜하우어
진리
풀소유
의인
피조물
허무
미리 생각해보는 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by David Mathis
2020-11-20
조만간 가을 추위가 겨울 추위로 넘어갈 것이다. 화려한 황금빛 들녘은 곧 하얀 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할로윈과 추수 감사절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앞으로 계절이 어떻게 바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시간, 잊었던 사랑하는 감정이 되살아나는 마법과 같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건 2020년이 되기 전까지 이야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가 지금 전 지구를 휩쓰는 전염병 시대에도 가능할까? 올해도 과거와 같은 크리스마스일까? 전염병만 아니라면 너무도 아름답기만 할 이 시간이 올해도 가능할까? 거리를 두는 크리스마스매일 매일이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지만 우리는 바뀌는 계절 가운데에서 익숙한 리듬을 느끼며 그 속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가장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생이 처해있을 때에 조차도 우리는 봄이 되면 눈이 녹고, 여름에는 태양이 가장 뜨겁게 빛나고, 또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며, 겨울이면 다시 눈발이 휘날릴 것이라는 사실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2020년 크리스마스는 누구라도 평생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수십 년간 우리는 익숙한 패턴에 젖어있었다. 물론 종종 황당한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것을 만나리라고,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크리스마스의 중심은 친구와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이사야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까? 정작 하나님은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는데 말이다. 불확실, 예측 불가전쟁과 같은 비극의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2020년 크리스마스는 가장 특이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는 결코 우리가 매년 12월에 기대했던 그날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애초에 그런 식으로 전개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기대와 위로에 맞춰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혼이 깨어난 우리가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있는 하나님의 방식과 생각을 깨닫는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마도 이번 크리스마스와 강림절은 비록 많이 늦었지만 우리로 하여금 오래 전 이 땅에 찾아왔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는지를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아마도 올해 2020년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이상적인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닌, 오래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놀라운 우여곡절과 더 조화를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는지 기억하라. 위대한 왕인 다윗과 그의 왕좌를 영원히 세울 통치자가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후 무려 천년이 지났다. 이사야가 임마누엘, 아이를 밴 처녀, 어깨에 정사를 짊어진 아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7:14; 9:6)라고 예언한 지 7세기가 흘렀다. 말라기와 히브리어 정경이 끝난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400년을 더 기다렸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약속한 메시아가 그토록 수 세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역사의 첫 조각을 움직이셨을 때, 아무도 나사렛을 추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사렛? 이스라엘 밖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그렇게 구석진 산간에서 좋은 것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훨씬 더 적었다. 갈릴리조차도 예루살렘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고?그리고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신다고?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고대인들도 이런 사실만은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것 없이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탄생할 정확한 시간에 마리아와 요셉을 다윗의 마을로 데려와 미가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미 5:2).그들이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 거룩한 아기가 쉴 장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눅 2:7). 예수가 누구인가? 다윗왕의 후손이 아닌가? 궁전에 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부유한 부모를 상상할 때, 차마 어린 양(눅 2:24)은 말할 것도 없고 비둘기도 사지 못할 만큼(레 12:8) 가난한 부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기인데 위대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태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천사가 방문한 건 초라한 목자들이었고, 천사가 그들을 인도한 곳은 마구간 구유였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멀리서 온 이방인 학자들이 도착했다. 심지어 베들레헴에서 고작 5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학자들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말이다.당신의 영혼을 꿰뚫는메시아의 가족이 유대를 떠나 이집트로 도망쳐야 했을 때 하나님은 또 얼마나 우리의 기대를 뒤집으셨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 노예의 태에서 나왔다. 이집트에서 그의 아들을 불러내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을 오히려 이집트로 부르셔서 요셉을 알지 못했던 바로와 같은 악마적인 폭군을 피하도록 하셨다. 마침내 성전에 있는 시므온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날카로운 말이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언급 정도로 쉽게 간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말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뿐 아니라, 그 메시아는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사건은 그 메시아가 죽음을, 그것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시므온은 마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당신의 영혼도 예외가 아니다. “내 영혼이 찔릴 거라고?” 아마도 그녀는 물었을 것이다. “잠깐, 뭐라고? 그런데 메시아가 찔릴 거라고?”첫 진짜 크리스마스인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졌던, 세계를 변화시킨 그 놀라운 힘에 익숙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아마도 우리는 연례 일과와 더불어 12월의 교회 이야기,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하 행사를 즐기면서 잠드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졌나 보다. 하지만 2020년의 크리스마스는 다를 것이다. 정말로 다를까? 예상치 못한 2020년 크리스마스와 강림절 서막은 우리에게 환멸보다는 더 큰 희망을 준다. 크리스마스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다시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뻔한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올해 하나님은 평생에 걸쳐 축적된 향수와 기대로 범벅이 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는 “당신의 크리스마스”를 12월의 번잡함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다. 아마도 올해 2020년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이상적인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놀라운 우여곡절과 더 조화를 이룰 것이다. 그런 크리스마스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일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크리스마스야 말로 오래 전 진짜 크리스마스와 가장 비슷할 것이다. 원제: Have a Holly COVID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사회이슈
크리스마스
첫번째크리스마스
시므온
전염병과크리스마스
빠름과 편리 대신 평안과 기쁨을!
by 정요석
2020-10-28
10월 27일 현재 한국의 코로나19 감염 사망자가 460명이다. 미국이 23만 명에 가까우니 한국이 코로나19를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확진자는 26,043명인데 비하여 미국은 857만 명에 이른다. 올해 2월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란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 등 4개의 상을 탔다. 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과 견줄 만하다는 ‘빌보드 200’ 1위를 BTS는 쉽게 기록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은 12위로 스페인과 호주를 앞선다. 미국 민간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가 발표한 ‘2019년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은 7위로 영국·독일·이탈리아 등 G7 국가를 앞선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손홍민은 현재 득점 1위를 달리고,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 김광현, 최지만 등이 크게 활약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경제와 군사와 문화와 방역과 스포츠 등에서 세계의 상위에 해당하는 국가가 되었다. 우리는 이 면에서 큰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의 2019년 자살자 수가 13,799명으로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이다. 최근 3년 하루 평균 36.5명이 죽었다. OECD 전체 37개국 평균의 약 2배이다. 10대와 30대의 사망 원인들 중 자살이 1위이다.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와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온 나라가 노력하여 457명 사망자라는 탁월한 결과를 거두었지만, 매일 36.5명이 자살로 죽는 어이없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사이 택배 기사들이 과로로 인하여 죽는 기이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자살과 과로사의 원인들이 무엇인지 분석하면 우리나라가 여러 분야에서 일류를 이루었지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15~19세 청소년들의 약 54%가 자살을 생각한 이유로 ‘성적·진학 문제’를 들었다. 수능고사 후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한 수험생들의 자살이 벌어지곤 한다. 그들의 성적은 하위에 속하지 않고 상위에 속함에도 sky라는 불리는 일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2등임에도 1등이 되지 못하기에 자살한다. 노인 자살률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1위인데 평균 3배로 높다. 인구 10만 명당 노인 자살률은 81.8명으로 미국 14.5명, 일본 17.9명이니 4-5배 이상으로 높다. 심각한 것은 최근 이십 년 사이에 자살 인구가 2배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혼자 사는 노인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더 좋은 집과 차와 위생 환경이 지난 이십 년 사이에 크게 향상되며 편안하고 깨끗하여졌지만, 오히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증가하고, 평안과 화목은 사라지고 있다.일부 연예인과 정치인과 운동인은 언론과 유튜브와 댓글의 지나친 비판과 악성 루머로 자살하였다. 언론과 팬의 정당한 문제 제기와 긍정적 비평은 필요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악랄한 비난은 살인에 가깝다. 얼마나 악성 댓글이 심한지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는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이미 작년 10월과 올해 3월부터 시행하였고, 올해 8월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도 폐지하였다. 국민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댓글이 지니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기능에도 불구하고 일률적으로 댓글이 금지되었다.과로사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가 10월 23일자로 14명에 이르렀다. 한진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11월부터 심야배송을 전면 중단하고, 전국 사업장과 대리점에 분류 작업을 위한 지원 인력 1천명을 단계적으로 투입하겠다고 10월 26일에 발표하였다. 왜 택배 회사들은 심야배송을 통해 새벽에 택배물이 도착하게 할까? 이것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짧은 유학 경험과 몇 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빠르고 편한 나라인지 경험하였다. 어떤 주문과 요구이든 빠르게 반응하는 한국의 회사와 공기관에 비하면 OECD에 속한 나라들은 한국에 비하여 상당히 느린 수준이다. 심야배송과 새벽도착이 이루어지려면 택배 노동자들이 야간작업까지 해야하니 노동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과 식당들이 있으려면 누군가 그 시간에 일해야 한다. 한 사회가 24시간 누리는 편리함과 빠름이 있다면 누군가는 그 편리함과 빠름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는가?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고 먹을 방법이 없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 카피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문장은 한국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잘 표현한다. 올림픽에서 2등이나 3등을 한 한국 선수가 기뻐하는 대신 슬픔에 빠져 침울하거나 우는 것을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외국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여하는 자체로 기뻐하며 즐기고, 게다가 입상까지 하면 메달색에 상관없이 좋아하는데, 우리나라 선수는 금메달이 아닌 한 실패로 여기곤 한다.편함과 평안은 다르다. 한국의 아파트는 디자인과 건축 자재와 동선 등에서 매우 높게 향상되었다. 1인당 거주 면적도 이삼십 년 전보다 넓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건축학적으로 더 넓고 깨끗하고 편리한 집들에서 산다고 마음까지 더 넓어지지 않고, 더 평안과 행복과 기쁨이 깃드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률에 있어서 한국은 거의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소통은 어떤가? 그 빠른 인터넷 망으로 악랄한 비판과 악성 댓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초등학생들까지 자신의 방에서 스마트폰의 웹툰과 유튜브와 카톡에 빠져 가족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오히려 가족들의 소통을 해치고 있다. 과학은 편리만이 아니라 부작용도 대부분 동반하곤 한다.필자는 대학생 3년부터 중1까지 다섯 명의 자녀가 있다. 우리 부부는 자녀들이 중학생이 되면 2G 핸드폰을 사주었다. 그런데 자녀들이 핸드폰이 생기면서부터 자신의 방에 들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곤 하였다. 그 전까지는 친구들이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부모는 전화를 자녀에게 바꾸어주면서 누가 자녀의 친구인지 알 수 있었고, 통화를 들으며 내용도 대강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이 생기자 바로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자녀들의 친구와 고민도 알 수 없었다. 고학년이 될수록 학교 수업에 스마트폰이 사용되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면서, 우리 부부도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었다. 그러자 자녀들이 자신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많아졌고, 가족과의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들 또래 문화의 영향을 더 받았다. 그만큼 성경을 접하고 묵상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가치관도 변해갔다. 우리나라는 경제와 군사와 문화와 방역이 발달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이고 기쁨이고 행복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에 대한 고찰과 대응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자살률과 과로사는 계속하여 높아질 것이고, 중요한 가치와 덕목들이 사라지며 국가의 총경쟁력과 효율성도 퇴보하게 될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사회에 좋은 문화를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한다. 과학의 발달과 상황의 변화는 삶의 형태를 다소 바꿀 뿐이지 본질적인 새 것을 주지 않는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는 잠언 1:4절의 말씀은 사람이 땅과 해와 바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이고,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10)는 말씀을 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과학과 경제와 문화의 발전이 편리와 빠름과 세련됨을 줄지 모르지만 오래 전 세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주지 않고, 더 큰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과학과 경제와 의료에 대한 허황된 과신은 오히려 큰 부작용을 가져온다. 빠름과 편함과 효율성을 행복과 평안과 기쁨으로 여기는 것도 큰 착각이다. 우리나라가 이삼십 년 전보다 더 행복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빠른 택배 시스템이 진정 우리에게 무엇을 배달해 주는지 그리고 다소 느린 택배 시스템이 정말로 불편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기독교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일등주의와 효율성과 부자와 강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빠르고 편하고 깔끔한 이 땅의 삶을 인하여 하늘나라를 소망하지 않게 만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자신의 편함과 높음이 아니라 이웃의 소외와 아픔과 뒤처짐을 챙기고 격려하도록 잘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종교들은 2등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의하여 느리게 살아가는 2등을 기억하고 격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아니고, 우로나 좌로도 치우치면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다(고후 13:8). 기독교는 사회에 효율과 편리와 빠름 대신에 진리에 대한 통찰을 선사해야 한다.
문화
사회이슈
코로나19
봉준호
BTS
손흥민
악성루머
스마트폰
자살
일등주의
왜 소셜 딜레마(Social Dilemma)인가?
by Trevin Wax
2020-10-24
정보는 넘치지만 지혜의 기근 속에 사는 것, 그게 오늘날 우리가 처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이다. 각종 기계를 통해서 쉬지 않고 정보를 습득하는 우리는 거의 항상 온라인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수록, 보다 지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또한 지혜의 마음을 가꾸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깊은 집중에 필요한 뇌 근육은 점점 더 약해진다. 정크 푸드로 머리를 채우는 우리에겐 이제 솔로몬 왕의 충고를 들을 마음도 또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다. 그는 “지혜를 얻고” 또 “명철을 얻으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지혜가 제일”이기 때문이다(잠 4:5-9).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전자 기기와 SNS 앱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스크린 타임”이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스크린 타임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애초에 인간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서(inform) 만들어진 게 아니라, SNS이 없이는 아예 살 수 없는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서(deform) 만들어진 SNS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유튜브,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그것도 심각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이런 앱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의 여부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 나온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가 화제가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 다큐는 소셜 미디어의 심리학을 다루는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그리고 유튜브 등의 회사들의 본질이 무엇인지(그 회사들이 얼마나 많은 광고를 하는지, 알면 정말로 놀란다) 그리고 또 이러한 앱이 왜 그렇게 중독성이 강한지를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를 위해 인터뷰를 한 몇몇 사람들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미 중요한 책을 썼고, 나는 그들이 카메라에서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에는 인터뷰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왜곡된 생각으로 인도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한 학생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드라마도 포함되어 있다.이 다큐가 왜 중요한지 몇 가지를 열거한다. 이 다큐가 많이 알려지게 된다면 끊임없이 온라인 상태에서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1. 어린이와 청소년이 소셜 미디어에서 경험하는 압력과 불안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한다.소셜 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친구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온라인에 연결되자마자 온라인 활동은 시작된다. 비록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또는 다른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라고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굳이 꼭 “소셜 미디어”로 간주되지는 않는 앱 때문에라도 오늘날 십대는 학교에서 일반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불안감과 사회적 압력을 느끼며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성경 앱인 유버전(YouVersion)에는 성경 읽기 계획 뿐 아니라 특정 구절에 디자인을 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기능도 들어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 구절에 대해서 댓글을 달 수 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채팅방도 있다. 다시 말해, 이제 성경은 하나의 소셜 미디어가 된다. 물론 이 앱을 쓰면서 소셜 미디어적인 기능을 최소한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앱을 쓰는 것은 소셜 미디어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내 자녀들에게 유버전을 열심히 추천했던 부모로서 나는 이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댓글 창에는 이런저런 농담 뿐 아니라, 특정 학생이 만든 아트 구절에는 “좋아요”를 눌렀는데 내가 만든 구절에는 누르지 않은 선생님에게 그 이유를 묻는 질문도 올라온다.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유버전은 성경 읽기, 사회적 불안, 또래의 압력, 대중 앞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나는 유버전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이건 정말로 놀라운 도구이다. 나는 단지 소셜 미디어적 본질(ethos)이 우리 주변 모든 것 속에 이미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사례로 언급했을 뿐이다. 2. 각종 기계가 우리 모두에게 중독의 원인이 되어버린 이유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소셜 딜레마는 우리가 왜 하루 종일 휴대 전화에 매달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앱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쉬지 않고 그것을 더 찾도록 디자인되었다. 알림 기능은 그런 기능 중 아주 사소한 한 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앱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콘텐츠를 계속해서 제공함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해당 앱의 플랫폼에서 시간을 소비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하도록 만든다. 뛰어난 알고리즘일수록, 내가 적극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높은 정보를 더 많이 뿌려준다. 온라인 게임도 비슷하게 설계되었는데, 더 많은 라운드를 뛰도록 만들기 위해서 적절한 보상 시스템을 제공한다. 그리고 결코 한 번에 모든 보상을 다 받을 수는 없게 만들어져 있다. 크리스 마틴(Chris Martin)은 다음과 같이 아주 탁월하게 이 다큐를 평가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헤엄치고 있는 물이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물은 아주 좋지 않다. 우리의 임무는 물을 정화하고, 독성을 더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당신이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페이스북 뉴스 피드에서 받은 정치적 게시물을 보라. 페이스북은 당신 속에서 열정을 일으키고, 그래서 댓글까지 달도록 할 뉴스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그런 충동에 저항하라. 인스타그램 또한 어떤 사진이 당신의 감각을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다. 똑똑한 물고기가 되라. 미끼를 덥석 물지 마라.” ‘소셜 딜레마’는 이런 제품을 설계한 사람들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통해 크리스의 이런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우리는 소셜 미디어가 인간 상호 작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더 잘 알아야한다.‘소셜 딜레마’에서 가장 좋은 내용 중 하나는 기본 인간 상호 작용이 좋든 나쁘든 간에 소셜 미디어로 인해서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얼마든지 로맨틱한 관계로 이어질 수도 또는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의견이 이제는 다 인스타그램 속 “좋아요” 또는 짧은 댓글로 대체되었고, 물리적으로 바로 옆방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이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 대신 스마트폰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소셜 딜레마’는 끊어지지 않는 온라인 연결로 인해서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또 왜 바뀌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4.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설계된 소셜 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만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얼마나 왜곡된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없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당신의 눈에 맞춰진 세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양극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모두가 똑같지 않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치 시즌이면 특히 더 소셜 미디어 앱을 통해 특정한 내러티브가 생성되고, 또 그로 인해서 우리가 가지는 정치적 인식이 형성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일은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내 뉴스 피드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와 사역자 또는 유명한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클릭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 알고리즘은 동일한 기독교 지도자나 사역에 대해 비슷한 비판을 가진 사람의 동영상을 추천한다. 그런 동영상을 보다보면 나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 이 사람에 대한 비판이 엄청난데?” 그 동영상이 비판하는 특정 교회나 특정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경우라면, 나는 자연스럽게 잘못된 정보를 믿게 될 것이다. 더 좋은 단어가 없기 때문에 이 단어를 쓰는데, 나는 결국 “가짜 뉴스”를 믿게 된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비디오나 기사를 공유함으로 온라인적 불일치가 아닌 노골적인 비방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목회자라면 교회 성도들이 정치와 관련된 음모 이론(QAnon은 많은 극우 음모 이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이든, 교단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든, 다른 목회자와 지도자에 대한 공격이든, 비록 일부라고 해도 거기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우려해야 한다. 왜 소셜 미디어인가? 소셜 미디어 조작에 맞서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당신이 조작당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가 성취한 일이다. 나는 넷플릭스가 올린 몇 가지 좋지 않은 프로들 때문에 결코 넷플릭스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스트리밍 서비스에 이 다큐멘터리를 추가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물론 아이러니하게도, 넷플릭스 알고리즘 때문에 내게 이 다큐가 추천되었다).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이다. 무엇보다 잠언 9장에 나오는 지혜(Lady Wisdom)에 주목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The Social Dilemma’ Matters번역: 무제
문화
사회이슈
소셜미디어
SNS
온라인중독
양극화원인
성경적지혜
QAnon
유버전
쇼셜딜레마
율법이 정한 손 씻기, 자가 격리, 마스크 쓰기
by 박용기
2020-10-15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0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3천6백만 명 이상이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1백5만 명 이상이 치료 중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비말감염과 접촉감염으로 전파된다. 비말감염은 감염자가 입을 벌려 이야기하거나 기침, 재채기할 때 체액이 작은 물방울인 비말로 튀어나와 상대방에게 감염된다. 접촉감염은 감염자의 체액이 묻은 물건이나 사람을 접촉함으로 전염된다. 이러한 바이러스 감염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약 3500년 전에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방역 규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공 보건을 위해서 율법으로 주어졌다. 1. 손 씻기 성경에서 손을 씻는 의미는 정결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남의 장소인 성막 안에 물을 담은 놋대야와 같은 물두멍을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들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손을 씻지 않고 성소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21). 시체를 만지고 자신의 몸을 씻지 않는 자 역시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민 19:20)이라고 말씀한다.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평생 손 씻기를 철저하게 지켰던 바리새인들에게 손 씻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막 7:1-7). 이 말씀은 손을 씻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육체의 정결을 위해 손을 씻으라는 말씀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은 직후 손에 묻은 수십 마리에 불과한 세균은 3시간 정도가 지나면서 일반적으로 26만 마리로 증가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권장하는 30초 손 씻기 방법을 참고하여 거룩한 손 씻기를 소개하겠다. 식사 전에는 거룩한 손 씻기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자. ① 깨끗한 흐르는 물에 손을 적신 후, 비누칠하고 손등과 손가락 사이 그리고 손톱 밑을 비누 거품으로 닦자. ② 최소 20초간 비누 거품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 20초 동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한 번 부르며 손과 마음을 동시에 씻자. ③ 흐르는 물에 비누 거품을 씻어낸 후, 타올이나 에어 드라이어로 손에서 물기를 말리자.2. 자가 격리 현재 해외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람은 모두 코로나19 진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그 결과가 음성으로 나와도 바이러스 잠복기를 고려하여 14일 동안 더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레위기 13장에서도 피부 감염병으로 의심이 될 때 14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첫 번째 7일째에 제사장은 의심 환자를 진단한다. 이때 음성을 판정을 받더라도 의심 환자는 추가로 7일 동안 자가 격리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레 13:4-5). 만약 피부 전염병 환자로 확진 판정을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 캠프 밖으로 나가 격리된 채,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6).가족 중 한 사람이 피부 전염병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공동체 캠프 밖으로 보내져 격리된 채로 평생을 살게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나와 가족만 생각한다면 전염병 사실을 감추고 생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레위기는 전염병 진단 기간에 있는 자는 예배드리러 나가지 말고, 14일간 자가 격리를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22:37-40). 레위기에서 전염 병균은 죄를 상징한다. 영문 밖으로 쫓겨난 전염병 환자는 범죄하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아담과 오버랩 된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고 격리된 인간은 결국은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죽게 된다. 예수님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다. 그곳에서 부정한 자로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죽임 당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가 부정한 자로 고난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길을 열어주셨다. 3. 마스크 쓰기 피부 전염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은 자는 “윗입술을 가리고 …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한다(레 13:45). ‘윗입술을 가리고’를 NIV 성경에서 ‘cover the lower part of their face’로 표현했는데, ‘그들의 얼굴 아랫부분을 덮고’라고 번역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스크를 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얼굴 아랫부분을 덮는 것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한다(레 13:45; 겔 24:17; 미 3:7). 마스크를 써야만 공공장소에 갈 수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매우 답답하고 슬프다. 마스크로 답답함을 느낄 때 죄가 우리의 영혼을 수치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슬프게 함을 떠올리자. 예수님만이 슬픔의 마스크를 벗겨 주시고 찬송의 옷(사 61:3)을 입혀 주시는 분임을 늘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이 죄에 감염되지 않도록 거룩한 영적인 방역 활동도 병행해야만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사회이슈
손씻기
자가격리
마스크쓰기
세계보건기구
코로나19
팬데믹
이웃사랑
사회적거리두기
처음
이전
11
페이지
열린
12
페이지
13
페이지
14
페이지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