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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실’과 ‘너의 사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알 수...
by Samuel James
2022-02-21
가짜 뉴스 및 허위 정보의 문제와 더불어 그 해결책을 제시한 조너선 라우시(Jonathan Rauch)의 책 ‘지식의 헌법: 진리 수호’(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를 생각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1997년 영화 ‘맨 인 블랙’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부 요원 K(토미 리 존스)는 외계 생명체를 은폐하고 통제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J 요원(윌 스미스)에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K는 신문 가판대로 J를 데려가더니 타블로이드 더미를 가리킨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채로 태어난 아이들, 여전히 살아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위치타에서 공연을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전하는 그런 선정적 출판물들 말이다. K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상에서 최고의 조사 보고서지. 뭐, 원하면 뉴욕 타임스도 읽어봐. 운이 좋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것은 단지 절묘하게 구성된 재미있는 대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이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그건 당신의 세계관에 달려 있는가? 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 관한 논문을 읽고, 또 실제로 아는 사람은 또 다른 논문을 읽고 있지 않은가? 현대 서구 문화에서 이것은 공상과학 여름 블록버스터의 단순한 줄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위기에 수반되는 질문들이다. 지구로 이주하는 외계인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야 아마도 없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자 잡지 애틀랜틱(Atlantic)의 기고 작가인 조너선 라우시는 이런 사회적 위기가 끝날 때라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보호하며 촉진하는 사회적 계약의 회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계약을 형성하고 보호하는 공동체는 “현실 기반 공동체”로 알려져 있으며, 증거에 근거한 사실을 추구하고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두터운 네트워크이다. 라우치는 이런 공동체가 “지식을 만드는 데에는 옳거나 그른 방법이 있다는 공유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5). 이러한 현실 기반 공동체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헌법(Constitution of Knowledge)이 나오게 되며, 그것은 대중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기본 합의가 되는데, 그 결과 대중적 담론에 필요한 조건이 형성된다.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지식의 헌법)조너선 라우시그릇된 정보. 고의적 논쟁, 악의적 선동. 음모. 소셜 미디어를 통한 집단 공격. 캠퍼스의 편협함. 표면적으로만 봐서는 최근 일상 어휘에 추가된 이런 용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를 인식적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고 거짓보다 진실을 높이는 미국의 능력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다. 이 획기적인 책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18세기 자유 민주주의와 과학 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지식의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 즉 불일치를 진실로 바꾸기 위에 필요한 사회 시스템을 설명한다. 지식의 헌법을 설명하고 현실과의 전쟁을 조사함으로써 라우시는 진리의 옹호자라면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라우시의 이 책은 모든 미국인이 러시아만큼 멀리 있는 동시에 휴대폰처럼 바로 곁에 있는 위협으로부터 객관적인 진실을 방어하고 자유로운 탐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포괄적이고 읽기 쉬운 설명이다.BROOKINGS INSTITUTION PRESS. 280 PP.현실 기반 공동체 라우시에 따르면, 이런 공동체는 진지한 사고를 추구하는 모든 지적 분야에 존재하며 “현실 기반”이라는 지식 표준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다른 구성원의 작업에 일관되게 적용함으로 진리 추구라는 대의에 기여한다. 이것은 경험주의 회복이라는 계몽주의에 그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철학자 찰슨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와 그의 “실용주의”에 크게 의존하는 라우시는 가짜 지식을 실제 지식에서부터 구분하는 것이 반증의 원리(principle of falsification)라고 주장한다. 충분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추론하려는 모든 사람을 궁극적으로 설득할 수 없는 주장은 현실 기반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 기반 네트워크는 생태계처럼 작동한다. 검증된 명제의 생산과 관련해 인간이 그 구성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통제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현재로서는 최선의 실재(reality)이다”(87).따라서 지식의 헌법은 언론을 보호하고 악의적 행위자를 걸러내며 진리에 대한 특권적 주장을 방지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럼 그런 현실을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라우시의 이 책은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선언문이다. 라우시의 비전에서 인식론적 왕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객관성, 오류가능성(fallibilism), 그리고 불일치 및 기타 근본적인 인식론적 주장(commitments)을 고수하고 방어할 책임을 가진다. 양극화를 넘어선 미래라우시의 현실 기반 공동체는 진짜 좋은 것을 성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공동체는 권위를 희석하는 인터넷의 폭정에 단호히 반대하며, 당파적 약속이나 수익성을 노리는 조회수 미끼가 진실을 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기와 반직관적인 관점만을 근거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부정적 인식론과 집단 사고에 대한 열정적 주장으로서, 라우시의 이 책은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알고리즘과 엘리트주의를 초월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자극한다. 지식의 헌법이 다루는 문제는 위기 식별이 아니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 제안이다. 라우시에게서 건전한 인식론 현장의 본질인 실용주의는 심각한 상상력의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는 진리, 선, 아름다움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그다지 인식하거나 염려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건 아마도 현실 기반 공동체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쓰는 “현실 기반”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학력주의(credentialism)와 대중 지식의 문지기로서의 전문가 합의의 중요성에 대한 라우시의 강조는 그를 대중의 신뢰뿐 아니라 제도적 무결성의 위기, 그리고 현재의 사건으로부터도 크게 동떨어진 사람으로 만든다. 실용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라우시는 현실 기반 공동체의 승리를 독단주의에 대한 경험주의의 승리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 기반 공동체의 핵심 가치는 정의(definition) 상 신이 있을 여지뿐 아니라 기적 또는 초월적 사건도 배제한다. 라우시는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실 대 진실이라는 이분법을 제안하며 이를 막으려 한다. 진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도덕적 실체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말할” 자유가 있다. 대조적으로 사실은 아홉 가지 인식론적 약속으로 판단할 수 있고 또한 판단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진술이다. 라우시에 따르면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진리의 영역을 떠나 사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우시는 핵심 섹션에서 “지식의 헌법이 공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 사적 믿음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썼다. 비유하자면, 미국 헌법은 미국 중앙 정부에 대한 규칙을 설정하지만 가족을 운영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커뮤니티를 조직하거나, 우리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규칙은 명시하지 않는다. 헌법은 단지 헌법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지식의 헌법은 개인이 여러 종류의 개인적 신념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을 만든다(115).바로 여기에 라우시 접근 방식이 갖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그의 방식이 이미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유명한 주장인 “비중첩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l, 역자 주: 종교는 ‘왜’라는 질문에, 과학은 ‘무엇’과 ‘어떻게’라는 질문에 각각 대답을 주는 고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제이 굴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을 접한 사람이라면,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라우시의 비전에서 동일한 느낌을 받아야 한다.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적으로 존경받는 굴드의 책 ‘시대의 암석: 충만한 생명 속의 과학과 종교’(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Fullness of Life)은 1999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출간했다. 이 책은 개인 차원으로 믿는 종교적 신앙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다른 책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굴드와 라우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도킨스가 이해하는 것은 종교적 계시라는 주장이 결코 삶에서 동떨어져 어느 경건한 구석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도킨스는 종교를 지적 삶의 주변부로 격하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미소를 지으면서 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라우시의 사실 대 진실 이분법은 철학적으로도 건전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미국 헌법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종류의 개인적인 신념”을 허용한다는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 건 헌법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수용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단순히 효율성의 네트워크가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인간의 타고난 타락에 대한 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권력 분립을 하는 이유), 악을 통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강제적 법 집행 메커니즘이 필요한 이유), 또한 공정성과 공평성의 선함도 인지하고 있다(법원의 존재 이유). 또한 미국의 경우에 모든 인간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고 확신한다(생명, 자유, 행복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 그러나 이러한 믿음 중 그 어느 것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그것들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라우시 자신의 인식론적 범주에 따르면 지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학력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라우시 주장의 두 번째 큰 문제는 현실 기반 공동체가 비현실에 굴복할 가능성에 대해 이상하게 침묵한다는 점이다. 라우시의 이 책 대부분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책 속에 지난 2년 동안 공중 보건 공무원이 시민을 이끌거나 계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가 없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이, 팬데믹은 라우시가 자주 찬양하는 제도와 학력주의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학력주의 형태의 공공 지식 시장이 궁극적으로 자체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옳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자체 수정의 비용은 그의 생각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잊기‘맨 인 블랙’은 반전으로 끝난다. 비밀과 고독 속에서 보낸 세월에 지친 K 요원은 J 요원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그에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잊는 것이다. 나는 서구 사회가 기억을 지우고 싶은 이 K 요원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자율성과 표현적 개인주의 감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더 큰 존재에 우리 존재를 묶게 하는 현실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은 대체되어야 한다. 결국 내가 아는 사실과 당신이 아는 사실의 차이가 빚어내는 인식론적 위기는 세속화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진리 상태에 관해 경고를 했다는 점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바른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현실 기반 공동체는 실용주의자의 기계 같은 것이다. 현대 사회와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뢰 사이에 서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과학적 또는 기술 관료적 전략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전문 분야에 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이 단지 도널드 트럼프나 트위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덕적 추론 방법의 실용적 부재는 지식 헌법이 정작 진리 제공자 없이 진리를 찾기 위한 또 하나의 장황한 시도로 끝나지나 않을까 우려하게 한다. 원제: My Facts Versus Your Facts: Can We Really Know Truth? (Review: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by Jonathan Rau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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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도킨스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by 김선일
2022-02-19
요즘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성세대와 대조하는 가장 가벼운 표현은 ‘개인주의’일 것이다. 필자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화되고 삭막하다는 푸념을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인간 개인이 자기의 존재 가치를 독립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서구 사상의 최대 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는 집단과 전통의 부분에 불과했던 자아가 독립적인 주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한 근대적 자아의 탐구가 200년 이상이 흐르면서 이제 우리 사회에도 뚜렷한 신념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 김난도와 공저자들은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2022년의 대표적 트렌드를 ‘나노사회’라고 표현하며, 이 나노사회가 우리가 경험할 변화의 근인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 “나노는 10억 분의 1을 뜻하는 접두사로, 보통 원자나 분자 단위를 측정할 때 쓰는 단위다. 사회가 공동체적 유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유기체의 기본단위인 분자 또는 원자, 곧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쪼개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1쪽). 나노사회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초미세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다. 개인의 자아도 특정한 집단이나 명분에 종속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중된다. 그간 사회 곳곳에서 기존의 틀로부터 해방되는 개인의 몸부림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직장에서 퇴근 후 단체 회식 문화가 사라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근무 시간 중간의 점심식사도 자기만의 시간으로 삼으려고 한다. 엄마이자 주부로서 가족을 위한 의무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모습은 중년 여성들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된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 하더라도 각자의 통장은 그대로 유지하며 공동의 생활비용을 합리적으로 분담하는 ‘따로 함께의 삶’을 실천한다. 물론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장기화가 우리에게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살아가는 삶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추구하는 가치관은 코로나가 창출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지속되어 오던 흐름이 코로나로 인해서 성큼 앞당겨진 것뿐이다. ‘나’ 중심의 시대적 트렌드는 우리 사회를 더욱 세분화할 것이다. 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은 그의 책 ‘그냥 하지 말라’에서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 현상을 “분화하는 사회, 혼자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거대한 가속’의 저자 스콧 갤러웨이도 이를 마이크로 세대라고 불렀다. 누구보다 자기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표현하는 것이 최대의 미덕으로 부상한다. 이 모든 나 중심의 현상을 총합하면 ‘슈퍼 개인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가 만들어 준 혼자만의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셀프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수제품을 의미하는 크래프트 맥주, 크래프트 커피, 크래프트 옷이 SNS에 열풍처럼 등장하며, 자기만의 경험과 성취를 보여 주는 징표가 되었다. 남이 부여하는, 또는 남과 함께 만드는 행복이 아니라 셀프 행복이다. 지난 몇 년째 불어 닥친 MBTI 열풍도 특이하다. MBTI가 소개된 것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MBTI 진단이 필수가 되었다. 사주, 운세, 타로점을 보는 젊은이들도 늘어난다. 이에 대해서 미래전문가 김용섭은 ‘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 젊은 세대는 과거에는 자신의 인생을 위한 조언과 위로를 종교나 가족에서 찾았지만, 이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찾은 것이라 한다(276-277쪽). 과연 위로가 될는지, 과연 의미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만, 어쨌든 자신을 위한 정신적 위안거리를 찾는 방식임은 분명하다. 얼마 전 한 TV 방송에서 한 젊은 기자가 “점심 한 끼 2만원 시대”를 몸소 시연했다. 그런데 점심에 해장국을 먹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오전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오후에는 꽤 고급스런 아이스크림도 필수로 포함시킨다. 이 뉴스가 나온 뒤 취지와는 달리 아이스크림까지 포함시키는 점심 끼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 댓글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불균형이 이미 부와 소비를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위한 마땅한 보상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개인의 선호와 취향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정치나 국제질서와 같은 거대담론에 무관심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바꾸는 것에 더욱 참여적이다. 따라서 슈퍼개인은 행동하는 자아이며 변화를 위해서 연대하는 자아이다. “돈쭐내기”는 행동하는 자아의 연대를 잘 보여 준다. “갑질” 하는 매장은 불매 운동을 하지만, 선한 주인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다들 가서 매상을 올려주는 돈쭐내기 인증샷을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도 한다. 작은 행동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행동 연대를 하는 의미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증대하는 슈퍼 개인이 되었다. ‘트렌드 모니터 2022’은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가리켜 ‘강력한 영향력을 원하는 슈퍼 개인’의 등장이라고 명명한다.슈퍼개인의 시대를 단순히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로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르다. 현재 집단과 위계로부터 개인이 자기를 찾아가는 시간이자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슈퍼개인의 시대, 또는 나노사회, 사회의 분화 현상에는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모래알과 반향실 현상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조각조각 모래알처럼 흩어졌다가 비슷한 생각과 취향을 가진 이들끼리 자기들의 소리만을 반복해서 듣고 호응하며 다른 의견들은 차단하는 반향실(echo chamber)로 재집결하는 것이다. 예민한 사회, 정치적 이슈가 부각되면 이러한 반향실 효과는 극심해진다. 이는 앞으로 우리에게 묵직한 공동체적 과제를 안겨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하겠다.)이러한 슈퍼개인의 시대와 기독교 신앙이 조우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 공공신학 등의 용어들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 교회가 개인구원, 내세신앙, 기복주의에 연연해서 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공적인 의식을 함양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동의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존재됨을 재각성해야 한다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상하는 신앙의 공적 역할에 대한 강조가 본의 아니게 한 개인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성경은 절대군주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 취급되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개인의 존엄함을 인정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 신약성경은 할례와 혈통에 의한 선민사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개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언한다. 개인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 나라의 공적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미 신약성경에서는 전통과 제도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존재로서 개인을 존중한다.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한다. 이는 계급을 초월하는 기독교적 형제애를 반영하는 개별적 정체성의 존중을 암시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음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이라는 바울의 선언은 또 어떠한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도의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상호 협력한다는 말씀도 개개인의 은사가 성령의 선물임을 시사한다. 성경에서 순종이나 복종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위계 구조 안에서 무조건적 지배와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 복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가부장제의 전형처럼 일방적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는 대전제를 제시한다. 이는 전통적 위계질서를 근원적 층위에서 해체하며, 가족 안에서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인데, 교회가 전통적인 끈끈한 연대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다. 교회가 위계와 차별을 고착화하는 세상의 규범에 포로가 되었다면, 이는 뼈아프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아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일원으로 형성시키는 공동체라면, 슈퍼 개인의 시대는 교회에게 새로운 선교적 도전이 될 것이다. 이전 글: •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다음 글: •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복음중심적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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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일
2022-02-12
새해 첫머리에는 그해의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트렌드에 밝다고 하면 시대의 변화나 유행에 민감하고 개방적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덕스러운 풍조에 부화뇌동하는 얄팍한 뉘앙스도 풍긴다. 그래서 서점에서 “2022 트렌드”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은 시선을 끌긴 하지만, 막상 집에 모셔다 놓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설 때가 많다. 하지만 트렌드가 그냥 지나쳐도 될 만큼 사소해 보이지도 않는다. 미래학이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중장기 예측이라면, 트렌드 분석은 이미 일어난 변화의 단기적 방향에 주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렌드는 발자국과 같다. 모래사장에 찍한 발자국을 보면 어느 정도 크기의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볼 수 있듯이, 트렌드 분석은 남겨진 흔적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22년 트렌드 전망은 2021년의 흔적을 토대로 한다. 2021년의 흔적 또한 앞서 전망했던 2020년, 2019년, 혹은 그 전부터 이어져 온 공통 흐름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현재 2022년의 트렌드로 제시되는 현상들은 이미 조짐이 일어났고 앞으로 더욱 본격화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필자는 네 권의 트렌드 저서들을 살펴보면서 주요 현상들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책은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주도하는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22’이다. ‘트렌드코리아’는 매년의 띠를 중심 이미지로 삼아서 로고를 만든다. 예를 들어, 호랑이 해인 올해는 ‘호랑이가 될 것인가, 고양이가 될 것인가?’(Tiger or Cat?)라는 로고를 만들고, 영어 문장의 각 알파벳들을 이니셜로 조합한 10대 트렌드를 제시한다. (알파벳 글자가 총 10개이기 때문에) 트렌드코리아는 김난도라는 명사를 앞세우며 가장 선제적으로 이슈 선점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소비트렌드분석센터라는 정체성이 말하듯 소비성향과 마케팅 전략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로 비중 있는 트렌드 서적은 날카로운연구소 소장 김용섭의 ‘라이프 트렌드 2022’이다. 김용섭 소장은 2013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트렌드 분석서를 내놓는 내공을 보여 주고 있다. 라이프트렌드는 최신 문화적 유행 현상들과 언론의 보도들을 수집해서 나름대로의 변화되는 생활 패턴들을 주목하고 있다. 앞서 트렌드 코리아가 소비마케팅의 관점이 강하다면, 라이프 트렌드는 그동안 가족, 관계, 결혼, 정체성 등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세 번째로 눈여겨 볼만한 자료는 ‘2022 트렌드 노트’인데, 이 책은 과거 다음의 계열사였다가 독립해서 나온 바이브컴퍼니의 생활변화관측소에서 펴내고 있다. 국내의 최고 빅데이터 권위자인 송길영이 바이브컴퍼니 부사장이기 때문에 트렌트 노트의 분석 또한 빅데이터와 키워드, 연관 검색어 등을 자료로 삼는다. 끝으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으로 활동이 많은 엠브레인의 ‘2022 트렌드 모니터’이다. 트렌드 노트와 트렌드 모니터 모두 생활 문화의 변화들을 주로 조명하는데, 트렌드 노트가 주로 빅데이터 중심의 자료들을 취합한다면, 트렌드 모니터는 자체의 다양한 설문조사들을 근거로 한다. 트렌드 노트가 비정형화된 통계를 통해서 사회와 의식의 변화를 살펴본다면, 트렌드 모니터는 설문조사 결과들을 분석하는 정형화된 통계에 의존하는 편이다. 앞으로 7회에 걸쳐서 이 네 권의 대표적인 트렌드 저서들에서 나타난 2022년의 주요 흐름들을 취합하며, 이에 대응하는 선교적 고려사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7가지의 주제들은 네 권의 책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빅 트렌드, 곧 큰 발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 발자국들은 다음과 같다. • 슈퍼 개인의 시대: 사회의 파편화와 개인의 확장 시대• 일상의 재발견: 루틴과 습관의 개발• 생태적 라이프스타일 • 메타버스의 가속화• 세계관과 내러티브의 즐거움 • 진화하는 관계: 가족과 공동체의 미래 이와 같은 주요 트렌드들이 2022년에 지속적으로 비중 있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줄지 아니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지 예단할 순 없다. 세상을 향한 증언과 섬김이라는 선교의 과제가 유행하는 트렌드들을 쫓으며 대응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하지만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고서는 복음이 인생과 사회에 주는 심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 트렌드는 너무도 쉽게 변화하는 통속적인 문화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필자 스스로도 트렌드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선교적 의미를 탐색할 때마다 갖게 된다. 트렌드를 알아야 복음 전파의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필자는 트렌드를 통속적인 문화현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통속성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대면하는 다양하고, 때로는 찰나적인 문화적 경험들이다. 인기를 끄는 노래, 드라마, 영화, 방송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투, 패션스타일, 소비패턴 등도 통속적인 층위에 있다. 이는 특정한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기쁨, 슬픔, 분노, 행복, 염원 등의 감정을 담고 있다. 종교사회학자 고든 린치(Gordon Lynch)는 일반적으로 신학적 분석이 텍스트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으나, 매일의 경험과 관습들로 이루어지는 통속적 문화 콘텐츠야말로 신학적 진단이 요청되는 중요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Understanding Theology and Popular Culture, 15). 트렌드의 변화와 부상을 볼 때마다 우리는 복음이 적용되는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비록 최신 트렌드를 장착하진 못하고, 그러한 트렌드를 기민하게 선교에 응용하진 못할지라도, 트렌드가 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치와 욕망에 대한 복음의 대답을 고민하는 것은 복음 사역의 소명을 지닌 자들이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복음의 핵심과 표현을 구분한 바 있다. “복음은 모든 다양한 형식 속에서 존재한다.” 복음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 어느 사람에게도 다양한 형식 속에서 진리를 선포한다. 우리의 신념과 라이프스타일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전히 적실한 답을 제공한다. 트렌드를 이해하고 선교적인 접촉점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복음의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측면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음 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복음중심적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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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죄’도 있다
by Trevin Wax
2022-02-10
최근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제도적” 또는 “구조적” 죄의 존재를 두고 열띤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특별히 노예제를 예로 들어 설명되곤 하는데, 과연 죄를 사회 구조에 ‘떠넘기는 것’은 합당할까? 아니면, 죄는 순전히 개인의 영역일까? 제도적 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제도적 불의의 예로 과거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들며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사회의 법이 바뀌었으므로 “제도적 인종차별”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반기를 든다. 인종편견과 싸우기 위해서는 개인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어떤 이는 제도적 불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들은 “사회 정의”라는 말만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의 불순종은 삭제된 채 죄를 재정의하게 될 위험이 있다며 주의를 준다. 제도가 개인을 압도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억압받는” 사람들(소수)은 그들이 받은 억압 때문에 당연히 의인이 되고, “억압하는” 사람들(다수)은 그들의 특권 때문에 당연히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속한 환원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입장(정당한 반대)에 선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죄와 회개 이외의 개념에 대해서까지 논쟁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적인 죄, 제도적인 죄, 집단적인 회개 같은 것은 없다. 죄는 언제나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다. 집단적인 것이 아니다.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할 때, 다른 사안을 검토함으로써 특정 원칙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 두고, 다른 영역의 사례를 통해 구조적 죄의 적용이 가능한지 알아보도록 하자.“제도적 불의” 논쟁: 사례 죄가 조직의 구조와 문화, 일의 동기, 분위기에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패트릭 래든 키프(Patrick Radden Keefe)의 ‘고통의 제국’(Empire of Pain)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치른 모든 전쟁으로 죽은 미국인보다 오피오이드(opioid, 아편(opium)에서 유래한 용어로, 마약성 진통제를 통틀어 일컫는 말-역주)로 죽어간 미국인이 어떻게 그리고 왜 더 많을 수 있는지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오피오이드 남용에 대한 책임 부과를 위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통의 제국’은 새클러 집안의 아서, 모티머, 레이몬드 형제가 어떻게 뉴욕 상위 사회의 계급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주요 오피오이드 공급 업체인 퍼듀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그려내고 있다.새클러 집안은 수년에 걸쳐 자신들의 약물을 임상 테스트할 수 있는 특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먼저 그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의사와 병원으로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보고서를 확보하고, 에이전시에서는 광고 캠페인을 고안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학 저널에 그 임상 기사와 광고를 개제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사가 뉴스와 잡지에 실릴 수 있도록 이들은 관련 기관에 모든 섭외력을 동원하였다. 의를 가장한 변명오피오이드 옥시콘틴(OxiContin, 중등도 및 중증 통증의 조절에 사용되는 확장형 마약성 진통제-역주)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들이 명시한 동기는 연민과 자비였다. 그들은 암 환자의 고통뿐 아니라 모든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내세웠다. 키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업계에서는 퍼듀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사람들도 돕고 돈도 쓸어 모을 혁신적인 제품을 제공하였다는 인식이 있었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그럴듯한 말로 FDA의 승인을 받고서, 무료 샘플로 환자들이 옥시콘틴에 “길들게” 함으로써 새클러 일가는 그들의 약이 새로운 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시장을 장악했다.추락결과는 대재앙이었다. 키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이러한 현상이 시민들을 차례로 사로잡으면서, 일부 지역사회는 좀비 영화를 연상케 했다. 이전에 잘 적응하고 활동하던 성인들을 의존과 중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말았다.옥시콘틴의 중독성이 명백해지자, 퍼듀의 임원진은 피해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오피오이드 중독자는 피해자이면서 범죄자라며, “의사들이 언론 보도로 인해 겁을 먹은 것인지, 협박을 받은 것인지 우리의 판매 실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로 완벽하게 좋은 자신들의 제품을 그릇되게 사용한 이들이 회사에 오명을 안기고 있다고 했다.몇 년 동안 새클러 집안은 그 약의 중독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옥시콘틴의 위험성을 인정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용 억제”라는 새 버전으로 약을 출시해 특허를 독점했다. 그러고 나서 퍼듀 회사는 대담하게도 FDA에 원래 팔던 옥시콘틴의 복제약 승인을 거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새로운 버전의 약을 팔기 위해서 이전 버전의 약은 이제 “안전하지 않은 것”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공범‘고통의 제국’은 읽기에 매우 곤혹스럽다.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회사가 어떻게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다니며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했는지, 또한 어떻게 자신들의 주요 제품에 대한 거짓된 토대 위에 조직의 문화를 세웠는지를 보면서 비통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것이다. 퍼듀 사는 회사와 가까운 의사들에게 영업 사원을 파견하여 불필요한 처방전을 남발하도록 요청하면서 약 공장과 같은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하기까지 했다.그러나 오피오이드 사태의 탓을 어떤 한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매출을 올릴 목적으로 고안된 몇몇 조직들에 만연해 있는 죄성과 이기심(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욱 강화된다)이다. 처방전을 건네는 부패한 의사들, 황폐한 지역사회를 오피오이드의 홍수로 뒤덮은 영업 사원들과 실무진, 불어나는 법적 문제에 눈을 감아버린 정부 관료들. 회사 안팎의 사람들이 다 연루되었다. 당신은 어쩌면 이 모든 일을 기업의 최고위층에 속한 개인들의 어떤 음모나 결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도의 구조(정부의 승인과 여러 조직 간의 관계 역학 포함)와 동기는 모두 불의에 기울어져 있었다.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과실이 있지만, 그 과실의 무게가 같지는 않다. 퍼듀 사의 서류작업을 하는 비서에게 새클러 가족 구성원 중 한 명과 같은 정도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죄책을 면할 수는 없다.죄의 침투성‘고통의 제국’은 구조적 죄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는 잘못된 동기, 좋지 못한 습관, 거짓된 신념에 굴복한 조직의 부패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퍼듀 사의 상황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음모를 넘어, 어떻게 사업 자체나 시스템, 프로그램, 법, 선의를 가진 개인들도 그들의 의도 이상으로 악을 수행하는 데 휘말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죄는 만연해 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의에 연루되어 있다. 잘못된 점(크고 작게)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세계 경제에 참여하는 것 자체로도 말이다. 잠재적으로 얽혀있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어떤 경우에 죄를 단순히 개인의 영역으로만 보지 않고 세력으로 이야기하면서, ‘죄’를 죄인들이 하는 행위의 합보다 더 큰 것으로 표현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위대함을 위시한 히틀러의 부패한 요구에 문명화된 독일 루터교인들이 먹잇감이 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르완다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인종적인 폭력을 휘두른 충격적인 만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죄를 지나치게 개인화하면 사회에 스며드는 죄의 침투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구조적인 죄성에 대한 견해의 문제는 그들이 너무 멀리까지 간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멀리 가지 않는 데에 있다. 구조적 죄의 현현은 죄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다. 인간의 마음은 ‘억압자’ 편이든 ‘희생자’ 편이든 절대적으로 악하므로 이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늘 전경에 위치시켜야 한다.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의 시도가 늘 금방 사그라지고 우리가 시도하는 개혁조차도 죄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제도적 불의를 제거하는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훗날 개혁자들의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모든 죄를 덮고 정복하신 구주가 계신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세력을 무력화하시고, 의로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화해의 대사이다. 복음은 개인적인 죄와 제도적인 죄 모두의 해결책이다.원제: What OxyContin Reveals About Structural Si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제도적죄
구조적죄
의를가장한변명
추락
공범
죄의침투성
옥시콘틴
고통의제국
오피오이드
아편
돼지 심장의 인체 이식, 윤리적인가?
by Joe Carter
2022-02-09
이야기: 의료 역사상 최초로 유전자 변형 돼지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했다. 동물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게 과연 윤리적인가? 배경: 말기 심장병을 앓고 있는 쉰일곱 살 남성이 최초의 동물-사람 이식 수술을 통해 유전자 변형 돼지 심장을 이식받았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을 담당한 메릴랜드 대학 의료팀에 따르면 돼지 심장 이식 수술은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이 장기 이식을 통해서 유전자 변형 동물 심장이 신체의 즉각적인 거부 반응 없이 사람의 심장처럼 기능할 수 있음이 처음으로 입증됐다고, 메릴랜드 대학교 의료센터(UMMC)가 발표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긴급사용승인 규정을 적용해서 새해 전야에 이 수술을 긴급 승인했다. 동물-사람 장기이식은 1980년대에 처음 시도되었다. 이미 유명한 사례가 된 스테판 페이 비클레어(Stephanie Fae Beauclair, Baby Fae로 알려짐)는 치명적인 심장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고, 개코원숭이의 심장을 이식받았다. 그러나 외부 장기에 대한 면역 체계의 거부로 그녀는 수술 한 달 만에 사망했고, 이후 유사한 이식 시도는 아예 중단되었다.의료 연구자는 돼지 장기의 사용이 보다 더 성공적으로 입증되기를 희망한다. UMMC 이식 수술의 경우, 사람에게 보다 더 적합한 장기로 만들기 위해 돼지 장기에서 네 개의 유전자가 사전에 “제거”되었다. 그리고 돼지 심장의 면역 수용을 담당하는 여섯 개의 사람 유전자가 돼지 게놈에 미리 삽입되었다.“이것은 획기적인 수술이었고 장기 부족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습니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의 긴 대기 목록을 다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증자의 심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지만, 이 세계 최초의 수술이 미래에 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합니다.” 돼지 심장 이식에 성공한 바틀리 P. 그리피스(Bartley P. Griffith, MD)의 말이다.미국 연방 정부에 따르면 현재 십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으며, 매일 열일곱 명이 이식을 기다리다가 사망한다. 무슨 의미인가: 동물 장기의 이식이 윤리적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장기나 조직을 이식하는 이종 이식(xenotransplantation)이 가지는 윤리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생물 의학의 기술 발전으로 상황은 곧 바뀔 것이다. 역사가 알려주는 현실은 종간 이식이 거의 지난 삼백 년 동안 발생했거나, 적어도 시도되었다는 것이다.1167년 루이 14세의 궁정 의사였던 프랑스 의사 장 밥티스트 드니(Jean-Baptiste Denis)는 어린 양의 피를 인간에게 주입하려고 시도했다(그는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어린양의 피가 더 순수한 형태일 것이라고 믿었다). 최초의 사람 대 사람 각막 이식보다 무려 65년 전인 1838년에 환자에게 동물(돼지)의 각막 이식이 최초로 수행되었다. 또한 19세기에는 다양한 동물 종(양, 토끼, 개, 고양이, 쥐, 닭, 비둘기)과 인간 사이에 피부 이식이 비교적 대중화되었다. 보다 더 최근에는 돼지 심장 판막으로 사람의 판막을 교체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물론 어떤 일이 수세기 동안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의 항의가 없이 그런 이식이 진행된 이유는 많은 기독교 생명윤리학자(여기에 유대인 및 이슬람 생명윤리학도 포함)가 동물-사람 이식을 비윤리적이거나 적절한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절차는 동물과 사람을 합친 키메라를 만드는 것이다. 키메라는 둘 이상의 다른 종에서 유래한 세포로 구성된 동물이다. 동물-사람 키메라를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은 한 종의 세포를 다른 종의 발달 중인 배아나 태아에 주입한다. 기독교 생명윤리학자들은 종종 이식과 관련해서 부위에 따른 다양한 용도를 구별한다. 예를 들어, 2005년 당시 존스홉킨스 의료 기관의 소아신경외과 책임자이자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 위원이었던 벤 카슨(Ben Carson) 박사는 사람-동물 키메라에 대한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인슐린, 심장 판막, 그런 성질의 것을 종간에 섞어서 사용하는 것과 증식 능력이 있는 유전 물질을 혼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위원회로서 확인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그 두 가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윤리위원회가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그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은 키메라의 경우에 동물과 사람의 부분이 혼합되고, 나아가 발달 단계에서 도덕적 경계를 넘는 방식으로 얽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세포는 생식선 조직에서 끝나고 동물의 체내에서 사람 배우자(난자 또는 정자)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몸 속에 동물 장기를 이식하는 것은 종간 혼합에 대한 우려 사항이 아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바이러스가 종에 걸쳐 돌연변이를 일으켜 전 세계에 위협이 되는 전염병을 일으킬 가능성이다.)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동물로 아담과 하와를 위한 옷을 만드셨고(창 3:21), 나중에 사람에게 동물을 음식으로 주셨다(창 9:3). 따라서 종간 이식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동물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동물까지 책임지는 왕국의 청지기로서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조심하는 동시에 명백한 종간 장벽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간 이식을 통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원제: Is It Ethical to Transplant a Pig Heart into a Hu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윤리
종간이식
이식수술
창조윤리
키메라
장기이식
생명윤리
돼지심장이식
로마가톨릭의 내부 개혁자, 베네딕토 16세
by Leonardo De Chirico
2022-02-07
교황들은 언제나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전 세계 로마가톨릭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교황이 “성 베드로의 의자에 앉은 역대 교황 중 최고의 신학자”로(1:xi), 또 마르틴 루터 이후 가톨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인이라고(1:xi) 불리는 인물이라면, 그는 훨씬 더 많은 시선을 끌 것이다. 적어도, 신학적으로 예민한 개신교인 독자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전집(Opera Omnia)은 총 1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전집은 신학과 교회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학문적 엄격함과 목회적 깊이도 겸비하고 있다. 이 교황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고려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오늘의 로마가톨릭을 진지하게 다룰 수 없을 것이다.[이 전집과 비교했을 때]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가 쓴 방대한 전기(1, 2권 합쳐 1,000쪽이 넘는다), ‘베네딕토 16세: 한 생애’(Benedict XVI: A Life)는 베네딕토 16세(본명 ‘요제프 라칭거’)의 인간적인 매력으로 우리는 초대한다. 이 책은, 신학적 전기라기보다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어린 시절 침실에 테디베어가 있었고(2:2) “거의 여자아이 같은 부드러움”(2:55)이 있던―한 인물이 사건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게 된 삶의 이야기를 풍부한 정보로 다룬 저널리즘 기사에 더 가깝다. 베네딕토 16세: 생애: 제1권: 나치 독일 청년기부터 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1927-1965 Benedict XVI: A Life: Volume One: Youth in Nazi Germany to the Second Vatican Council 1927-1965피터 제발트 지음‘베네딕토 16세’ 제1권은 교회 계급의 최고위 성직자의 위치까지 올라가며 점차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웅이자 피뢰침이 될 한 남자의 젊은 삶이 주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로마에서 베네딕토 16세와 가진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두 권짜리 전기는 요제프 라칭거의 생애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유산에 대한 결정적인 기록이다.제1권은 독일에서 성장한 시기와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소년단(Hitler Youth) 가입, 신학 교수, 뮌헨 대주교장에 이르기까지, 미래 교황의 초기 생애를 다룬다. 제2권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시기 로마로의 이동, 교황 즉위, 논란이 된 사임, 후임 프란치스코 1세 교황 선출 이후 언론에 오르내린 그의 발언들을 다룬다. 베네딕토 16세의 회고록, ‘마지막 증언’(Last Testament)과 꼭 함께 읽어야 할 이 책은 바티칸 뒤뜰에서 은퇴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뉴스를 만들어 내는 한 과격한 가톨릭 지도자의 생애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이다. 제발트는 이미 추기경 시절에도 그와 긴 인터뷰를 했고, 또 그가 교황이 된 후에도 역시 긴 인터뷰를 한 적 있다. 그리고 그 인터뷰들은 각각 ‘이 땅의 소금: 밀레니엄 끝의 교회’(Salt of the Earth: The Church at the End of the Millennium, 1997)와 ‘마지막 증언’(Last Testament in His Own Words, 2016)으로 출간됐다. 라칭거와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기록한 이 두 권짜리 전기는 또한 저자 제발트의 폭넓은 조사의 결과물이다. 라칭거와 동시대를 산 백 명과 대담을 했고 또 라칭거와 추가 인터뷰까지 했다. 제발트는 난처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안 되는 거리”(critical distance)(1:x)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1927년에 태어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세기 로마가톨릭 신학의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인상적인 이력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전문가(1962-65), 뮌헨·본·뮌스터·레겐스부르크에서의 다양한 교수직(1957-1977), 뮌헨 대주교(1977-1981), 추기경(1993-2005), 바티칸 신앙교리성 장관(1981-2005), 교황(2005-2013), 그리고 다소 비극적인 사임 후 2013년 이후 명예 교황(Papa emeritus). 베네딕토는 또한 오백 년 만에 나온 최초의 독일인 교황이기도 하다.이 전기는 베네딕토의 사임을 앞둔 말년의 맥락을 자세하게 설명하기에 특히 환영을 받는다. 성 학대, 바티칸 은행 재정 스캔들, 그리고 바틸리크스(Vatileaks, 바티칸 기밀문서 유출 사건)의 비극적인 결과는 모두 라칭거의 힘을 약화시켰고, 전통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이 교황으로 하여금 결국은 상당히 비전통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생애 초기어린 시절부터 요제프 라칭거는 로마가톨릭교회에 삶을 헌신할 생각을 했다. 1931년 뮌헨 대주교 파울하버(Faulhaber) 추기경이 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네 살 난 요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언젠가 추기경이 될 거에요”(1:25). 1934년, 요제프가 아기 그리스도께 보낸 첫 번째 편지(라칭거가 작성한 최초의 문서)는 미사 경본, 녹색 미사 예복, 예수님과 같은 마음(1:31)에 대한 요청을 담고 있다. 소년 때부터 그의 성향은 이미 매우 분명했다. 그의 가족생활은 묵주, 고백, 그리고 9일 기도의 독실한 가톨릭 의식으로 특징지어졌다. 어린 시절 요제프와 그의 형 조지는 성직자 놀이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어린 시절 놀이로 시작한 게 결국 그의 삶이 되었는데, 평생에 걸쳐서 라칭거는 무려 2만 5,000번 넘게 미사를 집전했다(1:250).라칭거가 회상하듯, 신앙과 관련한 그의 첫 번째 경험은 “전례(liturgy)의 아름다움”(1:55)을 통해서였다. 이 주제는 “합리성과 미학의 혼합”(1:313)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사실 젊은 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전례의 정신’(The Spirit of the Liturgy)이었다. 라칭거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독서는 자신이 ‘나에게 직접 말하는 동시대인’(1:191)이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과 강하게 동일시했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는 하나님 백성의 교회론’(The ecclesiology of the people of God in Augustine)은 라칭거의 첫 학문 연구 주제가 되었다.신학의 발전신학교 시절에 라칭거는 가톨릭의 일체성(the wholeness of Catholicism)을 강조한 고트프리드 생엔(Gottfried Songhen)의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서 라칭거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념, 존재의 유비에 대한 위대한 보편적 예”(1:212)를 발견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재된 이스라엘 신앙과 헬라 정신의 종합”(1:269)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원칙을 기독교를 “탈헬레니즘화”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비판했던 2006년 레겐스부르크 연설(2:328-344) 당시 그가 주장했던 요점이기도 하다.라칭거는 생엔에게서 또한 전례 운동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적 접근 방식을 배웠다. 살아 있는 과정으로서의 전통(성경을 포함)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조사, 철학-신학적 “누벨 신학”(Nouvelle Theologie, 새 신학)에 대한 공감, 교회일치운동의 충격, 그리고 신학을 함에 있어 명확한 공식화에 대한 열정(1:215) 등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원칙은 “현대적이지만 결코 현대성에 함몰되지 않는”(modern but not modernistic)(1:321), 그가 작업할 미래의 신학적 지평이 되었다. 초창기 라칭거에게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책은 “성육신을 그리스도가 역사 속으로 자신을 확장한 사건으로”(1:235) 해석한,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의 책 “가톨릭주의”(Catholicism)였다. 그리스도처럼 교회도 세상으로 확장함으로 교회의 권위와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시도에 라칭거는 감동을 받았다. 나중에 라칭거는 자신의 신학 형성에 그 책이 “핵심적 역할”(1:233)을 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온전한 그리스도”에 더해 그리스도 성육신의 연장으로서 교회를 바라보는 드 뤼박의 주장을 반영한 라칭거는 두 번째 시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는 것, 우리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연속(continuation)이 됨을 의미합니다” (1:241).라칭거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신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성례전적 성격에 대한 주장과 깊이 얽혀 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스 큉(Hans Kung)이 교회를 “공의회”(council-concilium)로 본 것과는 달리, 라칭거에게 교회는 “성체 공동체”(Eucharistic community-communio)였다(1:417).라칭거의 교수 자격 연구는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의 역사 신학이었다. 이 중세 프란치스코수도회 신비주의자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라칭거는 “계시가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 교부와 성인의 영감, 살아 있는 믿음 자체와 같은 것들에서도 주어졌다”는 확신을 확고히 했다(1:280). “계시는 단지 성경에 실린 표현 이상”이라는 그의 평소 견해와 “성경과 전통과 교회의 선포 사이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라칭거는 항상 “성경주의(Scripturism)의 위험”(1:390)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것은 개신교(Protestantism)를 비판하는 방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제발트는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ism)을 받아들이는 길에 들어선 수많은 개신교 지식인을 포용한 라칭거의 역할을 언급한다(예: 2:51; 2:170).2차 바티칸 공의회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스핀 닥터”(특정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의 최측근에서 그들의 대변인 구실을 하는 사람-역자) 중 한 명이었던 라칭거는 문서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 교부, 전통, 하나님의 백성, 계시 같은 공의회의 핵심으로 판명된 영역은 라칭거의 전문 영역이었다”(1:387). 그 후 그는 공의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세속화 및 프로테스탄트화 경향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로마가톨릭 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친 1968년경의 혁명적 혼란은 그를 크게 괴롭혔다. 성 혁명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일종의 “트라우마”(2:30)까지 경험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가 (“뉘앙스와 확장성을 제외하고는”) 신학을 바꾸지는 않았지만(2:42), 그로 인해 로마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진보” 경향에 대해 그는 확고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는 비관 속에서, 때로는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했다(2:69).공의회에 대한 라칭거의 해석은 “개혁의 해석학”(hermeneutic of reform)으로, 교황 레오 13세의 공식을 사용하면 “새 것으로 옛 것을 보완하고 완성함(Vetera novis augere et perficere)”(2:77)으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라칭거의 로마가톨릭 신학을 평가할 때, 전통주의와 진보주의가 마치 그의 저작 내에서 교란되고 상충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처럼 대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다양한 단계의 경력에 따라서 각각 다른 강조점과 우려가 있었을 수 있지만, 제발트의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라칭거가 급진적 신학자에서 융통성 없는 정통주의의 파수꾼으로 회심했다는 식으로 그의 신학을 평가하는 것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오류이다. 1982년 한 독일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진부한 표현은 라칭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요제프 라칭거는 몸과 영혼 모두 가톨릭 신자일 뿐이다”(2:159-160).개신교에 대한 반대 라칭거의 신학은 로마가톨릭의 보편성(catholicity)을 전형화한다. 예를 들어, 그의 신학은 항상 권위 있는 교도권(magisterium)에 비추어 성례전이라는 렌즈를 통해 성경을 읽는 방식이다. 그는 로마가톨릭 교회가 성육신을 연장한다는 관점과 니케아 기독론을 하나로 엮는다. 그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동시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개신교 교회법 및 교령, 그리고 보다 최근의 마리아 교의(Marian dogmas)를 함께 고백한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체 희생의 표현과 관련시킨다. 그는 또한 항상 성령을 교회의 성직위계 구조와 연결시킨다. 라칭거는 에큐메니즘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함이 있고 오로지 로마 교회만이 유일한 “가톨릭” 교회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그는 전 세계를 포용하는 가톨릭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추구한다. 그는 교회의 교회적 관점에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정치적 역할을 결합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칭거는 회복된(revitalized) 로마가톨릭주의의 경계선 내에 있는 현대적 보수주의자이다.라칭거가 1972년 창간에 참여한 신학 저널 ‘꼬뮤니오’(Communio)의 모토(2:79)는 그의 신학적 비전을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다. “진정한 전통의 근원으로의 회귀를 통한 쇄신 프로그램.” 다시 말해서,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구체화된 로마가톨릭주의의 업데이트는 결코 그 전통적 뿌리를 끊지 않는다. 베네딕토는 결코 성경에만 전념하거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종교개혁의 주장에 반대하는 로마가톨릭의 뿌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로 결코 교정될 수 없는 “가장 깊은 핵심에서부터”(2:120) 또는 “내부에서부터”(2:164) 로마가톨릭 신앙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자 출신 교황(현재는 명예교황)의 신학적 존재의 요지이다.칼 트루먼(Carl Trueman)은 ‘베네딕토 16세의 신학: 개신교에서 바라본 이해’(The Theology of Benedict XVI: A Protestant Appreciation)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한다. 로마가톨릭교(Roman Catholicism)는 단순히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개신교(Protestantism)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며, 개신교와는 매우 이질적으로 성경과 전통과 교회 교리를 고도로 긴밀하게 연결하는 방식이다(153).베네딕토 16세는 그러한 “다른 사고방식”을 구현한다. 개신교 독자들은 성경적 또는 신학적 언어의 사용에서 일부 중복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복음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설명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신교와는 매우 이질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 교황이라는 우뚝 솟은 지적 위상과 20세기 로마가톨릭을 향한 그의 명백한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의 전기는 전 세계에서 무려 13억 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전통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흥미로운 진입점이 된다. 원제: Renewing Rome from Within: A Biography of Benedict XVI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로마교황
베네딕토16세
바티칸
제2차바티칸공의회
조셉라칭거
어거스틴
칼트루먼
개신교
세속주의, 기독교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또 다른 조류
by Glen Scrivener
2022-02-03
2019년 10월, 영국 법원이 현대 문화전쟁의 전형을 보여 준 재판에서 데이비드 맥커레스(David Mackereth)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30년 경력의 의사인 맥커레스는 취업 면접에서 “180센티미터 장신의 턱수염 난 남자를 “여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대답했다가 채용을 거부 당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신념이 창세기 1:27에 기초한 것임을 알렸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맥커레스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는 근본적인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그는 재판에서 패소했다. 판사는 특히 창세기 1:27에 대한 이 의사의 믿음은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인간 존엄성”의 뿌리가 되고 있는 이 말씀이 이런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톱질해 버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침내 기독교의 영향력은 썰물이 되어 사라졌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사회의 공적 영적에서 신앙이 밀려났다고 개탄하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서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세기 시인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는 그의 시 ‘도버 해안’(Dover Beach)에서 한때 온 세상의 해안을 휘둘렀던 “신앙의 바다”가 “길고 우울한 소리를 내며 밀려나고” 있으며, 이제는 “기쁨도 사랑도 빛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매튜 아놀드가 1851년에, 주일이면 영국 사람의 절반이 교회에 출석했던 시대에 이런 시를 썼다면, 그는 과연 오늘날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교회 출석률이 6퍼센트인 영국 상황에서, 그리고 성경의 기본 진리가 공개적으로 정죄당하는 이런 사회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물결은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또 밀물이 되어 다시 차오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 “길고 우울한” 소리는 수도 없이 많았고, 높은 파도처럼 비상하게 높이 솟아올랐던 때도 그만큼 되었다. 영원한 썰물은 없다. “신앙의 바다”라는 이 비유는 이렇게 발전시킬 수도 있다. ‘현재의 수위가 어떠하건, 물의 힘은 자명하다.’ 썰물 때의 지형도 밀물 때의 해변이 그렇듯이 확실하게 대양 곧 물의 힘에 의해 빚어진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현시대의 이러한 모든 조류 속에서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기독교의 이러한 역동성을 인식해야 한다.맥커레스 사건에 어떤 역동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트랜스젠더 사상에 반대했다. 하지만 맥커레스의 생각과 그와 상반되었던 생각, 둘 다 각자의 방식대로 기독교적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평등(equality), 긍휼(compassion), 승낙(consent), 세 가지 가치가 논쟁의 쟁점인데, 이것들은 일부 트랜스젠더 옹호자들에 의해 기독교 서사(Christian story)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재결합되었다.그러면 그 분리와 재결합을 살펴보자. 평등의 재정의평등의 개념이 기독교 서사로부터 분리되면, 급진적인 개인주의가 될 위험이 있다. 예전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적 방식으로 생각했고, 개성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회를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의 느슨한 연합체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원자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의 생각의 출발점은 나 자신과 나의 정체성이 된다. 다른 문화 속에서라면 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외부를 바라보았을 것이지만, 우리 문화 안에서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다른 문화들은 책임을 중시하지만, 우리는 권리를 중시한다. 이러니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종류의 사회적 소속(교회 출석만이 아니라)이 바닥을 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동등하게 앉는 것이 원칙이다. 현대 사회의 목표는 모두가 자신의 사다리를 동등하게 올라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바울은 평등을 이렇게 표현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그런데 21세기의 서구인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꾼다. “여러분 모두가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하게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모두가 대체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간극은 이제 너무나 벌어졌다. 긍휼의 재정의 긍휼이 기독교 서사에서 분리되면 ‘경쟁적 피해자의식’(competitive victimhood)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이점을 얻기 위해서 피해자 지위를 경쟁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기독교에서는 희생자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억눌린 자에게 존엄과 희망을 주신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희생자들을 존중하고 돕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대범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미덕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불만을 표출하고 있고), 중재할 수 있는 더 큰 도덕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나 적다. 페미니스트(또는 종교적 소수자) 쪽과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 쪽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핵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보호에 대한 양측의 주장을 파악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언제, 무슨 근거로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별, 신체, 인간의 개별적 특징, 공동체에 대하여 훨씬 더 확고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의 고통” 이야기하고, 그리고 트윗에 대문자로 크게 “지금은 21세기라고!”라는 선동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용 도구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승낙의 재정의 성적 승낙이 기독교 서사에서 분리되면 성을 기독교 가치관으로부터 훨씬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성적 관계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승낙’이, ‘헌신’ 같은 또 다른 좋은 가치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성을,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말해 줄 더 풍성한 진술로부터 분리시킬 위험이 있다. 성을 마치 여가 활동 같은 편안한 선택이라고 순진하게 가정하게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의 격차(power differentials)는 항상 존재하며, 성은 우리의 신체, 개인적 관계들, 그리고 우리 사회 구조와 엮여 있다. 개인주의자들인 우리는 성을 지극히 개인이 사적인 관계를 거래하는 문제로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신체,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성적 선택은 모두 결혼, 자녀, 가족, 생물학, 그리고 수많은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승낙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성 윤리의 충분한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 추상적 가치를 특정한 방식으로 섞으면 강력한 혼합물이 나온다. 개인의 힘, 소수의 힘, 그리고 개인 선택의 힘(특히 성 문제에서)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트랜스젠더 사상의 기본 신념이다.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며 권리를 주장한다: 나는 문화나 생물학적 방식과 무관하게 나의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고 소수자로서 나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이념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한편, 데이비드 맥커레스에게는 그 자신의 기독교적 기반이 있다.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자유; 과학(구체적으로는 성에 대한 생물학적 정의); 그리고 우리의 평등의 최초 근거가 되는(창 1:27) 성경의 권위가 그것이다. 그래서 2019년 맥커레스 사건의 법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가치에서 출발했지만 그 세속화된 버전과 전통적 버전 사이의 충돌이다. 우리가 놀랐던 것은 이 판결에서 맥커레스가 졌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 전쟁에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판결을 내린 근거였다. 판사는 창세기 1장이 문제라고 판결했던 것이다. 스펜서 클라반(Spencer Klavan)이 신랄하게 비판했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씨앗이 꽃과 또는 곡식이 빵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은 열매에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그 열매를 낸 나무의 뿌리를 정죄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증가하는 세속화 추세는 지속가능한 전략이 아니다. 이것이 제시하는 처방은 자유가 아니라 분열의 처방이다. 그런데 이것이 드러내는 한 가지가 있다. 기독교의 피할 수 없는 영향력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창세기를 정죄했어도, 여전히 “기독교적” 이유를 가지고 정죄한 것이다. 기독교가 서구 문화에 끼친 명백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라면 현재의 기독교는 썰물의 시간을 맞았다. 그러나 현재의 문화적 조류가 끼치는 결과보다 “신앙의 바다”가 만들어 내는 형세는 훨씬 더 깊고 더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우리가 탈기독교 시대의 공포와 혼란과 분열주의를 목도하고 있는 이때에도,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물결이 바뀌기를 바라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원제: Secularism Proves Christianity’s Influe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신앙의물결
평등
연민
기독교의영향력
양심의자유
인간존엄성의뿌리
창1:27
세속주의
포스트기독교시대
트랜스젠더
(다시) 세워야 할 때이다
by Trevin Wax
2022-01-25
요즘 “해체”(deconstruction)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의 정서에는 “붕괴”(collapse)라는 표현이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헌신의 붕괴, 확신의 붕괴, 이 말에는 기관과 지도자들, 교회에 대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다. 더욱 심각하게는 기독교 진리가 가진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또는 우리는 결국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확신의 붕괴도 있다.설문조사나 여론조사의 결과는 세속주의와 무종교의 확산뿐 아니라 종교기관에 대한 신뢰가 나날이 잠식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강력한 교회나 친밀하게 결속된 가족이라는 구조적 도움 없이도 세상의 압박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주의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 이렇게 자신이 신뢰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은 한동안 불확실성은 높아지고 자신감은 낮아진 상태에 머물게 된다.충성의 진공 상태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로버트 니스벳(Rober Nisbet)의 말처럼, “인간은 충성의 진공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이내 어떤 프로젝트나 또 다른 무언가에 충성을 다짐하게 된다. 설사 그것이 당장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인 쪼그라든 욕망일지라도 말이다. 충성은 이렇게 돌아오는 법이다. 우리는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어떤 것(실은 뒤처질 명분)을 찾아 나서게 된다. 오늘날 “해체”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일부 그리스도인을 위해 말하자면, 확실성과 신뢰가 돌아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신뢰의 붕괴는 또 다른 입장의 강경한 확신이 되어 버렸는데, 바로 기독교 믿음은 가망이 없을 정도로 타협에 넘겨졌으며 전면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할 것으로 전락했다는 입장이다.파편들로 다시 세우기한편, 헌터 버몬트(Hunter Beaumont)가 “탈문화”(disenculturation)라 명명한 긍정적 해체가 있다. 그는 여기서 교회가 문화라는 덫에서 진짜 기독교를 분별해야 하며, 낡은 바닥과 벽은 벗겨 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런 유의 해체에는 회개와 겸손이 내포되어 있다. 곧 교회가 자행한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돌아가, 그분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도록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다시 빚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는 생각의 표출인 것이다.불행히도 해체에 관한 대화에서 너무나 자주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부패를 옹호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저버리고,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 기조를 과하게 선전함으로써 진정한 진보의 의미를 퇴색시킨다.자, 건물의 낡은 부분은 그냥 무너지게 두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근시안과 이기심에 맞서 도전하실 때, 진리와 맞바꾼 거짓을 버리게 하시고, 구원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것이 우리의 눈에서 벗겨져 우리 마음이 변화되게 하시기를 바란다.그런데 이러한 부패의 싹을 잘라 내는 일은 우리가 서 있는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곰팡이가 핀 바닥을 벗겨 내는 이유는 집을 위해서이며, 바닥 아래에 견고한 기초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종류의 해체는 개조와 재건과 회복의 첫걸음이다.회복적 해체이러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확신이라는 것은 일단 흔들어 놓아야 만족하는 현시대의 분위기에 저항해야 한다. 진보는 우리에게 할머니 시대의 믿음 따위는 거부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보여 주었던 교회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버리라고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교회의 교훈 따위에 더는 자신을 옭아매지 말라고 한다. 이처럼 이 시대는 귀로 듣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으라고 우리를 압박한다.회복은, 회개의 길이 그렇듯이, 해체에서 시작된다. 회개는 기독교 진리에 담긴 흔들리지 않는 은혜에 대한 믿음, 교회가 은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낼 것에 대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죄인들을 향한 사랑 이것으로 가득한 길이다.다시 세워야 할 때앞으로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시고자 그 뜻 안에서 허락하시는 종말론적 재난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철저하게 삶의 모든 영역(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의 부패한 곳을 제거하는 일에 자신을 드릴 때,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회복이 목적이다. 다시 지어지는 것이 목적이다.그리스도인 교수의 올바른 역할에 관한 통찰력 가득한 두 편의 글을 쓴 브래드 이스트(Brad East) 교수는 그가 자기 일을 왜 성을 쌓는 일(fortification)의 하나로 여기는지를 (학생들의 믿음의 기초를 다지고 지키는 의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해체는 그저 파괴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집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어려운 질문을 피하거나 의심과 씨름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공동체에 전해 내려오는 명제들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렇게 성을 쌓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난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 씨름은 우리 이전 세대에도 있었으며 우리 이후에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서 성경과 위대한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 이러한 질문을 가감 없이 던진다.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를 불신하고 그 권위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잘못에 대해 비난하기를 즐기는 질문자와 기독교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잣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공동의 헌신에 의지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죄와 악을 인정하는 질문자는 다른 것이다.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브래드 교수는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 가운데 그들의 교회에서 은연중에 유사 마르시온주의, 곧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성경,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암묵적인 회의론”을 흡수한 학생들에 관한 글을 쓴 적 있다. 그 학생들의 마르시온주의 신앙을 ‘해체’하기 위해 브래드는 그 학생들의 가정과 교회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 그들의 목사와 교사들이 성경의 3분의 2나 되는 부분[구약성경]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간과해 왔는지를 거듭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에, 만약 브래드 교수가 그들의 마르시주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그 학생들의 교회가 가진 확신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구약성경에 대한 암묵적 무시가 그 학생들이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신앙에 얼마나 반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세우는 일”임을 상기시켜주는 회복적 감수성이다. “이 세우는 일을 하는 동안 재건축, 슬레이트를 교체하는 일, 또는 벽과 건물의 토대를 더욱 튼튼하게 고정하는 일 같은 작업이 수반된다. 목적은 세우는 것(edifice)이 목적이다. 사도 바울이 서로 덕을 세우라(edification)고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살전 5:11].영적 재충전으로 가는 길(서구) 기독교의 미래는 해체를 자기네 “브랜드”로 내세우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세상과 교회의 타락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겸손한 이들,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교회를 떠난 위선자들에게서 조롱당하는 마음이 순결한 이들의 것이다. 영적 재충전은 성령의 역사,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우리가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 사랑하기를 힘쓸 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비록 얼룩은 졌더라도 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다시 빛날 것이다.원제: It’s time to (Re)Bui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해체
회복적해체
재건
회복
영적재충전
2021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
by Collin Hansen
2021-12-30
2020년이 떠넘겨 준 소란과 분노와 불안이 2021년에는 모두 사라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과 치유를 경험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었다. 세상에, 틀려도 이렇게 틀리다니. 2020년에 비하면 올해 그리 새로운 도전이 많았던 건 아니다. 그 대신 2021년, 내가 선정한 미국 기독교 10대 신학 기사들은 작년에 겪었던 갈등의 많은 부분을 되풀이했다. 아주 예리한 복음주의 비평가들은 인종과 학대에서 정치와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문제의 중심에 있는 분열의 근원을 설명하려 애썼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개혁주의 복음주의자를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통회 그룹, 자비 그룹, 신중 그룹, 그리고 용기 그룹이라는 네 그룹으로 나누었다. 드영은 이렇게 적었다. “종이에 쓰는 교리 내용은 똑같다더라도, 이들이 그 교리와 관련해서 취하는 자세와 실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조지 패커(George Packer)가 매거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과 그의 책 ‘마지막 최선의 소망’(Last Best Hope)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만 이러한 분열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드영의 네 가지 범주를 패커의 네 가지 아메리카에 다음과 같이 투영할 수도 있다. 통회 그룹(정의로운 미국인), 자비 그룹(똑똑한 미국인), 신중 그룹(자유로운 미국인), 용기 그룹(진짜 미국인). 이렇게 얼마든지 달리 상상할 수 있듯이, 신학도 결국은 전기(biography), 직관, 종족(tribal), 충성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 자연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할 때, 온 세상이 고통 받는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 미국 상원의원은 1852년에 이렇게 말했다. “종교인들조차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면, 위대한 사랑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고백하는 정치인이 극소수에 불과한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기대할 게 있기나 할까요?”1830년대와 184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 곧이어 남북전쟁이 따라왔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까지 예측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것은 최종 단층선이 어디에 형성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 선이 통회와 자비와 신중과 용기 그룹마저도 제각각 분리시킨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해서 보는 이 나라에서 교회가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을 맞을 것이다. 만약에 자비와 신중 그룹이 공통점을 찾고, 통회 그룹과 용기 그룹이 계속해서 자기네 성격을 밀고 나간다면, 미국 교회는 그보다 더 나은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모든 게 조작되고 일시적인 공황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또는 심지어 불공정과 불신의 실제 사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가리킬 것이다. 교회들은 학대와 낙태를 모두 비난할 수 있다. 교회들은 정의와 정당성을 모두 다 찬양할 수 있다. 참으로 교회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신실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2022년을 위한 이런 희망과 기도를 가지고, 나는 지금 2021년 10대 신학 기사를 골라 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 한다. 내가 제시한 다음 내용은 복음 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신앙고백 선언에 동의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2021년 내내 교회에서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서 쏟은 같은 양의 에너지를 2022년에는 믿음을 쌓기 위해서 쓴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허락하실지 상상해 보자. 10. 메타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2021년에 우리는 유행을 선도하는 일부 목회자가 교회의 미래가 현재 ‘메타’로 알려진 페이스북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Facebook/Meta 및 기타 주요 기술 회사가 현재 온라인 3D 세계를 만드는 데 투자하는 압도적인 리소스를 근거로 할 때, 아마도 향후 십 년 우리는 지금 이 기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은 고작 10위에 올려놓은 이 기사를 1위로 다시 분류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교인이 급격하게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본 교회 지도자라면, 이제는 함께 모여서 드리는 대면 공동 예배의 실용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를 입증해야만 한다. 9. 신흥 세대가 종교개혁 이전의 신조를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지 논쟁하다특히 침례교 전통에 속해 있는 젊은 신학자들이 성경과 에큐메니컬 신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열띤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몇 년 전, 삼위일체 내에서 영원한 복종과 권위의 관계(ERAS: eternal relations of submission and authority)를 찾는 신학자에 대한 장로교의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이 이제는 신학적 방법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되었다. 학생들과 멘토들 사이의 날카로운 비판을 토대로 볼 때, 앞으로 침례교 신학자 중 일부는 다른 개신교로, 심지어 고전적 신학과 관련해서는 가톨릭과 정교회로까지도 분열할 것으로 보인다. 8. 평결들이 2020년 폭력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다아흐마우드 아버리(Ahmaud Arbery) 살해에 대한 재판에서 나온 세 건의 유죄 평결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2020년 8월 케노샤 폭동 중 두 명의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카일 리튼하우스(Kyle Rittenhouse)에 대한 무죄 판결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리튼하우스 사건에서 당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도록 허용한 도시에서 발생하는 자기방어 모델을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무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그를 위험한 자경단원으로 바라본다. 지속적인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비판적인 인종 이론의 확산에 저항하려는 신학적 우선순위는 2021년 미국 문화를 더욱 더 대표하는 사례와 판결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7. 복음주의의 문화와 역사를 점검하다복음주의 세계에 로마 교황 같은 수장, 말하자면 “휘튼의 주교” 같은 이가 있다 하더라도, 로마 교황과는 달리, 그에게는 세계 복음주의를 정의할 권한이 없다. 설사 그런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다양한 저자들이 이 무정형의 개신교 갱신 운동을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특히 2016년 이후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의 주요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하면서 정치적 위세를 행사하자 여러 작가들이 보수적 개신교 신학이 현대 문화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있다. 모든 세대가 예외 없이 시대를 초월한 복음과 근시안적 사고에 빠진 복음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건강한 해체라면 문화에 사로잡힌 교회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의 보수적 판결에 바이든 행정부가 진보적 의제로 맞불을 놓다미국 대통령 선거가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문화적 교착 상태를 중재하는 대법원의 역할이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낙태논쟁 만큼 미국 민주주의의 열정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진보성향 재판관은 낙태반대론의 주장을 “종교적 견해”로 규정하면서도, 모든 인권이 사실상 신학적 결론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방 기금으로 낙태를 지원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도, 낙태를 제한할 수 있도록 주정부의 손을 들어준 트럼프가 새로 임명한 가톨릭교인 대법관들도, 결국 생명의 저자(주인)가 누구인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5. 치열했던 총회장 경선으로 남침례회의 분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다미국장로교(PCA) 같은 작은 교단이 현대의 성 정체성 개념을 두고 토론하고 또 적시에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은 남침례회(SBC) 같은 거대 교단에서 일어났다.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교육자[앨버트 몰러 남침례 신학교 총장]가 남침례회 총회장 경선에서 3위로 낙선했다. 2위를 한 마이크 스톤은 선거 운동 내내 교단 내 성 학대 의혹을 총회실행위원으로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고전했고, 총회장에 당선된 에드 린튼은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물러나는 그리어 총회장가 집행위원회에 남아도 되는지를 두고 일어난 논란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남침례회는 과연 “남부” 또는 “침례교”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갈까? 4.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그리스도인들이 탄압에 노출되다 미국인은 이제 이십 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안정과 승리의 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더하여, 보복 공격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하는 미군을 보면서 수치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탈출 행렬 속에는 아프가니스탄 지하교회 교인들도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탈레반의 탄압이 미치기 전에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탈출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미국인도 있다. 현실은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들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탈레반 때문에 결코 좌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았다. 3.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둘러싸고 교회들도 갈라지다최근 몇 년 동안 페이스북 엄마 그룹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2021년 상반기까지 전 국민에게 제공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일부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미약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백신 회의론은 현재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높다. 남침례 신학교와 에스베리 신학교는 백 명 이상 직원을 보유한 사업체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백신 명령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의를 잘 하기로 유명한 캐나다인들조차도 앨버타의 제임스 코테스(James Coates) 목사가 에드먼턴 교회의 정원 제한 명령을 거부한 것을 놓고 찬반 여론으로 갈라졌다. 교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교회가 비록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팬데믹을 놓고 음모와 권위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고 있다. 2.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 팟캐스트가 교회를 뒤흔들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의 팟캐스트 ‘마스힐의 부흥과 몰락’은 지난 십 년을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기독교 미디어로 전 세계 팟캐스트 차트의 정상권에 오르기도 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이 팟캐스트는 특히 2021년에 수면 위로 올라온 라비 재커라이어스의 학대 행위를 잇달아 폭로하면서 정신적 학대의 문제를 교회가 해결해야 할 최상위 의제로 밀어 올렸다. 이러한 상호 의심의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유명 교회들이 내부 분열을 겪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지도자가 그들에게 단지 말씀으로 도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확인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신학자들은 “공감”의 적절한 정의와 적용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1.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다팬데믹과 정치가 몰고 온 아홉 달의 긴장이 마침내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십자가들이 세워지고 교수형장의 올가미들이 걸리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을 기독교 민족주의를 주제로 하여 다룬 후속 해설 기사들은 적절한 애국심과 비성경적인 혼합주의를 뒤섞어 놓았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2020년 선거 결과에 격렬한 분노로 반응했고, 지금도 여전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한번쯤은 물어 봐야 한다. 아마도 기독교 민족주의,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미국에 적용하는 이 사상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화된 종말론 또는 언약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민족주의
문화적포로
성경적성정체성
낙태논쟁
프로라이프
복음주의비평
메타버스 시대를 준비하는 법
by Ian HarberㆍPatrick Miller
2021-11-30
헨리 포드가 직접 대형 교회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자가용 때문에 대형 교회가 가능해졌다. 자가용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동네에 있는 자신의 교파 교회에 출석했다. 장로교인은 장로교회로, 감리교인은 감리교회로, 침례교인은 침례교회로, 루터교인은 루터교회로, 가톨릭교인은 가톨릭교회로, 그렇게들 각자 동네에 있는 자신의 교파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자가용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어린이 프로그램, 청소년 프로그램, 찬양팀이 좋은 교회를 찾아서 차로 10~30분 거리에 있는 교회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자가용을 이용하여 좋은 교회 쇼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교회들도 교회 쇼핑을 하는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역 매뉴들을 준비해 놓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술문명은 지금까지도 수없이 교회를 변화시켜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기술문명은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속도를 따라가자니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앞으로 닥칠 거대한 디지털 문명의 변화라는 빙산의 일각만 경험했을 뿐이다. 현재 우리 앞에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과 교회를 뒤바꿀 근본적인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메타버스이다.메타버스는 무엇인가?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메타버스’는 낯설게 느껴지는 새로운 단어일 것이다. 어쩌면 이 단어를 최근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모기업 이름을 '메타'로 바꿀 때 한번쯤 들어 봤을 수도 있다. 메타라는 이름은 다가올 새로운 미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페이스북은 메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기네가 다가올 디지털 세상의 첫 주자임을 자임했다.그런데, 도대체 메타버스가 무엇인가? 메타버스를 선도하는 벤처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매튜 볼(Matthew Ball)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메타버스는 실시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제한으로 현실 세계와 광범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3D 가상세계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역사, 신분, 소통, 금융거래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메타버스는 또 하나의 디지털 세상이 아니다. 여러 세상들이 통합되는 새로운 디지털 세상이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 소유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세상들은 단순히 가상 현실(VR)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실제 그 세상에 참여하는 증강 현실(AR)로도 존재할 것이다.메타버스는 이제 막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의 몇가지 예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메타버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의 폭스 TV에서 진행하는 알터에고(Alter Ego)라는 프로그램은 아마추어 가수들이 디지털 아바타로 출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나 사회적인 요소들과 연결된 선입견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디지털 아바타를 사용하여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실력만으로 온전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메타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신체적인 본래의 자기 모습보다 디지털 아바타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포켓몬 고’ 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증강 현실 안에 있는 포켓몬을 잡는 게임을 했다. 미래에는 이러한 증강 현실을 업무에 활발하게 적용하게 될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증강 현실 속에서 노는 일도 더 많아질 것이다. • 미국의 힙합 가수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은 온라인 게임 ‘포트나이트’(Fortnite)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여기에는 전 세계에서 3,000만 명이 참여해 함께 춤추고 즐겼다. 미국의 슈퍼볼 하프타임 때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모인 행사였다. 아마도 미래에는 사람들이 가상 세계 속에서 라이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애플의 안면 인식 프로그램은 적외선을 사용하여 당신의 얼굴에 있는 3만 개의 포인트를 찾아서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디지털 아바타의 표정으로 실시간으로 반영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당신의 표정과 디지털 아바타의 표정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플레이스테이션 5’에는 혁명적인 촉각 기술이 반영된 손잡이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보다 더 현실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는 디지털 장갑을 착용하고 메타버스 안에서 가상의 악수도 나누고, 건배도 하고, 심지어 하이파이브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마이크로소프트의 플레이팹(Play Fab)과 아마존의 게임리프트(GameLift)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서 게임을 할 때 필요한 맞춤형 상대를 가상으로 만들어 냈다. 사용자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앞으로 미래에는 메타버스 안에서 내게 필요한 가상의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다. • NFT(가상 화폐)는 우리에게 디지털 세상 속에서 재산을 소유하게 만들 것이다. 메타버스 안에서 디지털 디자이너가 만들어 낸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착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증강 현실을 통해서 그것을 현실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증강 현실 안경을 착용하면 사람이나 장소가 살아서 움직이는 예술 작품(또는 광고)이 될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Flight Simulator)에는 250만 기가바이트의 데이터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실 세계를 가상 세계 속에 구축하고, 이를 게임으로 만들어 냈다. 2조 그루가 넘는 나무와 15억 개의 건물이 그 세계 속에 들어 있다. 게임 유저들은 현실과 거의 동일한 가상 세계 속에서 비행을 즐길 수 있다(심지어 허리케인 같은 현실과 거의 동일한 기상 상황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을 미러 월드(mirror world)라고 부른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미러 월드의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하여서 현실 세계의 건물을 구입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초현실적인 디지털 재산을 구입하여서 그곳에서 거주하거나 휴가를 즐기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시들이 메타버스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장차 메타버스가 만들어 낼 미래의 모습이 어떠할지 보여 준다.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그렇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메타버스는 무엇일까?페이스북이 2004년에 등장하고, 아이폰이 2007년에 출시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이후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14년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미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제야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메타버스가 문화를 전부 뒤바꾸어 놓은 후에야 교회가 변화된 현실을 알아차리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메타버스 시대를 살아갈 제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메타버스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가 만들어 내는 문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메타버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까지 5~10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우리는 다가올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 미래의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갈 증인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미래 시대의 신실한 제자들을 키워 내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의 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1. 짜여진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오늘날 우리 사회가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안다면 지금 바로 이 문제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메타버스 안에서 철저하게 짜여진 아바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마크 주커버그의 메타버스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보면 가상의 공간에서 친구들은 만들어진 로봇처럼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가상 세계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실제의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자신처럼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앞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가상 세계 속에 만들어 놓은 정체성을 합쳐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인 트랜스휴먼에 대한 논의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턱이다. 이제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은 ‘메타버스의 형상’(imago meta)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은 굉장히 반문명적인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살과 뼈를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로 구분된 사람,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정체성은 미래 사회에서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생명이 흘러나온다. 사실 스스로 자기를 창조해야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Z세대[199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태어난 세대]는 이미 이러한 자기 창조의 두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교회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된 존재라는 진리를 마지막까지 고수하는 곳이어야 한다. 2. 해체 사회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앞으로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해체될 것이다. 우리는 가상 세계 속에서 아바타로 또는 증강 현실 속에서 홀로그램으로 해체되어 갈 것이다. 우리의 육체와 실제 환경과 가상 현실 사이의 차이를 더욱 현실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상 세계 속에서 주어진 무제한의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그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담아 내고 있던 초월성, 거룩의 의미를 빼앗아 갔다. 그런데 어느 팟캐스트 진행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메타버스는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던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물리적인 이 세상과 우리의 몸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가장 우선하는 근본적인 일은 에덴동산을 가꾸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든 사람을 돌보며, 외로운 사람에게 찾아가고, 절망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이 세상을 보호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현실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중요하다고 외쳐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디지털 세상으로 넘어가려는 끊임없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가상 현실을 거부하며, 더욱 더 현실 세계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서 눈을 마주치고, 서로 포옹하며, 그들과 실제로 함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이 미래 사회에서는 반문명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 것이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3. 한계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은혜라는 한계메타버스는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메타버스 안에 있는 무제한의 정보는 전지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메타버스 안에서 제한이 없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면서 전능함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지리적인 한계도 극복하여 어디든지 우리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편재성도 체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가상 현실을 통하여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영원함도 손에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초현대적인 바벨탑이 한계없는 세상을 약속하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이런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공동체에 머물러 있으면서, 급속도로 빠른 메타버스의 성장에 저항하여 천천히 가는 길을 택하고, 극도의 지식 사회 속에서 “나는 잘 모른다”는 말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는 어디든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새로운 시대의 신실함우리는 메타버스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뒤바꿀지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전지전능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우상이 그러하였듯이 메타버스도 우리에게 해악을 더 많이 미칠 것이다. 메타버스는 그럴듯하게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말씀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를 창조하신 영원한 왕을 겨냥하고 있다. 모든 기술적인 혁신이 그러하였듯이 메타버스도 기회와 동시에 위험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제자도라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제자도의 길을 고수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현실 세계에서도, 가상 세계에서도, 또한 엄청난 변화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원제: How to Prepare for the Metaver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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