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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
by 김선일
2024-03-12
얼마 전 딸아이가 급히 병원 응급실에 가는 일이 생겼다. 진단 결과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지만 빨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순서가 되는 대로 수술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종합병원이 늘 그렇듯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 큰 딸이지만 병원 측으로부터 아무 기별이 없다고 하니 부모 마음이 초조한지라 ‘따지러’ 갔다. 그냥 보이는 대로 응급실 데스크 앞에 앉은 간호사에게 물었다. “우리 애가 아파서 와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만 있는데 수술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응급실에 더 늦게 온 사람들도 먼저 수술받으러 가던데요.” “어 그러시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님. 따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앳되게 보이는 간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친절을 다해 응대한다. 아이의 이름을 입력해서 확인한 그녀는 자기가 모든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서 알려주겠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순순히 아이 옆으로 돌아가고 얼마 뒤, 그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아버님, 제가 지금 담당 선생님에게 여기 환자분 상황이 급하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더 급한 환자들이 있어서 그랬다고 곧 수술 일정을 잡아주시겠다고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간호사의 정성어린 조치에 더는 정색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돌아간 간호사는 약 10분 뒤 다시 와서 묻는다. “환자분, 혹시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제가 지금 또 확인해 봤는데 수술을 위한 입원수속을 도울 선생님들이 오신다고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윽고 입원수속을 돕는 스탭들이 와서 병실로 이동하는데, 그 간호사가 나와서 “수술 잘 받으시고 잘 나으세요!” 응원을 한다. 나도 웃으며 고맙다고 화답하는데, 그녀의 자리에 놓인 (나는 식별할 수 있는) 큐티집이 보인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을 뿐 아니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의 하나님이 부르신 보통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이 우리가 위대한 신앙의 선배로 추앙하는 이들은 원래부터 특출한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대하게 쓰신 보통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 젊은 간호사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그녀가 아마도 좋은 신앙인이라는 추정하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근래 일터 사역, 일터 영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신앙의 무게 중심이 교회와 주일에서 이제는 일상과 평일로 이동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 중 가장 많은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는 일터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데 종종 일터 사역과 영성을 위한 모델은 평범한 일터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인 기업인이나 선망할 만한 전문직 종사자로 채워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모임에서 일터 사역 강좌를 인도하는데, 그날의 주제가 일터에서의 압박이었다. 이미 정해진 교재와 외국 저자의 동영상 강의가 주어진 나는 그 내용을 해설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일터에서의 압박이라는 아주 중요한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사례로 나오는 이들은 모두 변호사들이었다. 기독법률가회 모임이라면 참으로 적절한 모델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더욱 평범한 일터에서 단순한 업무나 육체노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사례가 얼마나 와 닿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사례로 나온 변호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일터의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의 나라를 위해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일터 영성과 소명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아니, 평범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일터 사역의 건강한 방향이자 가능성이라고 믿는다.언젠가, 집 앞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순댓국 하나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와서 반찬은 셀프라고 웃으며 일러주신다. 반찬 코너로 가니 따라오셔서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신다. “고추절임이 참 맛있어요. 꼭 한번 드셔보세요!” 별로 당기는 반찬은 아니지만 자상함에 몇 개 가져왔다. 식사하는 중간에도 오셔서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며 챙기신다. 사실 혼자 외로이 밥 먹는데 뜻밖의 친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계산을 하며 고요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자세히 들으니 익숙한 멜로디다. “요게벳의 노래!” 한 가지 예를 더 들겠다. 몇 주 전, 학교 신입생 면접을 한 일이 있었다. 비신학계열 학과에 지원하는 아직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학교의 어떤 점이 끌렸냐고 물으니, 학교 분위기가 따뜻하고 직원들이 친절했단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부담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한다. 누가 친절했냐고 물으니, 학교 카페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특히 상냥하고 친절했다고 한다. 또 한 번 뿌듯했다. (우리 학교 카페에 한번 와보시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일터에서의 작은 섬김과 친절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터 사역은 바로 나와 내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터의 보통 사람들이 이제 일터사역의 방향과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거창하고 성공적인 일터사역의 사례보다 작고 평범한 영웅들에서 공감과 동기부여를 받아야 한다. 수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에는 버스 기사로 일하는 린다라는 여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녀는 자기 버스에 자주 타는 손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이 늦으면 기다리곤 한다. 한 80대 할머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힘들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운전석에서 내려 노파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버스에 실어줬다. 이 노파는 그 뒤로 린다가 모는 버스만 기다리게 되었다. 한번은 추수감사절 즈음에 버스 정류소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여성을 보았다. 그 여성은 그 지역에 처음 이사를 와서 모든 게 낯설었다. 린다는 그 여성에게 다가가 이 지역에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묻고는 추수감사절에 자기 집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초대했다.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신문기사는 린다는 자신의 버스를 작은 축복의 공동체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때로 승객들은 린다에게 종종 꽃다발을 비롯한 선물을 주곤 한다. 취재 기자가 묻는다. “짜증내는 승객들을 대하고, 교통 정체에 시달리며, 때로는 좌석에 붙은 껌도 떼어야 하는 고된 버스 운전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린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새벽에 일어나 주님 앞에서 30분 동안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 데서 저의 하루 기분이 결정됩니다.” 린다는 버스 노선 종점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이제 운행이 끝났습니다. 사랑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말한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느 버스 기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우리는 이 복잡한 도시의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가는 린다의 45번 버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나는 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 블로그에서 읽었다. 하지만 미국 교회에서만 배울 수 있는 선진 사례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이처럼 일상과 일터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의 그 평범하고 위대한 이야기를 찾자.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일터에서 ‘함께’ 결정하라
by 김선일
2024-03-06
페인트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 조(Joe)는 같은 일을 반복한다. 손님이 와서 특정한 색의 페인트를 주문하며 조는 해당 페인트를 골라서 기계에 섞고 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준다. 그다음에는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다음 손님을 받는다. 같은 일은 반복된다. 이 일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조가 지각이나 결석을 한다면 그는 해고당할 수도 있다. 그의 상사는 조가 같은 일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해도 제시간에 와서 해준다면 문제없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조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하는 일에 무슨 변화나 성장이 있을까?” “이 일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실제로 무슨 영향을 줄 능력이 있을까?”이 이야기는 최근 출판된 요한 하리의 벌거벗은 정신력의 6장에 소개된 한 사례다. 저자는 일하는 현대인들은 이와 같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는 열망과 자기 인생의 실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한 하리가 페인트 가게 점원인 조 필립스와 인터뷰할 때, 그는 공허감 가운데 각종 중독에 빠졌음을 고백했다. 조는 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 속에서 아무런 기대를 갖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냥 먹고 살아야 하니까 무기력감 속에서도 일할 뿐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무의미하게 일하고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12년 142개국을 대상으로 갤럽에서 행한 일 경험에 관한 조사를 예로 든다. 일터의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맡은 일에 “참여하며”(engaged) 직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고 답한 이는 13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63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실제로는 “참여하지 못한 채”(not engaged) 마치 일하는 시간 내내 몽유병 환자처럼 시간만(에너지나 열정이 아니라)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머지 24퍼센트는 “적극적으로 일을 망치려고 한다”(actively disengaged). 이들은 일터에서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바쁘게 자신들의 행복하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다른 참여적인 동료들이 성취하려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결국 갤럽 조사에 의하면,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기보다는 괴로워하거나 심지어는 혐오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적 일의 신학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근대 개신교 노동윤리와 직업 소명은 자신의 세속적인 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할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성실, 인내, 정직의 기독교적 덕목을 강조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것으로는 처절한 일터 현실 속 그리스도인들에게 울림이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1세기에 박해받는 상황에서 믿지 않는 육신의 상전을 모시며 인내와 진실함으로 자기의 일을 감당한 신앙 선배들의 귀감은 여전히 위로가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일터의 사람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결정한 대로 지시에 따라 일할 뿐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 일의 계획과 진행 속에서 어느 부분을 맡고 있는지, 어떻게 목표하는 바에 기여하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고급 기술을 다루는 대기업에서는 직원들이 일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분업화시킨다고 한다. 나중에 퇴사한 뒤에라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기업의 자기 보호적 정책은 결국 종사자들을 일로부터 더욱 소외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이 제시할 수 있는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인가?요한 하리는 같은 책에서 또 다른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한 정신과 의사가 영국의 일반 공무원 18,000명과 수년간 인터뷰를 한 뒤 재량권과 의미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그런데 복잡한 일들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그러한 결정으로 인한 책임의 중압감에 시달릴 고위직 공무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단순한 일만 처리하면 되는 하급직 공무원들에 비해서 1/4 수준이라는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닌 관리자들이 단순 반복 업무하는 이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주도권과 통제력의 상실은 비록 일에 대한 책임 부담이 덜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울, 불안, 공황장애, 무기력증과 같은 정신적 질환들은 우리 사회에 쓰나미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덮쳐온다.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낸다면, 일의 경험이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일에서 재량권을 얻지 못한 대다수는 지금도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소외와 무의미라는 고통을 겪으면서 밥벌이의 신성한 임무를 묵묵히 감당한다. 인내와 순종을 가르치는 신앙의 권면이 일정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의 신학이 이와 같은 일터의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고 오롯이 개인에게 성실과 인내로 일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 승리로 비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은 개인적 덕목의 차원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까지 포괄해야 한다. 일의 재량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는 현실에서 일의 신학이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성경에 있다.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주신 첫 번째 과업이 바로 결정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하나님은 동물과 새들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보여주시며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른 대로 이름이 결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 권한을 부여하시는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은 바로 결정권을 주신 것이다. 아담의 결정 과정을 하나님은 관찰하시고, 그의 결정을 허락하셨다. 이름을 짓는 결정 과정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결정권이라는 고유한 역량을 일터에 접목한 사례가 있다. AES(Applied Energy Services)라는 민영 전력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이 회사를 4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킨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사람들에게 결정 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이 일터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임을 확신하였다. 그 자신이 매우 주도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직접 경영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일의 결정 과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위에서 시키는 일만 강요당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창의성과 미적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신다는 것이고, 아담에게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인간과 결정권을 공유하신다는 것임을 믿고 이를 자신의 기업 경영에 도입했다. 모든 직원에게 직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자기 멋대로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조언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당 사안이 있을 때 최소한 5, 6명의 관련 경험자나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서 결정을 내리게 했다. 결정으로 인한 결과가 좋았다 하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질책을 받는다. 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쳤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함께 분담한다. 인간은 결정권과 창의력뿐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공동선을 이루는 존재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권 부여와 조언 과정을 인적자원개발의 근간으로 삼은 AES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인간 경영을 구현한 실험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데니스 바키의 이러한 성경적 일의 철학은 그의 저서 Joy At Work 조이 앳 워크에 이야기 형태로 담겨 있으며, 그의 형제들이 공동 집필한 일의 즐거움 워크북에도 성경공부 교재로 전개되어 있다. 기독교적 일의 관점은 무엇이 달라야 하나? 그동안 일의 신학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측면에서만 기독교적 일의 가치를 발견하는 경향이 있다. 회식 자리에서 술 마시지 않는 법, 정직하게 세금 내기, 주일 성수 하기, 직장에서 험담하지 않기 등과 같은 윤리적이고 방어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신자 개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중요한 신앙 양심의 과제다. 신앙의 양심이 흔들리는 상황을 상대하고 극복해 내는 일터의 신앙인들을 위한 목회적 격려와 위로는 항상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터에서 신앙이 있든 없든 사람들 대다수가 겪는 고통은 바로 일하면서도 일의 주도권과 재량권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함과 결정권을 인정한다. 일터에서 결정권을 공유하는 것은 언뜻 낭만적으로, 또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데니스 바키가 AES의 최고경영자로 일할 때도 이사진과 대주주들로부터 그러한 우려와 공격에 시달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창의성과 결정권을 부여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진지하게 실천을 모색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바로 이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면 성경적 일의 신학이 일터의 세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먼저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 가정에서, 교회에서, 혹은 교회의 한 부서에서도 여러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있을 것이다. 가족 여행을 언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자녀들에게 연구하고 조언을 얻어서 결정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 소그룹에서 기도회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한 교회는 자기 교회의 예배 시간마다 낭송하는 신앙고백을 교인들과 함께 결정했다. 물론 조언의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결정 과정의 공유라는 기독교적 일의 가치가 교회와 가정에서부터 체득된다면 그 가치는 또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속의 일터로 스며들 것이다. 더욱더 결정 과정에 참여할수록 책임감과 즐거움도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원형적 모습이다.
일의 신학을 위한 좋은 출발
by 김선일
2023-12-15
세계 3대 전력회사 AES의 최고경영자였던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겨자씨재단(Mustard Seed Foundation)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의 도시선교 지원, 그리스도인 인재 장학 지원, 그리고 일의 신학 프로그램 지원 등에 해마다 이삼백 만 달러를 기부해 왔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신학대학원에서도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을 정식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등록금과 도서비를 보조해 주었다. 일주일간 집중 수업으로 개설된 이 과목에는 일의 신학과 리더십 연구로 특화된 미국의 기독교대학원인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에서 강사를 파견한다. 전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의 신학 프로그램이 개설됐는데, 한국은 주로 신학교들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목회자가 미치는 영향력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신학생 때부터 교인들의 주중 일터 생활에 대한 신학적 안목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일의 신학 수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과제 하나가 일터의 그리스도인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업을 조율하던 나는 이 과제를 건전하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기업을 탐방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그동안 알려진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기업들 외에 최근에 새롭게 떠오르는 주목할 만한 기업들 몇 곳을 알아 놨다. 주일성수와 정직한 납세 등으로 기독교적 모범을 보인 회사들뿐 아니라, 경영 그 자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혁신과 창의성을 도모하는 기업들이었다. 학생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해당 기업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게 했다. 그렇게 학생들은 일터 그리스도인 인터뷰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했다. 미국에서 파견된 교수는 학생들의 모든 발표를 듣고 수고했다며 칭찬한 뒤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멀리 힘들게 탐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과제의 목적은 훌륭한 기독교 기업을 탐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전문인과 인터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학생 여러분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유명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도인 전문인을 일부러 찾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에서 경비일 하시는 분이 교회에 다니신다면 그런 분이 좋은 인터뷰 대상자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교회 청년도 적합한 대상자고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과 신앙이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지, 교회와 목회자로부터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가입니다.” 꽤 참신한 그리스도인 기업들을 발굴해서 알게 해줬다며 나름 흡족했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일의 신학을 구상하면서 모범적이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기업인들부터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인생의 문제와 해법을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습관에 익숙했던 것인가?’ 이 일을 겪은 뒤 일의 신학에 접근하는 내 관점은 변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찾아서 일터 사역의 실체를 제시하려던 방식을 재고해야 했다. 일의 신학은 우리의 일상과 멀찍이 떨어진, 선망할 만한 기독교적 사례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일의 신학은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일’이라는 관점에서 관찰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일의 신학은 ‘일’이라고 내놓을 만한 정규직, 전문직, 혹은 기업경영에서 신앙의 모델을 찾는 것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씨름하는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나 자신 또한 수년 전부터 일의 신학을 신학교 교과목에 도입하고, 일터 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강조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통상 알려진 ‘일’의 개념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직업, 또는 일자리와 자연스럽게 연관시킨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은 곧 상대의 직업을 묻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도 급여를 받는 고정된 일자리여야 ‘일’을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은 자칫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 왔던 여성들, 그것도 전업주부이거나 경력 단절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아울러 일의 신학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성년의 자녀들과도 접점이 약해 보인다. 일은 바깥 어딘가에서(out there)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몇몇 교회에서는 일터 사역을 하면서 일의 개념을 확장하여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상과 가정에서의 모든 일을 포함하였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업주부 여성들이 많은 봉사를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일터 사역은 전업주부나 미성년자들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제는 단순히 일터 사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의 신학을 더욱 근원적으로 성찰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일의 신학을 일상과 가족의 차원에서 근본부터 다시 접근해야 한다. 일과 병행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 자녀 양육, 일상의 관계 등이 일의 신학을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급여를 받은 일이든 아니든, 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 살림살이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관계, 친구들을 사귀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 사람을 섬기는 각종 봉사활동,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취미로 식물을 재배하는 일 등 모두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향하여 의미 있게 에너지를 활용하는 일이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일이란 정신적, 혹은 육체적 에너지를 방출해서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개인의 성취를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261). 일의 유형이나 범위가 중요하지 않다. 일은 직업이나 기업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일상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경험하는 실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올리고 일의 신학을 말하려면 전문직이나 기업경영에서 모범을 찾는 습관적 행태는 근대적이고, 엘리트적인 일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미래 사회로 나아갈수록 AI 같은 디지털 문명이 전통적 인간 노동을 급속도로 대치할 텐데, 그때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일을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직업이나 활동으로 국한하던 기존 인식에 변화는 불가피하다. 전통적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을 돌보며 공공선과 관계된 일들은 계속 늘어난다는 점을 주목한다(제러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 사회, 2019). 미래의 일은 재화나 용역을 통한 수익 창출 범위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 돌봄이나 공익적 활동으로 확대될 전망이 높다. 일의 신학을 모범적인 기독교 전문인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기업을 발굴하려는 태도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일의 신학은 고도를 낮춰야 한다. 일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을 위한 신학이다. 인생 대부분을 교회와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일의 신학은 엄중한 현실적 고민이자 과제다. 교회와 신학교에도 일터의 문화와 위계질서에 대한 고민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아와 살림만 해왔던 주부들에게도 일의 신학은 중요하다. 자녀들이 자기들의 전공을 선택하고 일을 찾아갈 때 일의 신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이웃들도 일을 하며, 일 가운데 살아간다. 일의 신학은 평범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원래의 의도된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제가 일터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걸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10-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에게 과외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전도를 하나 봅니다. 아이가 저에게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고 묻더니, 그 미술 선생님이 자기에게 기독교 얘기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동안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이금주: 이 질문이 전도의 주제라면 김 교수님이 더 전문이실 것 같은데요. 제가 이 사연을 보고 처음 떠오른 질문은 ‘이 과외 선생님은 전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아마 이는 일터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가져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김선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21세기 복음전도의 주된 현장은 일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지요. 우리의 일터는 그곳이 많은 사람이 일하는 큰 조직이든 아니면 이처럼 어린 학생 하나를 지도하는 사적인 공간이든 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이 사례에서 과외를 받는 학생이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 물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열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닌다고 답하고 대화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김: 예, 비록 사소한 질문 같지만 전도의 문이 열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일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5에서 바울이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며 세월을 아끼라”고 했는데,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기회를 사라”는 의미라고 하지요. 일상에서 이러한 순간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골 4:3)을 열어 주시는 것일 수 있으니 영적으로 민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저라면 이 학생에게 ‘그래 선생님도 교회 다닌단다’ 이렇게 답하고 나서,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니?’ 또는 ‘너도 교회에 관심이 있니?’ 물으면서 대화를 더 이어가겠습니다. 학생에게 예수님과 복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 그렇지요. 근데 저 질문의 행간을 보면, 질문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머뭇거리고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물은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그래서 제가 시작할 때 그 과외 선생님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지나 성경을 펼치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복음을 전합니다. 과외 선생님의 말과 행실이 그 학생에게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선생님이 다른 믿지 않는 선생님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학생은 ‘이 선생님은 뭔가 다르구나’ 느꼈을 겁니다. 우리의 언행과 태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훨씬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김: 사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느냐가 이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면 사영리나 다리 예화 같은 특정한 프로그램의 ‘전도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도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좋은’ 전도를 하느냐 ‘나쁜’ 전도를 하느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전도가 되겠지요.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 의미에서 전도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과 행실의 전도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김: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일터에서, 즉 일을 위해서 만난 자리에서 전도라는 종교 활동을 해도 되느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과외라 해도 일은 공적인 것인데, 여기서 개인의 종교를 나누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터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전도라는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나누어도 괜찮은가?’ 이런 의문이 함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의 신학은 일터에서 우리의 일차적 사명은 하나님 앞에서 일 자체를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경우도 학생에게 과외를 가르치는 일이 전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성껏 학생을 지도하면서 학생이 공부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소명입니다. 일 자체의 소명에 충실하고 고 어린 사람일지라도 존중하며 대하는 선생님의 그러한 모습이 복음을 전하는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김: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들린다.’ 이런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들려진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 3:1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선한 행실을 보일 때 그 남편들이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이고,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귀감이 안 된 상태에서, 공부를 지도하는 일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도에 더 장애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말과 행동이 같이 전달되어야 설득력이 훨씬 높아집니다. 김: 우리가 종종 디모데후서 4:2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는 구절을 전도에 적용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도를 해야 한다는 전도 제일주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제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로서의 소신과 영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연소한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스승 바울이 교회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말만 하려 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자세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자세와 동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 다음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목양과 교육을 의미합니다. 교회 밖에서 불신자를 만나면 아무 때라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에서 그 말씀을 너무 아무 때나 전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저도 종종 봅니다. 일보다 전도가 우선이라고 하거나, 그래서 일은 전도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복음의 더 큰 차원을 놓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미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 예, 물론 이렇게 개인적으로 과외지도를 하는 경우라면 가르침과 돌봄이라는 공적인 일에서 선생님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 형성과 선한 행실이 일종의 예비적 전도사역이 될 것입니다. 사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 또한 근대 계몽주의가 가져온 여러 폐해 중 하나입니다. 공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간미가 필요합니다. 좋은 배려와 돌봄의 관계에서 복음을 나눌 기회는 언제든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너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벧전 3:15)하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적절하게 할 말을 준비하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일터에서 양심에 꺼리는 일이 있을 때
by 김선일·이금주
2023-09-20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회사에서 선진 마케팅 기법이라고 해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시제품을 과대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실을 말하자니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고, 저도 상사에게 질책을 당합니다.김선일: 회사에서 신제품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이 나온 것처럼 예고를 해서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고민은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겪을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금주: 이 질문을 보고 검색을 해보니, 요즘 마케팅에서는 고객의 필요를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선진기법이라고 한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야말로 기독교적인 ‘타협’(compromising)의 이슈를 안고 있다고 봐요. 이 타협이란 거룩함의 문제와 연결되고, 그것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기 위해서이지요. 이: 이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이 취해야 할 몇 가지 단계를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먼저 그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서 사실적 분석을 하십시오. 회사에서 계획하는 홍보방식이 과대홍보라고 바로 결론짓지 말고 정말 과대홍보인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자신은 과대홍보라고 생각하지만, 회사입장에서는 과대홍보가 아니라 정말로 선진기법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 추론하고 끙끙 앓지 마십시오. 어쩌면 회사의 운영방침이 내가 고지식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욱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먼저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예, 저도 조직 생활을 하다보면 한 개인으로서 업무나 경영을 대할 때와, 책임을 맡은 리더로서 전체를 볼 때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나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라 하더라도 실무자의 경우는 그 일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이: 그래서 둘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분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분명히 거짓이 담긴 과대홍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 둘째 단계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 말하기를 목회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김: 목회적이라 함은 사람을 대할 때, 비록 그가 나보다 상관이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의심될지라도 너그럽고 배려하는 자세로 접근하라는 것인가요? 이: 맞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짓말을 안 하고도, 고객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진기법의 취지를 잘 살려서 회사에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건의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를 의롭게 보이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다른 사람도 수긍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겸손하게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하려고 하는 선진기법이 100퍼센트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김: 질문하신 분도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신 것을 보니 조금 애매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품을 홍보하는 데 있어서 거짓보다는 진실을 늘리고, 사람들이 잘못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자고 건의해야겠네요. 이: 미국의 조직문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윗사람에게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예의를 지키면서 건의해야 합니다. 공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상사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십시오. 아무리 권위주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얼마나 겸손한 태도와 용어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사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김: 진실과 공의가 중요하지만, 그 진실과 공의를 담는 방식은 겸손과 온유함이어야겠습니다. 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고 연구해서 제안을 하십시오. 불평부터 하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만을 따지지 말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십시오. 그게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김: 제 경험으로도, 어떤 일에서 잘못된 것을 불평하고 뒤에서 비난을 일삼으면 점점 조직에 대해서 불신이 쌓이고, 일에 대해서 실망하고 의욕도 잃는 것 같습니다. 이: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김: 어쩌면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놓고, 비즈니스에서는 기독교적인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의 신학에서는 일터에서 일어나는 딜레마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해놓고 안주하려는 자세를 가장 경계합니다.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올바르게 접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김: 지금까지 두 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사실분석을 하고, 그다음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과 온유함 가운데 더 나은 대안을 찾아서 건의하라. 그래도 윗사람이 들어주지 않고 기만적인 과대홍보를 밀어붙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그때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명백한 거짓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라고 말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자녀들이 걸식하지 않게 하신다(시 37:25)는 믿음을 가지십시오.김: 아마 그렇게 하면 설령 회사 정책에 반하는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더라도 결국 더 큰 상전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도 경험하리라 봅니다. 이: 동시에 영업이나 홍보에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의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자신도 더 연구하고 심사숙고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항상 기도하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상황에서 떠오릅니다. 비즈니스의 속성인 이익 추구 시스템을 너무 순결주의로 접근해서 섣불리 선악을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순결함은 상사 및 동료들과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겸손과 존중의 목양적인 지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 끝으로, 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교회와 목사님의 협력적인 목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목사님들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을 일의 신학적 관점으로 목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양적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의 일에 대한 목양을 받아야 일터에서 목양자가 될 수 있겠습니다. 목양 받아야 목양합니다!
일터 예배, 모든 직원을 참여시켜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9-0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현재 30명 규모의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월요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인도를 제가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고 선교에 관심이 많은 것을 직원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잘못한 직원에게 책임을 묻고 필요하면 징계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용서와 너그러움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난감합니다. 자칫 엄격하게 하면 교회가 욕을 먹을 수도 있어서요. 김선일: 이 질문은 일의 신학을 접하는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이 겪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들로부터 현실에서 일의 신학을 적용하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질문에는 고민해야 할 주제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에 모든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한 가지 가장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주제, 곧 일터에서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금주: 이 질문을 보면서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부터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저명한 구약학자인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교수가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터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질문하신 그리스도인 경영자가 월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김: 한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경영자들 대부분이 일터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매주 병원에서 일터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이: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직원이 그리스도인이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요? 그러면 예배 시간은 얼마나 길게 진행되나요? 직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들은 이 경영자가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에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알게 되나요? 그들은 경영자에게 무엇을 기대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경영자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면 그의 행동이나 삶에서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김: 보통 일터에서의 예배는 30분 이상 진행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하신 분을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데, 직원들의 절반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는군요. 대신 입사할 때 일터 근무 시간 중에 주 1회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고 동의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 좀 파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만약 예배 시간이 30분이라면 직원들에게 예배 대신에 자유 시간을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 이분의 경우에는 근무 외 시간에 예배를 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직원들의 복리를 위한 시간을 배려하는 것이 일의 신학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 카이저의 말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면,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죄송하지만, 이분은 예배와 일터에서의 영성을 분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일터에서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예배나 기도 모임을 하는 것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배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요구될 경우, 비록 그것이 강요의 형식을 띠지 않더라도 회사의 위계로 봤을 때 사실상 부담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이: 질문자께서 직원이 잘못하면 책임을 묻고 또 징계해야 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잘못이 단순 실수인지 고의적 기만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해야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실수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실수와 고의가 혼합되면 안 됩니다. 만약 금전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실수라면 먼저 원인 파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과 징계를 논하기 전에 그리스도인 경영자와 해당 직원 둘이 앉아서 먼저 대화해야 합니다. 첫째, 원인을 먼저 찾고, 둘째,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방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셋째, 손해를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을 같이 찾으십시오. 직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경영자의 소홀한 태도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직원이 너무 지쳐서 일을 제대로 못 하거나, 가족 문제가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김: 그리스도인 경영자라면 책임과 징계를 논하기 전에 먼저 실수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겠네요. 해당 직원에게 추궁하기 전에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잘못한 것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을 때마다 함께 의논해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김: 이분은 자신이 직원들에게 엄격하게 하면 교회가 욕을 먹을 수도 있어서 난감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로 고민하시는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이 많습니다. 이: 이런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왜 난감할까요?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말하느냐, 아니면 하대하면서 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잘못된 행동을 관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원들을 존중하면서 잘못에 관해서 진솔한 대화를 할 순 없을까요? 경영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직원들을 대하시나요? 직원들을 질책하더라도 사랑과 온유로 하나요?(딤후 4:2, 고후 10:1, 빌 4:5, 엡 4:2, 벧전 3:15 참조). 이것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난감한 것입니다. 김: 그리스도인 경영자는 직원들을 징계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통해 용서와 회복으로 나아가야 목표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책하다가 직원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 일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영자는 직원들에게 일의 목표와 가치,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터의 윤리가 무엇인지 알려줘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엡 6:9). 만약 예수님이 더 큰 경영자시라면 어떻게 하실지 항상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김: 일터에서 예배를 드리는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덕이 되려면 우리의 일 자체가 하나님과 동료 직원들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 회사라 할지라도 우리의 예배와 일이 분리되면 복음의 진정한 영향력은 드러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 3:23)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터 예배일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가 내 신앙을 무시할 때
by Miranda Carls
2023-08-29
가시덤불과 엉겅퀴_신앙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득한 일터(창 3:18) 현장의 조언을 들려드립니다.회사 동료들이 내 신앙을 비웃습니다. 그렇다고 비열하고 적대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들은 도무지 신앙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내가 세속 공간에서 다양한 신자들과 나누었던 여러 대화의 핵심을 다 짚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동료들이 종종 우리의 믿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는 한 가지 생각이 들어오면 거기에 덧붙여 여러 다른 생각을 쌓아갈 수 있다. 우리 팀원들이 신앙을 가진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공통점이 없다. 동료들은 아마도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착각에 빠져서 성경이나 읽고 있는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 사람은 내 믿음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마음의 널뛰기는 상황에 따라 훨씬 더 심하게 오르내릴 수도 있다. 동료들이 내 믿음을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고객이나 친구에게 나는 보통 이렇게 묻곤 한다. “그래? 그렇게들 생각한다고?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안다. 내 대답이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을 더 성가시게 할 수도 있을 반응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깊은 사랑과 좋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사실을 제대로 분별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느낄지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것이다. 진짜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회의적인 동료라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다들 반응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대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과 부정적인 경험으로 엮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따라서 당신이 과거의 그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다를지 궁금할 수도 있다. 또는 아예 당신이 말하는 믿음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 전파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불필요한 망설임에 발목이 잡혀서도 안 된다. 직장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영의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탄 원수는 관계를 망치거나 복음 전파의 기회를 원천 차단하려고 동료의 비웃는 말 또는 싸늘한 시선까지 악용할 수 있다. 사람이 두려워서(잠 29:25) 후퇴한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결코 동료들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를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올바른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상기할 점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세상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를 미워한다고 놀라서는 안 된다(요 15:18). 세속 직장에서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저항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투지와 더불어 굉장한 기도가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은 직장에서 당신을 쓰실 것이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장사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불신자에게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지금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인 우리는 세속 직장에서 일하는 독특한 소명과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 네 단계직장에서 상황을 개선하고 그리스도를 보다 더 온전하게 전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1. 씨 뿌릴 기회를 모색하라어떤 동료에게는 당신이 진짜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수도 있다. 언론 또는 확신에 찬 온라인 무신론자가 말하는 엉터리 예수에 그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야 한다. 직장 안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로 전할 기회가 당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것이고 반드시 복음의 씨를 뿌릴 기회가 생길 것이다(고전 3:6-9).2. 신앙을 변증하라많은 그리스도인이 지금 당신이 제기한 바로 그 이유로 믿음 나누길 주저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여라도 신앙을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걱정한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가 전혀 근거 없는 믿음 체계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질문받을 때 믿음을 변증할 책임이 있다(벧전 3:15).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효과(중요한 이유), 복음의 실제 메시지(복음이 말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담고 있는 성경 본문의 신뢰성(믿을 수 있는 이유)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당신이 기독교 변증론을 어느 정도 공부할 것을 권한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의 중요성과 신뢰성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데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서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되새김으로써 당신 자신의 신앙을 더 강화하는 효과까지 있을 것이다. 3. 교제에 참여하라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무시하는 바쁜 전문가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함께 걸어가는 형제자매 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이겨낼 것이다. 서로가 기도의 용사, 책임 파트너, 그리고 공유하는 성경 세계관의 렌즈를 통해 모두가 함께 겪는 도전을 논의하는 공동 공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 공동체가 아직 없다면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라. 교회 소그룹에서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교회 친구 몇 명과 주간 커피 일정을 잡는 건 어떨까? 직장에서 점심시간이나 일과 전에 갖는 성경 공부는 어떨까? 당신의 초대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될지, 당신은 분명히 몹시 놀랄 것이다. 4. 전체적인 관점에서 직장을 바라보라대부분 전문가가 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직장에서 만나는 문제가 훨씬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도 이 부분에서는 유죄이다. 팀장이었을 때, 우리 팀이 분기별 목표를 초과 달성할 때면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확실하다고 믿던 거래가 날아갔을 때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직장에서 믿음을 반대하는 반응을 접할 때,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단단히 유지하고 진리에 닻을 내리라. 하나님이 계신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있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줄 형제들을 가까이 두라. 예수님 안에 닻을 내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말라. 영성 훈련을 통해서 당신은 나무에 연연하지 않고 숲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동료들이 비열하지는 않다고 언급했다. 직장 동료들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선택 사항을 기억해야 한다. 직장에서 종교 차별이 있는 경우, 인사담당자와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그리고 상황이 당신의 영적 건강과 안녕에 계속해서 심각한 방해가 된다면,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나 멘토의 조언을 구하라.마지막으로, 어두운 세상 직장에서 빛이 되어 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계시며 직장에서 당신을 크게 들어 쓰실 것이다. 원제: When Colleagues Think Your Faith Is a Jo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여성의 은사 활용 기회를 제한하는 교회, 떠나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31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교회 봉사는 시키지만, 리더의 역할은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은사를 활용해서 가르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를 옮겨야 할까요? 김선일: 이 질문은 교회를 옮기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일, 여성, 은사 등의 문제들도 결부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향상되듯 교회에서도 여성들이 리더의 역할을 맡는 일도 요즘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렇게 남성 중심적인 교회들이 있군요. 이금주: 우선 ‘교회를 옮겨야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보자면, 저는 ‘쉽게 옮기지 말라’고 조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교회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를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도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옮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마다 교회를 옮기는 습관이 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먼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는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교인들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 영적인 신뢰를 갖지 못할 때는 교회를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이: 물론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먼저 자신의 은사를 점검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중에 교회를 옮겨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옮겨야 할 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김: 예. 주관적 경험이나 느낌으로 쉽게 교회를 옮기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이: 저도 질문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때,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쉽게 떠난 것은 아니고 고민과 기도 끝에 결단했습니다. 김: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시면서 어떠한 과정이나 절차를 겪으셨나요? 그래도 혼자 끙끙 앓을 것이 아니라 목사님과도 상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이: 제 경험에 비추어 질문자에게 이렇게 권면하겠습니다. 첫째, 목사님과 진지하게 대화하십시오. ‘나의 은사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목사님께서 조언해주시고 지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혼자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거나 궁리하지 말고 먼저 목사님과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을 하게 되더라도 교회의 목회 방침에 따르겠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런 대화를 통해서 목사님이 설득되는지, 목사님이 자기 교인의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김: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이: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떠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때 마음도 평안해집니다. 현재의 교회에 계속 머무는 것이 마음에 불편하다면 다른 교회를 찾아서 옮길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교회가 나의 상황을 잘 헤아리고 동역할 수 있는 교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목회자를 찾아가서 요구하고 논쟁하면 안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결국에 교회를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섬김의 은사를 활용할 수 없음을 발견해서 옮긴 것입니다. 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겠군요. 이것도 일의 신학과 관련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라는 클 틀에서 봐야겠네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뿐 아니라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에서 계속 있어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고민합니다.이: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이 교회가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인가? 교회가 당신에게 그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면, 목사님의 문제나 여성 차별의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김: 우리가 은사와 소명에 관해서 중요하게 보는 구절이 에베소서 4장 12절인데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과제는 성도를 온전하게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에베소서 4장 7절에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 은사를 활용하고 계발하도록 돕는 것은 교회 지도자의 주된 책임이라고 봅니다.이: 그래서 초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목사님도 죄인인 인간입니다) 이 교회가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곳인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물론 남녀 차별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 죄송하지만, 다시 저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목사님은 부모님과 일찍 이민 오셔서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안수받은 한인이었고 장로님드르 교인들 대부분이 미국인이었지만 회중에는 미국인과 한인 2세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으로 연구한 여성 사역에 관한 특별 주제를 금요일에 대학부 성경공부 시간 전에 가르칠 수 있겠냐고 했더니 당회에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일에 예배 끝나고 30분 정도 세미나를 인도할 기회나, 혹은 수양회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한 세션을 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1년은 걸렸습니다. 장로님인 제 남편은 이미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마음의 결정을 할 때까지 기다렸노라고 나중에 말해주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1년 반이 걸린 겁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원래부터 알던 교회였는데, 그곳에서 제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김: 교회를 옮기기 전까지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뜻을 묻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야 할 주제는 교회나 목사님이 아니라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요. 그러고 보니, 일의 신학이 교회 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군요. 요즘 한국 교회의 젊은 목사님들은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이 중요합니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동등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주의 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자칫 여성운동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납니다. 제가 다녔던 미국 교회는 오랫동안 여자 장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장로들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한 뒤에 여성 장로가 가능하도록 교회 규정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장로들이 많이 뽑히니까 남자들이 장로로 추천돼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이 더 많아지니까 남자들이 소수가 돼서 불편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협력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여자도 남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하고, 남자들도 여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이들에게 은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주일에 일해야 하는 직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현재 직장을 구하고 있는 40대 싱글여성입니다.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살고 있고, 생활이 넉넉지 못합니다. 주일에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명이고 기쁨입니다. 서비스 업종(카페 매니저)에서 일해 왔는데, 제가 원하는 조건의 직장은 주일에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중에만 일하고 주일에 쉴 수 있는 곳은 그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계속 주일에 쉬며 교회에 갈 수 있는 직장을 기다리는데 잘 나오지 않네요. 우리 교회에는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저녁 시간에 교회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해줍니다. 계속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주일에 일하는 곳에서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이금주: 저는 이 질문이 한국적 기독교 신앙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미국에 있는 교회가 많이 느슨해졌지만, 과거에는 주일성수를 율법처럼 엄격하게 지켰죠. 한국에서는 여전히 주일성수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선일: 한국 교회도 과거보다 주일성수라는 개념이 조금 이완됐고, 사회 전반적으로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매장들도 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지요. 이: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주일성수란 무엇인가?’ 둘째,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김: 주일성수의 의미와 일의 목적이군요.이: 먼저 스스로 주일성수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까? 교회당에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교인으로서의 습관입니까?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제쳐두고, 근본적으로 ‘내가 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한 주에 하루를 정해놓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일을 희생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까? 만약 후자라면 주일성수의 의미로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공허하게 제물을 드리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김: 이사야 1:12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고 경고하십니다. 이: 이 또한 큰 그림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이 왜 나에게 중요한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됩니다. 질문자가 주일에 일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이유가 ‘원하는 조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 조건이 월급도 많이 받으면서 주일에도 교회 가도록 보장해주는 직장을 얻는 것이라면 주일성수는 어떤 순위에 있는가요? 중요한 질문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입니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내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김: 질문자의 고민에 이미 우선순위와 가치의 문제가 반영되어 있군요. 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상에 바친 고기를 알면서 먹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대접할 경우에는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김: 예,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27절에서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26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다음 구절인 28절에서는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합니다. 즉, 상대방을 배려해서 어떤 때는 먹을 수도, 어떤 때는 먹지 말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그 원리가 이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나의 신앙 가치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 때문에 교회를 빠진다면 그것은 신앙 양심에 배치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도 일터에서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갖고 일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안입니다. 하지만 단지 조건 때문에 절충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김: 저는 주일에도 하는 일이 사람들의 생명과 기본 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대로 본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자제하기를 권해요. 병원이나 대중교통, 안전을 위한 경비와 관리에는 상시 인력이 요구되니까요. 그런데 사실 주일에도 교회에서 예배 뒤에도 교인들끼리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를 많이 이용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그런 곳들을 거리낌 없이 이용하면서 주일성수를 적용한다는 것이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와도 연관되네요. 이: 맞습니다. 주일에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본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주일에 일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가 되느냐의 여부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14:2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먹느냐, 안 먹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시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입니다. 김: 그 말씀이 이 질문자의 상황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이: 질문자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사로서 아이들이 ‘왜 주일에 선생님 교회에 안오시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하는 큰 그림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주일성수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김: 사실 주일성수라는 단어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신학적 의견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좀 전에 말씀하신 로마서 14:5에서 바울도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이: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일성수만큼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로 인해서 그들이 시험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김: 예수님께서도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셨지요. 이: 질문하신 분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국 교회에 다닐 때 목사님이 저에게 장년부 성경공부를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인인 저에게 미국인들 성경공부를 맡긴 것입니다. 몇 년간 장년부 주일 성경공부를 기쁘게 지도한 후에 좀 쉬어야겠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그럼 주일학교 아이들부터 가르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부터 가르쳤는데 저에겐 잘 맞지 않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4학년 아이가 저에게 귀한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아이는 자폐증이 있어서 당시 초등학교 선생이신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 아이 때문에 너무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라 충고도 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성경을 가르쳤더니 1년 만에 다른 아이가 된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서 많이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학교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김: 주일성수로 인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문제, 그리고 일의 소명과 은사를 탐구하는 과제로 이어지는군요. 이: 이처럼 여러 가지 관련된 사안들의 목록을 만들어서 성경적, 신학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김: 우리가 문제를 넓고,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이: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삶의 작은 경험과 일들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주일성수, 예배함의 의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일의 소명 등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김: 지금까지의 대화를 토대로 질문자에게 제가 목회자로서 질문자에게 권면한다면, 좋은 조건을 포기하더라도 당신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어디에서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기쁨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거기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그 은사와 소명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일성수
이단 제품, 쓰지 않아야 하나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17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화장품을 쓰고 있는데, 그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가 이단과 연루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 제품을 계속 사서 써도 되는지 고민입니다. 제품은 좋은 것 같은데, 그 회사의 매출이 늘어나게 함으로써 결국 이단의 포교를 돕는 것이 아닐까요?김: 저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신학대학 다닐 때, 학교에서 강의하시던 미국인 선교사님이 한겨울에 석유난로를 많이 쓰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석유 판 돈으로 이슬람이 선교한다고요. 이: 저는 이 질문을 보고 자칫 율법주의 관점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이 보이콧해야 할 회사들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정책이나 윤리를 지지하는 회사들의 제품을 불매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낙태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회사들의 리스트를 만듭니다. 제가 그 리스트를 갖고 있는데, 굉장히 많습니다. bibleblender.com에 의하면, 아마존부터 있네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책을 사야 할까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항공사 대부분, 코카콜라, 펩시콜라, 드롭박스, 이베이, 애플, 골드만삭스, 페이펄, 마이크로소프트 등등 100개도 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다 거부하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질문자는 화장품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지만, 아마 고민 없이 아이폰을 쓰고 있을 수도 있어요. 김: 저는 그러한 생각에는 순결주의 강박도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신앙은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것이지요. 사실상 그렇게 살기는 불가능하고, 늘 경각심은 가져야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신앙의 동력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우리는 이 문제를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봅시다. 11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에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not of the world) 않은 것이 예수님께서도 인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환경을 기독교의 관점으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김: 저는 그다음 15절 말씀도 주목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분리된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세상과 완전히 차단돼서 사는 것은 불가능함을 아십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도 한때 이단이 경영한다고 의심받은 화장품 회사에서 세일즈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 말씀이 그 회사의 경영자가 종업원들을 굉장히 잘 지원한다는 거예요. 또한 좋은 화장품을 싼값에 공급하는 게 회사의 모토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품이 많이 팔리면 이단 포교를 돕는 것이라는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회사의 종업원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창출되고, 회사에 매출이 늘어나면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연구 개발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지 내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김: 일의 신학이 이러한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겠군요. 아무리 이단이나 타종교에서 운영하는 회사라 하더라도 그들이 일의 신학에 부합되는 가치를 실천하며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도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라고 하셨습니다.이: 저는 누가복음 6:32-33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35절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종교가 다른, 심지어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비즈니스와 일에 대해서 먼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김: 그들이 노동을 착취하거나 불량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한다면 일의 신학의 관점에서 거부해야겠지요. 전에 이단들이 신도들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서 번 돈으로 자기네 조직과 교주의 배만 불린 적도 있었으니까요. 이: 예. 맞습니다. 그들이 낙태 옹호 단체에 돈을 보내거나 기독교 가치나 생명윤리에 명백히 배치되는 일을 공공연하게 한다면 거부해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로마서 14장입니다. 20절을 보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우리가 이단의 제품이나 서비스 자체가 악하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이단의 것인 줄 알면서 자유분방하게 애용하거나, 또는 약간이라도 불편한 마음을 품고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김: 오래전 신학생 시절에 신학 교수님이시고 목사님이신 분과 차를 타고 지방에 가다가 휴게소에 들렸는데, 거기서 그 교수님이 통일교에서 판매하는 음료수인 맥콜을 사서 거리낌 없이 마시고 저에게도 괜찮다면서 나눠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일로 며칠 동안 저분이 정말 제대로 믿는 분인가 하고 고민했었습니다. (웃음) 이: 로마서 14장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는 이유는 또 다른 더 중요한 원칙,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김: 나는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덕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고려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헌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그런 좋은 화장품을 만들어서 방문판매 하는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이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피라미드식 판매를 통해 실적을 쌓아서 다이아몬드를 이루면 한 달에 1억을 번다.’ 이런 점이 오히려 일의 신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봐야 할 사항 아닐까요? 이: 그건 우리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단 포교를 얼마나 하느냐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공주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처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가 물질적 성공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선교적 소명으로 삼고 운영하는 기독교 회사라면 모를까, 세상에서 운영하는 회사를 그런 문제로 탓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모순된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라는 숙제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김: 그런데 때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포장하는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모든 회사가 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 내 안의 욕망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나 자신이 윤리적으로 바로 서는 게 중요합니다. 나의 현실과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이웃을 배려하고,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늘 헤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 아니요로 나뉘지 않습니다. 김: 그리스도인이 이단 회사의 제품을 이용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먼저 일의 신학적 가치를 고려하라. 그 회사가 노동착취를 하는 반사회적인 사교 집단이거나 불량제품을 만드는 곳이지 않은 한, 또는 공공연히 기독교 가치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한, 무조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둘째, 이단의 포교와 같은 문제는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라. 그들의 비즈니스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안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셋째, 그렇다고 이단의 제품이라는 걸 알면서 굳이 계속해서 애용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도 알아보라.넷째, 믿음이 약한 이들을 배려하라. 이단의 제품을 사용하는 나의 자유가 그들에게는 시험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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