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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복음, 두 각도, 그리고 네 ‘움직임’
by Matt Smethurst
2023-07-13
현실을 직시하자.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끼리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정작 복음 속 중요한 의미가 사라지거나 억제되기도 한다. 복음 속 좋은 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식”(news)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결국에는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원천이다. 기독교는, 그 본질을 말하자면, 좋은 ‘조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좋은 소식의 선포이다. 복음을 이해하려고 신학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사역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5분도 기다릴 필요 없다. 꼭 알아야 하는 건 2,000년 전에 어떤 침략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천국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고, 예수님은 새 나라를 열었다. 33년 동안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확고하고 완벽하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당신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기에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믿는 사실은 이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삶을 산 나처럼 취급받았고, 그래서 이제 나는 예수님의 의로운 삶을 내가 살았던 것처럼 대우받는다. 예수님은 묻혔다. 그러나 사흘 뒤에 벌떡 일어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명백하게 사악한 삶이건 교묘한 “종교적” 다양성이건 관계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반역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도 예외 없이 이생과 다음 생에서 그와 연합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새 땅에 적합한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며, 그분 아래서 영원히 우주의 왕이 되어서 다스릴 것이다. 할렐루야!회의적인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속기 쉬운 아이들에게나 통할 억지스러운 동화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 소식은 온전히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찬양 가사처럼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까? 아, 나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자비란 원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자비라고 불린다. 하나의 복음, 두 각도나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사역하는 목사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면 더 잘 보이는 것들—우리 도시만의 크기, 윤곽, 인구 밀도 등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대로를 걸으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하늘에서 보는 것과 걸으면서 느끼는 것, 두 가지 관점 모두 리치먼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체 조감도가 없는 거리 수준의 관찰에도, 거리의 관점이 생략된 조감도에도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물론 단지 지리학적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리치먼드의 역사와 문화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요는 한 도시를 관찰할 때도 다양한 각도에서 보지 못하면 일차원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트 챈들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두 가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공중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에서 보는 관점이다. 버지니아에 수도가 하나인 것처럼, 복음도 하나이다. 하나의 복음을 두 각도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감탄한다. “공중에” 있는 복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가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예: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한편, “땅에서” 보는 복음은 이 장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지를 구체화한다(예를 들어, 하나님, 인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반응).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복음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다. “공중”과 “지상”, “와이드 렌즈”와 “줌 렌즈” 같은 상호보완의 관점을 가장 잘 종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복음 이야기를 네 가지 움직임(movements)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통치자(Ruler), 반역(Revolt), 구원(Rescue), 응답(Response)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보다 더 풍부한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누군가와 믿음을 나눌 때 훨씬 더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자“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성경은 현실에 관한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또 다스리신다. 현대 문화가 흔히 범하는 잘못된 개념과 달리, 하나님은 하늘의 산타도, 우주의 자판기도, 짜증만 내는 교관도, 그리고 아이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아빠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며 사랑의 주님이시다. 영원한 백성의 공동체이시며, 성령의 기쁨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은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있다.다름 아니라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그분만이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의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도록(그분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신다는 의미) 창조되었다. 인간은 성공과 인기, 오락과 로맨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안에서만 제대로 된 의미와 성취감을 추구하도록 맞춤 설계되었다.자,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삶이 창조주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고 그를 모든 것 위에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확실히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반역우리 마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죄의 바다에 빠뜨렸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그 두 사람으이 일으킨 비극의 여파이다. 창조주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 죄의 촉수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우리의 사랑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물든 본성과 자의로 사랑의 주님에게 반역했다. 죄를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간주하는 건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약함 또는 하늘나라에서 범하는 주차 위반 딱지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심각하다. “우주적 반역” 곧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한 반란이다. 죄의 본질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죄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것은 단지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중심에서 시작한 배신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속였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종종 영적 간음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중심으로 삶을 구축하려고 발버둥질한다. 창조주께 받은 좋은 선물을 우리는 오히려 창조주를 대신하는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한다. 2. 죄는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인 문제이다. 죄가 미치는 수평적 영향도 파괴적이지만, 죄는 근본적으로 수직적 문제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인 다윗은 우리 모두가 처한 곤경을 고백한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시 51:3-4; cf. 창 39:9; 눅 15:21).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sin”(죄)은 단수형이지만 의미는 단지 단수에 머무르지 않는 유일한 영어 명사이다. “Sin”은 “sins”보다 더 포괄적이다. 깊은 수준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 게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다. 이것을 숙고하라. ‘나-주의’(me-ism)와 우상숭배의 결과는 다름 아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파멸적 갈라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그 결과 생명과 사랑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공의의 심판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죄의 결과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진노,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확고한 반대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바울은 신자들에게 묻는다. 이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반대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 편을 들겠는가? 복음을 알고 싶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면 얼마나 선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나님만큼 선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도덕적 완전성은 실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소식이다.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의로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앞에 두고 있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움도 없는 곳이다. 여기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한 설명이 있다.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그런데 이렇게 계속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나열해 나가는 대신에, 바울은 “그러나”라며 말을 돌린다. 당신의 영원 여부가 이 작은 한 단어 “그러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구원그런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궤적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그러나”가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2:4-5)수 세기에 걸친 하나님 백성의 반역이 있고 나서, 영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아, 아기, 청년,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히 2:14-15). 나사렛 목수는 33년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끊임없는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지만, 고백할 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 번도 참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담이 살지 못한, 이스라엘이 살지 못한,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살지 못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빌 2:8). 율법을 만드신 이가 율법을 지키다가 율법을 어긴 이들을 위해서 죽었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법을 어긴 이들을 대신해서 죽었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아들에게 벌을 내렸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온전한 그의 아들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유일한 사건은 단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뿐이었다면, 십자가의 결과는 다시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NBA 정규 시즌에 모든 팀은 여든두 경기를 치른다. 그 어떤 팀도 무패의 완벽한 시즌을 달성한 적이 없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잠깐만요. 우리 팀 기록은 지금 0-0이거든요? 완벽한 시즌입니다. 한 경기도 진 적이 없습니다!”누구라도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반응할 것이다. “당신 팀은 경기를 하나도 안 했잖아요? 모든 경기를 치르고 다 이겨야 진짜 완벽한 시즌입니다.”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도덕 기록은 말하자면 0-0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기에 “무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의로움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시즌”을 보낸 게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했다. 그들의 기록은 0-82로 급락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물려받은 도덕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82-0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농구의 예를 계속하자면, 요점은 이것이다. 예수님이 단지 죗값만 치렀다면 우리의 도덕 기록은 0-0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단지 82패라는 손실만 흡수한 게 아니다. 그는 또한 빈 무덤으로 증명된 여든두 번의 승리를 신자에게 안겨주었다(롬 4:23-25). 우리의 기록은 순식간에 0-82에서 82-0, 그러니까 전패에서 전승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한 번도 그분을 화나게 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그분을 기쁘게 할 뿐이다. 할렐루야!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로 가득한 죄인으로 대하셨고, 우리를 흠 없는 삶을 산 그리스도처럼 대하셨다. 신학자들이 이것을 “달콤한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음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 모든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청교도 리처드 십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들어라.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요즘 같은 문화 환경에서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거나 도덕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런 식의 관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의 수준으로 왜곡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려고 건방지게 날뛰었기에, 하나님이 몸이 구부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내가 좋아하는 존 스토트의 설명이다.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 두 가지 모두의 핵심이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맞서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만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을 두셨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기꺼이 받으신다. 아멘.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계속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잔인한 죽음 후, 그의 시체는 “안전한” 무덤에 안치되었고(마 27:65-66), 다시는 그 무덤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없었다. 죽음의 세력이 생명의 주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행 2:24; cf. 3:15). 그는 약속한 대로 셋째 날 무덤에서 나왔다. 믿음을 나눌 때, 부활이 단지 복음의 “추가 사항”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희생이 받아들여졌음을, 죄에 대한 공정하고 완전한 대가를 치러졌음을 공개적으로 확언하셨다. 하나님이 구원 수표에 서명한 날이 성금요일이라면, 수표가 현금으로 바뀐 날이 부활 주일이다.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고 자기 백성을 위해 지금 중보기도 하는 예수님은 어느 날 재림하실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은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죄가 일으킨 재앙이 훼손하지 않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성경은 그 현실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용어인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cf. 벧후 3:13; 계 21:1-4)이라는 미래의 집으로 묘사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우리는 통통한 천사들과 황금 하프를 연주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달리고, 일하고, 놀고, 노래하고, 웃고, 쉬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베푸는 끝없는 경이로움을 즐길 것이다. 당신의 응답고속도로 통행료 부스에서 돈을 받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 있는 경험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건 단지 비즈니스 거래이다. 당신이 돈을 내면 그 사람은 차단막을 올린다. 당신은 당신 할 일을 하고 상대도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런 식의 관계가 아니다. 무감각한 거래 관계가 아니다.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개인적인 결합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자비에 당신 전부를 던진다. 그는 당신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 복음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준비 되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돌아서라첫째,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을 고백하는 데에는 하나같이 능숙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내가 가장 황폐해져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이다. 마음을 바꾸고 180도 돌아서라.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2. 믿으라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죄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향해서는 “예”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일과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변하지 않는 약속을 받아들인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3. 보물로 받아들이라우리는 예수님을 소중히 여긴다. 기술적으로 이것은 세 번째 단계가 아니라 두 번째 단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치아 임플란트 뿌리를 박는 것처럼 단계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 보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지옥행에서 나를 구해주는 무료 승차권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르고, 경배하고, 또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분을 아는 것만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다(요 14:6; 17:3). 그를 통해 우리는 용서의 기쁨과 성령의 도우심, 나아가서 내세의 소망까지 경험할 수 있다.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가거나, 기독교 정서가 담긴 글을 올리거나, 기도하거나, 카드에 서명하거나, 교회 복도를 걷거나, 여름 캠프에서 솔방울을 불에 던진다고 구원받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은 이런 식의 모든 외양적 요소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진짜 질문은 당신의 심장을 겨냥한다. 바로 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생명을 걸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가?복음은 응답을 요구한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고후 6:2). 우리의 믿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자. 무엇보다 영원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의 지점으로 그들을 인도하자. 복음이야말로 지금까지 전해진 최고의 위대한 소식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소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Matt Smethurst의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The Gospel Explain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복음전도
구원
대속
회개
반역
죄
성경 전체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by Phil Thompson·Andreas Koestenberger
2023-07-06
최근 남자 성경 공부에서 한 대학생이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가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설명했다. 불과 이십 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교수를 제외하고 이런 식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신도도 성경 속 각각의 책을 연구하고 그게 성경이라는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바뀐 걸까? 차세대 지도자들이 성경의 상호 연결성이라고 가정하는 지점에까지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던 걸까? 수십 명의 저자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언어로 기록한 방대한 책 성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젊은 지도자들은 수십 년간 축적된 성경신학 연구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고 있다. 성경신학이라는 학문은 복음주의 교회와 특히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사역으로 드러나는 개혁신학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신학이 널리 보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여전히 새로운 연구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작품이 약 1,000쪽 분량의 방대한 책으로 탄생했다.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와 그레고리 고스웰이 쓴 BibIical Theology: A Canonical, Thematic, and Ethical Approach이다 쾨스텐버거는 성경 연구자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는 성경 입문서, 주석, 해석학 안내서, 사역 자료 등 수십 권을 썼다. 의심할 여지 없이, Biblical Theology는 수십 년에 걸친 쾨스텐버거의 목회와 저술 속 많은 내용이 함축된 초석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해서 공동 저자인 시드니 크라이스트 칼리지 출신의 그레고리 고스웰은 구약에 대한 더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두 명의 구약과 신약 학자는 우리가 성경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 새 책과 관련해서 쾨스텐버거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어떻게 성경 속 66권의 모든 책에 다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는지 설명했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이며 조직신학과 같은 다른 학문이나 신학적 성경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TIS) 같은 운동과는 어떻게 다른가? 성경신학은 다양한 성경 본문을 지속적으로 경청함으로써 성경 저자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추구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신학이 연결에 관한 학문이라면 조직신학은 구성에 관한 학문이다. 성경신학에서 우리는 정경 속 다른 목소리를 서로 연결한다. 같은 구약이지만 오래된 책과 상대적으로 후기에 기록된 책들 사이의 연결,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연결 등등이다. 그러다 보면 더 오래된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신약의 저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6:35; 8:12; 10:7, 11; 11:25; 14:6; 15:1) 속 예수님의 “나는 ∼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서 40-66장 속 여호와에 대한 이사야의 언어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사야서의 내용은 또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스스로 밝히신 내용을 상기시킨다. 성경신학은 역사적, 귀납적, 서술적 학문이기에, 우리는 본문 자체의 용어로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 사이의 연결 또는 “텍스트 간 연결”을 섬세하고 주의 깊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더불어서 성경 용어, 원래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루신 역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시간이 갖는 의미 등을 존중하면서 본문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성령, 교회 같은 중요 주제별 분류에 기초해서 신학적 구성에 관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 자료를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대적 맥락에서 배열함으로 오늘날에도 인간에게 성경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TIS에 관해서 물어야 할 핵심은 사람들이 “신학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다. 신학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성경의 저자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즉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성품과 길을 계시하기 위해 쓰였다고 받아들이는 의미라면, 성경신학과 TIS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그러나 TIS가 성경의 신학적 해석을 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최고의 주석가들은 항상 본문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TIS의 경우에 성경 접근과 관련해서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 자체가 광범위하고 연역적 전제이지만, 성경 신학에서는 본문을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성경 저자들이 지닌 신념과 확신에 따라서 관련된 성경 구절 사이의 연결을 그린다. 우리는 성경 언어와 석의에 대한 능력을 갖춘 성경학자들이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최고의 모델은 실무자들이 관련한 전문 지식을 테이블에 가져와 함께 작업하는, 다양한 분야 간의 진정한 파트너십 구축이라고 믿는다. Kaiser, Schreiner, Thielman, Guthrie 또는 Marshall의 작품을 보면서 바득바득 이를 가는 신학교 사람들에게 당신의 접근 방식은 그들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 66권 각각의 책에 담긴 ‘정경’ 및 ‘윤리’ 섹션이 당신의 고유한 접근 방식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당신이 언급한 학자들은 신약신학 또는 구약신학만을 저술한 반면에 우리는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성경신학이다. 사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복음주의 영어권에서 성경신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여기서 특히 Beale, Schreiner, Thielman, Witherington을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그중에서도 딱 한 사람(이 사람의 전문 분야는 신약인데)만이 전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우리 두 사람의 경우, 우리는 각자의 전문 분야를 꺼내놓고 논의함으로 진정한 협업 프로젝트를 이뤄냈다. 나와 그레고리는 성경신학을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지닌 귀납적, 역사적, 그리고 서술적 학문으로 이해하는 공통된 방법으로 이 작업을 완성했다. 66권으로 이뤄진 하나의 도서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저술들 사이의 연관성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믿음에서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66권 각각의 책이 나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우리가 한 권 한 권 책 별로 접근해서 이번 책을 완성한 이유이다. 각각의 책에 대해서 우리는 주요 주제, 윤리적 가르침, 그리고 정경적 공헌을 다뤘다. 정경적 공헌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서 그 책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발견한 내용을 종합하고 모세 오경의 윤리나 복음서의 주요 주제에 대한 토론을 포함시켰다. 마지막 장에서는 왕국, 언약, 십자가, 사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12가지의 중심이 되는 구약과 신약 주제를 논의함으로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된 시각을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그 사랑에 보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야말로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 중 하나임을 확인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 속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신학 분야가 이루어내는 독특한 공헌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아는 한, 주류 성경신학 학계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식으로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돈 카슨과 함께 당신은 성경신학의 총체화(totalizing) 경향을 일축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성경신학의 단일 센터 추구에 관해서는, 단일 센터라는 “성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돈 카슨의 회의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또한 그런 식의 노력이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적이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성경신학의 척도는 성경의 다양성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달려있다는 카슨의 현명한 조언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성경신학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절제된 가족 대화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 은유를 성경신학에 적용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성경적 자료를 연결하고 종합함으로 우리는 모든 성경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경 간 대화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경에 크게 기여하는 약 12개의 구약과 신약 주제를 찾아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 전체의 요약이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랑이라고 했으며 요한의 사랑 윤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약 750쪽에 걸쳐서 우리는 여러 주제와 윤리적 가르침을 논의함으로 성경신학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한 것이다. 책 전체에서 당신은 정경 속 책 순서의 중요성과 또한 순서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정경 순서가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예는 무엇이 있을까? 정경 순서에 대한 다양한 방식(schemas)이 성경에 접근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책의 위치가 그 책을 이해하는 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리고 다른 책과 관련해서까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해서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예를 들겠다.헬라어 성경에서 예레미야 애가가 예레미야서 다음에 배치된 것은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읽는 데 필요한 기본적 연결고리를 만든다. 애통하는 목소리 중 하나가 예레미야라면, 이것은 심판의 선지자와 고통받는 백성 사이의 화해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백성을 정죄한 선지자가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히브리 정경 속 위치로 볼 때, 애가는 전례(liturgical)에 필요한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메길로트) 중 하나였다. 이런 식의 배치는 그 책이 역사적 위기라는 맥락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도리어 미래에 만날 위기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 책은 그 어떤 고대 사본이나 정경 목록에서도 누가복음 다음에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같고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사도행전 1:1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신약 정경이라는 삶 속에서 사실상 별개로 살았고, 그들의 근접성 부족은 각 권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어졌음에 관한 진술이다. 정경적 관계에 있어서 사도행전은 특히 누가복음보다는 정경적 블록으로서 다른 복음서와 고리를 맺고 사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함으로 신약의 증언에 통일성을 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이후에 많은 편지를 쓰고 또 많은 교회를 설립한 바울의 사명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쁜 목회자가 성경신학을 설교 준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건전한 성경신학에 의해 만들어진 설교는 그렇지 않은 설교와 어떻게 다른가?목사는 강해설교뿐 아니라 성경신학적 설교도 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본문을 설교하건 간에, 전체 정경의 틀에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설교 본문을 성경 속 관련된 다른 내용과 연결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목사는 그 이야기를 창세기 앞부분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시켜야 한다. 동시에 뒤에 나오는 성경 내용과도 연결해야 한다. 특히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수많은 연결 지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연구하고 설교 준비를 한다면, 그는 영적 풍요를 경험하고 더불어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더불어서 그는 교인들을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로 끌어들이고, 그들 스스로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총체적이고 정경적인 접근 방식을 모델로 제시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설교가 가능할까? 목사가 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본문을 면밀히 읽고, 그 이해에 기초하여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교인들 사이의 진정한 연결점을 분별함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또한 삶의 도전과 실존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성경의 음성을 갈망하고 있다. 당신이 가장 기대하는 성경신학의 새로운 경향은 무엇인가? 향후 20년 동안 미래의 학자들이 탐구할 새롭고 유익한 방향은 무엇인가? 혹시 몇 년 안에 우려해야 하는 성경신학의 어떤 경향이 있는가? 급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인 성경신학은 교회와 학계에 엄청난 양을 제공하는 활기찬 학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각 권 또는 성경 전체를 다루는 다양한 책과 여러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그중에는 내가 편집하는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Series도 있는데, 조만간 마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다. 40권으로 예정된 Evangelical Biblical Theology Commentary 시리즈는 현재까지 몇 권만 인쇄되었다. 다른 유용한 시리즈로는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Essential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그리고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등이 있다. 단언컨대 성경신학은 많을수록 더 즐거운, 실로 광할한 분야이다!한 가지 우려는 “성경신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다양한 정의와 방법이다. 그렇기에 성경신학을 연구할 때 우리는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해야 하고 또한 연구 방법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레고리와 나는 처음부터 정의와 방법의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우리가 볼 때 일종의 혼합적 접근을 실천한다. 그들은 특정 신학적 체계를 전제로 하고, 거기에다가 성경적-신학적 내용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한 접근 방식에서 성경신학은 더 이상 순수 귀납적일 수 없다. 물론 순수한 귀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신학 체계의 전제를 막는 노력과 더불어 여전히 귀납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주의하길 바란다. 성경신학의 기치 아래 판매되는 모든 것이 반드시 동일한 정의와 방법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Biblical Theology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고리와 나는 성경신학의 미래를 다뤘다. 우리가 미래를 안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논했다. 우리는 성경신학이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노력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책임 있고, 방법론적으로는 미묘한 차이를 일으키며 동시에 신학적으로 정제된 성경신학을 만들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영역에서 더 많은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성경신학의 명확한 정의와 조직신학과의 적절한 구분.· 다른 학자의 발견에 대한 더 큰 협력 정신과 개방성, 반대로 해당 분야의 학자들 사이에서 덜 경쟁적 관계.· 마스터(만능) 열쇠 탐색을 포기하고 대신 다중 접근 방식 채택.· 이번 책에서 모델링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성경 신학과 윤리 간의 더 큰 통합.· 주요 주제, 성경의 줄거리, 정경 구조와 관련해서 성경 속 각 책이 추구하는 신학에 대한 적절한 관심.· 예수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의 폭이 더 커지는 것. 구원이 아닌 창조로 성경신학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는, 진정한 글로벌 접근을 이루는 것.· 성경신학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는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방법으로 새로운 세대의 설교자를 양성하고 또 전체 회중을 양육함으로써 학계뿐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것.원제: How to Make Sense of the Whol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신학
조직신학
신학적성경해석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by Sam Crabtree
2023-07-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면(사실 그렇다), 또 이 난장판의 책임자가 하나님이라면(사실 그렇다), 이성적인 사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로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어떻게 그를 신뢰하고 또 그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른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만족의 근원은 여러 곳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변함없는 사랑.• 그가 멀리 있는 대신 내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나의 슬픔과 아픔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 모든 면에서 나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 아침마다 새로운 긍휼로 심판을 이기시고 나와 같은 죄인에게 내려질 진노를 거두신다. •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의지, 하등의 약속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즐겁게 약속을 주시는 그의 마음.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라고 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이유가 되겠지만, 조금 전 살펴본 첫 문장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한 문장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수년 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보는 법을 배웠다. 즉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복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 문장을 제대로 읽을 때까지는 말이다. 물론 삼십 년 전에도 나는 그 문장을 읽었고, 그 이후로 성경은 내게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하는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기쁨)이게 과연 사실일까? 내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냥 기쁘신 게 아니라 가장 기쁘다고? 내가 막 읽은 것과 비슷한 문장은 “기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지도록 만든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운 게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은 술에, 마약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은 바람직한 웰빙이고 적절함에서 만족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순결함, 더럽지 않음, 흠 없음, 오염되지 않음, 바래지 않음, 제한 없음,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을 추구함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파이퍼의 주장처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만족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만족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함으로써 성경 읽는 방식뿐 아니라 우주를 관찰하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 우주에는 관찰할 것이 많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기쁨은 그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만족의 원동력이 된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준다. 아래에 열거한 건 단지 몇 가지 보기일 뿐이다. • 공의를 기뻐하신다(잠언 11:1).•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잠언 15:8).•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시편 147:11).• 백성을 택하기를 기뻐하신다(신명기 10:14-15).•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시편 115:9).• 자기 아들을 기뻐하신다(마태복음 17:5).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다. 하나님은 이 점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는 또한 최고로 가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최고로 평가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그는 항상 합리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족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함으로써 완벽하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가 없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다. 또한 미치지도 않았다. 헨리 스쿠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즉 자기 자신은 가장 가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좋은 답을 알고 있다. 견고함과 변하지 않는 내구성을 가진 것, 증발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요인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모두를 이기는 것,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 실질적이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다른 모두를 파생시키는 것, 매우 희귀해서 어디에서도 유사품을 찾을 수 없는 것,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심오하고 결정적으로 유용한 것, 그리고 끝없이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것이 가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귀하고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기에 가장 기쁘시다. 자신의 영광 안에서 그는 가장 기쁘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전능한 하나님이 불평만 한다면? 유명한 기도,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가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전능한 힘을 사용하여 그는 언제라도 우리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기에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의 가장 높고 깊은 기쁨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결코 실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일을 마치고는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실 수 있다. “정말 좋다. 참 좋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행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당연한 말 같지만 참으로 행복하다.” 심지어 그의 진노조차도 결국에는 그를 기쁘시게 한다.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공의를 이루며 그를 영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변함없으시며 항상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행하신 일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믿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감사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또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듯, 나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인해서 또 그가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이다.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기뻐신 것처럼, 나도 매일 하나님 때문에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엉망진창 속 하나님의 기쁨길고 더운 날을 끝낸 농부가 어떻게 쟁기질로 다 파헤친 잔디를 보면서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밭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밭이지만, 농부는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러운 수확을 기대하며 쟁기질을 즐긴다.우리 부부는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냈다. 당신은 실패했다며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 우리 부부와 완전히 관계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오산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끝내지 않았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나는 중학교 딸과 함께 도예 수업을 들었다. 작업실과 옷을 먼지투성이 진흙탕으로 만들어가면 몇 시간이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이 모든 수고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아직 가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수고가 지금 매력적이고 유용한 작품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하나님은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기뻐하신다. 경작 중인 들판, 육체의 질병, 완전히 침수된 행성, 그리고 이 부서지고 신음하는 우주는 지금도 영광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선을 이루시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만족하신다. 결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법이 없으시다. 그의 기쁨과 나의 존재하나님이 하나님이기에, 또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가져다준 변화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만든 신들과 하나님을 구별시킨다. 그런 신은 인간을 닮아서 하나 같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 제우스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벼락부터 예측할 수 없는 포세이돈의 분노, 트로이 전쟁 때 인신 제물을 요구하는 아르테미스, 오늘날 유행하는 취소 문화 속에서 낙태를 조장하는 자기신격화한 도덕 경찰 닮은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신들은 기뻐 만족하시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영원한 즐거움을 확실하게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모든 역사에 목적의식을 불어넣었다. 기쁘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역사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이룬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현실 이해의 방식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좋은 곳, 아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성경 읽는 방식도 바꾸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기쁨은 행과 행간 곳곳에 들어있다.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쁨은 후회가 없는, 일종의 깊은 기쁨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할 때(예를 들어, 창세기 6:6과 사무엘상 15:10), 그것은 축소된 영광이라는 슬픈 현실에 대한 한탄의 의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왜일까?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의 아들에게 최대의 영광을, 그의 백성에게 최대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려는 그의 깊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으로 인해서 기쁘시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원제: What If God Were Happ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하나님의기쁨
하나님의만족
하나님의 본질에 충실한 제자훈련과 자연법
by 최창국
2023-06-29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관계적, 영적 상태가 달라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아지고, 독재자와 권위주의적인 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학대가 더 심해진다(티머시 제닝스,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 164. 이하 제닝스의 같은 책에서 인용). 따라서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27-32, 5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권위주의적이거나 엄한 존재와 같은 신으로 믿고 예배하면 두려움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런 신을 계속 믿고 예배하게 되면, 결국 만성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뇌와 몸이 손상된다. 수많은 뇌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달라진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신, 인간이 달래야만 용서를 베푸는 신을 믿게 되면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싹트고, 개성이 말살된다.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면 치유가 찾아온다.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제닝스, 99-100).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라고 한 대상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가 아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치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율법적 신학, 종교 제도와 같은 실정법에 얽매인 채 쌓는 제자훈련이라면 오히려 삶을 파편화하거나 파괴하기 쉽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놓치고 권위주의적인 하나님 관을 견지하면 파멸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했다. 4개월 만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살상되었는데, 그 장소는 주로 교회였다. 당시 르완다는 인구의 56퍼센트가 천주교, 26퍼센트가 각종 개신교단으로 기독교 국가였다. 무려 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그 절망적인 시기에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은 도피 중인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에 들인 뒤 민병대에 알렸고, 민병대가 교회에 들어와 숨어있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성직자가 자기 교인을 죽였고, 교인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 성직자를 죽였다. 대학살의 광란이 끝난 뒤 교회와 교단을 불문하고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의 장로와 집사와 교인이 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제닝스, 111). 티머시 롱맨은 이 전쟁의 참상을 고증한 책에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 행동이 소속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믿었기에 일부 종파의 암살단은 죽이러 나가기 전에 미사를 드렸다. … 사람들은 날마다 미사에 와서 기도한 뒤 출동해 살해했다. 민병대원이 광란의 살육을 잠시 멈추고 보란 듯이 재단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Timothy Longman, 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6-7). 연구진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살상에 가담했고,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교회에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했는지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요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독재자나 권위주의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람들은 살상에 가담했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피난민을 보호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세례를 어떤 방법으로 베푸는지, 예배를 무슨 요일과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죄를 사제에게 고해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직접 자백하는지, 성찬식을 어떻게 하는지,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였다. 기독교의 바른 교리와 바른 신념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친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살상하는 데 가담했다(Longman, 같은 책, 7-8).넓은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영혼 돌봄과 치유와 관계된다. 물론 영적 성장과도 관계된다. 제자훈련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보지 못하고 실정법인 교리와 율법적 신학의 지적 습득에만 몰두하게 될 때,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볼 때도 처벌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사람들에게 실정법 개념만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막힌다. 실정법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율법적 신학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완고하게 만든다(제닝스, 114). 이러한 특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실정법에만 치중한 공동체는 사람들을 더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로 이끌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중국, 요르단, 남아공, 투르키예 등지의 어린이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더 나눠 가질 줄 모르며 남을 더 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연구의 저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연구를 보면 무신론과 무종교 가정의 아이일수록 오히려 더 너그러웠습니다. … 이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어느 나라든 다 비슷하게 종교는 아이의 이타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종교심이 친사회적 행동을 촉진한다는 견해에 반할 뿐 아니라 종교가 도덕적 발달에 꼭 필요한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도덕적 담론의 세속화가 인간의 친절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 반대입니다”(제닝스, 156-57).티머시 제닝스는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 즉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와 비밀을 무시하고, 교리와 같은 실정법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는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 하나님의 법을 놓치고 율법적으로만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더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제자훈련은 조직의 교리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던 내용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제자훈련이 인간이 만든 실정법 위에 서 있는 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연합할 수 없다. 실정법의 전염병은 항상 기독교에 비참한 분열을 초래했다. 성경의 교리나 해석이 어느 쪽에 옳으냐를 두고 경쟁하며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법이 실정법에 불과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사람들은 그분의 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진다(제닝스, 182). 기독교가 수만 갈래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열한 현상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더 이기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인간의 실정법으로 대체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제라도 실정법에만 충실한 제자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에도 충실한 제자훈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연법은 하나님이 설계한 인간의 뇌, 마음, 몸, 자연 질서 등과 관계되고, 실정법은 인간이 만든 교리, 제도 등과 관계된다. 물론 교리와 같은 실정법과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인 마음과 몸 등과 같은 자연법은 나선형 관계 안에서 소통할 때 보다 더 효과적인 제자훈련을 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폴 트립의 말처럼, 교리는 삶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폴 트립, 교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참조).
제자훈련
자연법
실정법
하나님의 뜻 분별하기
세 가지 전통적 유형과 현대적 적용
by 김경호
2023-06-23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분별의 원리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하나님의 인도와 음성 듣기에 대한 분별을 이렇게 말한다. “영적 건강 상태와 하나님의 인도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영적 건강은 인도의 전제조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마음의 영적 건강(health), 습관(habits), 그리고 욕구(heart)가 전제될 경우, 분별(holiness)이 가능하다. 또한 달라스 윌라드(Dallas A. Willard)도 동일한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는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게리 프리슨(Garry Friesen)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삶의 기본적인 원칙(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을 알려주셔서, 더 많은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이들 세 영성 학자들은 이런 공통점과 함께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분별의 요소제임스 패커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학자마다 분별의 요소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패커는 하나님의 인도를 세 가지로 본다. 그것은 성경, 지혜, 조언이다. (1) 먼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책(성경), 율법, 마음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명령’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원리상, ‘책(성경)’이라는 규범을 통해 인도하신다. 이 규범적 형식은 구체적으로 ‘율법’을 통해 표현된다. 율법의 근본은 십계명이고, 율법의 내적 원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마음(생각)은 악을 최소화하고 선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2) ‘지혜’는 “참된 원리를 삶에 적용함으로써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구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언’을 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달라스 윌라드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윌라드는 말씀, 성령의 감화(내부), 환경을 강조한다. “세 가지란 환경, 성령의 감화, 성경 말씀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믿어도 좋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상호 의존 관계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치되는지 합치되지 않는지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그 음성에 경험적으로 ‘친숙’해서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음성은 음질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특정한 생각’이나 ‘지각의 형태’이며, 그 음성에는 특정한 ‘정신’(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배어 있고, 그 음성을 특징짓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이란 성경에 부합한 것이며, 원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맥락에서 그 음성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는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순종’이라기보다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역설이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간청한다 해도, 그 말씀이 어떻게 들려올지 잘 모르고 거기에 반응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정작 말씀이 들려와도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 이 역설은 두 가지의 비참한 결과로 나타난다. 첫째, 자신의 기분이나 우연한 기회, 또는 절박한 필요를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엄청난 실패를 경험한 후, 종교적 일상은 유지하지만, 실생활에서 철저히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경우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종교적 독재자에게 끌려다니며 광기로 치닫는 경우다. 따라서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체험’의 방식이 아니라 인격적 차원의 ‘대화’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게리 프리슨의 세 가지 분별의 요소. 프리슨은 하나님의 인도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을 제외한 두 가지 요소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당신의 뜻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원칙(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을 알려주셔서, 더 많은 자유와 책임을 허락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전제로 한다. 즉 성경의 원리를 어기지 않는 한, 결정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윤리적인 뜻을 ‘원’으로, 개별적인 뜻을 ‘원의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인 ‘원’ 안에 모든 결정을 ‘자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이는, 성경에서 사도들의 의사 결정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사도들과 바울의 의사 결정은 “좋게 여겨”(선교지, 살전 3:4-5), “필요한 줄로 생각”(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일, 빌 2:25-26), “합당하면”(헌금 모금, 고전 16:3-4), “마땅치 아니하니”(과부 돌보는 문제, 행 6:2-4), “가한 줄 알았노니”(할례 문제, 행 15:28-29)와 같이 표현된다. 프리슨은 이러한 윤리 안의 자유의 영역을 ‘지혜’로 표현한다. 즉 보다 더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리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성경적 모델을 사실상 “개별적이 뜻”을 제외한 세 가지로 제안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그리고 자유의 영역(지혜)이다. 종합세 학자가 제시한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기본적으로 비슷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학자들은 각각 세 가지 요소로 성경-지혜-조언(패커), 말씀-성령의 감화-환경(윌라드),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윤리적인 뜻-자유의 영역(프리슨)을 제시했다. 여기서 나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초자연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로 구분하고, 자연적인 요소는 다시 객관적 원리와 주관적 원리로 구분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자연적인 요소에서 객관적인 원리에는 “성경(원리), 윤리(규범), 지혜(자유), 환경(섭리)”을, 주관적인 원리에는 “내적 감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주요 원리가 아닌 “나머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패커의 경우, 점술 행위로 분류하는 ‘징조와 표적’과 감정적 충동으로 분류하는 갑작스럽고 지속적인 ‘감정’ ‘최선과 차선’ ‘조언’ ‘소르테스 비블리카’(우연히 발견한 구절), ‘직접적인 음성, 환상, 또는 성령의 감동’이다. 윌라드의 경우, 다른 사람들, 기이한 현상과 음성, 초자연적인 사자(천사), 꿈과 환상 등이다. 프리슨의 경우, 상담, 상식, 초자연적인 인도(음성, 천사, 환상, 입신, 꿈, 예언, 이적 등), 여기서, 최선과 차선, 조언, 다른 사람들, 상담, 상식은 ‘지혜’로 분류할 수 있다. 지속적인 감정은 ‘내적 감화’로 분류할 수 있고, 징조와 표적, 직접적인 음성, 환상, 성령의 감동, 기이한 현상과 음성, 초자연적인 사자(천사), 꿈과 환상, 초자연적인 인도(음성, 천사, 환상, 입신, 꿈, 예언, 이적 등)은 ‘초자연적인 요소’로 분류할 수 있다.적용빌 하이벨스(Bill Hybels)는 고전적 영성 훈련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적용한다. 그의 책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의 제목이 암시한 바와 같이, 현대의 리듬은 기도할 시간도 없이 너무 바쁘다 보니 경건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더 이상 삶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따라서 하이벨스는 처방책을 제시한다. 첫째, 하이벨스는 삶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일기쓰기를 제안한다. 기도를 글로 쓰는 것이다. 글로 쓰는 기도의 효과는 확실히 삶의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해진다. 둘째,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가능한 조건이 이루어진다. 능력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온다. 이제 나는 잠잠해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다면, 먼저, ‘오늘’ 하루를 살펴본다. 하루 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들, 갑작스러운 사건들, 누군가의 말이 계속 떠오르는 경험을 생각해 본다.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주님께 말한다. “주님, 이제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 제게 말씀해 주소서. 제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지금 이 시간에, 제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이벨스는 오늘 하루 그가 경험한 ‘듣기’를 소개한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빨리 집으로 가서 쉬기를 기대하며 걸어갔다. 그러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1초도 안 되는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감’을 받았다. 그러나 하이벨스의 반응은 “왜요?” “왜 하필 접니까?” 하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하이벨스는 그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합리화하면서 차를 몰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계속 강권하셨다. 결국 차를 돌려 그 여성 옆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혹시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나요?” 그 여성은 교회 사역 게시판을 보고 행정 업무를 지원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결국 사역진에 합류했고, 거의 10년 동안, 하이벨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신실한 사역자로 섬겼다. 오늘(Today)! 그리고 듣기(Listen!)는 주관적인 인도하심의 경험으로 표현하는 좋은 도구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인도하심의 경험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에게서 오는 인도하심은 모두 그분의 말씀인 성경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체로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체로 종 됨과 관련이 있다. 인도하심이 돈과 명예와 관련된 것이라면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겸손, 섬김, 격려의 손길이라면 그 인도는 성령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대체로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 객관적 인도하심에 대한 표준적인 예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경우일 것이다. 월버포스는 회심 이후 정치에 소명을 두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자 평생을 두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유혹은 있었다. Today! 자신이 내각의 각료로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흔들린 것이다. 그의 야망은 솟구쳤다. Listen! 그러나 그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 다시 내면의 질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처럼 휴식하면서 종교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이날에 이 땅에 것들은 그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가고, 나의 야망은 수그러들었나이다.” 기억하자. Today!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Listen!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자.
절망의 시대를 이기는 기독교 변증
by Gavin Ortlund
2023-06-20
THE KELLER CENTER C. S. 루이스가 쓴 그 가공할 힘에 나오는 마크는 자신의 삶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아내와 함께 마크는 근대성이 의인화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의 신념은 오늘날 많은 세속인을 대표한다. 하지만 플롯 속 사건을 통해 점차 초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크는 투옥되어 심리적 고문을 받는 동안 심오한 도덕적 경험을 한다. 신맛과 비뚤어짐을 배경으로 달콤함과 옳바름에 대한 어떤 비전이 일어났다. 그가 막연하게 “정상”이라고 부른,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전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거기에 있었다. 단단하고 육중하며 고유한 모양까지 갖고 있어서 만지거나 먹을 수 있거나 심지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것은 제인과 달걀부침, 비누, 햇빛, Cure Hardy에게 꽥꽥대는 당까마귀, 그리고 그 순간 바깥 어딘가에서 햇빛이 비치고 있다는 생각과 뒤섞였다.내가 쓴 글에서 종종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덕적 논증을 만드는 맥락에서 이 구절을 사용했다. 그러나 보다 더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의 절망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교리(또는 객관적 선 개념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한 가지 함축)로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창의적인 문학적 표현이다. 많은 후기 현대인에게 복음을 접하는 것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달걀부침과 비누와 햇빛”으로 전환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평탄함에서 충만함으로, 환멸에서 새로운 매혹으로, 회색빛 칙칙한 세상에서 생명과 색깔로 가득한 세상으로의 전환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대의 절망을 이해하라찬사를 받은 저서 A Secular Age(세속 시대)에서 찰스 테일러는 현대 시대의 환멸과 의미 상실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 최근에 발생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오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전근대인도 분명히 절망을 느꼈겠지만, 일반화된 절망감은 후기 근대 서구를 특징짓는 독특한 역사적 발전이다. 테일러에게 그러한 절망은 특히 초월의 쇠퇴와 자아 개념의 변화라는 또 다른 형태의 발전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우리의 행동, 목표, 성취 등등에는 아무래도 무게와 중력 그리고 두께와 실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는 절망이다. 현대 절망의 본질을 탐구함으로 우리는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희망을 가시화할 수 있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전통적인 초월의 근원에서부터 점차 스스로를 단절시킨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종종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큰 황량함과 환멸감을 특징으로 한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 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접하는 문화를 평범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문화는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통해서 보는 안경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자기 가족이 역기능 가족이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던 어떤 십대처럼, 실제로 대안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또 그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팀 켈러는 대부분의 현대인이 너무 불행하기에 불행의 본질을 완전히 깨닫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대체로 우리는 깊이와 크기 또는 불만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사상가는 병적인 예외로 간주되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내는 건 예언적 목소리이다.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불만의 크기와 차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는 심리부터 버려야 하는데, 거기에는 보통 몇 년이 걸린다.절망의 문제는 실존주의 철학이 중점적으로 집착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새로운 무신론자”(예를 들어 샘 해리스)는 보다 활기차고 낙관적인 무신론의 소유자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연민과 인권 같은 객관적인 도덕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전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눈에 무신론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심리적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신과 별개로 객관적인 도덕성을 유지하려는 초기 프랑스 무신론자들의 노력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존주의자는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도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지성이 작동하는 천국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 순간 모두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에게 초월적 의미의 상실은 삶의 부조리를 수반했다. 카뮈는 인간의 존재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에 비유했다. 영원히 언덕 위로 돌을 굴리지만, 매번 다시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에 처한 시지프스. 무신론에 의해 도입된 혼돈과 분열의 감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명한 “미치광이” 우화에서 강력하게 전달된다. 이 인물(일반적으로 니체를 상징한다고 간주된다)은 시장으로 달려가 외친다.“신은 어디에 있는가?” … “난 당신에게 말하겠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당신과 내가 죽였다. 우리는 모두 신의 살인자이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했나? 어떻게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가? 저 지평선 전체를 쓸어버리는 스펀지를 누가 우리에게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이 지구를 풀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이동하는가? 모든 태양에서 멀리?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여전히 위 또는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해서 방황하지 않는가? 허공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더 추워지지 않았나? 밤이 점점 더 다가오지 않는가?”현대 절망의 아우라가 이러한 은유 속에 잘 포착되어 있다. 지평선을 없애고, 지구를 풀고, 허공으로 뛰어드는 등. 많은 현대인이 이유는 몰라도 니체가 그린 이런 식의 심상이 드러내는 감정에 공감한다. 실제로 21세기 세속적 사고가 19세기와 20세기 실존주의적 사고에 반영된 기본적인 갈등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믿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비록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망이 여전히 현대 문화의 뿌리 깊은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살펴보자. 21세기 맨해튼 은행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 전 서유럽의 한 수도원으로 여행했고, 그 수도원의 수도사 중 한 명이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 맨해튼으로 여행했다고 상상해 보자. 한 계절 동안 두 사람이 서로 자리를 바꿨다. 누가 문화적 충격을 더 크게 받을까? 누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더 강하게 느낄까?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고 잘 지낼 가능성이 높은 쪽은 과연 누구일까? 의심할 여지 없이 시간여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든든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워할 게 많은 21세기 세계인답게 은행가는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게 많다. 나는 과거를 마냥 낭만적으로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특히 인간의 마음에 관한 문제에서, 나는 수도승이 발견할 21세기 세상이 그가 살았던 세계보다 더 빈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연결되어 있지만 더 외롭다. 수명이 길어졌지만 그만큼 자살률도 높아졌다. 더 많은 기회가 있지만, 불안과 우울증도 급증한다. 우리의 세계는 분명히 더 화려하다. 그러나 수도사의 세계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의미와 풍요로움이 있었다. 요약하면, 근대성의 특징은 초월적 의미의 상실이다. 이 사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또는 반의식적으로까지, 우리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막연한 황량함의 구름 아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뿐더러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절망”이라는 단어로 현대인의 갈등을 표현하는 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로움, 중독, 안절부절못함, 우울증, 지나치게 바쁘고 산만한 삶의 이면에는 깊고 요동치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마크처럼 우리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있다.그런 이런 현실이 복음을 경험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변증해야 할까? 복음이 절망을 대하는 방식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1983년 템플턴상 수상 연설은 유명하다. 그는 먼저 20세기 폭력이 가져다준 끔찍한 공포를 이야기하고, 모든 공포의 원인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지적했다. “오늘 내가 우리 인민 육천만여 명을 삼켜버린 파멸의 혁명이 가능하게 만든 근본 원인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서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다음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의 폭력과 관련해서 솔제니친의 진단이 사실인 것처럼, 21세기의 절망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절망을 다루는 데 교회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현대인에게 의미 있고 진정성 있게 복음을 전하려면 지혜와 더불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1. 복음의 충만함을 선포하라바울의 말처럼,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3)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조차도 복음을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전달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핵심 전략은 다양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교도 환경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창조의 교리로 더 거슬러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교도들의 시인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와 연결할 다리를 놓을 창의적인 방법을 찾았다.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사도행전 17장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상대가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많은 현대인에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도행전 17장의 맥락에서 사도행전 13장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것과 같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복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복음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경험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합된 세계관을 찾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 없이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고, 창조 없이는 십자가를 전할 수 없으며, 심판 없이는 구원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에게서 배운다.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사는 변증가로서 우리는 복음이 함축하는 모든 의미가 현대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 및 고민을 반영하도록 전달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현대의 절망에 대한 해답으로 인식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가르쳤듯이,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안식과 성취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원천이다. 현대인의 절망에 있어서 하나님은 배고픈 자에게 주어지는 음식과 같다. 오직 그분과 연결될 때만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게 복음인 이유이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불신자가 이러한 다양한 포인트를 제대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그러므로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인내와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전도는 점점 더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 될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마크를 다시 생각하자. 감옥에서 “정상”을 만난 후에야, 그는 그리스도께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 루이스의 회심도 비슷하다. 그는 유신론으로의 여정을 길고 느린 체스 시합에서 진 것에 비유했다. 1929년에 유신론자가 되고도 이 년이 더 지난 1931년에 가서야,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1925년 또는 1927년 당시만 해도, 루이스 생각에 자신에게 그다지 필요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친구, 직장 동료, 가족, 그리고 이웃과 함께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도 그 메시지는 아직 시기상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 놓인 과제의 막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변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감각, 영원과 영광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도록 돕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숨 막히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행 17:23).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성령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2.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라그리스 철학자들은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초월성을 놓고 논쟁했다. 현대 변증학은 주로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선함과 아름다움도 함께 강조했다. 이런 변증은 인간과 관련해서 훨씬 더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팡세의 구절을 보자. 파스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세 단계 전략을 제안했다.인간은 종교를 경멸한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이에 대한 치료법은 먼저 종교가 이성에 반하지 않고 경외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라. 그래서 선량한 사람들이 종교가 진리이길 바라게 만들다. 그런 다음에 종교가 진리임을 보여주라. 요약하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전에 기독교가 존경할 만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라는 게 파스칼의 주장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복음에 대한 선천적이고 자연스러운 저항 때문에 필요하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파스칼식 접근은 절망의 시대에 필요한 변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맞는 가장 큰 도전은 날카로운 반론보다는 훨씬 더 자주 만나는 무관심과 산만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울리는 스마트폰 알람과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영혼의 문제에는 둔감하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이 복음이 진리이냐 아니냐에는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왜 복음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기초부터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복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청중의 무관심을 제거함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망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또 문학을 읽으며 깊은 종교적 갈망을 경험한다. 찰스 테일러는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대의 경향을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무엇인가가 나를 압박한다는 느낌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느낀다. 삶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순간에,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사별과 상실의 순간에, 그 느낌은 매우 격렬하고 예측할 수 없다. 편안한 불신앙에 안주하기에 우리 시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 불안은 끊임없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테일러의 주장은 이것이다. 변증이 현대인의 마음에서 때때로 표면화되는 “불안”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마음속 깊은 갈망과 관련해서 복음을 위치시켜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세속의 주문을 깨는 것과 비슷하다. 루이스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인간의 깊은 열망을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나는 거의 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세속적인 악한 마법에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 찾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하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육은 진리를 찾으려는 이 수줍고 끈질긴 내면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절망의 시대에 변증이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세속적 설명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세속적 사람들은 사랑과 정의 속에 담긴 초월적 가치를 느끼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과 결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그들이 그 가치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지 찾기란 매우 어렵다. 보통 환원적 방법을 통해 진화심리학의 산물로 설명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와 같은 가치가 우리의 조상인 동물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생물학적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객관적인 관련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최종적 해결 또는 궁극의 의미도 없다. 찰스 테일러는 이와 같은 긴장을 “현대성이 잠재우지 못한 경계”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인 사람들이 세속주의 내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야 하는 종교적 자질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들어서 왜 그토록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비신론(nontheism)”이 등장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변증의 과제 중 일부가 바로 이런 모순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가 세속적 세계관의 결과인 메마름과 갇힘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황홀한 행복과 경이로움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복음에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영광스러운 의미와 성취가 담겨있다. 복음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굶주려 죽어가는 세상이 갈망하는 식량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참여해야 할 고대 전통, 노력해야 할 초월적 대의, 그리고 영원히 누릴 영원한 영광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불신자로 하여금 지금 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는지,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원제: Apologetics in an Age of Despai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변증
루이스
찰스테일러
절망의시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Bruce Hindmarsh
2023-06-1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1733년, 옥스퍼드 대학에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질한 열여덟 살 먹은 신실한 학부생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가 빠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영적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제목의 책을 건넸고, 그 책은 그에게 돌파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내 소중한 친구의 손을 통해서 그 훌륭한 논문을 보내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George Whitefield’s Journals, 46-47) 그 학부생은 조지 휫필드였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 대륙에 걸쳐서 일어난 영적 각성을 주도하는 설교자가 될 인물이었다. 그에게 그 책을 건넨 친구는 찰스 웨슬리였으며, 그는 휫필드와 함께 부흥의 시대를 지나며 위대한 찬송 작가가 되었다. 실제로 시기는 각각 달라도 초기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거의 모든 지도자가 이 책을 읽었고, 그 중요성을 앞다투어 간증했다.중요한 건 이 작은 책이 복음주의 부흥의 뿌리, 바로 그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마치 위를 덮은 토양에 생명이 피어나도록 만드는 지하수와 같았다. 조지 휫필드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이 책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헨리 스쿠걸, 개신교 신비주의자이 책을 쓴 사람은 스물여덟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헨리 스쿠걸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젊은 목사이다. 1677년에 익명으로 발행된 이 글은 원래 여자 친구인 레이디 길모어에게 주는 영적 지침을 담은 부드러운 편지였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적인 서신에서 찾을 수 있는 따뜻함과 솔직함이 넘친다. 본문을 읽을 때 마치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영적 조언을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이다. 젊었지만 스쿠걸은 기독교 고전이 품은 영성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여러 교부,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중세 영적 저술가들, 그리고 아빌라의 테레사와 잔느 귀용처럼 비교적 최근 영성 저술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빠짐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막상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가 읽은 수많은 고전을 하나로 통합하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진리만을 뽑아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굳이 참고한 저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손에서 신비주의자의 가르침은 수도원과 가톨릭에 제한되지 않았다. 복잡성이 제거되고 본질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그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본 가르침이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 신성한 본성에 대한 진정한 참여”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쿠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시다’”(44).참된 종교가 무엇인가?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한 실마리는 이 책을 통해서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 휫필드로부터 찾을 수 있다. 모든 진지함과 규율, 모든 종교적 준수와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핵심적 실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종교적 의무를 종교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는 스쿠걸로 인해서 휫필드는 놀랐다. 의무는 본질이 아니었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서 휫필드는 당시를 회상했다. ‘세상에! 이것이 참된 종교가 아니라면, 무엇이 참된 종교이겠는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내게 보여 주셨다. 몇 줄을 더 읽었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과 영혼이 결합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신성한 빛의 광선이 내 영혼에 순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George Whitefield’s Journals, 47)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휫필드에게 돌파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 삶의 중심이라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흘러나올 뿐이다.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서두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성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까지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올바른 교리, 올바른 실천, 올바른 도덕, 이 모든 것이 다 훌륭하고 좋지만,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기독교 또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생명 원리를 갖는 것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다. 스쿠걸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본질을 신성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표현하는 다른 길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44). 하나님 그분이 내 안에 거하시고 사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책의 제목,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담겨있다. 이것은 스쿠걸이 다룬 위대한 주제였다. 종교에 대한 모든 잘못된 생각을 정리한 후, 그는 이 한 가지 명령에 모든 주의를 집중했다. 그는 독자가 경험하기를 원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가장 진지하고 엄숙한 생각이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하는 데에만’ 고정되도록 만들어야 한다”(126).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꼭두각시도 사람이라 불릴 수 있다는 말”(48)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비로소 그분의 생명 자체가 영혼에서 촛불처럼 빛난다. 스쿠걸은 말한다. “아니, 그건 그분의 본성에 대한 참된 참여이며, 영원한 빛의 광선이며, 무한한 선하심의 대양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덧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신다’고, 또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었다’라고 말한다”(49).감각으로 육신의 삶을 특징짓듯, 영적 삶은 “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감각 또는 감정적 설득”인 믿음으로 특징짓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55)이다. 활동적인 생명 원리로서 이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마음의 순결, 그리고 마음의 겸손에 있어서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작용한다. 참된 종교의 뛰어남훌륭한 영적 고전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한 열망까지 불타게 한다. 스쿠걸의 책이 가진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신성한(divine) 삶이 주는 아름다움을 설득력 있는 그림으로 묘사한다.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신성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진정으로 갈망하던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애초에 창조되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세상이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그는 심리학자 못지않게 이해하고 있다. 영혼에는 “사납고 꺼지지 않는 갈증, 즉 비물질적인 종류의 불 … 성가신 갈망이 있다”(112-13). 그리고 그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근본적으로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갈망임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우리 시선의 방향을 돌린다. 그는 묻는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열정에 감히 맞서거나 그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 또는 선함이 뭐가 있는가? 그건 한 꺼풀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존재 전체를 다 잃어버릴 정도가 되려면 … 그분의 선하심에 나 자신이 온통 다 빠져서 삼켜질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나 무한한 기쁨이어야 가능할까?”(74, 78).아, 무한한 즐거움! 하나님을 따르는 건 내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내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편 16편을 읽으면서 나는 전환점을 맞았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시 16:11). 스쿠걸에 따르면, 이 구절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자신을 존재의 창조자에게 온전히 바치고 거룩하고 헌신된 존재가 되었음을 자각하기 전까지 … 영혼은 결코 견고하고 본질적인 기쁨을 알 수 없다”(78).하나님을 믿어서 놓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처럼 잘못된 생각도 없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삶은 차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을 약속한다. 모든 욕망의 물줄기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며 깨끗하게 비워진다. 실질적 인도스쿠걸은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의 유지에 관해서 실용적인 조언을 제시한다. 온 하늘이 우리를 위해서 관여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왜 진정한 선과 보편적 사랑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96). 우리에게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있다. “도랑에서 배회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거기서 끌어내 주실 때까지 단지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98).첫 번째로, 영혼에 신성한 생명이 거하길 진정 원한다면, 죄를 피하고 유혹을 경계하라고 스쿠걸은 조언한다. 독을 마시면서 몸이 나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는 우리가 영혼을 더 깊이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자기 성찰 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기도와 묵상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며, 더불어서 “숙고”하는 습관을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배우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을 숙고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완전성을 숙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사랑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친구에게서도 사랑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한번 상상해보라. 친구 속 아름다움은 고작해야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 방울에도 이토록 달콤함이 넘친다면, 무한한 샘에는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달콤함이 들어있을까?” (122). 이런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애정을 키울 수 있다.이 땅의 계속되는 순례길에서 우리가 종종 절망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스쿠걸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처럼 약하고 미천한 피조물을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이 붙잡고 있는 곳이라면, 영혼 속 하나님 사랑의 가장 희미한 불꽃이라도 남은 곳이라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그 영혼을 지키신다고 그는 격려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작은 불꽃도 결국에는 홍수도 끌 수 없는 커다란 화염으로 만들 것이다”(95). 따라서 영적 고갈을 느낄 때면, 단순하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당신에게 지금 모습 그대로 바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또는 스쿠걸의 조언처럼 할 수도 있다. “나를 내려놓자,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께 천 번을 드리자”(117).책을 들고 읽으라조나단 에드워즈는 인류에게 ‘참된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다며 신앙감정론이라는 위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스쿠걸을 읽었다. 신앙감정론을 쓸 때 과연 그 책을 생각했는지가 새삼 궁금하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스쿠걸은 가장 훌륭하고 또 간단한 답변 중 하나를 제시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또 “사람의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스쿠걸의 이 작은 책은 충분히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원제: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고전
헨리스쿠걸
인간의영혼안에있는하나님의생명
신비주의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치유한 하이델베르크 문답
by Kathryn Butler
2023-06-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만성 질환과 보낸 수년의 힘든 싸움을 털어놓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치료의 연속, 치료의 실패, 그리고 기쁨을 갉아먹는 병과의 지난한 투쟁 과정을 듣는 사이에 내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육신의 고통이 영혼에 미치는 생생한 피해를 목격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어려운 순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어.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사나 죽으나 내 몸과 영혼이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알아.” 그녀의 또렷한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다름 아니라 수 세기 이어져 내려오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를 아름답게 포착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내게 들려준 것이다. 그녀와의 대화 후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삯이 내 삶을 잠식할 때면 또 인간의 타락이 나를 압도할 때면, 나 역시도 그녀의 대답을 되풀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를 버리신 분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항상 기뻐할 수 있다(요 10:11; 요일 3:16).하이델베르크 소망1500년대 중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데어 팔츠(Friedrich III von der Pfalz)는 여러 개혁파 그룹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한 독일 남서부 지역인 팔츠(Palatinate)를 관장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필리프 멜란히톤의 학생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에게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되는 기독교 교리의 요점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우르시누스와 여러 기고자가 1563년 봄에 기독교 교리 초판을 완성했다. 비록 그 교리문답이 프리드리히가 희망했던 것처럼 다양한 개신교 운동을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담긴 복음에 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설명은 그 이후에 이어진 제자도 사역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교리문답이 끼친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1619년 도르트 회의 (Synod of Dort)가 이 문서를 (벨직 신앙고백서 및 도르트 신조와 함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일치의 세 가지 형식 중 두 번째로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최신 버전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9개의 문답으로 이뤄졌으며, 일 년 동안 매주 공부할 수 있도록 52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내용은 비참함, 구속, 감사의 세 범주에 속하며, 이것은 암기하기 쉽게 G로 시작하는 세 단어 Guilt(죄책), Grace(은혜), Gratitude(감사)로 요약할 수 있다. 1. 비참함: 인간의 죄 많고 타락한 상태에 대한 노출2. 구속: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3. 감사: 구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는가에 관한 방법 (즉, 우리가 십자가가 준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몸과 영혼, 삶과 죽음세 가지 주제를 소개하기 위해 교리문답은 전체 내용의 심장에 해당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앞에서 내 친구가 신중하게 인용한 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삶의 돌팔매와 사탄이 쏘는 화살의 공격 속에서도 수많은 성도가 두려워하지 않고 위안을 찾도록 만들었다. 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답: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이 놀라운 진술 다음에 교리문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Creeds and Confessions of the United Reformed Churches in North America, 73)첫 번째 질문은 신자로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형성적인 진리를 분명하고 강력한 언어로 상기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요 8:34, 롬 6:16, 22). 대신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했다. 유일한 위로첫 번째 질문을 깊이 숙고할 때,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위로(comfort)라는 단어를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로에 대한 논의는 종종 포근한 양말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 좋은 책 또는 막 오븐에서 꺼낸 향긋한 쿠키와 같이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진짜 위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포옹, 걱정을 가라앉히며 위안을 주는 소식,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등 물질 너머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오는 위로라는 단어에는 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의미가 담겨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이 쓴 것처럼 본문 속 독일어 단어인 트로스트(trost)는 영어 단어 신뢰(trust)와 관련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확실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The Good News We Almost Forgot, 22). 교리문답이 촉구하는 것은 무엇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줄 것인지가 아니다. 오히려 실존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확신을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할 때, 도대체 어디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인종으로서 인간의 본성은 이 땅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의미와 안식을 갈망한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직업, 관계, 그리고 세상이 주는 정체성에 몰입한다. 소유물과 타인의 찬사가 주는 순간적 희열을 갈망한다. 기분 전환, 산만함, 그리고 심지어 화학적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고통을 무디게 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든 추구는 궁극적인 실패를 가져다줄 뿐이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세상이 주는 기분 전환으로도 한 시간 또는 하루 정도는 상처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기는 다시 곪아 터지고 통증은 영혼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참된 위로는 오로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빌 4:7), 모든 시험 중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평안은 오로지 한 분, 세상을 이기신 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 16:3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우리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서구 사회가 중심이 되어 자아실현을 우상화하는 이 시대에는 매우 급진적이다. 소셜 미디어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감정이라는 지배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세상 가르침에 따르면, 나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형성할 뿐 아니라 운명까지 선언하는 임무는 내게 주어졌다. 누구나 다 “최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따르면 나 자신 외에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세상 원칙들이 매혹적일지 모르지만, 죄 많은 세상이 주는 긴장 아래서 하나같이 휘어지고 금이 갈 헛된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열렬히 개인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해도 피할 수도 또 통제할 수도 없는 재난을 만나기 마련이다. 질병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질병이 우리를 압도한다.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자연재해는 또 어떤가? 개인적인 죄가 스며들어 소중한 인간관계를 부수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은 찢어진다. 다시 끼워맞출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산산이 부서져 버린 삶의 조각 앞에서 망연자실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는커녕, 나를 주인으로 삼으라는 세상의 원칙은 내 마음을 흔들고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끌 뿐이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예 17:9).세상이 주는 황폐함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는 샘물을 주신다(요 4:14).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라는 깊은 의미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가?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지치고 부러지고 또 비바람에 시달린 손으로 시작하거나 끝내는 인간의 위로와는 차원이 다르다. 비틀거리는 나를 예수님이 안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눅 15:4-6).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실패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일 3:1).나는 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소유물이다(시 100:3; 요 10:11).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무엇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7-28; 롬 8:38-39).오로지 그리스도만을하이델베르크의 첫 말씀은 위로의 샘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제자로 부른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메시지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변치 않는 믿음과 감사를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 6:19-20).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진리에 관해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따라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잊도록 하자.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목표이신 그분을 향한 노력이 되도록 하자. (3.7.1)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또 우리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수님께 속해 있다. 이 진리는 삶과 죽음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통과하는 유일한 빛이요, 또 어둠이 잠식할 때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이 진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도록 도전한다(롬 14:7-8).원제: I Am Not My Own: How Heidelberg Healed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재림을 의심하는 성도에게 어떻게 대답할까?
by Cody Wilbanks
2023-05-20
“예수님이 정말로 재림하실 예정이었다면, 이미 오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거죠?”목사로서 최소한 한 번 이상 나는 이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건 내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도 다르지 않을 거다. 예수님의 재림에 의심이 드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지진 같은 엄청난 사건, 또는 말기 불치병이나 유산 같이 좀 더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을 만날 때면 우리는 누구나 다 무의미해 보이는 비극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행여라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예 타락한 채로 내버려 두셨는지, 포기하신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기독교 역사에는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에 대한 수많은 실패한 예언(예: 윌리엄 밀러, 에드가 위스넌트, 해럴드 캠핑)이 존재한다. 그런 사실 앞에서 아예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과 기독교 지도자의 신뢰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면 재림에 대한 작은 의심의 씨앗이 아예 절정에 달한 불신앙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소망 가득한 미래가 없다는 결론에 굴복할 위험이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육신의 생명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결론, 그리고 나아가서 설혹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사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는 어리석은 결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재림에 관한 질문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직후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의심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이 의심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진리로 의심을 해결하기우리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진리를 만날 수 있다. 베드로는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벧후 3:4). 회의적인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또 정작 우리 마음도 의심으로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베드로는 세 가지 신학적 대답을 준다. 1.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신다(벧후 3:5-7).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거 같다. 인간이 초래한 난장판 같은 세상과 아예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여전히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과거 활동을 상기시킨다. 그가 지적하는 건 다름 아니라 노아 시대의 홍수이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도 이 세상에 개입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계신다. 베드로는 이 세상이 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에 의해 “축적되고” 또 “보전된다”고 말한다(골 1:17; 히 1:3).베드로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이 이 세상이나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일 그렇듯 오늘 아침에도 해가 떴다. 당신은 여전히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이 모든 게 우리의 창조주이자 우리를 지키시는 분에게서 오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창조와 심판의 활동을 하셨다면, 오늘날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똑같이 역사하실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은 이 세상을 떠받들고 계신다. 과거에 심판과 구원을 가져오신 것처럼 미래에도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2.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벧후 3:8-9a).다음으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호소한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시간과의 관계가 우리와는 아예 다르다. 매튜 바렛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과 관련해서 영원하며, 아예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영원하다.”물론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백 투 더 퓨처의 마티 맥플라이가 영화에서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매일 순간순간을 살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렇다면 감히 하나님의 때를 판단하는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로마서 9:19-21에서 선택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을 향한 바울의 엄중한 대답처럼, 베드로도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가 무한하신 창조주를 정확하게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3.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벧후 3:9).왜 예수님은 아직 재림하지 않으신 걸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그의 오래 참는 사랑은 그가 사랑하는 모든 백성이 회개에 이르도록 기다리게 한다. 오늘날 복음이 온 세상에 걸쳐서 전파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있으며, 회개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가 계속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심판을 미루신다(행 17:30).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에 하나님은 왜 모든 피조물을 단숨에 쓸어버리지 않으셨을까? 이런 궁금함이 든 적이 없는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엄청난 악으로 들끓는 세상을 하나님은 왜 심판하지 않으실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 나와 당신은 하나님의 원수였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멸하지 않으셨을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꼭 필요하고 합당하며 적절한 모든 심판을 지연시키셨다. 왜? 그의 백성들이 복음 앞에서 반응하고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 인내하고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을 반대하고 의심하는 이들에게, 또 무엇보다 내 마음에 드는 의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한 시도 우리를 떠난 적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조바심 내는 내 마음에 또 똑딱거리는 인간의 시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명심하라. 결론은 명확하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므로 우리도 인내해야 한다. 당신과 나는 인내와 거룩한 생활로,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구원의 충만함을 가져오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을 신뢰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벧후 3:10-13).인내하라 성도여,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 원제: How to Answer Doubts about the Second Com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재림
하나님의인내
성도의인내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기’에 숨은 위험
by Ty Kieser
2023-05-15
몇 년 전 교회에서 나는 누가복음 14:26에 대한 소그룹 성경 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 시간은 “적용” (그러니까 “오늘 배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부분에 와서 절정에 이르는데, 이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본문에서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본문과 씨름하는 중에 나는 비로소 “적용”이라는 측면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향해서 성경 전반에 걸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단지 사소한 변화나 약간의 조정 정도가 아니다. 누가복음 14장에 (그리고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지 “적용”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림없다고 할 정도로 깊고 넓으며 또 실제적이다. 세 가지 흔하고 틀린 가정다시 말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베스 펠커 존스가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면을 변화시킨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많은 열매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적용”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다. 적용이라는 도구로 인해 우리가 단지 틀릴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가정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다음 세 가지 가정이다.잘못된 가정 1: 나와 내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적용이라는 말 속에는 주체가 되는 사람과 그의 목적을 지원하기 위해 외부 물체를 사용한다는 가정이 담겨있다(가령,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바르기 또는 생산성 기법 적용하기 등). 그러므로 “성경 적용”은 얼마든지 나와 내 삶이라는 우선순위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성경 진리는 단지 하나의 외부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발견해서 내 삶을, 내 질문을,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가정 속에 숨은 위험은 성경 해석이라는 태양계의 중심이 내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오로지 나와 내 삶을 중심으로 돌아갈 뿐이다. 진리를 더 많이 삶에 “적용”할수록, 중심에 있는 내 삶은 더 큰 중력을 갖는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은 모두 기각되어 우주 쓰레기로 강등된다. 대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라. 내 질문과 가정을 우선순위에 둠으로 “성경의 서사를 가려버리는” 대신에, 하나님 이야기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이라는 현실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창 1:1)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근본적 실재이신 하나님과 함께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 질문 또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가령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의 계절을 이기기 위해서 특정 시편을 읽거나 지혜의 습관을 기르기 위해 가족 예배 시간에 잠언을 읽는 것 등).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내 질문과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인류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비성경적” 탐색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야기, 즉 실제 일어난 사건 속에서 내 위치를 찾을 때 사실상 많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응답은 욥과 베드로에게 하신 응답처럼(욥 38-41장; 요 21:22) 직접적인 대답 또는 내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주님의 응답은 훨씬 더 위대한 해결책, 바로 주님의 임재이다. 잘못된 가정 2: 성경은 원리원칙 모음집이다. 적용이라는 얕은 접근 방식은 사실상 검색 대상에 대한 가정을 깔고 있다. 성경을 단지 문제 해결 열쇠 꾸러미, 원칙 모음집, 또는 “발견되고 적용되길” 기다리는 “영원한 진리”로 전락시킨다. 성경 이야기, 시편, 예언서, 서신서, 묵시 문학을 읽고 우리는 “여기서 빼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묻는다. 차라리 엑셀 스프레드시트 형태의 성경이 우리에게 더 적합할 것이다. 일련의 진술, 규칙, 삶의 원칙, 그리고 CTRL+F 키만 누르면 세상 흐름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빠른 적용거리를 순식간에 나열해주는 스프레드시트 말이다. 품위 있는 삶에 적용할 현명한 통찰력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부자 청년처럼(막 10:17-22), 우리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친다. 때로는 직장에서 필요한 말씀 또는 자동차 범퍼에 스티커로 붙일 말씀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성경 속에 담긴, 삶 전체를 휘어잡는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대안: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일하심의 이야기이다. 원칙 모음집으로 성경을 사용하면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무디게 할 수 있다(히 4:12). 성경에 원칙이 있는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죄가 초래하는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그분의 사역에 관한 설명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야기” 또는 “드라마”이다. 이야기에서 단지 원칙만 도출하는 것은 (원칙만 도출하고 이야기 자체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마치 원칙이 이야기라는 껍질 속에 담긴 핵심이라는 듯이) 핵심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 이야기의 본질은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 속에 빠지고, 그 결과 이야기의 “저자”를 만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잘못된 가정 3: 성경 읽기 목표는 내 삶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가정하에서 하는 성경 말씀 적용은 결국 나의 이익이라는 목표 추구에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런 경향이 만연하면서 생긴 반사작용은 X(돈 벌기, 투표하기, 옷 입기, 육아, 사업, 심지어 다이어트 방법까지 다 X에 포함된다)를 하는 “성경적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다) 책과 설교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적용 습관”을 훈련한 나는 성경을 펴면 당장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익부터 찾는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세 가지 요점 또는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 변화 등등이다. 따라서 즉각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성경 측면, 즉 구약의 독특한 서사, 이스라엘의 의식 관습, 초대 교회의 묵시적 기대 등의 내용 앞에서 힘들어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적용 가능성의 제한이라는 겉모습 때문에, 교회에서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친구의 하루가 어땠는지 물은 후에, “잠깐만, 네 하루 이야기를 내가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게 좋을지 좀 알려줄래?”라고 묻는 당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다. 행여라도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친밀함과 온전한 성장이라는 축제의 향연을 사소한 행동 변화와 내가 바라는 최적화된 삶을 위한 실용성이라는 팥죽 한 그릇으로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대안: 성경 읽기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내 문제와 관점에서 시작하여 삶의 개선에 필요한 원칙 찾기에 골몰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교제하라는 성경의 초대이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건 내가 바라는 방식에 따라 내 삶의 특정 측면을 개선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즉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그의 열망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정말로 삶을 “개선”하고 싶다면 바로 여기,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요 10:10)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성한 삶은 내 구미에 맞게, 내 목표에 따라서, 적당하게 향상된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갈 2:20).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측면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의 방향 전환세 가지 잘못된 가정을 뒤집음으로써 나는 성경을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성경 읽기의 방향을 바꾸면 더 이상 성경을 지침서로 보지 않는다. 저자를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일종의 좋은 자서전을 읽는 것과 비슷해진다. 성경 읽기가 단지 내 성품의 한 측면을 바꾸는 도구 또는 약간의 시간 투자 정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 읽기를 통해 모든 것을(빌 2:8-10), 심지어 생명까지도(눅 14:26)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실 것이다(살전 5:23).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을 기억하자.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과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세이어즈는 분명히 후자를 선택하라고 강권할 것이다. 후자가 무엇인가? 나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다. 원제: Potential Dangers of ‘Applying Scripture to My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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