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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율법은 모순되지 않는다
by Tim Keller
2019-09-21
나는 칼럼니스트나 학자 또는 언론인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기독교인이 일관되지 않다고 비난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규범 중 일부만 취사선택하여 따른다.” 가장 흔히 듣는 비난은 이런 말이다. “기독교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을 무시한다. 가령 날고기나 돼지고기 혹은 생선을 먹지 말라고 한다든가 안식일을 어긴 죄에 대해서는 처형하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두 가지 종류의 직물로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는 정죄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한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물론 나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성경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모순을 드러낸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이 가진 상식을 먼저 확인해 보기를 (또는 신학적으로 훈련된 교사와 최소한 이야기라도 한번 나눠 보기를) 바라고 있다.우선, 구약성경만 동성애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부터 생각해 보자. 사실 신약성경 역시 그 문제와 관련된 많은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심지어 이혼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는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 의도하신 본래의 목적이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로 연합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는데, 여기서 그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결혼이나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마 19:3-12).그렇다면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신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에 언급된 내용을 일관성없이 따르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비난에 직면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제시해 보겠다.일단 구약성경은 속죄를 위하여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희생 제사에 관해 수많은 본문을 들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원리를 소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의식적인 정결을 위한 복잡한 규례도 함께 밝힌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특정 음식만 먹고 다른 음식은 먹지 않으며 또 정해진 의복만 착용하고 다른 여러 가지 대상들은 만지지 않는 가운데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생생한 규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인간은 영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해지는 절차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구약성경의 많은 저자들은 희생 제사와 성전 예배의 규례가 그 자체의 내용을 초월해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삼상 15:21-22; 시 50:12-15; 51:17; 호 6: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이분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막 7:19), 구약의 정결법을 뛰어넘어 나병환자나 죽은 사람의 몸까지도 만지셨다.그 이유는 명확히 드러난다. 즉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써 정결법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이 몸소 죄에 대한 궁극적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우리 각자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히브리서 전체는 구약의 의식법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히 10:1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식법을 계속해서 준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여전히 효력을 지닌 율법이와 같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관해 신약성경은 또 다른 가이드를 제시해 준다. 곧 로마서 13장 8절 이하에서 바울은 구약의 도덕법이 여전히 우리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는 바뀌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도덕법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인자하심, 신실하심과 같이 그분 자신의 성품을 보여 주는 삶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소유를 관대하게 나눌 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하게 헌신해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신약성경도 살인이나 간음을 계속 금하고 있으며,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성윤리도 다시 명시하고 있다(마 5:27-30; 고전 6:9-20; 딤전 1:8-11). 이처럼 신약성경이 또 다시 요구하는 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효력을 미치는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래서 죄는 변함없이 죄이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에서 간음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범행은 이스라엘 국가의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죄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하나님 백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집행되었다.그러나 신약 시대에 하나님 백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모임이며,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정부의 통치 아래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정부 기관이 아니기에,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권면이나 충고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멤버십에서 제외함으로써 그 문제를 처리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근친상간의 문제를 처리한 방법이 그와 같았다(고전 5장; 고후 2:7-11).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 전파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원 사건의 우선적 의미를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은 모순 없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인해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인해 더 이상 교회는 국가적 차원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교회가 처한 장소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경우에 성경은 기껏해야 영감 어린 구절이나 지혜로운 말씀이 일부 수록된 문서일 뿐 그 대부분은 어리석고 잘못된 내용으로 가득한 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오직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먼저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지금까지 설명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접근은 전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가이드를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이 되고만다. 물론 이 경우에 기독교가 구약의 도덕 조항 중 일부만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는 모순된 신앙이라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건 공정한 접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처럼 모순을 운운하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것이다. “당신은 저한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이에 상대가 “왜 그렇게 묻죠?”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정말 예수님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저는 음식이나 관습에 대한 어떤 정결법도 따를 수 없고 동물을 바치면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가져다준 효력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약 계명 중 일부는 준수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아야만 합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aking Sense of Scripture’s Inconsistency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율법
하나님의계획
희생제사
성전예배
규례
기독교신앙
십자가사역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
by Don Carson
2019-09-18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새로운 탄생 혹은 중생을 일컫는 ‘거듭남’에 관해 예수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그야말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거듭남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꺼내셨을 때(요 3:3), 니고데모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흔히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꺼낸 이 질문을 보며, 그가 얼마나 꽉 막혔는지 예수님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그 표현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만큼은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즉 사람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하며, 전혀 다른 생명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다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다시 시작하며, 정말로 새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자랑하면서 그 출발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이 그 어려움을 다음처럼 잘 표현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기록한다 기록한 후에도 / 또 계속 움직인다 그대의 모든 경건도 지혜도 / 그 손가락을 되돌려 반 문장도 지우게 할 수 없다 / 그대의 모든 눈물로도 단 한마디도 씻어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잘못과 죄악만이라도 지워 버리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기도 한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오, 내 안에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으니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더는 아니기를.” 또 다른 시인인 존 클레어(John Cl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에도 개정판이 있다면, 그 원고를 어떻게 수정할꼬.” 니고데모는 사람이 새로운 출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항해길에 오른 지가 한참이니,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엔 늦지 않았는가(요 3:4,9). 만일 그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면, 소망은 아주 없어 보인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거듭나야 한다는 요점을 다시 강조하신다. 다만 ‘거듭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확장시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관건이 된다.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까?불충분한 설명들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은 그리 충분치 못한 답변으로 판명이 났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이 표현을 통해 두 가지 출생을 가르키신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사람은 (물로 태어나는) 자연적인 출생뿐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데서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표현은 새로운 의미가 결여된 진부한 내용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표현의 첫 번째 부분(즉 ‘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는 존재해야 한다. 너는 자연적으로 출생하여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부분(즉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2) 고대 사회에서 자연적인 출생을 가리키기 위한 어구로 ‘물로 나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자연적인 출생에 앞서 자궁에 있는 양수가 터져 나오는 현상을 보고 ‘물로 나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낼 수도 있겠으나,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 문헌이나 헬라 문헌에서 그런 의미로 이 표현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 볼 때,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또 다른 견해로서 성례적 해석이라고 불리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출생이란 물과 성령 모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데 이때의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맥락에서 니고데모가 ‘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기독교의 세례 의식을 떠올릴 거라고 예상하며 예수님이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 않고 그 의식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실을 소개한다(요 4:2).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더 나은 설명그렇다면 더 나은 설명이 있을까? 먼저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도록 아래와 같이 배열해 보도록 하겠다.(요한복음 3장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한복음 3장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여기서 금방 알 수 있듯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5절)은 ‘거듭나다’라는 표현(3절)과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자연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으로 구분되는 두 차례의 출생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하신 ‘거듭나다’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단회적인 출생’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그분이 ‘거듭나다’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신 내용을 부연하며 이는 다름 아닌 니고데모의 질문(4절)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답변이 니고데모에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질책하셨다(요 3:9-10). 왜냐하면 당시 니고데모는 성경에 정통한 지식을 갖춘 바리새인으로서 현재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연구하며 그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신학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제(곧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부가하신 표현(즉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표현)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을 파악해야 했을까?그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구약성경 어디에 ‘물’과 ‘성령’이 한 문맥 안에 같이 언급되어 새로운 변화를 약속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는 본문은 에스겔 36장 25-27절이다.“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하나님은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그 변화는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제거하는 맑은 ‘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도 설명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즉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예언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여기에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에 대한 지금 이 해석은 본문의 이어지는 내용과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야 한다는 자신의 선언이 다름 아닌 계시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말씀이라고 주장하신다. 즉 그분 자신이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계시라는 것이다(요 3:11-13; 참고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기록된 계시인 구약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악과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그 권능으로 구원하시는 패턴도 이미 구약에 제시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요 3:14-15; 참고 민 21:4-9).결국 이 모든 진리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요 3:16-21).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진리를 믿게 만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oe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Mean in John 3:5?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물
성령
요한복음3장5절
오마르카이얌
알프레드로드테니슨
존클레어
형벌적 대속론을 정립해준 세가지 사실
by Daniel Hames
2019-09-14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메시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랐다. 여름 수련회, 휴일 특별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학교 토론회 등의 모든 모임에서 핵심 메시지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죄와 내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 결과 이제 나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신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또 내 믿음을 점검하면서,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믿음에 대해서 나는 점점 더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여태 알고 이해하던 기존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진 몇 분의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이 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인’(A New Kind of Christian)과 스티브 초크(Steve Chalke)와 알란 맨(Alan Mann)이 쓴, 이제는 꽤나 유명해진 ‘잃어버린 예수의 메시지’(The Lost Message of Jesus) 중 다음 부분도 읽었다. “십자가는 우주적으로 저질러진 아동 학대 범죄가 아니다. 십자가는 복수하는 아버지, 아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아들을 벌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략] 만약에 십자가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저질러진 인류를 향한 폭력의 행사라면, 단지 아들이 대신 그 폭력을 당하도록 한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중략] 하나님은 화가 난 신이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의 모습에 더 가깝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모습일 수는 없다.”나는 안셈(Anselm)의 만족설(theory of satisfaction)에 관한 비판을 읽었다. 비록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론이지만, 그것도 결국 고작해야 중세 서구의 법의학 수준에 그친다는 비판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진노한 신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고대 이방신에게나 어울리는 생각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이런 이교도 신들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거기서 한 걸음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대가, 그리고 대속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형태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는 브래들리 저색(Bradley Jersak)이 이야기했듯이, 단지 “칼뱅의 상상이 만들어낸 법정 드라마” 정도로만 부각될지 모른다. 결국 이런 시각은 다 하나님을 화난 존재로, 아들을 희생자로 그리고 나는 감사해야 하는 존재로, 무엇보다 십가가형이 주는 폭력적인 공포의 수익자로 만든다.어릴 때부터 들어서 익숙해진 속죄에 대한 이런 그림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되고, 단순하고 또 역사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좀 앞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거기로 다시 돌아가서그러나 몇 년에 걸쳐서 신학적인 혁명을 가져온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그들의 결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이해한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던 걸까? 물론, 난 아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일학교 이야기를 비판한 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내 과거를 코웃음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중고등부 시절 붙잡았던 믿음을 해체하고, 내가 좋아하게 된 새로운 작가들의 생각에 근거해서 당당하게 그 믿음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수준의 속죄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진정한 신학적인 혁명일까? 나는 칼뱅, 이레니우스(Irenaeus), 안셈 또는 아나스타시스(Athanasius)의 글을 읽은 적은 없다. 솔직히 성경을 진지하게 읽은 적도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사실은 내게 심각하게 경고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신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새로운 신학에 파고드는 것은 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어처구니없는 길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한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복수심에 불타는 이방신의 이미지를 닮은 하나님, 사랑없는 하나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믿고 있던 진짜 하나님과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새롭게 인지했던 하나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도대체 얼마나 믿을만했던 걸까?다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정립시켜 주었다. 이제 나는 신앙이 처음 뿌리내린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1. 진짜 성경을 제대로 읽기누구든지 이사야서 53장 5절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과 같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결정적인’(clobber) 구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얼마든지 이런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고, 또 다른 구절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전혀 다른 십자가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깊이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의 위대한 주제와 유형에 비추어 이 본문들을 보게 되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동물 가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숫양, 유월절 양과 맏아들, 출애굽할 때 닥친 심판의 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온 세상을 뒤덮은 어둠, 이 모든 사건을 대속과 우리를 대신해서 흘린 피라는 의미를 빼고 나는 도저히 다른 방법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실제로 전체 주제를 고려해 통합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또 구약을 복음의 예시라는 관점에서 읽음으로,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졌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이지 결코 곁다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결코 의도적으로 조작된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삼위일체어린 시절에 들었던 십자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는 삼위일체에 근거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죄를 너무 싫어하기에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이었고,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일종의 제3자였다. 이런 설명도 일부는 맞다. 그러나 너무도 단순한 이런 설명은 복음과 삼위일체를 왜곡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를 가르친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서 그 누구도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나는 고작해야 열 살이었다. 그런 우리였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부족함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성경에 따르면,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 모두가 다 죄로 인해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모두가 다 이 죄를 함께 진멸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세상을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로 결심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아들이고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영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까지 보면,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체를 입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종이 되어 죽기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순종했다. 진노의 잔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를 보면,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 26:42).‘복수하는 하나님’과 ‘죄 없는 예수님’을 굳이 서로 대척점에 놓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바로 죄를 싫어하고, 또 죄인을 구하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저주하는 바로 그 사건에 스스로 참여한 아들의 공모(complicity)는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 우리는 믿음을 더 굳건히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까지 더 잘 보게 된다.3. 역사 속에 드러난 교회의 증거예수님이 마지못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이 속죄 이론 중에서도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비난을 여전히 되풀이하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형벌적 대속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건, 왜곡과 혀가 꼬이는 이상한 소리(lisping) 뿐일 것이라는 비판도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초창기 변증에 관한 글을 하나 보도록 하자. 2세기에 쓰인 마테데스(Mathetes)가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교환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혜택! 많은 사람의 사악함이 한 명의 의로운 이로 인해 숨겨지고, 그 한 의로운 이가 수많은 범죄자를 다 의롭게 만들다니!시편 51편 주해를 하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썼다.“주님조차도 죽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건 죄로 인한 게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들였고, 그리고 우리의 죄악을 없앴다. [중략]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다름 아닌 원죄 때문에 말이다. [중략] 그렇기에 화해를 위한 중보자가 필요했다. 한 번의 희생을 바침으로써 율법과 선지자가 행한 모든 희생이 예시하던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졌다. [중략] 이제 하나님이 화가 났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분노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감정을 기초로 해서 비유로 전달된 단어, ‘분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지 죄에 대한 그의 불만이라고 부른다.”심지어 고대의 노래조차 진노를 대신 받아서 짊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한다. 1500년 전에 쓰인 베난시오 포르투나토(Venantius Fortunatus, AD 530–607)의 아름다운 찬양,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See the Destined Day Arise)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아라, 예정된 날이 시작된다. 기꺼이 희생제물이 된 이를 보아라. 예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저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 그가 아니면 다른 그 누가 하나님의 위대하고 공의로운 진노를 감히 대신 질 수 있을까? 모든 고통, 모든 가시, 저주받은 너의 삶을 회복한다.”나는 또 현대 복음주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와 제임스 패커의 ‘십자가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What Did the Cross Achieve?)를 읽고 그들의 관점 또한 내가 과거 신학 고전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인가!아마도 어렸을 때 내가 이해한 십자가는 얕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또 교회 역사를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응시했고 또 동시에 나의 위치와 내 죄를 바라보았다. 십자가에 대한 각종 사례는 잘못된 것들이 적지 않기에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표성, 머리됨과 하나됨, 악한 세력이 전복, 십자가를 통한 전 우주적 승리 등의 가장 중요한 개념만은 달라질 수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모든 진리는 다 어릴 때 배운 말씀을 통해 내 속에 저장되었던 ‘좋은 기초’(good deposit)가 있었기 때문에 더 강화되고 풍성하게 될 수 있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I Changed My Mind About Penal Substitution번역: 무제
복음
십자가
희생
이방신
심판
삼위일체
진노
형벌적대속
어거스틴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넜다!
by Tim Keller
2019-09-10
신약성경의 안내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구약의 한 본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는 출애굽 기사의 본문이다.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위치한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집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 집에는 영국의 구약학자 알렉 모티어(Alec Motyer)가 머물고 있었고, 나 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프로울이 모티어에게 청했다. “어떻게 구약이 신약과 연결되는지 우리에게 좀 이야기해 주실래요?” 이에 모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말을 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중 한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며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양의 피를 집에 바르고 도망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지도자를 따라 도망쳐 나온 후로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죠. 갈 길이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이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고 또 성막을 주셔서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시죠.’라고 말이지요.”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거의 똑같이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나는 그 말에 놀라며 생각했다. ‘과연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사실을 말해 왔다. 지금도 다른 종교들이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혹 누군가가 “그렇다면 여기 이 종교는 어떻습니까?”라고 지적하며 나한테 마치 속았다는 듯 비난할 때, “그 종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라고 반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다리를 놓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먼저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단된 다리를 가끔씩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 생활이 그와 같다. 이러한 종교 생활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 건넜다는 느낌을 가질 순 없으며, 그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통해 그처럼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노력을 계속한다.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방금 전까지 거듭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조금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그분의 자녀가 된다. 여기에는 과정이 없다. ‘흑암의 권세’에 속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속했든지 둘 중 하나다(골 1:13). 기독교의 유일성을 드러내는 이 진리,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구절이나 이미지를 한번 떠올려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이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즉각적으로 옮겨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가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할 때 참고하던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에 겸손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글쎄요,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로이드존스는 설명하기를, 그런 대답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조금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래와 같이 단번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1. 이전에는 ‘저’ 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나라에 속해 있다.2. 이전에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외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3. 이전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4.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칭의’를 얻은 상태에 있다.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은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권능에 대해 알고 있는가?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2002년에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헤븐’(Heaven)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비록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거기서 블란쳇은 여배우로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는 어느 도시의 특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약 거래상이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삶을 망쳐 놓는 상황을 소개하며 바로 그 상황에 분개한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경찰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는 스스로 마약 거래상의 사무실을 폭파시켜 그 거래상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야간 경비원이 쓰레기통에서 폭발물을 발견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두는 바람에 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다른 네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사망자 안에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다.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일을 계획했던 블란쳇은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이 대목에서 블란쳇이 보여 준 탁월한 연기 덕택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한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삶은 타다 남은 잔해와 같이 황폐해져 죄책감과 수치심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이런 종류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똑같이 느꼈던 사람이 성경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다. 그런데 그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율법에 갇히게 된 인간의 마음은 그런 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거짓된 겸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내면의 변화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되었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도덕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만 구원받죠. 하지만 믿는 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전심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구원받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을까?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바다를 건넜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건너갔다고 할 순 없다.누군가는 바닷물로 세워진 벽을 따라 걸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와, 이 광경을 좀 봐!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잖아! 애굽인들아, 이제 너희는 상대가 안 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하지만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이러다 물이 덮치면 어떡해! 죽을지 몰라. 죽을지도 모른다고!”어찌 되었든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구원을 받았다. 모두 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의 ‘대상’으로 인해 받는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성경은 바다를 건너는 일이 오직 은혜로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중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라고 외친 모세의 말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거기서 스펄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순간, 구원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확신하건대, 여러분은 ‘가만히 서 있기’가 매우 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기는, 주님의 군사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년의 가르침을 통해서야 겨우 배울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전사에게는 가만히 있기보다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일이 훨씬 쉽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서 있기란, 사람이 세운 일반 군대에서는 처음에 배우는 기초 훈련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대장의 지휘 아래서는 가장 배우기 힘든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그 어려움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노련한 정신과 오랜 경험, 그리고 엄청난 은혜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습니다.”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죄와 사망을 하나님이 다 처리하셨기에, 지금 붙들고 있는 그 문제들은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앞에서 큰 난관을 만난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똑똑히 보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et Out! Tim Keller on the Exodus Stor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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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모티어
마틴로이드존스
찰스스펄전
출애굽
로마서 1장으로 회의론자 살려내기
by Nancy Pearcey
2019-09-07
고등학교 때부터 딜런은 타고난 리더십을 보였다. 풋볼 팀에서 MVP로 뽑히기도 한 그는 모두로부터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 딜런이 갖고 있던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신은 말 그대로 들어가는 수업에서마다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 수업에서 배운 다윈의 자연주의 철학은 가정(assumption)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어 수업에서 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관한 여러 주장들에 대해 가면을 쓴 채 이뤄지는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각종 심리학의 이론들은,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에서 스키너의 행동주의까지, 하나같이 기독교를 하나의 정신 병리학적 증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딜런이 다녔던 교회는 지극히 기본적인 복음을 가르쳤을 뿐이지,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만나는 각종 도전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어떤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 근본에서부터 흔들린 딜런은 결국 대학을 중퇴했고, 기독교가 과연 진리인지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프랜시스 쉐퍼가 스위스에서 운영하는 라브리에 가게 된 딜런은 그 곳에서 그의 눈을 뜨게 한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라는 말이 진리임을 딜런에게 확인시켜 주었다.그럼 교회가 어떻게 해야 떠나간 젊은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게 할까?왜 젊은이가 신앙을 거부할까딜런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평생 믿던 신앙에서 왜 떠났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변을 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 의심과 질문을 교회가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해당 연구를 수행한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거나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내어놓은 첫 번째 대답은 그들이 가진 질문에 교회가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 도전하는 세상의 온갖 세계관들을 다 알고 대응하려면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하다. 모든 ‘주의(ism)’를 다 암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은 성경이 모든 사고 체계에 다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타당한 전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로마서 1장이다. 로마서 1장을 바울이 주는 ‘변증 훈련 매뉴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이다.바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믿음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역사의 위대한 줄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줄다리기이다. 한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대용품을 창조함으로써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억누른다.바로 이런 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에 필요한 신학적 바탕이 된다. 진리에 관한 모든 논쟁은 예외없이 다음 두 가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철학을 테스트함으로 철학의 주장이 과연 실제 세계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또 동시에 철학의 논리적 일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도 테스트한다. 로마서 1장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왜 이런 테스트가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이런 테스트에 필요한 전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진짜 세상 테스트로마서 1장은 초월적인 창조자를 거부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라고 말한다(롬 1:23,25). 그들은 우상을 창조했다. 궁극적인 실체인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우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학문 세계에서의 지배적인 철학은 유물론이며, 유물론은 물질을 신의 위치에 놓는다. 물질은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용품이다. 딜런이 교실에서 공부한 세속적 사상가(다윈, 프로이트, 푸코)는 하나같이 모두 유물론자였다.이런 유물론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적이지 않은 실재는 모두 부정해야 한다. 결국 인간은 복잡한 생화학 기계 또는 의지, 정신, 영 또는 혼이 없는 로봇으로 축소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인간을 유전자에 의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 또는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관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로봇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을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자유 의지를 부정한다면 그건 식당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철학자는 농담처럼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내가 오늘 먹기로 이미 결정한 그 음식을 갖다 주세요.”물질주의가 우리가 아는 인간 본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꼭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피조물 중의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영광과 뒤바꾸는 철학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로 바꾸는 꼴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낮은 무언가로 시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항상 인간에 대한 낮은 시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이런 시각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른다. 즉, 인간을 온전히 인간보다 더 낮은 그 무엇인가로 낮추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 본성과 유물론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 테스트비 성경적인 모든 세계관은 이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인간에 대한 환원주의적 견해도 정신 또는 인지 능력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원주의는 이성을 이성보다 낮은 그 무엇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어떻게 환원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환원주의도 이성을, 그러니까 논리적 논증을 사용해야 가능한 게 아닌가? 따라서 환원주의가 이성을 왜곡하는 순간, 환원주의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고 만다. 바로 자기모순(self-refutation)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유물론은 생각에 대해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작용으로 이해한다.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이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가 가진 논리적인 주장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뉴런의 특정 패턴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이런 주장이 물질주의자들이 가진 견해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똑같은 추론을 적용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물론도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두뇌에서 일어나는 뉴런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뉴런 활동의 산물에 불과한 이런 유물론의 주장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어차피 논리적인 결론이 아닌데 말이다. 변증가 그렉 쿠클(Greg Koukl)이 말했듯이, 이것은 유물론과 같은 세계관이 스스로 ‘자살하는 방식’이다. 진리를 향한 세계관의 정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순간, 지금까지 논리를 근거로 한 그들의 모든 주장은 말이 안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이것은 ‘자기 참조적인 부조리(self-referential absurdity)’라고 불리며, 로마서 1장이 취하는 접근법은 왜 그것이 효과가 있고, 어떤 세계관에 적용 가능한지를 알려준다. 환원주의를 잘 살펴보라. 환원하는 바로 그 지점이 바로 환원주의가 스스로 모순이 되는, 자살하는 지점이다.로마서 1장의 서사는 모든 변증론 주장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딜런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소식은 성경적 전략이 보편적으로 다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더 이상 이런 저런 ‘주의’를 다 암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로마서 1장 하나로 모든 세상 주장에 다 맞서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One Strategy to Rule Them All: How to Answer Skeptics from Romans 1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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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
자기모순
그렉쿠클
언약으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
by Richard Phillips
2019-09-04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구약성경 다음에 신약성경이 나온다는 정도는 안다. 성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모세오경이 나오고 따라서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가 나온다는 정도를 안다. 신약에 들어서는 가장 먼저 복음서가 나오고 이어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뒤따른다는 것도 안다. 이런 순서는 교회가 정경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과연 성경의 구조 자체가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충분할까?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이해했듯이, 성경은 '언약 신학'이라고 부르는 데 필요한 충분한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언약 신학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언약 신학은 단지 종교개혁자들만이 바라본 성경의 이해가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드러내는 구원의 방식이다.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백성의 역사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여러 가지 다양한 접근법으로 바라볼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는 과정을 전쟁이라는 기본틀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대통령 제도, 놀라운 발명품들, 혹은 개인의 자유 확대라는 틀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해를 위한 이런 기본틀은 미국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데이터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성경은 어떤가? 성경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 최근 나는 비행기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기회를 만났다. 한 젊은 유대인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게 이렇게 물었다. “기독교인은 뭘 믿나요?”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가? 나는 다양한 교리를 통해서, 그러니까 창조와 죄, 심판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었다. 교리를 통한 접근은 꽤나 신선하고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교리 대신 성경 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언약 신학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내가 이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가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 메시지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알려줄 때 쓰셨던 바로 그 방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언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축복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축복 안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도 약속을 한다. 우리가 혼인 서약이라고 부르는 공식적이고 강제적인 계약이 바로 그 약속이다. 혼인 서약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데, 이 안에는 그들만이 누리는 특권과 더불어 책임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그분의 주권적이고 강제적인 조건에 따라 스스로를 인간과 묶으셨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내가 그 유대인 여자에게 한 대답을 살펴보자. 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온전히 내게 순종하기만 하면 너를 영원히 살게 하시겠다'는 생명의 언약이죠. 그런데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언약을 깨 버렸고, 그렇게 죄를 지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모든 후손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희생의 피를 통해, 그러니까 오로지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주시겠다는 또 다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후에 하나님이 홍수를 통해 죄악에 찬 인류를 멸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분은 또 하나의 언약을 노아와 맺으셨습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인간을 구하고 또한 자신을 위해 그 거룩한 백성을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이었죠. 나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또 언약을 맺으셨어요. 그 언약은 아브라함이 믿기만 하면 그에게 축복의 땅과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기독교인이 가진 믿음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신 것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그의 자손을 통해서 영원한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신 그 언약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즉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서 그분의 완전한 삶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 그리고 이를 믿는 이에게 바로 그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설명은 언약 신학을 떠받드는 성경적 기초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이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드러내는 성경의 방법이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언약 신학을 믿는 것이다.두 개의 언약 이야기성경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죄와 구원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각각 다른 두 가지의 언약과 연결시킨다. 하나는 언약을 깨뜨린 인간이고, 또 하나는 언약을 충족하신 그리스도이다. 이 두 가지 언약, 즉 행함에 의지하는 언약과 은혜에 의지하는 언약은 성경의 가르침이 제대로 세워지는 데 필요한 구조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내가 유대인 여자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이 이 언약 조건에 근거하여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 그 언약 조건은 다름 아닌 “완벽하고도 개인적인 순종”이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7.2). 바로 그 언약에 관한 하나의 테스트는 나무와 관련된 것이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순종을 통해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약을 깼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개혁 신학은 이것을 “행함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아담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가 살지 죽을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행함의 언약을 파기한 아담의 불순종은 커다란 문제가 되었고, 성경의 나머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파괴되어 버린 행함의 언약에 대한 처방으로 하나님이 들고 나오신 대답은 은혜의 언약이다. 악마를 상징하는 뱀이 첫 번째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한 이후, 하나님의 은혜는 뱀의 패배라는 장면을 통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신학자들은 이것을 최초로 제시된 원시복음(Protoevangelion)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에 이어서 은혜의 언약이 어떻게 이어질지를 보여 주셨다. 즉 죄인을 대신해서 죄 없는 자가 희생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죄인들에게 주어지며 그들이 져야 할 형벌은 그의 피로 대신 치르게 될 것을 보여 주셨다. 창세기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은혜의 언약은 그 이후 이어진 세대를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이야기에 놀라운 통일성을 제공한다.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그 언약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구주가 탄생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많은 후손만을 약속한 게 아니었다. 그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단 한 명의 후손에 대한 언약이기도 했다(갈 3:16). 모세 시대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나라를 이루었고, 모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죄 용서를 위해 희생 제사를 집례할 제사장을 제공했다. 하나님 왕국도 통치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은 결코 실패하거나 죽지 않는 왕을 약속했다. 그러나 파괴된 행함의 언약은 길고 긴 세대를 통해서도 여전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여전히 완벽한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 구절이야말로 언약 신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마 5:17).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함의 언약을 완성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심으로써 죄인들이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새 언약”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언약이 온전히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속 죽음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언약 신학은 구약과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신서에 실린 사도적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나님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라고 하실 수 있을까? 언약 신학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성취하신 행함의 언약뿐 아니라 은혜의 언약에 의해 바쳐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된다. 여기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가 하는 행함과 별도로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만드는가? 이에 대하여 언약 신학은 성경의 대답을 들려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함의 언약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진 빚을 대신 갚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은혜의 언약에 따라 오로지 믿음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역사는 결국 그분의 이야기이다언약 신학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드러내어 구원에 필요한 성경의 구조를 잘 드러낸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이 기록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그 답은 그의 언약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는 바로 생명, 지키심, 약속의 땅, 영광스런 백성, 선지자, 의로운 왕, 그리고 속죄양이다. 이 모든 약속들은 우리가 언약의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예'와 '아멘'으로 받을 때에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이 말하는 성경의 역사는 실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맛볼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demptive History번역: 무제
신학
교리
언약
구속사
하나님
역사
그리스도
바울
언약신학
철저하게 부활에 소망을 둔 삶
by John Piper
2019-08-3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15:30-3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15:20).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택한 삶이 정말로 불쌍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터무니없었을 우리들의 삶에, 인내하며 행하도록 힘을 부여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그가 기꺼이 경험한 평생의 모든 위험에 대해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그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자기 부인’의 정도를 생각하며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했을 때 쾌락적인 욕망에 대해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하루도 어떤 욕망을 죽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이다. “[전략]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또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운’ 일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맹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과 유다서 10절에서는 복음을 반대하는 어떤 부류를 ‘맹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낙담시키는 것들이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그래서 바울은 그가 잦은 위험에 노출되고, 맹수로 인해 매일 싸우며, 죽음의 위협 속에 있었기에, 부활이 없었으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삶은 어리석고 불쌍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만 이 고난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그는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식충이가 되고 술고래가 되자는 의미이다. 부활이 있든지 없든지 그들은 불쌍하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부활이 없으면, 적절히 절제하는 삶이나 거기에서 벗어나 최대한 세상 쾌락을 즐기는 것이 모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바울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세상 쾌락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난을 택한다. 그 고난은 그가 순종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을 때, 아나니아는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바울은 그의 소명의 일부로 ‘고난’을 수용했고, 그는 고난 받아야했다.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행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철저한 순종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나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은 아무 것도 헛된 것이 없다(고전 15:58)”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던 것이다.부활에 대한 소망은 바울의 삶의 방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그를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방시켜 주었다. 그 소망은 많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 없이도 행할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었다. 예를 들면, 그가 결혼할 권리를 가졌음에도(고전 9:5), 수많은 고난을 감당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즐거움을 포기했다. 그는 부활 때문에 그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집에 초청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동기를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라고 말씀하셨다.이 말씀은 현재 우리의 삶이 부활의 소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잘 살펴보라는 철저한 부르심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아니면 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부활이 있어야만 오직 지혜롭다고 설명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가?우리의 몸이 노화될 때 낙담하여 어떤 것들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시인하는가, 아니면 부활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는가?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겉사람은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매일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4:16-17).우리 모두 한평생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Radical Effects of the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소망
환난
쾌락
즐거움
고난
사도 중 가장 작은 자
by Jerry Bridges
2019-08-27
신약성경은 교리와 이야기를 통해서 약 스물여섯 가지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특성을 알려 준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 사랑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그 어떤 특징보다 자주 언급된다. 공감, 친절, 온유함 그리고 인내 등등 그 외의 다른 모든 특징들은 사실상 사랑과 겸손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도 바울을 바라보아도, 우리는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자. 그는 빌립보서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사도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견디어야 했던 엄청난 고난 속에서, 바울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이 유명한 구절도 그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에 썼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기 여러 해 전에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또한 투옥되었다(행 16:16-40).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런 심각한 상황은 당연히 엄청난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5절).그들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의 전체적인 의미를 유추해 볼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을 만큼 자신들이 가치가 있는 도구로 사용된 것에 대하여 감사했고, 동시에 이런 힘든 상황조차도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되도록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투옥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한 바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기 7-8년 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즉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다(마 10:29;눅 12:6). 그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붙잡았다.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신뢰는 다름 아닌 그분의 선하심과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에 뿌리는 두고 있었다. 또한 바울이 보여준 겸손의 근원은 바로 그가 가졌던 신학이다. 애초에 바울은 겸손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 아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처음 만나는 그는 오만하고 아집에 찬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감옥에 보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행위를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타고난 강하고 거친 성품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엄청난 경험조차도 그의 기본 성품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뒤따르는 이야기에서 달라진 바울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메섹 회당에서 그분을 담대하게 전한다. 또한 몇 년이 지나고 고린도 교회가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겪을 때, 그는 이를 결단력 있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거짓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훼손하려는 그릇된 선지자들을 강하게 저주하기도 한다. 그는 진정 바리새인일 때부터 보인 기존의 그 강하고 거친 성격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도로서의 삶, 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관통한 것은 바로 겸손이다. 바울의 겸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그가 스스로를 평가한 기록이다. 서기 55년 경,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이후 5년 정도가 지나고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엡 3:8)라고 표했했으며,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서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불렀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간이 흐르며 이처럼 변화했다. 즉 그는 오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새인에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하는 자로 바뀌었다. 진정한 겸손함을 갖춘 사람만이 스스로를 이러한 용어로 묘사할 수 있다.도대체 무엇이 한때 그토록 교만하던 바리새인을 그리스도의 겸손한 사도로 바꾸었을까? 이는 바로 그가 이해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자격없는 자에게 주는 혜택 정도로 이해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자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격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자로 생각했다.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한때 그토록 파괴하려고 했던 그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다. 스스로를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평가했고, 또 이어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그는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 3:8). 그는 자기 자신을 은혜 입은 자의 표본으로 보았고, 바로 이런 은혜의 신학이 그가 가진 겸손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생애에서 사랑은 어떠한 모습일까? 한번 더 그의 강하고 거친 성격을 상기하면, 바울이야말로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했다. 바울은 과연 삶 속에서도 그런 사랑을 보여 주었을까? 그가 네 교회에 보낸 서신서를 살펴보면, 바울은 진정 삶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다.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또 이렇게 썼다.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 우리는 바울 안에서 정말로 놀라운 패러독스, 즉 역설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그의 강한 성격은 사랑과 온유를 특징으로 하는 ‘부드러움’과 놀랍도록 조화를 이룬다.물론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그나마 ‘괜찮은’ 교회였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뭐가 힘드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 많았던 교회, 바울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었던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그의 마음을 어떠한가? 바울이 이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정말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갈라디아 교회에는 또 이렇게 썼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들에게 그토록 엄격했던 것은 바로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그들의 영혼을 위한 그의 걱정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사랑을 ‘엄격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엄격한 사랑이야말로 사랑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다. 바울이 교회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의 사랑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신은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하셨기에 바울은 고린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사랑할 수 있었다. 바울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굳건하게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품은 자신의 신학을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바울도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Least of the Apostles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사도
교리
기독교인의특성
바울
신뢰
사랑
겸손
기도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
by 고상섭 목사
2019-08-24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의 ‘온전한 그리스도’는 18세기 초 일어났던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싱클레어 퍼거슨은 팀 켈러 목사가 이 책을 쓸 것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왜 팀 켈러 목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18세기에 일어났던 매로우 논쟁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매로우 논쟁은 스코틀랜드 교회 안에 만연했던 율법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총회파들로부터 ‘반율법주의자들’이라고 정죄되었던 ‘매로우파’들은 ‘현대 신앙의 정수’(The Marrow of Modern Divinity)라는 책을 읽고 ‘은혜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토마스 보스턴을 필두로 하는 매로우파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당시 교회가 율법주의의 색채가 강하게 퍼져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이 오늘날 다시 대두되는 이유는 오늘날 현대교회가 18세기 초 매로우 논쟁 당시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복음을 잃어버려 율법주의로 향하는 현대교회를 향해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의 대부분에서는 가장 먼저 ‘복음’을 이야기 한다. ‘센터처치’의 시작도 ‘복음’이고, ‘팀켈러의 설교’의 시작도 ‘복음’이다. 또 많은 설교에서도 복음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럼, 팀 켈러 목사가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복음’이란 무엇인가? 팀 켈러는 ‘센터처치’를 시작하면서 복음을 정의하기를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라고 말한다. 좋은 충고(good advice)와 좋은 소식(good news)의 차이는 무엇인가? 좋은 충고는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이고, 소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즉 “복음이란 우리가 행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다.” 여기서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말한다. 복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복음을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 됨에 대한 인식 먼저, 복음은 ‘내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다.’ 이 말은 내가 행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스토트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자기주도적인 일 중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고 말했다. 왜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했는가? 인간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전적 무지’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해주셔서 깨우쳐 주시면 되는데, 왜 행동을 하셔야 하는가? 인간이 무지하기도 하지만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결되지 않는 ‘전적 타락’의 존재이기에,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행동을 해주셔야지 구원이 가능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즉 복음의 시작은 내가 죄인이라는 깊은 깨달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권의 제목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2권의 제목은 ‘구속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구속주’라는 말은 인간이 ‘피조물’이며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의 출발이다. 복음이란 인간에게 어떤 소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2.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다: 사랑받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인식 팀 켈러 목사는 복음을 바로 깨달을 때 사람 안에 두 가지 감정이 생겨나는데, 첫째,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둘째, “나는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고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감정은 순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죄인 됨을 깨닫는 동시에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편 85편 10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 표현해 주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십자가에서 의와 화평이 서로 하나가 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게 된다. 이 상반된 두 가지가 하나가 되는 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셔야할 만큼 우리의 죄가 심각하고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동시에 그렇게 큰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죄인 됨과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는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면서 동시에 담대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겸손과 담대함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것은 태어나면서 가지는 자질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정체성이다. 태어나면서 성격이 온유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싸워야 할 때, 분노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인간의 타고난 성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를 때가 있다. 반대로 말을 잘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은 반드시 말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저지를 수 있다. 즉 인간의 본성적 성품은 절대로 균형있는 삶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다. 그러나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 자기 자신을 죄인과 괴수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우울과 절망가운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고백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또한 모든 것을 가진 자라 말한다. 어떻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는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복음이 주는 정체성 때문이다. 3. 복음의 정체성을 가져라!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하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는 복음의 정체성을 가졌는지, 여전히 자신의 의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알아보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비판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것이라 말했다.누군가의 비판 앞에 좌절한다면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기 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이 말한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데, 그가 나를 더 낮은 사람으로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복음의 정체성은 비난 앞에 힘들지만 씨름하며 그 비난을 거룩의 과정으로 삼을 수 있다. 나를 깊이 돌아보면, 사실 나는 그 사람이 비난하는 것보다 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악하고 무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무엇에 근거한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해주신 사랑에 근거한 정체성을 가짐으로 극복해갈 수 있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에서 이렇게 말한다.“종교적인 사람은 비난을 받을 때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아상은 자신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것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없애야 한다. 반면에 복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비난을 당할 때 씨름한다.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은 내가 행하는 무엇에 나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해주신 변하지 않는 그 사실에 나의 정체성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애쓰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해주신 그 일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선물이며 자유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해주신 그 아름다운 일들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무엇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복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충만한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늘 명심하라고 말한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넘어질 때 마다 ‘이것도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죄인 된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랑이 결국 우리를 기쁨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복음은 내가 무엇을 성공하고 잘했을 때도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해준다. 나 같은 죄인이 이런 일을 했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다. 좋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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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겪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말론
by Ryan Martin
2019-08-21
나는 전쟁으로 파괴된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에 위치한 작은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다. 지난 여름, 특히 불안정하고 폭력이 만연하던 그 계절에 나는 종말론에 대한 연구를 지도하고 있었다. 연구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미래 희망이라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한 민족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멀리서 터지는 포격의 천둥이 방을 흔들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읽던 미가 선지서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우리가 읽은 본문은 미가서 4장 3절, 모든 민족이 시온 산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이었다.“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만약에 AK-47과 RPG를 다 녹여서 말이야, 그걸 가지고…”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은유를 더 멋지게 완성할지를 고민했다. “그 총을 다 녹인 철을 가지고 말이야, 농구 골대를 만든다면, 그럼 어떨까?” 물론 농구 골대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모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현대 콩고와 고대 이스라엘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콩고 동부의 언덕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평생을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있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공부하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통받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이곳을 더 밝은 미래로 인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정치, 경제적 현실은 평화와 발전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좌절시킨다. 지금 이런 콩고의 현실처럼 미가 선자자가 그리던 미래의 모습과 동떨어진 게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전쟁으로 고생하는 콩고의 기독교인은 도대체 미가서의 이런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스라엘도 미가 선지자의 시대에 전쟁의 공포를 겪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칼과 창으로 다스리는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살았다. 평화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미가서 4장 3절의 주님은 지금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말씀하신다. 파괴의 도구를 녹여서 생산과 번영의 수단으로 만드시겠다고! 이것은 마치 혼돈 속에 말씀을 불어넣어 우주를 창조한 신(창 1:2), 포로가 된 민족을 해방시킨 신(출 14:30),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겔 37:10),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는 신인 하나님을 떠오르게 한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주신 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콩고 동부의 희망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새롭게 만들어 가신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압박하는 질문이 남아 있다. 미가가 예언한 그 영광스런 미래가 이미 도래한 것인가? 신약학자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이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도대체 신약성경은 이미 실현된 종말을 어느 정도까지 보여 준다는 것인가?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본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실 그때를 기다렸던 것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믿는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에,’ ‘너희 가운데에,’ 심지어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성경은 ‘성취’와 ‘완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 아니라, 종종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날’이 왔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 앞에서 나와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는가? 우리의 현실이 미가 선지자가 본 환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전쟁터로 향할 필요는 없다. 진정으로 이러한 현실이 이미 도래한 ‘주의 날’이라면, 그건 참으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교회는 싸움 끝에 갈라지며, 세상의 권력은 점점 더 기독교에 저항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세상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은 듯하다. 폭력과 불확실성 속에 서 있는 콩고인들 중에 과연 누가 이렇게 외칠 수 있을까? “여러분,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미 도래한 그러나 아직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살고 있다. 주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오늘날 콩고의 동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새로운 세대와 영혼들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모든 폭력과 죽음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안겨 줄 평화의 그날을 말이다.종말론의 중요성나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하늘과 땅의 모습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으로 훼손되지 않은 새로운 창조물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즉 타락한 피조물을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부여받은 이 사명이 얼마나 고귀한가? 종말론은 왜 중요한가? 이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맡은 자들로서 선교할 때 동기를 주고, 방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선교의 목적까지 알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겪는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우리의 현실이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현장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왕국이 온전하게 도래했을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해 보라. 칼과 창이 쟁기와 갈고리가 되는 그 세상을 상상해 보라.우리 주변에 가득한 어둠, 그 아래에서의 좌절과 불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세상을 다시 만드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좌절과 불만은 당신이 죄악을 싫어하고 또한 죽음으로 처참해진 이 세상이 당신의 본향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굶주림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도래할 그분의 왕국을 향해 더욱 충실히 봉사하도록 만든다. 성령께서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이 부서진 현실에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미래를 가져다주시기를 기도하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종말론이자 그 종말론을 향한 우리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날까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종말론이고 이를 믿는 우리의 태도인 것이다. 낙담과 갈등의 종식2017년 말, 내가 사는 지역에서 전투가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그 전쟁의 무게에 짓눌렸다. 그때, 내 친구는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편지를 썼다. “이날 당신은 갈등과 투쟁의 세대를 지나 마침내 아주 오랫동안 지연된 평화가 찾아온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무거움과 폭압이 사라지고 희망과 기쁨이 회복된 그 지역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폭탄과 총성으로 가득하던 그곳은 이제 조용하고 평화롭다. 드디어 아름답게 조화되는 삶이 회복되었다. 이날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안전한 가운데에 거하는 사람들,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더 이상 공포와 절망에 젖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단순한 삶을 위협했던 폭력과 부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한 미래의 희망일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말씀의 약속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칼을 쟁기로 바꾸시는 그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schatology in an Age of Artillery Fir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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