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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큰 기쁨,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다
by David Mathis
2019-12-24
성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는 것 같다. 성탄의 분위기와 매력, 그리고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매혹적인 느낌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성탄은 특별히 어른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대해 무뎌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방 점성술사들이 서쪽을 향해 길고 힘든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에 뭔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한 왕이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을 보면 뭔가 놀라운 일이 임박했음이 분명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목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다가 자기 양 떼를 놓아두고는 갓 태어난 아기를 찾아 나선 것, 그리고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눅 2:18). 주님 되신 그리스도천사들이 선포할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알릴만한 이 위대한 신비의 핵심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에 담겨있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대하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특별히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신 것일 뿐 아니라, “주님”의 오심 이기도 하다. 하나님 자신이 오신 것이다. 오랜 기다림 후, 마침내 진정한 임마누엘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 이는 너무도 장엄한 소식이어서 한 번에 다 말할 수 없다. 이 아이의 삶 속에서 매일 가르침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이 사람에게 이스라엘과 열방의 “주”이신 하나님의 신성이 있음을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복음서의 각 페이지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분명히 인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더욱 잘 보여줄 것이다. “육신이 되어”(요 1:14) 오신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동일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요 1:1–3). 그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본 위대한 장관이 이것이었고, 이는 이 진리를 앎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성탄을 생각할 때마다 맛보기를 갈망해야 하는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그분의 오심은 단순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구주 되신 그리스도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이는 재미를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주가 마음만 먹으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공개 시연 같은 것도 아니다. 이 불가사의는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죄, 그리고 죄의 영향, 덫, 그리고 파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천사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라고 선포한다. 이 사자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라고 한다. 히브리어 ‘예슈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순간마다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왕들을 구원의 도구로 보내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 자신이 오신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보화 되신 그리스도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속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최종적인 값을 치르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벧전 3:18)이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큰 기쁨’(시 43:4)이 되신다는 사실이 큰 기쁨의 이 좋은 소식(눅 2:10)의 근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청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 따르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큰 기쁨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된 모든 유익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의 인격보다 훨씬 가치가 낮고, 그의 인격의 영광에 비교하면 그 가치는 더욱더 낮다. 그러한 유익들을 다 합쳐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에 비할 수 없다”(‘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3쪽에서 발췌). 우리가 얻은 구원의 기쁨이 극대화되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이시다(마 13:44). 그는 극히 값진 진주(마 13:45–46)이시다. 그를 단순히 임마누엘이나 우리의 구주로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인간이며, 인간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하시는 가장 큰 기쁨이요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시다. 영광 되신 그리스도성탄은 기쁨을 누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자는 수많은 천군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선포한다. 원한다면 이를 성탄 희락주의(Christmas Hedonism)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가 신인(神人)으로 오셔서 자신의 인격을 통해 선사해 주신 그 기쁨은 모든 창조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하고 그 목적을 성취한다. 성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짜릿한 기쁨을 흘려보낸다. 굿윈은 계속 이르기를,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중략] 그리고 모든 타락하는 것들을 작정하신 것, 심지어 구속 그 자체마저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했다. 마크 존스(Mark Jones)도 예수님이 주님이시오, 구주이실 뿐 아니라 보화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부록이 아니다 [중략]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극치이기에, 우리는 그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의 부요함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보다 우리 구원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4쪽). 성탄에 난 그 아기는 주님 이상이시다. 심지어 구주 이상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이시고, 우리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안에 그의 영광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존재한다. 성탄의 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가 태어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당신은 성탄의 큰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You were made for Christmas번역: 이정훈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탄
큰기쁨
영광
창조
주님
구주
보화
토마스굿윈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
by Brandon D. Crowe
2019-12-21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교리는 보통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처녀에게 탄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구약 성경의 맥락 속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걸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예언을 이루었다는 걸까? 이사야 7장 14절은 처녀 탄생과 관련해서 중요한 핵심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 구절이 어떻게 예수와 연결되는지 살펴보자.먼저 여러 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구약적 맥락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사야 7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는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명령을 주기 위해서이다(10-11절). 이것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재앙을 대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보통 하나님께 어떠한 징조를 구하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이다(12절). 앗수르와 정치적인 결탁을 하는 대신(왕하 16:1-9) 아하스 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선지자의 말에 대한 아하스 왕의 거절,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결국 앗수르에게 침략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사 7:17-25). 아하스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징조를 받았다. 이사야 7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셨는데, 바로 특별한 아기의 탄생이다. 그 아기가 히스기야 왕인가?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 중 하나인가? 여기서 이 아기가 어떤 아기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단지 그 아기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조라는 것만 명확한 것이다. 아기가 누구인가보다 더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여인이 과연 처녀인가에 대한 것이다. 혹자는 이사야 7장 14절 속 히브리어가 처녀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지금껏 아이를 낳지 않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약적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히 처녀를 말하고 있다.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는 그 단어는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처녀를 의미했던 단어이다. 게다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 성경은 이 단어를 분명히 그리스어 “처녀”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했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약 성경의 저자가 이사야 7장 14절은 분명한 처녀 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 1:22-23).여기서 약속된 아이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경고였다. 그에게 있어서 임마누엘은 축복이 아니라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는 경고이자 저주였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함께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반응해야 한다.요약하면,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약속한 아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시이며, 아하스의 믿음 없음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의 도움과 피난처이며,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 신뢰와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가까운 미래에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기 전에 아하스 왕이 두려워한 모든 정치적 위험은 사라질 것이다(사 7:16). 그럼에도 아하스에게 징조로 보여진 그 아이는 보다 더 완전한 성취를 가리키고 있다. 아하스 왕 시대에 이사야 7장 14절이 말하는 임마누엘 아기가 정말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분명한 징조였고,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면 저주였다. 이 예언은 틀림없이 아기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이라는 더 위대한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처럼 우리와 맺은 언약적 존재인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에 따라 복이 되거나 저주가 된다. 아하스 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힘을 주거나 경고의 메시지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에 대한 경고가 된다. 아하스 왕은 이방 신에게 제사하는 방식으로 그의 아들을 불에 바쳤던 것 같다(왕하 16:3; 대하 28:3).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축복을 가져다줄 아이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회복을 약속하셨다. 마지막 임마누엘은 희생적인 죽음으로 그 희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찬송하는 “천사 찬송하기를” 속의 가사처럼, 처녀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 아기는 “죄인들을 불러서…영생하게 하시니”를 실현하신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Of the Virgin’s Womb번역: 무제
복음
변증
예수님
처녀
이사야7:14
임마누엘
선지자예언
언약백성
피난처
예수님은 왜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by Mark Jones
2019-12-14
흔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 기적을 행하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 맞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 늘 역사하여 기적을 행하도록 만들었다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분의 생애에서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정말 예수님의 신성만이 유일하게 그 인성에 작용하는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예수님은 성령이 필요하셨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때로는 뛰어한 신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 성령이 무슨 역할을 하셨는지를 확실히 모를 때가 있다.성령을 따라 사역하신 예수님예를 들어 로마가톨릭이나 루터파 신학자들의 경우, 각자의 전통에서 내세우는 기독론을 고수하는 한 성령의 의미심장한 역할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로마가톨릭과 루터파 신학자들은 (가령 믿음이나 소망과 같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사나 은혜를 성령과 어떻게 연관지어 설명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와 달리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논증하며 통찰력 있는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내가 아는 한, 오웬 이전에 그처럼 선명하게 그 관계를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하게 통합된 상태에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오웬은 성자의 신성이 아무런 매개 없이 인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일은 단 한 번으로서, 오직 성육신을 통해 인성이 실재하도록 결정하는 일을 할 때만 그러했다고 주장했다.그에 따르면,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모든 활동의 주체는 성령이 되신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권능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권능을 베푸셨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위격적 연합’(the hypostatic union)에 의해 ‘직접적으로’(immediately) 활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매개적으로’(mediately) 활동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위격적 연합이란,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함께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오웬의 접근과 달리,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해 통상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그분 자신의 신성에 의해 기적이 행해졌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오웬과 다른 개혁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직접적인 주체가 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성령의 관계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읽을 때 마주하는 수많은 물음들에 답변할 수 있게 된다.인간의 영혼을 지니신 예수님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의 영혼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왔을지는 몰라도 잘못된 추측이다. 예수님은 여느 인간과 같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닌 순전한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자신의 도덕적 행동에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영혼을 지니셨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의식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성자의 위격이 곧 그리스도의 자의식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이 설명한 바와 같이, 위격이란 한 존재의 양식 내지 정체성이지 영혼의 활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그분의 위격을 가리키는 물음이며, 이에 우리는 (그분의 정체성을 가리키기 위해) ‘예수님은 신인(the God-man)이시다’라고 답변한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분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그 신성에 묻혀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했다. 또한 하나님께 올려진 그분의 기도도 단순히 사람의 기도이거나 심지어는 신인으로서 성부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령의 권능 가운데 성부께 드려지는 성자의 기도였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입을 열어 간구한 어떤 기도도 그분의 인성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성령의 도움 없이 드려진 기도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도 주님의 간구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이렇듯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분과 동행하신 분은 성령이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모든 주요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도 성령이셨다. 이를테면 성육신을 일으킨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원인 자체도 성령께 있었다(마 1:18, 20; 눅 1:35).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처럼 성령에 의해 시작된 사실은, 메시아가 성령을 받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던 이사야의 예언과도 잘 들어맞는다(사 42:1; 61:1).실제로 신약성경은 이사야의 증언을 여러 군데서 확증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라고 언급한다(요 3:34). 또한 세례 시에는 성령이 그분 위에 내려오셨다고 묘사한다(마 3:16). 그리고 광야의 시험 전후로도 성령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셨다고 설명한다(눅 4:1, 14).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시작하는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며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눅 4:21). 그래서 그 선언대로 성령의 권능을 따라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마 12:18; 행 10:38).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영혼이 지닌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치셨다(히 9:14).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처럼, 그분의 부활 역시도 성령에 의해 일어났다(롬 8:11). 그 결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롬 1:4; 참고 딤전 3:16; 벧전 3:18).이처럼 성령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 계속해서 동행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성부께 기도하실 때도 성령의 능력을 따라 간구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로마서 8장 26-27절 본문도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언급하는 수많은 성경 본문은 개혁신학의 해석 전통을 따를 때 가장 잘 설명된다.연약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지금까지 설명한 기독론을 전제했던 휴 마틴(Hugh Martin)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약하고 힘없는 상태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 의존성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간구를 담고 있는 그분의 기도 속에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그분이 여자의 몸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갈 4:4).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는 말은, 다른 규례나 의무와 마찬가지로 기도해야 할 책임 역시 그분에게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도의 율법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늘로부터 응답받지 않고는 그 무엇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조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겔 36:37).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에서 나오는 믿음, 사랑, 존경, 기쁨을 하나님께 기도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하늘의 모든 은혜를 성령의 권능을 따라 체험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와 소원을 늘 아뢰기 원하셨고, 또한 자신이 신뢰하는 그 아버지를 언제나 찬양하고자 하셨다. 나아가 거룩한 결정을 내리실 때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를 다른 어떤 의무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본분으로 여기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 그분의 참된 인성이 구현되었다.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예수님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 대한 사역을 지속하신다는 사실이다(행 2:33).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사역을 이제는 천상에서 적용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 일을 다름 아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분의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활동하신다(롬 8:9).둘째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우리 안에 두셔서 그분의 정서와 갈망을 갖게 만드신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인도하신다(롬 8:29).셋째는, 성령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 생애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이 이제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성령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듯이, 지금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 아들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결국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성부와 성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 사실을 떼 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성령을 이제는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루셨다(요 14:18).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y Jesus Needed the Holy Spirit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령
사역
영혼
사람
필요
성육신
존오웬
기독론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구약의 하나님
by Miles Van Pelt
2019-12-11
구약에 등장하는 자비(mercy) 또는 긍휼(compassion)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이는 출애굽기 32장부터 34장까지의 내용, 황금 송아지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이집트로부터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스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산 아래에 천막을 쳤다. 거기서 그들은 연기 나는 산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들리는 체험을 통해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다(출 20:22). 이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출 20:4, 23).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로부터 고작 40일 정도가 지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일, 바로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출 32:1-6). 이 한 번의 불순종은 시내산 언약을 어긴 것이었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는 죽음이었다(출 32:10).그러나 서사는 계속된다. 모세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지 않기로 하셨다(출 32:11-14). 모세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계속해서 지켜주실 것을 요청했다(출 33:12-26).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놀라운 요청을 한다(출 33:18).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출 33:19).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 뒤에 숨기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여 모세가 영광을 보도록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바로 이 마지막 내용, 출애굽기 34장 6-7절에 나오는 거룩한 이름의 선포 부분이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부분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후략]’”출애굽기에 깊이 묻혀 있는 이 두 구절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핵심적인 사고 체계(paradigmatic expositions) 중 하나가 들어있다. 이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 가지는 풍부함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근원인, 모세에게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 구절이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다음 두 가지 핵심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6절의 첫 부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섯 가지로 보여준다. 자비, 은혜, 화내기를 더디 함,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신실함이 그것이다. 그리고 7절에 나오는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할 때, 특히 “악한 행위와 죄를 용서” 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무한한 탁월함(His limitless excellence), 측량할 수 없는 능력(immeasurable strength), 그리고 더없이 완전함(complete perfection), 이러한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incomprehensibility of God)을 생각해보자.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존재 중 일부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또는 성품)과 관련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한 첫 번째 속성이 바로 자비하심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자비로우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기록한 구절의 원래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비는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7) 라는 구절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약한”(weaker) 속성을 알려주려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이 특정 속성은 구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지는 데에(시 78:38; 86:15; 103:7–14) 있어서 중심이 되고, 참되고 진실한 회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한다(욜 2:12-13; 대하 30:9).하나님의 자비가 구약 속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 자비하심은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된다. 시편 145편 8절이 출애굽기 34장 7절에 처음 기록된 이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한번 보라.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편 145:9) 성경은 편협하게 제한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모든 현실을 형성하는 무소부재한 힘(ubiquitous force)이며, 희망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pervasive impetus)이다.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품성이 먼지 쌓인 건조한 신학책 속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은 죄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우리의 삶에 가장 잘 적용하는 사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특히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단지 죄인에게 내릴 벌을 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손을 내미신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컸는가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난다. 돈을 빌려줄 때 가난한 자들은 이자를 면제받았다(출 22:25). 판결을 내릴 때 절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면 안 되었다(출 23:3; 레 19:5). 제사를 지낼 때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에 맞추어 제물을 준비하면 되었다(레 14:21). 신명기 15장 7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그 구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절). 잠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잠 14:21; 17:15; 22:9, 16; 28:27). 선지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자를 정죄한다(사 3:14–15; 10:2; 렘 5:28; 겔 22:29; 암 5:12). 시편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68:10; 72:13; 112:9; 113:7; 140:12).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 궁핍하고 배고픈 자, 억눌린 자를 돌보지 않고 외면하신다는 말씀 구절은 구약의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외에도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물론 과부라고 함은 남편이 죽고 다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말한다. 구약에서 고아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말한다. 고아를 영어 성경에서는 “아버지 없는 자”(fatherless, 특히 ESV 성경에서)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그네는 이방인 또는 외국 땅에서 사는 외국 거주인인데,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서 나그네였다(창 23:4). 모세는 미디안에서 나그네였다. 사실 모세는 미디안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즉 “그 지역의 나그네”라는 뜻으로 지었다(출 2:22).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도 나그네 취급을 받았다(레 25:23).그러면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관심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취약함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사회적, 또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억압을 받거나 학대받았다. 사회적 제도로 보호받거나 이웃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금지했다(출 22:22; 신 24:17).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할 기회를 주도록 했고(신24:19, 21; 26:12), 매년 열리는 축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신 16:11, 14). 그리고 행정적인 처리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신 24:17). 반대로 과부나 고아, 또는 나그네에게 공의를 베풀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7:19). 이 죄가 가진 심각성을 말라기 선지자는 거짓말, 마법, 그리고 간음과 동일시하였다(말 3:5)고 말한다.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고 찬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는 자비의 모습을 세상에서 보여야 한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3-4).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혜는 그것을 가르친다. 선지자들은 거기에 동참하고 시편은 그것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신약 성서의 자비와 긍휼은 구약 성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자비와 긍휼이 극치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Old Testament God of Compassion and Merc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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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호프 씨의 마지막 희망
by Michael A. Rogers
2019-12-07
나는 최근에 호프 씨를 묻었다. 호프 씨는 성숙한 기독교인 여성이고 86세였다. 그녀는 이름이 호프인 것처럼 내가 그녀의 목사로서 알고 지낸 20년 동안 희망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재활센터에서였고, 그녀는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호프 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지팡이 두 개나 필요할 만큼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런 그녀는 여러 가지 건강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뻐하며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호프 씨는 애초에 4개였다가 갑자기 6개로 늘어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에 나는 다른 목사 한 명과 병원에 방문했다. 야고보서 5장에 근거해서 그녀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치유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녀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호프 씨는 48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심장 수술을 견뎌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야고보서 5장 15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시리라.”목사들은 이제 종말이라는 궁극적인 주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주님의 날에 있을 모든 영혼을 향한 심판, 믿지 않는 자들을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지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준비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좀 더 자주 설교해야 한다. 요즘 주로 들리는 얕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복음주의 설교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선포해야 할 궁극적인 희망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몇 세기 앞선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급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했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훨씬 더 짧은 수명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좇지 않았다. 주변에 산재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희망을 선포하는 설교가 울려 퍼졌다. “죽어가는 한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 나는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라고 말하는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설교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성경을 보면서 환상적으로 멋진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원하는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약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현재를 넘어서는 내세의 구원 약속이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극히 드문 약속도 고통이라는 우울한 배경에서 나온다. 욥기 19장 25-26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16편 11절도 욥기와 유사한 위로를 보여준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인은 죽은 뒤에 두 단계를 거친다는 신약의 가르침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가장 먼저는 죽은 후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즉각적인 경험이 있다(빌 1:23). 히브리서 12장 23절에서는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그 위대한 부활의 날까지 주님과 함께 있는 왕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린다. 오로지 홀로 죽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영과 혼은 불사(immortality)의 선물을 받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의식을 가진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육신 없이 영혼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육신을 실재로 간주하고, 영혼은 형체가 없는 일종의 유령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영혼의 무게를 재거나, 영혼을 측정하거나, 영혼을 셀카로 찍은 사람이 있던가?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중요하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영적이지만, 실질적인 존재를 영유한다.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7-8절에서 말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을 때에 육신은 무덤에 남기고 떠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신학자들은 보통 죽음을 통하지 않고 영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사이(between)와 불완전함(incompleteness)을 함축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의 단계로 들어가는 첫 과정을 “즉각적인 천국”(immediate heaven)이라는 좀 더 긍정적인 말로 부르고 싶다. 강조할 부분은 바로 이 시작 단계에서 접하는 ‘즉각성’이다. 예수님은 회개한 십자가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성경적인 희망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사망한 즉시 주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with)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인의 희망에는 두 번의 단계가 있다. 놀라운 예수의 재림은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시작이 된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가 급작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 앞에서 분명하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는 신자들의 영혼과 함께 온다(살전 4:13-18).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진다(고전 15:51-57). 그 놀라운 날에 기뻐하며 왕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은 구세주의 확실한 보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호소해도 정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차단된다(마 25:31-46). 창조는 이제 그 자체로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롬 8:20-21; 벧후 3:10-13). 성도가 누릴 미래 경험의 정점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예언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것은 모든 악, 죄, 죽음, 슬픔의 흔적이 사라진 궁극적이고 완전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은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마지막 핵심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중략]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마지막 때 하늘 전체를 덮는 파노라마는 너무나도 놀랍기에 수백만 명의 회의론자들이 성경의 결론을 환상 또는 신화로 여긴다. 냉소주의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기에 “과장된 상상속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무엇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만연해있는 고통과 죽음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악과 고통을 마지막 결론이라고 믿지 않을 뿐이다.‘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희망은 미래 세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그런다고 지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했던 그리스도인은 다음 세상을 가장 열렬하게 기다렸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은 미래로 확장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확실한 약속이라고 믿는다.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기에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지 반드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한번 살펴보자. 로마서 4장에서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처럼 자식을 낳을 수 없고, 태가 죽은 것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중략]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바울은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라고(21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희망의 핵심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의 역사적인 재림을 상상하는 것, 놀라운 부활의 몸을 받는 것,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행하는 것, 이러한 미래의 희망을 모두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고, 경험해본 사람도 없기에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아담(Thomas Adam)은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 내렸다.“희망은 맑은 얼굴을 가진 현숙한 여인이다. 그녀는 이 땅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목표는 하늘에 있다. [중략] 믿음은 그녀의 변호사, 기도는 그녀의 간청자, 인내는 그녀의 내과의사 [중략] 감사는 그녀의 귀중품 보관소, 자신감은 그녀의 해군 제독, 하나님의 약속은 그녀의 닻 [중략] 그리고 영원한 영광은 그녀의 면류관.” 우리 부부는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묻힐 땅에 놓을 비석을 작년에 샀다.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항하여 희망의 간증을 새긴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거기에 빌립보서 1장 21절을 새겨 넣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오늘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확신으로 서 있는가? 출처: www.ligonier.org원제: Our Final Hope번역: 무제
복음
부활
중간상태
재림
천국
희망
루이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
by John Piper
2019-11-30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다고 가르친다(롬 5:19; 고후 5:21; 롬 4:6, 11: 10:3). 이 가르침은 그분이 공생애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사역만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이런 질문은 칭의의 원인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본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본문은 이러한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위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죄 사함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무죄한 생애를 주장하는 가르침은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사역만으로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의 죗값이 탕감받고 용서받는 일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본문을 찾을 수 있다.“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그 죽으심이 바로 ‘무죄한 생애의 절정으로서’(as the climax of a sinless life) 이해되어야만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하고 죄가 없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7-28).“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생애의 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덮는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 사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설명이 아니다. 또한, 그 사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설명도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생애의 절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분의 전 생애가 바로 그 십자가를 향하도록 계획된 삶이었다고 증언한다(막 10:45; 요 12:27; 히 2:14). 그분이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사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이 지닌 구원의 효력을 논하는 일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삶의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그 죽으심이 과연 어떤 효력을 갖는지 논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다.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순종은 무죄한 생애의 절정에서 이뤄진 행위로서 그 백성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하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순종을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보이신 순종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그 둘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시점에서인가?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던 시점에서인가? 마지막 만찬에서 자리를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시점이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신 시점에서인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으시던 시점에서인가? 그 어떠한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순종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인위적인 결과만 낳을 뿐이다.따라서 바울이 칭의의 원인으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관해 설명할 때도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순종만이 아니라 공생에 전체를 통해 보이신 순종의 절정으로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그와 같은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즉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 그리하여 자기를 낮추셨다. - 자기를 낮추신 방법은 복종이었다. - 그 복종은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완전한 순종이었다. - 심지어 그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이 본문은 예수님이 사신 생애의 시작점에 일어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과 그 생애의 종결점에 일어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사이에는 자기를 낮추시어 순종하신 삶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순종의 삶이 결국에는 가장 끔찍하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분의 모든 순종이 지향한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몇 시간의 순종을 그 이전까지의 순종, 즉 처음부터 그 죽음의 시간을 향해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오며 보이신 순종과 분리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그 이전의 모든 순종과 구분해서 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여기서 아담의 경우에는 한 가지 죄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생애 전체를 통해 완전히 승리하게 되셨다.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불순종과 순종은 대비된다.바울이 아담의 “한 범죄”와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를 비교할 때, 그는 아담이 금기의 열매를 먹은 행위에 상응하는 어느 한 가지 행위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담처럼 또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가지 범죄만으로도 아담처럼 실패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 전체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이처럼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생애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와 ‘죽음’이란 결코 그 이전의 삶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 주신 순종의 절정이자 결론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이 완전하게 순종하신 삶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완전한 순종의 삶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얻게 만드는 최상의 행위,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한 순종으로 무죄한 삶을 사신 생애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행위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의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ufficiency of Christ’s Obedience in His Life and Death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관계
회복
순종
복종
죽음
바울
새로운 TULIP이 주는 기쁨
by David Mathis
2019-11-27
최근 개혁신학이 다시 각광을 받으며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스스로가 주장하는 신학에 어울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칼빈주의 신학에 부합한 신앙의 덕목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TULIP(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 Un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ement, Irresistible grace, and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짝을 이루는 또 다른 TULIP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전적 겸손(T: Total Humility)“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위의 두 구절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했다(“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성경이 다루고 있는 위대한 주제는 이처럼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를 돌보며 세워 주신다는 내용이다(눅 1:48, 52; 14:11; 18:14; 약 4:10; 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춰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기이한 영광을 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칼빈주의의 핵심이자 정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식을 왜곡시켜 우리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한다.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마 18:4).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겸손한 왕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건장하고 멋진 준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 마 21:5).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빌 2:3)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야 할 칼빈주의가 악의와 분노와 경멸이 가득한 논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과연 당신이 신봉하는 칼빈주의는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었는가?”무조건적 친절(U: Unconditional Kindness)“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친절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하찮은 덕목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 사도행전은 친절을 베푼 작은 행동들을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다(행 10:33; 24:4; 27:3; 28:2). 그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고후 6:6; 골 3:12; 딛 2:5). 이렇듯 모든 성도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엡 4:32). 교회에서 공인된 지도자라면 더욱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 친절은 성령의 열매일 뿐 아니라(갈 5:22),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고전 13:4).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절한 성품을 함양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눅 6:35). 그처럼 인자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 5:45). 더 나아가 그 인자하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만들기도 한다(롬 2:4).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을 통해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롬 11:22).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딛 3:4), 또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계획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엡 2:7),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가 타인의 삶 속으로도 흘러가도록 기도한다. 따라서 ‘인색한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제한 비판(L: Limited Criticism)“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중략]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우리는 ‘4대 강령주의자’(four-pointer)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참고로 4대 강령주의자란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제한 속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교리만을 수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는 비판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간혹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세부적인 논점을 짚어 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다툼을 일삼아야 하는 건 아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투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했다.물론 성도들에 대해 책망해야 할 때가 있다(눅 17:3; 딤전 5:20; 딛 1:9, 13; 2:15). 이때 목회자는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딤후 2: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종을 부리듯 회심한 성도들을 대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그들을 대하며 권고했다(고전 4:14). 그 결과 때로는 눈물로 훈계했으며(행 20:31),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그런 자세로 성도들을 대하라고 요구했다(살전 5:12, 14).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사랑 가운데 서로의 잘못을 친절하게 고쳐 주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골 3:16).이때 우리의 비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또한 그 목적은 언제나 상대방을 세우는 데 있지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후 13:10). 그러니 날카로우면서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담대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잘못을 짚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가급적 제한해야 한다.불가항력적 공손(I: Irresistible Graciousness)“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이 구절은 젊은 칼빈주의자가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놀랍게도 ‘항상’이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든,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릇된 문제에 맞서 싸울 때에든, 항상 은혜 가운데 말을 하려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에게 잘못을 알려 주거나 또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때에도 은혜 가운데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말을 하는 태도 자체가 공손한지 불손한지를 한번 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영광스러운 ‘은혜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타인에게는 불손한 태도로 말을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라면, 자신이 정말로 그 은혜 가운데 말하고 있는지도 신경 써야 한다.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볼 때도,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말할 만큼 공손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시 45:2).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공손히 말한다면, 5대 강령을 둘러싼 논쟁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될지 모른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할 때 뒤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혔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참음 속의 인내(P: Perseverance in Patience)“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해 묘사한 첫 번째 속성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고전 13:4). 또한 그는 인내야말로 자신의 사역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여겼다(고후 6:6; 12:12 딤후 3:10).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라고 반복해서 권했다(살전 5:14; 딤후 2:24; 4:2). 심지어 디모데 후서 4장 2절에서는 단순히 참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으라고 명했다.분명 우리의 신학이 점점 더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갖출수록, 우리의 삶도 점점 더 인내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인내를 보여 주신 위대한 모델이기 때문이다(롬 2:4; 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래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 1:16).감출 수 없는 기쁨훌륭한 신학이 그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비방을 받는다면, 이는 얼마나 큰 수치겠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으로 혹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용기를 내야 한다(빌 1:6; 2:13).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울은 기도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바로 이러한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혹 우리는 아무 기쁨도 없이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온유한 태도는 둘 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을 때,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것이다(빌 3:15). 이때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바로 그 사역에 참여할 수가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Doctrines of Graciousness: Five More Points for Young Calvinists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칼빈주의
겸손
친절
공손
인내
비판
기쁨
복음을 앗아가는 두 대적
by 고상섭
2019-11-23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두 가지 오류가 발생되는데 그것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이다. 터툴리안은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복음은 두 오류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했다. 이 두 오류는 ‘종교’, ‘비종교’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도덕주의, 상대주의라고도 불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팀 켈러, ‘센터처치,’ 59).복음과 복음의 혜택이 분리되지 않는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과 그 혜택이 분리가 되면,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설교자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행할 때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율법주의’에 걸린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면서 ‘반율법주의’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온전한 그리스도’(The Whole Christ)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했다(109).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동일한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어떻게 등장하는가?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는 탕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둘째 아들인 탕자는 반율법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없이 자신 마음대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 왜 나에게는 이런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냐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아마도 율법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아들은 모두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신앙이다. 늘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또 반율법적인 삶을 살 때가 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순종을 통한 또 다른 보상을 얻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자신의 순종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율법주의는 늘 이렇게 숨어 있다가 결정적일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했는데 무언가 숫적인 부흥이 없거나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도 “내가 주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렸는데 왜 선교지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지?”라는 원망이 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율법주의의 모습이다. 이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던 노력들이 너무 힘들어지면 반율법주의로 바뀔 때가 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제약을 주실리가 없다는 잘못된 오해가 반율법주의적 삶으로 인도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오해하여 “이런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실텐데” 라는 적용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잘못된 대적들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을 엄하고 두려운 분으로 오해한다.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오해한다.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의 출발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에서 하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여 죄를 범하였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한다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금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만 하라잖아”라고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것이 있고 금지한 한 가지가 있지만 하와의 눈에는 오로지 금지 명령만 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복을 주는 ‘율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두 가지 길을 추구한다. 한 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이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복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팀 켈러는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한 가지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그것을 오해할 때 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반율법주의를 또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율법주의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아들 모두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사랑과 잔치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두 아들 모두를 초대한다. 이는 예수의 메시지(복음)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길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도 비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비도덕도 아니며, 도덕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니고,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 극단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예수의 복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팀 켈러,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56-57).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 폐기주의에 대해 처방하는 치료제와 동일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이제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 이것만이 율법주의(율법이 더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다)와 율법 폐기주의(우리가 율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율법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에게 오며, 우리 마음에 그 율법을 쓰신 성령이 그것을 지킬 힘을 주신다)의 속박을 모두 깨드리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이 치료제가 아니면 율법주의자든 반율법주의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르게 연관될 수 없다.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211).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한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다. 결국 바른 복음을 선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향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향한 자발적인 순종이 흘러나오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그저 형벌에 대한 끔찍스러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기리기 때문에, 또한 그를 주로서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원광연 역, 48).설교자들여! 복음을 먼저 누리라, 그리고 바르게 선포하라.그때 우리의 양떼들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길이 아닌 복음이라는 아름다운 길로 걸어갈 것이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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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
예수님 승천이 갖는 특별한 의미
by Eric B. Watkins
2019-11-16
짧은 분량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담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를 ‘사건 중심의 종교’라고 정의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졌고,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믿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기독교를 이루는 사건들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만약에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느니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기에 기독교인은 그 부활에 비추어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오로지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을 반영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 부활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의 마지막은 아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후, 그리스도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이 증거하듯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승천이 주는 특별한 뉘앙스는 부활하시고 또 부활 후 여러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난 이후에,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사도신경)는 것이다. 부활이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였다면, 승천은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약속한 보좌, 다윗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셨음을 의미한다(삼하 7장).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할 뿐만 아니라 영광 중에 하늘로 승천할 것을 말씀하셨다(요 20:17 등). 그의 승천은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 꼭 필요한 선행 과정이었다(눅 24:49-52). 사도행전 1장은 승천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듯이 성령 강림을 예언하고 있다. 성령님이 교회 위에 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다. 승천이라는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만,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중에 거하실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믿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마 28:20).승천에는 생각해봐야 할 실용적인 측면이 하나 더 있다. 시편 68편은 하나님을 정복하는 전사로 표현한다. 68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그러나 의로운 자는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3절). 왜 그럴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치 성을 떠나 적들과 싸울 준비를 마친 왕처럼 전쟁의 사람이 되어서 성전에서 나왔다. 68편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지 적들을 물리칠 뿐 아니라 포로가 된, 억울한 그의 백성을 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이며 과부의 재판장이다(5절). 그는 또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의 백성을 적으로부터 구하시는 분이다. 시편 68편이 보여주는 전쟁의 모습은 놀랍고 또 두려울 정도이다. 하나님의 발소리에 땅이 진동하고(8절), 하나님은 왕들을 흩으시며(12절), 그리고 마침내 승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언덕과 성소로 다시 올라가 포로들들 이끌어내며, 그가 사로잡은 자들(captives)로부터 선물을 받는다(18절).어떤 이들은 ‘사로잡은 자들’이 하나님의 적, 그러니까 강제로 붙잡힌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해당 구절이 일종의 정복당한 자들이 벌이는 죽음의 행진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로잡은 자들’에 대한 훨씬 더 타당성 있는 이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적에게 잡혔던 자들, 다름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 전쟁을 치러서라도 구하려고 했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해당 시편의 주제와 흐름과 더 자연스러워질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단지 신적 전사로만이 아니라 신적인 구원자로도 바라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해석만이 바울이 에베소서 4장에서 인용하고 주해한 시편 68편 18절과 조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시편 68편을 성취했는지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승천을 통해서도 성취했음을 말하고 있다(엡 4:8-10). 그리스도는 죄와 (가장 큰 적인) 죽음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단지 자유를 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갖 은사까지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68편 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으셨다’라는 구절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는데, 에베소서 4잘 8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맞는 걸까? 둘 다 맞다. 하나님이 구한 사람들도 하나님에게 선물을 주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선물이다. 그들은 또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필요한 은사를 받았기에, 부활하고 승천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에 주는 선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그는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재창조하신다(엡 2:10). 그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하신다(엡 4:23-24). 그래서 우리가 단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받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은사를 소유한 존재가 됨으로 이제는 선물을 주는 자로 바꾸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단지 부활 이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왕이 자신에게 합당한 보좌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왕은 그가 구원한 백성들에게 은사를 제공함으로 그의 왕국에 필요한 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바로 그 분 자신이다. 이와 관련해서 웨스트민스터 요약 교리 문답서의 질문 23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삼중 직분(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을 “이 땅에서도 또 하늘에서도”(both in his estate of humiliation and exaltation) 수행하시고 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승천해서 영광을 받는 중에도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질문 24).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신다(질문 25).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 자신 및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도록” 하신다(질문 26).부활이 기독교 역사의 가장 주요 사건이자 기독교 서사의 클라이막스라면, 승천은 영광의 보좌에 그가 앉으시면서 면류관을 쓰는 사건이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훌륭한 선물을 주시며, 그 중 가장 훌륭한 선물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 거룩한 구원자이자 우리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에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가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메이첸이 주장한 것처럼 부활과 승천이 없다면, 기독교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생활과 마찬가지로 확고부동한 닻을 지니게 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Ascension of Jes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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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내게 어떻게 적용할까?
by R. C. Sproul
2019-11-13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율법과 그것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십계명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를 읽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편을 읽으면서 율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이야말로 율법에 관한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어야 하는 곳이다. 시편에서 가장 긴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놀라운 찬양으로 가득 찬 글이다. 119편은 이합체시(역자 주: 시의 형식 중 하나로, 각 구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다른 뜻의 말이 나온다. Acrostic)이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수와 동일한 22개의 절(stanza)로 이뤄졌는데, 각각의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한 문자를 상징하고, 또 해당하는 문자로 내용이 시작된다.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 알파벳으로 치면 A에서부터 Z까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통틀어서 율법을 기뻐하고 즐긴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이다. 신약의 가르침에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고풍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히려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뻐한다. 성경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고 말하고 있다.그 결과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기독교인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현대에 만연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 시편 저자의 말을 숙고해야 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97–104).119편의 이 부분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감탄으로 시작한다(한글 성경과 달리 영어 성경에서는 ‘Oh’라는 감탄사로 97절이 시작된다-역주). “오우!”라는 말은 실로 깊고도 심오한 감정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의 감정은 다름 아닌 ‘애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기독교인을 본 적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하나님의 율법이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당연히 대답은 No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왜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더 깊은 감사와 애정을 느끼지 않는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구약 성경 속 성도들의 삶에서 기쁨의 초점이었던 그 어떤 것을 지금 와서 경멸하거나 무시하도록 만드는 게, 그리스도의 삶 자체와 그분의 사역이었다는 게 말이나 될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구약의 율법이 신약 성경 속 기독교인들과 더 이상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일 것이다. 율법은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위한 것이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표본은 모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오늘날 교회에서, “오, 예수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또는 “오, 주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와 같은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인을 만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감정에 뭐라고 응답하실까? 초기 교회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는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나도 한 때는 율법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율법은 무시합니다.”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음식이자 음료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요 4:34)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율법의 한 획, 한 획을 다 준수했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사명으로 보셨다. 그분의 동기는 율법의 항목 하나하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율법을 통해 당신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셨다.시편 119편에는 ‘율법’과 ‘말씀’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드러내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예 제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교차해서 사용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 시편 119편에서 이런 이분법은 찾을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애정을 반복적으로 찬양한다. 그럼,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 깊이 사랑했을까?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건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왕, 회장, 지도자 또는 다른 사람들이 지시를 내릴 때, 그들의 명령은 도전받지 않는다. 그들은 권위의 최종 목적지(the final court of appeals)이기에 그들의 명령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말이 바로 법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건 혹시 아닐까?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율법인가? 그분은 구약 성경에서와 같이 여전히 절대 주권자이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신약 시대 교회의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인가? 그분의 말씀은 율법이며, 그분의 율법이 그의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은 꿀보다 더 달콤하다(시 119:103).시편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축복으로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이 구절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행태, 관습,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지혜를 따르지 않는, 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풍습과 패턴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 1절에서는 어떤 특정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 즉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축복이 선포된다. 그럼 긍정적인 측면, 그러니까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오늘날 기독교인이라면 이 구절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바보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주의자 같은 사람들이나 율법을 기뻐하고 일 년에 5분 이상을 그것을 묵상하는 데 쓸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복 있는 사람은…”시편 기자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시편 기자와 그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유대 광야를 한번 상상해 보자. 불모의 황무지인 땅에서 나오는 마른 싹과 타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바싹 마른 땅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나마 살아 있는 잎사귀를 상상해 보자. 그리고 저기 멀리 수풀에 심겨져서 과실을 주렁주렁 맺은 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를 한번 그려 보자. 또는 요르단 강가의 입구에 심겨진, 뿌리가 땅속 깊숙이 들어가서 수분과 영양분을 마음껏 흡수하는 나무들을 상상해 보자. 이 나무들은 건강하고 가지마다 맺는 과실은 풍성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내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심어져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뿌리 없는 작은 나무 같지 않다. 그는 생명이 넘치는 강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현대 기독교인의 눈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면, 그 비밀은 비단 율법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지혜서와 같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같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마치 외계인 또는 우리의 삶에 불쑥 들어온 침입자처럼 느껴진다면, 그뿐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항상 넘어지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있다면, 그리고 시시때때로 사소한 산들바람에도 멀리 날아가는 겨처럼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묵상해야 할 때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Does God’s Law Apply to M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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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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