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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바울의 모순 들여다보기
by Chris Bruno
2020-02-05
성경 속 난제 중 하나는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다.- 바울: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3:28).- 야고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약 2:24).성경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놓고 한 번쯤은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종교 개혁 논쟁 중에도 일부는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과 하나님의 권위로 된 책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두 사도간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야고보서 2장 24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는다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야고보가 로마서 3장 28절 또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로 그 “믿음”을 여기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는 정말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구절을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만으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맥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이 무슨 의미인지 19절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 귀신들은 일명 쉐마(Shema)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이 말하는 바를 믿고 있다. 귀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이고 진정한 신이며, 그가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워서 떨고 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진리가 가져다줄 결과 때문에 감정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 사례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설명한다. 이 사례야말로 야고보와 바울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서로 같은 말을 하지만 단지 믿음의 측면에 관해 다른 강조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러나 이 두 저자가 고려하고 있는 아브라함 인생의 시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그 시점에 서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든,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순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 사건은 창세기 15장 시점보다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 정도였다(창 12:4). 그리고 창세기 15장은 12장의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그 이후 수년간,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기 전까지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갔을 때 이삭은 아마도 십 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37살이 되었을 때라고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삭이 제사에 필요한 나무를 지고 산 정상까지 갈 정도로 컸다는 것은 알 수 있다(굳맨Goodman, 130-131).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할 때,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야고보는 바로 이런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약 2:23).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 아브라함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상태(status)는 믿음만으로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게 야고보서 2장 21절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행위의 역할은 믿음의 역할과 다르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 즉 의로운 상태를 부여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의로운 상태는 그가 행하는 신실한 행위로 완성되어야 한다. 진정한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변화(transformation)를 가지고 온다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믿음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거기에 따른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 이상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그 약속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궁극적으로 선한 행실과 분리될 수 없다. 바울과 다른가?야고보는 소위 말하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이 바울이 로마서 3-4장과 갈라디아서 2-3장,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인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행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한다. “율법의 공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관계없이,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들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믿음으로 하는 선한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그는 거기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다.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창세기 15장으로 되돌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목한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창세기 15장에서 시작해 그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 시점 이후 그의 생애를 바라보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썼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커갈수록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견고하여졌다. 이 말은 당연히 거룩함과 선한 행실이 더 많아졌다는 것으로 들린다.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순종은 당연한 것이다(롬 6:1-14 참조). 야고보가 우리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말하는 믿음, 그러니까 의롭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율법의 공로”와 관계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했을 때, 그는 결코 야고보가 말한 그런 선한 행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말씀을 이처럼 적절한 문맥 속에서 이해할 때, 야고보는 결코 바울과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강조점을 다르게 하여 적절하게 보완하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James Really Contradict Paul?번역: 무제
신학
신약성경
야고보
바울
위롭다
믿음
순종
약속
변화
예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by Sam Allberry
2020-02-01
1966년 영국은 풋볼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장 바비 모어(Bobby Moore)는 웸블리 스타디움 연단으로 올라가 여왕으로부터 트로피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이후 그 역사적인 순간에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모어는 겁에 질렸었노라고 답했다. 여왕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모어는 경기로 인해 지저분해진 손으로 여왕과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며 미친 듯이 바지에 손을 비비며 닦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더러워졌던 경험이 있다. 물론 더러워진다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 내면도 더러움을 느낄 수 있다. 더러운 것 같은 느낌마가복음에는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한 사람이 나온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나신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는 부정한 자였다. 나병은 특히 끔찍한 병이다. 불치병이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병 환자들은, 나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야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전염병자 취급을 받았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자신에게 독성이 있고 방사능을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당신 자신이 마치 전염병 같은가?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과거에 한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맥베스(Macbeth)에서 맥베스 부인은 던컨(Duncan) 왕을 암살하라고 부추겼다. 그것이 그녀의 양심을 짓눌렀고 자면서도 손을 비비며 핏자국을 지우려 했다. 그녀는 “이 손은 정녕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는가!”라며 울부짖었다. 셰익스피어는 죄책감에 눌린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성폭력으로 인한 더러움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만 더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른 이가 행한 악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어느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그 일을 왜 입 밖에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음과 같이 밝혔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에 그 사건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공격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난 파티에 초대받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주차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이나 할 만한 여자인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봐야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뻔했어요. 가해자의 범죄를 드러내는 데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말이죠.성폭력으로 인해 이 여성은 그 가해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의 나병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율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회복시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하시면”이라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고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경험한 어려움을 예수님은 아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기피 하여 뒷걸음질 치지 않으신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그를 만지신다. 아마도 십수 년 넘게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예수님은 이 나병 환자처럼 그에게 나오는 자들의 부정함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혐오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로부터 멀리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신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예수께서 ‘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놀랍기까지 하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2).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은혜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위험한 존재이거나 전염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가 아닌 나병을 문제의 요인으로 보셨다. 아무리 더러운 흙이 묻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해도 예수님의 정결함은 훨씬 더 강력하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의 불의를 능가하는 의가 있고, 우리의 범죄를 능가하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의 죄를 넘어서는 용서가 있다. 우리의 최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선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더럽힐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뿐이다. 우리의 더러움의 농도가 아무리 진하다고 해도 그분의 거룩함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력하다. 그분이 지우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그냥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내 악함이 너무 커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자조(自嘲)적인 생각을 사람들은 겸손이라 착각한다. 사실 그것은 교만이다. ‘내가 너무도 대단한 사람이어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보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엄히 경고하시며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사장에게만 보여서 깨끗해졌음을 입증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신다. 아직은 예수께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행동하여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예수님과 그 나병 환자가 서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이전에는 나병 환자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진 곳에서만 살았다. 이제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깥 한적한 곳으로 가셔야 했다.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예수께서 어떻게 더러움을 제거하시는가?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와 당신의 더러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모든 죄, 모든 상처, 모든 깨어짐과 더러움을 그가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완전히 버림당하셨다.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말이다 (막 15:34). 그는 독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고, 나는 향기를 내게 되었다. 그가 밖으로 쫓겨났기에 내가 안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는 더러움을 ‘느끼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참소하는 자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사단은 영원히 사단이다. 하지만 죄와 더러움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피할 곳이 있다.바비 모어는 바지에 손을 계속 문질렀지만 더러운 손을 완전히 깨끗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더러운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tains That No One Sees: How Jesus Removes Our Shame번역: 이정훈
바비모어
셰익스피어
죄
상처
깨어짐
아웃사이더
인사이더
복음
예수그리스도
왜 구원의 투구라고 할까?
by Iain Duguid
2020-01-25
이 투구는 공격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것. 하지만 날은 덥고 투구는 무겁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길버트(Gilbert)와 설리반(Sullivan)의 합작 오페라인 ‘이다 공주’(Princess Ida)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가 결투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렇게 노래한다. 필자가 펜싱 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무딘 플뢰레(foil)를 쓰는 펜싱 시합이라 해도 요구되는 장비를 착용하면 정말 덥고,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노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펜싱에 동반되는 위험을 알고 있다면, 필요한 장비를 반드시 구입하려고 할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는 뭘까? 어떤 인생을 목표로 하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원한다. 인생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옷차림도 간편하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헐렁한 슬리퍼와 같은 마음가짐이다. 그들은 강력한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매 순간 깨어 있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영적 안전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저 무심히 햇살이나 즐기며 종일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할 뿐이다.구원의 투구바울이 “구원의 투구”(엡 6:17)라 부르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걸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투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의 호심경처럼, 구원의 투구도 이사야 59장 17절에서 묘사된 전사(warrior)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빌려온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자로서 모습은 이사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자기 백성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모든 대적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적인 그들의 죄, 그 죄로 인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이 투구를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완전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이 쓰는 이 투구는 구원의 확실한 소망이다.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투구를 분실해버린 듯하다. 대부분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망”하는 수준인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것은 전쟁에 나갈 때 투구 대신 햇볕만 가리는 헐렁한 모자를 쓰는 것과 같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그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결국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식의 모호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안정된 확신을 가리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있다(벧전 3:15). 반면 자신이 천국에 갈 것 같다는 모호한 느낌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어떤 전도 프로그램에서는 “만일 당신이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묻게 한다. 많은 이들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혹은 “저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 답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불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한가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결정된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선한가? 인생 후반기에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악한 일들을 볼 때, 내 개인의 노력과 공로에 의지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 자신의 선함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결단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고도 견고한 소망성경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라고 말한다. 요한은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길 바라며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생명이 있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영생은 그의 아들 안에 담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와 더불어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동시에 천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천국을 얻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면 우리에겐 언제나 불확실성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천국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국을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선하심을 받고 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악을 그분께 맡기면 분명 천국을 얻은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붙이면, 우리가 누릴 영생에 대해 전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제대로 쓴 것이고, 이제 삶의 폭풍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삶은 고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방이 고난과 유혹으로 포위당해있다. 외적인 환란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도 씨름해야 한다. 전투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갑옷으로 무장하고 삶의 환란을 대할 때, 흑암의 세력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해도 전장의 안개가 걷히면, 소망 안에,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is the Helmet of Salvation?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소망
천국
확신
그리스도인
이사야
부활을 향한 달리기
by Quina Aragon
2020-01-18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달리기를 했다. 나는 내 몸이 더 빠르게, 더 멀리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다리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폐는 공기로 가득 찬다. 눈은 자연의 예술성을 감상하며 엔돌핀은 땀에 젖은 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생각보다 느리게 달릴 수도 있겠지만 포장도로에 내딛는 내 걸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나는 자유롭다. 2011년, 나는 빠르게 뛰거나 많이 뛰면 왼쪽 무릎과 엉덩이에 고통을 느끼는 장경인대증후근(ITBS)에 걸렸다. 이 통증은 내가 앉아있거나 서 있을 때, 혹은 침대에 누워있을 때 확 올라오기도 한다. 이것 때문에 몇 달 동안 달리지 못했다. 지금은 내 스포츠 카이로프랙터의 도움을 받아 매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달리지만 말이다.나는 지금 내가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내 몸은 늙어가고 있기에 언젠가는 뛸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완전하게 확정된 것은 아니다. 나는 미래에 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더 빠르고 더 강할 것이며, 내 병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그저 부활이 주는 소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부활의 소망랜디 앨콘 (Randy Alcorn)은 그의 ‘천국’(Heaven)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영원한 집은 새로운 땅이라고 말한다. 천국이 땅에 임하여 하늘과 땅을 하나로, 그리고 같게 만들 것이다(계 21:1-4).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기도문에 응답하실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우리는 천상계에서 떠다니며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듯이 사는 영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활기찬 땅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이 기쁨의 소식은 우리가 죄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할 때 진정한 기쁨과 소망이 된다. 죄는 하나님이 “심히 좋게”(창 1:31) 만드신 모든 것, 즉 사람과 동물과 모든 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창 3:16-19; 롬 5:12; 8:20). 그로 인해 우리는 고통 받고 죽는다(창 3:16-22; 고전 15:56). 이 땅에 가시와 자연 재앙을 가져 왔다(창 3:17-18). 우리의 죄악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우리에게 그의 재판을 받게 한다(롬 3:10-20).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땅,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가 비록 손상되었더라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기 전보다 더 영광스럽게 고치고, 새롭게 하시며 회복시킬 것이다(롬 8:18-25; 엡 3:7-10).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 1:9-10; 골 1:19-20 참조)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고 계시다. 부활이자 생명이신(요 11:25)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에서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고, 우리 죗값으로 그의 삶을 내려놓으셨다(요 3:16; 고전 15:3-6; 사 53).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셨다(고전 15:20-2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의 부활”(요 5:29)이라는 귀한 약속을 받는데, 이 약속에는 “우리 몸의 속량”(롬 8:23)도 포함된다.부활의 영광죄 하나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사람들과 완전한 사랑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은 어떤가? 당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은 어떤가? 어떤 방해나 육체적인 제약 없이 심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들은 모두 부활할 때 당신이 경험할 것이다.우리의 고통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이다. 부활은 단순히 우리가 경험한 고통의 저울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현재 고통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롬 8:28 참조)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죄에 맞선 몸부림, 믿음 방해하는 박해, 관계의 문제, 건강 문제, 심지어 내 인대의 병(ITBS)까지도 모두 나의 영원한 기쁨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부활한 육신에서 내 삶을 돌아보며 “그 고통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내 상처는 이제 나의 전리품이다. 오직 주님만 찬양받으실 분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부활의 육신앨콘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당신의 몸이 약하더라도 그 몸 안에는 부활의 육신이 설계되어 있다. 당신은 현재의 육체나 정신에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부활할 때 개선되는 몸을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 몸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릴 것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과 경이로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나는 오염되지 않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새로운 땅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을 상상해본다. 티 없이 푸른 하늘과 나를 둘러싼 자연의 선명한 색들을 상상해본다. 내 발이 심장박동의 리듬에 맞춰 뛰는 것을 상상한다. 물론 내 달음박질을 방해할 나의 병도 없을 것이다. 나는 기쁨으로 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터질 것 같이 벅차오르는 내 영혼을 상상한다. 현재 이 땅에서 달리며 그 기쁨을 짧게 경험한다. 실재하는 부활의 달콤한 맛을 잠시라도 느끼게 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병(ITBS)이나 다른 질병, 또는 부상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 나는 이런 쓰라린 고통이 부활에 대한 더 큰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찬양한다.현재 상황이 어떻든지, 난 나의 새로운 몸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unning to the Resurrection번역: 허예송
복음
부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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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육신
생명
기쁨
랜디앨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by Dan Dodds
2020-01-14
중세 시대에 로마가톨릭이 점점 타락하면서 교회는 미심쩍은 교리들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와 말씀이 갖는 이중적인 권위에 대한 교리였다. 물론 교회와 말씀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로마 교회가 자신의 판단대로 우선적인 권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로마가톨릭은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최종적인 발언권을 거머쥐었다.바로 이 말씀 해석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하고자 한 주요 대상이었다. 그들의 비판은 오직 성경을 의미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할 때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로마 교회에 상반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즉 신자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이러한 정신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 루터의 답변 속에 잘 묻어나 있다.“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이 아닌, 교황이나 의회에 설득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펴 왔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올바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저의 입장을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바로 이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가 주어진다. 이 교리는 하나님 백성의 양심을 속박하려는 어떠한 사람이나 기관의 불법적인 권위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성경이 (혹은 성경에서 합법적으로 도출된 진리가) 특정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으며, 이때 그 양심은 누구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권위나 견해가 그리스도인을 억압할 수 없다.이렇게 신앙의 본질과 관련 없는 자유의 영역에 대해 신학자들은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아’와 판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디아포라’가 합성된 개념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된 아디아포라는 판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결국 성경이 아무런 도덕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선호에 따라 자유로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게 아디아포라의 적용이다.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에 중요한 논제로 취급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교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까지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그 문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칼빈이 그 답변을 제시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흔히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이 일단 함정에 걸려들면 길고 복잡한 미로에 빠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마포를 가지고 시트나 셔츠나 손수건 또는 냅킨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는 곧 대마포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에는 삼베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의심에 빠진 자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만 보이게 마련이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7절).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를 마치 보편적으로 그릇된 행위처럼 규정하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그 행위를 억제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멈춰 세울 수 없는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이런 태도가 율법주의 한 형태이다. 그와 같은 율법주의는 자유와 동떨어진 율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신자의 양심은 억압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자세그처럼 사람이 만든 율법이 교회 안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과정을 새가족반에 첨가했다. 현재 이 과정에는 스물다섯 개가 넘는 주의 사항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다른 신자의 양심을 억압하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련되었다.그런데 간혹 그런 일이 발생하듯, 우리는 이편에 있는 도랑을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다가 저편에 있는 도랑에 빠지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그 교리를 오해하며 부주의하게 다루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잘못을 예방하고자 다음과 같이 교훈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에 베드로도 동일한 원칙을 제시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로마서 14장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이 소개된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듯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가 이슈였다.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우리가 숙고해야 할 내용으로서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먼저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정도로) 믿음이 강한 형제가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범하지 못하도록 경계시킨다. 그러면서 또한 음식을 먹지 않는 자에게도 음식을 먹는 자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지 않으신 행동을 죄로 여기며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롬 14:19).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 자유를 사용하는 자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불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여러 모양새로 실천하되, 다른 지체를 판단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마 7:1; 롬 14:2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ian Liberty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루터
양심
아디아포라
자유
판단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by Albert Mohler
2020-01-11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가 쓴 ‘백치’(The Idiot)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기독교적 취지와 신학을 깊이 반영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이야기에서 다소 이상해 보이는 개념을 상정한다. 곧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개념이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한데, 기독교의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이에 대해 두 가지 성경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7편이다. 먼저 이사야 53장은 메시아를 묘사하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한다(사 53:2). 그런데 이 말은 시편 27편이 주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르게 들린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이 두 구절을 병행시켜 묵상할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단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는 사람들이 지켜볼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분으로 그려진다. 그분은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메시아의 대속 사역과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죄에 대한 심판을 예견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이란 메시아의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어떻게 보면 성경은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움으로 마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창 1:4, 10, 12, 18, 21, 25). 심지어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도 말한다(창 1:31). 그런데 이 좋다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보다 의미가 깊다. 히브리어에서 그 표현은 아름답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는데 심히 아름다웠다는 내용을 전달한다.이렇게 시작하는 성경은 어떻게 마칠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2-27).이와 같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과(22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은 아름다움의 회복을 증언한다.결국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미술 전시회 또는 그랜드 캐니언에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어떤 개념일까? 또한 구속 사건에서 그 아름다움은 어떻게 드러날까?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아름다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봐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트의 계산대에 진열된 온갖 잡지들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잡지들이 인위적으로 그려 내는 모델의 외관은 세상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혹 그들의 이미지가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그런 이미지는 성경이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기독교 세계관은 진실로 선한 아름다움이란 스스로 계실 뿐 아니라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그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적인 가치인 진(the true), 선(the good), 미(the beautiful)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편 27편 기자가 말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에는 그분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분리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가 진실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선하고 아름답다고 가르쳐 준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선하다면, 그 대상은 또한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가르쳐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진열대의 잡지들이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이미지를 그려 낼지라도, 그런 이미지는 진실로 선한 모습을 전달하지 못하기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독교 세계관은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얼굴이 전문 모델의 조작된 이미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피를 쏟아내는 그 끔찍한 광경은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십자가는 분명 아름답다. 예수님이 거기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거기서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진실하고 선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에 참으로 아름답다.그러니 도스토옙스키가 옳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그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선재하는 아름다움우리는 더 나아가 인간 내면에 있는 아름다움의 선재성(the priority of beauty)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진리에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세속주의자도 해가 지는 광경에 놀라곤 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대상에 사로잡힌다는 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드러내는 문제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단지 감성의 작용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의 객관적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갈망 역시도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우리의 상태를 드러낸다고 고백했다.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우리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은 아름답기에 진실하다. 또한 그 희생은 진실하기에 선하다. 결국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기에 좋지 않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아름답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ll Beauty Save the World?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세상
구원
이사야
창세기
선재성
어거스틴
인식
진실함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진 교회
by Derek Thomas
2020-01-08
이 땅에서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예수님은 과연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어떤 구조와 조직을 갖춘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주어지게 된다. 우선 오순절 사건 직후에 탄생한 교회는 그 조직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그 교회는 사도들이 감독하는 하나의 모임으로서 네 가지 사역에 헌신했을 뿐이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 간의 교제, 성찬, 그리고 기도에 집중했다(행 2:42).그러다가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특별한 구성을 갖추지 않은 가정 모임에서부터 조직화된 회중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집사와 장로라는 뚜렷한 직분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해 연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쟁점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직분과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직분을 어떻게 서로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이러한 직분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또 하나의 논점은,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항구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와 같은 은사중지론자는 신약에서 언급되는 일부 은사가 “사도의 표”(고후 12:12)로 주어졌다고 믿는다. 즉 구속 역사의 목적상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약성경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에만 주어졌다고 믿는다. 당시 초기 단계에 있던 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데는 그처럼 예외적인 은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약의 정경이 완성되고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사도라고 일컬어진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집사와 장로 혹은 (해석자가 따로 구분할 경우에는) 목사와 같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직분만 존재하는 규범적인 상황이 교회 안에 확립되었다.교회의 조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와 같은 후기 서신들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서신들은 더 이상 특별한 직분이나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집사와 장로 그리고 디모데가 수행했던 복음 전파자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는 어떤 직분이나 은사가 교회의 유년기에만 허락되었고 성숙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집사의 직분집사라는 직분은 교회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을 수용하며 성장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문제의 정황은 이렇다. 당시 1세기 문화에서 과부는 취약 계층에 속했는데, 교회는 공동체 의식에 따라 그처럼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평등하게 음식이 배분되어 실망하는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행 6:1-7). 이를테면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과부들을 교회가 편애하여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이 음식을 받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익숙하게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사도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곱 사람을 선택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런 해결책을 실행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하였다(행 6:4).물론 그런 편파적인 행동의 책임이 사도들에게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음식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행 6:2). 교회를 키우고 양육하는 데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차원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되어 따로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다(행 6:3).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교회에서 세움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임명을 받게 되었다(행 6:6). 이처럼 안수식과 임명식이 있었던 사실은 그들에게 분명히 구별된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이 일곱 사람은 정말로 집사로 세워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의 직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네오’라는 용어는 (‘집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디콘’(deacon)과 근접한 관계성을 지닌다. 그리고 일곱 사람이 집사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그들은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일곱 사람을 집사의 원형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직분은 교회가 말씀 사역과 좀 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사역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결국 집사라는 직분은 성도의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가령 재물과 음식을 나누거나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섬기는 리더십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일정한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은 언제나 섬기는 리더십을 전제로 한 직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집사와 장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더욱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 가운데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건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집사에게 요구되는 영적 자질을 나열할 때,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제시했다. 집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제외한다면, 그 신앙의 덕성과 영성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야 했다(딤전 3:8-12).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6장의 구제 사역은, 집사에게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샘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집사는 구제뿐 아니라 교회의 재물과 소유 전반에 관련된 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이후에 바울은 집사의 사역 범위 안에 특별히 과부에 대한 섬김을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킨다(딤전 5:3-16). 그리고 일반적인 과부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과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교훈을 제시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과부를 섬기는 일에 교회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는 교회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관행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자원을 바르게 사용하는 분별력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지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영적 은사를 갖춰야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문제를 처리할 때 정확한 사리 분별을 해야 한다.여성 집사에 관하여그렇다면 모든 집사는 남자여야 할까? 신약성경에는 여성 장로와 관련해서는 참고할 만한 본문이 없기 때문에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여성 집사의 경우는 다소 애매한 언급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매 뵈뵈”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추천하는데, 이때 그녀에 대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언급한다(1절).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안수식이 요구되는 직분은 아니어도 집사의 사역에 참여하는 직무를 의미할 수 있는 단어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설명하는 가운데(8-13절), 여자들에 대한 조건을 첨가한다(11절).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동일한 장에서 장로에 관해 설명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1-7절).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서 “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스’는 여성 집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로 읽을 경우에만 본문의 흐름이 산출하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내가 속한 개혁교단은 이러한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라 여성 집사를 인정하며 그 직분을 공식적으로 제정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입장이 여성 장로에 대한 논쟁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장로의 직분이 글에서는 (오늘날 장로교단에서 ‘가르치는 장로’라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목사’가 (‘다스리는 장로’에 해당하는) ‘장로’와 분리된 직분인지에 관해서는 다룰 수가 없다. 그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분량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규범적인 직분으로서 ‘장로’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이 직분을 언급할 때 신약성경은 세 가지 타이틀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한다. 그 세 타이틀은 ‘감독’(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뷔테로스), ‘목자’(포이멘)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17절과 28절에서 그 세 가지 개념은 모두 동일한 사람들에게 사용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분량으로 논의되며 쟁점이 되어 온 주장, 즉 각각의 타이틀이 독립된 직분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일축하기에 충분하다.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장로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지녀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열거한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장로 또한 특정한 덕목을 갖추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리더십이다. 성품의 결함은 그 어떤 재능으로도 메꿀 수 없기 때문이다.집사와 달리 장로가 갖춰야 할 특징이 있다면, 바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2). 물론 모든 장로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딤전 5:17). 이는 일반 장로와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집사 또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딤전 3:9), 그중에서도 가령 나이든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쳐야 하고(딛 2:4), 나아가 전체 회중 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골 3:16). 그리고 모든 신자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벧전 3:15).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능력만으로는 장로의 직분을 얻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능력이 장로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또한 권한에 있어서도 집사와 장로 간에는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집사의 권한은 그 집사가 속한 지역 교회에 제한되지만, 장로의 권한은 그와 같은 지역 교회를 넘어서 행사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서 신약교회 전체에 구속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행 15:6-21).이와 같이 신약교회의 리더십은 집사와 장로라는 두 가지 직분을 통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교회 안에 그 두 직분을 공고히 세워야 한다. 잘 훈련받은, 경건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전 14:40).출처: www.ligonier.org원제: Leaders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여성집사
직분
디아코네오
디콘
집사
장로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
by Stephen M. Coleman
2020-01-04
시편 110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성경의 본문이다. 다윗 왕이 저술한 시편 110편은 미래에 오실 메시아, 왕의 승천과 통치를 예언하고 있다. 다윗은 이 왕이 주의 권능을 가지고 오시며(2절),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다(5절). 그는 뭇 나라를 심판하며(6절), 하나님의 원수들을 내치시고(1, 6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신다(3절). 특히 눈에 띄는 구절로, 다윗은 이 왕을 “나의 주”라고 부르며, 왕의 혈통을 가진 그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이 놀라운 예언의 한 중심에 구약성경의 가장 모호한 인물 중의 하나가 나온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절)라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북부 연합의 네 왕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해낸 후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알려진 그를 만났다(창 14:18-20). 다윗은 이 신비한 인물에게서 위대한 왕이며, 그의 백성들의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인격과 사역을 발견한다.왕권을 가진 제사장고대의 왕은 보통 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성스러운 영역도 다스렸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제사장적 왕이 가능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왕권을 유다 지파에게(창 49:9-10), 특히 다윗의 자손에게만 허락하셨다(삼하 7:12-16). 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에게만, 특히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맡기셨다(민 17장).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실 왕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떤 근거로 이스라엘의 왕이 제사장으로서도 섬길 수 있을까? 사울 왕의 제사장적 특권 행사는 결국 거부되지 않았는가(삼상 13:13-14)? 다윗이 멜기세덱에게서 발견한 것은 여느 제사장직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장직에 대한 소망이다. 유사한 논리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노략물 중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그에게 축복을 받은 점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사람임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히 7:4-10).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면, 그는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아들인 레위보다 높은 자이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의의 왕”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의 제사장직은 왕권을 가진 것으로 더 나은 제사장직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예시하는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며 왕이었다.예수님이 왕권과 제사장직을 함께 행사하신다는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격려가 된다. 예수님이 왕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며 바르게 살아야만 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 의로운 왕이 또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아버지 앞에서 중재자로 서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기”(히 4:15) 때문에,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16절). 우리는 궁극적인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며,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영원한 제사장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제사장직이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보다 우위에 있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말한다(시 110:4). 합법성을 얻기 위해 족보가 본질이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는 대조되게, 멜기세덱의 족보는 창세기나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출생이나 죽음, 그의 혈통 또는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히브리서 저자가 통찰적으로 말하듯이,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의 등장은 그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영원성을 보여준다(히 7:3).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이 감당해야 하는 책무 중의 하나는 제사장으로 섬길 때 불행하게 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희생이 끊임없이 필요했던 것처럼, 새로운 제사장도 끊임없이 필요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다르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스스로 완벽한 마지막 희생을 했더라도, 죽음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16절).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영원히 서 계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은 매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원천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고 그분이 우리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님을 상기시킨다. 불순종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히 13:5).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죄인을 구원하신 그분을 믿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완전한 중재자가 있다. 시편 110편은 영원한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며 축하하고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Eternal Priest번역: 정은심
멜기세댁
레위지파
대제사장
중재자
시편110편
영원성
승천
우월성
복음
예수그리스도
악의 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by R. C. Sproul
2019-12-28
악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고전적인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져 왔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철학자는 주장하기를, 악의 존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않거나, 또는 선하시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서 벗어난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하나님이 악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성품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악의 문제가 함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교회는 소위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변증 작업을 시도해 왔다. ‘신정론’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헬라어 단어가 합성된 개념이다. 즉 하나님을 의미하는 ‘데오스’(theos)와 정의를 의미하는 ‘디카이오스’(dikaios)가 조합되었다. 결국 신정론은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이를테면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신정론은 악을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직접적인 결과라고 이해하는 단순한 설명에서부터 라이프니츠(Leibniz)가 철학적인 접근으로 제시한 더욱 복잡한 논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중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은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에서 풍자적으로 다뤄지기도 했는데, 라이프니츠는 거기서 세 가지 유형으로 악을 구분했다. 바로 자연적 악, 형이상학적 악, 그리고 도덕적 악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3중 도식에서 특별히 도덕적 악에 대해서는 유한성(finitude)의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즉 완전한 존재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론적 결여가 불가피하게 그와 같은 악을 발생시킨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은 무한한 존재에 이를 수 없는 부족함을 지니기에, 그 부족함이 우리가 목격하는 도덕적 악과 같은 결함을 낳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신정론은 성경이 규정하는 악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만일 피조물이 그 존재상 필수불가결하게 지닐 수밖에 없는 조건이 악이라면,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부터 악을 내포한 상태에 처하고 만다. 심지어는 천국에서 영화된 후에도 피조물로서 악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나는 개인적으로, 신학자들이 “불법의 비밀”(the mystery of iniquity)이라고 부르는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는 경우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역주: 원래 “불법의 비밀”이라는 표현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에서 사용되었으며, 이 어구가 KJV 영어성경에서 “the mystery of iniquity”라고 번역되어 전통적인 표현으로 굳어졌다. 여기서는 악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언급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설명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설명하는 일에 얼마나 큰 부담이 따르는지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는 악의 기원을 설명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한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악을 선택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고자 하는 경향이 의지에 있는 한, 이미 죄악이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악의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접근이라면, 어거스틴(Augustine)이 처음으로 개진하고 나중에 아퀴나스(Aquinas)가 발전시킨 신정론을 들 수 있다. 이 신정론을 통해 그들은 악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했다. 악은 그 자체로 어떤 대상이나 실체 혹은 존재로 규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대신에 악은 하나의 행위, 즉 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행위로 규정된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악을 선의 부정(negatio) 또는 결핍(privatio)으로 정의해 왔다. 그리고 악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악은 선에 기생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은 정의상 선에 의존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비록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는 그 어려움이 배나 되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면 선의 존재부터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고는 선에 대한 궁극적 기준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악과 선을 둘 다 부정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을 취해 왔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한 행동으로 실제적인 고통을 가한다면,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자신이 악한 행동의 피해자가 되어보기 전에는 악의 존재를 부인하기가 쉬운 법이다.결국 우리가 악의 기원에 대한 완전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선하심 속에서만 악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즉 악을 행하지도 만들지도 않으시지만, 악이 존재하도록 주관하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당연히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막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용하셨다. 그렇다면 악의 존재는 그분의 주권적 결정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그 주권적 결정은 그분의 완전한 성품을 따른 일이었기에, 우리는 악의 존재를 허용하신 그분의 결정이 선한 결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여기서 우리는 악을 선하다거나 선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신 결정이 선하다”라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악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신 결정은 선하며 그 결정에서 벗어난 다른 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정론 조차도 ‘어떻게’ 악이 피조 세계에 유입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접근은 오직 ‘왜’ 악이 존재하는가만 설명할 뿐이다. 우리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 행동 가운데 악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악의 세력이 현저하게 드러나 이 세상에 큰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악을 다스리시며 마지막까지 악이 득세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악은 언제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 가운데 악을 최종적으로 정복하시며 우주에서 그 악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셨다. 바로 이 구속 계획에서 우리는 안식과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계획이 이뤄지기까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갈 뿐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ystery of Iniquity번역: 장성우
기독교인
악
신정론
실낙원
라이프니츠
복음
변증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자!
by Dave Harvey
2019-12-25
그날은 1984년 1월 22일이었다. 수퍼볼XVIII를 시청했을 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3쿼터가 진행되는 중에 애플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의 출시를 홍보하는 블록버스터 광고를 방영했다. 80년대 초반을 기억할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다면, 지금 유튜브를 통해 그 광고를 확인해도 된다. “1984”라는 제목의 이 광고에는 큰 화면 속 영상을 보고 있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 큰 화면에서 빅 브라더, 즉 독재자는 검열의 미덕을 찬양하고 있는데, 갑자기 금발의 여자가 나타나 앞을 향해 도전적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망치를 화면을 향해서 던지자 독재자의 연설을 보여주고 있던 큰 화면은 산산조각이 난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는 모두가 다 획일화된 기술로 정체되어 있는 세상에서 개인을 해방시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부터 해방시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티브 잡스의 팬이든 아니든 그를 칭찬해야 한다. 그는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애플에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고 있다면, 잡스는 그 일을 특별하게 알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애플 제품 출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소비자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했다.하나님의 출시 이벤트나는 최근 이사야 9장 6-7절을 읽으면서 이 일을 생각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커다란 뉴스일 것이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것은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과의 친숙함은 우리로 하여금 얼음에 구멍을 뚫어 흐르는 물 아래를 보게 하는 대신 표면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잠시만 이 얼음 아래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구절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이 구절 속 좋은 소식은 출생 발표이다. 한 어머니에게 한 아기가 주어졌고, 그 아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신성을 가질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는데,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린다. 아들은 또한 독특한 권세, 즉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평화가 증진되고 영원히 확장되는 그런 독특한 권세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뉴스는 가장 위대한 뉴스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영원한 평화의 권세를 만든다는 뉴스 말이다.이런 뉴스는 단순한 위대함을 뛰어넘는다. 이런 뉴스는 애플이 발표하는 신제품 광고를 하찮게 만든다. 자, 그럼 하나님은 이런 아들이 세상에 오는 순간을 위해 어떤 종류의 놀라운 프로모션 행사를 준비했을까?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청중과 무대는 단지 몇 명의 목자와 양이 있는 들판이었다. 누가복음 2장 9-11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라면 이런 사실에 당황했겠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셨다.평범함 속의 비범함자정 이후 들판에서 한 무리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런 당황스러운 탄생 스토리를 지켜보았다. 파파라치들이 놓친 이 특별한 소식은 평범한 목자들을 통해서 그 반향이 울려 퍼졌다. 그렇기에 이 소식은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이 좋은 소식을 힘 있고 고귀한 사람들과 IT 전문가와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듣도록 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과 교육받은 엘리트는 이 소식에서 제외되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뉴스는 궁전 발코니에서 발표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호위하는 측근에게 둘러싸여 도착하지도 않았다. 천으로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약한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복음은 평범하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세주를 보내셨고, 그것을 믿은 겸손한 이들만이 복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나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온 세상의 왕이고,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는 상황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종종 회심한 사람들의 화려하고 강력한 간증을 들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간증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러 오실 때 분명히 충격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의 회심에 화려한 불꽃놀이는 없었다. 적과의 치열한 세력 다툼도 없었다.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것도 없었다. 내가 회심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날짜와 시간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화려한 불꽃, 기억에 남는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회심 과정은 훨씬 더 초라했다. 회심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기적이지만 때로는 화력이 뛰어난 대규모의 군대보다 잘 훈련된 소규모의 저항군에 더 가깝다.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의 욕망을 새롭게 혁신시켰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나를 예수님에게 끌리게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회심의 역사하심은 내게 하나님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여기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1. 표면 아래를 보기내 인생 대부분 크리스마스는 큰 행사였다. 집에 장식을 하고 교회에 가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었다. 산타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행동도 제대로 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평범’이라는 주파수에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그 위대한 거룩함이 겉으로만 번쩍이는 화려함에 묻히게 된다. 진짜 아름다움, 진짜 의미,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주는 초월성은 외면의 화려함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 때 사라지게 된다. 성경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문화적인 요란함과 마케팅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를 보도록 만든다. 크리스마스 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가장 평범한 광경 속에 감추었다. 그는 그 선물을 거룩한 단순함으로 포장했다. 선물을 열기 전에 말씀을 읽는 것, 선물이 열린 후에 감사를 표하는 전통, 식사 전에 하는 감사의 기도, 아이들과 베들레헴 드라마를 나누는 것, 나이든 손님에게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나누는 것, 친척과 함께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예수님이 들어간 그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 등이다. 이런 단순한 행동들 속에 어떤 번뜩이는 천재성은 없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바로 이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이제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영원히 중요한 사건으로 만드는 진정한 보물인 예수님이 구유 안과 밖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2. 크리스마스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하라당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또 좋지 않은 크리스마스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산타가 아이 (또는 마음이 아이인 사람)에게 선물 대신 양말에 석탄을 넣어두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우리가 받을 선물과 관련된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동조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구세주는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이 세상에 도착함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오셨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성장하신 후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심판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았음도 상기시켜 준다. 크리스마스 희망 목록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이다.3. 크리스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기회로 활용하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성탄절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모두 비웠다는 사실이 차지하고 있다. 바로 종이 된 예수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참된 능력을 볼 수 있다.크리스마스에 소파에 누워서, 풋볼을 보면서 프레즐을 먹으며 나무 늘보처럼 퍼져있는 것은 재미있다. 내게는 TV 리모컨을 완벽하게 제어할 자격도 있다. 그러나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서게 되면 완전히 다른 크리스마스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두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하나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이 수고하도록 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 이기심을 역행하는 방식이다. 구세주는 아기로 이 땅에 온 왕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또한 아기에 불과한 우리가 그를 닮아 이 세상에 역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이 세상에 역행하는 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다. 놀랍고도 또 대담한J. I. 패커(J. I. Packer)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 놀라게 된다.” 그런데 생각할 점이 있다. 애플처럼 엄청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기 때문에 놀라는 게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또 해냈어!”라고 외치면서 놀라는 게 아니다. 놀라운 이유는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가장 예상치 못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녀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아기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함으로 영원까지 변화시키도록 했다. 단지 “놀랍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위대함이 가진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이렇게 외치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냅시다!”원제: Have Yourself a Subversive Little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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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그리스도
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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