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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문제,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하는가
by Samuel Emadi
2020-03-18
상대방이 지구의 연대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이 얼마나 긴지를 따져 보기 시작하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의혹의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의 견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 그러한 견해 차이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여겨질 때면 더욱 그렇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만, 유독 창조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과 곧잘 싸울 태세를 갖춘다.지나온 상황을 한번 돌아보면,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오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서로의 도전에 직면할 때 느끼는 불편이나 의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신학계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현대주의자(modernist)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지난 역사가 한몫을 해서인지,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실제 기간 따위를 따지는 문제는 소위 대속의 범위라든가 은사지속론 대 은사중지론에 관한 논쟁보다도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창조 문제가 언급되면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가 경박스럽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이끌려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의 논의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진화론에 대한 우려만 느낀 나머지 지성적으로 천박한 근본주의 신학의 족쇄를 차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결국 창조 교리를 대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할 신학적인 주제를 올바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주제가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복음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은 1차적인 주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예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2차적인 주제는 교단이나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띠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를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아니면 언약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등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달리 3차적인 주제는 복음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훨씬 덜 영향을 미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는 차등적인 접근이 모든 교리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가 지닌 신학적인 확신이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덜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1차적인 주제가 신학 자체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문제에 해당한다면, 2차 혹은 3차적인 주제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불일치를 감수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일부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하면 복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천년왕국설에서 당신이 선호하는 견해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믿고 있는 신학 체계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양보하면 될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여기서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기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 그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한다). 지금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 교리에 있어 1차적인 주제를 2, 3차적인 주제와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가르칠 때 창조 교리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어떤 지점에 있어 서로가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이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입장 차이를 서로 어떤 자세로 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고 있는 신학적인 차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매우 잘 보여 주게 되었다. 원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전천년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등이 1차적인 주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요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천년왕국이라든가 휴거 또는 적그리스도와 같이 부차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1차적인 주제를 설정하라창조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를 구분하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역사적인 선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이라는 작품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일관성과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창조와 관련된 일곱 가지 포인트를 1차적인 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각 포인트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와도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이러한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창조 기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1.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2.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신다.3.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6.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다.7.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실제로 불순종했던 역사적 인물이다.성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를 창조 기사뿐 아니라 여러 본문을 통하여 증언한다(롬 4:17; 고전 1:28; 고후 4:6; 히 11:3). 이 두 가지 포인트는 하나님이 스스로 영존하신다는 자존성의 진리를 대변한다. 세 번째 포인트는 독자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해석에 대해 어떤 접근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문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전제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발흥하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네 번째 포인트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통해 확증된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신학이 바른 궤도를 따라 돌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포인트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창세기 1장의 연대는 복음주의자들 간에 혹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은 논의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 또 배우자를 허락하시며 가정을 세우셨으나 이내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재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반드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다섯 번째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론의 신학적 토대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류가 한 시조를 공유한다는 여섯 번째 포인트를 포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행 17:26). 마지막으로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일곱 번째 포인트를 부정하게 되면, 원죄 교리 역시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을 위시한 핵심적인 성경신학도 세울 수 없게 된다(롬 5:12-21).서로를 받아주며 논쟁하라이와 같은 1차적인 주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대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 물론 서로가 성경의 무오성을 힘있게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창세기 1장이 내포하는 물리적 시간이라든가 지구의 나이 또는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이나 포식 관계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1차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기보다 그에 관하여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창조에 관한 대화 자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에 관해 아예 토론하지 않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자신의 견해를 엄격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얼마간의 잉크를 거기에 쏟아붓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창조 교리에서 1차, 2차, 3차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ological Triage and the Doctrine of Creation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창조
복음주의자
역사성
근본주의자
프란시스쉐퍼
창세기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반응을 요구한다
by Jonathan Parnell
2020-03-1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 사건이다.만일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생애가 끝났다면, 우리는 그 희생이 정말로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알지 못하여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선한 목적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고 한들,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속에 계신다면, 그 죽음이 기약한 모든 내용은 사실상 희망 고문을 안겨다 줄 뿐이다.그러나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불멸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으로 무엇인가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그 죽음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부활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도 부활이 남긴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이 도대체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이 복음의 메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복음이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 준다.단지 독서용이 아닌 이야기기독교의 복음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지 독서용으로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본질상 그 이야기는, 그냥 담담하게 내용을 관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 반응하는 자세를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가는 반응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살아 내는 반응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와 같은 반응을 요구한다.만일 부활이 일반 전설과 같이 하나의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도 필요 없이 그 이야기를 평가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흥밋거리로 읽고 머리로만 내용을 이해한 후에 원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바뀔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실제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그렇다. 정말로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남들의 대화나 엿듣는 자세로 그 사건을 방관하며 지나가는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실제로 등장하는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저들과 똑같이 타락하여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영광을 쫓고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고로 이야기를 읽다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 ‘관해’ 말해 왔던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고.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그분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언제나 그 이야기의 정점에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린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든 혹은 애써 무시하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그 사건에 대해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으려는 자세 또한 일종의 코멘트다.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영향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과 이어지는 토요일까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일 수밖에 없던 그들의 두려움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한 저자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이어 또 다른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불린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그 책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활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최초에는 부활을 목격한 증인만이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었다(행 1:22).누가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를 살펴보면, 동요하는 군중을 향해 시종일관 부활에 초점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그러고 나서 부활과 뗄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한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신분이 공적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성령을 보내어 그 부활 소식이 더 강력히 들리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행 2:32-35). 그리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면서 설교를 마무리한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에 대해 누군가가 단언했듯, “하나님이 그분을 주님이자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바로 오래전부터 약속된 메시아이며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가 어찌할꼬이 설교를 들은 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베드로가 마지막 말을 전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청중은 “마음에 찔려” 당혹스러워했다(행 2:37).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긴 표현이다. 우리 식으로 옮기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의미이다.이에 그들의 영혼은 진동하고, 인생의 위기감이 찾아들었으며, 그저 세상에서나 잘살아보려 애써 온 자들의 마음속에 그 모든 사실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을 자아냈다. 진짜 현실이 그들 앞에 드러난 것이다. 베일에 가려 있던 현실이 원색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졌다.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이제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도 무언가 달라져야 했다.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언급된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사도들은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분개하든(행 4:2),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든(행 17:32), 부활의 소식을 계속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부활의 현실은 모든 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말이다.당신에게 선포되는 복음우리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한 설교를 통해서도 부활을 선포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안디옥은 오늘날로 치면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1세기의 대도시다. 그 도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 이야기의 요점을 되짚어 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메시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 사건을 해석한 후, 그 사건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선포된 메시지가 청중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볼 수 있다. 곧 바울의 설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소식을 듣는 자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부활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나 교훈이 아니다.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사색거리도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진짜 뉴스가 여기에 있다. 그분이 살아 계신다.이처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죄 사함의 소식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듣는 자는 단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부활은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에 무응답으로 일관할 수 있는 중간 지대란 없다.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그 소식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그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 결과 이 순간에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따르라.”저 복음의 사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면, 이 같은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Resurrection Demands Respons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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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이해 못하는 십자가 의미
by Matt Bennett
2020-03-07
지난 1,400년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화 주제는 “예수가 정말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었다. 코란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반면(수라 알-니사 [4]:157),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을 복음과 직접 연결한다(고전 15:3-5).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이야기한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중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었을 때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라는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구약의 레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구약의 제물에 관한 제도를 알지 못하면, 무슬림 친구들은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부분에서 오해하게 될지도 모른다.1. 속죄의 의미첫 번째 오해는 언어에서 온다. 코란은 “카파라”(Kaffāra)라는 단어를 사용해 죄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이 단어는 아랍 성경에도 “속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키퍼”(유대교의 대속죄일, 욤 키푸르가 여기서 나옴)를 번역했다. 성경에서 속죄가 포함하는 것은 대표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대체 제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생명을 상징하는 피이다. 속죄의 결과는 죄에 대한 용서와 불결함의 정화이다.코란에서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 속죄의 대리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함, 선행, 혹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뉘우침을 보고 죄를 덮거나 없앤다. 이슬람에는 용서를 받거나 정결해지기 위한 제사장,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없다. “카파라”라는 단어는 이슬람의 코란과 기독교의 성경 모두에 쓰였지만, 그 뜻은 매우 다르다.2. 제사의 목적코란에도 제사가 등장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무슬림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한 것(수라 알-사파 [37]:99-111)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기 위한 하나의 행사로 생각하지만, 코란은 이 제사를 각 신앙의 공동체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린 의식으로 보고 있다(수라 알-하지 [22]:34-67). 그렇다면 이슬람에게 있어 매년의 희생 의식은 유대교와 기독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과도 같다. 이 주장은 코란의 한 부분(수라 알-임란 [3]:67)에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닌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희생 제사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이슬람 전통에 속하는 무슬림으로 확인하고, 이슬람교 신앙을 종교의 최종적인 은혜 베풂으로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3.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속죄와 제사가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무슬림에게 설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려움의 가장 큰 이유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속죄와 제사가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코란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인지, 그의 지도를 따를 것인지, 그의 방식을 기억할 것인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삶을 제시한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초연하고 냉담하다. 코란은 자신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악행의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그들이 한 행동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것이다. 무슬림에게는 1세기의 어느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속죄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세 가지 장벽은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의 속죄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세 가지 문제, 즉 속죄와 희생, 그리고 양쪽 모두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다.하나님은 한 민족을 부르시고 이끄시며, 그 사이에서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 레위기(특히 16-17장)는 거룩하고, 정결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 많고 불순하며 의롭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만든 계명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레위기의 가르침에 익숙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레위기의 대제사장, 그리고 그 이전의 제사와 다른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여긴다.이 세 가지에 비추어 볼 때, 히브리서는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장직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히브리서는 성육신 훨씬 이전부터 그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슬림 친구를 초대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의미와 용서, 그리고 정화를 담은 제사의 목적을 보여줄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신학적인 부분에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속죄를 정의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성경적 제사가 올바르게 자리 잡기를 기도한다. 성령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면서 말이다. 그 구원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감사와 기쁨을 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Help Muslims Understand the Cross번역: 허예송
속죄
희생
무슬림
이슬람
히브리서
코란
카파라
복음
십자가
로마서 8장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by Justin Dillehay
2020-03-04
강대상에 서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십니다. 단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한 번씩 웃음을 삼키곤 한다. “만약에 스물두 살이던 내가 지금 앞에 앉아서 현재의 내가 전하는 이 메시지를 들으면 뭐라고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과거에 나는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자유의지 침례교(Free Will Baptist)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알미니안으로 자랐다. 십 대 때 리로이 폴라인(F. Leroy Forlines), 매튜 핀슨(J. Matthew Pinson)의 신학뿐 아니라, 좀 더 오래된 제임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와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신학에 심취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구원에 있어서 은혜는 꼭 필요하지만, 그 은혜가 반드시 불가항력적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버릴 수도 있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다.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함, 미리 결정되지 않은 자유함이 필요하다. 폴라인을 인용하자면 “영향을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관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방식이었지, 결코 칼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원인과 효과(effect)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이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우리의 인간 됨(personhood)을 존중한다. 하나님은 이 방식을 고수한다. 그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과 원인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차이는 바로 다음 한 단어, 보장(guarantee)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폴라인은 그의 책 ‘진리를 위한 추구’(The Quest for Truth)에서 이렇게 설명했다.칼빈주의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상당 부분 영향과 반응이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과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라도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원인과 효과를 다루는 것이다. 그 보장이 사라지면 칼빈주의도 사라진다.그의 말은 맞다. 그때는 그에게 동의했다. 지금도 그에게 동의한다. 단지 나는 편을 바꿨을 뿐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짧게 말하면,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거꾸로 되짚어 보았다. 열정적인 설교자, 문제의 구절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는 종종 “구원의 황금사슬”이라고 묘사된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예지, 예정, 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라는 다섯 가지 “고리” 때문이다. 알미니안으로서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문제가 많은 구절로 보았다. 특히 29절은 예지 된 믿음에 근거한 선택(election-based-on-foreseen-faith)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주석가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 해석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절은 그냥 문제가 많은 예외적인 구절로 치부했다. 사실 그 어떤 신학 이론도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거 아니던가? 그러다가 나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로마서 설교를 듣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2004년,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때까지 어디서도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파이퍼의 흠잡을 데 없는 주해는 그동안 그 구절에 대한 내 해석의 약점을 알게 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설교 때문에 확실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설교로 인해서 최소한 내가 갖고 있던 자신감은 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나는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바울의 황금 사슬은 상당 부분 보장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슬은 떨어질 수 없는가?한번 29절에서 30절까지 펼쳐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 위에서 아래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라. 그리고 이탤릭으로 된 단어와 그 단어 위에 있는 알파벳에 주의를 기울이라)"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A)을….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B)…. 또 미리 정하신(B)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C) 부르신(C)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D)의롭다 하신(D)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E) 하셨느니라"알미니안으로서 조셉 벤슨(Joseph Benson)과 같은 성경주석가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동의했다. “사도는 지금 부름을 받아 의롭게 되고, 그래서 영화롭게 된 사람의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연구하면 할수록, 바울은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는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슬을 하나씩 살펴보자. (정확하게 하려고 나는 다섯 가지에 각각 알파벳을 붙였다.)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행한 어떤 특정한 그룹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에게 추가로 한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또한….미리 정하셨으니”). 각각의 연결에 등장하는 “또한”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이 바로 그가 미리 정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B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각각의 사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이제 각각의 구절 사이에 중복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두 번째로 사용된 동사가 다음 구절에서는 첫 번째 동사로 사용된다. 바로 이런 동사의 쓰임이 이 다섯 구절을 하나의 사슬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결국 벤슨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분명하게 똑같은 숫자의 사람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을 하나님은 예정하고 예지하며, 또 부르시고 의롭게 만들어 영화롭게 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 = B = C = D = E.알미니안으로서 나는 이 다섯 가지 단계는 단지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신앙 여정 정도로 이해했다. A그룹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E 그룹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고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과녁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 있는 만점짜리 동그라미(bullseye)를 향해 갈수록 동그라미가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를 자세히 연구할수록 이런 내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부름을 받은 모두가 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결국 그 부르심은 믿음을 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화보다 앞서기 때문이다(롬 5:1). 의롭다 함을 받은 모두가 다 영광스럽게 된다면 의롭다 함은 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외롭다고 하신 그 선언을 번복하지 않으신다.이런 사실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로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파이퍼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파이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를 알게 했다.황금 고리의 보장바울은 왜 이 고리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28절에 나온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여기서 바울은 단지 어떤 사실 주장(factual claim)을 하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는 지식 주장(knowledge claim)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바로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데?”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 황금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29절은 “그렇기에”(for)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28절의 내용을 입증하는 논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역자 주: 우리말 성경에는 for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즉 29절부터 시작하는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전에 너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입었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사슬 안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폴라인도 맞았다. 알미니안의 주장, 즉 영향을 주고 반응하는 형태 속에는 결코 보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이 전하려는 애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장은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사슬 속 어디가 되었든지 믿는 자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선을 이룰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결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롭다 함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슬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설교 또는 믿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족을 만드는 이 일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단지 영향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리 정하신다. 그렇기에 부름을 받은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롬 8:29).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결과는 확실하다. 형제들이여,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Romans 8 Made Me a Calvinist번역: 무제
신학
신약신학
로마서8장
황금사슬
존파이퍼
칼빈주의자
알미니안
놀라우신 주, 그리스도를 보라
by Marshall Segal
2020-02-29
세상에 있는 많은 놀라운 것들, 높고 가파른 산과 깊은 협곡, 넓은 대양이라도 하늘에서 보낸 아들과 비교될 수 없다. 그분이 누구신지 온전하게 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관하여 놀라움과 뜨거운 마음으로 매료되었던 것이 언제인가? 혹시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가 더 이상 그분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예수님은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무한한 지혜, 정의, 힘, 사랑을 육신으로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이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만으로도 모든 대륙, 행성, 그리고 은하계를 운행하시고 통치하신다.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태평양의 파도까지도 다스리신다. 모든 새와 곤충을 먹이시며 모든 들판에 있는 풀잎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신다. 70억의 인구가 호흡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행 17:25).하지만 우리는 종종 무감각하게 잊곤 한다.당신의 눈을 열어주신다우리가 무감각한 것은 본질의 의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영광의 광채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둔하고 연약한 사람이다(고후 4:4).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창문의 조각을 빠짐없이 막았다. 우리의 망막은 지금 보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상의 표면을 보지만 실상의 근원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는 우리에게 지혜와 눈을 주셨으며 처음으로 참된 경이로움을 깨닫게 해 주셨다.“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빛이 당신의 마음에 넘쳐흐른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그곳에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행복을 찾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탐색을 끝내셨고, 당신의 찢긴 마음을 고쳐주셨다. 그분은 죄와 수치의 커튼을 걷어 주시고,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며, 우리의 눈을 점점 더 넓게 열어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당신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성경책을 열 때,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받는 혜택을 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따분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떨며, 기쁨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가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무뎌진 이유는 묵상할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그분을 만났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흥미로움에서 놀라움으로, 경이로움으로, 모든 것으로, 그리고 위대한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깨닫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몇 주간 그분의 말씀을 먹었을 때, 마치 식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많은 것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그분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셨을 때 우리는 숨을 쉴 새도 없이 받아마셨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팔았던 사람처럼,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의 진주와 보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땐 그분이 정말 멋지지 않았는가?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잃게 된다. 우리가 적은 시간이라도 그분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분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분과 함께한 시간은 그분 없이 보낸 수많은 시간보다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만일 그것이 실패한다면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 외에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그분 안에서 놀라움을 보기 원하면 사탄(그리고 누구든지 혹은 무엇이든지)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매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놀라우신 분을 응시하라모든 것을 다해 그분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응시하라. 그러면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예수님의 사랑에 무감각하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그에게는 모든 대양에 있는 파도보다 더 큰 힘이 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대학의 학자보다 더 현명하다. 최고의 진주나 다이아몬드보다 더 고귀하고, 순수하며, 가치가 있다. 가장 치열한 전쟁에 출전한 용감한 용사들보다 더 담대한 용기가 있다. 그는 신생아와 함께 있는 엄마보다 더 온화하다. 법정의 어떠한 재판관보다 더 정의롭다. 그의 사랑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느껴왔던 것보다 더 크고 놀랍다. 그 힘, 그 지혜, 그 사랑이, 그 광채가 지구상에 왔고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그분은 놀라우시고 아름다우시며, 정의롭고 강하시며, 경이롭고 거룩하시다. 그렇지 않은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e Yawn Because We Forget: uncovering the Wonder of Christ번역: 이현석
무감각
묵상
시간
경외감
사탄
지혜
경이로움
복음
예수그리스도
번영신학에 대해 알아야 할 것
by Joe Carter
2020-02-22
몇 년 전 미국의 우정국(USPS) 검열관들과 미국 국세청(IRS) 범죄 수사관들이 “건강과 부”의 전도자요 신유 사역으로 악명 높은 베니 힌(Benny Hinn)의 사무실을 급습했다. 명성으로만 듣던 힌(Hinn)이라는 인물과 번영신학(혹은 “복음”)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번영신학이란 무엇인가?“건강과 부의 복음” 또는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 운동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번영신학은 예수님의 복음을 왜곡한 것으로써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이 늘어나며, 건강과 부도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헌트(Stephen Hun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 (번영신학) 중심에는 믿음을 통한 ‘신성한’ 육체의 건강과 번영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는 ‘건강과 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동적인 신적 권리라는 의미이며, 구원과 함께 얻는 부산물의 한 부분으로서 믿음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죄의 제거뿐만 아니라 아픔과 빈곤의 제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왜 번영신학이 거짓 복음인가?데이비드 W. 존스는 번영신학 교리의 오류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아브라함 언약은 물질적 자격요건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 예수님의 대속은 물질적 빈곤의 “죄” 까지 확장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해 베푼다.- 믿음은 번영으로 인도하는 스스로 만들어낸 영적 능력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번영의 축복을 부어주시도록 촉구하는 도구이다. 존슨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번영신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잘못된 관점을 주기 때문에 거짓 복음이다. 만일 번영신학이 진리라면, 은혜는 쓸모없는 것이요, 하나님도 필요 없는 분이고, 인간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 언약, 대속, 베풂, 믿음 혹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번영신학 선생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대가를 지불하는 거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번영신학은 어디서 발생했는가?번영신학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오순절파(Pentecostalism)의 부산물로서 발생하게 되었다. 작은 텐트 규모로 지역 성도들의 부흥집회로 시작되었으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더 큰 규모의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텔레비전선교”의 등장과 함께 튼튼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모든 번영신학 설교자들이 오순절파 혹은 은사주의파(대부분의 은사주의나 오순절파 기독교인들은 번영신학과는 관련이 없다)인 것은 아니지만, 이 운동은 여전히 주로 부흥 운동가들이나 은사주의 교회들과 관련된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그 밖에 오순절 운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세계 각 지역에서 쉽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누가 번영신학을 설교하는가?현대 번영신학 설교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인물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이다. 신앙요법 전도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는 오랄로버츠대학교(Oral Robert University, ORU)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전성기에 로버츠는 연간 1억1천만 달러(원화 약 1280억원)의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였다.오랄로버츠대학교의 학생이며 오랄 로버츠의 기사로 일했던 케니스 코프렌드(Kenneth Copelan)는 번영신학 교사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짐과 태미 페이 베커(Jim and Tammy Faye Bakker), 베니 힌(Benny Hinn), 펫 로버트(Pat Robert), 그리고 로버트 틸톤(Robert Tilton)을 포함한 1980년대에 유행했던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번영신학의 교사들로는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T.D. 제익스(T. D. Jakes), 귈러모 말도나도(Guillermo Maldonado), 조엘 오스틴(Joel Osteen), 그리고 폴 화이트(Paula White)등이 있다. 어떻게 번영신학 설교가를 구별할 수 있을까?2014년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번영신학을 식별하는 6가지 핵심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성경적인 고통과 회복에 관한 교리의 부재, 즉 고통 교리의 부재- 자기 부정이라는 명백하고 중요한 교리가 없음- 성경 주해의 심각한 부재- 성경 말씀에서 긴장을 다루지 않음- 지나치게 화려한 삶을 사는 교회 지도자들- 개인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지 않음(미국의) 어떤 이들이 번영신학에 매료되는가?2015년에 유고브(YouGov)라는 기관에서 자신이 “거듭났거나”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미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조사에서 특정 설교자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부유함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증거 인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기도가 당신을 더 부유하게 한다고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백인의 15%, 흑인의 42%, 그리고 히스패닉의 2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부유함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증거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백인의 9%, 흑인의 34%, 그리고 히스패닉의 24%가 “매우 그러하다” 혹은 “아마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흑인 번영신학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흑인 복음주의자들은 히스패닉이나 백인 복음주의자보다 많이 “매우 호의적”이거나 “다소 호의적”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백인의 10%, 히스패닉의 24%라는 비율과 비교하여 흑인의 70%가 T.D. 제익스에 대해 호의적인 답변을 했다. 크레프로 달러(Creflo Dollar)의 경우 결과는 더 낮게 나타났다. 백인의 3% 그리고 히스패닉의 8%와 비교하여, 흑인의 28%가 호의적인 답변을 하였다. 반면 흑인 복음주의자들은 흑인이 아닌 번영신학 설교가들에 대해서도 더 높은 비율로 선호하는 의견을 지지했다. 그들을 조엘 오스틴(Joel Osteen: 51%, 백인의 22%, 히스패닉의 39%), 펫 로벗슨 (Pat Robertson: 41%, 백인의 17%, 히스패닉의 14%), 베니 힌(Benny Him: 23%, 백인의 4%, 히스패닉의 12%), 그리고 케니스 코프랜드(Kenneth Copeland: 34 %, 백인의 8%, 히스패닉 12%)에 대해서 “매우” 혹은 “다소” 선호한다는 견해가 더 높았다.흑인과 히스패닉 복음주자의 4명 중 1명, 백인 복음주의자 7명 중 1명은 종교활동을 통해 부유해진다고 생각한다. 번영신학을 다루는 자료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Prosperity: Seeking the True Gospel’이라는 책은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다. 또한 TGC, 9Marks, Desiing God, 그 외 다른 웹사이트에서 관련 아티클을 찾을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You Should know About the Prosperity Gospel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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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
번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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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오순절파
은사주의파
존파이퍼
설교자
하나님께서 사울이 죄 짓도록 하셨을까?
by Richard McDonald
2020-02-19
판사가 교통법규를 많이 위반한 운전자의 면허증을 정지하겠다고 경고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경고를 받은 운전자는 다시 붙잡히게 되었고, 결국 그의 면허증은 정지되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판사는 운전자가 또 다른 위반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경고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면허 정지는 반복된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하나님도 같은 의미로 심판하신다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우리 삶의 죄를 심판하신다(겔 18:23–32; 히 12:10). 이러한 심판은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그렇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 하신다.재판관 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사무엘상 16–19장에 나타난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씀을 읽고 나면 즉각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사울을 꾀어 다윗을 죽이도록 하신 것인가(삼상 18:10–11; 19:9–10)? 하나님께서 사울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셨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그가 살인을 선택한 것인가?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심으로 사울을 실패로 인도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13절에 비추어 이 말씀을 읽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6–19장과 야고보서 1장 13절 말씀 간에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1.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사울 통치 초기를 볼 때 그가 왕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울은 전도유망한 왕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며 몇 차례 중요한 승리를 이루었고(삼상 11; 13:1–4; 14:16–23), 또한 지혜와 자비를 행사했던 왕이었다 (삼상 11:12–13).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 일어난 두 번의 사건은 모든 게 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사울은 자신과 군대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번제를 드리는 일을 감행했다(삼상 13:5–14).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모습을 꾸짖었고, 주님께서 마음에 다른 왕을 이미 택하셨다고 주장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점, 하나님을 반역하며 불순종한 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점 때문에 사무엘은 또 한 번 사울을 꾸짖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호와께서는 사울의 왕권을 폐지하셨고(삼상 13:14; 15:23)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게 하셨으며(삼상 16:14), 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삼상 16:14).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을 통해 사울을 유혹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사울의 완강한 불순종에 대응하는 심판의 행위로써 악령을 보내신 것이다.성경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에 따라 모든 영적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삿 9:23; 삼하 24:1; 대상 21:1; 눅 22:31).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의 고집스러운 불순종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영을 보내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사울은 다윗의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은혜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삼상 16:23).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를 회개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롬 2:4).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셨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일의 책임이 어떻게 사울에게 있는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저항할 수 없는데 말이다.2. 사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사울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방향키를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제불능의 배와 같지 않다. 사울은 그의 삶에 있어서 키를 잡고 선장이자 주인공이었다. 그는 사무엘상 16–19장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던 책임이 그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사울은 다윗을 궁전 주변에 두어 하프 연주를 하도록 했다. 악한 영이 사울을 지배할 때면 언제든지, 다윗은 하프를 연주했고 사울을 회복시켰다(삼상 16:23). 사울은 연주를 위해 다윗을 소환함으로써 다윗의 사역을 수용했다. 더구나 버림받은 왕인 사울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었던 다윗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의 성공을 질투하며 그의 의도를 매도하는 선택을 했다(삼상 18:8–9).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사울의 밑에서도 다윗은 형통할 수 있었다. 다윗은 왕의 무기를 드는 자가 되었고(삼상 16:21), 골리앗을 죽였으며(삼상 17),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으로 승격하였다(삼상 18:5). 다윗의 형통함과 그를 향한 백성들의 사랑(여인들이 그를 찬양했던 것도 포함해서)은 사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삼상 18:7–8). 사울은 그날부터 다윗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질투와 불신의 마음을 품기로 작정했으며, 이는 결국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질투와 불신을 품기로 선택했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베푸시는 평화의 방편을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악한 욕구를 쫓았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두 번이나 창을 던졌고, 이 두 번 모두 악한 영이 그를 지배했을 때였다(삼상 18:10; 19:9).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다윗의 음악은 더 이상 사울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사울은 스스로 악한 욕구에 몰두하였다. 사울에게 야고보서 3장 16절은 꼭 맞는 말씀이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사울 인생의 열매는 그가 신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주지만, 그의 삶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적용점을 제시한다. 사울과 악한 영에 대해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시지 않는다. 야고보서가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자신의 악한 욕심에 미혹될 때에 유혹을 받는다(약 1: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임의대로 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 하지만 그 목적은 회개에 있다(겔 18:23, 32; 롬 2:5–11; 히 12:10).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타락한 세상의 판사는 너무 성급하거나 가혹하게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만, 하늘의 재판관께서는 놀라운 모습으로 인내하신다. 사울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완강하게 불순종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에야 심판을 받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내가 만료될 수 있다(시 103:9; 벧후 3:8–10). 반면 심판 가운데서도 신자와 불신자들을 향한 자비를 연장하시면 그들이 돌이키기도 한다(롬 2:4).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죽을 때까지 회개치 않는 불신앙과 반역을 고집했다(삼상 31). 비록 신자의 구원이 확실한 것이지만, 우리는 유혹이나 죄를 완전하게 이겨낼 수 있는 면역성이 없다(고전 3:3; 약 4:1).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통해 악한 영을 대항할 의지를 갖게 된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내주하는 죄악을 대항할 의지를 갖는다. 불신자의 경우, 불신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롬 1:24;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개하는 믿음을 통해 진정된다. 우리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멸망시켜 복수하시려는 재판관이 아니시다. 그는 정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두가 회개하고 생명 얻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딤전 2: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Made Me Do It!’ Why Did God Tempt Saul with an Evil Spirit?번역: 정진호
신학
구약성경
회개
심판
선택
책임
설교
불순종
미혹
자비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소식
by Robert B. Strimple
2020-02-15
나는 1935년 세례(침례)를 받은 이후로 규모가 큰 ‘주류’ 개신교 교단에서 자랐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시절 유행했던 옛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목사님들에게 많은 실망을 해서 부모님께 다른 지방의 정통 장로교회로 옮기자고 말했다. 우린 교회를 떠났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깊은 성경적 믿음을 주셨다.오늘날 미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주류 교회들은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어떻게 성도를 끌어모으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 결과 매년 성도의 수가 줄어들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신생’ 교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과거의 낡은 자유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성경적 복음을 고수한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의 풍성한 기쁨과 성령의 힘으로 설교하기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배우자, 부모, 자금 관리자가 되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설교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견고한 토대 없이 이런 설교만 듣는 청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빠져서는 안 된다. 성도의 수가 증가하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선포돼야 하고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롬 10:13-15). 복음이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참담한 여론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 본 자료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1950년대에(내 세대)는 75퍼센트에 달했으나, 다음 세대(내 자녀 세대)는 35퍼센트로 줄었다. 그리고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에 의하면 그다음 세대(나의 손주 세대)에는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교회에서 자란 십 대들은 신앙을 급격한 속도로 거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다가서도록 할 수 있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소위 말하는 ‘실용적’ 설교 주제가 왜 복음을 대체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캐나다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전달 도구가 마사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문제는 나쁜 소식이 뉴스인 세상에서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했다. 성경의 메시지는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린 기적의 소식이다. 이러한 소식은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에 관한 일상적인 뉴스보다 더 믿기 힘들다.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큰 것이기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증거들로 참되고 입증되었기 때문이다(히 2:3-4).나는 당신에게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45절에 있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 번 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믿느냐”(26절). 마르다가 “예 주님, 믿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 각자가 대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다.마르다의 대답은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하나님 말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나서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했다. “네, 주님. 내가 곧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하나님이 행하실 엄청난 구원의 행위라는 것을 정확히 보았다. 그녀는 구원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메시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이다. “예 주님, 당신 안에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르다는 사실상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에 오기로 약속하신 분입니다.”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권위적인 기적을 알고 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이 부르시자 실제로 죽은 자가 나왔다(43-44절).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을 행하셨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참된 마지막 구원자이자 참된 말씀이심을 증명하셨다.대학 시절에 꽤 유명했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무신론자인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페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은 나에게 너무 큰 단어야. 나는 그렇게 높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너무 높은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크고 놀라운 소식이기에 믿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출처: www.ligonier.org원제: Too Good to Be True? 번역: 송유희
복음
부활
자유주의
복음주의
실용적
생명
마르다
마샬
입양 교리가 왜 그토록 달콤한가!
by Aaron Menikoff
2020-02-11
판사가 몇 마디 선언과 함께 망치를 친다. 그러면 한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이 주어진다. 미국 전역에 있는 법정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일이라고 할까. 친부모에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없거나, 그 부모가 아예 양육 자체를 거부할 때, 아이는 입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 아이는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새로운 부모에게 완전히 소속된다.최근 몇십 년 동안 입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그 관심은 야고보서 1장 27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구절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순결한 신앙에 대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크리스천으로서 이 구절을 적용하기 위해 실제로 고아를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입양이란 어느 한 구절에 근거해서 이뤄진다기보다는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입양 교리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우리를 입양하신 하나님입양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신 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자비로운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긍휼과 보호와 공급과 훈계를 받고, 결단코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획득으로 입양을 설명한다.세상에서는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입양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새로운 가정에 소속되었으며 그 가정이 자신에게 주어진 게 맞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입양하시는 일에는 그와 같은 의심이나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죄인을 자기 자녀로 삼으신다(요 1:12). 이와 같은 의지는 완전하여 결코 바뀌는 법이 없다.하나님의 입양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그칠 줄 모르는 사랑에 기초해 있다. 산맥이 형성되고, 강물이 흐르며, 하늘에 새가 날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인을 자기 가족으로 입양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그렇듯 창조 사역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를 향해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사 41:8; 약 2:23) 자녀라고도 부르신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러한 자비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가장 달콤한 교리입양을 가장 달콤한 교리로 표현하면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신학자는 그 교리가 얼마나 우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지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존 대그(John Dagg)는 “칭의보다 높은 수준의 은혜를 보여 주는 축복”이라며 입양을 칭송했다. 누군가를 사면하는 일은 판사가 하지만, 그 사람을 입양하는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도 입양이야말로 칭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표현했다. 로버트 웹(Robert Webb)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우리 모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 자녀를 부드러이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콤하게 느낀다. 때로 고난이 우리를 덮치고 근심이 홍수처럼 밀려오면, 우리는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손을 뻗친다. 혹 죽음의 천사가 문간에 들어서며 사랑하는 이를 데려갈 때조차,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며 가장 친밀한 위로를 얻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위협이 물결치며 크게 범람할지라도, 우리는 저 별들 너머로 빛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거기에 세워진 아버지의 집을 묵상한다. 그러면 무너져 가는 이 땅의 장막 가운데서도 큰 격려를 받게 된다.”이러한 교리는 단지 전문적인 신학자들만 음미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입양에 내포된 보석 같은 진리는 미국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크리스천 노예들을 붙들어 준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잔혹한 속박을 견디게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만들어 준 진리가 바로 입양 교리였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단지 주권을 행사하시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없이 자애로우신 아버지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가정의 노예로 살았던 앨런과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Ellen and William Craf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의 입양 교리를 묵상하면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을 끄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기도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듯이, 이제 우리도 잔인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입양을 주제로 한 성경 이야기크래프트 부부에게 성경이란 입양을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원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돌보시며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면서 동산을 거니시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창 3:8).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산 밖으로, 즉 아버지의 임재 밖으로 그들은 추방되었다(창 3:24; 롬 5:12).이후 아브라함을 통해 번성한 아담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 자손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며 다시금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출 4:22-23). 하나님은 타락한 그 백성을 불러내어 자기 곁에 두고자 하셨다. 그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면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고 약속하셨다(레 26:12). 마치 지난날 에덴에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을 거부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가 되시건만(시 103:13), 그 누구도 그분을 그렇게 경외하지 않았다.이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큰일을 행하셨다. 바로 완전한 주권자요 공의로운 창조자이신, 그 영원하신 아버지가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으시며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큰일을 이루셨다.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또한 그 대속을 적용하여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3:24),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고후 5:17). 그리하여 자기 가족으로 그들을 입양하신다(갈 3:26; 4:4-7).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있을 수 없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어딘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늘 아버지만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따라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속감을 주실 수 있다. 곧 세상의 죄인들을 자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다(롬 8:17).입양 교리가 달콤한 이유그러므로 입양 교리는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진리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첫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든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확신을 갖게 된다(롬 8:15-16). 이 확신은 방탕한 아들을 한없이 품었던 그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마음이다(눅 15:11-32).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면, 당신을 자기 자녀로 입양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기 바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당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둘째로 입양 교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혹 당신이 해외에서 다른 신자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당신과 비슷한 모습들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언어나 문화에서 느껴지는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깊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전 세계에 가족을 둔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한다.그와 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우리에게 가족으로 허락하셨는데, 특별히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그 가족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때 기존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바가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함께 주셨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우리의 신앙생활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다. 곧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그 모임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고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자신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셋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 역시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도와준다. 몇 년 전에 아내와 내가 한 아이를 입양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 그 일을 한 게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27절이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에게 고아를 돌보며 가정을 제공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는 성경 전체가 입양에 대해 가르치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즉 우리 자신이 약하고 추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었다(롬 5:6-11). 그렇기에 우리 부부가 딸아이를 입양한 일은 그저 우리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었다.그러므로 당신도 입양 교리를 한번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그 교리가 얼마나 달콤한 진리인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혹 언젠가는 고아를 입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입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doption: The Sweetest Doctrine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입양
성령
사랑
로버트웹
정체성
존대그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라
by David Mathis
2020-02-08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행 17:21) 옛 아테네 사람들과 같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IT와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즉 문자 그대로 “뉴스”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래된, 영광스럽도록 오래된 진리들을 붙든다. 이 진리는 뉴스에 탐닉하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의 현위치를 파악하고 영적 판단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D. A. 카슨(D. A. Carson)은 한 가지 위험을 감지한 바 있는데, 그 위험은 한 세대가 지난 현재도 여전히 시급한 문제로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생각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사람들이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십자가가 응당 누려야 할 중심적 위치로부터 밀려날 위험에 늘 처해 있다”(‘십자가와 목회’[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동일한 경고가 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목회자이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9)는 그의 책 ‘거룩을 향한 하나님의 방도’(God’s way of 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만들어내는 귀한 열매들, 죄 용서, 평강, 그리고 거룩함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닌 공상의(fancied) 성화는 바리새주의와 다를 바 없다. 거룩해지고자 한다면 십자가로 가서 그 아래 머물러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금식, 기도, 선행 같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얻을 수 없다.보나르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흐름에 대한 처절한 도전이다. 또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오래된 진리를 붙잡고자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각을 보나르의 오래된 언어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모든 진실한 거룩함과 선행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라는 말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성자 하나님께서 못 박히셨을 때 모든 것이 변화된 것이다.부활 직후 일어났던 사건에서 “못 박히심”은 우리 주님을 나타내주는 표현이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5–6; 또한 막 16:6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오십일이 지난 후 행한 오순절 설교의 절정에서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한다.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친 후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그 앞에 섰다. 그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라고 묻자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4:10)라고 답한다. 예수님을 구별하여 보여주는 “못 박히심”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 선포한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우연하거나 부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숨기지 않고 밝히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을 뿐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 된 것이다(롬 5:8). 카슨이 십자가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행위 중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대표적인 묵상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장 5절에 등장한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허물어버릴 만큼 놀라운 계시적인 십자가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즉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메시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때(고전 1:23)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고전 1:20).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죄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한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영광을 본다.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고전 1:30) 되신 분이라 믿는다.십자가는 불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쓰는, 복음 메시지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시는지(“지혜”),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고(“의로움”) 거룩해질 수 있는지(“성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구속”) 보여준다.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뿐만 아니라 그가 간 모든 곳에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행 20:27) 전하였다. 십자가가 지극히 중심적이고,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으며, 지극히 계시적이어서 어떠한 주제를 이야기하든지 그가 말한 모든 것(“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은 보나르의 표현처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왔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대한 카슨의 주석처럼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윤리, 교제, 하나님에 관한 교리, 또는 어떠한 것이라 해도 십자가와 연결하지 않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은 복음 중심적이다. 그는 십자가 중심적이다.” 초기부터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빈 무덤보다 십자가가 그리기 쉬웠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고 부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 전체를 대표한다. 세상의 지혜와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내세적인 힘을 보여주고,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을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는 부활에 나타난 능력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특별히 구별되고 기독교 신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부활을 꿈꾸기는 할 것이다.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다.공상의 성화와 참된 성화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략] ‘거룩함’ [중략] 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어로 ‘하기아스모스’(hagiasmos)이다. 보나르는 공상적인 성화와 참된 성화라는 두 종류의 성화에 대해 논하는데 “공상의(fancied) 성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반”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존 오웬(John Owen)도 말한다. 시편 130편 4절(“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 이다”)을 주석하면서, 용서하심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이 경외함과 예배의 기반, 즉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경외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가 바로 이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죄 용서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죄인도 그분을 경외하거나, 섬기거나, 예배할 수 없다”(‘존 오웬 전집’[Works of John Owen]).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예배와 “참된 성화”는 십자가 구속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믿는 믿음으로 그 힘을 얻는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 6:6).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다. 우리도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거룩한 여정의 비밀그렇다면 보나르의 권면처럼 어떻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 것”인가? 보나르는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증”이라 함은 객관적 사건과 사실로서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은혜로운 마음이며, 그의 영원하신 호의를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보나르는 십자가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카슨 역시 바울의 십자가 중심의 시각을 분명히 보여주며 복음의 실제를,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으라”고 권면한다.바울과 보나르, 그리고 카슨도 “지속적으로” 또한 “계속하여”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머물기 위해 당신이 취하는 구체적 방식은 내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정말로 십자가로 다가가고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머물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항상 물어야 한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다가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든지” 아니면 세상 속에 머물든지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진실한 것이든지 아니면 공상적(fancied)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보나르는 “매일”이라는 다른 일반적 기준도 제시한다.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못 박히신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피곤한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진리와 더불어 살아온 지 어느덧 십오 년이 되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는 날마다 새로운 진리라는 사실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Get to the Cross and Never Leave번역: 이정훈
성화
용서
보나르
구속
의로움
카슨
지혜
복음
십자가
바리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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