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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주일의 참된 의미
by 장대선
2020-07-23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방역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내에서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일시적으로 폐하고 각자 온라인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세대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무엇보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전염병 문제는, 주일예배와 관련된 신앙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주의 날에 교회당에 온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하거나 곤란하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주일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교리문답 ‘안식일의 거룩하게 함’(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을 통해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관련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이 편리한대로 모든 것들을 다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수단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며, 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주님은 모세의 자리(율법의 자리)에 서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도록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이셨다. 앞서 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율법의 가르침]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런즉 율법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한 개혁된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신앙은 전혀 개혁된 바 없이 여기저기 분란만 일으키는 사변적이고 문제투성이인 개혁자가 된다. 즉,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율법의 거룩함과 의가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선후 관계를 크게 오해한 자들이었다.한편,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7문답)에서 “그것들(봉사의 일들)이 경건의 의무들(예배의 의무들)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에 봉사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이] 틀어지든지 간에, 반드시 교회당에 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엄격하게 속박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라는 구절은,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라고 가르쳤다.사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을 보이고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거룩히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칫 그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특히 주일에 행하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마일리지를 적립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사(예배)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가 제사와 율법을 준행할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가 전부 다 사실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인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 결과 실제적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우리 자신과 이웃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 즉 예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도록 섭리하셔서 우리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일하시기도 한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해와 우리의 타락한 습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는 말씀을 곧장 우리의 영적인 나태와 방종의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유는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 규례에서 용인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마 12:11) 것이 당연한 이유는, 속히 꺼내지 않으면 양이 죽거나 다쳐서 적잖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불가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8문답)에서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그러한 봉사의 일들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필요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와 관계됩니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일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의 일들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재해들, 혹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예배와 경건의 일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과 주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를 하여 이 상황에 성경적으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공적인 행사들에 참여하는 것 외에 각자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모습인지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 아닌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1641년에 윌리엄 구지가 작성한 이 문답들이 영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봉사의 일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일들, 예배당을 향하기 전과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가정과 개인으로서 행하는 예배와 경건의 묵상,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도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 이제 교회는 신자들을 모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성도들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수고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장로들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열심만이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인 ‘치리장로’들이 성도들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본래의 직무수행 없이는, 각자 흩어진 가정에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도록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했던 주일예배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재정립하고,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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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은 누구인가
by Moses Y. Lee
2020-07-17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가장 애매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왕과 제사장이라는 영광스런 두 직분(dual honor)을 예수님이 어떻게 동시에 감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 신비스런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이 멜기세덱 왕조의 순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왕과 제사장 역할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만찬을 준비한 왕성경에 등장하는 아주 적은 양에 비해 구속사에 있어서 멜기세덱이 감당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고 그는 살렘(“샬롬” 즉 조화로운 평화를 의미한다)을 다스렸다.그의 삶과 사역을 묘사하는 세 구절에서(창 14: 18-20) 우리는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권한다. 아브라함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일조을 드렸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이 가진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속에는 성찬식에 대한 함의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왕을 기다리며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편인 시편 110편은 왕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구절이다. 다윗 왕은 미래의 왕을 생각하며 이 구절을 썼다. 어쩌면 기원전 971년 왕위에 오르기 전 솔로몬을 생각하면서 썼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윗의 핏줄에서 나올 후대 메시아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시편은 미래의 왕이 과거 그 어떤 왕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 그리고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그는 야훼의 대리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인 야훼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110:1).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야훼로부터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왕의 권능을 행사하며 주의 원수를 굴복시킨다(110:2). 또한 왕의 왕국과 그의 백성을 보호한다(110:3). 그러나 이런 메시아적 인물은 단지 왕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기도 하다(110:4). 한마디로 이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다윗 가문의 왕은 레위 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전체 기도를 주관하며 또한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제사장적” 역할까지 수행했다.그러나 이 구절은 다윗 왕조의 제사장 기능을 더 발전시켜서, 한때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여부스 가문의 왕-제사장과 완벽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 결과, 다윗 왕조는 약속의 땅을 통치하는 데 하나님의 신성한 지지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창세기 14장 18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향한 멜기세덱의 축복도 성취하게 되었다.5-6절은 다윗 왕과 야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2-3절과 평행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절을 보면 왕이 야훼의 오른쪽에 앉아있지만, 5절을 보면 야훼는 왕의 곁에서 그를 신성한 힘으로 지키고 도와주고 있다. 2-3절이 왕을 전쟁의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5-7절을 보면 야훼, 또는 신성한 전사(Divine Warrior)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으로 하여금 적을 물리치도록 돕는데, 그 적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적이다(“여러 나라”, “뭇 나라” 등). 이것은 기존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벗어나는 확장이다. 달리 말해 그 적장 왕들은 혼란에 빠진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야훼는 그 적들을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나라를 대신해서 그의 궁극적인 멜기세덱 족속의 제사장-왕을 통해서 물리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야훼의 구원 속에 있는 적용점은 단지 개인의 영혼 차원을 넘어서 육체적 측면 또 집단적 시스템, 나아가서 전 우주적 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시냇물을 마시면서 원기를 회복하는 야훼의 모습으로 마친다(110:7). 이 구절이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야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영원한 멜기세덱 족속의 왕-제사장신약에 가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의 수준을 아예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pre-incarnate Christ-figure)의 모습으로까지 끌어올린다. 멜기세덱은 영원한데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에 대한 확증이다(히 7:4). 멜기세덱을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한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진정한 의의 왕(“멜기세덱”)이 된다. 또한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의 왕(살렘)이다. 예수님은 또한 레위 계통이 아니기에(히 7:14), 그의 제사장직은 훨씬 더 우월하며(히 7:11)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히 7:17)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었다(히 7:22).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한다”(히 7: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님이 무한한 능력과 공의로 다스리는 완전한 왕이시기에 우리 믿는 자들은 안심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히 4:15) 완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도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이제 믿는 자들은 우리도 멜기세덱 족속의 한 사람으로서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 왕국의 가족으로서 진리와 공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또한 이 세상 뿐 아니라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비와 치료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o Is Melchizedek?번역: 무제
신학
구약
멜기세덱
아브라함
다윗왕
살렘
성육신
절망의 시대, 어떻게 변증할까?
by 박용기
2020-07-16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불변의 소망’에서 기독교 소망과 세상 소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망은 내가 뭔가를 해서 즉, 간절히 바란다거나 노력을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받은 것으로 인한 소망이다.” 세상의 소망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얻을 수 있지만, 기독교의 소망은 이미 받은 소망이다.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 변증이란 신자가 소유한 소망에 대해서 불신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벧전 3:15).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항상 변증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기독교 변증을 준비해야하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defense, 변증)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1. 삶을 통해서 변증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Apologia)다. 이 단어는 "from"(apo)과 "Reason" or "Logic"(logia)의 합성어로, 불신자들이 던지는 질문과 공격에 신자들이 이성적이면서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1세기 변증은 삶과 동떨어진 사변적 논쟁이 아니었다. 불신자들이 신자가 소유한 소망을 보고 그 이유에 대해서 질문할 때 대답해 주는 것이 변증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신자의 주관적 삶의 이야기와 객관적 변증의 관계를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에서 설명한다. ‘변증은 개인의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객관적인 복음 교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복음서 역시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스토리들을 잘 들여다보면 복음의 핵심 교리를 찾을 수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변증은 어려운 신학,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보다는 신자의 주관적인 삶 속에 녹아있는 객관적인 복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개인의 간증을 통해서 객관적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로 거룩해진 마음으로 15절의 헬라어 본동사는 명령형으로 “거룩하게 하다”이다. 이 본동사와 묶여서 형용사 “준비하되”가 해석된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always being ready to make a defense, NASB). 형용사 “준비하되”는 본동사 “거룩하게 하라”와 연결되어 해석되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곧 변증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통해서 마음이 거룩하게 되면서 변증이 준비되는 것이다. 3. 소망으로 바울은 성도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성도들이 소망으로 영화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롬 8:30). 1세기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구원을 성령님 안에서 보증(고후 5:5)받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살전 5:8)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옥문이 열린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은 그들을 본 빌립보 감옥 교도관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대답과 함께 자세하게 복음을 온 가족에게 변증했다(행 16:30-32). 4. 온유와 두려움으로 온유는 연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힘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변증은 신자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변증의 결과가 성령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간적인 부담을 내려놓고 온유하게 변증할 수 있다. 신자들이 개인 간증을 할 때 내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인간적인 부담감 때문에 부풀려 이야기하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간증하고 변증해야 한다. 청년들 사이에서 ‘희망 고문’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같이 헛된 희망으로 고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소망은 썩은 동아줄처럼 결국은 끊어진다(잠 10:28). 어릴 때 연날리기를 종종 했다. 중랑천 다리 위에 서서 연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하늘에 떠 있는 연이 움직였다. 1세기 성도들도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 영화로운 구원과 소망의 줄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망의 삶을 보여줌으로 변증할 수 있었다. 2020년 7월, 한 해의 하반기로 넘어왔지만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이웃들이 많다. 모두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 때다. 산 소망을 소유한 성도들이 선한 행실과 진실한 믿음을 이웃에게 보여준다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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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삶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노승수
2020-07-13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 고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삼위일체는 고백일 뿐 삶의 구조나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은 자유주의가 일어나면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에 자기 계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 경륜 안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뭔가 조심스럽고 이해를 잘못하면 이단이 될 것 같거나 혹은 아예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관심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본다면 삼위일체를 뵙는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진술은 삼위일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사랑하는 분, 성자를 사랑받는 분, 성령을 사랑 그 자체라고 비유하며 이런 비유는 인간에게로 확대해서 인간의 영혼이 마음, 지식, 사랑 셋이면서도 한 영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비유로 놓으면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존재하며 현대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관계로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은 ‘관계’ 개념 없이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관계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인격 간의 관계를 의미하며, 이 인격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간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 삶에 실천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인격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삼위일체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삼위일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며 둘째는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περι)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코레시스(χώρησις)의 합성어로 상호 공재, 혹은 상호 침투로 번역된다. 직역을 하자면 “상호 간의 원형의 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우주와 인간의 원형을 원구의 형태로 이해했다. 특히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에서 별들의 운행을 춤(choreia)으로 이해했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를 완전하며 불변하는 구체로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차용했을 이 인격의 상호 침투 개념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엄마 품으로 올 때, 아이는 자기 내면의 무서움을 엄마에게 담아둔다. 엄마는 아이의 무서움을 담아주며 엄마와 아이의 인격은 서로를 모사하며 자기 동질성을 확보한다. 잠언에도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고 말한다. 인격은 서로에게 비치는 거울 같으며 상대의 감정의 일부를 담아주기도 하며 건네기도 한다. 죄인인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주로 미움과 분노를 건네지만 원래 인격은 사랑을 건네며 받아두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시므로 참 사람이 되시는 교리를 일컫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신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신 채로 인성을 입으신다. 그래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피곤하셔서 뱃고물을 베고 주무셔야 했지만 동시에 신성으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이신다. 이 둘이 모두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며 인격은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자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물론 기독론에서도 인격은 통로의 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통로는 우리 안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기도 하며 우리 밖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할 때, 이는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하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우리 몸과 영혼의 본성이 밖으로 주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과의 동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랑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삼위께서 동등하시며 남녀가 동등하고 부부가 동등하며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다. 그러나 동등한 관계에도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순종하신다.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나 고용주는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대우해야 하며 고용인은 고용 계약서의 법적 요구들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돕는 자로서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인격은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대상이 되는 인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부모의 인격적 반응을 통해 양육하지 않고 비디오나 TV에만 장기간 노출시키는 행위는 유사 자폐를 부른다는 연구도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비유했다. 각자의 숟가락이 있는데, 그 길이가 자기 입에 넣기는 불가하고 남에게 먹여줄 수만 있어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곳은 천국이요 자기 필요를 채우는 곳은 지옥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이란 서로의 짐을 담아내기도 하며 때로 내 어려움을 상대에게 담아주기를 요청하기도 하는 관계적 삶이다. 이것은 요청과 자발성에 의해서 이뤄져야 한다. 동등한 관계란 상대를 임의로 재단하지 않고 내 필요에 대해서 요청하고 상대의 필요에 대해서 물어보고 확인하며 요청이나 질문을 받았을 때, 자발성에 의해서 반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으로 사랑하며, 인격을 통해서 상대의 일부를 내 존재 안의 일부분으로 담아두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로서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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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더 깊고 깊은 죄
by Greg Morse
2020-07-10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를 맞았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어떤 태도나 행동을 “죄”라고 부르려고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가 이제는 너무도 구닥다리로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기운 빠진 회중들을 향해 죄에 대해 꾸짖는 설교자를 한번 상상해보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설교 또는 그런 설교자와 엮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도 상실하게 된다. D.A. 카슨(D.A. Carson)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가 없는 한, 십자가가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Fallen: A Theology of Sin,’ 22).죄에 대한 얕은 생각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이끈다. 죄가 가진 엄중함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가진 심오한 세계를 맛볼 수 없다.가짜 그리스도들죄의 본질에 관해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싸구려 이해가 우리 주변을 채우게 되고, 그 가짜들은 각자 나름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인생 코치 예수. 죄를 출발점으로 보지 않을 때, 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보게 될 때, 우리는 죽음과 심판 그리고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불가능한 목표와 거창한 꿈을 성취하도록 돕는 ‘그리스도’에 치중하게 된다. 예수는 이제 착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우뚝 서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가정부 예수.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인간인” 우리가 당연히 저지르는 것으로 죄를 바라보게 된다. 즉, 죄는 애통해야 할 것이 아닌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죄는 단지 하나의 실수일 뿐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이 정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인간이 “악마”는 아니니까. 따라서 예수는 이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의 뒤처리를 해주는 존재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우리의 ‘사소한 실수’를 청소하는 청소비를 내주기 위해서다. 인본주의자 예수. 죄를 거룩한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면, 좋은 목적을 가진 대의명분을 아예 궁극적인 명분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예수는 이런 명분에 필요한 좋은 선전도구로 사용되며, 인간은 죄를 짓는 자와 그 죄로 인해 해를 당하는 자의 관계로 정의된다. 따라서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가 가장 열정을 쏟는 문제인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내게 임하소서(Kumbaya) 예수. 죄를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를 단지 좋은 느낌을 전해주는 존재로 보게 된다. 예수는 이제 우리의 문제와 스트레스를 들어주고, 이 땅의 새와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를 푸른 초원과 안전한 물가로 인도하는 존재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이기에, 그는 굳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우리가 맘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왜곡된 그리스도가 주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무엇이고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우리의 타락과 죄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류의 옷장 속에 넣어 놓은 해골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바로 아담 속에 있는 우리의 원죄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내 자신과 우리 시대가 짓는 죄의 수준을 벗어나 인류의 뿌리를 점거하고 있는, 바로 그 죄의 근원까지 내려가야 한다.아담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있을까? 또한 그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키는지를 생각하는 이는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지은 죄의 역사는 우리 존재보다 앞선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노예의 굴레로 던져졌다. 우리 모두는 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죄에 빠진 상태다. 그리고 예수님, 진정한 그리스도가 또한 바로 그 장소에서 약속되었다. 어떻게 아담의 죄가 곧 우리의 죄가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8-19)가 가능했던 것일까?다윗과 골리앗의 기념비적 전투를 생각해보자. 블레셋 거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의 왕이자 거인이었던 사울은 텐트에 숨어있었다. 그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참지 못했고, 골리앗에게 도전했다. 골리앗이 다윗을 놀리자마자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냈고 그의 머리를 잘랐다(삼상 17:51).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을 것이다. 왜 다윗과 골리앗, 두 사람만 싸운 거지? 왜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거지? 우리는 골리앗처럼 쓰러졌다일대일 결투로 전쟁의 승패를 겨룬 마지막이 과연 언제일까? 이것은 바로 최고의 전사, 즉 우리의 “챔피언”이 상대편 챔피언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던 고대의 관습이다. 골리앗은 바로 블레셋의 챔피언이었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 17:8–9).다윗과 골리앗은 대표로, 그러니까 양측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만난 것이고, 그들의 싸움은 양쪽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다윗이 죽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의 챔피언이 사탄과 결투를 벌였고 그때 아내까지 아담의 곁에 있었지만, 아담은 패배했다. 뱀의 머리를 박살냈어야 했을 아담은 도리어 그의 자손까지 걸려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굴복했다. 우리의 대표, 우리의 전사는 그 사악한 뱀의 거짓말하는 혀를 잠재우지 못했고, 대신 자기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다.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된인류의 챔피언으로서, 또 창조주와의 언약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적과 싸운 아담은 쓰러졌고, 그의 자손들은 이제 아담의 타락성과 죄를 모두 다 상속하게 되었다. 아담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 즐겁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며, 또한 악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분노의 자식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이고 또한 우리의 조상이 패한 대상인 사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다(엡 2:1-3). 우리의 조상 아담 때문에, 우리의 신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가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 17:9)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리는 다 죄 중에서 태어난다(시 51:5). 우리의 죄가 단지 우리 자신의 정욕과 교만함 그리고 거짓말하는 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챔피언은 적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었고, 달콤한 선악과를 깨물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저주의 쓴맛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중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에 수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탄과 맺은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인류라는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독에 오염되었다. 두 전투 이야기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향하도록 한다. 동화 속 요정 예수, 정치적 활동가 예수, 집을 치워주는 예수가 아닌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첫 번째 아담은 궁극적으로 진짜 챔피언이 와서, 아담의 머리를 잘라버린 바로 그 적과 제대로 싸우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자 복수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롬 5:14). 이 세상에 죄가 한 사람으로 왔던 것처럼(롬 5:12), 용서도 다른 이를 통해서 온다(골 1:14).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이에게 죽음을 가져다줬다면(롬 5:15),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가져다준다(롬 5:17). 아담은 그의 자손을 저주와 타락으로 밀어넣었고 또한 그들을 사탄과 죄의 노예로 만들었지만, 두 번째 아담은 아버지를 위해 그의 형제들을 해방시켰고, 거룩함 안에서 그들에게 그의 온전한 은혜와 신령한 도움을 준다(롬 5:16). 에덴동산에서의 전투 때문에 세상은 저주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는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이제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첫 번째 챔피언은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에 의해 박살났지만, 우리의 진짜 챔피언은 이 세상과 육욕 그리고 사탄을 박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죽음을 이겼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노예고 하나님의 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고 또한 앞으로 맞게 될 세상에서 우리는 다 왕과 왕비가 될 것이다.우리가 죄의 혈통을 잊을 때, 또 우리가 아담이 가져다 준 타락 때문에 죄 속에서 태어나 사탄을 따르는 자였다는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죄를 ‘가벼운 실수’ 정도로 여기고 서로의 상처를 너무도 쉽게 치유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행위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또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 지식적으로 또는 기능적으로 유혹받기도 한다. 그러나 죄의 우물은 너무도 깊다. 우리의 죄는 너무도 오래되었고 우리의 노예 생활은 너무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전사가 필요했다. 다른 아담이 필요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는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Sin Runs Deeper Than You Think번역: 무제
복음
변증
아담
원죄
DA카슨
쿰바야
골리앗
챔피언
에덴동산
팀 켈러가 묘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김상일
2020-07-04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팀 켈러 ‘왕의 십자가’ 37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시간에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팀 켈러가 삶을 풀어내는 교리 특히 그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다. 현대 문화 안에는 기독교 교리가 추상적인 것, 일상의 삶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한 이런 고정 관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교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켈러에게 있어서 교리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서 (삼위일체론, 구원론, 종말론, 죄론 등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며, 따라서 켈러에게 교리는 성경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삼위 하나님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그렇다. 켈러는 자신의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King’s Cross)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성부), 비둘기 같은 성령,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켈러는 실제 유대교의 경전을 살펴보면서 왜 마가가 ‘비둘기’라는 비유를 통해서 성령을 묘사했는지, 거기에 숨겨진 더 큰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고 들어간다.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 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굼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왕의 십자가’ 33쪽).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워낙 인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교리이기에, 또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적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켈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개념 정리를 우선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분도 아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 만약 켈러가 여기서 멈췄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 아니 교리는 다 어렵다’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삼위 하나님이 서로 맺고 계신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읽어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지혜가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맺고 계신 그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불러들이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특히 루이스가 사용하는 삼위일체가 함께 누리는 “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켈러의 말을 들어보자.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오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 (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 (‘왕의 십자가’ 35-36쪽).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일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왕의 십자가’ 37쪽)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돈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산다. 우리의 하나님이 권력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모든 것을 건다. 우리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그 만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서 벗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없이)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추시는 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관계를 그려내시는지를 삶의 지혜로 깨달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양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왕의 십자가’ 38-39쪽).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켈러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만큼이나 우리의 이웃 또한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서 크나큰 시사점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 내 사역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시사점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 있다. 사역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기에 그렇다.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추며 배우는 관계적 진실성 켈러는 자신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역동성에 가장 필수적인 것 중 하나를 ‘관계적 진실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관계적 진실성,’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진실성이란, 1)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와 휴식과 문화생활과 공공 활동에 있어서 이웃과 같아야 한다, 588쪽), 2) 이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해주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관대함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보다 낮게 살아가는 법도 고려해야 한다, 589쪽), 3)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솔직하게 이웃에게 드러내면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적 진실성을 갖고 이웃에게,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켈러는 특히 관계적 진실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는다. 하나는 그가 조화 접근법(the blend-in approach)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거품 접근법(the Christian bubble approach)이다. 조화 접근법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향을 숨긴 채 관계적으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센터 처치’ 592쪽)을 가리키며, 기독교 거품 접근법이란,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 것”(‘592쪽)을 가리킨다. 왜 그리스도인임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면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가? 관계를 깊이 맺게 될 때 따라오게 될 희생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켈러는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 양쪽 모두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신자들 사이에 왜 관계적 진실성이 그렇게도 적은가? 그 답은 주로—전부는 아니지만—동기에 있다. 조화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용기가 부족하다. 그들은 영향력을 잃는 것, 무대 뒤에서 고초를 겪거나, 또는 직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품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센터 처치’ 595쪽).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들이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을 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춤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신 관계의 방식을 따라서 그 관계 안에 충분히 침잠되어 살아가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웃들과 맺어가는 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기를 통해서 가꿔간다는 말이 된다.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우리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갈수록,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될수록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갖고 사람들과 관계 맺어왔던 이전의 방식을 포기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듯이,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할 때 그 중심 동기는 단지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중심 동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찬양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A학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 취직이 잘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됐다. 다시 말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듣는다. 내게 모차르트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싶어진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왕의 십자가’ 34-37쪽).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시는 관계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에 둔다면, 우리의 사역 프로그램과 목회 방법론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지나치게 열심을 쏟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시작된 교리와 전통 읽기는 이렇게 삶으로 풀리며, 사역의 기술과 목회 방법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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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노래한 베일에 싸인 종
by Davy Ellison
2020-07-03
영국에는 A Question of Sport라는 오래된 TV 퀴즈쇼가 있다. “Mystery Guest”라고 불리는 단계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참가팀들이 30초 길이의 영상을 보고 그 영상에 나온 유명한 운동 선수가 누구인지 맞춰야 한다. 하지만 선수 본인은 변장을 한 상태로 등장한다. 가령 카우보이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을 다 가리고, 목도리로는 입과 코를 가리는 식이다. 베일에 싸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것이 참가팀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베일에 싸인 이가 이사야에도 등장한다. 이사야 40–55장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처음 서른 아홉 장에서 약속하신 소망, 은혜, 그리고 회복을 “여호와의 종”이라 일컫는 베일에 싸인 그를 통해 성취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소위 종의 노래(Servant Songs)라 불리는 네 본문을 통해 이사야는 그 종이 어떤 이인지 보여준다. 그 노래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종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첫 번째 노래: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시다(사 42:1–9)이 첫 번째 노래 직전에, 이사야는 우상을 그 종과 대조시키며 그의 청자와 독자에게 우상은 어리석은 것임을 경고한다(사 41:21–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41:29)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중략] 보라” (42:1)“바람”(사 41:29)에 지나지 않는 우상들과 달리 그 종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자신의 영을 그 종에게 부어주셨다(사 42:1). 그 종이 세울 정의(1, 3, 4절)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숱한 왕들이 못한 일, 즉 정의로 통치하는 일을 해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실 것이기에 이 일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6–9절). 이사야 1–39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 종이 정의를 세워가며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두 번째 노래: 그는 선지자다(사 49:1–7)두 번째 노래에서 그 종은 자신이 이스라엘(5절)과 열방에게(6절)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라 말한다. 이 노래의 서두인 1절에 나온 “들으라”는 이 노래의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동일한 말로 지속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 부르셨다(사 48:1, 12, 16). 그 종은 똑같은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과 화살의 이미지(2절)는 그 종이 선지자로서 선포하는 말에 정확히 꿰뚫는 힘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여 그의 선지자적 능력을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과녁을 정확히 맞출 것이다. 이에 더해 그 종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받은 부르심(1, 5절)은 그가 행할 과업이 지닌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비교: 렘 1:4–10). 이러한 것들이 그 종이 누구인지를 더 자세히 보여준다. 그는 한 명의 선지자다. 그러므로 그 종이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그 종마저 거부할 것이다(7절). 이 사실은 다음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세 번째 노래: 그는 순종하셨다(사 50:1–11)세 번째 노래의 주제는 그 종의 순종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이사야 1–12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후에도 이사야는 계속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상기시킨다(사 42:18–20; 48:18–19).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그 종이 세 번째 노래를 통해 무대에 등장한다(4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4절), 그의 귀를 깨우쳐주셨고(4절), 불순종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5절)는 사실이 그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 종의 완전한 순종(5절)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거부하게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던(49:7) 두 번째 노래로부터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폭력을 당하는(50:6) 세 번째 노래에 이르기까지 긴장이 상승하는 것이 보이는가? 하지만 그 종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도우심에 의지해 이를 견뎌낼 것이다(7절). 그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했던 것과 해내지 못했던 것을 다 이루고 해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완전하게 순종할 것이다.네 번째 노래: 그는 우리의 대속제물이시다(사 52:13–53:12)51–52장은 흥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소망, 기뻐함, 즐거워함, 그리고 감사함을 주신다(51:3). 그의 구원은 영원히 있을 것이고(51:6, 8, 11) 시온은 다시금 아름다워지고 강대해질 것이다(52:1–10). 네 번째 노래는 바로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보여준다. 네 번째 노래를 통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구원은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을 많이 들어봤지만 이 시가 사실 매우 정교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이 노래는 다섯 연으로 되어 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각 연은 세 절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가운데 연(사 53:4–6)이다. 이 정점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그 종이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우리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고난을 당하실 것이다. 그 종이 당하는 고난은 이 중간 연의 앞과 뒤에 나오는 연들에 의해 강조된다(53:1–3, 7–9). 이 두 연에서 보는 바 그가 홀로 이 고난을 감당하시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종의 무죄 판결(vindication)을 암시하는 이 노래의 서두(52:13–15)와 결론(53:10–12)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이 시는 피라미드 모양처럼 재배열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을 통해서 올 것이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일에 싸인 그는 누구인가 이사야를 주의하여 읽었다면 이스라엘 자신이 “종”(사 41:8–9)이라 불린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종이 누구인가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종”이라 불리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그’ 종은 바로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고, 무엇보다 신약 저자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종은 누구일까? 첫 번째 노래는 마태복음에 인용되었다(마 12:18–21). 마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 첫 번째 노래의 성취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사역은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노래는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예표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예: 마 5–7). 그 종이 전하는 말을 칼에 비유한 구체적인 심상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에게 분명히 적용된다(계 1:16; 19:15, 21). 순종이라는 넓은 주제에 대한 세 번째 노래는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다(비교: 마 5:17). 수난에 대해 말하는 이사야 50장 6절은 예수께서 감당하실 고난을 나타낸다. 네 번째 노래는 신약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본문도 이것이다(행 8:26–40). 사도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에 대해 쓸 때 이 네 번째 노래를 암시했다(벧전 2:22–25).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네 번째 노래를 읽다가 빌립에게 묻는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행 8:34). 빌립의 분명한 대답은 이사야가 말하는 이는 타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사야 자신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였다(벧전 1:10–12). 이사야서 종의 노래에 나온 베일에 싸인 이. 신약은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o’s the Mystery Guest in Isaiah’s Servant Song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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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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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리 시대, 어떻게 설득할까?
by Brett McCracken
2020-07-01
현재 목격하고 있는 인식론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진리가 이성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다수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차원의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개인적 차원에서 느낌으로 발견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내게 진리로 느껴지는가의 여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진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진리”로 나의 진리를 위협하지 않는 한, 나의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진리에 관한 다른 사람의 이해가 내 생각과 충돌하는 경우, 과거에는 서로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토론을 나눴다. 그러다보면 다른 생각이 내 생각에 도전을 주고 또 내 사고를 전환시키기도 했다(물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는 진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아예 침묵한다. 또는 아예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고집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처럼, 트위터를 통해서 상대방을 향한 유치한 욕을 퍼붓는다.SNS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보면 이런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들자면, 해리 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Rowling)이 최근 트위터를 통해 생물학적 성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온건한 주장을 내놓았다. “성 개념을 지워버리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을 할 기회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미움으로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뤄졌고, 내가 여자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나는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군중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롤링이 이해한 진리를 싫어했고, 그녀가 트랜스젠더를 증오(transphobic)한다고 주장했다. 롤링의 말 속에 담긴 논리에 관심을 갖는 대신, 비난자들은 롤링을 악마로 취급했다. 고작해야 다음과 같은 답글을 반복해서 달았을 뿐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자도 같은 여자다.” 마치 같은 말을 여러 번 쓰면 그게 사실이 되고 자동적으로 롤링의 논리가 반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트위터에서든 아니면 뉴욕타임즈 뉴스룸이든, 우리는 점점 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와 관련한 논쟁을 거부하거나 그런 주제 자체를 무시하려고 한다. 이런 변화는 탈진리 시대를 살아가는(post-truth trajectory) 우리에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진리를 주장하고 또 진리를 보존해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취약함이런 시대가 도래한 데는 복음주의자들도 나름 한 몫을 담당했다. 다른 목소리는 아예 내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위협적인” 생각과 대면하는 것을 무조건 피하기만 하는 태도는 단지 세속적인 진보주의자들만이 아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가 가져다준 “세상적인(worldly)” 사고에 관한 근본적인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복음주의 부모와 목사 그리고 단체들은 그 사고와 대면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책임지는 사람들이 잠재적 해가 되는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까하며 보호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건 몰라도 복음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에게 쏟아지는 반지성적이라는 비난이 비록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그것은 애초에 예정된 결과기도 하다. 한편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신학 사상을 강조하는 대신 믿음이 가진 치유적 측면과 감정적 체험을 강조했다. 취약한 교리 학습과 어려운 교리에 대한 회피는 자연스럽게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종교적 정체성이 감정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당연히 더 취약해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만난 기독교인은 당연히 믿음이 가진 지적 측면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는 기독교인이 발을 디디고 있던,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허약한 믿음의 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deconversion accounts)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너무도 많이 목격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인 대화 그리고 믿음의 내용에 관해 조리있게 설명하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이 비판하는 “지적 교만에 빠진 세속적인 사람들(secular snowflakes)” 만큼이나 취약한 존재가 되었다.“안전주의(safetyism)”가 주는 매력과 취약성에 대한 가정은 세속적인 좌파와 종교적인 우파 모두를 유혹한다. 우리는 다 공개된 공간(village green)에서 종종 혼란을 주고 진을 다 빼는 이교성을 함축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거품과 메아리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더 선호한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매일 만나는 나쁜 뉴스와 분노로도 충분한 상황에, 굳이 사람을 더 힘들게 자극하는 새로운 주제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이미 트라우마에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수 인종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도록 꺼놓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일한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드럽게 진리를 항변하는 세 가지 방법 진리를 쫓는 길이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데 굳이 불필요한 어려움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는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온라인 멍청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생각이 도전 받는 것을 결코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중간 지대가 있다. 기독교인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추구할 때, 담대하면서도 동시에 친절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말투(tone)에 신경써라아무리 조심해서 전달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진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이 말하는 성 윤리(sex ethic)를 아무리 잘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미움과 편협함 그리고 위협이 되는 진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투로 전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주제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고 나아가서 이성적인 대화로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공격적인 전달은 필연적으로 강한 반발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공감적인 이해심과 친절함 그리고 존경심으로 무장하고, 또 논리적이면서도 사랑으로 전달하는 경우라면(벧전 3:15), 어려운 주제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 4:18). 이런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을 단숨에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대화는 아마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어려운 주제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었다고 해서 그가 항상 대화의 시작을 어렵고 딱딱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비난이 아닌 초청하는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말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2.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라오늘날 토론에서 아무리 진리를 선포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단지 선포만 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배울 마음이 없는, 가르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선생일 뿐이다. 자칭 “전문가”가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겸손과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의 가르침이 단지 말을 아예 하지 말거나 또는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 주제가 아무리 듣기 힘들더라도 듣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단순히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에 도전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을 무시하거나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그런 세상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기독교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압두 머레이(Abdu Murray)는 이렇게 썼다. “탈진리 시대를 맞아서, 증거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나 의견과 일치하면 모든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증거는 아예 용납될 수 없거나 불쾌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런 증거는 이제 얼마든지 건전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토론까지도 무력화시켜 버린다.” 나름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독교의 진리와 다르다는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에 직면한 기독교인의 경우, 비록 그 주제가 우리를 자극하고 감정적인 스트레스까지 유발하더라도 대화를 피하거나 또는 무조건 공격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들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진 의미 중 하나를 실천하는 길이다(눅 10:27).3. 상대방의 모든 주장에 다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부분에 반대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비난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방식을 보면 하나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다 조금씩 합쳐놓은 형태다. (1) 누군가에 대해 절대적 최악으로 생각하기, (2) 밉다는 딱지를 붙이기, (3) 나와 어떤 부분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와는 결코 공통 분모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하기. 그러나 우리의 취약성이 가져다준 이런 증상은 사회에 만연한 자기 방어와 불신의 기운을 증폭시킬 뿐이다.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내용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일정 부분에는 동의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도 그 사람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 의견에는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일부분에서 서로 동의하는 누군가와 얼마든지 손을 잡고 협력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개혁주의 기독교인이라면 일반 은총의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 완전히 틀린 생각을 하는 누군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부분이 가진 중대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나와 같지 않으면 완전히 적이라는 식의 당파적 극단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부분에서 보다 더 상대를 향한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입법과 같은 주제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다. 설득을 다시 한번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자사회는 지금 무서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설득의 가능성을 거의 다 포기한 상태다. 즉,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다 지성의 힘을 모아 너와 내가 전혀 다른 진리가 아닌, 진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설득의 힘을 포기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단지 권력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는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를 포기할 때,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정치 뿐이다. 이 세상은 이제 누가 또는 어떤 당이 리더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진리에 충실해서 살도록 강요받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능적 무신론자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으며, 그 대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쥐기 위해 경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오직 진리를 알 때만 만날 수 있는 참 자유는 이런 식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요 8:32). 이것은 허무하고 위험하다. 이런 접근법은 단지 문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미국을(다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설득의 과업이 다시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임시적인 그 어떤 정치적 이득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 그 자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it the Echo Chamber. It’s Time to Persua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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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개념
해리포터
진리
증오
성령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6-25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서 성령님도 믿게 된다.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고대의 성령훼손당과 몬타누스주의 등의 이단들을 생각해 보라.) 유난히 성령님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과연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지를 살피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님에 대한 생각이 과연 성경이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성경적 성령님과 바르게 관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다.질문 1: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십니까?”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같은 타종교인들이나 여호와의증인이나 미국의 ‘크리스천사이언스’(Chrisian Science)라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사이언스’라는 이단에서 유행시킨 것 같이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바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는 그 이름과 달리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1894년 미국 보스턴에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가르침으로 첫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6년경에는 27만 명까지 성장했으나 그 후에는 교세가 약화되어 2009년에는 5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그리고,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질상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께 명령을 한다든지, 자신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듯 하는 것은 결국 성령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과연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참으로 신실한 사역자들이 늘 그리했듯이 용어도 “성령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심령에서 그렇게 성령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써야 한다. 그저 용어만 성령님이라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중에서 표현하듯이 “하나 안에서 삼위가, 또 삼위 안에서 한 하나님이 경배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이남규, ‘신조학’ 합신대학원출판부). 성령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아뢰고, 경배해야 한다.질문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존숭하는 것 같이 성령님을 존숭하십니까?”마음 깊이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만큼 존숭(尊崇)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백하게 이교적이거나 이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령님이 성부(聖父) 하나님이나 성자(聖子) 하나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가 자신의 심중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하나님의 경륜상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성자께서 성부보다 낮은 위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듯이,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시고(요 15:26) 그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낮은 위격이 아니다. 위격상의 동등과 경륜상의 복종을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순종의 형태가 보이지만 그 위격에 있어서 삼위는 동등하시다.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우리들은 잘 들어야 한다. 오순절에 교회 공동체에 임하여 오신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기때문에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행 5:9) 하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서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행 5:11)했다(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이레서원).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고전 3:16; 고전 12:13; 엡 2:22)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존숭해야 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 삼위 안에서 아무도 더 먼저 있거나 더 나중 되지 않으며, 아무도 더 크거나 작지 않다. 다만 세 위격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동등하시다”라고 고백했다. 질문 3: “성령님께 순종하십니까?”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핵심적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까?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다른 것, 특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이해하고 성령님과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됨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 성경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야지,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시고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4-15)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일차적으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보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요 14:26) 방식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려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 15:26; 요 16:13-14).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알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했다(고전 2:13). 둘째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성령님을 따르는 것을 동의어로 놓고 논의해 간다(롬 8:4-14).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했으니, 중생하여 하나님을 참된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이다(롬 8:16). 이것은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여 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부르짖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며, 그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아갈 때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질문 4: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십니까?”우리가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표현하는지 아닌지 다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다. 우선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우선 성자께서 아버지, 즉 성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 특히 성부로부터 성령님이 보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말의 “나오신다”(proceed), “나오심”(proc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발출(發出) 등으로 쓰면 안 된다. 특히 고대적 상황에서는 그렇게 쓰면 고대 교회의 대표적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출설과 혼동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현세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는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따라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의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부님과 성령님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계속 쓰다 보니 과거 동방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하시다는 종속설, 즉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하신다는 견해, 즉 성부가 좀더 높으시다는 견해를 자꾸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종속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모인 ‘톨레도 제3공의회’(589)에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고 표현하여 “성자로부터도”라는 어귀를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더 넣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성자가 더 못한 분이라는 종속성을 막고, 성경을 따라 성령님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표현하는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서방 교회의 전통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 제12항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다.“우리들은 또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고 고백합니다.(성령님은) 만들어지신 것도 아니고, 피조된 것도 아니고,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질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지만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권위와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우리들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지를 묻고, 더 나아가서 그 성령님께 과연 순종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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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약속하는 우리의 회복
by Petar Nenadov
2020-06-17
“우리 오늘밤에 나갈 거예요 아빠?” 앞줄에 앉은 여자아이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일단 착륙하면 호텔을 알아보고 저녁을 먹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디즈니에 갈 거야.” 아빠가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오빠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마침내 디즈니월드에 가게 되었다며 어린애다운 흥분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나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애비(Abby)라는 여학생이 떠올랐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애비는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애비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열여섯 살 된 학생인데, 최근에 암 진단을 받았다. 일 년 육 개월 전, 감기 증상인 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몸에 백혈병이 있어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나는 디즈니에 가 보려고 올랜도에 간 것은 아니었다. 로젠 싱글 크리크(Rosen Shingle Creek)에서 개최되는 TGC 내셔널 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그 도시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공항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오하이오에서 올랜도까지 나 같은 사람들이 발길을 옮길 만한 공원이라든가 관광지에 대한 광고조차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줄곧 강연을 듣는데, 비행기에서 앞줄에 앉아 떠들던 그 아이들의 기쁨과 언젠가 애비도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이 마음속에 수시로 찾아들며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소’라고 불리는 디즈니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기쁨과 바람을 가져다주는 것일까?’고통과 위로디즈니는 오래 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과 제휴를 맺어 왔다(역주: ‘메이크어위시 재단’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취지 하에 1980년 설립된 미국의 자선 단체로서 두 살 반에서 열여덟 살에 걸친 환자들의 신청을 받는다). 이 재단에 신청되는 소원 가운데 디즈니월드와 같은 리조트에 가는 일은 여전히 인기가 제일 높다. 그런 목적에서 ‘기브 키즈 더 월드 리조트’(Give Kids the World Resort)도 운영되는데, 이곳은 생명에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아이들과 가족들이 환상적인 휴양을 일주일 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70에이커 규모의 비영리 시설이다.애비는 ‘메이크어위시’에 당첨되면 어떤 여행을 할 수 있는지 홀리(Holly)라는 자매를 통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홀리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자매로서 암 투병을 하고 있는데, 8년 전 ‘메이크어위시’에 선정되어 디즈니에 가게 되었다. 홀리와 그 가족들은 암이라는 질병과 그 치료 과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여행과 같은 바람이 환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는 도중에라도 바라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아이들이 ‘메이크어위시’에서 하는 일을 알게 되면, 당연히 흥분되어 가슴이 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꿈에 그리는 여행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말인즉슨 그 아이들이 악몽과 같은 삶을 살아왔음을 뜻한다. 그 여행은 아이들이 겪어 온 아픔과 고통에 대한 위로를 상징한다. 어떤 아이들은 여행을 할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 더 많은 후원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혹 여건이 된다면, 당신도 그 재단을 후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그러한 위로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소망을 제시하는 것일까?부활과 회복내가 참석했던 TGC 컨퍼런스의 마지막 시간이 되자 팀 켈러(Tim Keller)가 나와 누가복음 24장을 해설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내포하는 독특한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24장 40-43절을 다루었는데, 그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0-43).켈러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 식사 장면 속에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을 지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꿈 속에 나타나거나,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신 게 아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손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며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일은, 장차 새롭게 될 세상에서 새롭게 될 육체를 가지게 될 부활의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위로 그 이상을 약속한다. 곧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활은 사실상 우리가 상실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 준다.”당시 켈러는 독신으로 있는 지체들과 어려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했지만, 나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남매와 지금도 자신만의 ‘메이크어위시’ 여행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우리 아들은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할 거야’, ‘우리 딸이 병원에 갇혀 고등학교도 못 다니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는 모든 부모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 모든 자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이 있음을 확신했다. 곧 새로워질 세상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했다.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믿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어떤 좋은 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진정으로 좋은 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들려주는 좋은 소식은 세상이 들려주는 나쁜 소식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보장한다.애비의 몸에는 암이 있지만, 암이 애비를 다스리진 않는다. 예수님이 애비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그녀는 수시로 손을 들어 그분을 찬양한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보며 경배했던 이들처럼 말이다(눅 24:52).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이 들려주는 회복의 약속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약속이 제시하는 기쁨도 이 세상의 어떤 일시적인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가져다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storation: the Promise of the Resurrec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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