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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by Don Carson
2022-12-13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선하고 충실한 사람인지, 그의 생애와 시대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 구약 본문이 무려 세 군데나 있다(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사 36-39장).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토라의 가르침에 맞게 나라를 개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히스기야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앗시리아 왕 산헤립과 맞섰을 때 드러난 히스기야의 놀라운 용기와 신실한 믿음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세 본문 중 그 어떤 것도 히스기야가 저지른 도덕적 실패를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특히 두 본문(열왕기하와 이사야)은 그중 하나를 탁월한 슬픔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논의를 위해서 이사야 39:1-8에 초점을 맞추고, 다음 세 가지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도덕적 대조다른 많은 성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장은 놀라운 정도로 도덕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야서 36-37장은 히스기야의 믿음과 용기를 전해준다. 이사야서 37:14-20에는 그의 특별한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등장하는 징징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진 38장 속 히스기야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실망한다. 게다가 이사야 39:1-2은 바벨론 사절들에게 어리석은 자랑을 일삼는 그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39:5-7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책망이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선하다가 악해지고, 현명하다가 어리석어지고, 그토록 하나님 중심이었다가 돌연 자기중심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래도 영웅이라면 좀 더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대조는 놀랍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가 이사야서 39장을 구약에서 가장 슬픈 본문 중 하나로 만드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최상급으로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물론 충분히 슬프긴 하지만 확실히 가장 슬픈 건 아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수치스러운 거짓말로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치며 독선적인 분노로 좌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은 또 어떤가? 실로 죄가 많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자행한 자이다. 신약성서 속에서 예를 찾는다면, 당장 베드로를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지만,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사실, 성경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인물도 있다(예: 요셉, 다니엘, 에스더).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삶 속에서 실망스러운 모순과 뿌리 깊은 대조를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이다. 섭리의 왜곡겉으로 보기에 히스기야는 섭리의 교리를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은 바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섭리를 왜곡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향해 존중을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욕심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이스라엘을 찾은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그는 부요함을 자랑함으로 왕국을 위험에 빠뜨린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를 꾸짖으셨고 앞으로 있을 비참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너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너의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빌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사 39:6). 더욱이 임박한 재난은 개인적인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 가운데서 더러는 포로로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사 39:7).히스기야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사 39:8). 언뜻 보기에 히스기야는 마치 하나님의 뜻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록 심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8절 후반부는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왕국 앞에 놓인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justice) 앞에서도 여유를 부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은 안전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사 39:8).심판의 위협 앞에서 전혀 달랐던 다윗의 반응간음과 살인의 여파로 다윗은 왕국에 심판이 닥칠 것이며, 더불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다윗은 죄를 회개했고, 선지자 나단은 선언했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삼하 12:13-14). 그리고 다음 주 아이가 사투를 벌이는 내내 다윗은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먹기를 거부했다. 아기는 결국 죽었고 다윗의 시종들은 주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 주저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소식을 알게 된 다윗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과 로션을 바르고는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종들에게 다윗은 자신이 히스기야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삼하 12:22-23)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선언을 들은 다윗은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단지 원초적인 의지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교류하시는 자비로운 분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아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스기야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인식했고, 이미 선고된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그의 진심은 이기심이다. 히스기야는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후손 중 일부가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거세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산헤립과도 대적했던 이 왕은 이제 자신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자녀와 손자까지도 돌보지 않는다. 한때 이 왕에 대해서 이런 평가가 있었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그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왕하 18:5-7).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안락함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끝난다. 이 이야기에는 슬픈 신랄함이 있다.심판과 소망히스기야는 이사야 40-66장의 위대한 주제 중 하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슬픔을 주는 이사야 39장은 예언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북소리 중 하나를 발표한다. 선지자의 초점은 영적 활력과 파멸적인 정죄 사이를 계속 오간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다(사 43:14-2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헛된 우상을 섬기며(사 44장) 죄악과 불의를 따른다(사 59장). 예루살렘은 회복되고(사 44:24-28; 51:1-16; 54장)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겠지만(사 48:12-15; 49:8-21), 구원에는 심판이 따른다(사 65장).마지막 두 장에도 심판과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무시무시한 실패와 죽음이 있다.개인이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 전체이든, 우리는 용감한 믿음의 본보기는 따르고 타오르는 이기심의 본보기에 대해서는 슬퍼하도록 명받았다. 높으신 주님의 음성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이 글은 Themelios 47, no. 3 (December 2022)에 실린 같은 제목의 논문을 간추린 것입니다.원제: One of the Saddest Texts in the Old Testa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스기야
다윗
이기심
섭리
이사야39장
홉스와 이사야: 역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
by Dennis L. Sansom
2022-12-05
1990년과 1991년, 두 번에 걸쳐서 나는 1월 학기 동안 학생들을 그룹으로 만들어 스위스와 독일로 데려갔다. 두 번 다 우리는 악명 높은 집단 수용소 다하우(Dachau)에 갔다. 최소한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악이 발생한 곳에 서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주유소 옆에 선 채로, 수천 명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악으로 물든 이 땅에도 푸른 풀이 자라고 잔잔한 개울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제수용소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일이 번영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인간이 문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다시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 뒤에는 사실 더 큰 질문이 있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가 내놓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대조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영원한 갈등에 대한 홉스의 설명홉스는 1642-51년에 걸쳐서 지속된 격동의 시대, 파괴적인 영국 내전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했던 그는 그 극복을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썼다. 그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길들이고 정의를 보장하는 독재 통치자를 옹호했다.홉스에게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하는 끊임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악하고 잔인하고 또 짧은” 인생이다. 우리는 밤마다 문을 꼭 잠가야 하고, 행여라도 극악무도한 적과 함께 방에 갇히면 권총을 꼭 쥐고 있어야만 한다. 이토록 무서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두 가지 자연법칙뿐이다. 첫째,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둘째, 인류의 갈등 성향을 고려할 때, 자기방어는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따라서 정부는 순응을 강요해야 하고, 거친 반대자를 진압할 권한을 가진다. 홉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과 민간인 2,200만 명이 사망했고, 2,3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전쟁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고작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전쟁이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발했다.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8,500만 명이 죽었다.전쟁이 가져다준 참상을 겪은 인류는 이제 대량 학살을 중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또 한 번의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소비에트 연방, 중국, 그리고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공산주의 정권의 폭정 아래 무려 6,000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이제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직면했다. 20세기만 봐도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전쟁을 도발하려 하거나 전쟁 도발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라는 홉스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평화와 문명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홉스가 옳다. 인류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파괴하는 세력인 것이다. 이사야의 긴 이야기또 다른 기록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위대한 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예언적 해석으로 읽힌다. 이사야서가 기록된 시대는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어서 바빌론이 기원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대 민족이 전쟁으로 파괴된 혼란의 시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홉스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시대가 가져다준 분노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며 정의를 위해 여전히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사야는 더 긴 줄거리를 바라본다. 칼과 창이 변하여 괭이와 낫이 되는 날, 세상의 모든 은혜가 예루살렘에 이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함께 나누는 재물, 서로를 향한 존경,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를 향한 사랑을 모두가 누리게 되는 날을 향해서, 지금도 여호와는 한 발 한 발 인간 역사를 심판하고, 움직이고, 또 인도하신다. 이사야 58장과 61장의 환상에서 이사야는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며 거리를 복구하는 특별한 무리의 활동을 설명한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적 섭리 사역에 동참하여 역사의 상처를 회복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증오와 폭력의 잔해를 극복하고,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며, 만인이 참 주님을 올바르게 영접할 수 있도록 사회를 준비시킨다. 전쟁은 최종 결론이 될 수 없다이사야에게 전쟁은 현실적이고 끔찍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다. 인류 역사와 민족의 운명이 품고 있는 진짜 주제는 하나님의 손이 멸망의 세력을 이기고 인간을 본래 창조된 목적으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신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위대한 지휘자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종 파괴로 얼룩진 불협화음의 악보 너머로 그의 백성이 공동체 생활을 축하하는 장대한 크레센도의 화음을 내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게 하신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하는 것을 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멸망의 세력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의, 그리고 화평과 인간의 성취를 위해 씨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또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힘을 이사야가 예언했다. 회복의 힘은 폐허를 수리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무너진 곳을 고치고, 나아가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사야의 믿음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절망하는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한 아편이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회복의 원리에 대한 이사야의 믿음은 홉스가 주창하는 파괴의 원리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학자연과 인류 역사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목적(teleology)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다하우 밖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풀밭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2007년, 나는 노르망디 해변에 갔다. 오마하 해변에서 우리는 1944년 6월 6일, 거의 2,400명의 미군이 죽거나 다친 곳에 서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고 손실인가? 하지만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해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날 늦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의 하나인 미국인 묘지에 갔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노르망디와 다하우 같은 곳이 (그리고 인류 역사의 다른 수천 곳이) 회복되고 재건되고 또 치유될 수 있는 걸까? 두려움과 파괴와 전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회복이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경험에서 희망이 완전히 증발한 적은 없었다. 문명은 계속된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하나님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파괴는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악은 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혼돈 속에서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금도 씨름하고 계신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당신과 나는 지금 어느 쪽에 기여하고 있는가? 원제: 2 Competing Visions of Hi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역사철학
역사관
홉스
이사야
리바이어던
전쟁
세계대전
갈등
폭력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신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그 나라를 발견하다
by Stephen Witmer
2022-12-0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어린 나이에 회심한 나는 교회에서 자랐다. 강해 설교를 들었고, 주일학교의 부직포 그림들을 보면서, 또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 수련회의 성경 구절 빨리 찾기 시합을 통해서 내 신앙의 기본기를 다졌다. 할머니의 권유로 나는 십 대 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기독교 대학에 들어가서는 부전공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그래서 이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꽤 많은 성경 구절을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성경을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구원의 메시지를 완전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목회를 준비하는 중에 나는 그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특별한 문장을 만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스캔들이 되셨을 때조지 래드(George Ladd)가 쓴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신약신학)을 어떤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문장이 들어있는 장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확실하게 다 읽었다―은 내 상상력에 불을 붙였고,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와 내 삶에 대한 이해를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구약성서와 유대 묵시문학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대의 끝을 가져오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불의한 자들의 멸망으로 인간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와 하나님 나라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기 전에, 선과 악이 뒤섞인 사회가 계속되는 현시대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다스릴 미래 시대의 권세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이미 도래했다고 단언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94)이 글을 읽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성경을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라는, 다소 정적인 기록으로만 읽었다. 중요한 성경 속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더 큰 줄거리,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계획,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구속 사역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래드는 내가 미처 모르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담긴 역동성과 진보성을 보여줌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나는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 동시에 얼마나 듣기 거북한 소리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기적을 행하고 또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한 것은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과 대결은 어릴 때부터 들어서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 내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래드이다.래드의 눈을 통해, 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듣기 거북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 때에 드러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 나라를 작고 숨겨진 겨자씨에 비유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물, 겨자씨, 누룩에 관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래드의 가르침은 이미(already) 도래한 나라,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나라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무려 이십삼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의 흥분과 만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보다 훨씬 큰래드의 가르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초림 속에 담긴, 역사를 뒤흔든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래에 있을 새 창조를 확실히 보장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때를 이루는 첫 성취의 문을 여셨다. 그때까지 내가 성경을 읽은 방식은 거의 다 개인 차원의 적용을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고, 그런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러던 내가 비로소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우주적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예수님의 새로움이 내 가슴을 때렸다. 또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절정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깨달음은 내가 지성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더욱 높이도록 했다.이미 시작된 종말론이 가져다준, 라드로 말미암은 지적 자극은 깊었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자극 덕분에 나는 신학교에서 성경 신학의 풍부함에 푹 빠질 수 있었고,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이 어떻게 성취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춘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삶의 이유를 알게 되다신약성경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넘어, 래드는 내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중복되는 시대와 관련한 라드의 유명한 다이아그램―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겹치는 “현재 시대”와 “다가올 시대”의 선―을 보면서 나는 내가 살았던 곳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당신이 있는 위치는 바로 여기입니다”라는 표시가 붙은 쇼핑몰의 지도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이 왜 나를 의롭다고 하시고 또 성령께서 지금도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지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왜 여전히 죄와 고통스러운 투쟁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왜 내 속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서 성적인 이미지를 접하고 싶어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런 나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우는가? 겹치는(overlap)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그것은 또한 내 삶에 영향을 미쳤던 고통의 슬픔도 설명했다.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아버지는 지금도 휠체어를 타고 있는가? 왜 불안은 지금도 나를 때때로 마비시키는가? 겹치는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한 건 아니지만, 죄와 성화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했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와 절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주었다.삶의 목적래드를 만나고 이 년 후, 나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맑고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나는 대서양 옆 매그놀리아의 바위 위에 앉아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가 쓴 신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다.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 즉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장소이다. 바울의 모든 윤리적 판단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다. … 두 시대 사이의 시간을 충성되게 산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 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지나치게도 너무 적게도 주장하지 않으며 도덕적 분별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윤리적 비전, 58-59쪽)이 구절도 내게는 삶의 목적을 보여주었다. 래드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매우 중요하고 내 인생을 형성하는 글이 되었다. 내 속에 목사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회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로 또한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말세에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쓰시는 권능의 초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목사라는 소명을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만든다.윤리와 종말론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나라에서 사는 삶) 자체가 우리의 일상생활 방식을 형성한다는 나의 확신을 헤이즈가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존재가 가진 중간적 본질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하나님의 능력은 이미 동이 튼 말세의 새벽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지만, 완성된 새 창조는 여전히 미래이다)이, 그리고 현실이 가진 실질적이고 윤리적이고 또한 일상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도록 하는 데에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 내게는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이다. 나는 헤이즈의 책 뒷장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내 삶의 목적이다.”삶을 바꾸는 신비 나누기그 이후로 나는 내가 찾은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미래에 관한 화려한 묘사를 통해 지금 이 땅에서 고통받는 신자를 격려하는 책이다. 나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좀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길지 않은 책을 한 권 썼다. 지극히 선한 미래의 새 창조가 결국에는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미래의 새 창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면서도 동시에 인내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 그리고 흥분되고 좌절되는 긴장 속에도 무한한 가치가 있음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신학교 학생을 가르칠 때, 이미 시작된 종말은 항상 반복되는 주제가 되었다. 십사 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성경의 줄거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의 우주적 중요성,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성취에 근거해서 미래의 새 창조가 온전히 우리 소유가 되었음을 실제 삶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 되어 예수님이 확보하신 권세와 축복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맛보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더불어 그의 은혜로, 하나님이 품으신 모든 계획을 만족시키는 은혜의 절정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은 사람이 풍성하게 누리는 데에 작지만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원제: A Mystery Made Sense of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조지래드
하나님나라
이미와아직
종말론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의 지평
by 최창국
2022-11-29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에토스 함양에도 중요한 문제다. 용서는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피해자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고 용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 용서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스런 감정을 수반하는 프락시스(praxis)다. 하지만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용서를 말하고 베푸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용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말한 용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통하여 단지 윤리적인 의무만을 강조하게 될 때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의 역동을 간과할 때 흔히 발생한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분별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지평만이 아니라 사법적(judicial), 심리적(psychological), 그리고 관계적(relational) 지평까지 포함하는 매우 역동적 주제이다. 사법적 용서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주체이며, 피해자의 부정적 긍정적 감정인 분노와 분개와 자비 등과 관계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즉 가해자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용서이다.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를 단순하게 윤리적 프락시스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용서에 관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마 18:22).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용서의 당위성과 윤리적 실천만을 강요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피해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적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다짐해도 미움과 정죄와 분노가 떠올 수 있다. 인간은 상처나 피해를 받으면 분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피해자의 마음의 치유 없이 용서의 실천만을 강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은 윤리적 차원이나 관계적 차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상황적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용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자가 되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의 정신과 용서하는 자세를 함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용서가 등장하는 맥락은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용서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료의 애절한 청은 거부하고 자신의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가 베풀어진 방식이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 18:33). 하지만 이 질문은 수사적으로 표현된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보상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 보상이나 이익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치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광의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 18:21)라며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반면, 예수님은 이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대답함으로 베드로의 질문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양적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가 마음과 자세의 문제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즉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게 되면, 용서의 상황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상황적 문제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용서의 미묘하고 복잡한 차원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용서하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도덕 기준과 양심, 그리고 정의감을 모두 무시하고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으므로 너도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를 묻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 할 수 없을 때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용서의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악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해자에 대한 보복의 논리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틀에 박힌 정형화된 공식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자유로움의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다. 용서는 그 특성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역동성을 지닌다.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자 관계적이고, 개인적 문제이자 공동체적이며, 역사적 문제이자 상황적이다. 따라서 모든 용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용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용서를 개인의 분노와 분개의 차원이나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가해자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 용서는 복잡한 맥락, 즉 일종의 영적, 윤리적, 관계적, 생태계 안에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용서가 무조건 상황에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가 상황을 전환시킬 힘을 지닌다는 의미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243).용서는 단지 피해자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다. 즉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다.용서의 여정은 보편적으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된다. 즉 피해자의 자기 분화 수준과 피해의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용서의 여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용서는 피해자의 분노가 해소될 때 발생하며, 그 여정은 고통스럽고도 긴 여정이다. 따라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발생 원인과 분노 해소 과정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며 생명력의 표현이다.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이다. 용서와 분노 같은 감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양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다.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의 분노나 상처가 완화되고 치유될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 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질 스코트(Jill Scott)는 용서를 “정당한 복수에 대한 회의에서 용서에 대한 중립적 수용을 거쳐 가해자에 대한 충일한 인간애”로 전진하는 일종의 연속체로 보았다. 그녀는 이어 “그러므로 용서의 실천은 끊임없는 소소한 제스처와 의도들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 외에도 용서의 스펙트럼 안에는 분개심과 복수심 같은 감정들도 같이 들어 있는 까닭에 용서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감정들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수년이 지난 후에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고 하였다(Jill Scott, A Poetics of Forgiveness, 199).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언어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인간의 용서는 의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해도, 상처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가 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지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서의 부정적 긍정적 반응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용서를 개인의 의지적 결단과만 관련시킬 때 정서적 상처로 인하여 용서가 쉽지 않은 사람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의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정서적 여정과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광의적인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문제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의 실현의 문제와도 관계된다. 데이비드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참된 용서는 단지 개인의 화해(reconciliation)의 과정에 이르는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생명력과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용서의 참된 초점은 개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소나 착함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대인 관계의 화해, 온전함과 생명을 함께하는 것에 있다”(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 6-7). 그가 보는 참된 용서의 의미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위성에 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가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격려와 용서의 가능성에로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이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복음을 실현해내는 여정과도 관계된다.
용서
예수님의용서
용서의여정
복수
용서와화해
기독교는 결코 편안한 하이킹이 아니다
by Trevin Wax
2022-11-19
모든 좋은 이야기 속에는 갈등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방랑이 아니라, 가치 있는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물과 도전을 마주해야 한다. 모험으로 가득한 탐구를 지속하려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한다는 약속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이킹할 때 정상에 초점을 맞춘다.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이 지칠 때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맑은 공기 그리고 넘치는 만족감―만으로도 우리는 아무리 지쳐도 계속 산을 오르게 하는 영감을 받는다. 언제나 나아가며인간은 본성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우리 마음에는 목적지가 있다. 휴대폰에는 특정 기술과 지식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많은 앱이 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비디오 게임은 도전과 자극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 몸이 복종하도록 훈련하는 데에는 영감이 필요하다(고전 9:27). 그래서 보통 각종 동호회는 코치와 함께하는 피트니스와 운동 루틴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교사는 학생이 지식을 쌓도록 돕는다. 또한 각종 강사와 코치는 수강생이 새로운 언어나 악기를 배우거나, 또는 운동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더 이상 인격을 성장시키는 것에도, 새로운 취미를 시도하거나, 집과 마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데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삶의 개선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목표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예 야망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슬프다. 왜일까? 인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목표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반면에,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체성의 기반을 오로지 성취에만 두는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산비탈을 하나하나 이루는 작은 걸음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성취를 통한 완벽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루하루를 초조함 속에 살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다른 추구때때로 종교인은 삶의 여정을 산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로, 그리고 정상에 다다르게 되면 마침내 영적 성장과 탁월함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단지 하나님의 하강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강림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일으키시겠다는 목적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상승한다. 십자가 저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정상을 향한 길과 닮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정 또한 모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어려움을 예상해야 한다. 신약은 믿음의 경주를 장애물 경주로 묘사한다(갈 5:7, 살전 2:18, 히 12:1). 정상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기에 설렌다. 그 여정에 좌절의 위험이 없다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장애가 없다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항상 존재하는 진짜 위험이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동네 주변을 생각 없는 걷는 편안한 산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가치 있는 목표일수록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마라톤을 뛰기 위한 훈련을 하든 간에, 힘들수록 따라오는 대가는 가혹하다. 성공을 맛보고 마음과 몸을 변화시키려면, 미래에 만날 나의 모습에 대한 비전을 확고히 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참회의 길당신이 나와 같다면, 미래의 자신을 생각할 때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위축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결점과 실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힘들어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모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계속 걸려 넘어지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학교라면, 지금 내 수준은 잘해야 간신히 합격하는 정도이다. 교회가 병원이라면, 지금 입은 상처와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차마 건강한 내일의 나를 꿈꿀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라! 자기 평가는 원래 좋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신의 눈에는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만드는 남아 있는 죄가 더 잘 보일 것이다. 거룩함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높은 산일수록, 정상은 더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 또 충실하게 걸어간, 과거의 신앙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당신은 결코 그들이 자신의 발전에 대해 자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런 말이 들릴 것이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거 같아.” 그냥 그리스도의 명령 중 몇 가지를 확실하게 지키고, 넘어짐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만을 바랄 것이다. 이처럼 산을 오르는 길은 때때로 절망적일 수 있다.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기독교가 마치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준을 세우는 것 같지만, 동시에 길을 잃은 사람에게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복음은 용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당신의 불의를 덮는다. 엄청나게 높은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 바로 옆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자리 잡고 있다. 급진적 이상은 급진적 자비로 인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그 표준을 낮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표준이 그분의 자비를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실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16세기 전, 교회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잔인한 박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긴장을 직면했다. 그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일부는 생계를 잃었고, 또 목숨을 잃은 이도 적지 않았다.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한 로마의 탄압에는 신성한 종교 문서의 몰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에 일부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포기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약성경을 당국에 넘겼다. 한편, 많은 사람이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고, 그 결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자 핍박 때문에 신앙을 버리거나 성경을 넘겨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들도 회개하면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극심한 핍박으로 흔들리던 사제와 주교가 다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크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북아프리카의 주교인 도나투스(Donatus)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로 명명됨)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귀한 지도자가 집례하는 세례와 성만찬은 아무런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성화와 관련해서 수천 개의 글을 남겼다. 그런 그의 여정은 그를 도덕적 해체에서 도덕적 미덕으로 이끌었다. ‘고백록’에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담한 자기 평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도 도나투스파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결코 기독교의 높은 이상을 낮추거나 죄와의 싸움 내지 투쟁을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야말로 약한 자, 의심하는 자, 그리고 “실패자”를 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소위 말하는 도나투스파 논쟁에서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력을 통해 교회는 거룩함과 자비를 모두 다 옹호했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제 그 길은 회개의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손짓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넘어짐을 덮을 것이다. 복음은 순결하고 건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패배자, 실패하고 나약한 자, 그리고 타락한 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미덕의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은 참회의 길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다. 회개하는 삶이다. 죄인에서 성자로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는 다른 세상(otherworldly) 윤리에 대한 철저한 충성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활짝 열려있다. 성화의 학교는 지금 한창 수업 중이다. 야전병원은 지금도 부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다.이상(ideal)과 적절하게 타협하려면 도덕적 노력이라는 모험의 수준을 낮춰야 한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상을 낮추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악덕을 미덕으로 바꾸는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뭔가 모자란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진 빚으로 왜곡한다. 정통은 죄인을 구원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정통은 죄인을 성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물론 하이킹은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을 오르다 보면 비틀거리기도 하고 또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은혜의 선물을 힘입어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미 나를 사로잡고 있는 정통을 더 굳게 붙잡겠다고 다짐하며 우리는 다시 나아간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실패할 때마다 회개를 잊지 않는다. 미래의 승리로 가는 좁은 길은 현재의 회개라는 길이다. 그 누구도 죄 없이 정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죄 없는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글은 트레빈 왁스가 쓴 The Thrill of Orthodoxy(정통이라는 희열)에서 발췌한 것이다. 원제: Christianity Isn’t Your Usual Mountain Hi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도나투스
박해
고난
인내
성화
칭의
정통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by Ryan Griffith
2022-11-1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attempt great things).바로 이 여섯 글자가 글로벌 선교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 삶의 비전과 방향을 바꾸었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학 3학년 이후 그가 내 인생에서 떠난 적 없는 건 확실하다. 여느 대학생처럼 나도 영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한 지역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했다. 마침내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교회를 찾았을 때, 하나님은 은혜의 강을 여셨고,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변혁적인 영적 성장의 시기를 맞게 하셨다. 하나님이 여신 은혜의 강에서 만난 지류 중 하나가 4학년 때 있었던, 캐리가 쓴 소책자,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 사용할 수단과 관련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질문’(An Inquiry Concerning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 1792)에서 발췌한 이 문장과의 섭리적 만남이었다.나는 우리 교회가 수요일 밤에 주최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전국 대회에서 캐리의 책에서 발췌한 이 문장을 읽었다. 다른 많은 18세기 저작물과 마찬가지로, 캐리의 책 제목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제목 뒤에 숨은 내용은 매혹적이었다.제안에서 사명으로사도들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세계 선교에 대한 검토에 더하여, 캐리는 (그는 거의 전적으로 독학했고, 이중 직업을 가진 목회자였다) 대륙별 세계 복음화 상태에 대한 통계를 수집했다.더 놀라운 점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마 28:18-20)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각종 변명을 다루기 전에, 캐리는 먼저 복음의 아름다움을 간결하게 포착했다는 점이다. 캐리는 이렇게 의아해했다. “지금도 무지와 우상 숭배에 빠진 실로 엄청난 불신자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쉬는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는 건가요?”[1] 글로벌 차원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의무와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의무를 부여한다고 캐리는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대의와 하나님 왕국을 증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2]캐리의 말이 내 마음에 깊이 와서 닿았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일 외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캐리는 내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비전이 글로벌 차원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성경의 비전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만민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가? 그렇다. 그가 지적했듯, 예수님이 주신 대 사명(great Commission)은 결코 대단한 제안(great suggestion)으로 그치지 않는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였고, 거기에 맞게 내 인생의 사명도 바뀌어야만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나의 소명과 상관없이 그분이 온 세상으로부터 영광 받는 것을 나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 것을 의미했다.하지만 빠진 부분이 있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정치적, 기술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의 대의와 왕국을 증진하는 데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바치는” 어려운 일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그런 수고가 완전한 탈진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까?가능성과 의무이런 질문은 캐리에게도 중요했다. 그러나 조금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 중북부의 침례교 목회자들은 거의 교회의 연합을 마비시킨 사고방식, 즉 오순절과 같은 추가적인 성령 강림(사도행전 2장)이 있어야만 열방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명백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움직이시기 전까지는 교회에게 행동할 의무도 또 행동해도 성공할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791년 6월에 노샘프턴셔 목회자 모임에서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와 존 서트클리프(John Sutcliff) 목사는 당시에 성행하던 “미루는 데 급급한 사고”와 복음의 좋은 소식에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불타는 전도의 열심을 주제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3]회의가 끝날 무렵 캐리는 이미 성경에 답이 있는 질문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전도 국가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인가요? 그리고 그게 과연 가능합니까?”[4] 그래서 그의 소책자 ‘질문’(An Enquiry)이 그해 후반에 출판되었다.그러나 내가 처음에 읽었던 발췌 부분은 의무에만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논쟁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했던 부분, 즉 그러한 의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빠져있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그러나 가장 시의적절한 본문‘질문’이 출판된 지 몇 달 후, 노샘프턴셔 연합회 목사들은 캐리의 답변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1791년 5월 31일 모임은 이사야 54:2-3을 본문으로 한 캐리의 설교와 함께 시작했다. 너의 장막 터를 넓혀라. 장막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라. 너의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네가 좌우로 퍼져나가고, 너의 자손이 이방 나라들을 차지할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얼핏 보기에, 그가 선택한 본문은 기이한 선택 같았다. 복음전도와 제자양육에 관한 한 명료하기 이를 데 없는 신약성경 본문이 한두 개가 아닌데, 굳이 대사명의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구약의 선지서에서 본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성경을 속속들이 꿰고 있던 캐리는 이사야서가 가진 구속사적인 비전의 탁월함과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고난받는 종의 승리(사 53:10-12)는 기쁨(사 54:1a)뿐만 아니라, 축복(사 54:1b)을 가져올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승리가 하나님의 적들을 영원히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더 이상 이방 신들의 현혹이 열방이 하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좌우로 퍼져나가고, 이방 나라들을 차지할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사 54:2-3).캐리는 이사야가 그리는 미래의 비전이 주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서 이미 실현되었음을 알았다.기대와 시도메시지의 절정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한, 다음 여섯 단어에서 드러났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5]예수님이 인류를 위한 대체 불가의 유일무이한 대속물이라는 사실은 부활에서 입증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보좌와 권세에 대한 메시아의 궁극적인 승리의 신호였다. 예수님이 단지 열방에 대한 복음의 사명을 시작만 한 게 아니다. 영광스러운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은 복음의 절대적인 승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이미 제거하셨다(막 3:24-27; 계 20:1-2).따라서 캐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위대한 일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단지 기대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초라한 시작이라도,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우리는 대 사명의 성공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대 사명을 교회에 주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8-19).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말씀은 오순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약속이 지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순절은 열방으로 나아가서 전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가능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우리는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다내가 가진 ‘질문’ 발췌문 사본에 누락된 내용 중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기대와 시도 사이의 연결에 관한 부분이다 모든 민족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적용된다면, 이 사명과 관련해서만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매우 제한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그런 생각을 아예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명령을 내린 경우에 굳이 그 명령을 구속력 있는 뭔가로 만들려는 추가 시도는 필요 없겠지만, 명령의 이행에 필요한 과정, 그러니까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그런 장애물은 이미 제거되었습니다.[6]부활의 승리로 인해 복음의 좋은 소식은 이제 그 무엇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캐리는 알았다. 이제 만물이 예수께 복종하게 되었으니, 그가 그의 영과 그의 교회를 힘입어 강한 자의 집을 강탈하리라(막 3:24-27).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의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이 깨달음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예수님과 동행한 초기에 나는 행여나 복음 속에서 극복하지 못할 지적 장애물을 만날까 두려웠다. 마찬가지로 개인전도에서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타문화 전도라는 도전 앞에서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과 부활 권세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나는 모든 두려움을 완전하게 물리쳤다.그리스도의 관심사를 중심에 두기 위해, 나는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그의 제자로 살기에 만날 모든 위험도 감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다.세상을 바꾸는 여섯 글자여섯 글자 속에 담긴 비전은 또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캐리의 설교가 끝날 무렵 노샘프턴셔 연합회 목사들은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협회” 창립을 결단했다. 4개월 후인 1792년 10월 2일, 그들은 그 계획을 정식으로 채택하여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구성했다.그로부터 일 년 후, 지금은 무려 수천 명의 선교사를 보유한 BMS는 첫 선교사로 윌리엄 캐리와 그의 가족 및 몇몇 조력자를 인도로 파송했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침례교 선교회의 모토가 되었고,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들을 향한 복음 선포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되었다.[7]성경 속 문화를 초월하는 비전(cross-cultural vision)의 회복은 떠오르는 복음주의 운동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캐리의 친구이자 동료 목사인 존 라일랜드(John Ryland Jr.)는 나아가서 런던 회중교회(London Congregationalists)가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를, 그리고 성공회 교회가 교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창립하도록 힘을 보탰다. 1806년,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윌리엄스 대학의 2학년생 다섯 명이 캐리의 ‘질문’을 읽고 미국 선교단체의 출범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헌신했다. 그로부터 사 년이 흐른 후, 그들은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의 설립뿐 아니라, 그들 중 두 명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과 그의 아내 앤 하셀틴(Anne Hasseltine)을 버마로 파송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윌리엄스 칼리지(Williams College) 다섯 동기생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루터 라이스(Luther Rice)는 해외 선교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침례교도들을 연합시켰고, 사 년 후에는 침례 교단 선교 모임(General Missionary Convention of the Baptist Denomination)을 창립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사 파송 조직인 남침례회 국제 선교부(International Missions Board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전신이다. 우리는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또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위대한 일이 오늘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만들까? 1. William Carey,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Leicester: Ann Ireland, 1792), 8. 2. Carey, Enquiry, 87. 3. 다음을 보라. Andrew Fuller and John Sutcliff, “Jealousy for the Lord of Hosts” and the “Pernicious Influence of the Delay in Religious Concerns”: Two Discourses Delivered at a Meeting of Ministers at Clipstone in Northamptonshire, April 27, 1791 (London: Vernor, 1791). 4. J.W. Morris, “Narrative of the First Establishment of This Society,” in Periodical Accounts Relative to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vol. 1 (London: J.W. Morris, 1800), 2?3. ?5. Morris, “Narrative of the First Establishment,” 3.6. Carey, Enquiry, 10-11.7. Eustace Carey and William Yates, Vindication of the Calcutta Baptist Missionaries: In Answer to “A Statement Relative to Serampore, by J. Marshman, D.D. with Introductory Observations by John Foster” (London: Wightman & Co., n.d.), 35. 원제: Expect Great Things, Attempt Great Thing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윌리엄캐리
지상명령
대사명
복음전도
선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⑥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1-06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결론적으로 말하지 않는다.[28]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를 논한 게 법적인 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덕과 더불어 그에 따른 변화에 대해 썼다고 하더라도, 그의 “표현 방식”에 따른 칭의, 특히 칭의를 의롭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근거를 모호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칭의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니고 있는 이런 지속적인 모호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따르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한다. 펠라기우스 논쟁을 요약한 중요한 편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우신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사람이 은혜 앞에서 무슨 공로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사람이 과연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면류관을 씌우실 때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만들어진 면류관이다. 우리가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긍휼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래 믿는 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마지막 날 영생의 선물과 함께 하나님은 말씀에 적힌 대로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의 관을 씌우실 것이다(시 103:4). … 심지어 영생 자체도 … 선행 공로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지만, 상급으로 주어진 공로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이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공로로 인해 주어진 게 아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그 자체조차도 오로지 은혜로 인한 것이다.[29]믿음의 시작과 함께 행하는 선행을 포함하여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채무자로서 빚을 갚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사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우신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 앞에서 선언되는 칭의의 유일한 근거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사람이 구원을 이뤄내야(earn)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이면에서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을 더 명료하게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지만, 그가 겪었던 교리적 논쟁이 그에게서 더 많은 신학적 성찰을 이끌어내지 않았기에,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오늘을 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론 읽기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를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그의 성경적 주석과 신학적 추론을 아퀴나스, 칼뱅, 에드워즈 및 우리 동시대인과 같은 후대의 해석자들과 비교하기 이전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입장과 방식에 맞춰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건 여전히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신학적 논쟁과 실천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코 예상하거나 또는 다룬 적 없는 특정 질문이나 문제에 관해서 그에게 억지로 답하도록 강요하는 시도를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개혁자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선행의 공로 없이 오로지 은혜로만 죄인을 용서한다는 진리를 옹호했다는 사실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과 사랑의 불가분성을 강조하고 옹호한 방식, 또는 칼뱅이 그리스도의 칭의와 성화의 두 은혜 사이의 불가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도 우리와 의견을 같이한다는 데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의미를 표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식이 비록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라면 누구든지(빌 3:9)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 그 점을 모호하게 표현한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28. 라이트(Wright)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 논리가 법의학적 정당화(“Justification in Augustine”)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조(Cho)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르쳤다고 보다 자신있게 주장한다. (“Divine Acceptance of Sinners: Augustine’s Doctrine of Justification,” Perichoresis 12, no. 2 [October 2014]: 163?8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거론하지 않는다는 데 라이트와 조 둘 다 동의한다.29. Letter 194.5.19 (WSA 2.3:296). Cum Deus coronat merita nostra, nihil aliud coronat quam munera sua. Cf. Cho, “Divine Acceptance of Sinners,” 178.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칭의론
은혜와공로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신 책
by Nancy Guthrie
2022-11-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세 살 무렵 팝콘 기계에 화상을 입어 내 오른손 손등에는 아직도 흉터가 있다. 교회학교 시절은 말 그대로 내 몸에 새겨졌다. 그러나 교회학교가 나에게 정말로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나의 마음과 영혼이며, 인생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성경을 (특히 구약성경을) 읽고 이해한 방식에서이다.나는 꽤 오랫동안 구약을 믿음의 삶을 사는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일종의 불연속적인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 책이라는 국한된 이해에 불과했다.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빛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무지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실 언약의 후손이 뱀과 그 저주를 선으로 무력화하실 것과 우리가 여자의 후손에 속했음을 창세기 3:15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다.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임을 알기 시작했다. 오직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만 구약이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나는 성경 이해에 있어서 나 자신을 어린아이라 여기고, 관련 책들을 샀다. 그중 한 권은 나의 구약 읽기에 혁명을 일으켰다.구약성경을 통해 예수님 알기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의 구약에 나타난 예수, 성령, 하나님(Knowing Jesus Through the Old Testament) 서문의 한 글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예수님과 구약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히브리 성경은 바로 예수님께서 읽으신 말씀이자 그분이 아신 이야기들이며 그분이 부르신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은 그분의 ‘인생과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한 견해를 형성했던 지혜와 계시와 예언의 보고다. 여기서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사명의 목표를 발견하셨다. (13)이 문장을 통해 나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새로운 관점으로 구약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명의 자리로 이끌었다. 예수님의 인성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지만, 그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이해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위 단락은 그런 내 생각에 제동을 걸었고, 예수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가셨다”(눅 2:52)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심지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도 구약을 묵상하면서 그 이해가 점점 자라갔다.예수님은 그 시대 여느 유대인 소년처럼 회당에서 낭독되는 두루마리 구약성경을 들으며 배웠다. 유일하게 알려진 예수님의 어린 시절 장면에서 예수님은 선생들 사이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신다”(눅 2:46).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정리하셨고, 그곳이 곧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인식하셨다.우리는 예수께서 이사야 61장의 시작 부분인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를 읽으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안다. 주님은 고향에서 큰 소리로 이 말씀을 낭독하시고는 사람들에게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 4:21)고 하셨다. 시편의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시 22:14)와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이사야서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5)를 읽으면서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을 보신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읽으실 때 자신이 받게 될 영광뿐만 아니라 받으실 고통까지 아셨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선지자가 말한 모든 말을 믿느냐고 물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이러한 고통을 받으실 것과 그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을”(눅 24:25-26) 이해해야 했다.구약성경 읽기구약에 나타난 예수, 성령, 하나님의 이 문장은 구약성경을 다르게 읽도록 나를 이끌었고, 예수님은 무엇을 가리켜 “이것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질문하게 했다.누가는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설명하여 주셨다”(눅 24:27)고 기록한다.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왜 죽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실 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야기나 산상수훈, 혹은 바리새인과의 언쟁이나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하지 않으셨다.주님은 창세기와 레위기, 시편, 요나, 호세아 그리고 다른 구약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에 관한 것이다. … 이것이 내가 짊어지려고 온 저주에 관한 것이다. … 이것이 내가 죄인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러 온 자비에 관한 것이다. … 이것이 나로 인한 구원의 충분함에 관한 것이다. … 이것이 사망에서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 이것이 십자가에서 내게 내려진 심판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개별적인 예언이나 구절만이 아닌 구약성경 전체가 그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요 5:39-40).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요 5:46). 예언에서만이 아닌 그 안의 역사, 약속, 사람들, 규례, 예식, 노래, 이 모든 구약의 내용이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이렇듯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책의 한 구절에서 비롯한 발견을 시작으로 이를 계속 추적해 온 것이 지금 나의 사명과 사역이 되었다. 나는 지역 교회의 성경 공부에 성경 신학이 스며들게 하는 데 사명이 있다. 다시 말해, 성경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이다. 비록 성경이 다양한 문학적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40여 명의 저자에 의해 수 세기에 걸쳐 기록되었지만, 이는 정말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책에 관한 이 발견이 그동안 내게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일으켰는지 살펴보면, 구약에 있어서 어린아이로 돌아가 나는 One Year Book of Discovering Jesus in the Old Testament(1년 동안 구약에서 예수님 발견하기)를 썼고, Seeing Jesus in the Old Testament(구약에서 예수님 보기)라는 시리즈를 냈다. 지금은 국내외 성경 신학 워크숍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고 있다.성경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경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를 보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기쁨은 그야말로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충분함, 필요성을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깊이, 그리고 영원히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원제: The Book Jesus Loved Mo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구약성경
구약의그리스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⑤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30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2.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평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 기간 내내 “믿음이 없이는 영생에 이를 수 없지만, 행함이 없어도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응했다.[25]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안일한 신앙(easy-believism), 더 엄밀히 말하면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라고 부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믿음은 바울을, 특히 바울의 고린도전서 3:11-15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정죄했다. 그리고 그는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함을, 바울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믿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바울이 영생을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롬 4:5) 사도 바울이 말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의를 행함(the works of justice)이 멸시되어도 관계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는 전혀 율법의 공로를 쌓지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의 공로(the works of the law)는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 오는 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따라온다.[26]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칭의의 사건(신앙의 시작)과 뒤따르는 결과(신앙의 진보)를 분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가르친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도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라고까지 기록하게끔 했던, 어떤 비성경적 생각에서 나오는 “오직 믿음”을 거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야고보와 함께 그런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 그러니까 “귀신의 믿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야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2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진리를 자신의 시대에 선포하면서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바울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또 다른 질문이 남는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는, 믿음에 따라오는 행위는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며, 어떤 식으로든 그런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기초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25. Augustine, Revisions 2.38 (WSA 1.2:145). 26. Augustine, Faith and Works 14.21 (WSA 1.8:241). 27. Augustine, Faith and Works 14.21 (WSA 1.8:241). 이 구절들에 더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여러 곳에서 “오직 믿음”에 대한 이 잘못된 생각을 수정했다: Enchiridion on Faith, Hope, and Charity 18.67; The City of God 11.17?22; Eight Questions of Dulcitius 1.10-13.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믿음과행함
공로주의
반율법주의
값싼믿음
성화
칭의
이신칭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④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23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검토하기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후기 개혁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첫째, 칭의의 의미 속에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는 사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보다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개혁자들은 칭의를 단지 선언적 의미로 제한하고 성화와의 분명한 구분을 강조한다. 둘째,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개혁자들은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의롭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치유함으로써 더 이상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1] 개혁자들에게 “의롭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기초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칭의에 관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알아보고,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 시대에 제기된 관련한 우려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에 대한 칼뱅의 평가칭의에 관한 글에서 칼뱅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지 결코 행위가 가져다주는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반복해서 인용한다.[22] 그런 동의(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관해서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지적한다. ‘기독교 강요’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확장된 섹션에서 칼뱅은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 1100-1160년경)와 같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가 은혜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 오해했는지를 설명한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정, 또는 적어도 그의 표현 방식조차도 완전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가 비록 사람의 의가 가져다주는 모든 공로를 제거하고 모든 공로를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돌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땅히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성화의 머리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다룰 때 우리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눈을 돌이켜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의 완전하심만 바라보라고 성경은 명령한다.[23]칼뱅은 칭의와 성화를 적절히 구별하지 못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을 도무지 승인할 수 없었다. 로마서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설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중생의 은혜라고 생각했다.”[24] 달리 말하면,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은혜 (칼뱅이 칭의라고 부름)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은혜(칼뱅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를 합친 것이다. 칼뱅은 이런 식의 “표현 방식”이 중세 후기 기독교의 남용, 그러니까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우려한다. 칭의와 성화라는 이중적 은혜를 구별하면서 칼뱅은 하나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한 근거가 인간에게 생긴 새로운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라는 진리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주장했다고 칼뱅이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칼뱅이 반박한 대상은 칼뱅 자신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오해한 동시대 사람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와 중세 후기 학자인 롬바드이다. 칼뱅은 단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 방식”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롬바드와 같은 후대의 사상가가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잘못 인용했다고 본 것이다. 칼뱅의 이런 평가는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대해서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와 관련해서 믿음과 행함을 어떻게 연결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더불어서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의 기초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던지기에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시대에 접했던 두 가지 논쟁을 처리하면서 언급한 질문이기도 하다. 22. 폴 헬름(Paul Helm)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긍정적으로 인용한 경우가 다음 세 번이라고 지적한다: 3.13.4; 3.14.4; 3.14.20.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Paul Helm, “Duplex Gratia,” in Calvin at the Cent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96-226. 23. Calvin, Institutes 3.11.15-16. Cf. 이 부분에 대한 폴 헬름의 논의는 “Duplex Gratia,” 205을 보라. 24. Calvin, Comm. Romans 3:22.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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