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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세 지평
by 최창국
2022-12-28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하지 않다. 성경에서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용서를 다루는 많은 본문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는 서로 다른 지평의 용서가 묘사되어 있다. 바로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와 관계적 용어이다(스티븐 트레이시, 영혼을 만지다, 301-12). 용서의 이러한 세 가지 지평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구조와 특징을 지닌다.용서의 사법적 지평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는 하나님에 의한 죄의 용서와 관련된다. 사법적 용서는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시 51:1-9), 가해자와 다른 모든 범주의 죄인에게 해당한다(시 32:1-5; 고전 6:10-11). 하나님에 의한 사법적 죄의 용서는 구원 경험과 관련된 용서이다. 사법적 용서는 죄에 대한 고백(시 32:5; 요일 1:9)과 죄의 인정과 회개(눅 24:47: 행 2:38, 5:31)를 조건으로 한다. 죄에 대한 사법적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를 베풀 권한이 없다. 인간은 사법적 용서를 베풀 수 없지만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사법적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모두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도록 충고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성경에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내용이 있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군중 속에 있는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기 위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아래로 내려보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죄 사함 또는 죄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가 아니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피해자의 용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용서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보다 사실상 ‘신의 용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물의 핵심 의미는 내세적인 신앙이나 “의례적 종교 행위의 일환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맞춰가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2).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선명한 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광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 21:1-19). 예수님은 음식을 준비하신 후에 불과 며칠 전에 사람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 부인하였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두 가지로 총 세 번 하신다(요 21:15-19). 처음 두 번의 질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말을 바꿔 이렇게 묻는다. “너는 나의 친구이냐?” 세 번째 질문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그대로 옮겨 다시 묻자, 베드로는 슬퍼하며 이렇게 답한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의 친구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답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용서를 넘어선 위임의 말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책임을 부여한다. “내 양들에게 먹이를 주어라.”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보살펴라.”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의 소명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이는 베드로에게 전환의 순간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명의 메시지만 아니라 용서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만남에는 용서의 두 가지 의미, 즉 베풀다(카라조마이, carizomai)와 풀어주다(아피에미, aphiemi)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87-88).결국 주님의 용서는 용서와 소명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뜻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이웃을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이웃이란 교회 안과 밖의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분노와 심지어 증오의 대상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용서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뉘우침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소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베풂(for giving)과 남을 위함(for others)이라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3). 결국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위한 기초이자 소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의 심리적 지평심리적 용서 또는 정서적 용서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용서로서 두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부정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차원이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은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 등과 관계되고,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저지른 악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인 분노와 같은 반응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분노가 무조건 나쁘거나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건강하고 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였다(마 21:12-17; 막 3:5). 시편에도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5편, 10편, 69편).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분노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통해 분노는 신성한 적대감이 아니라 악을 향한 거룩함의 변치 않는 반대라고 해석했다(리로이 아덴·데이비드 베너, 용서와 상담, 259). 성경에서 금하는 분노는 개인적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마음속에 품는 분노다. 바울은 인간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죄가 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엡 4:26). 한편 분노와 유사하지만 다른 형태로 표출되는 감정인 분개도 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누그러지지만, 간혹 그 분노가 마음속에 오래 머물거나 때로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정착된 분노가 소위 분개이다. 특히 가해자의 악의와 부정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가 분개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버틀러(Butler)는 분개를 일종의 자기보호 기재로서 불의를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 나오는 정당한 감정적 대응이라고 이해하고 이렇게 강조하였다. “악의와 부정에 대항하는 분개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유대감이자 동료애라고 할 수 있다. 개개인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S. Lamb·Jeffrie G. Murphy, eds., Before Forgiving, 44). 그가 분개의 긍정적 차원을 피력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하다. 소위 용서에 관한 기독교적 가르침은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분개와 같은 감정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용서에 관한 가르침에서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중요치 않다는 관점을 견지하며 용서야말로 악행이나 상처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버틀러의 이해는 기독교의 이러한 가르침처럼 단순하고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용서의 실천을 단지 손쉬운 아량으로 혼동하는 오류는 심한 상처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더욱 큰 심적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불의나 악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거나 잊거나 무시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는 정의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피해자가 용서하려고 할 때 무엇을 용서하려고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용서가 자신과 가해자 그리고 세상을 좀 더 밝은 곳으로 만들지 아니면 더 못한 곳으로 만들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용서는 윤리적 차원을 피하기 어려운 심리적 영적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분개는 악행에 항거하는 일종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아존중의 행위의 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분노나 분개의 위험한 측면도 있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가 자기 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해자에게 집착하는 상태가 된다면, 분노와 분개는 역으로 지나친 자기 몰입에 빠지는 위험성을 초래할 수 있다. 파멜라 쿠퍼-화이트(Pamela Cooper-White)는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른 용서를 할 때의 위험성을 잘 설명하였다. 섣부른 용서는 일시적으로 모든 일을 무마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게다가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기독교의 주요 덕목이라고 믿으며 성장해 온 우리에게 섣부른 용서는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는 분노와 아픔을 내면 깊숙이 집어넣는 결과를 일으킨다. 그 때문에 이 분노와 아픔은 독을 품는 증기가 되어 우리 집과 교회와 공동체 밑바닥을 서서히 썩게 만든다. 그리고 섣부른 용서 때문에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책임도 진심으로 감당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와 재활을 막기 때문에, 그것은 실은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과도 같다(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 256).광의의 맥락에서 용서는 정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감성을 무시하고 진정한 용서에 이를 수 없다. 피해자의 부정적인 감정은 용서에 필요한 예비 단계이자 여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로 인해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인하게 하거나 그러한 감정이 자기 비하와 같은 내적 분열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용서는 단순한 분노 관리 그 이상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의 기억을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분노와 같은 내적 상태나 행동을 부인하거나 왜곡시켜도 안 되지만, 가해자로부터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기보다는 가해자의 곤고한 상태도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의 긍휼의 마음이 용서로 이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골 3:12-13). 피해자의 이러한 마음은 분노를 극복하도록 도와 심리적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의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가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가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피해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가해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치유될 것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이다(마 5:43-47).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도우심으로 분노와 증오를 극복하고 가해자에게 적절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울 때 심화된다.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이다. 특히 분노나 분개는 자아존중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질 경우 도리어 그 감정들이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분노와 분개는 용서와 모순되는 감정이 아니다. 용서의 행위는 정당한 분노와 분개를 무시하거나 잊는 데 있기보다는 그러한 감정들을 품고서 무언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나 분개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분노나 분개가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조용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내적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용서의 시작일 뿐이다. 인간의 용서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도 관계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용서의 관계적 지평관계적 용서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변화와 관계되어 일어나는 용서이다. 즉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회개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메타노니아’는 ‘마음’과 ‘변화’를 뜻하는 두 헬라어를 합성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방향이나 행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행 26:20; 롬 12:2; 고후 12:21; 계 2:5).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apology)는 같은 것이 아니다. 사과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확실한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는 자신을 ‘재구성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의 사과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 관계적 용서는 특히 가해자가 범한 죄와 그 죄가 지닌 악하고 파괴적인 성질에 대해 충분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가해자의 행동이나 삶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회개할 때까지는 용서를 시작하거나 어떠한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용서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관계적 용서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기보다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 관계된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의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과 관계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분노와 같은 내적 장벽을 정화하는 여정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심리적 용서를 해야 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에게는 치유의 희망을 제공하고, 가해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여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가해자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에서와 야곱의 심리적, 관계적 용서인간 사이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과 관계적 용서가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의 교활함과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와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의 과정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에서는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 장자권을 빼앗긴 후에 극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발생한 에서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에서의 분노 감정은 격분으로 이어진다. 그의 격분은 야곱에 대한 복수감정으로 이어지고 야곱을 죽이고자 한다(창 27:41). 리브가의 도움으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한다. 이때 리브가는 야곱에게 “네 형의 분노가 풀리거든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창 27:45)고 말한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야곱에게 집을 떠나 기다리라고 권한다. 분노의 감정은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야곱은 에서에게로 돌아온다. 세월이 지난 후에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워졌을 때 야곱은 에서에게 용서를 구한다.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완화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에서의 분노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화되었으며, 야곱의 회개를 통해 용서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에서 앞에서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힌 후에 에서와 야곱은 화해를 하게 된다(창 33:4).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서 피해자인 에서의 심리적 용서와 에서와 야곱 사이의 관계적 용서는 야곱의 회개와 함께 순차적으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여정에서 발생한 분노가 시간이 필요했음을 암시해 준다. 즉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게 한 것은, 야곱으로 인해 촉발된 에서의 분노 감정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는 용서의 예비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에서의 심리적 용서의 과정이 있은 후에, 야곱의 회개와 함께 관계적 용서가 일어난다. 이는 야곱이 에서 앞에서 몸을 일곱 번 굽힌 후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는 모습(창 33:3-4)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선물로서 용서 용서는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자 여정이다. 용서는 상처나 악행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넘어서는 일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와 악행을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상처의 황무지에서 공감의 강물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다. 용서는 공감의 프락시스다. 그것은 가해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비통함과 죄책감 등을 피해자가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승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피해자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도리이다. 용서의 결과,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나 부당한 상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거듭난다.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의미로서 승리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는 반전의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치유와 자유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다. 진정한 용서는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이며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이다.
용서
용서의사법적지평
용서의심리적지평
용서의관계적지평
분노
사과
죄용서
하나님의용서
구유에 누우신 그는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다
by Gavin Ortlund
2022-12-22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도 첫 번째, 세 번째와 마찬가지로 모든 곳에 계신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그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성경은 그가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 1:3)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골 1:16).그런데 우리가 매년 성탄절에 기념하는 기적(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은 바로 이 신학에 질문을 던진다. 가령 서기 10년, 나사렛을 다니던 시간에도 소년 예수님은 온 세상 어디에나 계셨는가? 구유에서 동물들 사이에 누워서 마리아의 젖을 먹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에도 과연 모든 쿼크와 별을 다스리며 온 우주를 가득 채웠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우리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extra Calvinisticum)이라고 부르는 신학에 따르면,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이지 않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제한되지 않으셨고,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우주를 계속 채우고 붙드셨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교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수많은 책이 필요하겠지만, 올해 축하할 놀라운 성탄절을 앞에 놓고, 마음과 생각을 재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만 던지도록 하자.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라틴어이다. 칼리니스티쿰(Calvinisticum)은 “칼빈의”(Calvin’s)를 의미하고, 엑스트라(extra)는 “외부”(outside) 또는 “너머”(beyond)를 뜻한다. 16세기와 17세기 루터파 신학자와 개혁파 신학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이 자신의 육신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개혁파의 가르침에 반대했다. ‘기독교강요’에서 장 칼뱅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나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고 이 땅에서 사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는 태초부터 하셨던 것처럼 언제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셨다! (기독교강요 2:13.4) 그러나 이 교리에 포함된 기본 사상의 원조가 칼뱅은 아니다. 이 교리는 아주 오래되었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썼다.말씀께서는 자기 몸에 속박되지 않으셨고, 몸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해서 몸 아닌 다른 곳의 임재가 가로막히지도 않았다. 몸을 쓰시는 동안 생각과 능력으로 우주를 명하시는 일이 중단되지도 않았다. … 경이로운 점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사는 동시에, 말씀으로서 우주의 생명을 지탱하고 계셨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계속 함께 거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3.17)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는 건 단지 인간 육체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아들의 존재만이 아니다. 그는 아들이 우주의 지탱자요 감독자의 역할을 쉬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교와 주석에서 칼뱅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속에 담긴 공간적 특성뿐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중재자 역할이 가진 의미도 같이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편재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중에도 완전한 신성을 유지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말이 되는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 이 개념을 우리가 머리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두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 이 개념은 불합리한가? 그리스도는 유한하시며 무한하시다, 국부적이면서 동시에 편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이것이 정통 칼케돈 그리스도론과 어떻게 일치하는가?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그리스도를 상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오류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이것을 이해하는 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은유가 있다. 간달프와 프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활동하는 반지의 제왕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J. R. R. 톨킨이 자신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는 더 이상 옥스퍼드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간계에 있는 그의 존재는 옥스퍼드에서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이런 상황이 톨킨의 인격의 통일성이나 논리의 법칙을 반드시 위반하느냐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중간계와 옥스포드는 시카고와 뉴욕처럼 같은 세계의 다른 장소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역” 또는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은유일 뿐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세상에 들어가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연관성은 시카고와 뉴욕보다는 옥스퍼드와 중간계의 관계에 훨씬 더 가깝다. 여전히 옥스퍼드 책상에 앉아서도 샤이어를 걷고 있는 톨킨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분리되지 않는 한 인격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아들, 신성한 본성에서는 무한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에서는 유한한 그분을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왜 중요한가?나는 개인적으로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칼케돈 그리스도론이 주의를 기울인 몇 가지가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뒷받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격화”하려는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완전히 신성하고 불변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설명하기 위해 성만찬 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육체가 편재한다고 확증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렇게 요약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초월성이라는 그리스도 신성(예를 들어, 제한될 수 없다)과 인성의 순수성(예를 들어, 오로지 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교리이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보존함으로써 성육신이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점을 깨닫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의 자궁 속 작은 배아로 줄어든 게 아니다. 신성한 위엄은 여전히 남겨놓으셨다. 그는 언제나 완전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한 연구는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을 이렇게 요약한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아들이 그의 우주적 제국을 포기한 게 아니다. 오히려 반역하는 피조물을 향해 그의 제국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매년 성탄절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축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생각해 보라.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는 다음 두 가지를 다 갖고 계신다.강보에 단단하게 싸여 있지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어머니를 꼭 잡고 있지만, 온 우주의 원자가 제자리에 있도록 붙들고 있다.젖 달라고 울면서도, 하늘의 별을 지탱하고 있다.나귀 사이에서 자면서도,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엑스트라 칼비니스티쿰은 이 성탄절 찬송[천사 찬송하기를] 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처녀 몸에 나시어 사람으로 오셨네. 세상 모든 사람들 영원하신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원제: He Lay in the Manger without Leaving Heav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편재
그리스도론
성육신
성탄
칼케돈그리스도론
베들레헴: 작은 동네, 그러나 중요한 곳
by Kaitlin Miller
2022-12-20
몇 년 전 처음으로 성지를 방문했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전설적인 신화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검증이 가능한 장소에서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 위에 근거한다는 확신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가장 심오하고도 또 구체적인 깨달음은 베들레헴에서 발생했다. 베들레헴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작은 마을” 이상으로 중요한 성경적 역사와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 실제 장소이다. 성경 속 베들레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 그리고 생명의 떡으로 성취하고 증명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 양성경 속 베들레헴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35:19-21에 나오는 라헬의 매장지이다. 라헬은 예수님 혈통 속에 있는 족장 야곱의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암양”(ewe)―어린 양 또는 양―을 뜻한다. 이 구절은 또한 라헬이 에델 망대(믹달 에델)에 묻혔다고 알려주는데, 이 히브리어는 “가축 망대”를 의미한다. 유대 역사에 따르면,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난 흠 없는 새끼 양이 천에 싸여 유월절 제물로 쓰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앞으로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이 얼마나 놀라운 예표인가? 또한 미가서는 “가축 망대”에 왕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미 4:8). 그분이 누구신가?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세상에 처음 소개한, 참되시고 유일하신 왕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였고, 결국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베들레헴의 믹달 에델에서 태어나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던 흠 없는 어린 양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고(마 5:17),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유월절 양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는 역사를 목격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온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희생양이다.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로 바뀌어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넘어갔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제 그의 피가 우리의 삶에 임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영원히 넘어간다(pass over). 그리고 그 진노는 자비로 바뀌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 목자-왕베들레헴은 성경에서 다윗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중에 왕이 된 일개 목동이었는데, 그의 등극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의 집과 왕국을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 아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삼하 7:12-16).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다. 아버지인 요셉의 혈통을 통해 태어나신, 다윗의 생물학적 후손이다. 성경은 그를 “양들의 큰 목자”(히 13:20)로 묘사한다. 그분은 사망과 죄와 수치의 거인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셨다.하나님께서는 그 왕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지금도 그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으로 아버지 곁에 서서 만유를 다스리신다. 그 앞에서는 보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배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6-14).생명의 떡영원한 본향 천국에 도착해 보좌 주위에 둘러서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왕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때마다 공급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을 의미하며, 바로 이 집으로부터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계시하신 분이 오셨다(요 6:35).이번 성탄절에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세상의 덧없는 쾌락, 썩어 없어질 소유물에서 만족을 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깊은 갈망을 더 간절하게 느낄 뿐이다.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굳건한 사랑, 그치지 않는 평화, 샘솟는 기쁨, 흔들리지 않는 소망, 변하지 않는 의미, 구속의 공의, 넘치는 은혜, 그리고 우리를 초월하는 영광을 더 애타게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두라고 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떡의 집에서 태어난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그에게로 오는 이는 결코 주리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요 6:33-35). 이것은 좋은 소식이요 큰 기쁨이다. 떡의 집, 즉 다윗의 성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가 바로 주 그리스도이시다(눅 2:10-11). 할렐루야!그를 놓치지 말라여행에서 만났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베들레헴 성문 밖에서 어린 양을 짊어지고 가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을 때였다. 그날도 그 아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오늘이나 삶의 혼돈과 성탄절의 분주함 속에서 정작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성탄절에 가장 자주 잊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늘 자기를 중심에 두고 온갖 세상사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정작 우리를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지 못하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하늘에서 찬양하는 천사들, 달려온 목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 목자이자 왕, 생명의 빵 앞에 무릎 꿇은 동방박사를 기억한다. 이 모든 진리를 마음에 간직할 때(눅 2:19), 우리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 영은 기뻐 춤춘다(눅 1:46-49). 저 작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우리가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건 상관없이, 주님은 그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심으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셨다. 할렐루야!원제: Bethlehem: Little Town, Big Signific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베들레헴
성탄
어린양
목자왕
생명의떡
마리아가 그 아기에 관해 알고 있었던 세 가지
by Jonathan J. Routley
2022-12-19
‘예수님이 성취하실 일에 대해서 마리아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묻는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하나 있다. 메리 로리(Mark Lowry)가 작사한 ‘Mary Did You Know?(마리아, 알고 있었어요?)는 케니 로저스(Kenny Rogers), 위노나 주드(Wynonna Judd), 클레이 에이큰(Clay Aiken) 및 씨 로 그린(Cee Lo Green) 같은 인기 아티스트가 불렀다. 노래 가사에서 마리아는 아기가 앞으로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마리아는 심지어 이런 역설적인 말까지 듣는다. “당신이 낳은 이 아이가 곧 당신을 다시 낳을 겁니다.”신약성경 저자는 마리아가 아들의 성취에 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메시아이며 그가 성취할 것에 관해서 마리아가 결코 무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준 게 아니라 노년에 잉태한 엘리사벳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눅 1:36).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가 급히 엘리사벳을 만났고,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천사의 말을 확증하는 예언을 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고 부르는 내용으로 주님을 찬양했다(눅 1:46-55). 정말 멋진 노래다. 다양한 구약 본문을 언급함으로써 마리아는 자신이 얼마나 구약성경에 정통한지, 특히 메시아와 관련한 주제를 이미 훤히 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어린 소녀는 놀랍게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마리아가 알고 있었던 것 구약성경에 비추어 이 구절을 연구하면 마리아가 알고 있었을 세 가지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예언의 의미를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1. 심판과 구원이 이미 동시에 도래했다.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눅 1:46-47)으로 찬양을 시작한다. 마리아는 지금 인용하는 건 하박국 3:18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마리아는 적에게 심판을 집행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용사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이 본문을 암시한다. 하박국 3장의 언어는 예수의 감람산 담론과 요한계시록 및 다른 묵시적 구절들(cf.합 3:10-12; 마 24:7-30; 계 6:12-17)과 매우 유사하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역과 관련하여 메시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친히 기름 부으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오십니다. 악한 족속의 우두머리를 치십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십니다”(합 3:13). 이 구절의 요점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놀랍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자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하박국의 맥락을 이해한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적에게는 심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폭력적인 압제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당시 1세기 유대 땅의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어쩌면 마리아는 메시아의 오심을 죄로부터의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리아의 이 노래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언급도 포함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눅 1:51).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역을 언급하는 두 가지 핵심 용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팔과 교만한 자들을 흩으심이다. 신명기 26:8은 여호와의 팔이 얼마나 구원하기에 능했는지를 설명한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뻗은 팔은 이집트 종살이라는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강림하시는 능력의 표시였다.마찬가지로 모세는 민수기 10:35에서 일어나 원수들을 흩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이 두 가지 암시는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 당신이 택한 왕을 세상에 보냄으로 한 번 더 팔을 길게 뻗으실 것이다. 2. 불의가 뒤집힐 것이다. 마리아는 또한 메시아의 오심을 특징짓는 불의의 반전을 암시한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눅 1:51-53)겸손한 자를 높이고 교만한 자를 낮추는 주제는 이사야 2:11-12, 17을 반영한다. 주님의 종말론적 공포와 광채가 세상이 끝날 때 교만한 자를 낮추어, “그날에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이사야서의 처음 내용은 통치자의 부패로 말미암은 사회 불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실 메시아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을 것이다. 부패한 통치자는 사라질 것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사 2:4). 굶주린 자는 배불리 먹겠지만 부패한 엘리트는 더 이상 음식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사회 부조리가 바로 잡히고 정의가 영원히 확립될 것이라는 그녀의 희망을 드러낸다. 3.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다음 세 구절은 우리의 주의를 언약으로 이끈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50, 54-55)자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을 묘사한다. 마리아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련한 여러 구절이 들어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50절은 그녀가 특히 시편 100:5과 103:11을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 100:5)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시 103:11)두 구절 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결코 잊히거나 무효가 되지 않으며, 메시아를 통해 실행될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의 시를 마무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더 나아가 다윗에게)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이다. 마지막 단서 하나마리아는 예수님이 누구를 고치실지, 어떤 기적을 행하실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 속에 담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누가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마구간에 도착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더불어서 마리아에 관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마리아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 2:19). 목자들의 말을 숙고한 마리아, 그것은 그녀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지식과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연결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마리아였다고 해도, 예수님이 하실 모든 일을 다 알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리아 찬가 속에 담긴 구약의 메시지는 그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원제: 3 Things Mary Knew About Her Baby Bo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마리아
예수
마리아찬가
메시아
성육신
성탄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by 고상섭
2022-12-18
성탄의 가장 큰 의미는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이 중요한 성탄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탄을 믿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합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전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이 장애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자연주의 세계관은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 C. S. 루이스는 기적에서 기적은 초자연적 힘의 간섭으로 자연 외에 초자연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군가 기적을 경험하더라도 그의 신념 속에 초자연을 배제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적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옳다면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물질세계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모순을 드러낸 홀데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 정신 과정이 순전히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 소신이 옳다고 가정할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갖지 못한다. … 따라서 나는 내 뇌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도 갖지 못한다”(기적, 31). 루이스는 기적을 믿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 자연의 통상적 안정성을 믿어야 하고 둘째, 자연 그 너머에 어떤 실재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믿음이 있을 때만 비로소 초자연적 실재가 우리의 자연계를 이루는 시공간 속에 침입해서 그것을 교란시켰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성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느냐의 차이다.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신념으로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초자연의 세계관을 가질 때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은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야기이다 팀 켈러는 성탄 설교를 모은 예수, 예수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뿐 아니라, 픽션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현대인이라면 더 현실주의적이 되어야 하는데 판타지 문학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계속 판타지를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유명한 동화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끊임없이 판타지 문학을 찾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열망을 얼마간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 픽션은 그런 열망을 건드리거나 채워줄 수 없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갈망이 초자연 세계를 경험하려는 갈망, 죽음을 면하려는 갈망, 영원한 사랑을 만나려는 갈망,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며 창의적 꿈을 실현하려는 갈망 등이다. 잘 구성된 판타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감동과 만족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그런 것들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잠시나마 이런 갈망을 채워주고 미치도록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예수, 예수, 50)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인간 안에 깊은 갈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이 탄생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모든 판타지의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려준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한다.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거나 처음 외국을 그려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결혼이나 여행이 최고의 것일 때도,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현실 속에서 무너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내가 훌륭할 수도,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 213)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성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새끼 오리가 헤엄치고 싶어 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실적인 이야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판타지 문학을 추구하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현실적인 사건들로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자연주의, 물질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판타지 문학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린이들의 동화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창문이라 할 수 있다. 신화가 사실이 되었다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신화를 읽을 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다”라고 말한다. 루이스는 인간 지식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경험적 지식으로 맛을 느끼는 순간처럼 맛을 경험하는 지식이다. 이것은 맛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분석하는 설명적 지식과 구별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순간 더 이상 그 맛을 맛으로 느끼지 못한다. 부부관계를 하는 순간 쾌락을 조사하거나 회개하는 동안 회개를 연구할 수는 없고,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 유머의 본질을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피고석의 하나님, 73)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포옹하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랑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꼽 잡고 웃는 순간 유머를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설명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 즉 행복과 유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런 인간 지식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화라고 말한다.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단순한 명제로 기술되지 않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화는 사고를 초월한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한 죽은 신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신화이며, 그래서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 버린) 그 신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은 동정녀가 잉태했을 때 이 위대한 신화가 사실이 되었음을 몰랐던 이들입니다. 사실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신화의 온갖 특성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76)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된 신화이다. 신화적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사실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사랑과 순종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도덕주의자, 학자. 철학자가 되어야 하지만 시인과 아이의 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실이 된 신화를 누리고 맛보고 경탄하며 경외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갇혀 이 땅의 지식과 이 세상의 것들로 쉽게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육신은 인간의 지식 이상의 초자연의 세계가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이 땅을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오늘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인가?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니아의 옷장을 여는 문인지 모른다. 마음을 다해 시인과 아이의 눈으로 그 문을 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아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나니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성육신은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열어주고, 나니아의 세계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니아의 옷장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함을 상기시켜 준다. 성탄은 신화가 사실이 된 날이다. 그리고 현실의 세상에서 초자연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제 나니아의 옷장을 열어보자. 무미건조한 삶의 하루하루가 경외와 경탄이 있는 삶으로 바뀔 것이다.
성탄
성육신
신화
신화와사실
허구와진실
판타지
강림
동정녀탄생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한 문장
by Ed Welch
2022-12-1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신학교 첫해에 나는 하나님, 가장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상담할 사람들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칠 한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내 눈에 성경은 단지 잘게 부서진 일련의 조각처럼만 느껴졌다. 물론 하나하나가 다 좋은 조각이었지만, 서로를 잇는 일관성이 부족해 보였고, 그 사실은 때때로 내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성경 속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보다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어 핵심 메시지를 보여주는 책을 읽으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난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의 The Christian View of Man을 읽는 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글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이 인격(personal)이시기에 인간도 인격이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건 분명히 메이첸에게 있어서 대통합의 원칙이 되는 중요한 관점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더 꼼꼼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메이첸이 ‘인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만 따로 정리하고 책을 덮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쓴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을 읽었다. 그는 성경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주 잘 썼고, 그의 통찰은 내가 현재까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만든 출발점이 되었다. 그 책을 읽은 결과, 나는 보스의 모든 글(캐서린 보스(Catherine Vos)의 아동 도서까지 포함)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러는 중에 내 인생을 바꾼 문장을 발견했다. 보스는 내게 인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만족스러움을 가져다주는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제공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또 단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생각과 목적과 일에서 그분과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186쪽)주거니 받거니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이 그날 내게 준 감동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담긴 핵심이 무엇인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보스가 이단에 빠졌고,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나님과 의식적이며 호혜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함으로 그분에게서 받고 또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첸이 말한 인격의 의미였다. 굳게 잠겨있던 뭔가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말은 내가 “주거니 받거니”(back and forth)라고 짧게 말하거나 쓸 때마다 그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으로부터 또는 나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은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시 62:8)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쏟아낼 수 있고, 그분은 내 말을 들으신다. 하나님은 공감(compassion)으로 반응하시거나, 또는 단지 자녀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겁게 들으신다. 그리고 그는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 주거니 받거니. 호혜적 교제. 영적 존재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그리스도께 더 가까이모세가 떠오른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출 32:7) 백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모세가 항의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어떻게 임할지를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그제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대답할 여지를 주고 계심을 깨닫고 그 초대를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셨던 과거의 약속, 열방 앞에서 드러날 하나님의 명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종…자손”이라는 사실에 호소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은 “마음을 돌이키셨다”(출 32:14).그렇게 ‘주거니 받거니’가 이어진다. 주님은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출 32:34)라고 말씀하신다. 응답하라는 하나님의 다른 초대를 모세가 놓쳤을 때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 33:3). 아마도 이전 대화로 인해 담대해진 모세가 대답한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출 33:15).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출 33:17). 그렇게 계속 주거니 받거니 한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일련의 대화는 주님께서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이 이제 죄의 용서로 표현될 것이라고 계시하실 때 절정에 이른다(출 34:6-7).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모세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가 떠오른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하늘과 땅을 나누는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시며, 그분의 얼굴은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그분의 모든 백성을 향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새롭게 빚어진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에게 말하라고 권유하신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벧전 3:18).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친구라고 불리며(요 15:15),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풍성함하나님은 이제 나를 그의 백성 가운데 두셨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나를 그 자신에게 더 가까이 두셨고, 내게 말하라고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더 많이 말할수록 내게는 더 좋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나를 하나님께 더 드러낸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런 식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원하신다. 누가 감히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이 사실이 내 마음에 점점 더 뿌리를 내려감에 따라서 나는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 좋은 것과 어려운 것에 대해서, 종종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그냥 털어놓기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더 자주 고백한다. 이런 기도가 내 삶에서 일으킨 변화는 내 안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기도 속에 형식으로 포장된, 마치 친구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형식적인 대화를 담지 않는다 이런 영적 풍성함은 아내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이 내 속에 자리 잡기 전까지 나는 아내에게 다 털어놓으라고 종종 말하기는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부끄럽거나 아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주된 관심사가 내 말을 하는 것보다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매일 준비한다. 오늘 내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지? 그런 다음, 나는 언제나 나를 돌보시는 주님께 나아가려고 준비한다(벧전 5:7).이런 깨달음은 매주 내가 하는 상담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언제나 내담자가 마음을 열고 얘기를 하도록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나는 꼭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그것을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염려에 쌓인 사람에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빌립보서 4:5-6은 그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 그러니까 당신을 괴롭히는 세상과 혼자 싸우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털어놓아라. 당신의 생각을 하나씩 정리해 보라. 불안함을 일으키는 요인을 생각해 보라. 당신을 괴롭히는 걱정이 말하는 사실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거기에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가르치다 보면 나는 자주 시편을 인용한다. 시편은 결국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이다. 각각의 시편을 각기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하라고 나는 제시하곤 한다. “나에게 말해라”라고 주님이 손을 내미신다. “지금 너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냐?” 나는 이 점을 최근에 쓴 책에서도 설명했다. 그 책 제목이 ‘더 가까이 가도록 창조된’(Created to Draw Near)’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수십 년 전에 이런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보스를 인용했다. 끝나지 않는 대화내 주변의 세상을 관찰할수록, ‘주거니 받거니’야말로 온 세상에 넘쳐흐르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운영되는 방식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좋은 친구는 서로 마음을 나눈다. 배우자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 그게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마음을 나누지 않을 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준 이 네덜란드 신학자의 긴 문장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런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종하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렇다. 그 모두를 다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신의 대답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재구성되도록 하라.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피조물도 할 수 없는, 사랑의 말로 끝없이 속삭이는 ‘주거니 받거니’의 관계가 주는 기쁨에 당신이 동참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원제: Back and Forth with God: A Sentence That Reshaped My Relationship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관계정립
게할더스보스
메이첸
그리스도인의삶
구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by Don Carson
2022-12-13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선하고 충실한 사람인지, 그의 생애와 시대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 구약 본문이 무려 세 군데나 있다(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사 36-39장).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토라의 가르침에 맞게 나라를 개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히스기야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앗시리아 왕 산헤립과 맞섰을 때 드러난 히스기야의 놀라운 용기와 신실한 믿음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세 본문 중 그 어떤 것도 히스기야가 저지른 도덕적 실패를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특히 두 본문(열왕기하와 이사야)은 그중 하나를 탁월한 슬픔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논의를 위해서 이사야 39:1-8에 초점을 맞추고, 다음 세 가지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도덕적 대조다른 많은 성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장은 놀라운 정도로 도덕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야서 36-37장은 히스기야의 믿음과 용기를 전해준다. 이사야서 37:14-20에는 그의 특별한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등장하는 징징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진 38장 속 히스기야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실망한다. 게다가 이사야 39:1-2은 바벨론 사절들에게 어리석은 자랑을 일삼는 그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39:5-7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책망이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선하다가 악해지고, 현명하다가 어리석어지고, 그토록 하나님 중심이었다가 돌연 자기중심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래도 영웅이라면 좀 더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대조는 놀랍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가 이사야서 39장을 구약에서 가장 슬픈 본문 중 하나로 만드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최상급으로 실망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물론 충분히 슬프긴 하지만 확실히 가장 슬픈 건 아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수치스러운 거짓말로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치며 독선적인 분노로 좌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은 또 어떤가? 실로 죄가 많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간음과 살인을 자행한 자이다. 신약성서 속에서 예를 찾는다면, 당장 베드로를 떠올릴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었지만,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사실, 성경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인물도 있다(예: 요셉, 다니엘, 에스더).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삶 속에서 실망스러운 모순과 뿌리 깊은 대조를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히스기야이다. 섭리의 왜곡겉으로 보기에 히스기야는 섭리의 교리를 고수한다. 그러나 사실은 바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섭리를 왜곡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향해 존중을 표현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욕심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이스라엘을 찾은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그는 부요함을 자랑함으로 왕국을 위험에 빠뜨린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를 꾸짖으셨고 앞으로 있을 비참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너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오늘까지 너의 조상이 저장하여 놓은 모든 보물이, 남김없이 바빌론으로 옮겨 갈 것이다”(사 39:6). 더욱이 임박한 재난은 개인적인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 가운데서 더러는 포로로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사 39:7).히스기야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대가 전하여 준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오”(사 39:8). 언뜻 보기에 히스기야는 마치 하나님의 뜻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록 심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8절 후반부는 그의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왕국 앞에 놓인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justice) 앞에서도 여유를 부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은 안전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사 39:8).심판의 위협 앞에서 전혀 달랐던 다윗의 반응간음과 살인의 여파로 다윗은 왕국에 심판이 닥칠 것이며, 더불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다윗은 죄를 회개했고, 선지자 나단은 선언했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삼하 12:13-14). 그리고 다음 주 아이가 사투를 벌이는 내내 다윗은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먹기를 거부했다. 아기는 결국 죽었고 다윗의 시종들은 주인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 주저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소식을 알게 된 다윗은 몸을 씻고 깨끗한 옷과 로션을 바르고는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종들에게 다윗은 자신이 히스기야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가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소?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 (삼하 12:22-23)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선언을 들은 다윗은 그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단지 원초적인 의지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교류하시는 자비로운 분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아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스기야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인식했고, 이미 선고된 심판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그의 진심은 이기심이다. 히스기야는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후손 중 일부가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거세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산헤립과도 대적했던 이 왕은 이제 자신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자녀와 손자까지도 돌보지 않는다. 한때 이 왕에 대해서 이런 평가가 있었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그는 주님에게만 매달려,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왕하 18:5-7).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안락함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끝난다. 이 이야기에는 슬픈 신랄함이 있다.심판과 소망히스기야는 이사야 40-66장의 위대한 주제 중 하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슬픔을 주는 이사야 39장은 예언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 울려 퍼지는 북소리 중 하나를 발표한다. 선지자의 초점은 영적 활력과 파멸적인 정죄 사이를 계속 오간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다(사 43:14-2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헛된 우상을 섬기며(사 44장) 죄악과 불의를 따른다(사 59장). 예루살렘은 회복되고(사 44:24-28; 51:1-16; 54장)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겠지만(사 48:12-15; 49:8-21), 구원에는 심판이 따른다(사 65장).마지막 두 장에도 심판과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무시무시한 실패와 죽음이 있다.개인이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 전체이든, 우리는 용감한 믿음의 본보기는 따르고 타오르는 이기심의 본보기에 대해서는 슬퍼하도록 명받았다. 높으신 주님의 음성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이 글은 Themelios 47, no. 3 (December 2022)에 실린 같은 제목의 논문을 간추린 것입니다.원제: One of the Saddest Texts in the Old Testa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스기야
다윗
이기심
섭리
이사야39장
홉스와 이사야: 역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
by Dennis L. Sansom
2022-12-05
1990년과 1991년, 두 번에 걸쳐서 나는 1월 학기 동안 학생들을 그룹으로 만들어 스위스와 독일로 데려갔다. 두 번 다 우리는 악명 높은 집단 수용소 다하우(Dachau)에 갔다. 최소한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악이 발생한 곳에 서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주유소 옆에 선 채로, 수천 명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악으로 물든 이 땅에도 푸른 풀이 자라고 잔잔한 개울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랐다.강제수용소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일이 번영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인간이 문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다시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 뒤에는 사실 더 큰 질문이 있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가 내놓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대조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영원한 갈등에 대한 홉스의 설명홉스는 1642-51년에 걸쳐서 지속된 격동의 시대, 파괴적인 영국 내전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했던 그는 그 극복을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썼다. 그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길들이고 정의를 보장하는 독재 통치자를 옹호했다.홉스에게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하는 끊임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악하고 잔인하고 또 짧은” 인생이다. 우리는 밤마다 문을 꼭 잠가야 하고, 행여라도 극악무도한 적과 함께 방에 갇히면 권총을 꼭 쥐고 있어야만 한다. 이토록 무서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두 가지 자연법칙뿐이다. 첫째,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둘째, 인류의 갈등 성향을 고려할 때, 자기방어는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따라서 정부는 순응을 강요해야 하고, 거친 반대자를 진압할 권한을 가진다. 홉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과 민간인 2,200만 명이 사망했고, 2,3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전쟁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고작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전쟁이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발했다.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8,500만 명이 죽었다.전쟁이 가져다준 참상을 겪은 인류는 이제 대량 학살을 중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또 한 번의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소비에트 연방, 중국, 그리고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공산주의 정권의 폭정 아래 무려 6,000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이제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직면했다. 20세기만 봐도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전쟁을 도발하려 하거나 전쟁 도발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라는 홉스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평화와 문명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홉스가 옳다. 인류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파괴하는 세력인 것이다. 이사야의 긴 이야기또 다른 기록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위대한 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예언적 해석으로 읽힌다. 이사야서가 기록된 시대는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어서 바빌론이 기원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대 민족이 전쟁으로 파괴된 혼란의 시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홉스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시대가 가져다준 분노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며 정의를 위해 여전히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사야는 더 긴 줄거리를 바라본다. 칼과 창이 변하여 괭이와 낫이 되는 날, 세상의 모든 은혜가 예루살렘에 이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함께 나누는 재물, 서로를 향한 존경,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를 향한 사랑을 모두가 누리게 되는 날을 향해서, 지금도 여호와는 한 발 한 발 인간 역사를 심판하고, 움직이고, 또 인도하신다. 이사야 58장과 61장의 환상에서 이사야는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며 거리를 복구하는 특별한 무리의 활동을 설명한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적 섭리 사역에 동참하여 역사의 상처를 회복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증오와 폭력의 잔해를 극복하고,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며, 만인이 참 주님을 올바르게 영접할 수 있도록 사회를 준비시킨다. 전쟁은 최종 결론이 될 수 없다이사야에게 전쟁은 현실적이고 끔찍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다. 인류 역사와 민족의 운명이 품고 있는 진짜 주제는 하나님의 손이 멸망의 세력을 이기고 인간을 본래 창조된 목적으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신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위대한 지휘자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종 파괴로 얼룩진 불협화음의 악보 너머로 그의 백성이 공동체 생활을 축하하는 장대한 크레센도의 화음을 내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게 하신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하는 것을 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멸망의 세력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의, 그리고 화평과 인간의 성취를 위해 씨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또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힘을 이사야가 예언했다. 회복의 힘은 폐허를 수리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무너진 곳을 고치고, 나아가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사야의 믿음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절망하는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한 아편이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회복의 원리에 대한 이사야의 믿음은 홉스가 주창하는 파괴의 원리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학자연과 인류 역사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목적(teleology)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다하우 밖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풀밭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2007년, 나는 노르망디 해변에 갔다. 오마하 해변에서 우리는 1944년 6월 6일, 거의 2,400명의 미군이 죽거나 다친 곳에 서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고 손실인가? 하지만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해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날 늦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의 하나인 미국인 묘지에 갔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노르망디와 다하우 같은 곳이 (그리고 인류 역사의 다른 수천 곳이) 회복되고 재건되고 또 치유될 수 있는 걸까? 두려움과 파괴와 전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회복이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경험에서 희망이 완전히 증발한 적은 없었다. 문명은 계속된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하나님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파괴는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악은 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혼돈 속에서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금도 씨름하고 계신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당신과 나는 지금 어느 쪽에 기여하고 있는가? 원제: 2 Competing Visions of Hi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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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이사야
리바이어던
전쟁
세계대전
갈등
폭력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든 신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그 나라를 발견하다
by Stephen Witmer
2022-12-0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어린 나이에 회심한 나는 교회에서 자랐다. 강해 설교를 들었고, 주일학교의 부직포 그림들을 보면서, 또 여름 성경학교와 여름 수련회의 성경 구절 빨리 찾기 시합을 통해서 내 신앙의 기본기를 다졌다. 할머니의 권유로 나는 십 대 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기독교 대학에 들어가서는 부전공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그래서 이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꽤 많은 성경 구절을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성경을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구원의 메시지를 완전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목회를 준비하는 중에 나는 그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특별한 문장을 만났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스캔들이 되셨을 때조지 래드(George Ladd)가 쓴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신약신학)을 어떤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문장이 들어있는 장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확실하게 다 읽었다―은 내 상상력에 불을 붙였고,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와 내 삶에 대한 이해를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구약성서와 유대 묵시문학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대의 끝을 가져오며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불의한 자들의 멸망으로 인간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와 하나님 나라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기 전에, 선과 악이 뒤섞인 사회가 계속되는 현시대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다스릴 미래 시대의 권세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창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이미 도래했다고 단언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지만, 인간 사회가 뿌리째 뽑히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 나라의 신비이다.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94)이 글을 읽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성경을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라는, 다소 정적인 기록으로만 읽었다. 중요한 성경 속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더 큰 줄거리,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계획,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구속 사역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래드는 내가 미처 모르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담긴 역동성과 진보성을 보여줌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나는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 동시에 얼마나 듣기 거북한 소리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기적을 행하고 또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한 것은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과 대결은 어릴 때부터 들어서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 내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래드이다.래드의 눈을 통해, 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듣기 거북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 때에 드러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 나라를 작고 숨겨진 겨자씨에 비유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물, 겨자씨, 누룩에 관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래드의 가르침은 이미(already) 도래한 나라, 아직(not yet) 오지 않은 나라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무려 이십삼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의 흥분과 만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보다 훨씬 큰래드의 가르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초림 속에 담긴, 역사를 뒤흔든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래에 있을 새 창조를 확실히 보장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때를 이루는 첫 성취의 문을 여셨다. 그때까지 내가 성경을 읽은 방식은 거의 다 개인 차원의 적용을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고, 그런 예수님의 사역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러던 내가 비로소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우주적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예수님의 새로움이 내 가슴을 때렸다. 또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절정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깨달음은 내가 지성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더욱 높이도록 했다.이미 시작된 종말론이 가져다준, 라드로 말미암은 지적 자극은 깊었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자극 덕분에 나는 신학교에서 성경 신학의 풍부함에 푹 빠질 수 있었고,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님이 어떻게 성취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춘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삶의 이유를 알게 되다신약성경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넘어, 래드는 내 삶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중복되는 시대와 관련한 라드의 유명한 다이아그램―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겹치는 “현재 시대”와 “다가올 시대”의 선―을 보면서 나는 내가 살았던 곳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당신이 있는 위치는 바로 여기입니다”라는 표시가 붙은 쇼핑몰의 지도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이 왜 나를 의롭다고 하시고 또 성령께서 지금도 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지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왜 여전히 죄와 고통스러운 투쟁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왜 내 속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서 성적인 이미지를 접하고 싶어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런 나 자신과 필사적으로 싸우는가? 겹치는(overlap)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그것은 또한 내 삶에 영향을 미쳤던 고통의 슬픔도 설명했다.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아버지는 지금도 휠체어를 타고 있는가? 왜 불안은 지금도 나를 때때로 마비시키는가? 겹치는 세상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한 건 아니지만, 죄와 성화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했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와 절망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주었다.삶의 목적래드를 만나고 이 년 후, 나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맑고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나는 대서양 옆 매그놀리아의 바위 위에 앉아 리처드 헤이스(Richard Hays)가 쓴 신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다.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 즉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장소이다. 바울의 모든 윤리적 판단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다. … 두 시대 사이의 시간을 충성되게 산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 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지나치게도 너무 적게도 주장하지 않으며 도덕적 분별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윤리적 비전, 58-59쪽)이 구절도 내게는 삶의 목적을 보여주었다. 래드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는 매우 중요하고 내 인생을 형성하는 글이 되었다. 내 속에 목사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교회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교두보”로 또한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말세에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쓰시는 권능의 초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목사라는 소명을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만든다.윤리와 종말론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나라에서 사는 삶) 자체가 우리의 일상생활 방식을 형성한다는 나의 확신을 헤이즈가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존재가 가진 중간적 본질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하나님의 능력은 이미 동이 튼 말세의 새벽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지만, 완성된 새 창조는 여전히 미래이다)이, 그리고 현실이 가진 실질적이고 윤리적이고 또한 일상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도록 하는 데에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 내게는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이다. 나는 헤이즈의 책 뒷장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내 삶의 목적이다.”삶을 바꾸는 신비 나누기그 이후로 나는 내가 찾은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미래에 관한 화려한 묘사를 통해 지금 이 땅에서 고통받는 신자를 격려하는 책이다. 나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좀 더 잘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길지 않은 책을 한 권 썼다. 지극히 선한 미래의 새 창조가 결국에는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미래의 새 창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면서도 동시에 인내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 그리고 흥분되고 좌절되는 긴장 속에도 무한한 가치가 있음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신학교 학생을 가르칠 때, 이미 시작된 종말은 항상 반복되는 주제가 되었다. 십사 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성경의 줄거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의 우주적 중요성,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성취에 근거해서 미래의 새 창조가 온전히 우리 소유가 되었음을 실제 삶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 되어 예수님이 확보하신 권세와 축복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맛보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더불어 그의 은혜로, 하나님이 품으신 모든 계획을 만족시키는 은혜의 절정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은 사람이 풍성하게 누리는 데에 작지만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원제: A Mystery Made Sense of M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조지래드
하나님나라
이미와아직
종말론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의 지평
by 최창국
2022-11-29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에토스 함양에도 중요한 문제다. 용서는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피해자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고 용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 용서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스런 감정을 수반하는 프락시스(praxis)다. 하지만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용서를 말하고 베푸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용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말한 용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통하여 단지 윤리적인 의무만을 강조하게 될 때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의 역동을 간과할 때 흔히 발생한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분별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지평만이 아니라 사법적(judicial), 심리적(psychological), 그리고 관계적(relational) 지평까지 포함하는 매우 역동적 주제이다. 사법적 용서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주체이며, 피해자의 부정적 긍정적 감정인 분노와 분개와 자비 등과 관계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즉 가해자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용서이다.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를 단순하게 윤리적 프락시스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용서에 관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마 18:22).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용서의 당위성과 윤리적 실천만을 강요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피해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적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다짐해도 미움과 정죄와 분노가 떠올 수 있다. 인간은 상처나 피해를 받으면 분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피해자의 마음의 치유 없이 용서의 실천만을 강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은 윤리적 차원이나 관계적 차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상황적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용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자가 되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의 정신과 용서하는 자세를 함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용서가 등장하는 맥락은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용서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료의 애절한 청은 거부하고 자신의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가 베풀어진 방식이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 18:33). 하지만 이 질문은 수사적으로 표현된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보상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 보상이나 이익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치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광의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 18:21)라며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반면, 예수님은 이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대답함으로 베드로의 질문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양적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가 마음과 자세의 문제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즉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게 되면, 용서의 상황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상황적 문제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용서의 미묘하고 복잡한 차원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용서하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도덕 기준과 양심, 그리고 정의감을 모두 무시하고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으므로 너도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를 묻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 할 수 없을 때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용서의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악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해자에 대한 보복의 논리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틀에 박힌 정형화된 공식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자유로움의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다. 용서는 그 특성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역동성을 지닌다.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자 관계적이고, 개인적 문제이자 공동체적이며, 역사적 문제이자 상황적이다. 따라서 모든 용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용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용서를 개인의 분노와 분개의 차원이나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가해자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 용서는 복잡한 맥락, 즉 일종의 영적, 윤리적, 관계적, 생태계 안에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용서가 무조건 상황에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가 상황을 전환시킬 힘을 지닌다는 의미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243).용서는 단지 피해자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다. 즉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다.용서의 여정은 보편적으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된다. 즉 피해자의 자기 분화 수준과 피해의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용서의 여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용서는 피해자의 분노가 해소될 때 발생하며, 그 여정은 고통스럽고도 긴 여정이다. 따라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발생 원인과 분노 해소 과정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며 생명력의 표현이다.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이다. 용서와 분노 같은 감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양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다.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의 분노나 상처가 완화되고 치유될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 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질 스코트(Jill Scott)는 용서를 “정당한 복수에 대한 회의에서 용서에 대한 중립적 수용을 거쳐 가해자에 대한 충일한 인간애”로 전진하는 일종의 연속체로 보았다. 그녀는 이어 “그러므로 용서의 실천은 끊임없는 소소한 제스처와 의도들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 외에도 용서의 스펙트럼 안에는 분개심과 복수심 같은 감정들도 같이 들어 있는 까닭에 용서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감정들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수년이 지난 후에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고 하였다(Jill Scott, A Poetics of Forgiveness, 199).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언어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인간의 용서는 의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해도, 상처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가 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지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서의 부정적 긍정적 반응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용서를 개인의 의지적 결단과만 관련시킬 때 정서적 상처로 인하여 용서가 쉽지 않은 사람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의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정서적 여정과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광의적인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문제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의 실현의 문제와도 관계된다. 데이비드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참된 용서는 단지 개인의 화해(reconciliation)의 과정에 이르는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생명력과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용서의 참된 초점은 개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소나 착함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대인 관계의 화해, 온전함과 생명을 함께하는 것에 있다”(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 6-7). 그가 보는 참된 용서의 의미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위성에 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가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격려와 용서의 가능성에로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이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복음을 실현해내는 여정과도 관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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