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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인가?
by Ken Caruthers
2019-05-02
모든 크리스천은 선교사인가?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선교사’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은 관례적으로 그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선교사’라는 말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러 낯선 땅에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선교사는 아니며, 오지로 떠나는 사람들만 선교사라 할 수 있다. 자국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는 선교에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해를 입게 될 것이며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동떨어진 기독교를 붙들고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어떤 이들은 ‘선교사’라는 용어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모든 크리스천은 선교사이며 선교사의 활동은 모든 크리스천이 그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행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하나님이 먼 곳으로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사람들의 부류가 있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일 ‘선교사’라는 단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이러한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교회는 해를 입게 되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교회를 이끌도록 은사를 주신 사람들을 간과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히 낯선 곳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와 같은 크리스천은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섬길 때도 모든 크리스천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치와 같다.‘선교사’의 성경적 개념어떤 이들은 “모든 사람이 선교사다”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모든 사람이 선교사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선교사’라는 용어는 복음 전파라는 성경적 개념을 알리도록 만들어진,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용어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따라야 하는 성경적 개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아버지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의 백성과 교회를 구원하셨다. 믿는 자들로서 우리 모두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있으며 우리 가슴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받고 동시에 성령과의 교제로 연합되었다. 성령과의 이러한 연합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서로 교제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크리스천이 교제할 때는 언제나 삶과 예배를 통하여 복음을 나타내는 지역 교회로 구성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고유하게 준비되어 서로 간에 그리고 이웃을 향해 국내외에서 섬기는 사역을 위하여 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영으로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 교회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이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 가운데 그분의 다스리심을 전하게 하시면서,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에 교회가 평화롭게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사도행전은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활동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순전하게, 세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채로 그분을 경배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살아가며, 복음을 도처에 선포하기를 원하신다.그리고 하나님은 이 과제를 완성하기까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을 통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도록 만드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미지로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키신다. 더구나 성령은 그분의 백성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행할지를 알려두기 위해 교회를 섬기는 자를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은사를 주셔서 이러한 전체 사역으로 우리 각자를 적합하게 인도하신다.하나님의 ‘선교’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하셨으며, 계속 하고 계시므로 그분의 위대함은 온 땅에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이름을 위하여 모든 족속과 언어와 국가를 구원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성취하려고 하시는 이 사역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부른다.선교는 지상에서 그의 교회들을 통하여 수행해지도록 설계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을 주로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분명히 말하자면, 우리가 섬길 기회는 다양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기 부여된 시간과 장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특정한 삶의 정황과 자리에서 청지기로 섬겨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가족, 독신, 교인, 시민 등).우리의 특정한 상황은 다르더라도, 제자가 되라는 소명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역을 위임하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말이다.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급, 민족, 성별, 종교, 지정학적 장소, 언어, 수치와 두려움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또한 우리 서로 간에 온전히 화해할 수 있게 된다.어떤 의미로 선교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를 일부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모두 새롭게 명심하자.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고 순종하면, 어떤 종류의 장벽이라도 모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 있는 곳에서 불러내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장벽을 뛰어넘는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선교사라는 명칭을 관례적으로 사용하면, 국내에 머무르든지 해외에 가든지 모두 복음을 전하는데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후자를 ‘선교사’라고 불러왔을 뿐이다. 하지만 둘 다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만일 예수님에 의해 속죄가 이루어졌다면, 그 효과는 매우 위대하여 권세있는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장벽을 없애버리게 된다. 그러면 정말로 사랑하기 힘든 이웃과 가족에게도 복음을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길을 건너가야 한다.복음 전파, 선교의 성경적 의미‘선교사’라는 단어는 단순히 언어학적으로 ‘파송된’이라는 의미에 근거한 성경 외적 용어이다. 이 용어는 복음 전파라는 성경적 개념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교회는 이러한 성경적 개념들을 보존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 개념을 모든 사람들을 제자삼기 위하여 문화와 언어적 장벽을 넘어간다는 관례적 관점으로 보든지, 아니면 어디에 있든지 사명적 관점으로 제자를 삼는 모든 크리스천을 의미하든지,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의미가 사라지지 않도록 사용해야 한다.신실하게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따르자. 국내에서, 길 건너서 그리고 우리 도시의 가장 곤핍하고 가장 잊혀진 사람들에게, 지구 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복음이 가장 전달되지 않고 가장 전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예수님을 따르자.출처 www.9marks.org원제: Is Every Christian a Missionary?번역: 정은심
선교지침
선교사
성령
제자
청지기
소명
복음전파
순종
선교를 위해 떠나야 하는 네 가지 이유
by Andrew Knight
2019-04-18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에 관하여 들어보았는가? 그 선교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하려고 집, 가족, 모든 익숙한 것을 떠났다. 그는 새 문화를 이해하려 했고, 여러 방식으로 복음을 상황화 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사랑했다.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을 추구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사람들을 돌보았다.그리고 그가 구하러 온 사람들의 손에서 순교를 당했다.하지만 그의 죽음이 그의 선교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메시지를 더 멀리 퍼지게 했다. 그에 관한 책이 저술되었다. 그에 관한 증거들이 공유되었다. 그의 명성은 여러 민족과 국가와 대륙에 알려졌다. 그의 선교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지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교 단체를 세상에 출범시켰다. 그의 유언은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귀에도 여전히 울린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백성들을 구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복음과 함께 온 세계에 전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이 그분의 사명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대리자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잠시 이 땅을 떠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남기셨다.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마지막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4 가지 이유가 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파송하기 위하여 구원하셨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선교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반복해서 보내시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분의 계획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선교를 위해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목적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아들의 신실함과 열정을 심어서, 그리스도 단체들 안에서 아들의 선교적 삶이 계속 반복적으로 번져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분이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4:19)고 했을 때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파송하는 일과 사람을 낚는 일을 진지하게 여기셨다. 그분의 뜻은 전혀 뜬구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명백하고 권위 있게 지금도 울리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제자 삼는 자로 만들려고 하신다. 성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순종의 삶이라면, 선교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을 따라 행하는 삶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성화는 선교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야 하며, 이에 우리의 삶을 다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모양과 형태 및 방식으로든 어디든지 믿지 않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한, 당신은 성장하거나 신실해지거나 성화될 수 없다. 선교지는 아닐 수 있지만 당신은 분명히 어디든지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를 해외로 가라고 부르시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느 쪽도 아니라면 어디일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부터 물려받은 한 가지 사명을 나눠가지고 있다. 2.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때문이다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선교에 대한 나의 이해를 여러 차례 완전히 변화시켰다. 내가 바울처럼 나를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로 볼수록, 복음의 능력은 더욱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내 죄가 흉측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다른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새롭고 더 깊은 소망을 내게 주었다. 이제 하늘에 소망을 두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나도 구원하셨다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였음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구원받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큰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이유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죽은 자를 살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해 보면, 홍해를 가름과 애굽의 모든 재앙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심으로 죄악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보여주셨다.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여 전 세계에서 복음을 통해 매일 수많은 사역을 하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복음은 무한히 구원하시는 자비의 능력이다. 복음은 이를 위한 것이다. 복음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복음을 전할 용기가 없다면, 거울 속을 다시 들여다 보라. 하나님이 복음 사역으로 이미 구원하신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3.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구원받았기 때문이다복음의 좋은 소식 자체는 명백히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확실히 어떤 사람들은 사탄에 의해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후 4:4).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믿을 수 있겠는가(롬 10:14)? 따라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문제다. 우리가 아직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다.그것이 나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고후 5:15) 내 마음에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살고, 나 만을 생각하며, 나만을 위해 행할 것이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옛사람을 싫어하게 한다.복음은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한다. 물론, 나는 이런 저런 정서적 고통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해결함 받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매일 많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겪을뿐 아니라 영원한 형벌의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지옥은 그들의 미래다. 복음이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선교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했으니 우리는 반드시 가야하며,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세상 끝까지 가야한다.4. 너무 적은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떠나기 때문이다“당신은 하나님에게 화판이나 색칠하기 그림책을 주려고 하는가?”이 비유는 여러해 동안 내가 지상명령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시험했다. 내가 하나님께 속했는가 아니면 그분이 내게 속했는가? “제가 당신의 길에 동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 사인을 넣은 빈 화판을 들고 하나님께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결정한 계획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갈 것인가? 나는 그동안 하나님이 그림의 색만 결정하게 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윤곽이 그려진 그림을 드리고 하나님이 그 윤관 안에만 색을 칠하게 해왔다.우리는 세계 선교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2% 미만이 복음적 크리스천이다).유럽의 33%, 러시아의 50%, 중국의 80%, 그리고 동남아시아 일부의 90%가 복음 미접촉지역이며, 대부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도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복음 사역자가 없다).2,200 종족들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이 위기는 복음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나가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복음은 부족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전파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추수할 것은 많다”(마 9:37)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다. 그분은 구원하시려고 한다. 그분은 모든 종족으로 백성을 삼으신다(계 5:9-10, 행 18:9-10). 하지만 나가서 대변할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하러 나갈 사람이 너무 적다. 예수님은 소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을 보시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고 하셨다. 복음을 들고 추수하러 가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추수의 주인이시다. 그분이 우리에 앞서 나가시고 가장 중요한 사역인 마음 사역을 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단지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다. 당신의 삶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일 수 있다. 당신이 추수하러 떠날 자일 수 있다. 나는 2015년 7월에 선교를 위해 떠났다. 나는 지금 세속화된 후기 기독교 시대 유럽에서 살며 선교하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가라고 하지 않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는 추수하러 떠나는 자가 되었다. 집을 떠나서 해외에서 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열방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시작하지 말라. 만일 기도하고 있다면, 당신도 곧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선교사들은 그분의 믿음의 선물과 용기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속에서 살아가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해보았다.하나님은 모두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선교를 떠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으며, 그 백성에게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유한 은혜가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our Reasons Why We Leave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파송
신실함
열저
성화
지상명령
능력
복음
구원
세계화는 기독교 선교의 훌륭한 기회이다
by Albert Mohler
2019-04-11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선교 시대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선교의 새 시대는 지난 2백 년의 성취 위에 세워지겠지만, 또한 현재 세계의 상황에 맞게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세계 선교 비전 중 가장 중요한 차원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온 세계의 죄인을 구원하심으로 그분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기쁘게 여겨야 한다.기독교는 글로벌 신앙이며 세계는 점점 글로벌 공동체로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주로 문화적, 사회적 고립 속에서 살았다. 수많은 문화가 녹아 있는 여러 다민족 국가에서도 소수 민족과 소수 언어 그룹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지역과 공간에서 거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제국주의가 전세계를 무대로 팽창했던 19세기까지는 서부 세계와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 그렇게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탐험가와 용감한 선원들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지만, 제국 시대는 전 세계에서 얻은 폭넓은 경험을 통해 서양 세계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무렵 아시아의 주요 문화들 특히 일본과 중국은 드러내놓고 외부의 다른 문화에 저항했다.제1차 세계대전은 문화적인 변곡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거대한 세계화의 시대가 등장했다. 미국을 예로 들어 보자. 전쟁은 전투에 함께 했던 수많은 미국 남성들을 이동시켰고, 서유럽 배경의 미국인들과 다른 소수 민족(언어) 배경의 미국인들이 서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미국의 내국인들이 대양을 넘어가서 처음으로 다른 사회와 접한 계기가 되었다.세계화의 가장 위대한 힘은 사실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교통 기술의 발달과 소통 매체의 진보는 여러 문화들을 연결시켰고, 20세기가 끝날 즈음에 세계화는 서양에 있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중국의 만리장성 뒤에 있는 사람과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은 한 세기 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지구 반대 쪽에 있는 두 사람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세계화 현상을 그대로 상징한다. 세계화는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계적으로 연결된 경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본다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는 비행기로 24시간 안에 세계 어느 곳이든지 도착할 수 있다. 세계화는 전 세계의 소식이 세계 구석구석에 매우 빠르게 도달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가 이제 지구 사람들이 사는 모든 곳을 아우르는 세계 문명의 한 부분이라는 의식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세계화와 함께 도시들이 급히 성장했고 도시화가 일어났다. 1800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3%만이 도시에 살았다. 1900년까지 도시에 사는 사람은 10%까지 증가했다. 1900년과 2007년 사이에 50%로 증가했다. 2050년까지 인류 전체의 75-80%에 해당하는 인구가 도시에 살게 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도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며 미래가 있는 곳이다. 도시에 대하여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는 점이다. 초대형 도시는 또한 다양성에서 나오는 긴장감을 만든다. 세계 대 지역, 공동체 대 고립, 다양성 대 단일성, 국제 대 민족, 그리고 부유함 대 가난함 사이에서 오는 갈등 말이다. 이러한 초대형 도시에서의 경제적 갈등을 생각해 보라. 16억의 사람들이 현재 빈민가나 슬럼가에서 살고 있다. 도심 외곽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도시의 슬럼가로 몰려들었다. 누가 이러한 경제 분배의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생각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이 있는 곳, 이러한 모든 문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한번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은 지상에서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언어적으로 가장 풍성한 다양성을 지닌 나라로 여겨진다. 사실, 어떤 사회학자들은 이제 미국이 곧 소수 민족이 다수인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어떤 주에서는 이미 그 상황이 현실화 되고 있다. 이 말은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현실은 엄청나고 전례없는 복음 전파 기회를 제공할 것임을 예고한다. 만일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복음적 교회라면, 교회는 인류 통계학적 변화에 좀 더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성경적 비전의 핵심이 처음부터 세계화 및 세계 공동체를 돌보고 걱정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온 하나님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은 훨씬 더 긴급하게 우리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다(마 28:18-20). 이와같이 기술과 소통이 세속적으로 세계화되기 전에 이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세계적 관점을 가지라고 하셨다.신실한 교회는 항상 세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세계는 이제 경제적, 기술적 및 정치적 사실로서 세계화를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계 선교를 주님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세계는 세계화를 경제적 및 사회적 결과라는 면에서 논할 수 있지만, 교회는 세계화를 전례 없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세계화는 사회학자와 정치인 및 사업가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수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위대한 약속으로 다가온다. 현대 크리스천들은 이제 전 세계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여 모든 족속과 민족과 국가들이 왕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lobalization and the Christian Mission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글로벌
도시화
지상대명령
기독교
세계화
경배
순교, 영원한 영광의 무게
by Garrett Kell
2019-04-04
2018년 11월 17일, 존 쇼우(John Chau)는 북 센티넬 섬의 해변가를 향하여 카약의 노를 저어갔다. 이틀 전, 그는 그쪽에서 은둔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와 연락을 취했지만 결국 빗발치는 그들의 화살을 뒤로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쇼우는 센티넬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년 동안 계획하고 기도하며 준비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그곳으로 부르셨다고 확신했다.쇼우는 그 섬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존 파이버(John Piper)는 위협적인 곳에서 순교를 당한 또 다른 선교사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희생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훨씬 더 나쁜 것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려 했다. 그는 그의 죽음이 ‘영원한 영광의 무게’가 될 것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었다.” 존 쇼우는 이와 똑같은 위대한 소망으로 목숨을 걸고 같은 값을 치렀다.그 공동체가 행한 폭력의 역사는 잘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이 왜 외부자들에게 그렇게 적대적인지를 약간 이해할 수 있다. 1880년대에, 모리스 비달 포트먼(Maurice Vidal Portman)이라는 영국 해군 병사가 원주민을 연구하기 위해 그 섬에 도착했다. 그는 6명의 센티넬족을 납치했다. 4명의 자녀들과 함께 붙잡힌 노령의 부부는 병이 들어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또한 근거가 약하기는 하지만 포트만이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가슴 아픈 보고도 있다. 센티넬족이 외부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당한 고통이 복수를 정당화시키지는 않지만, 그 보고는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하나님,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존 쇼우의 열정, 훈련, 신중함, 유산에 대해 많은 의문이 일어난다. 하지만 또 그러한 비극의 저변에는 더 중요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하나님은 센티넬족에게 그분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내셨을까? 하나님은 그들의 살인을 용서하고, 그들 자신의 고통에서 그들이 자유를 얻도록 하셨을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쇼우 가족을 어떻게 치유하셨을까? 그분은 화해시키는 은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부당함, 화살, 쓰러진 선교사를 사용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전에도 매우 유사한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일을 하신 적이 있다. 1839년 11월 20일에,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 선교사는 뉴헤브리즈(현대의 바누아투)의 에로망고라 불리는 작은 섬의 해안가를 향하여 항해를 했다. 그들은 이 섬을 피하도록 권고 받았다. 왜냐하면 그 섬의 원주민들이 외부인들에게 폭력적이며 때로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과 해리스는 하나님이 선교사들을 다른 섬으로 옮기시는 일을 보았고, 이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계속하시리라고 믿었다.그들은 그 길을 준비했다그들은 위험을 알았지만, 에로망고 공동체가 최근 외부자들의 손에 공격을 당해 화가 나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들이 도착하기 몇 주 전에, 호주의 백단향 무역업자가 그 지역 추장의 두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 공동체는 백인 외부자들을 폭력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윌리엄과 해리스는 그 해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곤봉으로 공격을 받아 죽었고 성스러운 의식의 일부로 그 섬사람들에 의해 잡아먹혔다. 그들의 운명에 대한 소식은 빨리 퍼져 나갔고, 많은 이들은 그 선교사들의 어리석은 열정과 ‘원시 천국’에서 살고 있는 공동체에게 원치 않는 외부의 사항을 강요했다고 비난했다.이렇게 그 선교사들의 사명은 끝났지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도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20년 후에대략 20년 후에, 존 페이튼(John G. Paton)이라는 또 다른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에로망고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항해를 떠났다. 그 종족의 영혼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페이튼은 윌리엄과 해리스가 순교를 당했음에도 하나님이 거기서 반드시 역사하시리라고 확신했다.결국 주님이 페이튼의 사역을 사용하여 바누아투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와 치유와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확신은 사실로서 입증되었다. 페이튼은 후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에 앞서 선교사로 갔던 이들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따라서 헤브리즈인들이 순교자들의 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에 전 세계 크리스천들에게 이 섬을 당신의 섬으로 삼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한때는 고통과 분노로 가득했던 이 섬에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번창하고 있다.그들을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2009년 11월 20일에 열린 화해 축하 기념식에서도 드러났다. 존 윌리엄스 선교사가 죽임을 당했던 그 해변에서, 약 170년 후에, 그의 4대째의 손자와 13명의 가족들이 그를 죽였던 섬종족의 후손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종족은 용서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오직 그리스도만 가져다주실 수 있는 용서와 화해를 기념했다. 바누아투 공화국 대통령은 “우리가 기독교 국가이므로 이와 같이 화해를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BBC는 이 이야기를 취재하여 3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용서이 일들을 생각해 보면서, 나는 하나님이 지금도 유사한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고 있다.쇼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기 몇 시간 전에,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록이 아니기를 소망하지만, 혹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열방의 모든 종족들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바로 예수님이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며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요 3:16-20).하지만 센티넬족과 에로망고족과 같이, 인류는 진리를 전하는 자를 거부했다(요 1:11-14).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너무 싫어하여 그분을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았다(요 19:1-37). 하지만 성경의 기이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그런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고 그 죽음에서 살아나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용서와 충만한 기쁨을 주셨다고 말한다.우리의 영혼을 흔드시는 하나님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모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 세상의 미접촉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이 더 많은 선교사들의 영혼을 흔들어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센티넬족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 존 쇼우의 죽음을 사용하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도 흔들고 있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후대 선교사들의 마음에 역사하여 선교사들을 죽인 자들에게 용서의 메시지를 가져다주고 또한 몇 세대 전에 부당한 취급을 당한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도록 하고 있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지금부터 여러 달, 여러 해, 여러 세기 전에 이미 용서의 이야기를 써서 세계 앞에 그분의 자비를 높이려 하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북 센티넬 섬의 해변에서 있었던 그 감동적인 기념 행사를 마음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5년 전 순교한 또 다른 선교사의 장례식 전야에서 존 파이퍼가 호소한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을 대신하는 선교사들이 세계에 흘러넘치게 합시다. 우리는 죽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을 포함하여 세계가 주목할 영원한 기쁨을 추구합니다.”하나님은 선교사들의 순교로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이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다시 그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God Might Do with Satan’s Arrows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순교
존파이퍼
존쇼우
페이튼
윌리엄
해리스
용서
긍휼
개인적인 갱신이 어떻게 선교에 기름을 붓는가?
by Jeremy Linneman
2019-03-28
“영적 수준이 깊어질 때, 나는 더 전도할까 아니면 덜 전도할까?”이 질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영적 성장에 관한 심도 있는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추구 속에서도 이 질문은 불쑥불쑥 떠올랐다.당신도 한번 이 질문을 생각해 보라. 시간이 갈수록 더 전도하는가 아니면 점점 덜 하는가? 만약에 당신도 나처럼 교회 밖에서 거두는 열매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면, 도대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선교 유형팀 켈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선교 패턴을 간파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내보내시되 그 전에 먼저 끌어들이신다는 패턴이다.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신다. 그리고 그가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고는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불꽃 안에서 나타나셨을 때 모세는 양을 치고 있었다. 모세가 얼굴을 가리고 경배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내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었으니 이제는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니, 가서 내 백성을 이끌고 나오라.”누가복음 5장에는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어부 베드로가 나온다. 그때 해변가에 있던 한 사람이 말한다. “그물을 한 번만 더 내려라.” 그 결과, 베드로의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고 고깃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고깃배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8장에는 부활 이후에 빈 무덤에 도착한 여자들이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보았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다. 기쁨에 못 이긴 그녀가 주님께 매달렸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붙잡고 있지 마라. 가서 사람들에게 네가 목격한 사실을 알려 주어라.”반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신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파송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당신께로 불러서 당신을 더 잘 알게 하시고 우리를 파송하신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말이다.갱신주도형 선교지난 12년 간의 사역 동안, 다른 사역에는 소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영적 깊이를 추구하는 사역 또는 선교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교회 개척에 치중했던 2008년과 2010년에는 관계 세우기, 복음화, 그리고 일대일 제자훈련이 사역의 주안점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교회에서 사역하는 중에는 목양 사역과 행정 때문에 선교 사역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선교 패턴에 주목하면, 영적 성장과 선교적인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목사가 말했듯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동일하게 필요하다.”내 친구 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성령님이 주시는 복음으로의 각성을 통해 갱신된 개인 또는 공동체가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낼 때, 새로운 신자를 훈련시킬 때, 그리고 교회를 개척할 때, 비로소 “갱신주도형 선교”가 이뤄진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를 파송하기 위해서이다.갱신주도형 선교는 요즘 더 필요하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깨우고 새롭게 하실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불러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1) 우리 마음에 넘쳐야 하고, (2)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넘쳐야 하며, 그리고 (3) 모든 사람을 향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믿지 않는 그들에게까지 넘쳐야 한다.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사랑은 부족하지 않다. 사랑은 넘치고 또 넘쳐 흐를 정도로 충분하다. 바로 그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특징인데, 풍성할 뿐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고 언제나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함으로 그 수가 배가 되게 한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을 개발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갱신주도형 선교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까?1. 관찰하고 기도하기바울은 아테네인에게 그 유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도시를 걸어다니며 도시의 영적 혼란에 대해 크게 고뇌했다(행 17:16). 그는 시장에서 그들의 영혼을 향한 깊은 연민에서 메시지를 전했다.이런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공동체를 바라보는 만큼 우리도 그들의 절박함을 보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실로 간절하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내가 항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소외와 외로움 그리고 인생의 무게에 힘들어한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가슴 아파해야 하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솟아 넘쳐야 한다.기독교 역사는 모여서 기도할 때 비로소 위대한 부흥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떻게 해야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정기적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2. 힘든 일 하기약 2년 전, 성장하는 대형 교회에서 6년 간의 사역을 마치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도움을 요청했고, 조그마한 도시로 돌아가서 우리는 말 그대로 맨바닥에서부터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때는 갱신주도형 선교가 교리적 확신에서 라이프스타일로 바뀌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갱신주도형 선교는 우리를 다시 주님께로 몰아부쳤다.지혜로운 상담사라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때로는 힘든 일을,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에도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그게 반드시 교회를 개척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은 아니다.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 길을 건너가서 이웃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모이자고 동료에게 문자를 보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친구에게 전하는 일이다. 이런 전도와 제자훈련의 열매가 있고 나면 당신의 교회는 당신에게 새로운 사명을 줄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구령에 대한 사명을 가진 조직을 구성하고, 또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사역 같은 일들이 그 예이다.지금 주님께서 당신을 불러 맡기시는 일이 무엇인가? 3. 쉬면서 일하기사역은 진을 빼는 일이다. 관계를 만드는 것은 감정적인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전도는 흔한 거절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힘든 일은, 정말로 힘들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쉬면서 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종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다. 때로는 제자들만 데리고 앞으로 감당할 대규모 선교 여행을 준비하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창기 신자들을 보면, 그들은 간절한 기도와 열정적인 선교 사이의 균형을 잘 맞췄다.나는 이 부분을 인풋과 아웃풋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나는 자전거광인데, 두 시간 자전거를 타고 약 1800칼로리를 소모한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태워 없애는 칼로리만큼 추가적인 칼로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전거를 타기 전과 타고 난 후에, 도너츠 또는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나는 쓰러질 것이다. 인간의 몸은 소비하는 영양분만큼 다시 채워주는 새로운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기도와 독서 또는 다른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내적 내구성은 사역이 주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파송받아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건 어떤 모습일까?간절한 기도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곧 그분이 이끄시는 갱신주도형 선교에 참여하는 길이다.영적으로 깊어질수록 당신은 더 전도하는가? 나 자신과 당신을 위해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비추신 영광이 밖으로 드러나서, 이 추수 때에 새로운 제자들과 건강한 교회가 나날이 더 늘어나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당신께로 더 이끄시고 우리를 파송하소서. 아멘, 아멘.”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Personal Renewal Fuels Mission번역: 무제
선교전략
팀켈러
선교패턴
갱신주도형
전도
인풋
아웃풋
기도
영적훈련
파송
제한 속죄가 선교에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이유
by Alex Kocman
2019-03-20
"그만 앉지, 젊은이. 비신자를 구원하겠다고 결정하신 하나님께 굳이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까 말일세."이 말은 영국의 특수침례교인(Particular Baptists: 칼빈주의에 기초한 침례교인)이자 열정적인 젊은이였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에게 침례교 목사 존 라일랜드(John Ryland)가 던진 충고이다. 지금 윌리엄 캐리는 현대 선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그때 이후, 개혁주의 신학과 선교를 원수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은 복음 운동을 광범위한 차원으로 괴롭혀 왔다. 진정한 칼빈주의자인 윌리엄 캐리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유혹은 다름 아닌 "당신이 진짜 칼빈주의자라면, 전도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와 같은 논리이다(역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하는 전도는 구원받을 사람을 창세 전에 선택했다는 주권 교리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제기되는 것이다).윌리엄 캐리와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영국의 특수침례교회 목사이자 적극적인 선교를 옹호했던 신학자), 그리고 제임스 패커(J. I. Packer)와 같은 사람들은 개혁주의가 강조하는 제한 속죄(역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구원이 오직 선택받은 자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도록 의도하셨다는 교리)와 선교 활동은 서로 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고, 실은 단짝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그러나 우리 시대까지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 남아 있다. 그 질문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첫 글자를 따서 표기한) 'TULIP'에서도 특히 성가신 이 'L'에 관한 것이다(역주: L은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를 의미하는 약자이다). 즉 하나님이 미리 선택한 사람들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믿는 자들이, 어떻게 먼 길을 떠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동기를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제한 속죄 교리에는 '저 사람은 구원받지 않았어' 또는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무모한 베팅을 하게 하는 유혹이 있다. 한 마디로, 교리가 만든 모호함에 빠지도록 만드는 유혹이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는, 즉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주장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고난받기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와 같은 사람이 가졌던 선교 열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제한 속죄를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한 속죄는 성경적인 진리임과 동시에 선교에 꼭 필요한 성경적인 기초를 다져 준다.1. 제한 속죄는 선교의 목적을 명확하게 한다세게 선교라는 교회의 사명은 그 목적이 명확하다. 세계 선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되살아날 영혼들을 부르고자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유배된 유대인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 이상의 예언, 즉 전 세계를 향한 ‘새 언약’의 예언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라는 ‘대사명’을 주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자녀들을 찾으라는 분명한 명령을 받은 것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큰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라고 말한 것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요 10:16)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리스도의 행군 명령도 이와 같다. "각각의 민족마다 내가 선택한 백성이 존재한다. 너희들은 가서 그들을 찾아라!"만약에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굳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넘어 세상 끝까지 선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특별히 선택된 자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들이 각각의 나라에 퍼져 있기에, 우리에게는 모든 나라, 민족, 언어 및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가 있는 것이다.2. 제한 속죄는 선교의 방식을 유지한다제한 속죄는 부패한 인류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을 회복시키려는 우리의 선교 목적을 공고히 한다. 그뿐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선교 방식, 즉 그리스도 한 분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진리까지도 명확하게 한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진실되고, 완전하며, 효과적인 중보자이자 선교의 구심점이다. 또한 우리가 선포하는 모든 메시지의 중심이기도 하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리스도가 주께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수 있다.가설에 불과한 보편속죄의 교리(그리스도께서 모든 개인을 위해 죽으셨지만, 스스로가 믿음을 행사하지 않는 한 효과가 없다는 교리)가 갖는 문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구세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이 구원을 가능하게는 하셨지만, 실제로 성취하지는 않으셨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교리를 선교에 적용할 때 외쳐야 할 메시지는 ‘믿음’ 그 자체가 된다(이 경우에는 믿겠다는 개인의 결정이 구원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 경우, 믿음은 우리를 그분과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핵심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그분을 설교해야 하며(고전 1:23; 고후 4:5), 이는 곧 '주권적'으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이다.인간이 허락해야만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면, 굳이 세상의 모든 종족에까지 알려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그리스도는 바울이 알던 강권적인 그리스도도 아니다. 고집 세고 반항적인 바울을 구원하고자 그를 말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주를 모르는 전 세계 40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선포할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분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그분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갖지 않은 믿음을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분이다. 아직 그분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만약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그 이름이 온전한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손에 예외없이 새겨져 있다(사 49:16).3. 제한 속죄는 선교의 결과를 보장한다그렇다면, 전도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해 요한계시록 5장은 우리가 문화의 차이를 떠나 모든 민족을 향해 선교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알려 준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 5:9-10).그리스도의 피는 절대 헛될 수 없다. 그래서 요한은 바로 두 장 뒤인 7장에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라고 쓰고 있다. 임무는 이미 완수되었다.간단히 말해, 주님께서 내리신 ‘대사명’은 그 결과에 대한 보장이 없다면 애초부터 달성 자체가 불가능한 명령이다. 우리는 모든 민족마다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이들이 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대속 사역이 있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가 주신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을 안다. 만약에 예수님이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대중을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잡힐지도 모를 물고기를 쫓고자 아무 곳에나 그물을 치는 허망한 어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아니,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배에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을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이 구절에 나타나듯이 분명히 잡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을 보장한다는 제한 속죄의 본질은 세계 교회의 그물이 물고기로 가득 채워질 것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그 명확한 사실을 보장한다.모든 사상에는 따라오는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종종 좋은 의도를 가진 성장하는 신학자를 쓰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뚤어진 막대기로도 직선을 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계속 비뚤어져 있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제한 속죄가 인기와는 상관 없지만, 이는 분명히 영광스러운 교리이고 선교의 핵심을 이루는 가르침이다.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할지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구원할 사람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으며,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 구원을 이루신다. 그러니, 우리는 보장된 결말을 마음에 품고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3 Reasons Definite Atonement is Basic to Biblical Missions번역: 무제
선교전략
교리
모호함
유혹
캐리
제한속죄
구원
선택
성령님
선교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라
by Andrew Knight
2019-03-13
이전에 세상이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나는 헬리콥터 위에서 찍은 어떤 사람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바깥 세계와 단절되었던 아마존의 열대 우림에서 살아가는 부족이었다. 두려움, 놀라움, 불확실성이 드리운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손에는 창이 들려 있었고 손가락은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응시한 채 그 종족을 그리며 묵상해 보았다. 그들은 바깥 세상에서 이루어진 세계화 및 기술의 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난 200년을 살아왔다.내 생애 처음으로, 예수라 이름하는 구세주를 들어 보았을 가능성이 (혹은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들을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미전도된’(unreached) 사람들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실존하고 있었다. 전세계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나와 같은 상태이다. 놀랍게도 10 명의 크리스천들 중에서 7명은 세계 복음화, 특히 전세계에 퍼져 있는 미전도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대하여 무지하다.크리스천으로서의 생애 절반이 지날 때까지 나 역시 이러한 사실에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약 8,000개의 종족들이 복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 날, ‘세계 기독교 운동에 대한 관점’(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이라는 강의 시간에 나는 어느 미전도 종족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용서와 자유가 필요하지만 그 안에 참된 신앙이 없는 이 사람들의 얼굴은 내게 수많은 말을 던지며 도전해 왔다. 미접촉된, 미전도된 사람들과 미파송된 크리스천들 그 사진은 내가 모르고 있던 세계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성경이 없는 종족들’(Bibleless peoples)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나는 성경을 읽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보았으나, 2억 여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싶어도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어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그리고 ‘미접촉된’(unengaged) 사람들에 대해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비신자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져 가는, 그리고 죄와 구세주에 대하여 듣기를 기다리고 있는 종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현재 그들에게는 교회도 없고, 사역 단체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계획을 가진 크리스천도 없다.나는 ‘미파송된’(unsent)이라는 말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들을 ‘보내진 사람들’(요 17:18)로 명하셨지만, 나는 그분이 명하신 사람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세계 곳곳에 선교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복음적 교회가 선교사를 아직 파송하지 않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내가 선교사를 보내느냐 아니면 내 자신이 보내지느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우리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없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한 사실에 대해 무지하지만, 심지어는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마음에 감동이 없다.파송된 구세주를 따르라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마음에 감동도 있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위해 분명하게 파송된 분이셨다. 그분은 눈을 열고, 뛰는 가슴으로 세상에 발을 들여 놓기 위해 죽으셨다.“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종족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더불어, 그분은 두 가지 사실을 알고 계셨다. 하나는 인류가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쳐있으며, 이에 대해 절망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인류가 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알고 계셨던 그분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구원의 목자이셨다(요 10:10-11). 양들은 비록 그분을 몰랐지만, 그분은 양들을 알고 계셨다.조슈아 프로젝트(Joshua Project) 같은 사이트나 선교 관련 서적,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 송출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시청해 보라. 그리고 이를 통하여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쌓으라. 통계학적으로 볼 때, 14만 여 명의 비신자들이 매일 전 세계의 도시를 오가지만, 그중에 80%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무 곳에서도 크리스천을 전혀 만나지 못한다. 또한 비율로 보았을 때 하나의 미전도 부족 당 크리스천 인구는 무려 8만 여 명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알거나 그들에게 가고자 하는 크리스천은 극소수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에 어떠한 움직임이 일어날까? 데이비드 브라이언트(David Bryant)가 말했듯이, “당신이 특정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그쪽으로 인도할 수 없다.”시달리고, 절망하며, 잊혀진 사람들예수님은 사람들의 상황을 아시기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을 보고 마음 아파하셨는데, 우리 목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외진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느냐 가지 않느냐를 논쟁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교회는 누가 그 사람에게 갈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과, 또한 많은 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전혀 듣지 못했기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예수님은 무리가 복음을 접하지 못하여 고생하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긍휼의 마음을 지니신다. 대략 30억 명 이상의 지치고 절망하며 잊혀진 영혼들이 있는데, 5천 명의 크리스천 중 단 1명(단지 0.02%)만이 그곳으로 향한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마 9:38)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위에 표시하며 기도하고 골몰해 보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월드 비전 창시자인 봅 피어스(Bob Pierce)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사실들로 나도 마음이 아프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마음의 움직임을 기대해 보라.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파송된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선교사들의 선방에 서 계신 분이다. 그분은 구원하기 위해 파송되었고, 또한 구원하는 모든 이들을 파송하신다. 그분은 당신과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어디로든 가라고 명하신다. 미전도된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수입 중에서 2천원 만으로도 선교사 파송에 동참할 수 있다면, 전체 크리스천 수입의 0.05% 만으로도 국제 선교에 기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파송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적은 액수라면, 우리가 그 금액을 보내는지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기뻐하셨다 모든 죄악, 고통, 슬픔이 넘쳐나는 세상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사명 완수의 기쁨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인내하셨다(히 12:2). 양들은 지치고 절망하며 목자의 수 역시 절실하게 적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에서 구속의 추수를 많이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5:9). 이것이 예수님이 보신 기쁨이다. 예수님은 아직 그분을 모르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백성의 하나님이시다.예수님이 모든 소외된 사람들로 인해 기뻐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그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눈을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가고, 보내라.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하늘 아버지를 알도록 하는 일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그것이 선교사 파송에 동참하는 우리의 참된 기대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듯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4). 오늘날의 미접촉된, 그리고 미전도된 사람들이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크리스천들이 생각을 모으고 행동으로 나설 때이다. 로버트 사비지(Robert Savag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의 명령은 ‘가라’였는데, 우리는 육체, 은사, 기도, 영향력 등 모든 면에서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하지만 99%의 크리스천들은 자국내에서 계속 꾸물거리고 있다.” 우리는 열방을 위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좀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소망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ll Never Wish You Did Less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미전도
조슈아
구원
파송
구세주
로버트
사명완수
기쁨
인내
짐 엘리엇과 네 청년의 순교: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해당하...
by John Piper
2019-03-06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편 91:1-2).1956년 1월 8일 에콰도르의 쿠라레이 강가, ‘팜비치’(Palm Beach)라고 부르던 모래톱에서 짐 엘리엇(Jim Elliot),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에드 맥컬리(Ed McCully), 피터 플레밍(Peter Flemming), 로저 유더리언(Roger Youderian)이 창에 찔려 죽었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와오라니(Huairani) 인디언에게 전하려 하던 중이었다.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이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기렸다. 이 책의 제목은 시편 91장 1절에서 따온 것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사고가 아니다전능자의 그늘. 바로 그곳에서 짐 엘리엇은 살해당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잃고 2년 후에 자신의 책 제목을 정하면서 이 가슴 아픈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짐이 죽었을 때 엘리엇 부부는 결혼한 지 3년 되었고 10개월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이 제목은 실수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섯 선교사의 죽음도 실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일을 다르게 보았다. 전 세계가 이 젊은이들의 죽음을 비극적인 악몽이라고 일컬었다. 엘리자베스는 세상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쓴다. “세상은 짐 엘리엇의 신념 중 두 번째 문구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책을 '전능자의 그늘'이라고 명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피난처는 고통과 죽음을 모면하는 피난처가 아니라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패배에서 벗어나는 피난처임을 전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구하기 위해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에서 구하기 위해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우리가 저 다섯 선교사들의 믿음,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용기를 지녔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6-39).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안전함“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나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말의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있는가? 이는 당신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면 당신은 전능하신 능력의 보호를 받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 생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는 무한하고 끝이 없는 안전함이 있다.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든 간에 하나님의 영속적인 영광 안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흔들림 없는 피난처를 뜻한다. 이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급진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 부르심이 죽으라는 명령일지라도 순종하게 한다.하루 종일, 날마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평범하고 특별한 순간들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보다 당신을 더 자유롭게 하고, 감격하게 하고, 기운이 나게 하는 것이 있는가?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익을 위해 정하시는 일만 일어난다.하나님이 개입하셨다다섯 선교사들의 순교에 얽힌 정황을 조사하자,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이 드러났다. 1996년 9월에 발행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엘리엇, 맥컬리, 플레밍, 유더리안과 함께 순교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의 기사가 한 편 실렸다. 그 기사에서 스티브는 선교사들의 살해 이면에 있었던 와오라니 부족의 계략에 대해 새로 발견한 내용을 기록했다. 스티브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전능자의 주권에 대한 문장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문장 하나를 썼다. 이는 살해당한 선교사의 아들이 쓴 문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이롭다."'살해자들이' 예전 일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팜비치에서의 살인 자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발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다시 말해, 어째서 이 다섯 젊은이들이 죽었고 수천 명에게 감동을 주는 유산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설명밖에 없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내 유익을 위해 정하시는 일만 일어난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그분의 주권은 바로 이런 것이다.또한 누구도, 결단코 어느 누구도, 열방을 향한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좌절시킬 수 없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에 하나님은 원수의 전선 후방에 자신의 무기를 숨기고 계신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시편 86장 9절에서 말하는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우리가 이를 믿는다면,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이 진리(우리가 전능자의 그늘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받으며 산다는 진리)에 사로잡힌다면, 우리 개인의 삶과 가족과 교회는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겸손해지며 강력해지겠는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lain in the Shadow of the Almighty번역: 차수정 (개혁된실천사)
선교전략
짐엘리엇
사고
능력
개입
전능하심
구원사역
순교
매우 힘든 지역에서 선교하는 이들에게
by Brett Rayl
2019-02-27
“만국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지로 나간다. 그런데 그 열정을 끌어안고 찾아간 현지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아프리카 선교사 C. T.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의 표현대로—사역의 “로맨스”가 “단조롭고 수고스러운 노동”으로 바뀌는 순간 마음이 식어 버린다.선교는 도전적인 일이며 우리의 믿음대로 현실이 펼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훈련하는 고달픔, 현지 문화에 부적응해서 남발하게 되는 잦은 실수들, 자녀 교육의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고민과 이민국에 수시로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업무, 그리고 안식년에 출입국하는 과정과 후원 교회를 돌아보는 일 등 선교 사역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제들로 인해 처음에 가지고 온 뜨거운 열정은 점차 사라진다.특별히 선교하기가 매우 힘든 지역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품었던 소망을 잃어버리고 사역의 열매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이처럼 온갖 고난 속에 처하다 보면, 애초에 선교지를 향해 발길을 옮기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모두 상실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우리의 선교가 바로 이 같은 어려움을 만날 때 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하나님을 추구하는 선교란 무엇인가“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5-7).선교의 여정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시 84:7),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고(요 1:16),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힘 주시는 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 힘을 얻어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현실화되는 여정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선교는 바로 그 믿음이 이끄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삶의 변화를 거쳐 비전을 소유하는 데에 이르는데, 그 비전은 거룩하고 온전한 심령만이 알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드러내므로 바로 그 비전이 충만한 곳에 최상의 행복이 있다.”만일 아직 눈앞에 드러나지 않은 실재가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면, 굳이 선교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사역을 후원하는 일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갈망하기에 단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상의 행복을 보여 주는 충만한 비전’을 추구하기 위해 선교 현장에 나간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고 기뻐하며,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다가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 서리라는 확신을 안고 선교를 지속한다(시 84:7; 히 11:13-16). 결국 선교란 하늘에 계신 그분을 추구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는 비전“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실제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세계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장차 영원히 즐거워하게 될 그분의 영광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즉 내 자신의 이기적인 야망을 삼킬 만한 그분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위의 시편에서와 같이) 악인의 저택에서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천국의 문지기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고백을 구체화하게 된다. 현재로서는 주님의 궁정을 지키는 문지기로 선교한다는 비전이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되지만, 결국에는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바로 이런 비전을 통해 단조롭고 힘든 사역을 지탱하고 견딜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선교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주님의 이름을 추구하는 사역이다. 그렇기에 선교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로 시작되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될 때 드리는 예배 가운데 마쳐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이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하게 주어질 때, 그 비전은 어려운 지역에 가서 선교를 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고, 그 지역에서 경험하는 고된 사역 중에서도 우리를 붙들어 주며, 영원한 즐거움을 오직 그분 안에서 찾게 만든다. 신학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전망을 행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이라고 가르쳤다.예를 들면,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이렇게 설명했다. “행복의 비전은 유한한 피조물이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거룩한 사역에 관한 가장 완벽하고 뚜렷한 지식을 포함하는데, 이는 단지 믿음으로 이 땅에서 소유하는 불완전하고 흐릿한 지식과는 다른 지식이다.” 마찬가지로 존 오웬(John Owen)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중략] 그리스도를 직접 보게 되는 이 경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모두가 이 땅에서 사모하고 간절히 원하는 일이다.”모든 예배는 바로 이 예배, 즉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예배를 지향한다. 모든 선교도 바로 이 예배를 추구한다. 이러한 행복의 비전은 예배를 목적으로 삼는 선교의 토대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예배는 장차 경험하게 될 그 예배를 미리 맛보는 행위이다. 이 영광스러운 비전이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따라 위대한 걸음을 내딛게 하고, 우리가 섬기는 자들을 위해 매일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는 유일한 소망을 제시한다.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한 날이 이생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일생보다 낫기 때문이다.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신다“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까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지금까지 설명한 비전은 선교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해와 같이 세상 모든 곳을 비추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전은 어느 한 성도만이 누리는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함께 기뻐하는 전망이다. 즉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계 7:9) 즐거워하는 영광이 그 비전을 통해 주어진다. 주님의 신실한 백성을 위해 그리스도가 예비하신 상급은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인데(시 2:8-9; 계 2:26-27), 이는 그분을 영원히 예배하는 온 세상의 우주적 교회를 의미한다.칼빈은 이 예배의 즐거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행복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사람이 아무리 표현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선교가 종국에는 예배로 온전히 마쳐질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모든 백성과 방언으로 하여금 그분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도 가장 힘든 지역에 가서 극심한 도전에 직면하는 선교 사역을 일으키고 지속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그 행복을 약속하는 비전이다.그러므로 지쳐있는 모든 종들이 인내와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구해야 할 가장 큰 필요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세상에서 수치를 당할 때, 그분은 우리를 선대하며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그분을 의지하는 자가 복 되다고 가르친다(시 84:12). 그분은 우리에게 선이 되는 어떤 일도 철회하지 않으신다. 결국에는 이 복음, 즉 우리가 너무나도 힘든 지역에 가서 선포하는 그 복음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Sustains Missions in the Hardest Places?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어려움
예배
회복
어거스틴
비전
프란시스
존오웬
칼빈
복음
선교지 교회를 세우는 두 가지 선교 전략
by Andy Johnson
2019-02-13
선교를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지역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사역을 가장 좋은 선교 전략으로 든다. 여기에는 전략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접근이 있을 수 있다.하나는 개척자 정신으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을 의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약하고 제대로 교육 받을 수 없는 취약한 장소에 있는 지역 교회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 사례가 모두 선교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회 개척개척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울이 행한 사역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5:20-21).개척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는 오늘날 매우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통계적으로 다를 수 있으나, 아마도 20% 미만의 개신교 선교사들만 세계에서 복음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지역에서 애쓰고 있을 것이다. 80% 이상의 선교사들은 복음이 잘 전달되고 교회가 이미 세워진 곳에서 사역하고 있다.당신이 한 명의 선교사만 지원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에 온전히 종사하고 있는 두 명의 선교사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한 선교사는 수백 개의 교회가 있고 수천 명의 크리스천이 있는 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다른 선교사는 크리스천의 수가 적고 교회가 거의 없는, 선교가 매우 제한된 나라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어느 선교사를 선택해야 할까?다른 모든 조건들이 똑같을 때는 복음이 잘 전달되지 않은 곳에 지원을 해야 한다. 물론 여러 상황을 참작해야 하지만, 복음이 잘 전달되지 못한 곳에서의 사역과 복음이 더 많이 전달된 곳에서의 사역은 전략적으로 달라야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교회가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사역이 등장한다.그러나 선교적 복음 전도의 목적은 지역 교회를 굳건히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도 이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는 ‘가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말하는 구절이 없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천은 “모이기를 폐하”(히 10:25)지 않고 지역 교회에 모여야 한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선교사들은 영혼을 수확하고 사람들은 교회로 모였음을 알 수 있다(행 14:1-23; 18:8; 19:20). 선교의 목표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게 하여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게 하기 위함이다.기존 교회 강화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선교 전략이 교회 개척만은 아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시작 부분에는 이런 말씀이 등장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이처럼 교회를 성경적으로 더 잘 세우는 일은 바울에게 중요한 사역이었고,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미치지 못한 깊숙한 곳에 선교사를 보내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복음이 이미 전해지고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 그 교회를 강화시키기 위해 훌륭한 사람들을 보내는 일에 바울이 관심을 두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3-4). 바울은 교회가 성경적으로 잘 세워지도록 도우면서, 새로 세워진 교회를 잘 가르쳐서 성경적으로 든든한 교리를 세우기 원한다. 그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동역자를 마게도냐에 보내서 교회를 개척하게 하지 않고, 건강한 교회를 계속 지원하는 사역을 하도록 에베소에 보낸다. 아마도 새로운 전망과 속도감을 좋아하는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전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선교 사역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흔히 떠오르지만 기존 교회를 강화하는 일은 잘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선교지 교회에 능력 있는 지도자들이 나타났는데도 선교사들이 계속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전 사례들을 보면, 선교사들이 계속 지도력을 행사할 경우, 그 결과는 보통 좋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하는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계획적으로 힘을 부여하고 그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교회가 오래 전에 세워지기는 했지만 공동체가 연약하고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면, 이를 건강해지도록 돕는 사역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좀 더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차원에서, 이 사역은 선교지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기존 교회에서 교회 개척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가리킬 수 있다. 그보다 덜 형식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선교사의 접근이 제한된 지역에 있는 사역자의 가정에서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제자화하거나 훈련시키는 방법을 가리킬 수도 있다.교회가 한번 조직되었더라도 외부 선교사들에 의해 행해져야 할 전략적인 사역이 여전히 존재한다. 새 지역에 있는 잃은 양을 찾으려는 선한 열정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바 된, 이미 모여 있는 양떼들을 방치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wo Ways Missions Should Focus on the Local Church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교회개척
선교지
바울
기존교회
방치
훈련
디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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