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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별 볼 일 없는 도시란 없다
by Josh Manley
2020-01-02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작은 도시나 외진 곳에서 살게 하실 때, 그곳에서 하게 될 목회도 하찮을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곳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언젠가는 하늘이 빠짐없이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든 생명, 그리고 영원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셨을 때, 놀라운 이야기 두 가지를 해주셨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양 아흔아홉 마리가 안전해도 길잃은 양 한 마리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 어떤 목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인은 동전 아홉 개가 남아있어도 잃어버린 한 개를 찾기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었던 동전 하나를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5:1-10).예수께서는 심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가르친 것이지만, 또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도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척박한 땅으로 가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길 원하신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눅 15:4) 찾아다니는 것에 큰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전략적이라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제대로 볼 수 있게끔 우리의 시각을 파격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대략 칠 년 전, 나는 세계적인 요충지 중 하나라 불리는 곳인 아랍 에미리트 연합국(UAE)의 두바이(Dubai)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 복음주의 교회를 개척하고자 미국을 떠났다. UAE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미리트의 집권 셰이크가 복음주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토지를 하사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거의 오지 않는 기회였다.하지만 내가 이주해 간 그 에미리트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남쪽 이웃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다. 국제적인 경제 허브(hub)도 아니다. 두바이에 비해 인구도 턱없이 적다.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전략적인가?’우리는 결코 외진 곳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최근 들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 달란트, 그리고 자원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전략적 도시들’에 집중하자는 계획이 대두되었다. 전략적 도시라 함은 전 세계 곳곳에서 유입된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살고 있는 거점 도시들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전략적 도시인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사역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오래 일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는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고 적었다. 전략적인 도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말은 전략 도시가 아닌 곳에서 사역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비전략적” 도시에서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피로 사신 바 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 모두는 이 땅에서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어떻게 하면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고민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곳에 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지역이나 상황 속에서 사역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우리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지혜와 얼마나 다른가를 기억해야 한다.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을 때, 그는 대도시가 아닌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 하실 정도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미 5:2). 예수께서는 또한 인구가 기껏 이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사람들이 나사렛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는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다나엘이 심각하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물었던 장면에서 드러난다(요 1:46). 전략적인 도시들의 목록이 있었다면, 우리 주께서 나신 곳은 결코 거기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감옥으로부터 세상을 바꾸다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바울 역시 항상 전략적인 도시에서 “전략적인” 사람들만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전도여행에서 성령은 에베소와 기타 주요 도시들이 위치했던 그 전체 지역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셨다.대신 성령께서는 바울을 400마일에 걸친 도보 여정으로 이끄신 후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게 하셨다. 정말이지 비전략적일 수밖에 없는 그 감옥에서 바울은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회심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행 16:6–40). 만일 사람의 지혜로 그 여행을 계획했다면 우리는 분명 다른 경로를 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죄인 한 명이 그 감옥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감옥은 그날 밤 이 땅에서 가장 전략적인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의 영향력를 최대한 발휘하고자 애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지혜에 유혹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전략적이냐 비전략적이냐를 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지혜에 근거하여 행해진다. 마지막 날에는, 과부의 두 렙돈이 억만장자의 거액보다 더 전략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인데, 이는 이 과부가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눅 21:4) 넣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이나 내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네팔 저 먼 곳에 사는 한 형제나 자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존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하는 일을 행하실 수도 있다. 우리 주께서 세상의 지혜,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의 지혜마저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천국에서 보게 될 놀라운 일들대서양을 건너, 전략 도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도시로 들어간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전략적이고 무엇이 비전략적인지는 이 세상과 나의 기대와 가치를 기꺼이 뒤엎으시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 맡긴다. 결국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갈보리 언덕이라는 가장 비전략적인 장소로 가심으로 이 세상을 이기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떠한 인간도 계획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으며, 다른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셨다.지금 “전략” 도시에서 “전략적인”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가? 신실함 속에서 계속 정진하라. 복음 안에서 귀한 청지기의 책무를 지고 있음을 잊지 말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에서 사역 중이고 당신의 일이 별로 전략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면, 주를 위해 일하는 한 비전략적인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힘을 내기 바란다. 하나님은 마지막 양 한 마리까지 돌보신다. 무엇이 전략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침내 그 모든 충만 속에서 드러날 때,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다.만일 당신이 사역 중인 도시나 마을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고민 중인가? 주권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금 있는 그 곳에 있게 하셨음을 기억하라(행 17:26).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행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롬 8:28). 그러므로 지금 현재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두신 사람들과 기회들을 둘러보라. 지역 교회를 세우라. 당신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당신이 떠난 뒤에도 그곳에 오래 남아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주께서 당신을 불러 일하라 시킨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기쁘고 신실하게 섬기고 증거 하라.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No City is Too Small for God: Reaching the Crevices of the World번역: 이정훈
선교
선교지침
전략적
달란트
영향력
청지기
에미리트
성령
천국
신실함
말씀과 긍휼의 사역은 뗄 수 없는 친구!
by Cynthia Ruble
2019-12-05
18년 전 일본에 선교사로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발걸음의 목적을 명확히 해 두어야 했다. 그곳의 비기독교인들은 내 사역의 성격과 의도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다. 한 일본인 크리스천은 심지어 내게 “일본에는 더 이상 선교사가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면, 나의 일은 인기가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우리의 전도 활동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당신을 회심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섬기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라고 응수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면 은혜의 복음을 놓칠 수 있다. 우리 주위의 문화와 더 적극적으로 상호 작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큰 의미의 복음과 더 넓은 의미의 선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그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일본에서 하는 일이 고작 빈둥거리며 겉치레로 하는 것이라면,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존중받기 어려울 것이다. 매일 과로에 시달리는 일본인들의 눈에는 그저 게으름으로 비춰질 뿐일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10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것도 근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회의론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다.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충실히 증거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방도들을 모색해야 했다. 당시 일본에는 미혼모들을 위한 시설이 전무했고, 태어난 아이들은 입양되기보다는 주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낙태를 경험한 이들을 위한 상담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내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몇몇 일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임신한 여성들을 위한 시설이며 또한 낙태를 경험한 이들을 위한 상담소인 임신상담센터(Crisis Pregnancy Center)를 운영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나와 함께 거주하는 미혼모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동네에 카페 하나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말씀 사역”과 “긍휼 사역”을 동시에 해 온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회적 실천주의(social activism)에 깊이 천착한 이들이 “우린 그저 사람들을 ‘회심시키려고만 하는’ 이들과는 달라. 우리는 이 세상과 전인적으로 소통하면서 이곳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라고 말하며 너무도 쉽게 자기 의의 덫에 빠지는 것을 많이 목격해 왔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군가를 사회적 행동에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그렇다면 소위 바꾸고자 하는 이 세상과 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사회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우리에게 가장 우선되는 부르심은 ‘지상 대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순한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이 아니라, 십자가 군병들이다. 십자가 군병들사회 정의 사역을 하면 이 세상이 우리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고,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 줄 수도 있다. 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는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 군병들로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고, 그것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2011년에 한 일본 영화 제작자가 만든 입양 장려 다큐멘터리에서 우리의 사역이 소개되었고, 거기에서 나는 기독교 선교사로 안내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필두로 연이어 나온 작품들을 통해 일본 내에서 입양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다. 이 다큐멘터리 때문에, 그리고 다운 증후군이 있는 남자 아이를 입양한 나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일본 내 입양 지지자들로부터 하나의 부탁을 받았다. 바로 입양 규제 정책을 새로이 입안 중인 일본 정부 관료들을 동경에서 만나 그들을 설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 관료들은 기독교 입양 단체 같은 사립 입양 기관의 활동을 계속 허용해 주기로 결정했다. 정말 신속하게, 일본 정부는 입양에 반대하는 쪽에서 입양을 장려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지방 자치 단체는, 매일 밤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한 교회도 다녀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혼모들을 우리 단체로 보내어 거주하게 한다. 사역에 임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씨를 뿌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의지가 강하고 성실했던 시주카(가명)는 아이를 낙태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임신 초기에 나와 나누었던 전화 통화가 그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임신 40주 차가 거의 다 찼을 때, 시주카는 노숙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로 인해 우리 센터에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올 때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시주카는 분노에 차 있었다. 낙태를 했어야 했다며 나를 비난했다. 성경 공부를 할 때면 시주카와 그녀의 친구는 자주 조롱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난 후, 시주카는 일을 구할 수 있었고 자기가 낳은 아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녀와 연락을 했고 계속 기도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시주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근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교회 목사의 아내가 시주카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시주카의 세례식 사진을 받았다! 바로 며칠 전, 그녀는 아들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의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거칠기 짝이 없던 이 회의론자가 이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저 사회 운동가로만 사역한다면 나는 ‘내가’ 뭘 하는지에 집중할 것이다. ‘내가 정말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십자가 군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낙태를 경험한 내담자들과의 상담을 마치고 기도를 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은 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이유이다. 많은 경우, 상담을 받는 여성(혹은 남성)이 기도 중에 흐느껴 울고는, 복음에 초점을 맞춘 상담을 계속 받을 수 있는지 묻곤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 군병들로서 자신이 뿌린 씨가 언젠가는 화려하게 피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이들을 위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관점이 있다.근본적 문제, 근본적 해결책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말씀하셨다. 천사들마저도 기쁨으로 춤추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고 또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힘은 오직 은혜의 복음에만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마 9:1–8). 이를 무시하면, 이생에서는 개선된 삶을 살더라도 종국에는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덧붙여 말하지만, 십자가 군병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최후의 전사이시다. 그때까지 우리는 지상 대명령을 받들어 행할 뿐이다. 우리가 그분을 증거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문화의 어떤 국면들을 새롭게 접하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양 떼를 먹이고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신실하게 섬기도록 하시며, 때로는 우리를 박해나 순교의 자리로 부르시기도 한다. 이를 분별하는 일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은 짧기 때문이다. 우리 각각을 향한 독특한 부르심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3–14)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Are Close Friends번역: 이정훈
선교전략
전도
회심
긍휼
지상대명령
십자가군병
말씀
사역
사도 요한이 전하는 선교를 돕는 다섯 원리
by Andy Johnson
2019-11-07
사도 요한은 그의 세 번째 서신에서 그의 친구 가이오에게 순회 복음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선교사 파송과 지원에 대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적 원리를 제공한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쓴다.“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 1-8).이 짧은 본문 안에는 선교에 직접 관련된 많은 지침들이 담겨 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선교사 파송과 지원에 대한 다섯 가지 원리들을 생각해 보자. 1. 크리스천은 선교와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보여야 한다(3, 5, 8절)요한은 그의 친구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고서,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라고 확고히 말한다. 그 다음에 그는 “우리가 이같은 자들[선교사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마무리한다. 성경말씀은 복음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열망은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명백히 말한다.2. 선교사 지원에 지역 교회들이 서로 협조해야 한다(3, 7절)이와 유사하게, 여러 지역 교회들이 선교에 협조하는 일은 당연히 선한 일로 여겨졌다. 이들 복음 사역자들은 (아마도 요한의 교회일 가능성이 큰) 다른 교회에서 보내졌다. 가이오에게 “나그네 된 자들”(5절)이라고 했으므로, 확실하게 그들은 그의 회중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의 교회와 가이오의 교회가 진리를 위하여 함께 동역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선교사들을 공동으로 지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진정한 복음 동역자 관계이다. 3. 지원해야 할 선교사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6-8절)누구를 지원해야 할 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그 목록을 상당하게 줄여 준다. 분명히 크리스천들 중에서 박해 때문에 흩어질 때나(행 8:4) 혹은 사업을 목적으로 여행을 할 때(약 4:13)도 복음을 나누기 원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파송된 사람들을 지원하는 특별한 의무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은 우리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세계화가 되었고 유동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항상 교회가 국제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재정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요한은 이 선교사들이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복음으로 돈을 벌지 않고 있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 사역에만 전념하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한다. 이 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만 지역 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선교사라 부른다. 선교사들은 그냥 자유롭게 사역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그들이 지원받는 만큼 또한 책임을 가지고 특정한 지역 교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요한삼서에서 언급된 선교사들은 아마도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교회에서 파송되어 그 교회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6절에 나오듯이, 선교사들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인지했는가? 요한은 가이오에게 이 선교사들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가이오에 의해 지원을 받은 후에 그들은 그들을 파송한 교회에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요한의 서신은 교회의 승인을 받은 선교사들에 대한 교회의 칭찬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적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러한 방식이었다. 4. 선교사에 대한 지원은 풍부해야 한다(6절)요한은 선교사에 대한 우리의 지원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명확히 한다. 풍성하고, 풍부하며, ‘하나님께 합당하게’ 공급해야 한다고 한다.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충분히 공급받아야 할 것이라는 언급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바울도 디도에게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딛 3:13)라고 가르친다. 선교사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가 지원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5. 선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어야 한다(7-8절)마지막으로, 선교사로 나가고 파송하며 지원하고자 하는 동기는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는 선교 사역의 원동력이다.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필요한 요소들은 매우 많지만, 요한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보내라고 강조한다. 요한삼서에서 말하는 이 다섯 가지 원리는 명백하다. 이 원리를 지키면 교회가 선교 사업을 지원하는 방법에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Mission Principles from Scripture’s Shortest Book번역: 정은심
선교지침
가이오
요한
파송
지원
관심
협조
영광
단기 선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by Ramon Lull
2019-09-26
단기 ‘선교’ 여행이 선교의 대의를 실제로 돕고 있는가?‘선교’라는 말은 전도된 크리스천들이 미전도된 사람들(Unreached People Group)과 복음을 나누는 과정을 의미한다. 물론 언어를 배워야 하고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 언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이해하려면 여러 해,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며칠이나 몇 주로 가능하지 않다. 이는 선교가 효과적이려면 처음부터 장기 선교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면, ‘단기 선교 여행’(Short-Term Mission Trip)이 유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단기 선교 여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선 이를 정의해 보면, 단기 선교 여행은 선교를 위하여 보통 두세 주 미만으로 외국에 있는 선교지를 다녀오는 것이다. 내가 이 정의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로 교계에서 가장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정의에 따르자면, ‘단기’ 선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3주간의 방문으로 언어를 배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단기 여행이 선교라는 대의를 전혀 지지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가 선교지를 위하여 실행하고 있는 장기 선교 목표와 관련하여 단기 여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우리는 지금 가볍게 가는 휴가 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천 번의 여행, 수억 원의 돈, 그리고 그 수가 알려지지 않은 미전도된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선교 모델을 찾기 위해서, 특히 높은 위험이 있는 경우, 성경에 나온 예를 통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선교사를 격려할 사역자 보내기“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중략]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5, 29-30).이 글은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교사(바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단기 사역의 훌륭한 모델인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을 엿볼 수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전달하는 사자가 되고,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필요를 돌봐 주는 목회자가 됨으로써 교회와 선교라는 대의를 섬겼다(빌 2:25). 그의 ‘단기’적 노력은 가장 효과적인 선교 도구인 장기 선교사들을 지원함으로써 선교의 대의를 진전시켰다. 에바브로디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다. 1) 그의 팀은 아주 작았다. 홀로 여행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한 팀이 10명 내지 20명 이상인 경우 정말 도움이 될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 당신이라면 한두 주 동안 당신의 집에 10-20명 가량의 사람들을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모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든 생활 물품의 결핍을 느끼고 있는 선교사에게 그런 일이 어떻게 다가오겠는가?2) 에바브로디도는 사업을 하거나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려고 가지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지붕을 이는 일에 전문가이든 아니든, 그는 고아원의 지붕을 올리는 일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다). 3) 그는 큰 경험의 기회를 주려고 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너무 어린 아이는 사역에 공헌을 할 수 있기보다는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할 뿐이다. 4) 그는 바울에게 ‘교회’를 가져다 주었다. 모국의 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은 항상 친교를 나눌 수 있고, 매주 예배와 소그룹 모임을 통해 새롭게 된다. 하지만, 장기 선교사들은 다른 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임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에바브로디도 같은 단기 방문자들은 선교사들에게 큰 격려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거의 짐을 싸려고 할 만큼 용기를 잃은 장기 선교사들은 단기 방문자들을 통해 신선함과 격려를 받고 있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지속적인 직업 교육 공급하기선교의 목적은 1세기 이래로 바뀌지 않았지만, 전략은 바뀌었다. 한편, 휴가와 산업 환경 및 서비스 분야는 해를 거듭하며 발달하고 있다. 당신 자신의 휴가나 사업 환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 10-20명 가량의 사람들이 휴가를 내고 한 팀이 되어 한 주 동안 당신의 일을 도울 목적으로 당신의 직장에 온다고 말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들의 손길이 당신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팀은 당신의 동료나 소비자들의 언어로 소통하지도 못하고, 다른 문화권에서 왔기 때문에 당신의 직장 문화도 전혀 모른다. 그런데 그 팀이 당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사역자 팀의 방문 목적이 전형적인 휴가나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선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겠는가?사실, 단기 선교 팀이 몇 주 동안 방문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사역은 선교사들에게 지속적인 직업 교육(Continuing Vocational Education)을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보통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특정한 영역의 사람들이 같은 영역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세미나나 컨퍼런스와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전문성을 함양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지역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이런 전문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많은 선교사들이 전문 지식과 자원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CVE 여행은 강사가 산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혜택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충분히 받기만 하면 된다. 이런 부류의 직업 교육은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자녀를 집에서 교육시키는 부모를 지원하는 컨퍼런스도 있다. 교육이나 학력 평가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에바브로디도 같은 자원봉사자 두 명이 방문을 했다고 가정하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자녀를 홈스쿨링하고 있는 엄마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겠는가? 그와 같은 집중적이며 사려 깊은 방문이 선교 현장에서 한 해만 더 이어진다면, 한 주간의 단기 선교를 52번 나가는 것보다 선교의 대의를 위해서 훨씬 가치있을 수 있다(그리고 자원을 훨씬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결론선교는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집중적인 언어 학습, 문화 연구, 관계 형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단기 선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선교는 그 나라에 얼마나 오래 실제로 머무느냐와 상관없이 장기 선교이다. 따라서 단기 선교 여행을 위한 교회의 자원들은 장기 선교 전략과 동떨어진 방식이 아닌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들에게 사랑으로 격려를 제공할 수 있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역자를 보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가정과 그 공동체를 돌보기 위한 특정한 직업 교육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분명히 단기 선교 방문자들이 선교사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있지만, 어떤 새로운 계획을 발달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가정, 마을, 그리고 직장에 무엇이 잘 맞을까를 고려해 보자.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방문이 여행자들을 위해 계획된 휴가와 같은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문은 방문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귀한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획되어야 한다. 단기 선교는 ‘단기’라는 단어를 빼고, 장기적인 선교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계획되고 수행되어야 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re’s Nothing Short about Short-Term Mission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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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을 품게 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by David Strain
2019-09-12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에 관해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나아가 영성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내용을 몇 차례 확인했던 것이다(참고로 이에 관한 저자의 아티클은 신학 섹션과 영성 섹션에 각각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참된 기독교 영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큰 주제 속에 묶여 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이때 부여된 정체성이 우리 각자를 새로운 공동체 안에 두어 또다시 새로운 영성을 따라 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내용에 이어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 자신이나 교회 안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 각자를 넘어 타인에게로 마음이 향하도록 만들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사람들을 이끄는 선교 사역을 통해, 세상 끝까지 그 마음이 확장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땅끝에서부터 예배자를 불러 모으시는 삼위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이 세상 속으로 파견되기 때문이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예배를 지향한다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연합에서 비롯되는 예배의 목적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진리이다. 이 사실은 그 어떤 본문보다도 에베소서 1장 3-1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의 찬송은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에 이른 구속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는 우리 각자가 복음을 믿게 되는 경험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체 전망을 펼쳐 보인다. 이때 구원의 각 단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드러내는 국면으로 설명된다.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같은 죄인을 성령의 사역으로 그 아들과 연합시키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며(6, 14절),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영광에 대한 찬송이 되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성경은 밝힌다(12절).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아들과 연합하게 하신 목적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찬송, 곧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진리이다. 이는 영원히 찬송 받으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진리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강조한 이 진리를 로마서 11장 33-36절에서도 설명한다. 곧 1장에서 10장에 걸쳐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값없이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놀라운 복음을 전한 바울은 11장에 들어서며 하나님의 선택에 감추어진 큰 신비와 또한 말씀 전파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광대한 계획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 끝에, 억제치 못한 그의 마음이 찬송으로 터져 나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우리는 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 안에서 새로운 몸을 이루고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여 마침내는 영광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창조 세계 전체에 자신의 탁월한 지혜와 자비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신다.선교에 관해 생각할 때, 바로 이 목적을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실리적인 생각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 사역이 얼마나 대중적인지,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지, 아니면 어떤 성과를 가져올지 하는 문제를 넘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이 사역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그렇다면 이 사역을 수행하는 방식은 인간 중심적인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각 개인과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데 그 연합의 목적이 있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선교를 요구한다이처럼 죄인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돌이켜 거룩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그분을 찬송하게 하는 데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요구하는 선교의 사명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향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에 있다면, 그 목적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물어야 한다. 즉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가? 나는 앞서 다른 아티클에서 영성에 관해 논의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 적이 있다(영성 섹션에 게재된 ‘참된 기독교 영성에 관하여’를 참고하라). 거기서 우리는 예배의 주제를 다루며 은혜의 방편을 통해 개인과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내용이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이다. 이제는 거기서 다루지 못한 또 다른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내용은 바로 선교와 관련되어 있다.존 파이퍼가 선교에 관해 저술한 탁월한 책으로 인해 유명하게 된 문구가 있다. 바로 ‘열방을 향해 가라’(Let the Nations Be Glad)이다. 그 책에서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가 아닌 예배이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할 것이다. 그러나 전도를 영원히 하진 않을 것이다. 또 영광스러운 주님을 마주 대할 때 찬송을 멈출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때 이미 멈춰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날에는 누구도 그리스도에게 새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면,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은 서로를 알 듯 그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선교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아직 그분을 알지 못하여 예배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향하는 목적이 예배에 있고 선교의 목적도 예배에 있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4절부터 6장 1절에 이르는 본문을 통해 그의 선교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우선 그는 5장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18-19절에서는 바로 그 연합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이 바울 자신의 사역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했는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5:20-6:1).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을 대신하여 일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그분을 대신하여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바로 그분이 우리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알리신다는 것이다. 이는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주일 예배의 설교 시간에든, 차와 머핀을 즐기며 커피숍에 있는 시간에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비신자를 향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 비신자에게 알리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선교 또는 전도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보이는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용하여 우리 각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분을 대신한다.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세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에게는 담대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또한 모든 말씀을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마음을 품고 복음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일이 혹 두렵고 떨리더라도 말이다. 죽은 자를 일으키고, 못 듣는 자로 듣게 하며, 맹인이 눈을 열어 보게끔 만드는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대사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두려움과 맞서 싸우자. 그분이 우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둘째,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다. 전도는 예배를 위한 활동이며, 예배는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분과 분리된 인생은 얼마나 엉성하기 그지없는지, 또 그분과 연합된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부요한지를 드러낸다.셋째,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제자들의 공동체이므로 건강한 교회라면 선교 사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교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사람들을 이끌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그들을 끌어안지도 않는다면, 더 이상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선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선교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우리 곁에만 두려 한다면,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지역과 세계 곳곳에 나아가 제자를 삼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된 자들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모르는 이웃과 친구 또는 동료들을 위한 공동체로 우리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고립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면, 그분의 제자를 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Union with Christ and Mission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존파이퍼
연합
예배
비전
전도
담대함
기쁨
그리스도
선교의 눈으로 보는 예수님의 비유
by Tim Keesee
2019-08-01
“얘기 하나 해줄게,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아. 괭이로 옥수수 밭 잡초를 뽑지 않은 게으른 농부에 대한 거야. 내가 결코 말할 수 없었던 이유, 그러나 그 청년은 언제나 건강했어. 그는 6월 초에 옥수수를 심었지. 7월이 되면 옥수수는 그의 키 만큼이나 자랐어. 9월에는 큰 서리가 왔어. 그럼 그 청년의 옥수수는 모두 다 사라졌지” 이 구절은 게으른 농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오래된 블루그래스 음악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 “괭이로 옥수수 밭 잡초를 뽑지 않은 소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역사가 깊은 농부 집안 출신이다. 우리 조상 중에는 바이올린과 밴조를 연주하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 꽤나 재미있다고 웃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농사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농업 방법은 지난 세기 동안 크게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이며, 또한 잡초 뿐 아니라 날씨와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 오로지 수확 하나만을 바라며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밭으로 나가서 종일 수고하는 고된 일이 농사인 것이다.미래의 희망 그리고 현재의 신실함미래의 희망은 현재를 더 성실하게 살도록 만든다.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 4장 26-29절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가 알려주는 진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왕은 그의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르쳐준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름 아닌 생명의 말씀을 담은 복음을 의미한다. 농부가 씨앗을 자라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씨가 풍성하게 자라게 하는 데에 농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려고 아침에 일어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면서 일을 시작하고, 주간과 야간에도 희망을 갖고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농사에 신경을 써야 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선교한 여러 베테랑 선교사들은 이 비유가 하루하루 인내를 가지고 척박한 환경에서 복음을 뿌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럼 도대체 이 비유 안에 있는 무엇이 그런 능력을 제공한다는 걸까? 무엇보다 왕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전혀 화려하지 않은 농사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농부를 높이 평가한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복음 사역, 특히 적대적인 환경의 타문화 사역으로 인해 지치고 쓰러질 때에도,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의 사명은 더더욱 고취되고 성취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방식을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개월에 걸친 피나는 연구와 숱한 연습을 하고도 고작해야 걸음마 하는 아이 수준으로 그 나라 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지해야 할 언어 습득에 지름길만을 찾는 것은 결국 비효율, 좌절, 두려움 그리고 때로는 선교 현장에서의 조기 철수를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파송하는 교회 또는 단체가 선교 활동에 대해서 낮은 기대 수준을 갖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왕국 비유에는 인내에 관한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 농부가 자신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명이 자리를 잡아 간다. 가장 먼저 땅 아래에서,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갈색이던 땅이 녹색이 되어간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농부조차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했지만, 그가 모르는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 복음적인 용어로 볼 때 그것은 ‘다른 것’이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 새롭고 지속적인 삶을 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추수의 주인은 추수가 가능한 밭의 구석구석으로 일꾼을 보낸다. 일꾼은 심고 물을 주고 또 잡초를 뽑는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줄 수는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인내함의 모습들아라비아 선교의 개척자였던 새뮤얼 즈웨머(Samuel Zwemer)는 인내 뒤에 숨은 능력, 용기 아래 숨은 확신, 그리고 증인과 함께 하는 성령으로 부활을 지목하곤 했다. 지금부터 1세기 훨씬 전에 즈웨머는 다음과 같이 썼다.“우리의 최고 사령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던 일은 이제 가능해질 뿐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 된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모든 힘이 내게 주어졌으니 [중략]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본문을 놓고 이렇게 설교했다. ‘여기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요소가 있다. 그런데 다른 요소가 이제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겠다’라고 말한다. 어떤 바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불가능에 도전하고 그것을 성취한다”(The Unoccupied Mission Fields of Africa and Asia).최근 나는 위험 지역에서 사역하는 두 명의 베테랑 선교사와 대화를 나눴다. 한 명은 헤즈볼라가 100% 장악한 중동의 한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전 회교도이다. 그의 사역은 한 마디로 구제 활동, 확실한 복음 전파, 그리고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협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알바니아의 산간 지대에서 23년 동안 사랑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여성들을 사랑과 봉사를 통해 구원한 독신 여자 선교사이다. 나는 그들에게 인내에 관해서, 한 해 한 해 그 힘든 사역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질문했다. 모하메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고 주일학교 수업에서 만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테레사에게 인내는 기쁨으로 가득찬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기 때문이다(딤후 4:8). 죽어서 예수님을 만나든지 아니면 재림하는 예수님을 만나든지, 그녀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을 만난다는 기대는 그녀로 하여금 긴박감을 가지고 선교에 더 열중하도록 한다. 트로포자의 급경사 지대를 올라가는 그녀의 발걸음을 더 빠르게 만든다. 이 비유에는 농부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마다 항상 조금은 놀랐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매년 거두는 수확물이지만 매년 새롭기만 하다. 수확물을 앞에 놓은 농부는 자신의 유한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감사와 내면의 만족감, 그리고 자신보다 큰 어떤 존재에 대해 조용한 놀라움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에 국한되지 않은 우리의 왕은 예상치 못한 일을 계속한다. 그는 구원을 주시고 주권을 가지신 놀라운 하나님이시다. 예상치 못한 수확미전도 종족이 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수년 동안 사역한 내 친구가 자기의 동역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던 내 친구에 따르면 그들이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비전은 미전도 종족 그룹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종족들과 함께 살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 하는 본국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요리와 청소 등 집안일을 돕던 무슬림 여인 가정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마침내 누군가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결국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여기에 사역했는데, 그 결과가 고작해야 한 명의 회심자라니.”미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온 그들을 맞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를 믿게 된 바로 그 가정부였다. 그녀는 뭔가 근심에 찬 듯 보였다. “선생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내 친구는 순간 긴장해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이 떠나 있는 동안 제가 30명의 이슬람교 친구들과 가족을 예수님께 인도했어요. 그리고 선생님 집에서 성경 공부를 했어요.”이 예기치 못한 추수에 대한 선교사의 놀라움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풍성한 수확을 얻을 때 우리가 누릴 놀라운 기쁨 중에서도 아주 일부를 미리 맛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와 빈 무덤에 뿌리박은 우리 미래의 희망은 오늘도 손에 쟁기를 들고 일하는 왕의 충성된 일꾼들이 사역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을 능히 견디도록 하는 동력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A Parable of Endurance from the Mission Field번역: 무제
선교지침
농부
비유
미래
성실
스펄전
수확
씨
희망
신실함
제한 속죄는 선교를 금하는가
by Greg Turner
2019-06-20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봤는가? “당신이 칼빈주의자, 즉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자라면 아마도 전도와 선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교회사를 잠시만 들여다보면, 그런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지금 내 머릿속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또는 로티 문(Lottie Moon)과 같이 칼빈주의자로서 선교에 헌신했던 인물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한 고정관념은 이미 널리 퍼져 대중화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므로 우리는 굳이 지상 사명을 열심히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휫필드나 캐리나 문처럼 전도나 선교에 헌신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들이 믿는 ‘칼빈주의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결코 ‘칼빈주의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흔히들 개혁신학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런 통념은, 특별히 제한 속죄 교리에 초점을 두고 거론된다(참고로 제한 속죄 교리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적용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 교리는 개혁주의 전통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복음 전파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인냥 취급된다. 만일 회심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바로 당신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교회사라든가 역사 신학을 통해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목표는 그런 작업으로 제한 속죄 교리를 변호하는 데 있지 않다. 이미 존 오웬(John Owen)이 자신의 권위 있는 논문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이라는 글을 통해 그 교리에 대한 성경의 지침을 상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다(이 작품은 제임스 패커[J. I. Packer]가 훌륭하게 요약적으로 소개하면서 관심 있는 현대 독자들이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의 목표는, 제한 속죄라는 교리의 틀 안에서 복음을 나누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그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복음 전도의 내용을 살펴보기만 하면,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바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식으로 전도하진 않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속 초대교회 사도들은, 전도할 때 제한 속죄 교리와 일치된 접근으로 복음을 선포했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렇게 전도하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제한 속죄는 선교를 권장한다나는 이 글에서, 그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려고 한다. 여기서 나의 목표는, 제한 속죄에 대한 믿음이 단순히 전도나 선교의 가능성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차원의 변호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한, 그 교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이끌 뿐 아니라 강하게 권장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간단히 말해 제한 속죄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예수님이 단지 어떤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 죽으신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이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을 실제로, 개별적으로, 틀림없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대속물로서 누군가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주권적으로 죽으셨기 때문이다.따라서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을 따라, 성령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을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사역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거듭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선물로 받는다.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계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하나님의 구원 계획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정하실 때 그 구원이 성취되게 하는 수단도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수단에는 그분의 섭리에 따른 여러 정황들이 다 포함되는데, 예를 들면 내가 어디서 태어나고, 살아가면서는 누구를 만나며, 또 어떤 글을 읽게 될지까지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수단을 정하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도록 이끄신다. 그런데 그 모든 수단 중에서 다른 요소로 대체될 수 없는,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수단이 있는데, 바로 복음 선포이다. 그래서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은 또한 그 복음을 다른 죄인들에게도 선포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포함으로써 구체화되는 외적 부르심(the outward call of the gospel message)을 성령의 내적 부르심(the inward call of the Holy Spirit)과 하나로 연결시키신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전도할 때 제한 속죄와 효과적 부르심(effectual calling)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참고로 효과적 부르심이란, 제한 속죄의 대상으로 택함 받은 자에게 복음이 선포될 때, 그 외적 부르심을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성령의 내적 부르심을 가리킨다).두 번째로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리적 죽음을 통해 구속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일까? 요한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언급된다.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여기서 두 장을 더 넘기게 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등장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이 무리가 바로 예수님이 피로 사신 자들이다. 즉 개별적으로 확실하게 구속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구원을 이루는 범위는 전 세계에 미칠 만큼 광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아들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죄인들을 불러 개별적으로 구속하시기 때문에 전도의 열매가 땅 끝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위의 이 두 가지 사실은, 전도와 선교를 하도록 이끄는 최고의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에게는 땅 끝까지 전달되어야 할,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야 할 영광스러운 소식이 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육체를 입으셨다. 성육신하신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살다가 대속물로 죽으셨다. 그리하여 성취된 구원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구속의 효력을 가져온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죄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으며, 모든 민족에게 가서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그 복음의 선포에 따라 회개하며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는 끝까지 완고할 수 없다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전도는 우리 자신의 실력과 말주변에 따라 열매를 맺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열매는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분은 구원을 단지 제공하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그분이 일하시면, 전도를 하기에 너무 어려운 곳도, 너무 완강해서 다가갈 수 없는 사람도 없다. 많은 선교사들이 겉으로 보기에 그토록 완고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선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개별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를 가졌으며, 또한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선교에 가장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하심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미치는 범위가 전 세계에 미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뢰하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품으신 계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제한 속죄를 믿는다고 하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정말로 그 교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하나님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불러 자기 백성을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으로 지금도 그 뜻이 성취되고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열방에 선포하며 자신의 놀라운 역사를 모든 민족 가운데 전하게 하기 위해, 나와 당신의 구원을 처음부터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혹 전도와 선교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제한 속죄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출처: www.9marks.org원제: Believe in Particular Redemption? Then Evangelize and Send Missionaries with Abandon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칼빈주의자
존오웬
속죄
개혁신학
구원계획
절대주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박해를 받고 있다
by Joe Carter
2019-06-12
얼마 전, 미국 연방 정부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종교의 자유를 박해하는 나라들에 대한 20번째 연례 보고서를 내놓았다. USCIRF 의장인 텐진 도지(Tenzin Dorjee)는 이렇게 말했다. “본 보고서는 종교적 억압이 가장 심한 28 개국의 상황을 보고합니다. 더불어, 종교와 신앙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 의회와 정부에 제안하는 실질적인 정책을 포함합니다. 본 보고서의 목표는 단순한 폭로 혹은 연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부가 이러한 나라들과 공조하여 더 이상 해당 국가들이 이 보고서에 등장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안하고 이를 위한 실행을 촉구하고자 본 보고서를 발행합니다.”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박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아티클은 2019년도 보고서의 내용을 포함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2018년에 기록된 상황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정부 보고서는 타종교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지만, 이 아티클에서는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만을 다룰 예정이다.) 1. 북한북한 정부는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항하는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에 크리스천 역시 가장 위협적인 신앙인으로 간주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비밀리에 예배드리는 크리스천을 적발하기 위해 민간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발각되면, 해당 신자들이 투옥되는 것은 물론 그 가족들도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종종 감금된다. 정부 부처의 추정에 따르면, 8만 명-120만 명 가량의 정치범이 '권일소'라고 알려진 악명 높은 노역장에서 강제 노동으로 신음하고 있다. 전체 억류자 중 크리스천의 수는 무려 50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영구적으로 감금되어 있으며, 기아와 고문 및 처형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또한 추측하기로는 핵 무기를 비롯한 다른 전쟁 무기들을 개발하는 데 투입되어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2. 중국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크리스천은 중국 정부에 의해 수정된 성경을 사용할 확률이 높고, 많은 수의 목회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사망했다. 중국 정부는 신앙을 통제하려는 일환으로, 독립된 종교적 실천을 제한하거나 제거하는 등의 지속적인 박해를 가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5천 명 이상의 크리스천과 1천 명 이상의 목사들이 그들의 신앙과 모임 때문에 체포되었다. 또한 중국 당국은 수천 개의 교회 혹은 예배 장소를 철거했다. 그중에는 베이징의 시온교회(Zion Church), 산시성의 램프스텐드교회(Lampstand Church), 광둥성의 바이블리폼드교회(the Bible Reformed Church)와 하우스오브데이빗교회(House of David Church) 및 롱귈리레인교회(Rongguili Lane) 등도 포함된다.3. 에리트레아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과 실천 때문에 정기적으로 체포되고 수감되며, 법적인 절차나 보호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곳의 크리스천은 기도 모임과 종교적 행사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4년 이상 수감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교회 예배나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겠다는 사인을 강요 받는다. 현재까지 13년 이상 수감 중인 개신교 목사도 상당수이다. 그 예로 순복음교회의 키데인 웰도우(Kidane Weldou) 목사와 하일리 네이즈기(Haile Naizghi) 목사, 남서순복음교회의 기프 루(Kif lu) 목사 등이 있다. 4. 이란이란에는 거의 30만 명의 크리스천이 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란 정부는 교인들을 감시하고, 교회를 세우거나 보수하는 데 법적 제한을 가하고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사적으로 신앙 모임을 열거나 가정 교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러 해외에 다녀 온 사람들도 징역형의 대상이다. 실제로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에서 예배 의식을 거행하는 일, 교회 외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일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또한 가정 교회의 목회자들은 종종 국가 안보 관련 죄로 기소된다. 5. 나이지리아나이지리아의 크리스천들은 인종 말살에 가까운 살인 위협에 시달린다. 이 나라의 많은 지역에서는 종교로 인한 갈등이 처참하고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자연스럽게 상업 활동이나 이주의 문제에서 제한을 겪을 수밖에 없다.6. 수단수단 정부는 수단개신교복음주의교회와 수단그리스도교회의 성도 및 목회자를 박해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2018년에 관찰된 바에 따르면, 수단에서는 보안 요원들이 법과는 상관없이 크리스천을 괴롭히고 체포할 수 있다. 같은 해 10월 10일, 기도 모임 중이던 다퍼(Darfur) 지역의 크리스천 13명이 체포를 당했다. 크리스천이 되기 전 이슬람교도였던 그들은 배교의 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7. 베트남베트남의 소수 민족들은 그들의 종교와 신앙 때문에 가혹하고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2018년 내내, 베트남의 지방 정부 공무원과 경찰들이 소수 민족의 가정 예배를 해체시킨다는 보고가 USCIRF로 전달되었다. 특히 하오땅(Hoa Thang) 공동체와 이드롱(Ea Drong) 공동체 및 산악 지방의 작은 민족들에 대한 감시가 심하다고 전해진다. 2018년 4월에 쯔엉두엉(Tuong Duong) 지구의 경찰은 등록 절차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베트남복음주의교회 소속의 몽(Hmong) 공동체를 위협했다(몽 지역 전체 인구의 약 40 퍼센트 정도가 크리스천인 것으로 추측된다). 몽 신앙 공동체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여러 경우, 지방 당국은 개별 신자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거나 철회하도록 강요하고 때로는 신체적 폭행이나 추방의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8. 버마버마의 종교문화부는 기독교 예배와 교육에 대해 정부가 승인한 소수의 교회에서만 진행하도록 제한했다. 또한 해당 시간에 여러 종족의 소수 민족어가 아닌 오직 버마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제한 정책의 일환이다. 최근 USCIRF는 카친주(Kachin State)에 있는 30개 이상의 교회가 물리적 공격으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정보를 받았다. 추측에 의하면, 카친주에는 더 이상 예배의 장소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교회가 100여 개나 존재한다. 9. 파키스탄파키스탄에서는 최근에 적어도 40 명이 신성 모독죄로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에는 크리스천 두 명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온라인에 모하메드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 아티클과 이미지를 올린 혐으로 2018년 12월 지방 판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파키스탄에서 신성 모독죄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아시아 바이비(Asia Bibi)의 사례이다. 크리스천인 그녀는 2019년 하급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018년 10월 대법원에서 기존의 모욕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녀의 사례는 파키스탄 내의 여러 크리스천들이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독죄라는 이름 아래 여러 모양으로 박해받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Global Persecution of Christians(2019 Edition)번역: 정은심
선교지침
북한
중국
에리트레아
이란
나이지리아
베트남
보마
파키스탄
박해
문화 개종, 문화 정죄, 문화 소비
by Matt Chandler
2019-05-30
오늘날 세상은 테러 공격에서부터 인종 차별, 정치적 혼란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을 점점 상실해 가는 듯 보인다. 이런 혼란의 세상을 겪으며 우리가 독특하고 도전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된다. 단순히 문화적인 현상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런 유의 불안이 교회 안까지 점점 스며들고 있다. 여러 크리스천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거나 혹은 기독교 관련 블로그 등을 읽어 보면 교회가 확실히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과거의 교회들과는 매우 달라졌다. 이런 문화적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작금의 상황에 대응한다. 때론 위대한 생각이나 직감에 따라 대응하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을 따라하며 대응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대응 방식은 전형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를 개종하려 들거나, 문화 자체를 정죄하고 무시하거나,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은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의 저서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에서 차용한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문제가 있거나, 근본적인 그리고 성경적인 용기가 결여됐다는 한계가 있다. 문화를 ‘개종’하는 방식문화를 개종하려는 사고 방식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문화가 성경적 원리와 가치를 절대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은 문화 개종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기꺼이 거기에 헌신하려 든다. 설령 그것이 부패한 정치인 혹은 정당과 동맹을 맺거나, 분명한 도덕적인 방향성을 찾지 못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최근 들어 이런 방식으로 문화에 접근하는 이들이 외치는 ‘기독교의 우선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러나 교회가 압도적인 문화적 입지를 차지하지 못할 때, 이런 접근 방식은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이 전쟁에서 좌절하고 낙망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미 그러한 일들이 여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오히려 교회를 세상 앞에 엎어지게 만들 구덩이를 파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접근의 기저를 이루는 교만한 태도는 세상과의 ‘문화 전쟁’을 영구히 지속시킬 뿐이다. 결국 세속 문화를 완전히 전복하려는 접근 안에서는 지금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건강한 접합점을 찾을 수 없다.그렇다고 해서 ‘문화를 개종하려는’ 방식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같은 신학자들의 놀라운 업적은 문화 개종을 근간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크리스천이 가급적 모든 문화에 관여해야 하며, 온 만물을 창조하고 지탱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인식 안에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인이 아닌 온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와 같은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크리스천은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찾고, 정의를 추구하며, 선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도시와 하늘의 도시를 혼동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의 이 땅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문화를 완전히 개종하고자 이 땅의 정치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물론 문화 개종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이 이를 위해 타협과 불합리한 동맹을 이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교회와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화를 ‘정죄’하는 방식이는 크리스천을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방식이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상반되기에, 크리스천의 문화를 마치 소수의 하위 문화처럼 은둔하게 하고 또한 사회의 보편적인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이런 유의 방식은 교회 역사 속에 늘 존재했다. 수도원의 부흥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고, 재세례파 운동의 다양한 양상 속에서도 유사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 존경스럽고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명하셨고, 성경은 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크리스천은 세상과는 다른 ‘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접근 역시 온전히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어야 한다. 소금은 음식 속에 스며들어 부패를 막을 뿐만 아니라, 형체는 사라질지언정 그 맛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니, 소금은 오히려 그 맛을 음식 전체로 퍼뜨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언젠가는 사회를 향해 크리스천의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를 증거해야 할 때가 온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친밀함과 온화한 인간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역 공동체에 소속되어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망명 생활 동안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 29:7)라고 명령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공동체의 평안을 구해야 한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식, 앞선 기술, 음악, 그리고 오락 거리 등을 선물로 주셨다. 이는 창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바르게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잘못된 부분을 비평할 줄도 알아야 한다. 두려운 마음에 숨거나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화는 악의 원천이 아니다. 모든 악한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막 7:18-23). 그러므로 문화를 차단하려 아무리 높은 담을 쌓는다고 해도 죄 자체를 막을 순 없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문화 소비는 세상의 문화 트렌드를 그대로 따라 가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또한 가장 압도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 아래에서는, 문화와 성경적 가르침이 상충할 때 전자가 후자에 앞선다. 기독교 전통쯤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없어도 무방하지 않은가 하면서 말이다.많은 크리스천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문화의 트렌드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 도시 문화의 중심인 맨하튼에서 사역하는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이 접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이 모델은 기독교와 주변 문화를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이 모델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련 없는 문화 운동 안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문화 소비의 문제는 복음을 무시한 채 문화와 사회 정의에 과도한 초점을 맞출 때 시작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복음 자체보다는 복음이 낳은 사회적 결과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발생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접근 안에서는 성경 말씀보다 문화를 따르는 일이 더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적인 모습들은 무시되거나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크리스천의 삶은 점점 세상을 닮아 가며 교회의 가르침과는 멀어지는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문화가 교회를 다스린다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단지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자 절박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사교 모임일 뿐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문을 닫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교회에 굳이 찾아오려고 하겠는가?용기 있는 자세문화 개종, 문화 정죄, 문화 소비. 이 세 가지 접근은 비록 진행 양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닐지라도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세 가지의 대응 방식 모두 일정 부분 두려움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문화 개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문화 전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고는 교회가 번성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 정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상 문화가 크리스천과 교회를 부패시킬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또한 ‘문화 소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대중에게 외면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이렇듯 크리스천이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감안할 때, 나는 우리가 세상 문화에 관여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용기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후기 기독교, 포스트 모던 시대의 크리스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용기를 내어 올바른 길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은 금방 끝나버리거나 잘못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담대한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맡은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에 없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용기를 가진 자에게는 도전적인 이 시대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소망과 기회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용기가 있다면, 우리의 관점이 바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상황 앞에서 겁먹거나 화내거나 마비되지 않고, 기뻐하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주어지는 용기가 있을 때,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른 직관과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ian Courage before Cultural Strategy번역: 정은심
선교전략
문화
팀켈러
크라우치
혼란
용기
개종
정죄
소비
선교하도록 설교하라
by Jared C. Wilson
2019-05-09
어떻게 해야 전도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 당신이 구도자를 타겟으로 한 전도 이벤트를 찬성하지 않고 복음 중심으로 설득하는 메시지를 신뢰하는 설교자라면, 어떻게 설교해야 교회가 선교적 열망을 불붙여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할지 궁금할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방법이 있다.1. 하나님의 선교라는 맥락에서 본문을 바라보라성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과 지상에서의 영적 사명을 다룬 거대한 서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와 가르침에서 이 사실을 놓칠 때가 많다. 당신이 지금 설교하는 본문을 하나님의 선교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청중들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큰 이야기 틀의 맥락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정기적으로 또 분명하게 선교적 맥락 또는 선교적 함의를 성경 본문에 적용해서 설교할 때, 청중들은 점진적으로 선교적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 선교 지향적인 적용을 하라설교의 적용은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 중심의 실질적인 권고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은 ‘최고의 나’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돕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청중이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제 3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직장, 학교 및 이웃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우상에 대항하라지역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교회가 속한 지역의 광범위한 문화를 제대로 읽어냄으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이제는 설교를 통해서 그 우상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다. 그런 우상들이야말로 교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큰 유혹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당신이 처한 특정한 환경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정복하는가를 묘사하는 것은, (1) 예배에 참석한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되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주님되심을 보도록 돕고, (2) 예배에 참석한 믿는 자들로 하여금 혼합주의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회개하도록 만들며, (3) 예배에 참석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일상 생활에서 선교를 수행하는 동안 주위에 있는 우상 숭배의 정체를 확인하고 제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4. 올바른 복음주의적 도전과 변증에 관한 질문을 예상하라또한 전도 설교는 선교 현장 속에서 만나는 우상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품고 오는 영적, 신학적, 윤리적, 성경적 또는 개인적인 질문까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반복되는 감이 있지만, 이 말은 주일 설교가 반드시 믿지 않는 사람들만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설교는 어느 정도 적절한 수준에서 ‘구도자에게 민감’해야 함을 의미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있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 또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신경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제기할 수 있는 이의와 질문 및 방해물을 미리 처리할 수 있다. 팀 켈러(Tim Keller) 목사와 앤디 스탠리(Andy Stanley) 목사는 이런 질문들을 잘 처리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켈러 목사가 이 부분에서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청중들이 이해하고 있는 신학적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설교 마인드를 가졌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존경받아야 한다. 게다가 스탠리 목사의 경우에 청중들이 특히나 더 역사적으로 기독교 문화에 젖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이렇게 썼다.이 두 명의 목사는 아틀란타와 뉴욕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초교파 침례교와 전통적인 장로교라는 신학적인 배경도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전혀 다른 동기로 사역에 접근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같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설교자라면 청중 속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 일치한다.스탠리와 켈러는 아마도 사역의 신학적 비전이라는 점에서는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만큼 다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설교자라면 구원받지 않은, 교회 다니지 않는 청중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내 말은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이 100%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스탠리의 경우 남부 지방 사람답게 ‘교회 다니는’(churched) 그리고 ‘교회 다니지 않는’(unchurched)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켈러의 경우는 그의 환경상 ‘믿는 자’(believers)와 ‘불신자’(non-believer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스탠리와 켈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비롯한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 스탠리에게 예배의 목적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참석하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켈러는 믿는 자와 불신자 모두가 복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복음과 양육은 같이 가야 한다고 믿는다. 팀 켈러는 이렇게 썼다. “청중이 다 기독교인이라고 간주하고 영적 성장만 설교하면 안 된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너무 복음 설교만 복음적으로 해도 안 된다. 양육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양육하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당신이 스탠리의 입장에 더 가깝든지 아니면 켈러에 가깝든지, 그들로부터 분명 배울 게 있을 것이다.우상과 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른 질문들을 예상하는 것은 가정, 직장, 학교 및 온라인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런 질문들을 청중들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미리 훈련시킨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설교를 하는 당신의 일차 사명은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설교를 통해 청중들을 선교와 관련해서도 훈련시키는 것이다. 5. 은혜롭게 동기를 부여하라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힘이다. 이것은 복음이 선교에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선교 열정을 차단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왜 전도하지 않냐고 다그치며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전도를 경쟁적으로 만들고, 목표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망신주고, 두려움이나 불안감에 빠지게 하는 등 이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동기를 사라지게 하는 데에 놀라운 역할을 한다.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청중에게 그들은 지금 성령이 불어주는 바람을 등지고 있음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릴 이를 살리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사람은 복음 전도의 결과에 책임지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복음 전도를 얼마나 신실하게 했는지가 중요한 존재이다.교회의 선교 열정을 불 붙이는 데에 은혜보다 더 강한 동기부여는 없다. 물론 모든 설교가 이런 요소를 다 포괄할 수는 없고, 또 여러 개의 설교를 합쳐도 그 중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메시지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복음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정기적으로 설교한다면, 교회는 선교라는 사명을 더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reaching Your People Toward Mission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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