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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들
by Joe Carter
2021-02-10
전 세계적으로 3억 4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신자 8명 중 1명)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높은 수준의 박해를 받고 있다. 지난 29년 동안 ‘Open Doors World Watch List’는 인권 및 종교적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국가 및 사회적 불안정에 가장 취약한 국가에 대한 글로벌 지표를 제공해왔다. 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의 미국 대표 겸 CEO인 데이비드 커리(David Curry)는 “코로나 19 전염병은 나쁜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바꾸었다. 코로나로 인한 공중 보건의 위기는 가뜩이나 종교적 박해가 극심한 지역에서 신앙 때문에 발생하는 차별과 폭력이 더욱 더 악화될 상황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2021년 오픈도어 세계 감시 목록에 따르면, 기독교인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신앙 때문에 차별과 폭력을 견디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특히 박해의 강도가 더 높아진 것으로 드러났다. 나이지리아에서만 하루 평균 열 명의 기독교인이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살해당한다. 여기 박해가 가장 극심한 열 개 국가가 있다. 이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을 위해서 기도하자.1. 북한박해 유형 : 공산주의와 공산화 후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 400,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북한에서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는 것은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즉시 살해되지 않는 경우 정치범이 되어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 비인도적인 감옥 상황은 끔찍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신자는 거의 없다. 가족 모두가 같은 처벌을 받는다. 김정은은 현재 5만 ~ 7만 명의 기독교인이 수감되어 있는 수용소를 더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기도 요점: “투옥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들이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끼도록 기도하자.”2. 아프카니스탄박해 유형: 씨족 및 민족적 적대감추정 기독교인 수: 수백 명 기독교인의 고통: “가족 중 누군가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 씨족 또는 부족은 신자를 부인하거나 심지어 죽임으로써 가족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은 정신 병원에 갇힐 수 있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광기의 표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기도 요점: “격리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신자들이 더 굳건한 신앙으로 힘을 얻도록 기도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고 또 다른 신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3. 소말리아박해 유형: 씨족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수백 명 기독교인의 고통: “소말리아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애초에 ‘교회 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소말리아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며 소말리아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의심받는 경우, 그 사람은 즉각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가족, 씨족 또는 공동체 구성원은 그들을 괴롭히고 위협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일 것이다. 여성은 강간 당하고 강제 결혼에 처해질 수도 있다.”기도 요점: “신앙 때문에 살해당한 이들의 가족이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를 받고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4. 리비아박해 유형: 이슬람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34,500명기독교인의 고통: “리비아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불법이며 다른 사람과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려는 사람은 폭력적인 반대와 체포 위험에 처한다. 중앙 정부가 없는 이 나라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사회 전체가 무법 지대다. 기독교인이 공격을 받거나 살해 당할 때 법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기도 요점: “세례를 받은 새로운 신자를 위해 기도하자. 그들이 함께 교제할 다른 신자들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하자.”5. 파키스탄박해 유형: 이슬람의 박해추정 기독교인 수: 4,052,000명기독교인의 고통: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이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박해에 직면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강력한 이슬람 국가에서 이등 시민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는 낮고, 더럽고, 불명예스러운 직업이 주어지며, 억압받는 노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기도 요점: “과거 테러 공격이 일어났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휴일에 파키스탄 교회에 별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자.”6. 에리트레아박해 유형: 기독교 교단 보호주의(정교회의 박해-편집자 주)추정 기독교인 수: 2,552,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비전통 교단의 기독교인들은 정부와 에리트레아 정교회(EOC)로부터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는다. EOC는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기독교 교단이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기도 요점: “에리트리아 기독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기회를 주셔서 종교의 자유라는 주제를 놓고 정부가 고민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7. 예멘박해 유형: 씨족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수천 명 기독교인의 고통: “예멘에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신앙을 비밀로 유지한다. 발견되는 순간 사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모든 예멘인은 국가에서 무슬림으로 간주된다.”기도 요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예배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그들이 또한 다른 신자들을 도울 때 지혜와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하자.”8. 이란박해 유형: 이슬람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800,000명기독교인의 고통: “이란 정부는 무슬림의 기독교 개종을 이란의 이슬람 통치를 훼손하려는 서방 국가들의 전복 시도로 보고 있다. 무슬림 출신 기독교인들은 정부 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 사회에 의해서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는다. 비밀 교회는 수시로 습격 당하고 지도자와 교인들이 체포되어 ‘국가 안보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기도 요점: “현재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자. 이란 교도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고 전염병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9. 나이지리아박해 유형: 이슬람의 억압추정 기독교인 수: 95,358,000명기독교인의 고통: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믿음 때문에 살해당하는 기독교인이 많다. 보코 하람(Boko Haram), 하우사-풀라니(Hausa-Fulani) 무슬림 무장 단체, ISWAP (이슬람 국가의 분파) 및 기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폭력적인 공격은 이 나라의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흔하며 점점 더 그 세력을 남쪽으로 뻗어가고 있다.”기도 요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잃고 또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위로가 더해지도록 기도하자. 주님이 납치된 자들에게 가까이 오시고 또 그들이 석방되거나 구조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10. 인도박해 유형: 종교적 민족주의추정 기독교인 수: 67,356,000명기독교인의 고통: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다 힌두교인이어야 하며 국가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광범위한 폭력을 사용하며, 특히 그 폭력은 힌두교 배경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다. 기독교인들은 ‘외국 신앙’을 따른다는 비난을 받고 지역 사회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이라고 비난받는다. 신자들은 종종 신체적 공격을 받고 때로는 살해 당하며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힌두교로 돌아가라는 끊임없는 압력을 받는다.”기도 요점: “우리 형제 자매, 특히 새로운 기독교인, 시골에 사는 사람들, 고립된 사람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자.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가 그들의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원제: The Countries Where It’s Most Dangerous to Be a Christian in 202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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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교회, 은혜와 사명의 선순환
by 김선일
2020-12-03
최근 여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델로 선교적 교회론을 주목해왔다. 선교적 교회 운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청했다. 일부에서는 선교적 교회론을 기존의 해외 및 타문화 선교를 더욱 강화해서 교회의 최고 중점 사역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전도를 목표로 삼는 사역 모델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그보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는 그의 기념비적 저서 ‘변화하고 있는 선교’(CLC, 2006)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명으로서 ‘선교’(mission 단수명사)와 그러한 선교의 구체적인 실천들인 해외선교, 봉사, 교육 등의 ‘선교들’(missions 복수명사)을 구분해야 하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의 사역 중 하나인 선교(missions)를 더욱 부각하거나 심지어 중점 과제로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지향점에 바로 근본적인 보냄 받음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특정 행위의 사역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보냄 받은 존재와 소명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 더욱 근원적으로 이러한 선교적 정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존재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세상 속에 보냄 받은 증인으로서의 존재론은 야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아들로 화육하시고, 성령으로 내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스스로, 그리고 서로를 보내시는 삶에 근거한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역사 속에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함께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선교적 교회론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중요한 재발견이며, 이 존재론은 개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로 모임을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내셨기 때문에 선교적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전적 은혜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론은 어떤 교회를 할 것이냐의 문제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성찰이며,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missional life)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보냄 받음이 정점을 이루었다. 따라서 신론은 기독론으로 집중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내셨기에(요 20:21) 기독론은 선교론을 낳는다. 우리는 홀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냄 받으심에 동참하기에 선교론은 교회론을 낳게 된다. 기독론 → 선교론 → 교회론의 구조(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가 공저한 ‘세상을 바꾸는 작은 예수들’_포이에마 참조)는 교회의 사역 가운데 한 가지인 선교 사역으로 교회의 본질을 채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세상과의 교통으로서의 선교에 교회가 존재함을 의미하다. 나는 지금 선교적 교회론을 현대 문화에서 적합하고 창의적인 사역 모델이나 교회 형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근본적 층위에서 봐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단지 선교적 교회론을 웅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적 교회론이 굳건하게 자리 잡아야 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상기하기 위함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루어진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근래에는 선교적 교회론을 정의롭고 적절한 공적 사역으로 환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교회가 속한 더 큰 사회를 개선하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론과 더불어 지역 공동체 운동, 마을목회, 사회적 목회, 공공신학 등이 거론된다. 교회의 주된 목적이 세상을 선하게 바꾸고 이웃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간 교회의 대 사회적 이미지와 신뢰도를 반복적으로 상기해온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이 분명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정체성 회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바람직하게 도출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데 있어서 그 설득력을 좌우할 만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가능하게 한 근원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선교적 존재로서,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뿌리로부터 멀어지면 안 된다. “생수의 근원되는”(렘 2:13)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기억하고 그 진리를 붙들지 않으면 선교적 교회 운동은 근본적 추진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행함’(doing)이 아니라 ‘존재’(being)로부터 다져지고 힘을 얻어야 한다.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은혜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보냄 받았을 뿐 아니라 부름 받았다. 먼저 부름을 받고 은혜로 채워지지 않는 한 보냄 받을 수 없다. 은혜 안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보냄 받은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며 감사함으로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선교’라는 단어가 사명이나 목적을 의미하다 보니, 자칫 선교적 교회는 온갖 ‘해야 할 선한 일들’로 가득찰 수 있다. 선교적 교회의 실험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자주 듣는 피드백 중에 하나는 그들의 교회 성도들로부터 힘들다는 하소연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교인들은 세상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힘겹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근근이 버티다 겨우 교회에 와서 안식과 교제를 맛보고 싶은데, 교회에 와서도 다시 또 주변을 섬기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니 너무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공통적이자 지배적으로 교회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약성경은 외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도 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교회 안에서 창조되고 형성된 새로운 존재와 관계의 경험이 흘러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예배와 선교, 은혜와 사명, 부름 받음과 보냄 받음의 선순환은 우리에게 부여된 축복된 리듬이다. 선교적 교회론에서 유의해야 할 주장이 있다. 그것은 선교는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논리다(‘교회 너머의 교회’ IVP, 76-79쪽 참조). 특히 선교적 삶은 세상 속에서, 우리의 이웃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깊이 거하지 않고 어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사역하신 일을 우리에게 일깨우시고 생생하게 살리시는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서 어찌 우리의 선교가 가능하겠는가? 좀 더 도전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선교가 교회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들이 가정하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나는 이러한 주장을 접할 때마다, 교회가 종교조직이나 제도, 또는 건물로 전제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이자,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대안적 공동체라는 근본적 신학적 취지를 고려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과제는 세상을 개선하는 전략이 아니라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확신하건데,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조적, 대안적, 대항적 공동체로 존재하는 일에 천착하지 않는 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은 근원적 양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또 하나의 수고와 노력이 될 것이고, 교회는 사회의 여러 복지 구호기관의 반열에만 설 뿐, 구원의 능력을 증언하는 유일한 은혜의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명에 앞서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가 사명을 이끈다. 은혜 아니면, 선교적 교회도 서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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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는 결국 하나다
by David Mathis
2020-10-21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빽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해외로 나가 다른 지역을 섬길 것이냐를 두고 공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면전이 펼쳐지기도 한다.어떤 환경에서든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개는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가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조화를 이룬다기보다 마치 경쟁하듯 교회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대립하는 갈등 관계를 일으킨다.한편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물리적 근접성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깊이 일깨운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혹 복음이 이미 전파된 지역에 살고 있더라도, 그 메시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들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많다. 잃어버린 영혼이 우리가 속한 도시에 너무도 많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전 세계에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민족이 칠천 민족이나 된다는 사실에 우리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깊은 사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생명의 소식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 이 둘 중 어디에 더 주력해야 할지 과연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새로운 긴장이 아니다제한된 물질과 재정, 그리고 개인의 소명을 고려한 인적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는 어려운 결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선교든, 그 실행에 앞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예수님이 분부하신 사명이 얼마나 원대하면서 또한 단순한지를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기독교 선교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우리의 관점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최근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고자 어디서든 선교 지향적인 삶을 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러한 강조가 혹 신선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두 선교 유형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새롭게 발생한 게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인 1984년 11월,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그러한 주제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당시 교회는 세계 선교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한 지 일 년 정도 되었고, 이에 지역 선교를 앞세우는 이들은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 양자 간의 긴장은 설교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다양화된 국내 사역과 개척 선교의 관계’(The Relationship Between Diversified Domestic Ministries and Frontier Missions).그러므로 이러한 긴장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며 또 하나님이 그 두 가지 사역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지역 공동체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모두 용기를 낼 수 있다.왜 세계 선교는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가그렇다면 왜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선교 지향적인 삶을 사는 일이 왜 미전도 종족을 위한 사역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지, 여기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자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존 파이퍼의 1984년 설교에서 취한 내용이고, 세 번째 이유는 그로부터 도출한 내용이다.1.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의 ‘신뢰성’(credibility)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맺는 선교의 열매가 해외에서 진행되는 세계 선교에 신뢰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 파이퍼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가 먼저 국내 사역 현장에서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곧 지역 선교]에 헌신해야 최전방[즉 세계 선교]에 보냄 받아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사들에 대해 현지인들이 지속적으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 사역은 세계 선교의 신뢰성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신뢰성은 선교사의 모교회에 대해 궁금해 하는 현지인들만 아니라, 복음이 새로운 민족에게 전파될 때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꿈꾸는 선교사들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2.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를 위한 ‘자원’(resources)을 제공하기 때문이다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를 위한 자원을 제공한다. 이는 재정 자원과 인적 자원 모두를 말한다. 다시 한 번, 파이퍼의 설교를 인용해 보겠다. “국내 사역은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에 헌신할 새로운 지원자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값진 훈련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곧 세계 선교를 후원하는 데 쓰일 일꾼과 재정이 국내 사역을 통해 마련되지 않으면, 해외로 진출하여 제자를 삼으려는 고된 선교란 달성될 수 없다.3.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를 준비하는 ‘훈련’(training)의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이 이유도 파이퍼가 언급하기는 했으나, 여기서는 좀 더 발전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자국의 문화에서 우선적으로 익혀 또 다른 환경인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나 네 번째) 문화에서 상황화해야 하는 사역의 원리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본토 문화에서 사역의 핵심 원리들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만큼 타지 문화에서 행해지는 독특한 관습을 잘못된 관점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독교 신학의 대략적인 구성과 제자훈련의 기본 원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기술 등을 철저히 익히는 과정은 타문화권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어려운 결정 사항을 다루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선행 학습이 된다.왜 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를 필요로 하는가물론 세계 선교만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지역 선교도 세계 선교를 필요로 한다. 왜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지, 여기서도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다.1.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해외로 전파되어야 할 만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지역 선교의 메시지도 진정성을 갖추게 된다. 즉 우리가 속한 도시나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이 필요하다는 지역 선교의 메시지는 세계 선교를 통해서만 진정성을 확보하게 된다.예수님은 특정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 민족과 우리 언어와 우리 국민과 우리 나라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국민과 나라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곳에서 자신을 찾는 예배자들을 불러 그 비교할 수 없는 존엄성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인간의 마음에는 어느 한 민족이 섬기는 우상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깊은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즉 모든 민족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와 구속하신 참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역 선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하려는 분도 바로 그 열방의 하나님이지 그저 우리 지역만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세계 선교는 우리에게 있는 복음이 해외로 전파되어야 할 만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2.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돌아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을 제공하기 때문이다복음을 품고 타문화권에 가서 선교하며 발견하게 된 내용은 본토 문화를 위한 사역에도 많은 지침을 제공해 준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존 문화권에서만 복음 사역을 하다 보면 사각지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타지역에 가서 새로운 문화권 속에 교회가 정착하는 과정을 보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기에, 다시 파송 교회에 돌아오면 적지 않은 도전을 끼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파송 교회도 선교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교사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단지 그들의 사역을 알아주거나 그들이 추진하는 전략이나 기술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역을 제대로 평가하고 개혁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이와 같이 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가 제공하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가 점차 탈기독교화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우리가 지속해 온 사역 방식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접근은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방식이야”라며 무조건 따라하다가는 교회가 성장하는 데 장애만 발생한다. 그런 자세보다는 “여기에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경청하며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일 때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한 마디로, 자신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는 교회일수록 본토에서도 그만큼 더 훌륭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3.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의 성숙도를 ‘확인’(confirmation)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세계 선교를 통해 지역 선교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는 훌륭한 지역 선교에 뒤따르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역 선교는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꾼을 생산하고 파송하며 후원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역의 성숙과 건강 상태는 그런 목표를 얼마나 실현하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물론 선교사 파송으로 지역 선교가 완성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로 지역 사역이 진행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 사역이 성숙한 운동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그와 반대로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는 사명에 교회가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는 그 공동체가 어딘가 병들어 있거나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혹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공동체가 고립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교회가 지역 선교만이 아니라 세계 선교에도 참여하고 있다면, 이는 그 공동체가 건강하고 성숙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로써 교회가 해당 지역에서 견실한 복음 사역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주님 안에 한 선교가 있을 뿐결국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는 서로에 의해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활성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에 각 지역을 위한 사명과 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을 위한 사명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를 함께 명하셨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주님 안에서는 하나의 선교가 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복음이 이미 전파된 지역과 아직 전파되지 않은 지역을 위한 사역을 따로 구분하여 어느 쪽을 지원할지를 두고 갈라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명하신 선교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을 다 덮어 주는 하나의 옷자락과 같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eamless Garment of Christian Mission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존파이퍼
지역선교
세계선교
신뢰성
자원
훈련
진정성
문화권
성숙도
전례없던 복음 전도를 다시 이루려면
by Tim Keller
2020-09-03
기독교인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해가 된다고 여기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는 지금 진입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문화는 점점 더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어가고, 그럴수록 하나님, 진리, 죄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현대 문화는 기독교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이제 교회 지도자는 아예 교회에 올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달라도 너무 달라진 문화 환경 속에서 교회가 그들을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양육하고 만들어가야 할지를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서구 문화와의 선교적 접촉(missionary encounter) 위한 ‘밖을 향한 움직임’(Outward Move)과 ‘안을 향한 움직임’(Inward Move)이라고 부르도록 하자.이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말하는 선교적 접촉이 결코 문화로부터 후퇴해 기존의 사회와 거의 관계를 갖지 않는 고립된 공동체로 숨어들어 가자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전혀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서 강제로 기독교적 기준과 믿음을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세상과 연관성을 맺어 지금 문화에 완전히 적응함으로 아예 그 문화에 동화되자는 것도 아니다. 선교적 접촉선교적 접촉은 후퇴 전략과 달리 연결하는 것이고 동시에 동화 전략과 달리 대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정치적 인수 전략을 포함한 다른 모든 전략과 달리,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회심시키자는 것이다. 선교적 접촉을 하는 교회라면 후퇴 전략이 지향하는 고유성, 그러니까 세상과 다른 교회만의 특별함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동화 전략이 요구하는 관련성, 그러니까 이웃을 인정하고 섬기는 면까지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한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회개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서구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비기독교인(non-Christian)이라는 호칭 보다는 탈 기독교인(post-Christian)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기에, 이제는 선교적 접촉 방식 또한 교회가 과거에 했던 식으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지금부터 서구 문화를 상대하는 선교적 접촉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다섯 가지 요소를 소개하고자 한다.1. 기독교 고등 이론문화를 향해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복음에 비춰서 문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동안 변증론은 기독교의 진실에 대한 논증과 증거 제시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증의 경우, 변증론이 향하는 곳은 신약 성경(고전 15장)이었다. 그러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부터 어거스틴(Augustine)에 이르는 초창기 기독교 변증가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 관습과 믿음이 이교도 문화가 지향하는 표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이교도 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개발함으로 어떻게 이교도 문화가 그들 스스로가 가진 표준에 비춰 보더라도 이미 실패했는가를 드러냈다.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고등 이론(High Theory)이라고 부르는 방식을 개발했다. 그는 복음을 사용해서 당시의 만연한 문화를 비판했다. 오늘날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고등 이론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세속적 문화가 요구하는 합리적 기준에 부응하는 대신 오히려 그 기준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중립성, 객관성 및 보편성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기독교적 고등 이론은 후기 근대의 세속적 세계관을 제대로 분석함으로 그 세계관이 지향하는 신념 체계에 근거할 때 생기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세계관이 기본으로 삼는 주장(narratives)이 어떻게 인간 본성 및 직관과 맞지 않는지를 보여줄 수 있고, 그 결과 복음을 거기에 대한 반론 또는 대안(counterpoint)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아를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미명 하에 현대의 세속적 사고의 틀이 어떻게 우리를 지금의 상태로 만들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고의 틀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모든 관계는 거래이다.· 모든 정체성은 지극히 취약하다.· 그리고 성취의 모든 근원은 실망스럽다.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유롭지 않다. 지역 공동체와 가정이 쇠락함에 따라 주관적으로 봐도 자유롭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내적 외로움과 치명적인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결국 학계를 포함해서 후기 근대성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을 알고 있는 비기독교인 학자와 사상가의 도움을 받은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금의 문화 속에서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절제되지 않는 개인주의와 상대주의가 초래하는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다. 2. 진정한 탈 기독교 왕국 복음주의의 역동성서구 문명은 다양한 전도 방법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한 가지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는데, 그건 비 기독교인이 여전히 하나님, 진리, 죄, 그리고 사후세계의 기본 개념을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찾고 있으며 또한 복음에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복음적 역동성을 오늘날에 맞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게 필요하다. 오늘날과 비슷하게 복음에 적대적이고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도 초대 교회는 회심을 통해 성장을 이뤄냈다.그런 역동성 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의 요소가 들어있다.① 의도성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초대 교회 시절 80% 또는 그 보다 더 많은 비율의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성직자 또는 전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이코스(oikos)라고 불리는 개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친척 또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 평범한 기독교인에 의해서라고 추정했다. 누구나 자기가 잘 아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복음을 설명하면 귀를 기울이게 된다. ② 대안이 되는 대답구원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비 기독교인이 깨닫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답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게 필요하다. 여기서 ‘그들이 갖고 있는 답’(people’s answers)의 의미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의미, 만족, 자유, 정체성, 용서하고 용서받는 방법, 도덕적 질문에 대한 해결 방법,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 그 누구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지금의 문화가 제시하는 답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의도성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시간이 되었을 때 기독교가 제시하는,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만족함을 제시할 수 있다.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공한다. · 고난으로 사라지지 않는 삶의 의미, 오히려 고난으로 더 깊어지는 삶의 의미· 환경에 지배 받지 않은 만족· 공동체와 사랑의 관계를 얄팍한 거래로 바꾸지 않는 자유· 업적에 근거하지 않고 왕따(exclusion)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정체성· 죄책감을 이기는 방법, 쓴 뿌리 또는 수치심 없이 용서하는 방법· 스스로를 괴롭히는 압제자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정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기초· 미래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침착함과 평안으로 대하도록 하는 방법다시 말해서, 그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이런 욕망과 필요의 정체가 그들 속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필요라는 사실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③ 복음후기 근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해야 한다.복음은 다름 아니라 “주로부터 오는 구원”(요 2:9)이다. 복음을 소개하는 것은 언제나 다음 두 가지 포인트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 나쁜 소식: 당신은 지금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좋은 소식: 당신은 노력이 아닌,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 전통적 문화에서는 “삶의 의미는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이 통했지만, 이제 후기 근대 문화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달라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생의 의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되었다. 3. 카테고리를 규정하기 힘든 사회 프로젝트‘신들의 파괴자(Destroyer of the gods)’에서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로마에서 기독교가 가장 박해받는 종교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당하는 불이익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허타도가 찾아낸 것은 아주 독특한 기독교 사회 프로젝트였다. 일종의 독특한 인간 공동체인데 너무 독특해서 당시에는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 수가 없었고, 그 사실은 오늘날도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다섯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요소를 더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또한 그 모든 요소가 모여서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대 교회가 수행한 사회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다 인종 및 다 민족·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데에 전념· 용서에 대한 다짐이라는 특징을 가진 보복 금지· 낙태와 유아 살해에 대한 강력하고 실질적인 거부· 혁명적인 성 윤리관초대 교회 공동체는 공격적이면서도 또한 매력적이었다. 로마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다는 일종의 전략적인 생각으로 이런 사회 프로젝트를 한 게 아니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다름 아니라 성경적 권위에 굴복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성경이 명령하는 것이다. 공격적이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이 다섯 가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 지, 그 카테고리가 불분명하다. 처음 두 가지는 “자유주의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는 “보수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세 번째 요소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는 처음 두 가지 또는 끝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결국 이 네 가지를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다섯 가지 중 그 어떤 하나라도 포기하는 순간 기독교는 특정 정치 프로그램의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선교적 접촉에 필요한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4. 디지털 시대에 맞는 반 교리 교육“교리 교육”이라고 할 때 지금 아주 엄숙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진 교리 문답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교리 문답을 찬성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기독교인을 양성할 때 교회는 오로지 성경과 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뤄가야지 결코 이 세상 기준에 따라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현실은 교회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교리 교육을 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교리 교육과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를 잊고 있다. ① 교리 교육은 언제나 반 교리 교육이었다종교 개혁 기간 동안 교리 교육의 폭발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지도자가 앞다투어 새로운 교리 문답을 썼다. 이것은 단지 교인들에게 개신교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비 개신교인이 되는 유일한 대안인 가톨릭 교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주사 효과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교리는 개신교인으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당시 지배적 대안이었던 가톨릭 교리를 해체함으로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역할까지 감당했다. ② 교리 교육은 도덕 생태계의 일부이다 수 년 간 교회에서 자라고 배운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니, 두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하는데 섹스를 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난 이해를 못 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건 하나도 놀랍지 않다. 놀란 부모들이 성경 구절을 들이민다고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왜 그럴까? 첫 번째로 그건 젊은이들이 가진 섹스관이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데에 근간이 되는 현대 사회의 정체성과 자유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정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사고가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에 대한 폭로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교리 교육은 공공 영역에서 드러나는 신실한 기독교인의 존재감을 포함한다우리는 지금 비기독교적 사고와 주제(이성/과학, 개인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말은 교회가 기독교인을 훈련시켜서 그들의 믿음이 공적 영역인 직장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인이 제대로 무장될 수만 있다면, 정치적 접근을 통해서 기독교가 더 우월적 힘을 갖는 방식 또는 비록 다른 영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혼자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는 효과적이며 후퇴적인 방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복음은 오늘날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이 될 것이다. 5. 끝까지 은혜우리는 복음의 은혜와 종교적 도덕주의의 차이를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왜 개신교 교회가 끊임없이 자기 의, 지배 그리고 배제라는 유혹에 빠지는가? 왜 교회는 초대 교회의 사회 프로젝트와 같은 성과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지금 교회는 신앙(faith)의 핵심을 바로 붙잡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노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교만과 동시에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과 세상이 우리를 칭찬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는 교만과 더불어 정말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생기는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그리스도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존재론적(또는 교리적)으로 제대로 붙잡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기쁨을 잃고 두려움에 빠질 뿐 아니라, 은혜를 잃고 교만에도 빠지게 된다. 교회가 잘못하는 것을 잡아내는 데에 있어서 빨라도 너무 빠른 세상은 자연스럽게 문제 있는 교회가 증거하는 복음을 무시하는 것을 합리화한다. 그렇게 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교회가 사랑과 봉사가 아닌 지배와 주도의 방향을 계속해서 추구한다면, 그 자체로 교회 스스로가 자기네가 전파하는 복음을 사실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아니, 교회도 믿지 않는 복음을 왜 이 세상이 믿어야 하는가? 도전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복음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복음 없이 희망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우군(encouragements)이 있다.① 기독교 교세의 세계적인 증가20세기와 21세기가 가져다 준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비 서구 지역에서 기독교 교세의 폭발적인 증가이다. 그 대부분이 복음주의 또는 오순절 계통이다.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오늘날 기독교인의 70%는 비서구권에 몰려 있다. 그리고 서구권의 기독교인도 상당수는 비서구권에서 들어온 백인 이외의 인종이다. 가나에는 영국과 미국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숫자의 장로교 신자가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영국과 미국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숫자의 성공회 신자가 있다.또 하나의 현실은 북미와 유럽의 세속적 인구가 하강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복음 전도와 출생 덕분에 기독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이 증가에는 이민과 선교 사업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고, 서구 여러 지역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하고 있다. 그 결과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와 “특정 종교가 없음”이라고 말하는 인구는 앞으로도 점점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② 선택된 종교의 위력어떤 종교는 자연스럽게 대물림된다. 가족적 배경 또는 국적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종교도 있다. “당연히 루터교지요, 나이지리아 사람인데요.”“이탈리안이요, 그러니까 가톨릭이죠.”“힌두에요, 인도 사람입니다.”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다. 젊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 가톨릭 그리고 주류 개신교가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가 표방하는 믿음은 이런 문화적 상황에 잘 맞는다. 복음주는 무엇보다도 믿음에 대한 개인의 결정과 개인적인 회심 체험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문화에 잘 접목되는 복음주의 신앙이지만 그와 동시에 올바른 개인적 선택을 하도록 강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별도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삶은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위에 복종하는 삶이라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③ 도시의 문화적 형성력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성장의 동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비 백인, 비 서구 사회 젊은이가 주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서구 사회의 큰 도시가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도시일수록 인구는 젊고 또 다 민족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를 형성하는 자궁의 역할을 한다. 도시 근교의 재능까지 하나로 모으는 응집을 통해 새로운 혁신과 창의적인 기업이 생겨나고 또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간다. 교회가 도시에서 부흥한다면, 또한 점점 더 늘어나는 도시의 기독교인이 자신의 일터에서, 또 예술과 미디어 및 아카데미 영역에서 신앙과 삶을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이 될 것이다. ④ 전례가 없던 일1900년까지 비 서구 사회, 기독교가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서 빠른 성장의 부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부흥이 일어났다. 한국의 부흥과 동 아프리카의 부흥을 보라. 반면 탈 기독교, 세속적 사회에서 그 동안 부흥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발생하기 전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원주의 부흥 운동은 발생하기 전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종교개혁도 전례가 없었고, 미국의 대부흥도 발생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게는 이 약속에 만료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Reach the West (Again)번역: 무제
선교전략
전도
도시선교
탈기독교시대
현대사회전도법
교리교육
선교적접촉
탈기독교인
복음주의
초대교회
세계 선교에 도래한 혁명
by Darren Carlson
2020-08-20
세계는 이주하고 있다.2010년에 세계 이민자로 추정된 숫자는 총 2억 1400만 명이었으며 이는 가히 21세기 초를 이민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보편적으로 이민자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당신은 정치적 논쟁을 생각할지 모른다. 본 글에서 나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이민의 한가지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단순 이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영국에는 15,000명의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계열의 선교사들이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선교사로 분류되는 1세대 이민자들이다. 그리스에 존재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의 대다수가 아테네에 있는 복음주의 이민 교회들이다. 런던의 경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영어를 제2외국어로 사용한다.Deeper Life Christ 교회의 나이지리아 선교사인 이케 느와오바시(Ike Nwaobasi)는 독일어를 배웠고 호주에 세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이스라엘 올로핀자나(Israel Olofinjana)는 런던의 한 침례교회를 섬기는 나이지리아 목사다. 그는 “역(逆, reverse)선교”를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교차 문화(Cross-cultural) 사역자들을 교육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제3세계 선교 센터(the Centre for Missionaries from the Majority World)를 설립하였다.세계 선교의 다음 혁명은 디아스포라의 출현 가운데 이미 도래했다. “역선교”는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아시아, 그리고 남미와 같은 선교지역의 개종자들이 서구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교차 문화 선교에 참여할 때 발생한다. 향후 몇 년 동안, 서구 사회 이외의 선교가 유럽 (그리고 아마도 미국)에서 감소하는 기독교인 인구에 미치는 영향은 교회 인구 통계가 변화함에 따라 느껴질 것이다.19세기와 20세기에 (이민보다는) 선교가 기독교를 서구 사회 밖으로 이끌었다면, 오늘날 이민은 선교를 서구 사회로 이끌어가고 있다.성경 속 이민자들이민은 성경만큼이나 오래되었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이라는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드셨다. 최초의 가족은 에덴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가인은 떠돌아 다녔고(창 4:23), 열방은 결국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지게 되었다(창 11:8–9).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이주했으며(창 12:1–9), 롯은 땅 분쟁 이후에 이주했다(창 13:5–12). 야곱은 도망하였다 귀향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요셉을 강제로 애굽에 보낸 뒤에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성경의 첫 두 책만 보아도 도망자, 노예, 기근의 피해자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후대의 이웃 나라 왕들도 유대인 인구의 일부를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왕하 15, 17). 느부갓네살 왕은 고대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망명 보냈으며 그곳에서 더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구원의 역사 역시 이민에 대한 이야기다. 구원자의 가족들은 압제를 벗어나 애굽으로 강제로 이주했다. 복음은 로마 전역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선포되었다. 기독교는 결코 지리적인 요충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라고 묘사한다(벧전 1:1). 여기서 끝인가? 새 예루살렘을 향한 이주가 남아있다. 초대교회의 선례초대교회 또한 선교로 이어지는 이주의 많은 예들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주하는 백성들을 사용하신 완벽한 실례(實例)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신자들은 AD 31년–32년에 있던 핍박을 벗어나 스데반의 죽음을 따라 도망하였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 그룹이 구브로와 구레네로부터 이주해 와서 교회를 세웠다. AD 45년 경에는 구브로에서 온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일하며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 소개하였다. 사울과 바나바는 수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했다.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사울의 핍박 때문에 끝내 안디옥에 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교회는 성장했다. 신자들을 그곳에서 먼저 이끌었던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데려왔다. 사울은 1년간 가르치는 사역을 했으며 그리고 나서 과거 그에게 핍박당했던 신자들이 세운 그 교회는 사울을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이주는 여러가지 방법, 특히 두 가지 방식으로 선교 사역을 이끌어 냈다. 첫째, 이주했던 불신자들은 복음 사역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사도행전 2장을 보라). 이는 많은 무슬림들이 서구 사회로 이민을 오면서 처음으로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둘째, 우리는 의도치 않은 신자들의 흩어짐(예, 행 8:4; 11:19)이 복음 전파로 귀결되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에리트레아에서 핍박 받던 신자들이 현재는 유럽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사람들의 움직은 전례없는 범위다. 이는 다양한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문화가 어떤 대상을 “정상”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들을 확장한다. 또한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특별히 무슬림 가운데서)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이끌며 또한 서구 사회에 복음의 부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은?복음주의 기독교는 이전보다 더욱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부분 복음주의 선교사 영웅들은 문화적 관행에 가리워진 복음과 함께 직권을 가지고 있던 백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새로운 선교사들은 백인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적 힘의 위치로 접근하지 않으며 또한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들의 수가 지난 200년간 힘있는 나라에서 파송 된 선교사들에 의해 인도된 사람들보다 더욱더 많아지기를 기도해야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Revolution Has Come to World Missions번역: 정진호
선교지침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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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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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문화
지역사회
‘황금 어장’을 선점하라
by 김돈영
2020-07-11
복음 전파를 위한 황금 어장, 군부대 선교는 생각보다 결코 쉽지 않다.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할 사람과 시간이 부족하다. 전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으며, 다양한 휴게 시설과 휴대 전화 등은 병사들이 예배당보다는 생활관에 머무르게 한다. 게다가 교묘한 방법으로 포교 활동을 하는 이단은 신앙이 있는 병사들에게도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드러났기에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뭘까? 당신의 대안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런 물음에 시원하게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수학 문제처럼 딱 떨어지는 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듣고 경험했던 일을 나누려 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마음이 있는 소수가 있다“많은 사람이 오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고, 성경을 알고 싶은 병사들, 성경을 배우고 싶은 병사들은 꼭 오도록 해주십시오. 단 한 명이 와도 괜찮습니다.” 부대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외부에서 부대를 방문할 때면 많은 병사가 모이도록 요청하는 일은 으레 있는 일이다. 행사를 계기로 초청하여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행사가 그렇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신앙이 있는 병사들과 말씀에 갈급하고 좀 더 깊은 것을 갈망하는 병사들에게는 더 큰 갈증만 유발하게 한다. 실제로 현역병으로 있을 때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깊은 말씀을 듣고 싶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은데, 위문 예배라는 이름의 행사는 언제나 학예회와 같은 시간이었다. 노래하고 율동하고, 선물과 간식으로 마음을 끌었지만 정작 말씀은 ‘수박 겉핥기’였다. 김빠지고 미지근한 음료수를 마시는 느낌만 들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선택한 것이 성경 공부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전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말씀의 풍성함을 알고, 부대에 말씀을 읽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성경에 관심이 있는 병사만 오도록 한 것이다. 관심도 없는데 앉아 있으면 서로가 힘들다. 무엇보다도 집중하고 공부하려는 병사들에게 영향을 주어 집중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대 교회의 목회자와 뜻이 같아야만 가능한 일이다.스스로 성경을 읽다보통 10명에서 20명 안팎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중하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욕심이다. 신학교 수업 시간에도 집중력이 흐려지는데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몇 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 강의 때까지 공부한 부분을 읽기로 한다. 보통 6주의 간격을 두고 강의를 진행한다. 부대 교회의 담임 목회자와 군종병은 성경을 6주 동안 매일 읽을 수 있는 분량으로 나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강의하면 다음 강의 때까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매일 읽을 수 있도록 분량을 나누는 방식이다. 그 계획에 맞춰 하루에 두 세 장씩 성경 통독을 해 나갔다.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난 6주 동안 통독표에 따라 성경을 읽은 병사가 있는지 물었다.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6주가 지났다. 이번에는 세 명이 6주 동안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했다.“훈련을 나가니 밤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읽었는데 강의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신기하게 성경 내용이 이해되니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처음이었습니다. 훈련 가서 성경책을 제일 많이 읽은 것 같습니다.” 성경 읽기에 성공한 병사의 소감이다. 훈련 나가서 밤중에 성경을 읽었다는 그 말이 인상적이다. 또 다른 병사의 소감이다. “성경책은 어렵고 읽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나 TV, 핸드폰 등을 더 좋아해서 성경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성경책에 더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우리의 청년이고, 우리가 만날 목회자다세 번, 네 번 강의를 진행할수록 성경 읽기 미션을 완수한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한 명에서 세 명으로, 그리고 일곱 명, 여덟 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의 변화도 있었다. 주일 예배에 와서 서로 얼마나 읽었는지 묻기도 하고, 같이 읽자고 독려하는 등 병사들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말한다. 작은 불씨와 같이 성경 읽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중이다.“저는 신학교를 다니다 왔는데, 솔직히 성경을 처음부터 정리하면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제 전역을 하지만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이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는 습관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다 온 군종병이 전역을 앞둔 마지막 수업 때 했던 말이다. 그 외에도 몇 명의 신학생 병사들을 만났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지금 병사 중 한 명이지만, 전역하면 신학교에 복학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사역자로 교회에 갈 것이다. 길어야 1년에서 2년, 어쩌면 전역하고 바로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우리 교회에 사역자로 오게 될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병사들을 양육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 공동체의 청년이고, 앞으로 우리가 만날 수도 있는 전도사, 목사가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살피고,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청년층이 흔들리고 사라지는 것이다.균형이 중요하다강의가 끝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진지하게 듣고, 질문에 대답도 잘하던 병사가 군대 와서 처음으로 교회 나왔다는 것이다. 훈련소에서 처음 교회에 갔고, 세례를 받은 후 자대에 온 것이다. 성경이 궁금했는데 마침 성경 공부를 한다기에 참석했다고 한다. 성경이 재미있고, 무엇을 믿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무언가를 자꾸 질문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낀다.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그런 병사를 종종 만난다. 어쩌면 이 모습이 ‘황금 어장’에 접근하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병사를 향한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 한 사람씩 양육하고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둘 사이에 협력이 잘 되었을 때 비로소 황금 어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전체를 살피고 우리는 어느 곳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접근해야만 한다.가까이 있는 부교역자성경 강의에 오는 간부들을 만난다. 소대장, 대대장, 연대장 등 다양한 계급으로 주일에는 집사로 봉사한다. “20년 군 생활 가운데 군부대에서 성경 강의를 들은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항상 위문 공연 같은 것만 오는데, 이런 공부가 정말 필요합니다. 자주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역 대대장인 집사님과의 대화다. 지역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기회가 있다. 많은 강사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부대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다. 따라서 부대의 간부들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성경 공부를 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신앙인으로서 말씀의 갈급한 마음을 채울 방법이 별로 없다. 담임 목회자 혹은 군목에게 신앙 상담을 하거나 성경 공부를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간부들이 성경을 알고, 바르게 신앙인으로 선다면 부대 교회는 큰 힘을 얻을 것이다.간부들은 몇 년에 한 번씩 근무지를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교회도 옮긴다. 간부들이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면 어느 곳으로 가든지 부교역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부대의 상황과 병사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영향력이 있기에 이보다 좋은 부교역자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간부 집사님들의 도움이 있는 곳은 강의 진행이 훨씬 수월하다. 함께 강의를 듣고 교제를 나누다 보면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을 만난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좋은 동역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왜 우리는 못 하는가?면회를 통해 포교를 할 수도 있다. 면회를 가서 내 아들만 부르지 마라. 자녀와 공동체 생활을 하는 병사에게 밥 한 끼 나눠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할 수 있는 병사가 있다면 푸짐한 음식을 나누어 보면 좋겠다. 만일 함께 면회하는 것이 어렵다면 위병소나 면회실 근무자, 인솔자 등 눈에 보이는 병사에게 친절하고 따스한 말 한마디, 최소한 음료수 하나라도 건네보라. 다만 음료수 한 캔, 피자 한 조각, 치킨 한 조각을 나누면서 호구 조사 하듯이 묻고, 교회 나가라고 압박하는 일은 제발 하지 말자. 그냥 나눠라. 즐거우면 되는 거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들은 당신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작은 실천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공교회를 말한다“군대 가면 다 교회 가잖아요. 그러니까 군 교회는 가만히 있어도 애들이 오는 거 아니에요?”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들었던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쩌면 이 말이 군 선교를 대하는 다수의 솔직한 마음이자, 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앞에서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모두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먼저 이런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최소한 군대에 보낸 청년이 아직도 우리 공동체 소속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 청년이지만 다른 곳에서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렇다면 방법이 조금은 보일 것이다.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고 휴대 전화 사용이 가능한 시간이 있다. 지역 교회의 청년들에게 SNS나 전화, 카톡, 메신저 등으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 나눌 때 부대에 있는 병사에게도 해보자. 토요일이면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권면해 보자. 그가 찬양팀으로 혹은 성가대나 교사로 봉사했다면, 군 교회에서도 계속할 수 있도록 권면하자. 성경 통독 방을 만들어서 말씀을 올리거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일을 해보자. 그래서 여전히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라.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군대에서 신앙의 방학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군대에 와서 신앙 생활이 단절되는 병사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선교 단체에서 활동했고, 여러 곳에 사역도 다녔다던 병사는 전입 후 한 번 예배에 참석하고 그 후에는 오지 않았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한 병사는 예배 참석이 뜸해지더니 어느 날 다른 종교의 군종병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입대 전에 했던 많은 봉사와 화려한 이력이 입대 후 신앙 생활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목적은 사람이다가끔 선교 단체가 병사들을 양육하기 위해 협력을 제안한다. 사역자가 부족하고, 양육의 필요를 절감하는 교회의 입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선교 단체의 장기적인 목표는 선교 단체의 일원을 만드는 것이다. 전역 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아닌 선교 단체 지역 모임으로 이끄는 것이다. 양육 교재나 내용 등도 선교 단체의 것이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단체의 확장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대 교회가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기에 막을 수도 없고, 허용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병사를 양육하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공교회를 굳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특정한 곳이 아닌 지역에 있는 교회로 인도하고, 거기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바르게 성경을 읽고 든든한 믿음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다. 내 주머니를 먼저 채우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결국은 성경이다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모르고 믿는다면 바른 믿음이 아닐 것이다.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 크고 좋은 것에 자극이 되면 고민 없이 예배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병사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황금 어장인 군 선교, 결국은 성경이다. 성경을 읽게 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지키도록 하는 것, 신앙이 든든하게 서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중 세례가 필요하고, 모으는 행사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하여 굳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치우치지 않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또한 공교회를 말한다. 군에 있든지 사회에 있든지 그들은 모두 우리의 청년이다. 일정 시간 다른 공간에 있을 뿐이다. 여전히 청년이자 병사인 그들에게 마음을 쏟아야 한다. 공식 예배에 참석하도록 권면하고, 신앙의 성장이 있도록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군부대 교회에 협력자로 가라. 누군가를 파송하라. 청년이 있는 기간이라도 함께하며 양육할 기회를 만들어라. 정기적으로 면회를 가서라도 성경을 가르쳐라. 온라인 성경 강의나 성경 통독방 등 다양하게 시도해보라.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비난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미 그보다 더 열심히, 더 치밀하게 하는 이단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열한 황금 어장의 전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교회에서 청년들을 보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긴장하자. 함께 생각을 모아서 방법을 찾고 진짜 복음의 황금 어장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 먼저 걷는 한 걸음이 뒤에 오는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시작하라! 지금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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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어장
군종병
부교역자
공교회
무한 경쟁의 군선교 ‘황금 어장’
by 김돈영
2020-06-04
떼창의 강렬함을 아는가“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익숙한 가사의 찬양이 흐른다. 그러나 화면에는 낯선 장면이 나온다. 체육관 크기의 예배당을 가득 채운 젊은 청년들이 반주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흔히 말하는 ‘떼창’이다. 실로암을 수천 명의 젊은이가 떼창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 가수들이 내한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바로 이 떼창이라고 한다. 그만큼 떼창은 열정적이고 듣는 이가 전율을 느끼도록 할 만큼 강렬하다. 그런 이유로 실로암 떼창은 한동안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다. 복음 전파를 위한 “황금 어장”, 젊은 청년들이 가득한 곳, 바로 군대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한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교회와 교단에서 그 일에 참여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2018년 한 해 동안 진중에서 세례를 받은 병사는 13만 명이 넘는다. 2017년 14만 명, 2016년 16만 명의 병사가 군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통로가 아닐까 생각한다.그런데 수치를 보면서 뭔가 의문이 생긴다. 해마다 많은 청년이 세례를 받고 있는데, 왜 지역 교회에는 청년들이 줄고 있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길어야 2년 정도면 전역하고 사회로 돌아온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매월 세례받은 청년들이 제대한다. 그들이 지역에 있는 교회로 나간다면 청년은 점점 많아져야 정상일 것이다.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세례만 받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교육은 당연하다. 또한 믿음이 흔들릴 때 옆에서 붙잡아주고 이끌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한 사람의 성도로 신앙의 안정을 찾으려면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군대에서는 어떠한가? 누구를 양육할 것인가?병사들이 다니는 군 교회는 현재 1천여 개 가량 된다. 대부분의 군 교회는 민간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충분한 재정의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지출은 있지만, 수입은 후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함께 사역할 사역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담임 목사와 그 가족이 거의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의 종교 활동 시간은 정해져 있다. 주일 오전 예배를 위해 함께 왔다가 함께 복귀한다. 그 말은 훈련소에서 세례받은 초신자부터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함께 왔다가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일 예배 전후의 짧은 시간을 활용하여 초신자의 신앙 상담에서부터 성경 공부, 제자 양육, 리더 교육 등을 진행해야 한다. 지역 교회에서 각 부서의 사역자가 여러 날 동안 진행해야 할 일을 단 하루에 그것도 한두 시간 안에 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능해 보이는가? 결국은 별도로 상담하거나 양육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신병이나 초신자의 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다른 병사들도 양육해야 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의 단면을 말해주는 듯 입대 전에 청년회, 선교 단체, 찬양팀 등에서 열심히 활동했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조차 참석하지 않는 병사들을 자주 만난다.교회에 가라고 말하지 못한다“오늘은 위문 행사를 왔으니 특별한 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활동 시간에 교회로 가도록”오래전에 전역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안내 방송을 기억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병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맛있는 간식과 좋은 볼거리를 준비하고 병사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볼거리와 간식에 앞서 짧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등록시키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행사의 실효성과 평가는 차치하자. 왜냐면 지금은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이 종교 활동으로 특정한 곳에 가라고 강요할 수 없다. 대대장이 교회 다니고 있다고 해서 교회 나가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활관(내무반)에서도 전도 활동을 할 수 없다. 보통 교회, 성당, 법당으로 나누어지던 종교 활동에 ‘무교’라는 그룹이 더 생겼다. 그래서 무교인 사람에게 다른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예배하도록 권면하고 잡아주고 끌어주는 것이 힘들어졌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예배보다 좋은 것을 찾아‘군대스리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축구는 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강의를 위해 부대에 들어가던 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토요일인데 축구장에 사람이 없다. 농구 코트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병사들 대부분이 생활관에 있다는 것이다. 금요일이면 모든 일과를 마치고 이틀간 휴식에 들어가는데 대부분 실내에 있는 편의 시설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코인 노래방이나 당구장, 사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으로 불리는 PC방 등이 마련되어 있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개인 휴대 전화를 소지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고스란히 예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배 참석 인원이 꾸준하게 줄고 있다. 휴대 전화를 소지하면서부터는 10~20퍼센트, 많게는 절반가량이 더 줄었다고 한다. 예배에 참석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무언의 압력으로 예배에 참석했던 청년들이 누구의 간섭도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황금 어장은 우리만의 몫인가?병영 생활의 많은 변화로 인해 양육하는 것은 물론 예배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황금 어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있는 이단들이다.어느 부대에서 만난 병사는 신병인데도 모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공식 예배뿐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신앙 상담과 성경 공부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목회자의 눈에는 이보다 기특한 병사는 없을 것이다. 차기 군종병 1순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입대하기 전 1년 동안 성경을 공부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신학교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왔다. 군종병을 시켜달라고 한다. 생활관에서 심방하거나, 전도하는 등 종교활동이 가능한 사람은 유일하게 군종병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면회를 통하여 포교 활동을 한다. 면회를 오면서 풍성한 먹거리를 가지고 온다. 친하게 지내는 병사를 불러서 함께 면회한다. 몇 번 지나면 이제는 여자 청년을 데리고 온다. 면회 나온 병사와 여자 청년이 자연스럽게 연락하도록 한다. 전역할 때까지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도록 한다. 그리고 전역하면 그 병사는 그가 속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간다. 포교 활동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 청년들에게도 노출되어 있다. 아직도 ‘황금 어장’이라고 생각하는가?결론적으로 말하면 병사들을 향하여, 군대를 향하여 생각하는 복음 전파의 황금 어장은 단지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 천주교와 불교를 비롯하여 무교와 이단까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막연하게 황금 어장으로 생각하는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고기 잡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로운 도구를 준비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의자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로암 떼창을 보면서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만일 지금까지 그랬더라도 이제부터는 바꾸어야 한다. 머리에 냉수를 끼얹고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만 남게 될 것이다. 황금 어장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아니 모두 빼앗긴 뒤 이제는 남의 것이 된 황금 어장을 바라보며 ‘그땐 그랬지…’하는 통탄의 시간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황금 어장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살펴보자. 최소한 그물을 던지더라도 알고서 던지자. 그런 노력이라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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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진중세례식
군종병
신병교육
종교활동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게 하라!
by Brian Howard
2020-03-12
교회 개척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 교회가 다른 교회를 개척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교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일부 교회들은 부목사 중 한 명을 내보내 곧장 분립 개척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개척자에게 적지 않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많은 경우 교회 개척자 본인의 준비가 부족하여 분립 개척이 실패로 이어진다. 이는 모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의 부정적인 인식만을 남겨두게 된다. 부목사를 내보내 분립 개척을 시도하는 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추천할 만한 첫 단계가 아니다. 이 일은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하룻밤 사이에 변모할 수는 없기에, 서두르지 마라. 아래에서 소개하는 단계를 장기간에 걸쳐 따라가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교회 개척을 통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이다.[1년 차]교회의 선교 전략과 철학을 평가하고 다시 정의하라세계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많은가 하면 어떤 교회는 지역 선교를 잘 감당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전인적(holistic)인 3단계 모본에 근거하여 선교 전략을 수립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는 선교의 국면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지역 선교: 예루살렘 - 우리 교회가 속한 도시를 섬기는 사역, 긍휼 사역, 지역 전도- 국내 선교: 유대와 사마리아 - 국내 교회 개척- 세계 선교: 땅 끝까지 - 전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이 세 국면 여기저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많지만, 이들 모두를 하나의 전체론적인 전략으로 통합한 교회는 거의 없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는 선교의 이 세 국면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개척이 선교에 필요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 믿기지 않는가? 팀 켈러(Tim Keller) 역시 교회 개척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전략임을 주장한 바 있다. 시간을 들여 당신 교회의 선교 전략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세 국면을 모두 반영하도록 재조정하라.일 년 예산 중 일부를 교회 개척을 위해 책정하라선교에 있어 이 세 가지를 모두 강조하기로 했다면, 다음 단계는 각 국면에 자원을 할당하는 일이다. 전체 선교를 위한 재정은 얼마인가? 그리고 각 국면 당 어느 정도씩 재정을 배정해야 할 것인가? 내가 소전 네트워크(Sojourn Network) 대표로 사역할 당시, 우리가 돕던 개척 교회들에게 전체 예산의 15퍼센트를 선교비로 배정하고 각 국면당 5퍼센트씩을 할당하라고 주문했다. 어떤 식으로 재정을 배정하든, 이 일을 위해 상당한 재정을 책정하지 않고는 결코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년 차에 이 목표 두 개를 달성했다면 상당한 진보를 이룬 셈이다. 이 두 단계를 마쳤다면 이제 2년 차에서 5년 차 목표로 옮겨가라.[2년 차 ~ 5년 차]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 개척자를 후원하라새로 마련된 교회 개척 재정으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현 단계에서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교회 개척자들을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후원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마 아래와 같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교회가 합심하여 교회 개척자 한 명을 전적으로 후원- 교회 개척자들을 후원하는 연합이나 단체에 참여이 일을 교회 개척 뮤추얼 펀드(mutual fund)로 생각하라. 교회 개척자를 당신 교회 혼자 돕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도와라.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이들을 입양하고 지원하라3단계 전략과 함께, 나는 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사역자를 찾아 관계를 맺어가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 단계는 3단계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아래는 가능한 방법들이다.- 후원할 교회 개척자를 고른다- 그에게 재정 지원을 제안한다- 그와 관계를 형성해간다- 교회 개척자 및 그의 가족을 축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지원할 수 있다) - 당신의 교회에서 그 교회 개척자가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설교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 개척 교회는 당신 교회의 선교 헌신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회중이 늘 알게 하라당신의 교회 안에서 교회 개척 문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라교회 개척을 해보지 않았다면, 일 년 안에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변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도 중 대부분이 교회 개척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를 바꾸고 교회 개척 문화를 세우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되도록 시간을 주라.- 재정 지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을 이야기할 때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여기서 제시한 단계들을 약 오 년 정도에 걸쳐 충실히 이행했다면, 교회 개척이 전체 선교 전략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고, 교회 개척자들에 대한 후원을 시작했을 것이다. 교회 개척 자체에 대해 더 배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하나 이상의 교회 개척을 돕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개척에 대한 당신의 헌신을 이제 수년간 지켜보았다. 이제 당신은 6년 차,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옮겨갈 준비가 된 것이다. [6년 차, 그리고 그 이후]미래의 교회 개척자와 함께 교회 개척 연수를 하라 - 교회 개척자 한 명을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훈련 시킨 후 파송하라.- 교회 개척자는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나올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올 수도 있다.3년에서 5년 후에는 그 개척 교회로 보내어 섬길 수 있도록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보내는 교회로서의 문화를 세워가라.- 이러한 목적의식을 갖고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건전한 연합체와 더불어 평가, 훈련, 코칭을 함께 해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Become a Church-Planting Church번역: 이정훈
선교전략
전략
철학
재정
후원
훈련
지원
교회개척
선교의 전략을 바꾼 세 단어
by Darren Carlson ㆍ Elliot Clark
2020-01-30
1974년 서방의 거의 모든 선교 단체가 채택한 전략은 다음 세 개의 그리스 단어 때문에 바뀌었다. 그것은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이다. 이 단어는 특히 마태복음 24장 14절과 28장 19절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74년 로잔 회의(Lausanne Conference)에서 랄프 윈터(Ralph Winter)와 도날드 맥가번(Donald MacGavern)은 “숨겨진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윈터는 언어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선교 사역에서 제외된 약 만 육천 개의 숨겨진 민족이(나중에 그는 만 칠천으로 바꾸었다)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세계를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민족 그룹”(people group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천 개의 독특한 민족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라며 참석자들의 생각에 도전장에 내밀었다. 랄프는 이렇게 썼다.예수님이 “모든 민족”이라는 구절을 썼을 때 그는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단어 (그리스어 ethne)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류를 구성하는 확장된 가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대 선교 운동이 변화되었다. 최근에 존 파이퍼(John Piper)와 데이비드 플래트 (David Platt)와 같은 사람들의 사역은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시한다.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ethnolinguistic people)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이제는 복음주의 글로벌 선교 사업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인 이해와 함께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모든 민족이 다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러한 기대는 다른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을 다 구분하고 그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여 “임무를 완수하라”는 독특한 선교 명령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하는 곳이거나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각각의 민족에게 언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까지 정의하도록 했다. 크리스챠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최근 기사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식의 선교 접근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 대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에 전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을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쓰는 개별 민족”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단순한 데 있다. 그건 성경 신학적 정의보다 현대 인류학적 정의를 더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50년 전, 맥가번과 윈터와 같은 선교 학자들은 민족(ethne)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전히 지리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해로만 접근했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와서 사용하게 된 사회과학적 정의로 성경의 단어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민족을 지리적, 문화적, 또는 언어적 범주의 국가들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민족(ethne)을 20세기에 들어서나 도입한 국가 또는 민족 그룹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1세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추종자들은 주로 성경에 언급된 민족, 즉 성경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이방 나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인들과 다른 동시대인들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이고 지정학적인 구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민족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범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은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그래서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비유대민족이었다(엡 2:11-12; 막 11:17절에 나오는 만민(pasin tois ethne)은 비 유대민족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언어학적 또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인구 통계를 놓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구절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이 구절은 구약이 말하는 이방인에 대한 범주와 기대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사 66:18-19참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사역 내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마 8:11). 그의 말을 들었던 일부 유대인에게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약속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도 나중에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 모든 나라들(갈 3:8의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창 12:3도 참조)이 그를 통해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성취되었다.그러므로 모든 나라에 관한 예수의 약속(마 24:14)과 사명(마 28:19)에 대한 마태복음 기록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족에 관해서는 예언서, 특히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구약이 가지고 있던 모든 민족에 관한 것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최초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은 성경 신학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창세기 10장에서 11장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와 오순절에 등장한 민족들 사이에서 문학적 연관성을 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행 2:1-11).오순절 사건에 관한 누가의 기록은 모든 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천하각국”(pantos ethnous)에서 온 유대인들로 예루살렘이 넘쳤다고 말한다(행 2:5). 이러한 보편적인 언어(다른 사람도 아닌 주의 깊은 의사였던 누가가 이런 용어를 썼다는 점은 중요하다)는 용어에 대한 현대적 정의와 성경 기록의 차이를 강조한다. 우리는 오순절 그날 예루살렘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하게 글을 쓰지만, 반드시 사실 묘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장하여 기록할 수 있다. 바울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했다(골 1:23). 그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떻게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이 복음을 듣도록 하셨는지에 대하여 썼다(딤후 4:17).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해석하면서 과학적이고 세밀하게 그리고 인류학적인 정의만 가지고 접근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나 사도들이 모든 민족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이 당시에 존재하거나, 그 후에 존재하게 될 고유의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증거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모든 민족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현재 존재하는 고유한 언어를 쓰는 민족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민족은 복음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멸종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통용되는 모든 민족의 정의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충족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생각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도 하기 전에 죽은 모든 아기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이야말로 미전도 종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미전도 종족을 대표하는 아기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선포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계 14:6). 그런 주장은 선교에 대한 동기 부여를 약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말하는 모든 민족은 이 시대가 끝날 때 존재하는 모든 민족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비약적인 주장으로 보인다.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1세기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그때는 없었는데 지금 새로게 생긴 새로운 언어는 어떤가?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도 고려해야 하는가? 보좌 앞에서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를 동시에 다 포함해야 하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그룹은 한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두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복잡한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모든 선교사와 연구 그룹이 세계에 존재하는 민족을 정의하고 계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성서 신학적으로 모든 민족을 바라보면 바로 해결될 수 있다.선교적으로 중요하다열방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이 선포된 적 없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접 선교사로 가거나 아니면 보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가? 그렇다! 지리적 또는 민족 언어 범주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 당연하다! 사도들 자신도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 국가(스페인) 또는 민족 그룹(스구디아)을 고려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민족 그룹에 중점을 두는 과정에서 우리는 선교 방법을 수정하느라 선교 사명 자체를 희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복음전파, 세례, 교육, 교회 설립 및 지도자 양성)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사명을 마무리하는 것(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마태복음 24장이 마태복음 28장을 잡아먹어 버렸다.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략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선교에 필요한 자재 및 인력, 자원이 빠져나갔다. 복음이 일단 “도달한” 국가에는 신학교 하나 세우고는 그냥 방치했다. 가장 힘들고 많은 손이 가는 일, 유능한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은 그냥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선교 연구는 이제 민족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게 되었다. 선교 보고는 이제 전도를 강조하고 우리의 방법은 속도에만 중점을 둔다. 빠르게 교회를 증식하는 접근 방식이 발전함으로 서구의 선교 방식을 장악했고 동시에 세계 교회를 약화시켰다.이 모든 것이 다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슬픈 것은 복음이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선교 지역은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 그 지역에 사는 민족이 다시 미전도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교 사명을 완수하는 데 충실했는가? 핵심은 무엇인가?당연히 우리는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야 한다. 맥가번과 윈터가 제기했던 선교에 대한 수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 미전도 종족을 위해 삶과 사역을 다 바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또한 인류학을 선교 사역과 연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학문은 사탄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그러나 핵심은 우리가 세상과 세상 속 민족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선교 목표를 정해야지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선교 노력을 하고, 선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복음을 들어 본 적 없는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오래 머무르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민족으로 분류하고,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선교를 정의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예수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어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우리를 보내신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3 Words That Changed Missions Strategy—and Why We Might Be Wrong번역: 무제
선교전략
윈터
미전도
맥가번
핵심
이방인
아브라함
언약
사명
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과 능력
by Trevin Wax
2020-01-16
나는 마크 갈리의 “The Elusive Presence” 시리즈에 많은 칼럼을 쓸 계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선교적 개념은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통찰력 있는 복음주의 관찰자인 마크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쁘다. 나는 복음주의 내에 문제점을 기술한 마크의 글이 와닿았지만, 그의 선교적 교회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리의 접근에는 로드 드레허의 “Benedict option”와 동일한 자세의 문제점이 보인다는 것이다.잘못된 태도Benedict option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드레허 제안의 강점은 다가오는 문화적 압박을 견디기 위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값진 생명의 무언가를 세상에 돌려줄 수 있도록 하자는데 있다. 문화 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한 드레허의 말은 옳다. 만약 전장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고 영양실조의 상태에 있어서 세상에 보여줄 복음의 문화가 없다면 말이다.갈리의 선교적 운동에 대한 비판의 핵심에서 귀 기울여야 하는 유사한 경고를 발견한다. 텅 비어있고 열정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 채로 진행하는 행동주의적 믿음의 접근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드레허의 Benedict option 과 갈리의 “elusive presence”가 제안하는 자세는 주로 방어적이다. 그리고 내가 신약 성경에서 본 자세는 그렇지 않다. 내가 걱정하는 두 자세는 우리를 미션 보다는 유지를 우선시하고, 바깥 대신에 안으로 향하게 한다. 문제점은 태도이다.선교적 문제점?갈리가 교회의 선교 개념에서 본 주된 문제점은 교회를 다른 모든 것의 마지막 목표로 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지나치게 업무에 시달리게 하며 너무 많은 일 - 복음전도, 선교,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노력으로 지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내면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교회의 선교적 개념이 필요하다면?밖으로 집중된 선교적 충동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필요를 깨닫고,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알게 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는 내면의 절망감을 일으킨다면?땅끝까지 예수의 이름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분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소망하는 선교사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는다면?선교와 예배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가?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그분의 주권에 순복하도록 초청하는가? 우리의 목적은 창세기에서 주어진 문화적 명령과 혼합된 지상명령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창조주를 알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해야 한다. 믿음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선교를 지속시키고, 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처음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부른 마크의 생각은 옳았지만, 현재 문제점에 선교적 교회 개념을 비난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가 권하는 자세는 우리를 안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시고, 이끄시고, 구속하시고, 심판하시고, 찾으시고,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심으로 창조물을 다시 회복시키시기로 하셨다.정체성과 기능선교적 교회는 우리가 누구인가로 정의되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 정의된다. ‘정체성’ 혹은 ‘기능’ 중 무엇이 먼저인가? 정체성과 기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능’인 도구와 ‘정체성’인 표현은 둘 다 존재하는데, 이는 레슬리 뉴비긴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식이자 도구라고 말한 이유이다.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체성이 과업보다 앞선다. 우리는 증거하는 일을 하기에 앞서 증인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에 앞서 그것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주셨다. 마치 왕위에 오른 사람과 같다. 왕이 되었지만 사람들을 통치하거나 판결을 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어진 정체성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에서 밖으로 나와 부르심을 이행해야 한다.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빛을 비추라고 하셨고 말 아래에 놓인 등불에 대해 경고하셨다. 우리의 정체성이(세상의 빛) 그것의 목적(비추라)과 묶여 있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비추기 위한(목적) 세상의 빛(정체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목표)만약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적 자기희생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두 가지의 유혹하나님을 위해 너무 바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교회에는 일로 바쁜 마르다는 많지만, 마리아가 소중히 생각한 “더 좋은 것”을 잊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인간의 마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끊임없는 유혹이다.우리는 내부에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한 유혹에 빠지면 더 이상 지상명령에 대한 의식이 없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정체성과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해 간다.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스스로를 보지 않는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어가는 것이다. 선교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선교는 예배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열병이 나은 즉시 섬겼던 베드로의 장모와 예수님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마을로 보내진 귀신들린 남자,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많은 비유를 잊지 말자.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올려다보며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이사야를 잊지 말자.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적 행위의 본질은 거룩, 자기희생의 사랑, 그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불같은 열정이다. 우리가 그의 사명에 동참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하나님은 교회를 선교의 도구와 표현으로 바라보시는데, 교회가 선교적 이해를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정체성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교회의 선교적 이해는 모든 민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의 기쁨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감동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신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복음주의의 문제를 유행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진단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원제: The Beauty and Power of a Missional Church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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