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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
by Brian Croft
2019-03-15
나는 침묵을 싫어했다. 외향적인 사람들과 같이 있기를 좋아했고, 나의 수다스러운 면이 본성이자 곧 본능이라고 여겨왔다. 특히 이러한 자질이 목회 사역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침묵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위기의 순간에 전문적인 상담을 받게 되면서, 내가 오랫동안 조용한 삶의 필요를 무시하며 살았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지금의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야 침묵의 필요성을 알게 된 셈이다.상담자는 내가 그동안 삶 속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몇 가지 우려되는 행동을 찾아냈다. 이 중에는 침묵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홀로 있는 상태를 회피하는 모습도 포함된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주로 내가 지배하곤 했는데, 상담자는 이런 형편없는 경청의 태도가 침묵하지 못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듣는 연습을 시작하라고 강하게 권고하였다. 이는 비록 내게 매우 힘든 과제였지만, 절실하게 필요했던 치유의 과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침묵의 참 유익을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1. 침묵은 영혼을 노출시킨다감정이 영혼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침묵은 영혼을 노출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상담으로 드러난 스스로의 흉측한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강력한 방식으로 나를 만나주셨고, 그 여정은 내 영혼에 평화를 안겨주었다. 침묵 안에서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함으로써 나는 그분의 은혜와 임재를 깊게 경험하였다.모두에게 조용한 사색이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는 침묵의 시간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조용함은 세속적 묵상의 형태가 아니라, 성경적 침묵이며 고독이어야 한다. 돈 휘트니(Don Whitney)는 침묵을 크리스천의 중요한 영적 훈련으로 여겼다. 고요할 때에 우리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은 예수님과의 교감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훈련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청교도 학자이자 오랫동안 목회를 이끈 조엘 비키(Joel Beeke)는 묵상의 이러한 특성을 잘 설명한다.“청교도 묵상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자극하고, 우리를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며,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의 마음을 결합시킨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묵상은 우리가 진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마음에 깊이 심고자 할 때에 행하는 고귀한 영적 훈련이다’라고 정의한다. 그가 말하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조용함 속에서 주기적으로 묵상한다(시 119:97). 그러므로 청교도 묵상은 소리를 반복하거나 마음을 비우거나 특별한 감각을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하여 생각하고 이해하는 영혼의 훈련이다.”2. 침묵은 거짓된 목소리에 직면하게 한다이 목소리는 생애 전체를 통해 대적이 우리 귀에 반복적으로 속삭이는 메시지이다. 이 소리는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메시지로서, 주로 크리스천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가혹하고도 모욕적인 거짓말이다. 이러한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보통 불안하고 불쾌하여 그 소리들을 회피하게 된다.나 역시 이러한 마음속 소리로 인해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의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수치스러운 목소리, 대적이 말하는 거짓된 목소리, 고통스러운 비난의 목소리는 모두 실패와 자기 혐오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 목소리는 내가 홀로 있을 때 더욱 크게 들렸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나는 침묵을 멀리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우울할 때 들려오는 이러한 음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많은 경우 영적 우울의 문제는 자아가 비난하는 소리를 들음에서 비롯된다. [중략] 당신이 생애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불안은 자아에게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포기한 채 자아의 책망을 그저 듣기만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파괴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대면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기쁜 소식은 침묵이 그 대면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침묵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 비난의 목소리에 맞서 스스로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나 역시 참된 침묵의 시간을 통해 내 자아가 주는 거짓된 책망을 마주했고, 더불어 주님이 주시는 의연함으로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3. 침묵은 경청하는 법을 가르쳐준다오랫동안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형편없는 경청자였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꽤 힘든 일이었다. 늘 듣고는 있었지만, 사실 내게 있어서 경청이란 듣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대답을 준비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듣는 법, 그냥 듣고 공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다행히도 침묵을 수용하면서부터 듣는 법을 서서히 배워가고 있다.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주변의 소리를 이제는 제법 듣고 또 이해하는 중이다. 그리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훈련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할 말을 찾으려고 몰두하지 마라. 그저 담담히 들으면서 공감하라. 그러면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공감은 물론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4. 침묵은 나의 도피처가 어디인지 알게 한다침묵을 위해 애쓸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소음에 얼마만큼 중독되어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전화, TV, 스마트폰 등의 소리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가 고통과 번민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즉, 그러한 매체들이 일상 속 도피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결국 나는 복잡한 문제나 시련 앞에서 하나님이 아닌 소음에 의지하고 있던 셈이다. 이는 고요한 시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을 중요한 깨달음이다.목회자는 늘 소음과 방해물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침묵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고요함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침묵은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에 대면하도록 만든 후, 복음이 영혼의 깊은 곳을 관통함으로써 치유가 일어나도록 일한다.고요한 시간으로 들어가라침묵에 대한 어느 책에서 나는 다음의 글귀를 발견했다.“침묵의 역할은 중요하다. 우리는 여가를 나태와 잡담으로 낭비하지 말고, 침묵의 시간으로 채울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의 성장을 존중하는 공동체는 고독의 시간을 분명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지닌 풍부한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침묵을 싫어했지만 점차로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고요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 가고 있다.예수님은 죄와 수치심, 죽음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고 인간이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나를 구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나는 하나님께 영원히 입양된 자녀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그로 인해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우리가 이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의 능력을 깊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목회자들도 여기 속하며, 대부분의 목회 기간 동안에 나도 그러했다. 침묵은 이러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놀라운 도구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시끄럽고 불안한 영혼을 치유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침묵이 필요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Every Pastor Needs Silenc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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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쉬운 설교
by Jeff Wiesner
2019-03-08
얼마 전에 동료 목사가 내게 라일(J. C. Ryle)의 저서 ‘단순하게 설교하라’(Simplicity in Preaching)를 권해 주었다. 라일의 글이 내 설교와 성도들에게 준 실질적인 혜택은 너무나도 크다. “설교를 단순하게 하지 않는 한, 성도들은 당신의 설교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본문을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데 드는 시간의 양에 비해 설교를 단순하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가? 나는 신실한 설교는 단순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본문의 요점을 명확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듣기에 쉬운 설교가 중요하다.본문의 요점을 드러내라해돈 로빈슨 박사(Dr. Haddon Robinson)는 “설교는 무작위로 터지는 폭탄이 아니라 단 한 알의 총알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본문에서 얻은 모든 생각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큰’ 생각을 단순하고, 명확하며, 간결한 형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주제가 곧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최근에 이것을 잘 실천한 어느 목회자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가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에 대항하는 열왕기상 18장을 주제로 설교했다. 그는 “참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여러분이 숭배하는 우상은 여러분을 좌절하게 할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십시오”라고 설교했다. 그는 많은 내용이 아니라 단 하나의 메시지만 전달했다. 당신은 설교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본문이 설교자 자신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앉아서 듣고 있는 성도들도 그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다. 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본문을 선택하고 나면, 그 내용을 반드시 완전하게 이해하라. 증명하기 원하는 내용, 가르치기 원하는 내용, 확고하게 하기 원하는 내용, 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가기를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라. 당신 자신이 안개 속에 있으면, 성도들은 흑암 가운데 있게 된다."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간단한 설교는 본문의 요점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드러냄으로써 시작된다.쉬운 언어를 사용하라본문의 큰 주제를 드러내는 일에 부가하여, 설교자는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함으로써,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또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첫째, ‘사전’적 단어의 사용을 피하라. 학술적 언어를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통의 언어로 바꾸라. 예를 들어 ‘속죄’(요일 2장)와 같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특별한 본문의 경우, 천천히 그 단어를 단순하게 정의하라. 그와 동시에 듣는 순간 이해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유념하라.둘째, 복잡하고 긴 문장을 피하라. 가능하다면, 쉼표 등과 같은 문장 부호들을 사용하지 말라. 라일은 “당신이 마치 천식이 있거나 숨이 짧은 사람인 것처럼 설교문을 작성하라”라고 충고한다. 짧은 문장은 성도들이 설교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오도록 이끌 것이다.셋째, 교만을 버리라. 지식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싶은 죄악된 갈망에 저항하라. 신실함보다 당신의 명석함에 더 의지하려는 교만과 망상에 저항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를 포함하여 설교가가 빠지기 쉬운 자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영리함과 세련됨을 피하라.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와 성도들의 영혼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영리함에 더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넷째, 성도들 사이로 들어가라. 수준 높은 성도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교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성도들의 언어로 설교하라. 그들과 시간을 보내라. 반복해서 말하지만, 당신의 설교 언어는 당신이 좋아하는 설교자, 교수 혹은 학자들의 언어보다는 교회 성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단순하고 상황에 맞게 작성된 설교는 자기 부인을 보여주며, 자신의 양떼를 향한 목자의 사랑과 유사하다. 그리스도를 높이라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롬 1:16), ‘십자가’(고전 1:18), ‘그리스도’(고전 1:24), 오직 이 세 가지만 묘사한다. 설교의 단순성 확보는 위의 목록에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의 단순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영혼에 유익한 단순한 설교의 목적은 늘 명백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고전 1:24)의 선포이다. 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단순함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설교의 경우 만큼은 단순함이야말로 예수님의 복음을 완전하고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단순한 설교를 실천할 때, 비로소 이를 듣는 모든 이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또한 당신의 설교가 아무리 단순하다 할지라도, 만약 그 내용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바르게 위치하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사람이 되며, 어떻게 행하라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즉, 당신의 설교는 쓸모없게 된다.”설교를 쉽게 해야 하는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더 잘 순종하고 성경을 더 잘 알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이러한 사항들은 물론 목회자가 추구해야 할 바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동떨어진 지식과 순종은 피곤한 도덕주의로 흐르게 된다. 그러한 설교는 라일이 지적하듯이, ‘쓸모없는’ 설교이다.반드시 기억하라. 설교의 첫 번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더 명확하게 보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설교는 곧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Pastor, Aim to Preach Simple Sermon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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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설교 준비: 설교는 복음으로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
by 김일승
2019-03-04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우면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일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매주 설교의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또한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매주 설교할 힘을 얻는 이유는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나 자신 또한 새로운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설교 준비의 과정 중에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고,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다.설교의 한계 극복을 위한 유학의 과정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는 매주 설교 준비가 정말 곤욕스러웠다. 첫 목회로 대형교회의 대학부를 맡아서 사역을 했다. 쉴 새 없는 사역으로 시간은 늘 부족했고, 본문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주석과 설교집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설교는 며칠 만에 준비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나름대로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유학을 떠났던 것도, 깊이 있는 성경 연구가 없는 얄팍한 설교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유학을 가서 성경을 권별로 연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성경 본문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찾고자 애를 썼다. 이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단어조차 처음 보듯 하나하나 질문하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이렇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데 약 10여 년이 걸렸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때라 수업과 도서관을 통해 좋은 자료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구속사적 설교의 계기이런 과정이 바로 필자가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자세히 연구할수록 성경은 복음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책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복음이라는 성경적인 렌즈를 끼지 않고 성경을 접근하면 지엽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왜곡하기가 쉽다. 유학의 기간 동안 성경 전체를 통합하는 구속사적 원리를 발견했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말씀을 기록하고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말씀 묵상과 적용의 은혜를 맛본 후의 개척무엇보다 말씀의 능력을 깊이 경험한 것은 연구한 말씀을 개인적으로 묵상하며 적용하면서였다. 유학을 시작한 이후 10년 동안 목회를 하지 않고 매일 말씀 연구 및 묵상을 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으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했다. 묵상했던 말씀을 삶에서 경험하는 일들이 기적처럼 자주 벌어졌다. 말씀이 나의 죄악을 드러내고, 은혜의 통로로 변화되는 일을 경험하자 말씀 묵상이 너무 벅차면서 동시에 영광스러웠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매일 크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10년을 보냈다.이런 과정 끝에 2014년에 하늘사랑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듣고 멀리서부터 찾아오신 분들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먼 곳에 있는 분들이 설교를 접하여 교회를 찾아오는,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경험이었다.설교 작성의 단계들주일 설교는 다른 설교보다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은 성도들이 듣기도 하고, 또한 다른 설교에 비해서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주일 설교는 성경의 한 책을 정해 전체 본문을 차례대로 강해하고 있기에 본문은 정해져 있다. 50분 정도를 기준으로, 하나의 주제를 3대지로 전할 수 있는 정도의 본문을 선택한다. 본문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주일 설교를 마친 밤에 다음 주 설교의 큰 틀을 생각해 놓고 한 주 내 본문을 고민한다. 큰 주제와 틀이 거의 정해져 있기에 주제와 관련한 예화나 자료를 찾는 데 수월하다.1) 개요와 단어 연구설교 작성의 첫 단계는 본문의 개요와 단어 연구이다. 강해 설교에서는 본문이 어떤 맥락에 위치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한글 번역과 원문을 비교하면서 다르게 번역되거나 구체적 설명이 필요한 단어들을 추려서 연구한다. 단어 연구는 성경프로그램 ‘바이블웍스’와 ‘바이블렉스’를 이용한다.2) 질문과 해석두 번째 단계는 본문의 중요 내용에 관한 질문을 하고 성경 내에서 그 질문을 해석하는 단계이다. 인물 중심의 내러티브 본문일 경우에는 행동의 동기, 감정, 죄악 등의 단서를 본문에서 찾기 위해 애쓴다. 또한 성경이 이를 본문에 기록한 목적을 찾으려 애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꼭 필요하기에 기록되었다는 전제를 가지고 모든 디테일의 합당한 이유를 찾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주석을 읽으며 필요한 도움을 받는다.3) 원리화 및 주제 정리세 번째 단계는 본문의 내용을 원리화하고,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 중 중심 주제(Big Idea)를 찾아서 그 주제를 중심으로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중심 주제를 잡았다면 이제 전환 질문(TQ: Transitional Question)을 만들어 이를 대답해 나가며 본문의 대지를 정한다. 주제의 핵심 문장은 설교 제목이 된다.예를 들어, 사무엘상 25:23-31 본문에서 중심 주제를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낸다’로 잡았다. 이때 전환 질문은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가?’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잡은 세 가지 대지는 ① 하나님의 심판을 믿게 합니다(삼상 25:23-26) ②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게 합니다(삼상 25:27-29) ③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게 합니다(삼상 25:30-31)이다. 첫 번째 대지는 다윗의 원수가 심판당할 것이라는 26절을 중심으로 잡았다. 두 번째 대지는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안에 담아 보호하실 것이라는 28-29절을 중심으로 잡았다. 세 번째 대지는 다윗이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30절을 중심으로 잡았다. 아비가일의 말을 담은 이 설교의 제목은 ‘지혜가 가져오는 변화’이다.4) 구속사적 해석네 번째 단계는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단계이다. 앞서 예로 든 본문인 사무엘상 25장에서 아비가일을 구속사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자칫 하나님의 지혜로운 말을 해줄 좋은 배우자를 만나거나 그러한 사람이 되라고 잘못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통해 성도가 경험하는 놀라운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복음적으로 풀지 못하면 윤리적이거나 교훈적인 설교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5) 청중에 대한 적용다섯 번째 단계는 본문을 말씀을 듣는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성경 ‘공부’일 뿐이다. 설교의 꽃은 성도가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설교 작성에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설교 작성을 위해서는 네 가지 컴퓨터 프로그램을 기본적으로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신학대학원 시절부터 20여 년째 꾸준히 사용하고 있어서 이 프로그램들의 도움 없이는 설교 작성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첫 번째는 ‘베들레헴’ 성경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한글과 영어 성경들을 검색하고 찾는 데 유용하다. 두 번째는 ‘바이블웍스’(Bibleworks) 프로그램이다. 성경의 원어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데, 원어 사전을 읽고, 단어를 찾아보는 등 원어적 기초를 놓는 데 유용하다. 세 번째는 ‘바이블렉스’ 프로그램이다. 성경 원어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잘 정리해 놓은 프로그램이며 한글로 되어 있어서 성경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연구할 때 유용하다. 마지막으로는 ‘로고스’(Logos) 프로그램으로 이는 주석을 모아놓은 서재의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성경 권별로 도서관에 비치된 거의 대부분의 주석을 빌려서 각 주석의 유용성을 평가하는 주석 평가(commentary survey)를 개인적으로 작성했다. 주석이 워낙 많기에 성경 권별로 가장 유용한 주석들만 집중적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이런 평가 작업을 하면서 필요한 주석들을 로고스에 모았다. 지금도 그때 정리해 놓은 주석들을 중심으로 읽으며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예화 선택예화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필자 자신이 경험한 사건이나 깨달은 바를 중심으로 전하려고 한다.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그 본문이나 주제와 관련하여 경험했던 일들이 생각나는 경우들이 자주 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오랫동안 기록해 왔던 말씀 묵상 중에 특별히 개인적으로 적용했던 부분들을 읽어보면서 그 주제와 관련한 예화를 찾는다. 이미 알려진 예화나 다른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예화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설교 자료 정리설교 관련 자료들은 ‘에버노트’(Evernote) 안에 40여 개 정도의 노트북 카테고리를 만들어 모아 놓는다. 에버노트는 컴퓨터마다 동기화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마트폰 등 모바일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들도 클리핑 기능을 통해 주제별로 분류하여 집어넣을 수가 있어 편리하며, 사진, PDF, 인터넷 페이징 등 축적된 많은 자료들을 검색 한 번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장점이다. 설교를 하며 깨달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설교는 설교자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만큼만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복음 설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빠진 설교는 기복적이고 윤리적이며 율법적인 종교인을 만들어 낼 뿐이다. 복음을 계속 선포할 때만 성도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 무한 감사하다.출처: 월간목회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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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목회자여, 너무 빨리 저술하지 마라
by Derek Brown
2019-02-26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서른아홉 살의 젊은 목회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술한 작품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출판되지 않은 박사 논문, ‘당신의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How to Pray for Your Pastor)이라는 제목이 달린 작은 책자, 그리고 ‘성숙한 남성이 가져야 할 특성과 소명’(Strong and Courageous: The Character and Calling of Mature Manhood)이라는 최근 저서가 전부이다. 물론 다른 저술에 대한 구상도 가지고 있고, 가능하다면 나중에 더 출판하여 교회를 섬기고 싶은 바람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와 세 아이들, 사랑하는 교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양가의 부모님과 형제들에게도 시간을 내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언제인가 저술에 관한 주제로 팀 켈러가 젊은 목회자들에게 조언했던 내용을 통해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목회자가 책을 저술하는 일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충분한 연구와 가르침과 목회 경력을 쌓은 후에 천천히 시도하는 편이 낫다고 설명했다. 목회 여정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저술에 시간을 쏟게 되면, 나중에 성숙한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들을 처음부터 잘 갖추지 못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성경의 모델이런 문제에 대하여 나는 다름 아닌 성경에서, 특별히 누가복음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이 복음서의 서론은 목회자가 저술 사역을 할 때 꼭 유념할 만한 모델을 제시한다.누가는 복음서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힐 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눅 1:3) 후에 펜을 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주제를 연구했고,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다른 이들의 작업까지 검토한 후에 저술에 착수했다.혹 그런 작업이라면 누가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은 별로 없었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선택해서 저술했고, 인류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건을 다루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저술을 마치고 출판해야 하지 않았을까?따라서 우리는 그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세상이 알아야 할 소식이 여기에 있다!”라며 책을 광고하는 모습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는 그런 조급함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책을 즉각적으로 출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거나 좋은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저 준비하고, 연구하고, 저술했을 뿐이다.교회에 어떤 유익을 끼치기 위해 저술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지혜가 거기에 있다. 누가는 자신이 기록하는 이야기가 역사상 전례가 없을 만큼 긴급하게 알려져야 하는 메시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작업했다.주제에 관한 전문성우리에게 어떤 아이디어와 노트북이 있다고 해서 책을 쓸 수 있는 자격이 갖춰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누가 역시 저술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고 예루살렘 근처에 살았지만, 곧바로 책을 쓸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그는 몇몇 중요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먼저 그의 곁에는 동역자인 바울이 있었다. 아마도 이 관계를 통해서 누가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신뢰성 있는 정보를 상당량 입수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서 구약성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연장자이며 지혜로웠던 선배 크리스천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지식이 저술 작업에 매우 유익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또한 누가는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를 연구하는 일에 능숙했다. 모든 연구 활동이 저술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올바른 자료를 수집하고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일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주의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서재를 한가득 채울 만큼의 자료를 모으고는 정작 그 자료를 어떻게 선별하여 주제 연구에 사용해야 할지는 모를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연구하는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누가의 경우에는 이 연구 능력에서 더 나아가 성경의 진리에도 충실했다. 만일 어느 목회자가 성경의 신뢰성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또는 대속의 완결성이나 이신칭의의 필요성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저술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칠게 반대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어떤 신앙의 내용에 관해서도 고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말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책을 쓰거나 목회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가르침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그 두 가지 내용에 대하여 저술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목회적 관심에 따른 동기우리는 또한 누가가 단지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오빌로의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 저술을 결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3-4).분명히 누가는 동료 크리스천의 신앙에 유익을 끼치기 원했을 것이고, 이에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소재를 그의 복음서에 보충하였다. 비록 그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저술은 진정한 목회적 관심에 따른 동기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나는 목회적 관심이 결여된 기독교 저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전문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가장 우선적인 저술 동기는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 섬김이 다른 사역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든, 혹은 일반 성도에게 교훈하며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일이든, 아니면 비신자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변증하는 작업이든, 그와 관련한 모든 저술 동기는 목회적이어야 한다.그렇다고 나는 교회에서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을 집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독자들의 신앙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저술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저술 동기가 반질거리는 책 표지에 새겨져 있는 자기 이름을 보려는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런 책으로는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신앙적인 소득도 없이 자기 자랑에서나 싹트는 죽은 열매만을 거두게 될 것이다.친밀한 관계를 위한 내용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같이, 누가의 글도 개인적인 편지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보라고 맡겨 주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저술해야 한다. 또한 그 저술은 우리가 감당하는 목회 사역에 관심을 집중할 때 참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내가 책을 저술하기 위해 펜을 드는 일과 (죄의 문제나 신학적 질문으로 씨름하는) 교회의 지체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써야 하는 일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를 놓고 고민할 때, 저술 작업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기란 어렵다. 물론 지금도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생각하며, 연구하지만, 그 모든 절차는 내가 섬기는 교회를 즉각적으로 돌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또한 나는 성경 공부를 통해 얻은 교훈들과 그와 관련한 설교문들, 그리고 상담 노트와 잘 정리해 놓은 목회 일지와 더불어 앞서 언급한 유형의 이메일도 잘 보관해 둔다. 언제 유익한 저술 자료로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나에게 맡겨진 주된 사역은 내가 목양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속도를 늦추라새로운 신학 작품과 성경 주석, 그리고 신앙 서적을 출간하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사역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출판되는 책을 통해 들려오는 새로운 논의는 독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그동안 묻혀 있던 주제에 관한 대화를 활발하게 불러일으키며, 다른 방법으로는 접촉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어떤 목회자가 저술을 해야 하는지 또는 목회자가 몇 권 정도의 책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일찍부터 저술 사역을 시작한 존 파이퍼나 케빈 드영과 같은 목회자들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도 지니고 있다.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목회자들이 좀 더 속도를 늦추어야 하고, 또한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가장 충실한 작품은 뒤늦게야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성숙한 삶과 신앙적인 지혜, 정기적인 설교와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제, 그리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여러 가지 놀이를 통해—만약 그런 요소들이 없었다면 쓰지 못하였을—작품을 탄생시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훨씬 더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그 유익이 어떠한지는, 데오빌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e Patient, Young Pastor. Your Best Writing Is Later.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성경의모델
목회적관심
친밀한관계
속도를늦추라
저술동기
근본적인교리
행복한 목사
by C.J. Mahaney
2019-02-22
목자의 길을 걸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종종 극심한 좌절감을 안겨준다. 아마 목회 분야에 경험이 많은 목사들은 이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설교 준비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피하거나 미룰 수 없고, 또한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과업도 아니다. 여러 시간, 혹은 여러 날을 묵상과 원고 작성에 쏟아붓지만, 마감한 원고를 검수할 때에는 종종 글이 미처 채워지지 않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더욱이 온몸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키는 이 작업을 당장 다음 주부터, 그것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긴장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긴다.말씀을 전하는 현장에서는 어떠한가? 설교 중 느끼는 적막한 공기는 그날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나 담소를 나눌 때에도 설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격려해 주었으면 하는 아내마저도 “오늘 설교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설교 이외에 신앙 상담, 제자 훈련 등의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목사를 낙담케 하는 예는 무수히 많다. 이처럼 반복적이며 교인들의 시선에 매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직무의 성격을 고려할 때, 목사들이 쉽게 지치고 낙담하는 현상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그러나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회의 사명을 기쁨으로 수행하기를 바라고 또 요구하신다. 베드로가 목회자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라고 강조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벧전 5:2).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회 사역을 이룰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즐겁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행복한 목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당신은 행복한 목사인가? 만일 스스로가 지치고 낙담한 목사라는 생각이 든다면, 즐거운 마음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이 용서받은 사람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를 아는 지식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쉽게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은 오직 자신과 성도들의 죄만 인식하도록 당신을 이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견지하는 자세는 무척 중요한다. 이를 영적 훈련의 우선 순위로 삼으라. 또한 매일의 훈련이 되게 하라.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라(고전 2:2). 하나님이 구주의 인격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가장 빠른 기쁨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롬 5:11). 만약 당신이 이를 잊어버린다면,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없다. 둘째, 당신이 섬기고 있는 분야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확하게 보라. 성경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을 확인하는 두 가지의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이다(고전 12:4-11, 27-31; 갈 5:22-23; 엡 4:11-16; 벧전 4:10-11). 먼저 성경에서 이 목록을 찾아 주의 깊게 읽으라. 그런 다음, 눈을 들어 당신의 사역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보는 곳곳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발견들을 메모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며, 이를 성도들과 공유하라. 문제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당신이 그 역사하심을 인지하는가의 여부이다. 만약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시 모인다는 사실에 감사하라.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중략] 그들은 이내 가인처럼 자신의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성도들은 이번 주일에도, 그리고 또 다음 주일에도 모일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를 기억할 때, 당신은 점점 더 즐거운 목사가 될 수 있다. 목회는 쉬운 길이 아니다. 어느 목사이든 그 길에서 기쁨 없는 섬김의 강력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유혹을 뚜렷하게 분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기억하라. 우리는 기쁨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복한 목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appy Pastors 번역: 김장복 (개혁된실천사)
목회
난관
기쁨회복
용서받은사람
하나님의역사
감사
찰스스펄전
기쁨없는섬김
강력한유혹
행복한목사
긍휼의 소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
2019-02-18
누군가를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탈진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진심 어린 긍휼은 이내 바닥을 보이고 만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돕다가 결국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긍휼의 소진 (Compassion Burnout)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 상담가, 교회 리더가 어떻게 탈진에 이르는지를 알고 있다. 이미 주변에서 목격했거나 스스로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역자는 대개 높은 이상, 폭넓은 훈련, 긍휼이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사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긴 근무 시간을 버티고 감사하다는 반응도 얻지 못한 채 부족한 사례를 수령하면서 여러 해를 보내고 나면,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일에 대한 동기도 사라지고 긍정적인 결과도 보지 못하면, 이내 좌절이 찾아오고 좌절은 곧 무관심으로 이어진다.연구자들은 타인을 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네 단계로 진행되는 탈진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바로 열정, 침체, 좌절, 무관심이다.솔직히 말해, 나는 목회 사역을 하며 그 네 단계를 하루만에 다 겪은 적도 있다. 아침 7시에 사역을 시작할 때는 긍휼로 충만했다가, 점심 때가 되면 지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가며, 오후 회의 시간에는 좌절을 경험하다가, 집에 오면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만다.‘각성’(disillusionment)은 탈진을 묘사하는 임상 용어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사역을 하겠다는 비전을 갖지만, 그것이 실현되기도 전에 각성에 이른다. 그 비전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나는 사역의 갱신을 위한 깊고 신선한 자원이 다름 아닌 오래된—그러나 과소평가되어 온—기독교의 한 가르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란 곧 타인을 위한 긍휼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맛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긍휼은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구원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수행하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역의 필수 덕목이기 때문이다.긍휼을 찾아서그렇다면, 긍휼의 의미는 무엇일까?우리가 쓰는 ‘긍휼’(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파티’(pati)와 ‘쿰’(c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두 단어가 결합되면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긍휼’(Compassion: A Reflection on the Christian Life)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긍휼은 우리에게 아픔이 있는 곳으로 가, 고통의 장소로 들어가서, 단절과 두려움과 혼란과 고뇌를 나누라고 요청한다. 긍휼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신음하도록, 외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외로워하도록, 우는 사람과 함께 울도록 도전한다. 긍휼은 약한 자와 함께 약해지도록, 상처에 노출된 사람과 함께 상처에 노출되도록, 힘이 없는 사람과 함께 힘이 없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인간다운 상태에 처하도록 만든다.”긍휼은 흔히 접하는 단어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목이며, 사역을 위한 메타포가 된다.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이렇게 설명했다.“긍휼을 목회 사역의 핵심으로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긍휼은 누군가를 돌보는 사역을 구체화한다. 이때 긍휼은 그 사역의 근거를 하나님의 존재에 깊이 두어,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으로 가지고 타인을 돌보게 한다.”우리는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일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긍휼을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긍휼의 소진을 경험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유한하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긍휼은 감소하는 자원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으로 시선을 돌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만이 무한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긍휼의 주님“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번역본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긍휼’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50회에서 80회 가량 사용되었다.역사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차원의 긍휼이 자주 묘사된다(왕하 13:23). 시편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아버지와 같은 긍휼을 품으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한다(시편 103편). 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을 약속한다(사 54:7).또한 복음서로 가면, 긍휼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긍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돌아보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마 9:36; 14:14; 15:32). 그분의 치유 사역은 망가지고 약하고 빈궁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긍휼로부터 흘러나온다(마 20:34).예수님이 하신 비유들 중에 가장 사랑받는 두 가지 비유가 바로 긍휼과 깊이 관련된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긍휼을 갖고 행동하기를 권면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3). 또한 탕자는 긍휼로 충만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끝으로 서신서들은 주님의 긍휼에 거듭 호소하고(롬 9:15; 고후 1:3; 약 5:11),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교훈한다(엡 4:32; 빌 2:1; 골 3:12; 벧전 3:8).결국 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을 거쳐 그리스도와 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인내와 사랑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분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래의 내용은 소진되는 우리의 긍휼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다.1. 천천히 가라긍휼은 효율성이 낮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는 일에는 더 느린 걸음과 배려, 여유가 요구된다.서두르는 자세는 사역에서 탈진하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서두르는 일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나는 교회 개척의 과정에서 열 가지 약속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였다. 긍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가 세우는 계획의 방향을 재설정하셔야 하고, 우리 자신이 원하는 스케줄을 내려놓고,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의 제안과 필요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2. 긍휼의 샘을 채우라예술가와 작가들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한 창의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심상, 경험, 독서로 상상력의 ‘샘을 채워 놓으라’는 권면을 듣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긍휼의 사역자는 긍휼의 샘에 매일같이 찾아가 모든 긍휼의 주인 되시는 그분으로부터 신선한 자원을 받아야 한다.우리는 꾸준한 성경 읽기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긍휼의 샘을 채워 놓을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내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롭게 하시는 긍휼의 주님을 만난다. 따라서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분 앞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도움을 구하며 어려운 순간에도 평화를 찾을 수 있다.3.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하라우리는 지치게 되면, 지식(우리가 아는 것)이나, 능력(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나, 평판(다른 사람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건강한 사역의 규범은 ‘안으로부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 받은 정체성을 가지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의 긍휼은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긍휼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한다고 말이다.안으로부터 타인을 지도하는 일은 수시로 우리 자신의 깊은 생각과 감정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타인과 나누며, 내게 허락된 이들의 마음을 격려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럴 때 우리는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바꾸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기를 원하게 된다.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긍휼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긍휼을 받는 ‘내면’의 수용을 포함하고, 나아가 긍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외면’의 섬김도 포함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긍휼로 충만할 때, 나아가서 그 긍휼을 드러내게 된다.그래서 퍼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긍휼은 예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빈궁한 세상을 향한 자신의 긍휼을 확장해 가신다. 즉 우리는 그분의 긍휼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유한하고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긍휼의 소진은 사역에서의 실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리게 가고, 긍휼의 샘을 채우며,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결국 긍휼로 충만한 인생을 위한 지속적인 갱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urnout Is Coming-Here’s How to Prevent It번역: 하늘샘
목회
난관
긍휼의소진
헨리나우웬
퍼브스
긍휼의샘
각성
긍휼
Burnout
설교자로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라
by Kevin DeYoung
2019-02-14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가 설교를 가리켜 “개성을 통한 진리 전달”이라고 정의했을 때, 나는 그가 다른 누군가의 개성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개성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 한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에, 마침내 나는 설교단에서 자기 나름의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내 설교가 더 좋아지거나 나빠졌음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내 설교가 보다 진실하고, 보다 편안하며, 또한 내 설교 자원이 더 풍성해짐을 뜻한다. 비록 설교자로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당신의 설교가 10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어색하지만 참된 칭찬을 10년 후 즈음에나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의 개성을 통해 진리를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젊은 설교자들처럼, 그리고 적지 않은 연로한 설교자들처럼, 나는 설교자로서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해 애써 왔다. 대학 시절에 나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의 느낌은 마치 내가 읽은 글 전부가 수백 년 된 내용이거나 수백 년 전에 번역된 것 같았다. 그 결과, 내 글은(당시에는 내가 설교를 자주 하지 않았다) 라틴어를 곧바로 번역한 듯 어색했고, 문장들은 역시 유난히 길었다. 또 구식 문법과 너무 많은 단어들을 사용했다. 한 교수님이 내게 여러모로 조언해주며 이르기를, 내가 영웅이 되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글을 쓰라고 했다. 당시에 그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조언이었고, 심지어 그 교수님의 말을 신뢰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고전적이고 다소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것이 경건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였지만, 사실 그것은 경건의 표현이 아니었다. 나는 청교도적인 분위기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일 필요가 있었다. 신학교에서 나는 많은 급우들이 설교학 교수들을 흉내내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하다. 설교학 교수들은 자신의 복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강의를 할 때가 있는데, 이 비난의 일부는 자신의 설교 방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수들에게 돌려질 수 있다. 이 같은 강조는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비난의 일부는 학생들에게도 돌려진다. 우리는 자신이 존경하여 모델로 삼는 사람들을(특히 자신에게 설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마구 복제하려 한다.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나는 작은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들을 많이 보았다. 그 학생들 모두가 나쁜 설교자인 건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해돈 로빈슨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설교자로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로빈슨의 설교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 만큼, 다른 설교자들도 본받고 싶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가끔씩 존 파이퍼(John Piper) 흉내를 냈다. 파이퍼의 설교를 워낙 많이 들었던 까닭에, 내 기도와 설교 주제, 그리고 심지어 “기쁨!”이라고 외치는 모습까지 파이퍼를 닮았었다. 나는 파이퍼에게서 배우거나 그의 영향을 받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할 수만 있으면 그와 똑같은 설교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내게 맨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바로 파이퍼일 것이다. “내가 전하는 복음과 똑같은 복음을 전하세요. 즉 복음의 진리를 변형하거나 훼손하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나랑 똑같이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해가 걸렸지만, 이제 나는 존 파이퍼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파이퍼와 은사 면에서는 물론이고 성격 면에서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받기를 원했던 다른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었다. 나는 성경 본문을 설명하면서 앨리스테어 벡(Alistair Begg)처럼 유머를(물론 그 특유의 억양까지)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팀 켈러(Tim Keller)처럼 생각이 창의적이며 교양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C. J. 매허니(C. J. Mahaney)처럼 재미있고 겸손하기를 원한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리스콜(Mark Driscoll)의 흉내를 내거나 카슨(D. A. Carson)처럼 재치 있게 행동하고 싶다. 심지어 랍 벨(Rob Bell)처럼 시원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지난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여러 가지 설교 방법들을 실험해 보았다. 원고 없이, 절반의 내용만 적힌 원고를 가지고, 혹은 전체 내용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했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자들도 이런 여러 방법들 중 하나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내가 찾은 가장 좋은 방식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원고 전체 내용을 준비해두고서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학 교수들은 이렇게 말하면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유효한 방법을 다양한 접근을 통해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좋은 설교를 규정하는 특정한 원칙들이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이것이 내게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 안수를 받은 2002년 이후로, 나는 거의 500회 정도 설교했다(우리 교회에서는 저녁 예배도 드린다). 약 450회의 설교를 하고 나서야 이제 비로소 내 목소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내 목소리를 찾기 전의 설교들이 모두 나쁘거나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지혜로운 고백을 깨닫는 데 이처럼 오랜 시일이 걸렸다. 설교자가(특히 젊은 설교자가) 배우기 가장 힘든 것들 중 하나는 자기 나름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열정이나 유머나 학식을 모방하지 말라. 당신 자신의 개성을 벗어던지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이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개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모범적인 설교자에게서 배우라. 하지만 주일에 당신의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본받기를 원하는 설교자의 흉내가 아니라 당신의 설교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단히 다듬어지게 하고, 당신 자신의 개성을 통해 그분 말씀의 진리가 빛나게 하라. 자기 나름의 설교를 결코 잊지 말라.출처: www.9marks.org원제: Learning to Be Yourself as a Preacher: From One Still Trying to Do Just That번역: 김태곤 (개혁된실천사)
목회
설교와교육
로빈슨
존파이퍼
내목소리을찾아
하나님의성령
필립브룩스
개성
자비를 베푸는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
by Dave Dunham
2019-02-07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목회 사역이 두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예상을 깨고 두려움과 긴장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바로 커다란 몸집의 남성이 나를 찾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내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분노 조절 장애가 있고 전과 기록도 있다고 말하며, 내게 상담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와 상담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돌발적인 상황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남성이 자신의 분노에 직면하게 하려면, 나는 그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그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켜서 나를 공격하게 할까봐 두려웠다. 그 공격성 때문에 그 남자가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몹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 상처 입은 남성은 여전히 겁을 주며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며 내 앞에 앉아 있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에는 위험이 따른다자비를 베푸는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이들이 자비에 대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 때 마주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자비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이를 베풀어야 하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예를 들어 자비를 베푸는 행위에는 학대나 실망이 따를 수 있다. 내가 전에 섬겼던 교회는 ‘한부모 축체’(Single Parent's Fair)를 연례 행사로 열어 한부모와 그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그 행사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 중 몇몇은 물품이 떨어지거나 의료 검진의 줄이 길어지면 화를 내고는 했다. 그 몇몇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음에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성을 드러냈다. 또 한번은 우리 교인 중의 한 젊은 여성은 지역 매춘부들을 돌보려 하다가 몹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자비를 표현하는 일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베푼 자비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하지만, 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내고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얻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섬길 의지가 있는가? 그런 의지가 없다면, 당신의 교회는 아직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외로운 일이다오하이오주 남부 시골에 모여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전혀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치료 중인 사람들과 전과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한 여성이 내게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중독자들이 너무 많아서 무섭고 불안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마약 거래를 돕는 조직으로 오해하며 비난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사역을 복음 전파의 일환으로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방문하지도, 또한 우리 교인들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그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자비를 베푸는 일은 종종 외로움을 동반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자비를 베푸는 교회는 단일 프로그램이나 행사에만 의존할 수 없다. 나는 코너스톤침례교회(Cornerstone Baptist Church)에서 함께 사역 중인 자원봉사자들을 좋아한다. 교회가 위치한 그 도시는 우리가 도와야 할 일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도 없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공동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가 생기면 달려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방식은 다양하다. 법원에서 내린 시행명령에 따라 매일 오후 5시까지 학업 대신 일터로 향하는 청소년과 상담하는 일, 병으로 몇 주 동안이나 회복을 못하는 남성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일, 그리고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왜 그런가 살피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는 일 등이 그 예이다. 때로는 우리가 그동안 돕고 있던 노숙자가 거의 죽어가며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 봉사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에게 향하기도 한다. 강간 피해자를 상담하는 일, 부모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은 절대로 봉사자의 일정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 자비를 베푸는 일이 사역자의 편리를 봐준 적은 한 번도 없다. 자비로운 교회가 되는 과정에는 몇몇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나누어 줄 음식 창고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 교회나 개인은 때때로 자비를 베풂으로써 발생하는 불편 자체를 감당하기 힘겨울 수도 있다.물론 우리가 자비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이를 베푸는 행위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비의 최고봉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곧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희생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그 아들을 잠시 분리시킨 행위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자비를 명하는 복음은 자비에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모범으로 보여 준다. 교회가 자비를 베푸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려면 이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당신의 도움으로 매춘 생활을 접고 스스로 살아가게 된 여인이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그녀를 계속 섬길 수 있겠는가? 그동안 당신이 멘토링으로 섬겨 왔던 젊은이가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조차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를 계속 돌볼 수 있겠는가?인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 주신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혹은 그것을 먼저 찾아 나섰기 때문에 자비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자비를 베풀면서 실망을 느낄 때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낙심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진정으로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편함이 따르는 사역이다. 하지만 자비의 하나님을 안다면, 그 두려움은 진정되고, 외로운 마음은 위로받을 수 있으며, 불편함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cary Merc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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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을감수
자비를베푸는사역
복음의진리
사랑
자비의하나님
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by Dave Furman
2019-01-23
나와 아내는 오랜 시간 중동에서의 교회 개척을 꿈꾸어 왔다. 그곳은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의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번화한 지역이었다. 동료 목회자도 그곳에 반드시 복음 중심의 교회가 필요하다며 우리를 격려했다. 그렇게 주변의 독려에 힘입어, 나와 아내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다.수년간의 준비 끝에 우리는 드디어 그 꿈의 여정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23일, 끈적이는 여름 밤의 습기가 두바이에 도착한 나와 아내, 그리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들을 맞이했다. 우리 가족은 그 땅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을 바꿀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그 후로 겨우 한 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오다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날, 나는 쇼핑몰에서 주차를 하던 중이었다. 왼쪽으로 차를 돌리기 위해 핸들을 꺾는 순간, 양쪽 어깨에서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타는 듯한 따가움이 손가락 끝마다 자리를 잡았고, 결국 팔의 상당 부분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도, 문을 열거나 악수를 하는 것도, 심지어 혼자서 옷을 입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사실 이러한 통증이 처음 겪는 고통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 한참 전, 어깨에 발생한 신경 장애를 치료하고자 이미 한차례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그 이후 우리 부부는 나의 신경 질환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과 두려움을 몰고 왔다.그러나 이는 암흑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 나의 영혼은 우울증으로 급격히 피폐해졌고, 언어 학교도 그만둔 채 온종일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 사막의 한가운데로 부르셨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두 팔이 건강했다면 정말 행복했을텐데…’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 동안 이 생각을 무수히 반복했다. 하지만 나의 끝없는 소원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극단적인 생각이 마치 도돌이표처럼 머릿속에서 맴돌고 또 맴돌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동화 같은 결말은 찾아오지 않았다그 후로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화처럼 환호가 터지는 반전을 들려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이는 아프기 전에 누리던 모든 평범한 것들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야구를 하거나, 아내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거나, 혹은 내 스스로 안전벨트를 매는 사소한 일상을 이제는 꿈꿀 수 없다. 물컵 하나 집는 것도, 작은 책을 꺼내는 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힘겨운 일이 되었다. 극도의 절망감을 느끼던 그 고통의 시간이 여전히 내 삶에서 지속되는 중이기에 나는 매일, 아니 매시간마다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와 싸워야 한다. 양팔의 회복을 위해서 수도 없는 치료를 시도했다. 네 번의 큰 수술, 셀 수 없을 만큼의 재활 치료, 그리고 한 움큼의 알약들과 각양각색의 천연 약재까지. 그러나 그 중 눈에 띌 만한 효과를 안겨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여전히 연약하고 깨진 상태로 남아 있다. 나의 몸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까지 지금의 상태로 남아 있을 듯 하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를 개척하셨다. 2010년 2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곳에 두바이 리디머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자 찾아오고 있다.우리는 이 교회에 도움의 손길과 재정을 채워주는 신실한 협력 교회를 만났고,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강력한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하고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중심부, 그 안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선물을 받았으며,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고 있다. 두바이 리디머교회를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의 주변에 더 많은 교회를 세워 가시는 중이다. 또한 필리핀이나 레바논처럼 이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의 교회 개척에도 주님은 우리를 쓰고 계신다. 더불어 그분의 계획에 따라 신학 교육 센터의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 수학한 많은 제자들이 영적 리더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이 모든 역사를 통해 내가 배운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이다. 약함은 언제나 그렇듯 주님께 쓰임받는 통로이다사도 바울에게도 약함이 있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그 질병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건강했다면 이루었을 더 많은 선교적 성취를 상상하며 아쉬웠을 것이다.그러나 바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고쳐주는 방법이 아니라 그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고후 12:9). 즉, 미약함까지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그 예로 모세는 거친 애굽에서 주님의 백성을 탈출시켰고,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웅장한 성벽을 무너뜨려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모세는 사십여 년의 광야 생활로 연약해진 상태였고,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으며, 여호수아는 두려움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패커(J. I. Packer)가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 자녀의 약함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언젠가 킨츠키라고 불리는 고대 일본 예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킨츠키란 ‘금수리’라고 불리는 공예 기술인데, 깨진 사기 조각을 금이나 다른 귀한 금속 재료와 함께 모자이크처럼 붙여 나가는 기법이다. 나는 이 방식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킨츠키 기법을 사용하는 공예가들은 사기 그릇의 쪼개진 조각을 섞어 붙이며 그 그릇이 지녔던 본래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깨진 그릇의 결점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균열을 금으로 메워 그 부분을 더욱 빛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결함은 더 이상 흠이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거듭난다. 즉, 킨츠키 예술은 '깨짐'의 작품이 온전한 다른 그릇보다 오히려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강하고 준비된 자녀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의 방식은 우리의 예상이나 방법과는 다르다. 그분의 완전한 계획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깨진 자녀를 통하여 원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세우신 그 구상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미약함을 사용하신다이 글의 앞머리에서 밝혔듯이 나는 교회 개척을 위하여 수많은 해 동안 준비해 왔다. 신학교를 졸업했고, 다양한 인턴십을 거쳤으며, 교회 개척 기관에서 훈련을 쌓기도 했다. 두바이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장기간의 학습 과정을 밟았음은 물론이다. 또한 나와 아내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을 구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함께 일할 팀도 꾸렸다. 우리는 그렇게 철저하리 만큼 많은 준비를 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는 그분이 세우신다’는 진리를 정말이지 확실하게 증명하셨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자 이곳 중동에 왔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바꾸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내 안의 자만심을 무너뜨리고, 내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역사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부부와 또 우리를 지켜볼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바는, 바로 모든 영광은 오직 그분의 아들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일의 모든 영광은 사람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셔야 한다. 약하고 깨진 상태의 리더들이여, 나아가서 교회를 세우라. 돕는 손들을 기대하고 구하라.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 질병과 고통은 종종 교회 사역을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당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함을 사용하는 분이시므로(고전 1:27), 나와 당신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시작하고, 또 우리의 약함과는 반대인 강한 교회를 세워 가실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rokenness Is Not a Barrier번역: 정새롬
목회
난관
패커
킨츠키
고통
우울증
사도바울
미약함
설교자여, 불편한 주제를 피하지 말라
by Brett McCracken
2019-01-21
성(性)에 관하여 설교하겠다고 냉큼 달려들 목회자는 거의 없다.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설교일정표에 계획된 “잠언 5-6장에 나타난 성(sexuality)에 대한 지혜”라는 주제 옆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일단 그 순서를 피하고 싶었다. ‘좀 더 성숙한 장로가 이 문제를 다룰 순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하지만 나는 그 주제를 피하지 않았다. 결국 설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다루며 설교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내가 인간의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의도를 설명하는 40분 동안 예배당은 남극만큼이나 차가웠지도 모른다. 상호 보완적인 성과 성적 타락의 문제, 그리고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라는 구절을 다루며, 내 목은 사하라 사막처럼 건조해졌다.하지만 설교를 마친 뒤에 따라오는 청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이런 주제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을 피하지 않고 담대히 전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더 듣고 싶습니다.”청중은 우리가 이런 주제에 대하여 다루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늘날 문화에서 직면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분명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기 간절히 원한다. 성, 남녀 및 인종 차별, 지옥, 하나님의 진노, 전쟁과 폭력, 성령의 은사,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같은 주제가 다뤄지기를 원한다.성경에는 이 모든 주제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설교자 역시도 이를 다루어야 한다.하나님의 모든 뜻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언급했던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라는 말은 간혹 어떤 주제들의 경우 꺼리지 않고 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루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여러 문화적 맥락에서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줄 정도로 그 뜻의 일부는 무섭다. 많은 부분은 직접적이라서 두렵고, 또 다른 부분은 단순히 ‘세 가지 포인트로 구성된 설교’에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에 두렵다.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된 모든 뜻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다.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모든 뜻을 설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행 20:26).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진정성이 없는 예배를 말하는가?비신자를 고려하여 구도자 중심으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일 아침 강단에서 불편한 주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설교만을 듣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중은 우리가 어려운 주제에 대해 설교하면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러한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주일학교 시절, 거리낄 내용이 없는 설교만을 듣고 어려운 질문은 하지 못하는 중고등부 모임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밀레니엄 세대의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이제 교회들이 어려운 주제도 다루고 곤란한 질문도 던지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내 또래들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동일하게 느낄 것이다.내가 요즘 만나서 훈련하는 대학생들은 그저 친절하고, 쉽고, 거리낄 게 없으며, 편안한 기독교를 찾고 있지 않다. 이런 기독교는 인공적이며 진정성이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런 기독교는 실제로 진정한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큰 대가를 요구할 뿐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는 불편한 종교이다. 이 신앙은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이는 대중의 심기를 건드릴까 염려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라우리는 기독교의 여러 불편한 내용을 숨기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찰스 스펄전이 말한 것처럼, 위험 부담을 안더라도 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십자가의 효력을 없애 버리지 않도록, 그 십자가의 불편함을 숨기지 말라. 복음의 날카로운 측면에서 그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의 불편한 부위를 잘라내는 일은 그 능력을 없애는 일이다. 복음을 순하게 만들면, 그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라져 버린다.”우리는 성경을 순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복음을 길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용감하게 설교해야 한다.청중석에 앉은 이들은 불쾌한 부분을 제거한 거짓된 기독교,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지지해 주고, 자신들을 성장시켜 주지도 않으며, 자신들에게 도전하지도 않는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그들은 진리를 원한다. 아무리 듣기 어려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Don’t Avoid Uncomfortable Topics번역: 하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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