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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탐하게 만들지 말라
by John Piper
2019-05-28
번영신학을 설파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메시지가 정말로 이러했을지 의문이 들곤 한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은 매우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치명적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라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번영신학적 설교는 기만적이다. 또한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딛전 6:9)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통해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호소하고자 한다. 1.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도록 유인하지 말라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놀랐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말씀하여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셨다.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3-27)라고 말씀하셨다.번영신학을 설파하는 설교자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왜 굳이 사람들을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가?”2.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설교를 하지 말라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반면에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이를 부추기는 설교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강하게 경고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그러므로 나는 번영신학을 설파하는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고 많은 근심으로 스스로를 찌르게 하려는가?”3. 결국엔 사라져 버릴 것에 집중하게 하지 말라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행위를 경고하신다. 즉, 간직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는 자로 살라고 가르치신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그렇다. 우리 모두는 뭔가를 보물처럼 간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번영신학을 설파하는 목회자들은 왜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안에 있는 그러한 욕심을 부추기는가?4.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라고 현혹하지 말라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도둑질 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이를 성취하는 방법은 자신의 손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실하게 노동하는 주요 목적이 단순히 재물을 쌓아 놓거나 소유하기 위함이라면 이는 곤란하다. 수고의 목적은 “구제”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이 말씀은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다면 부자가 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더 많이 일하고 적게 간직함으로써, 더욱 구제에 힘쓰라는 뜻이다. 200만원을 버는 사람의 생활 양식이 80 만원을 버는 사람의 것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지출의 한계를 정하고 나머지는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 당신은 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어야만 비소로 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기는가? 당신은 단순한 삶 속에서 더 많이 구제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지 않는가? 당신은 왜 그들에게 보화는 경제적 부요함이 아닌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가?5. 믿음보다 재물을 의지하도록 만들지 말라히브리서는 우리의 현재 소유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가진 소유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기록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이 약속을 존중하고 신뢰한다면, 사람들에게 부자가 될 것을 왜 계속 강조하는가?6. 영적으로 질식하게 만들지 말라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말씀을 질식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특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를 잘 보여주셨다. 그 비유에서, 말씀은 마치 가시떨기에 떨어져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지고 마는 생명으로 묘사되고 있다.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당신은 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질식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삶을 추구하도록 만드는가?7. 소금이 맛을 잃고, 빛이 어둠 아래로 숨게 하지 말라크리스천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유함이 아니다. 부에 대한 갈망과 추구는 곧 세상의 맛과 모양이다. 크리스천도 세상과 똑같이 부유함에 대한 욕망으로 산다면, 세상의 맛과 모양대로 산다면, 과연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번영신학적 설교가 가진 큰 비극은 그것을 포용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깨어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저 욕심만 부리면 된다. 그러므로 번영신학적 설교가 설파하는 부유함은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삶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번영 설교는 그저 세상의 맛과 모양을 비추는 탐욕의 거울일 뿐이다.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그분의 빛과 소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빛과 소금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중략]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1-14).세상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소금을 맛보고 그분의 빛을 보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부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할 보상을 기뻐하며, 고난을 겪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의지와 포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위이다. 번영을 약속하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유인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분이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신 바는 결코 번영을 약속하는 메시지가 아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rosperity Preaching Deceitful and Deadly번역: 정은심
목회
설교와교육
번영신학
보화
경제적부요함
빛과소금
보상
고난
영적으로질식
재물
과연 바울은 담대했을까?
by Guy M. Richard
2019-05-24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안경을 끼고 역사 속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을 높은 받침대에 올려 놓고 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우리처럼 진흙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는 한다. 내가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과거의 목회자들이 우리의 삶과 인류 전체에 끼친 영향을 축소시켜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 또한 여러 가지 인생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장미빛 안경을 쓰고 그들을 바라볼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사도 바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더 엄청난 일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를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거나 그분을 위해 투쟁하는 게 힘들어 질 때면, ‘바울은 나처럼 유약하지 않았을텐데…’라고 쉽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성경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설교했고(행 13:44-46; 14:1-3, 17:22-32), 용감하게 적과 대적했으며(행 13:8-11), 또한 청중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설교를 힘 있게 전한 사람이었다(행 20:20, 27)고 기록한다.그러나 신약성경에 의하면 바울은 실제로는 그리 담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을 예로 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교회에서의 자신의 명성이 다음과 같았다고 썼다.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그리고 최소한 한 번, 그는 자신을 위해 '항상'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복음을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엡 6:18-20). 그리고 최소한 두 번은 주님이 갈등과 대적 가운데서 바울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셨다(행 18:9, 23:11; 또한 27:24 참조).이 구절들은 어쩌면 바울이 천성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그는 그리 대담한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담대하지 않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셨다는 사실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하나님은 천성적으로 소심한 사람을 가장 많이 사용하셨다. 대표적인 사람이 존 칼빈이다. 우리는 그의 제자 테어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통해서 칼빈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 사역을 계승했고, 칼빈의 삶과 사역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을 최초로 남긴 인물이다. 베자에 의하면 칼빈은 천성적으로 소심했고, 스포트라이트를 싫어했으며,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혼자만의 은둔 생활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칼빈의 삶을 통해 담대한 사역을 행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실제로 칼빈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선포했고, 대적들에 맞서 싸웠으며,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를 증거했다. 만약에 바울이 천성적으로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도대체 그의 담대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바울과 총독의 신앙을 방해하려는 마술사 엘루마가 대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성령이 충만한" 상태임을 볼 수 있다(행 13:9-11). 또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한 이유로 유대인과 마을의 많은 지도자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그의 담대함을 확인할 수 있다(50-52절). 또한 바울은 이고니온으로 이동한 후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기"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님 그에게 권능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14:3). 하지만 우리가 더욱 눈여겨 보아야 하는 부분은 사도행전 20장 32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고하면서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라고 강조한다. 그가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떼를 목양하도록 조언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장로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의지할 때에 비로소 주님이 사역에 필요한 담대함과 능력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성도 중에서도 겁이 많거나 하나님을 담대히 증거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담대하지 못한 사람들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복음을 알리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침묵하곤 한다. 이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반대 의견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반대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고 싶어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의미 있기를 바라고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그토록 놀랍게 사용하셨던 바울조차도, 우리처럼 연약함으로 힘들어했음을 말이다.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바울을 채웠던 동일한 성령이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심을 말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 혹은 타고난 자신의 능력을 기댈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약속에 의지함으로써 다음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용기는 공포의 부재가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 가운데서도 성령의 힘을 믿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나아가는 것이다.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고백한 "육체의 가시"가 바로 그의 천성적인 수줍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담대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 약점은 사람들 앞에 섰을 때의 바울과 글을 통해 마주하는 바울이 그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이 그에게 약함과 많은 떨림이 있었다고 평가한 이유 역시 그 수줍음 때문이었을 것이다.천성적으로 담대하지 못한 성품이 정말 바울의 가시였다면, 고린도후서 12장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의 소심함은 그의 사역을 실패하도록 만든 약점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부분에서 그가 주님을 의지하도록 만든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바울이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바울에게 "족했으며", 오직 그분의 능력을 통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 세상에 증명되었다(9절). 우리는 그 과정을 고통스럽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분명한 자비이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 고통스러운 자비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그 은혜를 통해 나는 점점 더 자신이 아닌 주님께 의지하게 되고, 그런 나를 통해 세상은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보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as Paul Bol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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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의 설교
by Bernie van Eyk
2019-05-17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고단한 인생을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이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는 훨씬 더 인기있는 처방이 많지만, 다른 치료법은 모두 다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다루지 않는 설교가 한 계절 동안 잠시 즐거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숨겨진 외침,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라는 그 외침은 결코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존 파이퍼의 말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걷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그것,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우리는 청중의 삶과 밀접한 설교를 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양떼가 서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성도와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실용적인 설교'에 대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 역시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내가 될까?",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할까?", "어떻게 해야 더 성공할 수 있을까?"등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에 굴복하면서 현대 설교는 신학을 하나의 심리적 위안제로 착각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심은 ‘나’이고 하나님의 자리는 잘해야 가장자리에 있을 뿐이다. 설교의 초점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과 내 삶 그리고 나의 필요와 경험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용적이지 않을 뿐더러 일상 생활과 별 관련이 없다고 쉽게 가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설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설교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딤전 4:4). 성령님은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격, 이름, 속성, 역사 및 영광을 보여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놀라운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닌 자기 중심성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태초에 하나님이"(창 1:1).말씀이 하나님 중심이라면 그 중심이 빠진 설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설교는 신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반영한다. 따라서 나의 신학이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나의 설교도 그러할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와 자기 중심성을 강조하는 문화일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설교이다.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옮겨져야 한다. 고통받는 아삽의 영혼을 위한 치료가 무엇이었는가(시 73)? 자기 자신과 그 시대가 주는 안락함에 빠져 도리어 악한 자를 부러워하던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거듭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현세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아삽의 지성과 마음이 변화될 수 있었다.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의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 설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때에만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요 1:18).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요약이자 본질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명백하게 말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골 1:28). 동시에 에베소 장로들에게는 이렇게 전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의 악한 시대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어 그 아버지께 데려가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요 6).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고, 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위엄, 그리고 죄인들을 위한 겸손한 사랑에 중점을 둔 설교는 영원한 찬양을 불러일으킨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하나님 중심의 설교는 지나가는 이 시대의 무의미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아삽의 고백을 하도록 흔들 것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 놀라운 영광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과 끊이지 않는 교제를 갈망하게 될 것이고 또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진지하게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보다 일상 생활과 더 깊은 관련을 가진 무언가가 또 있을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Centered Preach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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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ott Sauls
2019-05-03
나는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보며 당황할 때가 많다. 어느 부활절을 앞둔 주간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당시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그 결과 내 자신을 심히 미워하게 되었다. 그 잘못이란, 아내와 외식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던 자리에서, 누군가에 대한 실망감을 털어놓다 못해 그 사람에 대한 험담까지 쏟으면서 상대방을 헐뜯은 것이다. 그렇게 거친 말로 그 사람의 인격을 짓밟고 나자,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여보, 오늘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어요.”그렇게 내 잘못을 짚어 주며 솔직하게 반응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 설교를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내가 험담을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험담을 '입으로 즐기는 포르노그라피'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타인과 진실하게 교제하거나 그에게 헌신하려는 노력도 없이, 상대방을 그저 희생양으로 삼아 값싼 즐거움을 느껴 보려는 욕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정서적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행위가 험담이라고 생각했다.아내의 지적을 받고 정신을 차리자,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내 스스로를 복음의 일꾼이자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자라고 여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료를 그리 쉽게 저주하고도 똑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선포할 수 있을까?’ 그때 이 말씀이 떠올랐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9-10).나의 실패와 하나님의 은혜이 경험은 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고 당혹스럽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기 혐오감까지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붙들고 혹시 내가 가짜 목사는 아닐까 물어보았다. 정말 사역을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을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녀는 내게 드리운 죄악의 그림자를 매일같이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우선 내 마음이 매우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목회 사역에 대한 나의 소명과 하나님이 내게 주신 특권 역시 부인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여기서 특권이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거룩한 이름을 지니신 주님의 대변인으로 섬길 수 있는 권한을 의미했는데, 이는 간음했던 다윗이나 살인을 저지른 바울 그리고 성격이 거칠었던 베드로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던 특권을 가리켰다. 더 나아가 아내는, 내가 복음의 양면적 메시지를 곧잘 선포해 왔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이를테면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전혀 소망이 없는 실패한 죄인이라는 측면과 (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신다는 측면을 함께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에게는’ 일관되게 전달해 왔다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지금이야말로 매주 교인들에게 설교하듯이 복음의 두 번째 측면을 ‘당신 자신에게도’ 선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엉망이지만, 그 마음에 드리운 어두움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앞지르거나 당해낼 수는 없을 거예요.”그리고 부활 주일이 다가왔을 때, 나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지난 주간에 경험했던 그 어두움, 즉 내 삶에 일어났던 실패를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부활절을 맞아 교회를 찾은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이 죄악에 부딪혀 절뚝거리는 목사를 만날 필요가 있다고,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간혹 절뚝거리며 설교단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 그분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곤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제단이 아니라 마치 무대처럼 여기며 과시하려고 설교단에 뛰어오를 때, 공동체가 약해지는 일은 시간 문제라는 사실도 알았기 때문이다.매시간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다앤 라모트(Anne Lamott)는 어느 인터뷰에서 모든 이에게는 어딘가 꼬이고 깨져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에 집착하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막길을 타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 오르막길을 거슬러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자리로 흐르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렇게 무너진 마음을 지닌 이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그분 자신이 필요하다는 상태를 깨닫는 마음이다. 혹은 팀 켈러(Tim Keller)가 자주 말하듯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필요 자체를 인정하는 마음이다. 이런 말들이 그 부활절에 나를 건지는 구명 밧줄이 되어 주었다. 혹시 당신도 한 주간의 삶을 완전히 망치고도 마이크 앞에 서야 하는 설교자라면, 지금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당신의 가족 및 친구들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어떻게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이다.베드로처럼, 우리는 모두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죄인들이다. 분명히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결단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해 놓고는,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분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같다(마 26:30-35, 69-75).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러하셨듯,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그 사랑을 보이시며 자신의 양을 먹일 목자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요 21:15-19).내가 영적 싸움에서 처절하게 무너진 아픔을 부활절에 고백하고 나자, 교회의 어느 지체가 편지 한 통을 보내 왔다. 그 편지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투쟁 중인 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써 내려간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사랑하는 아들에게,오늘도 자신과 싸우고 있을 너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단다. 이 편지에, 나 역시 생각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던 몇 가지 사실을 적어 보고자 한다. 혹시 너는 모세가 말을 더듬었고, 다윗의 갑옷은 그의 몸에 맞지도 않았으며, 마가는 바울에게 거절을 당했고, 호세아의 아내는 창녀였으며, 아모스는 시골 농부였는데도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니? 또한 예레미야는 우울증으로 의기소침했고,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 많기로 유명했으며,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달아났지. 아브라함은 부끄럽게도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을 했고, 그 결과 아들과 손자가 똑같이 그 거짓말을 따라했지. 이들은 모두 처절한 실패, 좌절, 결함, 무능에 직면해야 했던 한낱 인생들이었어.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켰지. 마찬가지로 그분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자신의 권능으로 일하신단다. 바로 그 권능으로, 너에게 다시 용기를 주시기를 나는 기도하고 있다.너를 사랑하는 아버지가.”우리 각자가 살아온 인생이 어떠하든, 그 길에서 어떠한 일들을 후회하고 있든 간에, 참된 현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우리 모두가 굳건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 현실이란,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에, 우리가 저지른 최악의 실패와 과오라고 하더라도 그 일들은 우리의 인생을 규정하거나 사명을 박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입으로 저지른 죄악이 아무리 추하고 또 다른 도덕적 실패들로 고통할지라도, 그로 인한 회개와 통회가 일어나는 낮은 자리까지 우리의 마음이 이른다면, 비로소 열매 맺는 사역이 거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너무 뽐내며 활보하지 말고, 차라리 절뚝절뚝 걷자.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elf-Loathing Almost Ruined My Easter—and I’m Glad It Did번역: 장성우
목회
난관
나의실패
팀켈러
하나님의은혜
자비
회개와통회
낮은자리
열매맺는사역
영적싸움
건강한 설교를 위한 네 가지 비타민
by Joel R. Beeke • Paul M. Smalley
2019-04-26
성경적 설교가 다시 부흥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은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가야하는 길이다. 예를 들면,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말씀 사역을 성령이 우리를 재생, 개혁, 갱신시키는 엔진으로 보았다.하지만 좋은 것 안에서도 우리는 균형을 잃을 수 있으며, 영양의 불균형이 신체적 성장을 방해하고 질병을 일으킬 수 있듯이, 균형이 없는 설교는 영적 삶을 저해한다.종교개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4 가지 교훈이 여기 있다. 건강한 설교를 위한 4 가지 비타민이라고 생각해 보자.비타민 E: 강해(Expositions)첫째, 말씀을 강해하라. 츠빙글리는 마태복음, 사도행전, 디모데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요한복음, 바울의 서신서들, 시편, 모세 오경, 역사서들과 선지서들을 두루 설교했다. 불링거는 계시록을 100 번, 이사야를 190 번, 예레미야를 170 번 설교했다. 칼빈도 여러 개별 성경을 설교했다.당신이 개별 성경 전체나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가장 최근에 설교한 때가 언제였는가? 이 설교가들처럼(이들은 매 주 여러 번의 설교를 했다) 개별 성경 한 권을 가지고 많은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당신은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씩 설교해 내려가야 한다. 비타민 E가 부족하면 근육이 약해지는 신경 상의 문제를 초래한다. 강해 설교의 부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약화시켜서 교인들이 소극적이 되게 한다.비타민 D: 교리(Doctrines)둘째, 교리를 가르치라.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가 정기적인 성경 강해를 대신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불링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 중의 몇 편은 ‘수십 년’(Decad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은 설교 10 편씩으로 편성되었다. 각 편의 설교는 성경 말씀을 소개하면서, 기독교 신앙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예를 들면, 네 번째 장에서 불링거는 복음, 회개, 삼위일체, 창조와 섭리, 하나님만 경배함, 성육신, 그리스도의 왕권과 사제권, 성령, 천사, 인간의 영혼에 관하여 설교를 했다. ‘수십 년’은 영국 개신교도와 청교도들 사이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보다도 더 인기가 있었다.비타민 D는 뼈를 강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에 대한 정기적인 성경적 설교는 신앙의 뼈를 튼튼하게 하여 이단을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개별 성경을 전체적으로 강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지만, 신앙의 핵심 신념에 대한 성경적 설교를 계속 제공하지 않으면 어떤 교리를 가르칠 수 없다.비타민 C: 그리스도(Christ)셋째, 그리스도를 가르치라. 츠빙글리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두루 설교할 때 그의 주제는 항상 그리스도였다. 츠빙글리가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이었는지 그의 67 편 설교의 처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1. 복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모독하고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2. 복음의 요약은 우리 주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그분의 하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고, 죄 없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는 점이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4. 누구든지 다른 문을 찾거나 가리키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요 도둑이다.5. 그러므로 다른 가르침을 복음과 동등하게 보거나 높게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6.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약속하고 보내주신 안내자이며 대장이시다.7. 그분이 영원한 구원이며 모든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은 그분 외에는 죽음일 뿐이며,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이러한 확신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마음을 촉발하는 설교로 듣는 이들이 자석처럼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한다. 역사학자 휴즈 올리펀트 올드(Hughes Oliphant Old)는 “츠빙글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과 부활의 구원하는 능력에 대하여 가르쳤다.”고 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비타민 C가 부족하면 괴혈병이 오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 설교는 사람들이 성경에 박식하게는 할 수 있으나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할 때, 성도들에게 본문에서 너무 많은 세부 사항을 주려하지 말자.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한다. 비타민 A: 적용(Application)마지막으로, 적용을 하라. 칼빈의 서신서와 에베소서 설교를 열어보라. 그러면 그가 실천적 적용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놀랄 것이다. 신학이나 본문의 주석이 아니라 “적용이 주요 요소였다”(Gerstner). 에베소서 1장 4-6절에 대한 설교에서 칼빈의 서술을 견본으로 삼아보라.“그러면 우리는 훨씬 더 겸손해질 이유가 있음을 인지하게 되며, 그분이 우리를 꺼내주기 까지 우리는 지옥으로 향한 길을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하지만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좋은 방식으로 리폼하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순종함으로 섬기게 하도록 이미 역사하셨지만, 그것은 첫날에 온전히 리폼된 것이 아니라 우리 전 생애를 통하여 리폼되어간다는 것을 또한 우리가 알자…”“그러므로, 우리가 악함을 느끼면, 담대하게 그것들과 싸우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낙담하지 말자…”“그러면 많은 고통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여정이 남아 있는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 자신을 확신하며 계속 나아가자(36-38)”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자. 비타민 A는 시력을 위해서 중요하다. 적용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들의 죄와 참된 신앙의 영적 실재를 보지 못하게 된다.누적 효과가족을 위하여 매일 식사를 준비하는 부모처럼, 설교자들은 하나의 설교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이들은 더 설명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더 주제적이고 교리적일 것이다. 어떤 메시지는 실제적 방향을 제시할 것이며, 어떤 메시지는 단순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쉬게 할 것이다.종교 개혁가들의 예는 목회자들에게 성경적, 교리적, 경험적, 실천적인 메시지를 설교하라고 요청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머리되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자라가며 매일의 삶에서 그분과 닮아감을 드러내도록 말이다.당신의 설교에 비타민 결핍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Vitamins for Healthy Preaching: Lessons from the Reformer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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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타락하면 공동체 전체가 신음한다
by Marshall Segal
2019-04-19
매우 슬프지만 지도자의 타락 이야기는 불행하게도 너무 흔하다. 믿음의 훌륭한 지도자 한 명이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그 직분이 박탈되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다.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혼돈스러워하기도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과 때로 어떤 이들은 격분을 표출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교회에서 능력있게 사용하신 사람의 마음을 죄가 어떻게 그렇게 사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모든 추잡한 사항들을 찾아내어 또 하나의 재능있는 지도자가 타락한 모습을 보며 은밀히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혐오와 분노로 반항하며 다시는 교회 지도자를 신뢰하거나 순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지도자의 타락으로 무엇을 느끼고 배웠든지, 우리는 지도자의 죄로 인한 결과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회피하고 반항하는 식으로 방황하게 된다.지도자가 타락하면, 모든 것이 집어삼킴을 당한다지도자의 부도덕성은 하나님이 백성을 선택하신 이래로 계속 있어왔다. 지도자에게 오는 유혹은 그 외의 사람들에게 오는 유혹과 같이 실제적이지만, 그 결과는 더 심각하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모두가 처벌받는다.지도자의 죄에 대하여 처벌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로 인하여 처벌 받는 것이다. 아무튼 전체 공동체는 그의 죄 때문에 처벌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악함 때문에 앗수르를 일으키셨을 때 그 현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지도자가 타락했을 때 그 백성을 처벌하셨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사 9: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했을 때, 그들은 백성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약탈하는 지도자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었다(사 10:2).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돌보라고 하신 사람들의 안전과 믿음 및 거룩한 삶 보다는 자신의 명예나 성공이나 유익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양떼들은 ‘집어삼킴’을 당했다. 그들은 저항하고 반항했다.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고통과 파멸에 이르게 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가장 연약한 자까지도 벌을 받는다“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사 9:17). 지도자들의 부패가 너무 심하고 만연하여,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사람들에게서도 그의 자비와 긍휼을 거두셨다.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들 조차도 저버리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고 하셨다. 다윗도 하나님께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 68:5). 하지만 이사야는 지도자의 부패로 인해, 이제 그 하나님이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다]”(사 9:17)고 한다. 그것은 죄의 결과가 공동체에 미친 것이다. 특히 지도자가 타락했을 때, 그를 신임하고 따르던 사람들도 그와 함께 추락한다.사람들은 그들의 목회자의 죄에 대하여 처벌 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설교자, 교사, 저자, 코치, 부모, 멘토와 같은 지도자가 회개하지 않는 죄 아래 살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으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따라 죄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사 9:17)라고 하며,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 사람들은 목회자의 악함을 대신하여 처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악함 때문에 처벌받았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하고 악하게 행하게 되었을까?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사 9:16)라고 한 말씀이 이를 설명해 준다.지도자가 타락하기 전에 예방하는 일이 중요하다먼저,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신실함, 거룩함 및 순전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특히 지도자들에게 그렇다.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든, 소그룹 지도자든, 아니면 가족 안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든지 상관없이 당신의 삶에 죄를 허락하면, 그것은 당신을 존경하고, 사모하며, 본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오염시킬 것이다. 당신이 설교나 상담이나 그 밖에 다른 영향을 미치면서 당신의 부당한 행위와 당신 자신을 분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러난 커피 물에서 커피 성분을 걸러내려는 것과 같다.“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과의 특별하고 친밀하며 정직한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속 닮아가기를 추구하라. 거짓말이나 게으름이나 불륜이나 쾌락에 빠지는 등 죄의 유혹이 보이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과 영혼을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지도자의 신실함과 거룩함 및 순전함을 귀하게 여기라. 당신의 목회자가 순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도자의 순전한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그러한 모습을 보면 칭찬하라. 앞으로 목회자와 장로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사람들이 이러한 성품을 키우게 하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감사함으로 축하하라. 비천하고 쓸모없는 죄인들을 구하시는 은혜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을 다시 순전하고 완전하게 만드시는 은혜를 말이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의 자질(딤전 3:1-7; 딛 1:5-9)에 관한 목록은 목회자들을 비교하기 위해 필요한 점수 기록 카드가 아니다. 그 자질은 하나님의 귀한 아들과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품성에 초점을 맞춘, 하나님이 세우신 보호막이다. 그 자질은 복음의 은혜를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은 공동체 곳곳에 은혜가 자라나게 하며, 교회 전체에 은혜가 넘치도록 공동체를 보호한다.지도자를 청할 때, 이 사람의 가르침과 삶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과 순전함을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선언하고 보여주는지를 주의 깊게 고려하라.한 지도자의 사역의 붕괴가 그리스도 교회의 붕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대항하여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16:18). 천국이 하나의 추문으로 위기에 빠지지는 않지만, 지도자의 타락은 공동체 전체에 충격과 어려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슬프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지금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하는 때이며, 또한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할 때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en Leaders Fall, All Are Punished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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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부도덕성
유혹
연약한사람들
신실함
거룩함
순전함
지도자의타락
기도
무조건적 선택 교리가 어떻게 목회를 지탱하는가
by Jeramie Rinne
2019-04-12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지난 20여년 동안 목회자로 일해 왔다. 때로 이제 막 목회의 길에 들어선 젊은 목사들이 내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목회를 이끌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칼빈주의자가 되라"고 말해준다. 물론 농담이지만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칼빈주의자가 아닌 목회자 중에서도 성경을 올바로 믿고, 복음을 잘 가르치며,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들을 형제라고 여기며 그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신학적 틀, 특히 무조건적 선택 교리야말로 나의 목회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또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도록 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내 목회를 지탱해 준 핵심이다.무조건적 선택 교리(Unconditional Election)란?무조건적 선택 교리가 교회 안팎의 사역에서 그토록 유익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교리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무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1. 창세 전에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거나 예정하셨다.2.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한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그분의 주권과 선의에 근거하며, 그분 자신 외의 어떤 외적 조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러므로 '무조건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 선택을 받은 이들이 복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그분은 구원의 주권자이시다.나는 여기에서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성경적 논의를 하지는 않고자 한다. 성경에서는 이 교리의 원리를 드러내는 구절들이 많다.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에베소서 1장 및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 예이다. 나는 또한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 교리를 목회 현장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목회 성공의 의미를 재정립한다무조건적 선택 교리에 대한 정의가 사역 중에 있는 목회자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목회에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지가 구원 사역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목회 사역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울 수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조건적 선택이 사역에서 의미하는 바는 목회자의 우선적인 책무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것이다.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역의 결과를 결정하신다. 따라서 그분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성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우리가 선포하고, 가르치고, 순종하는 말씀과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신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한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자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그 수단(하나님의 말씀)까지 정해 놓으셨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목회 현장에 적용할 때,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으니 목회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분명, 목회자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즉, 우리가 선포하고 가르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맞춰 그 목적을 성취하신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 위에 세워진 사역의 성공은 성도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순종하는 그 신실함으로 측정된다.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목회를 지탱한다사역의 성공이 종의 신실함이라고 보게 되면, 목회자로서 우리의 짐이 가벼워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본분을 다하고 나머지 영역에 대해서는 그저 그분을 신뢰하기를 바라신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에, 비록 오래 기도하며 힘써 온 사역의 결과가 빈약하더라도 지난한 목회 사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그렇다면, 무조건적 선택 교리가 어떻게 목회를 지탱하는지를 네 가지 영역에서 살펴보자.복음 전도하나님은 누군가를 선택하시고 복음의 선포를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에, 전도의 목표는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복음을 들은 사람이 이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목회자는 선포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회심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허락하실 것이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설교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고]”(행 13:48), 또한 그가 빌립보 루디아에게 설교할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행 16:14) 것처럼 말이다.누군가 복음을 거절할 때, 당신이 전도에 실패한 것처럼 느낄 필요가 없다. 혹여 “잘못된 예를 거론했나, 설득을 더 잘 했어야 했나, 아니면 미소를 더 지었어야 했나, 내가 잘했다면 그 사람을 믿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내가 그 자를 믿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는가?”를 묻지 말라. 그 대신, “복음의 메시지가 확실했는가?”를 물으라. 첫 번째 질문은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적용 가능한 목표이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순간 받는 이가 예수님을 거절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선택받은 사람일 수 있고 나중에 언젠가는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복음 전도를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여길 수 있게 하고, 또한 복음에 폐쇄적인 사람에게도 이를 계속 전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신실함이 곧 목회의 성공이라는 사실은 복음 전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교노인, 청년, 기혼, 미혼, 비기독교인, 새신자, 형식적 크리스천, 성숙한 크리스천 등 성도들의 배경은 매우 다양하다. 어떻게 하나의 설교로 이토록 다양한 모두가 예수님을 알도록 이끌 수 있을까? 매주 서로 다른 계층의 성도들에 맞추어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 아니면 특수 계층을 목표로 교회의 철학을 설계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므로 영화 제목을 가지고 설교 시리즈를 만들어 다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떤가?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구원할 사람을 선택하여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를 성화시킨다면, 설교의 목표는 성경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본문의 주제가 설교의 주제가 되게 하고 그 주제를 교회와 삶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바르게 제시했다면, 우리의 설교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설교자가 문화 분석이나 추세 분석, 비디오 편집자나 변증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매주 가능한 한 신실하고 명확하게 성경을 설명 및 적용하는 설교자가 되고, 선택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때에 말씀이 역사할 것임을 굳게 믿기만 하면 된다. 더 나아가, 선택 교리은 목회자로 하여금 성경의 어느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주님이 반드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이다]”(딤후 3:16). 하나님은 요한복음뿐 아니라 레위기를 통해서도 예정된 사람들에게 역사하실 수 있다. 이는 설교자인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평생 동안 설교할 수 있는 효과적인 설교 자료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우리는 본문 선택의 문제로 너무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된다. 상담상담은 목회 사역 중 내가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이다. 사람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성도들이 중독, 부부 갈등, 학대 및 큰 슬픔과 같은 거대한 문제에 당면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그들이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목회이 방향을 신실함에 두게 되면, 목회자는 긍휼을 베풀고 성경적 상담을 제공하는 역할에 집중하면 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하신 그 말씀을 확실히 알고 믿음으로써 영혼의 치유는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사역에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적용한다면, 신실함이 곧 목회의 성공이다. 따라서, 상담에서도 복음을 삶에 적용하고 이를 나누는 것에 목표를 두면 된다.상담에 있어서 건강한 경계선을 세우고 이를 지킴으로써 내담자의 구세주가 되려는 충동을 저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털어놓은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모두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과한 책임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우리가 충분히 노력한 후 그것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주며, 결국 이는 목회자가 탈진하지 않고 오랫동안 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고난거의 모든 목회자는 고난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고난을 다루는 일에 관해서 주요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고난은 박해라는 형태로 교회 외부로부터 오기도 한다. 고난은 또한 교회 내부에서 배신, 실망, 배교, 중상 모략, 비현실적인 기대, 불만과 비난, 위기와 외로움 등의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다. 게다가 우리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더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바울이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라고 말했듯이 목회자들도 그렇다. 바울은 모든 회중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나는 겨우 한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이토록 어깨가 무거운데 말이다. 역량을 보이려고 애쓰지만 우리는 때때로 혼돈스럽고 지치며 또한 두렵기까지 하다.나는 교회의 운명이 목회자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다. 하나님은 단지 시험 중에도 신실하라고 하신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8-10)라고 했다.바울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가? 그는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견뎠다. 우리가 환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을 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택한 자녀들을 그분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우리의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불가능한 사명?나에게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단지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이는 내 목회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핵심 원동력이다. 나는 현재 중동의 큰 국제 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교회 밖에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만일 하나님의 사역이 이 모든 문화를 해석하고 각각에 맞는 복음 전도의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 혹은 복음에 미접촉된 사람들을 믿게 하는 목회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면,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 사회에는 통하는 방식이 다른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내게 소망을 준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라고 하셨다.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은 그분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예수님이 그분의 말씀으로 그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반드시 올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목회자로서 나의 본분은 복음과 성경을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먹이실 것임을 믿는 것이다.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우리 교인들에게 무엇이 당신을 교회로 이끌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매번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성경과 복음의 중심성 때문이라고 말이다. 복음은 초자연적인 자석처럼 힘을 발휘하여 다양한 양떼들이 함께 모이게 한다. 따라서 나와 당신의 사명은 명백하다. 신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말씀으로 상담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으로 기도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Unconditional Election Sustains Pastoral Ministr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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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by Juan Sánchez
2019-04-05
설교자로서 우리 모두는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그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도록 교회를 훈련시키는 일이다(엡 4:11-16). 이 과제를 신실하게 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설교 본문을 대할 때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아마도 그러면 “설교 준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선택한 본문에 대한 나의 모든 질문에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모든 본문에서 내가 주로 질문하는 여섯 가지 질문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이를 설명해 보려 한다.성경 저자는 본문을 어떻게 구성해 놓았는가? 모든 본문은 저자의 주장을 드러내는 구조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저자가 강조하는 바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신실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저자가 본문을 어떻게 구성하였는가를 분별하여 그 구조가 설교의 강조점과 구조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나는 한 주 내내 아침마다 선택한 본문을 묵상하며 읽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설교 준비는 본문의 구조를 분별하기 위한 작업을 할 때 시작된다. 왜냐하면 모든 본문 유형은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작업은 본문의 유형을 알아내는 일이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 서신서들의 경우, 구문, 화법 분석, 주제어, 반복된 단어, 전치사(그래서,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따라서), 동사, 교차 대구(chiasms) 등 많은 사항들이 본문의 구조를 드러낸다.이야기를 가지고 설교하려면, 구문과 화법 분석이라는 도구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흐름(배경, 갈등, 절정, 해결), 등장 인물, 장면의 변화, 화법(1인칭, 2인칭), 시제(현재, 과거,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시편이나 선지서와 같은 시를 가지고 설교하려면, 물론 구문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장면과 시제와 화법의 변화와 함께 병행구, 연행구(stanzas), 비교와 대조 또한 고려해야 한다.이 일은 어렵고 때로 길고 지루한 작업이다. 하지만 구조가 저자의 주장을 드러내기 때문에 설교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를 가르치려 한다면, 이 과정을 바르게 해야 한다. 물론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다른 질문들이 본문의 구조를 밝혀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과정을 직선적인 과정으로 여기지 말라. 그 과정은 하나의 해석학적 나선이어야 한다. 모든 질문은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어떤 다양한 문맥이 본문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는가?구조를 분별하고 나면, 어떤 다양한 문맥이 본문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근접 문맥(본문 전후의 문장들)을 살펴보는 일은 내가 선택한 본문을 개별 성경의 이야기 전개에 근거하여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작업은 개별 성경 저자의 전체적 주장 속에서 본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다. 물론 본문의 근접 맥락에서 개별 성경 전체 가운데 있는 본문의 기능을 이해하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선택한 본문이 속해 있는 개별 성경을 더 많이 알수록 그 본문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다.역사적 맥락 또한 선택한 본문의 의미를 종종 밝혀준다. 성경 말씀 자체에서 역사적 맥락을 얻을 수 없으면, 도움을 얻기 위해 성경 사전, 아틀라스, 백과사전, 주석 등을 살펴볼 수 있다.부가적으로, 어떤 다른 성경 본문이 우리가 선택한 본문을 잘 밝혀주는지 알 필요가 있다. 선택한 본문이 그밖의 다른 곳에 인용되어 있는가? 저자가 같은 문제를 다른 곳에서 다루고 있는가? 저자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성경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그리고 물론, 성경 저자들이 그 주제를 원래의 청중에게 어떻게 적용했는지 문맥을 살펴보는 일은 저자가 대상으로 했던 원래의 배경을 왜곡하지 않도록 지켜주면서 오늘날의 청중에게 성경을 더 잘 적용하게 해 준다. 저자의 요점은 무엇인가?매일 아침 본문을 묵상하며 읽고, 저자가 구성해 놓은 구조를 분별하며, 본문을 원래의 맥락에서 보려고 하는 일은 저자의 요점을 이해하여 그것이 설교의 초점이 되게 하는 작업이다.이 시점에 본문의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강조점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본다. 그리고 원래 청중의 상황에서 가능한 한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서술해 본다. 본문이 원래 의미하고 있는 요점을 찾아낸 후에 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본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기독교 설교자로서 우리는 기독교 설교를 해야 한다. 매우 당연한 말 같지만, 성경을 가지고 기독교 고유의 가르침을 설교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설교를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선택한 본문을 복음과 바르게 연결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려는 본문이 구약성경이라면 신약성경에서, 혹은 그 반대로 교차적으로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감각을 잘 발달시켜야 한다.그밖에 약속 성취, 신학적 주제, 유형 분류학, 조직신학 등을 살펴보는 일은 도움이 될 만한 전략이다. 다시 말하면, 선택한 본문에서 그리스도(그분의 삶, 죽음, 부활, 승천, 재림)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님과 가장 강하게 연관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설교의 주된 주장은 본문에서 무엇인가? 아직은 설교문을 작성할 단계는 아니다. 이 시점에 본문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주요 주장을 서술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주요 주장을 전하면서도 우리의 언어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따라서 저자의 요점을 재서술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언어로, 그리고 무엇보다 간결한 문장으로 서술해 보라. 이제 설교문을 작성할 준비가 되었다.본문에서 가르칠 설교의 구조는 무엇인가?설교의 개요는 본문을 쓴 저자의 구조가 반영되어야 하지만, 내 설교를 들을 청중의 언어로 서술되어야 한다. 설교 요점으로는 주된 주장만 전달되어야 한다. 부차적인 사항들을 모두 전달하려 하면 주된 주장이 약화될 수 있다. 간결성은 명확성을 가져다 준다.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은 종종 그것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많이 쓰지는 않는다. 본문의 의미를 주장하려고 하는 점을 설교의 요점에 가능한 한 가까이 연결하면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 적합한 적용점을 찾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할수록 본문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본문은 또한 적용점을 만들어 내야 한다.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이제 당신이 내가 “설교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를 알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질문은 “선택한 본문을 신실하게 가르치기 위하여 내가 묻는 모든 질문의 답을 얻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야 하는가?”이다.오래 걸리더라도 이 모든 답을 찾아 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Long Should Sermon Prep Tak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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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작은 교회에서 목회한다고 주눅 들지 마라
by Jonathan Worsley
2019-03-29
신학적으로 볼 때, 가장 작은 교회란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모임과 같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는 한 사람을 두고 목회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250명과 1,000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 사역을 맡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강단에 한 사람의 설교자만 있고 예배당 의자에 한 사람의 성도만 앉아 있는 장면은 상상조차 안 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4년 전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여자 성도 한 분만 참석한 것이다. 당연히 그날을 위해 꼼꼼히 작성한 설교 원고를 내려다볼 때마다 낭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그 이후로 내가 시무하는 이곳 런던의 작은 교회는 조금씩 성장해 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는 스물한 명의 교인이 등록한 상태이고 주일 예배에는 서른다섯 명 정도가 출석하고 있다. 비율로만 따지면, 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물론 그렇다고 해도, 목회 사역을 겨우 연명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예배를 인도하고 아내가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는 동안 다섯 살 난 첫째 아들이 주보를 접어서 동생과 칼싸움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든가, 성찬식에 쓸 빵이 떨어져서 재빨리 동네에 있는 마트로 뛰어간다든가, 우리 교회에 아직 충분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로 일부 교인들이 떠난다든가 할 때가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일어나게 되면, 나는 거의 순교할 지경에 이른다.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아직 이 교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제부터 소개할 세 가지 사실이 나를 붙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1. 시대가 달라졌다어쩌면 순수하기도 하고 어쩌면 불순하기도 한 마음일 텐데, 나는 스펄전이나 웨슬리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최근에는 로이드존스가 목회했던 웨스트민스터 채플 주변을 걸으면서, 그 예배당을 가득 채운 청중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음을 곧 깨닫게 된다. 현재 영국의 신앙 상태는 어두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어두워지고 있다. 현재는 봄날에 개화하듯 한창 피어나는 전투적인 무신론 사상이 몰려오면서 이 나라의 기독교는 혹한기와 더불어 접어들고 있는 분위기이다.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실체가 없는 멘토이거나 역사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신기루와 같이 여겨지곤 한다. 3년 전, 영국의 주간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한 헤드라인은 이런 제목이었다. “2067년에 영국 기독교는 종식된다.”물론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앞날에 대해 말하는 일은 주의해야 한다. 정말 영국에서 기독교가 사라질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 목회를 하면서 교회 성장에 관한 현실적인 감각을 갖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상황이 영국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현재 서구 사회의 영적 기상도는 매우 건조한 상태를 보이고 있음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교회가 시들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나 역시도 교회가 커지는 일을 갈망하며 이미 지나간 영적 추수기를 다시금 꿈꿔 보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이 야위어 가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작은 교회를 통해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2. 꾸준한 말씀 사역은 반드시 결실한다얼마 전부터 신앙이 없는 두 사람을 만나서 마가복음을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복음서를 이해하는 수준이 깊어지는 모습을 보며 큰 격려를 받곤 했다. 그래서 마지막 모임에는 그들을 안아주며 칭찬하고 싶은 마음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첫 모임을 가질 때는 정신을 차리도록 그 두 사람을 흔들어 놓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답답했다. 혼자서 이렇게 말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교회에 18개월 동안 출석하고, 50번도 넘는 설교를 듣고, 수백 번씩이나 찬송을 부르고도 어떻게 이 내용을 모를 수가 있지?’아마도 모든 목회자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이 정하신 때가 되어야 열매를 맺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라면, 은유적으로 말해 자신이 물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훨씬 적기에, 언제 열매가 나타날지를 참지 못하고 더 과민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운동력을 가지고서(히 4:12) 헛되이 돌아오는 법 없이(사 55:11) 늘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일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만일 목회자가 기도하면서 꾸준히 물을 준다면, 열매를 거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를 목양하다 보면, 열매가 겨우 드문드문 나타나기 때문에 인내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열매는 결국 맺힌다.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였던 휴 레티머(Hugh Latimer)는 이렇게 말했다. “빗방울은 한 번 세게 떨어지지 않고 자주 떨어져서 바위에 구멍을 낸다.”3. 마지막 날에 회중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올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도 런던의 부유한 지역에서 사역하며 그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곤 했다. 분명 이 세상은 (크게 이루었으면 성공했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하며) 크기와 결과를 동일시한다.크리스천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관점을 그들의 목회 현장에 투영할 수 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가 연예인과 같은 유명한 목사가 된다든가 대중 강연을 하는 일에 유혹을 받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은밀하게도 교회 앞에 ‘대형’이라는 수식어가 달리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크기를 바라야 한다. 즉 신앙과 수효 면에서 계속 성장하는 교회를 바라는 일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 어디에도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언급은 없다.그러나 성경은 크기와 심판의 개념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따르면, 교회의 지도자는 마지막 날에 자신이 돌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목자장이신 주님이 우리가 목양한 양들에 대해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메시지이다.이와 같은 미래를 묵상하다 보면, (비록 내가 현재 목양하는 교회보다 더 작은 교회를 바라게 되지는 않더라도) 교회 크기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이 내 안에 자리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19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했던 존 브라운(John Brown)도 이 생각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가 이제 막 목사 안수를 받고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며 주눅이 든 어느 젊은 목사에게 썼던 글을 한번 읽어 보라.“나도 자네 마음에 있는 그 허영을 알고 있다네. 아마 주변에서 목회하는 동료들과 달리 너무 작은 회중을 돌보고 있어 낙담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누군가가 했던 말을 꼭 기억하기 바라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에 대해 책임져야 할 때가 오면,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가 충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고 말일세.”그래서인지, 나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며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아니 어쩌면, 이 교회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My Small Church Hasn’t Burnt Me Out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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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
작은교회
꾸준한말씀사역
회중에대한책임
시대가달라짐
휴레티머
존브라운
제자 양육에 필요한 세 가지
by Ajith Fernando
2019-03-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대일 양육 방식인 제자 훈련을 되살려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이를 실제로 진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문화의 다양성으로 인해, 오늘날의 제자 양육은 예수님과 바울의 제자 양육(마 4:19; 29:19; 딤후 2:2)과는 많이 다르다.현대인들은 효용성과 생산성이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핵심 가치로 인식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지배 아래, 목회자들 역시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쉽게 말해, 예배 출석률, 행사의 규모, 프로그램의 개수, 건물 증축이나 매입 등이 사역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가시적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다보면, 제자 양육에 집중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일대일 제자 양육의 열매는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통계적으로 그 결과를 산출하기도 어렵기에 사역에서 쉽게 소외된다. 하지만 성도들의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자라면, 사역에서 질적 양육을 절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목회자들이 제자 양육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려면, 목회의 다른 영역을 어느 정도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요즘 나는 젊은 전도사나 부목사, 혹은 찬양 인도자와 같은 청년 사역자들을 만나서 멘토링이나 상담을 제공하는 중이다. 그런데 많은 젊은 목회자 및 사역자들이 그들이 속한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담임목사와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마저 느끼고 있다.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제자 양육을 위한 시간을 따로 확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끄는 목회에서 제자 양육의 문화는 애초에 생성될 가능성이 없다. 담임목회자가 앞장 서서 일대일 양육에 시간을 투자하는 본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스리랑카에서 청년 선교 그룹(Youth for Christ)의 지도자로 일할 때, 나는 항상 젊은 사역자들을 제자로 양육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의 삶으로 무척 가깝게 다가가는 모습에 대해 처음에는 어색하게, 또 일부는 불편함마저 느꼈지만, 나는 우리의 선교 사역에서 제자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최고 지도자가 일대일 양육에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를 따르는 다른 사역자들도 용기를 가지고 그 본을 따르게 된다.사역의 부피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리더십이 성장하면서 사역의 우선 순위에 불균형이 생길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계속해서 우선 순위를 점검하고 수정해야 한다. 지도자로 성장하면 할수록, 제자 양육과 같은 기본이자 핵심인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의 책무를 계속 줄여야 한다. 이토록 중요한 제자 양육을 수행하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짚어 보고자 한다.제자 양육에는 시간이 필요하다오늘날 사람들은 매우 바쁘다. 육체적인 일 외에도 SNS를 하거나 TV를 보느라 종종 ‘바쁘다.’ 이러한 환경은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한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또한 이와 같은 피상적이고 분주한 삶은 내적 불안을 초래하며,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과의 안정감 있는 관계를 쌓아가지 못하게 한다.오늘날 사람들이 시간을 관리하는 습관과 비교하자면, 크리스천의 삶은 시간 낭비의 답습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로 많은 시간을 반복해서 ‘낭비’하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들은 제자 양육에 사용되는 막대한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피상적이고 제한적인 대화만을 통해서는 결코 신뢰할 만한 관계를 쌓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삶에 대하여 깊은 대화로 들어갈 때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시작된다. 제자 양육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삶의 속도를 늦춰 줄 뿐 아니라, 서로에게 단단하게 연결된 관계를 형성해 줌으로써 내적 불안을 잠재우는 데도 기여한다.제자 양육에는 신뢰가 필요하다오늘날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신념과 삶을 공개하고, 또 모르는 이들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종종 본인이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을 노출하는 부작용을 불러온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친구 삭제’를 클릭한다. 오늘날 ‘친구 삭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가.만일 이처럼 얕은 관계를 여럿 맺고 있다면, 당신은 삶 속에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물론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또 그러한 깊이 있는 관계로 들어서기 전의 어색한 시간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무너지지 않을 유대감이 무척 중요한다. 잠언은 소셜 미디어에 중독된 오늘의 세대에게 지혜자의 조언을 전해 준다.“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제자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제자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제자를 삼고자 하는 그 사람에게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 나는 제자들이 얼마든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순복하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자로서 때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제자로 양육하는 일에 용기를 내야 한다. 내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제자도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교인이었다. 그렇게 노력하고 다가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제자를 키워 나갈 수 있다.제자 양육에는 배려와 조심성이 필요하다오늘날에는 개인 정보가 오용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다. 소셜 미디어에서 피상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생활이 일상이 된 모습과는 무척 대조되는 현상이다. 제자 양육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삶의 고민이나 자신의 생각을 지도자와 나누기를 꺼려하는 것이다.‘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교제를 꺼리는 문제는 작은 소그룹에서만이 아니라 대형 교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큰 교회일수록 익명으로 예배에 참석하기가 쉽고 많은 교인들 속에 묻혀 지내기는 일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 거리야말로 진정한 제자화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커다란 걸림돌이다.따라서 교회가 크든 작든, 나의 목회지가 교회이든 선교지이든, 목회자들은 제자 양육을 행할 때 인내로 헌신하며 그 안전 거리를 좁히고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나는 모든 이들이 제자 양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책임감, 위로, 신뢰를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는 효용성과 생산성을 중요시하고 또한 '안전 거리'를 유지하려는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루기가 쉽지 않은 열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은 미래 세대를 위한 일꾼을 길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들이 시간과 신뢰 및 배려를 통해 제자 양육에 최선을 다하기를 희망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Missing Relationship in the Church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제자양육
낭비
시간이필요
신뢰가필요
배려와조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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