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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씨름하는 목회자
by Mark Meynell
2019-08-29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한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렸을 때, 가깝게 지내는 교인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리 교역자 중의 한 사람이 정신 건강이 좋지 못하여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결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항상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는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목회라는 가면의 그림자에 숨어 때로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만 그 가면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나는 목회자가 정신 건강 문제로 씨름하는 상황을 교회에 알리는 것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목회자도 우울해진다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는 우울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긴다. 진정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가?그렇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정신 질환을 막지는 못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윗왕과 그 외의 시편 기자들, 엘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바울의 영적 상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성경의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존 칼빈(John Calvin), 그리고 스펄전(C. H. Spurgeon)과 루이스(C. S. Lewis)도 그들의 영적 상태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경험을 종종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에 대한 증거와 증언들은 명백할 뿐만 아니라 넘쳐흐른다. 목회자들도 성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이와 유사한 정신 질환으로 씨름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정신 질환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5%에 달한다고 한다. 목회자는 이들과 달라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사실, 우울증을 겪는 목회자의 비율이 비목회자로서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비율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목회 사역은 보람과 기쁨을 안겨 주지만, 때때로 이는 외롭고, 스트레스가 되며, 또한 목회자를 비현실적인 기대 안에 갇히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은 결코 끝이 없다. 특히 목회자들은 위기 중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돌본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지도, 전능하지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부여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공유 딜레마공적 사역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민감한 약점에 대해서 지나치게 공유하는 것과 성스러운 완벽함의 가면을 쓰는 것 사이에서 그들 나름의 적절한 경계선을 찾아야만 한다. 공유 범위의 두 축에는 오류와 위험이 분명히 존재한다.초보 목회자는 사적인 문제를 성도들과 지나치게 공유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항상 자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지금 무엇과 씨름하고 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 필요도 없다. 목회자 및 그 가족들의 사생활은 보호되는 것이 좋으며, 이를 완전히 개방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최근 나는 장로들이 목회자 부부에게 말하기 힘든 마음 속의 고통을 자신들과 나누어도 된다고 확신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실제로 장로들에게 사적인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나 두 주 후, 그 목회자는 해고당했다. 많은 목회자들은 아무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까운 소수의 사람에게만 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우울증이나 다른 여러 어려움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만든다. 첫째, 성도들은 목회자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고상한 존재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성도들은 잠시 동안은 목회자를 인상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실망과 절망 속에 갇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회자는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인간적인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이상 목회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게 된다. 둘째, 성도들은 은폐된 사항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목회자가 사실은 그렇게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성도들이 목회자는 위선적이라고 믿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성도들은 더이상 목회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마음을 여는 목회자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지혜롭게 마음을 여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연 정신 건강에 대해 알리는 것도 좋은가? 우리는 (너무 자세하지 않게, 그리고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과) 영적 싸움과 유혹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을 시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상황과 자신감에 기초하여 이러한 사안에 대해 마음을 열면, 이는 성도들에게 여러 이유로 큰 유익이 될 수 있다.첫째, 개방성은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내가 올소울즈교회(All Souls)에서 우울증에 대해 처음 설교했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아파하는 목회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들은 여전히 목회자가 자신들의 문제를 다루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만 그러한 바람을 드러냈다. 그 설교가 불러온 가장 의미 있는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제 나도 스스로의 아픔을 시인할 수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즉 목회자의 개방성이 그들에게 나 역시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주었다. “목회자가 자신이 겪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말이다. 교회 공동체는 상심한 상태의 연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공개해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둘째, 개방성은 냉소적인 세상을 향한 증언에 필수적이다. 비록 이는 정교함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빙빙 돌려 말하거나 허세 부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인간의 연약함을 부인하듯 살아가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종교 기관을 향한 사람들의 의심을 확증할 뿐이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거룩한 성배, 즉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삶의 복잡성과 의문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상처를 이기고 사역하는 목회자는 TV 진행자와 같은 매끄러운 진행 능력을 보이는 목회자보다 더 큰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것이다.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우울증을 겪는 목회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그들이 씨름하고 있는 것들을 성도들과 나누어 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당신의 진실성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hould Pastors Admit They Struggle with Depression?번역: 정은심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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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경계선
우울증
마틴루터
존칼빈
스펄전
루이스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찾는지 가르쳐야 하는 이유
by Lucas O'Neill
2019-08-20
나와 아내는 문득 어린 시절 즐겨 먹던 푸에르토리코 전통 음식이 그리웠다. 하지만 우리는 요리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이것 조금 넣고, 저것은 아주 조금만 넣고”라며 열심히 설명을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그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한번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재료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문제는 간단했다. 우리는 그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요리법을 알지 못했고 또한 전수 받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그 음식을 종종 만들었지만 나와 아내 혹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알려 주지는 않으셨다. 어머니는 요리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 그냥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게 요리법을 전수해 주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요리해 주시지 않는 한 다시는 그 음식을 만들어 먹지 못하게 되고, 결국 전통적인 푸에르토리코 요리법을 잃게 될 것이다.많은 경우,설교자들은 본문의 의미를 매우 잘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성도들에게 명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근사한 음식을 제공하면서도 정작 요리법은 가르치지 않는 모습과 같다. 본문을 잘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우리는 본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도출해 내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설교의 내용이 본문에 충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본문으로부터 어떻게 이끌어 내었는지를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뿐 아니라 핵심을 도출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살펴 보자.1. 성도들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다 오직 성경에 전념한다고 말할 때, 그러한 행위의 주체를 성직자에게 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성직자가 특별한 해석을 자로 기능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시 말해 오직 설교자만 해석의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을 인정하고, 성도가 성경을 해석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성도들이 설교자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함께 성경을 해석하고 또한 그 핵심을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물론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회중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설교자가 신실하고 깊이 있는 설교를 위해 들이는 노력을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된다(딤전 5:17). 하지만 그 노력의 일부는 반드시 성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가르칠 수 있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킬 수 있다(엡 4:12; 골 3:16).2.성도들이 설교자를 신뢰하게 하기 위함이다말씀 해석과 적용의 근거가 명백하게 본문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줄 때, 성도들은 설교자를 신뢰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리고 이를 이루고자 성경말씀을 이용하려고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우리가 권고하는 내용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설교 사역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 성도들은 명백하게 성경에 근거한 해석을 하고 그에 따른 적용에 이르는 지도자를 따르고자 한다. 예민한 성도들은 엉성한 강해로 그릇된 결론을 끄집어내는 설교를 알아챌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거듭되면 강단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혹여 설교자가 본문의 진리와 동떨어진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모르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성경의 본문에 기대어 그것을 말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를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만약 이러한 행위가 반복된다면 강단에 대한 신뢰는 반드시 떨어진다. 설교자들이여, 성경 강해는 견고하고 명료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들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3.성도들이 설교자를 테스트하게 하기 위함이다설교자가 가르친 내용에 대한 책임은 성도들이 아닌 설교자에게 있다. 우리는 그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는 것을 성도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신실한 강해와 그렇지 못한 강해를 분별할 수 없다면, 설교자의 결론이 바른 것인지 혹은 초점을 벗어난 것인지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성경을 옳게 해석하여 잘 가르칠수록, 성도들은 설교자가 놓치고 있는 것을 더욱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평은 건강하고 경건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여, 설교하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설교를 듣는 성도들을 위해서 이러한 비평을 환영하라. 4.성도들에게 성경말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다 설교자의 리더십은 설교를 통해 전하는 말에 무게가 실릴 때에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가진 모든 권위는 진정한 권위를 지닌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은 설교자가 성경말씀에 밀접하게 서 있을 때에 보호된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성경말씀과 거리가 먼 내용을 가르치는 습관이 있다면, 그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 진지한 물음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이 나의 권고를 무게 있게 받아들일 만큼 나의 설교가 성경 중심적인가?”라고 말이다. 5.성도들을 변화하게 하기 위함이다설교자의 핵심 과제는 가르치고 교정하는 것이다(딤후 3:16; 4:2). 이것은 성도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믿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나 논증만으로는 어느 누구의 믿음도 변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성령이 역사하셔야 가능하며, 성령은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다른 무엇이 아닌 성경말씀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은 비로소 그들의 믿음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분별력을 얻게 된다.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가 연구를 통해 발견한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다 나누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이해시킬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는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하여 본문의 논리를 제대로 설명하고 이와 더불어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나의 어머니는 요리법을 적어 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쉽게도 전화기 너머로 그 요리법을 설명하는 일에도 서투르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분이 할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을 취하셨다. 바로 비행기 표를 끊어서 우리를 보러 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푸에르토리코 전통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직접 알려 주셨다. 이제 나와 아내가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 방법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Preachers, Don’t Just Explain What the Text Means—Tell Us How You Got Ther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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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네 가지 설교
by Samuel Emadi
2019-08-15
복음적인 성경신학은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큰 복이다. 이는 ‘도덕주의’ 설교의 조류를 상당히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번영복음’ 같은 이 시대 최악의 신학적 위협과 싸울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사역자들이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을 가르쳐 온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신학대학원생이던 시절, 나는 성경신학에 흠뻑 빠진 나머지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들어맞는지’에 온 관심을 집중했다. 당연히 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도덕적 교훈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러한 실수는 내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방식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은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함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를 입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설교는 어떤 모습일까?1. 도덕적 권면을 배제한 설교성경이 대적하는 것은 도덕주의이지 도덕 자체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둘을 혼동하는 설교자를 여럿 보았다. 바울 역시 도덕적인 행위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6:13–14 참조), 윤리적 권면을 나열하는 설교에 곧장 안색이 변하는 목사나 신학생들이 많다.‘도덕주의’를 지양하고 참 복음을 강조하려는 여러 목사들의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구약 성취의 극치인 예수님을 향한 올바른 순종은 곧 회중에게 적절한 윤리적 권면을 전하는 것이다. 일부 목사들, 특히 젊은 목사들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설교할 때일지라도 율법을 적합하게 가르치는 것은(딤전 1:8) 성경적이며 또한 필수적인 행보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 언약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시는가에 대해 설교할 때, 우리는 성도들이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이끌어야 한다. 또한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설교할 때는 성도들이 그분의 희생을 신뢰하도록 촉구해야 하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신 18:15)을 설명한다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선포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심을 설교할 때, 우리는 회중에게 신실한 제자도와 권징을 통하여 그 성전의 순결을 지킬 의무가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이신 예수님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우상을 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포르노를 탐하지 마십시오.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예수님이 구약의 모형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를 설교할 때에 우리는 메시아가 자신의 백성을 그 성취에 어떻게 참여시키시는지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나 자신도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예수님이 구약의 모형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교하는 반면,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실로 너무나 멋진 분이지만, 만약 그분이 나와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면 더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게끔 마무리를 지은 적이 참으로 많다. 물론 구약의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속삭인다는 사실, 다시 말해 구약에 나온 모든 약속과 인물이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됨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하지만 우리 역시 그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참되고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성전이지만, 그의 백성들 역시 이와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 받았다(고전 3:16). 예수님은 진실하고 더 나은 이스라엘일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이끄시는 분이다(갈 6:16).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심으로써 구약의 부활 모형을 성취하셨지만(고전 15:1–3), 그분의 부활은 장차 다가올 것의 첫 열매이자 우리가 경험할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우리의 오늘을 붙잡아 주는 소망이다(고전 15:58).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분명 칭찬 받아 마땅하다. 나 역시 도덕주의에 빠진 설교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러한 설교가 초래하는 영적 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덕 명령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태도이다. 나는 마가복음 2장에서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신 후에도, 그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2. 성경 인물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찾지 않는 설교목사들이 청소년을 향해 “다니엘을 닮으세요”라거나 “요셉처럼 성적 유혹을 물리치세요”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 다윗, 요나단, 요시야, 바울, 심지어 예수님처럼 되라고 권면하는 설교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에는 이와 같은 ‘도덕주의’를 비난했지만, 수년이 지난 후부터 그런 태도를 멈추었다. 각 본문을 성경 전체의 맥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사의 절정에 비추어 읽음으로써 모든 상황과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안에 계시된 주님의 은혜를 증거한다는 것도 지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인물들처럼 되어라’ 또는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히 12:16). 바울은 광야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악행에 대해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며(고전 10:6; 10:11 참조), 야고보도 신자들에게 욥과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닮으라고 격려한다(약 5:10–18).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조언한다(고전 11:1).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이를 듣는 자들에게 그 비유 속 인물을 본받으라고 가르치신다(마 7:24–27).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명령하신다. 이는 다시 말해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는 뜻이다. 물론 성경의 인물들을 도덕적인 모범으로만 한정하는 설교는 비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삶으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전혀 끌어내지 못하는 설교 역시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성경의 각 이야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정점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어야 함은 물론, 이와 동시에 성경 인물들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 설교는 무엇보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된 마음을 성취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명령을 힘써 지키도록 지속적인 권면을 받아야 한다(마 28:20). 성경 속 도덕적 모본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순종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다. 다니엘 3장을 살펴 보라. 우상에 굴복한 군중 앞에 당당하게 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배트맨 비긴스’(Batman Begins)에서 브루스 웨인(Bruce Wayne)이 말했듯이, “사람들을 무관심 밖으로 끌어내려면 드라마틱한 모본들이 필요하다.”3. 매주 비슷한 설교구속사적 설교를 주로 하는 목회자들은 매주 비슷한 설교를 준비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주어진 본문의 윤곽을 따라 원고를 작성하는 대신, 자신의 성경신학적 확신이 너무나 큰 나머지 설교문마저 그 확신으로 구성하고 채우며 결론짓는다. 이로 인해 그들은 “예수께서 구약의 X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보십시오”라는 식의 유사한 설교를 매주 되풀이하고 만다. 데렉 토마스(Derek Thomas)가 지적했듯이 구속사적 설교는 처음에는 ‘멋있게’ 들릴 수 있지만, 만약 그러한 접근법만 고집한다면 당신은 결말이 뻔한 설교만 하게 될 것이다. 4. ‘나무’가 아닌 ‘숲’만 바라보는 설교 구속사적 설교의 마지막 문제는 설교 본문을 자세히 풀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문의 뜻을 자세히 해석하기보다는 그저 큰 성경신학적 주제(예: 성전, 제사장, 왕, 율법, 안식일 등)를 찾아낸 후 그 주제에 초점을 한정하여 성경의 거대 담론만 다루기 때문에 발생한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가장 기본적인 설교학적 질문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무시하는 태도이다. 예수님께 이르는 우리의 성경신학적 경로는 결국 본문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최고의 수식어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거저 주시는 그 은혜를 전하는 것이 설교의 궁극적 목적임을 가르치는 강의, 책, 글들은 복음주의 설교를 풍성케 한다. 하지만 설교 앞에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수식어는 ‘강해’이다. 왜일까? 신실한 설교는 본문을 강해하고, 신실한 강해는 본문의 문학적, 역사적, 언약적 그리고 정경적인 문맥에 이르는 모든 것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Bad Biblical Theology Warps Sermon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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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목회자여, 수고하는 자가 되라
by David Mathis
2019-08-06
그리스도는 목회자를 부르셔서 올바른 가르침으로 양무리를 먹이는 일에 힘쓰라고 명하신다. 그에 따라 우리는 말씀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전달하려 하지만, 이는 그리 쉬운 사역이 아니다. 사역의 결과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힘든 일은 힘든 일이다.열심을 다하는 자를 향한 존경“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이 구절은 흔히 그렇게 인용되듯, 단지 말씀과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이 존경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말씀과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 ‘수고하는’ 자들이 존경받아야 한다는 뜻이다.물론 모든 목회자가 숙련된 교사여야 하지만(딤전 3:2; 딤후 2:24; 딛 1:9), 그중에서도 다른 이들보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특별한 실력과 소질을 갖춘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이 위의 구절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그와 같은 은사가 아니다. 그는 ‘수고’에 초점을 둠으로써, 교회가 그렇게 애쓰는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말씀과 가르침에 헌신하는 일은 목회 사역의 중심을 차지하는 수고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돌보는 모든 목회자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하지만, 특별히 말씀과 가르침에 집중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역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땀 흘리며 그 뜻을 연구하지 않는 목회자는 소명에 합당치가 않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훌륭한 가르침은 절대로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깨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딤전 4:16).진리의 사슬에 매인 가르침목회 사역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진리의 사슬에 매여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와 양육은 단순히 성도들 앞에서 머릿속의 생각을 끄집어내어 가르치는 행위가 아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한다(딤후 2:15). 따라서 매주일 성도들을 먹이기 위해 전하는 말씀은 어떤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이어서는 안 된다.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훌륭한 목회자는 분명 이 책에 매여 있기를 기뻐하는 자이다. 이 책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쓰임 받았다. 따라서 좋은 목회자는 필시 이 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먼저, 이 책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성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즉 정신적인 노동을 지속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한다. 이 책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히고 그 의미를 수시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용하기에 앞서,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를 놓고 씨름한다. 또한, 이 책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 그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가르침을 받아 믿음과 회개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가장 무거운 사명우리는 설교를 위한 원고를 작성하거나 그 메시지를 강단에서 전할 때, 판단의 도마 위에 설 수밖에 없다. 특히 설교는 원고 작성보다 더 힘이 드는데,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은 수정하거나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무척 불편해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죽기보다 두렵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단지 말을 해야 하는 부담에서 더 나아가, 예배의 인도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어떠할까? 이보다 더 무거운 사명은 찾아보기 어렵다.“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설교자라면 ‘십자가 뒤로 자신을 감추기’ 위해 힘써야 하겠지만, 강단에서 자신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설교는 사람을 노출시킨다. 우리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삶을 보여 주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해야 할 메시지를 증언해야 하는 자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리고 청중에게 판단 받는 일에 더하여,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약 3:1) 마지막 날에 대한 부담까지 지게 된다.수고할 때 느끼는 마음따라서 바른 목회자는 게으를 수 없다. 아무리 현대 사회가 지나친 노동을 비판하고 나태함에 이르는 환경을 조장한다 하더라도, 목회자는 수고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겉으로만 열심히 일하는 태도는 내면의 죄성에서 나오는 모습일 수 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누구라도 그릇된 이유 때문에 수고할 수 있다. 가령 이기적인 야망 또는 자신의 명성이나 타인의 칭찬 때문에 열심히 일할 수 있고, 혹은 정서적인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회 사역을 위해 열심히 수고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기를 바라고 일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이미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일하는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다른 무엇이 아닌 복음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한 넘치는 감사함으로 수고해야지,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정신이 바로 노동에 관한 개신교 윤리의 핵심이다.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가르침이 달랐던 중세 시대의 노동 윤리와는 눈에 띄게 구분된다.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하지만, 특히나 목회자가 첫 번째로 새겨야 할 말은 ‘내가 일한다’가 아니라 ‘그분이 일하셨다’이다. 그분이 다 마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그 수고를 보아야 한다. 얼마나 일찍 일어나 기도하며 중보하셨는지, 날마다 몰려드는 무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제자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나 인내하셨는지,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지칠 줄 모르게 일하셨는지, 그리고 아픈 자와 장애인과 소외된 자의 간청을 어떻게 다 받아 주셨는지, 그 수고를 기억해야 한다.수고할 수 있는 자유이와 같은 정신으로 영혼의 궁극적인 안식을 추구한 개신교의 회복 운동은 전혀 다른 사람들, 즉 새로운 유형의 목회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결코 게으르거나 냉담한 일꾼들이 아니라, 새로운 활력과 자유, 장래를 내다보는 비전과 소망, 그리고 역사를 주도하는 정신을 지닌 자들, 또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냈다. 즉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일꾼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수고로운 일에 자유롭게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최고는 아닐지라도 탁월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일에 있어 복음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기술과 창의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게 된다. 내면뿐 아니라 외적인 행동까지 변화된 삶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이 되는 훌륭한 목회자는 이 새로운 윤리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체에게 몸소 보여 주는 모델이다(엡 4:28). 바로 이러한 마음과 함께 우리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라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이는 특권이 아니라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부르심이다. 명예로운 직분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기쁘게 수고하라는 명령이며, 안일한 삶 대신 열심히 수고하라는 소명이다.더 큰 기쁨을 위하여우리가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올바른 말씀과 가르침을 위해 수고할 때 깨닫는 교훈이 있다. 바로 열심히 수고하며 산 하루는 더 행복한 저녁을 안겨 준다는 가르침이다. 그 행복은 산만하고 게으른 채로 보내는 날에는 결코 얻지 못하는 깊은 즐거움이다. 즉 열심히 일한 하루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더 큰 기쁨을 만끽하게 되고, 그 기쁨은 다시 나를 통하여 교회에까지 전달된다.우리는 헛된 수고의 떡을 먹기보다(시 127:2), 영혼을 살리는 참된 양식인 그리스도 자신을 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 안에서의 수고가 부담이 아닌 하나의 기회, 즉 게으를 때는 알 수 없는 깊은 만족의 기회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 흡족함을 수고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다른 시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 가져올 유익을 기뻐하며 수고하지, 그 일이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고하지 않는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과연 소파에 누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자일까? 당신이 목회자라면, 강단에서 수고하는 그대의 모습을 보는 자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저기 있노라고 생각하게 만들라.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Plague of Lazy Pastors: Real Ministry Requires Hard Work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목회자
설교자
자기희생
존파이퍼
진리
말씀분별
목회자여! ‘신학적 비전’을 가져라
by 고상섭
2019-07-23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교회는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인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투표로 결정된 적도 없지만 교회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치고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이라 할 수 있겠다. 옥한흠 목사는 이것을 ‘목회 철학’이라 불렀고, 목회자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철학임을 강조하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온갖 종류의 좌절을 맛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 가지의 확고한 철학, 다시 말해 교회가 어디로 움직여야 하고 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잘 정의된 개념을 가지지 못한 지도자의 리더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또 지도자의 목회 철학은 방법론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목회의 방법론보다 더 깊은 것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라고 말했다. 팀 켈러도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리디머교회의 부흥을 보고 찾아와서 비결을 물었지만 그 비결은 ‘어떤 목회 프로그램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에 있는 것이었다. 릭 워렌이 말하는 ‘목회의 추진력,’ 옥한흠 목사가 말하는 ‘목회 철학’을 팀 켈러는 좀 더 좁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신학적 비전’이라 이름을 붙였다. 1. 신학적 비전이란 무엇인가? 리디머교회를 참관하는 사람들에게 팀 켈러는 사역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리디머교회가 그런 사역을 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목회 철학을 생각할 때 교회론을 염두에 둔다. 교리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또한 사역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팀 켈러는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형태 사이에 중간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학적 비전’이라 불린 그것은 교리적 기초를 어떻게 사역적 프로그램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에 대한 비전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신학적 비전은 당신의 교리를 가지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무엇을 행할 것이지에 대한 비전이다.” 팀 켈러는 교리적 기초가 ‘하드웨어’라면 사역 프로그램이 ‘소프트웨어’이고 신학적 비전은 ‘미들웨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위에서 설명한 옥한흠 목사의 ‘목회 철학’이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이 합쳐진 형태라면, 팀 켈러는 교리적 기초와 신학적 비전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후자가 더 유용한데 그 이유는 교리적 기초가 같아도 사역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두 명의 목회자가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인다면, 교리적 기초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역적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한 사람은 ‘시편 찬송’을 불러야만 한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CCM’를 불러도 괜찮다는 입장이라면, 이 둘은 교리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와 사역 현장을 연결하는 ‘신학적 비전’이 다른 것이다. 신학적 비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모적인 교리 논쟁을 하게 될 것이다. 2. 신학적 비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신학적 비전’ 이란 단어는 리처드 린츠(Richard Lints)의 ‘신학의 구조’(The Fabric of Theology)에서 인용한 것이다. 린츠는 오늘날의 신학이 삶의 실천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교리적 기초를 사역의 무대까지 연결시키지 못하면, 다양한 세속적인 문화적 필터들에 지배당하게 된다고 말하며 신학적 비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신학적 비전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문화의 주류 흐름에 반대해서 거스르지 않으며, 성경의 틀로부터 그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와 대화할 수 있는 주도성을 갖게 된다. [중략] 현대의 신학적 비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현 시대의 세상 속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대가 변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신학적 비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먼저는 교리적 기초를 튼튼히 놓아야 한다. 교리적 기반이 부실하면 건전한 신학적 비전을 생성할 수 없게 된다. 교리적 기초란 조직신학적 뼈대를 말한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교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 둘째는 현재 시대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사역하는 사역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교리와 현장이 이원화 되어 분리될 것이다. 셋째는 교리적 기초를 사역의 현장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린츠는 성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오늘날 문화에 대한 생각을 동시에 할 때 신학적 비전이 생성된다고 말한다. 3. 신학적 비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팀 켈러는 많은 사역자들이 교리적 확신이나 문화적 맥락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과 사역 방법들을 채택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가진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다른 교회가 활용하고 있는 사역 프로그램을 그대로 모방한다. 이런 방식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지역 도시에 사는 사람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왜 안 되는 것일까? 프로그램들이 복음 이해 및 지역 문화 특성에 대한 성찰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 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열매가 잘 드러나지 않을 때, 목회자들은 세 가지 방법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첫째, 열매의 결핍을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 탓으로 돌리면서 계속 교리적 기초만을 쌓으며 우직하게 일한다. 둘째, 책을 읽거나 다른 종류의 프로그램을 찾아다닌다. 셋째, 현대인들에게는 전통적인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교리의 토대를 수정해서, 교리와 상관없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접목한다. 이 모든 경우는 다 교리와 실천의 중간 영역인 신학적 비전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4. 결론: 고민하라!우리는 이제 교리적 기초를 어떻게 사역 현장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잘 고안된 비전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과 실천, 교회와 사역이라는 중간 지대에서 지속적인 고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 스토트 목사는 1972년 당시 서구 기독교 젊은이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반 지성주의’라고 꼬집었다. 동경대 강상중 교수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민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팀 켈러는 빌립보서 4장을 해설하면서 ‘생각하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설명했다.“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평강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오는가? 바로 ‘이것들을 생각할 때’ 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다’라고 쓰인 헬라어 단어는 회계할 때 사용하는 ‘계산하다’에 해당되는 말이다. 결국 하나님의 평강을 원한다면 더 깊이 생각하고 갈구하라는 것이다. 로마서 8:18에서도 “생각하건대, 현재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위로가 아니라 더 깊은 사고일지 모른다. 바울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삶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것들을 생각하라!” 팀 켈러는 오늘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교리적 기초를 어떻게 오늘의 문화의 현장에 접목하고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라! 고민하라!”팀 켈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했다. “분별하는 복음교리가 이 시대에 뉴욕 같은 거대한 국제도시에서 어떻게 소통되고 체계화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신학적 비전’이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Center Church)라는 책은 그 신학적 비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목회에 대한 팀 켈러의 고민의 양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회자여! 고민하라! 그리고 ‘신학적 비전’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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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하라
by PJ Tibayan
2019-07-18
칼빈주의가 정말 맞다면, 설교에서 칼빈주의를 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설교의 내용, 기능, 그리고 목적 때문이다. 1. 설교의 내용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신학을 서술해 놓은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벧후 1:21 참조)라고 말한다. 성경의 구절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신학적 논의는 결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쓰신 성경보다 앞설 수 없다.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은 성경 중심적 설교자의 좋은 예이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대할 때 그 본문이 어떤 교리를 지지하는지 혹은 어떤 신학 체계의 발전에 기여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모든 부분에 합당하고 완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Charles Simeon, Pastor of a Generation). 만일 당신이 칼빈주의가 성경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반드시 성경 안에서 기뻐하고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칼빈주의 설교자들이 특정 본문과 자신들의 신학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 본문의 뉘앙스를 미묘하게 조정하는 현상에 대해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필자[시므온]는 어떠한 본문도 변경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모든 종류의 본문에서 동일한 만족을 얻고, 모든 본문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들이 아무 제한 없이 말하므로 나 역시도 그렇게 할 자유가 있음을 믿는다. 진리를 어떻게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 저자들 역시 내게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 나는 거룩한 사도들의 발 앞에 앉아 배우는 것이 그저 기쁠 뿐이다. 사도들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했는지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교인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그 말씀에 뿌리내리도록 도우라. 크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설파하기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성경 본문에 뿌리내리고 성경 본문으로 틀이 잡힌 신학을 가르치고 그 안에서 기뻐하라. 성경만으로도 칼빈주의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D. A. 카슨(D. A. Carson)은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를 상세히 소개한 후, 누가는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고 적고 있다. 사도행전, 또는 신약 전체에 걸쳐 회심 및 회심자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거기서 사용된 말들을 우리의 설교와 말에 적용한다면 멋진 훈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 대해 생각 성경 말씀 자체에 기반하여 정의하도록 도와야 한다.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약 2년이 지난 무렵, 나는 하나님의 으뜸되심에 대한 출애굽기 개론 설교를 전했다. 이때 나와 성도들은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케 한다고 묘사된 본문,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되었다고 말하는 본문,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케 하셨다고 묘사한 본문 모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자칭 반(反)칼빈주의자들인 성도들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된 것은 궁극적으로 누구에 의한 것이지요?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바로 자신입니까?”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성도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입니다.”라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답했다. 이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적' 해석이었지만, 성도들이 바로의 마음이 완악케 된 일에 있어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 주님께 감사했다. 2. 설교의 기능설교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행위가 아니다. 설교는 성도들에게 건강한 교리의 틀을 잡아주고 그 틀에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주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성경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설교가 전달하는 전부가 아니다. 강해 설교의 언어와 목표는 해당 본문의 언어와 목표에 의해 설정되기 때문에, 특히 강해 설교는 성도들이 성경 본문 앞에 순종하고 성경 본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끈다. 강해 설교를 할 때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매주 본문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강해 설교를 통해 본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목사가 전하는 해당 구절의 해석을 통해 성경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즉 설교를 행하는 방식을 통해 청중은 성경에 순종하고 또한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이는 곧 제자 훈련과 같다. 주일의 회중 설교는 전 교회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는 사실 때문에 목회 사역에 있어 수원(水源), 즉 핵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수원은 수원일 뿐 물길 전체는 아니다. 설교는 교인들에게 주일 이후의 삶까지 책임질 올바른 교리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렇게 설교를 통해 선포된 말씀과 교리는 전교인의 제자화를 이룸과 동시에 목사의 사역과 연계되어 교회 전체로 퍼져 나가야 한다.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목사들은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행 6:4), 가르치며(행 20:20), 감독(히 13:17) 및 온전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엡 4:11). 또한 목회자는 성숙한 기독교적 삶의 본이 되도록 노력한다(딤전 3:1–7). 하나님은 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학습 과정, 함께 하는 식사, 대화, 일대일 성경 공부, 소그룹 등의 다양한 상호 보완적 활동과 상황을 통해 목회자들로 하여금 성도들이 건강한 교리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이끄신다. 설교가 목회의 전부가 아니듯, 주일 예배 역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의 삶을 나눌 때, 비로소 예수님과 그의 말씀 역시 그들의 관계 속에서 된다. 지역 교회와 그 교회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망은 제자도와 교리적 성숙을 위해 하나님께서 디자인해 주신 매트릭스와 같다(엡 4:11–16).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성경을 전하라. 또한, 섬기는 교회만의 신앙고백문이 있다면 성도들이 그 신앙고백문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도우라. 더욱 일치된 신앙 고백을 위해 노력하라. 그것을 당신의 칼빈주의식 용어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라. 당신의 칼빈주의가 성경적이라 믿는다면, 칼빈주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가 아니라는 것 역시 잊지 말라(조직신학 용어들은, 주일 설교 강단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지만, 제자도에 관한 대화에서는 종종 도움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는 것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목사 청빙 위원회의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자 했다. 왜냐하면 청빙 위원들이 말하는 '칼빈주의'라는 말에는 내가 볼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리킨 '칼빈주의'는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택과 그에 따르는 우리의 선택들이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에 대한 내 견해를 나눴고 청빙 위원들도 그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신앙고백문에 내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3. 설교의 목적 설교와 교육의 목적은 신학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위함도 아니고 '칼빈주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딤전 1:5). 사랑이 우리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향한, 서로를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목적이다(막 12:30–31; 요 13:34–35).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필요하지만(벧후 3:18), 바울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므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벧전 5:5; 약 4:6). 우리가 강단에서 전하는 메시지 때문에 성도들이 신학적으로 점점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하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건강한 교리 위에 세워진 사랑을 위협하는 두 가지는, 분별력이 결여되어 그저 감상적이기만 한 생각들(intentions), 그리고 결코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고 개념으로만 머무는 지식이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무지해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민감하게 반응하여 신학 지식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곤 한다. 신학 지식은 그 자체를 위해 추구해서는 안 된다. 신학 지식은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목회자여,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성도들을 세워가라. 성경의 기능과 목적에 맞게 설교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이 늘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사랑이 결여된 신학 지식이 아닌, 성경에 뿌리 내린 사랑을 추구하라. 결론그러므로, 설교의 내용, 기능, 그리고 목적 때문에, 나는 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할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특정 신학 용어에 집착하는 것보다 성경 자체에 확신을 갖는 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라. 자문해보라. 도대체 왜 그렇게 칼빈주의를 가르치고 싶은 것인가? 아마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정리한 칼빈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 당신은 압도되었고, 칼빈주의가 당신 마음 속에 절대 꺼뜨리고 싶지 않은 기쁨의 불꽃을 일으켰을 것이다. 실로 멋진 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칼빈주의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조직신학 책을 통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기쁨에 도달한 것인지 궁금하다.형제들이여, 칼빈주의가 아닌 성경을 전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당신은 성도들을 더 풍성해 보이는 신학의 샘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것이다. 당신이나 다른 이들의 신학적 재능이 아닌 성경을 신뢰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도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탄탄한지를 뽐내며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성도들에게서는 신학적 파벌주의가 심해질 것이다. 결국, 성도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영광에 대해 성도들이 마음을 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굳건한 확신으로 성경을 밝히 전하면 성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고, 그 말씀을 신뢰하게 되며, 다가올 고난에도 능히 맞설 수 있게 된다. 이는 성도들에게 억지로 칼빈주의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한 확신을 갖고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당신은 우리의 선한 목자를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인내로 목양할 수 있게 된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Preach the Bible, Not Calvinism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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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찰스시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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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그리스도인 리더의 중요한 습관
by Dave Harvey
2019-07-09
당신이 나 같은 무뚝뚝한 리더라면 아마도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이 어색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기쁨이라는 것이 자기 본분을 잊고 밖으로 뛰쳐나와 자유롭게 노닐기도 한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마치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의 상태는 손꼽을 만큼 극히 드물고, 나는 일상의 대부분을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의무감으로 버텨내곤 한다. 내 삶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혼자 있을 때면 마음 속 도랑은 언제나 우울한 생각의 못을 향해 흐르곤 했다. 기쁨을 누리기 위한 싸움은 힘든 분투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 한 구절을 적용하기로 굳게 결심한 이래로 많은 성장을 경험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Whatever”에 대한 전쟁내 여정은 빌립보서 4장 8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단어인 “whatever”, 즉 "무엇에든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에서 아름답게 사용된 단어 "whatever"는, 안타깝게도 영어권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 등과 같이 비아냥과 무시의 의미로 사용된다. 즉 남을 경멸하는 오늘날의 문화를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말은 없다. 숱한 이들, 심지어 교회의 리더조차도 이 말을 쓰곤 한다. 소그룹의 출석률이 저조한 날은 그룹 리더가 이 말을 조용히 내뱉고, 봉사자가 아무도 없다는 걸 들은 목사가 이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며, 자기 사역을 비판하는 말을 들은 목사도 마음 속으로 이 말을 떠올린다.“Whatever”라는 말은, 아무리 작게 속삭인다고 해도 상대방을 무시해버리는 강력한 방패막이, 즉 다른 사람의 기대와 관심에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입는 무관심의 갑옷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기쁨을 누리기 위한 이 싸움에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이 단어의 본질적인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함으로써 승기를 잡으신다. 빌립보서 4장 8절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은 “whatever”를 초청의 의미인 "무엇에든지"로 재정의하신다. 세상을 바라볼 때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이든지 참되고, 무엇이든지 경건하고, 무엇이든지 옳으며, 무엇이든지 정결하고, 무엇이든지 사랑 받을 만한 것, 세상은 이러한 것들로 넘쳐난다.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가라성경은 이 세상에 복, 덕, 그리고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라. 이를 쉽게 찾을 수 있는가?아름다움은 이런 것이다. 햇빛의 찬란한 궤적부터 가을 낙엽의 색조 그리고 번들거리는 바위를 감싸 안으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까지. 계속 둘러보면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이를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부터 우주의 행성들에 이르기까지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은 사랑 받을 만했다. 이슬을 머금은 풀밭, 소나무, 가오리, 해변의 모래밭, 수분하느라 바쁜 띠호박벌, 공중에 떠있는 벌새까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계는 곳곳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당신의 눈에 이 찬란함이 보이는가?일반 은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일반 은총 안에서 죄는 제한되고 자연의 법칙은 고양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분에 넘치는 복을 주셔서, 우리 각자에게 은사가 넘친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통해 비춰지는 은혜의 빛이 보이는가? 조국을 지키는 군인, 혼자인 아이를 입양하는 아름다운 부부, 사회의 부정에 용감하게 맞서는 직장인까지. 이 세상에는 덕, 경건, 옳음, 그리고 칭찬할 만한 양심적 행동이 존재한다. 즉 타락한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발현된다.이 세상에는 인식할 만한 일, 칭찬해줄 만한 일들이 많다.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리더여,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낼 수 있는가?가장 고귀한 것을 생각하라"무엇에든지"의 전형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이고, 구원의 선장이시다. 또한 그분은 기묘자, 모사, 구속자,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속제물로 드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셨다. 아담은 철저히 실패했으나 예수님은 완벽한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두번째요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가 실패한 곳에서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자신의 순종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의를 이루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해 주신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분은 빌립보서 4장 8절에 나열된 모든 특질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궁극적인 “무엇에든지”가 되신다. 우리의 구원자는 완벽하게 참되고, 흠없이 경건하며,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옳고, 눈부시게 정결하며,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을 받을 만하고, 영원히 뛰어나신 분이다. 존 오웬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이 세상에서 굳건히 설 수 있다”라고 했다. 필자처럼 기쁨을 생각만큼 누리지 못하는 리더들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물론 "무엇에든지"는 적어도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내적인 분주함, 즉 경쟁하듯 휘몰아치는 잡념이 당신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계속해서 듣고, 만지고, 맛보고, 내음을 맡아 보면 영광스러움, 용기, 경건, 순결처럼 훌륭하고도 칭찬할 만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그것들이 보이는가? 선한 것들을 발견했는가? 이러한 복을 찾아내는 것이 곧 기쁨에 이르는 길이다. 마음의 흐름을 살피라내가 아는 장로는 개인적인 영적 훈련법을 실천한다. 즉 자신의 "무엇에든지"가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면, 즉시 십분 정도를 떼어 직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분야들에 대해 적기 내려간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이는 전복적인 행위이다. 구속된 "무엇에든지"로 돌아감을 통해, 악한 것들을 불태우고 선한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불길을 자신의 마음 속에 지피는 것이다. 그 장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됩니다”라고 했다. 당신은 어떠한가? 자신의 생각을 검토하기 위해 충분히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가? 빌립보서 4장 8절은 우리를 그 시간에 참여하게 한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떤 것들에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어떤 "무엇에든지"가 내 시야를 사로잡는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경건치 못한 생각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를 직면하라. 깨어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귀에서 입으로, 그리고 입에서 다시 두뇌로 끊임없는 정보를 실어나른다.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부하는 나락으로까지 떨어지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의 흐름을 살피면, 내가 추구하는 "무엇에든지"가 과연 무엇인지를 찬찬히 발견하게 된다. 선하고, 옳고, 사랑 받을 만한 일을 묵상하라하나님은 아무런 도움 없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신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리더들에게 명하기를, 인식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묵상으로 나아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쉽게 방황하고 있구나. 믿음을 지키는 생각, 영혼을 깨우치는 생각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는구나. 내가 도와주마. 이것들을 생각하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마음을 고쳐 냉소적인 생각의 고리와 비관적인 선입관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 우리에게 “네게 보이는 선하고, 옳고, 사랑 받을 만한 일들을 취하여 네 마음에 두라”라고 말씀하신다. 아름다움의 속성은 단순함이다. 이는 어린 아이들조차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지혜이다.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듯,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칭찬 받을 만한 것들에 마음을 쏟을수록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리더는 눈을 들어 바라보아야 한다그 길이 보이는가? 그 길을 바라보는 것이 내겐 진정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라봄이 올바른 생각 위에 빛이 비추었고 또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도록 나를 섬세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리더여, 만약 이전의 나처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이 글에서 용기를 얻기 바란다. 빌립보서 4장 8절을 깊이 묵상하라. 그리고 그 길을 찾아서 그 위에 머물라. 옳은 일을 계속 묵상하다 보면 옳은 방향으로 가게 된다. 바로 그 여정에서 당신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는데, 이는 "무엇에든지"를 발견할 때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ever Gives You Joy in God: One Habit for Every Christian Leader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Whatever
하나님의손길
가장고귀한것
존오웬
마음의흐름
묵상
빌립보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설교
by Joel BeekeㆍPaul Smalley
2019-07-04
어떤 설교는 입에는 달콤하나 건강에는 좋지 않은 젤리 곰의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이런 설교는 듣기에는 좋으나 우리 삶을 확고하게 세우도록 돕는 교리적 가르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또 어떤 설교는 지성에는 호소하나 마음에는 감동을 주지 못한 채 공허함만 남긴다. 그러한 설교는 유익한 지식은 제공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정서를 일으키지는 못한다.바울이 말하듯이, 모든 교회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다(골 3:16). 문맥으로 보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은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10절)고, 또한 정서와 성격 및 관계 면에서도 변화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12-15절). 어떻게 하면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바울은 한편으로는 공적 예배에서의 찬양, 즉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16절)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게 “가르치고 권면하[라]”(16절)라고 조언한다. 이는 말씀을 가르치는 면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설교가 성령을 도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풍성히 거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바로 지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이끄는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가 현실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단계별로 살펴보자.1. 주의 말씀에서 설교자의 머리로지성에서 시작해서 감성으로 이끄는 설교의 처음 과정은, 설교자가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열 때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라고 말씀하신대로,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제자처럼 성경말씀을 대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내세우지 말고, 강해와 신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행하게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롬 4:3)에 초점을 맞추어 질문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된 비밀을 맡은 자이며 또한 자신이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임을 알아야 한다(고전 4:1-2). 2. 설교자의 머리에서 설교자의 가슴으로이 과정은 은혜로 말씀을 받은 설교자가 그 말씀을 영혼 깊숙한 곳에 심으면서 계속 이어진다(눅 8:13, 15). 설교자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딤후 4:1) 선 사람으로서,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영혼을 돌보는 자이다. 그의 사역은 요리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자가 되어 자기 자녀를 먹이고 돌보는 것과 같다(살전 2:7-8). 그러므로 신실한 설교자는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렘15:16)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신실한 설교자는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설교한다. 자신이 그 설교에 확신이 서고, 감동을 받으며, 순종하도록 말이다. 스스로 감동받지 못하는 설교는 속이 빈 껍데기와 다름없다. 물론 설교자가 자신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설교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이 능력으로 얼마든지 말씀의 진리를 전하실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설교자 자신의 전 인격을 녹여내어 준비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감동적인 설교를 통해 일하신다. 3. 설교자의 선포에서 청중의 머리로성령이 말씀으로 설교자의 마음과 가슴을 채우셔서, 그가 지혜와 감동의 설교를 준비하도록 힘을 주시면, 설교자는 비소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청중에게 설교를 전달할 준비가 된 것이다.그렇지만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해서, 설교자가 자신의 감정을 청중에게 분출하는 식으로 말씀을 전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자신의 지식이나 감정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4:5). 설교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말 2:7)이다. 즉 하나님의 대리인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진리를 나타[내며]”(고후 4:2),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그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담백한 선언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더하지 말고 “교리”의 말씀이나 명확한 가르침만을 전해야 한다(딤후 4:2). 또한 청중들이 설교자에 대한 존중으로 응답하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내적 확신에 근거하여 응답하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4. 청중의 머리에서 청중의 가슴으로이 과정은 설교자가 감정에 더 깊이 호소하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가 청중의 머리에 전달된 후, 성령의 은혜로 그 진리가 청중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마음을 흔드는 일이다(고후 4:6). 목회자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임을 명심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진심 어린 호소를 해야 한다(5:10-11, 13, 20).이 단계에서 만약 청중의 마음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설교자는 그 단단한 바위를 부숴뜨리는 심정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렘 23:29). 반면 청중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애통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면, 예수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시듯 목회자도 그와 같은 영으로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이러한 설교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말씀은 게으른 자들에게 경고를, 반면 약한 자들에게는 격려와 기댈 곳을, 그리고 모든 듣는 사람에게 오래 참음을 보여주는(살전 5:14) 설교이다. 또한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하여 온유함으로 훈계하고, 이를 통해 진리를 알게 하는 설교이다(딤후 2:24-2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의 인격을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지면에서는 비록 설교의 준비 및 전달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했지만, 목회 현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진행된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시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고후 3:3). 잉크가 아닌 성령으로 말이다. 그러한 놀랍고 거룩한 사역에 적합한 이가 누구일까? 바로 주님이 부여하신 자신감과 능력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이는 결코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전달 능력에 의지해서는 이룰 수 없는 사역이다.그러므로 설교자들이여, 하나님께 겸손히 의지하라. 주님의 힘에 기대어, 그분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감동하도록 설교하라. 그리고 뒤따르는 모든 영광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돌리라. 출처: www.9marks.org원제: Preaching from Head to Heart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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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회를 무엇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by 고상섭
2019-06-07
목회자의 마음을 항상 따라다니는 질문은 “내가 목회를 잘 하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지만, 자칫 잘못된 기준으로 돌아보면 열등감이나 무기력에 빠질 위험이 있다. 팀켈러는 ‘센터처치’ 사역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의 잘못된 목회 기준을 지적하고, 건강한 평가를 위한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잘못된 평가 기준 1: 성공(Success) 우리는 목회의 기준을 ‘성공’ 또는 ‘성장’에 두는 경우가 있다.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nderson McGavran)의 책을 필두로 실용주의에 기인한 미국의 ‘교회 성장학’이 들어오면서, 국내 목회 현장에서는 교회의 성공과 성장을 '수치'로 계산하고 또 평가하기 시작했다. 교인의 수, 헌금 액수, 건물의 크기 등으로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성공'을 수로 정의하는 교회에서는, 매주 당회가 시작되면 출석 통계와 헌금 액수를 평가하고 분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성공이 평가의 기준이 될 때, 목회자의 관심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는 일에 집중된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는 물론 긍정적인 결과지만, 반면 전체 사역의 초점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에 맞춰질 위험이 따른다. 또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양적으로 부흥할 수만 있다면, 목회자의 성품과 하나님의 주권 같은 중요한 요소들은 무시되기도 한다. 더불어 성공이라는 잣대가 목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면, 양적으로 부흥하지 않는 교회와 그 목회자는 큰 스트레스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잘못된 평가 기준 2: 충성(Faithfulness) 목회를 교인의 수나 돈으로 계산하는 것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다른 평가의 조건으로 '충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에 있어서 ‘충성’ 이라는 요소는 무척 중요하다. 바른 목회자는 교리에 충실하고, 성품은 경건하며, 설교와 목양에 신실해야 한다. 그러나 충성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열정적이지만 성공적이지 않은 모델에 대한 반성이 사라지게 된다. 즉 정말 열심히 충성스럽게 목회를 함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부족해서 능률이 오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사역자가 되려면 충성됨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학교에 지원하는 사람들을 불합격으로 처리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고 또 가장 고된 일이라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정작 아무것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지원서를 대부분 불합격으로 처리했다.” 그는 지원자들이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지만, 정작 그들을 통해서 “아무일도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즉 목회에는 충성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전도서에 기록된 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혜’없는 충성이 부르는 효과적이지 못한 결과를 떠올릴 수 있다. 팀켈러는 목회 평가의 기준을 오직 ‘충성’에만 둘 때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 “사역자의 책임을 경감시키고, 목회자가 반드시 던져야 하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지 않게 한다”라고 말했다. 비록 이 모델은 성공이라는 잣대보다 신실해보이지만,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가질 수 있다. 바른 평가의 기준: 열매(Fruitfulness)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궁극적 평가의 기준이 ‘열매’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이 ‘열매’라는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 위에서 언급한 성공과 충성의 뜻으로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첫째, 열매는 회심한 사람을 의미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둘째, 열매는 경건한 성품을 의미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 5:22).셋째, 열매는 선한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롬 15:28).이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향한 자비와 구제 같은 선한 행동을 ‘열매’라고 표현했다. 위의 예들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 속 ‘열매’라는 표현이 성공과 충성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매’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원예의 비유’이다. 바울은 목양을 원예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밭’이라 말했다. 이때, 어떤 사역자는 씨를 뿌리고, 어떤 이는 물을 주며, 또 어떤 이는 열매를 거둔다. 원예의 비유는 성공과 충성이 사역을 평가하는 최선의 기준이 아님을 말해 준다. 원예사는 반드시 충성되게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어떻게 일하는지도 중요하다. 즉 충성과 함께 최고의 실력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수의 결과는 원예사의 손을 뛰어넘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먼저 열매의 성취는 ‘흙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어떤 집단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딱딱한 마음 밭을 갖고 있다). 또한 ‘기후 상태’도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날씨는 주권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 11:14). 사역이라는 밭에서 풍성한 추수를 거두려면 최고의 기술과 최선을 다하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실과 기술만으로 추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흙의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한 이른비와 늦은 비 그리고 햇빛의 적절한 제공이 없다면, 풍성한 추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회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목회란 ‘각 사람’, 즉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신도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하지만, 바울은 그 수고를 이끄는 분이 바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목회의 평가 기준이 성공과 충성을 넘어 열매가 될 때, 우리는 분명한 책임 의식을 갖게 됨과 더불어 내 힘으로 성도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켜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하게 된다.
목회
리더십
성공
충성
찰스스펄전
열매
책임의식
사도바울
회심한사람
경건한성품
나훔을 읽어야 할 이유
by Mark O’Donoghue
2019-05-31
나훔은 구약성경에서 단 세 장밖에 차지하지 않는 분량에 비해 강력한 메시지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다. 나도 다른 교회에 가서 나훔 설교를 하게 되면, 청중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혹시 나훔에 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최근에라도 나훔을 읽어본 적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실래요?” 이러한 나의 경험에 비춰보더라도 그렇고, 관련 리서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실제로 나훔에 관한 설교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선지서에 관해 묵상하거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그토록 드물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나훔의 일곱 가지 특징을 소개하고 이 선지서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1. 나훔은 요나가 미처 들려주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책이다성경에는 두려운 앗수르 제국의 수도, 곧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과 이에 불순종한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비록 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요나가 단번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는,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4:1-2).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심판하지 않으실까봐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그런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나훔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등장하여, 요나와 마찬가지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한다. 이때는 요나 당시의 앗수르인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요나를 통해 그 세대가 일으켰던 진실한 회개 운동도 더 이상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의 마음을 상실한 채, 잔인한 정복 전쟁과 주변국들에 대한 약탈 및 압제를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니느웨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곧이어 남유다에 대한 습격을 전개했으며, 마침내는 예루살렘에까지 포위 공격을 퍼부었다. 이 끔찍한 고통의 시대에 나훔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이처럼 성경은 요나를 통해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면, 나훔을 통해서느 죄악을 관용치 않으시는 그분의 성품을 보여 준다(출 34:6-7). 2. 나훔은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해 주는 책이다나훔이 1장 9절에서 던지는 질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문장이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에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라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언급되는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대적'뿐 아니라 그 '백성'도 함께 다루는 문맥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품으신 생각과 대적에 대해 품으신 생각은 마치 1장 10절에 묘사된 표현처럼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나훔은 하나님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가지는 통념 내지 일반적인 전제에 도전하며 우리의 이해를 교정해 준다.3.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훔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이로서 그분을 소개한다(나 1:2). 이는 결코 우리가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자신에게 속한 영광을 위해 마땅히 품어야 할 질투를 드러내신다.아마도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앗수르 군대가 거침없이 남유다로 진격해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과연 하나님이 그 순간에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과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행위로 나타난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라도 그분의 행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실지라도, 그 모습은 무력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인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심판의 그림자를 앗수르에 드리우듯, 인내하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 제국을 무참히 멸망시키신다. 나훔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심판을 늦추지 않고 질투하며 보복하실 때, 어떻게 그 의로운 분노가 표출되는지를 생생한 야생의 모습과 전장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전달한다(나 2-3장).4. 나훔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이다세상 사람들은 911테러나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묻곤 한다. 또 많은 크리스천들도 왜 세계 곳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나훔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준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분노가 매우 강렬해서, 바다를 뒤엎고, 비옥한 땅을 메마르게 하며, 산과 언덕을 떨게 만드는 광풍과 같다고 묘사한다(나 1:3-5).또한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나 1:6). 이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명백하다.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 아무도 맞서 상대할 수 없는 대상은 그 어떤 제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인간적인 힘으로 이루고자 했던 제국의 꿈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나 3:8-10).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한 이상,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듯하더라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 3:12-19).5. 나훔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다나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만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을 향한 평안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나훔’은 평안을 의미한다. 이는 저자의 이름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책의 특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전개되는 이야기와 메시지는 평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게 하는 성경의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1장 1절에서 언급되는) “엘고스”라는 지명조차 격분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히브리 식의 언어 유희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나훔은 그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혹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겪는 박해라든가, 좀 더 일상적으로는 다양성을 강요하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또는 복음을 전하면서 마주하는 적대 등,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훔은 그분이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에 민감하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대적의 능력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신다(나 1:7-2:9).더 나아가 나훔은 그 모든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 통해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들을 돌보시며, 고난 속의 유일한 요새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즉 앗수르 대군과 같이 거대하게 밀려드는 고난 앞에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6. 나훔은 구원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하는 책이다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법적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그 한분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하나님께 대적하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본다.이처럼 나와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정의가 회복되리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또한 우리와 끝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을 즐거움으로 붙들 수 있으며(마 28:20), 더 나아가 그분이 우리의 적군, 곧 사탄과 죄악 및 죽음을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승리가 모든 이에게 알려질 그날을 대망한다.나훔의 이야기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를 자신의 대적으로 삼은 니느웨의 무모함과 그 심판을 떠올리며(나 2:13; 3:5),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며 겪은 고통과 수치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절규하실 때, 그분은 대체 어느 만큼의 고통을 견디고 계셨을까? 이렇듯 나훔은 하나님의 대적이 느끼게 될 괴로움과 수치를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내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7. 나훔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책이다결국 주전 612년, 나훔의 예언이 기록된 지 이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앗수르는 완전히 멸망한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난공불락의 수도였던 니느웨도 역사의 저변에 묻혀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흔적은 1842년, 고고학자들이 이라크 모술에서 잔해를 발견함으로써 다시금 우리에게 회자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니느웨의 소멸에 대해 우리는 경탄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바벨론의 무너짐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정의로운 심판에 기뻐 찬양하듯이 말이다. 나훔은 이러한 종말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임하리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최종 승리를 확정하실 그날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까지, 지금의 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7 Reasons You Should Preach through Nahum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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