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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피아프처럼’ 절규한다
by 필립 정
2023-05-19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연주곡 ‘새들의 노래’는 온갖 새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캐럴 곡이다. 그런데 마치 장송곡같이 어둡고 슬픈 느낌이 난다. 조국 카탈루냐를 독재자 프랑코에게 빼앗긴 카잘스의 마음엔 즐거운 새들의 노래조차 슬픈 마이너 코드처럼 들렸나 보다.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바랐으면, 그는 이 곡을 연주하기 전 “하늘의 새들이 평화, 평화라고 노래한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한 천재 음악가의 감정 이입이 아니라 실제 우리 주위의 수많은 동식물이 죽어가며 슬픈 목소리로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지기 전에 인간에게 전해 줄 메시지를 전하고 간다. 마치 죽어가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던지고 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처럼 말이다. 혐오와 폭력, 그리고 복수때로는 인간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들이 섬뜩한 광기를 동반한다. ‘유대인은 나쁜 인간들’이라는 편견이 나중에는 유대인과 같이 살 수 없다며 폭력으로 이어졌듯이 ‘야생 동물은 무섭고 더럽다’는 고정 관념도 그런 식으로 폭력으로 이어져 왔다. 지렁이 한 마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밟아 버리고, 스쳐 지나가는 쥐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지른다. 이런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되고 주입이 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뱀을 악하고 무서운 존재로 교회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뱀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처럼 고정된다. 다른 벌레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많은 벌레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불린다. 베드로조차도 벌레를 먹으라(이방인에게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거절할 정도로 그 잘못된 신앙과 같은 고정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했다. “어린양과 사자들이 뛰어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이사야 35장)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매일 자연을 대하는 게 내 직업이다 보니, 이 말씀이 전혀 비현실적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한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뱀에 대한 편견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이미 뱀에 대해 학습된 3세 이상의 아이들은 뱀을 무섭다고 피하였으나, 겨우 젖을 뗀 3세 미만의 아이들은 전혀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접근하였다고 한다. 잘못된 학습에서 비롯된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뭇 심각하게 봐야 한다. 즉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의 반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결코 아니고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라 가인의 후손의 통치 방식(폭력)이 반드시 수반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이렇게 편견에서 혐오와 폭력으로 파괴되어 왔다.인간은 자연에 감당치 못할 폭력을 행사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모기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게 되돌아왔다. 모기는 치명적인 지카 바이러스, 말라리아, 일본 뇌염, 뎅기열,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같은 바이러스를 옮겨 연간 7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래서 엄연한 해충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래서 사용된 최고의 살충제가 DDT이다. 우연히 개발되었지만, 후에 모기 살충제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1930년대 이후 DDT를 사용한 국가(베네수엘라, 인도, 아프리카 국가 등)에서 말라리아 환자가 사용 이전에 비해 수천수만 배로 줄어들었다. 모기만이 아니라 개미, 거미, 진드기, 벼룩, 빈대, 심지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까지 완벽하게 제어하여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널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후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DDT와 그 이상의 독성이 있는 살충제의 무분별한 살포로 각종 벌레가 사라지고 이를 먹이로 하는 새들이 오염되어 멸종되고 있었다. 새봄이 되어도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1962년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 Carson, 1907-1964)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 이런 폐해의 경고가 잘 드러나 있다. 1991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각국 사람의 체내에 DDT를 비롯한 각종 농약 성분이 발견되었고 남극 지방의 펭귄이나 크릴 새우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달걀에도 농약이 남아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동물의 68퍼센트가 사라졌다. 아마존 열대우림 지대의 광산 개발, 대규모 경작지 개발로 라틴아메리카에서 94퍼센트의 동물이 사라졌다. 식물들의 수분 매개 역할을 하는 동물들이 급격히 사라지자 식물도 40퍼센트 넘게 멸종 위기에 처했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다. 식물이 없으면 동물도 살 수 없다. 연쇄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다. 말을 못 하는 자연은 그렇게 죽음으로 인간에게 되갚아 주고 있다. 여전히 돈을 섬기는 시장 숭배자들에게 자연은 막대한 재산과 생명의 피해로 돌려주고 있다. 뛰는 농산물값, 물과 불로 휩쓸려 가는 산림, 온대 지역 열대화에 따른 열대 박쥐들의 온대 지역 출현,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세상…. 수백만의 생명이 사라졌고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자연이 인간의 폭력을 제대로 되갚아 주고 있다. 세상은 사랑을 노래하며 그렇게 죽어간다뜬금없이 한 가수의 이야기를 해야만 될 것 같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자면 고통이 함께 따른다. 그녀의 삶을 알고 나면 더 그렇다. ‘팬텀싱어 시즌 4’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오.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한 테너 가수가 너무 멋지게 불러 그녀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달이라도 따오고, 큰돈이라도 훔치고, 조국도 친구도 버릴 수 있어요.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이 노래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고 도저히 더는 노래할 수 없었지만, 다시 노래하기로 결심하고 작사한 곡이다. 그녀의 다른 노래, ‘장밋빛 인생(Ra Vie en Rose)’도 그렇고, 가사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원하지 않는 아이로 태어나 영양실조와 치명적인 병을 견디고 살아온 그녀,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 그리고 사별과 이별, 여러 번의 교통사고로 인한 고통,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한 모르핀 치료, 그리고 모로핀 중독으로 죽음까지…. 그래서 분명히 희망차게 사랑을 노래해도 슬픈 탄식의 노래로 들릴 뿐이다. 슬프지만 그래도 사랑을 노래하니 사랑의 노래다. 카잘스의 새들의 노래가 아무리 우울하게 들려도 새들의 노래인 것처럼….사람들은 그녀를 ‘노래하는 피아프(참새)’라고 불렀다. 이 별명이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새들도 분주하게 하늘을 날며 짝을 찾아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풀벌레도 허공을 향해 구애를 하고 공작도 사랑의 날갯짓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새들이 울면 천적에게 자기 위치를 노출해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직 어두운 새벽에 그리 울어 댄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연장된 삶에 필요한 언어들을 허공에 지저귄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얘기라 고되고 힘들지만, 새끼들과 연인들을 향해 염려하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죽음의 위협 속에 다른 할 얘기가 없다.피아프는 남자에게 배반당하고 피해를 보고 죽어가면서 또 다른 남자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다. 인간은 자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살려 내야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죄성을 가진 타락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으니 자연이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인간이 다 사라져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리석은 자연은 끝까지 인간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그래서 동물들은 생명의 위협에 처하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 상어에게 쫓기는 물개가 어선에 뛰어들어 살려 달라고 갈구하고, 낚싯바늘에 걸린 상어가 잠수부에게 다가와 입을 벌려 도움을 찾는다. 혹한에 처한 다람쥐는 사람이 사는 집의 문을 두드리며 쉬어 가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갈증에 지쳐가던 커다란 코브라가 입을 벌려 사람이 주는 물을 받아먹고 얌전히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간다. 길 잃은 새끼사슴이 마음씨 착한 아저씨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틈틈이 찾아와 고맙다고 표현한다. 어린 까마귀를 돌보아 주자 이 까마귀는 빛나는 돌, 유리를 물어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다. 병에 머리가 낀 붉은 여우가 제 발로 사람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청한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자기 체험적인 선지식에서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이 나무의 열매를 먹어 이제 죽게 되었구나’ 하는 식이다. 플라스틱을 개발하고 200년이나 지나서야 ‘이것을 써보니 해양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우리 몸은 병들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아담의 후예다운 탄식이다. 온갖 벌레와 새들이 그 지구의 위기를 노래로 말해주고 도와 달라고 해도 전혀 모르다가 인류가 멸망하게 되어서야 그 비참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만물의 탄식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인 게다. 자연은 인간을 찾아와 애타게 자기들의 언어로 무엇인가 호소하고 탄식하다가 어디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피아프가 사랑을 노래하며 사라져 갔듯이 자연도 죽어가며 사랑과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어찌 이 노래를 들으며 기도하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파블로카잘스
에디트피아프
참새
새들의노래
피조물의탄식
끝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
by 정현구
2023-05-16
현대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을 일상의 삶에서 격리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장례문화는 죽음을 눈앞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가족들의 눈물 어린 눈길 가운데서 숨을 거두기보다, 병원 중환자실이나 특수병동의 낯선 공간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도회지는 무덤을 외곽으로 옮겨 놓고, 병원은 영안실을 잘 안 보이는 뒷부분에다 둡니다. 모든 공간을 가능한 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만으로 채색하려 합니다. 그래야 생명으로 충일한 생동하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삶은 죽음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가는 것입니다.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도서 7:2).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잔칫집은 현재의 즐거움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망각하게 하지만, 초상집은 인생의 마지막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현재를 더욱 의미 있게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호스티스와 호스피스‘호스티스’와 ‘호스피스’란 두 직종이 있습니다. 호스티스는 밤의 화려하고 달콤한 쾌락 속에 사람들을 취하게 해서 인생의 밤, 인생의 마지막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스피스는 투병하는 사람의 병상 곁에서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분명히 눈뜨게 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닫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 호스티스와 호스피스, 죽음의 망각과 죽음의 기억, 어떤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만들까요?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받을 때 먼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하나는 ‘당신은 당신의 묘비에 어떤 말이 쓰이기를 원하십니까?’이고, 또 하나는 ‘당신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두고 사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며 살게 하고, 현재 살아가는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하고, 유언장을 미리 쓰게 합니다.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의 책 ‘죽음, 알면 이긴다’(샘물)에는 그의 유언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 유언장에는 자신이 살면서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한 유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소유물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신체와의 관계에 대한 유언들입니다. 그 유언장의 일부입니다. 저의 천국환송예배 때 이 글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 안식하기 위함이니 너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세상 고생을 다 끝내고 평안히 쉬고 있는 저를 생각하면서 기뻐해 주십시오.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방황하던 죄인을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고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며 살다가 저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하신 주님, 그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뵐 것을 생각하니 기쁨으로 벅찹니다. 주님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제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것 용서해주십시오.…둘째, 사랑하는 이들에게. 여보, 먼저 좋은 곳으로 가는 나를 용서해주오. ‘내 남편에게 휴식이 필요했는데 이제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쉬겠구나’ 생각하고 위로받기 바라오. …셋째, 소유물에 대하여. 제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샘물호스피스복지재단을 만들어 귀속시켜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저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다가 떠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유서와 유언장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이렇게 유언장을 미리 쓰고 살면, 주어진 삶을 더 잘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삶을 삽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때늦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전체로 보게 됩니다. 살다 보면 현재에 파묻혀 인생을 길게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을 미리 생각하고 살아가면, 삶의 목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루하루를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늘 생각하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무엇보다 준비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출생을 준비하고, 입학을 준비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취직을 준비하고, 노년을 준비합니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유서를 쓰지만,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유언장을 씁니다. 아름다운 끝을 마음에 담고서 매일을 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영생을 향한 새 출발임을 알기에 더욱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유언장
유서
호스피스
죽음
마음의 명령에 뇌와 몸이 순종하기를
기독교 세계관의 마음-뇌-몸 관계
by 김경호
2023-05-14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인간은 마음 안에 영혼을 지닌 지-정-의로 이루어진 존재다. 또한 인간은 뇌와 몸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은 마음, 뇌, 몸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마음 안의 영혼을 전제로, 뇌와 몸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이 관계를 잘 설명한다. 영혼은 인간 삶의 원리이자 주체이고, 마음은 그 생명의 근원이다. 하지만 우리의 궁금증은 더 많은 설명을 요청한다. 마음은 사실 뇌의 기능이 아닌가?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면 몸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분야에 노련한 작은 거인들이 있다. 이제 이 작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보자. 원리: 마음속 영혼의 명령을 따르는 머리(지), 가슴(정), 손(의)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 데니스 홀링거Dennis P. Hollinger는 마음을 머리, 가슴, 손 ‘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와 가슴과 손이 흥겹게 합주하는 악기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파편화된 신앙, 파편화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머리 신앙)은 개인 경건을 얄팍한 감정이라고 비난한다.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가슴 신앙)은 역동적인 내면의 경험을 중시하며, 지식이나 이해 추구를 비난한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손 신앙)은 경건을 믿음 있는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이 세 가지 신앙은 분리되고 한 가지 차원만 강조할 뿐, 나머지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파편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머리, 가슴, 손 신앙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머리 신앙. 머리 신앙은 회심, 성장, 세상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머리는 회심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성의 변화 없이는 진정한 회심은 불가능하다. 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에도 중요하다. 성장의 핵심에 바로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왜곡된 머리 신앙도 있다. 사고를 소홀히할 때 감정이 지배하는 신앙에 머물게 되고 이단을 낳기 쉽다. 또한 지성을 깎아내리게 될 때 세상에 개입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게 된다. 사고가 모든 것에 우선할 때도 머리 신앙은 냉랭한 죽은 정통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생동감이나 자발성, 그분과의 임재 의식을 잃어버리기 쉽고, 자기기만에 빠지며, 결국에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다.가슴 신앙. 가슴 신앙은 의지, 애정, 느낌, 이해, 이렇게 네 가지 차원의 형태를 띤다. 먼저 ‘의지’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내면의 결단이다. ‘애정’affection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내면의 성향이나 방향성이다. ‘느낌’feeling은 우리가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 사람이나 사상에 반응하며 경험하는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이해’는 지식과 지혜의 개념과 연결된 지식을 적용하는 분별력이다. 그러나 왜곡된 가슴 신앙도 있다. 가슴을 소홀히 할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부재가 나타난다. 또한 도덕적 성품이 결여하고, 결국 율법주의로 빠져들고 만다. 가슴이 모든 것에 우선할 때, 다시 말해 지나치게 내면 상태에만 집중하면 내면의 상태가 신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가슴은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왔다 갔다 한다. 또한 과도한 가슴 신앙은 이단에 빠질 소지가 있다. 손 신앙. 손 신앙이란 몸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화된 신앙이다. 기독교 영성은 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몸 안에서의 자유다. 이처럼 기독교에서는 몸이 중요하다. 창조는 물리 세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러나 왜곡된 손 신앙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선물인 몸 자체도 잘못된 고유한 충동과 경향을 지닐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몸을 오용할 수 있다. 행동을 소홀히 여길 때, 기독교가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실된다. 또한 행동이 최고가 될 때, 손 신앙은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기 의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행위에 치우친 신앙은 피상성과 맹목적 헌신으로 끝장난다. 결론은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신 6:5) 머리와 가슴과 손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원리를 따라 뇌와 몸에도 적용해 보자.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 캐롤라인 리프Caroline Leaf는 다음과 같이 마음-뇌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변화된다. 그렇다. 당신의 마음이 바로 그 변화의 스위치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혼의 좌소인 마음을 전제로 뇌가 작동하고 실천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상 용어가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마음은 뇌의 전제이고, 뇌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즉 마음이 뇌에 물리 변화를 일으켜 마음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과거에는 “마음(생각)은 두뇌 활동의 산물이다”라는 입장이었다면, 최근의 입장은 “두뇌는 마음의 명령을 따른다”는 입장이다. 리프는 이에 대한 근거를 설명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미 마음속에 담긴 무언가가 밖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1)무의식 상태에서 어떤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분석한 결과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린다. (2)이후에 그렇게 결정한 내용(생각)을 마음에 저장한다. (3)이렇게 저장된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두뇌 활동은 뇌의 기계적인 작용이 아니라 무의식에 저장된 정보를 처리하여 생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즉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의 지적 정보처리 과정이다.좀 더 전문적으로 도식화해 보자. 그 매커니즘은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 의식적 인지 단계, 상징적 결과물 단계로 나누어진다. (1)첫째,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떠오르고 조직되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 뇌는 하루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활동한다. (2)둘째, 의식적 인지 단계에서는 초당 2천 가지 활동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적 인지 단계는 무의식적 메타인지 단계에 의해 통제받는다. (3)마지막 상징적 결과물 단계는 오감을 통해 자기 의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마음)를 연결한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적 메타인지-의식적 인지-오감(말과 행동)은 끊임없는 사이클로 반복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뇌 활동은 무의식 상태에서 지적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고, 의식 상태에서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황농문 박사의 책, 몰입에서 그 예를 잘 보여준다. 황농문 박사에 따르면, 몰입적 사고로 계속해서 문제를 반복해서 생각하면, 뇌가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고도로 활성화된 장기기억을 활용하게 된다. 즉 잠을 자면서도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본인은 그 생각이 우연히 떠올랐다고 보지만, 사실상 무의식의 상태에서 계속해서 뇌가 문제를 풀고 있던 것이다. 이런 떠오르는 경험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의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아르키메데스는 순전한 금관인지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몇날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목욕하던 중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갑자기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물질은 비록 무게가 같더라도 부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은이 섞인 가짜 금관은 같은 무게의 순금으로 만든 금관보다 부피가 클 것이며 따라서 금관을 욕조에 넣어서 차오르는 물의 양을 비교하면 금관에 은이 섞였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을 깨닫게 된 아르키메데스는 너무 기뻐서 옷을 입는 것도 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외쳤다. “유레카!” “부력의 원리를 알아냈다!” 이는 무의식(뇌)-의식-표현(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결과다.적용 2: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몸 사이먼 로버츠Simon Roberts는 뇌가 아니라 몸이다에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에 대해 소개한다. 제목처럼, 로버츠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능력이 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 감, 감각, 직관 등과 같은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을 지닌 몸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과 몸을 지닌 개혁주의 인간론에 따라, 마음을 전제로 뇌와 몸이 마음-뇌-몸의 순서로 작용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적용 1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와 몸이 변화된다는 성경적 전제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몸도 마음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다 나은 몸에 대한 사유가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소유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에 일종의 “주종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스마트 폰을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경우를 “소유의 역전 현상” 즉 “나의 소유가 나를 침해한다”고 본다. 핵심은 가진 사람과 가짐을 당한 물건 사이의 주종관계다. 따라서 마음은 주인이고 소유된 몸은 종이어야 한다. 이러한 주종관계라는 전제 안에서, 마음을 따르는 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바로 생각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보, 능숙, 숙련, 전문가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자. 여기서 ‘초보’는 가장 간단한 단위로 쪼개 학습하는 수준이라면, ‘능숙’은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수준이고, ‘숙련’은 이성적 반응에서 본능적 반응으로 대처할 수 있고, 쪼개지 않고 전체적으로 대처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이며, 마지막 ‘전문가’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 즉 수행해야 하는 일에 덜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하는 일 ‘속’에 있다고 느끼는 수준이다. 나는 이것을 주종관계가 분명한 “몸의 자동성”이라고 본다. 마음의 명령에 따라 뇌와 몸이 순종하는 것! 이것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세계관
마음
영혼
지정의
몸
내 아들의 짧은 삶은 헛되지 않았다
by John Musyimi
2023-05-07
투기 음부구와 무시미는 9개월 동안 우리 가족이었다. 2022년 7월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내 아내의 자궁에서 그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투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 부부는 흥분했다.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켜달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매달 의사를 만나면서 우리는 투기가 화면 속 작은 콩 모양의 깜박임에서 완전히 사람의 형태를 갖춘 아기로 커가는 것을 보았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고 또 자궁에서 움직이는 투기를 느꼈다. 힘찬 발차기와 강한 심장 박동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아들의 모습을 기대하게 했다. 스캔을 통해서 우리는 3D로 만들어진 투기의 얼굴 이미지를 받았는데, 나는 아기가 나와 똑 닮았다고 결론지었다. 아내는 내 의견에 약간의 반발을 보였지만, 적어도 입술만은 무시미 가족이 가진 유전자의 힘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아기에게 다섯 번째라는 의미의 “T5”라는 별명을 붙였고, T로 시작하는 이름을 찾는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주로 아이디어를 내는 건 나였고, 그중 대부분은 폐기되었다. 아기의 형제인 타지, 타미, 티아, 그리고 탄도, 하나 같이 T로 시작하는 녀석들이 제안한 몇 가지 이름도 하나 같이 다 정중하게 거절되었다. 아이들은 새 가족을 맞을 기대에 부풀어 다들 매우 기뻐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T5”라고 불렀지만, 아이들은 그냥 “아기”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아기에 관해서 수백 개가 넘는 질문을 쏟아냈다. “아기는 무엇을 먹나요?” “아기도 말을 하나요?” “아기가 지금은 자고 있나요?” “아기는 언제 나오나요?” “아기는 어떻게 나오지요?” (마지막 질문에 잠시 어색한 침묵으로 대응하던 아내와 나는 “숙제 끝냈어?”라며 화제를 돌렸다.) 투기의 직속 전임자, 그러니까 바로 위 형제인 탄도는 투기를 위한 전용 녹색 컵을 선물로 준비했다. 아이들은 항상 투기에게 “안녕, 아가야”라고 말했다. “안녕, 아가야.” “아가야, 잘 자.” 투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선사했다. 투기는 사랑받았고 보살핌을 받았다. 또 투기에게는 좋은 환경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2023년 3월 22일이 되었다. 떠났다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 뱃속을 돌아다니던 투기가 탯줄을 목에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갔다.아내 뭄비는 그날 투기가 평소보다 덜 움직인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아내는 그녀의 할머니와 함께 투기 출산에 필요한 마지막 준비를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기에 투기가 자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38주가 되면 자궁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한 아기의 움직임이 줄어드는 건 흔한 일이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음날 의사에게 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의사를 만났다. 첫 번째 스캔,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스캔,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문제가 있습니다.” “아기가 죽었습니까?”“네.”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괴로웠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았다.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주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들은 그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 칸 병원 산부인과에서 아내의 힘든 진통과 분만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미 죽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남다른 강인함이 필요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아내는 그 과정을 이겨냈고, 24시간 후에 우리는 어린 투기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장례 예배를 드렸고 우리는 시신을 랑아타 묘지에 묻었다.투기를 보낸 우리는 임마누엘 침례교회 성도들에게서 특별한 위로와 보살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보살핌은 계속되고 있다. 기도와 심방, 전화와 문자, 음식 배달, 경제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친척들도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를 섬겼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과 지원을 제공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 중에 이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투기의 삶은 품위와 가치로 가득했다. 자궁에서 살았던 268일 동안, 투기는 우리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해주었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1. 투기는 우리 가족이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감사하게 만들었다. 자궁 스캔이라는 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복잡하고도 지혜로운 경이로움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2. 투기는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투기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쁨이었다. 심장 박동 소리, 발차기와 움직임, 3D 스캔의 얼굴 사진, 태어날 때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린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다. 3. 투기는 우리를 기도로 이끌었다. 투기는 우리 기도 속 간구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건강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투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4. 투기는 우리 결혼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투기를 임신한 내내 우리 부부는 서로를 섬길 많은 기회를 얻었다. 투기가 없었다면 하나같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른다.5. 죽음을 통해서, 투기는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복음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투기를 통해서 우리는 아들을 잃은 또 다른 주인공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의 죽음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은 그가 잃은 아들을 통해서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고 죽도록 내어 주셨다. 그의 죽음은 투기의 죽음과 달리 사고가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대속하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무덤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부활은 언젠가 투기 또한 우리와 함께 부활할 것을 보장한다.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으로 우리는 투기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할렐루야!투기의 삶은 짧았지만, 결코 허사로 끝난 게 아니다. 투기의 삶은 결코 낭비된 게 아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되었지만, 투기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우리 부부는 비록 고통의 먹구름 아래를 지나야만 했지만, 주의 백성을 통해 주님의 깊은 긍휼을 체험했다. 슬픔도 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 갑작스러운 투기의 죽음에 마음이 상한 우리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몽둥이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고백할 뿐이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어린 아들을 잃은 다윗 왕이 내린 결론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삼하 12:23).잘 가라, 아들아!원제: My Son’s Short Life Was Not a Wast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자녀의죽음
고통
어린 아이들과 같이
by Jared Kennedy
2023-05-05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물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 18:1).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9:46-48은 제자들이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다고 말한다. “내가 가장 큰 사람인가요? 내가 승진할 사람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 당신이라면 이렇게 지나치게 야심 찬 목회 후보생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질문에 반문화적인 대답으로 반응하신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라.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라.”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환영하는 일은 예수님에게는 로비나 지정된 가족 출입구에 놀이터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좋은 간판을 달거나 아이들의 이름을 환하게 웃으며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를 환영하는 일은 바로 어린아이의 자세를 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서로 누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제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한 아이를—제자들 중 한 명의 아이 일수도 있다—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겸손에 대한 반문화적 부름예수님의 시대에 유대인은 우리 문화와 같이 가족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구약은 자녀를 주님이 주시는 유산이자 상급으로 묘사한다(시 127:3). 그만큼 자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신 언약의 중심 역할을 했다(창 3:15, 12:2, 15:5). 동시에 유대인은 아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거버 유아식 광고나 베이비 갭 매장, “이 달의 아기” 달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구약을 포함한 당시 유대 문학은 청소년과 어린아이를 일관된 훈육과 시정이 필요한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현실적이게 묘사한다. 주디스 건드리(Judith Gundry)가 쓴 것처럼, 유대 문학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성인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이고, 그리스-로마 환경[당시 점령 문화]에서 아이들과 비교되는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대답하여 그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성숙과 지혜는 나이와 함께 쌓인다. 그렇다면 왜 반대로 가야 할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8:4-5).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들과 같이 되라고 요구하셨다. 또한, 돈 카슨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이상으로 높여지고 있다. 무죄, 깨끗함 혹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겸손함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기를 예수님이 바라신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똥을 싸고, 울고, 말썽을 부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어린아이들처럼 자신들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길 바라셨고, 우리 또한 이 사실을 깨닫기 원하신다. 지위에 대한 관심 내려놓기 어렸을 때 넘어져 앞니 두 개가 빠진 적이 있다. 덕분에 이제 그 자리엔 인공 치아가 있다. 최근 어느 토요일 밤에 어디에 부딪혀 그 중 하나가 흔들렸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다음날 아침 예배 시간에 주일학교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한창 가르치고 있을 때 한 남자 아이가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목사님! 이빨이 빠졌어요!” 그 아이 말이 맞았다. 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앞니가 빠졌다! 이런 부족한 순간들을 통해 나는 내가 이끄는 아이들만큼 엉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필요하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처럼 요즘 시대의 제자들도 본인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복음적인 책들을 읽고, 제자훈련을 받고, 종종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수천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있어야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을 받아야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정과 교만에 빠지는 우리의 경향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C. S. 루이스는 겸손의 명령을 이해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중심적인 지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정말 겸손한 사람을 만난다면 ‘요즘 사람들이 흔히 겸손하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저야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요”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느끼하고 역겨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인생을 너무 쉽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약간의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처방은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몸을 굽혀 낮은 자들, 특히 “작은 자들”(마 18:10)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이끌린 삶의 모습이다. 결국, 예수님은 몸을 굽혀 제자들을 섬기심으로써(요 13:1-17; 빌 2:1-11), 우리를 섬기기 위해 몸을 굽히심으로써 겸손을 받아들이셨다. 이제 우리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낮은 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영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요일 4:19).원제: Be Like Children: Jesus's Surprising Advice for Growing in Christian Matu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창호
어린이
겸손
성숙
죽는 날이 더 좋은 그런 삶을
by 정현구
2023-05-04
인생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 더 좋은지를 죽음이라는 순간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곧 ‘좋은 기름’을 가진 사람(전 7:1)은 태어난 날을 크게 잔치하며 해마다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을 곧 현재를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에게 죽음의 순간이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름을 다 앗아가는 순간 더도 덜도 아닙니다.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곧 ‘좋은 이름’의 사람은 어떠할까요? 그에게는 태어난 날도 귀하고, 현재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귀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게 될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시간도 복되지만,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은 더욱 복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은 날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바울 사도는 자기 생명의 촛불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최선을 다해 주어진 길을 힘써 달린 자신을 맞이하실 의로운 재판장 예수님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가장 복된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요?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얻은 날보다, 또 지금 살아가는 현재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그날 곧 죽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내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최후의 순간은 곧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으로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우리도 바울처럼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고 더 축하해야 할 날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태어난 날도 좋지만 죽는 날이 더 좋은 그런 인생이 될 때, 또 살아있는 이 순간도 좋지만 죽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이 더 좋은 그런 사람이 될 때, 그런 인생이 진정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전도서
죽는날
복된인생
좋은이름
좋은기름
하나님의 설계에 충실한 제자훈련을 위한 ‘이중 귀 기울임’
by 최창국
2023-04-29
제자훈련은 단지 성경과 교리의 지식 습득이 아니라 성경과 세상(요 3:16), 영성 형성과 삶의 형성 두 지평의 연결이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 만물을 모두 포함한다. 제자훈련은 하나님과 인간, 성경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자훈련을 위해서는 존 스토트가 강조한 ‘이중 귀 기울임’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이중 귀 기울임은 하나님과 복음을 신실하고 효과적으로 세상과 연결하기 위해 성경과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과 관계된다. 스토트는 이중 귀 기울임은 먼저 ‘이중 거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열중해서 세상을 직면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으로 도피하는 것과 세상에 너무 몰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못할 만큼 순응하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도피와 순응은 정반대의 실수이지만, 이 둘 다 기독교적 선택은 아니다(존 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33-34). 그는 우리는 이런 이중 거부 대신에 이중 귀 기울임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귀 기울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 때는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애써야 하지만, 세상에 귀 기울 때는 비평적 자세와 세상의 처지에 공감하며 복음이 어떻게 세상과 관련되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며 들어야 한다. 그는 이런 이중 귀 기울임을 통해 신실하고 민감하게 말씀과 세상을 서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 두 지평을 연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함과 세상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야 한다. 즉, 거짓된 적실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도 안 되지만, 말씀에 대한 신실함이란 미명 아래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의무 중 하나를 희생하면서 다른 하나를 성취하면 안 된다. 말씀에 대한 실실함과 세상에 대한 민감성을 조화시켜야 진정한 제자훈련이 가능하다. 제자 훈련은 세상 속에서 제자도의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트의 이중 귀 기울임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비평뿐 아니라 공감 행위와도 관계된다. 그는 세속 사회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 혼란과 절망에 공감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에 대답하고, 아무도 가려워하지 않는 것을 긁어 주며,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293-94). 그가 이해한 이중 귀 기울임은 한편의 귀로는 성경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의 귀로는 세상의 습관과 문화적 어법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과 한숨을 경청하는 것을 포함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중 귀 기울임을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때”의 빛에 비추어 “지금”을 살아낼 수 있다.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제자훈련이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이 훈련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혼의 활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훈련의 사회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규범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식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단지 그리스도와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다지는 일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일과도 관계된다.스토트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기독교를 ‘외톨이’ 종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 존 웨슬리의 말이 옳았다”라고 보고,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현대적이며 진보적이어야 함을 피력한다(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29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말씀과의 관계에서는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제자훈련은 개개인의 구원과 영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도 포함해야 한다. 제자 훈련은 개인의 영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 성장과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더 넓은 문화를 알아가며, 이 둘과 대화할 수 있는 자질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도 성경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비평과 공감도 요구된다.제자훈련이 성경과 교리에 대한 이론적 차원에만 머무르고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일에 실패할 때, 이러한 제자훈련은 일상 안에서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실현해 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언어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요 3:16),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언어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에 대한 한계”라고 말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도전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3). 성경과 세상의 언어, 즉 이중 언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의 역동적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중 언어를 배운 사람은 통역가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오직 성경의 언어만을 배우고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왜곡된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만연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몸에 대한 이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플라톤의 사상에 기초하여,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몸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격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는 “종교에서 육체를 제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만 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삶이다”라고 하였다(달라스 윌라드, 영성훈련, 42).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의 시를 통해 사람은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몸 때문에’ 발전한다고 하였다(오스왈드 챔버스, 전도서, 116에서 인용).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을 가장 잘 반영해 주는 창조적 선물이다. 제자훈련에서 이론과 실재의 균형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삶의 실재를 위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은 단순한 사고방식이 아닌 삶의 방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73). 이런 맥락에서 좋은 신학은 단순히 바른 생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의미 있는 삶과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자훈련도 삶의 실재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단지 교리와 성경 해석과 같은 이론적인 정확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제자훈련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실재에 관심을 돌려 단지 성경 텍스트에만 초점을 맞추는 우를 법할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인격적 실재를 이론으로 대치하려는 위험이 있다. 루이스는 본질적으로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믿었다. 물론 복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복음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재에 첨가되는 것일 뿐이다. 루이스는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C. S. Lewis, C. S. Lewis: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21). 그에게 기독교 복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하는 눈이자 생명이었다. 여기서 큰 그림이란 우리가 눈으로 관찰하는 것 너머와 그 아래의 숨져져 있는 가치와 의미의 방식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티머시 제닝스가 강조한 인간과 세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을 아는 것과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티머시 R. 제닝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46-49). 나아가 우리의 경험 세계가 아무리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기독교 복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큰 그림, 즉 교회와 세상, 성경과 인간, 영혼과 몸, 신앙과 일상 등은 서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실재다. 성경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서 있다”(골 1:17)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제자훈련이란 이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고, 그 구조 안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이중귀기울임
제자도
이 시대에도 부흥이 필요하다
by 고상섭
2023-04-26
팀 켈러는 사사기 설교에서 이 시대에도 항상 부흥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한때는 생생하게 살아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흥을 사모하라고 촉구한다. “우리 마음은 매우 추운 날 양동이에 담긴 물과 같다. 얼음이 생길 때 꾸준히 저어 주지 않으면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1] 부흥의 정의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에 앞서 ‘부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부흥을 사모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애즈베리 대학의 부흥처럼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한 장소에서 역사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은 특별한 집회에서 특별히 주시는 인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적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부흥을 일반적인 정의 두 가지에 자신의 견해를 포함하여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하심의 결과이다. 기적과 치유, 계시가 선포되는 것을 부흥이라 정의한다. 둘째, 설교, 집회, 전도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와는 다른 “복음 부흥”을 말한다. 복음 부흥이란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인 말씀, 설교, 기도, 성례를 통해 성령님의 일상적인 일하심이 강하게 나타나서 죄를 깨닫고 중생하고 성화되며 은혜의 확신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2]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라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저서 부흥에서 부흥은 인간의 절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면서 마가복음 9:28-29을 인용한다. 한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제자들은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제자들처럼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 활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3] 부흥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이런 부류”는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부흥은 철저한 자기 인식,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사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해 그들에게 곤란한 문제를 보내신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에게 파심으로써 그들의 진짜 상태를 보게 하신다. 팀 켈러는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도 친절하게 역사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고통과 어려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백성은 자신들의 진짜 상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4]2. 복음을 재발견하라 복음 부흥이란 하나님이 말씀, 설교, 기도, 성례라는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을 통해 성령님의 정상적인 일하심인 죄의 깨달음, 중생, 성화, 은혜의 확신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이런 복음 부흥이 공동체를 회복시킬 때 참된 부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알지 못했던 복음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많은 사람이 복음을 알고 있다고 믿지만, 교회 생활을 들여다보면 복음에 대한 오해가 많다. 부흥을 연구한 학자인 리차드 러브레이스는 많은 성도가 칭의에 근거해서 성화를 이룬다는 것을 지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들의 삶은 대부분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롭게 되기 위한 성결의 삶, 과거의 회심 경험, 최근의 신앙생활, 또는 고의적인 죄를 짓는 빈도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지에 대한 확신이 달라진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공로가 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5]복음 부흥에서 복음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는 것, 성화의 동기가 칭의가 되는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경건한 사람은 지옥의 심판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6]라고 말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기초하는 것이다. 복음에 기초하지 않은 종교 생활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반율법주의로,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만 순종의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의가 되고 자랑이 되는 율법주의로 나타나게 된다. 복음의 재발견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3.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E. M. 바운즈는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조직이나 기발한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다. 성령님은 방법을 통해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7]부흥의 궁극적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는 대개 몇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시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기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특별한 기도”라고 불렀다. 이 기도는 연합하여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처음엔 소수가 모이더라도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역사는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기도의 성격이다. 팀 켈러는 존 밀러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런 기도의 특징을 나열한다. · 죄를 고백하고 우리를 낮출 수 있는 은혜의 간구· 교회가 살아날 것에 대한 열정과 잃은 자를 찾고자 하는 연민· 하나님을 알려는 열심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영광을 맛보려는 갈망 사도행전 4장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공회의 위협을 받은 후에 자신의 안전이나 가족의 보호를 간구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 복음을 전할 담대함을 간구했다. 이처럼 복음의 부흥에는 예배나 기도의 일상적인 양상을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기도들이 항상 수반되었다. 4. 부흥의 장애물을 제거하라 사람들을 복음 부흥으로 인도하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복음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있지만 복음을 믿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것을 알려줄 실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며, 이것은 우리의 인정, 기쁨, 가치, 소망, 안정을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더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때 그는 자신의 평판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또한 그 순간의 자존심이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신자가 세금을 속인다면 돈을 가짐으로써 얻는 지위나 편안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정체성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언제나 죄의 뿌리가 된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그들을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팀 켈러는 해답은 옳은 행위를 하도록 강압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마음의 우상에 적용하는 것이라 결론 내린다. 복음 부흥을 위해서 설교하고 상담하는 사람들은 내재하는 우상들에 대해 항상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이를 통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독특하고 고유한 방법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도덕주의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하면 불안정, 억눌린 분노와 죄책감, 영적 무감각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8]5. 복음을 적용하라 복음 부흥이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면, 그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런 복음 적용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그룹을 통해 복음을 확산하는 것이다.부흥의 역사가 한창이었을 당시 조지 윗필드와 존 웨슬리도 4-8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어 매주 모여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실재적이셨는지, 그들을 괴롭히는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그 죄를 말씀을 통해 어떻게 다루셨는지, 그들의 기도 생활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나누었다. 설교로 선포된 말씀이 소그룹 안에서 삶으로 다시 적용되는 나눔을 통해 복음은 더욱 생생히 삶 속에 역사하게 된다. 또한 복음의 적용은 일대일 개인적 대화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복음으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공동체 가운데 영적인 갈망과 기대가 형성된다. 개인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대화 및 관계 형성을 통해 개인 부흥이 지속되고,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나아오게 된다. 결국 복음 부흥은 신학적인 복음의 재발견이며, 일상적인 설교, 기도, 교제, 예배를 통해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교회에 매주 드리는 일상적인 예배와 모임을 통해 복음이 흘러넘치는 복음 부흥의 시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주1.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두란노, 652. 팀 켈러, 센터처치, 두란노, 115 3.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생명의말씀사, 184.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두란노, 685. 팀 켈러, 센터처치, 두란노, 115 6.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생명의말씀사, 87(1.2.2)7. E. M. 바운즈, 기도의 능력, 생명의말씀사, 1 8. 팀 켈러, 센터처치, 두란노, 149
부흥
팀켈러
부흥의정의
내 곁에 없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슬픈 이유
by Fletcher Lang
2023-04-21
내 마음의 요새에는 묵직한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아버지 문제’라고 이름 붙은 방이 하나 있다. 202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방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거미줄을 헤치고 유령의 방으로 들어갔다.아버지와 나는 친한 적이 없다. 내 부모는 내가 다섯 살 때 이혼했다. 그 후 십 년간 나는 아주 산발적으로 아버지를 본 게 다이다. 그다음 이십 년 동안 우리는 딱 세 번 전화 통화를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아버지는 항상 내가 원하던 것보다 빨리 전화를 끊었다. 외아들로서 나는 항상 “아버지 문제”를 인생의 많은 문제 중 하나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이 슬픔과 씨름하면서 배운 세 가지를 통해서 나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소망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내 경험이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마땅히 슬퍼야 할 것을 슬퍼하라.솔직히 아버지가 죽었다고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사실상 그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냥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평상시대로 사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십 년 넘게 아버지 없이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와서 슬퍼해야 하나?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는 단 한 번도 이 땅에서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가진 적 없다는 사실이 주는 슬픔에 압도되었다. 나는 항상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돌아와서 나와 관계를 맺고 또 손주들을 안게 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게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지금껏 내가 경험한 다른 애도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복잡하다.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2. 용서를 배우라.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용서가 성경의 명령임을 안다. 하지만 상처받았을 때 원한을 품지 않기란 쉽지 않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용서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용서를 소홀히 하고 원한을 품는 것은 아버지가 내 삶에 가져다준 상처가 내 반응을 통제하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용서를 베풀려면 범죄자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팀 켈러가 말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라는 방정식에서 내 상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나는 훨씬 더 쉽게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아버지는 해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에 그는 군인들이 “빨리 총쏘기”를 하면서 서로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 노출된 화학전 약제 때문에 평생 건강 문제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다. 베트남에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은 건 거의 텅텅 비어버린 집이었다. 그가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의 재산을 거의 다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자기 나름의 부족한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망가진 탓에 그는 어른이 된 아들과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아버지 문제가 학대가 아니라 방치라는 점에 나는 감사한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고군분투에 공감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용서하려면, “복수를 추구하는 대신 빚을 내 것으로 만듦으로 가해자를 아예 의무에서 면제해야” 한다고 켈러는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버지가 단 한 번도 내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계속 원한을 품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신 나는 기꺼이 아버지의 “빚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비록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그의 실패를 깨끗하게 청산한다. 그리고 그 실패 때문에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라.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성경적 교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이 교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갖기 전까지 아버지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내게는 제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졸업식에 아버지가 온 적이 없다. 결혼식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도 할아버지가 피우는 축하 시가는 없었다. 아니, 카드 한 장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남긴 유산도 없다. 사망 당시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코트 한 벌이 전부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자녀들로 인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마음이 커졌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 땅의 아버지는 내게 불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내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는 사랑스러운 아빠가 된다는 것의 의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배워간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안다. 요한복음 1:12이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우리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고후 1:3).이건 내가 오랫동안 믿고 있던 진리지만, 그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 나오는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이 진리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작은아들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단지 받아들이기만 한 게 아니다.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따뜻하고 다정한 아버지의 이미지이다. 용서하고 축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아버지이다. 그는 아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향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실로 놀랍고 압도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지금도 하늘 아버지는 두 팔 벌려 받아주신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들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31절).나는 이제 내 인생의 특별한 순간들, 졸업식, 결혼식, 그리고 아이들의 탄생을 돌이켜볼 때면 내 아버지를 본다. 사람들 속에서 나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항상 나와 함께하셨다. 나는 왕의 자녀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원제: How I Grieved the Death of an Absent Fathe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아버지
아버지의부재
탕자의비유
용서
‘좋은 기름’과 ‘좋은 이름’
by 정현구
2023-04-19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전도서 7:1). ‘이름’과 ‘기름’라는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각각 ‘쌈’과 ‘쉐멘’입니다. ‘좋은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는 삶을 의미한다면, ‘좋은 기름’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소유를 말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을까요? 성경은 ‘좋은 이름’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열 므나 비유(눅 19:11-27)를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세 사람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세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은사와 조건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 므나 비유는 주인이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므나씩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들을 잘 사용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많이 끼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인생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운 평가를 얻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았습니다. 즉 이 사람은 ‘좋은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받은 소유와 달란트를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좋은 이름’은 만들지 못하고 ‘좋은 기름’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좋은기름
좋은이름
달란트비유
열므나비유
죽는날
태어나는날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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