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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결혼은 끝이 있다
by Greg Lanier
2019-11-22
우리가 속한 문화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결혼에 집착한다. 한편으로, “결혼 평등” 운동은 결혼을 행복, 상호 수용 그리고 법률적 혜택을 보장하는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궁극적인 목표로 바라본다.반면에, 이혼 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커플의 동거는 점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영화와 각종 쇼는 순전히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미성숙한 남편과 불행한 부인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 결혼의 실패를 계속 강조한다. 오늘의 문화는 결혼이야말로 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난 세대로부터 이어온 엄청난 실패라고 말한다. 비록 형태가 다를지는 몰라도 교회도 이런 긴장에서 예외일 수 없다. 미국 복음주의 내의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왕국에서 “일등” 시민권은 오로지 어린 아이들과 결혼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일종의 신유대주의적(neo-Judaizing) 주장을 하기도 했다. 반면에, 결혼의 본질적인 상실 또는 실패(brokenness)를 당연한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결혼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질 정도가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결혼의 궁극적인 선함은 이런 도전들 앞에서 위협을 받는 상태이다. 사두개인에게 말한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이 이 상황을 돌파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눅 20:27–40; 마 22:23–33; 막 12:18–27). 두 세상의 삶예수님에게 접근한 몇 명의 사두개인이 과장된 한 결혼 사례를 가지고, 자신들은 믿지 않는 부활과 관련하여 그분을 시험하려고 했다(눅 20:27;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8.1.4; 유대전쟁사 2.8.14). 이 사두개인들은 결혼 자체에 관심이 없지만 “모세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따짐으로, 명백한 성경적 모순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결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취수혼(levirate marriage), 그러니까 자녀 없이 남자가 죽는 경우에 그의 형제가 죽은 남자의 부인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서 죽은 이의 혈통을 유지하는 결혼에 관한 토라의 규정을 인용한다(창 38:8; 신25 :5). 그런 다음 사두개인들은 한 명의 여자와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이 취수혼이 계속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다. 그러니까 취수혼이 맞아서 이런 결혼이 일곱 번 발생한다면, 그럼 나중에 부활했을 때 이 여자는 무려 일곱 명의 남편이 있는 건데, 그것이 모세의 법이 금하는 일처다부가 아니냐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이 성경과 대치되는 이 문제가 예수님을 코너로 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취수혼과 부활 중에서 한 가지는 성경적일 수 있어도 두 가지가 다 성경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순이 발생하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능숙하게 대답하셨다. 부활에 대한 그들의 전제를 묻고 또 성경을 한 번 더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부활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셨다. “저 세상”(20: 35)을 단지 “이 세상”(20:34)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게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보여줌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셨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죽는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 는 성경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결혼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후손이 이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사는 저 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20:36).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애초에 그들에게 의도되었던 최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롬 11:12,25). 죽음의 저주는 사라졌고 더 이상 새로운 창조는 필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게 된다”(20:35). 참으로 우리는 이제 “천사와 동등이요”(20:36), 우리의 존재는 영원해지고 우리의 숫자도 고정이 되어서 더 이상 결혼해서 자녀를 낳을 필요가 없게 된다. 중요한 점은,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육신의 부모의 아들 또는 딸로 불리지 않을 것이고, 또 누구의 남편이나 부인으로 불리지도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자녀”(20:36; 계 21:7) 로만 불릴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래는 현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모든 질적인 면에서 현재의 세상을 능가한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모세가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 사두개인들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모세 오경을 그들에게 인용한다(출 3:15).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만 유효한 결혼의 특성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하시지 않는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고 또한 부활한 자들이 사는 세상이 지금의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하여 우리는 결혼을, 또 위에서 언급한 결혼과 관련한 긴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저 세상과 이 세상“저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성경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사는 문화와 인간의 육체는 최고의 기쁨이 오로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에만 있다고 아우성친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저 세상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몸은 변할 것이다(고전 15: 35-56). 모든 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은 사라질 것이다(계 21:4). 우리는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고,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받을 최고의 상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이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기쁨, 즐거움, 친밀한 관계 또는 슬픔, 상처, 관계의 혼란은 결코 궁극적이지 않다. 소홀하게 방치되었던 아이가 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 저 세상이 얼마나 더 좋을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아직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저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도 철저하게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결혼은 그림자, 복사품,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의 결혼이라는 궁극적인 결혼의 단면 중 하나일 뿐이다(엡 5:32; 막 9:15). 참으로 저 세상이 정의하는 실재는 “신부”(구원받은 자) 와 그리스도(계19:7; 21:2, 9; 22:7) 간의 결혼이다. 이 땅에서의 결혼은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세상의 결혼은 결국 구원받은 자가 어린 양과 치르는 결혼에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대상인 결혼하지 않은 기독교인에게 이 점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소식이다. 당신의 정체성은 지금 이 세상에서의 결혼 여부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결혼 여부에 달렸다.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은 그들의 독신 상태가 결코 궁극적인 기쁨과 의미를 찾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혀 열등한 게 아니다. 불완전한 것도 아니다(고전 7:32-35). 결혼하지 않은 그들의 인생이 나중에 저 세상에서 더 위대한 관계와 더 위대한 실재를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굳건히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결혼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살 때에는 결국 좌절감, 서운함(bitterness) 그리고 해체(dissolution)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배우자 또는 자녀 숭배라는 우상 숭배로 이어질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이다. 이 세상에서 결혼은 결혼 그 자체에 닻을 내리고 있지 않다. 결혼은 저 세상에 있는 다른 결혼에 닻을 내리고 있다. 결혼은 새로운 세대의 예배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 시대의 성적인 충동을 조절하고 또 바른 방법으로 성적 만족을 추구함으로 우리가 행여 완악함에 빠져 저 영원한 왕국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결혼이다(고전 7:9; 마 5:27-30). 그리고 결혼은 저 세상을 향한 성화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결혼 관계에서 두 배우자의 주된 목표는 복종, 희생적인 사랑, 존중, 회개 및 저 세상을 향한 위로이다. 결혼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온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부를 거룩하게 만들고 그분에게 바로 나아오게 하신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엡 5:25-28). 성령님으로 인해서 배우자들은 ‘그때’ 저 세상에서 서로를 그리스도에게 넘겨줄 준비 과정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결혼한 이들에게교회 안에서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사실은 위로가 된다. 당신의 결혼 생활은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붕괴된 상태, 심지어 실패한 당신의 결혼도 천국을 향할 때 의미가 있다.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의 모든 상처와 갈등이 신부의 상처를 싸매 주는 어린 양으로 인해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결혼 생활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슬플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런 결혼의 친밀함이 없는데도 어떻게 저 세상이 이 세상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걸까? 당신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저 세상은 더 낫다. 당신이 비록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저 세상은 더 낫다.그러나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자. 저 세상에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했던 배우자를 우연히 만나게 하신다면, 그래서 우리만 아는 농담을 서로 나누고 또 어린양을 예배하는 순간에 우리만이 아는 시선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났기에 잃어버린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 세상에서 얻은 것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배우자로 만났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마워요, 천국에서의 삶을 잘 준비하도록 도와줘서.”우리의 결혼은 끝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단지, 더 나은 결혼을 위해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arriage Is Built to End번역: 무제
가정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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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인
위로
부활
성화
성적만족
중독은 곧 우상숭배
by Edward T. Welch
2019-11-20
“하고 싶어,” 모든 중독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단계를 거치면서 ‘하고 싶어(want)’는 갈망(need)으로 바뀐다. 중독을 모두가 다 동의하는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능성 있는 정의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독은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상태를 향한 강박적인 추구인데, 추구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고 여전히 추구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독을 정의한 내용 대부분은 중독성 행동이 기본적인 뇌의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포함하고 있다. 중독에 빠지는 형태는 다 다르다. 중독이라는 굴레에 빠지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몇 가지 연구를 통해 알려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들을 파악함으로 우리는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독자가 추구하는 것은 변화된 신체 경험이다. 그 변화는 빠르고 강렬할수록 더 좋다. 따라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각성제, 코카인, 마약, 아편, 진정제 및 술 등이다. 음식도 리스트에 넣을 수 있는데, “힘들거나 우울할 때 찾는 음식”(comfort food)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음식은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불법적인 물질처럼 효율 또는 강도 면에서 그다지 높지는 않다. 가장 강력한 감각적 체험을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섹스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 전반을 통해 섹스는 항상 중요했고 섹스 중독자와 섹스를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섹스와 관련해서는 직접 신체 접촉을 통해서, 인쇄물로 또는 디지털 형태로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섹스는 중독을 초래하는 중요한 유혹으로 남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최근에 생긴 욕구 대상이지만, 그 강도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을 끊는 주간을 후원하는 초등학교들도 있다. 소셜 미디어는 사회적 연결을 통해, “소외”(out) 가 아닌 “소속”(in) 을 보장함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비디오 게임도 일종의 사회적 권력을 제공하는데, 현실과 다른 세상에서 살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인 대화나 독서를 통해 경험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신경 자극을 뇌에 가져다준다. 제어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하고 싶어”, “더 하고 싶어”라고 외친다. 문화에 따라 중독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중독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개인의 자유와 개인적인 탐닉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가장 일반적인 중독성 물질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여가 시간이 플러스로 보장되는 사회여야 한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중독은 번성하고 쉽게 퍼져 나간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중독에 관한 관찰이다. 그런데 중독에는 성경의 렌즈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중독과 관련해서 성경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중독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독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중독성 물질이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중독에 관한 토론이 영성을 향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그런 토론이 항상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중독 문제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독에 관한 인기 있는 보고서는 언제나 내적 고침(amends)을 강조하지만, 그 고침이 주님 앞에서의 회개를 의미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하나님을 염두에 둔 중독의 본질(Godward nature of addiction)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 숭배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보게 된다. 첫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에서는 환경이 중요하다. 애굽 탈출 이야기를 살펴보자. 존 칼뱅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굳이 자극을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불확실성과 고통의 시기야말로 우상을 만드는 적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시라면 우리는 노골적인 우상 숭배를 하기 전에 먼저 시험(test)인지 유혹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제한된 음식과 물, 눈 앞에 닥친 죽음,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는 지도자라는 심각한 환경에 처했다. 그런 환경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시험과 유혹 중에서도 현대의 중독에서 확인된 흔한 사실은 애초에 중독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중독 그 자체로 인해 좀 더 복잡해진다. 특히 그런 성향은 중독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기꺼이 원해서 하는 원인, 즉 인간의 죄성 때문으로 보는 시각에는 성경도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성경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영향으로 성경은 “세상”을 말한다. 그건 문화, 친구, 미디어, 교사 또는 심지어 부모까지도 중독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존경받는 이웃이 마약 거래상인 동네에서 자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또는 집에 음란물이 있는 상황뿐 아니라 그것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정도는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힘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지 않는다. 대신 세상은 욕망을 따라 사는 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평상시의 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경은 삶의 고난을 중독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야 이야기로 돌아간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거의 매 순간마다 우리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위안을 찾기 마련이다. 가능한 피난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님 그분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유래한 무엇인가에서 찾는 것이다. 중독은 창조자 대신 창조물에 의지하는 것이다. 중독자를 돌보는 데 있어서 이런 어려움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종종 희생, 거부, 수치심 및 수많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중독 물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애정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중독에 빠지는 사람 누구나 최소한 시작할 즈음에는 다 이유가 있다. 중독은 삶을, 종종 힘든 삶을 내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현명한 조언자라면 중독을 일으킨 원인을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독자의 자세한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두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은 실제적인 우상 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신약 성경은 우상 숭배의 기초가 되는 욕망을 겨냥한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욕망은 선하거나 우상적이며 심지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갈망하거나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것은 최고의 욕망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럴듯하고 우상적인 것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신 12:20)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향한 욕망(Idolatrous desires)도 적절하게 조절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적절한 욕망의 씨앗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욕망의 예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 건강, 순종적인 자녀, 소속감, 즐거움, 휴식 그리고 정의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정상적이고 심지어 좋은 욕망조차도 얼마든지 크게 자라날 경향이 있다고 경고한다(약 1:15). 그런 욕망이 힘을 얻게 되면, 언젠가 우리를 상대로 만족하지 못해 날뛰는 거인처럼 싸우게 될 것이다(엡 4:19; 약 4:1).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언제라도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실제 우상에 기초한 욕망으로 초점이 바꾸는 순간, 우상 숭배라는 그물에 즉시 도달하게 된다. 보다 더 주목을 끄는 우상인 약물, 섹스, 알코올을 고려하기 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우상인 사람과 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존중과 승인을 갈구하며(잠 29:25), 또한 개인 소득에 집착한다(마 6:24). 진짜 끔찍한 우상 숭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숭배의 대상 위에 세워졌다. 지혜로운 조력자는 그들 자신조차도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고,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욕망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세 번째로 실질적 우상 숭배(중독)는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비극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의 특성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을 흉내 내면서 우상 숭배자들도 점점 더 속이 비어 간다.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기에 그들도 같이 거짓말을 하며(사 44:20), 그들의 인생은 점점 더 비극을 향해 나아간다(잠 23:29-35). 숭배하는 대상이 단순한 돌이나 나무 막대기이기 때문에 힘의 원천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막대기 뒤에는 악마와 동일한 종류의 이 세상의 지배자가 있다. 분명히, 악마는 우상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숭배받는 것을 기뻐한다. 중독은 따라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독자는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른 결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예이며 또 결정권이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이 세상, 육체 그리고 악마라는 삼인조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렇기에 중독 전문가라면 누군가가 바닥을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독에는 명확한 바닥이 없기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예가 된 중독자에게 치고 올라갈 힘을 주는 바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시작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다양한 혜택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을 받을 때에만 그 자유함은 지속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분의 백성을 우상 숭배로부터 불러내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광야로 가셔서 사탄이 주는 엄청난 시험 중에도 그의 아버지를 믿었을 때 우상 숭배를 향한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졌다. 예수님의 능동적이면서 또 수동적인 완전한 대속으로 인해서, 그분은 율법의 형벌을 받았고 우리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 위해 승천했으며, 우리에게 능력의 성령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굴복하지 않고, 오랜 노예 주인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 싸움은 느리게 느껴지고 또 과거의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누리는 교제와 더불어 우리는 시선을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고정하고, 시편 저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그분을 알아 가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그러면 중독에 빠졌던 우리의 친구들은 축복을 받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살전 1:9).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이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각종 우상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게 하고 또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함으로 그 이름을 서로에게 인내와 선한 마음으로 선포하게 하며, 그 결과 진리를 말하시며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을 알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Addictions and Idolatry번역: 무제
생활
건강
중독
환경
유혹
욕망
우상숭배
노예
예수님
자유함
우리 아이 소셜 미디어 바른 사용을 돕는 원리
by William P. Smith
2019-11-08
나는 소셜 미디어에 글이나 사진을 게시한 후에 종종 후회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추후에 삭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이를 감사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소셜 미디어에 쓴 글의 내용이나 방식 혹은 첨부한 사진이나 영상을 삭제하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우리 모두는 원치 않은 것들을 소셜 미디어에 내보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인들에게 사실인 것은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그렇다.소셜 미디어는 얼굴을 마주하는 상호작용과는 다른 소통의 차원을 제공한다. 이러한 차원의 영향력을 무시하면, 당신과 당신의 자녀는 후회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도전하는 면을 이해하면, 그러한 소통의 차원을 개인 성장의 촉매제로 바꾸고 관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직접 나누는 정기적인 대화와는 다르다소셜 미디어가 직접 만나서 나누는 상호작용과 다른 세 가지 중요한 방식을 생각해 보자.첫째, 어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익명적이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아마 절대 만나지 않을 사람과도 가상의 세계에서 만난다. 그들의 견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견해보다 그다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당신은 직접 만나는 사람들보다 온라인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 지에 대해 그리 크게 주의하지 않게 된다. 둘째, 당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구체화된 피드백이 당신에게 바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이야기하게 되면, 그들이 미소를 짓고, 찡그리며, 창피해 하거나 속상해 하고, 웃거나 울며, 계속 이야기하거나 돌아서서 가버리거나 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다.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에 시공간적 거리를 생기게 함으로 이러한 영향력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 셋째, 극적인 것들에 피드백이 많이 온다.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를 볼 수 없다면 당신이 중요한 지를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결국 당신은 댓글과 논평 및 이모티콘을 통한 간접적인 피드백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주의를 끌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수십 억 명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응답이라도 받기 위해 눈에 띄어야 하며, 그러려면 도발적으로 말하거나 행하게 된다. 좋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당신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온라인상의 낯선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직접 만나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만한 것을 온라인에서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 방법은 당신을 유혹하는 만큼 당신의 자녀들도 유혹한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접근하면, 당신은 온라인 소통을 좋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적어도 5가지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아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없음을 기억하라소셜 미디어에서 우리가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경향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간직할 수 없다는 점을 현실로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감찰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렘 17:10; 계 2:23). 나중에 후회하는 게시물이나 당신이 겨우 게시하기를 모면한 부끄러운 게시물로 인해서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무엇을 알게 되는가? 당신이 무엇을 게시했느냐의 여부와 그것을 후회하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미 보고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신은 마음의 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현실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창 6:15; 8:21). 그리고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좀 더 투명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숨길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기는 쉽지만,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그 영향력을 알기만 하면, 마주 대하는 관계에서 여과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좀 더 솔직하게 보게 한다. 2. 자신을 솔직하게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어두운 세계에서 스스로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자녀가 이해하도록 도우라. 악의 힘은 우리가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악된 성향과 함께 음모를 꾸민다(고후 4:4; 롬 1:18).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 내면의 추악한 모습을 벗겨내서 회개할 수 있게 한다(롬 2:4). 그 가면이 벗겨지면, 그것을 의식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라. 당신은 잃을 것이 없다. 아무것도, 내재하는 죄조차도, 당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롬 8:31–39). 그러한 안정감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여 당신이 가상의 세계와 관련하여 하고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든 죄악된 행위와 성향까지도 빠르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게 한다. 3. 당신이 보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라회개하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당신이 하는 말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배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막 게시하려는 내용을 읽을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 의해 읽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 당신이 쓴 글을 게시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이 좋다. 누군가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라.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라. 그들이 내 게시물을 읽을 때, 내가 한 말로 인해 도움이나 용기를 얻거나, 도전받거나, 더 좋아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며, 낙심하고 속상해 하거나, 악이 좋거나 혹은 선이 나쁘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는가? 4. 인터넷에서는 비밀이 없음을 기억하라자녀들에게 이 점을 기억하게 하라. 그들이 한번 ‘엔터’키를 치고 나면, 게시물은 나름대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하나를 삭제하더라도, 누군가가 이미 그것을 복사해서 계속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네 말을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말하거나 쓰지 말라”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칠 좋은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소통 원리는 우리가 평생 노력해야 할 목표이지만(눅 12:2-3), 온라인 대화에서는 아주 본질적으로 기억해야 할 원리이다. 자녀들이 온라인으로 말하는 방식에서 좀 더 지혜롭게 되도록 돕기 위해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 묻도록 가르치라. “나의 부모, 나의 자녀들, 잠재적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그리고 미래의 고용주 혹은 나의 목사님 등이 내가 올린 게시물을 읽더라도, 여전히 괜찮을까?” 5. 현실 공동체를 성장시키라올리려는 게시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지 않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가 그것을 게시할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모를 때가 있을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 나는 나의 결점을 이미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며 믿어주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불확실성의 가상 공동체와 실제 세계가 견고하게 연결되도록 하여 양쪽 환경을 개선하도록 사용할 수 있다. 성장의 도구온라인 공동체는 다른 방법으로는 말하지 않을 만한 것을 말하게 유혹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또한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그 기회를 진지하게 여기고 당신 자신을 명확히 보며, 더 빨리 은혜를 얻고, 그것을 시공간적으로 당신을 정말로 잘 아는 사람과의 관계를 세워가는 기회로 삼으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Help Kids Communicate Well on Social Media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소셜미디어
용도
피드백
영향
현실공동체
성장의도구
인정받지 못해도 기쁘게 섬겨라
by Betsy Childs Howard
2019-11-06
수요일 밤이다. 나는 수요일 마다 우리 집에서 모이는 성경공부 그룹을 위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 음식은 제 시간에 먹을 수 있도록 늘 준비된다. 회원들은 퇴근 후 각지에서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감탄을 하고, 음식은 실제로 맛이 있다. 남자 회원들은 한 번씩 더 먹고, 여자 회원들은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재차 말한다. 그러면, ‘나는 섬기기를 좋아해!’라며 속으로 조용히 뿌듯해한다.목요일 밤이다. 나는 남편과 나를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든다. 마늘을 사오지 않아서 식료품점에 다시 갔다 오는 바람에 식사 준비가 좀 늦어진다. 음식이 빨리 익기를 기대하며 오븐을 켠다. 부엌은 더워지고 나는 약간 땀이 나지만, 계획한 시간보다 그리 많이 늦지 않게 식탁에 앉는다. 내가 닭가슴살을 자르자, 가운데가 완전히 익지 않아 핑크 색이 보인다. 남편을 처다보니, 아무말 없이 닭가슴살 주변을 가만히 자르고 있다.나는 열정적인 자기 방어의 내적 독백을 시작한다. “그는 내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지 모를거야. 우리 오븐은 믿을만하지 못해. 나는 교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 사실 닭이 잘 익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이 두 시나리오는 섬김에 대한 나의 애증 관계를 잘 포착하고 있다. 섬김이 나를 좋아 보이게 할 때는 보람이 있다. 덜 익은 닭요리처럼 나의 섬김에 결점이 있을 때는, 화가 나서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이 나의 섬김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분개한다.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자내가 아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을 가치 있는 선한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라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이나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경우처럼 어떤 관계에서는 우리가 상대방을 섬겨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의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즐겁게 섬겨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경우, 나의 섬김을 영적인 면에서 보고, 내가 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섬길 이웃을 내게 주셨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인정보다 그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섬기면, 그들을 주인의 위치에 놓게 되며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기대하자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감사하지 않으면, 섬기는 일이 우리에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넣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힘든 일에 보상을 받고 싶어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소망없이 희생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섬김으로 본을 보이면 복 받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요 13:12-17). 우리가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문제이다.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실제로 섬기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대한 영적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2–24).당신이 1세기 당시의 계약 노동자라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매일 강에 가서 주인의 옷을 빨고 천연 섬유가 하얗게 되도록 햇빛에 말린다. 당신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알아차리기를 소망하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당신을 조롱하고 거친 말을 함으로 자신의 나쁜 기분을 당신에게 쏟아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당신의 수고가 전혀 인정받지 못할 것이므로 열심히 노력하기를 멈출 수 있다. 아니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당신의 수고를 알고 그로 인해 기뻐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여전히 최선을 다하려 할 수 있다. 당신은 현실의 주인이 전혀 모르는 방식으로 섬기고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보상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주인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훌륭히 섬김으로 오는 기쁨의 비밀을 간직할 수 있다.우리 주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일까? 골로새서 3장에 나와 있듯이, 우리는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누군가를 섬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설계하신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갈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에 숨어 있는 메시지는 다가올 생애에서 우리 아버지는 이 땅에서 인정받지 못한 선한 행실을 축하하실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소식이다. 이 약속된 보상을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그분의 상속자임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예수님처럼 섬기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사는 변화된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사람의 평가에 으쓱하기 보다는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섬기는가? 그것은 직장 동료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매주 직장에서 커피포트를 씻어 놓는 모습일 수 있다. 그것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족들이 자신을 잊었다고 심히 불평하는 말을 하더라도, 당신이 그녀를 기쁘게 방문하는 모습일 수 있다.그것은 마트에서 후식을 사오는 능력을 아무도 인상적으로 여기지 않더라도,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그 후식을 제공하는 모습을 의미할 수 있다.기금 모금 행사에서 실내장식 자원봉사가 더 재미있고 인정을 더 많이 받는다고 알고 있더라도, 기꺼이 청소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일 수 있다.지난 번 이웃의 아이를 돌봐주었을 때, 그 아이가 설사를 하여 곤란했었는데, 이웃이 그것을 개의치도 않고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았더라도, 그 아이를 기쁘게 다시 돌봐주겠다고 하는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섬기는 수고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이미지를 강화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이웃의 필요를 어떻게 하면 잘 채워줄 수 있을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우리의 섬김을 훈훈하게 인정해줄 때는 어떤가? 자녀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엄마라고 말해 줄 때, 혹은 당신의 직장 동료가 상사에게 당신이 주어진 일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이메일을 보냈다면 어떤가? 우리는 우리의 섬김이 인정되는 순간을 위하여 살 수는 없으며, 다른 이들이 우리의 섬김에 대해 칭찬하기를 기대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의 섬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을 그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그들의 칭찬을 즐거워할 수는 있다.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고 인간의 종이 되셨고, 이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온 사람들에게 멸시와 거절을 당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빌 2:9) 보상으로 받았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든지 아니면 멸시를 받든지 상관없이, 우리도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면 그분이 주시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reat Reward in Thankless Service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인정
섬김
보상
칭찬
기쁨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특급 비밀
by Tim Savage
2019-11-04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름의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 운전자에게 사각지대는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어 사고를 일으키기 쉬운 곳이다. 크리스천들에게도 그들이 보지 못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사각지대가 있다. 그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며 삶의 기쁨도 적어진다. 목회를 하면서, 그 맹점을 보고 또 보았다. 나 자신 안에서도 그것을 보았다. 크리스천들이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받은 것은 즐거워하면서, 현재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간단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전치사구로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자그마치 164번이나 크리스천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주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말한다. 이 표현은 아주 짧지만, 황홀한 크리스천의 삶을 매우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우리가 ‘안에서’(in)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 문법적으로 그것은 아마도 장소를 명시하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위치해 있다.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끌어내기 위하여, 장소를 의미하는 전치사구 하나를 생각해 보자. ‘캘리포니아에서’(in California)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캘리포니아 주민으로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말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여행 잡지에 나와 있는 그대로 태양과 모래 및 파도타기의 삶을 경험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황금 주(Golden State, 캘리포니아 주의 속칭-역주)의 기쁨에 흠뻑 빠진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그리하여 그런 기쁨이 당신의 삶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다. 캘리포니아가 당신의 피 속에 흐른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캘리포니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전기를 가지고 비유하면 이를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모든 전기 기사들은 플러그와 소켓으로 가득한 도구 박스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플러그와 소켓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플러그가 소켓에 꽂아지면, 플러그는 소켓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소켓은 플러그에 모든 것을 준다. 소켓은 순간적으로 플러그 속으로 급전류를 보내준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플러그이고 그리스도는 소켓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그에게 꽂아져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로 말이다. 회심의 순간에,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길 때, 그분은 자신의 본질적인 것, 즉, 그분의 사랑과 능력, 평화와 기쁨 그리고 의의 전류를, 진정으로 그 자신의 생명의 흐름을, 우리 안에 갑자기 밀어 넣어 주신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엡 3:19). 이것은 놀라운 확증이다. 분명히 하나님만 그분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도 충만해질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성모독인 듯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모든 충만함으로 말이다.그리스도가 거주하는 삶의 능력이것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각지대와 같다. 우리는 충만함을 즐기기보다는 결핍감에 종종 무릎을 꿇는다. 때로 부적절하고 불안정함을 느낀다. 두려움과 죄책감 및 외로움으로 괴로워할 때도 많다. 내일 올 수도 있는 상실에 대해 미리 걱정하곤 한다. 평판이나 관계, 능력이나 소유물, 건강이나 행복을 상실할까봐 염려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짜증이 나며,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이 우리의 행로에 던지는 것들은 아무것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삶을 조금도 축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기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의미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무한한 충만함이 있을 것이다. 충만한 삶은 세상에게는 비밀이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주하는 성도들에게 이 비밀은 이제 나타났으며(골 1:26),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라는 아주 짧은 말로 함축하고 있다. 성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아마도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모든 서신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4장 19절, 고린도후서 4장 6절,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을 보라.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하셨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안에 풍성함을 공급해 주신다.바울은 이 현실을 생각해 보라고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만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리 쉽게 낙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그리 쉽게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해 그리 쉽게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원을 무한정으로 받으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은 바울의 가장 열정적인 기도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후략]”(엡 3:14-17). 그 후에 바울은 훨씬 더 열렬하게 탄원을 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말이다(엡3:18–19).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면, 이제 부족하다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성령의 임재로 활기가 넘치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 3:20)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현실적으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기독교의 일급비밀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ianity’s Best-Kept Secret번역: 정은심
영성
영적성장
사각지대
그리스도
분별
능력
비밀
세상을 향한 담대함과 명확함의 빛
by Rosaria Butterfield
2019-10-31
지금과 같은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은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일상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2016년 11월 9일 수요일, 이웃 집 수선공 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우리 집 다락방 문의 경첩이 부러져서 흔들거리는 것을 알게 된 그가 그것을 고치러 온 것이다. 그가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에게 다락방 문을 보여 주고 나서 부엌에 커피를 준비해 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홈스쿨링을 계속하러 갔다. 잠시 후 나는 누군가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필이 울고 있었다. 일을 마친 그가 부엌에 앉아서,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고 모든 것이 거기서 무너졌다. “기독교인은 위험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난번 선거가 그것을 증명했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관이 서로 다른데 우리가 어떻게 친구로서 잘 지낼 수 있겠어?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필과 나는 오랜 이웃이었다. 우리는 함께 파티를 하고 바베큐를 해 먹고, 가족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는 사이였다. 개집도 서로 빌려쓰고, 아이들의 자전거도 같이 나누어 쓰며, 아이리스 꽃도 서로 나눠 주는 사이였다. 그러나 선거를 한 다음 날,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필이 던진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결정적이었다. 내게도 깊은 고민이 생겼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서로 더 이상 대화도 나누지 않는 관계에서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는 그에게 부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고 우리는 한참동안 함께 울었다. 때때로 이와 같이 서로 다름으로 나눠진 세상은 우리에게 깊은 신음과 슬픔이 된다. 이렇게 가치관과 의견이 극단적으로 나눠지는 시기일수록, 부정적인 의견과 나쁜 평판을 받을까 두려워서 나의 신앙을 협상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에 대해서 스스로 새롭게 정의를 내리고는, 상대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는다. 소위 말하는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은혜와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은 결코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교회와 목사, 장로를 비판할 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 문화를 움직이는 두 가지 우상에 무릎 꿇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성적 지향과 상호관계성에 근거한 우상이다. 성적 지향이 우상이 되면, 우리가 가진 성적 욕구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존재론적으로 가장 잘 보여 준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상호관계성이 우상이 되면, 우리가 누구인가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차별(victim-statuses)을 받는지에 의해 측정되고, 또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종류의 불일치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우리는 밖으로부터 온 박해와 내부에서 비롯된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통을 받았던 2세기의 초대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다. 로마황제를 주로 고백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지금 우리 시대와 관련해서 살펴볼 한 가지 사실은, 2세기에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여러 신 중 하나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배타적인 믿음을 반역죄로 보았고, 그 죄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이 가진 배타성을 고백함으로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박해의 시기를 지나는 중에 교회는 더 커졌고 복음은 땅 끝까지 퍼졌다.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두 가지 형태로 온다. 첫 번째는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반대하는 적대적인 형태로 온다. 또 다른 하나는 복음을 문화와 타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2세기와 마찬가지로 지금 시대의 문화는 부활의 능력과 십자가의 피가 필요 없는 복음의 은혜를 제안함으로 복음의 생동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오늘날 그런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잘못된 가르침의 사례가 바로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의 약자로서 성의 해방을 상징한다-역주)가 내세우는 슬로건, “사랑이 이긴다”(Love Wins)이다. 사랑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기독교 복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그럼 2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로, 그들은 매일매일 희생적이고 친절하게 행했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가 없다면, 복음의 진리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믿는 성경적 진리는 함께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진리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도 포함한다. 둘째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가르침이 박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21세기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 반대로 생각한다. 거짓 가르침보다 박해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에 종종 실패를 경험한다. 세상을 향한 빛이 되어 담대하고 확고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복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고통 가운데 계셨다는 것을 이웃이 다 알기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서로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고, 식사가 끝나고는 말씀을 열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한 진리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전하도록 위임하신 말씀을 나누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무엇보다 투명해야 한다. 바로 그 장소에서, 불편하지만 정직하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을 대하는 조금은 어색한 바로 그 장소에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전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할 수 있다. 지식과 의와 거룩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지금의 탈기독교 시대에는, 이웃과 맺은 관계의 친밀도가 우리가 전하는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과 함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에도, 또 우리에 관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에도,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가능한 모든 기회마다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진실하고 대담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각각 50퍼센트씩이라는 식의 형편없는 방정식을 풀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는 100퍼센트의 은혜와 100퍼센트의 진리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는 모두 다 100%를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지금의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는 단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이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서 회복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관계가 불편하거나 단절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함께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원제: Boldness and Clarity as a Light to the World 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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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은혜
거짓가르침
박해
담대함
명확함
빛
탈기독교
경건 생활의 중요성
by Ryan Huguley
2019-10-28
흔히 가장 중요한 식사가 아침 식사라고들 한다. 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란 세 개와 커피로 아침을 거르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아침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루 중 섭취하는 가장 중요한 한 끼가 있다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집중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의 식사다(시 1:1-2).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매년 1월이 되면 올해는 성경 전체를 읽겠다는 웅대한 목표를 갖고 시작하곤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레위기 속에서 제사 지내는 장면 정도에 도달할 즈음이 되면 새해 목표는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열정에서 무관심으로 끊임없이 마음이 바뀌는 걸까? 내 경험과 목회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할 때, 경건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속성과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왜 이런 경건의 시간이 그토록 중요한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항상 쉽고 재미있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노력과 훈련이라는 것은, 그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아야 하지만, 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동기 부여의 측면을 망각하게 되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나처럼 잘 알고 있을 것이다.성경은 경건의 시간을 최우선 순위로 두도록 하는 다양한 동기 부여로 가득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중에서 세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목사로서 나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하는 신자들과 상담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하는 결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말씀,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할 말씀을 소홀히 할 때가 너무나 많다. 시편 119:105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는 성경을 펼쳐야 한다.하나님의 뜻을 막연하게 추측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선물인가? 우리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숙고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의 길은 더 반듯하고 우리의 결정은 더 확고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성경을 깊이 파고 싶은 동기 부여를 더 강하게 일으키는 사실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상기시킨다로마서 7:7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등불과 같다. 우리집 응접실에는 오래된 장롱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다. 서랍이 열리고 햇빛이 비치기 전까지 이 장롱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하다. 햇빛은 수년간 써서 닳은 장난감의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낸다. 빛이 장롱 속 숨겨진 장난감의 본질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삶을 향해 비추는 말씀도 같은 역할을 한다.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보낼 때면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언제나 내 속에 숨은 문제를 보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표준을 보게 되고 도저히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나의 완전한 무능함을 본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나의 죄를 상기함으로 나는 온전히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린다나는 정기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는 내 정신을 새롭게 만든다. 잠은 육신을 새롭게 한다. 친구와 수다를 떨며 큰소리로 웃는 것은 내 감정을 새롭게 만든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만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시편 119:50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성경 전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등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열매로 채우신다(갈 5:22-23).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주신 책을 열어 오로지 그분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살리는 그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라. 분명한 것은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으며 지금까지 내가 나열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율법주의적 동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는 않는다. 동기는 중요하다. 왜 하는지는 무엇을 하는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려고 지불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하려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건 아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지는 경건의 시간이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은 수준으로 전락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당신이 갖는 경건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동기가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잘못된 이유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당신의 영적 기쁨을 빼앗아 가는 부담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오늘 하루 왜 경건의 시간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임을 생각하라.원제: The Importance of Our Devotional Lives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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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기도
육신의 가족? 영적 가족!
by Harriet Connor
2019-10-25
지난 주일, 축도가 끝난 뒤 목사님이 캐시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두 주 전 캐시의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캐시는 그날 할아버지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할아버지가 잘 회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캐시는 할아버지를 매주 교회에 모시고 온다. 그녀는 걸을 때 할아버지의 팔을 부축하고, 앉고 일어나시는 것을 도우며, 예배 중 어떤 순서인지 할아버지에게 알려 드린다. 캐시의 헌신은 우리 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이제 캐시의 할아버지와 교회에 다른 노령의 성도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캐시가 피아노를 치는 주일에는 다른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어떤 찬송을 부르는지 찾아 드린다. 어떤 노인이 일어나는 데 힘들어하신다면,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팔을 빌려드린다.당신의 가족은 누구인가?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를 우리의 ‘첫 번째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새롭게 하셨다. 이제 어느 누구든 혈통이 아니라 예수 안의 믿음으로 그 가족에 들어갈 수 있다(요 1:12-13; 갈 3:6-9). 하나님의 가족은 아이를 낳음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통해 커지고 있다(마 28:19-20). 따라서 배우자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가족 안에서 존중받는 자리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마 19:1-12; 고전 7:32-35).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과 영의 가족 사이 충성심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 대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눅 14:26). 만약 우리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혼자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 남는 것이 육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혹은 기쁘게 하기 위해 떠나는 것보다 낫다.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히 이 땅의 가족들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따라 사람들에게 결혼 생활에 충실하며(마 19:1-19), 부모님을 공경하라고(막 7:9-13) 가르치셨다. 사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고전 7:8-9; 딤전 5:14). 그들은 여전히 남편과 아내이고, 부모와 자녀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교회와 가족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하였다.가족: 본보기육신의 가족 관계는 하나님의 가족 관계의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선언하셨을 때, 예수님은 잘 알려진 관계의 범주를 사용하셨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딤전 5:1-2)라고 권하였다. 우리는 그런 여러 가족 관계의 역동성을 이해해야만 누군가를 우리의 형제, 자매, 어머니 또는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성경 시대에 가족이란 개인적인 애정의 안식처 그 이상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생산적인 단위였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y)는 그녀의 책 ‘네 공동체를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이렇게 설명한다.산업 혁명 이전, 집이란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을 보살피며, 가업을 운영하고, 고객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잉여금을 만드는 장소였다. 집은 보다 더 넓은 사회와 접촉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딤전 3:15)에 속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예수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는 가업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가족: 학교내가 어린이 사역을 위해 받은 제일 실용적인 훈련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데 좋은 훈련이 되고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집에서 매일 일어나는 상호 작용은 분명한 의사소통을 하고, 듣고 공감하며, 현실적인 기대치를 설정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실망스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도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과 같은 대인 관계 기술을 연습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가정생활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가족: 돌봄의 네트워크교회는 개인들을 모으는 것 외에도 가족들을 한데로 모은다. 그리고 평범한 상황에서 우리의 가족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보살핌을 제공하는 주된 원천이 될 것이다.초대 교회는 과부들이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어느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있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을 돌봄으로써 그들의 종교를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4, 8).교회의 성도로서 우리에게도 보살핌의 책임은 여전히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보살필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고, 자녀들은 그들의 나이든 부모와 조부모를 돌볼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유대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가족: 사명의 기반처음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가정집에서 모였다. 가정들은 사명의 기반이었다. 가족 전체가 함께 복음을 듣고, 믿고, 그리고 전파했다(행 16:30-34; 롬 16:10-15).집은 여전히 교회의 사명 중 많은 부분이 일어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곳이다. 집은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곳이다.기독교 가정들은 중심은 강하지만 가장자리는 유연해야한다. 가정 안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노인과 젊은 세대 사이의 강한 관계는 그 사랑의 공동체가 외부인을 포함할 만큼 확장되도록 돕는다.신학자 앨러스터 로버츠 (Alastair Roberts)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있어 “가족”이라는 말은, 교회가 육신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크게 의존한다.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것은 보통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가정들이다. 그것은 교회가 대가족으로서 기능하도록 수용력을 준다.우리의 교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복음을 우선시하도록 부름으로써 더욱 강해질 것이다. 교회: 새로운 가족?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우리의 가족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복음이 우리 가족 관계의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새로운 우선순위들은 교회를 강화할 것이다.청소년 때에 나는 혼자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가족이 집에 남아 있을 때 나는 스스로 교회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반겨 주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랑의 영적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육신의 가족 안에서 자매였고, 딸이었으며, 또한 손녀였다.나의 가족은 지금도 주일마다 내가 교회에 갈 때면 집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혼자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로 나를 축복하셨다. 그리고 기도하기는, 하나님이 어느 날 나에게도, 영적 가족이든 육신의 가족이든, 나의 늙어 가는 팔을 부축해 교회로 갈 캐시 같은 손녀를 주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uclear Family or Church Family? Yes번역: 허예송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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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돌봄
사명
교회
캐시
헌신
낸시
육아 스트레스 부부의 친밀감 회복 작전
by Gavin Ortlund
2019-10-11
우리 부부는 교회 옆에 있는 작은 사택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 이사야도 살고 나오미도 같이 산다. 성경 인물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이사야와 나오미와 한집에 산다는 일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막 세 살이 된 이사야는 꽤 까다롭고 짜증을 잘 내며, 이제 겨우 한 살이 된 나오미는 집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나는 부모 역할을 좋아하고, 우리에게는 대단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게 매우 큰 기쁨을 준다. 하지만 양육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결혼 생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부부가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항상 방해를 받고, 함께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은 세우지만 완전히 지쳐서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하려고 해 보지만 아이를 봐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비싼 값을 주어야 하는지를 깨닫고는 그냥 접어 버리고 만다.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지 알 것 같은가?최근에 나는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가 되는 것은 결혼 생활에 중압감을 줄 수 있지만, 또한 결혼 관계를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게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함께 진흙탕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도전을 주는 이 시기를 그냥 견뎌 내야만 하는 시기가 아니라 우리의 결혼 생활을 위한 좋은 기회로 여기며 배워 가려 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시작한 후부터, 내 삶 속에 아내와 친밀감을 유지하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아빠가 되는 것조차도 말이다. 사실, 결혼 생활이 굳건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나를 아빠로 부르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되돌아본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10가지 전략을 나누고자 한다. 1. 의도적으로 배우자에게 키스/껴안기/듣기 좋은 말 등을 하라매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에 이것들을 하라. 현관문에 들어서면 나는 나와 씨름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습격을 받는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지만, 그들에게도 나에게는 아내가 우선이며 그 무엇도 그녀를 대치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려 한다. 부부가 서로 매일 잠깐씩이라도 신체적 접촉을 하고 지지와 관심을 표현하면 그 효력은 오래 간다. 2. 아이 돌보는 사람과 데이트를 위해 돈을 투자하라 부부가 데이트를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할 때, 나는 종종 “우리 형편에 괜찮을까?”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일단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항상, “하기를 정말 잘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어”라고 생각한다. 배우자와 함께 웃고 여가 활동을 하며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즐기는 가족은 함께 잘 산다”는 옛말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사실이다. 3. 함께 산책하라우리 아이들은 유모차 안에서는 조용하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일은 우리의 관계를 한층 더 좋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운동도 하고 대화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바쁠 때는 운동과 대화가 늘 뒷전으로 밀리기 쉬웠는데 말이다. 산책이 잘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상황에 맞으면서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를 찾아보라. 예를 들면, 헬스 센터가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당신이 이를 편하게 느낀다면, 아이들을 맡기고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해 보라. 4. 밤 데이트를 창조적으로 해 보라우리는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를 개발하여 매주 해 오고 있다. 보통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나의 할머니가 결혼을 주제로 쓰신 책을 한 장 읽으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드게임을 한다. ‘집에서 하는 밤 데이트’로 돈을 절약하고,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계속되는 TV의 횡포를 줄일 수 있다.5. 문자 대화를 활용하라나는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내와 나누는 문자 대화만은 즐기기를 원한다. 문자로 재미와 농담을 주고받는 일은 작은 것 같지만, 우리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편이 된다. 또한 우는 아이로 인해 의사 소통이 방해받을 일도 없다. 6. 친밀한 시간을 계획하라아이들을 둔 젊은 부모들은 때로 서로 친밀해질 시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간 일정을 세울 때 이 시간을 꼭 따로 정해 놓으라. 계획된 성관계는 이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낫고, 이는 부부가 여러 일로 바쁠 때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법이 된다.7. 함께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틈을 만들라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면 중요한 기회를 잃게 된다. 배우자는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을 영적으로 깨어 있게 도울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사람일 것이다. 8. 배우자의 일상 생활에 관심을 가지라배우자가 하루 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관계가 멀어지기 쉽다. 배우자가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문하고, 그(녀)를 가장 옹호하는 지지자가 되라. 배우자가 가정에 머물고 있다면, 당신이 그(녀)가 집에서 하는 가정일을 도와줌으로 그 일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고 감사를 표현하라.9. 배우자의 가장 약한 점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기르라 부모 역할은 배우자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죄 및 실패를 표면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다. 배우자의 부족한 점은 특히 당신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는 어느 정도 다르기 때문에 쉽게 경시될 수 있다. 배우자를 판단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슬퍼하라.주님께 유연함과 긍휼을 구하라. 빈정거림으로 배우자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 친구들에게 배우자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로 말하고, 불평하지 말라.배우자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꼭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인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라.10. 배우자를 알려고 노력하라배우자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배우자의 페이스북에 무엇이 올려져 있는가?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배우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우자가 최근에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배우자를 연구하라. 부부만 아는 농담을 개발하라. 결혼 생활로 만들어진 친밀한 비밀은 부부가 함께 간직하고, 상대 배우자에게 숨기는 비밀은 따로 간직하지 말라. 결혼 생활의 각 시기에 알맞게, 연애할 때처럼, 평생 서로에게 낭만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세우라.사탄과 세속 문화는 부부 간의 정절보다 불륜이 더 짜릿하다는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참 진리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 참 기쁨을 얻는 길임을 보여주는 길이다. 낭만적 관계에서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갈망하는 친밀감이 어떤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장점을 보여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결혼 생활의 목표는 평생 한 명에게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이며, 가장 만족을 주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삶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의 결혼 생활을 일구어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Ways to Grow Your Marriage While Having Young Kids번역: 정은심
가정
결혼
육아
친밀감
관심
긍휼
회복
부부생활
불안정감은 죄인가?
by Jeremy Pierre
2019-10-09
미국의 유명한 어린이 TV 프로그램 쎄사미스트리트(Sesame Street) 속의 인물 바니는 최근에 점차로 시청자가 줄어들어 힘이 빠진 커다란 보라색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린다. 한때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는 이제 조용히 옆에 서 있는 친구 엘모를 힘없이 붙잡는다. 바니는 친구의 목을 겨우 끌어 잡고 가까이 가서 그에게 말했다. “한 아이라도 ‘자신이 특별한 아이다’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게 해야 해.” 가성을 내는 괴물 엘모는 털로 덮인 손으로 바니의 손을 꼭 잡고 다른 이들에게 향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는 특별한 아이다’라는 메시지는 어린이 TV 프로그램에서 전달하는 여러 도덕적 교훈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이 유치한 재미나 상황적 문제 해결에서 도덕적인 권고로 넘어갈 때마다, 보통 등장하는 주제가 바로 긍정적 자아상과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신감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교육 TV는 우리의 머리카락 색깔부터 우리의 특정한 관심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지도해 준다. 하지만 언론이 대중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단순히 불안정감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낮은 자존감은 불안정을 양산하고 개인의 삶을 건강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불안정의 문제를 심각한 죄의 측면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일까?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나는 하나님도 불안정을 죄로 여기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일까?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자들은 우리의 불안정이 개인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안정이 그분의 아들의 가치를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여기신다. 하나님이 불안정을 문제로 여기신다는 점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성경에 따르면, 불안정은 바울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불안정과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특성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없는 데서 오는 불안정은 우리 삶에서 그냥 위험 그 자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데 문제가 있다. 당시의 종교 및 문화적 배경에 따르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모든 위대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적으로 자신이 바리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했고,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받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이처럼 신뢰한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특별히 인정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우리 문화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더 면밀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절박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 이에 고정되어 모든 면에서 절박하기 그지없다. 어린이 TV 프로그램의 여러 인형 친구들이 강조하듯이, 우리 문화가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형 친구들의 말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지적했듯이, 불안정은 그리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안정은 적어도 4가지 영역에서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자기 자신과의 혼란불안정은 하나님이 그분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해야 했거나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지만, 당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똑똑한지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질척거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라. 자의식이 강한 것은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관하여 몰입하고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우리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빌 2:3). 2. 하나님에 대한 불만불안정은 현재 내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만나를 원하며 불평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양은 좋으나 맛이 없는 음식에 싫증을 내고 별미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돈과 지위, 외모와 성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며 불평한다. 그러한 불만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딤전 6:9).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불만은 종종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연결되어 있다. 불안정은 우리의 (우리가 그리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는 죄가 아닐 수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모독이다. 3.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허리 사이즈가 28인치인지 34인치인지, 혹은 당신이 남의 집에 사는지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신경 쓰기 때문에 우리도 여전히 신경 쓰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의(righteousness)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평판을 가지려 한다. 우리의 생각이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거나 우리의 가치를 치켜올려 줄 더 나은 직업에 꽂혀 있다면, 실제로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다(롬 1:16-17). 4. 업적으로 인정받기를 갈망함불안정은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인정받는다고 믿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적어도 더 큰 교회나 더 인상적인 자녀들 혹은 또 하나의 학위를 갖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신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과 완전히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불안정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별의 메시지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 우리의 끝없는 불안정에 대해서, 바울은 “당신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별함이 해결책이라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구직 활동과 속성 다이어트와 같은 것들로 점철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식된 동전의 한쪽 면으로 치우치고 있는 우리의 애처로운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가 여전히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외에 다른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일은 자기 비난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불안정의 싸이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준다. 경건한 만족은 지속적인 불만으로부터 오는 곤고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준다. 전능한 하나님의 진심 어린 인정은 사람들의 변덕스런 감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하고 영원한 안정감과 자존감을 심어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은 우리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흔들거리는 확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가치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작별 메시지를 보낸다면, 분명히 당신이 특별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의롭게 되며, 이에 대한 증거로 결승선에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믿음으로 계속 달려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딤후 4:6-8). 스스로 특별해지는 것에는 너무 관심을 두지 말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 가치를 발견하는 데 부족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in of Insecurit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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