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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불안한 자녀 돌보기
by Chad Kraska
2020-04-17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 살아가는 지금, 우리 자신의 걱정뿐 아니라 자녀들의 걱정을 다루기 위해 실제적인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얼마나 적절히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1. 정보 수집은 믿을만한 자료를 통하라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디어 대신 믿을만한 뉴스나 정보원을 찾도록 힘쓰라. 신뢰할만한 자료는 아래에서 구할 수 있다.• 미국 질병 통제 예방센터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gov) • 미국 외상성 스트레스 연구센터(The Center for the Study of Traumatic Stress, cstsonline.org)(한국 내 코로나19의 발생 현황은 질병관리본부(www.cdc.go.kr)를 참조할 수 있다-편집자 주)2. 지나치게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정보를 모으고 뉴스를 읽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 뉴스는 하루에 두 번만 확인한다 등의 규칙을 세워 언제 어떻게 최신 뉴스를 확인할 것인지에 대한 범위를 정하라• 기사 제목만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말고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충실하라.•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자녀들 역시 미디어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시키라.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의 복잡한 거미줄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정보를 수집하여 자녀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3. 필요에 따라 자녀들과 정보를 공유하라아이들과 정보를 공유할 준비를 하되, 강제로 그리할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걱정, 두려움, 염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우리의 현재 감정 상태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어떤 감정을 정확히 명명(naming)하고 나면 그 감정의 강도가 감소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을 부모와 나누도록 격려하라.• 아이들의 두려움은 실제적인 것이고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동시에, 예방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보라. • 염려나 두려움, 걱정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든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하라.• 부모인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이 위기를 잘 이겨낼 거야” 같은 말을 통해 안심시키라. 4.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보여주라• 자신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려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실에만 입각하여 말하라.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라.• 자녀들에게 건강을 위한 습관을 가르치고, 이를 가족이 함께 세우는 계획 및 안전 생활 수칙에 포함 시키라.5. 부정적인 생각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당신과 당신 자녀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 것처럼 두려워 떨거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최악을 상상한다 함은 “이 바이러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처럼, 어떤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더 안 좋다고 상상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과도한 일반화는 우리의 염려를 증가시킬 뿐인 것으로, “항상”, “결코”, “아무것도” 등의 부정확하고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우린 아무런 힘이 없다고”와 같은 말이 있다. • 해결책은 각 시나리오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한 진술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건 분명해. 이 위기가 끝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파괴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예를 들자면…” 6. 기본에 충실하라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간과하거나 게을리하지 말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가끔 바람을 쐬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도 야외 모임을 계획해보라. 가능하다면 잔디가 있는 곳으로 나가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 이 시간을 통해 가족 관계가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 • 쉬라. 이 기회에 해야 할 많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잘 먹으라. 카페인이나 설탕을 과도하게 섭취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이 당신의 걱정이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잘 관찰하라. • 웃고, 놀고, 즐기라. 좌절과 침울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모두 보낼 수는 없다. 때로는 실없는 행동, 유머,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과 가족의 마음에 짐을 덜어주라. 그리하면 모두의 걱정이 줄어들 것이다. 7. 일정한 생활 규칙을 세우고 준수하라아이들을 포함한 우리는 모두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일과가 있을 때 좋은 성과를 낸다. 현재는 우리의 가족, 개인, 그리고 업무 등 모든 일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와 염려의 정도는 실로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자유가 점점 제한될수록 더욱 큰 실망과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변화와 예측 불가능에 대해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변화와 염려에 대해 까탈스러움, 분노, 좌절, 포기, 슬픔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와 증상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라. 덧붙여서 기상 시간 및 취침 시간과 더불어 규칙적인 수면 습관, 식사 시간, 노는 시간, 공부 시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 일종의 리듬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8. 다른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라친지와 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을 향한 염려가 다른 이들을 위한 염려로 바뀌게 된다. 이웃이 잘 지내는지 알아보고, 함께 식사도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해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9. 필요할 때는 지원을 요청하라걱정으로 인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자녀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교회 목사나 리더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 목사는, 가족을 목양하는 당신을 목양하기 위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에 더해, 당신이나 지인 중 누군가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 현재 거주 지역에 있는 많은 상담가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상으로 원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10. 당신의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라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라.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책을 읽어라. 가능하면 두세 사람이 모이는 기도 모임, 소그룹 모임, 아니면 친지들과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교제하며 서로 격려하라. TGC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제공하고 있는 자료에 더하여 Crossway에서도 다수의 디지털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TGC코리아에서는 미국 TGC, Desiring God, Ligonier 등에서 제공하고 있는 코로나 관련 자료들을 번역해서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한국 작가들의 글도 제공하고 있다 - 편집자 주)1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이럴 때 더욱 그리하라.• 온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묵상하라(시 115:3).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 부산물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일, 건강, 재정, 가족 등 당연시해왔던 모든 복에 대해 주께 감사하라.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Parenting Anxious Kids in an Anxious Time번역: 이정훈
코로나19
염려
하나님주권
이웃
자녀양육
사회적거리두기
온라인예배
코로나19로 인한 좌절을 이기는 지혜
by Abbey Wedgeworth
2020-04-15
얼마 전에 여배우 제니퍼 가너(Jennifer Garner)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코로나19로 인해 게임, 경기, 리사이틀, 작품 제작 등의 취소를 겪은 사람 등 “유치원생부터 전문직 종사자들”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는 글을 올렸다. 집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를 해시태그 #heyjenlookatme를 붙여서 올리면 본인이 직접 “세상과” 나눌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제니퍼 가너는 “제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라는 말을 친절하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올리는 춤 영상이나 혼잣말하는 모습 등을 재미있게 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끼친 각종 피해가 떠올라 슬퍼지기도 했다. 예배가 취소된 교회와 교단들, 결혼식이 취소된 부부들, 졸업식이 취소된 고등학생들, 경기가 취소된 운동선수들, 대학 생활 중 적어도 한 학기는 망친 게 확실한 대학생들, 휴가가 취소된 가족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팬들,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컵케익을 먹을 수 없게 된 아이들 등 많은 이들이 피해의 당사자이다. 일정만 조정하면 그만일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개인적인 낙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모를 수도 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크든 작든 고통으로 점철되기 마련이고, 전염병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가 낙심되어 괴로울 때 4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1. 위를 올려다보라깊은 좌절로 인해 모든 삶이 무너졌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보다 많은 고난을 겪으셨기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고, 해결자 되시는 구주께 나아갈 수 있다(히 4:16). 기도할 때는 솔직해도 된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 혀의 모든 말을 알고 계신다(시 139:2–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간고를 겪으셨고 아신다(사 53:3).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히 4:15). 예수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롬 8:28; 요일 4:10).유명 연예인이 우리의 영상을 보기 원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선언을 하신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실망하고 외로운 마음을 곧바로 그분께 가져가라.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시고 보살피시며 당신에게 깊은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라. 2. 안을 들여다보라갈망(desire)과 기대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좌절이나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취소된 것들에 대한 실망감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우리가 ‘무엇’ 때문에 실망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미, 가족, 행사 또는 체험, 시합, 공부, 추억 만들기 등이다. 그 실망의 ‘강도’를 보면 우리가 과도하게 바랐다거나 제멋대로 사랑했던 것, 즉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준다.우리의 낙심을 내어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부드럽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어떤 것을 무절제하게 좋아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를 잡도록 하신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요일 1:9). 우리 마음의 방향을 재정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빌 4:11–13). 3. 주위를 둘러보라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 하나님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실망의 때에 주께 나아가 그의 위로를 경험하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애통해할 때 그들을 더 잘 위로해줄 수 있게 된다(고전 3:1–7). 하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순종할 수 있게 하신다(마 22:36–40). 그러므로 좌절의 순간에 바라봐야 할 세 번째 장소는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내 친구 한 명은 예약한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취소를 통보받았다. 그 친구는 가족들의 방문도 뜸한 곳, 외로움에 시달리는 요양원의 노인들에게 자신의 결혼식 꽃을 기증했다.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은 그의 투어가 연기되자 집에 갇혀 있는 그의 팬들을 위해 책을 낭독하여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하고 있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가? 지금 몸이 안 좋거나, 외롭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다른 이들의 실망감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으라(엡 2:10).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도’ 그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4. 앞을 내다보라우리는 이 땅에서 좌절을 경험할 때마다 이 세상이 창조 때의 모습을 잃어버려 망가진 세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더디 이루어지는 소망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나 실현된 약속은 생명 나무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Yes)가 되어 우리가 아멘이라 선포하게 한다(잠 13:12; 고후 1:20).내일 일에 대해서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금 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느끼는 깊은 좌절감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삶을 위협하는 슬픔, 실망 또는 아픔이 없는 영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크고 작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소망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의 닻 같은 것이다(히 6:19).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5:5).낙심의 때에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께 나아가면, 그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소경 됨을 치유하며, 다른 이들의 상처와 필요를 보게 하신다. 우리의 눈을 들어 지금 이 순간, 그분이 모든 것의 구속을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보게 하신다. 어린양의 혼인 만찬은 결코 지체될 수 없고 지체되어서도 안 되는 잔치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언제나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verything’s Canceled! Dealing with Disappointment in Pandemic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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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와 새로운 가족
by 김선일
2020-04-04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교회에도 엄청난 충격파를 주었다. 모여서 드리던 예배가 온라인 등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었다. 주일 공예배 외 모든 집회는 중단되거나 역시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들은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황이기에 모두가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무도 앞으로 진행될 일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뜻밖의 흥미로운 경험담도 전해진다. 모처럼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교인은 지난 몇 주간 주일마다 분가했던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물론 아무리 가까운 가족끼리 모인다고 해도 신체적 거리 두기와 손 소독은 철저히 한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던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어느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가? 추측하건대 인기 있고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아니면 서로 돌아가면서 자기 교회의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은 신자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일시적인 비정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가족 예배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앞으로 사회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하게 될 때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이 어떻게 될는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다. 전 세계인들이 몸소 경험한 접촉에 대한 두려움은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으로 각인되어 우리가 맺는 사회적 모임과 관계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온라인 프로그램은 예배뿐 아니라 양육에도 응용되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앞으로 새로운 기준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적 갈망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우선 가족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주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사회적 거리가 넓혀지는 대신 가족 간의 거리는 좁혀지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 더 많이 모인다고 해서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행복과 사랑의 원천이 되어야 할 가족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책임과 희생, 그리고 불평등한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가족은 여전히 중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심히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엄한결 외, ‘2020 트렌드노트: 혼자만의 시공간’). 가족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정신과 육체를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골 깊은 갈등과 원망이 가족 안에서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혹자는 요즘 많아지는 1인 가족과 비혼자, 결혼 및 출산 포기 등의 현상은 기성세대가 좋은 결혼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김용섭, ‘라이프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스위트홈의 기대는 많은 가족에게 그저 신기루일 뿐이다. 조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3국 중에서 한국인의 가족 가치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정생활 만족도는 가장 낮게 나온다고 한다(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한국인들에게 가족의 비중은 여전히 높다. 그동안 가족이 모든 사회적 돌봄을 해결해주는 가장 신뢰할만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이 필요하다. 가족의 형태는 다변화되고 있지만,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터전으로서 가족은 늘 필요하다. 전통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족의 보호막이 허물어지고 있다. (전 연령에 걸친) 1인 가족이나 비혼의 증가로 인해 상호 보살핌을 경험할 대안적 가족의 필요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안 가족은 단지 동거가족만이 아니라 셰어하우스나 소셜 클럽과 같이 생활방식의 공유나 규칙적 교제 등으로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생물학적 가족처럼 신체적으로 끈끈하지는 않지만,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느슨한 연대의 사회적 가족은 앞으로 더욱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사회적 가족의 수요가 많아지는 때,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됨을 실험하는 것은 현실로 다가온 선교적 과제가 아닐까? 사실 초기 기독교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적 가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연 가족을 넘어서는 믿음과 순종의 가족(마12:46-50)을 제시하셨고, 바울은 교회들을 향한 편지에서 자신과 성도들의 관계를 가족적 유대감으로 표현하였다.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공동체 사상’이란 저서에서, 이는 단순히 의례적인 친밀감의 표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가족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복음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변화된 관계로 이어지게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들이 대안적 가족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는 먼저 가족을 돌보는 일이 중요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두드러진 공헌은 기독교인들의 세상에 대한 외적인 책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내적 역학(inner dynamic)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공공성을 갖느냐 하는 것보다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심각한 양상으로 번지면서, 과거 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 초기 기독교 교인들이 행했던 구제와 돌봄의 교훈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전염병이 퍼지면 이교도들은 그들의 가족일지라도 감염된 자들을 버려두고 도망갔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돌봐주었다. 또한 가족을 대신해서 죽은 자들을 장사하기도 했다.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 발흥’의 내용을 기초로 살펴보면 이러한 공공적 선행은 계승해야 할 유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초대교회는 먼저 교회 내의 구성원들이 가족적 공동체로서 상호 돌봄과 위생의 공동생활을 견지해왔다는 점이다. 전염병이 퍼졌을 때, 가족마저 버리고 가는 이교도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배려가 더욱 빛을 발하여 훨씬 높은 생존율을 보여주었다. 높은 생존율은 모두에게 기적으로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료된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사회적 관계망을 대치하는 새로운 가족관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기존의 공적, 사회적 집합체였던 기독교 공동체에 새로운 도전이 주어졌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밀집된 장소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는 것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한 신앙 프로그램이 많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가족적 공동체의 열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식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안전하고, 진정한 관계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적 빈곤감에 시달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대안 가족을 향한 갈급함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절규(행16:9)에 비견할만하다. 기독교 사역이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 진정한 대안 가족, 즉 두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사회적 가족 형성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면, 이는 분명 그 어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복음을 힘 있게 나누는 발판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 가족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충만히 경험하고, 외인을 향하여 지혜와 은혜 가운데 말하며(골 4:5-6), 단정히 행하고(살전 4:11-12), 선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벧전 2:12) 돌리는 이들이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불문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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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성경
by Scott Hubbard
2020-03-16
“요한복음 15장 2절에 나오는 단어, 프룬(prune) 즉 ‘제거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릅니다.”목사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본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영어 성경으로 번역된 걸 보면 프룬(prune)이라는 단어는 제거해버린다(가치를 친다)는 의미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맥락과 원어의 의미를 보면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주장이었다. 이백 명 정도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프룬의 원래 의미는 높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땅에 손을 넣어서 밑으로 처진 가지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우리의 순종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가 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높이 들려있고, 또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강단에서 내려왔다. 회중은 일어나서 그의 백성을 결코 치지않는 하나님, 그들에게 힘든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꼭 끌어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찬송을 불렀다.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방황하게 하는 말씀나는 위에 소개한 이야기를 가지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목사의 독특한 성경 해석,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 환상적인 해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유혹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유혹은 나에게도 있다. 나 역시 양날을 가진 진실의 칼 한쪽을 무디게 하고 싶은, 그래서 살이 베여도 너무 깊이 베이지 않도록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목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목사들이 왜 성경적 권위에서 벗어나서 방황하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 영혼에 붙어있는 작은 의심, 자신감을 흔드는 대화,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관계 등이 그것이다. 대화를 통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왜 그런 방황이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경건의 시간을 마칠 때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위로를 받을 때 보다는 혼란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머리를 책상에 부딪히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발버둥 쳤다. 의심이 내 팔꿈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낀 적도 있다. “너 정말로 이걸 믿는 거야?”그러나 나는 성경으로부터 받는 이런 경험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존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불편하게 하는 말씀아브라함은 그가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났고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상상도 못 했던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아내와 자녀를 거느린 목자 모세는 양을 끌고 호렙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불꽃에서 나오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명령을 받았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언이 주는 경외감 속에서 아이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예언을 들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예수님의 사역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씀이 많은 경우에 상처받은 갈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꾸짖었다(마 16:23). 또 그의 이웃을 공격했고(막 6:2-3), 서기관을 부끄럽게 했으며(마 22:46) 그 결과 그의 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도록 만들었다(요 10:31).만약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제거해버린다면 아마도 성경의 요약본도 채 안 되는 구절만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우상과 관습 파괴자왜 굳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가? 왜 스캔달을 일으키고 공격을 하는가? 하나님은 단지 깃털을 흔드는 정도로 기뻐하지 않는다. 현실은 항상 우리가 가진 망상을 사라지게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는 우리 모두를 어느 정도는 망상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어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하나님을 그려 넣으려고 한다(롬 1:18-21).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는 진리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규한다. “어리석은 소리야!” 우리는 또 외친다. “이 말씀은 너무 공격적이야!”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진리를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언덕으로 끌고 가서 나무에 매달고 싶어한다(고전 1:23; 2:8). 우리는 말씀으로 불편해져야 한다.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적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호세아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친구잖아요? 왜 그런 사람도 말씀으로 불편하게 하는 거죠?”우리를 구원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종종, 그리고 반복해서 우리를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신령하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때그때 부서진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생각을 부순다. 그는 위대한 우상 또는 관습 파괴자이다. 이런 부서뜨림이야말로 그의 실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시 또는 증거가 아닌가?”(헤아려 본 슬픔, A Grief Observed, 66)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우리를 회복시키지만 꾸짖는다. 구원하지만 부순다. 그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간절히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그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앞에 놓고 앉아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두 가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신 가장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우리는 군중들처럼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설마 나의 하나님이 그런 일을…” 그러나 그런 경우도 “나의 하나님(my God)”은 그냥 “나의 신(my god)”, 우리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작은 나무 조각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예의 바르고, 오래 참고 그리고 안전한 신.아니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지금 꼭 예수님이 말한 모든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에 안정된 평안만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점 하나까지도 다 지키기 때문에(요 10:35) 또 신약 성경의 모든 말씀도 지키기 때문에(요 14:26) 우리는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불편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지만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어린아이를 반기고 과부를 격려하며 버려진 자를 찾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범죄자 사이에서 면류관을 쓰고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죽음을 짓밟고 영광중에 다스리며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그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불편하게 하는 그분의 말씀에서 도망쳐 보다 더 평안을 주고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달려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와서 불편함을 느끼라데이비드 깁슨(David Gibson)은 이렇게 썼다. “때때로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울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제야 당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기대를 뒤집어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라. 당신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라”(’삶을 거꾸로 살기’[Living Life Backward]).유한하고 미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지혜를 하나님의 무한하고 실패하지 않는 지혜 앞에 내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은 뼈를 다시 맞추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치료하기 위해서이다(호 6:1).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이다.그러므로 이제 성경을 읽을 때면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겠다고 한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라. 당신을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훈련하신다(딤후 3:16). 꼭 그렇게 해달라고 용기있는 기도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어떤 우상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어떤 거짓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나를 불편하게 하소서. 나를 다시 만드시고 나를 흔드소서. 그것이 당신께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면.”이런 기도는 아프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자만심과 자족함, 평안만을 바라는 환상이 다 부서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자유이다. 영광을 향한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Expect the Bible to Unsettle You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프룬
CS루이스
헤아려본슬픔
호세아
고난 속에서 묵상하는 하나님 사랑
by 전재훈
2020-03-14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인문학은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셋째,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간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립보행하고 사회적인 행동성향으로 보아 ‘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출생과 가족관계와 하는 일을 통해 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깊이 고찰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는 역사와 철학과 경제와 종교를 두루 거치며 살펴보아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시간은 인간에게 삶을 제공했고 그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는 환경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그와 더불어 생각과 가치관도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시각으로 내 삶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과거의 내 삶을 돌아보고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시간들을 통해 오늘의 나를 규정지으려 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오늘의 나를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고정시켜 주지 않는다. 인간의 생애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역사도 변하고 있기에 삶의 모습도 변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국제적 상황도 변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 삶을 규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지나온 역사는 삶의 참고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용법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각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문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삶은 다양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 같은 부모, 비슷한 DNA를 가진 쌍둥이라도 그 둘의 삶은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 5천만 명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삶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몇 개의 특징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규정해서 여러 개의 카테고리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천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곳에는 서로 다른 5천만 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볼 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미래를 뭉뚱그려 헤아려 볼 수만 있다. 그렇게 내다 본 미래도 막상 다가가 보면 무수히 많은 예측들 가운데 하나를 살아가게 되거나 실상은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오직 인간의 죽음뿐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죽음을 미룰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진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루는 방법에 온 생을 다 바쳐야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문학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범죄한 죄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셨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여전히 변화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을 붙들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영원히 누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고난이라는 문제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고난의 큰 파도를 넘으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더욱 가까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누리기도 한다. 고난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혹은 더 가까워지게 하는 고난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고난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을 출발선으로 삼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이끄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내가 기대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야 할 뿐 사랑 자체가 의심되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 주시는 고통을 감수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출 12:43-45)장자의 죽음이라는 큰 재앙을 피하는 길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양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유월절 양식을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방 사람이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을 수 없었다. 다만 돈으로 산 종만이 할례를 받은 후에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언제까지나 종으로 살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유월절 규례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후에는 그들에게도 종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집에 거류인과 타국 품꾼도 기거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다. 돈으로 산 종과 타국 품꾼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일을 하게 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다른 집에 종으로 팔려온 사람과 자신의 노동력을 대가로 돈을 받는 품꾼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르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종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품꾼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또한 할례 받은 종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고 일해야 하지만 품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품꾼은 자신의 집안이 저 종만큼 가난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고, 종은 너무나 가난한 탓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까지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에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월절의 의미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종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유월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징하고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돈으로 산 종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까지 늘 기억하지는 않는다. 특히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에는 더더욱 잊어버리기 쉽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를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원망의 조건이 되지만, 이 모든 것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는 엄청난 감사의 조건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돈 받고 팔려온 종인가 아니면 구속 받은 죄인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원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감사로 찬양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영원히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살아갈 자녀가 될 것인가?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여러 경험들이 빚어낸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먹고 자고 입는 것의 수준들로 평가될 사람들도 아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자녀 삼은 가장 존귀한 자임을 믿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의 나의 삶을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지게 하기보다 감사와 찬양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늘의 만찬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은 비록 무교병과 쓴 나물로 한 끼의 식사를 해야 하는 돈 받고 팔려온 종의 신세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지금 어떤 곳에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영성
묵상기도
고난
하나님의사랑
유월절
정체성
모세
아론
규례
가족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by Liz Wann
2020-03-13
내 자녀들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고, 더 많은 디즈니 쇼를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가족에 관한 메시지이다. 어느 연령대를 위한 것이든 오늘날 많은 영화는 가족의 귀중함을 말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일에 중독인 아버지는 마침내 그의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워킹맘은 삶의 진정한 가치는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항적인 십대 청소년은 그의 가족 안에서 결국 치유된다. 이러한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행복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가치인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곳이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가족을 믿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화와 TV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의 가치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가족을 만드시고, 복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가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가족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끔찍한 우상이 될 수 있다.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고 있든지, 아이가 없든지 상관 없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가족은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교회도 당연히 가족 지향적이어야 한다.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고 싶은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의 왕좌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메시지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모든 소망을 부모와 조부모, 형제자매와 자녀들에게 둔다.인식하고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가족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가족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한 그 사랑을 반영하도록 설계하셨다. 가족은 반드시 하나님과 복음을 향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가족은 훨씬 더 중요한 관계와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말하듯이, 가족은 분명히 이 영역 안에 들어간다.분리되지 않는 헌신나는 남편과 아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우선적으로 부여하신 일이라고 보며, 내 삶이 가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은 가족과 함께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32-35절에서 결혼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을 때, 나는 가슴으로 ‘아멘’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것을 염려해야 하기에 하나님과 내 가족 사이에서 분리된 느낌이다(고전 7:34). 이 구절에서 바울은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것이 주님을 향한 헌신이 나뉘지 않으므로 유익하지만, 결혼한 남성과 여성은 마음이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염려하고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과 가족으로 나누어지게 한다. 바울이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은 명백하다.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고전 7:35). 그는 결혼한 사람을 편하게 해주지 않고 있다. 사실 몇 구절 위로 가면 그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고전 7:29)라고 말한다.이 구절 전체를 보면 바울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며 일상적인 일을 잘 하기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결혼과 가족 구조는 우리가 알듯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마 22:30). 바울은 우리가 가족들과 영원을 향하여 살기 원한다. 그는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기 원한다.잔칫상은 차려졌다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12-24절의 비유에서 큰 잔치를 열고 초청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인들은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다. 한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20)라고 했다. 이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한 사람에 대해 경고한 모습과 똑같다. 그 사람은 영원성보다 일상의 일과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에게 넓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가족은 그의 우상이었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았다.결혼하여 자녀를 둔 여성으로서 나는 이 구절들을 가지고 씨름하며,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내 마음은 계속 하늘에 두어야만 한다. 가족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가족이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이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가족으로 인해 그분을 향한 마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잔칫상은 준비되어 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Captivating Power of a Good Family번역: 정은심
가족
선물
우상
보화
잔칫상
헌신
가족지향적
하나님 선물로서의 몸과 영혼
by Robert Cutillo
2020-03-11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고 있다. 몸과 영혼의 분열은 오늘날 교회의 심장부를 흐르는 새로운 단절을 가져오고 있다. 영지주의라는 여전히 매력적인 이단 사상과의 투쟁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 지속되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몸과 영혼의 친밀한 결합을 잘못 해석하거나 무시하는 일에 교회는 주로 방관했다. 이로 인해 육체는 이 시대의 그릇된 사상의 쉬운 먹잇감이 되어왔다. 육체에 대한 의미는 빠르게 물질적인 의미로 축소되었고,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육체의 질병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우리에게 몸과 영혼에 대한 생각을 흐리게 하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을 단절시켰다. 몸과 영혼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합 된 것이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독교적인 믿음은 놀랍게도 점차 흐려졌다.인간이 육체의 올바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신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으며, 삶의 본질적인 본성에서 육체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다.육체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좋은 것은 무엇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상처받기 쉬운 육체육체를 따로 떼어 생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약점을 방어하고 최소화하려는 본능에서 나온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개성으로 인해 상처 입는 현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그것을 감수하기보다는 회피한다. 우리는 길가에 상처 입고 쓰러진 개인과 직접 교류하기보다 프로그램화된 방식으로 자선활동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만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어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성품이 연약한 관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떤가?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영지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친밀한 교제와 연약함을 보완하는 상호작용이라면 어떤가?성경의 이야기는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만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라. 찰스 테일러는“아가페 사랑은 배에서 나온다. ‘불쌍히 여기다’를 뜻하는 신약성서 단어(splangnizesthai)는 창자에서 반응한다."라고 언급한다.복음서에서 나타난 몇 가지 예는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성육신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 순간을 생각해보라.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는 그들을 보았을 때(마 9:36) 또는 수천 명이 사흘 동안 먹을 것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마 15:32). 하나뿐인 아들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과부의 눈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도 있다(눅 7:11-15). 예수님 사역 초기에 설교하려고 하실 때(막 1:40-41)도,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도 그러하셨다(마 20:29-34). 낫기를 원하던 문둥병자와 보기를 갈망했던 두 명의 맹인을 위해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셨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셨다. 깊은 연민(splangnizesthai)을 느끼셨다. 성육신으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지셨기 때문이다.‘가서 이와 같이 하라’성경의 비유 가운데 잘 알려진 것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연민으로 가득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먼 곳에서부터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눅 15:20).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리고 가서 보살펴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셨다.세상의 삶으로 익숙한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나의 처음 “본능적 반응”은 돌보는 것뿐이었다.갑자기 토미가 노숙자 클리닉에 왔을 때 나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랐다. 서른 살인 그는 필로폰에 찌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가 났다. 그의 모습 중 가장 최악은 싸움으로 다친 손을 그대로 두어 곪아 터진 그의 상처였다. 누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학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한참 후 나는 그의 차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버려진 그는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토미는 사랑보다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되풀이해서 학대하고 있을 뿐이었다.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책 ‘사랑의 행위’에서 두 예술가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예술가는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만나 본 사람들은 각각 불완전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두 번째 예술가는 아무 데도 여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그림을 그릴 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하기를 두 번째 예술가는 인간의 만남을 재정의하는 다른 관점, “어떤 무언가”를 그가 마주친 모두에게 발견했다고 했다.토미의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아 준 후에 그의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에게서 전에는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다. 자기 자신을 학대한 그의 눈에 비친 슬픔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안에는 연민의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치유적 존재로의 육체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면 내가 모르는 치유능력에 놀랄지도 모른다. 수년 전, 시카고 쿡 카운티 병원에서 가정의학과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멜빈이라는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멜빈의 아내는 2년 동안 멜빈의 치료를 위해 동행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편의 간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을 때도 그녀는 함께 있었다. 멜빈이 죽던 날 밤, 멜빈 부부는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듯 나를 집으로 불렀다. 내가 돌본 첫 번째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장례식이다. 장례예배가 다 끝났을 때,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내가 함께 있어 준 것에 고마워했다. 그 날 밤, 내가 한 일은 없었다. 젊은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곳에 있어 주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치유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건강을 위해“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육체와 영혼, 지식과 경험, 자연과 초자연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고 분열의 악한 영은 열심을 내고 있다.우리의 생각과 행동, 믿음과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이웃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딜레마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사마리아인과 같이 “내가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고민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내가 가까이 간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것을 걱정한다.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한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Healing Power of Bodily Presence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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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 때, 참된 영적 기도가 절실한 때
by 이승구
2020-03-08
이 어려운 때, 기도할만한 때에 열심히 기도에 힘쓰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기독교적 기도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말씀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적인 교제이다. 이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도록 하자.1. 구속받은 사람들의 기도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건을 통해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해서 감사하고, 그 감사의 최고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사람들만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라고 말할 수 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약속하셨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구속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들의 구속자에게 감사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그저 참된 기도와 유사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 유사한 기도로 보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이미 마음속에 역사하여 이루어지는 진짜 기도일 수도 있다. 그것은 후에 자신들이 참으로 믿게 되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미 역사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참된 기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는 기도와 모든 이교적 기도는 다 참된 기도의 유사물로 인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참으로 기도에 힘써야 한다).2.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참된 기도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제대로 반응하면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대상이 오직 성부, 성자, 성령 – 삼위로 계시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진정으로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그러므로 성자에게는 기도할 수 없다는 아리우스주의가 이단이라고 교회는 선언했었고, 성부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자께도 기도하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께도 기도하는 것이니 - 성부, 성자, 성령 각 위에게 성경에서 돌려진 일을 언급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고 -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성부에게만 기도하고 예배하는 유니테리안(unitarian)은 이단이다).따라서 그저 말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성경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배워 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도 기도의 성숙의 한 측면이다. 점점 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 가는 것이다.3. 구속 사건에 근거한 기도우리가 무엇을 주께 구하는데 주께서 그것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 행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느냐, 얼마나 고난 받으며 기도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구속받은 사람들인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참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부지런히, 힘써서, 열정적으로(fervently),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도하는 시간, 열정, 헌신에 의존하지 않는다).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고, 성립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속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롬 4:25). 그러므로 이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우리의 예배도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고, 찬양도 받으시고, 기도도 받으시는 것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다(벧전 1:18-19). 우리의 대속자이신(마 20:28//막 10:45; 딤전 2: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기에(갈 1:4) 대속함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가 중생하였다(벧전 1:3).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리(代理) 구속(救贖)”, 즉 대속(代贖)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히 9:14). 그러므로 구속받지 못한 자가 아무리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주께 상달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의 간구만이 주께 상달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구속만이 우리의 기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이다.4.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인 기도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에 있는 인간인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전 5:2)과 날마다 영적인 교제를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런 실재를 표현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했다. 우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 14:16). 또한 성자께서도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실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날에는 ...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했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했으니, 이것을 참으로 믿어야 한다. 성부께서도 그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한다고 했다(요 14:23). 그러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비한 교제를 표현한다.우리 존재에 구현된 이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기도이다. 먼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생각을 주께 아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바와 이 세상의 모든 정황, 특히 우리의 모든 정황을 우리가 생각한 대로 아뢴다. 그런데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구속함을 입은 사람이면 그저 자기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주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아뢴 말들을 점점 받게 된다. 주께 아뢰다가도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각과 표현을 교정해서 아뢰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다.기도가 참된 것이라면 (1) 하루 종일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식이 점증해 가면서, 동시에 (2) 일정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특히 이와 같은 때에 더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혹 금식하면서 기도하게 된다.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지를 드러내는 기본적인 시금석이다. 이것을 외적인 시금석(outer criterion)이라고 해보자.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참된 교제인지를 드러내는 몇 가지 내적인 시금석들(inner criteria)이 있다.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하고, 그 가르침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기도의 내용까지도 교정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까워진다면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은 있고, 열심히 기도한다고는 하는데 점점 더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수 1:8; 시 19:14).둘째로, 그 결과 우리가 점점 더 명확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cil of God)를 깨닫는 데 나아가게 된다. 기독교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광대한 사상을 형성하는 데 나아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서울: SFC, 2018], 특히 제 3장을 보라).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세상 속에서 진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회적 제자도를 실천하며, 바른 실천(orto-praxis)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바른 실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묵상과 기도 생각과 실천』 (서울: 나눔과 실천, 2015)이라는 책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다.셋째로,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잘 표현하는 데 나아가게 되어 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여 점점 더 성화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그의 인격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하여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으니,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형상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의 형상이니,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면 하나님의 참 형상이 잘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 우리가 제대로 된 하나님 형상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시금석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자. 그리하여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이 어려운 시기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의 선상 기도회와 같은 어리석은 기도를 반복하지 아니하려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가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참 하나님 백성들이 여기 제시한 시금석을 잘 드러내는 참 하나님 백성의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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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은 사명을 함께 나눈다
by Harriet Connor
2020-02-28
우리 대부분은 화목하고 건강한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가족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우리는 따뜻한 불빛이 비취는 방에 옹기종기 앉은 가족의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현대적이고 도시화된 사회에서 가정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휴양지 같은 의미이다. 낮에는 각자 흩어져서 일하고 공부하다가 저녁이 되면 함께 모여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즉 “가족 시간”(family time)은 대부분에게 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런 가정의 모습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전까지만 해도 가족은 하나의 생산 단위였다. 집은 일하는 장소였다.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함께 있으면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게 아니었다. 가족은 노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가족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을 잘 관리함으로 다른 이들을 창조주에게 이끌고,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전하고,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함께 일할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해 예수님과 그의 신부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바로 양육하고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 모습은 세상을 향해 아버지와 그의 영적 자녀들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가족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기독교인 가정은 사명을 공유해야 한다. 함께 일하고 또 함께 예배하는 것은 가족의 유대관계를 강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가족의 모습이 바뀌었다산업화 전까지 가족의 사명은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다. 가족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기반으로 밭이나 농장 그리고 가게를 운영했다. 가정은 자녀를 교육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곳이었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이런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어떻게 가족의 유대를 강화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과 아내에게 이런 가족은 같은 공간 안에 동거하는 것을 의미했고, 또한 서로가 곁에 서서 공통된 사업을 하는 것(비록 반드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을 의미했다. 어머니에게 가정 안에 일터가 있다는 것은 자녀를 키우면서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도 매진하는 것을 의미했다…. 생산적인 노력이 온통 가족에게만 집중되어 있을 때 아버지는…. 자녀를 훈련해서 함께 일하도록 하는 임무를 가졌다.이런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은 가정과 일터를 분리해버린 산업혁명과 함께 바뀌었다. 19세기가 지나면서 많은 아버지는 일터로 나갔고 집에는 어머니와 자녀만 남았다.채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현대적인 가정 대부분이 필요한 것을 밖에서 조달했다. 공장, 회사, 수퍼마켓, 학교, 그리고 양로원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더 이상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남편과 아내가, 또 부모와 자녀들이 공통된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지 않게 되었을 때 가족은 쉽게 분리되었다. 알라스테어 로버트(Alastair Roberts)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은 압박을 통해서 더 강해지는 그 무엇이다… 가족 전체에게 주어진 짐의 무게가 거의 사라졌을 때, 가족은 그냥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가질 뿐이다. 그런 가정은 훨씬 더 쉽게 붕괴된다.”가족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각 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사명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주어졌다(창 1:28).에덴동산을 가꾸고 일하는 것은 아담 혼자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했고 아담의 동반자가 되게 했다. 그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음으로 “땅을 채워갔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을 자녀들과 공유했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연약도 아브라함의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하나님은 창조 때에 인류에게 준 명령과 언약의 이행을 다음 세대에게 바로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부모에게 맡겼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 안식일에 쉬라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가족이 다 함께 일하고 또 함께 예배해야 하기 때문이다(출 20:9-10).초대 교회 당시 복음을 전파하는 것 역시 가족 전체의 임무였다. 고넬리우스, 리디아, 그리고 빌립보의 간수는 사도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에게 전했다. 그들의 가족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사명을 함께 나누었다. 누가는 두로의 믿는 자들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행 21:5).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번성함으로 세상을 채워야 하고, 또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 상기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삶과 행동으로 전하는 사명이다. 친밀하고 결속력이 강한 가족은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니다. 경건한 가족이 되어 이 세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 사명을 공유함으로 가족 간의 관계는 더 견고해지고, 가족에서 시작한 복음에 대한 사명을 이 세상 전체로 전파할 수 있다. 어떤 가족이 되어야 하는가현대 가족을 위한 하나의 접근법은 농장, 무역 그리고 소규모 사업을 통해서 가족이 다시금 하나의 생산 단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경제 활동 모습을 기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사명을 공유하는 가족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가족 전체가 모여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새 힘을 얻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N.D. 윌슨(N.D. Wilson)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족이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보는 시간은 풋볼 경기에서 다음 플레이를 하기 전에 쿼터백을 중심으로 모여서 작전을 짜는 시간(huddle)과 다르지 않다.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이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정원에서 무언가를 기르기손으로 유용한 무언가를 것을 만들기음식을 요리하기집안일 하기, 세차하고 잡초를 제거하기누군가를 초대해서 대접하기나이 많은 이웃을 방문하기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을 치우고 동네일에 참여하기쉼터 또는 선교 사역에 자원하기매주 함께 예배드리기교회에서 가족의 이름을 봉사자 명단에 올리기화목하고 친밀한 가족을 만드는 것은 단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따라서 온 가족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정한 가정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엡 3:15).출전: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trong Families Share Mission번역: 무제
가족
창조주
영광
복음
기도
예배
낸시
사명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 교회는?
by 이승구
2020-02-17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 세계적인 위협을 주는 상황 속에서 각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증상의 확산 위험에 대해서 처음으로 경고하면서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던 우한시 중심병원의 34세 젊은 의사 리원량(李文亮)이 환자들을 치료하다 감염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각국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다들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어떤 나라는 좀 더 잘 하고, 어떤 나라는 그야말로 허둥지둥 뒷북을 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의 경우에는 정부가 주도하여 교회 공동체의 모임도 금지하고 있다. 적어도 칭다오(청도)에 있는 교회의 상황은 전화 통화로 전해 들었으니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우한에서 상당히 먼 칭다오의 상황이 그러하다면 우한의 상황은 어떨지 짐작된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아마 다른 나라,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정부가 나서서 교회 공동체의 모임을 제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제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각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공동의 집회를 얼마간 열지 않고 다른 방책을 제안할 수는 있다. 절대로 정부가 교회 공동체에 간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스스로 자제할 때, 이럴 때 인터넷 매체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새벽 기도 때의 말씀을 공유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태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 모두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늘 그래야 하지만, 특히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공동의 기도와 각 가정과 개인의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가장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의 노력이 상당히 무력해 보이는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반은총 가운데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다. 일단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확진된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지 않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치유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감염자를 위한 치료 방책을 잘 찾고, 이들을 치료하시는 선생님들을 주께서 붙들어 주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의 손길을 사용하셔서 치료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각국이 일반은총 가운데서 잘 대처하고, 이 증상이 더 번져 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더 나아가서, 이렇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하나님 앞에서 오만함을 가지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가는 데로 돌아오기를 위해 간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근본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중국을 비롯해서 온 세상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꿈을 꾸는 한, 계속해서 이런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만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 하는 듯이 보일 때도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연약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이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해야 한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뢰고, 피조물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가장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묻고, 그분의 뜻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기본적 행동은 기도하는 일이다.교회 공동체는 기도만 하는 공동체는 아니다. 이번 사태를 비롯해서 우리들의 많은 문제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할 때,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한다. 우리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이 의사와 간호사가 되어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에 힘써 오던 것이, 우리가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와 같은 때를 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문가로서 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진뿐만 아니라 행정 기관에 있는 사람들도 이 문제 앞에서 우리 사회를 잘 보호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함으로 이 증상의 전파를 막도록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만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의 이런 노력이 의미 있게 드러나려면 수많은 비전문가가 전문가들의 인도를 따라서 자기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 전체가 스스로 판단하고 접촉을 줄임으로 이런 증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때에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불편을 감수하며 실천해야 한다. 전 세계적인 확산으로 이런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별문제가 없다고 좋아하거나, 그저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하는 소시민적인 태도는 비방 받아 마땅한 것이니 (우리가 얼마나 이런 상황 속에 있기 쉬운지 생각하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의 해결을 위해서 여행을 자제하고, 혹 불가피한 여행이 있었으면 혹시 있을 수 있는 확산을 대비하여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내가 내 마음대로 다닌다는 데 누가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식의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이런 데서 성숙한 시민됨이 무엇인지, 시민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이런 성숙한 시민됨의 드러남은 이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 공동체 회원들은 항상 어느 사회 속에서든지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들의 정상적인 모습은 항상 그 사회 속에서 가장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이 된다. 그러지 못한 교회 공동체는 그야말로 부족하고 연약하며 자기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민낯일 수 있다.그러므로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모두 회개하면서 진정한 기도를 계속하며, 이 사태의 해결과 이 사태 너머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주께서 이 참상 가운데 있는 우리를 참으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원한다. (이 글은 최근에 기독교보에 실린 글로 이승구 교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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