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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가족, 무엇이 먼저인가?
by 김선일
2020-05-16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입니다.” 필자가 수업이나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해 하는 표정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해명을 한다. “제 말은 옛날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다 가족을 뒷전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혈연 가족보다 더 큰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입니다.” 이 정도론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중산층 도시 문화에서 가정 사역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하다. 이는 유교 가족주의 영향도 있지만 험난한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대부분 가족 밖에 없었다. 교회는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원의 매개체도 아니다. 이 사실이 바로 정립되어야 교회는 가족을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된다. 육신 가족의 위기피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성경은 일관되게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정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을 금하셨으며 혼인의 신비를 재확인하셨다(마 19:6-9). 사도들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복음을 적용하였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곧 믿음의 증명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었다. 육신의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비하고 각별한 관계 가운데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최근 시대의 풍조 가운데 하나가 혈연 가족의 지위가 흔들리며, 대체 가족들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으로 비판해야 할 점과 수용할 점이 모두 존재한다. 혈연이라는 연결감은 인간의 원초적 감각이다. 자신이 입양 부모였던 작가 낸시 베리어는 ‘원초적 상처’(뿌리의집, 2013)라는 책에서 아기들은 40주 동안 엄마 뱃속에서의 교감을 기억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입양이 되더라도 심리적, 정서적, 영적 단절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9.11 테러가 난 후, 많은 이들의 눈물을 적신 사연들 중에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눈 마지막 사랑의 교신들이 있었다. 그때 생각 깊은 사람들이 의문을 던졌다. ‘왜 인간은 저렇게 가족에 연연하는가?’ 진화론적 과학에 의하면, 그건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려는 태고적 본능에 기인한단다. 약간 허무하지 않은가? 가장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가족의 친밀하고 희생적인 관계가 유전자 복제와 증식의 행동 패턴이라니 말이다. 내게 과학적 가설과 설명을 평가할 전문성은 없다. 그러나 두 개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는 절대적 사랑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적 속성에 근거할 것이다. 가족을 향한 문화전쟁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한 문화 역량이 있다는 점을 누구나 동의한다. 인간은 본능의 패턴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혈연 가족으로 인한 문제들은 너무도 많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인해서 부모가 자녀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친권에 의한 학대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남성 중심의 문화가 결혼 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너무도 큰 피해와 희생을 요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독립된 자기를 찾으려는 욕구가 유행이다. 혼인과 출산도 나의 자유와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비혼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외로움은 동거 등의 방법으로, 출산은 입양이나 시험관 아기로 해결할 수 있다. 유전자의 복제와 전파라는 본능적 욕구가 비생식적, 비혈연적 방법으로 대체 가능해졌다. 이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중시하는 문화에 안성맞춤 아닌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촌스럽게 보인다(이상의 현상에 대해서는 김용섭의 ‘라이프트렌드 2020:느슨한 연대’(부키, 2019) 27-64쪽을 보라).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는 가족 해체의 서사다. 문제는 이러한 내러티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교회와 복음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음모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할까? 물론 이는 문화 전쟁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적과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에 대해서는 분별과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육체의 소욕을 물리쳐야 한다(갈 5:16-17).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비복음적 가족관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였고, 최근에는 자기중심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주의 하에서 여성은 종속적 존재로 차별받아 왔고, 위계주의 하에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 내지 욕구 대리인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5:21-6:9)와 골로새서(3:18-4:1)에서 복음을 가족 관계에 적용하는 지침을 알려준다. 이 지침들은 고대 로마인들의 가족 관계를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 틀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정치학’을 보면 가족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3중 관계로 구성되었다고 보며, 남편과 아버지의 지배권을 정당화한다. 성인 남성만이 성숙하고 권위 있는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의 틀에서 성경은 달리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 3:17),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더이상 지배, 두려움,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경외하며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를 거부한다. 이는 예수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 23:9)고 하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11절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제는 지속될 수 없다. 또한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기중심주의와 어긋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함”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강요' 3권 7장을 시작한다. 복음은 순종과 자기부인을 통한 삶의 행복을 가리킨다. 일차적 가족으로서의 교회 ‘신자의 어머니’인 교회는 복음을 가르칠 뿐 아니라 복음적 삶의 실체를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신자의 참된 정체성과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IVP, 2019)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차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가족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일차적 부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차적 부르심일 뿐이다. 한국계 크리스천 저널리스트인 헬렌 리(Helen Rhee)는 창의적인 제목의 책 ‘미셔널 맘’(Missional Mom, Moody, 2011)에서, 이러한 소명 개념을 가족에 적용한다. “우리의 아빠, 엄마, 남편, 아내로서의 소명이 먼저가 아니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차적 소명이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순서의 역전은 가족에게 역효과를 주며,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이 우리 인생의 일차적 소명이다. 내가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때의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담은(엡1;23) 본질적, 보편적 교회를 말하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차적 소명의 준거점이다. 예수께서는 가족 됨을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셨다. 혈연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그의 가족이 된다(마12:50, 막3:35).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곳으로서 일차적 가족이다(Rodney Clapp, Families at the Crossroads, IVP, 1994). 종종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꾼다. 가족을 하나님의 목적에서 중심 위치에 놓기도 하며, 가족 친화적인 교회를 매우 건강한 이상적 교회로 여기기도 한다. 복음주의 윤리학자 러셀 무어는 ‘폭풍 속의 가족’(두란노, 2019)에서 “교회는 가족 친화적이거나 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 가족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 그는 더 나아가 가족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단일 뿐이기에, 가족을 더 우선시하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능력도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교회가 가족이라는 복음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일차적 가족이라는 사실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첫째, 혈연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자들이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해롭거나 당신을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두운 가족의 전통을 꼭 이어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가족 됨을 반영하는 교회는 불완전한 가족으로부터 고통과 상처를 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회복하는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는 전통적 가정 사역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전통적 가족의 범주가 해체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고 혼자 죽지 않는다. 1인 그리스도인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육신 가족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확대하는 선교적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분도, 1985)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가정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솔선적이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된다. 자기네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예수와 예수의 사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서로서로가 관계를 맺는다.”가족과 교회는 서로 긴장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적 특성을 반영하고, 가족은 하나님의 더 큰 가족, 하나님 가족의 이야기에 참여함으로 참된 정체성과 사명을 찾는다. 예배와 교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가족과 만나고, 선교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풍성한 가족이 있다!
가정
가족
피붙이
교회
대체가족
원초적상처
라이프트렌드
자기중심주의
미셔널맘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by R. C. Sproul Jr.
2020-05-11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은 위조에 능한 자다. 그 교활한 수법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신하는 왕국을 세우는 일만이 아니라, 가짜 왕국의 모든 부분이 진짜 왕국과 똑같도록 모방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는 위조자다.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는 단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against Christ)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instead of Christ) 자이기도 하다. 가짜 왕국의 가짜 메시아인 셈이다. 따라서 진짜 메시아처럼, 그도 자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또 삼중직을 날조하여 가짜 선지자, 가짜 제사장, 가짜 왕으로 행세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모든 복을 내려주시듯, 땅에 있는 자 역시도 그러한 복을 모조한다. 그리고 사악하게도 우리를 꾀어내 그 두 가지 복을 혼동하게 만든다.이 시대의 타락한 문화를 보여 주는 현상이 있다. 바로 가족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꾸준히 쇠퇴하고 있는 현상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허락된 축복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양육하여 경건한 백성으로 세우라고 명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가정을 이루는 사명과 더불어 그 자유를 행사하도록 인류에게 복을 주셨다. 그러나 뱀은 무수한 버전의 가짜 가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저급하고 어리석은 애정을 거기에 쏟아붓게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유혹하여 그릇된 장소에서 애정을 찾게 만들며, 밀물이 들면 쓸려 나갈 모래 같은 관계 속에서 소속감을 다지게 만든다.진정한 가족은 소속감과 더불어 공통된 신념과 목표를 제공한다. 다수의 크리스천이 모여 구성된 교회와 같이, 크리스천 가족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한 가지 목표를 지닌다. 나의 가족을 예로 들면, 저녁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서로가 부름받아 함께 이루어 갈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그러나 마귀가 만들어 낸 가짜 가족은 그와 같은 영적 생기를 지닐 수 없다.나의 가족은 ‘브리스톨 모터 스피드웨이’(the Bristol Motor Speedway)라고 하는 자동차 경기장에서 북쪽으로 불과 30마일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자신이 선호하는 레이서를 응원하며 경쟁하는 두 집단의 가족이 있다. 매번 경기마다 데일 언하트 주니어(Dale Earnhardt Jr)를 응원하는 집단과 제프 고든(Jeff Gordon)을 응원하는 집단이 서로 모조된 가짜 가족을 이룬다. 누가 어느 가족에 속했는지는 각자가 몰고 다니는 차량 범퍼에 붙은 스티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정 레이서를 선호하는 가족에 속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맞는 의상과 차량을 고르고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닌다.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아 가족을 이루려 한다. 가령 동일한 질병이라든가 취미를 공유한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긴다. 그래서 암투병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끼곤 한다.또 다른 이들은 부차적인 유전 형질에 근거하여 가족을 세우려 한다. 가족이란 유전학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념은 피부색에까지 미친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보며 정통 백인 가문이 아니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조상을 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갈색 피부를 가졌을지 몰라도, 그는 엄연히 스프로울 가문의 자식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하나님 나라를 가장 먼저 구하라고 부름 받았다.나는 그처럼 무의미한 기준을 따라 하나님 나라 바깥에서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으려 하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그런데 훨씬 더 슬퍼질 때가 있다. 바로 그러한 연대 의식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묶고 있는 모습을 볼 때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이루신 일보다도 우리가 좋아하는 축구팀에 더 충실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일에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결승에 진출했을 때 가슴이 가장 벅차오른다. 또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나이와 성별 혹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아니라 각자에게 있는 다른 무엇으로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정체를 규정하곤 한다.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자신을 향해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 관계가 우리를 우리로서 규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충실히 살펴야 할 가족도 이 관계로부터 주어진다. 나의 경우는 사십 대에 이마가 벗겨졌지만, 이런 모습에서 가족의 특징을 찾을 수는 없다. 또 영국 제도(the British Isles)에 가계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의 가족은 결국 어린양의 피로 구속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의 형제고 자매다. 서로 다른 축구팀을 응원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그들이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바로 나처럼 그들 역시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한 분의 아버지가 계신다. 또 한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맏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따라서 이 가족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바로 이 은혜로, 우리 모두가 이 땅에 매인 신분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둔 거류민과 나그네로 곧 그분의 가족으로 한 생을 살길 소망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e Are Family번역: 장성우
가족
위조자
적그리스도
정체성
소속감
어린양
가정, 하나님 은혜의 리트머스 시험지
by Tim Kimmel
2020-05-10
어린이와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의 깊이를 가늠할 만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나 노인처럼 인생 연대표의 양쪽 끝에 위치한 이들은 능력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 하루를 어려움 없이 살아내고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호의를 받고도 제대로 갚지 못하며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어린이나 노인같은 사람에게 일관성 있게 호의를 베푸는 성품을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진정한 인격은 우리가 어린이와 노인에게 베푸는 친절, 인내, 그리고 존경의 태도에서 정확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과부들과 고아들을 비롯해(약 1:27)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들 중 가장 작은 자”에 속한 사람들에(마 25:31–46)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 인격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가정의 기본 작동 방식: 하나님의 은혜이제 인격과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우리 삶의 기본 모드인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는 가정 생활을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고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는 중차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되기도 하고, 쓰디쓴 패배를 맛보는 곳이 되기도 한다. 가정 생활이 견디기 쉽지 않은 용광로와 같을 수 있다. 가정 생활 속에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 자체가 무력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만지고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말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고 말로는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우리와 매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 하느니 차라리 굶는 것이 낫겠다고 하거나, 배우자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내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는 무익할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최악의 예를 두 가지 언급했는데, 당신 가정이 그 정도는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가? 당신 가족이 가족 사진에서 당신이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관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회심을 위한 은혜, 매일을 위한 은혜선의를 지니고 잘 해보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십자가로 인해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구속 역사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개념을 잃었다 찾은 바 되고 보지 못하다가 볼 수 있게 된, 다시 말해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면서 어리석게도 여러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축소시킨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성과’를 거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이리 많으니 나는 빚진 사람이야. 이제 남은 인생은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지” 식의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복음을 적용할 때 이런 식의 태도는 거부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 마음의 방에 들어와 방 가운데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서는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일단 우리가 그런 식의 사고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가 복음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가 으레 하는 상투적인 말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신앙 생활에 대해서도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된다. 오늘날 자녀 세대는 “나한테 의미 있는 것만 진리”라는 식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도전할 때, 우리가 자녀를 다루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의 소재로 쓰이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에 맞서기기독교를 성과 중심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들도 많다. 필자는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순된 세상에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우리는 스스로 무능력하다 느끼고, 부담감에 압도당하며, 이 일이 너무도 벅차다고 느낀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 두려움에 눌리지 않아야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내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와 관련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복음주의와는 관련없는 인위적인 규율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임재를 무시하고 두려움 앞에 무릎 꿇게 된다. 소위 금욕적인 삶, 죄 관리, 영적인 이미지 컨트롤, 복음주의적인 행동 양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시는 일들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 지식으로 해석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녀들은 최악으로 행동하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있는지 알아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목자로 믿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사랑, 자비, 친절, 이해, 용서, 소망, 자유, 그리고 잠잠함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녀 양육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우리를 씻기고, 우리에게 스며들며, 결국 우리를 다시 정의하는 은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받을 뿐 아니라 그의 은혜로 늘 단련되는 부모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고의 증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다루시는데(요 1:14) 이 모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대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자녀를 대하라. 이것이야말로 은혜에 근거한 자녀 양육의 핵심이다.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가 행하시는 기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부모 안에 먼저 일어날 때 그 자녀들에게도 일어난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Family: God’s Litmus Test of Applied Grace번역: 이정훈
가족
회심
은혜
두려움
자녀양육
동역
부모를 용서하라고요?
by Marshall Segal
2020-05-08
현대 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돌봄에 마냥 고마워하지만은 않는다.자녀들이 자신의 단점이나 인생의 실패에 대해 말하며 얼마나 자주 부모 탓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나 미묘하게 말이다. 우리는 부모의 죄가 자손 삼대까지 전해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출 34:6-7). 또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점들을 부모들의 부족한 점과 그들의 양육 방법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들어왔다.인생의 경험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의식적으로나 무심결에) 부모나 혹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들이나 그들이 아직 터득하지 못한 교훈들, 아직도 변하지 않은 그들의 성격 문제들, 당신을 키우면서 했던 실수들, 당신에게 저질렀던 죄들 때문이라고 말이다.특정한 고통이나 약점의 근원을 생물학적으로 혹은 가정의 내력 등에서 살펴보는 것은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원인을 알아내거나 누구의 책임인지를 밝혀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부터 온다.가족에게 당한 배신요셉은 열 명이나 되는 자신의 친형들에게 배신당했다(창 37:18, 28). 요셉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어야 했던 형들은 처음엔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창 37:18), 나중엔 노예로 팔아 버리기로(창 37:28) 공모했다.어쩌면 친형제나 자매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당신에게 이보다 더 큰 잘못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요셉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도록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그 구덩이에서 꺼내어 적은 돈을 받고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노예 신세가 되도록 요셉을 팔아 버렸다. 형들은 동생 요셉이 어디로 보냈졌는지 짐작도 못한 채 단지 그들 눈에 거슬렸던 요셉을 드디어 없애 버렸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 일이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수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노예살이를 통해 권력의 자리로 옮기셨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통해 애굽 왕 바로(Pharaoh)에 다음가는 최고 권력자로 만드셨다. 각국에 심한 기근이 들자, 요셉의 가족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갔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대로 형들은 부지중에 그들이 배신했던 동생의 발 아래 엎드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걸하게 된 것이다.요셉은 살인 미수와 인신 매매 혐의가 있는 형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요셉의 위치는 피해자에서 재판관으로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마침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형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과 그에 합당한 형벌을 알기에 마음이 심란해졌다(창 45:3). 이런 그들을 향한 요셉의 말은 모든 성경을 통틀어서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 말들 가운데 하나다.“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4-5).당신은 요셉의 말에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요셉,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당신의 형들이 당신을 노예로 팔았고, 애굽에서 죽으라고 당신을 팔아버린 거잖아요.’ 하지만 요셉은 다시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십칠 년이 지나고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창 50:15). 요셉이 베풀어 준 용서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요셉이 당연히 보복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요셉은 연민과 애정으로 울며 그들에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요셉은 형들을 살인 미수범들로 대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로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을 벌하는 대신에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다고 약속했다. 무거운 억울함과 비통함은 제쳐두고, 그의 참담하고 악몽 같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겼다(벧전 5:7). 형들이 저주받아 마땅했을 때 요셉은 그들을 축복하기로 선택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쁨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형들을 향한 요셉의 놀라운 인내와 친절은 사도 베드로가 사라를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사라의 남편이 거짓말로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그녀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했다]”(벧전 3:6).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다. 요셉도 자신과 형들을 하나님께 의탁했다. 스스로 정의를 실행하거나 변명을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당신은 가족을, 부모를 용서할 믿음이 있는가(엡 4:32)?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내려 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롬 12:19)? 지금 당장 좋든 싫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선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롬 8:28)?고통보다 깊은 선요셉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더 깊게 그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배신, 노예살이, 감옥살이, 그 어떤 상황보다도 더 깊은 심오함(sweetness)으로 말이다. 또한 요셉은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ㆍ“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7)ㆍ형들에게는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창 45:11)ㆍ“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은 아마도 고통 가운데서도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적었듯이 말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우리 가운데 이러한 사역을 구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아름다운 사역이다. 요셉은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이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위해 하신 일들과 비교해 볼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형들의 모든 악한 의도들도 노예생활의 모든 학대들도 감옥에서의 모든 부당했던 날들도 말이다. 당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을 당신은 이토록 귀중히 여기는가?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성도여, 당신의 부모들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 설 수 없다. 그들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 요셉과 함께 당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내 부모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거지.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했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하게 바꾸셨어.’ 모든 어려움과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러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며, 또 그렇게 하실 것이다.요셉은 형들의 사과를 구하며 살지 않았다. 형들이 요셉에게 지은 죄는 요셉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형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요셉은 비통함과 억울함에서 자유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이미 사신 자유를 누림에 있어 부모가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지 말라.그들이 당신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넘기려고 음모를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통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 Can Forgive Your Parents번역: 김은혜
가정
가족
부모
용서
치유
믿음
요셉
고통보다깊은
선
지금, 엄마에게 새롭게 요구되는 것
by Christina Fox
2020-05-06
“그가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7)최근 몇 달간 안 좋은 뉴스들이 쇄도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암울한 뉴스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받고 숨졌는지를 보도하는 뉴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저녁, 우리는 정부가 내린 폐쇄 명령과 행정결정을 듣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식들을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었어?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나쁜 소식으로 평정심을 잃다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로 인해 평정심을 잃기 쉽다. 이 전염병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엄마인 우리의 일상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게 되면서 가사 노동 외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가정 교육도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친구들, 가족과는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로 마음은 주눅이 들고, 감정은 매몰된다. 두렵고, 외롭고, 동시에 걱정된다. 집안 일을 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하루 종일 비디오 게임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게 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된다. 얼마나 오래 집에 갇혀 있게 될까? 얼마나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게 될까? 얼마나 오래 아이들의 이러한 일상이 지속될까? 그리고 만약에 아프게 되면 어떡하지? 아이들이 천식을 앓고 있는데 바이러스가 병을 유발하면 어쩌지? 남편이 실직하면 어쩌지? 만약에 경제위기로 어려워진다면?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친구와의 관계가 중요한 나이대에 친구들과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다. 아이들이 기대했던 행사들이 취소되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일상을 지루해 하고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우리가 취하고 있는 극단적인 조치의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힘든 마음에 좋은 소식하지만 모든 나쁜 소식에도 좋은 소식은 있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편 112편). 이 시편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묘사한 지혜의 말씀이다. 시편 저자는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영어로는 “주님”(Lord)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야훼,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다.이 이름은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와 만났을 때 사용하신 이름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살이로부터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3-14).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다. 이 이름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많은 이름 중 하나다.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만물의 통치, 구원의 행위, 그리고 그의 백성과의 언약적 존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또한 이 이름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서 스스로 묘사하실 때 사용되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임을 대신 당하셨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보내신 성령님을 통해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나쁜 소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에게 좋은 소식은 우리의 주권자, 영원하시고 강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전염병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앉아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지쳐 버린 우리를 발견할 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의 구세주를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순간에 인내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적인 엄마가 되지 못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완벽한 분이심을 믿을 수 있다. “만약에”와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에 압도된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 질문들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고,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아신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분의 통제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으신다.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우리가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분은 여호와 이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그분은 충분하시다. 그분이 우리의 지혜다.친애하는 어머니들이여, 우리는 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쁜 뉴스와 불확실성에 압도될 때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대신, 좋은 소식으로 눈을 돌리라.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 전염병이 유행하는 가운데 그분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소망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ves, Mothers, and COVID-19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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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
사회적거리두기
전염병
불확실성
코로나19
하나님이 만드시는 건강한 가정
by 전재훈
2020-05-05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확진자가 4월 27일 기준 300만 명을 넘어섰으며 7퍼센트 이상의 치명률을 보이면서 2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계속 확산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전 세계는 서로의 왕래를 끊어 버렸고 많은 국가에서 사람의 이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동 제한령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일부 국가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강력한 거리두기 캠페인을 펼치며 가급적 재택근무 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바이러스와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고 말았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집에 머무르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주지 못했고 가족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전 세계적으로 가정 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일부 남성들이 스트레스를 아내 폭력으로 푸는 바람에 가정 폭력 신고 전화가 급증했는데, 미국의 경우 두 배, 프랑스와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30퍼센트 이상 증가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학이 미뤄지면서 육아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고,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단점들로 인해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Make yourself at home.”(집에서처럼 편하게 지내세요)의 의미가 무색한 시대가 되었다.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 3:1)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내용은 룻의 재혼에 관한 이야기다. 룻은 나오미가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얻은 며느리였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죽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작은 며느리였던 오르바는 친정집으로 돌아갔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을 떠나 유대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룻을 아끼던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가 혼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보아스와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고 싶었다. 이것을 나오미는 ‘안식할 곳을 구한다’고 표현한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마노아흐’라는 말은 다윗이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한 일을 두고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대상 6:31) 것이라고 표현했던 말과 같다. 실제로 가정은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려고 했던 이유는 룻을 ‘복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야타브’를 번역한 이 단어는 룻기 3장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하는 데, 7절에서 보아스가 ‘마음이 즐거웠다’고 할 때와 10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가정은 안식할 곳으로서 마음이 즐겁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곳이라는 의미다. 히브리 사람들이 가정을 ‘메누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안식의 터전’이라는 의미로, 가정은 곧 ‘안식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우리는 안식할 곳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도 어렵게 된다.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자주 남편이나 아내 된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장로나 감독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딛 1:6)이어야 한다거나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딤전 3:4)야 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동양에서도 가정의 중요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고대 중국이 통치이념을 정하지 못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이뤄 살아갈 때 공자는 유교를 만들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게 했다. 공자의 유교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 인(仁)이다. 사람 인(人)자에 둘을 의미하는 이(二)를 붙여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인(仁)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과일의 씨’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에서부터 도의 질서를 세워 가고자 했던 공자는 인간의 기본 씨앗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여겼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유교는 가정에서의 효(孝)를 이웃에게로 확대하여 예(禮)를 가르쳤고, 또한 국가에 대한 충(忠)을 강조하며 국가의 기본 토대를 완성하게 되었다. 결국 동양에서도 가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셨으나 ‘독생자’라는 아들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인 양 오해받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 중 가장 큰 언어가 바로 ‘독생자’이기에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할 때 ‘전 재산이나 내 생명을 준다’는 말보다 엄청난 표현이 바로 ‘내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준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실 때, ‘혼인 잔치의 신부’나 ‘자녀’, ‘양자’, ‘상속자’라는 가정의 언어를 사용하신 사실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가정들이 세워져 하늘의 복을 누리는 참된 안식의 처소가 되길 원하셨다. ‘안식할 곳’이 되어 ‘복을 누려야’하는 가정이 코로나 사태를 맞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가정의 위기는 비단 이 시대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였다.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과 하와부터 가정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남자나 해산의 수고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던 여자 모두에게 가정이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은 큰 아들 가인이 작은 아들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고,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그 후손들까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원수처럼 되었다. 야곱의 아들들도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이런 예들은 성경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윗이나 솔로몬도 가정이 행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6)가 된 것은 아닐까? 유대 랍비들은 가정이 ‘메누카(안식의 터전)’가 되기 위해서는 ‘헤세드(인애)’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 분의 관계는 완벽하게 만족스러웠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흘렀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부족함 없는 사랑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메시아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신실하게 이뤄졌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헤세드’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보여주심으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벧전 3:1)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권면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명확한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다. 어린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자녀들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며, 연약하고 부족하기만 했던 부모님을 온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날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가정이 위기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김영안 단국대 교수는 2013년에 ‘88세대 행복론’을 다룬 ‘행복저글링’(세빛에듀넷, 2013)을 출판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일, 돈, 관계, 건강, 자아 다섯 개 공의 행복 저글링”이라고 쓰여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도 관련되어 있다. 돈이 없으면 서로의 관계가 틀어지고 결국 건강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코로나 바이스러가 바로 돈, 관계, 건강의 문제를 모두 뒤흔들어 놓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심각한 폐 손상을 유발하고 기저질환을 가진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뿐만 아니라 호흡기 질환에 속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침이나 고열을 동반하고 비말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 고강력 거리두기 캠페인은 경제조차 위험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정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정마저 무너지면 인간은 더이상 안식할 곳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항상 그래오셨듯이 오늘날에도 위태하기만 한 우리 가정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는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는 한줄기 소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활짝 열어 주셨다. 이것이 가정을 지키고 하늘의 복을 누리며 우리 가정이 살아갈 참된 길이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가정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안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 할렐루야!
가정
가족
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
나오미
헤세드
행복저글링
김영안
새롭고산길
우리는 지금 다 어린아이다
by Jeremy Pierre
2020-05-04
MRI 기사는 검사실에 들어선 나를 한 번 더 유심히 봤다. 나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발암물질이었다. 내 얼굴엔 재가 묻어 있었고, 안경은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평소 같으면 하얬을 와이셔츠의 칼라와 어깨 부분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 몸에서는 시큼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이 날 예정된 뇌 촬영은 사실 내가 조금 전에 막 탈출한 시큼한 냄새가 나던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 두통으로 시달렸던 나는 여러 의사들에게 갔었고, 뻔한 원인들을 배제하고 남은 것은 정밀 검사였다. MRI 기사는 이제 진짜 심각한 문제가 뇌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협에 가까운 그의 말도 내게는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진짜 위협은 바로 그날 아침 우리 가족이 겪은 일이었다.통상적인 사전 건강 질문 몇 개를 채 던지지도 않아서, 기사는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다른 곳에 가 있는지를 알아챈 거 같았다. 내가 멍하니 손에 들고 있던 질문지를 다시 가져가면서 그는 이건 나중에 작성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내게 말하는 어투는 영락없이 여덟 살 난 막내딸 베씨가 하라는 것을 제대로 못할 때 내가 베씨에게 말하는 바로 그 어투였다. 기사는 검사복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나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검사실 천장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사가 내 위치를 잡는 동안 나는 천장만 보고 있었다. 유모차에 누운 것 같은 편한 자세를 잡아서 그런 건지, 잠옷 비슷한 옷으로 갈아입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계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외국어 대화를 듣는 것 같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어른이 된 이후로 나는 그 때처럼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두려운 때에 우리는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어떤 의미에서 선물이기도 하다. 공포와 불그날 아침에 있었던 위협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도록 하자.여느 화요일 아침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소와 같이 하루의 시작을 준비했는데, 일곱 식구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또 짐을 싸서 현관문을 나설 참이었다. 다섯 아이는 학교로, 두 어른은 직장으로 그리고 개는 개집으로. 과거에 들은 적 없던 날카로운 비명, 식구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침실에 있었다. 처음에는 유괴당한 아이를 찾아달라는, 빨리 나가서 용의자의 차량 번호 몇 번이 보이는지 보라는 식의 앰버 얼러트(Amber Alert, 정부가 국민의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터치 한 번으로 핸드폰의 소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불이야”를 외치는 내 아내, 사라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보통 두 가지의 목소리 볼륨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평상시 대화 때 나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미를 보거나 아니면 아이들 중 누가 다쳤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비명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었다. 침실 옆에 있는 세탁실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건조기에서 진한 오렌지 빛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우리 집의 분위기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 빛깔이었다. 나와 사라는 소화기를 가지러 1층으로 뛰어내려갔고,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서 119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2분 후, 다시 이 층으로 올라온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소화기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화기를 작동시키고 끝까지 분사했지만 이미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춤추는 오렌지 빛깔을 노려보았고, 내 손에는 텅빈 소화기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다. 이제 연기는 기름 같은 검은색이 되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집 밖으로 나가라고 사라가 내게 소리쳤다. 층계를 반 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분명히 네 명의 큰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막내 베씨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층계를 뛰어 올라가며 베씨의 이름을 비명처럼 부른 내 목소리에 정작 내가 깜짝 놀란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내게서 터져 나온 소리는 동물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건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을 앞에 놓고도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에만 터져나올 수 있는 통곡 같은 소리였다. 두려움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만든다내가 베씨를 찾던 순간들이 MRI 검사를 받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씨가 옆집에 있다고 사라가 소리칠 때까지, 베씨를 부르는 절망적인 나의 발버둥은 약 15초 정도 계속되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 15초가 내 안에서 뭔가를 바꿔놓았다. 그 15초는 내가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어떤 절망감을 알게 만들었다. 진한 오렌지 빛깔과 위압적인 검은 색의 연기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조차도 결코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나는 그 정도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생생하게 깨닫도록 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우리는 두려운 순간에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은 우리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도 지킬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정한 위로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른이 된 우리가 결코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어떤 특징을 콕 짚어서 말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뭔가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 말씀의 핵심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 바로 이 점이다. 누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조하는 일련의 이야기와 함께 이 구절을 배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필요한 마음 상태는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필요를 인정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 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인식하는 때는 없다. 그러므로 절망은 왕국으로 가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이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예수님 자신도 절망을 알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동일한 상실, 동일한 유혹, 그리고 동일한 고통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통곡하기도 했다. 그의 통곡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보다도 더 깊은 고통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차마 상상도 못하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했다(히 4:14–16; 5:7–10). 예수님은 절망이 무엇인지 알았다. 신앙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증명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다름 아닌 위험한 때에 증명해 보였다. 사실상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속 노래를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시 2:13).우리가 바로 그 자녀들이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절망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두려움 가운데서의 평안내가 지금까지 말한 이런 생각을 다 제대로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MRI 기계 속에 누워 있었고, 입술은 마치 불을 끄는 소화기가 된 거 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MRI 기계 안에 누워서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음이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아침 15초간 동물이 되어 딸의 이름을 부르던 그 절망의 순간과 집이 타 버린 우리 가족이 그날 밤 어디서 잠을 자야 할 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MRI 기계 안에 누워있던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그 날 찾아낸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걸 알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아니다.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몇 번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내가 경험했을 뿐이다. 내 마음에 하나의 생각이,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 하나의 생각은 마치 다른 어떤 생각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머릿속 나의 모든 생각을 다 장악한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바로 이 생각이다. 이건 계획한 적도 없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간증을 듣고 깨달아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건 음성이었다. 전혀 기대한 적 없지만 너무도 익숙한, 돕는 자로서의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그의 위로는 너무도 강력하고 압도적이어서 나는 이 생각이 어쩌면 MRI 결과지에 찍혀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바로 평안이다. 이 평안은 절망의 시간에 더 강해진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녀에게 더 자애롭다.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그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샤워를 하고 호텔 침대에서 뒹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이 이상한 게 퍼지는 바람에 더 강력해진 제한 조치를 발표하는 주지사의 회견을 들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닥치는 이 여러 번의 위협에 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3월의 어느 화요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그날 우리는 코로나19가 지금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을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가장 뛰어난 의사들도 치료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세계적인 통계도 이 전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일류 기업도 당장 필요한 의료 물품을 제 때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는 하락 곡선을 가파르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전문가들도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자리와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다. 화장실 휴지와 빵이 귀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일상 용품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의존하는 게 얼마나 하찮은 허상에 불과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다 어린 아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 어느 누구의 자녀도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고아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누군가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면 딸이다. 절망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이 차이를 제대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죄와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적 때문에 생긴 나 자신의 필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도록 자극한다. 절망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지옥이 주는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 절망은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누리는, 안전함이 주는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알도록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절망은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대부분의 절망은 결국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절망을 느끼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이내 당시의 절망감을 떠올리며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느낀 절망감 때문에 나는 부끄러울 수도 있다. 소방관은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집은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베씨는 지금 임대한 집 뒷뜰에서 다른 자녀들과 함께 신나게, 또 안전하게 놀고 있다. 아마도 그날 아침 내가 절망감을 느낀 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MRI 검사를 받으면서 내가 느낀 절망감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 있다. 검사 결과는 나쁜 게 아니었고, 지인들에게 농담 삼아 말하듯이 내 머리가 너무 좋아서 생긴 일이었다. 두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종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의 절망도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지금의 전염병 때문에 느꼈던 절망감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이 전염병도 이겨낼 것이다. 코로나19에 걸린 대부분의 환자들은 회복할 것이다.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사업장은 또 힘차게 움직이며 고용을 창출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안정감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절망감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사태는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평상시와 달리 좀 더 정확하게 보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때를 만나면 우리 모두는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e’re All Children Now번역: 무제
생활
감정
코로나19
어린아이
두려움
진정한위로
성령의위로
평안
앰버얼러트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by 장대선
2020-05-02
5월을 가리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날 등이 5월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푸르른 5월이라 하겠다. 많은 교회에서도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5월에 기획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5월은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다.그렇다면 가정의 달인 5월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어떠한 지침 혹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매년 5월에 교회가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기획할 정도로 가정이 중요하다면, 가정과 관련해서 성경은 어떠한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는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5월 행사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구약성경이건 신약성경이건 간에 성경은 가정의 ‘가장’(House Head)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톨레도트’(Toledot, 족보)가 가장인 아버지의 계보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household)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함으로써 가장을 중심으로 가정을 언급하고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도 개인보다는 ‘무리’(Flock)로서 다루고 있다. 그 무리가 때로는 ‘군대’(Army)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질서 있는 무리의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개인’은 대부분 무리를 이끄는 사람, 혹은 무리를 이끌게 될 사람들인 것을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성경은 믿음의 무리와 관련하여, 그리고 영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그 무리를 이끄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중심으로 신앙과 생활이 이뤄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성경은 이스라엘의 왕과 사사, 그리고 선지자를 이스라엘 무리(백성들) 가운데 보내어 세우고 질서 있게 이끌도록 하신 것이다. 심지어 신약성경에서도 믿음의 백성들은 사도들과 목사인 감독들의 지도 아래 장로들과 집사 직분의 직무 가운데서 교회공동체가 운영되도록 하셨다.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1769-1850)가 그의 책 ‘장로회 제도’(Presbyterianism, 1835)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들을 교회의 치리자로 세우는 장로회(Presbytery)로서의 교회를 신약교회로 세우셨다.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통상적인 경우, 이러한 질서의 원리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맥락인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하신 계명이 나타내는 바를 생각해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계명은 단순히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로 대표되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권세와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고 따르도록 요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의 질서, 즉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시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이르신 때로부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십계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이를 명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에 순종하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모범이었다. 십계명의 첫 번째에서 네 번째에 이르는 계명을 준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 특히 그 가운데서도 다섯 번째 계명을 따라 위에 있는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네 가지 계명들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이요 패역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있어서 가정과 그 가정의 부모, 그 가운데서도 ‘가장’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이고도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의 장이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세와 권위 아래에서 잘 다스림을 받으므로 그 확장된 형태로서 교회의 치리자들(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이나 국가의 관원들과 같이 위에 있는 권세와 권위에도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권세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갈수록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페미니즘(Feminism)과 소위 성 소수자의 인권 보호와 같은 성 평등(sex equality)의 주장이 갈수록 일반화되기에 이르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어떤 면으로 하나님의 권위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의 바탕 가운데 있는 문화 현상이 분명하다. 그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위 질서가 이미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에 대해서는 가장을 머리로 하는 질서에서 생각해야 한다. 개별적인 구성원들의 역할과 권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의 다스림과 그 역할 가운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가정이다. 특별히 신앙에서 가장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장로교회를 비롯한 대부분 교회에서는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 경건 생활을 권장하며 지도하는 것이다.예컨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을 작성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었는데, 가정예배 모범의 서문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르기를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에서 이같이 중요한 의무(가정예배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당회(a Consistory, 즉 지교회의 치리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바로 그러한 책임과 의무를 전제하기 위해서 가정을 구성하는 첫 관문인 결혼예식과 실질적인 가정을 구성하게 되는 첫 과정인 출산 후의 유아세례가 모두 예배당에서 교회의 회원인 회중 전체가 바라보는 가운데 행해진 것이다.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과 관련한 가장의 역할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로서 참여했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의 ‘거룩한 안식일’(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이라는 글이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글에 따르면 가장의 역할과 그 수행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사무엘하 6장 12절에 기록된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며 복을 주신 것과 같이 주일에 가정에서 행하는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이 정당하고 충실하게 이행될 때, 개인의 가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복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하여 “두세 사람이” 그러한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 그리스도 또한 함께하시는 것이다(마 18:20).그뿐만 아니라 구지는 그의 글에서 주일에 행할 사적인 의무로서의 가정예배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의무들을 이행할 때, 그들 중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항상] 그렇게 해왔던 바와 같이, 다른 모인 자들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리문답을 시행하고, 설교를 되뇌며 신앙의 기초를 가르치도록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가능한 한 가정의 ‘가장’(구지는 여기서 가장을 가리켜 가정의 ‘다스리는 자’라 칭한다.)이 이러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라고 말한다. 그런즉 가정예배를 비롯한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은 가정의 목회자인 가장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의 기독교 가정에서 이러한 가장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혹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들, 특히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며, 또한 요구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에 대한 이해와 신뢰, 그리고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하게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 근거하는 교회의 신앙 전통이다.이러한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는 공적인 교회의 틀과 예배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서는 바탕이요 기초이다. 그렇기에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을 작성하여 지교회의 치리회가 가정의 가장을 권면하고 지도하는 지침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구지의 책에서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구지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교회에 가기 전에, 그러한 경건의 의무를 수행함으로 성도는 공적인 예배에 더욱 적합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 다녀온 후에, 이러한 사적인 의무를 수행함으로 공적인 의무들이 더욱 우리에게 유익하게 된다.”라고 했다. 즉 “이러한 사적인 의무들을 행함으로 우리가 교회에 있지 않을 때도 거룩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함에 있어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교회의 지도와 관리를 병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의 달 5월에 교회가 더욱 중점을 두고 강화해야 할 올바른 취지일 것이다. 공적인 회중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기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의 직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사적인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는 책임과 의무를 위하여 가장이 있음을 기억하여 더욱 특별하게 실천하는 5월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독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정의 달일 것이다.
가정
가족
어린이날
어버이날
사무엘밀러
페미니즘
가정예배모범
가정의달
톨레도트
혼자여서 좋은 점을 활용하라
by Rusty McKie
2020-04-27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약간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힘들어 하며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기간이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시간일 수도 있다. 이들이 SNS에 올린 우스운 사진도 여러 장 보았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유지되던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멈춰졌지만, 대인관계를 부담스러워하던 이들에게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오히려 편안한 시간이 된 것이다. 격리 기간이라 해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취약 계층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겠지만, 집 안에 머물며 그저 넷플릭스를 보게 되어 아주 신이 난 사람들도 있다. 이해는 한다. 목사로서, 어린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내 삶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흔치 않은 시간, 그 아름다운 고독(solitude)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꿈꾸게 된다.하지만 혼자서 누리는 자유의 시간, 그 초반의 흥분이 가시고 나면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그립다. 내 가족, 친구, 그리고 교회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다. 이런 패턴이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알 수가 없다.복잡한 사회에서 벗어나 혼자 있게 되면 처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너무도 바쁘게 살아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TV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평소에는 결코 사 먹지 않았던 즉석식품을 쌓아 놓고 즐긴다. 고립이라는 햇빛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긴다.하지만 많은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 늘어난 걱정, 우울, 그리고 인간관계를 더 갈망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될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epidemic)은 벌써 퍼져가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의 외로움이라는 유행병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규모 전염병(pandemic)으로 번진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강요된 외로움많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고문 방식은 그냥 홀로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보지도 않는 영상을 틀어서 소리가 나도록 한다. 아니면 바삐 움직여서 혼자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우리의 일정이 다른 사람과 만남으로 채워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이런 상황에 질병관리본부에서 장기간 서로 격리된 상태로 지내라고 권고한다면 어떻게 될까?사회적 거리 두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회적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 침체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침체”를 다룰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외로운 곳을 찾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외로운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으로 의도된 것을 기적적인 선으로 바꾸신다(창 50:20; 롬 8:28).혼자만의 자리 만들기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더욱 전심으로, 또한 더욱 희생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따랐다(눅 5:16). 우리 영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는 고독과 침묵이 꼭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날들에 있어 첫 번째 관문은 우리가 만날 고독의 처소를 시끄러운 곳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시간은 하나님과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온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시 46),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잠잠히 기도하며 그가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이것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대규모 전염병 뒤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난관, 염려,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해 우울증이 심해질 수 있는 이들의 어려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은 실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과는 잠시 담을 쌓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무감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목소리들을 거부해야 한다. 대신, 선하고 주권적인 왕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하자(시 131).영혼의 필요 채우기우리가 외로움을 겪는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관계에 대한 열망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삶을 부인하고 광야로 들어가 고립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은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기회이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망가진 이 세상을 애통해한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음에 이르는 이 무자비한 상실로 슬퍼한다. 우리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가득한 두려움과 염려로 애통해한다. 더 이상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된 이들과 함께 모일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이 대규모 전염병을 슬퍼하고 이 병이 초래했고, 앞으로도 초래할 끔찍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한다. ‘주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하며 우리는 울부짖고 애통해한다.이 외로움은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동참할 기회이다.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깊어진 우울과 염려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기도한다.마지막으로, 이 외로움은 다른 이들의 삶에 동참할 기회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영성과 관계성을 현대 기술이 완전히 제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고독의 장소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면 우리 영혼의 필요가 채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고후 5:14–20). 매일 교회 친구 한 명,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 한 명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면 어떨까? 마트에서 사다 줄 것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는 쪽지를 이웃집 문에 남겨두면 어떨까? 당신이 어떤 이를 위해 그간 어떻게 기도해오고 있었는지를 손으로 직접 쓴 쪽지로 건네준다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변화될까?다시 만날 그날까지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위 “사회적 거리 두기”는 슬프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날을 벌써 고대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길이 놓여 있지만, 나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친구, 형제, 또는 연인보다 가까이 계시다. 이 모든 혼란과 단절 속에서도 그는 우리를 붙드신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다!내가 또한 믿는 것은 교회는 분명히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나서 더 크게 노래하고, 더욱 큰 미소로 인사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독의 장소 ‘밖으로’ 도망치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가 거기 계신 예수님을 만나자. 다시 만날 그날까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그리고, 이 대규모 전염병은 하나님이 창조 역사에서 쓰셨던 혼돈의 찰나 같은 것이므로, 그날이 오면 이 병은 우리를 더는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망하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Leverage Your Lonelines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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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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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을 막아준다면 가시도 축복이다
by Marshall Segal
2020-04-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고통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 최악의 시련을 맞더라도 그분의 강력한 사랑의 손길은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거나, 인내하는 중에 믿음이 더 커지도록 하거나,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준비시키거나 하신다. 또 우리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게 하거나,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더 깊고 강렬한 기쁨의 샘을 샘솟게 하신다. 결국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선은 종종 뭔가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뭔가를 피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고통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을 깨닫지 못하곤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뿐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피해야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신다. 때때로 어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숨겨진 죄를 바라보게 만든다. 달리 말해서, 어떤 고통은 특정한 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는 사랑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바로 교만이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는 이 어둡고도 위험한 죄 말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특정한 육체의 고통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 고통은 다름 아니라 그로 하여금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나로 하여금 자만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이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교만이 가진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받는 계시가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유혹도 같이 커진다. 교만이 가진 진짜 위험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배움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다면, 사탄조차도 당신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라고 격려할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가시를 주었다. 바울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처럼 교만이 주는 영적인 위험을 알고 있다면, 만성 통증이나 질병, 성취되지 않은 꿈이나 기대, 관계의 끊어짐과 투쟁, 괴로움을 주는 유혹, 또는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가시를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적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바울은 교만을 언급했다.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2-4). 앞으로 나타날 끔찍하고 처참할 정도로 파괴적인 그 한 사람은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교만의 씨앗이 실제 사람의 크기로 자란 것이다. 교만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것을 우리에게도 합당하다고 설득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는 날까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까지, 교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로 입교한 자도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교회가 한 남자를 장로로 성장시키자마자 그 사람은 교만에 빠져서 사탄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교만의 유혹은 끔찍하고도 파괴적인데, 그것은 특히 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가시교만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가시를 축복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가시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교만이 사람들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또한 우리가 바로 그 유혹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있다면, 가시는 그게 아무리 불쾌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더라도, 사랑스러움이라는 전혀 새롭고 놀라운 차원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가시에서 찾아내는 그 어떤 사랑스러움도 고통을 둔하게 하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탄은 끊임없이 가시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할 것이다(고후 12:7). 그러나 우리는 아주 천천히 하나님이 어떻게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성장시키며 또 새롭게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저주라고 느껴지던 가시가 이제 생각지도 못하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또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자라게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더 자주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결코 고통이 주는 고뇌를 최소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함을 빼앗기지 않았다. 괴로움을 당하고 곤욕에 처하고 박해를 당했으며 또 맞고 쓰러졌지만(고후 4:8-9), 그는 그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겉사람이 낡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끝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광의 무게 또한 실제이고, 아니 사실상 그건 바울이 잃거나 겪은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고난은 극심했고 때때로 참기 어려웠지만(고전 1:8), 고통은 아침의 수평선을 정복하는 일출처럼 항상 고통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바울이 가시를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가시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선을, 결코 일시적인 안식과 바꿀 수 없는 선을 가져다줄지언정 그렇다고 우리가 가시를 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또한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해서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라고 바울은 말한다.바울은 그가 교회에 간구한 것처럼 하나님께도 간구했다(그는 같은 단어를 롬 12:1; 고전 1:10; 엡 4:1; 살전 2:12에서도 썼다). 그는 서신서에서 여러 번 간구했지만 여기서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적은 없었다. 그의 간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가장 먼저, 고통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마 26:39).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믿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할 뿐 아니라, 반복해서 간구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주님에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를 통해서 입술까지 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한 반복해서 간구하기를 원하신다(눅 18:1-8). 따라서 고통이나 상심이 너무 클 때 반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영원히 간구하지 않았다. 그는 간구했고 또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그리고는 그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마치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강점을 들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함을 더 높이 들어 사용한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가시가 사라지는 것이 정말로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고 또한 필요할 때면 가장 적절한 때에 아낌없이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꼭 세 번까지만 간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가볍고 순간적인” 이 세상의 가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다시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바꿀 것이다. 시련과 약점이 승리와 강점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임을 알게 되고, 모든 지혜로움과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거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나아가서 가시를 포용할 뿐 아니라 자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우리를 바꿀 것이다. 기꺼이 가시를 짊어지고가시를 달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면, 우리는 가시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약함 뿐 아니라 능욕과 곤고함 그리고 박해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바로 앞 장에서 바울은 그가 겪은 능욕을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5–27)그럼에도 만족하다니? 고통 안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고통이 나를 떠나지 않는데도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고후 12:10)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약점, 고난, 핍박, 재난으로 인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 지혜, 은혜, 사랑이 더 풍성하고 더 밝게 드러날 수 있었다. 가시가 주는 현실은 가혹하지만, 바울이 예수님과 관련해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형성해 가는 데에 그의 가시는 큰 역할을 했다. 바울은 그로 하여금 교만을 멀리할 수 있게 했기에 가시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시가 와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음 구절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교만은 어리석게도 지금 높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 높이기를 좋아한다. 가시를 지니고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능력, 지혜, 타이밍을 더 높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영원히 높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가시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날을 기쁜 마음으로 자족하면서 기다린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elcome Whatever Keeps You from Pride번역: 무제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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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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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장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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