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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마신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by Benjamin R. Merkle
2020-08-25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나는 교회에 있으면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복음주의에 심취한 순진무구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냥 교회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바짝 마른 내 몸에 근육을 키울 수 있으면 좀 더 안정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병대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가 살던 동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탱크를 담당하는 예비 부대가 있었고, 그 덕에 나는 주중에는 대학을 다니고 주말이면 탱크를 모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만세! 나는 이제 “내가 말이야, 해병대에 있을 때….”와 같은 말을 남들에게 할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된 것이다. 화생방 훈련이 기억난다. 방 하나에 최루가스를 잔뜩 채워놓고 훈련 교관은 우리를 그 방안에서 한참 뛰도록 한 후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교관이 주먹을 들면, 우리는 다시 마스크를 쓸 수 있었다.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고 교관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마스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마스크 필터를 손으로 빼서 마스크 안에 있는 공기를 밖으로 세게 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마스크 안에 있던 모든 최루 가스가 사라지고,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쉽다. 내가 속한 화생방 훈련 그룹의 시작은 괜찮았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숨을 참았다. 일 분 정도 지났을 때 교관은 우리에게 다시 마스크를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잘 참았다. 이제 다시 마스크를 쓰고 그 속의 공기만 깨끗하게 만들면 된다.나의 어리석은 생각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루 가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다호 주에서 자란 깡마른 기독교 청년들 중에 나 같은 이런 경험을 한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제 나는 피부와 눈으로는 최루 가스의 위력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가스가 폐로 들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결심이 섰다. 마스크 쓰기 전에 가스를 조금만 마셔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나는 새로운 또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경험 때문에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루 가스를 아주 조금 마셨다.내 폐는 순식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터질 것 같았고, 나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네이팜 폭탄이 내 목구멍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나는 급히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속 오염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숨을 내쉴 산소가 내 폐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스크 속 최루 가스까지 마시고 있었다. 엄청난 패닉이 몰려왔고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문으로 달려가 이 방을 나가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 속 최루 가스 속에서 끙끙거리고 헉헉거리며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의 일부라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참았다. 금지된 지혜사실 그것은 엉뚱한 충동에 빠진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와, 잘 했네”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누구나 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했는데?”라고 물을 뿐이었다. 애초 내 생각이 멍청했고, 게다가 실행까지 한 것은 더 어리석었다. 멍청하게 들린다는 걸 알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그때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구분시켜줄 아주 좋은 기회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경험한 적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기회는 더 근사하게만 보였다.이런 어리석음은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기본적인 오류고, 그것은 우리의 첫 선조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뱀은 금지된 과일을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눈이 떠지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를 유혹했다(창 3:3). 사탄의 유혹이 가진 매력은 단지 선악과의 맛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탄의 말을 들은 하와는 그 유혹에 굴복했다.이런 식의 유혹은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또한 금지된 무언가의 맛을 보게 됨으로써 엄청난 지혜를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 눈에도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직까지 짓지 않은 여러 죄를 짓게 됨으로 얼마나 큰 수치심을 느낄지를 말이다. 게다가 스스로 봐도 너무 순진하기 그지 없었다는 생각에 더 부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순진하고 경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까? 결혼할 때까지 성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동정(virginity)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기독교 학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혼란 속에서 순수함은 어느새 불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이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죄를 통해 얻는 경험이 당신을 더 지혜롭게 만들까 아니면 더 어리석게 만들까? 진짜 죄에 빠지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는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까 아니면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책하도록 만들까?진짜 남자는 경건한 남자다이 원칙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여기서는 남자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기독교인 남자는 경건하면서도 남자답고 싶은 부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진 이 세상에서 사탄은 진짜 남자라면 남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유혹한다. 술에 취해서 정신도 잃어봐야 하고, 이곳저곳에서 섹스를 하고, 또 주먹질도 몇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하는 남자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사람이 나중에 구원받으면 간증 때 할 얘기는 아주 많다.)이 세상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말한다. 이 세상 기준에 따르면, 남성다움은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Christlessness)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이 말하는 남성다움은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세상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 거짓말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코 남성다운 기독교(masculine Christianity)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맛보는 것이 더 나은 남자로 만들 거라는 생각은 최루 가스를 마시는 게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만큼이나 어리석기 그지 없다. 이미 충분하다죄에 찌든 세상 경험이 우리를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 마약과 방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듣기 좋다고, 그런 간증하는 인생을 꿈꿔서는 안 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간증이 지루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죄를 많이 지었든지, 아니면 적게 지었든지, 죄는 그것으로 족하다. 지루한 간증을 한다고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독과 지혜를 혼동하지 말자. 지혜는 결코 죄를 맛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시고, 또 그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할 때에만 생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pping Poison Won’t Make You Wise (Take My Word for It!)번역: 무제
에덴동산
영성
영적성장
최루가스
죄의유혹
경건
남성
지혜
화생방훈련
마스크
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
by Brian G. Hedges
2020-08-16
나는 여름에 텍사스의 개간되지 않은 굉장히 넓은 한 초원에서 메스키트 나무를 제거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다. 살초제 탱크를 등에 지고 손에는 분무기를 들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 사이로 끊임없이 걸었다. 이 일은 매우 지루한 일이었다. 방울뱀과 마주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그곳은 해마다 방울뱀 제거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은 바지 위에 덧입는, 방울뱀의 송곳니가 뚫지 못할 만큼 딱딱한 고무 바지였다. 하지만 그 고무 바지는 나를 보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인디애나 존스처럼, 나는 뱀을 정말 싫어했다(지금도 싫다!). 내가 가는 길에 방울뱀이 지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번은 방울뱀을 거의 밟을 뻔 했다.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바짝 경계하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하며, 작은 소리라도 그것이 방울뱀 소리는 아닌지 주의를 기울여 듣고, 뭔가 갑자기 움직이면 바로 점프할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꼈고 나는 경계심으로 가득찼다. 영적 경계심무언가를 경계하는 것은 영적 경계심 훈련에도 중요한 요소다. 경계한다는 것은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파수꾼은 적의 접근을 지켜보며 경계한다. 그들은 경계심으로 가득하여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여기면 바짝 긴장하고 경계심을 품는다. 적들에 둘러싸여 있는 십자가 군병들로서 우리도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오래된 찬송가의 가사에 이렇게 나온다.신자여, 아직 쉬지말고편안함을 꿈꾸지 말라적들이 둘러싸고 있으니깨어 기도하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묵상과 기도처럼 건강한 영적 삶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신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서신들은 한결같이 도덕적으로 경계하고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를 촉구한다(고전16:13; 갈 6:1; 골 4:2; 딤전 4:16; 벧전 4:7; 요이 8). 그리고 히브리서는 우리 영혼을 지켜보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도 서로 권고하며 조심하라고 한다(히 3:12; 13:17). 하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강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현대 영적 훈련 매뉴얼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실천방법의 하나다.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늘 적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7세기 청교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 이의 실천에 대하여 자주 기록했다. 예를 들면, 초기 청교도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는 1602년에 ‘일곱 개의 논문’(Seven Treatises)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펴냈다. 7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저서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폭넓은 시각과 경험을 탐구하고 있다. 세 번째 논문에서 로저스는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고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이것들을 공동체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으로 나눈다.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는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훈련에는 묵상ㆍ기도ㆍ금식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로저스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개인적 영역의 첫 번째 목록에 놓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이 바르게 잘 사용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무시하면 다른 영적 훈련이 방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영적 훈련이라는 칼을 가는 숫돌이며, 다른 습관을 예리하게 지키게 하는 실천 방법이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소극적 차원은 세속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죄와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잠 4:23; 마 26:41; 롬 13:14).이것은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청교도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가 ‘들릴라 죄’라고 부른 것과 같이, 특정한 죄를 향한 개인적 경향에 대하여 우리가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삼손의 애인 들릴라처럼, '들릴라 죄’는 우리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귓속에 달콤한 말로 속삭이지만,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도덕적 힘을 끊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고의적이고 상습적인 죄를 짓도록 방치하는, 우리가 키운 특정한 죄의 패턴이다. 진흙탕 길에 깊이 파인 고랑 자국처럼, 이러한 악덕은 매일의 일과와 자기 합리화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우리 삶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패턴을 알아차림으로써 죄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이라는 우화에서 이 입구를 맨소울 도시(the city of Mansoul)의 다섯 개 문, 즉 “귀문, 눈문, 입문, 코문, 감각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살펴보지 못하면, 그 문을 통해 유혹이 우리 마음으로 기어 들어온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려면 우리가 방문하는 웹사이트, 읽는 책,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나 영화, 자주 가는 장소 그리고 우리 귀를 채우는 음악과 메시지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보안 시스템과 같다. 효과적인 감시 장치는 감시 카메라, 움직임 포착 센서, 투광 조명등, 전기 잠금장치, 고음의 알람장치 등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장치들은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자기 점검ㆍ기도ㆍ묵상ㆍ책임감과 같은 다양한 실천을 포함하며, 이 모든 것은 마음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예수님을 바라보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는 적극적인 차원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지 죄를 거부하고 유혹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그 시선을 고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맨소울이라는 은유의 도시를 다시 언급하면,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우리 영혼의 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을 빈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주하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엡 3:17).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의깊게 살피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흔들림 없이 멀리 보고, 위를 보고,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대하며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마24:42; 25:13; 눅 12:37; 계 16:15). 눈을 위로 향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 마음을 위에 있는 것, 즉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향하여 두라고 한 말씀을 의미한다(골 3:1-2). 우리는 발 밑을 보지 않고, 마라톤 선수처럼 결승선을 향하여 앞으로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는 사람이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회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은 아마도 내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장 잘 가르쳐준 사람일 것이다. 맥체인은 방황하고 있는 신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데 보내라. 자기 자신을 한 번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열 번 바라보라”고 했다.바로 그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의 핵심은 자신이 아니라 구세주에게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Most Neglected Spiritual Discipline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과기도
리차드
로버트
존번연
경계심
훈련
초첨
창조 신앙으로 몸과 성을 바라보기
by 이춘성
2020-08-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성(性)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성은 인간의 생명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창1:27)은 인간은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성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번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성의 사용을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하지만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성’과 ‘생명 번영’이라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생명 없는 성', '성 없는 생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성 없는 생명'이란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 밖에서도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 의학과 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 복제를 통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생명 없는 성'이란 성을 단지 남녀 사이의 쾌락만을 위한 놀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단지 감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책임감 없는 사랑과 같다. 책임을 제거하고 직감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은 단지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남용하는 세속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가속되었다.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난자와 정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어 아이가 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이것은 불임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임신 걱정 없이 순전히 섹스만을 즐길 수 있도록 각종 피임 방법을 고안해 내게 하였다. 결국, 피임법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 생명의 신성하고도 거룩한 연결 고리를 제거하고, 성을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성인 놀이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신학자 칼 투르먼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시하였던 과거 사람들과 달리, 현대 사람들은 성을 경시하고, 개인화시켰다고 말하였다.유튜브, 트위터 등의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과 텔레비전, 신문 등의 대중 매체들은 성을 성인들의 놀이 정도로 취급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매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 100여 년 전 1880년대에 미국에서는 YMCA, YWCA 등의 기독교 단체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시행하였다(Carrera). 당시의 성교육은 일종의 순결 서약 운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중 매체는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고, 10대 임신율이 오르고, 불법 낙태로 여성들의 건강이 위험해지자 성교육은 방향성을 새롭게 갖췄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보다는 호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나쁜 결과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성교육을 시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쳐 안전한 성관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미국 청소년들의 약 40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질병관리본부의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의 5.7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고, 최초 성경험은 만 13.6세로 나타났다. 최근 소셜 벤처 EVE의 “2019 청소년 성(性)문조사”에 의하면 약 54.7% 이상의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다. 비록 임신율은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성교육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라는 비뚤어진 인식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과 생명을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난 것이다. 결국 성의 경시와 도구화는, 나의 생명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장기매매와 같은 생명 경시와 생명의 도구화를 가속 시킬 것이다.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성교육이란 성에서 책임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다. 그 결과 성은 일종의 성인 놀이로 폄하되고 있다. 그리고 어른을 흉내 내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성교육이 오히려 성적 호기심을 더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에 관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성교육 전문가들과 교회에서는 조기 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교육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와 비신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공적인 영역에서 현대적 성교육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교회가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다. 또한 현대의 성교육 중에서 몸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무시할 부분이 아니다.초기와 중세 기독교는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몸을 분리하고 이를 차등하는 영육 이원론이 지배하였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이다. 더러운 육체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쾌락으로 탕진하는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영육 이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정정숙).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시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창1:27).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몸과 영혼이 유기적으로 연합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간접적이지만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구들(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이해하고 이를 균형 있게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번영하게 하고자 하신 문화명령을 시행하는 창조자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기본적인 통치 자질이다. 비록 이 자질이 타락으로 어그러지고 무너졌지만, 이 기능은 여전히 인간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 신자는 타락 이전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창조의 세계관을 회복하고 이에 따른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가족, 새로이 태어날 아이들을 양육하고 언약의 자녀들로 키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신자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자들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라는 자녀들에게 신체가 얼마나 소중하며 가치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과 부모부터 신체의 여러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며, 왜 창조되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몸의 창조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교육도 이러한 맥락 가운데 이해하고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 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춘기의 이차 성징이 일어나는 아이들이 신체 변화를 무방비로 맞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 신앙 안에서 이것들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마지막으로 몸, 특별히 성과 관련된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아이들이 질문하거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인터넷, 잡지, 동영상, 친구, 책 등)을 찾지 않는 한 일부러 가르칠 필요는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호기심이 생겼을 때, 그때 구체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답하는 것이 좋다.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에는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3:5;8:4)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다(Thomas). 참된 사랑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만을 깨운다면 이것은 욕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교육에 있어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자극에 노출되어 있고, 아직 깨우지 말아야 할 성적 호기심이 조기에 발달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의 성과 신체에 대한 질문 앞에서 교회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성에 대한 창조신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가지고 신체의 의미를 가르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성과 몸에 대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 외에 현대의 타락한 성문화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 성교육은 이 시대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며, 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신학은 모든 신자가 알아야 할 신앙을 위한 지식이다.
생활
건강
창조
타락
성
생명번영
쾌락
세속문화
성교육
아내를 이끌어 주며 사랑하는 법
by Brad Merchant
2020-08-10
결혼은 완전한 실재를 보여 주는 불완전한 그림이다.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신성한 진리를 드러내는 메타포, 즉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받는다는 진리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이 가시적인 세상 속에 잠깐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이 계획되었다고 설명한다.하나님은 모든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드러내기 원하신다. 어떻게 그런 모습을 드러내실까? 자신의 아내를 경건하게 리드하며 그녀의 성장에 유익을 끼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통해 그리하신다.바로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남편이 감당해야 할 여섯 가지 실천 사항이 있다.1. 선한 의도를 가지고 질문하라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선한 의도를 가지고 아내에게 질문하는 일은 그녀의 영적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 된다. 그 시작 단계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아내에게 규칙적으로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당신의 신앙생활에 격려가 되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 당신의 신앙생활에 낙심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내가 남편이자 아빠이자 한 사람의 신자로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2. 아내를 섬기라매일 자문해야 한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아내의 일상을 좀 가볍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세탁을 하거나, 그릇을 씻거나, 애들을 데리고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우리는 남편으로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말이다(막 10:45). 그분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필요를 돌보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며,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셨다.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의 가정은 휴식을 취하기 위한 피난처일 뿐 아니라 섬김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하루하루 가정에서 아내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3. 결혼 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라결혼 생활을 위해 시간을 일부러 ‘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인생은 언제나 바삐 돌아간다. 따라서 건강한 결혼 생활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 해의 스케줄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일부러 결혼 생활을 돌보기 위해 스케줄을 세우지 않는다면, 결혼 관계는 곧 메말라 가기 쉽다. 부부마다 생활 패턴이 다르기에 스케줄이 일정할 순 없지만, 우리 부부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리듬을 따라 계획을 세운다.매일마다 기도하기 (자기 전에)주마다 데이트하기 (금요일 저녁에)달마다 일상에서 탈출하기 (하루 온종일)분기마다 가볍게 여행하기 (1박 2일로)해마다 휴양하기 (며칠 간 둘이서)이처럼 규칙적으로 아내와 사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스케줄을 짜서 달력에 표시하기 바란다.4. 아내에 대해 알아 가라베드로는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권면했다(벧전 3:7). 이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아내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스포츠팀의 연간 성적만큼이나 아내의 마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의 아내가 요즘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또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이 물어본다면, 이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1) 계획적으로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2)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신경을 써야만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다.그러므로 TV 리모컨이든 스마트폰이든 무엇이든 간에 아내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내려놓고, 그녀에게 집중해서 대화하기를 바란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원리를 결혼 생활에 구체화하라. 그리고 아내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그녀에 대해 알아 가라.5. 둘이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라건강한 결혼 관계는 배우자의 성장을 상호적으로 추구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우리는 배우자가 예수님을 더 닮아가도록 도와야지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명목 하에 배우자의 변화를 바라지도 않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내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서로 같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 보라. 또한 좋은 컨퍼런스에도 함께 가고 주일 설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보라.하나님은 아내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라고 남편인 우리를 부르셨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알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라.6. 아내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나는 결혼 생활에 관한 성경구절 중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라고 권면하는 잠언 5장 19절을 좋아한다. 여기서 “연모하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의 다른 데서는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사 28:7). 이 단어를 통해 잠언 기자가 남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아내와 사랑에 푹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잠언을 하찮은 조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이후에 깨닫게 되듯, 결혼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대 사회에서 결혼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치러지곤 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잠언에 담긴 지혜가 더욱 놀랍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모든 조건을 뒤로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사랑에 푹 빠져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아내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수 있겠는가? 여기에 몇 가지 팁이 있다.왜 아내를 사랑하는지 말해 주라: 당신이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이유를 카드에 써서 건네주라.타인 앞에서 아내를 칭찬하라: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를 더욱 존중해야 한다. 그녀의 삶에 드러나는 아름다운 덕목을 볼 수 있도록 타인에게 알려 주라.따뜻한 행동으로 아내를 놀라게 하라: 당신이 애들을 돌보고 아내는 밤새도록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하라. 또 꽃다발을 들고 그녀가 일하는 회사에 찾아가라. 아니면 출근하기 전 그녀에게 작은 쪽지라도 남겨 마음을 전하라.아내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이야기하며 그녀를 격려하라: 아내와 데이트하며 천천히 구체적으로 그녀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말해 주라. 그녀가 더욱 참을성 있고 지혜로우며 친절하면서도 담대할 뿐 아니라 경건한 모습까지 갖춰가고 있다면,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며 그녀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는 변화를 지켜보라.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에 빠져 세상이 그들을 볼 때 마치 사랑에 취한 자들처럼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6 Ways to Lead and Love Your Wife번역: 장성우
가정
결혼
아내
섬김
시간
연모
오틀런드
칭찬
격려
성장
강을 보며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라
by Brett McCracken
2020-08-09
사막같은 날씨에 강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시원한 물과 초록빛 강둑이 주는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다면, 시편 126편 4절은 당신에게 그 어떤 구절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흐르는 물만 있다면, 아무리 말라 비틀어진 땅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유타에 있는 자이언 캐니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버진(Virgin)강이 사막과 다름 없는 마른 협곡 사이를 지나며 그곳을 푸른 빛과 야생의 생명으로 채운다. 미국 땅에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다 마찬가지고, 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강이 다르지 않다. 강은 그 어디에서 흐르던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한다. 강은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매년 여름이면 언제나 사람들은 강가에 모인다. 수영과 낚시같은 놀이를 위해서든 또는 강가에 앉아서 삶이 주는 위대한 경이감을 맛보는 명상을 위해서든, 강은 전 세계 모든 인류로부터 사랑받는다. 그렇기에 성경에 강과 관련한 이미지 상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 중에서도 가장 위로가 되는 시편 46편을 쓴 글쓴이는 그 누구보다도 이 강의 이미지를 잘 사용했다(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말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계 22:1). 성경 저자가 “강”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임재라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지구에 사는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강으로부터 배우는 세 가지 교훈감각이 둔하지 않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시 19, 롬 1 참조),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왜 강이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설명하는 도구로 자주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은 자연의 이미지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자주 사용했는데,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그분의 특징(signature)이 자연스럽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자세히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에서 몇 시간에 걸쳐 집중해서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 유명한 추상화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종종 스크린이나 디지털로부터 벗어나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건강에만 좋은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유익한 이유다.하나님이 창조한 강 주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신학적인 교훈을 더 잘 얻을 수 있다. 여기 세 가지를 소개한다.1. 강에 가까이 있을수록 더 번성한다시편 1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이 내용은 4절에서 말하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와 완전히 대비된다. 이런 이미지는 사막에서 강가에 다가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메마른 나무에서 갑자기 가지와 잎사귀가 자라면서 무성해지더니 참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강가에 있는 나무는 지속적으로 물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결코 마를 일이 없어서 잘 자란다.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런던과 파리 그리고 카이로와 로마같은 도시가 다 강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강은 비옥한 농지, 살아 움직이는 자연환경 그리고 무역의 통로까지 제공한다. 강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존 여부는 생명의 강이 되시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유일한 “생수”(요 4:7–15)의 근원이기에 우리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유지시킨다. 2. 강의 힘은 우리를 만들어간다강이 평화롭다고 해서 거기가 항상 안전하다고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목양적인 평안을 주는 자이언의 버진강은 종종 치명적으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것은 폭풍우가 엄청난 물길을 쏟아내릴 때다. 강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도 물살을 거슬러 헤엄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강하게 흐를 수도 있다. 그랜드캐니언을 보면 협곡을 따라 꾸불꾸불한 길을 만들어낸 강의 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만큼이나 강은 우리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알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아슬란으로 등장하는) 주님이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하나님이라고 썼다. 기독교인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한다. 단지 토마스 킨케이드(Thomas Kinkade)의 그림에나 등장하는 평화롭게 흐르는 강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낙원을 장식하기는 하지만 결코 위험한 방식으로 우리를 만들어가거나 방해하지는 않는 평화로운 물줄기 정도로만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세고 거칠게 흐르는 강이다. 그렇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강둑에 안전하게 서 있으려는 생각 대신 그 흐르는 물살에 몸을 던져야 한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가 주시는 신선한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흐르는 물살과도 같은 강한 능력이 우리를 움직이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돌”(벧전 2:5)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3. 우리는 강 같은 통로가 될 수 있다하나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나뉘어 흐르면서 각각 주변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물과 침전물을 공급하는 지점인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다. 통로(channel)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도구(vessel)가 되어 강이 가진 축복을 배분하는 데 쓰임 받는다는 의미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복음에 적대적인 땅에서도 번성하는 삶의 양식을 축적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른 땅에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 땅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주변에 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가? 동네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이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독성이 있는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고 있는가? 기독교의 존재가 새로움과 생명을 주고 성경 말씀을 축적하여 삼각주를 만들게 하는가? 행여나 우리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것이 오염되었거나 유독성 있는 물은 아닌가? 이 타락한 세상은 바짝 말라서 이제 불모지가 되었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사라진 사막이 되었다. 이 세상은 실로 갈급하게 생수를 원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예수님 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생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수가 우리의 삶에 확실한 증거를 남길 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을 주는 작은 시냇물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과 공동체는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세상 안에서 푸르른 녹지가 되어야 한다. 비옥한 삼각주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가 되어서 생명을 주는 이 강가로 지치고 힘든 이들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을 강가로 이끄는 초대장이 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부르던, 종종 강가에서 가졌던 수련회에서 부르던 이 노래를 다시 기억하자. “강 같은 삶이 내 안에서 흘러 넘치네…. 더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 영혼 안에서/ 넘쳐라,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나를 온전케 하소서/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게 주소서/ 풍성한 삶을 주소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ok at a River, Learn About God번역: 무제
영적_성장
영성
시편126편
임재
하나님성품
CS루이스
피카소
생수의근원
신앙에 의문을 갖는 십대 자녀, 어떻게 도울까?
by Melissa Kruger
2020-07-27
어린 자녀들은 거의 매일 이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을 부모에게 속사포같이 쏟아낸다. “나는 왜 7시 30분에 잠자러 가야 하는 거예요?”와 같은 상황적 질문에서부터 “내가 날개를 만들어 달면 지붕 위로 날아갈 수 있을까요?”와 같은 이론적 질문, “하나님은 왜 내가 자전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않으셨지요?”와 같은 신학적 질문까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는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매일 답변하고 조언하며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하지만, 자녀가 십 대에 들어서면, 그들은 새로운 정보 공급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부모는 더 이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최고의 지혜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많은 십 대들이 의문이 들 때, 특히 그것이 신앙에 관한 문제일 때, 사실 부모는 그들이 가장 나중에 찾는 대상이다. 그들은 종종 “내 말을 들어; 부모는 이해를 못해”라는 윌 스미스(Will Smith)의 노래 가사를 말로 표현하거나 속으로 중얼거릴 것이다(그들이 너무 어려서 윌 스미스가 노래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십 대 자녀가 답변을 찾고 있을 때, 마음을 열고 질문과 의심 및 불안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정에서 그런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토론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경청하는 귀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의심과 질문에 응답할 수 있을까?우리 자녀가 신앙에 대한 의문을 갖고 씨름할 수 있는 가정 환경을 조성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영적 토론이 가능한 환경을 미리 만들어라 자녀가 아직 어리다면, 그들이 십 대에 영적인 문제를 토의할 수 있도록 예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가정에서 성경 읽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라. 성경 구절을 함께 외우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눠라. 아브라함, 사라, 모세, 룻 등 성경 인물의 이름이 그들의 유치원 친구 이름처럼 친숙해지게 하라. 식사 전에 기도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침대 밑의 괴물을 두려워할 때 안정과 위로를 얻도록 기도해줘라. 어린 나이에 영적 대화를 시작하면 십 대 시절에도 대화가 계속 이어지게 하는 토대가 된다.자녀가 좀 더 나이가 들었더라도,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그들과 여전히 함께 성경을 읽고 배우기를 시작할 수 있다.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지 혹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면, 그것을 십 대 자녀에게 이야기하라. 정직과 겸손으로 다가가면, 자녀가 갖고 있던 저항하는 마음을 자연적으로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성경 공부 자료를 함께 찾아보라. 친구나 목회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성경 공부 자료를 사용했는지 물어보라. 가정에서 영적 토의를 시작하는 시기는 어느 때든 가능하다. 그들의 영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과 함께 성경을 두루 검색해보라.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이 말하게 하라.논쟁을 줄이고 질문을 늘려라십 대 자녀가 신학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할 때, 정답을 바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실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의 논쟁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 의문이 있는 십 대(성인)들은 보통 그들이 언급한 관심거리나 신학적으로 따지고 드는 사항들 뒤에 더 깊은 씨름거리들을 가지고 있다.질문하는 방식은 그들에게 그냥 답을 말해주는 것보다 그들의 이해력을 더 높일 수 있다. 만일 자녀가 성경의 무오성을 의심하고 있을 때, “언제 처음 성경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니?”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 있니?”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으면, 그들의 관심을 탐색해보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어보면서 말이다. 자녀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 속에서 그들을 알고 이해하려고 해보라. 질문을 하는 것은 당신이 경청하겠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그들을 한 인격으로 존중하겠다는 점을 알리는 길이다. 질문은 대화가 계속 이어지게 하며 더 깊은 논의로 나아가게 한다. 자녀가 질문하기 전에 그들이 질문하도록 도우라가정 예배 시간에 남편과 나는 우리 자녀들이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 만한 질문들을 정기적으로 묻는다. “누군가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나서, 예수님이 물 위로 걸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아마도 강어귀의 모래톱 위를 걸었을 거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니?” 혹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너는 뭐라고 말해주겠니?”이러한 질문은 십 대 자녀들이 깊이 사고하며 성경을 읽도록 돕는다. 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나는 아이들에게 “만일 사람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려면, 너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많이 제공하겠니 아니면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반적인 이야기만 해주겠니?”라고 물었다. 가능한 한 적은 정보를 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낸 후에(이 훈련 방식은 나름 일리가 있다), 요한이 독자들에게 제공한 많은 세부사항들을 눈여겨 보게 했다. 요한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난 특정 장소를 이야기한다. 만일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정말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면, 그가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을 왜 그리 많이 포함시켰겠는가? 글세, 요한이 정말로 나쁜 거짓말쟁이였거나 아니면 아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진실인 사실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십 대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움직여 배움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 중의 하나다. 그들이 질문하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들이 의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능동적으로 답변을 찾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정이 질문을 할 수 있는 곳임을 알게 한다.그들의 질문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만일 자녀가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질문을 시작하면, 우리는 두려워서 재빨리 바로 대답을 한다. 우리는 자녀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을 자녀 양육을 잘하고 있는 증거로 보려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만일 자녀가 신앙이 있으면,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양육했다고 본다. 만일 자녀가 믿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 된다. 그들이 질문하는 것을 우릭가 두려워하는 이면에는 그러한 질문이 결국 신앙을 잃어버리는 첫 걸음이라고 여기는 왜곡된 생각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이들은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계속해서 상기시켜야만 한다. 오직 은혜,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방식은 없다. 우리 자녀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고(엡 1:4) 어둠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해내셨기 때문이다(골 1:13). 하나님은 우리의 양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을 양자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을 인내로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물론, 크리스천 부모들이 종종 하나님 사역의 방편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일은 항상 그분의 계획이며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하다.그러므로 십 대 자녀가 신앙 문제로 씨름하기 시작하면, 겁내지 말라. 분노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라. 조바심내거나 간섭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 근심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그 두려움을 그분께 맡기라. 인내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친철함으로 그들을 대하라. 십 대 자녀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도록 도우라. 그러나 단지 성령만이 분별력을 주실 수 있음을 알라(고전 2:14). 그들이 답할 수 없는(혹은 어쩌면 당신도 답할 수 없는) 의문이 있다고 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라.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여 목회자나 지도자의 조언을 구하라. 자녀가 사고하는 과정을 돕도록 적절한 책을 찾으라.신앙에 대한 의문을 표현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드는 일은 시간과 에너지, 포용력과 기도가 요구된다. 우리 자녀들은 어린 시절 만큼이나 십 대일 때도 부모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스포츠 행사나 댄스 연습과 숙제로 분주할 때, 의문점들을 토의하는 환경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나의 가장 큰 열망은 내 자녀들이 항상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발견하기를 소망한다. 또한 내가 그들이 의심하는 것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걱정거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의 모든 날들을 사랑할 것임을 그들이 알기 원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elp! My Teen Is Questioning the Faith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십대
영적토론
질문
두려움
인내
기도
사랑
소란스러운 시대 묵묵히 자기 일 하는 법
by Mark Ward
2020-07-07
몇 년 전 유튜브 채널인 College Humor에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마냥 요란을 떨며 소셜미디어를 그만두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 영상을 보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가 그저 조용히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시간 낭비일 뿐인 이 파티장을 떠나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할 거라며 갑자기 열변을 토해낸다. 이 영상이 자주 생각났다.그 영상이 생각난 이유는 소셜미디어를 떠나는 사람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 소셜미디어를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 넘쳐나는 자기 홍보, 성급한 정죄, 새로운 것에 대한 아테네식 탐닉에 더해 다툼, 잘난 체와 아는 체를 비롯한 각종 척하기, 자기 의 등에 신물이 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 역시 거기에 동참하라는 유혹에 매일 직면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각종 음모론, 믿기 힘든 민간 의료 요법, 정치적 분파주의, 배교, 이혼 등에 관한 포스팅을 볼 때 피로감을 느낀다. 조쉬 해리스(Josh Harris)가 입에 담기도 싫은 말을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그의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이제는 아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어머나 세상에”라고 하면 거의 동시에 내가 “알고 싶지 않으니 나한테는 말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신 기술이나 기계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부럽다. 십대 소녀가 사이버 폭력으로 인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들으면 어찌 보면 나도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스마트폰에 이처럼 탐닉하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고, 나 역시 이 실험의 한 부분이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소셜미디어에서 나름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기 위해 계속하여 도움을 구하며, 내가 하는 포스팅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오늘 같은 소셜미디어 시대를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지침을 알 수 있다.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다음 두 구절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 3:11)나는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 중 누가 게으르게 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인류 역사에 있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오늘날의 정보 통신 기술이 나를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busybody)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Logos에서 일하는데, 필자의 그리스어 어휘론 지식에 의하면,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우리 것이 아닌”이라는 뜻의 비즈(βιζ)와 “밀랍”을 뜻하는 보데이스(βόδης)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은 돌아다니며 자기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자들, 다시 말해 자기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자칭 감독관 행세를 하는 이들을 말한다(벧전 4:15). 성경은 때로 덕과 악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덕과 악을 목록 형태로 제시한 후 적용을 우리 각자에게 맡기는 때도 있다.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오직 관용하며”(딤전 3:3).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최근에 올린 소셜미디어 포스팅 50개 중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몇 개 정도인지 세어보라.자기 일바울은 그저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 바울은 대안을 제시한다.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고든 피(Gordon Fee)의 설명에 의하면 바울은 여기에서 모순 어법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NIV나 NASB 번역인 “조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열망하라”(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를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소셜미디어는 요란하게, 더 크게, 그리고 더 큰 영향력을 미치며 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잔치에서 끝자리에 앉으려는(눅 14:7–11)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이 주는 강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소셜미디어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서’ 동시에 소셜미디어에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자기 일”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해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우선 나에게는 내 친구들과 가족이 바로 “자기 일,” 즉 나의 일이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일이기에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거나 답글을 다는 것을 통해 그들을 축복한다. 친구들이나 가족이 GoFundMe(온라인 모금 사이트)를 통해 모금을 하면 거기에 참여할 수도 있다. 내 가족이나 내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것도 큰 유익이 될 수 있다. 상담이라든지 구직 관련 추천 등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많다.내가 알고 있는 주제들 역시 내 일이다. 필자는 영어 및 그리스어 언어학을 즐기고 영국 합창 음악을 좋아한다. 이 주제들에 대해 글을 올리며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비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는 논쟁 모두 내 일이다. 내가 토론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때, 그리고 토론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할 때 이는 “내 일”이 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사려 깊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설득력 있는 의견들을 내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고, 자극적인 말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기준에 의하면, 기후 변화는 내 일이 아니다.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가 진심으로 회심했는지 여부 역시 내 일이 아니다. 스타벅스에서 제공하는 크리스마스 커피 컵이나 이란에서 벌어지는 군사 작전의 복잡다단함 역시 내 일이 아니다. 그런 일들이 중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 역시 개인적 의견이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을 공적으로 표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닌 그런 대화들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작을 것이다. 잠언 18장 13절을 잊지 말라. 소셜미디어는 내가 ‘실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고 그저 지금 온라인에서 내 눈 앞에 보이는 그 사람보다 더 크게 더 빠르게 목소리를 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한다. 내가 올린 글이 사람들에게 덕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거나(엡 4:29) 논쟁 주제에 대한 지식이 피차 비슷하다면, 온라인에서의 싸움이나 언쟁의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올린 헛된 글에 대해 심문을 받을 것이다(마 12:36).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바울 서신에 나온 이 짧은 단어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은 필자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평가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피해야 할 악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이다. 또한 바울의 명령인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를 통해 내가 배양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소셜미디어의 모든 죄악을 다 없앨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사랑과 은혜와 적극성으로 내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Mind Your Own Business When Everyone’s Sharing Theirs번역: 이정훈
생활
관계
소셜미디어
스마트폰
논쟁
데살로니가교회
Logos
고든피
기후변화
시편이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
by Heather Ferngren Morton
2020-07-05
최근 사태는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십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생명을 잃었고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아머드 알버리(Ahmaud Arbery)와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영상은 또 어떤가? 지도자들은 단합이 가장 필요한 지금 국민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가 당면한 위기 상황을 보면서 걱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두려워말라”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언론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제 2의 감염 폭증”을 연일 예견하고 있고, 또한 뉴스에 폭력 장면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라는 명령이 내가 가야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바로 이럴 때 우리에게는 시편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성경이 다 삶에 도움을 준다(딤후 3:16-17).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상황에 더 도움을 주는 특정한 구절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잠언 25장 11절은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른 찬송책인 시편은 특히나 더 우리의 두려움을 생생한 기도로 바꾸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평안을 누리도록 만든다. 고통을 위한 언어시편 중 많은 작품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쓰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를 죽이려는 사악한 인간으로부터 도망다닌 적이 없는데, 시편에서 그런 상황은 일상에 속한다. 나는 전쟁터에 나간 적도 없다. 그러나 나도 종종 잠재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그래서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느끼게 하는 위기를 겪기는 했다. 비록 시편이 쓰여진 상황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시편 저자가 느낀 절망은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치 익숙한 전례처럼 구원을 간구하는 시편 저자들의 울부짖음은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불평할 때의 기도시편의 많은 시가 기도로 작성되었다. 시편은 단지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간의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시편은 단지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편은 우리가 불평의 울음을 내뱉을 때에도 여전히 기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해 수직 방향을 견지하도록 도와준다. 기도는 단지 고통에 빠진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이 아니다. 고통을 누르거나 자기 연민 또는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화를 쏟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편은 우리의 모든 감정이 애초에 감정을 창조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께로 이끄는 이미지시편은 시다. 이미지, 반복 그리고 리듬이라는 특징을 가진 시의 형태는 종종 산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과 예술처럼 시는 상상과 감성적 지능 그리고 창의적 표현을 담당하는 우뇌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불안이 압도할 때, 선형적이고 직설적인 산문 형태의 성경 구절은 우리를 위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 속에서 또아리를 튼 두려움은 그런 성경 구절이 아예 들리지도 않게 할 지도 모른다. 놀라서 맥박이 뛰고, 손이 떨리고, 숨이 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야 말로 우리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진리로 인도하며 우리를 안정시켜준다. 힘든 때를 만나면 내가 반복해서 읽는 구절이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나는 성문을 통해 쭈욱 이어지는 넓은 조약돌 거리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를 상상한다. 길 주변으로 우거진 풀이 있고 우뚝 솟은 떡갈 나무와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여기는 삶과 휴식과 평화의 장소다. 단순한 환상이나 탈출과는 거리가 먼 이 이미지는 초월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변치 않는 안전함은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시편 저자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끔찍한 재난(시46:2–3, 6)을 묘사하고나서 곧 도시의 번영과 평화(시 46:4-5)를 교리적인 진리와 함께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1, 11).풍요롭고 푸르른 곳, 치료와 평화가 넘치는 이 하나님의 안전한 도시에 머무는 한, 나 자신과 두려움을 바라보며 떨던 나의 시선은 이제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나의 피난처시며 요새가 되신다. 시편 저자의 이 시적인 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 안에서 안정을 찾도록 한다. 시편을 통해서 나는 문자적이고 직접적인 표현(literal language)이 드러내는 하나님과는 다른, 새로운 측면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음 시편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시 91:4),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시 130:6).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인간의 깊은 감정이 생생한 이미지에 덧입혀져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이게 바로 시편이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어머니처럼, 시편의 시는 우리에게 위로를 속삭이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는 바울의 권고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이끈다.로라 파브리스키(Laura Fabrycky)는 이렇게 말했다. “엄습하는 현실 속에서 시편은 고통의 동반자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려준다.”지난 몇 주간의 경험을 통해서 두려움이 얼마나 나를 내 자신 속에만 깊이 빠지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내 눈에 온통 나 자신만 보이도록 만든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대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 부서진 세상도 우리 아버지의 세상이며 미래 언젠가는 새롭게 될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리자로 앉아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은 단지 이런 진리를 가리키고만 있는 게 아니다. 시편은 우리를 실제로 그 진리 속으로 인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시편이 필요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We Need the Psalms More Than Ever Before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_기도
시편
위기
코로나_바이러스
팬데믹
자녀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라
by Ryan Lister
2020-06-26
부모든 자녀든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우리 자녀들의 소망의 바탕이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의 소망, 감정, 그리고 행동을 이끈다. 기쁨은 우리 자녀들 마음 위에 매달린 당근 같은 것이다. 채소를 다 먹어야 디저트를 준다고 하면 아이들이 울상이 되고, 컴퓨터 게임을 그만 하라고 하면 5분만 5분만을 외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기쁨이 아이들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으면 우리는 자녀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부모인 우리의 역할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신 것은 우리 자녀의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로 부르신 것이다. 이는, 기쁨을 찾아 헤매는 우리 자녀가 ‘최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많은 부모들에게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나 팟캐스트는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기쁨이 지닌 영향력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닫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이미 어떤 방향을 향해 자녀의 기쁨을 인도해가고 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라. 딸이 학교에서 불량배 같은 급우와 다투고 온 날,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 당신 자녀가 학교 운동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해주었는가? 아마도 자녀가 받은 상처를 기쁨으로 바꿔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상처를 기쁨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늘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최상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다. 자녀에게 컴퓨터를 덜 쓰고 책을 더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부모로서 하는 대부분의 일은 자녀가 기쁜 삶을 살길 바라는 우리의 내적 열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되고 영속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 기쁨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에 비유하신다(마 13:44–46; 비교. 빌 3:7–8). 보화나 진주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행복감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라도 그 막대한 부를 차지하려 할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진짜 보화, 진짜 진주는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다. 궁극적인 기쁨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것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가 우리의 기쁨 추구를 왜곡시키기 시작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많은 경우, 찾지 말아야 할 곳에서 찾는 기쁨, 근시안적인 기쁨이 바로 죄라고 할 수 있다. 죄는 가짜 기쁨을 진짜 기쁨인 것처럼 퍼뜨림으로써 우리를 현혹한다. 죄는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기쁨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뱀은 먹지 말라 금하신 그 열매를 먹는 것이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주신 약속들보다 더 좋은 것이라며 유혹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베어 물었을 때, 그들은 열등하고도 망가진 기쁨, 즉 좋아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한때 친밀했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주는 가장 완벽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그 열매를 먹은 것이다(창 3:5–6).자녀 양육과 이것이 무슨 관계일까? 기쁨은 자녀 양육을 재정의해준다. 아이들이 아무 곳에서 아무 기쁨이든 찾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부모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에게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과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라 하신다(요 15:11; 시 36; 시 37:4).자녀 양육 재정의하기그러므로 우리가 이 관점을 수용하면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녀의 기쁨을 위한 청지기로 인식하면, 우리의 자녀 양육은 ‘드디어’ 목적지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가르치고 말하고 시키고 사랑하고 교정하고 위로하는 모든 것은 자녀가 놀라운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들이 되는 것이다(시 16:11). 하지만 단지 우리의 자녀 양육 방식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의 가장 큰 기쁨의 대상이 되면, 우리는 아이들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다는 시각으로 보면, 부모로서 우리의 일이 단순히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로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임을 알게 된다.이는 곧 우리가 완벽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더 나은 부르심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자녀가 완벽한 하늘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를 목표로 삼으면 우리에겐 자유가 생기고 우리 자녀도 자유로워진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자녀들 역시 실수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듯, 자녀들 역시 동일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한다.자녀 양육의 핵심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도록 격려할 수 있을까? 우리 자녀의 마음을 다루는 좋은 청지기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실제적 방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부모가 먼저 기쁨을 누려야 한다누구나 기쁨을 추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부모인 우리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므로 자녀의 마음을 잘 인도해주려면 우리가 먼저 길을 알아야 한다. 부모인 우리의 특권은 우리의 최고의 기쁨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 자녀의 손을 잡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우상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부모인 당신 자신의 우상을 분별하라. 자문하라. 내가 오늘 소망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예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2. 할 수 있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재정의하라나는 자주 일관성 없이 흔들린다. 어떤 때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녀에게 뭔가를 못 하게 하지만, 그저 실리나 피곤함을 이유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이를 개선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할 때는 명확하고도 일관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행동을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녀에게 영속적인 행복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시키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자녀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과속방지턱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는 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해도 된다”나 “하지 말아라”고 대답하기 전에, 당신이 보이는 반응이 기쁨을 향해 가는 아이들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하라.3. ‘왜’라고 물어라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기쁨이 가진 힘을 가르쳐줘야 한다. ‘왜’라는 말을 사용하여 질문하면 좋다. “여동생을 왜 때렸어?” “시험 공부를 왜 안 했어?” 이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물론 “몰라요”나 “그냥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당신은 아이들이 자신의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운 셈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결국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에 휘둘리기보다는 그것을 스스로 평가해보고자 결심하게 될 수 있다. 4.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라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이들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물어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녀의 기쁨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면 아이들 마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신 자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아이들이 그 사랑을 올바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일시적인 기쁨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연결시키도록 도우라 하신다. 자녀와 농구를 하라.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는 이런 선물들이 어떻게 더 큰 기쁨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라. 레고(Lego)나 인형은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녀가 하늘 아버지께 소망을 두도록 이끌 수 있다. 자녀가 죄 짓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길 밖에서 기쁨을 찾음으로써 기쁨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특권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Parenting Is About Treasuring: Four Ways to Nurture Joy in God번역: 이정훈
가정
자녀_양육
부모
기쁨
하나님
창세기
청지기
부르심
겸손으로 만나는 기쁨
by David Mathis
2020-06-22
축소해서 말하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과대 포장과 화려한 수식이 넘쳐난다. 대중적인 의사 소통은 하나의 장대한 사운드 비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파티, 이벤트, 보도자료, 경연 대회, 정치 집회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것은 과거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만 한다. 과대 광고와 과장, 화려함과 허세가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온라인 프로필을 꾸미는 데 가장 그럴듯한 사진을 선택하고, 가장 내세울만한 성과를 강조하며,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는 데이터를 선택해 타임라인을 신중하게 채워간다. 지금 하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한마디로 말해서, 과잉된 약속과 형편없는 결과라는 시대의 전염병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최소한 대중의 눈으로 볼 때, 단순한 진리를 겸손하게 전달하는 게시물은 거의 찾기 힘들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도 이런 사회적 압박에 희생되고 있다. 이번 주일 예배, 이번 컨퍼런스, 이번 연구, 이번에 나오는 책 등등을 알리는 메시지는 언제나 지난번 것 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교회 개척이나 새로 시작하는 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집단적 불안감과 미숙함은 실제보다 더 좋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증을 불러 일으키고 그러다 보면 사실보다 더 과장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척하는 교회든지 또는 사역 기관이든지 더 지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취약함과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을 위장하고 있는 정교한 포장에 불과하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보는 것은 어떨까?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 한번 겸손해지면 어떨까?당신 자신에 대해서 덜 생각하라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겸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그냥 마음먹는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겸손을 추구하는 첫 번째 과정은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만드는데, 겸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과정에 참여해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로마서 12장 3절은 겸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 중 하나며,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겸손케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들여다 보게 한다.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C.S. 루이스(C.S. Lewis)는 겸손에 대해 기념비적인 말을 남겼는데, “겸손이란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당신에 대한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과장된 생각에 빠져있지 말고, 대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나는 이 구절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비록 바울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라고 했지만,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세상의 패턴을 관찰하라첫 번째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과장된 사고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세상의 기준을 따를 때,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태초부터 그랬다.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에 발생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반란이다. 이런 죄가 뿌리를 내려 자라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퍼지기 시작해 세상에서 열매를 맺은 결과, 어떻게든 자기 사랑에 있어서만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는 인간들로 이 세상은 채워졌다.자기 사랑이라는 면에서 우리 선조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지금 우리의 손에는 우리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디지털 도구가 있다.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고 또 온 세상이 내 컴퓨터 스크린 위에 있다. 우리가 조금만 균형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또한 자화자찬으로 치솟았다가 조만간 자기 연민 속으로 추락할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예배와 경건의 시간을 쉬지 않고 가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다듬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겸손을 갖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요즘처럼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는 겸손이 마치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아도취에 빠진 이 세상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을 선택하기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교만)에 빠진 것을 본 예수님은 비유를 들었다. “상석”에 앉고 싶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0–11).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길 원한다. 많은 양들 중의 하나로서 낮고 평범할 뿐이지 결코 랍비나 선생 또는 스승처럼 특별한 존재(마 23:8–12)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것 없지만, 평범하기에 행복하고 더 나아가 기쁘게 종으로서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구나 다 작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되라고까지 했다(마 18:3). 그런 사람들은 굳이 강한 척할 필요도 없고, 또 다 가졌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다. 그들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의 비천함을 인정할 수 있다. 척하지 않기에 그들은 겸손하다. 자신에 대해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말하라자,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이 추구하는 자화자찬과 자기연민의 패턴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하는 것이고 또 지나친 것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우리가 하는 말에 달려있다.하루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나 자신에 대해 하는 생각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표현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당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당신에 대한 어떤 배경을 제시하는가? 당신 자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온라인 소개란에 써놓았는가? 굳이 SNS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얼마나 자주 겸손을 가장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가? 대중의 인정과 갈채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부러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안 좋게 써놓고 누군가가 나서서 당신을 높여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고 특별석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고 있는가?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말로 나오기 마련이다. 말은 나의 내면을 드러낼 뿐 아니라, 조금씩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형성하기도 한다. 작아도 만족할 수 있다흔히 말하는 “과소평가”는 겸손과 함께 간다. 화술의 일종인 과소평가는 오랫동안 “타피노시스(tapinosis)”라는 기술적 제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어 겸손(tapeinosis)에 어원을 두고 있다. 특정 현상(특히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나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며 최상의 (현대에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겸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우리의 풍요함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질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과소평가 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도 겸손이다. 그리스도가 안전함의 근원이기에, 우리는 실제 또는 온라인 대화에서 내 삶에 대해서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에서 더 극적인 삶을 누리며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실제보다 더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미묘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을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과소평가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능가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며, 그의 가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에 대해서 과대 포장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얼마든지 과소평가해도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예수님의 위대함에 점점 더 감동받을수록, 나 자신의 대단함에 감동받는 일은 점점 더 사라진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ell Yourself Short: The Rare Joy of Christian Humilit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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