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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질환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고찰
by Heath Lambert
2021-02-01
지금 이 세상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고 그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는 성경적 치료 상담사로서 정신 질환에 대응해서 어둡고 힘든 길을 그런 사람들과 함께 걸어왔다. 만성우울증에서 공황 장애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정신 질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소외되고 또 복잡한 어려움은 없다.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내 삶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도전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 질환'이라는 용어를 쓸 때, 사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정신 질환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에 정신 질환이라는 단어를 기독교인이 쓰는 경우, 그들은 그 질환을 아주 심각한,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아주 복잡한 문제를 가진 질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문제를 대하는 기독교인은 흔히 이 질병을 아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통 신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 약물이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정신 질환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된 도움을 주고 싶다면, 정신 질환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정신 질환이란 무엇인가정신 질환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 정신과 협회(The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가 만든 ‘정신 질환에 대한 진단과 통계 매뉴얼’(The Diagnostic and Statistic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은 정기적으로 정신 질환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그렇게 자꾸 바꾸는 이유는 심리학에서 내리는 정신 질환의 가장 최신 정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종종 그 정의가 또 다른 단체인 전국 정신 질환 연합회(The National Alliance of Mental Illness)가 내리는 정의와 충돌하기도 한다.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인 에릭 마이셀(Eric Maisel)은 ‘싸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심리학자들이 정신 질환을 정의하는 방식이 그 병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이 진짜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본질이다. DSM은 1952년에 처음 발간되어 정신 질환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을 압도하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체계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병이라고 부르는 이 진단에 대한 병리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병리학은 의사가 질병을 진단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이상이다. 예를 들어, 몸 속에서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분열하고 증식하는 대량 세포가 있는 사람은 암 진단을 받는다. 과학자들은 비정상적인 세포 성장과 정상적인 세포 성장을 비교하여 반복적으로 테스트하고 관찰하기 때문에 암에 관한 병리를 알고 있다. 검사하고 확실한 표준과 비교함으로써 의사는 진단 결과를 객관적으로 도출한다. 병리의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테스트를 수행함으로써 의사는 비로소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다는 의학적 진단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DSM에 나오는 정신 질환이 다른 질병과 동일한 수준의 의료 정밀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불행하게도 DSM에 기재된 질병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런 질병이 진짜로 있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의학적 검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DSM에 나열된 장애는 의학이 질병이라고 부르는 대상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다음은 그중 세 가지다. 1. 병리학은 없고 대신 위원회의 투표만 있다의학에서 다루는 다른 질병과 달리, 심리학에서 다루는 질병은 위원회의 투표로 결정된다. 워낙 다양한 버전의 DSM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각기 다른 위원회가 어떤 때는 새로운 병을 넣기도 하고 또 있던 것을 빼기도 하고, 또 이리저리 수정을 하기 때문이다. DSM의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에 대한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다. DSM의 초기 버전은 동성애를 정신 이상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1974년에 미국 정신과 협회는 DSM 두 번째 버전에서 동성애를 제외했다. 동성애가 15인 위원회 투표에 의해서 정상적인 것으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새롭게 발견된 어떤 과학 정보도 참고하지 않았고, 단지 동성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하는 정치적 압력에 반응했을 뿐이다. 물론 DSM에 있는 모든 질환이 동성애처럼 다 정치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DSM에 기재된 모든 질환이 투표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또 다시 수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투표로 병을 결정하는 방식은 암, 당뇨,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진단하는 의학의 방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2. 병리학은 없고 대신 주관적인 행동 묘사만 있다객관적인 의학 검사는 병리를 발견하는 생체검사, 피검사, 엑스레이, 그 외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병을 진단한다. 그런데 심리학은 정신 질환을 결정할 때 전혀 다른 방법을 쓴다. 무엇이 정상이고 또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바로 그 위원회가 해당 질병을 정의하는 행동적 특성에 관해서 투표를 한다. 그런 방식에 의해 병으로 결론이 난 한 사례가 바로 우울증이다. DSM 네 번째 버전을 담당한 위원회는 2주 이상 기분이 우울하고 또 우울증에 할당된 증세 아홉 가지, 예를 들어 잠을 자는 시간이 바뀐다, 활동량이 바뀐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다 등등 중에서 다섯 개 증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정신 질환이 있는 것으로 결정했다. DSM 다섯 번째 버전을 담당한 위원회는 우울증에 해당하는 요건에 큰 변화를 주었는데, 그 결과 남편이 죽어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여자는 이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DSM의 요건에 맞는 사람은 문제가 있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행동 양식에 따라 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것은, 병리를 찾아서 약을 처방하는 의학과는 거리가 있다. 3. 병리학은 없고 도덕적 행동만 있다DSM이 묘사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도덕적 범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앞에서도 동성애를 언급했다. 하지만 DSM에서 정신 이상이라고 규정한 GID(성 정체성 이상, Gender Identity Disorder)를 한번 살펴보자. GID는 성전환이다. DSM은 이것을 다른 성 정체성을 향한 강하고 지속적인 끌림과 현재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불편함으로 정의한다. GID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성에 속한 사람인 듯이 살고, 종종 그쪽 성과 관련 있는 옷을 입거나 행동을 하곤 한다. 심리학자들은 GID 치료를 위해서 여러 종류의 치료를 제안한다. 카운슬링에서부터 '맞지 않는' 성 때문에 오는 고통을 이겨내기, 그리고 성을 바꾸는 수술에 이르기까지.GID에서 근심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이미 그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낸 도덕적인 문제를 의학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DSM의 특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증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실제 정신 질환으로 진단받은 사람들이 삶에서 겪어야 하는 심각한 고통을 줄일 수는 없다. 정신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심층적이고 다양한 도움이 필요하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신체 병리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정신적 문제는 단순한 의학적인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바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에 정신 질환이 병리 단계에서 비호지킨 림프종(Non-Hodgkin’s Lymphoma)과 같은 수준이라면, 우리는 지금 DSM을 쓰는 세속적인 심리학자들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꼴이 된다. 성경적 인류학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고도 또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창 2:7; 마 10:28; 고후 5:1; 딤전 4:8). 성경은 인간이 육체적인 문제 뿐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도 있다고 알려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분법이라고 하는 성서의 이런 가르침은 경제적으로 힘들 때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만큼이나 두통이 있을 때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분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가 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다 영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은 죄가 될 뿐 아니라 무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를 다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차원으로만 환원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많은 기독교인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상태가 워낙 심각해 보이기 때문에 그 문제가 육체적인 문제로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간성과 영혼의 소중함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에 근거할 때, 심각한 문제라고 해서 반드시 의학적인 진단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욥의 극심한 슬픔을 보자. 살인을 일으킬 정도로 극렬했던 사울의 분노를 보자. 느부갓네살의 이상한 행동을 보자.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발광은 다 극단적인 영적 문제가 일으킨 증세고, 거기에는 그 어떤 의학적인 도움도 소용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꼭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가정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극단적인 것을 좋아한다. 문제들이 딱 하나로 정리되고, 다른 요소가 끼어들지 않으면 더 편하고 좋다. 성경이 말하는 이원론은 문제가 육체적일 수도, 영적일 수도 또 둘 다일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육체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오로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이 필요한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DSM이 말하는 정신 이상 치료법은 육체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면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기독교인의 관심이 커지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울증, 불안 장애 및 성 정체성 장애로 진단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그 문제를 단지 의학적인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의학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약물을 복용하라는 말 이상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울증에서 GID에 이르기까지, 영혼이 갇혀서 말도 못할 정도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영혼의 위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우리가 정신 질환을 보면서 단지 의학적인 범주에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정신 질환이라는 그 말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약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약이 필요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의사만이 제공하는 그 약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의사도 결코 줄 수 없다. 원제: Christian Reflections on Mental Ill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건강
정신질환
동성애
우울증
DSM
병리학
이분법
심리학자
성전환
진짜 지혜는 반드시 겸손하다
by Marshall Segal
2021-01-31
교만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교묘하고 소리없이 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내 귀에 속삭인다. 나를 오래 알아온 사람일수록, 그들의 눈에 나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아이러니는 그와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오래 알아온 나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망쳐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대 의견 또는 갈등이 수면 위에 떠오르면, 나는 종종 즉각적으로 (비록 무의식의 단계에서라도) 내가 옳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증거 의무는 나와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이 져야 한다고 확고하게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법정에서 내 의견과 내 입장은 언제나 가장 합리적이다. (이런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단지 좀 더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내 입장을 잘 방어해야 한다. 어떤 대화에서도 내가 옳을 수도 있고 또 틀릴 수도 있지만, 충동은 언제나 거울에 보이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한다.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쓴 단순한 (절망하게 하는) 다음 여섯 개의 단어로 이런 나의 마음속 평안한 법정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는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너무 빨리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아예 네게 지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 그 자체는 물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울 자신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엡 1:16-17).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진짜 지혜는 더 깊은 겸손과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지혜는 단지 하나님을 향한 끔찍한 반란만을 가지고 온다(잠 26:12). 십자가에 못박힌 세 개의 울부짖음만약에 하나님이 그토록 자주 반복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빨리 진도를 나갔을 것이다. 잠언은 경고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이사야 선지자도 썼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무슨 말씀이라도 우리는 잠시 멈추고 심각하게 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말씀이 아닌 경고를, 그것도 하나님이 반복해서 하고 또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 우리는 진정한 지혜의 영을 하나님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는 명령과 더불어, 하나님은 교만과 같은 이 죄성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바울을 통해서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다른 이 속에 있는 은혜를 찾을 것,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볼 것, 그리고 나의 약함이 이룰 수 있는 것을 음미할 것. 1. 나는 다른 이가 가진 은혜가 필요하다때로는 교묘하게, 또 때로는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못하다고 보거나 때로는 아예 다른 사람들을 생각 자체도 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시작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롬 12:3).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그리고 다른 지체들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롬 12:4-5). 교만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쟁 행위는 우리 편에 있는 은혜의 군대, 즉 또 다른 모든 은혜로 가득하고 은혜의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이다.교만은 이기적이어서 그 자체를 다른 모든 것 위에 놓는다. 자기가 가진 지혜, 재능, 경험, 잠재력 등 모든 것이 남보다 더 낫다고 여긴다. 교만은 자신의 강점에만 집중하고 약점은 최소화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의 약점을 극대화하고 강점을 무시한다. 그런 교만이 도전을 받을 때면, 종종 교만은 자신을 갉아먹는 자기 소비적 성찰과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바울은 교만이 우리 자신을 갉아먹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나 자신만을 향한 우리의 눈을 돌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은혜를 바라보도록 했다. 진정한 겸손은 내 것이 아닌 은혜를 소리 없이 멸시하는 대신 오히려 내가 받은 은혜 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사랑하게 한다. 내게서 교만을 멀어지게 하는 방법은, 나는 몰라도 다른 믿는 이들은 잘 알거나 잘 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얼마나 쉽게 성경 구절을 떠올리는지, 얼마나 빨리 그때그때 멈추고 기도하는지, 얼마나 용기 있게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지, 얼마나 너그럽게 자신의 시간과 돈을 이웃에게 쓰는지, 얼마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는지, 고통 중에도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묵상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은혜의 영역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은혜를 다 주시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로 겸손하게 하고 때로는 불편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을 의지하도록 한다(롬 12:5). 우리가 겸손 속에서 성숙해갈 때, 우리는 단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은혜 안에서 하나로 묶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제대로,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고 다른 이들을 나보다 더 낫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열심히 또 기대하는 마음으로 찾을 때만 가능하다.2.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받은 것이다다른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지혜를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지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내가 어떤 특별한 지식, 지혜 또는 은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대하게 드러내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워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의견 또는 전문 지식이 필요해서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더한 것도 아니다(고전 1:2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고전 3:19). 어떤 지혜라도 내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일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잠언은 경고한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6:12). 겸손 안에서 자라고 싶다면,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게 없고 또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의 교만함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들, 죄와 거룩함, 천국과 지옥, 결혼, 양육, 사역, 섭리, 주권,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까지,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한 지혜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알았던 세상의 지혜 또는 그리스도와 관계 없는 모든 이 세상의 지혜를 다 하찮게 만들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폭력적으로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이자 인간이었던 그 분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비극적인 안타까움은 이 세상의 실재와 영원에 대해서 이 세상이 너무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특히 인터넷 시대를 맞아 지혜로 위장한 정보로 가득하며, 그 대부분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숙성되어 펼쳐질 희귀하면서도 때로는 거친 지혜, 즉 하나님이 말씀으로 드러낸 그 지혜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원한다. 네 자신이 가진 지혜가 주는 자신감을 조심하라. 은혜를 떠나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외에는 당신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늘의 무한한 마음과 상상이 당신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아직도 고통스러울 만큼이나 아는 게 적다는 것을 기억하라. 3. 약할 때 나는 강하다수많은 성경 속 이야기 중에서도 아주 기이한 한 순간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천국을 열어주셨을 때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보거나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 하나님에 의해 천국까지 들어갔던 바울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지혜와 계시를 받은 것일까?"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엄청난 계시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왔다. 왜 하나님은 바울에게 천국을 보여주시고 나서 바로 지옥이 그를 괴롭히게 한 것일까? 바울은 한 구절 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남용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흐리도록 만든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아닌 약함과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일종의 가시를 지니게 된다.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 잊기에는 너무도 어두운 슬픔, 낫지 않는 병,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약함. 당신의 가시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시가 비록 사탄의 손에서는 칼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탄의 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묶여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주시는 가시는 삶을 구원하고, 우리의 교만을 제거하는 꼭 필요한 수술이 된다. 하나님이 반복해서 그의 자만심을 누를 때, 바울은 거기에 어떻게 반응했는가?"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고, 내가 어리석을 때 나는 지혜롭다(고전 3:18). 내가 낮아질 때 나는 높임을 받는다(마 23:12).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교만의 울부짖음이다. 우리는 우리 속의 약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그에게 맡길 때 우리의 약점을 통해 일하시는 좋은 하나님을 체험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는 당신의 탁월한 능력이 상한 영혼이라는 바로 그 장소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보기에 지혜롭게 되는 것을 거부할 때, 다른 이들 속에서 넘치는 은혜를 기뻐할 때, 얼마나 내가 아는 게 없는지를 인정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약할수록 그 약함을 자랑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느끼는 누군가를 보게 될 것이다. 원제: Never Be Wise in Your Own Eyes: Three Cries of Crucified Prid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교만
지혜
은혜
울부짖음
약함
고통
어려움
겸손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입니다
by 김형익
2021-01-30
교우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은 목회의 타협할 수 없는 목표고 어떤 수고와 고생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갈 4:19). 참된 목회자들은 다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변화를 입게 되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지,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말해야 함에도 너무 적게 말한 것들은 없는지를 생각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회개를 너무나 적게 언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내 반성의 결과였다.마틴 루터가 95개 신학 논제에서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라고 한 것이 그 첫번째 논제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 한—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들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성전(聖殿)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3.3.9).”루터나 칼빈은 회개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로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회개라는 기준으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현저한 변화를 꾸준히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회개의 부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강단에서 회개는 낯선 주제가 되어 버렸고, 많은 신자의 삶에서 회개는 주변부로 밀려나 버렸다.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도 적지만, 그들의 기도에서조차 회개는 그 고유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단순히 회개가 줄었다거나 드물다는 것을 넘어, 회개에 대한 오해의 문제도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하면서, 회개를 오해하지 않도록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먼저 말해야만 했다. 내가 언급한 회개의 강조점을 세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로, 회개는 일생에 한 번 또는 특별한 때만 하는 게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다. 회개를, 그리스도인이 될 때 돌이키는 회심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막 1:15). 또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믿음 없는 회개나 회개 없는 믿음은 참된 회심일 수 없다. 처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일평생 믿음으로 살아야 하듯, 처음 회개로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은 일평생 회개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려서 나는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혹은 수련회에서 회개를 주로 했다. 그래서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 하는 것이란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다. 물론 특별한 때 특별한 방식으로 하는 회개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성과 싸우고 그 죄성을 죽이는 수단으로서의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나 특별한 순간에만 행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칼빈은 거듭해서 회개가 일평생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회개 자체를 위하여 힘써야 하며, 우리 자신을 거기(회개)에 헌신해야 하며, 끝까지 그것(회개)을 추구해야 한다(3.3.19).” 둘째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나는 회심 이후에도 오래도록 회개를 소위 종교적 회개로 오해하고 살았는데, 사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회개에 대해 이런 오해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오해는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나를 벌하실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겠다는 동기 그 이상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런 회개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존 파이퍼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시작되는 철저한 순종의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행동은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깨닫고 맛보는 데서 유발되어야 하며, 이러한 행동에 불을 지피는 설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지존하며 영원히 만족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의 매혹적인 모습에 기초합니다. 형제들이여, 양떼가 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그 실례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공개적으로, 그러나 심하지는 않은 말로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는 공로를 그들에게 제시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를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기쁨으로 나오라고 했을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영혼의 아픔을 느끼며 울기 시작했다.”이것이 복음적 회개다. 이것은 두려움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믿음에 이끌리는 회개다. 죄를 고백할 때 나를 쫓아내지 않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이끄는 회개다. 이런 회개는 자신이 죄를 얼마나 뉘우치는지에 초점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복음 안에서 확신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셋째로, 앞에 살짝 언급된 내용이지만, 회개는 참 하나님을 뵈올 때 발생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고후 3:18; 4:4-6). 회개는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 그 영광을 목도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필연적 반응이다. 어떻게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뵈었는데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회개는 정말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고 했다. 이점에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회개 부재의 신앙이 된 데는, 참된 설교의 부재, 설교의 타락이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강단에서 말씀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성도가 일생에 걸쳐서 행하는 복음적 회개도 회복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강단을 오염시킨 번영신학과 율법주의의 가르침으로는 결코 참된 성경적 회개를 회복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적 회개가 없는 신앙은 결국 기형적이고 괴물 같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회개를 회복할 때, 무너진 윤리도 회복될 것이고, 언젠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주님의 말씀을 한국 사회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날이 오리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은혜의 날을 주님께서 꼭 주시기를!
회개기도
마르틴루터
95개조반박문
기독교강요
존칼빈
회심
존파이퍼
복음적회개
번영신학
율법주의
헤아려 본 슬픔
by R. C. Sproul
2021-01-18
이 그림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이번 달 테이블토크(Tabletalk: Ligonier 잡지의 한 콘텐츠-역주)지에 실릴 내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일반적으로 학생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성경적 또는 신학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이번에는 단순히 성경이나 신학적 관점에서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이번 주제에 관한 글을 쓰는 진지한 과제를 맡게 되었다. 테이블토크의 편집자들은 나에게 슬픔에 대해, 내가 그 슬픔을 나의 삶에서 어떻게 경험했는지 생각해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슬픔을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개인적인 슬픔을 논하기 전에, 나는 슬픔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우리가 슬픔의 실상을 말할 때, 우리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설명하는 고통이란 사소한 자극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부러진 뼈, 부러진 다리, 뚫린 어깨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피부를 관통하여 그 사람 존재의 가장 깊은 구석으로 내리박히는 고통이다. 이것은 마치 바이스(공작물을 끼워 고정하는 기구)와 같은 펜치로 극심한 아픔을 주며 영혼을 사로잡는 고통이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공격하는 고통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흔히 ‘상심’이라는 비유를 쓰지만, 마음이 정말로 바닥에 떨어지는 유리잔처럼 깨지거나 사고로 산산이 조각나는 뼈처럼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하고 깨진 마음이란 사실 울고 있는 영혼, 가장 어두운 밤에 가려져 있는 영혼을 말한다.우리가 슬픔에 관해 말할 때는 성경이 깊이 인식하고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주님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가장 사무치게 드러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애통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에게 슬픔이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인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슬픔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은 그 자신 안에서 느꼈던 고통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아닌 이 세상을 괴롭히는 큰 악을 자각함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거룩한 도시, 그분이 어릴 때 방문했고, 하나님이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시온의 거룩한 언덕이었던 그 도시로 오신 것을 알고있다. 예수님은 약속의 도시인 그곳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그곳으로 오셨다. 그 때는 최악의 불신앙이 예루살렘 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성읍을 보시고 한탄하며 부르짖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 이것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밀쳐지고 쓰러질 때 주님을 위해 울던 그 여인들을 보시면서 경험하신 그 슬픔이다. 예수님께서 그 구경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리 주님의 슬픔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긍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반면에 우리가 슬픔을 경험할 때, 우리의 슬픔은 대개 일종의 개인적 상실감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C. S. 루이스의 저서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 인간적 고충에 관한 그의 심오한 통찰력을 기억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서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속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가장 고통스럽고 처음으로 떠오르는 슬픔은 내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의 닻, 우리 집과 내 삶에 반석 같은 존재였다. 그가 쇠약해져 여러 번 뇌졸중으로 장애를 입고 마침내 죽음 그 자체에 스러졌을 때, 나는 절망에 빠졌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의 영웅이었던 그의 죽음은 내 영혼에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상처가 되었다. 또, 2000년에 나의 소중한 친구 짐 보이스가 영원한 영광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개인적인 상실감을 체험했다. 단순히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지를 잃었다는 것이 내게 그런 슬픔을 안겨준 것이었다.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의 고통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것은 배로 늘어났다. 이 영웅이 우리 곁에서 없어졌을 때, 나는 요나단을 잃은 다윗과 같이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고 울부짖고 싶었다(삼하 1:19).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삼하 1:20). 아무도 이 사람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십자가의 능력이 명백히 패배했다며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한 개인적 손실을 넘어서는 친구들의 상실, 동지들의 상실은 언제나 나에게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복음이 교회 안에서 적당히 타협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나를 비통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악함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타협이 내 영혼을 비통하게 한다. 끝으로, 내가 슬픔을 보고, 경험하고, 성경에서 그것에 관해 읽으면서, 그 슬픔이 자칫 비통한 감정으로 위험하게 발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 자체는 당연히 정당하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애통함이 슬픔을 넘어 쓰라리다면, 우리는 고통이 종기가 되어 독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결코 죄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슬픔에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도 슬픔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기를 기도한다.원제: A Grief Observed출처: www.ligonier.org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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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
헤아려본슬픔
고통
애통
상실
테이블토크
리고니어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by Scott Hubbard
2021-01-16
고난을 겪는 것만큼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경험은 거의 없다. 환난이 닥치면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속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당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나 어떤 이들은 그분을 저주한다. “주님을 신뢰합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려 깨어진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나고 만다.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분명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개인이 고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는 환난으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시험이 그들에게 무엇을 이루게 해주는지 알기 때문에 시험을 신실하게 감당하라 말한다. “내 형제들아 [중략]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중략] ‘너희가 앎이라’”(약 1:2–3). 야고보가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고난의 유익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유익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런’ 환난들이 ‘지금’ 일어나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그 환난들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몰랐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으로 가득한 그 단순한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이 말이 당신의 영혼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환난을 대하는 가장 멋진 태도, 즉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불로 연단을 받다야고보는 금속 가공업에서 차용해 온 듯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약속을 묘사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금과 은이 도가니에서 단련되듯(시 12:6; 잠 27:21)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해 정화되고 연단을 받는다(벧전 1:7도 보라). 불로 금속을 깨끗하게 하는 연단의 이미지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확증해주기도 하고 그 실체와 직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선, 그 이미지가 확증해주는 것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를 실제로 불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의 열기를 괜찮은 척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환난의 뜨거움으로 인한 화상 자국은 우리 영혼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연단은 불과 같다. 불은 우리 살을 데게 한다. 우리 믿음이 은처럼 강하다 해도 말이다.또한 야고보의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대면하여 보게 해주기도 한다. 고난이 연단이라면, 그 고난들은 무작위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연단하시는 그분은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그분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며 환난의 불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아시는 분이다. 환난이 우리를 뒤덮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신 32:10).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뜻 안에 놓여 있다(엡 1:11). 환난의 불꽃이 높아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사 43:2). 고통이 만들어 내는 것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그 고난이 우리로부터 앗아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불길이 마구 집어 삼키는 것을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본다. 하지만 잿더미 아래에서 우리의 고난은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고난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고난이 뭔가 영광스러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가 수없이 던지고 낮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질문, 그리고 흔들리는 우리 믿음 위에 어두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시련이 인내를 이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이 항상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병, 이혼, 외로움, 기나긴 기다림 같은 고통 뿐이다. 우리가 고난이 뭔가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늘 보기 때문이다.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고 모든 성도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종기로 고생하는 욥, 고향을 멀리 떠나 남편마저 잃은 룻, 어두움에 휩싸여 시편 88편을 노래한 헤만 같은 이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는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 의미 없이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단순한 고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환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찢으시나 도로 낫게 하신다(호 6:1). 여호와께서 우리를 낮은 곳으로 던지심은 우리를 다시 올려주시기 위함이다(사 30:26). 하나님이 보내시는 불꽃은 우리를 정련하기 위함이다. 존 리폰(John Rippon)의 찬송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래를 듣는다.불 같은 환난 지날 때 네 길을 내리라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환난의 불이 널 상치 못하네찌꺼기를 사르리니 정금같이 되리라인내하는 성도들정화된 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선을 창조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도 야고보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이라 말함으로 그 많은 선 중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영어에서 ‘endurance‘나 ‘patience’로도 표현할 수 있는 인내(steadfastness)라는 말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말처럼 인기가 많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의 무게를 견디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펴고, 영원한 삶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인내의 영광을 보고 싶다면 사도 야고보가 말한 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중략] 본으로 삼으라”(약 5:10).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빛으로 나올 수 있는 오늘날의 미가 선지자다(미 7:8–9). 그들은 척박한 땅을 바라보면서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고백하고 인내하는 하박국이다. 그들은 이전에는 풀무불을 두려워했으나 여호와께서 그 안에 함께 하심을 알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드락이다(단 3:25).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롬 12:12). 그들은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는 일을 지체하지 않는다(히 12:1). 지치지 않고 환난의 광야를 걸어간다(고후 1:6). 구속을 간절히 바라나 참음으로 기다린다(롬 8:25).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다(마 10:22). 그들의 시선은 승리한 전쟁, 극복한 유혹,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의 면류관에 고정되어 있다(약 1:12). 그들은 의의 나무들(사 61:3)이고 비바람을 많이 맞았으나 여전히 강한 바람에 맞서는 그루터기들이다(롬 5:3–4). 그들은 영광을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하는 성도들이고,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한다.환난의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은 오래 참음을 만들어 내신다. 고난의 불꽃으로부터 하나님은 인내를 창조해 내신다. 복합적인 기쁨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어 내는 줄을 ‘안다면’ 우리는 그 고난을 견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질 미래의 인내를 상상해 볼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환난을 기쁨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약 1:2). 그런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늘 쾌활한 사람이 짓는 그런 과장된 미소나 웅변가의 활기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기쁨은 복합적인 기쁨, 즉 저 깊은 곳에 이르는 눈물과 슬픔으로 어우러진 그런 기쁨이다(고후 6:10).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질고를 겪은 그분이 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다. 이 기쁨은 그분에게서 온 것이기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 1:4) 되어, 이 고난의 불꽃 저편에 계신 그분께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최고의 순간을 앗아가는 도적도 아니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꿈을 죽이는 암살자도 아니며 아무에게나 무기를 겨누는 광인도 아니다. 우리의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주시려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다.원제: Fortified by Fire: How Suffering Makes Us Strong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영성
영적성장
고난
인내
기쁨
연단
시련
시험
얘들아, 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by Jim Davis 외
2021-01-11
성(性)은 부모가 아이들과 나눠야 할 대화 중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러나 분명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이다.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언제 말을 꺼내야 하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너무 오래 기다렸나?여기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가진 두 부부가 말하는 민망한 대화를 더 편안하게 이끄는 네 가지 팁이 있다.1. 문화를 제압하라당신 아이의 성에 대한 순진함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질문이 있다. 놀이터에서 삐걱대다 끝낼 것인가 아니면 안전한 집에서 멋지게 끝낼 것인가?오늘날 아이들은 과잉 성애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발육상 이를 다룰 준비가 되기도 전에 성적인 언어, 이미지, 그리고 행동에 노출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10세(3학년) 때 또래 친구들로부터 성에 대해 듣고 있으며, 평균 12세나 13세(5학년 또는 6학년) 때 음란물에 노출된다.문화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아이들이 성에 노출되고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화가 우리 아이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이 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은 아니다. 타인 또는 인터넷, TV, 영화에 이 역할을 맡기기보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의 성에 관한 이해를 형성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특권이 있다.좋은 소식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2. 대화를 시작하라아이들과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체크해야 할 점검 대상이 아니다. 시작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가져야 할 대화다. “한번 하고 끝” 접근은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고 차후에 질문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간단하고 단순한 설명은 더 깊어질 것이고 신뢰를 쌓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 대화를 시작해서 주변 관계를 조성해야 한다.이런 대화들은 거창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재우거나 소파에 앉아 있는 중에, 심지어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일어날 수 있다. “꼼짝없이 타야 하는 차” 안에서 대부분의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한 이런 장소들을 찾아서 의도적으로 그곳에 있어라.게다가 연령대에 적합한 성 정보를 나누고 성경적인 비전을 가르지는 것은 성관계를 둘러싼 불건전한 사회적 규범을 거스르는 일일 수 있다. 연구들은 이러한 대화들이 정보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을 더 건강하게 키워낸다고 한다. 10대의 성관계 전문가이자 ‘Talk to Me First: Everything You Need to Know to Become Your Kids’와 ‘Go-To Person About Sex’의 저자인 데보라 러프만(Deborah Ruffman)에 따르면, “성생활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적 행위를 포함한 다양한 위험한 행동의 참여를 지연시킨다"고 한다.아이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하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관찰, 임산부에 대한 언급, 결혼에 대한 기대감, 심지어 부적절한 빌보드나 TV 광고에 대한 호기심 등과 관련된 발언들은 어떤 측면에서 성에 관한 짧은 대화를 위한 완벽한 시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부모들은 다음과 같은 열린 질문을 함으로써 성에 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하니?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 입을 때 왜 문을 닫아야만 하지? 아이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알고 있니?"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당신 아이들의 대답은 무엇을 이미 알고 있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진정한 대화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는가? 아이들이 질문을 하고 있다면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3. 당신이 어색하게 만들 때만 어색하다주제가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이 사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미 저지른 성적인 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 죄책감 때문에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 수치와 죄책감은 대화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적이 원하는 것이다. 어색함은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모와의 신뢰를 방해하는 장벽을 만든다.건강한 대화의 길을 상상해보라. 어색함은 그 길 양옆에 있는 도랑이다.오른쪽에 우리가 필요치 않은 어색함이 있다. 이런 어색함은 “넌 아직 어려” 혹은 “어디서 들었니?"와 같은 말로 대화를 중단시킨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웃으면서 그것은 좋은 질문이며 내게 물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라.왼쪽에는 필요 이상의 어색함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실제로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물을 것 같은 질문을 추측하거나 묻기를 두려워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4세 아이는 8세 아이와는 매우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지나친 공유는 적게 공유 하는 것만큼이나 대화를 억누를 수 있다.4. 더 좋은 이야기를 하라아마도 부모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성을 하나님이 만든 축제라기보다 경고로 가득한 위험한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집 밖에서 불안, 수치, 이기심을 부채질하는 성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몇몇 기독교 가정 안에서 이 이야기는 선의로 “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좋지 않아!”라고 단순화될 수 있다.더 좋은 이야기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과 선을 위해 성을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이를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삶의 기적을 기뻐하고 결혼의 모든 부분을 축하한다. 성이 우리가 더 사랑하고 서로를 더 존중하는 한 방법임을 기뻐해야 하며, 육체적으로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어떻게 복음의 현실을 구현했는지 기념해야 한다.다른 좋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오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홍수처럼 쏟아지는 성적인 문화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에 대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기쁨과 평화, 온전한 이야기보다 혼란과 비극의 무서운 끝맺음처럼 보이는 “모험을 선택해”라는 이야기에 준비 없이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일 중에 하나다. 하나님이 왜 성이라는 선물을 창조하셨고, 사랑 또는 위험이 될 수 있을만큼 성이 얼마나 강력하며, 또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서 성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엄마 아빠들이여, 우리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성에 관한 아이들의 정서적, 영적, 심리적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특권을 잘 감당해 보자.원제: Kids, Let’s Talk About Sex(Jim Davis • Angela Davis • Lindsey Holcomb • Justin Holcom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송유희
가정
양육
음란물
성관계
문화제압
대화
창조섭리
성역할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으라
by Jon Bloom
2021-01-10
인내심과 더불어 지성을 치열하게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을 기독교인이라면 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즉 열심히, 치열하게,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을 읽는 것은 더 큰 믿음, 노력, 기도, 겸손, 약함을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말씀이 뿌리내리기를 원하는 바로 그 장소다.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설명하기 전에 예를 하나 들도록 하자. 왜냐하면 좋은 예는 종종 좋은 설명이 되니까. 내가 지금 들려는 예는 바로 성경 속에 있다. 내 온 마음을 다해서시편 119편은 하나님께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소망의 노래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119편을 읽으면, 시편 저자가 어떻게 그리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심지어 필사적으로 온 맘을 다해서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19편 전체를 읽는 게 더 좋겠지만, 그 중에서 일단 몇 군데만 맛을 보도록 하자.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절)“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절)“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절)“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절)“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24절)“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47-48절)시편 119편을 읽다 보면 두 개의 진리는 결코 놓칠래야 놓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위한 것이며 인간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지성을 통해서다. 사랑해야 할 보물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 모세의 말을 인용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런데 신명기 구절을 인용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지성(mind. 역자 주: 성경에서는 ‘뜻’으로 번역했음)이라는 단어, 모세가 쓰지 않았던 이 단어를 추가했다(마 22:37; 막 12:30을 참조하라). 아마도 모세 시대의 히브리 청중들은 감정에 지성이 포함되었음을 암시적으로 이해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예수 시대의 다양한 군중들에게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이 이 지성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감정과 지성이 둘 다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계(hierarchy)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단지 생각의 대상이 되는 관념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인격이다. 최고로 소중히 해야 할 최고의 보물이다. 우리의 사랑(마음)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이해(지성)을 통해서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마음을 담아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영광을 보기 위해 읽으라기독교인으로서 성경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에도 종종 우리는 왜 성경 읽기가 중요한지에 대한 교묘하고도 간교한 오해에 쉽게 빠지곤 한다. 교묘한 오해는 이런 식이다. 우리가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마치 성경을 읽는 목적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은 나름 진실과 매우 흡사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 기만적이다. 정기적이고 훈련된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수단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그 행위가 그런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알라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다섯 기둥(편집자 주: 이슬람의 5대 핵심 교리)으로 훈련하는 무슬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지도자들이 성경에 접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의 증거로 행하는 일종의 의식으로서의 성경 읽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분은 우리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분을 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복해서 보기를 원하신다.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영광이 가장 밝고 선명하게 비치는 곳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러하다(요 1:14).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체”(골 1:15)고 또 그분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요 1:17)가 주어진다.이로 인해 성경은 특별한 영광으로 빛나고, 그 안에 담긴 귀중한 보화 때문에 그 말씀은 더 깊이 파고들 가치가 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구약과 신약, 예외없이 우리가 찾아내는 성경 속 모든 세부사항과 특별함에 관해서, 성경을 읽는 목표는 항상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다. 내가 ‘모든 세부사항과 특별함’이라고 말한 데 주목하라. 영광을 보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가스처럼 성경 위에 둥둥 떠다니지 않는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와는 별도로 숨겨진 어떤 장소에 숨어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영광은 본문 속 의미를 통해서 드러난다.” (‘존 파이퍼의 성경 읽기’ 중)하나님의 영광은 본문 속 의미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저장되도록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시 119:11). 단지 보기 위해서만 읽지는 말아라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지성이 쏟는 관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음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책)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독서의 유익은 이해의 방식으로 영혼에게 와야한다. … 신성한 대상을 향해 감정이 솟구치기 전에 마음에 깨달음이라는 조명이 있어야한다...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한다. 그 지식이 먼저 알려질 때, 비로소 그 지식을 통한 환희가 찾아오게 된다.”(같은 책)‘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신성한 것들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 읽기를 통해 우리가 가장 누리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지식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지식은 바로 사랑하고 즐기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을 나는 ‘모든 갈망의 기쁨’이라는 찬송가에서 빌려왔다. 성경 속 ‘모든 세부 사항과 특별함’을 고려해서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꽤 어려울 수도 있다. 때로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무한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사 55:8-9).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성경을 주셨는지 이해한다면, 그의 말씀을 읽는 것은 기쁨의 추구가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가장 잘 누리도록 설계된 기쁨, 즉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하는 것이다. 보고 음미할 때까지 읽으라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선명하게 봄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음미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는 브리스톨 고아들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했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의 사역 초기에 중요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신경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는 다름 아니라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같은 책). 그는 매일 아침 훈련된 성경 읽기와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시간은 그의 삶에서 오아시스였다. 말씀을 읽는 시간은 밸러스트(ballast, 역자 주: 배의 복원력을 유지하기 위해 배의 바닥에 물이나 자갈 따위를 싣는 것)처럼 작용하여 엄청난 스트레스와 종종 닥치는 격렬한 폭풍우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그의 삶을 똑바로 세워주었다. “특별한 장애물이 방해하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하기 전까지 결코 기도하는 무릎을 일으키지 않았다.”(같은 책)조지 뮬러는 시편 119편을 쓴 시편 저자처럼 온 지성을 다 동원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쏟아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우리도 그래야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거하기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저장하기 위해 뜻을 다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서 행복해질’ 때까지, 또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신선한 기쁨을 온전히 느낄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말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원제: Read the Bible with Your Hear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밸러스트
성경
영광
시편119편
스펄전
존파이퍼
조지뮬러
성경읽기
우울증을 겪는 자녀와 이렇게 대화하라
by Christine Chappell
2021-01-07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올 무렵 남편과 나는 자녀 양육에 관한 책들을 샅샅이 살펴보며 우리 아이가 누릴 기쁨과 성취로 가득한 밝은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본 그 책들 어디에서도 우리 아이가 우울증으로 길고도 예상할 수 없는 싸움을 할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이 가혹한 현실은 그야말로 우리 가족을 기습했고 우리는 소중한 우리 아이가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잘 이겨내도록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겪었던 우울증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내 자녀가 십대 이전부터 동일한 어려움을 겪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우리 딸이 자기 회의, 슬픔, 감정 없는 상태로 인해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나는 내 자신이 우울증을 통과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실 때 주셨던 진리의 말씀으로 반복적으로 돌아갔다. 딸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믿음으로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주신 그 위로를 되새겼고,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구명구와 같은 그것들을 붙들었다. 아이의 절망이 너무도 컸을 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불완전한 엄마와 우울증에 빠진 딸인 우리 존재의 근거를 복음의 소망 안에 두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모지 의료 전문가, 전문 상담가, 목회자가 아니다. 자녀가 우울증으로 인해 일반적인 슬픔이나 더 심각한 수준의 질환 증세를 보일 때는 아이가 지금 겪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는 부모가 줄 수 있는 소중한 것이 있다. 사랑과 격려다. 우울증을 겪는 자녀와 한 식탁에 앉았을 때나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다음 다섯 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함께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1. 우울증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당신의 자녀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큰 슬픔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과 아이들이 그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아이들은 이내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인간에게 있어 우울증은 일반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모세, 엘리야, 요나, 욥, 그리고 다윗왕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비통한 슬픔에 빠진 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라. 2. 인생에는 슬픈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우울증은 우리가 겪는 심히 어려운, 심지어 우리를 쇠약하게 만들기까지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의 경험들 중의 하나다. 하지만 자녀를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기쁜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계절들이 찾아오기 마련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전도서 3장 4절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시기가 찾아올 때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안다고 해서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눈물이 깃들일 수는 있겠지만, 기쁨이 회복될 것이다(시 30:5). 3. 슬픔에는 언어가 있다우울증이 주는 어려움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능력을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언어 능력이 있는 어른들도 그러할진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광대한 인자하심과 부드러운 보살피심으로 우리에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성경의 언어를 주셨다. 애통하라. 우리가 낙심하여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것을 그가 아신다. 우리의 짐이 무거울 때 우리가 그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경의 언어를 주셨다. 시편 13편, 77편 또는 88편 같은 애통의 시를 자녀와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언어들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자신의 우울감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면 우리 자녀들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느끼는 걱정, 애통, 피로, 불안을 표현할 수 있다. 4. 예수께서 우리를 앞서 가시고, 우리와 함께 가신다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자녀의 우울증은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초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간고를 많이 겪은 자(Man of Sorrows)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모든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엄청난 슬픔과 비탄을 겪으셨고 모든 인간적인 어려움들을 의롭게 견디셨기에, 이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완전한 구주가 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앞서 가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동반자이시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셨다. 특히 우리가 슬플 때에 말이다(시 34:18). 5. 우리 눈을 영원에 고정하자우울증은, 마치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 가기를 열망하는 마음 같은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이 세상과 그것이 약속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때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의 특권은 천국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 문제가 언젠가는 완전히 해결될 것임을 보증한다. 영원한 천국에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계 21:3–4). 슬픔이 없는 그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들이 마침내 모두 해결되는 곳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울증이 우리 삶을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녀를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의 격려는 불완전하고, 우리의 인내는 자주 한계에 부딪히며, 아무리 노력해도 낙심해 있는 자녀들의 관점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 의료인과 상담가들의 케어와 더불어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돌봄 사역의 일부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녀들을 돌보실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은 어두운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슬픔으로 가득한 계절 안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Talk to Your Depressed Child번역: 이정훈
가정
양육
우울증
슬픔
감정
소망
자녀
그리스도
고난의 신학이 필요한 시대다!
by 김형익
2020-12-29
가짜 복음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참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일처럼 효과적인 일이 없듯이, 번영 신학에 중독된 교회가 필요로 하는 해독제는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다. 조엘 비키는 ‘설교에 관하여’(복있는사람,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질주의와 심리학은 우리를 속여, 인생의 가장 큰 유익은 자신의 신체적, 재정적, 정서적인 번영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이 진리인지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일을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작정해 두셨는지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 다음 구절을 살펴야만 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29절). 성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셨으며(엡 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엡 5:25-27).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그 아들의 형상을 좇아 거룩해지도록 인도하기 위해 그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은 회중에게 고난의 신학을 설교하기 바란다.”(656-657쪽).고난의 신학을 설교하라는 조엘 비키의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방편으로서의 고난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적 고난의 신학을 설교로 듣는 일은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한편 소위 번영 신학에 기반한 거짓 복음은 많은 강단을 오염시켜왔고 많은 교인들은 번영 신학의 가르침에 중독되어 갔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신체적(건강), 재정적(물질), 정서적(안정)인 번영이 되었고 교인들조차 이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복음은 박해를 동반하였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가난했던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난의 신학은 설교에서 종종 다루어져야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잘 살아보세’를 기치로 하는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의 흐름 속에서, 가난과 고난은 깨쳐버려야만 할 악덕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이런 외부 세계의 거대 흐름은 강단에서 전해져야 하는 고난의 신학마저 왜곡시켜버리고 말았다. 이후 80년대를 지나고, 88 서울올림픽을 거쳐 소위 90년대의 경제번영기에 접어들게 되는 동안, 번영 신학은 특정 교단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파 교단을 망라하는 보편적 가르침이 되었다.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법이다(요 12:8). 가난한 자만이겠는가? 20세기를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병든 자, 실패한 자, 상실을 경험한 자, 신체적, 정서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번영의 신학에 물든 거짓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은 할지언정,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에서는 현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이 아닐까(롬 12:15).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거나, 우리가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소유한 물질과 건강과 성공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라거나,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하나님이 버리신 결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에 물을 탄 번영 신학의 가르침은,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증거라고 말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주는 반면,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가 바라는 물질과 건강과 성공으로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허황된 희망 고문이나 영적 좌절을 안겨주게 된다. 그래서 번영 신학은 속이는 것이고 거짓 복음이다.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의 본질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의 차원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위해서 받는 적극적 고난의 차원이 있으며(딤후 1:8), 조엘 비키가 말했듯이 일반적인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번영의 복음이라는 이름의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과(딤후 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말씀과(딤후 3:12) 같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피해가려고 애쓸지라도, 고난은 그들 자신의 인생에서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난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피해갈 수 있는 논리는 불가능하다.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게 해주는 고난의 신학이다.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욥기는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놓고 욥이 세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길게 소개한다. 욥기 1-2장을 읽은 독자들은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욥 자신과 친구들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한 믿음을 사탄에게 자랑만 하지 않으셨어도 욥은 그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욥의 믿음을 조건적인 믿음이라고 폄하하였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기 1:10–11).” 믿음에 대한 사탄의 관점은 철저하게 극단적인 번영 신학의 논리를 적용한 관점이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과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셨다. 말하자면, 참된 신앙은 고난이 주어져도, 가진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하여도 여전히 배신하지 않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과율이라는 율법주의에 근거한 번영 신학의 논리를 깨뜨리기로 하셨다. 욥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이 사탄의 마음을 격동하여 욥을 건드리고 싶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다. 그래서 고난이 깊어갈 때 욥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고백은 마치 망치로 독자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 이것은 개역개정역의 난외주로 소개된 번역인데, 실로 무서운 고백이 아닌가! 참된 신앙은 이런 고백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욥의 고난의 이야기는 욥이 믿음을 지켰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고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셨으며 그의 믿음을 지켜주신 이야기다. 욥은 이유를 알 수도 없었던 이 고난을 통해서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욥은 이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가게 되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고백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67,71).”루터는 좋은 신학자의 세 가지 조건을 기도, 묵상(성경), 시련(고난)이라고 말했다. 세 가지 조건 중에 고난이 들어간다고? 놀랍지 않은가? 기도와 묵상(성경)만으로도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기도조차 없는 신학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루터는 여기에 시련(고난)을 더했다. 그리고 루터 자신이 바로 그 세 가지 조건들 속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세웠다. 사실, 이 세 가지 조건은 좋은 신학자의 조건을 넘어, 좋은 신자의 조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R. C. 스프로울이 자신의 책 제목에서 밝힌 대로, 신자는 사실 모두 신학자이기 때문이다(Everyone’s a Theologian, 2014). 루터의 말이 옳다면,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져가는 일에 기도와 말씀묵상 만큼이나 고난이 필요한 요소라면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그 고난의 신학은 오늘날 번영의 신학에 중독된 신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해독제가 될 것이다.
영적성장
고난
가짜복음
조엘비키
설교에관하여
번영신학
인과율
스프로울
마틴루터
대부분의 성장은 느리다
by Scott Hubbard
2020-12-15
천국으로 가는 길은 위험으로 덮여있는데, 문제는 그 위험이 항상 우리가 예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예상한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쾌락, 세상이 속삭이는 거짓 이야기와 엉터리 도덕. 우리는 또한 고난이 주는 위험도 예상한다. 갑작스런 이별, 부서진 꿈, 여러 형태로 오는 핍박. 그런데 세상이 주는 위협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하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방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바로 느려터지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성화 과정(the slowness of our sanctification)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숫자 상 정확한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준비가 된 이들이 적지 않은데요. 무슨 육체적인 고통이 닥치거나 삶에서 무슨 아픔을 겪어서 그렇게 된 사람들보다는 성화의 과정이 너무도 더디게 진행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많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지쳐버린 겁니다.” 우리들 중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려는 일부는 세상이 주는 유혹 때문도, 고난에 지쳤기 때문도 아니라, 단지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속 자기 부인(self-denial)에 지쳤기 때문이다.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한 걸음 뒷걸음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성을 향해서, 끝이 나지 않을 거 같은 이 길을 걷는 데에 지쳤기 때문이다. 환상은 깨어지고 지쳐서 그 길에 주저앉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천만 번 단계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왜 이런 성화의 느린 과정이 놀라움으로 다가올까? 단숨에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처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이 세상이 우리의 기대 수준을 비현실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자존심이 오래 전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어쩌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열 번에서 아홉 번은 우리가 만나는 복잡한 갈등 상황을 너무도 단순화시키기 마련인, 모든 죄를 이기는 “비밀” 또는 “비결”과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제자도의 길이 빠르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던지 간에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은 결코 한 달, 일 년, 또는 십 년 아니, 평생을 살아도 완성되지 않는 것을 본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열 단계 정도의 계획이 아니다. 천만 번의 단계가 필요한, 우리가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과정이다. 길게 볼 것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장의 그림은 성화에 대해서 길게 보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를 빠름에서 느림으로, 즉각적인 것에서 점진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농부이다(갈 6:7).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라는 것처럼 천천히 은혜는 우리 속에서 자란다. 씨앗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서 발아하고, 작물은 천천히 들판을 채운다(막 4:28). 우리는 경작하고 씨를 뿌린다. 물을 주고 돌보면서 오로지 “인내로”(눅 8:15) 결실을 거둔다.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과 같다(엡 4:14-15). 아이들처럼 우리의 뼈는 천천히 자란다. 나이 많은 형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유를 마시다가 서서히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벧전 2:2; 롬 8:29). 그러다보면 언젠가 우리는 완전히 장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가 나타나시면…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가 이뤄질 때이다.우리는 달리기 경주자이다(고전 9:24). 그 달리기는 단거리가 아니다. 심지어 마라톤도 아닌, 평생 달리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딤후 4:7).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히 12:1)를 해야 한다. 처음 백 미터에 힘을 다 빼면 안 된다.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끝까지 달려야 한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는 여행자이다(벧후 1:19). 빛은 중간중간 우리의 어둠을 몰아낸다. 가끔 그늘이 지지만 우리의 길은 다음과 같다.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전 4:18).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위로 솟아오른다. 그 결과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농부, 어린아이, 경주자, 그리고 여행자이다. 이런 각각의 이미지는 심오하고 본질을 관통하는 성화가 평생에 걸쳐서 이뤄지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나 자신에 대한 또 이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꾼다.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일에서 조차 예수님은 아주 천천히 당신의 주되심을 이뤄가신다. 내 삶 어떤 영역에서 성령님은 아주 천천히 순종이 습관이 되도록 만들어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지만 결코 단숨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날로”(고후 4:16) 이뤄가신다.영적인 현실주의바로 이 지점에서 두 가지 확실하게 할 점이 있다. 첫 번째로 성화 과정의 모든 것이 다 천천히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어떤 특정한 죄에 있어서, 그 죄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는데도 그냥 단 하룻밤에 그 죄를 극복했다는 간증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화를 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하는 기도를 쉬지 않게 된다. 두 번째로, 영적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을 악용한다면, 그건 저주받을 일이다. “느리지만 쉬지 말고”는 모든 보통 기독교인이 꼭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내일, 내일”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좋아서 받으면서 하나님의 경고는 무시하는 한 내일은 언제나 오늘과 똑같다.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는” 게으른 자는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전 20:4). 죄에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심판 날 피난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성화에 관해서 긴 시각을 제공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짜 중요한 기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영적으로 적당주의(spiritually complacent)에 빠지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가 영적인 현실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영적 현실주의자는 한편으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노력한다. 그러나 영적 현실주의자는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피가 주는 성결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시온 산으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한, 회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는 가장 필요한 기도이다(마 6:12).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존 뉴톤(John Newton)이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의 나는 되어야 할 나도 아니고, 되고 싶은 나도 아니고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나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John Newton, Christian Life, 268)매일매일 조금씩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제대로만 이해하면 오늘 하루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꿔준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이룰 수 있는 성화에 대해서 겸손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농부는 토지를 경작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확을 거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광야를 지나는 여행자가 하룻밤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계절을 지나면서 느끼는 변화와 농지의 광활함은 농부가 허황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인도 오늘 하루 동안 원하는 만큼의 열매를 즉각적으로 맺지 못했다고 지나치게 낙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또 교제하는 것은 레버를 비트는 일이 아닌, 씨앗을 뿌리는 일에 더 가깝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나서야 비로서 수확에 대한 기대를 품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오늘 하루 내가 하는 작은 순종이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 하루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단숨에 나를 영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 작은 발걸음을 떼지 않는 한 결코 영광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가 말했던 “매일 매일 조금씩”(daily littles)을 이뤄가야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 이 땅 위에 있는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그것은 그 자체로도 여전히 작은 것이 아니지만 그때까지 진정으로 살아왔다면…. 그 살았던 삶 내내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God’s Way of Holiness, 127). 끝까지 인내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매일 매일 조금씩” 이뤄진다는 시각이다. 거룩은 한 번에 하나씩 이뤄진다. 당신 앞에 놓인 오늘 하루 동안의 순종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늘 하루 죄를 고백하고 또 회개하고, 오늘 하루 봉사하고 전도를 하는 일이 다 당신 영혼의 토양에 스며들 것이다. 당신은 오늘 미래의 당신을 만들어낼 씨앗을 뿌리고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Most Growth Will Be Slow Growth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존파이퍼
성장
성화
호라티우스
회개
기도
적당주의
현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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