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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들려오는 새해 희망
by Clarissa Moll
2021-12-31
작년 이맘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기억하는가? 팬데믹으로 한해를 보내고 2020년도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내년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인종 갈등과 정치 대립, 자연 재해,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마비시킨 한해였기에 새해에는 분명히 더 나을 것이라 희망했었다.그러나 올해를 마감하면서 돌아보면, 1년 전에 우리가 너무 낙관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2021년은 푸르른 목초지가 아니라 작년과 똑같이 메마른 황무지였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건강을 지키고 서로 연결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휘발유 가격이 치솟고, 교회가 텅 비고, 바이러스 긴급 검사기가 바닥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죽음과 사회 갈등이 우리 마음을 지치게 하고 짓누르고 있다.작년에는 비현실적으로 낙관했다면, 올해에는 비관과 절망으로 내년을 바라볼까 두렵다.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도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는 사막의 외로움을 보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재정, 관계, 건강의 어려움이 새해에도 이어질 것이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한탄마저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시 13:1-2). 의심은 커져만 간다. 새해가 밝아오는데도 옛 형제자매들처럼 신음한다. '우리를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출 14:11).희망이 없어 보이는 새해를 어떻게 맞아야 할까? 미래를 향해 항해하려는데 돛을 밀어 줄 낙관주의의 바람이 불어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슬픔과 실망과 끊임없는 다툼이 가득 찬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노래를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2022년에 펼쳐질 풍경이 저물어 가는 올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조금만 움직이셔도, 우리를 위해 조금만 예비해 주셔도, 은혜와 권능의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크고 신비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알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고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만나를 찾아 나서라빡빡한 재정과 관계의 긴장이 여전히 예상되는 한해라면, 2022년에는 만나를 찾아 나서는 열심을 내 보라. 불평만 하지 말고 아침마다 문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찾아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비처럼 광야에 내릴 것이라고, 긍휼이 그들의 장막 문 앞에 룸서비스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쌓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당신에게도 해당된다.희망을 갖고 앞날을 기대한다는 게 쉽지 않다면, 당신이 딛고 서 있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라. 당신의 삶을 위해 일용할 작은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아름다운 일출, 뜨거운 커피 한 잔, 작동하는 컴퓨터, 또는 문자를 보내오는 친구…. 하찮은 선물은 없다. ‘만나’라 이름 붙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말하라. 흠뻑 받아들이라. 오늘 하루치 영양분에 감사하라.당신의 홍해를 기억하라모세와 미리암은 40년 동안 광야를 걸으면서 홍해 옆에서 외쳤던 이 말을 몇 번이나 더 감미롭게 노래했을까?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먼지가 발을 덮고 밀려오는 모래바람이 눈앞을 가릴 때, 이 말은 그들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리듬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모세와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어린 시절 나는 조부모님의 작은 침례교회에서 주중 기도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신실한 기도의 전사들이 모여 온 교회를 위해 간구했다. 모여서 기도 제목을 나눴다. 그렇지만 그 주중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께 긴급 전화를 드려 도움만 구했던 것은 아니다. 기도는 곧잘 간증으로 바뀌었다. 간구 중에 사람들이 지난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고백하곤 했던 것이다. 건강진단 결과가 암울하게 나왔을 때,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이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지난날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해 냈다.새해로 첫 발을 내딛을 우리도 그들처럼 할 수 있다. 2022년에 하나님께서 크게 움직이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당신의 고통에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슬그머니 의심하는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려고 씨름하고 있다면, 당신의 ‘홍해’를 기억하라.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했던 옛 노래를 다시 불러라. 지난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주셨던 일들을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게 들려주라. 눈앞에 질고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 있는 듯 보여도, 끝은 있다. 지난날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앞날에도 당신과 함께 걸으실 것이다.바위에서 터져 나올 물을 기대하라체념하면 기대하지 않는다. 실망할까 두려워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잘될 거라 확신하지 못하니 어떤 일에도 냉담하기만 하다. 그런 우리를 현실주의자라 자처하겠지만, 체념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런 우리의 정신에 남을 것이라고는 건강하지 못한 비관주의일 뿐이다. 팬데믹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고, 끔찍한 사건사고가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전쟁과 기근이 온 세상을 할퀴고 있다. 이런 삶을 바라보고 있자면, 절망에 빠지기 쉽다. 엉망이 된 이 현실을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바로 잡으시려는 것일까?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절망이 점점 크게 밀려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에서 절박하게 부르짖은 모세의 믿음을 가지라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말씀하신다. 일용할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니 바위에서 터져 나올 물을 기대하라 하신다.모세는 목이 말라 대드는 백성에게 떠밀리다시피 하나님께 나아갔다. 분노와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무리의 절규가 귀에 윙윙거렸다. 모세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물을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의 아우성이 그의 희망을 갉아먹었다.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에 군중은 잠잠해졌다.2022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실 것을 기대하는가? 아니면, 기대치를 낮추는 것으로 실망을 사전에 회피할 것인가? 당신의 기도에 절망의 소리뿐인가? 새해로 첫걸음을 들여놓을 지금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진다면, 기억하라. 이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신다. 당신도 바위에서 물을 기대할 수 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뿐이라면, 우리는 결코 희망의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만한 믿음을 갖지 못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선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나날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길 때 우리는 참된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 체념과 비관주의가 2022년을 채우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걸으신다. 우리 옆에서 동행하신다. 새해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 우리에게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원제: New Year Hope from the Exodus Dese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만나
광야
출애굽
희망
새해
낙관주의
비관주의
실망
체념
사람의 곡선, 하나님의 직선
by 최병락
2021-12-29
류시화 작가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 19세기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통나무를 짓고 살았던 월든 호수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전한다. 잘못된 주소를 가지고 월든 호수를 찾다가 종일 헤매다가 결국 저녁에야 월든 호수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데이비드 소로를 좋아하는 어느 백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류 작가는 그 백인 작가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밤새 철학자 소로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만약 아침부터 나선 그 길에서 제시간에 월든 호수를 찾았더라면 나는 내 평생의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헤맨다고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한다.”‘도리어’의 역사바울이 감옥에 갇혔다. 사람들은 그의 사역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빌 1:12). 우리 말 ‘도리어’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를 옮긴 것이다. 이 말에는 ‘나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좋은 일인 것으로 밝혀진다’는 뜻이 들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인 ‘의외성’과 ‘반전’과 ‘상황의 역전’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이어 바울은 자신이 갇힌 것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빌 1:13).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이 시위대와 감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로마의 ‘시위대’(프라이토리온)는 황제의 궁과 총독 관저를 지키는 정예 부대였다. 철저히 로마 시민 중에서 선발한 남자들로만 구성된 시위대의 전체 규모는 9,000명에 이르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시위대는 전체 시위대 9,000명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위대는 로마 식민지 전역에 배치되어 있었고, 로마에 있는 시위대는 1,000~2,000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 시위대 1,000-2,000명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셈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들과 더불어 이 시위대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다른 수감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한다. 로마에서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오니 합법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를 종일 뛰어다녀도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찾아온 것이다. 감옥 안에서만 이런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다. 밖에서도 의외의 반전이 일어났다. 함께 복음을 전했던 동역자들 사이에 두 파가 생겼다. 평소 바울을 시기했던 사람들 쪽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다른 한 쪽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내는 착한 마음의 순수파였다. 이 두 파가 경쟁하듯 복음을 전했고, 가속도가 붙은 복음이 로마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수감이 결정되었을 때 바울이라고 처음부터 이 반전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도 적잖게 좌절했을 것이다. ‘하나님, 걸어 다니고 뛰어다녀도 부족한데, 이렇게 손발을 묶어 두시면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 버리신 것이다. 감옥 안에서는 2명씩 돌아가면서 24시간 교대로 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으러 왔고, 감옥 밖에서는 두 팀이 경쟁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밖에서 고군분투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리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구나!’ 자신에게는 곡선처럼 보이는 이 일이 하나님께는 직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하나님의 일하심감옥 안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바울은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내가 감옥 밖에 있을 때보다 감옥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더 많은 일을 하신다면, 감옥보다 못한 곳으로 가도 하나님은 더 큰일을 하시겠구나’ ‘감옥보다 못한 곳은 없으니, 내가 이곳에서 죽어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더 크게 일하실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죽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바울은 드디어 저 위대한 고백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실제로 바울이 60~70년 동안 살면서 전한 복음보다, 그가 죽은 후 지난 2천 년간 전파된 복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널리 퍼졌다. 바울이 로마 전역에 써 보낸 13권의 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전 세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졌고, 오늘 우리 손에도 들려 있다. 그는 죽어서 오늘까지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울의 인생이 감옥 안에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의 믿음은 오히려 그곳에서 단단해졌다. 바울이 멈추니 하나님이 더 바쁘게 일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우리는 매여도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었다. 동료 유대인들이 죽어나가는 수용소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훗날 그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역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로고테라피’ 또는 ‘의미치료’라는, 정신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이론을 제시한다. 수용소에서 그는 다른 이들을 관찰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다. ‘왜 어떤 사람은 살아났고 어떤 사람은 죽었을까?’ 그가 찾은 이유는 이러했다.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는 정신세계에서 창조성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의미를 지속해서 부여함으로써 자신에게 실존의 용기를 불어넣는 사람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대상자에서 제외되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추운 겨울날 강제 노역을 한 후에 주어지는 딱딱한 빵 한 조각과 미지근한 숭늉보다도 못한 커피 한 잔을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빵과 커피를 모두 마셔 버리지만 삶의 의미를 갖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 커피를 절반만 마시고 남은 절반으로는 세수를 하고 얼굴을 가다듬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았다.감옥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곳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보면서, 프랭클은 인간의 실존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유대인 그리스도인 바울은 역시 감옥 안에서, 빅터 프랭클이 발견한 정신의 의미를 뛰어넘는, 영적 의미를 발견했다. 내가 살아날 것과 전해야 할 복음이 있다는 것과 감옥 안에 있는 순간조차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우리 생각에는 곡선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직선일 때가 있다. 우리 눈에는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지름길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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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치료
류시화
은혜는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한다
by Ruth Chou Simons
2021-12-28
뭔가 늘 부족하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왜 매일 지쳐 있고, 두려워하고, 초조하게 애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 지 몇 년이 됐다. 왜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자원이나 시간, 성취, 명료성, 목적, 에너지, 확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수용과 환대가 부족한 것처럼 살고 있을까? 왜 우리는 친구로서, 동료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살고 있을까? 전례 없이 많은 기독교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책장에 꽂혀 있는 이런 책들로 우리 세대를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 시대의 여성은, 자력으로 성공하고 힘을 갖고 자유를 쟁취하여 이 시대의 틀을 깨트릴 수 있는 기회를 제한 없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불안과 압박과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이런 감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배경 음악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함께 이렇게 노래한다. ‘내 목적을 놓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면? 기대에 부응하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충분히 했다고 느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충분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터놓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나도 종종 나의 “달성”을 보장하는 공식을 찾고 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을 없애 줄 무언가를 원한다. 목표에 도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 한다. 나만 그럴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애쓰다 우리는 성적을 평가하고, 우리의 성과, 우리의 지지율, 우리의 소속감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데 몰두하는 문화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은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창조된 우리인데, 지금 우리는 햄스터 바퀴에 갇힌 채 우리 힘으로 애쓰고 있다.누군가가 당신의 질병에 대해 처방전을 제공했는데 그 처방이 당신 상태에 대해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처방전이 잘못되었거나 진단이 잘못된 것이다. 극도의 피로감과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면, 왜 이런 처방전들이 효과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성공을 위한 공식, 삶의 방향을 위한 전략, 또는 기분 좋아지게 하는 격려의 말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이것들이 우리의 무능감(feelings of inadequacy)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을 주셨다.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는 길을 주셨다. 나의 이러한 충족감(adequacy) 탐구를 완전히 바꾸는 놓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이해였다. 나는 충족감이라는 개념을 진부한 틀에서 끌어내어 성경의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은 최신 처방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끝없이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진단과 진짜 해결책이었다.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 ‘이 세상의 문제점’(What’s Wrong with the World)에서 내린 평가는 신랄하다. “기독교의 이상은 시도된 적도 없으면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어려운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래서 시도되지 않은 채 내버려졌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기소침해지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체스터턴의 이 말 때문에 나는 위로를 받는다. 어떤 게 하나님의 역할이고 어떤 게 당신의 역할인지 혼란을 느낄 때가 있는가? 당신이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이 이것을 정말 곰곰이 생각할 때) 너무나 터무니없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때로는 잠재의식 속에서, 경시하고 우리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의 별난 주장(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성취하신다)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이것으로는 변혁과 변화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한 진정한 수단 예수님을 믿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 않을 터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과(또는 성과의 결여)에 연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존의 복음을 숭배하는 것이다. 자기의존이란 우리의 노력에 따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은혜는 자기효능감(self-sufficiency)을 거부하고 자기 힘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문화에 대항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당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하시어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훈련되고 준비된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 문화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자기의존의 유혹에 도취되어 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고 말로는 신뢰를 표하면서도, 우리는 평생 ‘우리로’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변화를 위한 진정한 수단 곧 변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계발 및 공식들로 대체한다. 오늘 당신을 지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가능한 기준? 비교? 최선을 다했는데도 “아직 멀었어”라는 부담? 어머니, 당신을 압니다. 자녀가 “잘 되도록” 최신 양육 전략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대학졸업생, 당신을 압니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세밀한 계획을 짜고, 당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은사와 재능을 사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의 동료 여성 여러분, 압니다.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뒤쳐진 느낌이라는 것을. 여러분을 보면 내가 보입니다. 나도 그러한 삶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보았고,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그렇게 계속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리게 있게 되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삶보다 스스로 은혜를 획득하려고 분투하는 삶에 빠지기가 더 쉽다. 은혜는 당신 자신을 갈구하는 삶을 멈추고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고 살도록 만들어 준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를 드러내지 못하는 나태함이나 무관심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드러내는 데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촉매다. 당신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는 당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는 분투를 멈추고 당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가지고 계신다(엡 2:8-10). 은혜는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한다.이 글은 Ruth Chou Simons의 When Strivings Cease: Replacing the Gospel of Self-Improvement with the Gospel of Life-Transforming Grace(노력을 멈출 때: 자기계발의 복음 대신에 삶을 바꾸는 은혜의 복음을)의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Grace Fuels What Striving Can’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은혜와행위
자기무능감
자기효능감
은혜와공로
자기계발
자기의존
의무에서 보물로: 기쁨이 바꾸어 놓은 내 신앙
by Steven Lee
2021-12-2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이번에 좀 더 천천히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문장 속 단어를 하나하나 다 이해했지만, 전체 의미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지?” “나의 만족이 하나님의 영광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이 문장은 너무나 생소해서, 마치 아랍어나 아이슬란드어로 쓰인 글 같았다. 이 한 문장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기쁨,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씨름하도록 자극했다.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기쁨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기쁨을 발전시키고 최대화하고 또 자극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사실에 관한 내용을 계속해서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항상 성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한 문장은 내 삶을 말 그대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십 년 전 나는 성인으로서 독립을 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집에서 500마일 떨어진 대학에 도착했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과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성장한 내게 기독교의 본질은 의무와 규칙이었다. 적어도 열일곱 살 당시 내게는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뿐 아니라 부도덕하기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지만, 십대의 마음은 규칙과 금지 사항에 집중되어 있었다. 교회 출석, 기도하기, 성경 읽기, 혼전 성관계 금지, 술과 담배와 마약 금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 집안일이나 숙제처럼 의무였을 뿐 결코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고전 10:31),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대학 1학년 때 기독교 동아리에서 소그룹 리더가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 갈망하기’(Desiring God)를 내게 건넸을 당시, 나는 기독교 서적을 별로 읽은 게 없는 상태였다. 첫 번째 장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끝없는 혼란에 빠졌다. 저자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반복해서 말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라는 명령은 고사하고, 나는 한 번도 내 행복이 하나님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식의 가르침과 함께 자라지 않았다.예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또 행동으로 그분을 공경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고통의 길로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행실을 버리고 또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의무(labor)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했지만, 은혜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인용했지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까지 연결하지 않았다.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는 말은 마치 다리가 다섯 개 달린 개나 마른 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순종한다. 그러니까 순종만 하면 되지, 순종하는 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문화적으로 이런 접근 방식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속에는 좋은 성적, 근면, 의지, 규율, 인내가 심어졌다. 내가 자란 문화적 환경에서 시험에서 A 마이너스를 받으면 다음에 A 또는 A 플러스를 받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고 배웠다. 내가 좋든 싫든, 그건 상관없었다. 주어진 일은 무조건 잘해야 했다. 그러나 주로 거래 관계로 규정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예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성경을 읽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죄를 피했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 세상은 그냥 허물어지곤 했다. 내가 방탕한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하시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나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밭에 감추인 보배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축소시켰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했다. 내용 자체가 부족했다. 서서히,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기쁨, 예배 속의 기쁨,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나의 기쁨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단지 기쁨을 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영혼의 만족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위해 싸운다. 이런 생각이 성경 지면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시편 1:2). 주의 명령은 무거운 게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다(요일 5:3).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고 그의 우편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다(시 16:11). 예수님은 천국이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판다고 말씀하셨다(마 13:44).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당신의 직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혼부부에게 “당신의 직업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휴가지에 도착한 사람이 “이제부터 당신의 직업은 긴장을 풀고 즐기는 것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은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이고,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이다. 이 둘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갈 뿐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한다. 더 나은 곳은 없다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를 요약한 이 한 문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 놀라운 것으로 바뀌었다. 내 인생은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목사로서 성경을 전할 때, 내 목표는 순종을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인들에게 수치감과 죄책감을 줌으로 예수님을 따르거나 희생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위협이 있는 곳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더 큰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의 미소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예수님이 더 낫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 각종 오락이 주는 작은 즐거움보다 낫다. 예수님은 소셜 미디어의 늪을 끝없이 스크롤하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불법적인 쾌락, 화학적으로 유도된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이 죽음의 접시에 담고 있는 재물보다 낫다. 예수님께 순종하고, 교회에 참여하고, 그리고 주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일시적인 칭찬과 인정보다 낫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이 점점 커져갈 때, 그에 비해 세상이 주는 작은 기쁨은 점점 더 시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큰 경이로움은 그런 기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에 뿌리를 둔 영원한 기쁨을 만난다. 우리는 영원한 희망, 영원한 고향, 썩지 않을 왕국, 더 나은 기쁨,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현실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찾기 위해 창조되었고 설계되었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이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가 그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원제: From Chore to Treasure: How Joy Transformed My Christiani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희락주의
하나님께영광돌리기
기쁨
존파이퍼
신앙의본질
성탄절이 누군가의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by David Mathis
2021-12-24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지금 이 시점이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다. 특별히 더 힘들게 느껴지는 성탄절도 있는 법이다. 성격 자체가 워낙 활기차서 아무리 힘들어도 기운 내서 밝은 성탄절을 보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성탄절의 기쁨과 즐거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큰 슬픔, 더 깊은 아픔을 실감하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삶, 그것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그런 이들에게 온 세상이 노래하고, 종을 울리고, 갑자기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 찬 것처럼 쇼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고문과 다르지 않다. 성탄절의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기쁨을 느끼는 게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은 우리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의 첫 성탄절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성탄절도 모든 게 즐겁고 밝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즐거움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 날이었다. 그 첫 번째 빛줄기는 깊은 어둠의 땅에서 찬란하게 빛났다.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고, 무려 400년 동안 침묵하시기만 한 것 같았던 하나님은 어느 날 갓난아기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울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성탄절의 고통과 불행과 두려움을 깊이 생각해 보라.마리아와 요셉먼저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천사의 발표와 함께 혼란과 오해, 흥분과 기대가 뒤따랐을 것이다. 조만간 그녀의 배가 불러올 것이다. 약혼은 했지만 정작 결혼식은 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머지않아 그녀의 고향 나사렛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정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무려 삼십 년이 지난 후에도 예수님의 적들은 곤란할 때마다 그 카드를 사용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요 8:41). 예수님조차 그런 소문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면, 그 어머니 마리아는 어떠했겠는가? 이제 요셉을 생각해 보자. 약혼녀는 결혼 전에 이미 임신한 것으로 드러났다(마 1:18). 그에게 이런 사실은 어떤 치욕을 의미했을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녀는 요셉의 눈에 너무나 훌륭하고 순결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꿈이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꿈에서 천사를 만난 사이의 시간 동안 요셉이 겪었을 혼란은 얼마나 컸을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천사의 말을 믿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겠지만, 순간 아닐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그가 오셔서 지신 죄그러나 요셉이나 마리아가 겪은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지신 고통과 죄, 고난과 파멸이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선언했다. 모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의 점령과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적어도 그들이 이교도 이방인에 의해 정치적 예속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소식에는 로마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하나님의 첫 언약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로부터, 그들 안에 있는 흑암과 부패로부터 구원이었다. 열방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궁핍하지 않았다면, 굳이 성탄절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쇼를 벌이거나 카메오 역할을 하려고 굳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멸망하는 자를 구원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수세기 동안 불행과 어둠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세상의 타락과 훼손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의 오심은 참된 즐거움과 밝음에 대한 희망의 신호가 될 것이다. 초라한 마을 베들레헴아이가 태어날 때에 베들레헴이 준 것이라고는 놀라울 정도로 초라한 환영이었다. 천사가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아의 탄생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이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왕에게 적합한 환영을 하지 않았다. 궁전도 없고, 예루살렘도 아니었다. 왕이 태어난 곳은 대도시에서 6마일 떨어진 곳, 천 년 전 이 나라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태어났던 비천한 고향으로 알려진 작은 마을이었다. 베들레헴은 마을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위대한 왕의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 출생지였기 때문에 알려져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관”이든 개인 주택의 “객실”(그리스어 카탈뤼마(kataluma)로, 마가복음 14:14과 누가복음 22:11에도 나타난다)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게 결코 그들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눅 2:7). 그런데 정말로 이 분이 그리스도인데도, 그가 태어나실 장소조차 없었다고? 결국 마리아는 맏아들을 구유에 뉘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이건 아니건, 그런 상황은 누가 봐도 이상적이진 않다. 탄생의 겸손함은 그 자리에 오거나 오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더 확실해졌다. 그 지역 또는 국가의 고위 인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온 사람이라고는 외국 점성술사들인데, 그 사실은 당시에 오히려 혼란을 주는 사실일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목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드러낸 경외심, 그리고 놀라운 천사의 발표는 요셉 부부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런 모든 사실을 마음에 큰 기쁨으로 깊이 간직했다(눅 2:19). 그러나 블루칼라 목자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에게 주어진, 그의 오랜 영광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멀고 비천하고 고통스러울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영혼을 찌르는 칼마리아는 출산 직후에 성전으로 갓난아기를 데리고 갔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므온이라는 노인은 이 아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고 마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에게 냉정하고 예언적인 말을 했다.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4-35).내 자식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논쟁, 적, 큰 고통에 대한 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마리아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의 대상이다. 어떤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외에 여기에 다른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아들의 이른 죽음 외에 그녀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 무엇이 또 있을까? 헤롯과 학살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끔찍하게도, 첫 번째 성탄절과 관련해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가 발생했다. 두 살까지 수십 명의 남자아이들이 부모의 팔에서 떨어져서 불안하고 사악한 폭군에게 살해당했다.“헤롯이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 이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죄인 학살이 아니라, 갓 태어난 히브리 아들들을 나일강에 던진 바로와 같은, 무고한 이들을 향한 학살이다. 아이들의 엄마를 생각해 보라.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후에 얼마나 큰 고통이 왔을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그의 아들을 이 끔찍한 살육에서 구해 내셨다. 그리고 나중에 있을 더 무서운 십자가를 위해서 그를 보호하셨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사악한 왕에게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고통과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아들을 잃지 않는다면 기꺼이 치렀을 대가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마리아의 때가 곧 올 것이다. 슬픔보다 깊은 기쁨첫 성탄절을 맞아 이 세상에 온 예수님의 삶은 이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 태어날 때도, 유아기에도, 또 성인이 되어서도 쉽지 않았다. 사실상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은 예수의 생애 전체에 적용되는 특별한 고통을 포착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이사야는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 그는 정말로 그랬다(사 53:3). 그러나 고통스럽고 도전적인 삶이었지만, 동시에 그 삶은 질고의 사람을 지탱했던 깊고도 차원 높은 기쁨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기쁨은 올 것이다첫 번째 성탄절에 천사들이 발표한 큰 기쁨은 우리도 지탱해 줄 수 있다. 성탄절은 우리의 많은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에게 그 고통에 빠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탄절은 그 어떤 세속적인 축하 행사보다 더 심각하게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출 2:23-25; 3:7-9; 6:5).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이 시대의 성탄절은 기쁨과 밝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기쁨과 밝음이 조금씩 스며들 것이라고 약속한다. 최고의 성탄절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협 없는 기쁨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멀리서 볼 때조차도 미리 그 맛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과 슬픔의 사람이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근심하되 항상 기뻐해야”(고후 6:10) 한다. 성탄절을 맞아서조차도 몹시 슬퍼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원제: Christmas Doesn’t Ignore Your Pai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성탄절
요셉과마리아
베들레헴
헤롯
고통
성탄절과고통
크리스마스
복음을 지킬 것인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by 김정우
2021-12-21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라틴어 문자 그대로는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외교상 기피하는 인물’이라는 외교 용어로 사용된다.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곧 기피 인물이었다. “주여,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나이다.” 유대인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이렇게 기도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식탁 교제도 가졌다. 베드로는 더 이상 과거의 베드로가 아니었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 전후로 바울을 나눌 수 있다면, 이제 그는 이후의 베드로였다. 더 이상 이방인을 불결하게 여기지 않게 된 베드로였다. 자연히 그는 이방인 그리스인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다. 어쩌다가 한번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갈 2:12). ‘먹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계속적인 행동을 뜻할 때 사용하는 동사형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에 익숙했고,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방인들과 ‘계속’ 식탁 교제의 자리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이닥쳤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 식사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떠났다.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의식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비난을 두려워했고, 또 그들과의 갈등도 원치 않았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다녀온 후 할례자들에게서 받았던 비난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행 11:2). 베드로는 비난받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인정받는 사도로 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베드로, 교회의 반석으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본심으로는 더 이상 거리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 밖에 있는 눈, 자신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그 진리를 따라 행하지 못했다. 존 스토트는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보인 이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종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이제는 할례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믿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외식하는 유대인 게바, 유대인의 가면(페르소나)을 쓴 베드로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더욱 심각한 사태는 지도자 베드로의 행동이 끼친 파급 효과였다.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외식했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넘어갔다. 그 자리에 황망히 남게 되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을 또 어떠했을까. 칼뱅은 베드로의 외식이 미친 영향을 세 가지로 풀이했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중간 벽을 다시 세움으로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심겼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을 흐리게 함으로 사람이 만든 규례와 인습에 더 주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 유대인들의 마음을 더 굳게 하여 그릇된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 앞에 솔직하게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훨씬 쉽다. 좋은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좋은 영적 공동체라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의 ‘외식’이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 대 관계이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베드로를 “대면하여”(갈 2:11) “모든 자 앞에서”(갈 2:14) 책망한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 보자. 누가 믿음의 선배요 교회의 선임인가? 베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도 대면하여 공개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면박했으니 인간관계의 파국은 물론이고 교회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조직의 역공에 부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것은 ‘참된 복음’ 대 ‘다른 복음’의 투쟁, 본질이 걸린 문제였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침묵하거나 흘려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인간관계, 사회 질서, 교회위계를 고려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위도 맞추고, 안디옥 교회의 지지도 유지하려면, 다른 사도들(전부 선배다)과 좋게좋게 지내는 게 좋은, 좋은 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사도 공동체의 인정과 신임과 지지도 중요했던 바울 아닌가. 긴장하고 대립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기둥들”과 “친교의 악수”까지 나눈 마당에(갈 2:9), 여기서 눈 한번 질끈 감아 주면 “좋게”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걸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결정을 되돌리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 들인 비용이 아깝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것을 묻어두고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을 포기할 것인가? 예루살렘 공동체와 그간 쌓은 친교 관계를 위험에 빠트릴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할 것인가? 바울은 과감히 전자를 묻어 버리는 쪽의 위험을 택한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하나님께 좋은 쪽을 택했다. 나중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동일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갈 1:10).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만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오래 전 일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에서 꺼내 놓는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다니요!”(갈 1:6). 갈라디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도, 베드로가 보인 행동의 변화도 바울에게는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속삭이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학자이자 런던대학교 교수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가 저술한 <속삭이는 사회>(교양인 역간)에 나오는 표현이다. 스탈린 통치 하에 살던 소련의 평범한 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침묵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해서 언제나 속삭이는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자칫 복음을 살짝 옆으로 밀쳐 내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다른 복음”에 침묵할 수 있다. 사역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고, 친교도 그런 식으로 하는 걸 오히려 권장할 수도 있다.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나는 것은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미워서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쉽게 할 수 없는 방식을 결행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6). 바울은 일시적인 관계의 단절이 발생하더라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쪽을 택했고, 그것만이 허물어진 관계를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복음 외에는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다. 다른 모든 시도는 그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실상 이런 모순에 빠지는 게 우리다. 에필로그 이후의 전개가 놀랍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진심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흐르고 베드로는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벧후 3:15)라 부른다.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사람으로 바울을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면 베드로는 그를 “형제”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존 파이퍼의 말을 빌리면, “복음과 더불어 다시 사랑에 빠지면” 관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위선
갈등
유대인과이방인
음식규정
외식
존스토트
페르소나
존파이퍼
경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by Paul Tripp
2021-12-13
다가오고 있다. 벌써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가족에게 공격이 임박했다. 테러리즘이나 허리케인, 산불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다. 은밀하고, 매력을 발하고, 흥미를 끄는 공격이다. 훨씬 더 위험한 공격이다.우리 가족에게 ‘크리스마스 연휴의’ 공격이 임박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폴 트립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설명하겠다.크리스마스 시즌이 우리 앞에 와 있다. 이 시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길을 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반응을 기억하는 영광과 평화의 때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반응은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최종의 선물, 곧 자신을 내어주신 은혜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경배하고 경축해야 할 이 평화의 시간이 우리가 가정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름다운 장식이나 가족모임, 선물이 문제될 건 없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온 가족이 다시 모이고, 관계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까닭은, 이 시즌에 어떤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생각, 곧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를 규정할 것이냐를 놓고 한판 전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어떤 규정된 이야기의 의미를 먹고 살아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두 개의 이야기가 맞서 싸우는 전쟁이 되었다. 한 쪽은 매력이 넘치고 흥미를 끄는 이야기인데, 근본이 가짜다. 다른 한쪽은 우리를 너무나 낮아지게 만드는데,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든 필요한 이야기다. 가짜 크리스마스 이야기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가 들려주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을 중심에 올려놓는다. 사실 그 자리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요 하나님만을 위한 자리다. 이 이야기는 창조주 경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기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자기만족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가장 먼저 채워야 할 것은 물질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구속자의 구원의 개입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순간의 위안이다. 영원히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이 시즌에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위험하고 잘못된 이야기를 온갖 경로를 통해서 거듭거듭 듣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위로가 없는 곳에서 위로를 찾으라고 말한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희망을 걸라고 말한다.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 말한다.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그러나 이 가짜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달리, 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는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아무 매력도 없다. 이것은 죄악으로 끔찍하게 망가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파멸에 기꺼이 가담하려는 인간들이, 자기중심에 빠진 반역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슬픈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았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창조주께서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피조물 가운데로 들어오신 이야기다. 너무나 절박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속의 희생양이 되게 하신 상상하지도 못 할 일을 하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질문하는 이야기요, 우리가 길을 잃었고, 죄의 종이 되었고, 자기기만에 빠졌으며,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답해 주는 이야기다.이 나쁜 소식을 듣고 이해하기 전까지, 우리 아이들은 좋은 소식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에 오셔서 살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영광스러운 은혜의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가 축하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소식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 소식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된다. 진짜 전투에 나서라이 시즌에 치러야 하는 전투는 대중 캐럴을 부를 것이냐, 복음 캐럴을 부를 것이냐가 아니다. 성탄 예배를 드릴 것이냐, 가족 모임을 할 것이냐가 아니다. 진짜 전투는 우리 아이들이 믿게 될 것이고, 또 마음을 다해 추구하게 될 정체성과 필요, 의미, 목적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삶은 실로 이야기들의 전쟁이다. 진짜 이야기가 내는 목소리가 가장 커질 때, 그 전투도 가장 치열해진다. 선물도, 장식도, 별미도 즐기길. 하지만 가족에게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올해는 일찌감치 다가올 전투에 다함께 대비하길 바란다. 휴일 분위기에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전투에 나서길 바란다.마음의 전쟁을 위한 무기 5가지우리 아이들이 진짜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5가지 방법이다.1. 일찍 시작하라. 어디서나 가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이야기를 일찍 시작하지 않고서는 충분히 들려줄 수 없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2. 나쁜 소식을 전하라.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된 나쁜 소식을 전하여, 가족을 가짜 뉴스로부터 보호하라.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 않는 좋은 소식은 진짜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이야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이야기임을 우리가 절실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3. 가짜 이야기를 경고하라. 전통을 즐기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아이들이 반복해서 듣게 될 가짜 이야기가 어떻게, 왜 진짜가 아닌지 가르쳐 줄 기회를 잡아라.4. 선물 중의 선물, 예수님을 선물하라. 선물을 주고 사랑을 표현하라. 다만 아이들에게 피조물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한 선물, 곧 예수님의 성육신과 임재와 일과 은혜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라.5.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를 곳곳에 심어라. 그리스도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 죽음, 부활이라는 좋은 관점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다. 그리스도 강림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고자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의 은혜가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선물보다 더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 빛은 절대 꺼지지 않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원제: Warning: Christmas Is Com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성탄절
크리스마스
대림절
예수그리스도
복음
팀 켈러의 ‘크리스마스는…’ 20선
by Matt Smethurst
2021-12-12
다음은 팀 켈러 탁월한 저서 <팀 켈러의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Hidden Christmas: The Surprising Truth Behind the Birth of Christ, 두란노 역간)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대목들이다. 01다른 불빛이 다 꺼질 때에도 그분만이 우리를 위한 빛이시다(34). 02 크리스마스의 주제는 단순히 출생이 아니라 강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일은 창세전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43). 03크리스마스가 정말 실화라면 인류 전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전혀 오락용 현실도피가 아니라는 뜻이다. 복음이 실화이기에 그런 최고의 이야기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실현될 것이다(53). 04당신의 시간표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디어 보일 수 있으나 그분은 결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일하시는 속도가 아주 느리거나 아예 약속을 망각하신 듯 보일 수 있지만, 그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며, 그분의 약속이 실현될 때는 언제나 당신의 상상을 초월한다.…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난하다고 여기는 기간이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사실상 전무하다(62-63).05히브리 세계관은 인간이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개념을 철저히 배격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에 담거나 글로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장 가까이 따르던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삶과 주장과 부활을 통해 이런 확신을 심어 주셨다.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법을 알려 주는 한낱 선지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이다(73-74).06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은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희망을 준다. 이는 우리 사는 세상이 존재의 전부가 아니고 죽음 후에도 삶과 사랑이 있으며, 언젠가 악과 고난이 끝난다는 뜻이다. 끝없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희망이 있을 뿐 아니라, 끝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내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79).07하나님이 거룩하기만 하신 분이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냥 우리 스스로 분발해서 거룩하고 착해짐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얻어 내라고 요구하셨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뭐든 다 받아 주는 ‘사랑의 신’이라면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죄와 악을 묵과하고 무조건 우리를 품어 주는 이런 신은 현대인들이 지어낸 것이다. 도덕주의의 하나님이나 상대주의의 하나님이라면 크리스마스의 수고를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79)08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삶에 들어오시면 흠 없는 평판과는 작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아직 마태복음 1장이 그 정도이고, 2장으로 넘어가면 요셉은 더 많은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삶에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그는 사회적 지위만 훼손당한 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삶에 받아들이려면 용감해야 한다(92).09그리스도께 가려면 당신의 조건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하면 순종하겠습니다. 만약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순종에 조건을 다는 순간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제 주인이 아니라 조언자입니다. 주님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 가능하다면 그중 더러는 시행해 보기도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당신 마음대로 인생을 결정할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후기 현대의 문화와 충돌하지만, 우리는 바로 거기로 부름 받았다. 그 이하로는 안 된다(95).10당신이 그분과 함께 있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는 데는 무한히 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가 하나님의 속성인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용기가 필요한 신은 다른 어느 종교에도 없다(98).11우리는 종교를 통해 하나님을 길들이려 한다. 온갖 행위를 통해 그분을 우리의 채무자로 만들려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그분이 복을 주실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주권에 적의를 품는다. 다만 그것을 종교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거나 감출 뿐이다(112).12‘왕이 어디 계시냐?’ 그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소동하게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저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삶의 왕좌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 종교를 이용해 그 왕좌를 고수할 수 있다.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의를 내세워 그분을 내 말대로 하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종교를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어, 신은 없다고 목청 높여 주장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참되신 왕의 주권에 맞서 본능적 적의를 표출하기는 마찬가지다(112).13이렇듯 크리스마스의 사실성 여부에 정말 중립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을 주관할 권리를 잃었다. 어떤 주장이 사실일 경우 당신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잃는다고 하자. 누가 그 주장에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당신도 객관적일 수 없다. 당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점을 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당신의 회의에 의문을 제기하라(115).14왜 그들을 택하셨을까? 하나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누누이 말씀하신다. ‘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사렛을 택하겠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녀를 택하겠다. 모두에게 잊혀진 소년을 택하겠다(120).15천사가 나타나 말을 건다면 당신도 마리아와 똑같이 반응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앞서 보았듯이 유대인인 마리아도 행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다는 개념을 믿지 않도록 문화적으로 교육받았다. 따라서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믿지 못하게 그녀를 막아 선 장벽은 종류만 달랐을 뿐 당신 앞의 장벽과 똑같이 높았다. 그런데도 증거와 체험이 합해져 그 장벽을 허물었고, 마리아는 결국 믿었다. 믿음의 원리는 지금도 똑같다. 그녀는 회의와 의문을 품었고 이성을 움직여 질문했다. 오늘날 우리도 믿으려면 똑같이 해야 한다(133).16기독교 신앙은 흥정이 아니라 순복이다. 당신이 자신의 삶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의미이다(148).…순복의 가장 큰 동기는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실 일이 아니라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위해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154).17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의 은혜와 성육신을 통해 그분과 화평해질 수 있고, 일단 그분과 화평해지면 밖에 나가 다른 누구와도 화평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통해 온 세상에 평화가 증대된다. 하나님과도 화목하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화목해진다(172).18크리스마스의 구유는 당신도 예수님처럼 살면 웬만한 여관에 당신의 방이 없을 거라는 뜻이다(185).19지난 세월 내게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 성육신이나 온갖 교리를 왜 믿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착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착실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그 말도 교리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 구원이 아닌 행위 구원의 교리라 한다. 거기에 깔린 전제는 당신이 구주가 필요할 정도로 죄인은 아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신은 하나님과 인간과 죄의 속성을 총망라한 일련의 교리를 주창하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그게 다 틀렸다고 말한다(200-201).20크리스마스가 그럴듯한 전설에 불과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사실이라면(사도 요한은 전적으로 실화라고 증언한다)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203).원제: 20 Quotes from Tim Keller’s New Book on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윤종석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의미
팀켈러
팀켈러의예수
세계관
나사렛
성육신
다문화 크리스마스
by Michelle Reyes
2021-12-11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시점은 제1 세기다. 이 이야기에 백인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에는 으레 바닐라 향이 진하게 풍긴다. 마구간 장식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는 백인이다. 성탄을 축하하는 식탁 위에는 온통 앵글로아메리카 음식뿐이다. 예배에서도 유럽풍 찬송가만 부른다. 물론 유럽계 사람들도 자기네 고유의 민족 문화를 일관되게 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수많은 백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다양성이 부족한 이 크리스마스 축하 문화가 왠지 불편하다. 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지 자문하면서….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저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는 다양한 문화적 관점들을 포용하면서 말이다. 새로운 관점 갖기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마 28: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인종 구분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가닿는다(눅 2:10). 예수 나심의 사실이 이러하니, 우리는 저마다의 문화를 가지고서 성탄을 이해하고 또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문화 공동체에서 함께 성경을 읽다 보면,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이 그네의 문화에 젖어서 볼 수 없는 성경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와준다. 미국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적 자질을 갖고 있는 성도들로부터 배우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풍성하게 그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저 크리스마스 식탁에 여러 나라 음식을 함께 올리거나 여러 문화권의 옷이나 장식을 갖다놓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서 저마다 의미를 두는 요소가 특별한, 각 문화의 고유한 이야기(내러티브)를 서로 알아가자는 것이다. 포사다스, 거절당한 이들 기억하기중남미 사람들은 포사다스(posadas, ‘임시숙소’ 또는 ‘여관’)를 경축한다. 이 절기에 사람들은 친구 집을 방문하여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에서 묵을 방을 얻지 못하고 거절당한 사실(눅 2:7)을 재연한다. 포사다스는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 전통은 예수님이 거절당한 사람들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일러준다. 포사다 절기 중에 사람들은 노래와 음식을 이웃과 나눈다. 이는 가진 것이 적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며 살겠다는 다짐이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 편에 함께 서겠다는 연대감의 표현이다.키악, 모욕당한 이들과 함께하기이집트의 콥트 그리스도인들은 잉태한 마리아의 이미지에 주목하는 키악(Kiahk) 전례를 따른다. 이를 통해 그들은 대림절이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임을 되새긴다. 많은 콥트 그리스도인들이 12월 한 달 동안 금식한다. 그들은 마리아가 자신에게 임한 수태의 신비로 인해 받았을 극심한 모욕과 시련을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금식을 하면서 견뎌냈을 것이라 믿는다. 미국화된 이 휴일이 주는 온갖 달콤함과 즐거움에 빠져 있는 우리가 이러한 금식을 실천한다면, 우리 마음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본래 담겨 있는 고난의 이야기로 향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미국 국경에서는 이민자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마리아에만 주목하지 않고, 마리아 앞에 높여 있는 현실의 처지―사생아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아기를 곧 낳게 되는 연약한 젊은 여자―를 간과하지 않는다면, 이민 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도 달라지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담겨 있는 마리아의 수치와 믿음을 기억하고 기리는 다른 문화들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빠롤, 반짝이는 그리스도의 빛빠롤은 필리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장식해 놓는 랜턴이다. 전통 빠롤은 대나무와 종이로 만드는데, 오각형 별 모양이 가장 흔하다. 밝은 색감과 반짝이는 빛이 아름다운 빠롤은 저 베들레헴의 별(마 2:9-10)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을 떠올리게 한다. 가정집 창문에 매달건 예배당 안에 줄지어 장식하건, 이 전통은 “세상의 빛”(요 8:12),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을 경축한다. 빠롤을 보면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나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있는가?” “나는 이웃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동방 박사의 날, 이방인의 믿음 기리기‘동방박사의 날’(Dia de los Reyes)에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푸에르토리코, 우루과이, 멕시코에서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진정한 “유대인의 왕”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이방인 박사들(마 2:1-12)을 기념한다.이 박사들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2:18; 사 11:10, 60:1-6). 마태복음은 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으로 끝을 맺는다(마 28:19).‘동방박사의 날’은 우리도 이 박사들처럼 우리 문화의 개성과 표현을 온전히 담아 왕이신 예수께 나아가 경배해야 한다(사 60:11; 계 21:24-26)고 일깨워 준다.다문화 크리스마스 다문화 크리스마스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문화적으로 다양한 관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는 다양한 문화들로 우리의 가정, 공동체, 교회를 풍성히 채우면 좋겠다.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길 바란다. “우리 문화유산에는 예수 탄생의 어떤 면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새로운 면은 어떤 것이 있는가?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야기를 다문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읽고, 서로에게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경배할 수 있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그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원제: Making Space for a Multicultural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크리스마스
다문화크리스마스
포사다스
키악
동방박사의날
빠롤
크리스마스이야기
강림
힙합 가수 샤이 린의 ‘인종화합’ 명언 20선
by Matt Smethurst • Shai Linne
2021-12-09
아래에 인용한 샤이 린(Shai Linne)의 글들은 그의 책 <새로운 개혁: 인종화합을 위한 싸움 속에서 희망 찾기>(The New Reformation: Find Hope in the Fight for Ethnic Unity(Moody, 2021)를 읽는 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다. 교회 안에서 인종화합(ethnic unity)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15-16). 마르틴 루터가 이와 같은[반유대인 증오 발언]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고수하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그리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죄를 지을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르틴 루터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96). “인종”(race)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르게 방향을 잡으려면, 우리는 문화가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이러한 논의에서 진전을 이루려면, 오직 성경만이 이 주제에 답할 수 있는 처음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104-105). 어떤 문제가 가하는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의도적으로 멀어져 있으면, 그 문제의 긴급성은 고사하고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106).[증오, 우월감, 편애/편파, 억압, 그리고 맹목적 신념]은 인종 문제가 있는 곳에서 유독 그 본색을 드러내는 유별난 죄들이다(113).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일치(unity)는 어떤 것이든 결국 하나님께서 좌절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치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다.…사탄의 속임수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 일치를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위장하는 것이다(120). 바벨탑 이야기 바로 직후에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온 땅에 흩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도, 하나님도 없는 세상에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그 흩으신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모든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이로써 바벨이 품은 악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이 밝히 드러나게 하신다.…하나님의 목적은 바벨탑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민족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것이다(121, 125). 바울의 생각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기를 거절한 것(갈 2:11-14)]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복음의 문제였다. 과거의 민족적 또는 문화적 분열로 회귀한 것은 곧 복음의 진리를 범한 것이다. 복음은 어떻게 말하는가? 복음은 예수님이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인종 집단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종 구분도 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는 인종을 구별하여 친교를 나눌 사람을 고르는가?(130). 민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합당한 반응은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은근히 뻐기지 않는 것이다. 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합당한 반응은 나에게 민족정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것을 지렛대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백인 형제자매들에게 말씀 드린다. ‘피부색을 봐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길 바란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또 피부색이 아니라 내면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멋진 일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갈색 피부를 주신 데는 분명한 뜻이 있다. 하나님은 무시당할 수도 있는 이 피부색을 굳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피부색에 내가 감사하길 바라셨다. 다양한 피부색을 만드신 지극히 비범하신 당신이 찬양받으시길 바라셨다. 그러니 피부색을 무시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133).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역[인종문제]에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힘들어 한다. 이 사실이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죄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면서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인종과 관련한 죄를 이겨 내려는 최소한의 투쟁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이다(147).논쟁의 “반대편”에 예수님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올바르게 예수님을 따르는 쪽은 우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중에 모든 사람을 다 꾸짖고 기분 상하게 하시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점에서 다 공감해 주신 그런 특별한 사람들일까?(155).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치는 결코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주신 가르침은 분명하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으신 교회가 하나 되어 걸어갈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증인이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162). 오늘 교회에서 인종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적지 않은 분노를 목격한다. 적지 않은 냉소도 보인다.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조롱하는 모습도 많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모습이다(164). 집단 신음(Collective Groan)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현상이 있다. 일부 독자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특히 개인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른 많은 미국 흑인들과 더불어 나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살인사건들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흑인들은 이 사건들을 한 민족으로서 우리의 역사적 서사의 맥락에서 발생한 비극으로 바라본다. 노예제의 참상; 짐 크로우(Jim Crow) 시대의 린치(lynchings, 법을 벗어나 흑인들에게 자행된 백인들의 사사로운 처벌 행위); 소방호스와 개를 무기 삼았던 민권운동 시대; 흑인에 대하 부당한 주택 대출 제한; 에밋 틸(Emmitt Till)·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마틴 루터 킹 살해; 흑인 여자아이 넷이 희생된 버밍엄에서 일어난 교회 폭탄 테러;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한 흑인 교인들이 희생된 찰스턴 학살; 전국의 헤드라인 뉴스들을 장식한, 뜨거운 다리미가 노예의 살을 지지는 것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신을 그을린 각종 사건들과 그럼에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상의 모든 굴욕과 모욕, 잔인함과 결합된 조부모 시대의 노골적인 차별로부터 아버지와 삼촌을 절망에 빠트린 유리천장; 경찰과 마주쳤을 때는 이렇게 “대화”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많은 흑인 가정에게 뿌리 내린 일종의 통과의례; 그리고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평생 매일같이 치러야 하는 온갖 투쟁이 된 이 현실, 이 모든 것이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을 죽이는 것을 본 많은 흑인들로 하여금 “또 시작이다” 토로하며 집단 신음하게 하고 있다(173-174).누군가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무시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 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 누군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치부하는 글을 써 재끼는 것이, 비록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탄에 빠진 그들을 위로해 달라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드는 일이다(180-181).유오디아와 순두게(빌 4:2-3)는 무슨 문제로 의견 차이를 빚었으면서도, 영원을 함께 보낼 사이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갈등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유혹이 있다.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그 차이점을 벽돌과 모르타르 삼아 분리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하늘 아버지, 동일한 구주,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소망, 동일한 보편 교회, 동일한 언약, 동일한 약속, 그리고 동일한 영원을 공유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 우리의 문화적 배경, 그리고 우리가 속한 정당보다 훨씬 더 우리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타자”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꼭 이것을 기억하자(182-183).회심한 후에 “우리”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나아오기 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실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이 단어를 내뱉는 것이다. 옛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 가족, 우리 국적, 우리 민족, 우리 하위문화 그룹, 우리 정당, 우리 성별, 우리 출신 학교, 우리 동료, 우리 스포츠 팬 따위에 제한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우리”가 있다. 이 “우리”는 우리가 한때 동일시했던 이전의 모든 그룹을 대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우리”는 매우 다양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이 새로운 “우리”는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인, 공화당과 민주당, 대도시와 농촌이다. 교육 많은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이다. 이 새로운 “우리”는 국제적이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다. 여러 피부색이 함께하는 우리다. 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 된 우리다. 그리고 영광된 우리다. 새로운 “우리”는 이렇다(189).나는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것에 정말 감사한다. 또한 나는 내가 태어난 때와 태어난 곳에도 감사한다. 힙합 문화의 발상지인 뉴욕에, 그리고 힙합이라는 문화가 다섯 자치구를 넘어 발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 나는 흑인 문화, 흑인 여성, 흑인 설교, 흑인 음악, 흑인 유머, 그리고 흑인 음식과 그 양념을 좋아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는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문화 박물관’에 갔을 때이다. 내 조상들의 끈기, 결단력, 창의성, 그리고 저 노예선의 어두운 선창에서 시작하여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비상하는 흑인의 역사 앞에서 나는 겸손과 영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첫째 되는 “우리”는 흑인이 아니다. 나의 첫 째 되는 “우리”는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존귀한 이들…그 안에 나의 모든 즐거움이 있는,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시 16:3). 과격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웨스트 필라델피아 출신의 겁이 많은 흑인 힙합 가수인 나는 웨스트버지니아 산맥의 백인 광부, 사우스다코타 출신 주부, 그리고 베이 지역 의 중국계 미국인 의사와 근본적으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남부 필라델피아 출신의 흑인 힙합 가수 사촌보다 더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영광이요 아름다움이다(190, 191).진리 편에 선다는 미명하에 성령의 열매를 버릴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193-194).인종 다양성은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은 아니다. 다양성 면에서야 지옥도 뒤지지 않는다.…일치도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이 아니다. 지옥도 못지않게 일치를 이룬 곳이다(210, 211).원제: 20 Quotes from Shai Linne on Ethnic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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