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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자기성찰의 참 방법을 가르치다
by Mark G. Johnston
2022-01-26
자기성찰(self-examination)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자 할 때 언제나 핵심이 되는 요소다. 초대 교회에서도 바울은 갈등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이나 강력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라고 촉구했다. 첫 번째는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와 관련해서였고(고전 11:28), 두 번째는 믿음 자체의 진정성과 관련해서였다(고후 13:5).장 칼뱅도 ‘기독교 강요’의 서문에서 자기성찰에 대하여 말했다. 그는 참되고 건강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에서도 비롯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자기성찰의 실천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경건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자기성찰을 실천할 수 있는가’이다. 자기성찰의 훈련을 나쁜 방향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는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으며 나 홀로 하는 자기성찰은 도리어 영적 자해가 되어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까?성경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윗의 시 가운데 하나인 시편 139편은 유익한 방향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주석가들은 이 시를 가리켜 “신학적 교훈에 필요한 지혜 경건”을 보여 주는 모범이라고 말한다. 이 시는, 그 배경이 무엇이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정한 자기 인식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균형 잡힌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하나님 백성의 삶 속에 교리와 경건과 찬양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매우 잘 보여 준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적어도 세 가지 영역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특별히 시인이 마지막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 세 가지 영역이 잘 드러난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살펴봐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23절). 시인의 이 요청은 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고백과 서로 공명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절).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다윗의 관점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서 곧바로 나온다. 다윗의 하나님 이해,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얻게 된 하나님 이해는 다윗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은 매우 크신 분이시기에 모든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압도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속속들이 아신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서(1-6절), 다윗은 하나님이 알지 못하시는 것은 없다고 고백한다. 곧 하나님은 전지하시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 다윗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들을 되돌아보고서는(7-12절),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다고 결론 내리고, 자신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범위에 관하여 고백할 때에도, 다윗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13-18절). 그러면서 시인은 인간을 모태에 창조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여기에는 “자연”을 넘어서는 더 큰 신비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온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지혜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역사하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우리 자신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상태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우리에게 하는 듣기 좋은 말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자신의 실체를 여실히 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다. 바로 그 때 우리는 다윗처럼 부르짖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살펴봐 달라고 요청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4절).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의 책망은 아파도 진심에서 나온다”(잠 27:6). 듣기 힘들 정도로 아프지만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친구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 우리를 가르칠 뿐 아니라 교훈하고 책망한다고 가르친다(딤후 3:16).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아니면 불편해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기성찰을 직장에서 매년 하는 성과 분석의 영적 버전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시편 139편의 아름다움은 자기성찰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추악한 점을 낱낱이 들춰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 앞에 우리를 초청하신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가족 모두 긴장한다. 그저 이 친구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실내 장식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우리 집이 아니라 “이렇게도 될 수 있는” 집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1절부터 18절까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의 광채를 경험한 후에 다윗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뜻이라는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복음의 아름다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가장 진실한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좀 더 나은 우리가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다(갈 4:19). 이것은 영적 교정 수술과 같은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하는 간구는 자신을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4). 나는 지도를 보거나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걸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아내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찾을 때마다 매우 기쁜 마음으로 아내의 지시를 따른다. 다윗의 이 마지막 청원은 그가 자신의 삶 속에서 옳은 길이라 생각했지만 고통스러운 실패로 끝난 경험들에서 나온 것임이 확실하다. 비록 위대한 왕이었고 지혜로운 전략가였지만, 다윗도 너무나 자주 어리석은 판단과 결정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비참한 결과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 다윗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청한다. “제발 나를 인도하소서.” 사실 이것은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님의 의로 나를 인도하소서!”(Lead me, Lord. Lead me in your righteousness)라는 찬송도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누군가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본성적으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살펴봐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다윗의 용기와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윗이 어려서부터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에서 찾을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이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영혼의 수치를 모두 노출시켰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 부끄러운 것들을 씻어 주셨고, 그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 또한 그렇게 나타났다. 요한복음 기자 요한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우리에게도 비추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광채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기는 빛이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게 될 것이다. 원제: A Method for Self-Examin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박광영
자기성찰
시편139편
다윗의자기성찰
하나님의영광
인간의수치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
by Joshua Bremerman
2022-01-24
삶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질병이 찾아오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미래는 불투명하게만 느껴진다. 암을 마주하게 된 백발의 성도든, 미래가 극심한 압박감으로 밀려오는 젊은 대학생이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라 할지라도 삶의 위기와 고통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때로는 절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삶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전도서의 전도자도 종종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전도자가 우울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도서는 삶에 지쳐 낙담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책이 아니라, 좌절한 사람들에게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아 주는 책이다. 전도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간결한 희망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일과 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을 즐겨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잘 맞추어 가신다전도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을 심어 주려고 한다. ‘왜 삶이 이 모양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 변화무쌍한 우리 삶을 총지휘하신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전 3:2). 전도자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말로 시적으로 담아낸다. 그 모든 일, 곧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일, 모두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전 3:1). 누가 그 때를 정하는가? 전도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우리에게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 아름다움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합당하듯이(아 1:8, 15; 2:10),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아름답고 합당하게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모자이크 작품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맞추어 절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시는 장인이시다. 아마도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고백할 때 전도서의 이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비록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만, 전도자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이 문맥에서 “영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과 평행을 이룬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과 끝까지” 모두 이해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본성을 “사람이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 두셨다. 이에 대하여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 335-395)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새겨 놓으셨다. 바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를 결코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Homilies on Ecclesiastes, 79).우리는 이와 같이 인간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무능을 깊이 깨닫게 된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전 3:9-10).” 전도자의 이 질문에는 사실 이런 부정적인 대답이 함축되어 있다: 일하는 사람이 그의 수고로부터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에게 무슨 수고가 있는가? 전도서 3:2-8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여러 가지 수고가 들어 있다. 그런데 전도서 8:17은 우리가 하게 되는 특별한 수고를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수고를 해도 도무지 하나님의 일과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처음에 했던 질문을 재구성해야 한다.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묻는 대신에, “삶이 도무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를 따라서 모든 것을 사용하여 일하신다. 우리가 능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일과 방식은 합당하다. 언제나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적합하다. 우리가 이를 다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전혀 놀랍지 않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하나님을 경외하라그렇다면 삶이 도무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도자는 우리가 허무주의의 체념 속에서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전 3:14).”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우리를 그저 가지고 놀면서 즐기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무지 속에 갇혀서 방황하길 원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식을 갈망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갈망을 통하여서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게 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또는 관계 밖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놓여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이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이를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가심을 알기 때문이다.그들에게 밀어닥친 크나큰 재앙 앞에서 욥은 그의 아내에게서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욥은 그의 아내에게 이렇게 되물었다(욥 2:9-10)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와 비극을 목도하더라도, 그 고통이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 고백해야 한다.눈앞에 있는 삶을 받아들이라우리는 두려움에서 멈추면 안 된다.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는 것이 시작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서 더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하지만 전도자의 이 가르침을 카르페 디엠, 할 수 있는 대로 오늘을 즐기라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조 리그니(Joe Rigney)는 ‘땅의 것들’(Things of Earth)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촉구한다. “당신이 피조물임을 받아들이라. 하나님이 되고자 하지 말라.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당신에게 정해 두신 영광스러운 한계와 제한을 인정하라.” 리그니의 이 권고는 전도서 3장의 핵심,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세상을 누려라’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두려워하는 것은 곧 우리가 인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다가올 미래의 어두운 그림자를 알 수는 없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리고 선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받아들이고 이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개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가을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즐기라. 사랑스러운 자녀들과 함께 따뜻한 초콜릿을 천천히 음미하라.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의 직업에도 최선을 다하여 일하라. 우리 곁에 있는 병든 이들에게 손을 내밀라. 하나님의 일과 방식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다. 우리 삶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맡긴다면, 수고스러운 우리 삶 가운데서도 그만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이슨 드루치(Jason DeRouchie)는 유한과 무한, 좌절과 기쁨 사이에 있는 긴장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이것이 전도서의 목표다. 믿는 이들은 이 땅의 저주와 복잡한 인생의 무게를 느끼면서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아름답지만 이미 죄로 인하여 훼손된 이 세상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기뻐할 수 있다”(Shepherding Wind and One Wise Shepherd, 15).하나님처럼 선한 일을 하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누리라고 가르친 다음에, 전도자는 우리가 더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한.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전 3:12). 우리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기뻐할 때,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릴 때, 우리는 이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이 도무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좋은 일, 나쁜 일,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일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인생을 걸어가며 주님께서 주신 크고 작은 선물들을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삶을 함께 살아가도록 권하며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원제: When Life Doesn’t Make Sens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전도서
욥의고통
하나님의일과방식
고통과기쁨
삶의고통
삶의기쁨
바른두려움
전도서의삶의지혜
루이스와 파이퍼가 발견한 영광, 그리고 기쁨
by Elliot Clark
2022-01-20
한 세대 전, 존 파이퍼는 ‘하나님을 기뻐하라’(Desiring God)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답변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파이퍼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의 사역을 통해) 주장한 핵심 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은 별개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찬양한다는 C. S. 루이스의 시편 묵상에서 처음 이루어진 면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축구팀, 또는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것을 칭찬할 때 더듬거리거나 주저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전혀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니다. 이 명령은 사실상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찾으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찬양 받길 원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와 제로섬 게임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시면 우리가 지는 그런 게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얻을 때 영광을 받으신다.우리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개념은 루이스의 또 다른 개념, 곧 기독교 신앙은 이기심 없는 노력이 아니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욕망을 통해 자기부인을 하도록 동기부여 하신다.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Weight of Glory)에서 이런 생각을 적용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 얻는 것을 약속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희생하도록 동기부여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주목한다. 파이퍼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이 주제를 택하지만, 루이스와 똑같은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루이스는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놀라운 만족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 주어진 그것은 곧 영광이다. 루이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심”(fame with God), 승인, 감사, 영예라고 부른다(36). 다른 말로 하면, 그가 꿈꾸는 최고의 행복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로 인해서 기쁨을 느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고 우리에게는 영광이 돌아오는 기쁨이다!루이스에게, 그러한 영광은 “하나님께서 좋게 보심, 하나님께서 받아주심, 응답, 인정, 만물의 중심으로 환영을 받아 들어감”(41)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창조된 이유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영광의 약속은 믿기지 않은 정도로 놀라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약속입니다. 우리 중 일부, 곧 진심으로 그 약속을 선택하는 우리 중 누구라도 실제로 그 시험에서 살아남아서 인정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하나님의 행복에 실제로 기여한다는 것…하나님께 사랑 받는다는 것, 그저 동정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기뻐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는 것, 이것은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실로 불가능해 보이는 영광의 무게 곧 부담입니다(38-39).파이퍼도 루이스처럼 영광이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피조물의 기쁨이 창조주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 그러나 ‘영광의 무게’에서 루이스는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진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에게 영광을 가져다준다.영광의 무게루이스는 이 영광의 무거움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미래 희망에 대한 다섯 가지 주요 원천을 그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간략하게 나열한다. (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 (2)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 (3) 엄청나게 풍부한 이미지가 보여 주듯이,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4)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잘 대접 받고 잔칫상을 받고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5) 우리는 우주에서 일종의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곧 도시를 다스리고, 천사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34).이러한 약속들을 숙고하면서, 루이스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왜 처음 약속 말고 굳이 다른 약속이 더 있는 거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개념에 더해질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건가?” 결국, 하나님 자신이라는 그 선물 외에 다른 선물을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루이스의 놀라움을 생각하는 중에 나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요약한 각각의 약속은 영광이라는 구체적인 소망과 관련이 있으며 그 소망을 확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영광을 의미한다. 명예란 자고로 왕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에게 속한다(욥 36:7; 삼상 2:8).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처럼 될 것이기에(요일 3:2),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정확하게 드러낼 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롬 8:18-19; cf. 고전 11:7). 그리고 하나님의 광채와 아름다움을 반영한다(시 34:5; 단 12:3). 우리가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존귀함을 소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이스가 탐구하는 특정한 특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롬 2:7, 고전 4:5). 우리는 잔치에 참여하는데, 그것은 왕의 잔치에 왕의 손님이 되는 특별한 영예를 포함한다(사 25:6-7; 마 8:5-13; 눅 14:7-11). 앞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높은 지위가 주어질 것을 말한다. 나라의 권세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한다는 것, 심지어 천사까지 심판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영광이 얼마나 회복되는지 그 정도를 보여준다(시 8:5, 고전 6:3).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약속의 각각의 면이 독특한 광채로 빛났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명예를 타고나지 않은 경우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우리는 왕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고, 그리스도 왕국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며, 왕의 식탁에 초대되었고, 그의 왕국의 대리 통치자(vice regents)로 승격되었다.같이 받은 영광, 천국의 기쁨‘영광의 무게’에서 루이스는 이것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경이로움에 충격을 받는다. 이것만으로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전형적인 루이스의 방식으로 그는 그러한 영광이 “우리의 깊은 갈망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41)를 조명한다. 우리 각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승인과 인정은 기쁨의 중요한 원천이다. 우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상사의 세속적인 인정, 우리의 하루를 밝게 해주는 선생님의 칭찬, 자존심 강한 아버지의 인정과 기쁨에 찬 배우자의 칭찬, 이 모든 것이 한줄기 빛이 되어 우리 눈을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충만함을 향해 돌리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그 순간을 향해서 말이다. 그러한 특권은 실재하고, 공감할 수 있고, 바람직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야기하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영광의 개념은 비인격적이고, 가질 수 없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기쁨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난해해 보인다. 그 결과 성경의 많은 약속들이 우리의 가장 큰 갈망들과는 단절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루이스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의 내면에 인정을 향한 깊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은 그 갈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있음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고 싶은 우리의 굶주림은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그런 굶주림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고 또 하나님께 받게 될 그날을 고대한다(롬 2:6-10, 살후 1:9-12). 그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또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다(벧전 1:7-8). 그러한 기쁨과 영광은 두 가지의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서로 묶인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된 위대한 목적이요 우리가 고대하는 위대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목격하고 공유하는, 그리하여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고 궁극적으로 다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이다. 원제: What Glory Awaits: Journeying with C. S. Lewis and John Pip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S.루이스
존파이퍼
영광의무게
천국의영광
영광과기쁨
기독교희락주의
기뻐하시는하나님
두려움 없이 시대를 거스르는 그리스도인
by Thaddeus Williams
2022-01-16
채프먼 대학교는 미국인의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연례 설문조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미국 주요 도시의 화재, 논란에 휩싸인 대통령 선거, 선거 부정 주장, 전례 없는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테러리스트 소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셧다운 행정명령, 백신 의무화 등등, 2020년과 2021년을 장식한 이런 뉴스 헤드라인들을 떠올려 보면, 최근 미국 사회에 불안감이 급등했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채프먼 대학교의 이번 조사 결과에서 정치성향에 따라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이 확인됐다. 예를 들면, 진보성향 응답자일수록 대통령 선거 결과를 더 걱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74.6%). 보수성향 응답자는 29.5퍼센트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매우 두려워”하지만, 공화당을 지지하는 응답자는 1/4만이 그런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극 진보”라고 응답하는 75.8퍼센트는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 소요사태에 대해 걱정한다고 밝혔지만, “극 보수”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43.2퍼센트만 소요사태에 대해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물론 정치적 좌파가 두려움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당파의 경계를 넘나든다. 왜냐면 모든 정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거기에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당을 초월하여 미국에서 (6년 연속으로) 가장 으뜸가는 두려움의 대상은 “부패한 공직자”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응답자(84.6%)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응답자(77.8%) 모두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다. 2위를 차지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부패한 공직자”에 대한 두려움의 지수가 무려 20점이나 높을 만큼, 이 두려움은 지배적인 두려움이다. “부패한 공직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일으키는 데에는 여러 (일부는 타당하고 일부는 비합리적인)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 큰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1세기 그리스도인의 믿음공포심을 조장하는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1세기로 돌아가 보자. 사도행전에는 적어도 13건의 정치적 부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보통 폭력이 개입되었고 심지어는 죽음이 수반된 그런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이 13건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두려움이나 절망, 정치적 편집증으로 반응한 사례는 정확히 제로다. 그리고 그 13건 가운데 1세기 그리스도인이 담대하게 대처했던 사례는 정확히 13건이다. 그들은 13건 모두에서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정치적 살해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명백한 정치적 부패 사건의 첫 번째 사례를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공중 앞에서 치유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입 밖에 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 입을 다물게 하겠다”며 살해 위협을 가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위협으로부터 겨우 풀려난 뒤에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그들이 당한 일을 낱낱이 일렀다. 예루살렘에서 교회 식구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공황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려워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는 어떻게 하는가? 기도한다. 그들은 소리 높여 하나님을 “데스포테스”(Despotes), “대주재”라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한다(행 4:24). 이 단어에는 절대적이고, 전권적이며,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무너뜨리려고 위협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적, 정치적 세력은 “대주재”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들의 기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라고 선언하며, 이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는 모두 무익하다는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한다(행 4:26).그 다음에 이 기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향한다. 예수를 처형하는 데 공모한 정치 세력(“군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28절) 그대로 했을 뿐이다. 누가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chier), 아무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boule), 미리 정하여 두시는(proorisen) 하나님의 주권. 부패한 정치 세력이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던 그 암울한 날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초대 교회의 대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던 바로 그 자리, 당신의 주권적 보좌에 앉아 계셨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이 진리를 부패한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하는 절체절명의 위협에 적용한다. 그렇게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그리고 그 교회는 자신들을 철저하게 박해하는 세력 앞에서도 급격하게 성장해 나갔다.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주재,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연히 생긴 우주에서 그저 우주적으로 소외된 존재라면? 정말 그렇다면, 오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온갖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속주의가 팽창하고 있는 시대에 부패한 지도자에 대한 두려움 또한 증가한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약해질수록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려움이 필연적인 심리적 결과가 아니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은 오히려 기회가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을 따르지 않고 1세기 교회의 저 굳건한 신학을 따라 구속의 은혜로 이 시대에 맞서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불안해하는 친구들과 가족들, 이웃들에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우주의 하나님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행 4:24) 하나님을,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가장 강력한 제국들과 나라들과 왕들을 왜소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있다. 2022년을 시작했다. 올해도 세상에는 온갖 무시무시한 헤드라인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다는 사실 속에서 살아가자. 이 불안한 시대 안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자. 원제: In 2022, Christians Can Be Counterculturally Fearles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두려움
대주재이신하나님
1세기믿음
부패관료
시대를거스름
주권적보좌
다시 나그네로
by 김형익
2022-01-15
오랜 세월 기독교가 주류가 된 시대, 소위 크리스텐덤이라고 불리는 세상을 살아온 기독교가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는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벧전 2:11-12). 1970년대 이후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 교회가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보여 준 모습을 돌아보자. 어느 새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가 싶더니 성시화운동의 기치를 내거는 정치권과 교계 인사들이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1970년대 이전의 한국 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를 많이 말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사회의 주류가 되어 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땅의 불신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가르침을 점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눈치를 보던 마이너리티 시절은 지나갔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장 시대를 뒤로하고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 거류민과 나그네로, 다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옛 시대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거나 현 시대를 한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선교적 소명을 감당한다는 점에서 볼 때, 과거 1970-80년대 보다 더 어려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구 기독교가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지나 탈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우리의 선교적 소명을 감당하는 데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들어선 이 세상은 우리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아닐까?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로서 나그네와 거류민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아닐까? 거류민과 나그네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정체성은 분명히 그리고 언제나 거류민과 나그네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밝혔다(벧전 1:1). “나그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이 표현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잠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을 염두에 둔 영적,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이너리티로 존재해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성경을 오독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직면하고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거류민과 나그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담지한 표현이다. 베드로전서의 일차 독자인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로서의 신자의 영적인 정체성을 오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사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거류민’(파로이코스)은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인데, ‘더부살이를 한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리스도인의 집은 하늘 본향에 있기에, 우리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거류민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파레피데모스)는 외국에 머무는 임시 거류자를 지칭한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세상 속의 신자를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관점은 아니었다.히브리서 기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여기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등을 가리킨다. “외국인”(크세노스)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다. 주인이 아닌 손님, 낯선 곳, 낯선 문화, 낯선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외국인이다. ‘나그네’(파레피네모스)는 사도 베드로 가 말한 나그네, 곧 임시 거류자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쓸 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헷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히 11:9) 이들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는 거주 방식이었다. 윌리암 레인(William Lane)은 히브리서 주석에서 “(장막에 거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의 영원한 본향,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드러내는 가시적 삶의 방식, 곧 장막에 거주한 삶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일종의 ‘증거’였다는 것이다. 나그네 됨은 신자들의 정체성이라면, 장막 생활은 그 정체성에 대한 증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복음 증거를 말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잃어버린 증거 방식이다. 사도 베드로나 히브리서 기자의 논지는 나그네의 정체성은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앞에 증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나그네의 삶의 현실을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초기 교회의 성도들과 달리,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에게는 직면하기 불편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당신과 나에게도 말이다. 긴장: 시민이면서 외국인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일은 무엇보다 불편한 삶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불편함을 전제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편안해지는 것과 나그네가 되는 것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제럴드 싯처는 ‘회복력 있는 신앙’에서 초기 교회 신자들의 삶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 땅이 이들의 조국이지만, 모든 조국이 이들에게는 외국 땅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세상은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우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선한 행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증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의 방식이 육체의 정욕(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면(엡 2:3),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신자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벧전 2:11). 악행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세상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도록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불편함을 신자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유수자로 하나님의 은혜 증언하기신자는 거류민과 나그네이자 동시에 모범 시민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미 탈기독교 시대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1989년에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을 공저하면서, 신자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나그네 된 거류민이라고 말했다. 월터 브루그만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에서 살아가던 유대인과 같이, 이 세상의 신자들은 “유수자”(exiles)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이 주제에 접근하고 신학을 하는 일에서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은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접근하기에 최적화된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적대적인 세상 앞에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신자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의 신학을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조국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 슬픈 우리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게 된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삶의 역사는 우리가 나그네의 신학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시대가 어렵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우리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이 세상 앞에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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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텐덤
장막에거하는삶
탈기독교시대
이중시민
우리 혀가 (그리고 손가락이) 불이 될 수 있다
by Jon Bloom
2022-01-12
바리새인과 벌인 매우 긴박한 토론에서 예수님은 말의 중요성과 관련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이 얼마나 불편한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말하는 (그리고 자판으로 치는!) 말은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 때가 되면 우리가 내뱉은 말, 심지어 별 생각 없이 나온 말까지도 다 증인이 되어서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 말이 드러내는 것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마 12:34),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다.예수님은 조금 전 마귀의 압제에서 한 사람을 구하셨다. 그리고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마 12:24).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고발 속에 담긴 노골적인 위선을 폭로하면서 가장 엄한 책망을 쏟아내셨고, 더불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의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경고하셨다(마 12:31-32). 그리고 예수님은 말이 드러내는 것과 관련해서 요점을 밝히셨다.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줌으로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악의 세력, 곧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악을 폭로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중하고 의도적으로 할 말을 선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근거 없는 비난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동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압제에서 해방하심으로 맺은 “좋은 열매”를 의도적으로 악이라고 불렀지만, 부정직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불신함으로 스스로가 맺은 “나쁜 열매”는 인식하지 못했다(마 12:33).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한 일에 너무 눈이 멀어 스스로가 처한 영적 위험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마귀라고 부르도록 만드는, 마귀의 영향력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은 단지 그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에서 우러나왔을 뿐이었다. 부주의한 말까지도아마도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행여나 바리새인에게 번개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몇 걸음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는 단지 바리새인만을 향한 게 아니라 모두를 다 포함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예수님을 고발했던 바리새인들의 말은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무익한 말(careless word, 부주의한 말)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 아주 신중하게 예수님을 비난할 말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신중하고 사려 깊은 말뿐 아니라 생각 없이 내뱉는 무익한 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도 알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은 문제를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만든다. “무익한”은 헬라어 ‘아르곤’(argon)을 잘 번역한 것이다. 무익한 말은 경솔하고, 나태하고, 또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말일 수도 있다. 인내심을 잃었을 때 내뱉는 말 또는 평소 자주 생각하지 않던 문제에 관해서 아는 척하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우리가 평소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 화를 내며 거칠고 모욕적인 어투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에게서는 아주 드물지만, 부주의한 말이 인내, 친절, 존경, 평화, 그리고 겸손의 말이 될 수도 있다.예수님의 요점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우리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공격하는 증인으로 소환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무익한 말조차도 다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익한 말이 주는 교훈은 우리의 영적 경계심이 무너질 때 그런 말이 나오기 쉽다는 것이다. 아픈 비유최근 미국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살펴보자. 돈 잘 버는 눈부신 경력을 자랑하던 존 그루던(Jon Gruden) 감독은 무익한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2021년 10월, 두 개의 유명 신문은 그루던이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Las Vegas Raiders)의 감독이 되기 전인 2010년과 2018년 사이에 쓴 수많은 이메일에 대한 폭로 기사를 게재했다. 그 메일에는 그루던이 분명히 (그러나 결국은 멍청하게도) 비공개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단어들이 들어 있었다. 한 뉴스 사이트가 요약한 바와 같이, 공개된 이메일에는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성차별적 모욕의 말과 더불어서 상체를 노출한 워싱턴 풋볼 팀 치어리더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특히 10월 11일은 그루던에게는 여론이라는 법정에 서는 심판의 날이 되었으며, 한 스포츠 기자가 말했듯, 그루던은 “바보스럽고 부주의한” 단어를 쓴 자기 자신에 의해 철저하게 비난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레이더스의 감독직을 사임했다.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잘 깨달을 수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3).미국의 법 제도에서 기소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될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는다. 예수님도 같은 경고를 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말하고 사적인 방에서 속삭인 모든 것, 우리가 내뱉은 어리석고 부주의한 모든 말들이 우리에 대한 저주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조치는 법정에 가기 전에(마 5:25) “우리의 고소자와 최대한 빨리 합의를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하자.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우리의 심판자가 의로우시기에,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혀와 손가락에 재갈를 물려라 그러나 회개의 모습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또한 회개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말, 특히 부주의한 말에 관한 한 회개는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특성상 그 재갈은 자판을 치는 손가락까지 포함한다. 나는 재갈 또는 고삐라는 은유를 혀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세 가지 유용한 비유를 사용한 사도 야고보에게서 가져왔다. (1) 말의 고삐, (2) 배의 키, (3) 불꽃(약 3:1-6). 이것들은 혀와 손가락처럼 큰 힘을 가진 작은 물체이다. 처음 두 가지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통제를 보여 준다. 작은 고삐는 강력한 말을 통제하고, 작은 키는 강력한 배를 조종한다. 그러나 세 번째는 통제 부족(부주의라고 하자)이 얼마나 큰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작은 불꽃 하나가 숲 전체를 태울 수 있다. 요점은 분명하다. 통제되는 말은 유용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나무”가 될 수 있고(잠 15:4), “듣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다(엡 4:29). 그러나 통제되지 않고 어리석은 말은 우정, 가족, 교회, 그리고 직업까지 불태울 수 있다(약 3:9-10). 문제는 우리가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말을 통제하려 어떤 고삐를 조이고 있는가이다. 24시간 규칙내가 사용하고 있는 개인적 고삐 하나를 공유하겠다. 바로 24시간 규칙이다. 내 안의 화, 좌절감, 방어 심리를 일으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대답하기 전에 나는 적어도 하루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즉각적인 답을 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응답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거의 항상 24시간이 지나면 열정적으로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보다 더 신중하고 사랑스러운 말로 응답할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나는 종종 처음보다 상대방의 관점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 규칙은 글로 생각을 표현할 때에도 매우 유용하지만,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이 고삐는 특히 남편과 아버지로서 사용될 때, 항상 더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고삐를 찾아야 하며, 그 일은 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하는 게 중요하다. 예수님을 위해 말(words)이라는 거친 말(horse)에 고삐를 씌우는 힘든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은 그런 노력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사랑(요 14:15)뿐 아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려는 열망(마 22:39)까지 함께 드러낸다. 그리고 혀와 손가락에 고삐를 물리지 않는 자들은 심판 날에 그들이 내뱉은 말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느냐 않느냐는 우리 마음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원제: Our Tongues (and Fingers) of Fire: What Words Reveal About U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말조심
부주의한말
무익한말
말의위험성
말의중요성
심판자
생명나무
재갈
은유
여성들의 죄 고백: 그 거짓과 진실
by Tori Campbell
2022-01-10
잠에서 깨어 일어나 앉았다. 어슴푸레한 휴대폰 빛이 얼굴을 감쌌다. 내용이 빈 채로 문자 앱이 열려 있다. 변명거리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난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아니야. 엄지손가락이 바빠졌다. “엉망이 돼 버렸어.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눌렀다.처음 죄를 고백하기 위해 친구에게 연락을 취했을 땐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위험한 행동 같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죄에 빠져든 나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현명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죄를 고백할 타이밍이었다.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교회 안에서 남자들에게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통해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이러한 책임을 서로 나눌 복된 기회가 자주 주어졌다.그러나 야고보서 5:16의 하나님의 이 명령은 남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적용해야 할 말씀이다.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 사이에서도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이 쉽지 않은 일에 적극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힘든 일을 실천하려 할 때마다 온갖 거짓과 의심이 슬그머니 찾아와서는 선한 의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을 실천하려는 여성들을 주저하게 하는 몇 가지 흔한 거짓말을 살펴보고, 더불어 이러한 여성들이 붙잡아야 할 진리들을 나누고자 한다.1.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일 뿐이야.’“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 1:9).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들을 때 배우게 되는 진리의 말씀 중 하나이다. 그렇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 오직 예수님만이 용서를 베푸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백해야 할까?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께 하는 고백과 사람에게 하는 고백은 목적이 다르다. 우리가 우리의 숨겨진 어두운 부분을 우리 자매들과 나눌 때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성에 가깝다. 우리 믿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는 지체다. 서로의 부끄러운 모습조차 은혜와 자비로 대할 때, 서로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는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변함없는 소망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확신을 줄 때, 그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데인 데서리지(Dane Deatherage)가 말한 대로, 죄 고백은 “하나님의 용서를 생생하게 경험할 기회”이다.2. ‘내 죄가 고백할 만큼 큰 건 아니잖아.’문화에 따라 특정한 죄에는 집착하고 다른 죄에는 비교적 너그러운 어떤 경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에서 여성이 음란물에 빠지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마음속에 시기심을 갖는 것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거나 별일 아닌 듯 넘긴다. 그러나 로마서 1:29은 시기심으로 얼룩진 삶은 다른 죄와 동일하게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죄라고 가르친다.모든 죄는 다 우리 마음이 부패했다는 신호이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 삶을 갉아 먹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정식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살피고 애초에 죄의 싹을 잘라낼 기회이다. 3. ‘죄를 고백하면 내 이미지가 안 좋아질 거야.’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취약한 상태로 내모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바로잡고,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해준다. 비록 직면하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자매의 애정 어린 책망은 은혜로운 것이며 심지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시 141:5). 그런데도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서로 죄를 고백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벽은 자신이 고백한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 것 같다. 자신의 비밀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십거리가 되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이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이러한 쓰디쓴 현실을 맛본 후라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싫을 수도 있다. 확실히 어떤 자매들은 이러한 일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대상을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에릭 레이먼드(Erick Raymond)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우리 삶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혹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한 모든 굴욕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다(시 7:8). 영혼을 잃어버릴 처지에 있으면서 좋은 이미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격려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성숙한 자매를 찾게 된다면 그녀는 성령께서 자신 안에서 열매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절한 신뢰 관계를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잠 11:13). 게다가 성숙한 그 자매는 우리만큼이나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죄의 고백을 듣는다고 그녀가 충격에 빠지거나 우리를 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다. 만약 그녀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녀가 우리와 그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것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혜롭고 성숙한 여인은 자신에게 죄를 고백하는 자매가 죄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도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우리의 시선이 예수 곧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을 향하도록 도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수치를 짊어지고 담당하신 분이시다. 죄 고백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된다. 죄 고백의 목적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정반대로 너무 과하게 우리 죄의 세세한 부분까지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간혹 자신의 죄를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듯하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혹시 이러한 일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면, 이는 ‘죄 고백’ 속에 담긴 핵심을 간과한 것이다. 우리의 죄를 말하고 나면 확실히 마음의 짐은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죄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죄 고백의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사실 야고보서 5:16의 “병이 낫기를 위하여”로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때때로 몸의 치유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관계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할 때가 더 많다. 야고보는 이러한 이중 의미를 담아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 죄가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 인정하고 용기를 내어 서로 마음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걸음을 방해하는 질병이 떠나가고, 우리의 유일한 치료자 되시는 주님의 길을 다시금 자유함 속에서 걸어가게 된다.원제: Women Need Accountability, Too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여성
죄고백
수치
회복
고백과용서
죄고백의용기
나의 슬픔 가운데 오신 하나님
by Jessica Gray Roberts
2022-01-06
나는 삶을 영적으로 결부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나 믿음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해야 할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의 세계에는 종교나 믿음 같은 범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최근에야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무신론이었다.하나님의 이름은 내게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내뱉던 하나의 이름,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패배할 때 외치는 하나의 이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 믿으며 살았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실제적인 것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일 때 남편 텔이 이라크에서 죽고 말았다. 당시 내 딸 에이바는 5개월이었고, 나는 이제 막 엄마가 된 때였다. 그 소식은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현관문 안쪽에 서 있던 군인들을 붙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굳기 시작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애원하는 내 목소리만 들려왔다.조문 편지와 시편그날 이후,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책을 급하게 넘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성경책이 어떻게 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받은 조문 편지마다 가득 적혀 있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성경책을 뒤적였다.그러다가 시편 139편에 가닿았다. 조문 편지에 들어 있던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이 말씀을 보는 즉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러한 것을 몰랐다. 나는 단지 그 말씀이 사랑하는 남편 텔에 대한 것이길 바랐다. 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다.고통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던 그때, 이 생소한 성경 구절이 무신론자이자 불신자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렇게 내 슬픔의 샘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었다.혹시 텔과 더 가까이 있게 해 줄 다른 지점은 없는지, 나는 날마다 시편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눈이 아파올 때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에 시편 40편과 18편, 30편, 27편 말씀에 사로잡혔다. 이 말씀은 비탄에 잠겨 울부짖는 내 현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만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편을 쓴 이들은 자신의 울부짖음을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물은 바람에 그냥 흩어져 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시련이 극심한 고통으로 치닫고 있을 때, 그들은 누군가에게 울부짖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았다.슬픔과 결합되어 있는 강렬한 감정들을 느끼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경말씀에서 찾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시편의 이 구절들에서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았다.이 하나님은 누구신가?당신을 나타내셨다시편 기자들이 절망 속에서 부르짖었던 그 크신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성경구절 속에서 텔을 찾던 나에게서 차츰 빠져 나오고,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그 지점과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를 만나야 할지를 정확하게 아신다. 내 고통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줄곧 나를 시편으로 이끄셨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지나쳐 버리거나 하나님에게서 나를 숨기지 못하게 하셨다. 절망에 빠져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고 죽고 싶은 마음뿐인 나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그러나 당시에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엡 2:1).나의 죄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예수님에 관해 들어본 것이 별로 없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더 없이 크신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롬 3:21; 8:32; 요 3:16).텔을 잃은 슬픔이 이전처럼 자주 나를 삼키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막 가족을 이루고서 함께 꾸었던 꿈이 산산조각 나버렸다는 절망감, 아무도 텔처럼 나를 사랑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 홀로된 두려움, 이런 고통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새로운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지만, 그런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새 생명그렇지만 주님은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내게 주신 믿음의 목표 곧 내 영혼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지 정확히 아셨다(벧전 1:9). 주님은 로도스라는 한 남자를 내 삶에 보내 주셨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텔의 부대 동료들과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로도스는 텔을 알고 있었고, 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그의 겸손함과 자상함에 나는 호감을 느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텔과 비슷했지만, 그에게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비추는 어떤 빛이 있었다. 나는 평소 내 성격과 달리 과감하게 그에게 다가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내게는 없는, 내가 원하는 무엇가가 있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로도스는 나의 우정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수많은 질문을 받아 주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씨름하는 동안, 그는 자상하게 곁을 지켜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내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 그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함께 했으며, 텔을 잃은 슬픔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내 딸 에이바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뻐했다. 에이바가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이런 그와 결혼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다.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시며 그 은혜로 우리를 두르고 계신다. 내 인생의 범주에 없었던 하나님은 스스로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내게 나타내 보이셨으며, 하나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분이심을 날마다 내게 보여 주신다. 내 관심 밖에 있던 하나님이 이제는 나의 전부이시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원제: I Found God in My Grief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슬픔
절망
새생명
시편묵상
무신론
아름다운 유산: 기도와 공공선
by 최창국
2022-01-05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에서 사회학과 역사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어떻게 불과 몇 세기 만에 예수 신앙이 로마제국 변방의 작은 공동체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는지 연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목숨까지 내놓은 채 소외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장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의학이 낙후하여 낙태가 불가능했던 고대 세계에서는 원치 않는 아기를 낳은 사람들은 아기를 성 밖에 내다 버렸다. 그러면 아기는 추운 날씨에 동사하거나 야생 동물의 먹잇감이 되어 죽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영아 살해가 합법인 동시에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영아 살해를 합당한 국가 시책으로 천거했다. 주전 450년에 작성된 가장 오래된 로마법으로 알려진 ‘12표법’은 아버지가 여아나 기형아, 허약한 남아를 유기하는 것을 허용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1). 그러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이 사람들이 그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대부분이 여자아이였다. 또 그렇게 성장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자식을 낳아 대대손손 기독교 신앙을 물려주었다. 스타크가 제시한 기독교의 또 다른 성장 동력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아 준 것이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어느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환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성을 떠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스타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지 않고 남아서 전염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많은 경우, 독감이나 다른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음식과 물, 목욕 같은 최소한의 돌봄만 받아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간호사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는 사이 병에 면역력이 생겼다. 스타크는 버려진 환자들이 회복되었을 때 목숨을 살려준 이들의 신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다시 전염병이 돌아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에도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빛나는 업적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로마인은 구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제는 신을 섬기는 일과 무관했던 것이다. 이방 신은 윤리적 요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윤리적 범죄를 벌하지도 않았다. 인간이 신의 심기를 건드릴 때는 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의례 기준을 어겼을 때이다”(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37-38).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특히 이교도가 기독교의 삶의 강령 중에 낯설게 여긴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는 가르침과 실천이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선행의 대상은 믿는 가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교도들에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Marcus Minucius Felix)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 중에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면서 그 원인을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 초기 기독교의 성장이 사회 안에서 “건전한 삶의 방식”의 결과였다는 기록은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초기 기독교는 교제와 나눔과 기도를 중요한 영적 실천으로 여겼다. 이런 실천들은 사회 안에서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기도하는 삶과 사회적 실천이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교도는 기도와 같은 의례와 사회적 실천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겼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생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가 사회적 삶의 실천으로 발전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준다. 기도와 공공선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은 기도의 실천을 “사물의 현상들 너머에서” 존재하는 것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존재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Parker 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19).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여정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로의 참여와 실천을 위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단지 간청의 차원을 넘어 실존적, 경험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도는 삶의 실천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기도와 함께 승화된 행동 또는 실천은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기도뿐만 아니라 행동도 성령과 더불어 공동 창조하는 행위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의 능력이 산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차이점이다. 그러나 행동은 움직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표현하고 발견하고 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움직임이다. 행동이란 우리가 다른 존재와 성령과 더불어 현실을 공동 창조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가진 혹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고 또 배우게 된다. 성례처럼 행동은 보이지 않는 영의 보이는 형태이고 내면의 힘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동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 모양새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을 받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다시 빚어 내기도 한다. 우리가 행동할 때 세계는 반응을 보이고, 우리와 세계는 함께 창조된다(파커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42-43).그리스도인은 기도가 행동 또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리를 넘어 행동 또한 성령과 소통하는 중요한 방식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충만한 삶으로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특정한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행동의 한 형태, 곧 표현과 발견과 재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진정한 기도는 세상 속에서 행동까지 그 지평을 확장시킨다. 특히 우리의 기도는 자비, 정의, 관대함 등과 같은 공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단지 자기욕구 실현이나 자기도취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의 생명력이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명력 있는 기도는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이 넘치고 성장하는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가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정의를 위한 투쟁과 신적인 정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381), 사회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비인간적인 불평등에 눈을 감은 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공공선을 추구한다. 개신교 전통에서 공공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장 칼뱅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영적 공공선’과 ‘사회적 공공선’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22-30). 막스 스텍하우스(Max Stackhouse)는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으로 공공선을 지향한다고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 공적으로 선한 것인지, 무엇이 궁극적으로 선하고, 그 선이 어떻게 이 땅의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는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그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점점 다가오고 있으므로, 공공선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나라를 희망하며 살도록 한다. 진정한 기도는 공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공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이웃, 자연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세계에서 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실제로 기도할 수 없다”(사이몬 찬, ‘영성신학’, 181). 존 애서턴(John Atherton)은 교회와 사회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신학은 생명을 밝히는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단순히 영적인 문제와 세상에 무관심한 하나님에 관한 좁은 이해로 전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신앙이 어떻게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John Atherton, Faith in the Nation, 136).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삶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개인의 욕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기도는 너무 협소한 기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도는 건강한 사회적 삶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공동선을 추구한다.
로마제국의기독교
초기기독교
기독교공공선
기독교와자선
기도
사회적실천
더욱 예수님을: 새해를 위한 ‘맥시멀리즘 기독교’
by David Mathis
2022-01-0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침체되어 있을 때도 약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손을 능히 잡아 주신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한 채 겨우 버티고 있는 우리 영혼을 온유와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어 버리지 않으신다. 꺼져가는 우리 영혼의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 그리고 은혜로우신 예수님은 우리가 ‘적당히’의 상태(그럭저럭 적당히 믿고, 적당히 소망하고, 적당히 사랑하기)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메말라 가는 우리 영혼의 저장고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빈약한 영성, 미니멀리즘 신앙에 안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요구하시고, 더 많이 약속하시고, 더 많이 힘주신다. 성숙하고 건강한 기독교는 맥시멀리즘을 추구한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사모한다. 덜 사모하지 않는다. 거듭한 사람들은 최소한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리길 원한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소망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한다.때가 이르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마음은 곤궁과 결핍에서 더욱, 더욱, 더욱 회복되어,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보고, 더욱 깊이 사랑하고, 더욱 가까이 따르게 된다.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밝아오는 지금, 우리는 최소한으로 성경 읽고, 최소한으로 기도하고, 최소한으로 교제하려고 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우리는 새해에 예수님을 더욱 원한다.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존귀맥시멀리즘의 열망이 빌립보서 1:22-26 만큼 빛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갇혀 있던 곳이 어디였든 바울은 해방의 날이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이 서신에 담아낸다. 곧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그러면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아니면 죽음을 통해 이 땅의 삶에서 풀려날 것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란 곧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는 죽는 것이 “훨씬 나았다”(빌 1:23). 그의 가장 큰 바람이요 그가 개인적으로 원한 것은 가능하다면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했다(빌 1:21).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원한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쳤다. 바울은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시려는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과 본을 따르는 것조차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종종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남겨 두었다. 바울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현재로서는 자신의 소명이라고 확신했다(빌 1:24-25). 그러면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의 새로운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새롭게 펼쳐질 그의 삶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밝아 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은 빌립보서 1:22-26에 나오는 바울의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기독교’(Maximalist Christianity) 비전을 연마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일 것이다.열매 맺는 수고먼저, 바울은 열매 맺기에 힘쓰기를 강조한다.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빌 1:22).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한껏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성령의 능력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명령으로 여겼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로 살아가는 삶이 그러해야 했지만, 이는 또한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 목사요 자신이 후견하는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그는 열매 맺는 사도들을 기대하면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온 교회가 열매 맺는 일꾼 되기를 바랐다. 열매 맺는 수고는 마법 같은 것은 아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그것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신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진정으로 신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또한 그 열매가 우리가 원할 때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수는 있다. 진정한 수고는 배움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다. 진정한 수고는 힘써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한다. 우리의 에너지와 노력을 투입한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게 한 걸음씩 밟아 나가고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과 행동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으로 우리의 수고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당신의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다른 사람들의 진보와 기쁨바울은 더 나아가 “이 유익한 수고”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고 25절에서 분명하게 말한다.자기를 중심에 두고 뻔뻔하게 자기를 홍보하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울의 열망 가운데 있는 타자성이다. 이것이 참으로 상쾌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의 열망, 특히 미국인의 열망이 우리 영혼에 슬며시 스며들어 겉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열망처럼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다르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을 위함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바울은 삶은,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증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바쳐진 삶이다. 바울은 그럭저럭 살지 않는다. 그는 영적으로 최소한의 것만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계획은 한두 가지의 말이나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가 도모하는 것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고후 9:8).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한 수많은 행동과 말로 넘쳐흐르기를 소망한다. 그를 움직이는 열망은 최선을 다하려는 열망이요 타인을 지향하는 열망이다. 최고의 자랑거리마지막으로, 우리는 26절에서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을 발견한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이 땅에서 지금은 계속 살아갈 것인데,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석방되면 빌립보를 다시 방문할 예정인데, 그의 계획은 명백히 맥시멀리즘을 지향한다. 그의 계획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셔서 그가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여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살아갈 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하려 함”이었다. 말 그대로 “풍성한 자랑”이다. 그가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럭저럭 자랑거리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자랑이 넘쳐나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자랑이 될 만큼만 최소한의 노력과 에너지만 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최대한의 수고와 에너지를 쏟겠다는 뜻이다. 최소한을 택하든, 최대한을 택하든, 우리는 새해에 선택한 만큼의 소망과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그만큼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영혼이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면, 낚싯줄을 던져 넣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도 박탈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랑거리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깎아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염력이 강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에 주목해 보자.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고, 우리의 남은 삶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바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이유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풍성한 이유가 된다.기쁨의 촉매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과 나의 기쁨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기쁨의 촉매가 되어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한다. 또한 그리하여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로써 더욱 풍성해진 우리 삶의 향유를 그리스도께 부어 드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새해는 우리가 바울처럼 마음을 다질 기회가 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늘 해 오던 그런 새해 결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풍성한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에게 베푸실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많다.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번성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 은혜 말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러한 맥시멀리즘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미니멀리즘의 눈으로 볼 때는 매력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원제: More of Jesus: ‘Maximalist Christianity’ for a New Y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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