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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정할 때 해야 할 질문 다섯 가지
by Ric Rodeheaver
2022-03-09
정착할 교회를 찾는 것은 굉장한 압박감이 따르는 일이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고, 중대한 결정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법이다.당신이 지금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다면, 신뢰할 수 있는 목사님께 추천을 구하거나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 같은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믿을 만한 교회 위치를 검색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교회 탐색을 시작할 때는 이후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을 고려해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선정하라. 그리고 적어도 한 번 이상 방문하도록 하라. 한 번의 좋지 않은 (말하자면, 예외적인) 경험으로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을 결정지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에 정한 교회들을 방문할 때,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담아 가도록 하라.1. 그 중심에 하나님 말씀이 있는 교회인가?이 질문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으레 그럴 것으로 여겨 깊이 살펴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교회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 교회가 표방하는 가치가 담긴 표어들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이 교회 저 교회가 다 비슷할 수 있어서 충분하지 않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설교 목록을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웹사이트에는 (또는 유튜브 채널에는) 지난 설교 영상이 게재되어 있다. 이를 보면, 그 교회의 주일 아침 설교가 어떨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 말씀이 중심에 있는지의 문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것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단순히 성경이 반영된 메시지를 전하는가? 아니면 성경을 전하는가?이를 분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6개월 전부터 3주 전까지의 설교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설교가 (보통 한 주제에 4∼6주를 할애하여) 다양한 주제(만족스러운 결혼생활, 관계, 양육, 자기 확신, 대중문화 트렌드 같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아니면 담백하게 요한복음, 사도 바울의 서신, 또는 산상수훈 같은 예수님의 설교를 전하고 있는가?물론 4∼6주 동안 다양한 주제 속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식사가 어떤 방법으로 제공되는지가 아니다. 성경이 또 다른 주요 메뉴의 반찬이나 전채 요리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메인 메뉴가 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2. 나이트클럽처럼 느껴지는가, 집처럼 느껴지는가? 주일 아침에 모인 성도들을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곧 공동체를 세우고자 애쓰는 것이 보이는가? 아니면 개개인의 영적 체험을 독려하는가?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 백성의 모임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교회는 단순히 같은 생각을 하는 개인들의 고객 경험을 위한 곳이 아니다.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첫째, 스스로 물어 보라. 이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이트클럽과 흡사한가, 아니면 당신의 거실같이 느껴지는가? 그곳의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모여 있는가? 가족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둘째, 모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잘 관찰하라. 기도, 설교의 적용 포인트, 성찬식이 행해지는 방식 등,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를 목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순전히 개인에 집중하게 하는가?또한 교회 조명에 대한 현재의 대중적인 추세를 생각해 보라. 교회의 앞쪽 무대만 밝게 하고 전체 천장은 불을 끈다. 설교 단상은 어두침침하다. 이런 연극 조명은 소수의 사람만을 비춤으로써 무대 위의 일 만큼이나 서로 아는 것이 중요한 회중을 어둠에 가두어 버린다. 이는 예배 참여보다 무대 위 퍼포먼스에 집중한다는 신호이다. 교회의 미묘한 스타일에도 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다.3. 교회 지도자들이 목자인가, 운영자인가?교회의 리더십 구성이 목자 그룹과 유사한가? 아니면 이사회 구조 같은가? 그 교회 성도들이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문 사역자들이 그 일을 하는가? 교회의 리더십이 신약성경의 구조를 따르는가? 즉, 다수의 사람이 동등하게 하나님 백성을 목양하는 권위와 책임을 나누는가? 아니면 CEO, 중간 관리 조직, 실무자가 있는 현대 비즈니스 리더십 구조와 유사한가? 교회가 조직 구성을 위해 그 구성원들을 준비시키고 세울 때는 만인제사장직을 인정하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거나 교회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에 특정 개인을 의지하게 되면 이는 오만이나 불안의 (또는 둘 다의) 불씨가 되며 성경적 교회론의 이해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4. 성도들이 책임감 있는 구성원인가, 단지 소비자인가?교회가 언약 개념 아래 성도들에게 희생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는가? 아니면 성도들이 (교회에서 주는 것에 만족하기를 바라면서) 자율적이고 책임감 없는 상태에 있도록 내버려 두는가?교회에 등록하는 것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기 위해 헬스클럽이나 대형마트의 회원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실현보다 훨씬 더 위대한 목적으로 부름 받은 무리에 자신도 그 하나로서 내어 드리는 것이다(벧전 2:9; 히 13:7, 17). 때때로 교회는 적실성이나 문화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단지 목회자의 태만 때문에 교회의 가장 강력한 증인, 곧 열심을 가지고 희생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복종할 이들을 잃고 만다.어느 교회의 교인이 되는 세부사항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이것이다: 이 교회는 교인들의 삶에 복음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의미를 제시해 주고, 설명해 주고, 권면하고, 적용하는 적절한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가?교회의 성도들이 의미 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알아보는 한 가지 실제적인 방법은 당신이 교회에 방문할 때 일찍 가서 늦게까지 남아 있어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보라. 가족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콘서트 팬 모임처럼 보이는가? 5.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 은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은 교회보다는 당신 자신과 더 관련된 질문이다. 어느 시점에는 당신도 교회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자신의 전부를 다해 진실하게 교회에 헌신하도록 하라. 그곳의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랑을 주고받으라. 서로 기도하고, 협력하며,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히 13:17). 교회 안에서와 교회를 통한 복음 사역에 참여하고, 헌신하고, 책임을 지라. 이런 일을 할 때 겸손과 섬김의 자세가 없이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소비자 중심 사회에서 겸손과 섬김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방식으로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완벽한 교회는 없다. 위의 사항을 다 충족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불편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 즉 은혜가 필요한 구속받은 죄인들이 가득한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원제: 5 Questions for Your Church Sea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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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백성의모임
교회리더십
목자리더십
소비자교회
교인의책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by Maria Baer
2022-03-01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맘먹으면서도 내 눈은 다시 거기서 트렌드를 훑는다. 페이스북에서도, 트위터에서도, 인스타그램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방역수칙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올린 트위트 글이 보인다. 조금 더 스크롤해 내려가니(왜 이걸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마스크를 쓰거나 백신을 맞은 사람은 “두려움에 빠진” 사람이며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글도 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두려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상대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실 누군가를 비판할 때 나는 그런 문제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철없는 어린아이일수록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빌 2:3)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에 맞추어서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나 교회나 가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역 수칙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행동들(예를 들어 마스크 착용 여부)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악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우리 태도의 근저에는 ‘상상력의 빈곤’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우리와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도 잘못된 행동을 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지 모른다. 또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가 처한 상황과 동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같은 상황 속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아주 악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상상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충분히 떠올려 짐작해 보지 않고 판단한다면 동일한 판단으로 우리 자신이 정죄를 당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이웃사랑의 저 보석과도 같은 대원칙, ‘의심스럽더라도 믿어 주는 자세’(the benefit of the doubt)를 되살릴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1.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구글에 어떤 키워드를 입력하면 세계의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정보가 나타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여름 MIT와 카네기멜론에서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 둘이서 “아틀라스”라는 새로운 검색엔진을 내놓았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르게 검색되는 구글 검색자료를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었다. 이런 현실은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틀라스 개발자들은 이런 문제를 구글의 “정보 장벽”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방역수칙에 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착용, 백신 접종, 치료법, 코로나의 기원 등에 대한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혹시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마다 여러 정보들에 대하여 신뢰하는 정도가 다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는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정보만을 그들에게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책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보 장벽의 시대, 가짜 뉴스의 시대, 알고리즘의 시대에 서로를 정죄하고 비난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판단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2.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동일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어떤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그 사람은 절망에 빠진 사람인가? 아니면 정부를 의지하는 사람인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어쩌면 그 사람은 면역 체계에 이상이 있어서 백신을 맞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백신을 맞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을 무릎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안전 대책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마스크 착용이 의무인 곳에 있다가 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만약 어떤 사람이 백신을 맞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어쩌면 그 사람이 코로나에 이미 걸렸던 사람일 수도 있다. 또는 그가 건강상 여러 이유로 코로나 백신의 위험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람의 의사가 그에게는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가 백신을 맞지 않기로 한 판단에 대한 수많은 정보에 대하여 사실 모두 알지 못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평가할 만한 지혜도 없다.) 그렇다면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다!3.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제자들은 곧바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님, 이것이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내가 만약 저 여인이었다면, 이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그 때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 여인이 하는 행동을 눈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그 여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여인은 가난한 이를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기에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그 여인은 당시의 최고의 유대 지도자들도 알지 못했던 이 거룩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여인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 마가복음 12장에는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가 나온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것을 아시고 또 다시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 12:43).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알고 있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까지 다 알고 계셨다. 이처럼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수 있다. 좋은 소식이 여기 있다: 비록 의심이 들더라도 일단 믿어 준다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이처럼 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삼가려는 겸손, 바로 이러한 급진적 행동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자, 그러므로 이제 앞으로 당신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과 마주치거든 한 번 더 그에 관해 상상해 보라.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들도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길 기도하자. 원제: Are You Unimagina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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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상상력의빈곤
판단보류
정치적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by 김형익
2022-02-25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주님께 질문을 던졌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이 질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무려 40일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관해서 특별 수업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해 왔다. 대선을 목전에 둔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만큼이나, 제자들을 포함한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도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유대의 정치 현실은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만큼 중요하고 뜨거운 이슈였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언제 메시야를 보내셔서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시고 무너진 하나님의 왕국을 재건하실 것인가?”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제자들이 유대 민족이 처한 현실 정치와 하나님 나라를 혼동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약속들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는 세속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신자인 우리가 대한민국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아닐까? 또 우리가 처한 정치 현실에서 메시아와 같은 인물을 기대하거나 특정 정치인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것,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세상 나라의 정치에서 기대하는 것은 필시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그릇된 행보일 것이다. 우리는 대선을 둘러싼 정치 이슈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할 만큼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간을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은 이런 정치 현실과 정치 이슈들에 대해 분명하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현실 정치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입장을 어느 정도로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성경의 기본 원리는 분명하다. 먼저,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신자는 자기가 속한 세속 국가의 정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열쇠를 주신 대상은 세속 국가가 아니라 교회다(마 16:19). 대한민국의 5년 임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대통령직에 앉게 될 어떤 사람도 메시아가 아니다. 둘째로,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현실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는 명분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자 또한 세속 국가에 속한 모범 시민으로서 살아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자로서, 그리고 세상의 모범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셋째, 하나님은 세속의 국가와 정부를 인정하셨다. 우리는 세속 국가 혹은 그 정부의 기원을 노아 언약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5-6). 하나님께서는 세속 국가-정부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정부의 권세자들을 가리켜(일반적인 로마 황제들을 생각할 때도 그렇지만,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당시 황제가 네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역자”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다(롬 13:4, 6). 성경이 말하는 세속 국가와 정부는 궁극적으로 악을 극복할 수는 없지만, 악을 예방하고 악행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악의 극복은 오직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며, 심판자로 다시 오셔서 종결하실 것이다. 국가와 정부는 악의 예방과 악행자 처벌이라는 최소한의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사역자와 일꾼이라 불릴 수 있다.넷째, 신자는 세속 국가의 시민으로서 정부와 통치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고 썼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 지도자를 향해서는 이 구절을 적용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이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죄성을 드러내곤 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기준으로 현실 정치를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당에 가입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근본적인 전제가 반기독교적이거나 반사회적, 반인륜적 가치를 표방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수여야 하는가? 아니면 진보일 수도 있는가? 성경은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가정과 결혼의 가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종과 같은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와 존중에 대해서는 진보적이다. 세속 국가에서 우리는 성경의 가치를 온전하게 표방하고 구현하는 정당을 찾을 수는 없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한 정당의 모든 정강, 모든 정책, 또는 특정 지도자의 모든 주장과 입장에 다 동의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상대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유효한 말씀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물론, 현실 정치를 대하는 근본 원리를 보여준다. 여기서 ‘의와 공도’라는 말이 중요하다. ‘의’는 구약성경에서 보통 공의(righteousness)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쩨다카’인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즉, 의(공의)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 언약의 내용은 율법 안에서 설명되는데, 주님은 그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2:30-31). 이 말씀에 의하면, 언약에 충실한 삶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을 이롭게 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공도’는 무엇인가? 보통 ‘정의’(justice)로 번역되곤 하는 ‘공도’는 히브리어 ‘미쉬파트’인데, 주로 ‘결정’ 또는 ‘판결’의 의미를 가지는 사법적 정의의 개념, 재판이나 판결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법적 정의가 비교적 바르게 행해지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사법적 맥락의 정의도 많아질 것이 자명하다. 그러니 의와 공도를 행하라는 부르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 그리고 시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정의를 드러내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의 기준을 보여준다.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의와 공도’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에서 인물, 정책, 정당을 분별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시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기적 손익이나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 의와 공도라는 엄밀한 기준에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투표라는 정치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와 공도를 행하라는 부르심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세상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대선을 앞둔 지금, 명목상의 교인이나 장로 정치인이 아니라 윌리엄 윌버포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와 공도를 행하는 그리스도인-정치인들이 많이 그립다. 그러나 기억하라. 복음이 정치 보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보다 크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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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고통스럽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
by Marshall Segal
2022-02-18
인내(patience)는 우리가 칭송하는 덕목, 심지어 갈망하는 덕목이다. 멀찍이 있을 때는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내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이것 때문에 우리 스케줄이, 우리 계획이, 우리 일상이 망가질 것 같으면―인내는 이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인내는 우리 삶이 혼란스럽고, 계획이 지연되고, 실망스러운 일이 생길 때 비로소 그 존재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인내는 치열한 삶의 전투 현장에서 길러진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내를 배우기 어렵다. 그리고 대부분 인내가 필요한 상황은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보통 편리하고,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좋아한다. 인내해야 하는 쪽을 우리가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가 필요한 상황을 선택하실 때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신다.조급함(Impatience)은 우리 삶을 위하여 정해 두신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우리 태도에서 생겨난다. 조급함은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쟁이다. 반면에, 인내는 전혀 다른 토양에서 자란다. 우리가 이해하고 주도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자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깊고 변함없는 신뢰에서 자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서 자란다. 다시 말하면, 가장 깊은 인내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겸손히 바랄 때 자란다. 이는 곧 진정한 인내는 단순히 불편하고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러한 인내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는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에서만 가능하다(갈 5:22-23).인내의 여러 면우리 삶에서 진정한 인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실제로 어떤 것일까? 성경 어디에서 진정한 인내의 색깔과 질감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아래의 말씀이 나를 겸손하게 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인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다.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게으른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이런저런 부류의 사람들―게으른 사람들, 마음이 약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명령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을 오래 참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힘이 없는 사람을 도우라힘이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이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움이 필요한 약한 사람들, 어린이나 노인, 병든 사람이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곧바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 경험해 봤겠지만, 사실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힘이 약한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오랜 기간의 도움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바울은 교회에게 힘이 약한 사람들을 훈계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도우라고 했다. 여기서 ‘돕는다’라는 말은 ‘붙잡다’ 또는 ‘헌신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약한 사람들을 도울 때에는 끈질기게 돕는 헌신이 필요하다. 수개월 또는 수년의 불편과 희생이 있을지라도 약한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6). 이 말씀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인내가 나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약할 때에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 하나님께서 약한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을 떠나면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는지 진실로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약함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와서 백 번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약한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을 기쁨으로 신뢰하며 순종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라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낙심하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 중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이 있었다(살전 4:13-5:11). 절망 때문에 영적인 힘과 의지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들 역시 슬픔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섬기는 일을 할 때 힘과 끈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때도 많다.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절망하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도 버거워할 때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할 각자의 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정서적 또한 영적 필요를 돌보는 것은 시간이 지속될수록 버겁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역은 비범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가는 사람들은 험난한 역경을 통과하면서 초월적 인내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돌보고 있는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 40:29-30)누구든지 이 놀라운 새 힘을 경험한 사람은 마음이 약해진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누군가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사실 살다 보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낙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서로의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고통을 견디고, 유혹을 이기며, 사랑으로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되어 사역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인내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게으른 사람을 훈계하라 게으른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살후 2:1-2; 3:6).게으른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일할 수 있고, 더 도울 수 있고, 더 분명히 기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누군가 그들을 대신하여 더 수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게으른 사람들 때문에 더 수고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이를 참아내기란 정말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게으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인내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게으른 사람들을 책망했다. 그들에게 경고했고, 질책했고, 그리고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때로는 그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고(살후 3:10-11), 그들을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바울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라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엄한 말을 하거나, 아픔이 될 수도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에는 인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이 때에도 인내하라고 가르쳤다. 왜 인내해야 하는가?우리가 게으른 사람들을 훈계할 때에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죄인이기에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게으름―또는 다른 사람들의 탐욕, 또는 다른 사람들의 정욕, 또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 또는 다른 사람들의 허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악해질 수도 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자비를 베푸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을 향하여 인내하지 않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들을 훈계하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딤전 1:15-16). 우리는 누군가를 책망할 때에도 반드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들과 동일한 죄인일 수 있다는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인내할 것인가?그렇다면 우리가 책망해야 할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는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가? 첫째, 좋은 책망은 그 자체로 인내의 증거이다. 사실 죄인들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길이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실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오래 참으면서 부드럽게 책망하고 꾸짖는 것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 책망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희망도 담겨 있다. 책망하며 인내하는 것은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성화는 매우 고통스럽고, 때로는 극도로 천천히 이루어진다. 우리는 게으른 사람이 순식간에 부지런해지고, 교만한 사람이 즉시 겸손해지며, 화를 잘 내는 사람이 곧바로 온유해지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즉각 순수해질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습관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들의 죄에 대해서 가볍게 지나쳐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찾아가고, 경고하고, 간청하고, 필요하다면 날카롭게 꾸짖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화는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씨앗을 심는다.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참아 주시는 하나님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을 책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는 반기겠지만, 오래 참으면서 책망해야 한다면 그때도 반길 수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죄인을, 아니 나와 같은 죄인을 오래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렇게 드러내셨다.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 34:6).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실 만한 모든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계시지만, 노하기를 더디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고 계신다. 베드로후서 3:9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풍성한 인내를 보여주신 후에 우리에게도 인내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인내가 쉽다는 말이 아니다. 인내는 분명히 어려운 것이다. 출퇴근길 교통정체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는 불안한 시기를 보낼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인내는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희생과 굴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인내는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하나님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오래 참으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인내의 고통 속에는 사실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목적이 있다. 바로 이 인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의 은혜와 능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원제: Patience Will Be Painful: How to Love the Hard-to-Lov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인내
그리스도인의덕목
오래참음
게으름
성령의열매
왜 내가 원하는 걸 저 사람이 다 가진 거야?
by Tilly Dillehay
2022-02-16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을 아버지의 스튜디오로 데리고 가셨다. 내슈빌에 뿌리를 내린 대부분의 음악가나 프로듀서가 그렇듯이 아버지도 데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꽤 괜찮은 지하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마이크와 의자가 있는 방음 시설이 잘 된 어두운 부스와 공명판이 달린 또 다른 방이 있었다, 그리고 두 방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창이 있었는데,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창 너머로 “엄지척” 사인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먼저 노래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작은 방에 서서 커다란 헤드폰을 통해 재생되는 트랙을 따라 불렀다. 그러나 몇 분 지나자 바로 흥미를 잃고 말았다. 헤드폰이 너무 꽉 죈다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냥 나가서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며 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동생 소피의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분명 그날은 아버지가 소피의 놀라운 목소리를 발견한 날이 되었다. 아버지와 소피는 뭘 한 걸까? 몇 주가 흐르고 부모님이 저녁 식사를 위해 친구들을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소피와 했던 세션을 언급했고, 손님들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들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왠지 끼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시작될 때 나는 복도에 서 있었고, 녹음한 소피의 목소리가 허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소피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강력했으며 또 절제되어 있었다. 곧 이어 나의 작은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그럴수록 문밖에서 나는 더 몸을 움츠렸다. 일 분 정도 지나자 아버지가 볼륨을 낮췄다. 며칠 전 나는 왜 스튜디오를 떠났던 걸까? 왜 그렇게 빨리 그만뒀지? 내가 스튜디오를 떠나는 바람에 소피가 빛나게 될 것을 왜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타인이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녹음실의 단열재 냄새는 앞으로 몇 년 안에 내게 매우 친숙해질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아이들 모두를 포함시키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교회 콘서트에서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딸들을 무대에 올렸다. 나중에 아버지는 연줄을 써서 우리 자매 모두가 다 어린이 프로젝트의 세션 가수로 일하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는 향후 자동차 구입이나 대학을 위한 저축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재즈 커버 곡 CD 녹음을 위한 제작비를 지원했으며 항상 내 목소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지지해 주었다. 비록 소피의 목소리에 비해 내 소리가 특징이 없고 파워에서도 뒤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소피가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에 비교될 수 있다면, 나와 비교될 가수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여동생들은 ‘더 와일링 제니’(The Wailin’ Jennys)에 비교되었고, 아버지는 그럭저럭 그 모두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빨리 피어났던 시기와 질투의 시절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수십 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나는 복도에 서 있는 다섯 살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질투 때문에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소피의 CD를 연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CD가 긁혔거나 잘못 놓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소피의 목소리가 그렇게 멋지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날 집에 손님이 없기를 바랐다. 사실 나는 소피의 목소리가 가진 영광이 사라지길 바랐다. 중요한 건 불평등과 영광을 보는 눈소피가 가진 영광스러운 목소리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자신의 영광을 새겼고, 인류에게는 두 가지의 몫이 있다.사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다”(시 8:5).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빌린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다. 하나님의 영광이 실재하기에, 사람―하나같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갖 형상들로 바꾸어 놓았다(롬 1:16)―은 다른 사람의 영광에 감동하고 반응한다. 그게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동료 피조물에게서 발견하는 그 영광이 아무리 일시적인 형태일지라고 해도 말이다.은사의 영광, 유능함의 영광, 지성의 영광, 아름다움의 영광, 예술적 재능의 영광, 부의 영광, 안정적인 관계의 영광, 이 모든 영광은 잠겨 있는 천국의 문에 살짝 손가락을 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감탄할 때도, 누릴 때도, 예배할 때도, 또는 (다섯 살짜리 틸리처럼) 공포와 증오를 느낄 때도, 우리는 반응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내가 느꼈던 그런 공포와 증오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다. 바로 질투이다. 가장 겸손한 즐거움다른 사람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세기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세기에 비례한다. 우리는 영광을 누리기 원할 뿐만 아니라, 영광에 둘러싸여 있고 싶어 하고, 또 그 영광을 일부라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 욕망은 선하고, 피조물로서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다. 천국의 영광들에 관해 토론하면서, C. S. 루이스는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고후 4:17)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항상 불편하다고 말했다. ‘천국의 영광들은 도대체 어떤 영광일까? 명성, 동료들 사이에서 내가 얻고자 이런 헛된 것 아닐까?’ 루이스는 궁금했다. 무언가가 자신 속에서 깨달아지지 않는 한, 영광을 원하면서 또 겸손해지길 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느꼈다.그간 내가 겸손이라고 착각했던 것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가장 겸손하고, 가장 어린아이답고 또한 피조물이 누릴 가장 커다란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거 같다. 아,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열등한 자만이 누리는 특정한 쾌락, 인간 앞에서 짐승이 느끼는 쾌락, 아버지 앞에서 아이가 누리는 쾌락, 스승 앞에 선 제자가 느끼는 기쁨, 그리고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쾌락이다(영광의 무게, 37).인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졌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다. 사람은 또한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버지께서 영광의 관을 그에게 씌워 주시고, 그에게서 영원히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이다 질투라는 작은 마음우리는 가장 중요한 분의 눈에 들고 싶어 하고, 가장 중요한 분의 칭찬을 듣고 싶어 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 25:21). 영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변화되고, 광채를 발하고, 부끄러움 없이 그분의 영광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에서 즐거움을 보도록 설계되었다.여기 다섯 살짜리 나 자신과의 연결점이 있다. 두 번째 가인처럼 나도 내 누이가 지상의 아버지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죄성에 가득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질투는 제로섬 세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의 칭찬을 듣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는 하나님의 우주가 본질적으로 희소성의 원칙에 따라 돌아간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질투하는 마음은 너무나 작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기쁨과 넘치는 사랑을 무한히 표현하시는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풍요는 모두에게 돌아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진짜로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의 일부(놀라운 재능, 아름다움, 기술, 직업, 친밀한 관계 등등)를 빌렸다면, 내게 돌아올 몫은 그만큼 적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질투를 없앨 것인가? 영광에 굶주린 것은 헤드폰을 끼고 있는 어린 소녀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틈만 나면 아름다움과 빛과 명성을 좇는다. 우리가 나온 쇼를 시청하고, 우리가 부른 노래를 듣고, 우리 웨딩사진을 작품으로 만들어 줄 사진작가를 고르고, 호수 산책로를 하이킹하고,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엮고, 내 근황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아이들에게 뽀뽀를 해주고,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 수제 맥줏집에 들른다. 우리는 다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바람의 기미를 살피고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영광의 순간을 기다린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속삭임을, 그것이 설사 틀리거나 희미할지라도, 쫓아가는 게 우리다. 이렇게 쫓아다니다가 결국 좋은 소식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사실이라기에는 너무나 좋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5)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요 1:9-13)우리는 집 밖을 서성이면서 우리가 아닌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영광을 받았다고 발끈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다 떨어져버리지나 않을지, 이삭이 에서를 바라보면서 “너의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복을 가로챘구나” 하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나 않을지 의심한다. 이런 경우에도 괜찮을 영광이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한다. 누군가는 부자인데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가시를, 다른 사람은 자녀가 있는데 나는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가시를,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군가는 걸작을 잘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그런 작품밖에 만들지 못하는 가시를, 어떤 영광이 뽑아버릴 수 있을까? 질투는 영광 안에서 사라진다그러나 (비록 불균등 자체를 없애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불균등의 가시를 뽑아낼 영광이 분명히 있다. 이 빛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이 권리는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는 영광이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아버지의 기쁨이 우리를 에워싸고 다른 모든 것은 없애버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인한 기쁨이다. 하나님의 영광 바깥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었기에 누리는 기쁨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언젠가는 우리를 에워싸고 변화시킬 것이다.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8).질투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마지막 날에, 질투는 영광 가운데 삼켜질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원제: Why Do They Get What I Want?: Envy and the Eyes That Matt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질투
C.S.루이스
하나님의영광
창조원리
겸손
형제사랑
무한한세계
영광의무게
우리는 왜 혼자 있지 못할까?
by Greg Morse
2022-02-14
불편한 기운이 내 마음을 스친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몇 년 동안 익숙했던 방인데 갑자기 낯설어진다. 정적, 고요함이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마치 벽에 걸려 있는 사슴머리 박제 같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지만, 미동도 없다.겨우 고요함에 익숙해졌는데, 사방에서 산만함이 밀려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기도를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 저의 삶 가운데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소서.” ‘그런데 발은 왜 이렇게 차지?’양말을 신고 돌아와서 다시 무릎을 꿇는다. ‘어디까지 했더라?’‘그렇지….’ “내 삶 가운데서 당신의 이름을 높이소서, 주님,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잠깐, 무슨 소리지? 애들인가? 지금 몇 시지? 그럴 리 없는데.’거실을 내려다보다가, 두서없이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거룩’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군. 아마존이 책 모서리에 이런 흠집을 내서 배송하다니 또 짜증이 올라오네. 그때 바로 반품했어야 했어. 택배, 택배라, 어제 올 게 있었는데? 뭐였더라.’고독으로부터 도망가다최근 들어 혼자 있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눈에 띄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독의 공간은 활동으로 가득 찬 삶에 희생되고 말았다. “묵상 시간”(quiet times)이 더 힘들어졌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이제 나의 기도하는 집에 앉아서 소란스럽게 비둘기와 가축을 흥정하고 있다. 더 나쁜 건, 내가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블레즈 파스칼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이 침묵을 싫어하는 이유를 매우 잘 설명한다. “산만함: 죽음과 비참과 무지를 고칠 수 없는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Christianity for Modern Pagans, 170).”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주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 자신에게서도 도망치는 것을 본다. 이 세상은 분주하게 소용돌이치고, 타락한 인류는 고요함 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불만스러운 생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쫓아 분주히 움직인다.이렇게, 인간은 끔찍한 자기인식, 곧 아담의 자손은 시한부 환자라는 반갑지 않은 진실을 회피하려고 소란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이 피조물로서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쓸모없는 가지처럼 곧 불에 던져져서 불타버릴 존재라는(요 15:6) 생각을 애써 피하려고 이 생에서 헛된 것들을 분주하게 쌓아올린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172). 침묵을 위협하는 것들하지만 물론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한낮에 우물에서 홀로 물을 긷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셨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현실을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또한 생명의 물이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정적 가운데서 떨기나무가 우리 영혼 앞에서 타올랐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깨어지고 치유되기 위해 신을 벗었다.그리고 이제 이것은 패턴이 되었다: 매일 묵상의 시간(quiet times)에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를 가진다. 일기장을 채운다. 말씀을 밑줄이 친다.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한다. 눈물을 흘린다.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하지만 천천히 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유익한 부분, 꼭 필요한 것, 조용한 공간을 잊게 된다. 저 전원의 경건―녹색의, 생명이 있는, 과묵한―이 금속과 기계와 소란의 도시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독거(獨居)하고자 하는 내 갈망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 친근한 세상내 방 바깥의 세상이 두 손을 벌리고 서서 나를 초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의 여정을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을 헤쳐 나가는 길로 묘사했다. 그렇다. 내 방 바깥의 세상도 ‘허영의 시장’이다.내가 “분주함”이라고 불렀던 것 가운데 어떤 것―경력 쌓기, 배우자 찾기, 행복 추구하기―을 예수님은 “세상의 걱정거리” “부의 속임수”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에 빠지는 것이라고 부르셨다. 이러한 것들이 나의 삶에서 말씀을 가로막으려고 위협할 때, 내 삶의 선물들마저도 가시가 되어 버린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막 4:18-19).극심한 박해의 손아귀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부드러운 손길도 그렇게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요한일서 2:15).이 말씀 앞에 마주서야 할 때도 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약 4:4).이 말씀에 나를 비추어 봐야 할 때도 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딤후 4:10).그리고 나는 항상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둘째, 얄팍해져 가는 영혼내가 세상을 갈망할 때, 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을 수 없을 때, 내 주머니 속의 세상이 성경의 세상보다 나를 더 끌어당길 때, 내 영혼은 “너무 많은 빵에 바른 버터처럼” 얄팍해지고 만다.나의 약해진 갈망은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내 전화기로 향하게 한다. 나는 요나를 따라 테크놀로지의 다시스로 간다. 그리고 여러 번 항해를 하다 보면 출항은 할수록 쉬워지고 예전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내 영혼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얻으려고 조바심을 낸다. 짭조름한 간식에 손이 가면 갈수록, 진수성찬을 음미하지 못하게 된다.셋째, 시들어 버린 믿음은혜의 수단에서 멀어지면 신앙이 상처를 입는다. 묵상의 방에 돌아오니, 이런 의심이 올라온다. “이게 전부 사실일까?” 이런 생각에 맞서, 나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처음의 불편함을 견뎌내야 한다.차가운 발을 따뜻하게 하면서, 나는 기도를 이어간다. “주님, 오늘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저에게 죄 지은 자를 제가 용서해 준 것 같이, 저의 산만하고, 무지하고, 세속적인 많은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듣고 있다고 확신해?’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시간마다, 날마다, 해마다 기도해 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전부 사실이 아니라면.’ “주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산만해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다만 이런 것들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그 묵상의 방에서, 나는 차가운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온다.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나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우리를 만나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꿈과 그림자에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차단하고 의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다시 돌아오겠는가?우리의 생명이신(골 3:4) 그분이 우리를 바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실까? 엘리야에게 그리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하신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 19:11-12).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음성, 세미한 침묵”(a voice, a thin silence)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천둥을, 찢어지는 바람을, 지진을, 활활 타오르는 불을 마다하시고, 조용한 방에서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기도의 골방에 홀로 앉아 세상과 세상의 산만함을 차단하고, 우리와 만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다시 앉을 수 있을까?원제: Desperate for Distraction: Why We’re Bad at Being Alon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명근
QT
묵상
파스칼
산만함
고독
침묵
바쁘고시끄러운세상
세미한음성
골방
잡념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들
by Marshall Segal
2022-02-04
이상해 보이지만 우리는 사랑이 넘쳐나면서 동시에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랑이란 단어는 눈에 확 띄는 노란색 테이프처럼 우리 주변에 온통 도배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는 한때 우리가 가졌던 사랑에 관한 정의나 생명력을 없앤 커다란 베이지색의 벽을 만들어 놓고 누구나 원하는 대로 그것을 꾸밀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제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물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네 글자(LOVE) 단어가 너무 많이 사용되고 남용된다고 해서 사랑의 원래 의미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부터 우편함을 “나무”라고 부를 수 있다. 심지어 이웃들에게도 그렇게 하자고 설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뿌리, 수피, 가지, 그리고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붉은 색으로 물들다가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이루어져 있는 진짜 나무를 없애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의를 흐릿하게 처리해 버릴 때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누가 사랑할 수 있는가?사랑에는 정의(definition)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정체성도, 성격도, 이름도 있다: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4:7-8)하나님, 참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이 하나님, 오직 이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는 이러한 성경말씀들에 기대어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넘쳐나고 퍼져나가는, 그래서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게 되는 기쁨”이라고 정의한다(The Dangerous Duty of Delight, 44). 이게 사실이라면, 수많은 아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거나 베풀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남들 얘기 말고 우리 얘기를 해 보자.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우리조차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씨름해 보지 않고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진짜 사랑을 추구하지 못할 때가 있다.사랑이 아닌 것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마도 지금까지 기록된 사랑에 관한 문장 중 가장 친숙하고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남겼다. 이 장을 한껏 들떠 있는 신랑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신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바울은 서로를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는 평범한,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우리는 바울이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또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바울은 또한 우리가 사랑을 추구할 때는 사랑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도 세심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 예를 들면 이것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고전 13:4). 사랑은 오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으며, 짜증이나 화를 내지도 않는다, 사랑은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놀라운 사랑의 본보기를 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과 ‘사랑이 아닌데 흔히들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래의 것들을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된다고 하는지,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전 13:1-3)봉사는 사랑이 아니다 네 가지 경고 중 첫째는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하는 경고다. 우리의 은사, 심지어 우리의 영적 은사도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돈 카슨은 “바울이 그토록 중요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겼던 다양한 영적 은사는 이교도들도 모두 모방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랑이 갖추어야 할 본질이 될 수 없다”(Showing the Spirit, 84).바울은 어떤 종류의 은사를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바울은 앞 장에서 지혜, 지식, 치유, 기적, 예언, 영 분별, 방언을 은사의 예로 든다. 그리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은사를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심지어 촉구했다. 그렇지만, 심오한 영적 통찰력과 이런 통찰력을 표현하는 비범한 능력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사랑을 결여했던 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과 은사를 받은 자신들을 다른 성도들이 필요로 하고 찾는다는 사실을 매우 좋아했을 것이며,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필시 자신들이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은사를 추구하며, 또 (교회나 지역사회나 직장에서) 받은 능력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랑 없이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필요한 사람, 생산적인 사람,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에 더 크게 관심을 둔다. 우리가 이렇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봉사와 차이가 있을 때 가장 잘 깨닫게 된다. 지식은 사랑이 아니다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추구했고, 그들의 지식이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을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 부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쉽사리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고전 8:1). 사탄이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없도록 가로막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식으로, 곧 우리의 교만을 부추기고 우리의 사랑의 마음을 텅텅 비게 만드는 그런 지식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본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교만한 지식과 좋은 지식을 구별할 수 있을까?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8:1-2). 교만에 굴복한 지식은 사랑이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거룩한 지식은, 그 지식이 커질 때 겸손도 함께 커진다. 물이 새는 배에 실려 있는 황금은 배를 가라앉히지만, 튼튼한 배에 실려 있는 황금은 그 무게를 더할수록, 폭풍우 속에서도, 그 배를 견고하고 안정되게 한다.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또 자신에게 있는 어떤 지식이 자신에게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더욱더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사용한다. 그들은 지식을 사용하여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바로잡고, 회복하고, 사랑한다.구제는 사랑이 아니다“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 13:3). 얼핏 생각하면, 이런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이 정말로 사랑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을까?바울은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급진적 희생을 치르기 때문이며, “하나님 안에서 넘쳐나고 퍼져나가는, 그래서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게 되는 기쁨” 때문은 대개 아니다. 사실, 그 많은 이유는 하나님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어떤 행동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슬프게도, 교회에서조차 구제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우리의 이유가 하나님과는 거의 관련이 없을 때가 있다. 우리는 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더 많은 힘이나 영향력을 바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싶어 한다. 우리는 명분을 가지고 대중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경고하다. “사람들이 단지 자기애 때문에 큰일을 하거나 큰일을 감당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에 불과할 뿐이며, 이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다”(Charity and Its Fruits, 87). 우리에게 부여된 동기의 근원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쁨에서 벗어날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굶주리고 시들 것이다. 우리는 주고 또 주지만, 영원한 열매나 의미도 얻지 못할 것이다. 땀과 피,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더라도, 결코 우리의 행함으로 사랑의 결핍을 채울 수는 없다. 믿음은 사랑이 아니다가장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추구로 사랑을 대신하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사랑하죠, 나의 믿음을 보세요. 이들에게 바울은 “여러분이 하는 사랑을 통해 여러분이 진정으로 무엇을 믿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약 2:14-17)사랑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는 결코 없으나, 사랑을 통해 역사하지 않는 믿음(갈 5:6)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산을 바다에 던질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사랑의 언덕을 오르려 하지 않는다.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것을 기대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에 속한 사람들, 심지어 일부 이교도들까지도 신으로부터 큰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아는 사람들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정한 믿음은 산을 옮기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이 하나님을 더 많이 배우고 즐거워할수록 그 사랑은 넘쳐흘러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게 된다.바울이 네 번이나 “네가…사랑이 없으면”이 아니라 “내가…사랑이 없으면”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라. 격해지고 분열된 교회를 꾸짖으면서도 바울은 그들 안에서 보게 되기를 기대하는 그러 겸손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사도에게도 사랑의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똑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지식, 우리의 봉사, 우리의 구제, 우리의 믿음이라는 베일 뒤에서 차갑게 식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는가?더 큰 특권은 없다오늘날 “사랑”이 온갖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의 경험은 가치를 셈할 수 없는 보배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알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도 증명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 가운데에서 진정한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사랑에서 기적을 포착한다.믿음과 사랑의 은사 안에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영혼의 기질을 다루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받는 가장 큰 축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위대한 타고난 능력보다도, 어떤 후천적인 재능보다도, 어떤 성취보다도 크다. 어떤 학식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가치나 명예보다도 더 크며, 왕이나 황제가 되는 것보다 더한 큰 특권이다(Charity and its Fruits, 74).하나님께서 권능을 베푸신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품으셨던 모든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갈라진 틈과 구석진 곳, 우리의 가족과 우정, 교회와 이웃에 밀어 넣으신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알고, 구제하고, 또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고 우리는 더 하나님을 닮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세상에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원제: What Love Is Not: Four Ways We Avoid the Cost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장명근
사랑
지식
교만
은사
믿음
구제
사랑의특권
그리스도인도 마귀에 사로잡힐 수 있는가?
by 최창국
2022-02-02
교회 안에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매우 빈번하게 혼동하는 문제가 영적 문제와 정신적 문제의 혼동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큰 악을 저지른 대표적 사건인 마녀사냥도 인간의 정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중세 마녀사냥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시대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었다. 중세 교회는 그들의 정신적 아픔과 상처를 치료하고 돌봐주기보다는 그들을 영적으로 학대하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영적 학대와 폭력은 그 양상과 방법을 달리하여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정신 세계, 특히 그 무의식 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영혼을 잘못 인도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례가 지금도 드물지 않다. 어느 여성 성도에게 있었던 일이다. 이 여성은 중고등학교 교사로서 일하다가 모 선교단체에서 은혜를 받은 후 교사를 그만두고, 그 선교단체에서 헌신하기 위해 훈련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 여성은 밤이 깊어지면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마치 무엇에 사로잡힌 듯이 소리를 지르고 괴이한 행동을 하며 괴로워했다. 이 선교단체 지도자들은 이 여성이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이 여성이 퇴직에 따른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이런 행동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판단했다. 선교단체에서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판단을 받은 이 여성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돌봄 공동체에 보내졌다. 이 공동체에 와서도 이 여성은 같은 행동을 보였지만, 이 공동체의 지도자는 다르게 대처했다. 이 성도가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단정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그러자 이 여성은 심한 정신 불안 상태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했고 건강한 가정도 이루었다. 우리는 이 성도의 사례에서 많은 도전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영혼을 돌보는 사역자들은 영혼을 건강하게 보살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판단을 할 경우에는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 더구나 정신 현상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영적인 이름으로 선하게 포장하기도 한다. 영적 지도자는 아픔과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는 영혼이 내뱉는 언어와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바르게 해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 분별의 중요성영적 지도자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정신질환과 귀신들림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정신질환을 귀신들림으로 잘못 이해하고 규정할 때 당사자에게 매우 큰 상처를 줄 수 있고, 정신질환의 현상을 사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가 잘못된 영적 진단을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많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치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뿐 아니라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영적 지도자가 범하기 쉬운 실수와 그 실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정신병원에서 외래 환자로 정신분열 증세를 치료받으면서 교회 공동체의 심방과 기도, 사랑어린 도움까지 받으면서 점차 호전되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 환자는 새로 부임한 교회 목회자에게 가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목회자는 그 환자의 이야기를 15분 정도 듣고 나서는 그가 귀신들렸다고 단언하고 “귀신 쫓기”를 시작했다. 그 결과 그 환자는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그 목회자의 행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독단이었다. 그는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편견들을 근거로 상담을 하다가 우연히 자신의 전제를 뒷받침하는 어떤 상황을 발견하고는 무책임한 판단과 행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환자의 몫이었다. 또한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다는 확실한 진단을 받은 사람이 귀신 들렸다는 판단을 받고 교회에서 “귀신 쫓기” 의식을 행한 직후에 집에 돌아가 자기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 끔직한 사건도 있었다(Duncan Buchanan, The Counselling of Jesus, 105-106). 우리는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영적 지도자가 정신질환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사람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여기고 잘못 대할 때는 그 환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도 이중, 삼중으로 고통과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는 영적 지도자는 함부로 추정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함부로 상담을 해서도 안 된다. 설사 본인에게 상담을 요청하더라도, 그를 전문가에게 보내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도 목양의 은사만큼이나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사다. 성경은 악한 영의 존재와 영향력을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신질환자가 밖으로 드러내는 언행은 악한 영의 역사와 유사한 면이 많다, 그래서 그 현상만으로는 자칫 둘을 혼동하기 쉽다. 따라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귀신들림과 같은 악한 영의 현상과 정신분열증 같은 의학적 현상의 차이점들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을 정도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내용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정신질환과 귀신들림의 차이점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분별해 볼 수 있다. 정신분열증 귀신들림 말이 조리가 없고 횡설수설한다 의식이 뚜렷하고 합리적이다 눈에 초점이 없다 눈이 사악한 빛을 발한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예수님에 대해 특별한 거부 반응이 없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 반응을 보인다 초능력이 없다 투시 등의 능력이 있다 목소리에 변화가 없다 목소리에 변화가 있고, 이상한 방언을 한다 관계에 의기소침하다 관계성을 추구한다 장기간의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가 갑자기 일어날 수 있다 심리치료도 효과가 있다 영적치료만이 효과가 있다 정신분열증과 귀신들림 모두 괴상한 행동이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다. 하지만 귀신들림의 경우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귀들은 매우 합리적이다. 성경에 언급된 마귀들을 보라.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과 원치 않는 곳을 진술하였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말과 논리가 일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의 영과 악한 영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악한 영보다 강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악한 영의 권세는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악한 영은 그 올무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딤후 2:26). 하지만 악한 영은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사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영을 이길 수 있다(롬 12:21). 성경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악한 영에게 유혹을 받고 어려움은 당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로잡히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영의 권세로부터 구출되어 빛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골 1:13).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육체의 부활로 인하여 악한 영, 사탄의 권세는 제한되고 억제된다고 말한다(살후 2:2 이하). 사탄은 신자들에게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히 2:14).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만질 수도 없다(요일 5:18). 사탄은 그리스도인의 증거에 패한다(계 12:1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악한 영에게 고난은 당할 수 있지만 사로잡힐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제이 아담스(Jay Adams)는 The Christian Counselor’s Manual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귀신에 사로잡히거나 놀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더러운 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가복음 3:2-30에 언급된 두 가지의 완전한 대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을 마귀에게 돌리는 태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참람함이라고 경고하신다(막 3:30).” 질병의 유형 및 치유 방법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S. MacNutt)는 치유에 대한 연구에서 네 가지 기본적 질병에 대해서 설명했다(프란시스 맥너트, ‘치유의 목회’, 20-27). 개인적 죄 때문에 생기는 영의 질병, 과거의 정서적 상처와 손상 때문에 생기는 정서적 질병, 질환이나 사건 때문에 생기는 육체적 질병, 그리고 앞의 세 가지 질병 때문에 생기는 악마적 압박감이 그 넷이다. 맥너트는 각 유형의 질병에 상응하는 기도 방법도 세분하여 제시했다. 회개를 위한 기도, 내면세계의 치유를 위한 기도, 신체적 치유를 위한 기도, 구원을 위한 기도가 그것이다. 맥너트에 의하면, 영과 관련된 질병은 종종 정서적 질병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육체적 질병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 질병의 원인은 개인적 죄이고, 그 효과적 기도는 회개다. 기도하면서 개인의 죄를 인정하고, 죄를 실토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할 때 더 효과적이다. 정서와 관련된 질병은 종종 영적 질병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육체적 질병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 질병의 원인은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 효과적 기도는 내면세계의 치유를 위한 기도다. 정서적 질병에는 상담과 기도가 병행될 때 더 효과적이다. 육체와 관련된 질병은 종종 정서적 질병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영적 무력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 질병의 원인은 질병과 사고와 심리적 스트레스다. 이 질병에 유익한 기도는 육체적 치유를 위한 믿음의 기도다. 이 질병은 의학적 돌봄과 규칙적 식사와 알맞은 운동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황에 따라 악한 영이 위의 질병 또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악한 영에 의한 질병은 악한 영을 축출하는 기도만이 효과적이다. 악한 영에 의한 질병에는 인간적인 처방은 효과가 없다.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의 논리보다는 왜곡된 영 또는 마귀의 논리에 빠져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죄와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았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유대 사회에는 가난하게 사는 것도 병에 걸리는 것도 모두 죄 때문이라는 잘못된 영적 공식이 만연했다. 나아가 유대 사회에는 어떤 잘못된 일이 일어나면 불순종과 거짓의 아비인 악한 영 때문이라는 잘못된 영적 공식에 노출되어 있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의 논리보다는 잘못된 영의 논리에 노출되기 쉽다. 그리스도인의 영의 논리는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의 논리는 사탄은 그리스도인을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는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가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성도를 공격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귀신들림
정신분열증
정신질환
영의질병
정서적질병
육체적질병
악마적질병
이웃을 깎아내리려면, 이렇게 하라
by Trevin Wax
2022-02-01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내가 읽던 NIV 어드벤처 바이블(NIV Adventure Bible)에는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목록이 도표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도표에는 각 왕의 재위 기간과 행적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도표 오른 쪽 칸에는 “선한 왕” “악한 왕” “대체로 선한 왕” “대체로 악한 왕”이라는 평가가 매겨져 있었다. 예를 들어, 아사 왕이 “대체로 선한 왕” 범주에 들었던 것 같다. 아사 왕이 왜 “대체로 선한 왕”이었는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나는 성경을 폈고, 그가 어떻게 말년에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했는지 알게 되었다.안타깝게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4학년 수준의 범주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십자군의 열정으로 의를 내세우며 그렇게 할 때도 있다. 탈기독교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이다 보니, 기독교 인간관, 곧 인간성의 복합성을 고려하고, 심지어는 그런 복합성을 기대하기까지 하는 인간 이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인간 이해 대신에, 우리는 성급하게 사람을 “악한 사람” 또는 “선한 사람”이라는 범주로 나누고, 또 이 범주에 따라 사람을 대한다.그 결과는 어떤가? 교회에서조차도(우리도 알 때가 됐다), 같은 사람 안에 있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분별하거나, 어떤 주의주장 안에 옳은 면도 있고 그른 면도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관심과 배려, 다름에 대한 넉넉한 자세가 없다면, 우리 이웃을, 과거의 이웃이든 현재의 이웃이든, 경직된 범주 안에 넣어 일차원적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이는 곧 기독교 인간학을 포기하겠다는 자세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1. 사람이나 일을 “흑 아니면 백”으로 가른다.모든 사회는 기념비를 세우거나 건물에 붙일 이름을 정하면서 어떤 덕목을 기릴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내가 루마니아에 살 때 거리의 명칭이 바뀌는 것을 종종 보았다. 과거에 특정 개인에게 부여했던 명예가 지금도 적절한지 재평가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안타깝게도 최근 이루어진 역사적 인물에 대한 많은 논의가 사람을 ‘흑 아니면 백’의 양극단으로 나누는 함정에 빠져 버렸다. 런던에 있는 윈스턴 처칠의 동상이 갑자기 위협을 받고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서구 문명을 나치즘의 위협에서 구해 낸 처칠의 용기는 무시하고, 인종에 대한 그의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이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또한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그가 보여 준 감수성보다는 연방제에 대한 헌신이 앞선 사람이었으며, 결코 흑인 평등의 투사는 아니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비슷한 성급함은 종교적인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일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은 최근 신학을 따르지 않거나 정치적 입장이 자신과 맞지 않는 목회자나 신학자에게서 배우기를 거부한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얼마나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신학적인 도움을 주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반대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존경받는 성경적인 설교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거에 인종정의를 주창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서적을 무시해 버리거나 그가 강연하는 콘퍼런스에 대한 불참운동을 벌인다.신학교 시절 한 교수님이 우리와 다른 진영에 있는 신학자의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신 적이 있다. 그때 한 학생이 그 신학자는 “악한” 범주에 있는 신학자라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했다. “나도 자네가 말한 대로 그 신학자가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네. 그리고 그의 견해 일부는 문제가 있지.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 그의 견해는 너무나 유익해서 그의 글을 읽지 않는다면 자네는 빈곤해질 것이네.”이웃을 깎아내림으로써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지 말도록 하자. 성급하게 ‘흑 아니면 백’으로 나누는 것은 분별이 아니라 적대이다. 사실 이것은 거짓에서 참을, 악한 것에서 선을 분별하지 못하게 막는, 의로운 열심을 가장한 매우 끔찍한 자세이다. 어떤 영역에서 누군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폄하할 때, 당신은 이웃을 깎아내리고 당신 자신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든다.2. 사람과 동기를 동일시한다.이웃을 일차원적으로 깎아내리는 두 번째 간단한 방법은, 사람의 선을 그들의 성품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이 논의를 위해 잠시 사람을 간단하게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나누어 사고실험을 해보자.이렇게 생각해 보라: 선한 사람도 악한 동기에 이끌릴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선한 동기에 이끌릴 수 있다.온갖 덕을 베풀며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일에 전혀 현혹되지 않을까?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거의 보이지 않는 기회주의자는 선한 일에 전혀 앞장설 수 없는 것일까?우리 역사에는 선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일에 연루되어 유익보다는 해를 끼친 사례로 가득하다. 반대로 사사로운 이득이나 자신의 이익과 관련하여 (또는 상응하는 이익은 없을지라도 단지 신념 때문에) 그 내면은 죄로 어두울지라도 결국 의로운 동기에 기울어지는 사람도 찾아볼 수 있다.로버트 카로(Robert Caro)의 대작, 린던 존슨 대통령(Lyndon B. Johnson) 전기를 보고 나서 “이 사람은 대단한 확신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군”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치인으로서 의심쩍은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미국인을 위한 시민권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남녀를 불문하고 훌륭한 성품과 위대한 신념을 보여 주고,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반대 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오류를 키우고 불의에 가담한 경우도 있다.누군가가 혹 우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연루되었거나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 신학을 지지하더라도 그가 모범적인 미덕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과거 영웅들을 이상적으로만 보는 것을 피해야 하는 이유이다. 제아무리 진리의 진보를 이루는 데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오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3. 선행을 선과, 악행을 악과 동일시한다. 이웃을 일차원적으로 깎아내리는 간단한 방법은 당신 스스로가 전지전능한 사람인 척하며 다른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관은 우리가 얼마나 표면 아래는 보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되새겨 준다. 소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매춘부 팡틴의 행동을 피상적으로 볼 때는 “이 여자는 밤의 여인이야. 나쁜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는, 한 젊은 여인의 순진함, 그녀가 겪는 부당함, 소리 없는 절망(그녀는 자신의 딸을 돌보고자 하는 선한 충동 때문에 어둠 속으로 내몰렸다)을 볼 수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드미트리가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매우 형편없이 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헌신한다. 그녀의 행동을 보며 “자기희생의 표본이군”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동생 이반이 그녀를 꿰뚫어 보고 폭로한 바에 의하면, 그녀가 순교자적 희생양 역할을 자처한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드미트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참을성 있고 덕망 있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 것이다.기독교의 인간관은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다. 그저 사람의 행동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행동마저도 사람의 마음을 다 담아 내지 못한다. 일반은총이 있기에,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의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마 7:11-12). 반대로 죄의 편만성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가 고백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 때도 있다.사랑할 것인가 깎아내릴 것인가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의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정작 우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당신 자신을 한 번 보라. 모순투성이인 데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잘못을 저지르며, 흠이 있고 자주 실패한다. 그렇지만 온갖 복합적인 상황에 둘러싸인 당신을 누군가가 단순히 “선한 사람” 또는 “악한 사람”의 범주에 넣고 판단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니 당신이 존경하는 영웅이든 당신의 논쟁 상대이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당신이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당신의 이웃을 깎아내리지 말라. 원제: 3 Simple Ways to Flatten Your Neighb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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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버지를 용서해 드리십시오
by Marvin Olasky
2022-01-31
부모와 긴장 관계에 있거나 아예 그 관계가 끊어진 경우, 부모의 죄와 결점을 당신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심지어 돌아가신 경우라 해도)? 그 모든 문제를 은혜의 렌즈를 통해 보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나는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와 아버지(1984년에 돌아가셨다) 사이를 진술하자면 이렇다. 우리 둘 사이는 경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이해와 자비와 용서를 향한 느린 여정을 걸어 왔다. 내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함으로 앞의 두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내 이야기는, 다들 그렇듯이, 나만의 이야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신 길을 바라보면, 아마도 당신 앞에 놓인 길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용서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나쁜 경험에서 얻은 유익을 볼 수 있을 때 용서는 더 쉬워진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한 방식은 신문에서나 읽는 끔찍한 방식은 아니었기에 (물론 신문보다 더 심한 학대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결점을 통해 실제로 세 가지 면에서 내 삶이 더 쉬운 길로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나는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었다. 나쁨에서 시작해 선함으로아버지를 끊임없이 헐뜯으며 아버지를 게으른 패배자라고 욕을 해댄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성공했다고 느끼기가 더 쉬웠다. 어머니의 그 비난은 정당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40년 동안 꾸준히 일했고,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상대적으로 성취도가 낮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경조차 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엊그제, 반세기 전에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러브 스토리’를 스트리밍으로 다시 보았다. 하버드 대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성공한 대학생 운동선수는 그의 아버지와 극도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다. 그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엘리트 변호사인데다가 1928년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자기 아버지를 ‘선생님’(Sir)이라고 부르는 이 아들은 도무지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 같아 괴로워한다. 이 아들과 비교할 때 나는 조금만 성공해도 아주 만족했으니,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건 아니지만, 나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받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생각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면서 나는 나름 쉽게 독립심을 갖게 되었다. 열네 살 때 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유대교를 떠났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조만간 비유대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말씀드릴 때도 아버지가 반대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가 반대했더라도 내게는 수전과 결혼했을 배짱과 판단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평소 좋은 부자 관계를 가진 유대인도 결혼 문제 때문에 관계가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고 또 유대인 부모를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비밀로 유지하기도 한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셨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감추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아무튼, 적어도 내게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보이지 않는 희생물론 기독교에서 용서는 원한을 누그러뜨리는 감정 이상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용서는 희생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최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 러브 스토리는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겼지만, 나로서는 내 자존심을 희생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모든 것에 대해 내가 한 번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씀드릴 때 비로소 나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내게 생명을 주신 것으로 시작한 아버지의 선물은 나를 위한 지속적인 물질적 공급으로 이어졌다. 나는 빚을 거의 지지 않고 비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서른이 될 때까지 자가용이 없었지만, 나는 일찍부터 운전을 했고 자동차 유지비도 내가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공황 시기에 가난하게 자랐지만,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은 집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배고픈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아버지가 준 무형의 유산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나의 연구를 토대로 할 때, 아버지는 십대 시절에 커다란 반유대주의에 직면했음을 나는 80퍼센트 확신한다.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전쟁 생존자와 난민을 위한 번역가이자 봉사자로 일했던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강제 수용소를 목격했을 것이라고, 나는 90퍼센트 확신한다. 물론 거기에 관해서도 아버지는 이야기한 적이 없다.만약에 아버지가 나치 독일(Third Reich)의 폐허를 청소하는 중에 분명히 보았을 섬뜩한 장면들을 한창 자라던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면 어땠을까? 내 증조부모 중 누군가가 나치 군인과 나치 협력자가 쏜 총알을 머리에 맞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올해 초에 출간한 ‘아버지를 위한 애도’(Lament for a Father)에서 썼듯이, 나는 반유대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자랐다. 반유대주의가 분명히 있었지만, 나는 느끼지 못했다. 만약에 아버지가 반유대주의, 그러니까 이 세상이 나를 반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의 뇌리에 새겨 두었다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십 년 동안 나는 심각하게 방황했지만,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라는 공포가 주는 악몽으로 손상되지 않은 전반적인 낙관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나는 아버지에게서 과거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의 침묵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사건 현장에서 본 것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는 살인 탐정처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세세한 부분을 아껴 두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TV 쇼 ‘법과 질서’(law-and-order)가 자주 알려주듯, 비관주의라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사람에게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 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한 최고의 희생이라는 기독교의 중심 주제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희생을 치렀고, 그 점에 대해 나는 뒤늦게나마 감사를 드린다. 어떻게 은혜를 베풀 것인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할 차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은혜의 렌즈를 통해 상대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만약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해 주세요”라는 의미이다. 아버지는 하버드에서 인정하는 신학으로 자신의 신학을 바꾸기까지 했지만, 결국 하버드라는 사회에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퇴학당해야 했다. 그 일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지 지금은 상상할 수 있다. 또한 독일에서 유대인 시체가 통나무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아내와 아들들로부터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모욕감이 어떤 것이었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이미 스트라이크가 셋이니, 아버지가 삼진 아웃을 당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이해한다는 것은 평행선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는 자기 아버지를 보지 못한 내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크게 실망시켰을 것이다. 아버지는 정통 유대교를 떠나 유대교 재건주의를 받아들였다. 그건 오늘날 마치 근본주의자가 성공회 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데, 그렇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실망시켰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렇게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과거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는 내가 가족 전통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신과 의사 에이브러햄 트워스키(Abraham Twerski)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공기, 음식, 음료, 그리고 비난할 누구”(Prager, The Rational Bible: Genesis, 53에서 인용). 부재했던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자신과 똑같은 복잡한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막대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의 삶을 연구함으로 자기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라면 상호 비난을 없애고 좋은 관계를 위한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라면 아버지에 관한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상이 함께 제시되는 유일한 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엡 6:2도 보라).다시 말하지만, 나는 쉬웠다. 내 아버지는 악마적이지도 않았고, 단지 멀리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부족한 방식도 다르고 그 정도도 다르지만, 부족하다는 점에서 예외는 없다. 아버지는 종종 자신의 아버지보다 자녀에게 더 나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고, 또한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자녀들은 아버지가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원하기도 한다. 재결합의 길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며, 정죄 받지 않으려면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에서 시작한다(눅 6:37).쇠사슬 끊기그래서 나는 확실히 아버지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내 죄를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나에게 안경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무한한 자비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은혜의 렌즈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자연적인 비참함 속에서 자신의 원죄를 전가할 뿐이다. 언뜻 보기에 쇠사슬은 세대를 이어 준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 쇠사슬은 쉽게 끊어질 수 있게 된다. 기적적인 변화를 본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놀라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훨씬 더 못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게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상처를 입은 아버지를 사랑한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처럼 상처 입은 사람이고, 그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지 못하실 만큼 깊은 상처는 이 세상에 없다.원제: Can You Forgive Your Father?: My Slow Journey Toward Merc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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