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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by Scotty Smith
2022-04-13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수요일묵상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태복음 22:41-42(새번역)기도예수님,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특권과 명예와 기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천국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완전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에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던지신 질문은 지금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는 미천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셨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그 사이에 있는 전부이십니다. 천사들도 주님을 경배하며, 새들도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은 두 번째 아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으며,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몸소 받아내셨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의롭다 여김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뜨겁게 맞이하는 신랑이시며, 우리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신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으며, 그 크신 사랑은 결코 작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믿음 없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주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낮과 밤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고통을 다스리시고, 세상 모든 왕과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상한 갈대들이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악한 영들이 주님 앞에서 떱니다. 예수님, 주님은 이와 같으신 분이시요 그 이상이십니다. 주님의 영광과 은혜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 가장 놀라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사랑과 경배로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주께서 항상 우리를 생각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주님의 마음과 생각 가운데 두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아시며 우리를 온전히 기뻐하십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는 때는, 우리를 보시며 가슴 설레지 않으시는 때는,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때는 한순간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하고 은혜로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원제: Wednesday of Holy Wee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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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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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아는지식
성주간
“예수께서…우시었다”
by Scotty Smith
2022-04-12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화요일묵상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누가복음 19:41-42(새번역)기도예수님,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훨씬 전에, 주님은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게 우셨습니다. 믿음 없고 반역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주께서 흘리신 그 눈물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주님의 크나큰 사랑, 그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6-8)예수님, 겸손히 시인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바로 그 약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한 “선한” 사람 축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반역자요 무심한 비판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대신 값을 치르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로마서 5:10).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님을 통하여 우리와 평화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잎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나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심장이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다른 데서 평화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을 요구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어떤 자랑도,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죄를 용서받을 어떤 보장도, 의롭다 여김 받을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조건 없는 은혜 없이는 그렇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주님 밖에서 평화와 생명과 기쁨을 찾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을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만족, 우리의 기업 되시는 주님께 우리를 의탁합니다. 진실로 그날을 기다립니다. 존귀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와 경배 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원제: Tuesday of Holy Wee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예수님의눈물
성주간
예루살렘입성
평화
생명
기쁨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by Scotty Smith
2022-04-11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월요일묵상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요한복음 12:27-32(새번역) 기도예수님, 그때 그 성 주간의 사건들이 시작되자, 환희의 “호산나”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경악스러운 외침으로 돌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 감당하셔야 할 일, 창세 전에 주께서 세우신 계획이었으니까요(엡 1:3-14).그 며칠 뒤에 주님은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가 받아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 주간이 끝날 때 주님의 “상처 입은 발꿈치”(창 3:15)는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의 머리를 부수고 그를 쫓아내실 것입니다. 단번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셨으니, 주님, 말할 수 없이 괴롭다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 주간이 끝날 때, 주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 가족―모든 민족과 족속과 사람과 언어 중에서 구속받은 은혜의 자녀들;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은 자비의 딸들과 아들들(창 12-13)―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값을 기쁘게 치르실 것입니다. 주께서 영원으로부터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이를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몸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영광을 버리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5-11). 이제 우리 앞에 그 주간의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주님,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가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잠잠히 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경이로움을, 주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하소서. 거룩하고 은혜로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원제: Monday of Holy Wee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겟세마네의고뇌
주님의고뇌
고난의종
성주간
성월요일
종려주일
수난과 부활의 계절에 한국 교회의 부활을 꿈꾼다
by 이동원
2022-04-10
종려주일 유미형_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소위 코로나 팬데믹 2년 반을 지나 3년을 향하는 우리에게 지난 세월은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간 음부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기약 없이 걷고 있었다. 고작 우리의 기대는 곧 이 시기가 끝나리라는 기약 없는 희망뿐이었다. 그동안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죽음의 그림자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죽음 자체는 아닐지라도 죽음을 느끼게 하는 절망과 포기, 병약함과 자살의 유혹 등으로 우리는 많이 아팠고 많이 신음을 토해 내며 주께 묻고 있었다. 정말 기적은 존재하는 것이냐고? 아니 새 시대가 오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냐고?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되어 그렇게 주께 따져 묻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주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내게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의 무덤, 스올의 뱃속에서 수난의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물었어야 할 첫째 질문은 이 수난의 의미여야 했다. 요나처럼! 선지자는 이 큰 물고기 무덤에서 먼저 기도를 발견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옛 일제 강점기 초 우리 역사가 곤두박질하고 있었을 때 평양대부흥을 허락하신 주님은 한국 교회에 ‘부르짖어 구하는 기도’ 곧 통성기도를 선물하셨던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까? 선지자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놀라운 고백을 토해 낸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여기 선지자를 부활케 한 마법의 언어는 ‘다시!’였다. 다시 기도하겠다고! 다시 예배하겠다고! 다시 주의 성전의 귀함을 알겠다고! 다시 주의 공동체의 모임을 귀히 여기겠다고! 다시 주의 은혜를 은혜로 알겠다고! 다시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고! 다시 주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시 감사의 목소리를 올려 드리겠고, 다시 서원을 갚겠다고!(욘 2:9) 그리고 요나는 물고기 스올의 뱃속에서 나온다. 제삼일의 부활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간다. 그리고 니느웨는 뒤집어진다. 새 시대, 새 날이 밝아온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니던가! 수난과 부활의 계절에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요나의 표적을 다시 보라고! 요나의 표적 말고 달리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아니 다르게 네가 기대할 기적은 없다고…. 너, 요나가 다시 살아야 한다고. 너,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의삶
종려주일
팬데믹
요나
평양대부흥
한국교회
수난
부활
코로나시대
암은 그리스도인을 이길 수 없다
by Justin Dillehay
2022-04-07
우리 교회 성도 데럴 카르멘이 6개월 전에 암으로 죽었다. 그가 죽기 6개월 전엔 그의 아내 앤이 코로나로 사망했다(나는 앤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글에서 쓴 바 있다). 데럴이 죽고 한동안 나는 그가 천국에서 누리고 있을 삶을 그려 보면서 “암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티셔츠나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서 “나는 암을 이겨냈다”라는 문구를 한번쯤은 본 적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겼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라는 의미다. 이것이 ‘이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다. 사는 것이 승리이고 죽는 것은 실패라는 것이다(암이 치료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이 정의에 의하면, 데럴은 암에 졌다. 암이 데럴을 이겼다. 단순한 차원에서 이는 분명 사실이지만, 온전히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을 들어 말씀에 계시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갖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히 11:1).보이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암이 데럴을 이겼다고 결론짓겠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영광스럽고 더 큰 그림을 볼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어떻게 데럴이 사실상 암을 이긴 것이 되는지 성경적이고도 실제적인 세 가지 이유를 나눠 보고자 한다.1. 암은 예수 안에 있는 데럴의 믿음을 죽이지 못했다암이 주는 가장 심각한 폐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아마도 몸이 무너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암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좋으신 분이 아니야,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게 아니야,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었어.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시겠어?’ 암이 주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다.암은 데럴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가 여섯 달 전에 아내를 잃었을 때나 죽기 6주 전 에 암 진단을 받았을 때나 그는 항상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제게도 늘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다.데럴이 이러한 확신을 가졌던 것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많은 죄가 있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므로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혹 데럴처럼 예고된 죽음 앞에서 시간을 갖게 된다면, 사탄은 길고 긴 범죄 기록을 들이밀며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상처 준 사람들, 죄에 넘어진 모든 순간, 내가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수만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에 집중한다면, 죽는 것은 더욱더 두려워질 것이다.그러나 데럴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을 바라보았다(빌 3:13). 그가 뒤를 돌아볼 때는, 자신의 죄가 아닌 자신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성경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말씀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데럴 카르멘은 승리했다. 그는 암을 이겼다. 암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믿음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 해 줄 뿐이었다.2. 암은 데럴을 예수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했다사탄의 목적이 데럴과 예수님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면, 사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암은 데럴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었다(빌 1:23). 하나님의 사랑에서 데럴을 떼어내는 데 암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데럴을 잃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사 값 주고 사셨으며, 그가 주님 계시는 곳에 함께 거하도록 기도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7:24).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었다.데럴이 이 땅에서 죽기 전 마지막 6주 동안 경험했던 것과 지금 천국에서 누리고 있을 일들 사이의 간격을 생각해 보라. 고통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의로 충만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50년을 함께 했던 아내와 재회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기쁨은 그가 마침내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사랑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모든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어쨌든 암이 데럴을 이긴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암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손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암을 빨리 없앨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손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유익”이라고 말한다(빌 1:21). 암은 데럴을 이기기는커녕, 그를 예수님 앞으로 곧장 인도해 주었다.3. 암은 데럴에게서 빼앗은 것을 소유하지는 못한다암이 데럴을 이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최고의 근거는 그의 몸이 그의 고향 테네시주 하츠 빌에 묻혔다는 것이다. 물론 암이 그의 몸을 앗아간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도 실제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 패배했다.암도 이와 같다. 암은 기껏해야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결전은 이미 치러졌고, 결과는 승리이다. 오래된 부활절 축하 인사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으시고,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암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육체가 전부이다. 그뿐이다. 암은 그의 몸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데럴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셨을 때, 그는 데럴의 몸에 계약금을 걸어 놓으셨으며 후에 그것을 찾기 위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엡 1:14; 롬 8:11). 이 일이 일어날 때, 힘없이 뿌려진 죽은 몸은 권능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또한 낮고 낮은 몸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다.데럴이 죽기 전 며칠 동안 그의 곁에 앉아 암으로 쇠약해져 가는 그를 지켜보면서, 우연히 그의 침대 탁자에서 그의 젊은 시절이 담긴 액자를 보았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젊음의 활력이 넘치는 데럴, 이제 막 결혼한 남자의 유쾌한 미소가 가득한 모습. ‘이다음에 그를 만날 땐 바로 이 모습이겠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암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데럴을 위해 울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믿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한다. 최후 승리를 기다리는 우리는 데럴 카르멘이 암을 이겼다고 믿음으로 말할 수 있다.원제: Every Christian Beats Canc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죽음
부활
암
승리
믿음
부활하신그리스도
암을이겼다
믿음과소망
칭찬은 영성을 자극한다
by 최창국
2022-04-01
모든 인간(그리스도인)은 영성과 죄성을 공유한다. 영성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밝은 면이다. 죄성은 위험하고 어두운 면이다. 만일 죄성을 자극하면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반대로 영성을 자극하면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이 일어난다. 칭찬과 영성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비판과 죄성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짝을 이룬다. 인간의 뇌를 연구한 대부분의 기독교 정신과 의사들은 뇌의 양식(food)은 사랑과 칭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 뇌는 실로 신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듯이 인간의 뇌도 양식이 필요하다. 뇌의 양식은 다름 아닌 사랑과 칭찬이다. 인간의 뇌는 사랑과 칭찬을 받을 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반응한다(티머시 제닝스, ‘뇌,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 47). 인간은 칭찬과 사랑을 먹고 자라도록 지음을 받았다. 영성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칭찬과 사랑이 필요하다.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비판보다는 칭찬과 사랑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젠 소올 교수의 실험 이야기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했다. IQ 테스트를 한 후, 테스트 결과를 보지도 않고, 5명당 1명 정도의 아이들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아이들 앞에 세우고, “오늘 테스트 결과 여러분은 아주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이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 후 1년이 지나 똑같은 아이들에게 IQ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칭찬과 격려를 받은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능이 월등히 상승했음을 알 수 있었다. IQ가 20 이상 올라간 아이도 있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게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언어를 들려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려 48퍼센트나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언어심리학적 연구가 있다. 칭찬과 축복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역동적인 힘이 있다.유대인의 자녀 교육을 연구해 보면, 주로 자녀의 장점을 따라 칭찬과 축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중요한 방법이다. 칭찬과 축복을 많이 받고 자란 자녀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데 뛰어나다.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듯이, 칭찬과 축복의 언어를 먹고 자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데 탁월하다. 인간은 어떤 자극을 받느냐에 따라 다르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부정적인 것과 관련되어 자주 자극받게 되면 싫어하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자극받는 것과 동일시되어 버리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인간은 부정적인 것과의 동일시되는 현상에 취약하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닮는 묘한 심리적 특성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특성을 ‘적대자와의 동일시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저 놈은 죽일 놈이지’라고 계속 그 사람을 미워하고 주야로 그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람과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시어머니에게 학대받은 며느리가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나는 절대로 우리 시어머니처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시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바로 ‘적대자와 동일시 현상’이다.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것을 비판할 때, 부정적인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것에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우리의 부정적인 것이 비판을 받으면 부정적인 현상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극받는 것이 강화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긍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그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칭찬할 때 그것은 강화되고 부정적인 면은 변화된다는 점이다.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인성의 밝은 요소인 영성을 넓게 하고 어두운 요소인 죄성은 좁혀야 한다. 우리의 인성을 100퍼센트라고 할 때, 죄성의 자리를 좁히고 영성의 자리를 넓히려면 부정적인 어두운 면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밝은 면인 영성을 자극해야 한다. 죄성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죄성의 터치가 아니라 영성의 터치이다. 성경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제시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의 근심을 쫓아내는 것은 근심에 대한 자기비판이 아니라 믿음이다. 근심의 자리를 약화시키는 길은 초점을 근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두는 것이다. 사람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어떻게 하면 그의 밝은 면인 영성을 자극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엄지손가락을 위로 드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의 강점과 잘하는 일을 항상 발견하여 지속적으로 칭찬해 주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의 가장 큰 밝은 면과 잠재력이 자극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성과 죄성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가 나의 아내, 남편, 자녀, 친구의 영성을 자극하느냐 아니면 죄성을 자극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죄성을 자극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성을 자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와 그가 가진 강점을 보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칭찬은 영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상대방의 약점을 고쳐 주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 이런 특성이 강한 사람은 지도자로서 심각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지도자는 사람의 약점을 보는 데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강점을 보는 데 탁월한 사람이어야 한다. 비판이나 충고는 종종 다른 사람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수 있다. 특별히 그 비판이나 충고를 따를 수 없거나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때 비판이나 충고는 큰 죄책감만을 심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욥이 고통 받을 때 친구들의 충고는 오히려 욥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판은 악을 다루는 가장 흔한 방법이나, 사랑 깊은 행위는 악을 슬퍼하고 회개하게 한다. 비판이나 충고는 나쁜 것이나 약점을 다루는 세상적인 방법이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경우가 그 차이를 잘 보여 준다. 유다는 자신을 정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사랑 깊은 은혜를 입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고 눈물로 회개했다. 비판은 아무것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 넘치는 사람일 때가 있다. 자녀의 좋은 면들을 보고 칭찬해 주고 어떤 귀한 일을 성취하면 자랑스럽게 여기며 격려해 준다. 하지만 자녀들이 뭔가를 잘못하거나 약점을 보이거나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하면 쉽게 화를 내고 심한 말로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우리는 자녀가 잘하는 면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음을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족함과 실수에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녀에게 은혜 없는 진리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보편적으로 사람의 강한 부분은 관심을 두지 않고 약한 부분을 발견하여 보완하려는 경향이 많다. 강점보다는 약점에 초점을 두고 사람을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근래 강점에 초점을 맞추는 돌봄 방식이 강조되고 있다. 갤럽은 30년에 걸쳐 약 200만 명을 면담하여 강점에 초점을 둔 삶의 중요성을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즉, 자신의 약점보다는 강점이나 천부적 재능을 중심으로 삶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더 성공적인 삶을 성취해 냈다(Albert Winseman, Donald Clifton, and Curt Liesveld, Living Your Strengths, x). 물론 강점 중심의 삶이 인간의 약점이나 삶에서 개선해야 할 것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여 일하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보람을 느끼며, 현재 직업이나 위치를 떠나는 경향이 적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각 사람이 유능하게 일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성경은 사람의 강점은 칭찬하고 실수나 약점을 비판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마 7:1). 오히려 성경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고 한다. 성경 전반에 걸쳐 인간의 부족하고 연약한 면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대상임을 가르치고 있다. 비판은 오히려 우리의 죄성을 자극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죄성은 파괴적인 에너지이다. 비판은 죄성을 강화함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부르게 된다. 선과 악에 대한 모든 문제의 해답은 비판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막의 영성을 연구한 베네딕타 와이에 따르면,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죄에 대한 판단이나 토론, 또는 상황을 해결코자 하는 핑계나 이해도 아니다. 마음을 깨뜨리는 것은 긍휼과 사랑이다”(Ernest Kurtz, Katherine Ketcham, The Spirituality of Imperfection, 439). 사랑과 영성은 본질적으로 유기체적인 관계에 있다. 인간은 영성을 자극해야 성장한다. 영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칭찬을 해야 한다. 사랑과 칭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방편이다.성경의 다윗도 약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였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그의 약점을 극복하게 하였고 광야의 외로움을 견디게 했다. 헤세드가 그의 어리석음도 승화시켰다. 헤세드가 그를 성장시켰다. 그의 마음에 새겨진 헤세드가 그를 전진하게 하였다. 다윗의 가장 큰 강점은 온 마음과 몸에 새긴 헤세드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칭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헤세드 사역의 동역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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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알았던 ‘영적 성장’
by Susan Alexander Yates
2022-03-31
19살이던 어느 여름날 저녁, 그때 나눈 한 대화가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이제 막 대학 2학년을 마쳤을 때였다. 친한 친구 세 명과 함께 가슴 설레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함께 탑승한 어떤 친구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며 나도 그리스도인인지 물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 나는 대답했다. 그 친구는 내게 복음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우리는 생각지 않게 긴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계속 예수님을 믿어 왔지만, 예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는지, 그분이 내 안에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모셔야 하고, 그분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주님께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시기를 구한 그날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내 안에는 여전히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성공하기였다. 넘치는 의욕으로 목표를 세웠고 대부분은 잘 지켰다. 마음먹은 것들을 잘 지키기 위해 나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패배감에 더욱 비참해졌다. 결국, 일전에 복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친구에게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네가 정말 존경스럽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이 생활을 도저히 못 할 것 같아. 나에겐 너무 어려워.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나는 더 엉망이 됐어.”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바로 답장이 와서 놀랐다. “수잔, 네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네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너의 신앙이 자라게 할 수는 없어. 그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해.” 성취지향적인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친구의 말이 안심되면서도 겸손한 마음을 갖게 했다. 인생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국면마다 나는 이 교훈을 반복해서 되새겨야 했다.이후 7년이 지나면서 나는 쌍둥이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얻었다. 쌍둥이가 태어난 지 6주쯤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다른 주로 이사를 했다. 그때 나는 늘 잠이 부족했고 외로웠으며 아내로서, 엄마로서, 사역의 동역자로서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종일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내 마음은 무척이나 심란했다.급기야 나는 주님께 울며 소리쳤다. “저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 성취한 것 위에 자아상을 세우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나는 괴로웠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단순한 진리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룬 것 혹은 이루지 못한 것과 상관없이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바로 이거다!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다 성장했다. 다섯 모두 결혼해서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남편과 나는 21명의 손자손녀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예컨대, 십대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다 자란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텅 빈 집에 남겨지는 것, 성인이 된 자녀와 손녀를 대하는 것 각각의 시기마다 ‘하나님께 항복’이라는 지혜를 꺼내야 했다.‘저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비로소 나는 고집스럽게 추구했던 ‘자기만족’을 내려놓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 신앙은 더 깊어졌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을 준 세 가지 생각이 있다.1. 자연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차이를 분별하라인생 전체에 걸쳐 우리는 두 갈래에서 성장한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먼저 자연적인 성장이다. 이는 자기만족, 깊은 사고, 책임감을 가지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목표를 이루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대어야 한다. 이것은 나를 낮추는 것이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영적 성장은 “저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항복의 고백과 함께 간다.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면서 자연적 성장의 수단을 쓴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주춤하고 말 것이다.2. 여정과 동행의 아름다움을 즐기라 발전이나 성과는 자연적 성장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어떤 목표를 향해 꾸준하게 전진하는 것이 발전이라면, 성과는 누가 보아도 명확한 결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이나 성과의 가치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장하는 여정 자체이며, 그 길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과를 내라고 다그치지 않으신다. 성장의 여정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더욱 민감하게 발견하기를 바라신다. 무한히 인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당신을 누리기를 원하신다.3.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보다 훨씬 크시다인생의 때마다 자녀, 경력, 재정압박 같은 큰 걱정거리가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그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하기는 하지만, 우리 마음은 하나님 대신 염려로 가득 차 버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문제가 아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하나님의 성품의 특징들을 소리 내 읊는 것은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를 실천하면 삶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분의 성품에 관해 기록된 부분을 발견하면 밑줄을 그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특히 시편과 에베소서 1장을 통해 많은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과 동일한 성령의 능력이 있다.어렸을 때 나는 나이 지긋하신 경건한 여자 분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나도 저분처럼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거야.’ 그러나 확신하건대, 누구도 완전한 신뢰의 수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니 그와 같은 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신뢰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천국에서나 가능하다. 우리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을 기대하는 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 더 깊이 의존하는 단계로 이끌기 원하신다.원제: What I Had Wrong About Spiritual Grow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영성
영적성장
분별
영적여정
동행
하나님께의존
영적성장과자연적성장의차이
‘내 인생은 뒤처졌어’라는 거짓말 물리치기
by Ann Swindell
2022-03-17
내가 떨쳐버리지 않는다면 마치 시계추처럼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다. ‘넌 뒤쳐져 있어.’ 온라인에서 거대한 사업을 하고 있거나, 결점 없는 깨끗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5단계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거나, 음식을 해서 한 달 전에 미리 냉동시켜 두는 여성들을 본다. 거기에 비해 내 주변을 둘러보면 장난감들은 바닥에 널려 있고 아이들 교과서는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고, 나는 오늘 당장 식구들 저녁식사로 무얼 만들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내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원수가 거짓말을 속삭인다. ‘너는 뒤쳐졌어. 네 인생의 이 시점이면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어야지. 너는 돈을 더 벌어야 했어. 사업도 더 번성해야 했고, 좀 달린다고 할 수 있으려면 (10킬로미터는 몰라도) 최소한 5킬로미터는 달려야지. 다른 사람들이 너보다 몇 광년이나 앞서 있어, 그러니 너는 절대 따라잡지 못할 거야.’ 어떤 날엔 그런 거짓말에 맞서지 못하고 점점 커져가는 감정의 구멍으로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맞서 싸울 때, 이러한 생각들은 거짓말임이 그대로 인정된다. 이런 거짓말은 나를 달려가고 있는 경주에서 낙심에 빠뜨리고 다른 이들의 경주를 바라보도록 한다. 다음은 내가 어떻게 남과 비교하는 것과 싸워 왔고, 뒤처져 있다고 잔소리를 듣는 느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걸어가는 법을 배워 왔는지에 대해서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추라나는 내 두 아이가 평생 같은 직업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색이 같을 것이라고도 기대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친구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음식을 즐기거나 같은 수의 자녀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내 인생은 직업에서나 가족, 소명에서 주변 사람들의 인생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우리는 베드로도 비교하는 것과 씨름했던 것을 본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후에 예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며 그가 순교할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 21:19)는 단순한 명령을 주셨다. 베드로의 대답은 어깨너머로 요한을 쳐다보면서 그는 어떻게 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 21:21-22).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고 요한의 삶을 베드로의 삶에 비교하지도 않으셨다. 그 대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이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따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어깨너머로 주변 사람들과 (또는 우리가 화면을 통해 보는 사람들과) 우리 삶을 비교하라는 유혹이 몰려 올 때, 우리는 눈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그를 힘써 따라야 한다. 우리는 눈을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기보다는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데로 마음을 향해야 한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목표에 도달했는지에 눈길을 줄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가치와 유용성을 확인해야 한다. (엡 2:4-10이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몸임을 기억하고 섬기는 삶을 살라이러한 비교는 나의 능력과 성취를 다른 사람의 그것들과 경쟁시켜 내 인생에 대한 좁은 관점을 갖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저 사람보다 더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저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저 사람이 인생에서 이루어가고 있는 지점을 생각하면 나는 내 인생에서 뒤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진실은 나의 자질과 재능과 성취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 훨씬 큰 무엇 곧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소명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나라에서 우리가 사역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은사를 주셨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그들보다 뒤처져 있지나 않은지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을 더디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함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방해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 12: 26-27). 뒤처진다는 걱정을 없애는 한 가지 해독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더 큰 몸의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서 그것이 필요한 다른 지체들을 섬겨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부를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일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교회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판단은 주께 맡기라내가 주변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 나는 그들의 관점에서 나 자신의 성취, 나 자신의 삶을 궁극적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판단과 다른 사람의 판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고전 4:3-4).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신다(롬 14:4).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따라잡았는지를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주신 “달란트”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다(마 25:14-30).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근거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함의 기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삶에서 끊임없이 “뒤처져”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의 보배로운 피와 십자가의 속죄 사역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고 구원 받을 수 있게 한다(벧전 1:18-19, 요일 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우리가 인생에서 뒤처진다고 걱정할 때, 우리는 성취와 나아갈 길을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에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판단을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원수의 거짓말을 이기고 두려움과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원제: Fighting the Lie That I’m Behind in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패배의식
비교의식
베드로의비교의식
그리스도의몸과지체
판단
육아만큼 사랑도 뜨겁게 나누려면
by Matt Reagan
2022-03-13
“로맨스는 부자들의 특권이다. 실업자에게는 로맨스라는 선택지는 없다. 가난한 사람은 실용적이고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소설 ‘모범적인 백만장자’에 나오는 말다. 나는 이 말에 다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재정적인 숫자만 놓고 보면 나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자유로운 여유시간의 숫자로 평가하면 나는 빈곤층으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나는 다섯 아이의 아빠이다. 내 아내는 현재 코로나에 감염되어서 투병중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두 달째 격리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내 아이들 중에서 두 명은 계속하여 구토를 하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은 낭만보다는 당장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실용적이고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로맨스 같은 것은 우리 삶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여유롭게 열정을 가지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들은 어쩌면 부르주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특별히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 부부는 로맨스를 멈추어야 할까? 부부는 육아전쟁의 전우로서 그저 서로 어깨만 맞대고 오로지 육아에만 몰두해야 할까? 서로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로맨스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나는 육아전쟁의 한복판에서도 부부의 로맨스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해 보겠다.첫째,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은 우리 삶을 유지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실 육아전쟁을 감당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통하여서 계속해서 재충전을 해야만 한다(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나는 시편 19편의 고백처럼 해가 뜨고 지며, 아름다운 꽃향기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소리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였다). 우리 삶에 그러한 재충전이 없으면 우리는 육아전쟁의 고된 피로에 쓰러지고 항복하게 될 것이다. 둘째, 아이들에게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육아를 기쁨의 충만한 완성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과 비슷하다. 부모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때에 그 기쁨은 부모에게서 넘쳐흘러 자녀에게로 들어간다. 13세기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을 인용하자면(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비유적인 설명이다). “하나님은 웃으시면서 독생자 예수님을 낳으셨고, 하나님과 예수님은 함께 웃으시면서 성령님을 낳으셨다. 그리고 이 세 분의 웃음을 통해서 온 우주가 창조되었다.”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양육과 보호라는 개념은 자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엡 5:29).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 찔림을 느낀다. 부부는 (특별히 남편은) 자기 자신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자신의 배우자를 양육하고 보호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는 그저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별히 “보호하다”는 단어는 건조하고 가벼운 표현이 아니다. 이 단어는 깊은 기쁨에서 터져 나오는 표현이며, 마치 남편이 자신의 사랑을 시나 노래로 표현할 때 사용할 만한 그런 단어이다. 육아 중인 부부를 위한 실제적인 조언자, 이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정글에서의 생존과 같은 치열한 육아전쟁에서의 로맨스는 어떤 것인가?여기서 제시하는 조언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봤던 것들이다. 때로는 죄성의 흔적도 남아 있고,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도 있으며, 평범하고 지루한 것에서 마법과 같은 환상적인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다. 비록 이 조언들이 단기간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겠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전쟁의 현장에 있는 부부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움이 되는 것들은 실천해 보라.1.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라!보통 남편들이 아내보다 수면 시간이 짧다. 그러나 수면 시간을 조절하여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면 부부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최근 들어 함께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보통은 아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 부부가 먼저 일어난다. 아직은 한밤처럼 어두운 새벽에 우리는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그리고 온 세상이 고요한 그 새벽에 우리는 시편의 말씀을 서로에게 낭송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묵상한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에게 서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는 참으로 로맨틱한 순간이다. 2. 잠시라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라!이를 위해서 반드시 의도적으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저녁 식사시간에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시간은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지만, 자녀가 많은 가정의 경우에 저녁 식사시간은 보통 가장 정신이 없는 시간이기에 부부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여유도 없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대화 시간은 아이들이 잠든 직후이다. 이 때 의도적으로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의 피로 때문에 또는 다른 여러 이유로 방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텔레비전을 켜거나, 핸드폰을 만지지 말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대화해 보라. “오늘 당신의 하루에 대해서 얘기해 줄래요?” 이런 대화의 시간은 당신의 결혼 생활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또한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서로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으면서 부부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3. 서로 장난을 치라!저녁 열 시가 지나면 아내는 하루의 고된 육아로 인한 피로에 찌들어서 완전히 지쳐 있곤 한다. 이 때 나는 아내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아내가 눈물이 날 정도로 실컷 웃을 때까지 장난을 친다. 또한 아내의 장난에 과장 섞인 반응으로 응답하면서 서로 한바탕 신나게 웃는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청소년들의 시시덕거리는 장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육아전쟁 중에도 우리 부부의 애정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나는 로맨스를 유지하기 위하여서 부부에게 유머가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4. 서로에게 편지를 쓰라!당신이 “좋은 글”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당신이 쓴 편지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을 수 있다. 보통을 자신의 마음을 간단히 말로 전달할 때보다는 글로 적어서 전달할 때 더 효과적이다. 아마도 글이 더 깊은 생각, 더 깊은 마음, 더 많은 노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간단한 문자 메시지보다 문학적인 표현들이 담겨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삼행시와 같은 표현도 괜찮을 것이다.5. 창조세계로 나가보라!하늘은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선포하고, 태양은 신랑의 뜨거운 사랑과 기쁨을 외치고 있다(시 19:1-5). 들판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하나님의 부드러움을 속삭이고, 가을 녘의 낙엽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이런 자연을 보기 위하여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에어비앤비를 예약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번 주에 뒷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샛노란 낙엽의 색깔을 바라보면서 함께 감탄했다. 주기적으로 부부가 함께 외출을 하고, 자주 산책을 하는 것도 좋다. 서로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복잡하고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고 진정한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6. 서로 스킨십을 나누며 사랑을 표현하라!야외에서나 공공장소에서 서로 손을 잡아보라. 소파에 앉아서 쉬면서 아내의 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보라. 당신의 청소년 자녀들이 야유를 하더라도 부엌에서 아내와 꼭 끌어안고 있어라. 당신도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지금의 아내의 손만 닿아도 전기가 통할 정도로 설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짜릿함은 사라졌을지라도 여전히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쓰다듬고 만지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만지면서 표현하는 것이 로맨스의 핵심이다. 7. 당신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기도 하다(시편 136편을 보라). 우리가 이를 잘 실천할 때에 우리 감성이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날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우리 일기장을 꺼내 놓고,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삶에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함께 고백한다. 그러면서 함께 감동을 받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8. 외박을 해보라!사실 이것은 모든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부부가 함께 외박을 하려면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고(아마도 누군가 다른 가족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돈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같은 곳을 다녀왔다. 태평양의 피지 섬 같은 곳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이지 우리 부부에게 가장 좋았던 시간은 우리 부모님과 서로 집을 바꾸어서 부모님 댁에서 함께 외박을 했던 경험이다. 그 때 부모님께서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시고, 우리는 부모님 댁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행하실 미래에 대하여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9. 음악을 즐기라!당신의 가족이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음악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의 가족 중에 누군가 노래를 부르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으면 좋다. 그렇게 모두 간단한 노래를 함께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노래가 찬송가일 수도 있다(우리 집에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가장 좋아한다). 또는, 연주곡일 수도 있고, 신나는 댄스곡일 수도 있다. 그런 음악들은 우리 영혼을 일깨우고,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있는 감정에 접근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자에게 말하라!이는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로맨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서로 나란히 앉아서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우리의 진정한 신랑이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로맨스를 키워가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신비를 고백하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고백하며, 그 사랑의 놀라움을 배우자와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영혼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저 성경을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함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서로에게 채우라는 것이다(엡 3:19).육아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우리 삶은 참 신비롭다. 육아의 피로와 혼란으로 인하여 삶의 한계에 도달해 있을지라도 부부 관계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참 신랑께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구하라. 그리고 부부가 다시 로맨스를 회복할 수 있는 새 힘을 얻도록 기도하라.원제: Romance After Kids: Ten Ways to Keep the Fire Burni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부부관계
육아전쟁
사랑
회복
결혼
로맨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by 김형익
2022-03-11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대선 정국은 드디어 한 후보자의 초박빙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일 퍼센트의 차이도 되지 않는 승패 결정이었기에, 적어도 절반의 국민은 탄식할 것이고 절반의 국민은 안도의 숨을 내쉴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그리스도인 유권자들도 포함된다. 우리가 어떤 쪽에 속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가 어느 쪽에 속했는지, 어느 후보에게 표를 던졌는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링컨의 일화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한 측근이 하나님께서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하자, 링컨은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링컨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도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점이 많지만(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도리스 키언스 굿윈은 링컨의 리더십을 다룬 명저 ‘권력의 조건’에세 상당히 정확한 사료들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데, 링컨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녀의 결론은 매우 회의적이다), 이 이야기는 서로를 적대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좋은 통찰을 제시해 준다. 적어도 링컨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도리스 키언스 굿윈은 이렇게 링컨의 말을 인용한다. “남이나 북이나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했으며, 상대측에 불리하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남이 땀을 흘려 만든 빵을 억지로 빼앗는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쪽 모두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느 쪽의 기도도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름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권력의 조건’ 25장).미국 역사의 남북전쟁 상황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은 교회마저도 갈라놓을 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링컨의 말을 좀 더 진지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링컨의 지극히 정상적인 이 말에 동의한다면, 선거에서 승리한 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들어 주셨다”고 쉽게 말할 수 없고, 패배한 쪽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다음 선거를 위해 다시 기초부터 쌓아가며 기도하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정당의 정권 창출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민한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우리는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여쭈었던 제자들의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자기편을 들어 주시는 지역 신 정도로 만홀히 여길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돌아가 보자.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승자의 하나님도 패자의 하나님도 아니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정치적 견해는 다를 수 있겠지만, 그리고 여기에는 성숙한 정치적 견해와 관점의 차이뿐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몰이해나 미성숙의 문제도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를 나눌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을 찢을 수 없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첫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어떤 인물, 어떤 정당이 승리하든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구해야 하는 기도는 이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사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거나 명목상의 기독교 신자이든지, 아니면 타종교인이거나 설령 무속 신앙인이든지 우리가 간구해야 할 기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역사를 보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가 바벨론에게 짓밟힘과 정복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면서도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간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역사를 당신의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마땅히 그리고 언제나 간구해야 하는 우선적 청원이다. 두 번째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청원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 청원은 다분히 정치적 아젠다가 아닌가?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설령 내가 뽑은 사람이라고 일지라도 특정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가 메시야는 아니며 우리의 왕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자신이 뽑은 정치 지도자나 정당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하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선거 승리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자만심이나 선거 패배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좌절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주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임하고 있으며, 역사의 한 순간에 임하고야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는 우리와 온 세상의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의 특성이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점점 더 드러나고 시행되기를 열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랑과 정의의 나라라면, 우리는 세워진 대통령을 통해서 (내가 원했던 사람이든 아니든) 이런 하나님의 통치(나라)의 특성들이 더 바르고 편만하게 나타나도록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했다(롬 13:1). 우리는 이 말씀을 자신이 원하는 위정자에게 한정하여 적용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언제나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태도를 견지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세 번째로 주님이 가르치신 청원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특정 정치인의 공약에 대해서 판단과 평가를 할 수 있고, 특정 정당에 대해서도 그 가치와 이념, 성향에 대해서 호불호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구해야 하는 우선순위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가치와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나 인간 조직의 불완전한 뜻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또는 그것을 더욱 온전하게 하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기를 배운다면, 정치와 이념으로 찢겨진 주님의 몸은 치유와 회복과 하나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기를 배움으로써 얻게 될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적 삶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즉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마치 블랙홀처럼 정치와 대선의 이슈가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주님의 몸인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목사의 정치적 견해들을 쏟아내게 했고, 그 이슈로 교회마저 양분되었던 일을 생각해 보라. 이뿐인가? 개인의 경건 생활도 온갖 정치 뉴스에 쏟아 부어진 시간과 에너지에 의해 얼마나 침해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우리가 절실하게 회복해야 할 기도가 아닌가!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려야 할 더 궁극적이고 더 큰 유익이 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또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통해 왕으로 임하시는 날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은 온다. 바로 우리가 바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기도를 통해서 말이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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