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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없었던 그런 아버지 되기
by Ian Harber
2022-05-04
내 아들은 이제 겨우 한 살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없는 고통과 혼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내 어린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 들었고 아들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어릴 때보다 지금 더 자주 아버지의 부재를 느낀다. 아들이 생기자 여러 질문이 생긴다.• 내게 일어난 일이 내 아들에게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아들에게 전해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족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 아들이 나에게서 배워서 남은 인생 동안 꼭 간직했으면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무너진 가족은 무너진 정체성을 남긴다. 이런 경험은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미국에서는 넷에 한 명 꼴로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산다. 이러한 아버지 부재의 현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 백 명의 아버지가 백 가지 대답을 할 것이다. 시티뉴욕 교회(Church of the City New York)의 존 타이슨(Jon Tyson) 목사가 쓴 ‘아버지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용기와 인격을 갖춘 아들로 키우기 위한 지침서’(Intentional Father: A Practical Guide to Raise Sons of Courage and Character)는 바로 이 질문을 다룬다.의지의 아버지고등학교 때, 친구와 나는 “의자 아빠‘(chair dad)라는 말을 만들었다. 의자 아빠는 오후 5시가 넘어서 퇴근하면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스포츠 방송을 보다가 자러 들어간다. 친구네 아버지 대부분이 의자 아빠였기에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다고 의자 아빠가 무슨 특별히 해로운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종종 좋은 추억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아들의 인격과 미래에 대한 투자는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들 교육에 관해서라면 자동항법조종장치를 켜놓고 살았다. 아들의 형성(formation)은 그냥 운에 맡겼다. 아들의 제자도를 위해 청소년 그룹이나 또는 집에서 더 떨어진 기독교 학교에 맡겼다. 그들에게 아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은 직장에 나가 돈 벌고 안락한 집과 교육 제공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자에 앉은 채 아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러나 타이슨은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아버지로서 우리의 목표는 아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아들을 아버지를 닮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길을 따라 아들이 결국에는 창조주의 형상으로 새로워지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아들은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비전을 가지게 될 것이다(195).이제 막 아들을 대학에 보낸 타이슨은 아버지들에게 아들을 소년에서 성인으로 키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부재한 아버지가 주는 허상의 축복을 쫓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성년의 길에 들어서는 소년들이 가진 문제를 본다. 타이슨은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함으로 아들이 인생에서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살 수 있도록 돕는다.타이슨은 다섯 종류의 아버지를 설명한다. • 무책임한 아버지• 무지한 아버지• 일관성 없는 아버지• 간섭하는 아버지• 의지의 아버지의도적인 아버지가 나머지 아버지와 다른 점은 아들의 독특함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서 그 아들에게 맞는 양육 방식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의도적 아버지는 “이게 맞으니까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지 않고 “이게 너한테 맞아”라고 한다. 결국, 타이슨의 책은 단수한 단계별 가이드가 아니다. 그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아들을 키우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남자로 가는 길십대 자녀의 제자도를 청소년 그룹에 위탁하는 부모가 넘치는 시대에 아버지가 아들을 직접 제자로 훈련해야 한다는 타이슨의 비전은 급진적이다.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비전이다. 타이슨이 청소년 목회자였을 때, 그는 자기가 사는 동네의 몇몇 아이들이 그가 만나는 교회 청소년들과 다른 점을 알아챘다. 그들은 모르몬교 신자였다. 그는 모르몬교 장로들에게 젊은이들을 양성하기 위해 무슨 특별한 방식을 사용하는지 물었다. 대답은 모든 모르몬교 십대는 매일 등교 전에 “신학교”(seminary)에 참석하고, 학업을 마치고 지역사회로 돌아오기 전에는 반드시 선교 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타이슨은 나날이 쇠퇴하는 교회의 미래를 바꾸려면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제자도가 최소한 모르몬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이슨은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일어나 책을 읽고, 기도하고, 삶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권장한다. 매주 아버지는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치고, 가치를 심어 주고, 기억에 남는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아들을 “남자 학교”(man school)에 데려가야 한다. 아들이 열세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입은 상처를 먼저 스스로 다 치유해야 할 뿐 아니라, 아들과의 특별한 여행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우리의 목표는 독한 남자다움의 전형에 맞는 아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비전과 용기와 가치관이 충만한 신실한 남자를 키우는 것이다. 타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소년의 삶은 편안한 삶,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자아의 삶, 그 순간을 살기 위해 보낸 삶이다. 그러나 남자가 된다는 것의 아름다움은 어려움을 포용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되며, 더 큰 대의에 기꺼이 굴복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산다는 것에 있다(137쪽).당신은 지금 아들이 살고 있는 이야기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속에서 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맥락을 갖고,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보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사랑받는지 아는 세상에서 자신감을 갖고 걷게 된다. 타이슨이 하라는 것의 절반만 하는 아빠라면, 그는 대다수의 아빠들보다 더 의도적인 아빠일 것이다. 목표를 염두에 두고 날마다 아들에게 투자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주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세대를 치유할 마음에 꾸준한 사랑의 물방울을 뿌리는 것이 된다. 아버지 날아버지 날은 항상 나에게 일년 중 가장 힘든 날이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올해 들어서야 나는 그 안에서 구원의 희미한 빛을 느꼈다.나는 더 이상 내가 갖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대신 내가 되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들어 주고 조언해 주고 또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그런 꿈을 엉망으로 만들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나 가능한 것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게 행동의 첫 번째 단계이다.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행동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항상 우리 가족의 유산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인도할 사람이 없이는 그 작업이 벅차게 느껴질 뿐이다. 아버지로서 우리는 아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타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형성은 매일 발생한다. 왜곡도 매일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도 둘 중 하나를 하고 있다. 아들이 제대로 된 성인이 되도록 돕고 있거나 아니면 겉만 어른이지 속은 여전히 사춘기에 갇힌 인간으로 만들려는 이 시대 문화의 시도에 동참하고 있다(134).아들은 결코 그저 가끔씩 아버지가 내미는 약간의 손길이 필요한 백지 상태가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있든 없든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타이슨이 그리는 아버지의 길은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아들의 마음을 향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리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향하는 아들의 마음을 가리킨다(말 4:6).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 가정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The Intentional Father: A Practical Guide to Raise Sons of Courage and CharacterJON TYSON 자기주도(Self-initiation)가 젊은이를 죽이고 있다. 강력한 멘토 없이 소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상충되는 메시지를 들으며 광야에서 홀로 걸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아들이 세상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고 또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이 책은 아버지로 하여금 책임을 지는 아들로 키우는 데 필요한 정보로 가득하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도록, 또 우리 시대의 해로운 문화적 경향에 맞서 싸울 젊은이로 아들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는 특정 활동, 통과의례, 모든 가족에 적합하도록 조정할 수 있는 중요한 “특별한 순간”(marking moments)을 포함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위한 명확한 경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아들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들은 남자가 되는 데에 능숙해져야 한다. 이 책은 아버지, 할아버지, 남성 멘토가 어떻게 길을 인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BAKER BOOKS. 256 PP. 원제: Be the Dad You Never Had: Review: ‘The Intentional Father’ by Jon Tys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아버지역할
가정사역
청소년기
남자
아버지날
아버지와아들
따라 하다 보면 성장한다
by Tim Shorey
2022-04-29
개인적인 성장을 원하는가? 복된 사역을 하고 싶은가? 나는 이를 위한 방편으로 이름하여 ‘합성 모방’(composite imitation)을 권한다. 여전히 갈 길이 먼 내가 지난 45년 동안 해 온 방법이다.나는 선교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생동하는 교회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 사시는 분들이었다. 우리 가정은 예수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사랑, 주님의 거룩함과 주님의 증거, 그리고 주님의 세계에 헌신한 많은 이들로 북적거렸다.이러한 환경은 나의 ‘합성 모방’ 훈련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틀 수 있게 한 영적 온실이었다. 나의 이 훈련이 성경 내용을 적용하고자 시작한 것이었는지(고전 11:1, 빌 3:17, 히 6:11-12, 히 13:7), 성령님께서 직접 주신 아이디어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그때부터 이 훈련의 여정이 시작되었다.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을 닮아가기나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을 닮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했고,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은혜의 역사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본받기로 결심했다.나는 “요한처럼 되고 싶다”가 아니라 “요한은 확실히 겸손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한 겸손을 닮고 싶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 결과 여전히 매우 불완전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다양한 미덕들이 하나하나 모여 내 안에서 그러한 그리스도를 향한 ‘복합 따라하기’가 이루어졌다.이러한 영적 훈련 과정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미덕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빌과 로라 S(나의 부모님이시다)는 자녀에게 전혀 소홀하지 않으시면서 20년 동안 선교사로서 담대하게 헌신하셨다. • 빌 F는 섬세한 목회적 돌봄과 실제적인 베풂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 레이 M은 남다른 겸손의 삶을 살았다.• 알 M의 충실한 성경해석은 나의 사역이 도달해야 할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게리 H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는 경건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돈과 린 H의 가정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 렌과 루스 M의 양육 방식은 우리의 양육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는 더글러스 D 만큼 기쁨에 찬 열정을 가진 사람을 이전에 본 적이 없다.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꺼이 뛰어들어 섬겼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아는 한 의사 부부는 자신들이 소유할 수 있었던 큰 저택 대신 이동식 주택을 선택하여 더 많은 것을 나누었다.• 척 S는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곧 까칠한 설교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존 P는 강단은 거룩한 단상임을 보여 준 열렬한 설교가이다.• R.C.S는 심오한 신학 내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팀과 팻 B는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항상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관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주님, 아버지와 어머니의 용기, 빌의 사랑, 레이의 겸손, 알의 강해 실력, 게리의 경건, 돈과 린의 환대, 렌과 루스의 양육의 은혜, 더그의 종의 마음, 그 의사 부부의 관대함, 척의 매력, 존의 열정, 팀과 패의 헌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제 62세이다. 위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의 영향이 45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비록 완벽하게 이룬 것은 하나도 없지만(빌 3:12-17) 하나님께서 내 삶에 그러한 모범을 보여주시고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았을 때의 나보다는 좀 나을 것이다.나의 믿음은 의도적인 따라 하기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의도적인 흉내가 나를 ‘합성 모방품’이 되게 했다. 영적 원본이 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시고 빛나는 광채이신 분을 반사해 내려고 노력한 좋은 모범들을 찾고, 내가 다시 그 모범들을 반사해 내고자 한 것이다(히 1:3, 고전 11:1). 실망에 대비하라그러나 ‘합성 모방’이 실망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실패하기 마련이며, 상황이 더 나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의 영적 모델이자 멘토인 바울의 말을 따르자. 좋은 것은 취하고(본받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0-21). 우리 믿음의 선진도 결점이 있었지만,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범이 되었다. 영적 시험에서 항상 정상을 유지한 것은 아니지만, 욥이 끝까지 버틴 것은 우리가 본으로 삼기에 충분하다(약 4:10-11).나는 (비록 결점이 있을지라도) 훌륭한 모범들을 만나는 특권을 얻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참된 은혜와 은사의 모델을 찾아 가능하면 가까이에서 닳도록 관찰하라. 그러나 모범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는, 세상적 의미에서 멋지거나 인기 있고 매력적인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을 택하도록 신중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신자는 세상을 모방하고 문화적으로 순응하는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변화된 신자, 때로는 예수님에 의해 변화된 신자들을 따라 함으로써 변화된 신자다.사역을 한 지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따라야 할 본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내 삶에는 로버트 C의 인종 통합을 위한 용기, 키스 T의 집중력 있는 끈기, 브라이언 D의 성경에서 말하는 불, 알렉스 C의 꾀부리지 않는 노력, 릭 B의 겸손을 겸비한 성실, 팀 K의 끈질긴 기도, 앤드류 K의 세계 최고 수준의 격려가 있다. 물론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팀, 당신은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베낀 것 같지 않은데요.” 그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따라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엉망이 되었을지 상상해 보라.그러니 나처럼 더 나아지길 원한다면 그러한 사람들을 모방하라고 권하고 싶다.원제: Growing Spiritually Through Composite Imit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합성모방
합성모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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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기도 행진을 시작하라
by 이인호
2022-04-28
이스라엘 백성 앞에 여리고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라(수 6:3-4). 군사 전술로는 터무니없고 매우 위험한 시도다. 고고학 발굴 보고에 따르면, 여리고성은 4-5미터 간격으로 높이 10미터의 성벽이 두 겹으로 두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상 저지대이면서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문제를 잘 모를 때는 오히려 믿음을 가지기가 쉽다. 그러나 문제의 실체가 보이고 예상되는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닥치면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앞서 가나안 땅에 숨어들어간 이스라엘 정탐꾼 열둘 중 열이 그 땅을 직접 보고는 믿음을 잃어버렸다. 이처럼 난공불락의 성벽 아래를 매일 한 바퀴씩 돌다가는 막연하게나마 있던 믿음마저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을 돌라 하신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이셨다. 그냥 눈 감고 막연하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면 안 된다. 지금 나의 상황이 어떠한지 두 눈 뜨고 정확하게 봐야 한다. 직시해야 한다. 바로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채 피상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절망의 끝에 서 봐야 한다. 믿음은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정확히 보고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 주위를 돌 때 어떻게 할지 조목조목 말씀해 주신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그 앞뒤로 이스라엘 군사들이 행진하라고 하셨다.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희년이나 절기에 부는 양각 나팔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예배와 찬양을 가리킨다. 나팔은 또한 기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민 10:9). 전쟁에 나갈 때 나팔을 부는 것은 온 백성이 긴급하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에서 나팔을 불며 언약궤를 메고 행진하는 것은 예배의 행진, 기도의 행진을 의미한다. 이 행진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라고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여리고를 돌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믿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이 행진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여리고 성의 불가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황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매일,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 여리고 성을 돌았는지 보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행진하니라(수 6:12).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수 6:15). 그들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았다. 양각 나팔을 불며 주님을 바라보면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아마 한 시간 정도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 새벽, 문제의 한복판에서 성벽을 무너뜨리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한 것이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교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있다. 일어나자마자 먼저 바쁜 일부터 하거나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이메일을 체크하거나 해서는, 우리 삶에 다가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길 힘을 얻지 못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일어나자마자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문제 속에서 먼저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걸음을 주님께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다음에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걱정만 한다. 기도는 사람, 매일 열심히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람은 기대한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매일 새벽 한 시간, 주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새벽, 날이 밝기 전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매일 기도하라. 먼저 기도하라. 숙제처럼 기도하라. 그러다 보면 더 이상 숙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침묵이 기도가 되다여호수아가 성벽을 도는 백성에게 명령한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수 6:10).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행진하라는 명령이다.침묵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 불평을 막는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면, 누군가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와, 저 성벽 좀 봐! 정말 대단해. 우리가 이렇게 성벽 주위를 돈다고 저 대단한 성벽이 무너지겠어? 여호수아 장군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말’이다. 여호수아 세대의 부모들은 말로 망했다. 여호수아도, 그 백성도 부모 세대가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한다. 입을 다문다. 둘째, 침묵은 기도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한 번씩 언약궤를 바라보고 양각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리고 성의 위용에 놀라 의심했겠지만, 불평과 의심의 입을 다물고 계속 양각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도는 가운데 그들의 침묵은 기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 침묵의 행진, 기도의 행진을 하면서 믿음이 커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으로 외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다.말이 인생을 결정한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면, 그 말이 내 삶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말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려면 매일 기도하되, 마음에 믿음이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 믿음의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말을 하라. 그때 역사가 일어난다. 끝까지 순종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하게 순종했다. 상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그들은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 그렇게 도합 열세바퀴를 다 돌았다. 한 바퀴씩 돌 때마다 성벽이 조금씩 금이 간 것도 아니다. 어떤 조짐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철저하게 말씀대로 순종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다! 이 순종 행위의 핵심은 무엇인가? 기도의 행진, 예배의 행진이다. 아침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끝까지 순종해 보라.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답답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나는 무슨 생각부터 하는가? 여리고성이 무너졌듯이, 내 삶에서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매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라.
기도
기도의습관
주님의기도
여리고성
침묵과기도
기도와기적
진정한 겸손을 추구하는 다섯 가지 방법
by Randy Newman
2022-04-25
나는 최근에 그랜드 캐니언 방문이라는 비할 데 없는 기쁨을 누렸다. ‘방문’이 꼭 맞는 표현은 아니다. 알다시피 그랜드 캐니언은 단순히 방문하고 끝나는 곳이 아니니까. 그곳에 가는 사람은 예외 없이 감탄하고, 경외하고, 그 앞에서 숨을 고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연의 장엄함에 사로잡혀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랜드 캐니언을 떠날 때 당신은 작아짐을 느끼는 동시에 커짐을 함께 느끼는 어떤 병치된 감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경험은 그랜드 캐니언에 의해서 ‘캐니언되었다’(canyoned)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랜드 캐니언과 같은 아름다움을 창조한 하나님이 내 영혼의 구주라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복음이 만드는 겸손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은 우리를 더 작게 그러나 동시에 더 크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겸손에 대해서는 적절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신중하게 정의되고 묘사되어야 하며 또한 정확하게 표시되고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에 관한 몇 가지 흔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혼란을 주는 겸손나는 몇몇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냥 벌레에 불과해." 또는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저 빈 그릇일 뿐이니까.” 나는 이런 말이 겸손에 대한 건전한 견해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며,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 구속되고 축복받았는지를 선포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와 일치할 수 없다.겸손에 대해 혼동하긴 쉽다. 루이스(C.S. Lewis)가 새로운 유혹자를 훈련시키는 일을 맡은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입에 어떤 지시를 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네 환자가 겸손해졌어. 그로 하여금 그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었어? … 마음이 정말로 가난해진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은밀히 자리 잡는 만족스러운 느낌 말이야, “오우! 난 지금 완전히 겸손해졌어.”라고 외치는 그 때를 정확하게 포착해야만 해. 그러는 순간에는 거의 즉시 교만이, 스스로의 겸손함에 감탄해 생기는 교만이 반드시 고개를 들거든. 그런데 그가 그런 위험마저 깨닫고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억누르려고 한다면, 바로 즉시 다음 단계에 돌입하는 거지. 교만을 누르려는 노력까지 하는 대단한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교만이 생기도록 말이야. 이런 과정은 여러 번 거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러나 너무 오래 하는 건 안 돼. 네가 그의 유머 감각을 깨우고, 또 더불어 어떤 반복성이 주는 공식 같은 것을 깨닫게 만들면, 그는 그냥 피식 웃으면서 잠자리에 들지 모르니까 말이야(스크루테이프 편지, 69).겸손의 정의메리암 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은 겸손을 “교만이나 오만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정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정의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교만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사전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이다. 나는 로마서 12:3에서 적용한 이런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따라서 겸손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험은 평생 계속된다. 겸손의 묘사겸손에 대한 명확한 생각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가 쓴 짧은 고전, ‘겸손: 거룩함의 아름다움’(Humility: The Beauty of Holiness)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통찰로 글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겸손을 촉구하는 세 가지 큰 동기가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피조물이며, 죄인이고, 성인이라는 사실이다”(10).첫째, 우리는 내가 나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고, 내가 내 출생의 세부 사항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겸손해야 한다. 당신은 왜 1300년대에 어둡고 가난하고 질병에 휩싸인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당신의 폐에 당신의 힘으로 공기를 주입할 수 있는가? 재능 중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계획에서 나온 게 있는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바울의 통찰력 있는 질문을 생각해 보라(고전 4:7).둘째, 우리는 타락했기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죄인, 반역자, 범법자, 거짓 신을 숭배하는 자이다. 바울이 구원 전 우리의 이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셋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딛 3:5), 그리고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엡 2:9), 오로지 은혜로 구원받았다. 겸손의 드러남겸손에 대한 핵심 구절은 빌립보서 2:1-11이고,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의 완전한 본보기로 소개된다. 5절이 그 중심에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를 적용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겸손하신 것 같이 나도 겸손해야 한다.” 그는 참으로 우리에게 최고의 모범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최고의 희생이셨기에 그 모범을 따를 수 있다. 이 장의 처음 구절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당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연합이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1-4).구분되는 겸손겸손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이 드러내는 구체적인 내용을 떠난, 막연한 생각과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겸손은 자신을 나쁘게 여기는 게 아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얼마든지 역겨울 정도로 나를 칭송하는 갖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복음이 빚어낸 겸손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단련을 받는다. 그런 거리는 놀랍게도 우리를 통회와 확신의 자리로 이끈다. 그런 간격을 느끼는 자리야말로 진정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적절하고 완전한 이해를 갖게 하는 장소가 된다. 나라는 존재에게는 은혜 대신 진노가, 칭의 대신 심판이, 그의 영이 내주하시는 대신 하나님과의 분리가 합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오늘도 겸손한 담대함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겸손의 추구빌립보서 2:1-11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 유의하라. 1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겸손을 추구하는 일에서 우리에게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몇 가지 실용적인 제안을 소개한다. 육신의 기도우리 몸의 위치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무릎을 꿇고 중보기도하고, 팔을 들어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손바닥을 펴는 기도로 우리는 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스스로 힘을 내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엄격한 고백C. S. 루이스의 입을 빌어서 말하겠다. 그는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이렇게 썼다.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고 생각할 때, 종종 나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곤 한다. 물론, 이건 내가 나 자신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내가 간구하는 것은 나를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라, 나를 봐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와 봐주는 것(excusing)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용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넌 이런 짓을 했지. 나는 네 사과를 받아들인다. 앞으로 나는 이 문제를 다시는 네게 거론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둘 사이의 모든 것은 이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봐주는 것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넌 어쩔 수가 없었어. 그게 아니면 그런 짓을 한 게 네 진심은 아니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게 진짜 네 잘못은 아니야.” 정말로 탓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와 봐주는 것은 사실상 완전 반대이다(178–79).겸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봐주는 게 아니라 용서해 달라고 정기적으로 구하는 습관을 만든다. 정기적인 금식간단히 말해서, 단식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의지하기에 좋은 상태가 된다. 금식의 종류는 다양하다. 모든 금식의 형태가 다 겸손을 향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 외부를 향한 중보기도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물리적 생계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과 “나라가 임하시오며”(교회 성장의 가장 광범위한 범위)를 포함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국가에서 복음이 더 전파되도록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오퍼레이션 월드(Operation World)는 각종 책과 앱을 통해서 우리의 중보기도가 더 큰 범위에서 일하며 동시에 겸손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타인 중심의 대화말이 대화이지 많은 경우에 대화는 양쪽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독백으로 끝날 때가 많다. 복음으로 겸손하게 된 사람은 상대가 더 말하도록 대화를 이끌어 간다.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하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방법으로, 빌립보서 2장이 말하는 겸손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하다. 고개 숙여 절하고 우뚝 서다어떤 사람들은 그랜드 캐니언 앞에 서 있으면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거의 2,000제곱마일[길이 446km, 폭 6.4-29km]에 이르는, 1마일 깊이의 캐니언 골짜기가 고작해야 키 173센티미터인 내 몸을 왜소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온 우주의 창조주와 내 몸의 창조주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분명히 나 자신을 미세먼지처럼 하찮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랜드 캐이언보다 훨씬 더 위대한 놀라움 앞에 나는 서 있다.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 안에 …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2:1). 이런 십자가의 진리는 내 속에서 낮아지게 하는 동시에 우뚝 서도록 만드는 겸손함을 키운다. 원제: You Are Not Nothing: Five Ways to Pursue Real Humility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겸손
금식의유용함
C.S.루이스
영광의무게
앤드류머레이
스크루테이프편지
그랜드캐니언
슬픔과 근심 앞에서도 희망을 품는 세 가지 이유
by Alistair Begg
2022-04-24
우리 대부분은 감정과 경험의 혼합체이다.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추한 것이 시시때때로 우리를 덮친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과 경험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신자로 산다는 것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특히 걱정과 슬픔에 직면했을 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그녀의 책 ‘피난처’(The Hiding Place)에서 첫 번째 철도 여행을 고대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여행이 몇 주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수시로 아버지에게 가서 표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할 거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행여 표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여행 당일에 표를 못 구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통해서 그녀가 배운 교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표를 주시는 날은 여행 당일이지 그 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그 표를 지키신다. 마음의 상처와 실망,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개인적인 실패를 겪는 순례를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이 참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현세에서 영원으로 여행하는 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만 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표를 주실 것이다. 그 날이 오늘이라면, 표가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중이다. 오늘이 아니라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감정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또 걱정이 우리를 몰아붙이게 놔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독단적이고 비인격적인 세력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에게 고난의 때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1.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31:14–16).“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재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되새기게 하는 문장이다. 시편 31편의 첫 구절을 보면 다윗이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몇 구절이 지나서 그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고통의 상태로 즉각 돌아간다. 이런 식의 고통과 기쁨의 순환은 기독교 순례자에게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실망과 괴로움의 반복은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꽤나 흔하게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들고 있는 모든 짐, 두려움, 공황, 근심, 마음의 고통을 다 내게 가지고 오라. 대신 내 멍에를 메어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베푸는 사랑의 통치 아래에서 살도록 하라. 그러면 너의 영혼이 영원히 쉼을 얻을 것이다(마 11:28-30). 이것이 바로 안전의 약속이다. 짧든 길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슬프든 행복하든 우리의 시간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해야 할 선한 일을 주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무한한 날과 함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곳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2.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인정한다슬픔은 우리를 극도로 압도할 수 있는 감정의 한 예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경험이 많을 것이다. 내 경우 십대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이 내가 느낀 첫 압도적인 슬픔이었다. 그날 이후 그 어떤 것도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믿음이 슬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 굳이 오랜 신앙생활이 필요하지는 않다. 바울은 친구 에바브로디도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썼다.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이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너에게 겹치는 근심이 생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빌 2:27).에바브로디도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울은 아파했다. 물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실을 경험하는 것, 또는 상실의 가능성 앞에서는 진정한 슬픔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슬픔은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힘들게 만들고, 그로 인해 어떤 기쁨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슬픔이라는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언젠가 슬픔이 그보다 훨씬 더 큰 기쁨으로 구속될 바로 그 현실을 말이다. 그리고 슬픔은 다름 아니라 우리 주께서 개인적으로 겪은 현실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3. 예수님은 슬픔과 소망이 공존하게 하신다예수께서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셨을 때,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그분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슬픔을 보이셨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기 직전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진심으로 슬퍼서 우셨다. 이 장면이 드러내는 신비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랑하는 친구를 잃으셨을 때 진짜 눈물을 흘리신다는 점이다(요 11:33-35).성경은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이룬 승리의 실재를 소개하지만, 결코 화려하고 무정한 승리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알렉 모티어(Alec Motyer)는 이렇게 썼다. “눈물은 신자에게 적합하다. 실제로 눈물을 더 많이 흘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부드러움과 생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훨씬 더 민감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상실과 외로움이 주는 괴로움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든 고통이 그칠 그 날을 계속 갈망할 뿐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예수님을 우리의 모범으로 계속해서 바라볼 때, 예수님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생명”(요 11:25)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런 사실을 바로 알게 될 때, 걱정과 슬픔이 넘치는 삶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소망으로 마음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원제: 3 Reasons for Hope in the Face of Grief and Wor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감정
위로
고통
부활의의미
천국소망
코리텐붐
나사로
슬픔과근심
하나님의감정
결정공포에 빠진 Z세대를 위한 소망
by Aimee Joseph
2022-04-19
선택지와 기회가 부족했던 지난 세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밀실공포증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살았다. 반대로 선택지와 기회가 넘쳐나는 현재 세대에는 별난 광장공포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겉보기에는 선택권이 많으면 결정의 부담을 덜 것 같은데,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수세기 전에 현명하게 관찰했던 것처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Z세대는 이러한 현기증과 공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전 세대에는 없었던 선택의 자유와 자기표현의 자유가 넘쳐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난 이 인구 집단은 이제 자유의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평생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산다. 너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정의하고 재정의할 수 있다. 너만의 독특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합의된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명확한 표시와 방향이 없으면, 이러한 자유는 곧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한다. 순간의 결정부터 기념비적인 결정까지, 결정이라는 특권은 문제로, 그리고 이 문제는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으로 바뀌기도 한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어떡하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어떡하지? 어떤 조언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내 감정과 욕망이 나를 이끌도록 신뢰해도 괜찮은 건가?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채 홀로 결정의 벼랑에 서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성삼위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알게 될 때, 결정공포는 찬양으로 바뀌게 된다. 결정공포 파헤치기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알면 결정을 내릴 때 경험하는 공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의 밑바닥에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수치에 대한 두려움 같은 여러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직업, 살 곳, 인간관계 중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특권에는 그림자가 따른다.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그 뒤에 찾아오는 비난, 후회와 결과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그것이다. ‘나’가 최고 결정권자일 때, 그 결과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실 때, 우리는 그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다(시 55:22). 우리를 공포로 몰아가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예비하심 기억하기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시대에 성장한 Z세대는 몇 번의 클릭이나 스와이프로 최신 트렌드를 따르고 전문가의 조언을 찾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입력과 정보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지만, 기독교는 다른 것을 제공한다. 바로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은혜로운 섭리의 손으로 우리의 삶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을 발견한다(롬 8:28). 아들 안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우리 앞서 걸으시는 개척자를 발견한다(히 12:1-3).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연약함과 유혹을 아시는 분, “나에게 은혜와 도움을 구하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다(히 4:15-16). 성령 안에서, 우리는 삶의 인도자, 위로자, 진리의 안내자 되시는 분을 발견한다(요 14:15-17, 26-27). 그분은 결정의 벼랑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결정한 길을 동행하시며, 우리가 결과와 씨름할 때 함께하신다. GPS 내비게이션이 어디로 갈지 알려주는 데 익숙한 세대에게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처음엔 낯설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두려움은 찬양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앎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한 길 추구하기수백 또는 수천의 가상 친구들이 서로의 삶을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디지털화된 세상 속에서, Z세대들이 현기증과 공포를 경험하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견고한 희망을 얻고 때를 따라 인도하심을 받아 현실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으신다(창 1:27-28).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적 선택 의지라는 특권을 주셨고, 이 땅에서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의 말씀, 살아 있는 말씀 안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을 알려주셨다(히 4:12-13, 딤후 3:16-17).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규범이 되는 명령과 친절한 모범을 주셨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을 제한한다.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희망과 전망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시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본다(창 45:4-15). 시편은 우리가 혼란이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시편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당신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시 25:9-10, 43:3-5).광란의 피드와 뉴스 동영상이 윙윙거리는 세상에서 Z세대는 당연히 결정에 대한 압박감과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시대는 평화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색다른 길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항상 알려주시지는 않지만, 우리를 공황 상태에 내버려두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 앞에 펼쳐 있는 광장과 우리에게 주어진 무수한 기회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말씀 안에서 예비해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과 함께 그 광장과 기회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원제: Hope for Gen-Z’s Decision Panic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창호
Z세대
결정공포
성삼위하나님
자유와불안
자유의현기증
선택과기회
광장공포증
밀실공포증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by Scotty Smith
2022-04-17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부활주일묵상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3-6(새번역) 기도부활하셔서 다스리시는 주 예수님, 베드로 사도의 이 당당한 산 소망과 기쁨의 선포에 우리도 함께합니다. 주께서 죽음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저 어떤 국면을 바꾼 사건(a game changer)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꾼 사건(everything-changer)이니 그렇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는 죽는 것도 두렵지 않으며, 두려움에 빠져 살지도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불행한 방랑자가 아닙니다. 소망 가득 품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입혀 주신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공허한 잠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고전 15:14-19). 주님은 완전히 새로운 질서, 곧 구속과 회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열매요 보증입니다. 모든 슬픔이 비현실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그날을 갈망합니다.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미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모든 악한 통치와 권세와 세력이 이제 패배하였으며, 언젠가는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날을 고대하면 기뻐 외칩니다. 예수님, 주님의 죽음은 죽음의 죽음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 의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경이와 환희와 감사가 오늘 우리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 용서받았습니다! 우리, 사랑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이 생명의 소망과 크신 사랑의 빛 가운데서, 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영원한 유산의 빛 가운데서, 우리의 남은 나날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은혜 가득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원제: Easter Sunday: “The Lord Is Risen! He Is Risen Inde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부활주일
산소망
부활의기쁨
새하늘과새땅
부활의소망
죽음의죽음
죽음후의삶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by Scotty Smith
2022-04-16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토요일묵상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62-64(새번역) 기도예수님, 주님의 가족과 제자들이 성금요일 밤에 어찌 잠들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깊은 슬픔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고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주께서,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더 이상은 종교계의 현 질서를, 로마 제국의 정치 현안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며 말입니다. 토요일, 해가 떴을 때, 상상가능한 가장 억울한 죽음이 가장 큰 보상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조문들이 제거되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주님은 어둠의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모든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골 2:14-15).주께서 죽음의 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평화를 누리리라고는, 주께서 모질게 맞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치유를 받으리라고는, 주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초를 겪으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사 53).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었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지만, 주께서 혹시나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살아난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그들인지라(요 12:1), 살아난 예수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실로 어리석고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나시는 것보다는 해가 뜨는 것을 막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부활의 일요일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토요일의 적막은 이제 곧 일요일의 환호와 함께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 주께서 정말 살아나셨다!” 할렐루야! 외치고 또 외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 많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제: Saturday of Holy Wee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주간
성토요일
그리스도의무덤
고난받는종
이사야53장
“다 이루었다”
by Scotty Smith
2022-04-15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금요일묵상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새번역)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27:46(새번역)“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새번역)기도예수님,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을 “좋은 날”(Good Friday)이라고 부르자니 불편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영원토록 존귀하시고, 의로우시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신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그날은 결코 좋은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기쁘게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좋은 일입니다.십자가에서 주님은 뜨겁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눅 23: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 앞의 외침은 뒤의 외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려면 아들을 버려야 하셨지요.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보증했습니다. 아들을 버리셨으니 그들을 용서할 수 있으셨지요. 그리고 주님의 이 두 마디 외침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침묵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외침이 따릅니다. “다 이루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을 새롭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일은 이제 없습니다. 단 한 번에, 완벽하고 온전하게,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해에 이르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께 없는 죄를 대신 뒤집어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고후 5:21).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의로우신 주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부패한 우리를 위하여 아름다우신 주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주님의 희생과 사랑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수백만 년이 지나서도 어린아이의 경이로움과 무한한 감사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온전히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영원히 용서받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한없는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이제 주님의 완전한 의의 선물로 살고 있습니다. 머리 숙여 경배하고, 두 손 들어 찬양합니다. 가장 존귀하시고 가장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제: Good Fri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금요일
다이루었다
십자가의대속
십자가처형
가상칠언
십자가의용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by Scotty Smith
2022-04-14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목요일 묵상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1(새번역)“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새번역)기도예수님, 성주간의 오늘은 세족 목요일이라 부르는 날, 영광이 가득하고 은혜가 넘쳐흐르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 만찬이 이제 ‘주의 만찬’, 당신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매번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던 옛 언약 제도는 주께서 생명을 온전히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유효해졌습니다(히 10:12). 그렇습니다. 주님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받으셨기에, 주님은 이제 당신의 제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이 아름다운 낙담한 남자들을―몇 시간 전에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툰 남자들(막 10:35-45)을, 이제 곧 뿔뿔이 흩어지고 주님을 버릴 남자들을―사랑하셨기에,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주님은 이제 그들에게 당신의 드넓은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십니다.그런데 주께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보여주신 낮추심은, 이제 곧 벌거벗겨지고, 군중 앞에서 모욕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그리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씻겨 주실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신지요. 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사랑인지요(엡 3:14-19).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감사합니다, 주님. 차고 넘치고 놀랍도록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궁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이는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께서 주신 새 계명, 영원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이토록 중요한 명령을 어긴 우리를 용서하소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새로운 나날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주님의 거룩하고 사랑 많으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원제: Thursday of Holy Week: Maundy (Mandate) Thurs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주간
성목요일
세족목요일
발을씻겨주심
겉옷을벗으심
새계명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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