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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나의 회개를 기다리신다
by 유기성
2023-02-12
얼마 전 암으로 돌아가신 한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솔직히 경건한 신앙인이라기보다 교회 정치에 열심히 있으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은 참으로 신실했고 그중 한 명이 목사 사모였다. 평소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딸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아버지를 간병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배 시간에 아버지가 회개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서 회개하도록 하라니, 딸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한 마음을 주셨기에, 그녀는 아무도 없이 단둘이 있는 시간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회개하기를 원하세요.”이 말을 들은 그 장로님이 얼마나 노발대발 역정을 내시는지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평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회개하라는 딸의 말이 몹시 언짢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를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수는 없다”라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사흘쯤 지났을까, 장로님이 자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자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로님은 자신이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통증으로 다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던 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회개합니다”라며 통곡하고 회개하기 시작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도 “이것은 내가 잘못했다”라며 일일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고 누웠다가 또 회개할 일이 생각나면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그렇게 내리 몇 날을 회개하시다가 어느 저녁 아무 고통도 없이 편안히 소천하셨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시던 회개를 다 쏟으시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 가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아신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를 용납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 철저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유기성,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규장)의 일부를 간추린 글입니다.
회개
참회
고난, 오히려 위로
by 전재훈
2023-02-05
현대 사회는 개인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회이다 보니 이 시대 최고의 가치는 개인의 행복이거나 자유, 존엄 같은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고난이란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렇기에 고난은 피해야 하는 것, 그럴 수 없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는 리스크로 취급된다. 심지어 고난을 인간의 가장 큰 적이나 악으로 간주하기도 한다.이 세상 모든 사람이 고난을 싫어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완벽한 세상이라면 고난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고난이 존재하는 한 선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시 하나님이 존재하더라도 무능한 하나님일 거라고 조롱한다. 믿는 사람들조차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에게서는 다른 모습이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으셨다. 고난이 악에 불과하기만 하다면 예수님이 그 고난에 무참히 밟히실 리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약 1:2) 같은 말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성경은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며 그 고난이 유익할 때도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고후 4:17).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있던 그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고 했다.모든 고난 중에 가장 힘들고 아픈 것은 바로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다. 내 손톱 밑에 있는 가시가 남의 십자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되며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와 찬양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뿐 아니라 각자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라고 했던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월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서 주인공 맥이 하나님의 초대장을 받고 자기 딸을 죽인 범인이 보낸 것이라는 생각으로 초대에 응한다. 맥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때 맥의 친구가 병문안 와서 다소 비아냥거리는 말로 “그래. 하나님은 만났나? 하나님이 내게 전하라는 말씀은 없었나?”하고 묻자 맥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자네를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전하라 하셨네.” 고난은 고통이며 괴로움이지만 말씀을 떠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길 바란다.전재훈, 오히려 위로(아르카)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고난
고통
신정론
고난의위로
참 자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선택하는 자유
by 정현구
2023-02-04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그 관계가 복된 관계가 되려면, 관계를 이루는 법칙과 원리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반응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인격적 관계가 되려면 그렇게 만드는 조건이 필요하다. 자유가 바로 그 조건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맺어진 관계에서는 인격적인 관계가 나오지 않는다.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왕이 한 마을을 시찰하다가 아주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만났다. 그가 왕으로서 그녀에게 청혼하면, 그녀는 왕이 가진 권력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지못해서 승낙할 수 있다. 혹은 왕에 대한 사랑보다 화려한 왕궁 생활에 매력을 느껴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왕은 평민으로 변장해서 그 마을로 들어가 그녀와 사귄 후 한 남자로서 청혼했다. 그녀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왕을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는 인격적 관계의 기초다.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창 2:16)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셨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예’라도 응답할 수도, ‘아니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인간은 항상 ‘예’로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자유가 바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자기 결정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자유는 인간됨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도구이기도 하다. 잘 선택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선택의 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유를 가지고 선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하면 다음에도 선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그 선택의 결과는 선택한 자기 자신과 관계된 이웃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 그릇된 것을 선택하면 다음에도 그릇된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커지며, 그 선택의 결과는 자신과 관계된 이웃을 해롭게 한다. 피아노 연주자가 화성학과 연주법의 바른 원리를 따라 연주하기를 선택하고 계속 연습할 때 결국에는 어떤 곡이든지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어 자기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것과 같다.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 관계를 위해서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다. 그 자유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진리와 사랑을 선택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유지된다. 하나님이 동산의 많은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선악과는 금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때 그 자유를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을 기준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런 선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만든다.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관계는 자유가 없는 일방적 복종의 관계도, 순종이 없는 거역의 관계도 아니다. 자유를 가진 순종의 관계다. 자유를 가지되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 안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선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 안에서 참되고 옳은 것을 계속 선택하는 사람이 참자유자이다. 그러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정현구,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두란노)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자유
자유와복종
자유와순종
인간됨
남자가 주도하는 교회에서 내가 기쁘게 순종하는 이유
by Emily Anderson
2023-02-03
“여봐,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야. 절대 남자보다 뒤떨어지지 않아.” 교회 리더십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응답으로 쓴 그녀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처음 읽었을 때, 불편함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수년 동안 나는 남자가 주도하는 교회 리더십이라는 성경의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인스타그램을 읽는 순간 갑자기 교회에서 내 역할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의과대학을 다니는 젊은 여성으로서, 나는 내 의견이 제대로 인정받거나 또는 남자에 상응하는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두 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현실에 익숙한 상태였다. 그럼 나는 위선자인 걸까? 여성 리더를 금지하는 교리에는 복종하면서, 직장에서는 여성의 지위 상승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중적인 사람 말이다.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은 내게 여성 사역의 가치를 알려주셨다.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 경건한 여성 멘토, 그리고 성경 공부를 통해서 남자를 교회의 리더로 세운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라는 확신까지 확고히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핵심 진리 덕분에 나는 남성 주도의 목회 환경 속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1. 사역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현대 문화와는 달리, 베드로전서 4:10-11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맡은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울이 사역을 자신의 사역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역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역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에, 아무리 목회의 소명 또는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여자가 교회에서 리더십을 행사해도 된다는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교회 감독자가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자격을 명시하셨다. 디모데전서 2:12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현대 문화를 고려할 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명령은 무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13절과 14절을 같이 고려하면 새로운 해석이 드러난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첫 인간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결혼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교회 리더십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설계 구조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문화에서도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었던 동일한 모델이 오늘날 교회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2. 중요한 사역이 단지 설교로 한정되지 않는다. 목회 리더십에서 여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예 영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없게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단지 목회적 가르침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강단 밖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사역이 넓게 뻗어갈 수 있는지를 간과하는 우를 범한다. 복음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의 신앙생활이 지속적으로 축복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 신앙을 강하게 한 것은 설교와 더불어서 가장 힘든 학업의 시기를 보내던 중에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자매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과 환대를 모델로 해서 나는 학교에서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범 덕에 나는 불신자 동료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 사역을 통해서 교회 벽을 넘어서까지 불신자의 마음에 복음의 씨를 심으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 히브리서 6:10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를 격려한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여성 사역이 목회자의 설교보다 눈에 띄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와 신실함을 지켜보시고 축복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신뢰할 때 기쁨이 따라온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삶에서 목격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최근 과거에 쓴 내용을 보면서 나는 더 겸손해졌다. 내가 기도한 내용과 정반대의 결과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던 것이다. 나의 제한된 통찰력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가 대조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분의 뜻에 더 깊이 복종하게 되었다.하나님의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 덕분에 교회 리더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꺼이 복종할 수 있게 되었다. 제러마이어 버로스(Jeremiah Burroughs)는 The Rare Jewel of Christian Contentment(그리스도인의 자족이라는 드문 보석)에서 다음과 같이 꼭 필요한 말을 썼다. “자족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처분을 바라보고 또 하나님의 처분에 복종한다. …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 게 더 나은지 주님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시지는 않았다. 그러함에도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역을 주시고 또 그분이 세우신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자. 참으로 그렇다. 우리는 결코 남자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원제: Why I Joyfully Submit to Male Church Leader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리더십
여성리더십
보완주의
가장 힘들었던 대화,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이유
by Garrett Kell
2023-02-02
할아버지가 언제 일어나셨는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해가 뜨기 훨씬 전이라는 건 분명했다. 할아버지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그가 매일 아침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또 신문을 읽던 작은 식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지하실 벽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받은 각종 상과 사냥감을 들고 찍은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욕을 섞지 않고서는 단 몇 문장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욕을 배웠다. 보기에 따라서 무섭게 느낄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의 미소와 배꼽이 빠져라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은 바로 사라졌다. 할머니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내가 살면서 거의 본 적이 없는 수준의 서비스와 부드러움으로 가득했다. 할머니가 방에 들어오면 할아버지는 바로 일어나서 모든 수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교회에 갔다. 지극히 사적인(private)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 가족의 최고 어른으로서 식사 기도는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우리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백악관의 주인을 향한 욕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도 욕할 때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영적 부담2011년, 우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으로 가는 여름휴가 여행을 계획했다. 해변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거기 사는 조부모님이 우리 갓난아이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휴가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가족은 바빠졌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묵직한 부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강권하심이었다. 사실 몇 년 동안 할아버지의 구원 때문에 부담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런 대화를 직접 나누는 것을 왠지 나는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제 여든이 넘었고, 건강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주님께서 이번 휴가를 허락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과 하나 다를 게 없다. 복음을 믿는 내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마다 언제나 긴장한다. 할아버지와 나눴던 오래전 어렴풋한 대화는 내가 느끼는 긴장과 두려움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할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강철의 사나이, 나보다 거의 네 배나 더 오래 산 사람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앞으로 알게 될 지식보다 할아버지가 이미 잊어버린 게 아마도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죄를 회개하고 왕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할 생각을 하니, 너무 초조해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둘째, 할아버지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가 들은 설교만 해도 수천 번이 넘는다. 그러나 좋게 말해야, 할아버지는 복음에 조금 관심을 보이는 정도의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비록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하고 성실한 분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보여주는 열매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마 7:16; 갈 5:22-23).셋째, 그는 가족이었다. 나에 대해서 좋은 점, 나쁜 점, 모르는 게 없는 가족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종교를 조롱하고 우리 가족을 욕되게 하던 바람둥이 시절의 내 모습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내 인생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건 사실이지만, 할아버지가 내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내게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간구했다. 또 주변에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내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셨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약 30분 동안 복음에 관해서 분명하게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는 의문을 제기하고 또 의심 가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기꺼이 복음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은 편지와 그와 관련한 성경 구절, 그리고 내 친구 마이크 맥킨리가 쓴 훌륭한 책, 나는 참 기독교인인가?(Am I Really a Christian?)를 보냈다. 그 후로 우리는 한 번 더 대화를 나눴는데,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중생이라는 거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2012년 12월 17일, 할아버지는 55년 동안 함께한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출생지인 노스캐롤라이나 커리턱에서 추도예배를 인도하는 영광을 누렸다.씨가 뿌려지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영혼에 뿌려진 씨앗이 뿌리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셨기를 바라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함에도 한 가지 믿는 건 성경 말씀이 참되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느니라”(잠 29:25). 두려움은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칼 헨리(Carl Henry)는 복음이 진짜 좋은 소식이 되려면 제시간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복음을 나누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항상 순종한 건 아니었다. 아니, 거의 순종한 적이 없다. 그러함에도 이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끊어진 적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정말로 쉽지 않았지만, 그날을 돌이켜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내가 오늘 느끼는 두려움은 근시안적이다. 영원의 무게는 오늘도 우리를 압박한다. 복음 전파라는 맡은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더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정과 이웃, 그리고 학교와 일터에서 왕의 대사로 세우셨다(고후 5:20). 우리가 지금 속한 곳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담대하게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는 용기를 달라고 간구하라. 언젠가 우리가 그분의 아들 앞에 서는 날, 이 땅에서 나눴던 힘든 대화를 기억하고 더 감사하게 될 것이다. 원제: The Toughest Conversation I Don’t Regre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전도
가족전도
중생
종말적전도
선데이크리스천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
by 이재훈
2023-01-31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한국 사회에 실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 우영우의 사회 탐험기이다. 우영우 변호사가 의뢰인의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고민하다가 고래가 등장하는 환상을 보면서 시원하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장면이 아무래도 이 드라마의 백미이지 싶다. 시청자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우영우를 응원했고, 통쾌한 승리에 함께 기뻐했다.사회적 약자를 응원하고 또 그가 승리할 때 함께 기뻐하는 사회는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준다. 이것은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영우처럼 천재적인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회 전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요구 수준을 낮추고 그들이 이루어 내는 작은 성취에도 함께 기뻐하면 우영우의 감동은 멈춤 없이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는 장애인 촉진법이 엄연히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사업장은 법으로 정한 인원의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사업자가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에 과태료를 내고 그 의무에서 벗어난다. 남들 얘기일까?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파악한 즉시 시정하여 몇 명의 장애인이 정규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성도들의 요청사항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해 항의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들이 이해해 주게 되었고, 고용된 장애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게 되었다.교회에도 경영을 고려해야 하는 적지 않은 영역이 있다. 그런 데서는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려는 경제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며, 많은 일을 잘 처리하는 직원을 고용하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은 매우 비경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율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우영우가, 그 드라마가 보여 준 것이 바로 그 가치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하는 곳에서, 그렇게 함께하는 일터를 만들어 나가려고 애쓰는 곳에서, 우리는 경쟁이 가져다줄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감동에는 돈과 지식과 과학이 줄 수 없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감동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교회와 복음에 주목할 것이다.이재훈,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두란도) 중 “우영우는 어디에나 있다”를 간추렸습니다.
이상한변호사우영우
장애인
장애인촉진법
새해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의 목표로!
by Caroline Cobb
2023-01-20
2016년 이후 1월 초가 되면 남편과 나는 스물네 시간에서 마흔여덟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평가하는 동시에 새로운 해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작년 휴가 때, 나는 카페에 앉아서 저널에 이런저런 생각을 휘갈겨 썼다. 삶의 원칙을 수정하고, 읽어야 할 신앙 서적 목록을 정리하고, 또 내 삶에 꼭 정착시키고 싶은 영적 습관과 훈련과 목표를 적었다. 그러던 중에 떠오른 질문 하나가 열심히 펜을 움직이던 내 손을 멈추게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지?”순간 나는 내 동기가 반드시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유죄 판결을 받은 느낌이었다. 새해에 달성하고 싶은 영적 성장과 봉사를 계획할 때조차도 내 마음속 ‘우상을 만드는 공장’(idol factory)은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이런저런 목록과 목표를 만들 때, 나의 내면의 한 부분은 분명히 하나님을 원했지만, 또 다른 부분은 성취, 생산성, 종교적 확인, 신학 지식을 쫓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과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나는 또다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주 빠지는 두 가지 미묘한 왜곡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첫째,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음 정체성에 따라 사는 대신, 나는 또다시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님의 직원으로 살고 있었다. 둘째, 목적과 수단을 뒤섞어버렸다. 습관, 목표, 규칙을 만드는 외적인 행동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결심카페에서 그렇게 나를 겸손하게 만든 그 깨달음은 새해 목표를 세우는 당신에게 몇 가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질문은 던지게 할 것이다. 우리는 왜 영적 훈련에 참여하는가? 왜 굳이 삶의 규칙을 만들고 또 지키려고 하는가? 왜 새로운 기도 습관, 성경 읽기, 또는 소셜 미디어 금식을 실행하려고 하는가?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 또는 단지 명목상 하나님을 갖다붙일 수 있는 어떤 이차적인 혜택을 위한 게 되어서도 안 된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고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분을 더 많이 알고 만나기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시편 42편과 84편에서 고라의 아들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표현한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시편 42:1-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시편 84:2)시편 84편을 주해하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시편 기자는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이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비인격적인 신성한 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즉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만 충족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살아 계신 하나님은 결코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 민족이나 기독교 하위문화의 마스코트, 적절한 예배 환경에서 얻는 경험, 또는 문제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치료사도 아니다. 더더욱 매일 아침 “해야 할 일”에 해당하는 목록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체이고 활동하며 우리 곁에 계신 존재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실제로 접근해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목마른 사슴이 광야에서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 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먼 여행길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꿈을 꾸는 순례자가 된 듯, 그분과의 교통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길영적 지향의 모든 새해 결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잡는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 그 모두는 다 하나님의 임재로 가는 길, 하나님의 팔로 인도하는 방향타,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려는 이들을 위한 로드맵이다. 개인적인 변화 또는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 결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이다. 하나님만이 목적이고 핵심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일보다 낫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은이나 금보다도 낫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어떤 종교적인 성취, 잘 짜인 “예배” 경험 또는 마치 성경이 학술 교과서라도 되는 것처럼 공부하다가 깨달아서 내뱉는 비인격적 환희의 감탄보다 낫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부분이 마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기계적으로 표준화된 기독교 절차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행여라도 나는 지금 연극의 인물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만든 천박한 가짜 신을 쫓으면서 정작 진짜 하나님을 저 멀리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새해 목표로 성경 통독과 성경 암송을 결심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금식과 같은 영적 훈련도 고려하라. 삶의 규칙과 새로운 습관을 고민하자. 영양이 풍부한 기독교 서적을 읽고 또 신학과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자. 새로운 기도 습관을 세우고, 교회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또 지역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결심하자.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알고 만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모조품 또는 가짜 하나님을 쫓는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유익이 아닌, 오직 하나님 그분을 얻기 위한 영적 훈련과 습관을 만들어가자. 하나님이 목적이자 수단이다복음의 좋은 소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목표이며, 그분은 이미 우리가 자신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제공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중보를 통해,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얼마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다. 히브리서 4:14-16과 에베소서 3:12은 나의 의가 아니라 대제사장 예수의 의에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성령님은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신다. 우리 마음에 그의 법을 기록하시고, 그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감히 눈을 뜨고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영적 훈련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하는 삶에 씨를 뿌릴 수 있다. 새해를 맞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와 은혜의 비옥한 토양에 당신의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도록 하라. 그것보다 더 좋은 곳도 없고, 더 높은 목표도 없다.원제: This New Year, Make the Living God Your Go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새해목표
하나님의임재
영적성장
‘유신론/무신론 사용법’에서 ‘일반계시/특별계시 사용법’으...
뱅크스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by 김경호
2023-01-19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9.11 테러 이후 새로운 무신론이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무신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샘 해리스Samuel Benjamin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등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전제의 핵심은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신과 신앙, 종교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전제 위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공격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널리 퍼져나갔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신앙이란 비합리적이고 미개한 것이며, 종교란 인간을 이상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요? 공교롭게도, 이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유용한 두 권의 책이 친절하게도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무신론 사용설명서라는 책과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입니다. 전자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고, 후자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유신론 안에 무신론이, 무신론 안에 유신론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뱅크스와 드 보통의 글은 각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먼저, 뱅크스는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을 소개합니다. 이는 과거의 무신론의 대표적인 사람들의 주장 속에 비친 모습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신은 인간이 창조한 환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신은 상상 속 대상을 현실 속 대상으로 바꾼 인간적인 소원의 산물입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신을 압제 상태의 대체물이라고 정의하며, 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며, 자신의 반영만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신은 심리학적으로, 높임을 받은 아버지에 지나지 않은,” “억눌린 욕망의 투사”라고 정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원래 신은 이상화된 인간일 뿐이므로, 결국 신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은 권위주의적 종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주의적 종교/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은 모두 종교적 배경을 가졌고,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역할을 연구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뱅크스는 여기서 이 네 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신이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중요한 이정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포이어바흐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소원과 갈망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경우, 우리는 신을 통해 자신의 현세의 삶에서 부족한 것, 부당한 것, 뜻하지 않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우리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 의해 거꾸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프롬의 경우, 우리는 신을 권위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표상이라고 여기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뱅크스는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 낸 신, 또는 신을 대체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만큼 더 많은 우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에서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 사용법에 대한 자신의 전제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그리고 드 보통은 이 책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은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유한한 생애 동안에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마주쳐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위안이 되는 몇 가지 측면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얼마나 도발적이며 기발한 생각입니까! 드 보통은 이런 생각을 교리가 없는 지혜,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축, 그리고 제도에 적용하여, 유신론자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들을 들여다보며 어디 쓸 만한 것 없나 하고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먼저, “교리가 없는 지혜”에서, 드 보통은 수많은 고전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내는 것이 범죄가 아니듯이,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철저하게 무신론자의 전제하에(“교리가 없는”), 때때로 종교에서 발견한 유익한 것들(“지혜”)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에서, 종교는 유대를 강화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한 건축적 장엄함을 우리에게 빌려줌으로써, 예배 시에 서로 인사를 나눌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교회는 계층과 직위에 대한 집착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우리가 억지로 꾸미거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게 합니다. 교회의 식탁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의 속죄의 날은 분노에 대한 통찰과 용서를, 상처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경우, 희생자의 나약함과 가해자의 죄의식 모두에게 속죄의 날은 이런 모든 것들을 바로잡아 줍니다. “친절”에서, 만약 우리가 친절에 관한 적절하고, 솔직하고, 단순한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관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약아빠진 견해를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도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오히려 규제되고 인도하는 것을 당연히 전제로 해야 합니다. “교육”에서, 문화가 성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까지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경전에서 찾아내는 바로 그런 특성은 문화 예술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잘 조율된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애”에서, 성모 마리아의 숭배가 우리의 정서적 필요를 위해, 무엇을 밝혀주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의존성을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건강의 지표라고 봅니다. 오직 교만하고 허영심이 강한 사람만이 자기의 나약함을 부정할 것입니다. “비관주의”에서, 무신론이 빌려온 것은 이렇습니다. 종교적 비관주의가 오직 종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종교가 구원의 희망에 영원히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 하나밖에 없다는 무신론자의 기본적인 교훈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영위된다하더라도, 우리는 낙원을 믿는 사람들의 명민한 시각을 빌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점”에서, 세속적인 사람이 경외감을 경함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바로 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미술”에서, 특별히 우리의 미술관이 우리의 새로운 교회가 되어왔습니다.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줍니다. 물론 지루함도 느끼지만, 그곳을 나설 때만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건축”에서, 가톨릭은, 우리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기 위해서는 우리 주위에 훌륭한 건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서 고안된 세속 신전을 만들고, 우리의 희망을 일깨우는 기능을 담당하게 할 것입니다. “제도”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성스러운 전통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전통을 모두 적대시하며 내던져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전통에서 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측면을 찾아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사실상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리차드 로티Richard McKay Rorty는 평등권에 대해, 그는 자신을 일컬어, “기독교에 기식하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며, 무신론을 위해, 유신론의 사상인 평등권을 불러내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좀 더 분명한 신학적 기준과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입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용법으로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과 무신론을 위한 유신론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와의 관계와 많이 닮았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nam Kuyper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반계시란 하나님이 세상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보편적인 은총입니다. 일반계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똑같이 대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 살게 하십니다. 일반계시는 창조에 근거합니다. 반면에 특별계시는 타락 이후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타락과 구속에 근거한 특별계시는 타락과 구속 간의 상호 대립되어 있는 특징으로 인해 ‘반정립’Antithesis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간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영향이 있습니다. 첫째, 특별계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같은 비-기독교 국가의 영역입니다. 둘째, 특별계시의 영향만 받는 ‘제도적 교회’가 있습니다. 셋째, 특별계시의 빛이 밝게 비친 일반계시의 영역이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경우지만, 카이퍼는 이 영역을 기독교 국가 안에서 ‘비-고백자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특별계시의 영역, 즉 교회 밖의 유기체 교회입니다. 카이퍼는 이 영역을 교회 제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가장 이상적인 실천은 일반계시의 자료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과 “유신론을 위한 무신론 사용법”이 기발한 전략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기발함이 곧 정확함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략은 성경적-신학적 정확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사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신학이 말한 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라는 신념 때문입니다.
무신론
유신론
일반계시
특별계시
고난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 법
by Clarissa Moll
2023-01-14
남편 롭이 끔찍한 하이킹 사고로 마흔한 살의 나이에 떠났을 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나는 세상이 죄의 저주로 망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는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동일하게 내린다. 우리의 날들은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계수된다.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이 모두 창조하시고 선이라고 부르신 놀라운 태피스트리 속의 검은 실들처럼 흐르고 있다. 나는 “하나님, 왜요?” 또는 “왜 나에게요?”라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롭이 사망했을 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종종 물었다. 나의 길을 어둡게 만든 이 고통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비극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런 가슴 아픈 상실 앞에서 나는 세상과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 부부가 십년 동안 함께 쌓아왔던 삶이 내 발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살아남기를 원하고 또 다시 성장해가야 한다면 예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쩌면 고난당하는 자의 아이콘인 욥이 말한 것처럼 “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지 몰랐다. 나는 이제 유족들을 대변하고 돕는 사람으로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의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에 감사한다. 그가 학자의 예리함과 목회자의 마음으로 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실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사려깊음과 정직함과 희망을 가지고 헤쳐 나갈 수 있게 한다. 때때로 어떤 내용은 이제 막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고난받는 사람과 유족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성경적 지침을 제공한다. 자기 자신이 욥의 친구의 자리에 던져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욥의 친구들보다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현명하고 필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Suffering Wisely and Well: The Grief of Job and the Grace of God지혜롭고 온전하게 고통을 지나가는 법: 욥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 에릭 오틀런드(Eric Ortlund) 하나님은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고난의 고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할 수 있지만, 성경은 해답을 제공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삶에서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시련을 허락하신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죄를 회개하며, 구약의 욥의 이야기에서처럼 설명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 책에서 에릭 오틀런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시련을 탐구하여 각각의 영적인 목적을 밝히고,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독자들을 위로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고난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으나 또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욥기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의 의심,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포함한 중요한 문학적 묘사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각 장에서 세심하고 신중하게 분석한다. 이 책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동안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며 어떻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무엇을 말해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욥기를 한 장 한 장 지나갈 때마다 이 책은 고난당하는 자와 그들을 돕는 자들 모두에게 신뢰 할 수 있는 행로로 인도한다. 고난의 다양한 종류에 대한 간단한 개요 후에 저자 오틀런드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아주 가치 있는 내용을 제공한다. 그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간 대화에 대한 주해적 탐구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말하는가를 하나님은 아주 중요시한다”(169)라고 단언하면서, 오틀런드는 욥의 세 친구가 고난과 고난의 원인과 목적들에 대한 열띤 대화에서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분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독자들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뻔한 대답과 상투적인 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찡그릴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고난의 자세한 내용들을 분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했다는 데 있다. 저자는 종종 욥기서의 구절구절에 나타난 대화들로 우리를 데려가서 희생자를 탓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상실에 끼어들어서 그 원인과 목적을 분명하게 분별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냉담한 위로와 그런 가증한 온유함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79). 그러나 당신이 내가 대화해 본 많은 선의의 친구들과 가족들처럼 당신의 삶에서 어떤 상처받은 한 사람을 돌보는 입장이 된다면, 단지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보다 더 이상의 것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적절한 말을 해야 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오틀런드와 욥기서의 기자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틀런드는 욥의 친구들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조용히 욥의 잿더미 속에 합류하고 있는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와 좌절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위대한 장면을 보여주신다. 당신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준다. 모든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오틀런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매력적인 토론을 통해서 고난당하는 자를 돕고자 하는 모든 친구들과, 또 고난당하는 모든 성도가 마음에 항상 지녀야 할 지혜의 핵심을 제공한다. “자신의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장 명확히 보시는 그분은 그 세상을 그대로 영원히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사는 바로 그분이다”(157). 당신이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고 또한 지혜롭고 온전하게 고난을 지나가기를 원한다면, 이 지혜가 당신의 말과 발걸음을 인도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선한 의도, 신학적 명확성, 또는 성경적인 증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려고 시도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오틀런드와는 달리 나는 여기서 ‘시도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도와줄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대신 오르크런드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이상적인 친구로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비난할 때 분노나 가로막음 없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욥의 그릇되고 오해로 빚어진 불평도 친절하게 받아주신다. 하나님은 비꼬거나 비하하지 않으시고 판단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분노,슬픔,의심, 좌절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그의 곁에 계시기로 하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질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표면적인 위로로 행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시간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에서 행해야 한다.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시련은 종종 무력감과 절망감을 동반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바꾸거나 완화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온갖 시련을 인내할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분을 기다리면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이것은 레몬을 레모네이드와 같은 달콤한 것으로 바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그분 앞에 가져가야 한다” 욥기서는 필요하다면 우리가 슬픔을 속속들이 표현할 수 있다고 곳곳에서 거듭해서 가르쳐준다. 더 나아가서 고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가혹하고 가학적인 자기 점검으로 자신을 몰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슬픔을 매듭으로 단단히 묶고 고통이 끌어내는 교훈을 얻겠다고 자신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언제나 신실하기를 요구하신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의 위로를 걸러내어야 한다. 금을 건지고 나머지는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당신의 기도가 화가 나 있고 절망에 소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악의 무시무시한 영역을 꿰뚫어 보시면서 거기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항상 돌아가야 한다. 원제: How to Walk Faithfully Through Suffer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성도의고난
영성
묵상과기도
욥의고난
회복과약속
고통의경험
고난의목적
자초지종을 잘 모를 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by Megan Hill
2023-01-13
얼마 전 지인이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목회직에 면직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역도 관계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문제가 생기게 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면직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렇지만 나는 그의 편지에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하고 인생을 바꿀 만한 문제에 부닥친 그 친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빠진 조각교회에서, 그리고 특별히 사역에서, 우리는 빈번하게 도전적인 상황에 대해 듣게 되고 또 응답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전체 이야기의 작은 부분만을 안다.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에 관해 부풀린 이야기나 아니면 치우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죄를 폭로하지 않으려고 이야기의 일부만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잠언은 정보 없이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경고한다: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 (잠언 18:17)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 (잠언 18:13)때로 우리는 전모를 파악하여 더 완전한 그림을 얻기도 한다. 양 당사자 모두 우리 동아리 내에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두 사람이 성경에 기초하며 갈등을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내 지인처럼, 자초지종을 모두 또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나 관계도 있다. 세부 사항 전부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때도 있다.이처럼 전체 이야기를 파악할 수 없을 때라면, 이메일이나 커피 또는 주일 친목 점심 식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정말 안됐어요’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떤 상황에 죄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죄이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고수하는 기독교 신념이 고용주에게 불쾌감을 주어서 해고당한 교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게 되셨다니 정말 안됐어요.” 결근을 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교우가 있다? 그때도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니 정말 안타까워요.” 죄와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죄와 고통에 대한 슬픔은 올바로 표현할 수 있다.‘감사합니다’내가 받은 그 이메일의 경우처럼, 최고의 답장은 “당신의 오랜 섬김에 감사드립니다”일 것이다. 어쩌면 “힘든 시기에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라거나 “걱정해줘서 고맙다”일 수도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일 때도 있다. 상황에 대해 언급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사람이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같이 기도해요’우리 주님은 우리가 모를 때에도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는 주님이 일하시도록 겸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을 변론하시고, 죄를 지은 사람을 책망하시고, 서로 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시고, 그의 아들을 높이시도록 요청할 수 있다. 기도는 또한 우리 각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여 부르짖게 하는 훌륭한 평형 장치이다. 전체 이야기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함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됐다.원제: What to Say When You Don’t Have the Full 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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