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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by Gavin Ortlund
2019-01-09
현대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은 중세 교회의 가치를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해, 정말로 잘 모르는 듯하다. 우리가 가끔 교부들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주로 최근(개신교)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많다. 여러 복음주의자들이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는 복음주의자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휘튼 대학의 교수이며 오푸스(Opus: The Art of Work) 설립자인 크리스 암스트롱(Chris Armstrong)은 “신앙에 있어서 중세 크리스천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 시대 크리스천들의 독특함에 있다기 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전제들과 더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의 새 저서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 C. S. 루이스와 함께 잊혀진 시대의 신앙 발견하기'(Medieval Wisdom for Modern Christians: Finding Authentic Faith in a Forgotten Age with C. S. Lewis)는 중세 교회를 좀 더 잘 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의 다양한 문제점과 결점을 바로 잡기 위하여 중세 교회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C. S. 루이스를 중세 교회의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사용하고 있다. 중세 기독교 평가하기암스트롱은 전통에 대한 중세의 관점, 중세 신학과 윤리학, 중세의 병원 창설, 마음과 정서에 대한 중세의 관점 그리고 자연 신학과 성육신에 대한 중세의 관점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거나 악령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여겼다와 같은 중세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오해들을 하나씩 해체한다. 그는 중세 크리스천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전염병이 있을 때 병자들을 돕는 그들의 용기에서, 그들의 신앙적 글들에서, 그들의 금욕적 실천에서, 그들의 예술에서, 그리고 영적 성장에 대한 그들의 통전적 접근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이 모든 영역들 중에서도 중세 사람들이 이해한 성육신 교리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암스트롱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핵심 진리는 중세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것은 중세 크리스천들을 더 체화되고 통전적인 '지상의' 기독교로 이끌었다. 중세 기독교는 믿음과 이성, 머리와 가슴, 육체성과 영성, 말씀과 성례, 수도원적 묵상과 학술적 추론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다루었다. 암스트롱은 “이 책 전체는 우리가 성육신 교리를 놓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루이스는 중세의 다양한 신앙과 실천을 소개하는 가이드로 봉사하고 있다. 2장은 루이스가 그의 직감적 상상력으로, 그 자신의 신학으로 중세를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은 루이스가 특정한 주제들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시작한다. 암스트롱은 루이스의 저술들뿐 아니라 중세 신학과 문헌들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저자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 책이 전체적으로 폭넓게 제기하는 여러 논점들을 독자들이 더 명확하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현대 기독교 비평에 중세 기독교 사용하기암스트롱은 중세 기독교 탐구를 단순히 학술적 활동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현대 개신교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기를 원한다.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중세 시대를 방어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를 공정하게 엄격히 비평한다. 암스트롱은 현대 기독교를 ‘즉시주의’(immediatism)라고 부르며 꼬집는다. '즉시주의'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현대 사상의 세 가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1) 새로움 추구(‘연대기적 속물근성’) (2) 즉각적인 결과 갈망(‘압박된 실용주의’) (3) 본 그대로 이해하는 식의 앎에 대한 단순한 견해(그는 이것을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현실주의와 연관시키면서 ‘상식적 인식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현대 ‘즉시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차원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배에 다양한 형태의 매체를 사용하는 점에 대하여 현대 크리스천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예전적 표현들, 성직자의 중보와 리더십, 성례에 대한 확고한 견해, 예배에 예술을 활용하는 것 등에 관하여 편견이 있다는 말이다.암스트롱은 현대의 ‘즉시주의’와 비교하여 중세의 ‘성례중시주의’를 강조한다. 성례중시주의는 “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우주에 대한 현대의 견해가 척박하고 기계적인 것과는 달리 중세 사람들은 생명과 물질 세계에 통전적으로 접근했다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 전반에 주입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음식과 성과 감정조차도 영적 존재인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평가될 수 있다는 말이다.현대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중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내포된 중요한 의미를 간과해 왔다. 우리의 일, 문화 형성, 고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 등이 중요하게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균형적으로 ‘비평’하기중세 신학에 관심이 있고 최근에 성 안셈(St. Anselm, 1033–1109)에 대한 학위논문을 마친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중세 교회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암스트롱의 입장에 공감한다. 이 경우는 특히 훌륭하게 기술하는 능력이 있는 저자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했다.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전달력이 있고 통찰적이며 인상적인 책이다. 현대 크리스천들이 중세 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을 여러 방식으로 훌륭하게 구성하고 있다. 중세 신학을 연구하면서 나는 균형적인 ‘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여러 번 씨름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평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때로 균형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방치되었다고 여겨진 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기 쉬울 수 있다. 또한 바르게 잡아야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부풀려서 말하기가 쉽다. 한쪽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너무 상반된 쪽으로 가기가 쉽다. 학문의 세계는 특히 이러한 경향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장이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에서 배울 이유가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는 형편없고 그들은 훌륭하니까 그들이 우리를 바르게 잡을 수 있다”와 같은 생각마져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암스트롱의 저서는 이러한 면에 민감성을 보인다. 그는 과거에 빠지거나 과거를 현재를 먹이는 ‘카페 양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독자들은 특히 개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중세 교회가 많은 결점이 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타당성이 어떤 면에서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암스트롱이 복음주의의 사상이나 경건과 다른 중세의 지혜들을 비교연구하여 서술할 때 여러 지점에서 내게도 의문이 들었다. 그 예로 암스트롱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부분, 연옥, 화체설을 언급하는데, 주로 이 교리들을 지지하면서 이것이 희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듯 보였다. 그가 그 교리들을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재편성했다고 비평한다. 그는 또한 중세 사람들의 마리아 숭배 신앙은 “구원 역사에서 핵심인 성육신에 대한 최초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로마 가톨릭의 열정적인 마리아 숭배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암스트롱은 개신교 독자들이 로마 가톨릭 신학을 따르지 않으면서 중세 교회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더 확실하게 분별하도록 도왔어야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종교개혁이 중세 기독교보다 실제로 더 진보된 영역이 어디인지가 불명확해졌다.겸허함과 관대함으로 중세 신학자들을 연구한 암스트롱의 의도는 훌륭하다. 하지만 좀 너무 관대한 것처럼 보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노리치의 줄리앙(Julian of Norwich)이 그리스도의 여성성을 표현한 점을 “정서적 신앙의 자연적 발현”이라고 방어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줄리앙의 원죄 교리에 대한 그의 비평은 너무 빈약했다고 본다. 암스트롱은 “줄리앙은 죄를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말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빈약한 비평을 내놓고 있다. 중세 지혜가 도움이 된다고 분별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기 보다는 괴이한 부분을 식별해 낼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과거로 말하기'현대 크리스천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전반적으로 믿을 만하며 주장이 잘 제기되었다. 개신교의 방향성이 중세 역사에 대한 ‘비평적 평가’가 목적이라면 이 책은 ‘평가’ 부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비평’ 부분에는 좀 약하거나 모호할 것이다. 우리는 중세 선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그 외의 여러 시대의 교회 역사에 비추어 그것들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 Can Learn from Medieval Christians번역: 정은심
역사
중세교회
CS루이스
크리스암스트롱
성육신
비평
교회가 소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가?
by Shaun Cross
2018-12-31
소비주의는 우리 사회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소비주의는 우리 삶에 깊이 배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일은 마치 공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모든 사람은 단지 살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하기 위해 산다. 우리는 ‘더 새로운 것’, ‘더 나은 것’, ‘더 많은 것’으로 내적 공허를 채우려고 애를 쓴다.그런데 주목할 것은 발표되는 연구마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뚜렷이 증명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오히려 더 적은 만족감과 더 낮은 성취감을 느낀다. 소비의 대상이 된 교회슬프게도 교회는 소비주의라는 덫에 쉽게 빠진다. 우리(교회)는 고객(교인)에게 품질 좋은 제품(하나님, 설교, 음악)을 주기적으로 공급한다. 교회라는 기업에서 담임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목자에서 CEO로 변한다. 그들은 성도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경영하려 든다. 장로는 하나님이 맡기신 양 떼를 보살피는 대신(벧전 5:2), 이사가 되어 회사의 이익을 관리하고 투자 금액에 맞는 수익을 보장하려 한다.나아가 직원은 거대한 괘종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반복적으로 사업 시행과 고객 만족의 업무를 수행한다. 또한 회원 수(교인)는 우리가 제품을 얼마나 잘 팔았는지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교회가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죽어가는 경우도 있다. 전도, 섬김, 봉사 활동이 하나님보다 교회의 브랜드를 견고하게 하고, 더불어 ‘대상’인 청중을 솔깃하게 하는 전략으로 전락하는 경우이다(여기서 ‘대상’인 청중은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다).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변질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인 성도들의 모임에서, 고객으로 가득 찬 상업적 기업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지점에 이른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죄인의 회심에는 큰 관심이 없다. 말 그대로 기업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는 건강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건강한 주님의 몸예수님은 우리를 소비하도록 부르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며, 정의와 자비를 행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초대교회가 보인 자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초대교회의 성도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서 음식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 가족을 위해 내가 어떻게 은사와 물질을 활용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보다 형제자매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초대교회에는 소비가 아닌 섬김이 있었고, 시장이 아닌 가족이 있었다.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소비주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은 바로 교회 개척이다. 교회 개척을 통해 적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소비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1. 교회 개척은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 ‘파송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새 교회를 개척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교회는 파송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인력, 재정, 자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새 교회를 지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할 좋은 목회자를 양육할 수 있을까? 복음 안에서 이처럼 협력하는 일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이런 질문은 교회의 임무와 목표, 그리고 방향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답을 따라 성도들이 고심하며 노력할 때, 이러한 질문들은 성도와 또한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비주의는 힘을 잃게 된다. 2. 교회 개척은 모두가 ‘섬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교회 개척은 종종 명확하게 정해진 사역 없이 조그맣게 시작된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사를 주셨을까?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어떤 은사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하고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다. 나는 교회에서 다음의 현상을 목격했다. 한 성도가 주기적으로 찬양을 인도하기로 자처했다. 그는 처음 지원했을 때 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교회에서 은사를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우리 교회는 무너졌다가 회복되고 있는 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정의와 자비 사역을 감당할 만한 구체적인 제도가 아직 없었다. 그에 따라 성도가 주도적으로 그러한 사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환경 때문에 예배와 성례를 단순히 소비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섬김을 통해 복음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다.다시 말해, 교회에 미리 준비된 직원과 사역 체계가 없었던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그들을 복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이다.3. 교회 개척은 숨거나 불편함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작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지 않으면,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님은 내 안에서 일하신다. 그 예로 작은 교회가 성도를 양육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보여 주신다.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교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교회보다 좀 더 큰 개척 교회를 가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교회 개척 팀은 종종 더 크고 체계적인 교회는 시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방문자를 섬길 수 있다. 왜냐하면 작은 교회는 왔다가 소리 없이 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즉 작은 교회에서는 소비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곳의 공동체를 소개받게 되고, 그렇게 한 번 뛰어들면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게 된다.교회 개척 자체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소비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성령님과 복음의 인도를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신부가 어떤 모습인지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교회의 소비주의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교회 개척은 이러한 시작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소비가 아닌 섬김의 자세를 갖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Church Planting Kills Consumerism번역: 하늘샘
교회
교회개척
소비주의
주님의몸
하나님나라
선교
파송
목자
초대교회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by Tim Keller
2018-12-26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전통적 교리를 지켜 온 크리스천들은 시대에 뒤쳐지고, 지나치게 배타적이며, 심지어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그러나 역사가이자 성경 학자인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들을 냈다. 바로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과 ‘도대체 처음 3세기 동안 왜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었는가?’(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이다.그에 따르면, 초대 교인들은,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이 보기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세력과 상업의 중심부에서 배제되었고, 때로는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허타도는 로마의 권력자들이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독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고 말한다.왜일까? 당시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신들을 모시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가정과 도시와 전문 길드(guild)는 각자의 신을 믿고 있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갈 때나 공적인 행사에 참여할 때, 그 집단이나 장소의 신들을 찬양하는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집이나 공동체 내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모독 행위였다. 이는 신들의 진노를 야기할 수 있기에 위험한 행위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신성한 통치권을 정당화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로마 제국의 신들을 경배하지 않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반면,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의례들 및 경배하는 행위들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했다. 유대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의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용인되었는데, 유대인은 독특한 민족 집단이며 이 독특함이 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종족들로 퍼져갔고, 대부분의 기독교 성도들은 이전에 이교도였다가 회심한 후 다른 신들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거부 행위는 막대한 사회적 분열과 문제를 초래하여 그들을 공적인 집회에 참여할 수 없게 했다. 가족 구성원이나 노예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경우, 그들은 돌연히 집안의 신들을 경배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이다.기독교의 확산은 그 문화를 구성하는 삶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회 질서에 대한 전복으로 간주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좋은 시민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배타적인 부류로 여겨졌다.기독교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세 가지 이유1-3세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대체 왜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을까? 왜 기독교는 그토록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일까? 사회적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기독교의 매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허타도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1. 기독교인들은 타인에게 거부감과 호감을 동시에 주는 ‘사회 변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기독교인들은 낙태와 더불어 원치 않는 아기를 쉽게 버리는 ‘유아 유기’의 관습을 금지했다. 또한 그들은 이성 간의 결혼 관계 외에 모든 성행위를 피했다는 점에서 성적으로도 반문화적이었다. 이는 특히 결혼한 남성의 경우에 창녀, 노예, 아이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반면에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돈을 사용하는 일에 매우 관대했으며, 그들의 가족이나 민족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특별히 그러했다. 또 다른 놀라운 차별성은 기독교 공동체가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한 정체성은 각자의 민족적 정체성보다 더 근원적이었고, 따라서 종교상 전례가 없는 다민족적 다양성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민족을 죽인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복수하지 않고 용서해야 한다고 믿었다.2. 기독교는 창조자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제시했다당시 주변에는 신들이 내려 주는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동방의 종교들도 각성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사랑의 관계는 그 어느 종교에서도 제공되지 않았다.3. 기독교는 영생의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영생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복음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기에,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바로 지금 믿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초대교회와 오늘우리는 이러한 연구가 갖는 현대적 적실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는 온갖 종류의 신들(deities)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위협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온갖 종류의 정체성(identities)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매우 배타적이자 사회 질서에 반하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와 같은 당시 상황 속에서도 번성했다. 왜 그러한가?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다르고 배타적이라고 놀림 받은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끌린 것은 ‘기독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교에 주변 문화와 다른 점이 없고, 문화를 비판하여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특징이 없다면, 그 종교는 불필요하게 여겨져서 생명력을 잃을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자선, 관용, 정의, 다민족성, 평화의 중재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인식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겠는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은 그 시작부터 성(sex)과 관련하여 세상 문화와 조화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교회가 아니라 문화였다.기독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어떤 문화나 종교도 갖지 못했던 것,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은혜로 인해 거저 주어지는 구원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종교도, 세속주의도 이 구원을 줄 수 없다. 다른 어떤 영적인 접근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진리는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가치관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초대교회는 분명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완고한 소신으로, 그들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 역시 이런 변혁을 갈망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We Need to Learn from the Early Church번역: 김재완
역사
초대교회
팀켈러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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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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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holas Needham
2018-12-20
11세기의 서유럽은 책봉 갈등으로 인해 극심하게 흔들렸다. 왕들이 교황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교황들은 왕들에 의해 쫓겨나며, 군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교회 내부에는 불화가 생겼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의하여 결국 새로운 유럽이 탄생했다.신학적 논쟁은 갈등의 중심에서 요동쳤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봉건주의가 처음 발전하던 시기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방에서는 5세기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새로운 사회적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 환경에서는 돈이나 정치적 직위보다 땅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많은 땅을 소유해서 더 힘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에게 땅을 하사했다. 그 결과 땅을 하사받은 자들은 상관들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하사하다’(grant)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페우둠’(feudum)이며, 여기서는 ‘봉건주의’를 의미하는 영어 ‘퓨덜리즘’(feudalism)이 생겨났다. ‘땅과 충성’(land and loyalty)이라는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는 왕과 그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농민들이 있었다. 중간에는 중요성이 덜한 계층인 이류 귀족들과 지역 기사들이 있었다. ‘땅과 충성’이라는 이 사회적 구조는 교회에 변혁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역 땅 주인은 자신이 소유의 땅에 비용을 들여 지역 교회 또는 수도원을 지을 수 있었다. 교회의 땅과 부동산(예를 들어, 목사관)이 성직자에게 속하는 것은 오직 지역 영주의 하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영주는 지역 교회의 재산을 사제, 주교 또는 수도원장으로서 관리할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주의는 교회 구성원들이 성직자를 선택하고, 성직자와 사람들이 함께 주교를 선택하던 고대의 전통을 종식시켰다. 봉건 영주 가운데서도 최상위의 영주이지만 동시에 평신도였던 왕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주교나 수도원장으로 임명하거나 서임할 때, 이를 ‘평신도 서임권’이라 불렀다. 이 책봉식은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영적 직분의 상징인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때 주교나 수도원장은 자신의 영주가 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봉건화 된 교회에 대해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11세기 중엽에, 교황권은 오랫동안의 비참한 부패와 무능의 시대 이후에 그 고결함과 권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개혁적인 교황들은 교회 내에서 강한 세력의 지지를 받아 교황의 법정을 다시 한번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천재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비천하게 태어난 투스카니 지방의 사람이었다. 그는 개혁적인 교황들 아래에서 신임을 받으면서 다양한 직위를 매우 탁월하게 수행한 후에, 1073년에 대중적인 환호를 받으며 교황의 자리에 선임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그 후 그레고리 7세(Gregory VI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배후에서 지휘한 개혁 운동은 힐데브란트의 개혁 또는 그레고리의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힐데브란트는 삶을 전투적인 견지에서 보았다. 즉, 삶을 빛과 어둠 사이의 맹렬한 싸움으로 보았다. 어둠의 주요 대리인들은 세속의 통치자인 백작들, 공작들, 왕자들, 그리고 왕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미화된 흉악범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이 땅을 불의로 가득 채운 자들에 불과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빛의 대리인들, 즉 교황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이 악한 통치자들을 통제해서 하나님의 대의를 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왕권에 대한 힐데브란트의 부정적인 견해는 초기 중세의 전통을 깊고 철저하게 끊어 버렸다. 초기 중세의 전통에서는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크리스천 왕권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힐데브란트의 생각으로는 그런 왕권이 아닌 교황권 자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대리인이었다.힐데브란트는 교황으로서, 봉건주의가 세속 통치자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여한 권력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힐데브란트가 그 결심을 실행할 날짜로 선택한 시점은 평신도 서임권을 시행하는 날이었다. 그는 특히 왕이 주교나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는 의식을 반대했다. 이런 의식은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그들의 영적 권위를 왕에게 빚지고 있음을 의미했고, 서방의 왕들 역시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힐데브란트는 107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Henry IV, 1065-1105)가 평신도 서임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당시 헨리 4세가 서방 군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몰아붙였다(헨리 4세의 영토는 기본적으로 독일이었다). 힐데브란트는 만약 자신이 헨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다 굴복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힐데브란트가 자신의 도전을 천명했을 때, 독일의 주교들이 처음에는 황제를 지지했다. 그들은 황제를 기독교 사회의 중심으로 보는 전통을 따랐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헨리는 1076년에 보름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헨리의 주교들 대다수는 힐데브란트를 배격하면서 황제 편에 섰다. 헨리는 공의회를 통해 힐데브란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무서운 편지를 보냈다.“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된 나 헨리는 나의 모든 주교들과 함께 당신에게 고하노니, 교황의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서, 만고에 저주를 받을지어다!”힐데브란트의 반응은 마치 번개와 같았다. 그는 헨리를 파문하고, 모든 백성들을 헨리에 대한 봉건적인 충성, 맹세로부터 해방시켰다. 독일의 주교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두려운 마음으로 헨리에게 더 이상의 협조를 거부했다. 헨리는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자신의 군대 가운데 3분의 2를 단번에 상실하고 말았다. 헨리의 호전적인 독일 귀족들 역시 반역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힐데브란트를 또 다른 공의회에 초청했고, 반역에 가담한 귀족들은 그 공의회에서 새로운 황제를 선택하고자 했다. 그리고 힐데브란트가 그 선택을 주관했다.헨리는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소수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과 함께, 힐데브란트를 알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카놋사 성으로 직접 찾아갔다. 실상 힐데브란트는 헨리가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투스카니 지방의 부유한 친구인 백작 부인의 보호를 받으면서 카놋사 성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헨리는 1077년 1월에 사흘 동안이나 성문 밖에 서서 자신이 회개했음을 힐데브란트에게 울부짖으며 말하면서 눈밭에 맨발로 서 있었다. 성 안에서는, 클루니의 수도원장인 위그(Hugh the Great)가 헨리의 회개를 받아달라고 힐데브란트에게 중재했다.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위그는 힐데브란트처럼 평신도 서임권에 반대했지만,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밀한 공조를 원하는 중도적인 인물이었다. 교황은 사흘 동안 주저했지만, 마침내 헨리를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황제는 울면서 평신도 서임권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힐데브란트는 헨리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한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보여 주는 궁극적인 사례다.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권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발아래에 엎드렸다.힐데브란트가 용서함으로 인해, 독일에서 헨리의 권세는 다시 회복되었고, 교회의 땅에서 소집된 군대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귀족들 가운데 헨리의 대적들이 슈바벤의 루돌프(Rudolf of Swabia)를 황제로 선택했다. 헨리와 루돌프는 각각 힐데브란트에게 지지를 구했다. 힐데브란트는 전쟁이 지속되는 3년 동안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두 황제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내 1080년 3월에, 헨리는 힐데브란트에게 루돌프를 파문하라고 고압적인 자세로 집요하게 요구했고, 이에 화가 난 힐데브란트는 오히려 루돌프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로 인하여 헨리는 또 다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의 주교들이 헨리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그들은 루돌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헨리를 독일의 안정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다. 헨리는 6월에 공의회를 소집해서 힐데브란트를 교황 직에서 폐위했다. 그는 10월에 내전에서 승리했고, 루돌프는 전투 도중 죽임을 당했다. 승리에 도취한 황제는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1084년에 로마를 점령했다. 여기에서 그는 라벤나의 대주교를 교황에 올려, 교황 클레멘트 3세(Pope Clement III)라고 칭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클레멘트는 헨리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힐데브란트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로 망명을 떠났으며, 108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망명지에서 죽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동안, 두 명의 라이벌 교황이 공존했다. 한 사람은 헨리가 세운 로마에 있던 교황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힐데브란트의 이상을 지지했던 개혁자들이 망명지에서 선택한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 1088-1099)였다. 우르반은 마침내 자신의 교회 라이벌을 내쫓았다. 서임권 갈등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르반의 후임 파스칼 2세(Pope Paschal, 1099-1118)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혼신을 다한 인물이었다. 1110년에 그는 새 황제 헨리 5세(Henry V)에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만약 헨리가 주교들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서임하는 모든 허례허식을 포기한다면, 파스칼은 독일에 있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황제에게 양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주교들은 청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주교들 대다수가 좋아하지 않았으며, 파스칼은 그것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나 서임권의 영적 측면과 세속적 측면을 나눈 파스칼의 구분은 1122년에 이루어진 논쟁의 해결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 해 보름스에서, 교황 칼릭스투스 2세(Pope Calixtus II)와 헨리 5세는 두 가지 사항에 동의했다. 1. 황제는 자신의 직위에 포함되어 있는 땅에 대한 권위로서 주교 또는 수도원장을 서임할 것이다. 2. 주교의 영적인 상관인 그의 대주교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권위로서 해당 주교를 서임할 것이며, 이때 황제는 더 이상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하지 않을 것이다.이런 타협은 힐데브란트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봉건주의 아래에서 누리던 지위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교회에 보장해 주었다. 이는 또한 주교들이 그들의 영적인 직분을 왕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상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서임권 갈등은 우리에게 교회와 국가의 적절한 경계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런 구분을 짓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동반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독립을 강하게 추구했던 중세시대의 교황들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국가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며 신정의 극단으로 치우쳤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막 12:17) 바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는 일에는 심오한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그 지혜를 주시기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힐데브란트
봉건주의
교황
헨리4세
서임권
보름스공의회
개혁의 불을 밝히다
by R. C. Sproul
2018-12-19
나는 부흥의 시작을 외치는 교회 홍보 문구를 볼 때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런 교회들은 으레 부흥의 시기를 스스로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부흥에 대한 시간표를 정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서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부흥은 성령이 마른 뼈들 속에 들어와(겔 37장), 그분의 능력을 행사함으로 새 생명을 일으키실 때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지 않으신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성격의 부흥은 그 어떤 인간의 프로그램으로도 관리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사람도 종교개혁의 스케줄을 스스로 정한 일은 없다. 웨일스의 부흥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예정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각성도 사람의 시간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 역사의 이런 장엄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안에서만 일어났다. 즉, 하나님이 죽어 가는 교회에게 그분의 능력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부흥과 개혁의 차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부흥은 생명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가 교회의 핵심 목표가 될 때 선교와 전도 활동은 종종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적 생명의 부흥이 반드시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교회와 사회가 유지되는 틀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는데, 부흥이 개혁으로 발전하려면 복음이 사회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부흥은 다수의 새로운 크리스천을 낳을 것이나, 이 새로운 사람들이 문화의 변화를 이끌고 결국 개혁에까지 이르려면, 그들이 먼저 신앙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개혁이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이끈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겠지만, 우리는 모든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침체 상태에 있거나 진전이 없다고 느낄 때에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변화가 진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독약을 마신다면 몸에 곧 변화가 찾아오겠지만, 그것은 더 좋은 쪽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이처럼 방향성의 위험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많은 경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리는 기존 칼빈주의 5대 교리에 집중하는 ‘신칼빈주의’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다(여기서 지적하는 ‘New Calvinism’은 2006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개최된 목회자 컨퍼런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콜린 한센[Collin Hansen]이 명명한 표현으로서 19세기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에 의해 주도된 ‘신칼빈주의’ 운동과는 구별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교계는 물론 심지어 세속 매체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5대 교리에 국한시켜 이해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이 5대 교리를 개혁파 신학의 전체 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길 또는 다리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찰스 스펄전은 칼빈주의를 전체 성경신학을 표현하는 닉네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펄전을 비롯한 과거의 많은 신학 거장들은 개혁파 신학의 핵심이 이 5대 교리(곧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의 교리 체계에 반대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정립된 교리)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개혁파 신학은 서로 분리된 여러 개념들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혼란스러운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개혁파 신학은 조직신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곧 그분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의 눈에 더욱 일관되어 보이도록 성경에 다른 무언가를 첨가하고 또 지나친 획일화를 추구한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신학으로 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참된 조직신학은 성경을 거시적인 관점으로 분석하여, 전체 흐름에 내포된 신학적 구조를 밝혀낸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적인 생각도 덧붙이지 않으며,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일관된 방식으로 풀이하는 학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다. 즉, 개혁파 신학은 인간에 중점을 두지 않으며, 개혁주의 전체에 걸쳐서도 하나님의 교리가 핵심을 차지한다. 사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모든 교리를 알아가는 근간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선택적 구원 교리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반-가톨릭 신학이 아니다. 사실 개혁파 신학의 뿌리가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행보에 저항했던 종교개혁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의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공교회 곧 보편적인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이는 교회 역사의 초창기 1천 년 동안 정립된 에큐메니칼 신조(ecumenical creeds)를 그 본질로 삼는다. 에큐메니칼 신조는 특히 4세기의 니케아 공의회와 5세기의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에큐메니컬 신조는 삼위일체나 예수님의 속죄와 같은 정통 기독교의 모든 교파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교리를 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 역시 모든 크리스천이 따르는 교리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이전 것과 완전히 구별된 새로운 신학이 아니며, 기독교의 모든 교회가 따르는 공통의 신학적 기초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칭의에 대한 개혁파 신학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와는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개혁파 신학은 과거의 종교개혁이 그러하였듯이 칭의의 중심에 복음이 자리한다. 개혁파 신학은 마틴 루터(Martin Luterh)나 권위 있는 종교 개혁자들의 은혜적 교리 위에 굳건히 서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은 비록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명백하게 공표되어 있지 않지만 개혁파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들이다. 이상의 모든 설명은 개혁파 신학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훨씬 넘어서는 총체적인 세계관임을 말해 준다. 개혁파 신학은 언약적이고, 성례적이며,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개혁파 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고,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보게 하는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단순히 칼빈주의의 부활이 아니다. 참된 개혁은 우리 안에서 복음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부활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복음이 명백하고 충만하게 선포될 때, 하나님이 펼치시는 구속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놀라운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만 구원의 능력을 행사하신다. 우리가 개혁을 원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 그만 어둠에서 복음을 끌어내어, 모든 개혁의 고백이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 즉 “어둠 후에 빛이 있다”가 되도록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루터는 “모든 입이 신약성경의 참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소리 높였다. 더불어 루터는 복음을 명백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갈등을 마주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또한, 본능적으로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숨기고, 복음을 희석시키며, 또 복음을 모호하게 만드는 유혹에 이끌리게도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에 내재된 세상과의 마찰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락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게 복음은 그 자체로 장애물이자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복음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개혁을 원한다면,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힘써야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Fueling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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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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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루터
하나님의영광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
by Reuben Hunter
2018-12-17
나는 목회자 컨퍼런스 일정에서 ‘거룩한 교회 개척’이라는 제목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의 참여가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거룩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거룩에 대해 논하는 것은 종종 목회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삶 속에서 거룩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았던 장면들이 슬며시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선교적 교회 개척’, ‘문화적 교회 개척’, 혹은 그 외의 듣기 편한 수식어가 붙은 컨퍼런스로 발길을 돌린다.하지만 성경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두드러지게 가르치고 또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거룩함에 대해 더 많이 다루어야 할 것이다.피할 수 없는 거룩거룩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거룩함은 그분의 완벽하고 장엄한 초월성을 보여 주고,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닿을 수 없는 간극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묘사한다(사 6:3). 하나님의 거룩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우리를 떨게 만드는 두려운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인내하는 그 거룩함을 강조한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거룩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성경 속 사도들은 이 새로운 정체성을 온몸으로 품어야 하는 크리스천의 소명 역시 강조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름 받았다”라고 말했다(엡 1:4).오직 하나님 안에 머무를 때, 거룩을 추구하는 삶은 기피하고 싶은 행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변한다. 이전에는 우리를 ‘밀어내던’ 거룩이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경험을 해야한다.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삶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세상과 대립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시대적 혹은 문화적 상황에 맞추어 포용하거나, 혹은 반대로 경계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이를 ‘상황화’라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반드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당신의 사역이 아무리 상황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또 당신이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 또는 지도자라 하더라도, 성경에 충실한 모습으로 사역하고자 한다면 세상과는 불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당신을 고상한 척하는 사람, 고루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 우둔한(혹은 위험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지역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라교회 개척 초기 단계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기성 교회라 할지라도, 이 또한 변함없이 중요하다.교회를 개척하면, 종종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교회’를 구경하러 온다. 여기에는 사역에 헌신하려는 준비된 크리스천도 있을 것이고, 의심의 눈초리로 교회 곳곳을 살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끊임없이 계속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바라건대) 비신자도 있을 것이다.이들 중 누가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공적으로 선언하기를 망설이고 있는가? 혹은 누가 당신과 더불어 교회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가? 이들 중 누가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마지막 날에 인도자의 청산을 받을 것인가(히 13:17)? 달리 말하면, 회개도 없고 거룩하지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분해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구별되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은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도록 이끈다. 경계를 모호하게 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지도 않다.2. 구별되는 예배를 선택하라교회사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위해 모였고, 그 예배의 정확한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일 때, 예배하는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를 세상의 문화와 최대한 닮게 하려 애써서는 안 된다.우리는 예배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거행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예배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기쁨이 되지 않으니, 예배를 세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가면서까지 그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라. 3. 구별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라오늘날의 문화는 낙관주의 못지않게 비관주의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점점 더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도시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비관론으로 일관한다.이때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설교한다면, 교회는 모든 형태의 죄와 고통까지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죄와 타인의 정죄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만, 복음을 통한 구원의 소망과 값없는 은혜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희망을 준다.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할 것이다. 마치 좌초하는 배와 같은 자신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안에서 교회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성경 앞에 나아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4. 탁월한 연합을 보이라복음이 주는 은혜보다 더 강력하게 연합을 이끌어 내는 힘은 없다. 정치적 성향, 타고난 인종, 경제적 소속 집단 등을 기준으로 점점 배타적인 사회가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 및 집단에 속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또 연대를 이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그런 행보를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곳 런던에서는 웹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젊은 부부가 타국에서 이민 온 싱글맘의 창업을 돕기 위해 웹사이트 개설을 지원한 예가 있다. 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이다. 그 젊은 부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도운 싱글맘을 그들이 참여하는 교회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연합을 추구하는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는 많은 기도와 겸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분된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연합은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흠 없이 서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거룩함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교회를 세우자. 그리고 그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Become Holy—as a Church번역: 하늘샘
교회
교회사역
거룩
방법
구별
예배
선택
메시지
연합
그리스도
목사님, 예배에 기도를 더 많이
by Jason Helopoulos
2018-12-17
초청을 받아 미국 교회를 순방한 어느 아프리카 목회자 이야기를 들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교회 대표가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미국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내 경험도 그렇다. 미국 교회는 다른 건 몰라도 기도에는 유독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특히 주일예배 같은 회중예배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배에 3분 정도의 대표 기도가 들어 있는 교회도 찾기가 쉽지 않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독립성을 중시하는 미국인의 정서가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미적지근한 신앙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예배 중에 기도시간이 현저하게 부족한 교회는 이제라도 회개하고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기도를 회복하라교회에서 공동 기도를 시행하거나 증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예배에 기도를 필수 순서로 삼는 것이다. 몇 곡의 찬양과 이어지는 성경봉독만으로 예배를 마친다면,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찬양을 기도의 한 형식으로 본다고 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예배에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식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성도에게 기도를 배우고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나는 여러 차례 세미나에서 가정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본질적인 통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강의가 끝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줄 모르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 회중예배 시간에 기도가 부족할 때 독감이 번지듯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기도함으로써 기도를 가르치라회중예배 시간에 기도 비율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성도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때 기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기도의 구조, 어조, 어휘, 태도, 강조하는 항목, 적용되는 말씀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기도는 가르치는 만큼 배울 수 있다.주일 예배에서 대표기도 시간을 갖는 것은 성도에게 단시간에 기도를 교육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하지만 대표기도의 이유가 꼭 교육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배에서의 대표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공동체의 필요와 갈망을 간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우리의 영적 삶은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지체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중기도는 모든 성도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회중예배를 위해 여러 형식의 기도를 시도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교회를 위한 일반적인 대표기도의 형식으로 기원하는 기도, 경배하는 기도, 죄를 고백하는 기도, (목회나 중보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 설교를 위한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간구하는 기도는 좀 더 긴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다. 물론 너무 긴 기도는 회중을 깜빡 졸게 만들 수도 있지만 회중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길면서도 잘 구성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즉흥으로 기도하기보다는 기도를 미리 적어 두거나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오늘날의 목사 또는 장로는 사전에 따로 준비하지 않고 교인의 마음을 감화하고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긴 기도를 즉흥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의 방식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준비된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정기 기도회를 열라교회에서 회중기도가 고취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정기 기도회를 여는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 그대로 ‘기도’가 주가 되는 모임이다. 그런데 나는 기도 대신 가르침, 설교, 또는 찬양으로 가득한 ‘기도회’를 많이 보았다. 기도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무릎 꿇고 공동의 제목을 위해 간구하는 자리이다. 기도회의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좋다.이때 기도회의 순서가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도회 중에 회중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변화의 장치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총 한 시간이 기도회를 위한 시간이라면, 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편이 좋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기도의 방법과 유형, 주제를 사용해 보는 것이다. 기도를 위한 방법이나 유형, 주제의 조합은 무한하고 다양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기도회에서 벗어나, 참여하고 싶고 진짜 기도하고 싶은 ‘기도회’를 만들 수 있다.회중예배에서의 기도가 성숙될 때 성도 개개인의 기도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기도의 훈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이다. 특별히 나는 복음주의 교회가 기도에 대해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추구하길 바란다. 성도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확신한다.원제: Pastor, Include More Prayer in Your Church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주영식
기도회
주일예배
공예배
대표기도
회중예배
회중기도
정기기도회
소그룹과 제자도
by Jeremy Linneman
2018-12-14
당신이 이끄는 소그룹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친교? 우정? 성경 읽기? 선교 동원? 이웃 섬김? 소그룹 리더가 위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처럼 다양한 대답을 할 것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상황에서 직접 소그룹을 인도해 본 결과, 이전보다 더욱 확신하게 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제자도(discipleship)가 공동체 사역의 유일한 목표이자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 언급된 대답들은 제자도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이다. 나는 수단과 목적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섬기는 최고의 목표가 단순히 친교나 배움, 혹은 인원을 확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성숙한 제자들을 만드는 것이다.어떻게 제자를 만드는가?제자도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성경공부 모임, 훈련 프로그램, QT, 가정 예배, 일대일 멘토링, 교리, 또는 새신자 양육 같은 많은 요소들이 떠오를 수 있다.내가 속한 소그룹은 (성별로 구분된)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강조하면서 매주마다 죄를 고백하고 성경을 암송하도록 압박을 준다. 또 한 소그룹은 보통 세 시간 이상 모임을 갖는데,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들이 먼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하여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인도하는 또 다른 소그룹도 마찬가지로 구성원들끼리 오랜 시간 함께 모여 있으면 그 자체가 제자 훈련이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제자도는 많은 교회가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장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왕도도 없다. 제자도는 의무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교육 같은 것도 아니고 풀어야 할 난해한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헌신적이고 은혜로운 삶의 과정이다. 당신의 소그룹은 제자도를 이루어 가고 있는가?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1. 제자도는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다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중심을 둘 때에만 생명력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은 정체된 모임이 아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한다. 지친 자들이 와서 기쁨을 얻고 가는 모임이 되어야 하고, 잡담하고 험담하는 모임이 아니라, 말씀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도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근거한 복음 중심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2. 제자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다참된 제자도는 영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갈망하도록 만든다(딛 2:11-13). 우리는 자주 실패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계속해서 제자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다.3. 제자도는 실제 제자로 사는 과정이다제자도는 이론이 아니다. 공부 모임도, 훈련 프로그램도,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하는 교제의 시간도 아니다. 제자도는 새로운 인생의 방향과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일상의 변화를 이루고자 오늘을 살아내는 실천적 과정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제자로 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4. 제자도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제자도는 그리스도나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 요구되는 필수적 자격이 아니다. 제자도를 위한 첫걸음은 성장이나 변화가 아니다. 순종도 아니다. 제자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그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5. 제자도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다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우리는 점차 그분을 닮아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 갈 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순종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갈망으로부터 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시선이 닿아 있는 존재를 닮아 간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6. 제자도는 함께함에서 이루어진다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being)로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becoming)은 매우 개인적(personal)이지만, 그렇다고 은밀한(private) 성격의 변화는 아니다. 그 과정은 ‘예수님과 나’라는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변화를 경험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헌신적인 신자들이 동일한 목적 아래 매주 모이는 작은 지역 교회이다.예수님이 패러다임이다제자도를 위한 청사진을 얻고자 한다면, 진정한 제자도가 시작된 그 출발점으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보여 주신 그분의 삶과 사역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행하신 사역 속에서 몇 가지 핵심 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중 그분의 교제 방식을 배우는 것은 제자도를 이루는 데에 특히 중요하다.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알고 부르셨다. 그분은 열세 명도 아니고 열한 명도 아닌,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후로, 그중 누구도 더 나은 사람으로 대체하지 않으셨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가능성 때문에, 혹은 과거의 경력 때문에 선택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다 아셨고, 제자들 역시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좋든 나쁘든,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사람들이었다(유다까지도 말이다).예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제자들을 초대하셨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친구들 없이 혼자 계시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의 사역 여정에 동행했다. 예수님은 가족 모임에도, 종교적인 행사에도, 특별한 잔치에도 제자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님은 항상 가르치지는 않으셨지만, 매순간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예수님의 모든 삶이 그들에게는 곧 진리와 은혜의 가르침이었다.예수님은 식사하실 때조차도 제자들과 함께 드셨다. 마태복음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가장 선호하는 교제의 수단이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과도, 즉 바리새인, 세리, 이방인, 군중과도 함께 먹고 마셨는데, 그 자리에 항상 가까운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이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신다는 의미였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 때문에,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격분했다.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사명에 집중하셨다. 예수님은 세례 받은 직후, 열두 제자를 부르는 일로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의 사명은 곧 제자들의 사명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이뤄 가시는 사명이었다. 한마디로 그분의 사명은 관계의 사명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심지어 가르치고 치유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늘 공동체 안에 머무르시면서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셨다.이처럼 공동체는 제자 훈련에 필수적인 요소이다.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삶과 사역에서 보여주신 교제의 흐름(fellowship rhythms)을 잘 이어갈 수 있다. 따라서 소그룹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관계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교회야말로 참된 제자도를 이루어 가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Small Group Should Be Making Disciples번역: 김재덕
목회
모임
제자도
그리스도
패러다임
제자훈련
교제
성경신학과 공예배
by Bobby Jamieson
2018-12-14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매주 모이는 모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천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성경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다면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야 하는가? 구약성경은 예배에 관해, 즉 기도와 희생 제사 및 찬양대와 악기 등에 관해 자주 언급한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이 신약시대의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에 관한 성경신학이다. 성경신학은 불규칙하게 전개되듯이 보이는 성경 줄거리 속에서 통일성과 다양성,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훈련이다. 이 글에서 나는 공예배에 관한 성경신학을 네 단계로 나누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구약성경에서의 공예배.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 셋째, 신약성경에서의 공예배. 넷째, 공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 구약성경에서의 공예배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여 그분의 임재로부터 추방된 이후,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께로 다시 모으는 일을 해 오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속박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내어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임재 안에서 예배하게 하셨다(출 3:12, 18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출 15:13, 17절). 그 거처는 어디인가? 처음에는 성막이었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와 부정함을 없애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다.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4-46). 출애굽의 목표는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해 거룩한 장소(성막)와 사람(제사장)을 지정하셨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하나님은 그들을 백성으로 삼으셨다. 또한 이스라엘과의 이 새로운 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이 소위 말하는 ‘모세 언약’이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이 모세 언약의 내용이 자세히 나오는데, 먼저 여호와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낼 때 행하신 일을 상기시킨 후, 그들이 그 언약의 조항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출 19:1-6). 여호와는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과 이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든 율법들은 이 언약의 조항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 모든 세부 내용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 맺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서로 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레위기에 세부적으로 묘사된 희생 제사와 정결 예식은 이 언약이 깨졌을 경우, 그 관계를 복구하는 방편으로, 그들은 의식을 통해 언약을 보존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초실절 등과 같은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레 23장), 1년에 몇 차례에 걸쳐 성막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절기들 외에도, 정기적인 희생 제사들이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졌으며,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죄나 부정을 제하기 위한 특별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성막(나중에는 성전)으로 갔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인들은 1년 중 몇 차례의 특별한 경우에만 공예배를 드렸다. 오직 여호와께만 드리는 개인적인 헌신의 예배는 그들이 주야로 행해야 할 의무였지만(레 6:12-13),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공예배는 특정한 사람들과 장소들과 시기들에 국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 임재는 성막에 국한되었고 제사장들의 호위를 받았다.2.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성경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성자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다(고후 1:20). 예를 들면, 구약의 모든 모형들이, 가령, 제사장, 성전, 왕권 등의 제도들과 출애굽, 유배, 귀환 등의 사건들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예배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 언약의 예배가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고 또 변화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성막(후에는 성전)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신 곳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 구약의 성막을 성취하고 대체하신다. 요한은 이르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하셨다고 기록했다(요 1:14). 또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약속하셨다(요 2:19). 달리 말해서,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만나고 그 임재를 드러내며 그들의 죄를 처리하시는 성전이 예수님의 몸이다(요 2:21-22). 참 예배자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필요가 없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요 4:21-24). 예수님은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을 성취하고 대체하시므로 이제 참 예배자들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 언약, 성막, 성전과 관련된 전체 희생 제사를 성취하며 대체하신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록했듯이, 매일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드려” 백성의 죄를 속하셨다(히 7:27).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것은 구약의 희생 제사들처럼 단지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고 내면을 새롭게 한다(히 9:13-14). 예수님이 이 단번의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황소나 염소를 드릴 필요가 없다(히 10:1-4, 10, 11-18절).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레위기의 희생 제사들을 성취하고 대체하신다. 이제 그 피가 우리의 영원한 구속을 보증한다. 이 외에도 예로 들 것들은 많지만, 핵심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이 백성과 관계 맺으시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개시하신 새 언약은 옛 언약, 곧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맺으신 언약을 폐한다(히 8:6-7, 13절).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인 희생 제사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소수의 제사장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히 4:16; 10:19-22).3. 신약성경에서의 공예배이 모든 것은 새 언약 시대의 공예배를 위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첫 번째로 주목할 사항은, 구약성경의 예배 용어들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신자들의 삶 전체에 적용되어 그들의 영적 생활을 규정 짓는다는 점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희생 제물의 대상으로 짐승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린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행위이다. 또한 히브리서 13장 15절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은 곧 제사이며, 우리는 주일 아침 한두 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사를 드린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는 찬양은 물론이고 훨씬 더 많은 것도 포함한다. 예컨대, 공개적으로 담대히 복음을 고백하는 것과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모든 말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예배’가 주일에 국한되어 교회에서 주로 행하는 제한적인 의식이 아님을 뜻한다.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예배는 신성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연합되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주하사 당신을 개인적으로나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고전 3:16-17; 6:19; 엡 2:22).그렇다면 새 언약에서의 공예배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성경 읽기와 설교(딤전 4:14), 시와 찬미 및 신령한 노래로 찬양함(엡 5:18-19; 골 3:16), 기도(딤전 2:1-2, 8절), 세례와 성찬식의 거행(마 28:19; 고전 11:17-34),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서로에게 격려함이다(히 10:24-25). 새 언약에서의 공예배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는 사항들 중 하나는, 각각이 아닌 전체로서의 몸을 세우는 일에 줄곧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골 3:16).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한다. 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를 세워간다. 바울은 모임에서 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까지 강조한다(고전 14:26). 매주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함으로써 서로를 세우기도 한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 언약으로 인하여, 새 언약 시대의 공예배는 옛 언약하에서의 공예배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띤다. 이제 신자들은 1년에 몇 차례가 아니라, 매 주일마다 공예배를 위하여 모인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 않고, 자신의 거주지 인근의 지역 교회에서 모인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성소에 국한되거나 제사장들의 호위를 받지 않고,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그분의 모든 백성 안에 거하시며,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곳마다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마 18:2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련의 정교한 제사나 제물도 드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설교하며, 말씀으로 기도하고, 또 말씀을 노래하며, 성례들을 통해 그 말씀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사랑 안에서 하나의 몸을 세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4. 공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공예배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먼저, 교회의 정기 집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삶 전체가 예배이지만, 교회에서의 정기적인 모임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크리스천은 교회에 함께 모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히 10:24-2)5), 교회 출석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는 예배 때,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교회 구성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뜻한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고안된 규례나 예배 관행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골 2:16-23). 이 성경적인 원칙들이 역사적으로 공인된 우리의 예배를 구성하고 특징지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교회는 공동 모임에서 뚜렷한 명령으로든 혹은 표준적인 사례로든 성경에 적극적으로 제시된 일들만 실행해야 한다. 다른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예배하는 법을 성경에서 배워야 하며, 성경이 지시하는 것만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성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려 주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경에서 예배에 대한 어느 자료가 표준이 되며, 또 구속력이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철저히 답하려면, 아마 책 한 권의 분량의 안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한다.예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분석적인 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도 완전하며 표준적인 ‘예배 순서’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모든 교회를 향해 분명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몇몇 명령들이 있다. 에베소와 골로새의 교회들은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았고(엡 5:18-19; 골 3:16), 고린도 교회 역시 함께 모일 때 찬송한 것으로 언급되는데(고전 14:26), 이는 모든 교회의 예배에서 찬양이 필수적임을 암시한다. 바울이 목회와 관련하여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라고 명한 것은(딤후 3:15-16), 그렇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일이 모든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그런가 하면,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 16:16)와 같은 명령은 당시 문화에만 특별히 국한된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좀 더 보편적인 표현으로 옮기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서로 환영하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매주 첫 날에 헌금을 모아 두라며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특별한 명령은 문맥상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를 위한 특별 헌금이었지만, 모든 교회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갈 6:6), 따라서 헌금은 공예배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지금까지는 신약성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어떠할까? 구약성경에는 예배에 대한 명령이 매우 많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5). 이러한 구절은 교회의 예배에서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악, 퉁소, 그리고 소고를 준비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시편은 모세 언약 시대의 예배를 표현한 것으로서, 모세 언약을 가리켜 신악성경의 저자들은 ‘옛 언약’이라고 말한다(히 8:6). 예레미야 31장에서 우리는 약속된 새 언약이 도래했기 때문에, 옛 언약은 폐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모세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롬 7:1-6; 갈 3:23-26). 따라서 모세 시대와 결부된 예배 형식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성전에서 섬기는 역할을 맡은 자들은 제사장들이었고, 그중에는 예식 음악의 전문가들도 있었다(대상 9:33). 사실, 시편 150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악기를 연주한 자들이 바로 이 제사장들이다(대하 5:12-13; 9:11). 따라서 시편 150편은 기독교 예배를 위한 표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성전이나 레위 제사장직과 결부된 옛 언약 예배의 특정 형태를 오늘의 우리에게 알려 줄 뿐이다. 즉 시편 150편 본문은 교회 예배를 위해 어떤 악기들을 동원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해 정해진 답변을 제공하지 않는다. 신약의 예배에서 구약의 짐승 희생 제사를 전례로 받아들일 수 없듯이, 구약의 전례라고 해서 단순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많은 기독교 전통들은 마치 레위기 제사장직과 성전 예배의 몇몇 특징들이 새 언약 시대로도 그대로 연결되는 것처럼 구약성경의 전례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하지만 이는 성경신학적 이해의 결함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예배 방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시편은 경외심과 기쁨과 감사로 예배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 교회의 예배 형태나 구성 요소들을 규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이 옛 언약 아래 하나님 백성을 위한 헌법 역할을 했듯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을 위해 새로운 헌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일관되며 그가 구원하시는 언약 백성도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 관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 언약을 세우신 후에 전격적으로 바뀌었다. 공예배를 위한 신학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성경신학의 모든 도구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떻게 그 도구들을 활용하는가? 두 언약들을 비교하고, 모형과 원형 간의 연결점을 추적하며, 약속과 성취를 고찰하고, 더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파악함으로써 활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 백성이자 약속하신 성령이 내주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방식에 따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Biblical Theology and Corporate Worship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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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란 무엇인가?
by Jonathan Leeman
2018-12-12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복음 설교와 복음 성례를 통해 서로의 공동체성을 공적으로 확증하거나, 감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기적 모임을 갖는 크리스천들의 무리이다. 다소 간단하기는 하지만, 이 정의 속에 담긴 다섯 가지 요소들에 주목해 보라.첫째, 크리스천들의 모임. 둘째, 정기적인 모임. 셋째, 확증과 감독이 회중에 의해 공적으로 행사됨. 넷째,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역할을 대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임. 다섯째, 이 목적을 위해 설교와 성례를 행함.주례 목사의 선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부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요소들은 단순한 크리스천들의 모임에 지역 교회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모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중요하다. 우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자리가 모임이기 때문이다. 모임은 우리 앞에 도래할 장래의 나라를 공표하는 전진기지 혹은 대사관과 같다. 또 모임은 우리의 왕 앞에 절하며 예배하는 곳이다. 세상의 대적들이 우리를 방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백성을 만민으로부터 이끌어 내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의 강력한 회중을 형성하신다.더 나아가, 모임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설교와 성례와 권징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행사하시는 곳이다. 복음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설명한다. 또한 우리 왕의 이름을 선언하고 그분이 왕으로서 당하신 희생에 관해 가르친다. 그 설교는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우리의 불순종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세례와 성찬을 통해, 이제 모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즉 성례는 우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세례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연합되었음을 선언한다(마 28:19; 롬 6:3-5).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리고 그의 몸인 우리의 공동체성을 선언하는 것이다(마 26:26-29; 고전 11:26-29). 이처럼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자신의 백성이 알려지며 구별되고, 교회와 세상 간에 선이 그어지길 원하신다.결국, 지역 교회란 무엇인가? 바로 천국 복음을 선언하고, 복음 고백자들을 확증하며, 그들의 제자도를 감독할 뿐 아니라, 거짓 고백자들을 노출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만드시고 권위를 부여하신 제도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동아리에 가입하듯 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오히려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성을 결정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at Is a Local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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