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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서 참 기쁨과 만족을 찾으라
by Mike Bartlett
2019-04-08
대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야망이 가득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또한 최대한의 경험을 쌓기 위해 학교 밖에서도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드러내고자 고군분투하던 그 노력의 끝에는 아무런 기쁨도, 만족도 없었다.바로 그 즈음, 한 친구가 ‘하나님을 기뻐하라’(Desiring God)라는 책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낯선 이름의 저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만족해 할 때가 바로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할 때이다”라고 대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확신에 찬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공인 법학을 잠시 내려놓고 대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 메시지는 내 인생의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신학교 1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발견하였고, 내 삶을 변화시킨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열망으로 무척 고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과 만족이야말로 끝내 신학교를 졸업하고 학생 사역과 교회 개척의 길에 뛰어들게 된 원동력이자 이유가 되었다.나는 그렇게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열정적인 젊은 목회자로서 기쁨이 충만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첫발을 내딛었다.기쁨이 어디에서 오는가?나는 비록 열정이 넘쳤으나 교회 개척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의 확신, 즉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믿었던 그 확신을 시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개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그 기쁨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를 보게 되었다. 자금을 모금하는 능력, 교회의 규모,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혹은 설교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에 따라 내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와 같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이에 대한 아무런 예상도, 준비도 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교회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세상적인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무심코 교회 개척에 관한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This American Life)을 듣게 되었다. 이 방송은 일반적인 창업의 세계와 교회 개척을 같은 맥락에서 그리면서, 교회 개척도 비지니스 마인드로 접근하여 성공한 기업 모델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시각으로 볼 때 교회 개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이 방송을 들으면서 내가 성공이라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교회를 개척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얻도록 돕는 일이 내게도 기쁨이고, 또한 그 기쁨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척의 목표를 오로지 규모의 성공에 두게 되면서 나는 그 기쁨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기쁨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고난이 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까?나는 이제 ‘성공’하고 있을 때에도 불안감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만큼 오랫동안 교회 개척에 몸담고 있다. 교회 개척에서 성공에 대한 집착은 나쁜 우상과 같다. 그것은 다른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꿈꾸는 것을 가져다주지도 않을 뿐더러 내 안의 기쁨까지도 훔쳐간다. 성공이라는 유혹이 개척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내가 개척한 교회를 성장시키신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겔 36:22). 성공이라는 우상에 대해 깨달았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고난이 올 때 과연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떻게 반응할까?’ 최악의 상황일 때, 고난은 나의 은사, 나의 동역자들, 교회, 하나님까지도 의심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고난이 얼마나 나의 기쁨을 빼앗아 버리는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분한가?”라는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은행 잔고가 넘치고, 동역팀이 잘 협조하며, 새 신자들이 교회로 몰려들 때뿐이다.하지만 교회 예산이 줄어들고 있으면? 동역 팀에 불화가 있으면? 당신이 사랑으로 섬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로 하면? 건강이 악화되고 가족 문제가 당신을 힘들게 하면? 공동체에서 반대 세력이 있으면? 그때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시련이 온다.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이러한 여러 유형의 고난은 우리의 편안함, 안정감 및 평정심이라는 가면을 벗겨낸다. 고난은 우리의 불안을 드러낸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 기뻐할 수 있을까? 다윗과 같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쁨으로 충만한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교회 개척의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여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필요할 것이다.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계속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너무 간단할 수도 있지만, 기쁨은 예수님과 맺은 친밀한 관계의 부산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야 하며(요 17:3), 그분 밖에는 영원한 참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기도하신(요 17:13) 이유이다. 따라서 기쁨 그 자체를 추구하려 하지 말고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이것을 반대로 추구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며,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된다. 교회 개척의 여러 과정 가운데서 값싼 기쁨에 만족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우리는 기쁨의 삶을 일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교회 개척이라는 압박감이 스며들 때, 예수님을 추구하는 일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게 될 수 있다. 예수님을 깊이 추구하는 일을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기쁨 추구로 바꿔 버리게 된다.교회 개척자들이여,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값싼 기쁨을 추구하고 싶은 충동과 싸우도록 촉구한다. 우리 삶과 사역의 목표는 예수님을 알고, 그것이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요 15:11).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성공을 쌓는 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며,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사역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urch Planter, Joy Is a Fight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참기쁨
고난
성공
집착
우상
하나님의영광
그리스도안에서
종교개혁과 하나님의 영광
by John Piper
2019-04-02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얼마나 처절하게 죽은 존재인가를 놓고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수 있음을,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고 의를 완성할 수 있음을 철저하게 믿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이다. 이 기적은 결코 인간의 장점 또는 의로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개혁자들은 이 모든 구원 과정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라고 압축해서 표현했다. 1. 하나님의 영광은 무슨 의미인가?가장 기본적인 거룩의 의미는 세속된 것으로부터 “구분됨”이다. 그 의미를 이 세상 모든 속됨에서 무한하게 “구분된” 하나님께 적용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을 무한한 단계의 ‘유일하신 분’(one-of-a-kind)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완벽한 다이아몬드처럼.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성경을 꿰뚫는 일관된 메시지는 이것이다. 무한하게 가치있고 또 무한하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유일성이 창조에서 시작하여 인간 역사와 구원 사역에 스며있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다름 아닌 그분의 내재적 가치와 아름다움 그리고 여러 모양의 완벽함이 빚어내는 위대함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다.“여러 모양의 완벽함”의 아름다움이 드러내는 광채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살후 1:9)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엡 1:6) 등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의 모든 단면이 다 반짝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분의 속성 중 하나라도 잃는다면, 그 영광은 줄어들고 결국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게 된다.나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마치 그분의 본질과 별개인 무엇, 그러니까 하나님이 잃을 수도 있는 어떤 소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로지 구속받은 사람만이 영적으로 보고 음미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가치와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광채라는 사실을.2. 왜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영원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창조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역사 그리고 구속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창조하시고, 붙드시고, 통치하시며 또 구원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품은 그분의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시19:1). 그렇다. 그게 하늘이 맡은 역할이다.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6-7).이 목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다 뻗어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생명이 살지도 않는데, 우주의 은하가 저토록 광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작해야 점에 불과한 인간은 왜 존재하는 걸까? 우주는 인간의 중요성을 보여 주려고 또는 창조 그 자체를 보여 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웅장함과 위엄을 아주 조금이라도 보여 주고자 우주를 두신 것이다.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붙드시고 통치하시며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3.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칭하신 백성을 통해 어떻게 가장 영광 받으시는가?나는 기독교 쾌락주의자이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속에 개혁 교리를 탁월하게 요약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썼을 때,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확신한다.우리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을 두 가지 다른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라고 말한 의미를 그들은 정확하게 알았다. 바울이 보기에 그리스도가 가진 최고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가장 빛나는 방법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고난과 죽음까지 가져다준다고 해도 말이다.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만족임을 알기 원하신다. 그건 우리의 행복이 궁극적인 목표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분이 최고의 기쁨이 될 때 우주의 궁극적인 가치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최상의 보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4.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 받으시는 것과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조금이라도 누리는 영광은 궁극적으로 만물의 근원과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의 하나님과 더불어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하나님은 왜 당신의 영광과 함께 우리도 영화롭게 되는 데 그토록 열심이실까?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목표가 그분 자신의 기쁨, 즉 그분의 신성한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1; 17:13). 그러나 작은 스마트 카에 747 비행기 제트 엔진을 넣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화산처럼 솟구치는 하나님의 기쁨을 영광되지 못한 우리의 미천한 영혼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의한 인간에게 영광스러운 기쁨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한 분만이 오로지 우리를 통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 17:24-26).나는 당신이 예수님께 끌리기를 바란다.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그분을 믿는 순간,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우리가 잘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통해서이다. 이제 다른 희생제사나 구원을 위한 의로움은 필요치 않다. 오로지 믿음만을 통해서이다. 오, 사람의 업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왜 이런 구원이 필요한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에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궁극적인 보물로 삼고 그분을 누리고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께만 속한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바로 그 목적 때문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The Reformation and the Glory of God번역: 무제
역사
종교개혁
하나님영광
구분됨
구원
믿음
영화롭게
존파이퍼
사역 평가에서 배운 열두 가지 원리
by Chuck Olson
2019-04-01
지난 20여 년 간, 나는 자신의 사역을 평가하면서 애증을 느껴 왔다. 우선 그 일을 “싫어하는” 이유는 매년 내 일정표를 잠식해 들어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리더십이 발전해 가고 사역이 탄력을 얻는 데 있어 사역 평가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이 글을 읽는 당신은 교회 사역자들을 지도하는 담임목사일 수도 있고, 인턴을 감독하는 신임 직원중 하나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반 직장에서 직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좀 더 비공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주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그런데 현재 당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하나님은 주어진 권위를 청지기처럼 잘 사용하여 당신이 보살피는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당신을 부르신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이렇게 목자처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에 사역 평가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사역의 수행 정도를 측정하는 일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 성품을 발전시키고 개인적으로 영적인 열매를 맺는 일에도 도움을 준다.나는 지난 수년 간 사역 평가를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매년, 이전 해에 사용했던 방식보다 더욱 철저한 방식을 도입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내용을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 내용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1. 동기를 점검하라 관리자로서 사역 평가의 큰 그림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의 동기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서가 향상되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소망한다면—바닥짐(ballast)이 배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듯이—당신은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사역 평가라는 귀중한 기회를 최대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청지기 의식을 가져라다른 이의 사역 평가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일이 요구하는 청지기의 책임 의식에 대해 숙고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리더십에 대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이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내 마음 속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 조용히 묵상한다. 이 묵상과 숙고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기에 “취급 주의”라고 쓰여있는 고가의 도자기 상자와 같다는 상상을 해 본다. 3. 기록하라 사역 평가는 신중하게, 또한 계획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을 통한 정확성이 요구된다. 잘 정리된 문서가 있으면 사역 평가의 효과는 눈에 띄게 상승한다. 기록된 문서는 현재뿐 아니라 이후에 그 문서를 다시 읽으며 숙고해 볼 때에도 큰 도움을 준다.4.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라지난 기간 동안 내가 개발해 온 사역 평가에는 사람들에 대해 칭찬하고픈 여러 영역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두었다. 예를 들자면, “주디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여성이다” 또는 “스티브는 리더를 훈련시키는 일에 달란트가 많은 목회자이다” 등이다.5. 솔직하라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면, 사역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관리자로서 또 무엇보다 리더로서, 당신은 당신이 작성하는 직접 보고서를 통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역 평가를 할 때에는 솔직한 피드백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기저에 깔려있으므로, 사역 평가야말로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6. 준비하라 사역 평가 시 민감하거나 어려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친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는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까다로운 주제를 다룰 때는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미리 생각해 보거나 해야 할 말을 적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짐, 당신이 리더로서 계속 성장해 갈 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네요. 우리가 대화할 때 당신이 제 진심을 이해하고 제가 당신을 돕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라고 말해 볼 수 있겠다.7. 상대방의 의견을 구하라 어려운 주제를 다룰 때에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수잔, 외부 평가자들이 당신에 대해 제출한 의견들을 읽어보니 공통된 사항 중 하나가 당신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네요. 혹시 설명을 좀 해 줄 수 있나요? 왜 이런 공통된 의견들이 나왔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8. 자기 평가에 우선 순위를 두라사역 평가를 해 온 기간 중,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자기 평가의 전략적 중요성이다. 모든 사역 평가는 정해진 반성적(reflective) 질문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삶과 리더십을 스스로 평가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효과가 있다. 먼저, 해당 피평가자가 어떤 기쁨과 좌절을 느끼고 있는지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점검해야 할 민감한 주제들 중 대부분은 피평가자 자신이 먼저 언급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9. 평가 기준을 확립하라 사역 평가의 많은 가치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사역 수행에 관한 공식 기록인 “문서 궤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자료는—인사 기준을 충족시키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어떤 사역자의 사역 수행도가 지속적으로 평균을 밑돌아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할 때, 또 그러한 이유로 해당 사역자가 현재 상황을 개선하고 보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밟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을 알아보도록 격려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특히 유용하다.10. 초점을 명확히 하라 모든 사역 평가에서는 해당 피평가자가 평생 성장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서술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수년 간, 사실 이 목록에는 최대 두 개의 항목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소 한 개의 항목은 있어야 하는데, 이유는 모든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고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개를 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부분에 전략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1. 항상 업데이트된 상태를 유지하라 사역 평가가 모두 끝난 후에는,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이 없어야 한다. 새로운 내용이 드러난다는 것은 평가자가 직접 보고서에 관해 피평가자와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역 평가는 필요한 경우 중요한 주제들을 다시 가져와 그것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전략을 함께 세워가는 시간이다.12. 패턴을 찾으라 사람들을 평가할 때 지혜로운 평가자는 “단발성 특징”이 아닌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고자 한다. 한 사람의 삶과 사역에서 일정하게 드러나는 행동 양식과 태도를 규명해 내는 것은 중요하고 심사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위에서 나눈 내 생각들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사역을 평가하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주의력이 들게 마련이지만, 당신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명백하다. 잘 하기만 하면, 사역 평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업무 수행과 영적인 삶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2 Lessons I’ve Learned About Ministry Evaluations역자: 이정훈
교회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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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의식
기록하라
긍정적인면강조
사역평가
자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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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예배의 다섯 가지 유익
by David Mathis
2019-03-26
서로가 함께 모여 예수님을 경외하는 일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 중 하나이다. 바로 우리의 삶에 영적인 불꽃을 일으켜 계속 타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적 예배는 함께 나누는 말씀과 기도 및 교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도록 돕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하지만 예배를 하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경험이지 그 외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 예배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일과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를 기억하여 훈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영적 실천이다.돈 위트니(Don Whitney)에 따르면, 공적 예배에는 홀로 드리는 예배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는 은혜와 축복이 많이 있지만, 공적 예배에서 누릴 수 있는 고유한 유익은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1. 영적으로 깨어남우리는 종종 영적으로 안개처럼 희미한 상태에서 공적 예배를 드리러 온다. 힘들고 번잡한 주중에 타락한 세상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과 당장 눈에 중요해 보이는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정신을 맑게 하고 영을 재조정하여 늘어진 마음을 다시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공적 예배가 자신을 영적으로 일깨워 주는 데 강력하게 영향을 준다고 했다. “집에서 홀로 예배를 드릴 때보다는 교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내 마음이 훨씬 더 뜨겁고 활력이 있다.”영감이 있는 시편 저자의 경험은 루터의 말보다 더 낫다. 시편 73편에서, 저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절망적인 마음을 고백함으로 시작한다(시 73:2-15).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아오자,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게 된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시편 저자는 처음에 괴로움 가운데 있었다. 즉, 영적 안개가 매우 짙게 드리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때 그 안개가 걷히는 경험을 하고, 그 다음에는 찬양으로 절정을 표현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우리에게도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영적 무기력을 느낄 때, 우리는 공적 예배를 멀리하기보다는 그 예배의 일깨움을 더욱 맛볼 필요가 있다. 마음이 가장 침체되어 있을 때가 곧 예배가 가장 필요할 때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2. 신앙의 확증두 번째 유익은 공동체적 역동이다. 공적 예배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일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홀로 세상에 대항한 아타나시우스와 루터와 같은 인물을 존경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는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창 2:18). 이 영웅들은 암울한 시절의 산물이다. 그들은 비록 신앙 공동체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홀로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친구 없이 홀로 서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엘리야 때처럼 역경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은 칠천 명을 그에게 보내 주신다(왕상 19:18).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만드시고, 그 공동체를 ‘교회’라 부르시며, 우리를 이 위대한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으셔서 그 신앙을 확장시키신다. 교회 공동체는 믿음을 강하게 하며, 우리가 믿는 분을 진정으로 알도록 확신시켜 준다(딤후 1:12). 지역 교회에서의 예배는 보편적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 예배를 암시한다. 예수님은 열방이 자신의 백성이며, 언젠가는 모든 나라를 그분의 백성으로 포함시키실 것이다(계 7:9).3. 점진적 성장공적 예배는 우리의 영적 성숙에 있어 꼭 필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점진적인 성장을 하는 존재들인데(롬 8:29), 이때 공적 예배는 “다 [중략]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한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기 때문이다.팀 켈러가 말하듯이, 크리스천의 성화는 공적 예배에 참여하여 복음을 들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성령의 감화로 함께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자가 기도하며, 성가대가 찬양을 하거나, 혹은 참 진리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성장한다. 단순히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윤리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때보다도 공적 예배의 여러 순간을 통하여 치유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우리가 공적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4. 다른 사람의 인도공적 예배와 개인 예배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주도하는 위치와 관련이 있다. 공적 예배는 믿음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려 준다.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을 인도한다. 그와 달리 공적 예배를 드릴 때는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게 된다.개인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운전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어떤 성경 구절을 읽을지, 언제 기도할지,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성경 읽기와 묵상에 얼마나 시간을 소요할지, 어떤 찬송을 부를지, 자신에게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전할지, 그리고 무엇을 적용할지를 우리가 결정한다. 하지만 공적 예배에서 진행되는 예배 의식에 응답하는 자로 입장이 바뀌게 된다. 다른 사람이 설교하고 기도하며 찬송을 선택하고, 각 순서에서 얼마나 시간을 소요할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인도를 받아 따라가는 입장에 있다.개인 예배 시간에 예배의 요소들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도 우리에게 유익하다. 공적 예배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고, 다른 사람의 인도를 수용하는 기회를 제공한다.5. 기쁨의 증가마지막으로, 공적으로 모인 상황에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한 차원 더 커진 기쁨을 경험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함께’ 경배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고조되고, 갈망이 깊어지며, 기쁨이 증폭된다.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공적 예배에서, 우리가 고유하게 즐기는 ‘은혜와 축복’은 영적으로 깨어남, 신앙의 확증, 점진적 성장, 다른 사람의 인도 그 이상이다. 서로 모여 함께 하나님을 높일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갈망과 더 큰 경외의 기쁨을 경험한다.공적 예배에서 느끼는 은혜의 비결은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영광을 소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홀로 얻지 않고 믿음의 형제자매와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Five benefits of Corporate worship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공적예배
신앙확증
돈위트니
마틴루터
아타나시우스
팀켈러
사람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말씀
by R. C. Sproul
2019-03-26
수년 전에 할머니는 자신이 어린 소녀였던 1880년대에 하던 여러 가지 게임을 내게 알려 주셨다. 그중 하나가 할머니와 감리교 신자였던 할머니 친구, 그리고 로마 가톨릭 친구들이 함께 즐기던 게임이었다. 가톨릭 미사에 대한 장난스런 농담과 함께 할머니는 “토미와 조니가 강을 따라 도미노 게임을 하러 갔다”라고 말하곤 했다. 도미네(역주: 주님을 뜻하는 라틴어)라는, 가톨릭 미사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빗대어 도미노라는 단어를 쓰던 놀이였다. 당시 가톨릭 미사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사에 참석하는 아이들도 거기서 쓰는 단어를 알 턱이 없었다.비슷한 맥락에서 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술사가 어떤 마술을 부릴 때면 꼭 쓰는 주문에 대해 알고 있다. “아브라카다브라”, “프레스토 창고” 등과 같은 주문을 외우면서 마술을 하는데, 특히 유명한 주문은 “호커스 포커스”이다. 오늘날에도 이 주문은 마술을 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말 그대로 가장 유명한 마술사의 주문인데, 이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이 말은 로마 가톨릭 미사에서 쓰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차용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고대 라틴어로 암송되는, 다음과 같이 반복되는 구절이었다. “혹 에스트 코퍼스 메움.” 이 말은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라틴어 구절인데,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찬식에서 먹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와인이 가진 기적의 요소를 담은 이 구절이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의 귀에는 우스꽝스럽게도, “호커스 포커스”로 들린 것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파생은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미사를 인도할 때 생기는 당연한 결과이다.모든 미사를 오직 고대 라틴어로만 진행해야 한다는 중세 시대 교회의 신념은 확고했다. 라틴어는 오로지 교육받은 사람, 그것도 주로 성직자들만 이해하는 언어였고, 일반 신자에게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야, 미사의 언어를 라틴어에 국한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외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성경 말씀은 말 그대로 교회 목회자에게 한정되었고, 그럼으로써 말씀은 언어에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 신자들의 손에까지 결코 이를 수 없었다. 성경을 읽고 스스로 해석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나 이해하는 언어로 성경을 읽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무려 수세기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이단 시비와 박해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앞두고 영어를 쓰는 사람들 중에서 틴데일과 위클리프가 교회 검열에 걸렸는데, 이들이 감히 성경을 라틴어 외의 언어로 번역하려 했기 때문이었다.1521년, 마틴 루터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면전에서 자신이 쓴 글을 철회하기를 거부하고 전체 의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를 정죄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보름스 의회는 극적으로 종료되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단호한 대답에 의회는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지만, 루터의 친구들은 납치를 가장해서 루터를 보름스에서 빼돌렸고, 아이제나흐 근처에 있는 발트부르크 성에 비밀리에 피신시켰다. 거기서 사제로 변장한 루터는 일 년에 걸쳐 평생의 사명인, 신약성경을 원문 그리스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성했다. 성경을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번역한 작업이야말로, 루터가 교회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그러나 그 결과가 반드시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고대 언어에 정통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지론은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였다. 그런 그였기에 루터가 성경을 누구나 다 아는 모국어로 번역한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수준의 문헌학자라는 점에서 루터를 존경했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감히 교회에 반대하면서까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을 질타했다. 만약에 성경이 공용어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건 “온갖 죄악의 범람을 막고 있던 문을 열어버리는 셈”이 될 것이라며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충고했다.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쥐어주게 되면 마치 찰흙으로 코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말씀을 마구 왜곡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건 누구라도 자기 뜻에 맞게 말씀을 마구 해석해도 된다는 면허증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도 이 점에 동의했다. 미숙한 사람이 자기 말로 된 성경을 읽게 되면 많은 악행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의 이단 사상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말씀을 악용할 여지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루터는 성경의 명확함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즉 구원에 대한 핵심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해서 어린아이라도 제대로 읽으면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이 전달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누구나 스스로 읽고 구원의 기회를 잡는 것은 가치가 있으며, 비록 거기에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루터는 확신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온갖 죄악의 범람을 막고 있던 문이 꼭 열려야 한다면, 열리는 것이다.”성경을 공용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사적인 해석에 관한 기본 원리가 생겼다. 16세기 중엽에 트리엔트 공의회 제4차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적인 해석 원칙을 정죄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 이후로 성경은 수천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에라스무스의 예언적 우려는 사실상 현실화되었는데,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수많은 교단은 다 스스로를 성경적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복음은 전 세계로 알려졌다. 사적인 해석이 사적인 왜곡을 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엄중한 책임 의식,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Word of God in the Hands of Man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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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기독교인에게 명하는 십일조
by William Barcley
2019-03-25
성경은 신약의 성도에게 십일조를 명령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기준선은 구약에 명시된 대로 10%인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십일조는 경건을 위해 필수적이며, 교회의 지속적인 사역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요구 사항이기도 하다.내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면, 모세 율법보다도 선행된 십일조에 대한 요구는 의식적인(ceremonial) 면이 추가되어 성문화(成文化)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도 적용됨으로써 예수님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모세 이전의 십일조우선 십일조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는 성경 본문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창세기 14장과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창세기 28장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십일조에 대한 개념 자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주변 나라들의 풍습을 단순히 따랐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창세기 26장 5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이후의 가르침과 거의 동일하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 외의 율법도 주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이는 창세기 4장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인류 최초의 가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소산의 일부를 하나님 앞에 돌려 드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바친 제물의 종류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 또 이후 구약성경에 “처음 난 것”과 “첫 열매”의 제물이 십일조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십일조였기에 확실히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원칙과 또한 하나님이 이에 수반되는 모든 규례를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몇몇 사람들은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일회성으로만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존 커리드(John Currid)에 따르면, “십일조를 드리다”라는 동사는 빈번한 혹은 다수의 동작을 묘사한다. 즉 우리는 야곱이 “십일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과 평생의 언약을 체결”했으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왜 모세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록했을까? 모세가 나중에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국가적 풍습에 맞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의 경건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기록했다.더구나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히 7:1)에게 드린 것이기 때문에 그 십일조가 합당한 것임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 7장에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레위 사람들이 모세 언약 아래에서 준수했던 십일조를 연결 짓는 고유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는 히브리서가 새 언약의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옛 언약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즉 두 언약 사이의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다른 내용들과는 달리 십일조에 대해서는 크리스천이 영원한 대제사장께 십일조를 하게 된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이러한 본문들 안에서 제시되는 십일조에 대한 명백한 요구는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등장하는 것이지 그것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성문화(成文化)되어 있는 옛 언약일지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새 언약을 믿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옛 언약의 일부라고 묵살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들은 창세기 족장들의 경건함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나타낸다.모든 것이 그분의 것우리가 율법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십일조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기 위한 기준이라는 점이 명확해 진다. 십일조는 드리는 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시는 주님께 속한 것이다(레 27:30). 하나님의 백성은 십일조를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십일조는 여호와의 것이며, 또한 그들은 자동적으로 주님께 돌려 드려야만 했다.모세 율법 아래에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 정기적으로 드리는 십일조이고, 다른 하나는 ‘절기 십일조’로서 요구된 절기를 축하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었다(신 12:17-19).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구제 십일조’로 매 3년마다 레위인, 거류민, 아비가 없는 고아나 과부들을 위해 드리는 것이었다(신 14:28–29).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그들 수입의 10%가 아니라 23.3%를 바칠 의무가 있었다는 말이다.많은 구약 학자들은 이 세 종류의 십일조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세 개의 용도를 가진 하나의 개념으로 본다. 그러나 혹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비용은 여러 필수 절기들과 관련된 의식법(ceremonial law)과 결합될 때 당연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모든 절기들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이를 창조에 근원을 두고 있는 영원한 도덕법인 안식일 규례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모세 율법 아래에서 다양한 의식적인(ceremonial) 측면을 표현하게 된다(예를 들어 진설병을 가지고 행하는 의식들과 같이 말이다). 이는 또한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말하는 바, 누구든지 안식일에 대한 질문 앞에 비판 받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새 언약 아래에서 안식일의 도덕법은 남아있는 반면, 의식적인 부분들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십일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의식적인 면은 점차 사라지지만, 사역의 일을 돕는 기본적인 십일조는 남아있다. 하지만 십일조는 최소한의 것이다. 크리스천은 언제나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다른 사역들도 지원해야 한다(고후 8–9장). 이때 기본적인 십일조를 말라기 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회에 드려 그 사역과 선교를 돕도록 해야 한다.말라기 3장 6절부터 12절에 걸쳐 주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책망은 최소한 세 가지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1.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그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고발하신다(말 3:8). 이 구절은 십일조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한다.2. 거의 유례가 없는 경우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당신을 시험해 보기를 도전하신다. 십일조는 언제나 믿음의 시험이다. 큰 고통을 줄 수도 있으며,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어진 수입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결코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3.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릴 때,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고후 9:6). 모세 율법의 의식적인 면에 있어 부패한 제물로 드린 제사 외에는 이렇게까지 비난을 표현한 곳이 없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부족함을 경멸할 만한 것으로 보신다.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일조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십일조를 지지하신다(눅 11:4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일부분인 십일조에 대해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채 그릇되게 행하는 헌신을 정죄하신다. 그러고 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ESV(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에서 'ought'(해야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강한 어조와 필수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반드시 이것들도 행해야 하고, 저것들도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3장 전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실천과 가르침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무리들과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십일조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옛 언약 아래에 놓여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전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문맥을 놓친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다른 말씀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어떤 율법을 제하는 일을 피하지 않으신다(막 7:19). 하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십일조에 대해서는 주장하신다.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아내와 나는 결혼 생활을 하며 십일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는 여섯 명의 자녀를 키우며,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가운데 많은 도전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지역이라고 알려진 보스턴 북쪽 해안 지역에 살던 때에는 특히 더 힘들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뿐 아니라, 매년 선교비도 후원했었다. 우리는 십일조가 총소득에서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정부가 세금을 거두기 전에, 하나님이 당신의 십일조를 받으실 수 있도록 말이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필요를 맞춰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다.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소득의 채 3%도 안 되는 부분을 교회와 사역에 봉헌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간곡히 권하고 싶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가르치는 십일조에 헌신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부유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시지는 않지만, 그분은 분명 당신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옛말처럼, 당신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상으로 드릴 수는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Bible Commands Christians to Tithe번역: 정진호
교회생활
십일조
존커리드
모세율법
말라기
헌신
여호와의것
처음부터 함께해 온 칼빈주의와 교회 개척
by Jeff A. Medders
2019-03-22
목회자들의 책장에는 칼빈주의에 관한 서적이 많다. 그들은 (칼빈주의가 주창하는) 은혜의 교리를 설교와 상담과 양육 사역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 교리가 단지 탁상공론으로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사실 칼빈주의는 신학적인 지식을 넘어, 특별히 교회 개척을 지향하는 신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동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빈주의가 어떻게 교회 개척을 일으키고 지속시키는지에 대해서는 흔히들 생각해 보지 않는다.교회 개척에 동기를 부여하는 칼빈주의교회 개척이란 핵심 멤버를 모으는 일부터 쉽지 않은 사역이다. 예를 들어 가족을 이끌고 외딴 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온몸에 진땀이 흐를 것이다. 저조한 출석 인원, 비어 있는 예배당, 이래저래 따라올 수 있는 상황적인 압박 등은 제 아무리 믿음의 용사라도 맥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힘든 개척 사역을 어떻게 지탱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변을 칼빈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우리는 먼저 구원 역사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이 개척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극대화시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곧 하나님만이 누구도 멈출 수 없고 좌절시킬 수도 없는 능력의 근원이시며 우리는 바로 그 능력을 지니신 이와 더불어 사명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마음과 시선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열리게 된다. 여기서 은혜의 교리는 우리의 노력과 인내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에 힘을 불어넣으며 왜 우리가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요나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으며(욘 2:9),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칼빈주의 5대 교리와 교회 개척칼빈주의 5대 교리는 개혁주의 구원론을 정리하는 데서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5대 교리는 교회 개척을 위한 신학을 제공하고,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파송하게 만들며, 총체적인 선교학을 견고히 세워 준다.전적 타락인간이 전적으로 죄악에 물들어 있다는 전적 타락의 교리는 누구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따라서 도시나 시골이나 교외, 그 어디에 살고 있든 상관없이, 모든 이들은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 영적으로 타락하여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일은 오직 구원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척을 통해 각 지역에 교회들이 확산되게 함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무조건적 선택 및 제한 속죄이 두 가지 교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만 근거해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계 5:9). 이 사실대로라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는 그분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이 세계 모든 지역에서 자신의 양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나팔을 불어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그 선하신 목자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카페에 있든, 학교에 있든, 시장에 있든, 우리는 그 어디서나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힘써야 한다. 거기에 그분의 양이 있다면, 그(녀)는 우리를 통해 전해지는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요 10:27).불가항력적 은혜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는 우리가 지고 있는 부담을 덜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생시키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역의 성공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즉 우리의 설교나 전략이나 세련되게 갖춘 예배 형식이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신다. 이런 관점은 우리의 잘못된 부담을 덜어 주면서, 동시에 사역에도 정진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하나님이 그분의 약속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며, 지속적으로 제자 삼는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개척은 지상 사명을 성취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길에서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전 3:5-7).성도의 인내성도의 인내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키도록 하신다는 내용을 가르친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을 지키며 인내하는 여정은 홀로 걷는 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리는 신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가리키는 복수형으로 표현된다(perseverance of the saints). 즉 인내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성도의 인내란 (다른) 성도와 함께하는 인내이다. 이때 지역 교회는 마지막까지 신앙으로 인내하는 성도의 여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히 10:24-25).간혹 칼빈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교한 개혁신학의 요점을 다루며 앉아서 토론만 하거나 인터넷상에서 다른 신학 전통에 대해 비판하기만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진짜 칼빈주의는 그런 일에 시간을 보내도록 우리를 놔두지 않는다. 만일 칼빈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논쟁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도록 이끌지 않는다면, 그 전통은 설익은 신앙 체계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아예 해롭고 위험한 사상일지도 모른다.진짜 칼빈주의는 선교적 칼빈주의이다. 여기에 역사적 칼빈주의의 진면모가 있다. 가령 칼빈 자신이나 옛 칼빈주의의 전통을 고수했던 찰스 스펄전과 같은 인물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명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교회 개척의 선두 주자, 칼빈칼빈은 서재에만 틀어박혀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 개척에 대해 뛰는 가슴을 품은 목회자였다. 그래서 그의 사역도 저술과 설교 및 주석 작업을 넘어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제네바에서 목회하는 동안, 칼빈은 목사후보생들을 훈련하고, 양성하며, 파송해서 교회를 개척하게 했다. 이에 대해 존 스타크(John Stark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555년이 될 때까지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그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총 5개의 교회를 프랑스 지역에 개척했다. 4년 후에는 프랑스에 개척된 교회가 100여 개가 되었다. 1562년에 이를 때까지는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와 그 주변 도시들의 협조로 2,000개 이상의 교회를 프랑스에 개척하게 되었다. 이렇듯 당대 유럽에서 칼빈은 교회 개척의 선두 주자였던 셈이다. 그는 교회 개척에 요구되는 사역의 전 과정을 이끌었다. 곧 선교사와 교회 개척자를 훈련하고 평가하며 파송한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상담하고 편지하며 사역을 지도했던 것이다.”이처럼 진짜 칼빈주의자라면, 교회 개척의 불씨를 꺼뜨리기보다 타오르게 할 것이다.교회 개척의 전략가, 스펄전우리는 교회 개척 프로그램이 마치 현대에 고안된 새롭고 유익한 대안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래 전에 스펄전이 영국에서 세운 목사후보생 대학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이미 운영했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단지 위대한 설교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열방에 사람들을 보내 교회를 개척하고 갱신시키는 프로그램 운영자였다.스펄전을 연구하는 톰 네틀스(Tom Nettles)는 이렇게 말했다. “스펄전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어려운 지역에서 전도하는 교회 개척자가 되도록 학생들에게 매우 분명한 동기부여를 했다.” 또한 스펄전 자신은 그가 창간한 월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바는 이 학교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점점 더 선교 사역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다. 우리 기도에 주님이 응답하여 그 일을 이루시리라고 믿는다.” 물론 주님은 그 일을 실제로 이루셨다.네틀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펄전의 목사후보생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영국, 스페인, 남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 자메이카, 터키, 도미니카공화국, 하이티, 남미, 인도,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1891년부터 1892년까지 스펄전의 목사후보생 학교에서는 거의 900명의 사람들이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약 30년 전인 1864년부터 추산한다면, 약 100,000명의 사람들이 스펄전이 배출한 교회 개척자들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되었다.지금도 함께하는 칼빈주의와 교회 개척칼빈주의와 교회 개척은 이렇듯 오랜 관계를 맺고 있다. 칼빈과 스펄전뿐 아니라, 오늘날 호주, 부르키나파소, 칠레, 콩고, 인도, 일본, 케냐, 레바논, 말라위, 모잠비크, 파키스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터키, 아랍에미리트, 우간다 등에 740여 개의 교회를 두고 있는 Acts 29(사도행전 29장) 운동 역시, 칼빈주의자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교회 개척을 추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선하고, 영광스럽고, 눈부셔서 우리의 책장 속에만 갇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빛은 거기서 나와, 오늘도 우리가 개척하는 사역 현장 속으로 침투할 수밖에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lvinism and Church Planting Are Old Friends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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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이 이야기하는 예루살렘 공회
by Scott Swain
2019-03-21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진행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진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준다. 그 이야기는 복음이 진전되는 과정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는 내용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 15장에서 소개되는 예루살렘 공회에 대한 이야기는 초대 교회가 직면한 갈등의 한 사례를 보여 주며, 어떻게 하나님이 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해 회의하고 심사숙고하여 마침내는 복음의 확장에 도움이 되는 결과에 이르게 하셨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논쟁예루살렘 공회는 구원의 본질을 다루는 심각한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사도들의 지시를 받지 않은 어떤 교사들이 이방인을 중심으로 새롭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서는 할례와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행 15:1, 5, 24).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러한 가르침이 복음의 진리에 상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적으로 그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다]”(행 15:2). 결국 이 문제가 가볍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한 논쟁의 범위도 확대되었기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사도들과 장로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된다.공회의 소집이렇게 안디옥 교회가 도움을 요청하자,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인다]”(행 15:6). 여기서 우리는 “이 일을 의논”할 때 그들이 취한 방법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루살렘 공회에 대한 누가의 설명을 더 깊이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 세 가지 질문이란 ‘누가 결정하는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무엇을 결정하는가’이다.누가 결정하는가첫째로, ‘누가’ 문제의 해결 방안을 결정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로 “사도와 장로들이” 결정한다. 누가는 다섯 차례나 반복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수행한 역할을 주목하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행 15:2, 4, 6, 22-23). 물론 여기서 사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내용이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시작부터 그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을 감당해 왔기 때문이다(행 2:42-43; 4:33, 35, 37; 5:29; 6:1-6; 8:1, 14; 9:27; 11:1). 오히려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사도행전 11장 30절에서야 처음으로 언급된 직분인 장로들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이 이야기의 현재 단계에서 장로들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은, 그 역할을 통해 리더십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 누가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 이후로 누가가 더 이상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듯, 교회를 설립하는 데 필요했던 사도들의 근본적인 역할이 마무리되어 가자, 초대 교회의 리더십은 장로들의 손에 위임되고 있었다(행 20:17-38). 즉 사도들과 더불어 장로들은 당면한 문제를 논의하며 해결 방안을 결정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어떻게 결정하는가둘째로, ‘어떻게’ 사도들과 장로들이 문제의 해결 방안을 결정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난 대로 그분의 구원 계획이 펼쳐지는 방식을 고찰하여 결정을 내리게 된다.베드로가 주장하듯이,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행하신 일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입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선택하셔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하셨을 뿐 아니라(행 15:7),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행 15:8)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셨을 때 행하신 일 외에 할례나 율법 준수와 같은 다른 요구 사항을 구원의 조건으로 부가하는 일은 “하나님을 시험하”(행 15:10)는 행위가 되었다.더 나아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대언하는 권위를 과연 누가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공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명백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신 권위 있는 대변자인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그분의 계획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이 공회에서 (신약의)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통해 주어졌다. 그는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말했다(행 15:14). 다음으로 (구약의)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11-12절을 공회에서 인용하며 구약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암시한 야고보에 의해 주어졌다(행 15:13-21). 결국 야고보가 주장하듯이,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목적에 대해 서로 “일치”된 메시지를 드러냄이 확인되었다(행 15:15).따라서 예루살렘 공회에서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린 자들은 교회의 지도층이지만, 그들은 “신앙의 모든 논쟁”과 “공회의 모든 판결”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는 최고의 권위(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조 10항),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무엇을 결정하는가셋째로,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무엇을’ 결정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확인한 이상, 공회의 남은 절차는 분명해졌다. “성경이 말씀하니,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옛 교훈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의하는 과정만 남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에, 공회는 할례나 율법의 다른 요구 사항을 구원의 조건으로 부과함으로써 이방인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할 권한이 없었다(행 15:19, 24). 대신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해야 한다고만 결의하게 되었다(행 15:20). 왜냐하면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왔기 때문이다(행 15:21).여기서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곧 어떻게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유를 허용한 공회의 결정과 레위기 17-18장에 근거한 사도행전 15장 20절의 네 가지 금기 사항의 예처럼 율법의 몇 가지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제한한 공회의 결정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신약학자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의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보캄에 의하면, 레위기 17-18장에 근거한 네 가지 금기 사항은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할례를 받아 모세 율법 전체를 준수할 책임이 있는 경우가 아닌 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사항들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야고보는 모세 율법을 준수할 책임이 없는 이방인이 유대인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지침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만일 이런 추론이 옳다면, 공회의 결정은 복음의 본질과 그 복음이 제시하는 율법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공회는 이방인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엡 2:8-9), 모세 율법이라는 짐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아 그들에게 부과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방인이 선한 일을 위해 구원받았기에(엡 2:10), 그들에게 “각 성에서”(행 15:21) 함께 사는 이웃인 유대인을 섬길 기회로 그 자유를 활용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사도행전 15장 20절의 금기 사항을 지킴으로써 이방 기독교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몇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전 9:19-23).그리하여 예루살렘 공회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제기될 수 있는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피하게 되었다.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를 피하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필수 결과임을 부인하는 반율법주의를 피하게 된 것이다.사도들이 정한 규례사도행전 15장 22-29절에서 보내진 편지는 사도들이 정한 규례(the Apostolic Decree)를 담고 있으며, 이는 예루살렘 공회가 내린 결정을 요약하고 있다. 이 규례는 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조화롭게 공포되었기에, 예루살렘 밖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게 결정적이며 교의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참고로 사도행전 16장 4절에서 언급된 ‘규례’는 문자적으로 교의를 가리킨다). 안디옥 교회에 이 편지가 전달되자, 그 안에 담긴 규례는 그들에게 기쁨, 위로, 능력, 평안을 가져다주었다(행 15:31-33). 더 나아가 그 규례는 안디옥 교회 말고도 다른 이방인 교회들에까지 전달되었다. 사도행전 16장 5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행 16:5).결론거짓된 가르침은 교회를 “괴롭게 하고”, “혼란하게 한다”(행 15:24). 사도행전 15장은 거짓된 가르침이 일으키는 괴로움이 확장될 때 교회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해결 방안을 보여 준다. 지난 역사 동안 많은 문제들을 다룰 때 교회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를 따라 왔다. 그 사례로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공회만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총회까지 들 수 있다. 이처럼 교회가 예루살렘 공회의 모범을 따르며 진행했던 지난 회의들은 교회의 평안과 순결 및 복음의 확장을 촉진시켜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 자신이 정하신 수단으로 입증되어 왔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Jerusalem Council번역: 장성우
역사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회
논쟁
소집
결정
규레
부흥이 아닌, 부흥 운동은 이제 그만
by Michael Lawrence
2019-03-18
어떻게 교회를 키울 수 있을까?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관심을 갖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질문을 던지는 동기가 선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즉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신실한 열망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결국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부흥 운동의 역사제2차 대각성 운동이 크게 성공한 이후인 1800년대 초반부터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는 교회를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부흥 운동(Revivalism)의 '기술'에 주목했다. 부흥 운동과 부흥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매사추세츠 서부의 청교도 성직자였던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는 부흥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그의 백성 가운데 신앙을 부활시키는 특별한 사역"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부흥이 가진 초자연적이고 놀라운 측면과 그것이 교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회심과 성도의 제자화, 양적이며 또 영적인 성장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신성한 부흥의 결과이다. 그의 손자이자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 그리고 뛰어난 신학 변론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신앙적 열망을 느끼는 횟수 또는 강도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분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고자 하는 마음의 변화로 증명된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증명하는 일은 성령의 열매이지, 결코 흥분이나 열심이 아니라는 것이다.한편, 부흥 운동은 "구원의 확신, 회개와 거듭남"을 끌어낸다고 간주되는 일련의 기술 및 방법의 집합체이다. 역사학자 이안 머레이(Iain Murray)가 지적했듯이, 정작 대각성 운동 당시의 부흥 설교자들은 "부흥을 일으키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말하는 '부흥 운동 주도자들'은 심지어 부흥의 결과를 보장한다는 시스템까지 만들어 유행시키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되었는가 하면, 부흥은 제2차 대각성 운동 이후 이제 그 성공이 예고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즉 구조를 분석해서 장치 또는 시스템의 기술적인 원리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부흥에 접근하게 되었다.제2차 대각성 운동의 캠프 미팅과 결신자 초청, 그리고 구도자석(찰스 피니[Charles Finney]가 고안한 방법으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예배 후의 안수 기도를 위해 미리 앞에 와서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에서부터 감정적이며 힘 있기로 유명한 D. L. 무디(Moody)의 설교와 아이라 생키(Ira Sankey)의 감동적인 찬양의 절묘한 결합,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연속적인 부흥회까지, 부흥 운동의 방식은 변화하는 문화에 맞춰 빠르게 변화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핵심적인 기술은 예전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응을 고조시키기 위한 대규모의 환경,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고의적인 감정 자극, 그리고 끌어낸 반응을 회심의 고백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짜여진 기도 또는 일련의 행동까지 모두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기술의 사용 이면에는 개인의 반응을 설교자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전제와 더불어 회심을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킨 우리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이나 무디, 빌리 그레이엄 등의 사역에서 진짜 회심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회심이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써 죄의 자각, 지속되는 회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주권적인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지 않고 회개와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죄 가운데 죽은 채로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 안에 인간의 기술이 들어설 자리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손을 강제로 움직여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기술이란 있을 수 없다. 칼빈주의자가 된다는 건,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러한 진리가 바울(엡 2:1-10)뿐 아니라 예수님(요 6:44-45; 10:27-30)도 동일하게 가지셨던 바로 그 신학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비록 부흥 운동의 기술이 복음 전도자의 임시 ‘부흥회’에서 지역 교회의 주일 예배로까지 옮겨간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부흥 운동이 심지어 구원에 대한 개혁주의적 또는 칼빈주의적 이해를 고백하는 교회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할 현상이다. 혹시 부흥 운동의 기술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결국, 그 기술이 원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나? 군중을 끌어모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들과 감정적인 연결을 맺어 그 순간에 고백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으고 연결하고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기존의 신학적 확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부흥 운동의 효과각 교회마다 예배나 부흥회의 분위기, 찬양 선별 및 브랜딩은 각각 다르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수정교회에서부터 당신의 동네에 있는 대형 교회에 이르기까지, 부흥을 일으키고자 하는 방법은 교파에 관계없이 점점 더 동일해지고 있다. 즉 ‘모으고, 연결하고, 이끌어 내라’는 흐름에 수많은 교회가 집중하고 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 실용주의적 접근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큰 교회를 담임하는 칼빈주의자 목사에게 물어보라. 아마 "당신이 제대로 못하는 전도보다 내가 잘하는 매력적인 전도가 낫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만 찾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교회 성장을 위해 필요한 건 단순하다. 좋은 음악, 어린이 프로그램, 그리고 충분한 주차 공간이면 된다"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아무리 칼빈주의자이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신실하게 믿더라도, 이러한 발언은 해당 목회자들이 교회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을 선호하고 또 교회는 그저 사랑받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신학자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현대화에 함몰된 현대 복음주의를 비판한 그의 첫 번째 책 '신학실종'(No Place for Truth)을 출판했다. 그 책의 부제는 '복음주의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이다. 그는 제2차 대각성 운동 때부터 복음주의자들이 사역에 있어 이미 현대화의 도구인 마케팅, 기술, 제도화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결론지었다. 쉽게 말해, 목표는 고상했지만 그 동기는 실용적이었다. 오늘날은 모든 성공이 숫자로 측정되는 만큼 현대화의 도구는 더 잘 소비된다. 그렇게 부흥 운동이 시장 방식에 의해 정리되고 완성됨에 따라 "교회를 다니지 않던(unchurched)"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는 성장한다. 웰즈는 이런 성공에 눈이 멀어버린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대적이고 산업적인 도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오늘날의 부흥 전략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현대화를 지향 및 소비하는 문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교회는 현대 문화를 향유하고 추구하는 종교 소비자들로 넘치게 된다.평범한 은혜의 수단을 신뢰하라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킬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내리는지, 사람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매력적으로 제시할 때 비로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부흥 운동에서 쓰는 현대적 도구들은 성공으로 가는 티켓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은,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서만 다시 태어난 자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부흥 운동은 결코 당신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우리는 부흥을 원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참된 역사로 일어나는 부흥을 원한다. 태초부터 이 희망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뤄져 왔다. 오순절 첫 복음 전파에서 종교 개혁을 통한 복음 선포의 회복까지, 또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했던 바로 그 복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언제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그러므로 칼빈주의자여, 이제 부흥 운동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키우기 위해 쓰셨던 바로 그 평범한 은혜의 수단으로 교회를 성장시키자. 그 수단은 바로 올바른 복음 설교, 올바른 성례, 그리고 올바른 권징이다. 그리고 그 옛날의 사도들처럼 말씀과 기도 사역에 헌신하자(행 6:4). 현대적 도구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을 중단하라. 그것은 결코 사도들의 방법이 아니었다.문화적으로 적절한 음악, 편리한 주차 공간, 매력적인 간판, 그리고 간소한 등록 절차는 잘못된 구성 요소가 아니다. 이런 부분들도 당연히 우리가 신경써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런 도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롯이 말씀과 하나되는 영적인 예배를 이끌거나, 설교를 통해 그들의 마음에 참된 진리를 심어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령만이 그 일을 하신다. 인간적인 기술이 아닌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그 역사하심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ey Calvinist, Enough of Your Revivalis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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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징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견해 차이
by Jeremy Kimble
2019-03-14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리 차이에 대해서는 수세기 동안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예를 들어 이신칭의, 세례, 성찬, 성인 숭배, 교회의 조직 등 넓은 범위에 걸친 주제들을 다루며 양측이 논쟁해 온 것이다. 그런데 권징에 관해서는 둘 사이의 차이를 다룬 설명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이 주제에 관한 역사적인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다음으로 권징에 대한 두 교파의 견해를 살펴본 후에, 마지막으로 그들의 견해를 평가하고 성경적인 권징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를 제안하고자 한다.역사적인 배경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권징을 일관되게 적용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분명히 초대 교회는 거짓된 교리를 퍼뜨리거나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않은 교인들을 징계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두 가지 종류의 회개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때 수반되는 단회적 회개와 그 결과로 신자가 된 사람이 일생동안 죄와 싸우게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복적 회개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과중한 죄에 계속해서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잘못을 교회 앞에 시인함으로써 친교를 회복하도록 힘써야 했다.그런데 3, 4세기에 이르러서는 (그와 같은 회개를 통해) 교회에서 원래의 직분을 회복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참회의 권징’(penitential discipline)을 받으며 회개하는 자가 기존의 교인 자격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해 타인의 기도를 간청하거나 성찬 참여가 금지된 상태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등 더욱 구체적인 단계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된 참회의 행동이 결국에는 교회의 권징 방식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이처럼 시간이 흐르며, 마태복음 18장에서 가르치는 방법과 같은 성경적인 권징의 절차는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점차 사라지거나 바뀌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원리적으로는 권징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실천적으로는 그 관습을 서서히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속죄를 위한 참회의 과정이 제도화되어 등장한다.권징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견해이 참회의 방식은 결국 로마 가톨릭의 역사에서 성문화된 규범으로 확립된다.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기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과 혐오”를 수반하며 미래에 그 죄를 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져온다(로마 가톨릭교회 교리문답, 1490). 이때 참회는 뉘우침을 표현하는 세 가지 종류의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회개(repentance), 사제에게 행하는 죄의 자백(confession), 삶의 개선을 표현하는 보상(reparation)이 그것이다.회개는 반드시 믿음으로 가득 찬 동기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또 하나님 및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양심을 철처히 살펴본 후에 기억나는 모든 죄, 즉 아직 자백하지 않은 모든 과중한 죄를 사제에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자백하는 사람은 “죄로 인하여 손상된 문제를 보상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에 합당한 습관을 재정립하기 위해” 참회하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행동에는 금식과 기도와 구제가 포함되지만, 공의를 행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성경을 읽거나, 전례주년(the liturgical year)의 절기와 일자를 준수하는 일 등도 포함될 수 있다.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도의 후계자라고 간주되는 사제들만 “교회의 권위로부터 용서하는 직분을 받아 화해의 사역을 행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참회의 결과로는 하나님 및 교회와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상태, 대죄(mortal sins)에 대해 주어진 영속적 형벌이나 다른 죄에 대해 주어진 일시적 형벌의 면제, 양심의 평안과 안정, 영혼의 위안, 그리고 신앙의 전투를 위한 영적 활력의 증가 등이 따라온다.이러한 관습들에 더하여 로마 가톨릭에서는 필요한 경우에 출교도 시행한다. 이는 가톨릭 법에 의거하여 중대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교회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형벌이다. 이 형벌은 “성찬만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다른 활동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이 형벌을 받는 자에 대해서는 교회법에 따라 교황과 지역 주교, 그리고 그들에 의해 특별히 권한을 부여 받은 사제 외에는 사죄를 행할 수 없다.”이때 출교가 성경과 그 가르침에 관한 역사의 권위있는 해석과 조화될 경우에는 오류가 없는 권징으로 간주된다. 또한 출교된 사람은 참회의 방법으로 그들의 죄를 사죄받지 못하기에 교회 밖으로 추방되어 저주를 받는다. 결국 요약하자면, 로마 가톨릭의 권징은 사도적 후계자에 귀속된 권위 아래 행해지는 죄의 자백, 참회,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 주어지는 출교라는 방법을 통해 시행된다고 할 수 있다.권징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로마 가톨릭이 규정한 자백이나 참회의 방법과는 달리, 권징에 대한 개신교의 가르침은 신자의 제사장 직분에 의해 행해지는 회개(repentance)와 회복(restoration)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스스로 로마 가톨릭의 참회 제도를 깊이 경험한 자로서 그 권징 방식에 대해 비성경적인 관습이라고 비판하였다. 지역 교회에서 각 신자가 행하는 참된 회개와 통회의 대체물이 되어 버린 가톨릭교회의 관습을 루터가 비판하자, 이는 종교개혁을 촉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움직임은 또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권징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적용을 더욱 추구하게 만들었다.루터의 많은 작품들이 이 주제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세 편의 소논문 내지 설교가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바로 ‘금지에 관한 설교’(A Sermon on the Ban, 1520), ‘열쇠’(The Keys, 1530), ‘공의회와 교회에 관하여’(On the Councils and the Church, 1539)라는 작품이다. 이러한 문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논의는 참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 반대하는 루터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루터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 고린도전서 5장 1-13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14절, 요한이서 1장 10-11절과 같은 본문을 인용하며,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지역 교회의 권징을 따라야 한다고 권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 깊이 회개하며 뉘우치는 과정에서 권징은 영적 열매를 맺게 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회중으로부터 용서를 얻기 위해 다른 부가적인 참회의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또한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열쇠’란 교황이나 주교가 아니라 성도가 가지고 있는 권위라고 강조했다. 가령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 5장은 교인들이 권징에 참여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거기서 권징은 단지 사도들의 명령에 의해서만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권징의 목표는 누군가를 영원히 교회 밖으로 추방하여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참된 회개를 통하여 원래의 신앙을 회복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따라서 교회 전체가 권징의 과정에 참여했으며, 혹 출교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되게 그 판결을 행할 책임이 교회에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책임은 거기서 다하지 않았고, 그 출교된 자를 권하여 회개하게 하는 데에도 교인들의 지속적인 역할이 요구되었다.또 다른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은 또 다른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권징을 시행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올바른 교리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백성의 경건한 삶을 보존하기 위해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권징은 범죄하는 사람의 교정과 회복을 위해 시행되어야 하는 방편이었다(기독교강요 4권 12장 113절).재세례파 종교개혁자인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 역시 교회 권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후브마이어는 세례, 교인의 자격, 성찬, 제자도, 권징을 다 교리적으로 연결시켜서 그 모든 요소들이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 전체를 수호하는 가운데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인내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의해 행해지는 권징의 성경적 기준을 확고히 할 사명이 있다고 피력했다.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권징을 시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일지라도, 이 대표적인 개신교 주자들은 로마 가톨릭이 내세우는 참회의 관습만이 아니라 교황과 주교가 교회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상 자체를 비판했다. 오히려 지역 교회가 권징을 시행할 때 자체적으로 권위를 행사하여 교인들에게 회개를 요구해야 하며, 다른 참회 행위 따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평가와 적용앞서 설명한 각 견해에 대한 평가는 우선 ‘참회’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과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회개를 가르친다. 이 회개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심히 죄악되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죄에 대한 슬픔과 그 죄로부터 의를 향해 돌이키는 결단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 회개의 과정은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호의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내려는 참회의 행위(즉 더 많은 죄를 지을수록 더 많은 참회가 요구되는 행위)와는 다르다. 분명히 회개가 변화를 동반하지만, 이는 은혜를 받아 내려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주어진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과정이다(빌 2:12-13). 그리고 죄에 대해 궁극적인 값을 치른 이의 공로를 인정하는 과정이다(롬 3:21-26). 따라서 회개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가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정확하게 보여 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다음으로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는 권한에 대한 평가도 해야 한다. 이 권한은 로마 가톨릭에서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간주되는 권위자들에게 속해 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지역 교회와 교인들에게 속해 있으나 다만 그 사용 과정에서 지도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원리는 마태복음 16장 19절과 18장 18절에서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는 권한을 부여하며 반복적으로 언급하시는 구절을 통해 분명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이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교회 권징이 어떤 과정으로 시행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시는데, 그 과정은 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이에 대한 다른 사례 역시 고린도전서 5장 1-13절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도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쫓아내는 일을 교회 전체가 하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열쇠의 권위는 지역 교회에 귀속되지, 교회의 정치 위계에서 상부에 자리한 어느 특정인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따라서 이와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권징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가 구체적인 원칙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그중 세 가지 요점만을 언급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권면하여 죄를 피하도록 돕는 일을 할 때 동료 지체에 대한 우리의 역할과 책임을 진지하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로, 지역 교회는 회개를 권하여 사람을 회복시키는 권징을 시행할 때 성경이 요구하는 바에 가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셋째로, 권징이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을지라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권징을 가르치는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신뢰하는 가운데, 제자를 삼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을 추구하는 본연의 소명에 신실해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Two Views on Church Discipline: Protestant vs. Roman Catholic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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