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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빈이 다시 발견한 성령
by Sinclair Ferguson
2019-05-07
루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비해 칼빈의 이야기는 덜 알려져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과 씨름했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향한 엄청난 갈증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았던 반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되고 확실한 지식을 추구했다는 게 전체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나름 일리가 있다.루터의 경우, 중세 후기 가톨릭의 의식이 그에게 죄로 고통하는 양심에 평화를 주지 못했고 죄를 씻어내지도 못했다. 칼빈의 경우에는, 교회뿐 아니라 십대와 이십대 초반에 그가 보여 준 엄청난 지적 훈련과 중세 후기 인본주의 학문의 습득조차도 그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로마서 1장 16절이 두 사람의 배경, 교육, 기질 및 개성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장 16절 및 이후 구절이 이들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루터가 로마서 1장 16-17절과 씨름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싫어했다. 그 구절 속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좋은 소식에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지?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하는 역할은 오로지 저주뿐이라고 루터는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기록했듯이, 그의 눈이 열렸다. 그는 로마서 구절을 읽는 동안은 눈이 멀어 있었다. 글자들을 보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의가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알았다. 천국의 문은 열렸고 루터는 자신이 다시 태어났음을 느꼈다. 칼빈은 로마서 1장 18절과 이후 구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나님이 드러내신 지식, 우리가 소유한 그분에 관한 지식, 그러나 억압하고 우상 숭배와 바꿔버림으로 결국 인류가 포기했지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그 지식이 칼빈의 관심사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라틴어 판(1559)의 번역자인 포드 루이스 배틀(Ford Lewis Battles)도 그렇게 생각했다. 칼빈 신학의 대의이자 그의 신학이 끊임없이 중점을 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에 나도 거기에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종교개혁은 도대체 무엇인가?이 질문을 받으면 우리 대부분은 본능적으로 종교개혁은 의롭다하심,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또 혹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말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말씀(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과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 솔라(sola)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솔라도 성령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이 각각의 솔라에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성령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벤자민 워필드(B.B. Warfield)의 그 유명한 말처럼 칼빈은 '성령 신학자'였다. 성령을 떠나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 구원 받고 견인되지만, 은혜가 우리 속에서 나온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가 알게 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허락하신 역사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성령이 영감받은 인간을 통해서 쓰도록 하신 결과이다. 게다가 칼빈이 강조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성령이 바로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그럼 도대체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루터 신학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성령에 관한 그의 신학도 별도의 주제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에 비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좀 더 조직적으로 성령을 정리했다. 이 두 사람은 성령에 관해서 간결하고도 기념비적인 발견을 했다. 성령의 재발견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점점 구원 역사에서 성령의 역할을 빼앗아 갔다. 그 사실은 성례를 통해 은혜와 구원이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가르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구원은 성례에 갇혀버렸고, 구원에 필요한 열쇠는 이제 신부들과 교회 관리자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그 결과는 신학적으로나 실재적으로 재앙이었다. 성령의 역할은 탈취되었고, 그의 권위는 사제직에 의해 격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탄생 권리, 용서의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경험하는 대신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구원을 의심하고 불안하게 되었다. 과거 루터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은 성례의 도움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배웠고, 그 결과 그들이 가진 믿음은 완전한 사랑에 걸맞게 그들도 완전해야만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중세의 교리였다. 의롭게 된 사람들의 칭의는 다름 아닌 성례의 도움을 통해 의로워지는 칭의이다. 이 제도는 교회가 이런 칭의를 '은혜'로 인함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했지만, 이 은혜는 결코 '오로지 은혜로만'은 아니었다. 이 은혜는 성례라는 도움과 점진적 발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정도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구원에 대해서 낙관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이 지점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루터와 칼빈이 눈을 뜨게 된 지점이다. 칼빈이 즐겨 말했듯이 우리의 모든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여기서 성령이 역할을 한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그래서 우리를 가까이 불러 구원의 믿음에 반응하도록 한다. 루터가 자신이 거듭났다고 또 "천국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라고 느낀 건 분명하다.칼빈이 교회가 그동안 '부당한 지식'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갑작스럽고' 또 '예기치 않은' 회심을 경험했다면, 그건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자신을 부당하게 자신을 끼워 넣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셨고 칼빈은 구원의 모든 과정이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렇기에 존 녹스(John Knox)가 종교개혁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주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니다.▶ 읽어주는 아티클로 듣기 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he Reformers Rediscovered the Holy Spirit and True Conversion번역: 무제
역사
종교개혁
루터
칼빈
성령
로마서
솔라
건강에 유익한 양식을 섭취하고 있는가?
by David Mathis
2019-05-02
유기농 계란인가? 방목한 젖소에서 짠 우유인가? 우리는 매일 섭취하는 음식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따져보며 살아간다. 닭과 젖소에 주입한 호르몬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과연 유전자 조작 식품(GMO)이 몸에 무해할까?이러한 질문이 때로는 과도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분별력 있는 소비자로서 품게 되는 정당한 고민을 반영한다. 특히 우리 자신을 위한 식료품만이 아니라 아이들까지 먹는 음식을 고를 때는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 나름의 고민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섭취하는 영적 양식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할까?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 먹는 그 말씀이 영적으로 나를 건강하게 할 양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양식이 장기적으로 내 영혼에 끼칠 영향은 어떠할까? 내가 이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아 먹으면, 나의 영혼은 건강해 질까? 아니면 처음부터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구체적으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규칙적으로 섭취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양식들, 가령 주일 설교만이 아니라, 아침에 묵상하는 QT 자료, 수시로 접하는 기독교 서적과 팟캐스트 및 소셜 미디어,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영적 대화가 건강에 유익한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냥 우리 모두가 평생 읽어야 할 성경책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는 식의 답변 말고, 우리 자신이 현재 섭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양식이 정말로 영양가가 있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나의 건강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표나 결정 요인이 있을까? 다시 말해, 무엇이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을 만드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을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0-11절에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을 전달하고 있다.건강에 유익한 양식을 판별하는 기준디모데전서 1장 10절 말미에 언급되는 표현, 즉 문자적으로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이라는 어구는 목회 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좋은 교리와 나쁜 교리, 또는 건강에 이로운 교리와 해로운 교리를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다. 즉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가르침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짓된 가르침은 영혼의 질병을 낳는 반면(딤전 1:3; 6:3-4), 진실한 가르침은 장기적인 건강을 허락한다(딤후 4:3-4; 딛 1:9; 2:1). 우리가 이 ‘바른 교훈’을 처음으로 언급하는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과연 무엇이 건강에 유익한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바울은 바른 교훈이 다름 아닌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른다]”라고 밝힌다(딤전 1:10-11).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단순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자 정수이며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복음이다. 바울이 언급한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는 메시지가 그 기쁜 소식이며, 이는 우리가 전해야 할 말씀의 요체이다. 따라서 진실한 가르침은 바로 그 복음을 설명하고, 강조하며, 부연하는 반면, 거짓된 가르침은 그 메시지를 희미하고, 불분명하며, 애매하게 취급한다.하나님은 역사의 정점에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이 보좌에 올라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다.바로 이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지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이다. 이 기쁜 소식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담겨 있다.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이 믿고 고백하는 내용 또한 바로 그 소식과 관련되어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처럼 우리가 생각하기에 흥미롭고 편안한 사실만이 아니라, 죄와 거룩한 진노와 영원한 지옥 형벌처럼 어둡고 난해하며 불안한 내용도 포함된다.바울이 강조하듯, 바른 교훈이란 이러한 복음을 따르는 가르침이다. 즉 기독교 교리는 성경의 특정 본문으로부터 세부적인 방향성을 확보하는데, 이때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낳는 가르침이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고, 뒷받침하며, 명료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러한 복음을 통일된 주제로 삼아 형성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건강에 유익한 양식이다. 따라서 어떤 양식을 섭취할 때 그 영양 정보를 확인할 수 없거든, 복음이라는 시금석을 사용해 봐야 한다.건강에 유익한 양식이 가져다주는 효과이렇게 ‘복음’을 언급했으니 다 끝난 것처럼 글을 맺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바울은 건강한 가르침이 복음을 따르는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단순히 복음만 언급하지 않고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the gospel of the glory of the blessed God)이라고 하며 수식어구를 함께 사용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대할 때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수식어구는 과연 무엇이 복음을 좋은 소식이 되게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얼핏 보면, 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어구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어구는 바울이 어쩌다가 한번 언급한 표현이 아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개념이란,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지만 그 의미를 놓치기는 쉬운 ‘복음’과 ‘영광’과 ‘복되다’라는 개념이다.먼저 ‘복음’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하나님이 그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에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있다. 거기에는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다.이어서 ‘영광’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혹은 그분의 무한한 가치와 존귀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태를 일컫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다(특히 창세기 1장 27절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이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즉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말하는 “은혜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장 선명하고 밝게 드러난다.마지막으로 ‘복되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그 개념을 파악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단어이다.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일까?여기서 ‘복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경배 받기에 합당하셔서 우리가 찬양으로 그분을 복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물론 그렇게 해야 하지만,이 문맥에서 그 단어는 하나님을 수식하는 표현으로서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지만, 그분의 존재가 복되다는 표현은 그 이전에 그분 자신이 ‘행복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분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신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그분은 바로 이 행복을 소유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무한히 행복한 존재이시다.최근에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하나님의 복되심’(the blessedness of God)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며 디모데전서 1장 11절을 다루었는데, 이때 하나님의 복되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복음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소식이다. 이 소식은 그분의 본질을 영광 가운데 드러내며 복되심 가운데 증언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인류를 주권적으로 구원하는 분이실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그 존귀한 모습을 펼쳐 내는 왕이시며, 더 나아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신성의 깊은 영역에서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과연 하나님은 복되시다.”이 하나님의 복되심, 즉 그분의 영광 가운데 실재하는 거룩한 행복이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행복의 토대가 된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불만으로 가득하거나 차가운 마음을 지닌 분이 아니시다. 결코 아니다. 그분은 복되시다. 바로 그 존재에서 향유되는 무한한 행복을 우리와 나누는 분이시다.이 무한하게 행복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대로 창조와 구속 사역을 통해 스스로의 무한한 가치와 위엄을 공적으로 드러내셨는데, 이를 그분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그 영광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그분의 아들이 희생당할 때 가장 충만하게 드러났으니,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부른다. 태생부터 위법자들이었던 우리에게 이는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할 수 없이 영광스러우시며, 더 나아가 그 영광 가운데 ‘행복’한 존재로 계신다는 사실은 가히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집안에서는 부모가 행복하면 온 가정이 행복해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집”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에서 그분이 행복하시다면, 우리 역시 그 행복을 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바로 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야말로 우리 건강에 유익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m I Sitting Under Healthy Preaching?번역: 장성우
영성
예배
건강
유익한
양식
기준
효과
복음
바른교훈
하나님의복되심
청교도, 진정한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들
by Joel R. Beeke
2019-04-30
당신도 어쩌면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어봤을 것이다. “청교도는 누군가 행복해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처럼 현대인의 관점에서 청교도란 “흥을 깨는 사람들”, 또는 재미없고 “냉담한 신자들”로 여겨진다. 청교도와 관련된 표현에는 그런 선입견이 늘 따라다닌다. ‘청교도’(Puritan)라는 단어는 16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애초부터 비난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평범한 영국인의 관점에는 양 극단의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그 한쪽이 로마 가톨릭에 속한 ‘교황 예찬자’(Papist)였고, 다른 한쪽은 ‘정확성에 집착하는 사람’ 혹은 ‘엄격주의자’(Precisionist)로 여겨진 청교도였다. 즉 ‘청교도’라는 표현은 아주 세부적인 일에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며 또한 타인보다 자신이 순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이는 물론 사실을 반영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단어로 불리던 사람들은 순결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코 자신들을 순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죄악과 결함을 철저히 고백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한 삶을 실천했는데, 이를 청교도주의(Puritanism)라고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교리적으로 활력과 기쁨이 넘치는 칼빈주의를 지향했고, 경험적으로는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에서 얻는 따뜻함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 또한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역동적이고 신속하게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고, 교회에 모일 때는 언제나 삼위 하나님과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집중했다.이처럼 청교도들은 진지하고 경건했지만, 사실은 매사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교도들이 누렸던 즐거움이 과연 무엇인지, 다섯 가지로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1. 거룩한 즐거움: 하나님을 경외하며 누린 행복시편 128편의 주제는 그 내용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4). 여기서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진정으로 행복하여 내면에서 우러나는 기쁨, 즉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이 시편은 참된 즐거움의 토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있다는 가르침에서 더 나아가 그 즐거움이 창조 때부터 주어진 세 가지 사명을 통해서도 주어진다고 밝힌다. 그 사명이란 바로 노동과 결혼과 예배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즐거움이 매일의 일과 가정 생활과 예배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우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청교도들은 세 가지 요소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이룬다고 가르쳤다. 그 요소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인식, 하나님의 임재를 어디서나 지각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한결같은 책임 의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이다. 청교도들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죄는 불행을 가져다주고 내면에 있는 즐거움을 앗아간다면, 거룩한 경외심은 그 죄를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2. 노동의 즐거움: 일하면서 누린 행복또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도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누리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다고 믿었다.직업은 단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에, 그 일을 통해 이루는 모든 성취도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증거인 줄 알고 매사에 그분을 경외하며 즐거워한다.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일함으로써 모든 과업을 성경이 가르치는 정직과 성실과 열심으로 감당하며 힘을 다해 목표를 이루어 간다.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혹 사르밧 과부의 경우처럼 양식이 줄어드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펴주시기를 바라며 그분을 신뢰한다.인생에서 실망스러운 일을 경험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목적이 있음을 생각하며 그 상황을 영적 성장의 기회로 여긴다.이 땅에서의 수고와 선행에 대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자비로운 상급이 있음을 생각하며 이를 영원히 즐거워하게 되리라는 확신 가운데 산다.이처럼 세상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바라볼 때조차 청교도들은 풍부한 신학적 진리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3. 가정의 즐거움: 가족과 함께하며 누린 행복다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그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마찬가지로 청교도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가정 생활에는 즐거움이 쌓여간다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를 통해 얻는 즐거움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아내가 가져다주는 열매는 자녀만이 아니었다. 포도나무는 단지 포도만 맺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잎을 내고, 그늘을 만들 뿐 아니라, 주변을 아름답게 하고, 흙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도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인생에 베푸시는 많은 은혜를 가족들에게 보여 준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결실이 넘치는 삶을 상징하는데, 가족들은 이 포도나무를 통해 회복과 충전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같은 아내는 남편에게 현명한 조언을 제공하며, 남편은 그녀를 전심으로 신뢰하게 된다.물론 청교도들의 결혼 생활에도 결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애쓴 그들의 성실함은 가정을 견고하게 세우는 초석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이 정한 길을 걷는 자가 행복한 가정을 통해 복된 인생을 살게 되리라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4. 예배의 즐거움: 주일을 보내며 누린 행복시편 128편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누리는 즐거움을 묘사한다.“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시 128:4-5).청교도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복락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혼을 위한 잔칫날과 같았던 주일은 그들이 누리는 즐거운 삶의 중심에 있었다. 매주일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은 임마누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상쾌함을 수시로 누렸다. 이러한 체험은 기쁨의 눈물을 쏟게 만들며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이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평생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이처럼 청교도들도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앙 생활을 했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방식은 그분 자신에 의해 제정된다는 원리를 믿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예배의 방식에서 그 무엇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예배의 규범을 확립해 갔다.더 나아가 우리는 청교도들이 설교 한편 듣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여겼는지, 또한 그렇게 좋은 설교 듣기를 세상의 향락으로 날을 보내기보다 얼마나 더 만족스럽고 즐겁게 여겼는지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들이 듣던 설교는 보통 한 시간 이상씩 지속되었다. 케임브리지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가르친 로렌스 채더튼(Laurence Chaderton)은 언젠가 두 시간이나 쉬지 않고 설교를 지속하게 되자 회중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회중은 이렇게 소리쳤다. “제발, 멈추지 말고 계속 하세요!”5. 미래의 즐거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통해 누린 행복끝으로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행복이 먼 미래에까지 펼쳐진다고 선포한다.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 128:6). 청교도들은 기쁨에 찬 언약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혜 언약(the covenant of grace)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 될 뿐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며,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서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역과 전도의 핵심이 된다고 보았다.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신자란, 그 일생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God’s covenant faithfulness), 다시 말해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상은 바로 그들이 기록한 그 유명한 문서에 고스란히 반영되기에 이른다. “인간의 최고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진정한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들이와 같이 청교도는 흥을 깨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비난자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즐거움을 정말로 알았던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자신과 노동과 가정과 예배와 주일을 통해 경험했을 뿐 아니라 다가오는 후손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될 그 알 수 없는 미래에까지 미친다고 여긴 즐거움의 비결은 다름 아닌, 그들의 경외심 곧 성령의 역사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참되고 진실하게 경외하는 저들의 마음에 있었다.그 즐거움이 바로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라고 약속하신 그분 안에서 경험하는 삼위 하나님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기쁨을 알 수 없고, 오직 영원히 타오르는 불과 같은 하나님만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Reasons the Puritans Were So Joyful번역: 장성우
근현대교회
청교도
진정한즐거움
거룩한즐거움
노동의즐거움
가정의즐거움
예배의즐거움
미래의즐거움
언약적신실함
종교개혁자
교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두 가지 착각
by Timothy Paul Jones
2019-04-29
1932년, 남가주대학은 도난 방지를 목적으로 유니폼 티셔츠에 "남가주대학 재산임"이라고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는데, 인쇄를 한 티셔츠가 인쇄 없는 티셔츠보다 더 많이 도난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가주대학은 이런 문제점을 역이용하여 “남가주대학 재산임”이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판매하여 많은 수익을 냈다. 오늘날 많은 대학 및 스포츠 팀이 스포츠웨어에 "어느 대학의 재산"이라는 마크를 넣어서 판매하고 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제사장"(출19:6, 벧전2:5)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속한 모든 자녀에게 부여하신 "우리 대학의 재산"과 같은 마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라고 불렀을 때, 그건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용어를 교회에 적용했는데, 새로운 언약에 따라 믿게 된 이들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선택된 공동체로서 확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향한 공동체의 헌신은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교회에서 맡은 역할과 관련해서 빠질 수 있는 최소한 두 가지의 치명적인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착각1: 교인은 지도자의 소유물이다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은 특권이지만 그 특권이 그들을 지도자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경건한 리더십은 언제나 겸손한 청지기로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자만심에 찬 소유욕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교회 지도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라고, 사람들이 마치 지도자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양 착각하라고 부름 받은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양떼 가운데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지도자를 목자로 부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지도자들에게 ‘교인들은 내 재산’이라는 착각이 여전히 강한 유혹으로 남아있다.목사가 성도를 성공의 발판으로 쓴다면, 그건 한 마디로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도둑질이다.교인이 소유물이라는 착각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분노하면서 몰아치는 독재자 유형의 목사, 교회의 권징을 남용해서 다른 의견이 아예 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독단적 유형의 장로, 교회 재정을 다 통제하겠다는 무책임한 지도자. 또한 공적 목적에 맞지 않는 곳에 교회 카드를 쓰면서 상당한 비용을 허비하는 지도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경우가 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원이 하나님의 재산이 아니라 지도자의 재산이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 워낙 교묘하고 은밀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괜찮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지도자가 착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에 교회가 즉각적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경우 터져나오는 불평과 조급함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교회가 담임 목사 개인 브랜드를 홍보하는 플랫폼이 되어 SNS에서 인기를 끌게 하거나 서적 판매를 늘리는데 활용되는 때도 이런 망상에 빠져있는 경우이다. 바나바 파이퍼(Barnabas Piper)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 지역 교회 사역은 더 이상 지역 교회 사역에 머물지 않는다. 자만심은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직업상의 위험이다. 당신 이름이 실린 기사가 나오거나, 당신이 쓴 책이 나오거나, 또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자만심은 떨치기 힘든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그 자만심은 규모가 작은 교회와 부목사의 직분은 뭔가 큰 사역이 열리기 전까지 거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만심이란 우리 모두가 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을 공유하는 거룩한 관계라는 생각 대신 교회를 개인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활용하려는 행동 또는 태도를 의미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런 착각이 가져오는 절망적인 결과를 이렇게 묘사했다.“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중략] 자신이 원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들어가고, 스스로 만든 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형제들과 하나님까지 심판한다. 또한 [중략] 마치 자신의 꿈만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양, 스스로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창시자처럼 행동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바라는 이상이 실현되지 않으면 마치 공동체가 파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형제들을 원망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교회는 목사가 가진 희망찬 꿈을 중심으로 목회자의 환상적인 이상이 궤도에서 돌게 하는 기반, 플랫폼이 아니다. 또 교회가 목사에게 사회적 지위 또는 감정적인 만족을 주는 수단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재산이다. 그렇기에 성도들을 출세의 발판으로 간주하는 목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훔치는,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죄에 해당하는 절도를 저지르는 사람이다. 착각 2: 지도자는 교인의 재산이다“목사님, 내가 한 마디 하죠.” 그 집사는 행여 내가 한 마디라도 놓칠까봐 나를 향해 테이블 너머까지 몸을 뻗어 말했다. “만약에 사모님이 이번 건으로 나한테 한번 더 전화한다면, 내가 목사님의 스케쥴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목사님이 집에 있어야 할 때는 반드시 집에 있도록 할 겁니다.” 십 년이 넘게 지나서야 나를 사랑했던 그 집사의 협박이 어쩌면 나의 사역을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너무도 많은 교회가 바쁜 목사, 사역을 나누지 않고 혼자 다 맡아서 하는 목사를 좋아한다.나는 담임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러 떠난 사이에 4년간 협동 목사로 사역했다. 교인들은 내게 담임 목사를 제안했고 나는 그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담임 목사로서 부교역자를 뽑은 후에도 나는 기존에 하던 협동 목사 사역을 전부 다 했기 때문이었다. 스태프 회의를 인도하고 매주 여러 번의 설교를 준비할 뿐 아니라, 여전히 주일학교 선생님을 위한 월례 교육을 감독했고 청소년 및 청소년 사역위원회 회의 참석, 그리고 청소년 예배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으며, 곧 닥친 선교 여행을 위한 물류 작업까지 도왔다. 매일 저녁 혼자 집에서 첫 딸을 돌봐야 하는 아내의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났다. 아내는 내게 사역 일부를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아내는 충직한 마크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결국 나는 식당에서 마크 집사를 만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 대신 교회 회의로 너무나 많은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질책을 받은 것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내 사역을 위임하고,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포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는데, 포기해야 할 사역 목록을 앞에 놓고 한 시간 넘게 고민하던 끝에 결국 나는 내가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면 교회가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그때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마치 내가 교인과 또 교회 프로그램에 속한 소유물처럼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나처럼 사는 건 고귀하고 희생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나이 든 목사님들이 자신들이 젊었을 때 얼마나 교회를 위해 헌신했는지 자랑하면서 젊은 목회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교회를 책임지면 가정은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지실 거야.”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런 식으로 책임이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에 의하면, 교회 지도자로서의 완전성은 가정에서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딤전3:4-5). 가족을 소홀히 하면서 마치 자신이 교회의 재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목사는 교회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게 전혀 아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고 필요한 사역 현장에 그들을 배치하려는 것에 별 관심이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엡4:12). 목사는 교회의 종이다. 그러나 교회가 결코 목사의 주인은 아니다.‘내가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지도자일수록 항상 강하고 완전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진다. 따라서 그런 지도자는 결코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지도자일수록, “내가 없으면 우리 교회는 아예 제대로 사역을 할 수 없어. 나야 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이야”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그들이 갖고 있는 환상을 깨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나만이 아는 내적 삶과 남의 눈에 보이는 외적 삶을 성공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 사역의 측면을 간과할수록 결국에는 눈에 보이는 사역에서도 제대로 일할 수 없게 된다. 너무 많은 교회가 지나치게 바쁘고 혼자 모든 일을 다 감당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이처럼 교회가 지도자를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재산으로 생각할 때, 교인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라그럼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목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교인들의 소유라는 것도, 교인들의 지도자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는 사실을 다시 배워야 한다. 목사는 교회의 종이지만 교회는 결코 목사의 주인이 아니다. 지도자와 성도는 피차 서로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다 오로지 하나님께 헌신된 하나님의 재산이다. 출처: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wo Delusions That Can Threaten Any Church번역: 무제
교회사역
소유물
바나바파이퍼
자만심
착각
하나님의재산
가정
정체성
은사
교회의종
반대가 있는 곳에 사역의 기회도 있다
by Guy M. Richard
2019-04-23
어떠한 이유로든지 반대에 봉착해 본 적이 있는가? 최근에 나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이를 싫어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갈등과 비평 또는 어떤 반대나 어려움이 있으면, 크리스천들은 그것이 교회를 떠나거나, 사역을 그만두거나, 직책을 내려 놓거나,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특정한 방식을 포기하라는 사인이라고 보는 경향이 상당히 많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은 이전보다 특히 이에 더 민감하다. 우리는 마치 목회를 평온하고 두 팔 벌려 환영받는 사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때로 반대에 봉착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한다.그렇기에 고린도전서 16장 8-9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은 매우 도전이 된다. 그는 마게도냐와 고린도로 가기 한참 전 에베소에 머무르려 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에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9절)라고 언급한다. 바로 이 부분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바울은 ‘광대하고 유효한 사역’의 기회가 있는 곳을 ‘대적이 많은 곳’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목회 현장에서 마주하는 반대 세력의 존재에 대해 사역의 끝을 알리는 사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광대한’ 기회가 있는 곳에는 늘 반대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바울의 고백을 통해 내가 그동안 삶과 목회 사역에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반대에 부딪힐 때, 나는 그것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사인으로 여겼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에 봉착했을 때, 혹은 반대 그 자체에 대해 쉽게 지금의 사역을 내려 놓으라는 신호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사고를 전환하여 바울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반대가 없다는 사실은 다른 사역을 시작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시점을 암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이와 관련하여, 켐벨 모건(G. Campbell Morgan, [Martyn Lloyd-Jones]의 후계자)의 말이 생각난다. “섬기고 있는 곳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잘못된 곳에서 섬기고 있다.” 모건의 말은 반대가 없거나 반대가 실제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이는 사역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두 가지 모두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은 세상 속에서 어느 정도의 반대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편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고(요 16:8; 살전 1:5),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며(요 6:61, 66; 딤후 4:3),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에 반대 의견을 표할 것이다(요 8:37; 15:18-21). 이는 역사 속에서 가인과 아벨의 때 이래로 항상 존재한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목회 현장과 크리스천의 삶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반대가 있을 것임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은 복음에 충실한 목사라면 성경과 신학 및 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반대를 다루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신학생들이 목회 사역의 한 가운데에 늘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 반대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여러 형태의 반대를 미리 숙지하여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직언했다. 그의 말을 수용하여 갈등과 비평 및 곤경을 어떻게 다룰지를 훈련 받는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틀림없이 더 건강하게 될 것이다.젊은 세대가 자신들이 처한 비난의 상황을 소명의 빛으로 해석하게 되고, 또 계속되는 반대에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면, 그 세대는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갖는다.반대를 사역의 문이 닫힌 것으로 보는 것 못지 않게 위험한 생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가시적인 열매가 없음에 대해 목회지를 옮기라는 사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반대 의견의 존재와 축복의 부재 모두를 사역의 문이 닫힌 증거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주의해야 할 태도이다. 이사야의 사역을 보자. 이사야 6장 9-10절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라고 말한다. 이는 이사야의 사역은 완전히 반대자들로 구성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유대 백성에게 행한 그의 설교와 수고로부터 아무 가시적인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며, 오직 반대 세력만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매우 유사한 말씀을 하신다. “온 땅”이 그를 대항하여 싸우는 곳에서 사역을 할 것이고(렘 1:18-19), 아무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며, 저주와 조롱을 당하며(20:7; 15:10), 폭행과 감금을 당하며(37:15), 많은 이들이 그를 죽이려 들 것이라고 하셨다(26:8). 심지어 친한 친구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며 그와 그의 사역을 비난할 것임을 말씀하셨다(20:10). 하나님은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반대 세력들로 가득한 험한 곳으로 부르신다. 만약 지속적인 반대를 잘못된 사역 장소의 증거로 보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예들을 우리가 반대 세력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도망치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 예들은 비록 사역 현장에서 가시적 결실이나 축복의 사인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 머무르게 하시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의도로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그러한 곳으로 부르셨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왜 이를 중지 혹은 이동의 암시로 쉽게 판단하는 것일까? 그러한 상황은 때때로 우리가 다른 것을 시작하거나 지속적인 반대를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님의 사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거기 머무르며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발하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답을 줄 수 없으나, 우리의 소명감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소명감의 렌즈를 통해 상황을 해석하기 보다는 아주 흔히 상황의 렌즈를 통해 소명감을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고는 한다. 나는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상황을 소명의 빛 속에서 해석하고, 지속적인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또 그 과정 속에서 다음 세대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en Opposition is a Good Thing번역: 정은심
근현대교회
반대
사역
기회
고린도전서16장
켐벨모건
이사야6장
예레미야
존칼빈
바울
이제, 섬기는 예배를 드리자
by Chad Ashby
2019-04-22
매주일 사람들은 ‘섬기는 예배’(a worship service)가 아니라 ‘섬김 받는 예배’(a worship served)에 참석하곤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면, 당신이 보내는 주일이 혹 다음과 같지는 않은지 떠올려 보기 바란다.일단 교회에 들어서면, 주차 안내 요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들은 예배당 자리로 당신을 인도한다. 그동안 충분한 연습을 마친 찬양팀이 선곡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곧이어 설교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충실히 메시지를 전한다. 이 시간에 영유아부 교사들은 당신의 자녀를 돌본다. 예배가 끝나면, 당신은 그 자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어쩌면 우리의 이런 모습은 이미, 초대 교회가 보여 준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인들은 일주일 동안 무엇인가를 준비하여 섬기려는 열정이 너무 커서 교회 안에 무질서를 야기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바울은 “한번에 하나씩 하라”며 제재해야만 했다(고전 14:24-40). 나는 우리 주변에, 그처럼 주님과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려는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혀야 할 만큼 너무 들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만일 우리가 그렇게 다른 이들을 섬긴다면, 교회에 어떤 변화라도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나는, 그저 섬김을 받는 주일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주일을 보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네 가지 방안을 한번 제시해 보고자 한다.1. 교회에 일찍 가라교회는 단지 청중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모임이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5-6). 이처럼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섬기라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해야 할 책임은 그분의 지체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너무 단순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교회에 일찍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획적인 준비, 즉 주일 아침부터 시작하는 여러 활동들을 다시 구상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수고를 해 본다면, 당신은 머지않아 다른 이들이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섬길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한 예로,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들은 늘 한 시간 일찍 교회에 와서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러면 그에 대한 답변이 주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실제로 이런 섬김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성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교회에 일찍 가라.2. 찬양하라요즘 크리스천들에게 찬양은 개인적인 활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찬양하는 일이 공동의 활동이라고 가르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한결같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권면했다(엡 5:19; 골 3:16). 이처럼 찬양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목적으로 함께 불러야 하는 예배 활동이다.우리는 한 주 내내 혼자서 찬양하며 주님을 예배할 수도 있지만, 교회에서 공동으로 모이는 시간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함께’ 높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시 34:3). 우리가 찬양과 애통, 고백과 감사를 노래로 함께 표현할 때, 우리 가운데 대제사장의 손길이 필요한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그리스도가 친히 돌보신다(히 4:15). 이처럼 찬양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다(롬 12:15).몇 주 전인가 후두염으로 앓았을 때인데, 나는 당시 비록 노래할 수 없었지만, 다른 지체들의 찬양 덕분에 영혼의 회복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 이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매주일 교회 안에 있는 연로한 지체들도 이런 경험을 하겠구나!’ 그분들은 보통 자리에 앉아 찬양을 따라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쇠약한 육신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노래하기 어려운 지체들을 위해, 우리는 다 함께 찬양함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3. 봉헌하라우리는 동방 박사와 같이 매주일 그리스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발 아래 예물을 내려 놓는 사람들과 같다. 우리는 단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물질을 드림으로써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낸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서 영화롭게 한다.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주 첫날에 헌금을 따로 준비해 두라고 권면했다(고전 16:2). 그리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드려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물론 주일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얼마나 신실하게 응답하셨는지를 나눔으로써 교회를 섬길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이 자신의 삶을 나눌 때 웃음과 눈물로써 그들을 섬길 수도 있다. 더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매주일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통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다.4. 경청하라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라]”(출 15:26).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우리가 공동으로 예배할 때 상당한 시간을 조용히 앉아 설교에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시간에는 점심 메뉴나 직장 업무, 혹은 학업에 관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스마트폰을 살펴보는 것도 잘못된 태도이다. 우리는 성령께 베드로와 같은 심정으로 그 뜻을 경청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그러므로 설교 시간에 혹 다른 이들의 집중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어쩌면 말썽꾸러기 아이 때문에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 옆에 다가가서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해 보라. 그리고 설교 시간에는 목회자와 시선을 맞추고, 성경의 본문을 수시로 참고하며, ‘아멘’이라고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이런 자세는 신실하게 말씀을 전달하며 당신을 돌보고 있는 목회자를 섬기는 방법이 된다.섬기기 위해 모여야 한다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섬기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자. 그리하여 매주일마다 섬기는 제사장으로 교회가 가득 채워지게 하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아멘.출처: www.9marks.org원제: Putting the “Service” Back in Worship Service번역: 장성우
교회생활
섬기는주일
지체
은사
찬양
봉헌
경청
바울
에베소교회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by Catherine Parks
2019-04-22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계시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애초에 세우신 계획은 서로 친교하는 것, 즉 함께 손 잡고 걸어가는 삶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신자들과 함께 누리는 이러한 교제는 서로가 "빛 가운데" 걷기를 원할 때에 얼마든지 가능하다(요일 1:7).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친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상태로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외로움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공동체 속에서 누리는 교제의 기쁨을 잃은 채 고립되고 있다. 교인들과 함께 빛 속에서 걷기를 거절할 때, 인간은 하나님이 애초에 우리 속에 심으신 친교의 목적을 상실하고 이와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유대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면, 아름다운 친교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이 있다. 그 유혹은 무엇일까?우리는 친교 대신 어둠을 사랑한다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종종 우리는 어둠을 택한다. 왜냐하면 죄를 즐기고, 그 죄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어거스틴도 그의 유명한 기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게 순결함과 관대함을 허락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원치 않습니다.”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면 혹여나 내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를까봐 두려울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종종 어떤 특정한 죄의 행위를 왜 꼭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기도 한다.어둠은 빛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어둠은 빛에 대항한다. 그러므로 어둠과 빛은 공존할 수 없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바로 그 자유에 반항하는 것이다.우리 자신과 타인을 속임내 머릿속 자아는 꽤나 놀라운 녀석이다. 종종 실패와 죄에 직면할 때면 나는 그것들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훨씬 더 자주, 나는 정신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죄악을 정당화하곤 한다. 자녀들이 죄를 지을 때면 분노하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정죄하는 게 아니라 사리 분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정말로 많은 변명거리가 있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8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죄 때문에 고통할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간주한다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도 속인다는 사실이다.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문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 넘어가는 게 문제가 많음을 알면서도, 왜 그게 그렇게까지 큰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자녀들과 죄가 가진 문제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때 그 중 한 녀석이 말했다. “엄마는 죄를 안 짓잖아요.” 바로 그 순간, 나는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아이들은 내가 매일 죄를 짓는 것을 보아왔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이 점에 있어서 확고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나의 죄성에 찬 말과 행동을 ‘죄’라는 단어와 연결시키지 않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내 죄를 정상적이고 맞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죄를 일상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마인 내가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아이들이 모른다면, 그건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 안에서 기쁨을 쟁취하기 위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자녀들이 나를 죄인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앞으로 엄마의 도움이 없이 죄와 외로운 싸움을 치뤄야 할지도 모른다.이런 사실은 함께 믿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가 계속 “전 괜찮아요”라고만 말한다면, 그건 다른 믿는 이들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죄의 무게에 짓눌려 싸울 때 함께 싸우고 회개할 공동체, 의지할 공동체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행 속의 기쁨서로에게 죄를 고백하는 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이 부분에 관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어요.” 그러나 그냥 마음을 열고, “이게 내가 한 행동이에요. 털어놓고 나니 맘이 안 좋네요” 정도로 말하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책, 기사,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이런 수준의 고백으로 가득하다. 실제로 친한 친구 또는 가족에게 고백하는 것 보다 소셜 미디어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게 더 쉬워진 세상이 되었다. 온라인 지인들로부터 듣는 말, “에이, 나도 그렇게 해요. 별 일 아니에요” 또는, "괜찮아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등등의 위로를 받는 게, 내가 아는 사람과 일대일로 마주 않아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미에 맞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내 글을 읽는 이방인은 내가 유혹과 벌이는 전쟁, 내게 꼭 필요한 그 전쟁에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다. 골로새서 3장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해야 힘을 합쳐 죄와 싸우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로 가득하다.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매주 나는 소수의 친구들과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한다.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를 기쁨으로 이끈다. 내 마음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를 향한 충성과 내 기쁨을 앗아가려는 내 마음 속 그것들을 서로 고백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이 일어난다.-나의 죄를 똑바로 보게 된다. 죄를 심각하게 대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고백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죄를 더 미워하게 만든다.-교제 안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내 친구들은 내 죄를 듣고 충격받지 않는다. 또 그들은 그것을 합리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신 듣고 기도한다(골3:12-14).-은혜를 새롭게 깨닫는다. 죄의 고백이 슬픔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아직 제대로 된 게 아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복음 안에서 다시 기뻐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깨우쳐준다. 나는 패배했다고 통곡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내 죄값을 다 치른 바로 그 십자가에 내 짐을 내려놓는다(골2:13).-동료를 얻는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또 그 분이 주신 사랑과 용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이제 싸워야 한다. 내 동료는 나를 도와준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죄와 싸우는 데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골3:16).-응답받은 기도에 기뻐한다. 예수님의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까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허락하신 승리가 내 속에서 넘친다. 다른 이들과 함께 죄와의 싸움을 수행할 때, 우리는 응답받는 기도를 누리는 기회를 얻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어둠에서 빠져나와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함께 빛 가운데서 걷기 시작한다면, 진정한 친교가 주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둠에 머물던 그 때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Happens When We Confess Sin번역: 무제
교회생활
어둠을사랑
어거스틴
죄
정당화
진정한정체성
용기
공동체
진정한친교
종교개혁이 교회를 변화시킨 네 가지 방식
by Alex Duke
2019-04-16
마틴 루터의 유산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제각각이다. 많은 이들이 행위를 쌓아 의로움을 얻는다는 공로주의의 심장에 치명타를 가한 독일 종교개혁자인 그를 역사적, 신학적 영웅으로 칭송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루터를 거만한 자아도취적 반(反)유대주의자로 비판한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루터를 인문주의자 중의 인문주의자요, 교조주의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해방시킨 21세기형 인간으로 지지한다. 한 사람에 대한 이런 다채로운 반응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예를 들자면 나치, 미국 남침례교 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 역사가들 등—이 오백여 년에 걸쳐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성인전(hagiography: 주인공을 성인 취급하는 전기문—역자주)을 써내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지성사를 논한 근사한 책인 '종교개혁자들이 신학'(Timothy George, Theology of the Reformers)와 '충족시킬수 없는 불꽃'(Michael Reeves, The Unquenchable Flame)을 보면 루터와 그와 함께했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음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네 가지 방면에서 바뀌었다. 1. 일반 신자들을 억누르던 교회의 엘리트주의를 무력화시켰다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법에 대해 반감이 있던 이들을 언제든 파문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로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뿐”이라는 말을 늘 사용했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16세기 교회 미사는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해지는 잡일 같았고, 사제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은혜의 물방울을 무조건 받아 모아야 했던 일종의 정치적 요구 조건이었다. 미사는 대부분이 알아듣지도 못하던 라틴어로 된 웅얼거림이었다. 성만찬 역시 사제가 혼란스럽고도 난해한 야단법석을 떨면서 빵과 포도주를 소위 모두를 교화시킬 수 있다는 살과 피로 성변화(聖變化)시킨다는 원맨쇼였다.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그리고 이후의 개혁자들 모두 문제를 직시했다. 그들에게 칭의는 삼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셨기에 그에게 단번에 주어지는 결코 뒤집을 수 없는 판결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히 마무리 지은 사역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주어지는 '외부적 의'가 크리스천에게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바로 이 깨달음이 아주 조금씩 '점진적으로만' 이루어진다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을 뒤엎었다.완전히 구체화된 루터의 구원론은 치열한 성경 연구 후에 나왔다. 다시 말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이끌어낸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루터의 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츠빙글리 역시 유사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519년 1월 1일,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전통적으로 해오던 라틴어 성구집을 없애고 자신의 모국어로 신약 전체를 강해해나가기 시작했다. 1525년까지 츠빙글리는 신약 전체에 대한 강해를 마쳤고 구약 강해를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교황과 종교회의에 부여된 권위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취리히에서 미사를 폐지함으로써 그곳을 사상 최초의 관료후원적 개신교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루터는 자기 민족을 위해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1534년에 출판하였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이해할 뿐 아니라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유럽 교회의 지평을 바꾸었고 오늘날의 개신교가 시작되는 길을 닦았다. 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적으로, 또한 다른 여러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전에는 교회에 그저 수직적 관계만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해, 들불처럼 번져가는 교회의 변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2. 목사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회복되었다종교개혁은 '목사'나 '사제'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그림을 회복시켰다. 사제들이 자기 자신도 이해 못하면서 그저 뭔가를 하는 시늉이나 내는 날들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제는 그 자리에 목사들이 섰으나 그들은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회중의 마음과 뜻이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되도록 돕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로 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실한 목사들이라면 은혜를 나누어준다거나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게 해준다는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목사들에게서 은혜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다함이 없는 부요함을 가리키는 화살표일 뿐이다.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양날의 검이다. 분명히 맞는 방향이긴 하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중보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가 중보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종교개혁은 크리스천들이 예외 없이 모두 절박한 상황 속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전에 사람들은 경건한 척 위선을 떨거나 성례라는 의식 뒤에 숨는 것으로 자신들의 절박함을 감췄지만 이제는 밝히 드러난 것이다.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루터 역시 오랫동안 영혼을 뒤트는 듯한 의심으로 괴로워했음을 다시금 인식한다.3. 성례가 신자들에게 회복되고 정교 분리가 시작되었다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장 명백한 변화는 세례와 성만찬, 즉 성례에서 일어났다. 유아세례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성례 중 하나였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동시대 개혁자들 모두 신학적으로 유아세례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많았는데, 왜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모두 의견이 같았을까?다양한 층위의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이자 메노나이트교회의 창시자-역주)나 재세례파(Anabaptists)처럼 유아세례에 반대한 개혁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추측을 해보는 수 밖에 없다.가능성 있는 이유 하나는, 단순히 말해, 루터, 칼빈, 그리고 나머지 개혁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교일치의 뿌리가 너무도 깊었기에 루터는 심지어 교회는 '하나님의 오른손'이요 국가는 '하나님의 왼손'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메노나이트나 분리주의 재세례파들은 지나치게 나아가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세례를 추구했지만, 그들은 오늘날 신자세례(credobaptist, 자기의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 believer's baptism이라고도 한다-역주)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이 신자세례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세례가 논의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4. 신학적 다양함 속에서도 일치됨을 추구하는 협력을 위한 길을 닦았다종교개혁 내내 가장 첨예한 의견 대립을 초래한 것은 성만찬이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개혁자들은 이제 각각 서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화체설을 형이상학적 신비주의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 불리는 신학적 중간지점을 주장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form)과 '우유성'(偶有性, accidents—비본질적 성질 [역주])에 기반한 생각이었다. 루터는 성만찬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형상이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偶有性) '안에,' 우유성과 '함께,' 그리고 우유성 '밑에' 임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의 경우 로마 가톨릭과 루터의 견해 모두를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만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되 영적으로만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더 나아가 '기념설'을 주장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그의 임재의 유익을 거둘 뿐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거의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무소부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일치가 중대한 국면을 맞은 것은 헤세(Hesse)주의 영주인 필립의 요청으로 1529년 10월 루터와 츠빙글리가 만나 교황과 그의 군사적 압박에 대항해 개신교 연맹을 조직하고자 했을 때였다. 둘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연맹이 조직되지 못했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신학적 말싸움은 근시안적인 것처럼 보인다. 산적한 문제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 개신교 대표 주자 두 명은 미세한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 군사전선을 조직할 수 없었을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에 대한 종교개혁의 재해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적인 의견 일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매우 자명했다. 성만찬 자체가 은혜를 수여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또 다른 성례인 세례도 마찬가지다.신자세례에 대한 초석이 메노 시몬스와 재세례파에 의해 다져졌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유아세례 자체는 은혜를 수여하지도 구원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그 누구도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특혜를 누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영적인 특권에서 제외된 채 태어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분명히 가르치듯 골고다 땅은 평평하여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 반유대주의자와 복음주의 남침례교인, 독일인과 프랑스인, 자유주의 역사가, 그리고 신학교 신입생, 즉 구주께서 주시는 외부적 의가 필요한 불의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흘리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he Reformation Changed the Church번역: 이정훈
역사
종교개혁
츠빙글리
루터
칼빈
성만찬
목사
사제
훌륭한 목회자는 후임을 위해 길을 놓는다
by Steve Mizel
2019-04-15
아내와 나는 초신자로서 역사가 있고 잘 세워진 교회에 등록을 했다. 이 교회는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혜가 많은 훌륭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에 의해 몇 십년 전에 세워졌다.우리는 그 교회에서 가장 젊은 교인이었고, 관심을 가지고 연세 있는 성도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있고 굳건한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옛날 모습’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말했다. 목회자가 나이 들고 그의 능력이 감소되어 가자, 교회는 그에 맞춰가는 듯했다. 우리가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몇 년 후에 담임 목회자는 소천하였다. 슬프게도, 그의 죽음은 교회를 오랜 우울과 분열 및 쇠퇴기로 몰아넣었다.나는 많은 젊은 교회 개척자들이 교회를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이 목회자는 모든 훌륭한 사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이상 그 교회를 섬기지 못하게 될 날이 불가피하게 올 수 있다는 점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에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 개척을 하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결국에는 떠나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준비해야 한다. 후임 목회자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나 자신도 교회 개척을 하려고 하면서, 솔로몬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려 하였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전 7:8).솔로몬은 두 종류의 지도자와 그들의 비전을 비교하고 있다. 솔로몬에 따르면, 교회 개척의 시작 단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지도자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교회 개척자로서 나는 이 점을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혼란을 다루고, 문제를 해결하며, 기회를 붙잡는다. 젊은 교회 개척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교회 개척자들은 집중하고 매일 제기되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어떻게 교만의 증표란 말인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솔로몬은 자아나 두려움이 우리의 시각을 좁게 만들면 교만한 마음이 있을 수 있다고 명백하게 말한다.ㆍ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교만. ‘나는 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초인적인 힘을 다해서 일했으나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았다. 내가 왜 후임을 도와야 하는가?’ㆍ젊음에 대한 교만. ‘나는 젊다. 내가 영원히 살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지만, 일을 나중에 처리할 시간은 항상 있다.’ㆍ인정 받음에 대한 교만. ‘나는 나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나를 중요하게 보며 내게 보내는 관심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신뢰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만 해도 위협감이 든다.’각각의 경우, 교만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우리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핵심적인 과제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솔로몬은 교만하고 근시안적인 지도자와는 달리, 수고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지도자는 참는 마음이 있다(그리고 더 낫다)고 한다. 적용은 명백하다. 지혜로운 교회 개척자는 지도력을 다음 세대 지도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교회 안에 의도적으로 지도자를 키우는 문화를 만들 것이다.훌륭한 목회자는 인내로 복음 중심적인 문화를 양육함으로써 후임을 위하여 길을 놓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우리 자신 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을 준다. 지혜로운 교회 개척자는 자신과 함께 없어지지 않을 복음적 문화를 만들려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인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의도적인 대비하지만 ‘인내’라는 말은 종종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 말을 싫어한다. 교회 개척자로서 우리는 ‘준비-조준-사격’의 대기 모드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성도들은 한쪽에 앉아서 전혀 서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인내하기란 정말 어렵다.주도적이며 사업가적이며 변화지향적인 사람들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어떻게 인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목회자가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상황을 교회가 어떻게 준비하도록 도울 것인가?교회가 목표를 향해 달려가며,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의 기회를 최대화해 가면서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세 가지 일이 여기에 있다.1. 힘을 나누어 주라당신 옆에서 섬길 신실한 장로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장로 감을 찾아내어 양육하도록 하라. 만일 당신이 갑자기 버스에 치이면(신체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이 지도자들이 때가 되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며, 당신을 대신할 목회자를 찾도록 도울 것이다. 만일 이들이 당신의 지도력을 수동적으로 그냥 인정해왔다면, 난기류와 같은 전이 기간을 통과해야 하는 때가 오면 그들은 허둥거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키우셨음을 믿는다면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라.2. 신뢰를 퍼뜨리라다른 지도자들을 높여주라. 다른 이들이 설교하도록 힘을 부여하라. 관심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오직 한 명의 교회 개척자라는 매력적이지만 거짓말이다. 이를 거부하라. 다른 이들의 수고와 공헌을 늘 인정하도록 하라.목회자여, 당신 자신이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 중의 하나임을 기억하라(고전 12:12-31). 이것은 당신의 참된 위엄을 강화시키며 또한 당신을 참으로 겸손하게 할 것이다.3. 교회가 선교를 하도록 인도하라교회가 자립하고 자급자족 한다고 교회 개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은혜로 계속 성장해 갈 것이다. 진정한 아량은 하나님의 관용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과 교회에게 계속 상기시키자(고후 9:6-15).그러면, 지도자인 우리는, 교회의 건강을 위하여 다음 세대 지도자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선교사들을 보내고, 새 교회를 개척하고, 은혜의 마음으로 관용이 넘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은혜의 관용을 받아들이는 일은 교회가 단순히 편함이나 개인적인 선호를 추구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축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도력을 성공적으로 넘겨주기 위한 단계를 세우도록 도울 것이다.위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다교만은 우리를 과대망상적이게 한다. 근시안적이 되게 한다. 우리의 삶이 마른 풀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사 40: 6-7).한편, 겸손은 우리에게 원시안적 지혜를 준다. 겸손한 목회자는 그의 시각을 도전과 기회와 즉각적인 영광에만 고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눈은 멀리 보고 그를 대신할 사람을 위하여 양때를 대비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윈제: Pave the Way for the Next Pastor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교만
후임
겸손
선교
인내
수도원 생활의 시작과 발전
by Andrew Hoffecker
2019-04-09
신약성경의 서신서가 기록된 이래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은 교회 역사에 계속해서 있어 왔다.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루었다.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을 이 땅에서 추구할 때 과연 어느 정도의 진보를 나타낼 수 있는가? 완전한 성화는 성취 가능한 목표인가? 기독교의 이상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잘 실현되는가? 가정, 결혼, 직장 등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환경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은둔적인 생활 조건에서 그러한가? 그도 아니면, 기도와 예배와 노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에서 그러한가?초대 교회에 대한 제국의 박해가 종식되고 기독교인이 예배의 자유를 갖게 되자, 위의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제공하려는 평신도 운동으로서 수도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곧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복음의 사명을 드러내기 위해 굳이 순교할 필요가 없어지자, 많은 신자들은 로마 문화의 타락성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를 등지고 공동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수도원 활동을 통해 금욕 정신을 드러내는 길을 걷게 된다.이 과정에서 크게 두 종류의 수도원 생활이 등장했다. 먼저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반박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친구였던 안토니(Antony)가 청빈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서 물질적인 안락을 거부하며 이집트에서 시작한 수도원 생활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금식, 기도,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을 통해 홀로 거룩을 추구하는 은둔자와 같은 모습으로 추구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잘 알려진 그의 저술인 ‘성 안토니의 생애’(Life of St. Antony)를 통해 바로 그 은둔자의 모델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안토니의 삶에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동굴이나 기둥 꼭대기처럼 고립된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다음으로는 군인 출신인 파코미우스에 의해 4세기 초에 시작된 최초의 공동 수도원 생활을 들 수 있다. 그는 열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훈련을 위한 규칙과 제도를 확립하여 수도자들이 홀로 살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했다. 초대 교회의 모범을 따라 그들은 일하고,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며, 자신들의 소유를 나누었는데, 이 모든 활동은 수도원장의 엄격한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이 두 종류의 수도원 생활을 형성시킨 동기는 모두 개인적인 성화를 이루기 위한 갈망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은 (세상의 재물을 멀리하는) 청빈, (결혼을 통해 가정을 세우지 않는) 정절,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순종, 이 세 가지 가치에 대한 엄숙한 서약으로 시작되었다.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갑바도기아의 바실(Basil of Cappadocia)이 세운 규칙 하에 수도원 생활이 제도화되고 신비적 형태를 띄게 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가르침을 목표로 삼아 동방의 수도자들은 기도, 묵상, 금식 및 다른 금욕적 훈련을 수행하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일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지경에 이르는 테오시스(Theosis) 즉 신화(deification)가 최고의 목표로 여겨졌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원리를 자신의 유명한 명제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닮게 된다는 의미이다.이와 달리 서방 지역에서의 수도원 생활은 더욱 실천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제롬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많은 주석을 저술함으로써 학자로서의 활동을 공동체적 생활과 일치시켰다. 그는 로마의 많은 귀족들에게 영향을 미쳐 재산을 환원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게 하고 그들의 저택을 수도원으로 사용하게끔 내놓도록 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들이 보여 준 철저한 헌신과 “수도회를 이루어” 목회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킨 사역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 초기 형태의 수도원 제도는 교회를 위한 성직자들을 후원하면서 “당대에 훌륭하고 탁월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에 칼빈은 4세기의 단순한 수도원 생활을 옹호하던 어거스틴의 논변을 들며 16세기의 수도원 제도에 침투한 타락과 복잡 다단해진 규율을 비판했다.이와 같은 배경에서 서방 수도원 제도의 가장 유력한 주창자인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베네딕트(Nursia of Benedict)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수도원 생활은 더욱 실천적인 형태를 갖추고 유럽에 보편적인 체제를 이루어 발전하기에 이른다. 베네딕트는 지난 교회 역사에서 열여섯 명의 교황들이 그 이름을 취하여 자신의 임기 동안 그와 같은 사역을 재현하고자 했을 만큼 큰 명성을 지니게 된 인물이다. 원래 그는 로마에서 학생으로 지내다가 그 도시의 퇴폐한 삶으로부터 피하여 수비아코에 있는 어느 적막한 동굴 안에서 은둔자로 살게 된다. 안토니와 같이 그도 역시 악한 세력의 유혹에 힘을 다해 대항하며 그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자 싸웠다.그러나 3년이 지나자 어떤 확신을 품고 홀로 실천하던 수도적 생활을 끝내게 된다. 즉 어떤 이들은 혼자서 온전한 신앙을 추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반 신자들은 훈련 공동체가 필요하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엄격한 헌신과 설교와 구제 및 치유에 관한 명성은 각 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이교도를 몰아내고, 많은 이들을 기독교로 회심시키며, 더 나아가 그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이 상주하는 열두 개의 수도원이 창설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529년에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창설하는데, 이는 로마의 남동부에 위치한 베네딕트회의 모체이다.그가 이룬 가장 빛나는 업적은 가이샤라의 바실과 어거스틴이 설명한 규칙들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표현된 새로운 규칙서로 축소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딕트는 그의 규칙서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원리와 실천 사항을 요약하고자 노력했다.이 규칙서는 총 73장에 걸쳐 수도원장의 감독 하에 이루어지는 예배와 노동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축으로 삼는 공동체를 제시한다. 수도자들은 그 규율에 자신을 종속시켰기 때문에, 재산은 전부 공유되고 모든 사람은 그들의 세속 직위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규칙서는 수도원의 온 구성원을 가족으로 여기게 하며,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지침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엄격한 훈련과 조화를 이루는 협력이 공동체 생활 전체에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 베네딕트는 겸손하게 순종하기를 명했다. “수도자는 단지 그의 마음으로만 아니라 그의 몸으로도 그를 보는 모든 이에게 겸손함을 드러내야 한다. 일하러 나갔을 때든, 기도실에서든, 수도원 안에 있을 때든, 정원에 있을 때든, 아니면 어느 길에나 야외에 있든 상관없이 그래야 한다.” 그는 수도자의 하루 일정을 여러 가지 활동 단위로 구분했다. 이를테면, 공동 예배, 시편 찬송, 묵상, 기도가 일곱 시간 동안 배정되었고, 나머지 예닐곱 시간에는 노동과 고기를 섞지 않은 점심 식사가 포함되었다.예배는 수도원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규칙서의 73장 가운데 11장은 그들의 공적 기도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다. 물론 베네딕트는 기도가 형식적인 활동으로 축소되는 일을 원치 않았지만, 명확한 기준선은 확립해 놓았다. 예를 들면, 매주 시편 전체를 암송하여 기도가 수도자들의 일상생활에 스며들게 했다. 또한 광적인 기도를 금하기 위해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짧아야 한다”라고 명시해 두었다. 더 나아가 하루에 일곱 차례로 구분된 기도 시간을 두는 일정을 짜서, 공동 기도를 제외하고는 기도와 기도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도록 했다. 그리하여 매일 드리는 규칙적인 기도를 이른 새벽, 해 뜰 녘, 아침 여섯 시, 오전 중, 정오 직전, 저녁, 그리고 자기 전에 해야 했다.이러한 수도원 생활은 대체로 단순했으며, 극단적인 절차는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일이 있었고, 오전과 오후에 하는 노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가사, 야외에서 손수 하는 작업, (수도원 학교의 기원이 되는) 자녀 교육, 독서와 작문, 외부인들에게 전하는 설교까지 다양했다. 베네딕트 규칙서는 그 외에 다른 임무를 부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도자들의 활동이 공동체 생활 및 다른 일상의 직무와 조화되기만 하면 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일하라고 명하는 바울의 지침을 따라 노동을 강조했다. 두 명의 장로가 다니며 수도자들이 각각의 노동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여기서 “노동이 곧 기도”라는 격언이 생겨났다.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수도원 제도는 거룩한 삶에 대한 성경의 요구를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특별히 베네딕트 규칙서를 통해 수도원 생활은 16세기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비록 역사적으로 청빈, 정절, 순종에 대한 수도원의 이상이 제도화되고 또 그 가치와 효용 면에서 다른 소명에 비해 더 숭고하다고 잘못 여겨지게 되었지만, 신자가 주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배와 노동을 함께 중요시했다는 측면은 신약 공동체가 가져야 할 사회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수도원 생활의 질서는 중세 시대가 진행지면서 여러 가지 타락상을 피할 수 없게 되고, 이윽고 새로운 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베네딕트 규칙서를 더 엄격하게 해석하는 운동으로 개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역할이 최고조에 있었을 때 수도원 제도는,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와 같은 후시대 인물이 복음의 불꽃을 밝히는 데 필요했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델을 보여 주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nedictine Rul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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