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교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주일을 건너뛰고 싶을 때
by Marshall Segal
2019-06-25
혹시 주일 예배를 건너뛰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는가? 주간에 잡은 약속에 사로잡혀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 감각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우리는 교회를 싫어한다기보다 주일 오후나 저녁에 좀 더 여유로운 휴식을 바랄 수 있다. 아니면 다음 주간을 그저 빨리 시작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주일을 당연하게 취급하고, 일상적인 업무와 관계, 행사와 활동, 심지어는 수고스러운 작업에 이르기까지, 월요일에 해야 할 일들로 얼른 달려가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서서히 인식도 못할 사이 한주간의 삶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전락하여 주변부로 밀려난다.하나님의 백성이 매주마다 한 자리에 모이는 그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이 어떻게 일상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불편한 신호등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다른 무엇인가를 주중에 예배하고 있기 때문이다.예배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예배를 건너뛰고 싶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최근에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하며 물질을 숭배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있을 때,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이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암 8:4-5).이 말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언제 이 예배가 끝나서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꼬'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건너뛰고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월삭이나 안식일 같은 정지 신호등에 걸려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귀에는, 말하자면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가장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제 집에 가도 된다는 소식을 알려주기 때문이다.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예배를 건너뛰진 않았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도 전에, 얼른 예배가 마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삶의 현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했다.아모스가 기록한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안식일만 빼고 나머지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돈이라는 신에게 매일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명령여기서 월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매월 첫날에 드려야 했던 예배를 가리킨다(민 28:11-15).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를 드려 매달의 시작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매달 정해진 제물을 드림으로써 속죄를 하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표현해야 했다.또한 안식일 제사도 매주 드려야 했다(민 28:9-10). 이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 시작된 규례이다(출 16:23-29).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출 20:8-10). 누구든지 이 계명을 어기면 죽음에 처해졌다(민 15:32-36). 하나님도 자기 자신과 그 백성의 기쁨을 위해 이 날을 구별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중의 일을 다 중단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다른 데서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기보다 또 한 가지 의무 사항처럼 여길 수 있다. 물론 예배에는 의무적인 요소가 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신 앞으로 나아오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신 일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시를 통해 하나님은 부담을 주시는 게 아니라, 참된 영광과 지속되는 기쁨을 맛보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달콤한 명령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명하실 때, 그분은 우리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마치 여름날에 좋아하는 해변을 누리도록 특별히 하루를 떼어놓으라고 누군가가 촉구하는 일과 같다. 따라서 부담스러운 강요가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초대가 바로 예배에 대한 명령인 것이다.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경고예배를 드릴 때 주어지는 약속이 영광스러운 만큼,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 주어지는 경고도 엄중하게 표현된다. 만일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주중의 일을 위해, 미묘하게 혹은 아예 공공연하게 예배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곧바로 알아차리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때와 같이 건강하고, 부유하며, 순조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의지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거짓된 생각에 빠져, 예배를 마치 하나의 장식처럼, 혹 빠져도 상관없는 요소처럼 간주하고 있었다.그 결과 그들은 안식일을 건너뛰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이상하게도 물이나 양식은 있는데, 기근이 펼쳐진다. 바로 하나님 그분을 찾지 못하는 기근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거두시는 기근은, 물과 양식과 거처를 거두시는 기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이다. 그들이 예배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곧 온 땅을 뒤지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하여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 함으로써, 어리석게도 광산을 버리고 금을 캐려는 꼴이 되었다. 고작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과 귀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닫히고 말았다.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 또한 저들에게 주어진 경고 못지않게 심각하게 여겨져야 한다. 우리가 만일 미묘하게든 혹은 공공연하게든 예배를 하찮게 여긴다면, 결국에는 하나님 없는 끔찍한 삶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만일 그런 삶을 전혀 끔찍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은,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진 않아도, 현재 누리고 있는 세상보다 좀 더 쾌적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하나님 없는 천국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주일을 불편하고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는 날로 여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미 부족할 게 없는 자신의 삶에 첨가된 하나의 부속물처럼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원토록 분리되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깨닫지 못한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삶의 비극을 끝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을 받아주실 거라는 착각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마 7:21). 그러다 자신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그동안 얼마나 교회에 참석했는데 자신을 모르시냐며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마 7:22).그러므로 혹 '예배가 언제 즘이면 끝날까?' 이런 생각이 마음에 지속된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말씀의 기근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이 영원한 빛이 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0:19)에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시고 또 우리 각자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 주셔서, 우리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그분 자신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예배의 계명을 주신 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곧 알게 될 것이다.비할 데 없는 모임그렇다면 예배를 건너뛰고 싶은 유혹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심판을 받게 되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살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높임으로써 그럴 수 있다. 마치 언젠가 경험할 천상의 예배를 매주일 이곳에서 드리듯 그분을 높이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배의 실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세상 어디에도 이러한 모임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로 삼은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창세 전부터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또한 거룩한 피로 구속받고 하늘의 법정에서 용서받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땅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며, 우주의 창조자가 그들 안에 거하신다. 이처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되어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부름 받았고, 우주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며 천사들까지 심판하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의 모임은 일찍이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모임이 바로 예배이다."우리 모두는 바로 이 모임에 매주 초청을 받는다. 고작 한 시간 반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실재를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어떻게 주일을 그냥 건너뛸 수 있겠는가? 실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예배하며 천상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고 할 수 있다. 매주 그 경험이 얼마나 익숙하게 느껴지든,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당신이 한 주간 기다리고, 바라보며, 즐거워할 만큼 경이로운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f We Could See Sunday from Heaven번역: 장성우
교회생활
주일
예배
월삭
안식일
경고
기근
존파이퍼
천상의기쁨
식탁으로 초대하라
by Chad Ashby
2019-06-14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상한 무기로 전쟁을 이끄시곤 했다. 그분은 개구리, 옴, 종기를 가지고 이집트와 싸우셨고, 기드온의 진흙 냄비와 횃불로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셨다. 가장 이상한 것은, 나무 십자가를 사용하여 죄와 죽음을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탄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숟가락을 들라고 하시더라도, 이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형제자매여, 식탁으로의 초대는 전쟁이다.저녁 식사, 식탁, 초대라는 단어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쩌면 아이의 웃음 소리, 마음 따뜻한 대화, 혹은 소소하게 음식을 곁들인 이웃과의 저녁 식사를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되었든 아마도 연상되는 이미지는 포근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환대가 진정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식탁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앞당길 수 있을까?왕의 식탁으로손님을 식탁에 초대하는 것은 정복자이자 최고 결정권자로서 왕이 가지는 특권이다. 그 예로, 다윗은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을 왕족의 연회에 초대했다(삼상 9:10).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 또한 유대를 정복하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환대했다(단 1:5). 이처럼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는 것은 왕이 베푸는 주권적 은혜와 자비이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베푸는 환대도 바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며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 1:14-15).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 그분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듯한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신다. 그 초대된 사람들을 보고 서기관들은 너무 놀라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우리는 그렇게 왕의 아들과 딸로서 그분의 식탁으로 초대된다. 다음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시 23:5). 전쟁 중임에도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것은, "너희는 감히 우리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어!"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오히려 적을 더 조롱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를 친히 부르신 구세주의 환대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승리를 성취하셨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우리를 초대하셨다. 이는 어둠의 세력을 향한 확실한 승리의 신호임과 더불어 그들의 패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나의 식탁으로 구약 시대에는 저녁 식사 때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먹은 것을 먹지 않았고, 이방인과 함께 같은 식탁에 앉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행 10:28). 이렇게 명확하게 갈라진 경계선은 모든 인류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범주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매일의 저녁 식사에서 어김없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면서,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식탁 싸움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하셨다.그것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베드로는 주님의 꾸짖음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처음으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집에서 고넬료라는 이름의 로마 백부장과 그의 가족이 성도가 되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의 피가 모든 사람을 깨끗이 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행 10:36)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 예수님은 그날의 저녁 식탁으로 베드로를 초대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대로, 베드로는 그 고넬료의 집에서 한 주님, 한 믿음, 그리고 한 세례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즉 이전에 서로 싫어하고 배척하던 사람들이 평화롭게 식사를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의 나눔임을 그는 깨닫게 되었다. 갈릴리 어부가 로마 백부장의 집에 초대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를 구분하던 적대감의 벽이 허물어졌다(엡 2:14-16). 베드로와 고넬료는 같은 복음 안에서 서로를 환대하며 전 세계를 향해 그들이 섬기는 왕의 승리를 축하했다(행 10:48).환대를 무기로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함께 하는 식사는 그분의 왕국을 앞당기기 위한 예수님의 계획이었다. 사도 행전 속에 묘사된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그 증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지난 수천 년 동안, 갈라진 식탁은 인류의 분열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제는 바로 그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의 평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당신은 왕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승리를 날마다 축하하고 있는가? 과연 당신의 식탁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화목한가? 함께 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식사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됨이 없었다면 결코 만나지 않았을, 보이지 않는 경계선 너머의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는가? 당신의 저녁 식사는 적대적인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평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환대를 베푸는 것은 싸움이다. 사탄은 주일이 오기 전까지, 매주 정확하게 여섯 번의 저녁 식사 시간을 통해 당신을 유혹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탁을 나눌 시간이 없다고, 일정도 바쁘고 운동도 해야 하고 또 피곤할 뿐만 아니라 돈도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다른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지 않을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는 분명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환대를 마치고 늦은 시간 주방을 둘러보니, 기름기 많은 냄비와 접시 더미가 싱크대에 가득하다. 그러나 기억하라. 바로 그것들이야말로 어둠의 유혹에 대항해서 훌륭하게 싸운 우리의 무기였다는 것을.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한 우리의 싸움에서 숟가락, 냄비, 그리고 접시를 가장 강력한 영적인 무기로 만들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spitality Is War번역: 무제
교회생활
왕의식탁
하나의식탁
환대를무기로
이방인
성찬식
베드로
'작음'의 참 의미
by Paul Wells
2019-06-05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복음서의 내용은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교회의 선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점점 커지는 세속주의의 위협 속에서 서구 기독교인들은 규모적으로 작은 교회가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선교 정책도 소규모 노선을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이는 복음의 전파를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크고 작음을 논할 때 우리가 정말 세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규모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작음'이다. 예수님에게서 참된 작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의 길을 따르기 위해 굳이 강하고 유명할 필요가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이 전하신 생생한 가르침의 대부분은 주변의,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작음과 '작은 무리의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때로(종종 틀린 방법으로도) 인용되는 구절이 바로 누가복음 12장 32절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양 떼의 작음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주셨다는 사실이다.한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실한 사람들은 세상의 큰 무리들과 비교했을 때 수의 측면에서 소수이고, 또한 힘의 측면에서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작은 양의 무리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의 나라를 찾는 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이미 그 왕국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고 또 축복 속에 공유하고 있으며, 세상이 끝나는 날 충만함 속에서 그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구약과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무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한 무리의 양 떼를 다스리는 한 명의 진정한 목자가 있다. 양 떼는 목자의 생명으로 구속되고 그와 하나되어,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받기로 약속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그분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실한 종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이런 관점으로 말씀을 고찰할 때, 큰 규모에 대한 현대의 과도한 집착 그리고 오직 작은 교회만을 본질적 교회로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로잡게 된다. 작은 씨앗이 가진 놀라운 힘 성경에 소수의 사람들, 개인 양육, 그리고 성장과 궁극적인 완성을 이야기하는 비유가 많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그것들은 마치 성장할 운명을 가진, 소그룹을 위한 맞춤식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겨자씨, 밀가루, 가라지, 누룩, 그물과 물고기,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마지막 때의 하인,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의 씨앗과 관련한 비유를 생각해보라. 특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에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비유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더 큰 의미를 지닌다(요 12:24). 그런데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쉽지 않은 질문이 있다. 씨 뿌리는 자의 사명이 세상에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뿌린 씨앗 중 열매를 맺지 못하는 4분의 3으로 인해 뿌린 자 행위는 결국 비생산적이고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이는 이야기의 논지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가르치는 핵심은, 비록 복음 전파가 종종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성취가 없는 것 같을지라도(마 7:13; 22:14), 하나님은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다. 즉 사탄의 저항, 완악한 마음, 세상을 향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다른 비유, 그리고 등경 위에 둔 등불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눅 8:16-1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놓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의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위치를 전복시키며,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여기에서의 소유는 마음 속에 심겨진 말씀, 즉 열매 맺는 씨앗의 비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 교회에서의 생명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중략]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이런 사명을 수행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에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에 모인다. 모든 모임이 그렇겠지만, 특히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력은 행동에 기반한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독립적인 지위, 역동적 리더십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적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복음과 타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이에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주님은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미약한 존재를 통해 이 땅을 향한 그분의 방식을 드러낸다. 즉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는 작은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오직 우리의 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의해서 정의되며, 기독교 공동체는 날마다 거듭다는 삶의 실재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영향력은 교회의 '큼' 혹은 '작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영향력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열매 맺는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거룩한 소수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mallness and the Kingdom of God번역: 무제
교회사역
진정한작음
작은씨앗
생명의근원
예수그리스도
거룩한소수
씨뿌리는자
문화에 대항하는 진정한 교회
by Brett McCracken
2019-06-04
문화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가서 살펴볼 필요가 없다. 혹은 애써 우리의 상상력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를 이해하면 된다.하지만 기독교가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아 그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에서는, 교회가 얼마나 혁명적인 존재인지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지역에서는 교회가 너무 평범하고, 심지어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담대함을 상실하거나, 혹은 세상과는 달라야만 하는 교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신앙 공동체를 개조하여 세상과 같은 색을 띄게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움직임은 위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이단적인 성격을 안고 진행되기도 한다.당연히 교회는 개조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회가 지닌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를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고 또 그 구별됨으로 세상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여기서는 세상 문화에 대항하는 교회의 네 가지 정체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1. 문화에 대항하는 모임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떡을 떼기 위한 실제적인 모임으로 존재해 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망각하곤 한다. 과연 이 세상 어디에서 사람들이 이처럼 정기적으로 모여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가?각종 매체와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교회조차도 점점 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되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다. 우리의 관계도 거의 다 디지털화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눈에 보이는 형체로 존재한다는 말은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우리의 신앙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 공동체로 구현하기보다, 오로지 머리(두뇌)로만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낳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녀야만 하는 물리성 혹은 신체성(physicality)이 미묘하게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주일마다 몇 시간씩 한 자리에 몸소 참여하는 모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시대의 문화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특징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오늘날의 사회 문화적 흐름에 역행하는 '회중성'을 소유 및 이행하는 공동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며, 또 복음을 전하고 여러 섬김과 교제에 힘쓰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성육신의 실체를 다름 아닌 교회를 통해 새롭게 알아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2. 문화에 대항하는 가족또한 이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관계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이다.우리는 어떤 컨텐츠든 “그냥 인터넷으로 들으면 된다”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기독교는 한 개인이 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기독교는 ‘나랑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영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연합체고, 교회는 한 가족이다. 세대와 문화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연합되었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그 연합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우리의 사명도 잊어서는 안 된다.이 시대의 문화는 나라와 사회 곳곳에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다양성은 세상에서 찾기 힘든 소망을 제시한다. 가령 요한계시록이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한데 모여 주님을 예배한다. 이는 우리가 개별적 존재로서 갖는 서로 다른 특징들이 천상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 차이점들은 여전하지만,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똑같이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될 때 나타나는 다양성과 단일성은 종말론적 공동체(the eschatological community)로서 교회가 지닌 본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즉 ‘아직’ 이르지 않은 마지막 날의 온전한 모습을 ‘지금’부터 세상에 조금씩 드러내는 존재가 바로 교회이다.3. 문화에 대항하는 변화교회는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이다. 기독교는 결코 우리에게 “지금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죄와 불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그저 묵인하며 세상을 마치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각 지역에 있는 교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주된 장소이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들은 함께 노력하며 거룩을 추구한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에게 진리를 나눔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변화한다.이런 모습은 그 자체로, “당신의 모습 그대로가 좋습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이 세상의 문화를 대항한다. 요즘에는 많은 교회들 안에서 ‘거룩함’보다 ‘솔직함’을 더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온전한 공동체를 추구하기보다 각자의 상한 마음을 솔직히 나누기를 더 좋아하는 시대적 경향성을 그대로 따라 가곤 한다.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성은 상한 마음을 공유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함께 거룩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만일 우리가 이 거룩과 변화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긴다면, 교회는 결국 세상에 있는 여느 조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우리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감각도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 던져진 빛과 소금이라는, 바로 이 독특한 신분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이야말로 교회를 진정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다를 때, 세상은 언제나 교회를 주목해 왔다. 복음의 영광은 그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서로가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문화를 대항하는 교회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4. 문화에 대항하는 사명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면, 냉담과 권태 및 열등 의식이 내면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교회가 지닌 근본적인 사명, 즉 문화를 대항하는 본연의 사명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사명이란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다. 또 본인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사업도 아니다. 사명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꾀하지만,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삶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확신 가운데 산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최고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다른 이를 위해 쏟을 때, 더 큰 목적을 따라 당장에 취할 수 있는 편안함을 희생할 때 미리 맛볼 수 있다.이는 소비지상주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도발적인 주장인지 모른다. 세상은 ‘자기’(self)라는 미명 하에 모든 가능한 것을 부추긴다. 자기 개발, 자기 실현, 자기 홍보, 자기 보호, 그리고 자기를 사진 찍는 셀카까지, 모든 게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이런 시대의 모습은 니체(Nietzsche)를 떠올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니체야말로 ‘자기’에게 집중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화두는 개인의 자아였다. 오늘날 동네 북카페에서부터 지하철 가판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대중적인 책과 잡지에는 ‘카르페 디엠’, 즉 바로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니 오늘을 붙들라는 표어가 수도 없이 붙어 있다. 니체는 이런 사상을 일찌감치 자신에게 적용했고,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복을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인식한다.그러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세상에 만연한 자기중심적 사상에 역행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당신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성공하라는 조언도, 또 세상으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인식하게 만들라는 충고도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너 자신을 부인하며(마 16:24) 그 생명을 내려놓아야 살게 되리라는 가르침을 제시한다(마 10:39).이런 가르침이 거칠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자유하게 하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우리에게 무겁게 매여 있던 자기 사랑(narcissism)과 자기 통치권(autonomy)이라는 죄악의 짐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통해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게 된다(벧전 2:5). 이렇듯 기독교는 강하고 크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스스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그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한 2년 전이었는데, 자신에 대해 “신앙을 저버린 후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워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한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저는 교회가 제 삶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의 현실이 싫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도전에 직면하고 세상 정신을 거절하며, 그저 편안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피난처이자 큰 산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비록 제 자신은 수시로 욕하고, 술에 취하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후회하는 사람이지만, 가끔씩 예배를 위해 찾는 교회마저도 저와 같은 모습이 되어 가는 게 싫습니다. 제가 믿기로 교회는,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성소여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나를 용서하시며 또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교회는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 그때만이 세상의 환난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요, 자기라는 우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성소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이처럼 세상과 구별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대항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교회라면, 문화에 대항하는 본연의 정체성이 그저 당위가 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단지 이질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The Local Church as a Counterculture번역: 장성우
근현대교회
문화
대항
교회
가족
변화
사명
니체
마틴로이드존스
종말론적공동체
자기 의를 앞세우는 목회자에게
by Dave Harvey
2019-06-03
목회자와 리더로 부름 받은 우리는, 교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성도들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어야 하는 여정에 들어섰기 때문이다(고후 12:15).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이다.하지만 굳은 각오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이끌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고통을 주고 떠나는 성도를 보며 상심할 때가 있다. 심한 경우, 그들은 죄악의 자국을 남긴 채 사라지기도 하여 그 자리에 남겨진 리더는 남모르는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어려운 상태의 리더는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거나,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칠 수도 있다. 또한 떠나가는 성도를 보며, 그를 마치 하나님의 뜻마저 저버린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그 생각이 비약되는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입장만 방어하며 떠난 자를 악인과 같이 언급할 수도 있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상대로 죄를 짓고 쉽게 떠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비방과 불화를 일으켜 공동체에 불을 놓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당연히 상처를 입는다. 이런 상처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쓰라림이 있으며, 헝클어진 교회의 모습은 여러 성도에게 아픔이 된다.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결과에도 불구하고, 떠남을 결심한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세로 불 같은 비난을 쏟아 놓는다. 그리고 타고 들어가는 그 불길이 목회자에게 옮겨 붙어 그의 명성에 해를 입히기를 바라기도 한다. 바울이 이렇게 탄식했듯이 말이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노라]”(딤후 4;14).우리는 상대의 폭언을 되받아치고 싶고, 그들의 비난에 강경하게 대응하며 나를 변호하고 싶다. 분명 바울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딤후 4:14). 그는 자신이 맡은 리더십을 발휘할 때, 장기전에 임하는 태도로 지도력을 사용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꼭 변호해 주셔야 한다거나,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의 모습을 따를 뿐이었다.“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아마도 겪어온 아픔이 컸을 텐데도, 바울은 이처럼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알렉산더를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여겼다.나 역시 30년이 넘도록 목회하면서, 이러한 사람을 여러 명 만났다. 그들이 교회를 떠날 때면, 내 마음은 늘 똑같이 반응했다. 언제나 무엇이 옳은가를 밝히는 일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게 사태를 바로 잡기 위해 싸우며, 나에 대한 비방에 맞서 변호하고자 했다. 결국 내겐 누가 옳으냐 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던 것이다.하지만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그런 태도는 결국 쓸데없는 말만 쏟아 놓게 만들었다. 그래서 괜한 말로 그 사람이 이미 건너간 다리를 불태우고 말았다. 잠잠히 있었으면, 떠난 자가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그들은 복음을 떠나지 않았다백발이 다 된 선배 목사가 이런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당신의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복음까지 상실한 것으로 착각하면 결코 안 된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당신이 섬기는 교회나 당신이 꿈꾸는 사역에만 부어지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바로 내 자신의 의로움이, 한때는 나를 주님과 분리시킨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말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그러니 자기를 변호하고 싶은 집착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단,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바울은 알렉산더에 대해 개인적인 앙갚음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디모데와 그 편지를 읽게 될 다른 성도들의 영적 안전을 위하여 이런 경고를 했다.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5). 그는 이처럼 짤막한 이유와 함께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는데, 바울이 보기에 신실한 목회란 유사시에 양들로 하여금 늑대를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일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피할 수 없기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디모데가 그 핍박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약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 3:12-13).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주님이 그 지침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우리가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바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기 때문이다(눅 6:35). 그러나 때로는 알렉산더와 같은 자들의 악행이 개인적인 공격 수준을 넘어, 복음을 가리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악행을 모른 척하거나 거기에 순순히 따라가면 문제가 고착화되어 결국 양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주저하며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즉 바울의 예를 따라 간단한 설명과 함께 분명하게 경고함으로써, 양들이 해를 입거나 병균이 확산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지금 다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이 완전히 끝나기는 어렵다. 디모데후서를 읽어보면, 바울 역시 죽기 전까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결말을 보지 못했음을 예측할 수 있다. 그가 경험했던 고통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문제들, 그리고 부조리한 일들을 하나님이 깨끗하게 정리해 주시지 않았다. 혹 당신은 자신의 믿음이 완벽한 결말을 보장해 주리라고 바랄지도 모르겠다. 바울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졌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신앙의 영웅들도 다 그런 믿음을 소유했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히 11:13). 이 믿음의 선배들은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약속, 이뤄지지 않은 꿈, 답변을 얻지 못한 물음 등을 안고 죽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오히려 그런 결말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세월을 버텼다.그러니 혹시 복잡하게 얽매인 갈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또 그 상황이 끝날 기미조차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일하고 있다면, 다윗도 바로 그런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내가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그는 곧 너로다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2-14).다윗뿐만 아니라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목회는 그렇다, 매우 복잡하다. 때로는 화평을 바라며 최선을 다한 노력이 원하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모든 일을 끝까지 밝혀 따지려 하지 않는다. 또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어 심리적으로 만족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믿음은 그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일만을 신뢰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보이신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결말의 모습을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즉 온 세상이 안고 있는 가장 중대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결론은 복음 안에서 나타난다. 우리 모두에게 위기를 몰고 온 이 죄의 문제를 과연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결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문제가 비로소 해결될 저 마지막 날을 소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고통을 안겨다 주는 상황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잠시 눈을 돌려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그 일을 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떠올리자.그렇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며 할퀴고 간 자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께로 달려가야 한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양들에게 상처 받는 목회 여정에도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결말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는 바울사도의 고백처럼(고전 13:12), 그날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혹 오늘은 아니어도 말이다.사람들이 떠나서 마음이 무너지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당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우리와 함께하리라는 약속 외에, 버림 받은 목자에게 주어진 복은 없다. 그리고 그 약속이면 충분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There’s Something More Important Than Being Right번역: 장성우
교회사역
바울
정당함
자기의
다윗
목회자
새하늘과새땅
하나님의은혜
복음
내가 소명 받은 사람인지 의심이 든다면
by Jeff Robinson
2019-05-27
첫 목회지에서 나는 상처와 아픔만을 품은 채 떠나야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일부 교인과 몇몇 장로들이 목회를 그만두라며 나를 설득했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내 정체성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만일 내가 원한다면 신학 교수나 좋은 군목 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칭찬하듯 돌려 말하는 내용이었다. 또 몇몇 사람은 사역하기 전 직업에 대해 언급하면서 목회하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그쪽 분야에서 훌륭한 직원이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이런 공격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내 내면의 직감은 여전했다. 사역을 향한 불타는 열정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확실했다. 때로는 목회에 대한 열정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의 충고처럼 목회를 향한 내면의 불타는 열정은 목회자로서의 소명의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는 주관적인 첫 표지일 수 있다. 계속되는 외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지키셨고, 우리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현재 나는 다른 교회에서 행복하게 또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 소명은 객관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역 교회의 목회가 당신의 은사와 소명을 확증해 주는 경우이다.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확인해야 한다. 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내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소명을 확인할 때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하다. 아래는 내가 사역을 하며 소명과 관련해 배운 여섯 가지 교훈이다. 주관적인 견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교훈들은 내가 소명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1. 고난의 계절 속에서도 여전히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그 소명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고난은 소명이 진짜임을 입증하거나 혹은 가짜였음을 밝혀낸다. 언젠가 소명 여부를 놓고 불안해하는 한 청년을 만났던 적이 있다.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한 목회자와 겪은 방법론적 불일치가 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역자와의 불일치는 그를 깊은 의심과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그것이 고난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비롯해 다른 여러 사역자들과도 그 문제에 대해 상담했다. 동역자와의 불화가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사역의 중대성을 고려했을 때 상대적으로 덜 핵심적인 문제로 사역을 그만둘지 말지 고민한다면, 그 소명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게 여러 사역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모든 직업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혹 사역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으로 인해 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진다면, 그는 지금 복음 사역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다행히도 오늘날 그때의 청년은 다른 직업을 찾아 행복하게 일하며 지내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 섬기고, 가정 안에서는 주님의 방법대로 가족들을 인도하며 살아가고 있다.2. 교회로부터 당신의 은사를 인정받고, 그 사역에서 최소한의 열매를 확인했는가? 그렇다면 고난이 있더라도 아마도 당신은 부름받았을 것이다사역 현장에서 당신은 가시적인 열매와 성과들을 보았다. 믿지 않던 영혼이 구원을 받고, 믿던 자의 신앙이 깊어지며, 젊은 청년이 사역자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아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치유를 위한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말에 올라타야 하지 않을까? 내 경우에는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사역에 복귀하는 데까지 약 1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양들을 먹이는 일에 대한 열정이 줄었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지난 사역지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고, 훗날 목회 현장에서 그 교훈들을 어떻게 유용하게 적용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3. 당신이 잠시 사역을 내려놓고 다른 형태로 섬기게 되더라도, 다시 사역으로 돌아가도록 부름받았을 수 있다불과 몇 해 전, 목회 사역을 내려놓고 아프리카로 떠나 2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형제가 있다. 또 다른 형제는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사역하던 교회에서 교역자가 아닌 평신도로 섬기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병행을 하든 아니면 전임 사역자로든, 목회자로 복귀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남침례교 국제 선교위원회를 이끌기 위해 수년간 섬기던 브룩 힐즈 교회를 잠시 떠났던 데이비드 플랫(David Platt)은 버지니아에 있는 한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사역 현장에 복귀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나는 목회를 잠깐 쉬었을 때뿐 아니라 목회를 하면서도 출판사의 편집자와 대학의 강의자로 일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허락한 은사를 결코 낭비하지 않으신다. 4. 세상의 잣대와 달리 사역의 양적 성공 여부가 소명 여부의 지표가 될 수 없다 거짓 교사도 수천 명에 달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다. 반면 진정한 목회자가 섬기는 교회에 고작 한두 사람의 성도만 모일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린도후서에 등장하는 ‘수퍼맨 사도들’을 따라 그들의 목회지로 모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짜임을 정확히 알았다. 건강한 복음의 열매가 무조건 엄청난 수의 예배 출석자와 넘치는 예산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형교회들이 모두 적당히 복음과 타협했기에 커졌다는 뜻은 아니다. 5. 소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이 말하는 장로 자격을 충족시키는가? 또 베드로전서 5장 1절-6절에서 베드로가 교회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겸손을 추구하는가? 그렇다면 사역의 열매가 생각만큼 빨리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 있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또 바울도 그랬다. 이와 관련해 설교의 왕자로 불렸던 스펄전 목사의 말에 귀 기울여 보라. 스펄전은 학생들에게 “소명 또는 하늘의 부르심”의 첫 징후가 “다른 모든 것을 다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사역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바울 역시 자신이 가르치던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비슷하게 권고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 디모데에게 장로의회에서 안수 받을 때 확인한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말며, “전심전력하여” 그 은사가 모든 일에 “나타나게 하라”고 말한다(딤전 4:15). 6. 기혼자는 아내의 의견을 구하라“나 당신이 반대한다는 거 알고 있어.” 이런 식의 태도는 성경이 말하는 ‘돕는 배필’을 향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아니, 이런 태도는 잘해야 그저 상대를 돕는 배필 정도로만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첫 사역지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아내는 사역을 멈추지 말라고 나를 격려했다. 때로는 자기 연민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게 강한 말로 권면하기도 했다. 사역지에서 일어나는 일과 나의 소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중요한 건 연단의 과정을 통해 나를 정금같이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강단에서 수없이 설교했던 진리, 아내는 바로 그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나를 부수는 대신 아내를 강하게 붙들었다. 나의 아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내 강점과 약점, 진심,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아내의 꾸준한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 정확하고 담대하게 말해 주는 경건하고 현숙한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의 완고함을 깨뜨리고 따뜻하고 때론 엄격하기까지 한 아내의 훈계를 듣게 해 주심에 감사한다. 당신의 아내 역시 당신의 소명을 확신하는지 물어보라. 그리고 그녀의 의견에 귀 기울이라. 사역은 당신에 관한 게 아니다나는 ‘인생 구절’ 같은 것을 안 좋아하는 편이다. 말씀을 전체 맥락에서 벗어나 얕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 부르심에 순종한 후 사도행전 20장을 연구하던 중 한 구절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목회 사명 선언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당연히 나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사역 중 얻게 되는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당신의 성장에 정말 유익이 되는지 회의가 들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고난을 통해 당신이 사실은 사역자를 빙자한 거짓 교사에 불과했단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드렸다면, 당신은 이미 삶의 소유권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겠다는 서류에 서명한 것이다. 쉽게 포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역은 당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삶을 위해 부름받은 게 아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부름받았다. 시험 당할 때 기뻐할 일로 여기며(약 1:2), 영광스러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당신의 인생을 바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elp! I’m Doubting My Call to Ministry번역: 무제
교회사역
고난
소명
목회자
은사
열매
사역
소유권
변화를 이끄는 교회
by Reuben Hunter
2019-05-21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를 믿는다. 우리는 변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은 바울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한 것과 같이 획기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인 ‘우리’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크리스천 공동체의 삶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합 2:14) 우리 지역 사회에 소금과도 같은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마 5:16; 벧전 2:9-12 참조). 이와 같은 선한 영향을 꿈꾸며 모든 교회 개척자들은 그 지역의 사람들과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도시와 문화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되는 것을 비전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그 비전이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우려한다. 이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혼란은 교회 개척을 의도치 않은 길로 쉽게 빠뜨리기 때문이다.교회가 도시와 문화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사명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과연 지역 도시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와 '변화'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 완성할 수 있다. 교회의 두 가지 사명조나단 리만(Jonathan Leeman)에 따르면, 교회에는 “안으로의 사명”과 “밖으로의 사명”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도 세우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안의 구성원들이 각각 활동하는 다채로운 모임으로도 세우셨다는 사실이다.여기서 교회가 지닌 '안'으로의 사명은 성도 전체를 하나의 몸이 되도록 제자 삼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며, '밖'으로의 사명은 그 제자 각각이 지역으로 나가 또다른 제자들을 만들고 그들을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끌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각 사명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도가 매주일 한곳에 모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주님과 함께 할 때(마 18:20),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 및 침례와 성만찬을 거룩하게 집행하여 한 몸인 제자를 키우는 '안'으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각각의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 다채롭게 세상으로 흩어졌을 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신 삶의 영역과 속한 지역에서 선한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가 되는데 이것이 교회가 행하는 '밖'으로의 사명에 대한 좋은 그림이다. 교회의 이 두가지 사명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가 교회의 역할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이에 대해서 리만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군가 나에게 ‘교회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혹은 ‘사람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까?’ 혹은 ‘교회 사역의 핵심은 말씀 선포입니까?, 아니면 말씀과 행위 둘 다 입니까?’ 혹은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까?’라고 물을 때, 나는 질문자가 의미하는 교회가 하나의 몸인지 아니면 각각의 구성원들인지 알 필요가 있다.” 움직이는 교회로서의 “각각의 구성원”은 맡은 섬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여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예배를 이끌고, 예산을 집행하거나, 혹은 직원을 고용하는 등 다른 모습으로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역할이 교회의 필수적이 의무는 아니지만 말이다.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삶은 교회의 두 사명 중 밖으로의 사명이 어떻게 개인과 도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예 무역을 폐지시킨 그의 노력은 “하나의 몸”인 교회로서 행한 안으로의 사역이 아니었다. 이는 지역 교회에서 제자로써 훈련받은 어느 정치가이자 기독교인이었던 한 개인이 “각각의 구성원”으로서의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 밖으로의 사역이었다. 맡기신 그 자리에서 나의 사명에 집중하라하나님은 이 세상에 세 가지 기본적인 기관을 설립하셨다. 첫째는 건강과 교육, 복지를 책임지는 가정이다(엡 5-6). 둘째는 정의의 책임을 가진 민사기관이며(벧전 2:14), 마지막은 하나님의 은혜과 평화를 전할 교회다(마 28:18-20). 각 기관은 맡은 역할이 있으며 그 책임에 집중해야 한다.그 중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교회의 역할은 그 안에 속한 교인들이 매주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성도들은 주일에 함께 모여 한몸으로서 말씀과 성례에 참여하여 변화한 후에, 각각의 구성원이자 움직이는 교회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신실함과 기도로 변화를 이끌기 위해 흩어진다. 바로 윌버포스의 경우처럼 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변화시키신다변화를 이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부여하신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당신이 속한 그곳에서 변화를 이루어 내기까지 지역 교회는 안으로의 사명과 밖으로의 사명 모두를 신실한 인내로 행해야 한다.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에서 이런 자세를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주로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교회 개척자들에게 이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변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을 존재임을 기억할 때, 비로소 그 인내를 성취하여 맡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hould Your Church ‘Transform’ the City? 번역: 송유희
근현대교회
변화
이끄는
교회
사명
오직하나님
조나단리만
안으로의사명
밖으로의사명
윌리엄윌버포스
건강한 교회는 애통의 언어를 말한다
by Mark Vroegop
2019-05-20
몹시 추운 2월의 어느 날, 나는 새로 판 무덤 아래로 자그마한 내 딸의 관을 내렸다. 며칠 전 아내는 사산된 아기를 출산했다. 아내는 약 9개월 동안 그 아기를 뱃속에서 키우고 있었고, 출산일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중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멈추었다. 친척과 친지들이 우리 가족 주위로 모여 섰다. 무덤 아래로 작은 관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나는 아내와 아들 셋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무덤을 뒤로 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찢어지는 듯했다.그러나 그것은 아주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모순된 정서와 계속되는 질문들과 반복되는 실망 속에서 한참을 헤맸다. 여러 번의 유산을 겪어야 했으며, 손상된 난자가 거짓으로 임신 양성 반응을 보이는 등의 일들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몇 년 후,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새 생명을 잉태하여 건강한 딸을 출산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의 굴레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매일 같이 투쟁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고통의 여정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놓치고 있는 요소아내와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을 알았다. 그분의 주권을 귀중히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매일 같이 힘들었다. 매우 힘들었다. 깊은 슬픔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질문과 두려움에 대해 하나님께 이야기했다. 그러나 가끔씩 내가 실제로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면, 몇몇은 그것을 불편해 하거나 거기에 대해 이상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들로 분위기를 바꾸려고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겪는 고통과 우리 가정의 사적인 내용들 사이의 관계성을 찾으려 들며 실수를 범하곤 했다. 내가 깊이 씨름하거나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할 때면 사람들은 보통 그 화제로부터 빨리 벗어나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우리와 동행하는 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모든 이들이 좋은 의도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분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애통의 언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깊은 슬픔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은 애통하는 일에 대한 익숙함이었다. 인생의 투쟁을 통해 하나님께 진실하고 정직하게 나아가 이야기하는 부분 말이다. 사실 애통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언어였다. 신학교에서 오랜 시간 훈련받은 목회자였음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시편 삼분의 일 이상이 애통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애통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 고통은 나와 애통 사이의 빈 공간을 상실과 슬픔으로 메웠다. 마음을 되돌리기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내 마음은 진실로 애통해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의 고통이란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 원했다. 혹 그 고통이 꼭 나쁘다고 할 순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다 나는 깊은 슬픔에 관한 책 대부분이 슬픔의 심리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치거나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했단 사실을 방어하려 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애통에 관한 내용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장례식과 주일 예배에서 애통을 가볍게 취급해도 될 만한 문제처럼 다루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축하와 승리의 노래들은 자주 불렸지만 애통에 대한 노래는 불리지 않았다. 나는 애통한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극단적인 삶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돌보심을 신뢰하며 견디는 성도를 위한 노래 말이다. 애통의 은혜여러 해에 걸쳐 애통에 관해 이야기하며 설교하자 사람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비통해 하는 사람들이 상담을 받겠다며 나를 찾아왔다. 그들에게 왜 나를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일에 설교하신 말씀을 듣고 목사님은 진짜 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애통을 선물로 보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이겨낼 수 없다는 식으로 절망에 빠지거나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외면하며 침묵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께 나아가 몸부림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애통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게 이야기하라. 그러면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울 수 있다. 애통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이끄는 고통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통의 언어에 대해 알게 되고 이 거룩한 상실감을 위해 허락된 예배를 중심으로 기도 생활을 재정비했을 때, 거기에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있다. 애통의 여정에서 우리는 아래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1. 기도하라고통이 당신에게서 해결하기 힘든 질문을 떠올리게 하거나 씨름하게 한다면, 애통은 그 모든 감정과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야기하게 만든다. 설령 기도의 내용이 영 어색한데다 엉망이라 할지라도 애통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으로 반응하거나 아예 침묵해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2. 불평을 토로하라애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질문과 두려움과 불만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성경에서 퉁명스럽게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시 77:9)”라고 반문하던 것을 기억해 보라. 이런 질문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질 때 구슬픈 탄식의 노래 안에 은혜가 임한다. 3. 대담하게 물으라약속하신 대로 행해달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 마음 한쪽에서 불평이 일어날 때가 있다. 때로 고통은 실망하게끔 만들지만, 애통은 담대히 일어나 다시 소망하게끔 만든다. 애통할 때 우리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도움을 구한다. 4. 신뢰를 선택하라이 땅의 모든 애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증으로 끝이 난다. 상처 받은 이들은 직감적이고 정직한 기도를 통해 고통을 이겨 낼 새로운 통로를 발견한다. 애통은 슬픔의 막다른 골목이 아닌 믿음을 새롭게 하는 도관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편 13편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시 13:1)”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이 왜 멀리 계신 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과 달리 다윗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라는 소망 가득한 선언으로 끝맺는다. 이것이 바로 애통이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곳이다.믿음 충만한 애통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영감을 받은 깊은 슬픔에 관한 표현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수님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고 애통하는 시편을 인용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다. 내가 겪은 고통의 여정과 목회 여정들 역시 애통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함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불평을 토로하며, 담대하게 묻고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슬픈 애통의 노래를 허락하신다. 이를 깊은 슬픔에 대한 단계적인 공식처럼 이해하지 말라. 기도하며 쏟아 내는 애통의 언어는 어두운 구름이 우리를 둘러 쌀 때조차 하나님을 향해 계속 부르짖도록 만든다. 애통은 눈물과 슬픔, 그 이상의 것이다. 애통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구세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계 21:4) 날에 소리 높여 한 갈망을 표현하게끔 만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의 구속 계획(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 무언지를 알고 있다. 영광스러운 계획이 완성될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서 애통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 찬양, 성경 공부, 상담에서 애통이 빠져서는 안 된다. 소그룹 모임과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또는 국가적 위기로 인해 개최된 기도회 등에서 우리는 마음껏 애통하며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 영혼은 애통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언어를 회복하는 일을 통해 부패하고 죄악된 이 땅의 여정 속에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trong Churches Speak the Language of Lament번역: 정은심
교회사역
고통
애통의언어
애통의은혜
기도
불평
대담하게
신뢰
믿음
성경의 권위를 다시 확신하라!
by Stephen Nicholas
2019-05-14
‘현장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건들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문 앞 광장 사건도 그중 하나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먼저 광장에 동틀 녘,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등장한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펴서 읽기 시작한다. 그 시간이 정오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로 운집된 군중은 일체 넋을 잃고 집중한다. 그 자리에서 율법은 낭독되고, 해설되고, 가르쳐진다. 바로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 느헤미야 8장은 그 행사가 곧 예배로 이어지는 장면까지 보여 준다. 사람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게 되는데, 그날의 모든 일은 그 거룩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분의 말씀은 안타깝게도 주변부로 밀려나고 심지어 회중 속에서도 강력한 능력을 보이지 않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말씀의 기근이 있으리라고 예언한 바가 있다. 실제로 성경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그와 같은 기근의 때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기근이 실로 심각했던 시절이 바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원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발행에 대해 항변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런데 95개 논박문을 게시한 여파로 갖가지 논쟁에 휘말리게 된 그는 결국 라이프치히에서 제대로 된 토론회를 갖게 된다. 바로 수개월 동안 로마 가톨릭의 일급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와 담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강령인 ‘오직 성경’을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성경의 절대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담은 사상이다. 그런데 이 토론회에서 일어난 논쟁의 기록과 루터의 저술들을 살핀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는 결국 루터가 이단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심문하기 위한 회의의 일자와 장소를 1521년 4월 17-18일, 보름스 제국의회장으로 정한다. 회의장인 보름스는 앞서 언급한 수문 앞 광장과 같이 ‘그 현장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만한 또 다른 장소이다. 4월 17일, 루터는 그가 수도원에서 입던 단촐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서는 다들 화려하게 차려입은 왕과 귀족 및 추기경과 사제들 앞에 섰다. 왕좌에는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카를 5세(Charles V), 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앉아 있었고, 루터의 저서들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내 명령이 내려졌다. “철회하라!” 이는 책들에 쓴 내용과 ‘오직 믿음’만이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사상, 그리고 ‘오직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모두 다 철회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루터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으로 하루를 요청했는데,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날 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다음날 그 자리에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내가 인용한 성경이 나를 붙들고 있고, 내 양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안전하지도,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 사건 이후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만한 또 다른 장소가 이어지는데, 그 장소란 바로 루터가 수개월을 칩거하며 은신처로 삼은 바르트부르크 성이다. 거기서 루터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쉼 없는 연구 끝에 ‘교회 설교집’(Kirchenpostille)이라고 불리는 저작을 남겼다. 당연히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교회 설교집은 그 말씀을 해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말씀은 선포될 뿐 아니라 해석되고 가르쳐져야 하기 때문에 루터의 결과물은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는 마치 앞서 묘사한 느헤미야 8장의 전례를 잇는 것과 같다. 즉 루터는 어떤 새로운 일이 아니라, 매우 오래된 모범을 따르고자 했을 뿐이다.이처럼 ‘오직 성경’에 충실한 태도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성경 자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사상을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루터가 그의 비판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큰 도움을 준다.당시 루터가 가장 많이 받았던 비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모아진다. “너는 천오백 년의 교회 역사를 저버렸다.” 여기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 “너는 교회를 저버렸다. 네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너는 스스로를 교회도 전통도 필요 없는 사람으로 자처했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성자들의 가르침이나 다른 성도와의 교제도 경시했다.”루터는 싸움에서 뒤로 물러서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비판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비판에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오직 성경’이라는 사상이 오늘날 잘못 주장되는 경우가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부에서는, '오직 성경'이 그 당시의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마치 다른 교사들도 필요 없고 이천 년의 교회 역사도 저버릴 수 있다는 식의 의미로 잘못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선언한 ‘오직 성경’은 그렇게 급진적인 개인주의를 조장하거나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기 위해 표방한 사상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해 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루터가 쓴 ‘공회와 교회에 관하여’(On the Councils and the Church)가 있다.1539년에 저술된 이 책에서 루터는 앞서 이십 년 간 계속되었던 비판에 대해 답변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에는 교회 역사의 가치, 건전한 전통의 가치, 그리고 공회의 가치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루터가 자신의 견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다른 이들의 견해를 무시했다고 보는 해석은 심각한 오해이다. 그는 전통 자체를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그 필요성과 유익성을 인정했다. 다만, 무오한 성경과는 달리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권위로 간주했다.성경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들을 훈련하여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 사람들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실한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쳤고, 디모데는 그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서 “부탁하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전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치 유산을 물려주는 행위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역에서 그 단어는 ‘전통’을 의미하는 용어로 번역되었다.이처럼 건전한 전통이 분명 있는가 하면, 부패한 전통도 있다. 루터는 부패한 전통의 특징으로서 외형과 형식을 내면의 실재보다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보다 더 높이는 행위를 들었다. 이런 행위가 1세기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행해졌고, 16세기 당시에는 잘못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전통은 하나님 말씀의 중심성과 우월성을 지지하는 한에서만 그 내용이 건전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신조들이 그러한 전통에 해당한다. 또한 역사적 공회들과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정립된 교리가 그 전통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해, 건전한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바른 교리를 높이는 반면, 부패한 전통은 그러지 않는다.루터는 분명 자신의 사상에 전통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었고, 교사의 중요성도 확신했다. 신약성경 역시 교사의 직분을 명시하고 있다. 루터의 고백처럼, 오늘 우리의 양심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가르칠 교사들을 허락하셔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이렇듯 우리는 전통과 교회를 거부하고 성도의 교제를 무시하는 자들이 아니다. 나의 동료인 키스 매디슨(Keith Mathison)은 우리가 주장하는 신념이 ‘솔라 스크립투라’(즉 성경만이 오류가 없는 최종적 권위라는 사상)이지 ‘솔로 스크립투라’(즉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는 사상)가 아니라고 간결하게 표현한 바가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로 주장한 성경의 권위이며, 우리도 동일하게 고백해야 할 권위이다.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해 믿을 수 있는 가르침을 제시하는 오류 없는 권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앞서, 우리는 성경이 제자리를 찾았던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곧 느헤미야 8장이 전하듯이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유배지로부터 예루살렘에 귀환했을 때 일어난 사건,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일어난 사건을 확인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은 역사를 바로 이 시대에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모시고 널리 전파함으로써 그 말씀이 결실을 맺는 영광을 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원제: Biblical Author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루터
면죄부
성경
권위
부패한전통
오직성경
교회를 온라인으로 다닐 수는 없다
by Andy Huette
2019-05-13
작년에 조지타운대학교 체육부는 이런 트위터를 내보냈다.“세상이 가상 현실을 향해서 점점 더 나아가고 있지만 거기서 한 걸음만 떨어져 나와 조지타운대학교 농구 경기장에서 진짜 현실을 한번 체험해 보는 건 어떨까요?” 농구 경기 입장권을 산 사람들은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오거나 아니면 입장하면서 맡겨야 했다. 핸드폰이 없는 농구 팬들은 그날 서로 ‘얼굴과 얼굴로’ 만났고 무엇보다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농구 경기에 가는 모습까지 바꾸고 있는, 온라인으로 연결된 이 시대는 교회를 다니는 모습도 바꾸고 있다. 온라인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유하는 교회가 점점 더 늘어가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참석할 수 있는 온라인 예배가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게 결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라이브스트리밍의 축복내가 다니는 교회도 예배를 라이브스트리밍 하는데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심각한 건강 문제 때문에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매 주일 그녀는 아이패드를 통해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그것은 몸이 떨어져 있어도 교회 지체들과 연결되도록 만든 축복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 여행을 하는 사람들, 또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응급구조원 등의 경우에도 온라인 예배는 매우 유용하다. 이런 비슷한 경우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온라인 예배는 축복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교회는 결코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교회 참석의 축복성경에서 '교회'는 사건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교회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속한 가족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당신은 좋든지 나쁘든지 그분의 가족과 교회를 얻는다. 설교, 기도, 찬양, 친교로 구성된 주일 아침 예배는 교회가 하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가족은 교회 그 자체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신자들에게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품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무려 50 가지가 넘는 명령에 '서로'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모이기를 소홀히 하기 쉽다. 그러나 모이기를 소홀히 할 때 교회는 오직 가족으로 모일 때에만 생기는 '서로'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소비자 사고 방식을 촉진시킨다. 당신은 온라인으로 설교를 듣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알아야 하는 기쁨, 애통함,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불편함을 제대로 체험할 수 없다. 교회는 우리가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참여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교회가 불편한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체로서 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죄인을 사랑하고, 인내와 온유함 그리고 희생적인 봉사까지 감내하도록 부름받았을 뿐 아니라, 이 죄많은 세상 속에서 교회라는 가족이 가진 혼란 속에서도 함께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힘이 들어야 효과가 있는 운동처럼 불편함도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진짜 교회를 가상 교회와 바꾸지 말라솔직히 말해서 가상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온라인 예배 외에는 예배에 참석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기도하며 양육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가족의 책임이자 특권이다.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꼭 지역 교회를 찾아 등록해야 한다. 교회 가족이 주는 행복을 제대로 경험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런 진짜 현실을 가상 현실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때로는 집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싶은 유혹이 들더라도 옷을 챙겨입고 교회로 가라. 가상 현실이 아닌 진짜 현실을 선택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 Can’t Livestream Church번역: 무제
교회생활
라이브스트리밍
온라인예배
가상교회
교회가족
교회참석의축복
예수님의가족
진짜교회
처음
이전
열린
26
페이지
27
페이지
28
페이지
29
페이지
3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