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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
by Andrew Wilson
2019-09-16
영어 단어의 수가 20만개를 넘어서지만, 나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단어는 은혜(charis)와 기쁨(chara)이라는 아름다운 헬라어가 감사(eucharistia)와 선물(charismatia)의 개념들과 합성되어 만들어졌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을 요약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귀하게 여기며 축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이 성례전적(성찬과 예전)이든지 혹은 은사적(예언과 치유)이든지, 교회의 전통이라는 창고에서 옛 보물과 새 보물을 꺼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감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축하하며 성찬을 드릴 수 있도록 초대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유카리스마틱’(Eucharismatic)이다.예배가 어지럽혀지다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예배가 어지럽혀진다는 말은 최악의 상태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이에 공감하며, 12세 소년이 기독교 성례전에 처음 참여하게 된 경험을 떠올려 본다. 그때, 그는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사제 모자를 쓴 남성이, 성상들에 둘러 쌓여,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내 마음이 벅차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낭독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또한 기독교 TV에 나와서 아주 기본적인 번영 설교를 하며 성경을 들고 흔드는 설교자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생각해 본다.교회의 예배 의식들을 생각해 보면, 새롭게 도입된 많은 예배 의식은 죄와 고통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오래 지켜온 예배 의식 역시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예배 시간이 극도로 지루했던 기억이 있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목석같은 사람들에게 매주 같은 말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설교를 들으며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은 어린 내게 큰 고역이었다. 그리고 어린 십대 아이로서, 지극히 창피했던 기억도 있다. 예배 시간에 중년의 여성들이 치마를 빙빙 돌리며, 발을 구르고, 탬버린을 흔들면서,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로 유대교의 멜로디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합창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혹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성례전을 중시하는 교회들이 목석같고, 은사를 중시하는 교회가 우스꽝스럽다면,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Eucharismatic) 모습은 목석같고 우스꽝스러움, 둘 다에 해당될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은 없다. 한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셰익스피어, 성(sex), 모짜르트, 좋은 포도주, 성부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지루하고 창피함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사로잡을 만한 진리조차도 그들에게는 너무 감성적이거나 영혼 파괴적인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매주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에게 당혹감이나 불만을 느끼게 하지 않는 예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배 의식에 불만이 있다고 그것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예배 의식이 꼭 그런 식으로 행해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교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예배 의식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난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며 실망했다. 하지만 나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를 연구하고 소망을 되찾았다.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아름다움그 다음 나는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상황이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물론 목석이나 허수아비 같은 사람도 있다. 형식주의란 목욕물과 함께 성례전이라는 아기를 버려버린 현대 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도 똑같이 뻔하며 형식주의의 목욕물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 되었는데도 계속 그 방식을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혹은 반대편의 전통주의자들의 예배에서는, 어느 누구도 전혀 놀라지 않고,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누구도 미소를 짓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보다 훨씬 더 흔한 모습은 역사와 관습 그리고 이 두 극단에 대한 회피가 어우러져, 인간성이 배재된 채 성경-교회라는 패러다임 안에 갇혀 있는 교회들의 예배 의식이다. 오래된 것은 케케묵은 일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새로운 것은 문화적 유행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여, 그들은 20대와 50대의 어디쯤에서, 안전하지만 무기력하고, 뻔하지만 우아한 예배를 선택한다. 그들은 성례전이나 감정에는 더없이 자유로우나,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면도 결핍되고 영적인 면도 결핍된 예배를 드린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 중 어떤 면은 당신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구체화된 예배의 기쁨을 맞이하는 교회를 상상해보라고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물, 떡과 잔, 기름과 같은 상징의 힘을 재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이 그동안 놓치고 있던 성경적 요소들을 예배에 포함시키고, 거의 잊고 있던 복음의 깊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수도사들의 기도문과 순교자들의 노래를 사용할 때 그 효과가 증폭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이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을 읽을 때보다 더 큰 활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모든 성도들은 성례전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그 다음, 교회가 성령에 깊이 감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즉흥적으로 찬양이 터져 나오고 기쁨이 얼굴에 퍼지는 모습을 말이다. 치유 은사가 있는 이들은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편 150편을 읽으며 치유를 실행한다. 필요할 때는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임에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한다. 때로는 소리치고 때로는 춤을 춘다. 어린 아이들처럼 웃는다. 그리고 마치 유다의 사자가 그들의 자리 끝에서 깃털을 세우고 튀어나올 것처럼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이 집에서나 사무실에서 그들에게 이야기하시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예배는 영국 사람들의 장례식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의 결혼식처럼 보인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놓아 보자. 치유의 간증과 고백의 기도, 시편, 찬송과 영적 노래들, 물세례와 성령세례, 영혼을 움직이는 교리와 몸을 움직이는 리듬을 포함하는 예배를 상상해 보라.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며, 아들과 딸이 예언하고, 모두가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각각의 방식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을 볼 수 있는가?그 모습은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t Means to Be Eucharismatic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성례전
은사
기쁨
감사
선물
유카리스마틱
시편
참된 교회를 세우는 권징
by Fred Greco
2019-09-06
권징이라는 단어는 많은 기독교인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권징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명령하는, 억압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폭군의 이미지를 풍긴다. 교회 내외에서 공개적으로 발생했던, 권위를 남용한 여러 사건들을 고려할 때, 권징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기독교인이 오늘날 누리는 자유라는 기준으로 바라볼 때, 권징은 더욱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각각의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앙과 신앙 생활에 대하여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는 게 맞다는 생각과도 조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난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권징이 참된 교회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권징의 진짜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바른 교회를 가르는 시금석종교개혁 시절부터 신학자들은 참된 교회와 가짜 교회를 가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이는 하나님 말씀의 바른 선포, 올바른 성례 집행, 그리고 적절한 권징의 행사였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또 올바르게 성례를 집행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참된 교회에 반드시 권징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권징은 말씀 선포 및 성례와 동일하게 참된 교회를 만드는 핵심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교육되는 것만으로는 바른 교회가 되는 데에 부족하다고, 무엇보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성경은 반드시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롬 2:13; 약 1:22)? 성례에 참여할 사람을 교회가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성례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그러므로 권징은 하나님의 가족을 바로 지정함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주님이 직접 만드신 방법이다. 교회는 단지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을 구원해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구체화된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다. 위대한 삼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이 심판의 보좌 앞에서 단지 죄가 없다고 선언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롬 5:1). 그는 구원받은 죄인들을 당신의 자녀로,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기를 기뻐하신다(요 1:12). 이런 가족의 개념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권징이 가진 목적과 그 속에 숨은 축복까지 깨달을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의 잘못을 바로잡고 격려하는 것을 소홀히 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도 서로를 바로잡고 격려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권징과 제자도교회 생활에 필요한 권징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변에서 들은 이런저런 사건이 아니라 성경이 주는 렌즈를 통해서 권징을 바라보아야 한다. 권징이라는 단어는 재판, 판결 그리고 벌과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도록 하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건 성경이 말하는 주된 권징의 사용 방법이 아니다. 성경적 권징은 그 어떤 단어보다도 ‘제자’라는, 우리와 친밀한 그 단어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다(마 10:24).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명령을 잘 관찰하고 배우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제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마 28:19-20).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자는 주님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울은 바로 이런 의미로 에베소서 6장 4절을 썼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신약에서 제자의 의미로 쓰인 그리스 단어는 넓은 의미로 교육 또는 훈육(특히 어린아이를 향한)에도 쓰인다. 누군가를 제자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훈련시키고(잠 22:6), 소중한 대상을 사랑으로(계 3:19) 세워 주는 것을 의미한다(히 12:5-11). 성경적 권징은 이게 다가 아니다. 성경은 은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데에도 권징이 필요하다고 알려 준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권징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그분의 교회 안에 참 목자이신 주님의 지시를 받은 작은 목자들을 만들고, 그 작은 목자들을 통해 양 무리를 세우며 성장시키기로 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을 권징하신다(엡 4:11-16).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권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이뤄지는 권징은 결코 세상 법정과 같은 공식적인 현장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지도자가 적절한 가이드와 지시, 그리고 필요한 경우 성경에 근거한 훈계를 주는 것으로 권징은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바로 세워지기 위해 무엇보다 그분의 명령을 잘 알아야 한다.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현실적인 의미에서, 권징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고 또 필요한 경우에 제약까지 받는 소중한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교회 권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참된 교회를 가르는 시금석이 권징이라면, 또 권징이 그분의 자녀를 사랑으로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왜 보다 많은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않을까? 왜 권징이 그토록 사소하게 취급되는 걸까? 이는 권징이 종종 잘못된 형태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자녀를 신실하게 성경적으로 훈련하는 부모처럼, 교회 지도자도 그들이 가진 권위를 일관성 있게 또 사랑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구약성경은 요셉을 편애한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편애가 가진 위험을 잘 알려 준다. 또 엘리 선지자가 그의 아들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훈육의 부재가 주는 위험도 잘 보여 준다. 실로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시키신다(히 12:6). 교회도 주님의 본을 받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징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 말은 권징이 결코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었을 때에 어쩔 수 없이 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권징은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시점에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징은 책임, 성장, 용서 그리고 은혜의 모습으로 교회 전체에 고르게 스며든 하나의 문화이다. 모든 교회 멤버는 죄로 힘들어 하는 다른 지체를 도와야 하는 책임을 진다. 그 책임은 판단과 비난이 아닌 온유와 회복을 향한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도 얼마든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갈 6:1). 마태복음 18장이 보여주는 모습은 권징이 소송에 대한 대안이라는 게 아니다. 일단 내가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는 작은 단계에서부터 필요하다면 교회에 문제를 알리는 큰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은, 성도가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지체를 대하는 사례이다. 교회 지도자는 권징을 행할 권위가 결코 자신으로부터 오는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권위는 바로 그리스도가 허락하신 목자로서의 권위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엡 1:22-23; 골 1:18). 교회를 흠 없이 세우는 분은 그리스도이다(엡 5:27). 따라서 지도자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권위적으로 또는 독재자처럼 행동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벧전 5:3). 또한 권징을 행하면서 누군가를 편애하여 그 눈을 감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약 2:1). 권징은 결코 은밀한 처벌이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고 관계를 치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교인들이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권징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권징의 대상이 되는 교인이 불필요한 노출이나 잠재적인 소문의 대상이 되어 명예를 손상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권징의 목표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더 강건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권징의 목표는 무엇인가마지막으로 교회 권징은 기도와 사려 깊은 배려 그리고 일관성이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권징은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목적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교회 권징에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 첫 번째로, 권징은 죄인을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권징이 사랑으로 행사될 때, 이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결코 죄인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며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가 다시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우리는 권징을 통해 복음이 살아 역사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거저 그리고 온전히 우리를 받아 주신다. 두 번째로,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향한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다. 이는 위선자의 가면을 쓰자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다. 즉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용서받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자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무엇보다 권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분의 사랑과 거룩한 품성을 더 드러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보여줄 수 있다(엡 3:1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권징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넘어진 자를 사랑과 겸손으로 회복시키려고 할 때, 그 행동은 우주 속 모든 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할 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벧전 2:12).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urch Disciplin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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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 Hodges
2019-08-23
문화적 상대주의가 사고를 지배하는 현대 문화에서 진리는 곧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진리는 ‘어디인가’ 존재하겠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만을 유일한 진리로 혹은 가장 좋은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문화적 상대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간 사회 현상을 마주한다.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는 상대주의를 넘어 ‘표현적 개인주의’라고 알려진 새로운 문화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간다. 상대주의는 진리의 고정불변을 말하는 주장을 꼬집으며 이를 교만 혹은 아집으로 간주하지만, 표현적 개인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만약 상대주의자가 “진정 참된 것이 무엇인지 누가 정의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표현적 개인주의자는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라. 표현적 개인주의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제 힘과 자유는 부여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발견하는 가치가 되었다. 팀 켈러(Tim Keller)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 문화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영웅적인 이야기는 자신의 내면에 관한 스스로의 이야기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를 스스로 정의하며, 사회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을 집중적으로 추구한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상대주의로부터 더 나아간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진리는 개인이 정의하기 나름이며,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는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자신의 내면인 시대가 되었다.교회에 스며드는 표현적 개인주의를 경계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주의를 인지하고 심지어 이에 저항한다. 현대 기독교는 진리를 주관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상대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변증법과 추론적 접근을 충분히 다루어 왔다. 하지만 표현적 개인주의는 상대주의에 비하여 좀 더 은밀하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목표와 열망을 위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확신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마음이 곧 그 진리의 원천인 것으로 여기도록 부추긴다. 교회에 이러한 이념이 스며드는 것을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든다. 회중은 개인주의를 밀어내기보다는 종종 미묘하게 이를 조장하고 또한 즐긴다. 주일 예배에서부터 소그룹 모임에 이르기까지, 만약 당신이 교회에서의 모든 삶을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면 이는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행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개인주의가 교회에 침투하는 상황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입으로는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네가 왕”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성경에서 살펴보자면, ‘자기’와 ‘교회’라는 단어만큼 서로 상반되는 용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분의 교회로 부르실 때 부여하신 임무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부인’하는 것이다(마 16:24-25).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들을 열거하실 때, 그 목록에 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님이 언급하신 것은 오직 우리의 그릇된 증거와 사악한 생각이다.또한 바울의 서신서를 살펴보라. 우리는 거기에서 바울이 타인과의 온유한 연합, 그리고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겸손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교회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의 관점에서 찾는다면, 교회는 표현적 개인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고 또한 자기 생성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진리는 인간의 형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또한 우리의 자아 역시 그분을 위해 죽도록 하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힐 때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거짓을 믿고,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열망하며, 진리를 모른 채 황야를 헤매는 자아이다. 우리를 위해 그분이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를 죽여야 한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새 생명은 자신을 부인하는 거듭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거듭남은 스스로의 마음이 갈망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개척은 반문화적이다교회 개척은 예수님이 주신 사명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 안에서 이러한 사명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공동체의 연합을 향한 극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헌신은 표현적 개인주의를 저해한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위한 헌신은 자기의 신념, 개인적인 선호, 스스로의 욕망을 교회의 중심에 두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를 세우며 마주하는 여러 어려운 도전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위를 내려놓도록 훈련받는다. 그리고 이는 비록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진리와 선함의 결정권자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교회를 개척할 때, 본질적인 가치만을 추구하고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라. 프로그램 제작과 운영 자체가 중심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단순성이 요구되며, 또한 자기 부인이 뒤따라야 한다.성도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릴 때, 그들은 비로소 복음이 주는 아름다운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신실한 순종을 바탕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전할 때, 설교자와 성도 모두 설교의 ‘스타일’이 아닌 그 안의 복음에 집중하게 된다. 교회를 개척하려면 복음의 진리를 삶의 핵심으로 여기는 생각과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앞에, 변덕스러운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교회가 개인주의에 잠식되는 이때,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의 기회와 장을 제공해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진리란 자기 마음속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배워갈 것이다. 또한 우리가 참 진리를 앞세울수록, 표현적 개인주의가 말하는 진리는 가짜임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tarting Churches in a ‘Follow Your Heart’ Age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상대주의
반문화적
진리
팀켈러
표현적
개인주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
by Guy Prentiss Waters
2019-08-19
“내가 경배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이다. 로마서 1장 21-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고 말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중의 하나는 참된 예배의 회복이다(요 4:21-24 참조).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로부터 나를 구하여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의무이자 기쁨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분은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마 28:18-20), 또한 복을 받는다(고후 13:14). 우리는 세 분의 신이 아닌 하나의 하나님을 경배한다. 즉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세 위격이 있다. 각 위격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개혁신학자 하지(A. A. Hodge)가 설명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똑같은 하나의 하나님이다. 분리할 수 없는 신성한 본질과 완전성 및 모든 특권은 같은 의미와 정도로 각 위격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세 위격은 서로 어떻게 구분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절은 “아버지는 아무로부터도 나거나 나오지 않았으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원 전에 나오셨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 전에 나오셨다”라고 선언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생명과 역사하심의 측면에서 특정한 질서로 나타난다.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말대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우리가 경배할 분이신데 말이다. 우리가 경배할 하나님이 자신을 삼위로 나타내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시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에베소서 1장 3-14절에 나오는 바울의 묵상을 살펴보자. 성부 하나님성부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3절). 성부는 크리스천에게 기쁨이 되는 모든 ‘신령한 복’의 원천이다. 더 나아가 그분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분이다(4절). 즉 성부는 창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고자 선택하셨다. 선택하심의 이유는 우리가 어여뻤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가 어여쁠 것이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11절의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 4-5절의 말씀 또한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양자로 삼으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나와 당신을 택하셔서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다. 화란의 개혁교회 목회자 빌헬무스 아 브라켈(Wilhelmus à Brakel)에 따르면, 성부는 복을 주고, 선택하고, 자녀 삼으심을 통하여 “신자의 영혼 속에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모습”을 만들어 낸다. 당신은 매주 공적 예배에서 어린 아이의 영혼과 같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가? 성자 하나님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7번이나 사용했다. 이 본문의 요점은 성부가 성자 안에 그분의 선함을 부어 넣으셨다는 점이다. 성부가 영원부터 목적하신 구원의 은혜를 그분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시점은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이다. 예수님은 ‘속량 곧 죄 사함’(엡 1:7)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성자가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설명한다(엡 5:2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엡 1:11). 그러므로 나와 당신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롬 8:17)이다. 성부는 구원의 계획을 성취함으로써 받게 되는 영광이 성자로 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엡 1:10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그분의 백성을 정하셨다(롬 8:29). 그렇다면 이미 정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매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공적 예배의 장소로 모이는가? 이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 위함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교회를 사랑하는가? 또한 그분과 같은 상속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성령 하나님바울은 성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성경은 성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복을 주셨다고 언급하며, 또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는]” 모든 죄인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라고 말한다(엡 1:13). 성령의 영광스런 사역은 ‘구원의 날까지’(엡 4:30)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보증된 기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엡 1:14).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분명 그날까지 우리를 강하게 보호하신다(엡 3:16 참조). 성령은 항상 나와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신실하고도 경계가 없는 진실한 친구이시다.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 시간, 성령이 당신에게 유익을 주실 것임을 믿는가? 그 믿음이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로 이어지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론적으로 삼위일체를, 그리고 실천적으로 유일신을 믿는 자들이다. 우리는 구원 사역을 통해 삼위의 본성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는 성부에 의해 택함받고, 성자에 의해 구원받으며, 성령의 내재하심을 선물 받은 이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를 통하여 위대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Centered Worship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개혁신학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루이스벌코프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by Marshall Segal
2019-08-09
그룹 사역을 계획하고 있는가? 그 모임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교회 안의 모임 혹은 친구들과의 사적인 모임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비록 모임 사역의 목적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그 모임을 계획하는 모든 사람은 많은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하나님이 팀원 개개인에게 그분의 뜻을 더 깊이 일깨워 주시기를 바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조원들이 광야 속에서도 믿음에 의지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모임을 통해 회개를 배우며 서로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대할 것이다.사도행전은 초대교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초기 모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묘사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28장으로 된 사도행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공동체의 성장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크리스천들이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는지를 안내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음으로써 모임 안에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일상의 나눔을 통해 예수님의 증인이 된 공동체사도행전은 크리스천의 모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중략]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 46-47).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교회는 네 가지 역할, 즉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뗌 그리고 기도를 담당했다. 초대 교회의 이 네 가지 사역에 대해 우리가 다루어야 할 내용은 방대하지만, 위의 본문 구절에서 드러나는 기본적인 특징은 그 모임이 정기적이었고 또한 모이는 목적이 분명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그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택했다. 이 공동체는 한 주에 단 하루, 겨우 두 시간 남짓을 함께하는 정도의 모임이 아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으로 서로를 지키기 위해, 또한 세상을 향한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한 주 내내 함께 모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이를 행하는 사람의 생활 방식이자 곧 그의 삶 자체이지, 한 주에 한 번 모여 겨우 인사만 나누는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닿을 필요가 없는 대상 혹은 서로의 삶이 공유될 이유가 없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의 공동체는 단지 주일에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관계가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삶에 헌신하는 모임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그룹 사역을 소망하고 있다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바람직한 공동체를 어떻게 닮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즉 그들이 말씀과 기도, 그리고 음식과 삶을 나눈 방식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불어 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동체 안에 임재하며 그 모임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각각의 은사를 통해 서로의 필요를 채운 공동체“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초대교회 성도들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마치 자신의 필요처럼 생각하고 이를 채워 주고자 노력하였다. 이처럼 물질적인 짐을 나누어 감당하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그들이 서로의 영적인 그리고 정서적인 부족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크게 헌신했을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돕는 은사를 주셨다고 말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은사인가. 하나님은 개인의 필요가 함께하는 성도들에 의하여 채워지도록 모임과 교제의 공동체를 설계하셨다.그분의 방식은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고 또한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성도가 줌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공동으로 의지하게 함으로써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룹 사역에 참여할 때, 우리는 각 지체의 필요를 알 수 있을 만큼 서로 깊이 알아야 하며 또한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야 한다. 서로를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한 공동체“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후략]"(행 2:43).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갈망했고, 기도에 간절함을 담았으며, 서로에게 의지했고, 또한 매일의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에 초대교회의 공동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후략]”(행 2:43)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그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고 먹으며 주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에 더 깊은 경외심을 심어 주셨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임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셨고,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더 큰 애정을 불러일으키셨다.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돌봄으로써 하나님께 더욱 이끌렸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이러한 기쁨은 지속적으로 희생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옥토에서 더욱 커지고 또 널리 전파된다. 그 옥토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돌볼 때, 하나님은 분명 나와 당신의 마음에 더 큰 감동을 주실 것이다.증인된 삶을 통해 양적 성장을 경험한 공동체“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하나님이 초대교회와 그 성도들의 모임을 세우신 이유는 단지 크리스천만을 돌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분의 목적은, 공동체 안의 아름다운 돌봄이 밖으로 전파되어 외부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을 찾아오도록 하고, 또 그렇게 하나가 된 자들이 함께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이 초대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하여 택하신 방식이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임과 교제를 통하여 그분의 백성을 사방에서 모으시고, 그렇게 모인 자들이 다시 나누고 사랑하도록 인도함으로써 공동체의 견고함과 성장을 이루셨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신실하게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모으시는 일에 쓰여진다.하나님이 그 수를 더하셨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교회를 찾아온 자들이 곧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등록하는 모습이었을까? 그보다는 복음적 설교를 통하여, 또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경험한 성도들의 간증을 통하여 믿음에 진정으로 매이는 자의 수가 더욱 증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와 모임 안에서 서로에게 신실하게 헌신함으로써, 교회 밖의 사람들을 안으로 인도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을 향한 사랑과 경배의 기쁨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실 것이다.출처: www.degiringgod.org원제: The Gig God in Your Small Group번역: 정은심
교회사역
사도행전
믿음의공동체
말씀과기도
음식과삶을나눔
은사
희생의교제
서로를돌봄
증인된삶
양적성장
소도시 목회가 주는 큰 기회
by Daniel Stegeman
2019-07-26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Acts 29에서 주최한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컨퍼런스에서 배운 것은 도시에 교회를 세우고 대도시들을 복음으로 공략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깊이 동의했다. 목회를 하려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도시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계속 하면서 나는 인구가 2백만 정도 되는 도시인 밴쿠버에 교회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신학대학원 역시 밴쿠버에 있었다. 밴쿠버에는 복음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야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는 나를 오하이오주의 시골로 가게 했다. 거기, 그리고 다시 여기로하나님은 인구가 194명 뿐인 설퍼 스프링스라는 곳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거기서 4년을 섬긴 후 뉴욕주에 있는 웨이벌리(인구 4,444명)라는 곳에 있는 교회로 청빙을 받았다. 지금도 여전히 작은 소도시이지만, 웨이벌리의 분위기는 설퍼 스프링스와는 사뭇 달랐다. 이웃한 소도시에는 심지어 월마트도 있었다. 거기서 사역한지 3년이 지나자, 아내와 나는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부르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골 목회, 소교회 목회에서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는 도시 목회로 전향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밴쿠버처럼 큰 도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번은 들어봤을 만한 도시말이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결국 인구 765명의 펜실베니아주 스노우 슈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스노우 슈는 펜실베니아주 복판에 위치한 오래된 탄광촌이며, I-80 고속도로에 바짝 붙어 있다. 스노우 슈로 처음 이사갔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주택의 폭이 좁아 일단 적당한 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월세를 살기로 했다. 이 기간 중에 우리는 교회 성도들이 우리가 “산 아랫쪽”이나 인근 도시가 아닌, 스노우 슈에 집을 구하길 바란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스노우 슈는 인간 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긴밀한 유대관계로 이루어진 곳임이 분명했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곳스노우 슈에서 맞은 첫 겨울, 처음으로 큰 눈이 내렸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아침 여섯 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밖은 아직 캄캄했고 나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가 벌써 우리집 진입로 눈 치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이웃에 사는 존이었다. 이후 3년 내내 우리는 한 번도 우리집 진입로 눈을 치워본 적이 없다. 자신이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 조차도 존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우리집 앞의 눈을 치워주었다. 말도 안되는 일 같겠지만, 이러한 선행은 스노우 슈에서는 흔한 일이다. 스노우 슈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곳 주택 뒷마당에는 담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는 도로 자체가 적고 땅을 넓게 쓸 수 있기 때문에 담장이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노우 슈 사람들이 담장을 세우지 않는 정말 멋진 이유는 대부분의 도시 거주자들처럼 답답하게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더 이상 밖에 나와 놀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밖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데 우리 집 뒷마당과 이웃집 뒷마당은 아이들이 탐험하고 놀 수 있는 넓고 안전한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여기 와서 또 하나 놀란 것은 방울뱀이다. 방울뱀을 조심하라고 여러 사람이 일러 주었는데 언젠가 한 번 실제로 방울뱀을 본 적이 있다. 당연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서 열린 “사냥감 시식의 밤”도 잊을 수 없다. 거북이고기, 사슴고기, 엘크, 곰, 비버, 야생 칠면조 등 각종 고기가 즐비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맛있었던 것은 방울뱀이었다. 사람들 말처럼, 정말 닭고기 같은 맛이었다. 작은 공동체, 큰 책무사람들을 알아가기 시작하던 첫 몇 달간, 교회에 나오지 않던 동네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알기 전에 이미 나를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있는지가 궁금했다. 새 목사가 온다는 소문이 벌써 쫙 퍼진 뒤였기 때문이었다.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식료품 가게인 홀스(Halls)에 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홀스는 유일한 자재점이고, 유일한 은행이고, 유일한 프랜차이즈(예: 서브웨이)이며, 이동식 도서관이 일주일에 한번씩 오기 때문에 우리 지역의 도서관이기도 하다. 홀스에 갈 때마다 우리 교회 교인을 만나거나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보곤 한다. 이로 인해 목회자가 경건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벧전 5:2-4). 우리 지역 페이스북 페이지에 “아무개 목사, 계산원에게 버럭 화내다”라는 포스팅이 올라가서야 되겠는가. 나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전혀 모르는 곳에 묻혀서 익명성을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좋은 일이다. 나는 홀스에 가는 것을 목회로 생각한다. 그날 누구를 보게 될지 전혀 모르지만 지금까지 이로 인해 복음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복음을 위한 많은 기회들스노우 슈에서의 사역을 독특하고도 보람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일들은 아주 많다. 하지만 가장 큰 복은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 사역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매주 세 번, 많게는 네 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여느 시골이나 도시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노우 슈에도 복음에 무지한 이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이 곳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빛을 전할 수 있는 발판을 내게 마련해 주셨다. 우리 지역에서 열리는 “성탄의 밤을 밝혀요”라는 연례 행사가 한 예인데, 이 행사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행사이다. 사역을 시작한 첫 해, 이 행사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 및 산타클로스 등장 직전에 10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모여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명확하게 전했다. 행사가 끝난 후, 놀랍게도 행사 담당자가 “내년에도 또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이라고 하는게 아닌가. 올해만 주어지는 기회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에서 사역하든, 모든 목회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도시, 어떤 교회에 가든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노우 슈는 작지만,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넘쳐난다. 주님이 당신을 소도시 목회자로 부르셨다면, 그로 인해 또한 많은 복을 주실 것이다. 놀랍도록 부어지는 복을 누릴 준비를 하라. 더 좋고 더 큰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과정쯤으로 소도시 목회를 취급하지 말라. 당연히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며, 삶을 바꾸는 복음의 힘을 신뢰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mall-Town Ministry Is Big with Opportunity번역: 이정훈
교회개척
소도시
목회
공동체
기회
복
어려움
선교의 발자취
by Adriaan C. Neele
2019-07-16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가 죽은 후 출간된 서적이다. 이 책에 실린 1739년의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신성해 질 것이고 훌륭한 책들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그리고 터키에서 출판 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뿐만 아니라 덜 배운 사람들도 이제 종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3-4).에드워즈는 이사야서 구절을 통하여 지금 전 세계가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 동시에 중국, 동인도, 그리고 남아메리카 선교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드러냈다. 그는 아마도 바로 다음 세기인 19세기에 개신교 선교의 위대한 시대가 펼쳐지고 자신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예견하고 이 설교를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설교와 사역은 전 세계로 퍼져서 많은 선교사, 선교 단체 및 선교 출판에 큰 자극이 되었다. 19세기 선교사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먼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영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칼빈주의 침례교 목사이다. 번역가이기도 한 그는 인도에서 수십 년 동안 봉사한 사회 개혁자이기도 하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은 현재는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에서 37년간 사역한 미국 회중교 선교사이다. 그는 나중에 소속을 침례교로 바꾸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무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에서 사역한 영국 선교사이며 중국내륙선교(OMF, 1865)의 설립자이다. 로티 문(Lottie Moon, 1840-1912)은 해외선교보드(FMB) 소속으로 중국에서 거의 40년 가까운 생을 선교에 바친 남침례교 선교사이다. 그리고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1867-1951)은 영국 성공회 소속인 제나나선교회로부터 인도로 파송 받은 후, 도나버에 고아원을 세우고 무려 55년간 선교 사역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복음과 선교 사역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선교지였던 해당 지역에 현재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 뒤로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러나 이들 뿐만 아니라 이름이 잊혀진 수백 명의 선교사들도 있다. 여기에는 파리 복음주의선교사협회(PEMS)에서 파송되어 오늘날의 레소토이자 그 당시에는 바수톨란드로 불렸던 지역에서 선교한 프랑스인 유진 카살이스(Eugène Casalis, 1812-91), 토마스 아보셋(Thomas Arbousset, 1810-77), 아돌프 마빌(Adolphe Mabille, 1836-94)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사람의 사역 기간을 합치면 무려 60년이 넘는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세소토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또한 영어와 세소토어의 첫 번째 사전을 편찬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 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모리야 신학교를 열었으며, ‘바소토의 작은 빛’이라는 신문사도 만들었고, 레소토 복음주의 교회도 세웠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들은 지역 사람들의 자립을 도왔으며, 궁극적으로는 레소토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쌓는 일에 기여했다. 그들이 시작한 이 운동은 지금도 레소토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도 나이지리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메리 슬레서(Mary Slessor, 1848-1915)가 있다. 그녀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여성의 권리와 원주민 자녀를 보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윌리암 화이팅 보든(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으로부터 수학했고 또한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자선 사업가이자 선교사 후보였던 보든은 무슬림을 선교하기 위해 중국의 간쑤 지방으로 가는 도중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카이로에 있는 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중동의 미국 장로교 선교회에서 50년 넘게 일한 앤드류 왓슨(Andrew Watso) 박사의 곁에 묻혔다. 그리고 그 곁에는 ‘이슬람의 사도’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2)가 묻혀있다. 이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교육자, 행정가 혹은 단체의 운영가로 생애를 보낸 많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 중에서는 레니쉬선교회(1799) 소속의 크리스천 발만(Christian Wallmann, 1811-65)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지역에서 일했던 스웨덴 출신의 선교자 한스 피터 할벡(Hans Peter Hallbeck, 1784-1840)을 꼽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예외없이 기도와 부흥 운동, 또는 서적과 선교 단체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1790년대 스코틀랜드 대각성 운동은 존 어스킨(John Erskine, 1720-1803)이 기도 운동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 ‘종교 재건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을 위한 놀라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백한 합의와 가시적인 연합을 촉진하려는 겸손한 시도’(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 for the Revival of Religion and the Advancement of Christ’s Kingdom, 1747)를 다시 발간했을 때 불붙듯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이 복음주의 부흥 운동은 스코틀랜드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1796)의 창립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선교 사업에 있어서 사역과 출판물이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었다. 이처럼 19세기 복음주의 선교 단체는 선교 활동뿐 아니라 중요한 기독교 저작물의 보급 통로였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에드워즈가 쓴 ‘구속 사역의 역사’를 재출간, 번역 및 배포한 것도 도서를 통한 선교 확장의 좋은 사례가 된다. 영국에 본부를 둔 종교소책자학회(Religious Tract Society, 1799)는 이 책을 여러 번에 걸쳐서 발간했다. 이 소책자학회의 설립자는 런던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를 설립한 복음주의자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다. 런던선교사협회는 기독교 교리 연구가인 조지 고거리와 같은 해외 선교사들에게 도서 수당을 제공했다. 조지 고거리는 인도에서 고작 10권의 책으로 도서관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중 3권은 에드워드의 책이었고 또 그 중의 한 권은 ‘구속 사역의 역사’였다. 게다가 미국소책자학회(American Tract Society, 1825)는 1838년부터 1875년까지 '구속 사역의 역사'를 무려 6만 권 넘게 출판 및 배포했다. 또한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선교출판사와 같은 선교 전문 출판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구속 사역의 역사’는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1776)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교의 필요성을 자각시켰고, 그 결과 네덜란드선교회(Dutch Missionary Society, 1797)의 발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의 첫 대각성 운동이 선교 활동을 일으킨 것처럼,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두 번째 대각성 운동은 자발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는 많은 단체를 창립하도록 이끌었다. 미국선교위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는 '구속 사역의 역사'를 아랍어로 출판하여 카이로는 물론 중동 전역에 보급하였다.이러한 영어권의 선교 노력은 프랑스어권으로도 이어졌다. 파리 복음주의선교협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의 창립자는 종교 간행물 배포를 위해 종교서적협회 (Religious Society of Books, 1836)를 설립하는 일에 헌신했다. 이를 통해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번연(John Bunyan), 존 칼빈(John Calvin), JC 라일(J.C. Ryle),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등의 저작물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와 레소토, 오세아니아 등지에 배포되었다. 종교서적협회는 또한 ‘구속 사역의 역사’(1854)의 프랑스어 번역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동시에 그 책의 출판은 프랑스 부흥 운동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롬 15:20)이라는 구절에 모토와 목표를 둔 파리복음주의선교협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1821)의 설립과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 초반의 선교사들과 많은 선교협회는 에드워즈의 도서를 익히 알고 있었다. ‘겸손한 시도’(Humble Attempt)의 1823년 프랑스 번역본 서문은 1800년대 후반에 일어난 스코틀랜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부흥 운동이 선교 사역과 선교사 그룹의 부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잘 보여준다. 복음의 선포와 여러 선교 협회에 의한 ‘복음주의 부흥기’의 많은 출판 그리고 성경 번역에 대한 헌신은 라미네 산네(Lamin Sanneh)의 말처럼 “사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실된 문화를 형성하여 기독교가 거부감 없이 뿌리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선교 단체 및 선교사가 지녔던 유럽 식민주의 확대와의 모호한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선교사들이 가졌던 모험심으로 인한 갈등의 발생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에드워즈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The Life of David Brainerd)와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의 저널을 캐리가 읽고 이해한 방식은, 복음 전파 및 복음 선포에 대한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 우려는 다름 아니라 런던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립 설교에서 표현한 것처럼 바로 에큐메니즘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장로교, 독립교단, 주교단, 또는 다른 형태의 교회 질서와 기관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단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고 싶을 뿐이다.” 많은 선교사 협회는 여기에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때로는 기존 교회와의 격렬한 긴장 관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선교 사역이 주는 부담을 털어놓는 캐리에게 존 라일런드(John Ryland)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이리 와서 앉아. 하나님이 이방 세계를 구원하고 싶으시면, 그분은 굳이 당신이나 내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 선교 사업의 열렬한 동역자이자 침례회 특별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 1792)의 공동 창립자인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1754-1815)는 캐리를 격려하고 그가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한 사람이다. 그 결과 오늘날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캐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루실 위대함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비록 미국 개혁교회가 그 초창기에 신학생이었던 즈웨머와 제임스 칸틴(1861-1940)을 후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초교파주의’를 표방한 미국 아라비아 선교부를 1889년에 설립하는 일을 이루지 않았던가.즈웨머가 지닌 선교 열정의 중심에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 모두를 품고 있다”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마음에는 칼빈이 말했듯이 “이 세상은 복음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극장”이라는 생각과 “선교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상이 가득했다. 19세기의 선교 전성기를 이끈 많은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과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행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Dawn of Missionary Societie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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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 진정한 정치의 시작
by Jonathan Leeman
2019-07-12
그리스도인의 정치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왕이 오신다! 회개하라! 믿으면 은혜가 넘치시는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정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성령을 통해 새롭게 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그 마음으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애를 쓴다. 또 그리스도인의 정치는 놀랍게도 지역 교회 공동체의 삶과 가르침과 교제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당신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에 상관없이, 지역 교회 안에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집단이기주의를 지양하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안에서 서로를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배우기도 하는 곳이 지역 교회이다. 또 구경꾼의 자리에 있는 열방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하며, 믿을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 바로 지역 교회이다. 목사가 매주 하는 설교는 일종의 정치 연설과도 같다. 왜냐하면 회중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왕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마 28:20). 목사는 회중이 왕이 세운 법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우리는 왕이 내리는 심판을 왕의 규례를 통해 선포하고, 왕이 뜻하신 바를 우리의 기도 중에 받아들이며, 왕의 기쁨과 슬픔을 우리의 노래를 통해 표현한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정책들다양한 분야에 관련된 정책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라. 복지 정책부터 살펴보자. 정치인들이 논하는 복지 정책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겠지만,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복지 정책”을 강조한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교인 서약문을 통해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 걷고,”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마음으로 보살피고 돌아볼” 뿐 아니라 “교회 사역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정기적으로 헌금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일반 재정을 위해 헌금하는 것 외에도, 구제를 위한 헌금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매년 드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인들을 돕는 방도이기도 하다. 우리 교우인 제인(Jane)이 노숙자 신세가 되었을 때 그녀가 안전한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도운 적이 있는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제인은 우리의 도움을 거절하고 공원에서 숙식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교인인 루터(Luther)가 공원에 동행했고 바로 옆 벤치에서 밤을 보냈다. 그야말로 루터는 제인의 복지(welfare)에 대해 깊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금 정책’에 관련된 것도 있다. 새 법안이 나오면 그것이 세금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해 미의회에서 자문하는 일을 하는 카를로스(Carlos)는 세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 가정을 위해 여러 날에 걸쳐 귀한 저녁 시간을 들여 상담해 주었다. 감당이 안 되던 빚을 지고 있던 이 가정을 위해 카를로스는 이 가정의 채권자들 및 수금 대행 회사와 협의를 진행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카를로스는 아내와 함께 그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 다양한 학과목 공부, 대입 시험 준비, 논술 준비 등을 도와주는 개인 교사 노릇도 해주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인종 문제도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창하게 미국 사회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교회 안의 인종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패티(Patty)가 어느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내게 고백하기를, 자신은 흑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해 준 조언은 톰(Tom)과 로라(Laura) 부부와 저녁을 한 번 함께 해보라는 것이었다. “제게 방금 하신 이야기를 그 분들과 함께 그대로 나눠보세요”라고 말했다. 톰은 흑인이다. 톰은 경건하고 성숙한 사람이다. 패티가 그런 말을 한다면 톰과 로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패티가 정말로 내가 조언한대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내 예상대로 톰과 로라 부부는 은혜와 사랑으로 패티를 대했고 패티를 용납해주었다. 패티는 회개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정치적인 주제는 끝도 없이 넘쳐난다. 난민 문제는 어떤가? 목회자 친구 중 하나가 내게 이르기를, 자기 교회 교인들이 이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 미국으로 넘어온 이란 난민 한 명에게 차량을 마련해주었다고 했다. 집도 마련해 주었고, 그야말로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그는 지금 미국 시민권도 얻었고 미군에 들어갔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이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난민 가정들을 입양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목회적이다우리는 관점을 좀 더 넓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지 정책, 세금 정책, 인종간 갈등 문제 해결, 난민 문제, 증가하는 자살률 등에 대한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대책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의 시작과 끝이 거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사고는 더욱 광범위해야 하고, 단순해서는 안 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더욱 인도적이야 한다. 다양한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 교회 ‘안에서’ 살 때 우리의 정치적 본능은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적 사고는 ‘목회적이어야’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경찰이 폭력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소위 구조적인 모순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거대 담론 등 최근에 미국 사회에서 인종 간 갈등에 불을 지피는 일련의 사건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내 개인적인 감정만 놓고 보면 소수 인종 그룹에 속한 내 친구들이나 우리 교인들 중 분명하게 좌파 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호의적이지만, 나의 일반적인 정치 성향은 우파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내 친구들과 성도들을 사랑한다. 그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요 자매들이고, 내가 아끼는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이 그런 견해를 갖게 된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믿기로, 그들은 자신만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가 못 보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나뉘어 있고, 나는 정치적으로 무엇이 정답인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겪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에서 사역하며, 나는 겸손, 이해, 그리고 정의를 향한 갈망을 배워가고 있다. 또한 더욱 섬세한 태도로 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말할 때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는 것을 배운다. 어떤 것이 더 좋은 정치인가도 배우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내가 계속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나의 정치적 사고가 계속 성장하여 내 기준으로 보기에 좌파, 그리고 우파인 형제자매들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에 이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치가 단순하지 않고, 진실성 있고, 믿을 수 있고,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야말로 실제적인 무언가가 되는 곳은 바로 지역 교회 안이다. 지역 교회 안에서 만나는 실제 상황들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공의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정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동료들을 향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가? 교회에 출석하라내가 거주하는 도시인 워싱턴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정치를 통해 뜻을 실현해보기 위해 이사해온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여기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이익 단체들, 로비 조직들, 조찬 기도회 모임들까지 합하면 워싱턴은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정치 활동이 끊이지 않는 곳이고, 나는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감사할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도 지역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는 자기가 마루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놀기 때문에 자신이 자동차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어떤 정책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짜 자동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어라. 지역 교회에 출석하여 당신과는 사뭇 다른 그 사람, 당신보다 연봉이 훨씬 높은 사람, 혹은 낮은 사람, 아니면 심지어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라. 진짜 정치는 당신의 정치적 견해가 아닌 당신이 내리는 매일 매일의 결정들로부터 시작된다. 진짜 정치는 당신이 공적인 무대에서 뭔가를 지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적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에서 시작된다. 진짜 정치는, 혼자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이유가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를 배워간다. 하나 됨을 향한 이 투쟁 안에서 우리는 공의롭고 정의로운 질서가 어렴풋이 드러내는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이는 열방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Church Life: Our True Political Witnes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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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
복지정책
세금정책
인종문제
난민문제
정치는목회적
칼빈주의의 기원
by John Piper
2019-07-03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완벽하지 않듯이, 존 칼빈(John Calvin)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대에 많은 명성을 얻고 있다. 사실 칼빈이 얻은 명성은 그의 신학적 업적이나 교회사적 성취의 무오성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회 전통에 의해 성경의 본질이 크게 흐려졌던 시대에 그가 말씀의 참 진리를 끊임없이 붙들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1509년 7월,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나 법학과 신학 및 고전학 분야의 최상위 대학에서 교육 받았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기억하는 칼빈의 명성은 그가 21세 때 경험한 극적인 회심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칼빈은 원래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회심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믿는 성경 중심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깊은 회심을 하게 하셨고 또한 이전보다 성경의 진리를 더욱 강하게 붙들도록 하셨다. 이를 계기로 나는 진정한 신앙심을 맛보고 참된 진리를 얻게 되어, 이내 성경 말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되었다. 비록 그때 다른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성경 이외의 여타 학문에 대해서는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졌다”(John Dillenberger, John Calvin, Selections from His Writings). 특히 그는 회심 무렵 홀로 성경을 읽던 중,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경의 구절을 듣게 되고 거기서 그분의 존엄을 알게 된다. 이는 그가 이전에 공부하던 고전학을 떠나 성경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헌신하게 된 분명하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Institutes)에서 성경 말씀의 이러한 위대한 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분명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기독교 강요,' 1권, 8장, 1절). 이후 칼빈은 1564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25년 동안, 제네바 성베드로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과 성경 연구에 온전히 몰두했다. 그는 주일마다 두 번씩 설교했고, 격주로 매일마다 설교했다. 그리하여 평균적으로 두 주에 총 10번의 설교를 담당했다. 칼빈의 설교 방식은 성경 몇 구절을 택하여 설명하고, 이를 다시 사람들의 신앙과 삶에 적용하는 형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 안에서, 그는 성경의 많은 본문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또 전하는 일에 크게 헌신했다. 칼빈은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189편의 설교를 했고, 예레미야로 271편, 레위기로 200편, 이사야로 343편, 고린도전서로 110편을 설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2년 동안의 망명 생활 이후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는 늘 설교했던 성베드로교회에서 다시 말씀을 전했다. 그가 돌아온 후 선택한 성경 본문은 망명 전에 설교했던 그 구절의 바로 다음 부분이었다. 말씀 강해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고조되었고, 이와 더불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는 사실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은 그 확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은 인간의 뜻으로 전달된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다. [중략] 성경은 인간의 뜻은 섞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만 비롯된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듯이 성경의 은혜도 동일하게 입고 있다”(J. I. Packer, 'Calvin the Theologian,' John Calvin: A Collection of Essays에서 재인용). 칼빈이 성경에서 본 것은 결국 하나님의 존엄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성경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나타내는 증거였고,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의 핵심이다.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기독교 강요,' 1권, 7장, 5절). 벤자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칼빈주의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들 뒤에서 하나님의 존엄을 볼 수 있으며, 모든 일을 할 때, 기도로 하나님께 영혼을 드리며, [중략]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가 흔적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사람이다”(Calvin and Augustine). 나 자신도 이러한 모습이기를 원한다.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내 스스로의 생각이나 의지가 흔적이라도 남지 않기를 원한다. 칼빈주의의 정신을 나 역시 이어받아, 오직 성경과 그분의 존엄에 의지하는 내가 되기를 고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영광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그분 자신만 받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의 진리가 온 열방에 퍼지기를 희망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Origin of Calvinism 번역: 정은심
역사
종교개혁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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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파이퍼
목회자여! 교회에 대해 매일 질문하라
by 고상섭
2019-06-28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는 지도자들이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단지 신학교 조직신학에서 배운 단편적인 지식이나 교회 헌법책에 나와 있는 내용 정도를 답습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목회자들이 신학을 공부하지만 ‘교회’와 ‘목회’에 대해 공부해야 할 당위성을 알지 못하고, 방법들을 배운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 배운 것을 목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는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기존의 교회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자신 나름대로 정리하고 분류하였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다양한 지식들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팀 켈러는 교회와 관련된 책들을 교회론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한 책과 실천적 적용을 제시한 책으로 나누고, 실천적 적용에 대한 책들을 다시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는 책들 팀 켈러는 첫 번째로 마크 데버(Mark Dever)의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징'(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 마크 데버는 강해설교, 성경신학, 복음, 회심, 전도, 교인의 자격, 징계, 영적 성장, 교회 리더십이라는 9가지를 통해서 건강한 교회에 꼭 있어야 할 요소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 각 주제에 대해서도 '건강한 교회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마크 데버가 교회에 대해 쓴 '더 처치(The Church)도 있다. 크리스티안 슈바르츠(Christian A. Schwarz)가 쓴 '자연적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은 교회가 건강하면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8가지 질적 특성을 소개하는 책이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 그리고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의 '교회'(The Church)를 소개한다. 특히 팀 켈러는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를 학문적이지만, 어렵지 않은 최고의 교회론 책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이런 책들은 성경 주해에서 시작해 성경적 교회의 특징과 역할을 열거하고, 성경 말씀에 충실하면서도 교리적으로 건전한 책들이다. 이런 건강한 교회의 성경적 표지를 이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복음 사역이 더 생산적이 되려면 그 이상의 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실용적인 책들 두 번째 범주인 실용적인 책들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성경적, 신학적 기초를 놓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는다. 대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특정 스피릿, 프로그램, 목회 방법들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범주의 책은 다시 3세대로 나눌 수 있다. 실용적 교회론 1세대: 피터 와그너, 로버트 슐러의 교회 성장학 책 1970~198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교회 성장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에 의해 쓰인 책들이다. 한국 교회에도 소개가 되어서 활발하게 사역을 했지만 교회의 부흥을 양적 부흥만으로 치부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회 성장학 개론'과 '성서적인 교회 성장' 등이 있다. 실용적 교회론 2세대: 윌로크릭, 새들백 교회이야기 등의 성공한 교회의 실천적 원리를 제시한 책 빌 하이벌스와 릭 워렌 등을 필두로 해서 소개된 성공적인 교회에 대한 간증과 적용을 위한 실천적 원리들을 쓴 책이다. '윌로크릭 교회 이야기'와 '새들백 교회 이야기' 그리고 앤디 스탠리의 '성공하는 사역자의 7가지 습관'과 '노스포인트 교회 이야기' 등이 있다. 실용적 교회론 3세대: 1,2 세대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좋은 교회의 현장을 위한 실질적 조언들을 제시한 책 실용서적의 3세대 책들은 교회 성장을 위한 '이렇게 하라'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들이다. 대개 교회 사역의 핵심개념과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톰 라이너의 '단순한 교회'는 제자도를 핵심개념으로 보고, 팀체스터와 스티브 티미스의 '교회 다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두 가지 중심'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야기 한다. 릭 러소와 에릭 스완슨의 '교회 밖으로 나온 교회' 는 지역사회 참여와 봉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팀 켈러는 교회 성장에 대한 서적들을 두 개의 범주(성경적 교회론, 실용적 교회론)와 실용적 교회론을 3세대로 나누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교회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독서를 통해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팀 켈러는 위의 책들을 읽었지만 한 권을 통해서 목회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각 권에서 한 두 개 정도의 아이디어들을 배웠다고 말했다. 팀 켈러처럼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고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로드맵을 그려보는 것이 좋다. 아니면 팀 켈러의 로드맵을 따라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위치를 정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각 책에서 그 교회의 사역의 마지막 열매보다 그런 결과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라는 과정에 집중하며 읽어야 한다.팀 켈러는 전 세계의 교회들과 사역 단체들이 리디머교회에서 하는 것을 관찰하고 배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감동했지만, 리더미교회의 프로그램을 모방한 몇몇 교회들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교회의 주보까지 모방했지만, 프로그램의 기저에 깔려 있는 신학적 원리들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적 상황과 관점을 반추하면서 그 상황에서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셋째, 신학적 기초와 실용적 방법이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자가 빠지는 위험 중의 한 가지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만을 선호하는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의 기호에 맞는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균형 있는 독서를 통해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신학적인 기초를 놓는 교회론에 대한 책도 읽어야 하고, 또 사역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가 하는 실용적인 서적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학적 기초와 현장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바쁜 목회의 현장 속에서 교회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의 근간을 이루는 작업이기에 너무나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옥한흠 목사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목회자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의 목회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교회사역
팀켈러
성경적원리
신학적기초
실용적방법
목회자
균형있느독서
과정에집중
독서통해로드맵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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