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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뭐가 다를까?
by Jon Nielson
2020-12-09
“이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내 사무실에 와서 앉은 일단의 부모들은 눈물부터 닦았다. 중고등부 목사인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들은 열여섯 살 아이가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가정과 교회에서 올바르게 자란 “선한 기독교인”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더니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 아이들은 교회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다 마쳤고 또 단기 선교 여행까지 갔으며 십대 시절 내내 다양한 사역에서 봉사하던 신실한 아이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신앙 활동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고 내게 찾아온 부모들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교회가 “신앙교육 패키지”를 보내서 그들이 여전히 교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보기에 결코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었다.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계속 발표되는 감당하기 힘든 통계를 볼 때마다 공황과 같은 공포를 느낄 지경이다.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청소년 사역이 잘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양한 보고서를 분류하고 그 속에서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신앙을 “잃은” 아이들을 교회로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쉬운 해결책도 없다. 그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그들의 삶에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역에 참여하는 이십 대 청년들을 교회에서 만난다. 그런 청년들은 뭐가 다른 걸까? 다음 내용은 내가 그런 신실한 청년들을 관찰한 결과이다. 나의 관찰이 청소년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그들은 회심했다흥미롭게도 사도 바울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나 “아주 착한 아이”와 같은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그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는 심성이 아주 착해”라는 식의 호의적인 표현으로 신앙 고백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성경 속 회심과 관련한 증거를 보면 거기에는 흔들림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 중고등부 목회자들은 구원이 진짜 무엇인지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구원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기적이다. 우리는 이제 “착한 아이들”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그만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충실한 예배 출석과 재미있는 수련회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해 아이들의 마음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오로지 회심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설교하고 있을까? 중고등부 목사님들이여, 우리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증거해야 한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아이들의 마음과 영혼에 기적적인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날 때 – 그래서 “옛 것이 가고”, “새 것이 오면”, 불확실함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명목상 기독교인” 그룹을 다루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증거하는 데에 굶주린, 미래의 교회 지도자인 “새로운 창조물”을 가르치고, 제자화하고, 준비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회심한 청소년들이다. 2. 그들은 온전히 되기 위해서 교회에 오지, 재미있게 놀려고 오지 않는다최근 우리는 청소년 그룹의 몇몇 학생들과 “남자들의 날”을 보냈다. 우리는 지역 공원에서 한 시간 동안 농구를 했고, “시카고 스타일”의 16인치 격렬한 소프트볼 경기도 했다. 그리고는 바비큐와 피자, 그리고 2리터 탄산음료를 먹으며 오후를 보냈다. 나는 청소년 사역을 재미있게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청소년 목회자라면 에베소서 4장 11-12절의 말씀을 계속해서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또는 교회에게 교사를 주신 이유는 결코 오락, 격려, 모범, 또는 우정을 위한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성도를 “온전하게 만들어(equip)” 복음 사역을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사역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젊은 신자를 제자화하고, 또 성경 공부를 하도록 준비시키지 않는다면, 설교가 아무리 훌륭해도 나는 사역자로서 소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을 한 이후로는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봉사하고, 인도하고, 가르치고, 성장함으로 신앙을 불태우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무이다. 아이들이 성경 읽기 습관, 성경 공부 기술, 제자 훈련과 기도의 강력한 본보기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들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양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재미있도록 해줬을 뿐이니까. 이제 그런 현실을 앞에 놓고 우리는 정말로 공포를 느껴야 한다. 잠시 청소년 프로그램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우리가 하는 사역이 대학에 들어가 전혀 다른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도 여전히 복음 사역에 열중하는 신실한 학생을 양육하고 파송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정말로 그들을 제대로 준비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돕고 있을 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회 중고등부 모임에 중독된 학생이 아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인도하고, 섬길 준비를 갖춘 성장하는 당당한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를 양육해야 한다.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청소년 사역 전략을 다 내려놓고 열여섯 살 학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 아이와 앞으로 어떻게 사 년을 보내야 이 애가 십 년 후에 최고의 교회 집사, 그리고 훌륭한 6학년 주일 학교 교사가 될 수 있을까?”3. 다른 사람이 아닌 부모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중고등부 목사로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말하는 모든 양육 과제는 나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의 능력으로 회심을 시킬 수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가정에서 내 사역을 열 배로 돕지 않는다면 사역자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힘 있는 기독교인 성인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사역 지향적 사고를 가진 이십 대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그들의 가정에서 복음이 결코 변두리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가진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 사역을 섬기고 이끌고 있는 이십 대의 경우 하나 같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가도록 하는 주체는 부모이다. 그들이 반항할 때 부모는 그 아이들을 징계했고 또 분명하게 책임을 물었다. 또한 그들의 부모는 매일 저녁 식탁에서 성경을 읽는다. 그들의 부모는 엄격하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과의 평화와 서로에 대한 용서의 기초로 삼는 깊은 은혜의 틀 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한다. 물론 이게 공식은 아니다! 복음 중심의 멋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교회를 떠난다. 엉망진창이 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도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찾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과 가정을 꾸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정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성장기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섬기며 가정을 복음으로 온전히 이끄는 부모들로부터 신앙으로 인도받은 아이들은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성장한다. 잠언 22장 6절 말씀이 항상 옳기만 한 공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에서 나오는 좋은 원리를 제공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중고등부 사역자여, 진정한 회심을 위해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학생들을 온전히 양육하라.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부모들이여, 복음을 선포하고 삶 속에서 복음을 드러내도록 하라. 우리 사역자의 성공 여부가 당신들에게 달려있다.원제: Why Youth Stay in Church When They Grow U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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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성장의 큰 그림을 그려주는 신학
by 김상일
2020-12-07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의 원리들을 배워 실천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영속적 변화는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속속들이 배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복음을 늘 섭취하고 소화해 자신의 일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탕부 하나님, 164쪽)신앙 성장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을 알며, 또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은 단지 이론적인 신학적 연구와는 다르며, 아울러 목회적인 상담 테크닉이나 교회 성장론과도 확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신앙 성장의 핵심으로서 1)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아는 것이며, 2)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이 가진 온갖 질문과 욕구, 고민 속에서 복음이란 어떤 소식인지를 그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해주며, 마지막으로 3)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을 안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가진 질문과 욕구, 고민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어떻게 해결 가능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는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성경과 신학 전통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에 대한 이해 또한 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 성장은 그 자체로 성경과 신학 전통을 현대인과 그들이 속한 문화 속에서 전달하고자 고민하는 신학함 즉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필요로 한다. 팀 켈러는 신앙 성장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큰 그림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아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 1)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복음에 대한 집중이다“우리는 복음이 결코 세상에 대한 단순한 종교적 재활 프로그램인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완성된 대안 사역이다. 우리는 복음을 어떤 것(예를 들면 천국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무엇(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복음은 또 다른 종류의 공로 구원(salvation by works)이 되고 만다. 복음은 믿음에 의한 구원이다.” (센터 처치, 57쪽)켈러에 의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여기에 인간이 어떤 기여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복음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 일하심을 믿는다는 말이 삶과 관계에서 어떤 뜻인지를 숙고하고, 또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공로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함의 중요성이 무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면 알수록 행함과 믿음이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복음 자체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켈러는 2006년에 고든콘웰에서 했던 ‘마음에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Heart)’ 강연을 비롯해서, 자신의 모든 저서들과 설교, 강연에서 계속해서 이런 요지의 주장을 반복한다. “만약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말은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서, 복음은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믿을 때 원수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켈러에 의하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견지에서 켈러는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신앙 경력이 오래 되었든 그렇지 않든, 아무도 복음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사람의 마음의 기본값은 종교(=하나님의 수용과 인정을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로 얻어내려는 시도)이며, 복음이 아님을 발견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주된 통찰이기도 하다.) 즉 신앙 성장이란, 복음을 더 온전히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다음의 설명은 그런 켈러의 확신을 잘 드러낸다. “사람들은 구원이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과, 거저 주신 구원의 결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장에서 성도의 노력이 갖는 구체적 역할이나 성질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마르틴 루터가 말하듯,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며 의(righteousness)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노력이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성화는 복음을 충분히 열정적으로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센터 처치, 147쪽)이런 식의 화법은 복음을 믿는다는 말의 무게를 신자들이 실감하게 해줄 뿐 아니라,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인 복음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숙고하게 해준다. 즉 복음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과연 복음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고민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식인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켈러는 이 점을 두고 신앙이 성장하려면 ‘복음이 우리 삶에 더 자주, 더 많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안다는 일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것이다현대인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현대인의 삶을 규정짓는 특징 중에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왜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런 일들의 배후에는 현대인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욕구가 숨어 있다. 자신의 저서 일과 영성에서, 켈러는 현대인이 고민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려는 시도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내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의 행동이란 ‘몸으로 구현해내는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주는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살아내고 있다. 환경을 지키는 따위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대의라든지, 불리한 사회적 신분과 기대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려는 갈망과 씨름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는 한 가정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끌어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들의 편견에 저항해서 저만의 성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한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커다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일과 영성, 196-197쪽)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의 경쟁 구도 속에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얻어내는 일이란 어떤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살아내야 하느냐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복음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온 몸으로 구현해내야 할) 이야기라면,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가. 그에 대해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가슴에 깨달아질 때, 우리는 신중하고도 확실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 구원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사랑과 용납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알게 된다. 복음을 통해 더 이상 우리 정체성의 기반을 성취한 공로들에 두지 않게 되며,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정체성을 갖게 된다.”(센터 처치, 145쪽)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얻는 정체성은 첫번째로 변함이 없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두번째로 내 노력이나 성취와는 상관없는 일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정체성은 당연히 안전하고 굳건하다. 변화될 여지가 전혀 없는, 너무나 확실한 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가. 3) 켈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은 복음에 집중함으로써 경험하는 정체성의 변화로 대변된다켈러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의 변화야말로 바로 우리가 전심으로 복음을 믿을 때 경험하는 바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동기가 변화된다는 말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다는 말, 즉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 켈러의 주장이다. 역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결핍을 원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왜일까. “진정으로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심성에 배여 있던 극도의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존경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후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결핍된 마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가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싶기도 하다. 전심으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 단지 개념일 뿐이라면, 우리는 결핍에 압도당할 것이고, 이 결핍이 우리의 모든 행동 동기가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나 은혜를 조금도 믿지 못할 것이며 마음은 부채 의식 모드인 율법주의로 작동할 것이다.”(센터 처치, 145쪽)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복음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켈러는 디도서 2:12을 읽어내면서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분석한다. “디도서에서는 독자들에게 불경건한 것과 세상적인 욕심에 대해서 ‘아니다’를 말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절제되고 경건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딛 2:12). 당신은 어떤 이유로 불경건한 행동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아니다—그러면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아니다—그러면 내가 속하고 싶은 그룹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과 부요, 행복을 안 주실 테니까아니다—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에 보낼 거니까아니다—그러면 나중에 나 자신이 미워지고 자존감이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 처치, 143쪽)왜 ‘아닌지’에 대한 다섯 가지 동기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악한 것들에서 멀어지고 경건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자기중심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동기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복음이 말하는 모든 요구 사항에 순종하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믿지 않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중 이런 동기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즉 맏아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동기들 위에 경건한 삶을 세우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며, 따라서 복음을 믿지 않고도 충분히 경건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데서 나오는 경건한 삶의 동기는 어떤 모습인가? 켈러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이 모든 동기부여 방식들은 마음의 자기중심적인 욕구들을 사용해서 외부의 규칙에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변화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디도서에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관리를 하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썼다 (딛 2:11-12). 또 바울은 디도서 3장 5절에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비로써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복음이 당신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르친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훈련하다’, ‘단련하다’, ‘일정 기간 코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먼저 당신과 씨름하게 해야 한다. 복음이 깊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이 당신의 관점과 동기의 구조를 바꾸도록 해야 한다. 당신은 복음에 의해서 훈련받아야 하고, 복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센터 처치, 144쪽)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정체성을 제공해주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 동기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바꾼다. 그렇게 변화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복음을 더욱 더 신뢰하고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 분을 따르는 삶, 즉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말하는 신앙 성장의 큰 그림이다.
교회생활
신앙성장
팀켈러
탕부하나님
센터처치
우상숭배
정체성
일과영성
복음
교회는 가족이다
by Megan Hill
2020-12-06
나는 성경적 용어들을 사용하기 훨씬 전부터 ‘형제’와 ‘자매’라는 말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이 전화 통화를 하실 때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반쪽 대화만을 듣고 책을 읽는 데 빠져들곤 했지만, 상대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약간 궁금했었다.대화가 시작될 때 하는 이런저런 수다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화가 조용히 멈추거나 단호한 어조로 바뀌는 시점도 내 관심을 완전히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화한 사람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곤 했었다.부모님이 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방은 분명히 교회 가족 중의 일원이었으며, 그가 병원에서 진단받은 결과에 대해 염려하여 전화를 하든지 혹은 의자를 빌리러 집에 들르던지, 그것은 아마도 내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보라 네 형제요 자매라성경적 용어로 예배에 참석하러 와서 내 주변에 앉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다. 생물학적인 가족의 일원과 같이, 우리가 그들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해 선택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우리 모두는 그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요한이 십자가 사건을 언급할 때 보면,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고 나온다. 그리스도가 그 선언을 하셨을 때, 마리아와 요한은 서로 한 가족이 되었고,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들이 보여주는 모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뵈뵈를 환영하고 도와주기를 바랐을 때, 그는 그녀를 “우리 자매”라고 칭했다(롬 16:1). 베드로가 실루아노를 칭찬하고자 할 때 그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벧전 5:12)라고 불렀다. 바울과 베드로가 온 회중을 칭할 때도 그들은 “형제들”(혹은 “형제자매들”)이라고 불렀다. 우리 주변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사실 우리의 가족이다.가정생활형제자매 관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우리의 깊은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넘쳐나야 하는 심오한 진실이다.이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요삼 1:15), 그들의 관심을 알고자 한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형제의 사랑을 표현하며(롬 12:10), 차별하지 않는다(약 2:1). 우리는 ‘당신이 내 형제자매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여러 방식으로 애를 쓴다.신약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돌보라고 명하고 계신다. 서신서는 특히 형제자매됨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다(딤전 3:15). “서로가 서로에게”라는 여러 명령을 하면서, 서신서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사는 삶은 주일만 아니라 매일 매시간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충성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교회는 우리 편리에 따라 참여해도 되고 거부해도 되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다. 학부모회나 주민회나 혹은 도서관 후원 클럽 등은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다.하나님의 백성은 우리의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다투거나 허영으로 대하지 않는다(행 4:32; 빌 2:3-4). 우리 마음과 문을 열고 식사를 함께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가구와 미소를 전달한다. 슬픔과 시련과 절망을 함께 나눈다. 사랑을 보여줄 방법을 찾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돈과 자유시간이 줄어들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슬픔이 배가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큰 기쁨이 있다는 것도 안다.예수, 우리의 형제교회에 속한 평범한 사람들과 영적 가족으로서 누리는 일상의 기쁨은 궁극적으로 더 큰 것에서 연유된다.우리의 기쁨은 영적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여기시는 그리스도 우리의 형제로부터 온다.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고 말한다. 구속 사역은 광대한 가족 구성원이 점점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제로 보이게 되는 데 의미가 있다.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제자매로 주신 특정한 이들로 기뻐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특이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면서 성품과 행동이 점점 더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그분과 닮아가게 된다. 그분의 영의 사역으로 인해 그들이 그분의 말을 하고 그분의 방식으로 사랑하며 그분의 대적을 미워하며 그분의 거룩을 반영하고 그분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될수록 우리는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며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하는 부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평범하고 연약하며 때로 까칠한 사람들을 그분의 가족이라고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분이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그들을 점차 형성시키시고 언젠가는 그들이 완전히 변화될 것임을 확신하시기 때문이다(히 2:10-18; 참조, 갈4:19). 우리 정체성이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기꺼이 형제로 여기시는 것이다.우리가 교인들과 확실한 관계 가운데 애정이 넘치게 되면, 그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세계를 향해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형제자매처럼 형성되어 가기 때문이다.크리스천 형제자매 안에서 우리는 세계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 말이다.원제: Your Church Is Your Fami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가족
형제자매
영적가족
맏아들
구속사역
교회공동체
예배 회중은 관객이 아니다
by J. T. English
2020-11-30
예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신 걸까? 에베소서 4장에 따르면 그는 하늘로 승천했으며 더 큰 선교와 연합을 위해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지도자를 주신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모두는 몸된 교회 전체가 아닌 직업적 목사(professional ministers)를 우선시하는 사역 시스템을 너무도 자주 만든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은 바른 선교를 위해서는 직업적 목사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필요함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깊은 제자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다름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성숙함으로 성장하는 통일된 교회를 세우도록 초대하는 사역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게 정말 예수님의 사명이라면, 그건 또한 지역 교회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사역은 단지 전문가만을 위한 게 아니다오늘날 교회에 흔히 만나는 이분법은 사역에 있어서 전문가와 아마추어로 나누는 것이다.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의 구분은 전문가(교회에 고용된 사람들)가 성도들과 함께가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커리큘럼을 작성하고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역을 이끌어나간다. 또 성경을 읽고 가르친다. 이것은 교인들이 바라는 방식의 목회자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예배 인도자는 회중을 더 많이 예배 속으로 참여시키는 것보다는 청중을 위한 공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영적 엘리트 전문가들은 앞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과 차별화되는 어떤 종류의 재능, 은사 또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에베소서 4장은 교회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다.한편,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인식하는 그룹도 있다. 그들은 사역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전문가들이 하는 사역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사역 전문가들은 너무도 자주 자신과 아마추어 교인들 사이의 거리를 즐긴다. 그들은 전문가로 인식되는 것을 좋아한다. 또 그들에게는 교인들과의 격차를 해소하도록 만드는 동기부여가 없기에 도리어 그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울이 목자와 교사의 목적, 즉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엡 4:11-12)라고 설명한 내용이 아니다. 목사와 교사 그리고 지도자는 회중을 위해 모든 사역을 하는 게 아니라, “아마추어”가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회중을 섬기고 준비시키도록 부름받았다. ‘아마추어’를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기훌륭한 교사는 자신과 학생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학생들이 더 많이 배우도록 도와줌으로 그 거리를 없애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단순히 훌륭한 선생님을 관찰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더 많이 참여해서 더 배우고 싶어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도록 부름 받은 게 아니라, 그들을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 에베소서 4장은 교사, 사역자, 그리고 목사를 부르신 목적은 교회 사역을 교인들과 함께 하도록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관객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는 사역에 참여하는 교인을 원하신다. 바울은 교회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모든 사람을 사역에 초대하는 것이지, 단지 일부만을 위한 게 사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교회에는 사역을 하는 특별한 그룹이, 또 사역 소명을 받는 특별한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교인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모든 교인이 다른 지체의 사역의 수혜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많은 지체를 가진 하나의 몸이고(고전 12:12), 리더는 그 지체 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다. 깊은 제자도를 가진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교회는 교인 모두가 사역에 참여하도록 촉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원한다. 성숙을 향해서에베소서 4장은 또한 모든 교인이 성숙, 즉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역 철학에서 발견하는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의 성숙이 지역 교회 밖에서, 그러니까 온라인 사역, 대규모 회의 또는 사적인 헌신을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지역 교회야말로 성숙함을 키워내는 중요한 장이다’ 라고 주장한다. 지역 교회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엡 4:13). 그리스도의 몸과 각 지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깊은 제자도는 당신과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바쁘게 사역하자제자도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면, 우리의 모든 사역 노력은 그 목표를 향해야 한다. F. F. 브루스(F. F. Bruce)가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백성이 목표로 삼아야 할 표준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미치지 못하면 한 몸이 된(corporate) 그리스도도 그 분량에 도달할 수 없다.”성숙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헌신하셨던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엡 4:13)에 도달할 정도로 “자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가 서로 서로 도와 그 일을 이루길 원하신다. 그러니 우리 이제 서로를 위한 사역에 바쁘게 힘을 쏟자. 원제: A Congregation Is Not an Audie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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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안식일 원칙이 영혼을 살린다
by Justin Huffman
2020-11-18
토론토에 있는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은 우리 가족은 작년에 이사를 갔다. 나는 첫 예닐곱 달은 교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대신 주로 교인들을 이야기를 듣겠다고 말했다. 장로, 직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와 함께 심방할 때 마다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영혼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고 느낍니까, 아니면 점점 더 말라간다고 느낍니까?”거의 100%의 교인이 “말라가요”라고 대답했다. 스스로를 혹사하면서까지 너무 열심히 사역하기혹시 교회나 가족이나 당신 자신이 반복적으로 너무도 지나치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닌가? “그래도 우리 교회 정도면 이런 건 해야 해.” “우리 애들이 그래도 이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어야지.” 또는 “이걸 완수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쉴 수가 없어.”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왜 모든 복음 사역이 우리의 노력과 스케줄에 달린 것처럼 살고 있을까? 몇 개의 스포츠와 음악 레슨을 받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밤에는 소그룹 모임에 봉사자 저녁 식사, 그리고 새 신자 커피 봉사 등등. 물론 그 어떤 일도 그 자체로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의무들이 차고 넘쳐날 때 영혼이 지치고 고갈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이런 현실이 지금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막 2:2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료한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기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는 원칙은 비록 오늘날 그 원칙과 정반대로 사는 교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신성하고도 탁월한 계시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담이 혼자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와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가 고갈되고 지친 가운데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 문제는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이 원칙을 따르는 데에 우리가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변치않는 원칙칠 일로 이뤄진 일주일은 달력 속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자연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로 주어진 원칙이다. 십계명보다도 앞서 나온 이 원칙은 그럼에도 네 번째 계명에도 등장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신약 시대 신자들이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구약 시대 신자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안식일의 원칙이 신약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안식일을 직접 지키심으로 그 가치를 확인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떠받치는 원칙,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지정하신 결혼의 원칙처럼, 사실상 율법 그 자체보다 더 우선시된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다.우리는 더 이상 구약에서 했던 것처럼 동물을 희생하거나 돼지고기를 금지하지 않는다. 또한 특별한 절기 의식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신자들은 십계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것은 안식일 준수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을 담은 창조 명령(ordinances)을 따르기 위한 노력임을 의미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구약 시대 이후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토요일이 아닌 한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요 20:19, 행 20:7, 고전 16:1-2) 그날을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내는 이다른 율법들처럼 안식일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을 만날 수 있다. 달리 말해 안식일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향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위대한 구원을 만나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그 어떤 휴가도,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또는 소셜 미디어로의 도피도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영혼을 위한 유일하고도 참되며 사라지지 않는 안식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 그가 주시는 은혜와 가르침에 순종할 때에만 찾을 수 있다. 데인 오틀런드(Dane Ortlund)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안식일이라는 그림자가 가리고 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내신 분이다. 그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미친 듯 뛰는 심장박동 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도록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그 어떤 외부 환경도 그가 주시는 안식을 위협할 수 없다.” 안식의 확인지나치게 바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 공급하려고 노력하는 게 된다. 아예 전능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식일에 누리는 휴식은 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기적이고 시기적절하게 상기하도록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 세계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일종의 강제적인 안식일이 찾아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에 따른 격리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열광적이고 빠르게 추구하던 속도를 늦추고 우리가 그리스도라 믿고 있는 그분을 더 의지하는 방식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일정을 잡거나 전략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 스스로를 하나님 속으로 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하는 실생활의 일상적인 구원 속으로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쁜 게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 자신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부흥할 수 있는 원칙을 계시하셨다. 안식일 원칙은 단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규칙이 아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이다. 우리는 이런 안식일 원칙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오늘날 안식일 지키기그럼 오늘날 안식일의 원칙은 어떤 모습일까?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보다는 “지켜라”라는 안식일의 원칙은 다름 아니라 안식일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이다. 특별한 팬케이크를 만들고 또 가족과 함께 주일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신뢰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하는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의 다양한 지체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의 활동은 당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끌어 결국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자비의 행위를 포함한다.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최소한 다른 모든 도모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축복을 말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삶 속에 정기적인 안식과 재충전 그리고 예배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일요일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매주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정기적으로 영혼에 안식을 제공할 수 있다. 안식일이 어떤 요일이 되었든지, 지금까지 설명한 원리를 사용하여 당신과 가족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또한 그 누구보다 당신은 안식이 필요한 존재이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간구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abbath: An Enduring Principle For the Sou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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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보호하며 교회 개척하기
by 박용기
2020-11-17
팀 켈러(Tim Keller) 목사가 리디머 교회 개척 3년 차에 겪었던 일이다. 하루는 아내 캐시가 발코니에서 혼수로 사 온 그릇들을 망치로 깨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잖아요. 지금처럼 계속 일만 하면 집안이 콩가루가 될 판이란 걸 알기나 해요? 나로서는 당신을 정신 차리게 만들 방도가 없어요. … 이게 바로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이라고요”(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두란노). 많은 교회 개척자들은 모든 에너지를 교회 사역에 소진하면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경험한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관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자신을 내어 주심을 근거로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워지며, 동일한 원리가 가정에도 적용된다(엡 5:25,27). 교회 개척자들이 교회와 결혼 생활을 함께 세워나가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배우자와 잡담을 나누라 앤디 스탠리(Andy Stanley)는 교회 개척자들에게 결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은 잡담을 선택해야만 합니다.”라고 조언한다(It’s Not Personal, Brian & Amy Bloye). 배우자와 심각한 이야기보다 소소한 작은 일들이나 잡담을 나누라는 의미이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읽은 책, 본 영화 그리고 영적 주제들에 대해서 짧게라도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나눌 때 친구가 될 수 있고, 영적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둘이 아니라 하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은 더 이상 혼자서 개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편은 전체의 반쪽에 불과하다. 그가 하는 일에는 항상 나머지 반쪽이 참여해야 한다.”(그리스도의 결혼생활, 생명의말씀사). 결혼은 2인3각 경기와 같다.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함께 외치며 한발 한발 내딛을 때 빠르게 전진할 수 있다. 마귀는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자 분리되어 존재하도록 부추기거나 한쪽만 열심히 뛰다가 넘어지게 만든다. 끝까지 함께 하는 관계팀 켈러는 교회 개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주님은 결혼을 인간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계로 세우셨다. 만약 당신이 결혼이나 배우자를 출세 가도에 필요한 지팡이쯤으로 여겨서 2-3번째 우선순위에 놓았다면 당장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남편에게 아내는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1순위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도 하지만 떠나기도 한다. 자녀들도 장성하면 제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난다. 목회자도 언젠가는 개척한 교회를 떠나는 날을 맞이한다. 그러나 배우자는 다르다. 배우자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하는 사람으로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인간관계에서 배우자를 항상 1순위에 놓자.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자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은 그의 책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생명의말씀사)에서 배우자가 느끼는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찾아서 그 언어를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① 인정하는 말 ② 함께 하는 시간 ③ 선물 ④ 봉사 ⑤ 스킨십. 교회 개척자는 교회 사역을 위한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배우자만을 위한 것도 준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봉사를 사랑의 언어로 느끼는 아내를 위해서 군대 내무사열 준비하듯이 집안 곳곳을 정리 정돈해보자. 스킨십을 원하는 남편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준비해보자. 서로 이런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면 기쁨으로 결혼 생활을 채울 수 있다. “…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일주일에 하루 쉬자하나님은 천지 창조 사역을 쉼으로 완성하셨다. 하루 안식하신 이유는 피곤하시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교회 개척자들이 사역을 멈추고 쉼 가운데 가만히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 가정을 세우시는 주님을 묵상하기 원하신다(출 20, 신 5). 일주일에 하루 사역을 쉬는 것은 교회 사역에 열심이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목회는 단거리 전력 질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배우자와 함께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서 둘 만의 대화 시간을 보내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자교회 개척자가 최선을 다해서 3년, 5년, 10년을 사역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목회자가 내가 이룬 사역과 교회 개척 결과에 의존해서 자신의 목회를 평가하게 되면 패배감과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이 누적되면 동료 목회자의 부흥 소식이 들려올 때,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하나님 왜 나에게는 그런 부흥을 허락하지 않으시나요? 왜 나만 이런 곳에서 사역하게 하시나요?” 이런 쓴 뿌리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든다. 목회자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사역을 평가해야 한다. 예수님은 작은 능력을 갖고도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충성한 빌라델비아 교회 목회자를 칭찬하셨다(계 3:8,10). 예수님은 교회 개척자들에게 성공보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배우자와 함께 바라보며 주님을 신뢰할 때 비록 작은 교회에서 적은 능력을 갖고 사역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충성할 수 있다.
교회개척
가정
배우자
팀켈러
결혼을말하다
마틴로이드존스
그리스도의결혼생활
스킨십
결혼생활
목회자
공동체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절
by Megan Hill
2020-11-15
어린 시절부터 교회의 절기 행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례 행사는 추수감사절이었다. 내가 이때를 좋아하는 이유는 맛있는 파이(아이들이 테이블에 달려들어 몇 조각을 먹었는지 셀 수도 없는 맛있는 사과와 호박과 초콜렛 크림이 들어 있는)나 교회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신나는 불꽃 때문이 아니었다. 달달한 과자로 들떠 있는 친구들과 싸늘하고 컴컴한 뒤쪽 복도를 따라 뛰어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때문도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하는 학기 중인데도 잠자리에 들 시간을 늦춰준 약속 때문도 물론 아니었다.나는 아보카도 색의 플라스틱 의자를 당겨서 피아노 주변에 반원으로 둘러 앉고 목사님이 감사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눅가 먼저 시작하겠냐고 물었던 그 순간을 좋아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누군가가 일어나서 “올해에 새 직장을 주셔서 세금을 낼 수 있고 저의 재능을 사용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저는 올해에 항암치료가 잘 진행되어 증상에 차도가 보일 수 있게 되어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바로바로 일어나서 혹은 때로 자리에서 머뭇머뭇 이야기하곤 한다.어린 아이였지만, 나는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특권을 귀중하게 여겼다. 해마다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 대한 감사, 목회자와 교사들에 대한 감사, 신체의 치유와 가족의 화해에 대한 감사, 죄를 이기게 하심에 대한 감사와 값없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 표현을 듣곤 했다.이 기회를 기다려 임신이나 결혼 언약을 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항상 놀라는 순간들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소천한 신실한 성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순간도 늘 있었다.그 행사가 끝날 때, 교인들은 의자를 제 위치로 돌려놓고 벽난로의 재를 긁어모아 불꽃을 끄곤 했다. 끈적끈적한 빵 부스러기 파이 접시를 가져다 놓았다. 코트 소매에서 벙어리 장갑을 빼내고 뻣뻣한 부츠를 잡아당겼다. 서로 껴안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추위 속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감사를 나눔으로 따뜻해졌다.감사를 드리자최근에 감사라는 주제는 인기를 얻고 있다. 감사는 베스트셀러의 주제이자 예쁜 밈의 대상이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정신 건강에서부터 더 나은 수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한다고 한다. 내 친구들은 대다수 개인적으로 감사 일기를 쓰고 있으며, 평생 크고 작게 받은 자비에 대한 감사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우리가 감사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기쁘지만 개인적인 감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감사의 중요한 차원을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것처럼 감사절 예배는 공동체의 일이 아닌가라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감사절 행사는 단지 봉투에 봉인되어 수취인 하나님만 읽을 수 있도록 감사카드를 보내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감사절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사이다. 감사는 귓속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귀에 들리게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시 66:5)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다.요즘 우리는 교회 예배에서, 가족 간의 식탁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대화에서 대중적으로 감사할 기회가 있다. 그런 기회가 되면 감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요청받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묻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감사를 서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큰 특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하나님께 감사하라세속 사회에서 감사절은 종교를 초월한 축일이거나 심지어는 종교를 기반으로 선택된 공휴일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감사가 단지 마음으로만 가득하게 간직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진정한 감사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모두 다 내려 주시는(약 1:17)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감사를 표현할 때 우리는 그분을 높이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선포하며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한다. 감사는 특별히 함께 표현하도록 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시편 136편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절)시편 136편은 공동체적 감사를 촉구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함께 영광을 돌리도록 초대한다. 승리한 스포츠 팀의 팬이나 승리한 정치 후보의 지지자처럼,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공동으로 목소리를 높인다.듣고 기뻐하라다른 이들에게 우리의 감사를 듣게 하고 그들도 그리하게 하면 우리 마음은 서로 감사로 고무된다. 다른 시편에 나온 다윗의 감사 시를 보자.“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시 34:1-3)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면서 다른 이들이 “듣고 기뻐하게” 하면 그들이 함께 찬양을 돌릴 수 있도록 격려한다. 가족이 함께 감사절 식탁에 둘러 앉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도 자비하심에 같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우리 혼자서는 감사하기가 쉽지 않지만 공개적인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경건하지 않는 사람들의 길로 우리가 표류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다른 이들의 공개적인 감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상기하도록 도와준다.모두 함께 즐거워하라마지막으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감사드리는 것은 크리스천의 연합을 격려한다. 교회의 감사절 예배에서 우리가 더 영적으로 충만해졌을 때는 새 가정이 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감사가 더해졌고 사소한 축복에도 교회의 하나됨을 표현할 기회가 되었다.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고 말한다.교회가 종종 시기와 갈등으로 좀먹었을 때, 공개적 연합 감사절 행사는 다른 이들로 인한 기쁨을 누릴 기회가 되며, 주님의 친절하심에 그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으며, 한 교인에게 주신 복이 교회 전체의 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한다.우리가 함께 감사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iving Thanks Is a Community Project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추수감사절
교회절기
공동체
공개된감사
감사절행사
어느 레위인의 고백
by Justin Loans
2020-11-12
이달 초 따뜻한 일요일 아침, 나는 두 딸과 함께 교회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길을 건너 교회 건물로 향하는 옆길로 들어섰을 때, 긴 수염에 초라한 셔츠를 입은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 불쌍한 참전 용사를 좀 도와줄 수 없습니까?”기왕이면 그 노인에 대하여 극적인 변화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그 노인과 함께 예배하기 위해 교회로 데리고 갔고, 예배 후에 그는 여러 명의 집사를 통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게 되었다. 또한, 그 날 교회 방문에서 느낀 사랑과 환대 덕분에 그는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되었고, 숙소를 제공하며 중독을 상담하는 지역 기관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내게 소리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행여 그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여 나는 바닥만 보고 걸었다. 교회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집도 없고, 보나 마나 정신 질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 딸들의 안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요즘이 어떤 상황인가? 코로나 시대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접촉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내 변명을 다 쓰려면 하늘을 두루마리도 삼아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날 교회 뒤편에 앉아서 내가 한 행동은 예수님이 말씀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2).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고도 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에게서 도망쳤다.레위인으로 가득한 교회?내 이야기가 많은 기독교인에게 모두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리고 일상을 살아간다. 최근 들어서 나는 그런 경향이 더 커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미국은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글을 썼다(사 58:10). 차머스 센터(Chalmers Center,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에서 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상처를 주지 않고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 올해 들어서 나는 이런 식의 대화를 많이 나눴다. “경제가 붕괴한 후 많은 사람이 교회에 기부했어요. 그런데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기부받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거죠?”목회 전략에 관한 보다 긴 대화라는 맥락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실업 문제나 재정적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10~15%가 실직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서구의 복음주의 교회는 교인들이 다 레위인으로만 채워진 것일까? 우리는 사실상 반대편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립시킨 건 아닐까? 교회가 물질적 빈곤이 가져다주는 현실에 지금보다 더 밀접해질 수만 있다면,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비와 장기적인 관계 접근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제공할 것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분명한 성경적 명령에 직면한 우리는 오히려 혼란과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아픈 사람을 도울 때(When Helping Hurts’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차머스 센터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브라이언 피커트(Brian Fikkert)는 차머스 센터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인 서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교회 중심의 저축 및 소액 금융을 통해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고향인 테네시주 채터누가(Chattanooga)에선 극히 소수의 사람을 돕는데 그쳤을 뿐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피커트는 이렇게 말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채터누가의 교회는 대부분 중산층 또는 상류층이 다니는 곳이에요.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 물질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돕지요. 그런데 서아프리카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해요. 달리 말해 그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과 사역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죠.”되찾아야 하는 사랑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 몇 가지 제안이 있다. 교회가 더 넓은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더 큰 비전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성경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윤리적 명령을 더 찾아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적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찾고 적용하도록 하자.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 2: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 3:18). 모세의 율법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윤리적 명령이 들어있음을 기억하라.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 겸손함을 잃지 않는 동시에 의도성을 가지고 사회 경제적 경계를 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라.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회적 계층화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큰 장애물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가치 판단이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 우월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경우에 그 장애물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계속해서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천히 하라. 천천히 움직이라.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교회 웹 사이트에 올리는 인증 사진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관계 그 자체이다. 이를 통해서 대다수에 해당하는 백인 교인들은 흑인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피커트가 말했듯이 빈곤한 현실에서 서로를 돌보는 세계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빈곤과 지역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을 찾아라. 물질적 빈곤이라는 뿌리에서부터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는 곳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차머스 센터가 하는 사역의 핵심이다. 짧은 글을 싣는 것에서부터 온라인 과정 진행, 소그룹 연구를 통해서 관계 개발 사역에 깊이 파고드는 커리큘럼에 이르기까지, 차머스는 바로 그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역을 하는 게 차머스 혼자가 아니다. 룹톤 센터(Lupton Center)와 기독교 공동체 개발 조직(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Organization)과 같은 조직은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이웃 치유를 위한 자원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Love In the Name of Christ (LoveINC)와 같은 파트너는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와 커뮤니티 조직을 하나로 모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마지막 말: 회개교회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교회가 오랜 기간 안락함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가족 프로그램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웃들로부터 고의적 혹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분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닌 동정과 경멸의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본 것도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은 주일 아침에 내가 참전 용사를 외면한 것과 비슷한 수천 가지의 작은 일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 결과 교회는 인류가 겪는 일반적인 고통을 향해 거의 눈을 감아버린 곳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사역 모델은 교외 부유층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세상의 고통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며 죄의 무게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신성한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사 53장; 빌 2장; 고후 8장). 우리는 왕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 위험, 불편함에 기꺼이 ‘나’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평안과 안락함을 우선시하고, 문화와 계급, 정치 또는 신학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비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더 통렬한 회개이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돌려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눅 3:8).원제: Confessions of a Levit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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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를 공부할 때 흔히 갖는 질문 3가지
by 김상일
2020-11-09
얼마 전 팀 켈러를 공부하는 목회자들 모임에 참여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최근 한국 교회 안에 팀 켈러와 그의 신학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신학생이나 목회자들, 그리고 기독교 서적을 즐겨 읽는 성도들 사이에 그의 저서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모임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켈러가 구사하는 논리나 언어, 논증 방식이 그가 최근까지도 목회하고 사역했던 뉴욕 맨하탄 지역의 사람들에게 상황화되어 있는 까닭에 많은 분들이 한국적 상황에서 켈러의 주장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좀 애를 먹는 것 같다. 필자가 처음 ‘팀 켈러의 중간 지대 신학하기’라는 주제로 TGC코리아에 글을 연재하기로 했던 목적이 사실 이런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여전히 한국의 상황 속에서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을 적용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앞에서 언급한 목회자 분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나왔던 질문들 중에서 세 가지를 골라서 나름대로 답을 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면 좋겠다. 1) 팀 켈러는 너무 탁월해서 일반 목회자들이 따라가기가 너무 어렵다?팀 켈러는 여러 면에서 일반 목회자들을 상당히 움츠러들게 하는 인물임에는 확실하다. 그의 독서량은 가히 신학자 수준에 필적할 정도이며, 그의 깊은 사고와 창의성은 일반적인 목회자들이 흉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켈러의 글을 읽다가 “내가 켈러처럼 하려고 하는 건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는 격인 것 같다”는 생각에 제풀에 포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팀 켈러가 자신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팀 켈러는 이렇게 얘기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영향력 있는 사역을 경험하고서는, 그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다른 세계에 가져다가 전혀 변화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45분 동안 한 절 한 절 강해하는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면, 또는 특정한 형태의 찬양 사역에 은혜를 받았다면, 또는 특별한 예배 순서나 시간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아주 자세한 세부 사항까지 그대로 복제한다. 그들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방법론 중심, 프로그램 중심이 되어 사역 방식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 곧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상황화하지 않은 것이다.”(센터 처치, 206쪽)그렇다면 켈러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점은 켈러가 하는 말을 모두 숙지하는 것도, 켈러의 교회 운영 방식이나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도 아니다. 켈러처럼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일 필요도 없다. 다만 켈러가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지역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는 작업을 위해서 자신의 사례를 참고하라는 것이다. 켈러는 신학적 비전을 ‘복음에 대한 충실한 재서술’이라고 정의하며, 각각의 문화적, 시대적 상황마다 복음은 새롭게 재서술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학적 비전은 각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기 위해서 물어야 할 다음 여덟 개의 질문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답하는 방식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 복음을 현대인의 마음에 다가오도록 제시할 것인가?• 문화는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문화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대항하면서 소통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도심, 외곽, 신도시, 시골 등) 우리의 지역적 위치가 우리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공 영역과 문화 생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참여할 것인가?• 교회 안의 다양한 사역들 (말씀, 봉사, 공동체, 교육 등)을 어떻게 상호 연결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혁신적이며,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도시와 지역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센터 처치, 28쪽)이 여덟 개의 질문들에 답하는 일은 굳이 켈러처럼 지적인 탁월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각각의 목회자들이 자신이 목회하는 지역과 문화의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 이 질문들에 대답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면 된다. 그리고 켈러는 자신이 하는 얘기들을 그런 작업을 할 때 참고하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목회자들이 켈러는 너무 똑똑해서 따라하기가 벅차다는 생각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2) 팀 켈러는 너무 논리가 강해서 논리보다 정서가 더 강한 한국 사람들에게 잘 맞지 않는다?팀 켈러는 논리가 강하다. 그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면이 자칫 잘못하면 한국의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켈러가 말하는 것들이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벽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도시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 특별히 젊은 세대 중에는 켈러가 사용하는 논리를 어렵지 않게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만약 켈러의 논리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면, 왜 한국 교회에는 그토록 켈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성세대들에게 켈러가 하듯이 논리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식으로 사역할 경우 소통이 막히는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 또한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팀 켈러가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 분께서 팀 켈러처럼 도시 지역에 특화된 목회자의 신학적 비전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켈러의 강한 논리 또한 그대로 가져오고자 한다면, 그 목회자는 결코 자신이 속한 지역을 위한 목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켈러는 뉴욕 맨하탄 지역의 문화적, 지역적 정서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목회 스타일에서 논리가 상당히 강해지도록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특화시켰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면보다는 정서적인 면이 더 강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해서 목회하는 목회자 분들은 반드시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지적인 욕구, 정서적인 욕구, 관계적인 욕구 등등의 욕구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문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큰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그 말은 정서적인 욕구가 강한 지역이나 문화권에 산다고 해서 지적이고 논리적인 부분을 경시해서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요는, 목회자들은 어떤 지역에서 목회를 하더라도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문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팀 켈러가 인간과 문화에 대해서 그리는 그림은 어떤 지역이나 문화권에서도 복음을 상황화함으로써 나름의 신학적 비전을 만들어가는 목회자 분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 물론 팀 켈러의 그것만 참고할 필요는 없다.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면서 도움이 되는 책이나 자료들은 누구의 것이든 참고하면 된다. 3) 팀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안 한다?얼핏 보면 팀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언급을 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센터 처치 652-674쪽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한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사람들이 복음을 깊이 깨닫게 되고, 복음을 믿게 되는 일, 즉 그가 말하는 복음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일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켈러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핵심에는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복음이 연결하고 소통시켜주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라는 점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만약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믿기 시작하면 좋은 공동체, 서로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교회 공동체 세우기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사역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을 여전히 배우고 깨달아 가야할 사람들에게도 복음적인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기가 어렵다. 이런 면에서 켈러는 특히 교회 바깥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 복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복음 부흥이 일어난다는 말은, 이제껏 복음과 도덕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특정한 정당과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던 기성 신자들이 복음이 가진 능력을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서 교회 안에서 생기는 변화를 가리킨다.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을 직간접으로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이해를 새로 교회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에 깊이 뿌리내린 공동체, 바깥 문화와도 힘있게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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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처치가 온다
by 김선일
2020-11-04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일반교회와 가정교회(6~12명의 소그룹으로 매주 모여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의 교제를 했는지에 대한 비교 항목이 나온다. 일반교회는 카톡/문자(65%), 온라인 교제(41%), 전화 통화(37%)가 가장 많았던 반면, 가정 교회는 카톡/문자(62%)와 전화 통화(39%)는 일반교회와 비슷한 반면, 온라인 교제는 62%로 훨씬 높게 나왔다. 주목을 끄는 점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대면 모임(일대일 만남, 작은 소그룹 등)에 있어서 가정교회는 68%의 경험을 한 반면, 일반교회의 25%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전체적으로 방역조치로 인한 제한적 상황에서도 소모임 형태의 가정교회는 일반교회보다 한층 다양한 방식으로 교제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코로나 상황에서 가정교회 성도가 일반교회 성도보다 더 활발한 경건생활을 하였으며, 헌금 감소의 타격도 가정교회가 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지난 글에서도 주장했지만, 필자는 앞으로 사람들의 관계와 공동체 유형은 더욱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작은 모임이 될 것이라고 본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방역 통제가 가능한 규모여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인간관계를 맺는 규모에 있어서 이전보다 개인적이고, 의미 있는 소수로 좁혀지고 있다. 엠브레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무의미한 관계의 확장 및 유지보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에만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결과가 나왔다(Trendmonitor 2020년 9월 24일자 리포트). 새로운 관계를 많이 만드는 오지라퍼가 되기보다는 가족과 친구 중심의 관계에 더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서적 변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다 짜놓은 소그룹에, 잘 모르고 편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어색한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를 당연시 여기고 무조건 용인만 해줄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낯선 자를 환대하며(신 10:19, 눅 10:25-37) 선한 이웃이 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나 선교 사역은 사람들이 있는 현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있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맞는 접촉을 하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의 비전을 갖고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소모임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들은 원래 초기 교회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당시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5절) 외에도 아리스도블로의 권속(10절, 나깃수의 가족(11절), 아순그리스도와 불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마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14),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15) 등의 4개의 공동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모두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 속한 모임들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로마 내에서 간헐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신앙의 연결은 가지면서도 평소에는 따로 모였던 모임일 것으로 추측한다(로버트 뱅크스의 ‘바울의 공동체 사상’, IVP, 72-74쪽). 이는 바울이 로마서 16장 7절에서 단일한 교회를 언급하지 않고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는 표현을 쓰거나, “너희가 거룩하게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며 서로의 교제를 권하는 것에도 암시된다. 위와 같은 모임과 관계의 소규모화에 비추어 흥미로운 기독교 사역의 형태는 ‘마이크로처치’(microchurch) 현상이다. 마이크로처치는 공식적이거나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일상의 작은 만남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서로 공감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족, 이웃, 공통적 삶의 이슈, 관심사 등을 토대로 5명 내외의 (예수님 말씀처럼 2~3명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정기적 교제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초 소규모라고 해서 반드시 그 한계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모임이 분화될 것인지는 구성원들이 의논해서 결정하면 된다. 미국 플로리다주 템파(Tampa, Florida)에 위치한 언더그러운드(Underground) 교회는 200개 이상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그 안에는 지역에서 이웃과 만나는 모임부터, 선생님들의 모임, 간호사들의 모임, 싱글맘 모임, 대학생들의 모임과 같은 다양한 마이크로처치들이 있다. 필리핀과 미얀마의 마이크로처치들도 이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중앙 통제적이고 집중적인 교회 구조가 아니라, 허브(Hub)라고 불리는 ‘코워킹’(co-working) 공유 공간만 있을 뿐이다. 중앙에서부터 소모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소모임들이 공동의 신앙고백과 사명으로 확장되어가는 형태다. 또한 워싱턴주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서 시작된 소마(Soma) 운동 또한 마이크로처치들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소마는 마이크로처치라는 용어가 아니라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ies)를 사용하지만, 그 사역의 유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 생활 공동체, 공립학교 교사 공동체, 시니어 공동체, 이슬람 선교 공동체 등 수백 여 개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는 주로 주중에 선교적 공동체 모임을 갖고 주일에는 연합 예배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 뿐 아니라 그들의 사명이 주중 선교적 공동체 모임에 있다.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 선교 운동인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 of the Church)은 파이오니아(Pioneer)라 불리는 사역자들을 훈련하고 양성한다. 파이오니아는 제일 먼저 1)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2)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2) 정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3)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 4) 교회로 발전하는 계획을 실행하게 한다. 이 운동은 지난 10년 이상의 실험적 사역을 통해 영국에서는 가장 건강하고 거의 유일하게 실질적인 전도와 교회성장을 이루고 있다.마이크로처치는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선진화된 사역의 모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우리의 현장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수 있다. 판교에 있는 심플교회는 약 10년 전 한 평신도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 집사 부부로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지인을 위로하고 영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그 지인이 다른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을 소개하면서 규칙적인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정례화되자, 모임의 리더는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일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제는 신앙 공동체와 기독교 대안학교 사역을 겸하는 모범적인 교회로 자립하였다. 꼭 마이크로처치로서의 정체성을 갖거나, 위 사례들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힌트는 미래의 교회 및 선교 사역이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가족, 이웃, 관심사, 취미 등이 의미 있는 신앙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뜻밖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근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불안과 탄식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눅 10;2)라고 하셨건만, 우리는 ‘추수할 것은 적고 일꾼은 많다’고 탄식하는 현실이 아닌가. 우리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 일상에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많은 잠재력 있는 관계들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진실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갈구하는 심령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신 선교명령은 때로 ‘멀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그리고 더욱 깊이’ 가야 할 과제일 수 있다. 임박한 마이크로처치 현상은 그와 같은 가능성과 소명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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