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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에 비대면 예배는 어떻게 해야 할까
by Jay Kim
2021-04-11
작년 초에 코로나가 발병한 이후 처음으로 다음 주에 나는 가족을 떠나 며칠 간 타지로 갈 예정이다. 물론 여행이 가져다주는 과거의 평범함에 감사하면서도 또한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하나는 가족을 몹시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런 그리움은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지만, 과연 코로나 시대인 지금은 얼마나 더할지 궁금하다. 평소처럼 우리 가족은 매일 페이스북으로 영상통화를 할 것이다. 나는 이 점에 감사한다. 적어도 서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선물 속에 숨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갈망이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 상호 작용할 때 우리 속에서는 아날로그가 주는 재결합에 대한 열망이 더 깊어진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함께하는 그 순간을 더 그리워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는 정확히 일 년 만에 처음으로 대면 예배를 한다. 물론 비대면 예배에도 나는 항상 감사했다. 그러나 이번 어려움을 겪으면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실체적인 존재에 대한 깊고도 본능적인 열망의 재확인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조금씩 서로의 얼굴을 보는 물리적 형태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인이 예전처럼 다 출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면 예배로 모이는 교인들은 다들 하나같이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은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 비대면 예배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 걸까? 아날로그 교회가 꾸준히 복귀하고 있는 지금, 디지털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오해받는 예배교회에서의 예배 생활은 항상 참여를 통한 것이었다. 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는 똑같이 몸 전체가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몸을 굽히고, 엎드리고, 또는 손에 키스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 등을 의미한다. 성경적 예배는 경배와 충성의 구체화된 표현이다. 여기에는 찬양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결코 예배가 찬양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예배의 의미 속에는 오늘날 기독교 예배의 일반적인 관행처럼 되어버린, “가끔씩 흥얼거리면서 무대에서 찬양하는 가수를 보는 것”은 결코 담겨있지 않다. 지난 해 특히 눈에 띄게 등장한 온라인 교회학(online ecclesiology)은 이런 오해를 더욱 부채질했다. 예배를 전달하는 수단이 엔터테인먼트를 전달하는 수단과 같아짐으로 평소에도 단지 교회에 참석만 하던 교인들(churchgoers)은 급속도로 스스로에게 방관하는 소비자 정체성을 고착시켰다. 물론 2020년 3월 이전에도 참여하는 예배와 수동적인 예배 사이의 갈등은 존재했지만, 최소한 매주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서로 접촉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제 예배자는 그냥 편하게 앉아서 버튼을 누르면서 예배 콘텐츠를 소비하는, 고립되었지만 마냥 편안한 청중으로 점점 더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하이브리드 예배디지털 교회와 온라인 서비스의 미래를 고민할 때 우리는 매체의 단점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미래는 최소한 얼마 동안 하이브리드(혼합) 형태가 될 것이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가까운 장래에 다시 대면 예배로 돌아올 준비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면 예배 참여를 독려할 때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온라인 예배에도 동일한 수준의 중요도(urgency)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제 단순히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가 비대면 예배 중에도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어서게 하고, 무릎을 꿇게 하고, 손을 들게 하고, 기도로 응답하게 하며, 잔과 빵으로 성찬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예배자가 구경만 하는 관중에서 참여자가 되도록 만드는 아주 기본적인 초대가 될 것이다.예배자가 수동적인 방관자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 진행을 창의적이고 신중하게 만드는 문제는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온라인 예배가 계속되는 한 교회는 디지털이 결코 모두에게 다 편리함을 주는 옵션이 아니라 단지 일부에게만 필요한,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예배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는 대면 예배라는 점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함께 모여 기쁨을나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기에 장기간 비대면 예배에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비대면을 은근히 바란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외로움이 보이지 않게 얼마나 내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는지 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놀랐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내 속에서 기쁨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나의 기쁨이 기독교 공동체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두 번째 산: 도덕적 삶의 추구(The Second Mountain : The Quest for a Moral Life)’에서 이렇게 썼다. “기쁨은 그 속에 스스로를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피부라는 장벽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그 둘은 서서히 하나로 융합된다.” 이 때는 다름 아니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디지털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개별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얕고 덧없는 행복감과 기쁨은 전혀 다르다. 진정한 기쁨은 (디지털 기술이 증폭시키는) 자기 중심적 경향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더 큰 이야기 속에 몰입시킬 때 생긴다. 사람들은 커피 잔과 자동차 스티커에 느헤미야 8장 10절,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를 붙이고 다니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은 느헤미야가 이 말씀을 한 때는 바로 모든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모여 있던 바로 그 때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름 아닌 대면 예배 현장이다.느헤미야는 사람들이 죄책감에 휩싸인 채 하나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고 또 통곡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여기서 “너희”는 복수형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은 너희의 힘이다, 바로 하나가 되어서 누리는 기쁨이다. 지난 한 해, 우리는 고립된 상태에서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온라인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약하게나마 묶어주었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떨어져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하게 느끼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축제를 더 크게 갈망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갈망이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본향, 하나님을 향해 하나가 되어 나아가고자 하는 더 큰 갈망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원제: Should Online ‘Church’ Continue After the Pandemic?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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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교회는 지금 표류 중인가
by Trevin Wax
2021-03-27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비록 개신교 전체가 몰락하고 있지만 그중 복음주의 진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며 승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죽어가지만 우리는 번성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그러나 이런 낙관주의는 믿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지난 몇 주 간 나는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와 마이클 에머슨(Michael Emerson)이 쓴 ‘미국의 복음주의(American Evangelicalism)’를 다시 읽었다. 1998년에 나온 책인 만큼 저자가 사회학적 분석을 위해서 사용한 자료는 유효 기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전투하고 번성하는' 운동에 대한 묘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울림이 있다. 또한 스미스와 에머슨이 실시한 복음주의 교회와 (이미 지난 세기말부터 급격한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주류 및 자유주의 교파 사이의 대조 분석에서는 여전히 얻을 것이 많다. 당시 그들이 목격한 적지 않은 강점들은 오늘날 통계에서도 여전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특히 독립 교단(non-denominational churches)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근 25년 전에 쓰인 이 책에 실린 주류 개신교 교회 신자들의 말을 정독하면서 내가 놀란 것은 오늘날 전국에 산재한 복음주의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그들과의 차이점이 아닌 유사점 때문이다.신앙 전통이슈가 되는 몇몇 경향을 살펴보기 전에, 종교 기관에게 영적 활력을 주는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저자들의 시각에서 고려해야 한다. 저자들은 신앙 전통이 가진 강점 여섯 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신실하게 고수하는 것2. 삶에 있어서 신앙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3.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큰 자신감과 확신을 갖는 것 4. 다양한 교회 활동과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 5.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신적, 실질적으로 헌신하는 것 6. 교회의 오랜 전통을 중시하고 새로운 회원들과 그 전통을 중심으로 교제하며 또한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회심자를 만들어내는 등, 등록한 교인들의 지속성을 꾸준히 높게 유지하는 것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에머슨과 스미스가 복음주의자의 강점이라고 발견한 영역들이 주류 및 자유주의 개신교 사이에서 오히려 약점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여기 내가 소개하는 25년 전 주류의 사고방식을 오늘날에는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에게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런 사실이 다가올 미래에 역사적 복음주의 교단이 만날 상당한 수준의 감소를 예고하는 걸까?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과거 주류 개신교의 경향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언제라도 바뀔 수도 있다. 몇 가지 관찰한 사항들을 살펴보자. 1. 기독교 신학과 윤리를 향한 헌신의 부족당신은 무엇을 믿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또는 교단이 표류하면 이 질문에 대한 응답도 애매해진다. 기독교적 믿음과 실행을 둘러싸고 조금씩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경우에 따라 기독교의 진리는 단지 다른 많은 종교들 중 하나처럼 주관적 확신으로 그치기도 한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구별은 간과되거나 아예 무시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교회 출석자들의 내면과 삶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이 가능한 확실한 내용과 헌신을 찾기는 힘들다. 오늘날 전통적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믿음과 도덕은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과거 기독교 전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25년 전만 해도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핵심이 되는 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표현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다. 리고니어(Ligonier)와 라이프웨이리서치(Lifeway Research)가 발표한 보고서, ‘신학 현실(The State of Theology)’에 따르면 오늘날 복음주의자 사이에 교리적 혼란이나 성경 문맹이 만연하다. 기독교 신학과 윤리의 많은 핵심 요소가 수정되거나 또는 아예 무시되는 것은 그래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2. 신자들 사이에 만연한 행복 추구복음주의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삶의 목적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불신자인 이웃과 비교할 때 특별히 다른 점이 있을까? 1998년 에머슨과 스미스는 주류 개신교인을, “미국의 문화적 실용주의와 개인이 스스로 정의하는 행복이라는 도덕적 권위가 기독교적 가치를 재정의하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이 말은 일상에서 기독교 교리와 윤리적 지향점이 노골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삶의 목적과 자유에 관해서만은 보다 더 일반적인 미국적 관점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주류 개신교인에게 신앙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다름 아닌 '개인적 만족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에머슨과 스미스는 지적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권위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나 헌신적인 제자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된다. 신앙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도록 만들어 주고 또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딱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런 진술은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신자들의 사고 방식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 아니라, 굿페이스(Good Faith)가 제공하는 충격적인 통계를 계속해서 인용하면서 노골적인 신앙의 개인화에 대해서 경고했던 것이다. 다양한 통계를 통해서 오늘날 미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생각하는 삶의 목적이 전반적인 미국인의 사고와 다를 바 하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내면의 성찰을 통한 은밀한 욕망의 추구다.) 많은 숫자가 부흥을 의미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너무도 많은 교회 신자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영적 활동이 아메리칸 드림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신론적 도덕 치료로 만들어지는 기독교 그리고 사람으로 넘치는 교회다. 물론 그런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3. 삶의 핵심이 아닌 한 부분일 뿐인 신앙지난 세대에 복음주의자들과 주류 개신교인들 사이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신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믿음의 중심성 여부였다.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을 언급할 때 자신의 삶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고백했지만, 주류 개신교인은 '신앙은 단순히 삶의 여러 중요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해서 마치 삶의 한 구석에 있는 가구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은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질서와 의미를 제공하는, 강렬한 개인적 헌신이 필요한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당연한 삶의 한 측면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주류 기독교인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참여를 그들의 삶에서 바뀔 수 없는 근본이 아니라 다른 우선순위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주류 및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은 교회 출석을 사회 생활의 중심이나 영적 생활의 핵심이 아니라 일주일을 살면서 거치는 일상 중 하나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20여 년 전 에머슨과 스미스의 설문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보다도 적은 빈도로 교회에 참석한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버리는 이런 상황과 관련해 몇 년째 경고를 하고 있는데, 교회보다 다른 사회 활동(운동 경기 참여, 가족 여행 등등)을 우선시하는 가족이 어떻게 해야 율법주의에 빠져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인 교회 참여와 관련해서 적절하게 도전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도 한 세대 전 주류 개신교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삶의 가장자리로 밀리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4. 식어버린 전도 열정복음의 내용을 모를뿐더러 복음의 진리가 주는 확신도 없는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기독교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개인적 취향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왜 전도하려고 땀을 흘릴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영원이 존재하지 않고, 유일하신 구세주를 믿는 신앙이 아니라 성실함으로 받는 게 구원이라면, 굳이 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전도해야 할까? 스미스와 에머슨은 1990년대 후반, 자녀들 전도조차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식어버린 주류 기독교인의 전도 열정을 지적했었다.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전 선배들이 걸어갔던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급속한 수적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말 이미 영적 쇠퇴의 증거가 주요 교단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다가올 세대에도 여전한 영적 활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과거의 성공이나 현재 경험하는 성장 또는 건강한 징후들 때문에 빠지는 안일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계심을 잃지 않을 때, 어쩌면 우리를 미래의 붕괴로 이끌지도 모를, 우리의 선배가 겪었던 동일한 문제에 빠지는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원제: Is Your Church or Denomination Drif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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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Merida
2021-03-22
가장 좋은 성도들을 파송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까?이 질문은 많은 회중들이 교회 개척에 대한 생각을 마주할 때 궁금해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질문과 걱정을 이해하면서 그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도전을 하고 싶다. 최고를 보내라“우리는 가장 좋은 사람들을 보낼 수 없어”라는 사고방식은 신약 성경의 사역 모델이라기보다는 마치 최고의 선수를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은 야구 단장의 모습에 더 가깝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고 (행 13:1–3),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 하늘에서 가장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요 17:18).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제자 훈련에서 결핍을 나타낼 것이며 건강한 성장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성화될 뿐 아니라, 선교를 통해서 성화되어 간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 개척의 과제가 파송하는 교회를 복되게 할 수 있을까? 총 여섯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1. 교회 개척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상 대명령에 집중하도록 한다 소비 지상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게 될 때,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교회 개척에 집중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소비 지상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 교회가 교회 개척에 동참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 영화를 보러 가는 문화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군대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목회자가 설교하는 동안 '팝콘이나 먹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정반대로,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함께 선교를 위한 보내심을 받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다. 교회가 주님의 지상 대명령에 관심 갖는 것을 멈추게 될 때, 사망이 찾아올 것이다. 보내지 않는 교회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2. 교회 개척은 성도들이 천국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한다교회 개척은 성도들로 하여금 많은 '복음의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한다. 이는 복음의 목적대로 인도된 고통스러운 작별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 이는 아픔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곧 그리스도께서 합당한 분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영광을 위하여 함께 보내게 될 수십 억년의 시간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의 단 몇 십년 간의 작별 인사는 그만큼 가치가 있다. 이것은 하늘 시민권의 빛 가운데 살면서 보여지는 삶의 한 부분이다(빌 3:20).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어떠한 고통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직접 얼굴로 뵐 때 이것들은 더 이상의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3. 교회 개척은 제자 훈련을 위한 높은 목표가 된다 제자 훈련은 (그것이 중요한 만큼) 절대로 단순 정보 전달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도들이 삶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도들을 선교의 관점에서 훈련해야 한다. 교회 개척은 제자 훈련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선교를 강조한다.4. 교회 개척은 관용과 연합의 문화를 조성시킨다 교회가 복음과 선교를 그 중심에 둘 때, (일반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소한 논쟁들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핵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성은 사람들이 주요 쟁점에 집중하는 곳에서 배양된다.교회 개척은 또한 관용을 북돋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 74세이신 어떤 사장님은 프랑스에 교회를 개척한 젊은 사역자에게 직접 선물을 보내고 정기적인 선교 후원을 하고 있다. 그 교회 개척자가 고국을 방문할 때 두 분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이는 관용과 세대를 넘어선 복음의 동역자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5. 교회 개척은 성도들로 하여금 상황화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교회가 교회 개척을 위하여 세계 곳곳으로 성도들을 파송할 때, 교회 개척자들은 많은 민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이상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우리도 그러한 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람들을 매우 쉽게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수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하지만 다른 이들의 우상숭배에 노출되는 일의 긍정적 측면은, 파송하는 교회 성도들이 “내 우상은 무엇인지, 내 이웃들은 어떠하며, 그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복음을 ‘많은 민족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지속적으로 고심하는 교회 문화 속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동일한 복음을 우리 이웃들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6. 교회 개척은 기도를 강조한다 모든 성도들의 간절함이 고조되기 때문에, 교회 개척 팀을 보내는 것은 교회가 기도 생활에 열심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교회 개척 팀이 개척을 시작할 때 그들의 기도 생활이 전과 다르게 활짝 열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팀 켈러 역시 리디머교회를 개척하려고 결정했을 때 자신이 경험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부흥하는 기도 생활을 경험한 개척 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송하는 교회 역시 대체로 이러한 경험을 한다. 교회 개척에 대한 최신 소식을 받으면 파송 교회는 기도한다. 목회자들이 합심 기도시간을 인도할 때, 파송 교회는 새로운 사역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또한 전 세계의 복음 발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기도를 어떻게 더 강력하게 만드는지 바라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회가 기도하기를 원하는가? 교회 개척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엄청난 축복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당신의 교회를 놀랍게 축복할 것이다. 많은 비용을 요하는가? 그렇다. 복음의 작별인사가 고통스러울까? 물론이다. 많은 도전이 있을까? 확실히 그러하다. 이것이 과연 '교회 성장을 위한 확실한 비결'인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어둠 속으로 빛의 공동체들을 흩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 교회 개척의 자리로 우리 자신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또한 이를 사용하셔서 파송하는 교회를 구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제: 6 Ways Church Planting Blesses the Sending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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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해보고 싶지 않으세요?
by 정명호
2021-03-14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자기만의 문제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픔이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 것도 아니라는 현실적인 성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중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여겨지는 사람에게 한두 번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자리에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전해 들을라치면 마음이 더 닫혀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마음에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내 속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아픈 사람들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성도들 중 힘든 문제 가운데 살아가는 분들, 고통의 눈물 가운데 기도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자주 듣습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이 마음에 사무칩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묻고 사는 문제, 그냥 품고 사는 문제들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힘든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도전이라는 것도 호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남의 인생을 멀리서 볼 때는 ‘인생을 왜 저렇게 살까?’하고 이상하게 여기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 배경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리를 끄덕이며 그분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는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수가성 여인의 이야기 (수가성에서 온 편지)저는 사마리아 땅에 속한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인입니다. 처음 한 남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할 때까지만 하여도 저는 제 인생에 내리 비치는 행복이라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뜻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내 방법으로 남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잘해 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우리 관계는 꼬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도록 지쳐버려서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고 말았습니다. 지옥처럼 여겨지던 결혼이라는 굴레, 나랑은 맞지 않는 이 남자만 벗어나면 내 인생이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으로서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는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하는 저를 발견하고서는 머리를 흔들며 또다시 지옥 같은 결혼의 악몽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마음에 다짐하곤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는데, 머리로는 이것은 아니라고 흔들기를 반복하던 중 결국은 가슴이 머리를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놈이 문제였어!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한 번 실패하지 두 번 실패하겠어?’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재기를 꿈꾸며 재혼을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실패와 아픔을 이제는 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것도 잠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자와의 관계도 변해갔습니다. 뭔가가 자꾸 뒤틀렸습니다. 이러려고 재혼한 것이 아닌데 … 반복된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감까지 더해지자 삶은 더 힘겨웠습니다. 새 남편은 걸핏하면 나의 인격까지 무시하며 이제 툭하면 옛 남편을 들먹거립니다. 누가 결혼에 실패하고 싶어 그랬겠습니까? 참다 참다 또다시 이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두 번을 이혼하고 나니 이제는 남자에 대해서도, 결혼에 대해서도 모든 꿈과 기대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일 뿐입니다. 남자에 대한 기대란 다 부질없는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다고 여겼습니다. 누군가가 사랑, 행복, 결혼을 이야기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서라도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그렇지만 여전히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지해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를 거쳐 간 남자가 첫 남편을 포함하여 다섯 명,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저를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내가 나를 봐도 싫은데 어느 누가 고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겠습니까? 아니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관심을 꺼 주었으면 오히려 좋겠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뒤통수에다 대고 수군거립니다. 안 들어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사는 것에도 이제는 지쳤습니다. 모든 것이 꼴 보기 싫고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귀신 만나는 것보다 싫습니다.여러분이 사는 세상처럼 집 안에 수도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 가려면 사람들이 가장 뜸한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정오의 뙤약볕을 피해 다들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에 저는 우물로 갑니다. 터벅터벅 가기 싫은 걸음 억지로 옮기며 … 힐끗힐끗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살피며….그런데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그 우물가에는 어떤 유대인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 시간에 여기 와 있지?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못 본 척 외면한 채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게 마실 물을 좀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유대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가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을 혼혈 후손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면하지도 않던 때였습니다.그래서 제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은 유대인 남자인데 어찌 나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하더군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 우물 말고 다른 곳에 우물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제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저는 혼자 조용히 그곳으로 물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적부터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라곤 이곳밖에 없었습니다.”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와의 대화는 영생, 저의 과거, 예배,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저는 저도 모르게 흥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아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도 아니고, 무언지 모를 희열, 기쁨, 기대, 감격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남자 아니,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 분은 메시아인 것 같다!”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도 꼴 보기 싫었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왜 뛰어갔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저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리 나와 보세요.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어떤 분을 내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리 와 보세요. 이분은 메시아인 것 같아요. 여러분이 저를 잘 알잖아요. 제가 이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시잖아요. 한 번 와 보세요.”사람들도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동안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랬을지도 모르죠. “드디어 저 여자가 미쳤나 보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까? 무엇을 보긴 본 모양인데….”사람들은 우물가의 예수님을 모셔다가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길 떠나려는 예수님을 그 동네에서 이틀이나 머물게 하면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몇몇 사람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은 당신이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귀로 직접 듣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이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과거가 지워지거나 잊힌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지금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염려하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무슨 보장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돈? 지식? 사람의 도움이나 약속? 그렇습니다. 진리와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와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는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아마 이전에 교회를 다녔거나, 한두 번 교회에 나가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나셨던 분도 계실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을 허구로 여길 만큼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상실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나쁜 경험이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의 삶은 언젠가 머지않은 시간 안에 끝이 오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거부할 수 없이 분명한 현실입니다.바로 이 시점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혼자 사는 인생 얼마나 외롭습니까? 얼마나 지쳤습니까? 왜 또 그 길을 다시, 계속 홀로 가려고 하십니까? 누구를 핑계 대고, 누구 탓이라고 비난해도 여전히 우리 인생은 변하지 않습니다.여기 다른 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 중에 예수님을 삶의 구세주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아버지로, 성령님을 우리의 상담자로 모시고 살게될 때 이전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던 수가성의 여인처럼 더 나은 삶, 변화된 삶, 기쁨의 삶, 적극적 삶, 무엇인가를 기대함으로 기다리는 소망의 삶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저나 여러분에게나 인생의 목마름이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아가다가도 불쑥 ‘이게 전부인가?’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으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구해보면 어떨까요?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4장 15절) 이런 질문 끝에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한복음 4장 28절) 그렇게도 멀리하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도 피해 다녔던 그 자리로, 기쁨과 환희의 감격을 가지고 달려 들어가는 여러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익숙하게 걸어왔던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습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수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새 삶과, 늘 꿈꾸어 왔으나 그동안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기쁨, 평안, 확신, 안전과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심하십시오. 작정하십시오. 성공적인 인생의 새 출발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과 안아주심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 발간한 '초청'이란 저서에서 직접 부분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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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성여인
야곱의우물
메시아
안아주심
만남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
by Clarissa Moll
2021-03-09
남편의 장례식이 있기 며칠 전, 친구에게 네 명의 자녀와 함께 나를 묘지로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롭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이었다. 끔찍한 슬픔의 어둠 속에서 안정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당장 장례식 날을 어떻게 견디어내야 할지 미리 생각해야 했다. 일단 묘지를 먼저 둘러보고 그가 묻힐 곳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예배가 열릴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장례식 날 신을 새 신발을 미리 집에서 신고 다니면서 길을 들일 생각이다. 친구가 모는 차가 묘지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엔진을 꺼달라고 했다. 토요일이면 하이킹을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이 자주 오던 산이었다. 예전에는 이 산에 공동 묘지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조용히 앉아 공동 묘지 입구 너머의 고요하고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정말 아름답고 고요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가 공동 묘지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 기쁘다고, 최소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충격은 아니라고. 지난 일 년 반 동안 슬픔을 상대할 때면, 묘지에 갔던 그날처럼 미리 준비하고 또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슬픔은 여행처럼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정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 슬픔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또 거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슬픔이 주는 놀라움은 종종 우리의 영적 생활을 힘들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받는 것이라는 복음의 경고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기꺼이 동참함으로 그분의 생명이 주시는 충만함을 누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렇게 썼다. “고통은 인생에 이미 예정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프로그램 되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나는 고통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물론 고통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그리고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만날 때 모든 게 달라진다.”고통에 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다가오고 슬픔이 뒤따를 때 우리는 놀란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교인을 위로하는 경험을 거의 정기적으로 하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넘어서 고통이 주는 슬픔의 시련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다음 네 가지를 통해서 당신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다.1. 슬픔이 얼마나 아픈지를 공감하라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저주가 가진 깊이와 넓이 때문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다. 죽음과 슬픔은 우리의 연약함, 통제력의 부족, 그리고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녀라는 혈통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에덴동산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고대 조상들처럼 우리 또한 묘지에 서서 과거를 한탄한다. 먼지인 당신은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무덤에서 바로잡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도 죽은 이는 듣지 못한다. 죽음이 주는 종착역이라는 고통은 살을 찢는 아픔이다. 그룹(cherub)들이 불칼을 들고 지키는 에덴동산을 바라보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놀라서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이별의 고통이 이토록 큰 상처를 줄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힌 아담의 저주를 인정함으로 우리는 고통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은 썩어가고 있고, 비극이 일어나며 죽음은 혼란을 가져다준다.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다(롬 8:1-23). 상실의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 내내, 조용히 곁에 앉아 함께 아파함으로써 우리는 그나마 작은 위로를 제공할 수 있다. 2. 오래 지속되는 슬픔의 현실을 인정하라나이 든 여인의 부고에 그녀가 신생아 자녀를 잃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내용을 읽을 때면 나는 놀라곤 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슬픔이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삽 속의 흙이 관을 덮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남아있다. 새로운 자녀를 낳아도, 재혼을 해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중심으로 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예전의 사랑과 삶을 기억한다. 우리는 종종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지속성에 놀라고, 어리석게도 그것이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충만한 삶을 약속하셨다. 그러면, 슬픔이 어떻게 충만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저주가 완전한 구속의 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할 적은 죽음이라고 기록했다. 이 시간표에 따라 우리는 몇 가지 기대치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유족을 돌보는 사역은 한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사역은 교회의 틈새 사역이 아닌 전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유족을 만나는 경우,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다시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3. 친구를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인정하라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냉동 식품을 찾는 것은 쉽지만,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뻔한 이야기, 또는 침묵, 아주 나쁜 경우에는 비판까지 하는 것이 사람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크게 놀라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가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한 욥은 그의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을 '끔찍한 위로자'라고 불렀는데, 나는 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욥 16:2). 이 세 사람은 욥이 고통에 빠졌을 때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라며,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는 것 같은 말을 위로라고 했다. 이 세상에 그런 친구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남편을 잃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바라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내게 헌신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슬픔에는 관계 자체를 바꿔버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2차 손실'이라고 부른다. 특히 장기적으로 슬픔에 잠긴 사람의 친구가 되고 지속적으로 돕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일에 용기를 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음식 제공, 연속 기도, 틈새 지원 등등, 교회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상실의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몇 년에 걸쳐서 친구가 되어 꾸준하게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정을 담은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욥의 친구들이 제대로 한 게 하나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욥의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당신이 하는 말이 다 옳을 수는 없다. 한 번 이상 심각한 말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뢰가 깊어지면 교회의 진정한 의도가 빛을 발할 것이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누군가를 잃은 후 모든 관계에서 점점 더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인 사람에게 기쁜 놀라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4.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라슬픔은 타락한 인간의 핵심을 건드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슬픔은 타락한 세상이 가진 어둠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장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마저도 흔들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주먹을 흔들지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침묵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침묵은 가장 고통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공동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팟 캐스트에서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매달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생의 슬픔이 우리를 압도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이 우리가 고통받는 중에도 우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함께 하신다는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슬픔을 보게 된다.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자. 교회는 승리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피 묻은 십자가를 계속 강조해야 한다. 슬픔에 빠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슬퍼하지만 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자. 슬픔은 깊고 오래 지속된다. 슬픔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킨다. 그러나 슬픔은 또한 우리를 공동체에 더 단단히 묶도록 만들 뿐 아니라, 복음에 더 깊은 닻을 내리도록 한다. 여러분의 교회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원제: 4 Ways to Love Someone Blindsided By Lo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고통과은혜
슬픔의본질
고통의의미
욥과친구들
C.S.루이스
고통을이기는방법
헤아려본슬픔
십자가
교회의 멤버가 되어야 한다
by Nate Shurden
2021-03-07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부터(창 12:1–3) 하늘로부터 임하는 새 예루살렘 가운데 묘사된 동일한 약속의 최종 성취까지(계 21장),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명백하게 증거한다.여기서 ‘사람들’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한 부분에 주목하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구원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거나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개인에게도 관심을 두신다(롬 10:9–10). 내가 ‘사람들’ 대신에 ‘백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말씀이 강조하는 바, “성도의 정체성은 반드시 관계적이어야 한다”(벧전 2:9)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 육체의 출생이 가족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 출생 역시도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깊은 연관성을 지닌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다. ▪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요 15:1–17)▪ 예수님은 모퉁이 돌, 우리는 성전을 짓기 위해 연결된 살아있는 돌들(엡 2:20; 벧전 2:5)▪ 예수님은 머리, 우리는 그의 몸의 구성원들(엡 4:1–16; 고전 12:1–27)그러한 은유들 속에는 개인주의 혹은 독립성을 암시하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홀로 살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개인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족이다(롬 8:14–16; 엡 2:19–22).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헌신과 적극적인 참여는 결코 수지타산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교회와 실제적이고, 활력이 넘치며, 생명을 제공하는 관계를 어떻게 세우고 유지할 수 있을까?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첫째, 우리는 반드시 교회의 멤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멤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마치 회비를 내고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서 이를 통해 멤버가 누리는 유익을 취하는 것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 멤버십이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언어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4–5절에서 말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손이 몸의 지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한 몸된 지체들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서로의 일부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지역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그렇게 살아간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가 필요하다둘째, 우리는 매주 교회 출석에 헌신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교인 명부에 올라간 공식 멤버가 되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성된 참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히 10:25).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는 대신에 운동 경기, 음악회 혹은 댄스 경연에 참여하기로 선택하거나 휴가를 선택했을 때, 영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속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마 6:21). 비록 우리는 어린이 야구시합이나 몇 가지 삶의 소소한 일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진 않겠지만,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일보다 세상의 활동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눅 14:26).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것들과 더불어 사랑 안에서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것의 가장 최고봉은 바로 교회다(엡 5:25). 따라서 주일에 예배를 위해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가장 참된 보화를 마주하는 곳이며, 구원의 기쁨을 더 많이 측량할 수 있는 곳이고, 또한 우리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영광으로 성장하게 될 곳이다(고후 3:18).셋째,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주일 예배 만큼 중요하지만 충분히 교제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진정한 신뢰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한 두시간 이상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 전반을 위한 끊임없는 동반자로서의 교회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기록한 교회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성전에서의 공예배 시간이 성도들 가정의 식탁에서의 비공식적인 친교의 모습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런 작은 모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나누며, 죄를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영적 은사를 분별하며,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며 또한 궁금해 하는 이들과 복음을 나누기 위한 기회들을 제공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소그룹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더 강화시키며 교회의 지속적인 제자 훈련과 선교 사역을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밑거름이 된다.넷째, 우리가 어떤 전환기에 있더라도, 반드시 교회의 멤버십을 유지해야만 한다. 많은 합리적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 출석하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소속 교회의 리더십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 장로들은 우리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장로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왜 공동체를 떠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히 13:7). 우리는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솔직해야 하며 새로운 교회를 찾기 위한 계획에 대해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조언을 열린 자세로 들어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가 다른 교회로 옮기는 중에 교회 멤버십을 유지하는 방법과 원활한 이명 절차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새롭게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도 가능한 빨리 이를 알려야 한다. 새가족반과 같은 수업에 참여해서 교회의 역사와, 비전, 교리, 사역, 그리고 성도의 자격 요건등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만약 성경적인 교회의 표지가 나타나고 그곳이 우리 가정과 같다면, 우리는 멤버가 되는 일에 결코 지체해서는 안된다. 오랫동안 교회와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며, 살아있는 돌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이다. 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며, 교회 역시 우리가 필요하다. 원제: Joining and Being a Member of a Church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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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피상적인 신앙을 배격하라
by 김형익
2021-03-04
리처드 포스터는 1978년에 출판한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저주거리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1장을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헤르만 바빙크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기독교를 향해 이렇게 썼다. “종교적 생활에 관하여, 미국의 도덕적 낙관적 이원론적 문화, 경험이 이끄는 문화가 엄청난 피상성을 초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죄와 은혜의 대조는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사역은 그저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도덕만 다룰 뿐입니다. 선택과 칭의와 같은 전체 신앙적 요소는 부족하거나 아예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중략] 어떤 이는 “미국인의 신앙생활에는 깊이가 없는 대신 넓이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제임스 에글린턴,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하지만 피상성의 문제는 비단 서구나 미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이것은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20세기 말인 9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한 이메일이라는 혁명적 통신 수단, 그리고 핸드폰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문자 메시지,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보편화된 SNS 사회관계망의 유행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지식의 축적과 신속한 공유를 가능하게 했지만, 이 현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피상성을 촉진시킨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시대의 상황이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깊이를 추구한다. 신앙은 피상적일 수 없고,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상성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앙과 교회가 직면하고 넘어서야 하는 도전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피상성이라고 지적한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8:11).” 거짓 선지자들이 전한 평강은 피상적 평강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치명적인 영적 질병을 가볍고 사소한 상처 정도로 여기고 반창고나 발라 줄 뿐이었으니, 그들은 깊게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입 속에 고기만 물려주면 피상적 평강을 빌어주고 입에 아무 것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하는 천박한 자들이었다(미 3:5). 이런 거짓 목사들은 지금도 많다!초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초대 교회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한 거짓 사도나 거짓 교사들의 특징도 결국 피상성이었다. 바울 사도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a)”라고 말할 때, 그는 복음에 물을 타서 희석시킴으로써 피상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수많은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들도 역시 탐심으로 사람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자들이었으니,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천박하고 얄팍한 자들이었다(벧후 2:3). 이들의 특징은 돈이 되는 자들에게 피상적 축복을 빌어주는 일이었다. 그들에게서 영적 깊이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은 일이다. 피상성과의 싸움은 우리 시대,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백성들은 언제나 깊이 있는 신앙과 교회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피상성을 극복하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워나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첫째는, 깊이 있는 말씀 선포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놓지 않았던 주요한 무기였다. 히브리서의 묘사대로,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히 4:12), 성도들이 피상성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드러낼 때,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고(벧전 1:23; 약 1:18; 롬 10:18; 고후 4:6), 그 말씀 속에서 주의 영광을 본 성도들은 깊이 있는 성화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고후 3:18).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시대의 피상적 문화가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침식해 들어오게 된 것은, 깊이 있는 말씀 선포의 부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 미국 교회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지적을 좀 더 들어보자. “교회 건물은 안락하고, 친구를 사귀기에 좋으며, 언제든 환영하고,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 되었지만, 강단은 없습니다. [중략] 교회당처럼 오늘날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오락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는 [중략] 매우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짧고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며 극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말할지를 잘 아는 가장 인기 있고 수요가 넘치는 인물입니다. 활기차지만 가볍고 즐거우며 유머로 양념을 했습니다. 설교는 노래와 합창과 독창과 성악과 기악 사이에 배치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 교회를 지적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강단의 회복이 없이, 신앙이 깊어지고 깊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둘째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을 공유하는 일이다. 구성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는 없다. 죽음은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죽음을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있다. 작년에 나는 교우들과 줌(ZOOM)으로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부부가 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라는 책으로 독서 나눔을 했다. 어린 두 아이를 연이어 잃은 부부가 상실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뎌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공동체 안의 한 가정이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경험이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공동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경험은 비단 죽음의 경험만이 아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의 사건들 또한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겪는 고난의 사건이 적절하게 공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인생을 희희낙락하는 가벼운 태도로 바라볼 수 없게 해준다. 문제는, 그 죽음 같은 상실의 아픔이나 통과하고 있는 고난의 이야기들이 그저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아픔과 고난으로 적절하게 공유되게 하는 일이다. 상실과 고난의 현실을 언제나 직면하는 공동체는 깊이 있는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다.셋째로, 깊이 있는 사귐(코이노니아)이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과 수치심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DNA가 되었고, 이 죄의 성향들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담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타자들로부터 영적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피상적이고 예의바른 관계 맺음으로 만족하게 되었고, 이것은 깊이 있는 결속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유하게 해준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누리게 된다(고전 4:3-4). 그래서 그는 거절당할 두려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 두려움을 버리고 형제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복음으로 자기를 벗어난 사람은 진정으로 형제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결속과 사귐은 깊이 있는 교회로 우리를 인도한다.주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를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전체가 달려있다는 말씀이고, 이 두 계명은 결국 하나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결속하고 이웃과 결속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라고 정의하신 셈이다. 바울 사도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도, 천사의 말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전 재산과 심지어 온 몸을 내어주는 구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말씀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전 13:1-3). 깊이 있는 신앙은 깊이 있는 관계를, 그리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운다.우리는 너무 가볍고 피상적이다. 피상적인 말씀, 피상적인 교제, 피상적인 기도, 피상적인 묵상, 피상적인 섬김, 피상적인 성장에 우린 너무 오래도록 익숙해져 오지 않았는가? 피상성과 거짓 목사들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고 상생적이다. 피상성의 문화는 거짓 목사들을 양산하고, 거짓 목사들은 피상성의 문화를 촉진한다. 당신은 피상성과 싸우고 있는가? 하나님과 맺는 당신의 관계는 충분히 깊이가 있는가? 당신이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는 충분히 깊은 결속을 경험하는가? 피상성의 시대에 깊이 있는 신앙, 깊이 있는 교회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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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바빙크
낸시거스리
혁명적 성경 읽기 노하우
by Peter J. Leithart
2021-02-28
교회 교부들이 남긴 길거나 짧은 설교를 읽을 때면 겸손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주해’ 중에서 아무 부분이나 펼치고 읽어보라. 시편에서 시작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으로, 또 복음서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펼쳐내는 놀라운 미로 여행을 경험할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8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가 모든 모래 알갱이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훈련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속 모든 구절에서 만화경처럼 신비한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그가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올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종종 그가 만든 뒤틀림과 굴곡 중 일부는 출구가 없는 골목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천하의 아우구스티누스도 후퇴를 할 때도 있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을 때 의지하는 갖가지 수단과 도구 없이 성경 전체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관련 소프트웨어와 검색 엔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손에는 그 흔한 관주 성경도 없었다. 초대 교부 시절부터 종교 개혁 시대까지, 기독교 지도자는 사실상 성경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그런 수준의 성경 지식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수는 있지 않을까? 만약에 우리가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지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1. 본문을 신뢰하라내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자를 신뢰하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이 글에서 하는 어떤 말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필요한 구절이고, 또 모든 것에는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님은 단 한 번의 호흡도 낭비하지 않았다. 성경 속에 우연히 끼어들어 온 구절은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장병을 데리고 있었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또한 성령님은 환자가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38년간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길 원한다. 153마리의 물고기가 단지 현지 상황의 결과일까? 아니다, 이것은 다 주님 말씀의 일부다. 만약에 누가 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흘간 있었냐고 묻거든 그냥 “그거야 뭐 나흘간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라고 대답하지 말라. 그럼 왜 나흘일까? 당신이 보기에 성경 저자가 이상해 보이는 구절을 사용한 경우, 그냥 엉터리 학자들처럼 “그것은 고대 히브리 관용구야”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내리지 말라. 그 표현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대하라.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또한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많은 주석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몇 장을 읽고는 이제 좀 내용이 이해되어 속도를 내려고 할 때면, 사도 요한은 주변의 다른 장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삽입' 내지 '이탈 또는 후퇴'로 본문을 채운다고 주석은 설명한다. 신령한 저자를 괴롭히지 말고 잠시만이라도 좀 가만히 놔두라. 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그렇게 힘든 방식으로 구성했을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브레이크를 밟을텐데 뭐하러 그 전에 속도를 내는 이상한 전개 방식을 택했을까? 인간인 저자를 조금만 더 믿도록 하자. 그가 그렇게 쓴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궁극적 저자인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은 수십억 개의 인류 역사 속 다양한 주제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당연히 일관된 내용의 책을 쓸 수 있다.2. 지름길은 없다여러 해에 걸쳐 성경 해석학을 가르쳤을 때, 나는 종종 로버트 펜 워렌(Robert Penn Warren, 20세기 초 미국의 평론가·소설가·시인)이 시에 대해서 했던 논평을 다음처럼 풀어서 말하곤 했다. 시를 가장 자연스럽고 잘 이해하는 것은 처음 읽었을 때가 아니다. 열 번째 읽을 때도 아니고 쉰 번째 읽을 때도 아니다. 바로 백 번째 읽을 때다. 백 번째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보면서도 기억하지만 '앞을 향해서도 기억(remember forward)'하게 된다. 시 전체가 비로소 한 줄 한 줄마다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 워렌의 주장은 요즘 문화가 길러내는 환경을 역행하는 발상이다. 우리는 즉각성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가장 처음 노출되었을 때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워렌이 맞다. 시를 읽을 때나 성경 한 권 또는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지름길은 없다.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길 밖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구절 하나 하나와 함께 당신 곁에 머물 때까지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야 비로소 본문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성경 주석을 쓸 때, 나는 성경을 최대한 많이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요한계시록 주석에 매달린 칠 년 동안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서 대충 한 주마다 요한계시록을 한 번씩 다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각각의 구절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때때로 가장 신선한 영감은 계시록 전체를 읽고 또 읽는 중에 떠올랐다. 3. 당신보다 뛰어난 가상의 독자를 찾으라내 막내아들은 작곡가다. 우리는 종종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가 음악을 듣다가 멈추고는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아빠, 저거 지금 들었어요? 지금 막 피아노 소리가 난 거 말이에요? 조가 바뀌는 거 들었어요? 리듬이 복잡해지는 거 알아챘어요?” 그러면 나는 멍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니, 난 아무 것도 안 들려.”물론 내 아들이 망상에 빠져서 있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는 더 단순하다. 조금 겸손하게 말하면, 그의 귀가 나보다 낫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계속 쉬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이런 식의 불평등을 굳이 성경 읽기에까지 적용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신교도는 성경의 명쾌함과 더불어 모든 믿는 자가 다 대제사장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도서관 책장 사슬에 채우지 않는다. 누구나 다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음을 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령의 은사 때문에 또는 긴 훈련 때문에 다른 이보다 성경을 더 잘 읽는다. 다른 사람이 그냥 넘긴 것을 잡아내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독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용을 연결시킨다. 장식용 벽걸이 천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은 고사하고 그냥 실의 형태만 보고 있을 뿐이다. 성인이 된 내게 제임스 조던(James B. Jordan)은 변함없는 스승이다. 나는 수십 년간 그의 메시지를 들었고 또 그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언제나 내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한다. 그는 구절과 구절 사이에서 튀는 메아리를 찾아낼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A'를 이야기하던 그는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Z'로 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회의적인 생각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오 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나는 비로소 그가 건너뛰었다고 생각한 B부터 Y 사이를 채우게 되고, 그가 옳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그나마 지난 수 년에 걸쳐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대부분 내가 그를 따라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당신만의 제임스를 찾으면 된다. 당신에게 자극을 주고 기쁨을 주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누군가를 찾아내라. 당신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이를 찾도록 하라. 잘 들으라 그리고 흉내내라.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지금 그가 곁에 서서 행여 당신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인도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4. 말씀이 차고 넘치는 의식을 치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근대 이전에 살았던 성경 교사들은 우리보다 이로운 점이 있었다. 우리는 성경 소프트웨어, 인터넷 그리고 차고 넘치는 책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대신 의식(liturgy)이 있었다. 중세 수도사들은 경전에 둘러싸여 일하면서 성경 텍스트를 복사하고 공부했다. 그들은 또한 매주 시편 전체를 암송했고 기도 시간에도 상당량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영혼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귀에도 있었고, 또 그들은 그 말씀을 입으로 맛볼 수도 있었다. 슬프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이런 식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이름에 '말씀'을 넣은 많은 교회가 정작 예배 중에는 말씀을 경시한다. 찬송가에도 말씀은 아주 조금 묻어있는 정도다. 목회자는 설교를 위해 몇 구절 읽는 것이 전부고 그것 외에 예배 중에 말씀이 들리는 것은 거의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의식을 집례하는 교회가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말씀에 깊이 몰입한다. 만약에 복음주의자들이 교회 교부들이 누렸던 깊이를 따라하고 싶다면, 그 시작은 루터교 또는 성공회 예배처럼 예배가 성경적으로 말씀에 깊이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은 지금도 선포하고 있다당신이 목사라면, 예배 속에 말씀을 더 많이 포함시켜라. 목사가 아니라면,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 말씀을 더 많이 공급해달라고 크게 외쳐라.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어라. 그리고 모든 구절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기대하라. 멘토를 찾고 그의 눈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우도록 노력하라. 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한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당신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Revolutionize Your Bible Readin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어거스틴
주석
성경
성경읽기
시편주해
성경해석학
요한계시록
복음주의자
성경은 무조건적 연합을 말하지 않는다
by Quina Aragon
2021-02-18
올해 초 미국 국회 의사당에서 일어난 난동 이후, 국가와 교회가 연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 논의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이러한 딜레마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여러 해 전 일어났던 ‘처치투’(ChurchToo, 교회 안에서의 MeToo운동-편집자주) 운동으로 그동안 ‘연합’이라는 명목 아래 학대를 은폐하려던 교회들의 상황이 드러났다. 그 후 2016년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대다수의 교회에서 흑인 교인들이 ‘조용한 탈출’을 했다. 이들은 교회에서 인종에 대한 정의(racial justice)가 부족하다는 우려를 표명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분열을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연합은 '분열되지 않은 상태’ 또는 ‘하나됨’이다. 그러니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먼저 성경이 말하는 ‘연합’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성경적인 연합삼위일체 하나님은 연합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모델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8)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완벽하게 순전한 연합체로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신다(신 6:4; 마 28:19).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교제를 누렸지만, 그들의 죄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분열을 가져왔고, 그 결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분열이 생겼다(고전 15:22). 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셨다(벧전 3:18). 그리스도 아래 모든 것이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전 우주적으로 실현될 것이다(엡 1:7-10; 빌 2:9-11).기독교의 연합은, 하나님이 인종과 배경과 사회 계층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한 가족(혹은 몸)이 되도록 모으신 결과다(고전 12:27; 갈 3:26-28). (이미 영적 실체지만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교회의 연합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를 반영하며 이를 바라보는 세계가 복음의 진리를 믿도록 촉구한다.크리스천들은 불신자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합당한 목표를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지만, 불신자들과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연합할 수는 없다.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구체화(행 2:42-47)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연합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요 17:17; 엡 4:13)을 통해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힘을 얻어 사명을 공유하고(마 28:19-20), 형재애와 봉사를 실천하며(갈 6:10; 벧전 1:22), 서로 화목하는(엡 2:11-22; 마 18:15-20) 것이다.비성경적 연합1. 연합 그 자체“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시 133:1) 선하고 아름답다고 했지만, 연합 그 자체가 반드시 미덕은 아니다. 바벨탑에서의 연합(창 11:1-9)이나 헤롯과 빌라도 간의 연합(눅 23:12)은 연합이 선이 아닌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수단임을 보여준다. 진리와 정통을 인정하고 이를 적용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 연합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이다.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노예 소유를 인정하는 크리스천 노예 소유주들과의 연합을 거부하면서, 이런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른 신조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는 주의 만찬에 함께 참여하지만, 노예 소유주들과는 어떤 교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교회 안으로 살인범을 받아들이면 곧…사람을 훔치는 도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연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의 연합이 목표다.2. 획일성더욱이 성경적 연합은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족은 믿음으로 한결같은 성숙을 위하여 서로 섬기는 은사를 받은 다양한 사람들이다(엡 4:11–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은사와 능력과 개인적 선호, 혹은 성별이나 나이 같은 다른 특징들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지워버리지 않으신다(계 7:9).당파적 충성을 요구하거나 개인의 고유 유산을 버리게 하거나 혹은 문화적/사회적 계층의 규범을 영적 의무와 융합시키는 일체의 요구는 성경적 연합이 아니며, 단지 그 요구에 동화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이다.3.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구약 시대 이후로 하나님은 범죄자들이 사죄하게 하는 것보다는 피해자를 온전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범죄자가 주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자신이 피해를 준 이웃에게 배상해야 하는 배상법(레 6:1-7; 출 22:1-15; 마 5:23-26)을 참조하라.유대 동족의 돈을 빼앗은 세리 삭개오는 이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기독교 연합은 취약한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받는 동안 '쿰바야'를 부르며 춤추는 원을 유지하기 위해 악을 은폐하거나 강한 비평이나 갈등을 무시하지 않는다(암 5:21–24; 고전 11:17–21). 다윗 왕은 자신의 딸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후에 이에 대한 정의를 집행하지 못했을 때, 그 교훈을 힘들게 배워야 했다(삼하 13). 그 결과로 가정과 왕국에 치명적인 분열이 일어났다.바른 정의를 저버린 연합은 가짜 연합이며,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정말로 연합을 원하는가?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가해자가 회개하도록 촉구하지 않는 공허한 연합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요구받을 때는 특히, 성경적 비전을 반드시 새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참되고 덕이 있는 연합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리고 그 참됨과 덕이 모두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연합을 표현하는 것인지, 우리의 뜻만을 고집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빌 2:3-4; 눅 10:25-37),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회개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새로이 결심해야 한다.성경적 연합이 때로 쉽거나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경적 연합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라는 말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이다.원제: What Do You Mean by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연합
분열
하나됨
삼위일체
획일성
융합
부당함
영적학대
때로는 분리가 맞다
by Carl R. Trueman
2021-02-17
분리(separation)는 오랫동안 교회를 괴롭힌 까다로운 주제다. 사실 성경은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정작 누군가와 분리해야 한다는 개념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각 세기가 끝날 때면 그 시기는 어김없이 인종 갈등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거부하면서 발생하기 마련인 무수한 피의 증언으로 채워졌고, 또 한편으로 분리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강력한 문화적 힘이 발생하기도 했다. 독자들이 행여 단지 설명이라는 목적 때문에 내가 이것을 언급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두 가지는 분리에 대해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가 결코 가볍게 다뤄져야 하는 주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리라는 개념은 교회 역사에서 오래되었고 또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그와 반면에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과 형태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는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 환경에서 분리라는 주제는 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백 년 전,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문제가 된 이슈는 단순했다. 그것은 초월적 기독교(supernatural Christianity)를 주장하는 사람과 기독교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초월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불일치는 모든 논의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어떻게 이 뜨겁고 또 복잡한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분리라는 주제에 접근해야 할까? 이 짧은 글로 모든 경우에 다 적용할 수 있는 만능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분리와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현대에 들어서서 발생한 분리와 관련한 대부분의 토론은 다 교리 때문이었지만, 우리는 또한 성경이 특정한 부도덕성도 분리의 문제로 분명하게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5장은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성적 부도덕에 빠진 사람은 기독교인 교제에 참여할 수 없고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분리라는 생각이 공격적이고 또는 바리새인처럼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교리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야말로 분리를 일으킨 진짜 주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진실된 교리를 떠나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순서를 기억하자. 바른 교리에서 떠나간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분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바로 믿는 사람들의 반응은 단지 잘못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교제와 분리의 정도가 가진 차이를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나는 장로교회 신자로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침례교회에서 장로나 목사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침례교도는 내가 있는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침례교 친구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교제를 나눈다. 어떤 경우는 공식적이고 또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침례교 발표자와 함께 컨퍼런스를 하기도 한다. 침례교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침례교 친구와 온전하게 사역에 수반된 교제를 즐길 수 있는 한,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들인양 우리가 서로 분리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어떤 경우에 분리가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분리는 바로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로 일어난다. 이 차이는 분리라는 방정식이 가진 도덕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며 또한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 전체까지도 포괄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온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절).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 또는 데이트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물론 이런 해석도 이 구절을 적절하게 바라보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결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이 구절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반적인 원칙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이 쓴 다른 글을 보면, 그는 기독교인도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 또는 컬트 신봉자처럼 교회 밖 다른 모든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결코 바울이 말하는 방식이 아님은 확실하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여기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장사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가 믿지 않는 건축업자를 통해서 교회 건물을 짓거나 하수도 공사를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지금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와 세상이 협력해서, 또는 복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협력해서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내 침례교도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기에 나는 침례교도인 내 친구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는 데 조금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근본 요소를 부정하는 누군가가, 비록 그가 장로교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복음을 믿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간에는 결코 동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적지 않은 윤리적인 원칙이 보다 광범위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을 고려할 때, 분리의 문제는 종종 보다 더 종합적인 맥락과 시급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낙태 문제는 어떤가? 또는 동성 결혼은? 이런 윤리적인 문제는 많은 전통적인 종교를 하나로 만들었다. 개신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 그러면 분리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개신교도인 내가 다른 종교인도 함께 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해도 되는 걸까? 다른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내가 공동전선을 형성해서 이런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의 기독교인과 사회 속 기독교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다니는 나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고수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는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나는 무슬림을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복음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를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속 기독교인으로 나는 주일 교회를 나서는 순간 더 이상 내 믿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대신 비록 영적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맥락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 그 집회가 종교적인 목적을 가져서가 아니라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확신 아래에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얼마든지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게 아니라 단지 사회 정책에 있어서 특정 윤리 문제에 관해서 내 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결혼과 성적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모임이 어떤 특정 종교가 더 과도하게 드러나는 데 선전용으로 사용되거나 또는 복음의 핵심적인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쪽으로 악용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런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맥락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지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은 경계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부담이 되어가는 분리와 관련한 주제인데, 바로 교단간의 연합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불필요한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신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분리의 역사다. 그것은 그동안 얼마나 개신교회가 일치에 관해서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큰 교단 안에서 발생한 정통의 붕괴가 평범한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도전을 초래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다 교회 지도자가 딱 한 번 심각한 문제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지만, 문제는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가다. 언제 바울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이 명령에 따라서 결단해야 하는가의 여부다. 모든 상황은 다 다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기본 원칙이 있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 고백을 적용하기 위해 확립한 기본 과정을 통해 지켜지는 복음의 기초가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때는 그 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부활을 부인한다고 그 즉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능한 교회법에 따른 모든 법적 절차를 다 동원해도 지도자가 여전히 그런 이단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때는 떠나야 한다. 분리는 힘들고 또 지금 이 시대의 문화와도 맞지 않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환경에 처하면 분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명령이다. 원제: Reasons for Separ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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