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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선교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의 은혜
by J. Nelson Jennings
2021-08-04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아시아 지역 선교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이들 이전에는 프랜시스 재비어(Francis Xavier),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전세계에 걸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로지 아시아 선교와 관련해서만 보게 되면, 이런 유명한 사람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시아 선교를 제대로 조망하려면, 그 선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거기에 아시아라는 넓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려면, 대상이 되는 시간의 범위도 훨씬 더 확장해야 한다. 성경은 서 아시아에서 아주 오래 전 발생한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 사역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지금 동서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하람으로 그를 이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별처럼 많게 할 것이고 또한 그에 따라 모든 나라를 축복하겠다는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그리고 그 주변부까지)을 서 아시아에 포함시키는 일반적인 관례를 따른다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구속 사역(이집트를 제외하고)과 복음서 및 다른 신약에 기록된 모든 구속 사역의 기록이 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순절 성령님의 부어주심에서 드러난 다양한 아시아인(“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 아시아,” 행 2:9)에 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을 떠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요한에게 특별히 나타난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아시아의 일곱 교회(오늘날 터키 서부)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 사역을 펼치는 데 있어서 특히 아시아를 중요시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시아 후속 선교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세상을 다룬 방식과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기독교 복음이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절을 보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창조자이자 왕인 하나님과 씨름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통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연합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나중에 힌두교로 알려진 종교 속 무수한 신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서사적인 기록에 푹 빠져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에 대한 도마의 증언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인도에서 시작하도록 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속 에데사(Edessa)를 지나서 인도와 로마 제국 사이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까지 믿음이 퍼져나갔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막아 온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대오와 바돌로매라는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3세기 후반,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Gregory the Illuminator)가 아르메니아에 도착했고, 왕 티리다테스(Tiridates)의 개종과 더불어 AD 301년에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형성되었다.이런 초기 서 아시아에서 이뤄진 기독교 선교는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가 그레코 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기독교를 정치적, 지리적, 또 문화적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며, 재직기간은 428년 4월 10일에서부터 431년 6월 22일까지이다. 기독교의 한 갈래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시조이다)를 이단으로 선포함으로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몽고 제국은 13세기 태평양-유럽의 동서 상업, 문화 및 종교적 상호 작용의 정점을 찍도록 만들었는데, 초기 기독교로부터 무려 천 년이 지나서 발생한 그런 몽골 제국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에 대해 유럽이 거의 제대로 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와의 연결 내지 인식과 관계없이, 아시아 선교사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했고 7세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의 수도에까지 이르렀다.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그리고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기독교인은 숫자가 계속 늘어갔고, 오늘날 볼 때에 놀라울 정도로 어떤 때에는 그 숫자가 서구 기독교인의 숫자를 능가하기도 했다. 7세기 들어 시작된 이슬람의 전파는 대부분의 아시아에서 더 이상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떤 몽골 군주, 특히 1206년에서 1227년까지 다스린 징기스칸(Genghis Khan)은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타 종교에 관대했다. 13세기와 14세기 중에 새롭게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는 이미 잘 닦여진 실크로드를 통해서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야만적인 몽골 통치자인 티무르(Tamerlane)의 부상은 재결합한 몽골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왔다.세상을 향한 유럽의 확장은 14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아시아 내 기독교는 남 아시아와 시리아 속에 존재하는 작고 연약한 모습의 1세기 후반 기독교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 후 7세기에 걸쳐서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은 새로운 서구와 잇는 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서구 선교사들은 아시아로 뻗어가는 서구의 상업, 정치 그리고 군사적 확장과 함께 들어왔다. 초기에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는 예수회(Jesuits)의 프란시스 재비어(1506–52)와 같은 선교사가 인디아와 남동 아시아, 일본, 그리고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예수회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혈통으로 담대하게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토착 사상과 융합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 ~ 1610)와 인도의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 ~ 1656)이다. 스페인의 보호를 받는 프란시스코회와 다른 가톨릭 선교사들은 새롭게 점령되어 필리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설교를 했다. 의심스러운 수준의 믿음과 열정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영국와 네덜란드 무역회사와 함께 도착했다. 어떤 지역에서 기독교 개종자의 숫자는 광범위했는데, 예를 들어, 인구가 이천만 명인 일본의 경우1614년에 이르자 어림잡아 삼십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새롭게 도착한 유럽인을 환영하는 아시아인들은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다. 17세기 이후로 해서 제국의 진보와 함께 아시아로 확산된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또한 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독일 경건파(Pietists) 소속의 바톨로뮤 지겐발크(Bartholemäus Ziegenbalg, 1682–1719)와 하인리히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52)는 덴마크의 후원을 받으며 1706년 인도에 입국했다. 1792년 윌리암 캐리의 인도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국 침례교 선교회(English Baptist Missionary Society), 1795년에 결성되어 중국에 간 최초의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파송한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812년에 만들어져서 최초의 북미 개신교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을 버마로 파송한 미국 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와 같은 개신교 선교 단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인 이유로 진출하는 나라라면 어디를 가리지 않고 함께 갔다.1840년대와 1860년대 초 아편 전쟁(Opium Wars)의 여파로 생긴 유럽의 중국 내륙 진출은 영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1832-1905)에 의해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1865년에 생겨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시암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졌다.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말레이지아, 방글라데시, 포모사(Formosa), 세일론(Ceylon) 및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세기 미국의 확장은 미국 선교사들을 경제적으로 유리한 중국, 일본, 태평양 제도로 진출하도록 만들었다. 초기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 성장은 1630년대 후반에 있었던 가혹한 핍박 때문에 중단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뿐 아니라 1850년대 일본이 스스로 2세기 동안 시행한 서방 세계와의 격리 상태가 강제적으로 끝나고 난 직후에는, 일본에도 약간의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톨릭은 1780년대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핍박을 받았다.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가 열리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18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요한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의 조언에 따라, 선교사들은 교회 개척에 있어서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그리고 자전(self-propagating)이라는 “삼자(three-self)” 원칙을 도입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외국인과 한국 설교자의 공동 노력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그 성장은 1907년에 있었던 대 부흥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고, 또한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국 전쟁 이후 보다 더 집중적인 성장을 한 한국 기독교는 이제 선교사를 나머지 아시아 국가와 전 세계에 보내는 수준이 되었다. 왜 복음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많은 중요한 요인들 중에서도 한 가지 핵심적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가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deity)에 대한 토착 의식이다. 고대 한국에서 최고의 신은 하나님(Hananim)으로 불린다. 온 우주를 지배하고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신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모두 다 카미(kami)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열도를 창조한 신화적인 창조자, 자연을 다스리는 신비로운 힘, 그리고 지배자 가문의 조상 정도의 신은 있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supreme deity)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만이 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런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최근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은 아시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빠르게 바꾸기 위해 외국인 및 해당 국가의 복음 전파자를 사용했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북동부 인도의 나갈랜드(Nagaland) 정도가 놀라운 수준의 기독교 성장이 일어난 유일한 곳이다. 좀 더 최근을 살펴보면, 중국도 1억에 가까운 사람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거의 천문학적 성장을 이루었다. 국내외 아시아 선교사들은 인도, 싱가포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 그 어느 때 보다 “아시아 선교”라는 사명에는 이제 전 세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참여하는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원제: The Church in Asia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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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교회의 세 가지 지표와 거품을 깨는 방법
by Eugene Park
2021-07-26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최근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는 지금 Fox와 CNN처럼 보입니다. Fox 교회와 CNN 교회는 들어가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우선이 되어버린 교회니까요.”너무도 많은 교회가 당대의 당파적 거품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너무도 걱정스럽고 슬픈 오늘날의 경향이라고 호튼은 말한다. 교회의 진정한 소명은 이러한 당파적 구분을 초월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거품에 관해 꼭 알아야 할 점은 당신이 거품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투명한 거품은 닿았을 때 실제와 접촉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상 당신의 인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 있다. 거품 교회의 지표거품 교회를 분별하는 세 가지 지표가 있다. 1. 교리보다 이데올로기호튼이 관찰한 바와 같이, 거품 교회의 주요 지표 중 하나는 교리보다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담임 목사의 교리적 입장보다 그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는 교인들이 다수인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그 교회는 거품 교회일 가능성이 높다. 정작 십계명은 제대로 모르는 평범한 교인이 어떤 특정 정당의 강령은 아주 잘 알고 있다면, 그 교회는 거품 교회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2. 동일성거품 교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교회 내부의 동일성인데, 이건 물론 단순히 지리적 요인 때문일 수도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조나단 로든(Jonathan Rodde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극심한 지리적 분파주의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단순히 몽고메리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것만으로도 교회는 이념, 정치, 심지어 TV 프로그램에서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찰 수 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표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가? 그럼 그 교회는 거품 교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3. 우리 vs. 저들거품 교회에 만연한 것은 적개심에 가득한 어조로 사고방식이나 문화가 다른 “밖의 누군가들”을 향해 교인들이 내뱉는 호전적인 위협의 표현이다. 만약에 당신이 내적 제자도보다는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더 신경을 쓰고, 또한 힘을 합쳐서 선교에 힘쓰기 보다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 복음주의 교회의 오류를 나열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에 있다면, 당신은 지금 거품 교회를 다니고 있다. 거품 교회의 거품을 터뜨리려면솔직히 말하면 어느 교회에나 다 어느 정도의 거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품이 낀 현실은 결코 성경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바울은 교회가 계급, 민족, 관점에서 혼합적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갈 3:2; 골 3:11).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거품이 터질 때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고 또한 “성장함으로 교회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울 수 있게”(엡 4:16) 된다. 거품을 어떻게 터뜨릴 수 있을까? 세 가지 방법이 있다.1.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도록 하라가장 좋은 방법은 거품을 단박에 터뜨리고 강제로 다양성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듀크 대학 교수인 크리스 베일(Chris Bail)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시각에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도성을 띄도록 만들 수는 없다. …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견해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따라서 거품에서 공기를 빼려면 최대한 부드럽게 하는 것이 좋다. 급하게 터트리려고 하면 의도치 않게 거품이 오히려 더 강화될 수 있다. 중요한 사역을 변경하거나 또는 어려운 주제를 다뤄야 할 때, 즉각적으로 “대립하는” 토론을 갖기 보다는 작고 소박하게 시작하도록 하라.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성숙한 교인 몇 명을 섭외해서 개인적인 식사를 통해 자연스러운 대화에 초대하라.2. 문제를 제기하라주제와 관계없이 거품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주제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주제를 꺼내놓고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양쪽 진영 어디에서라도 생길 수 있는 이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인화성이 큰 문제를 피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한 대화를 우회하면 할수록, 교인들은 더 큰 거품을 가진 더 “안전한 공간”을 찾아 더 많이 옮기게 되고, 그럼으로 그들의 생각은 더욱 더 고착될 것이다.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설교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정직한 토론까지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기적으로는 이런 시도가 더 많은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화합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라. 3. 소셜 미디어 제자도종종 과도한 소셜 미디어 사용이 이러한 거품의 원인이라는 비난을 받는데,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단지 성도들에게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하라고 말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정도로 상황이 간단한 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소셜 미디어를 기독교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즉 온라인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는 방법, 정보를 현명하게 검토하고 공유하는 방법, 영적 지체를 양육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식, 그리고 온라인에서 행동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제자훈련을 시행해야 한다. 더 나은 종류의 거품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거품 그 자체이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요 15:19; 롬 12:12),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세상과 구별됨으로 오히려 교회는 이제 전쟁을 위해 강화된 거품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과 나그네들이 복음을 듣고 공동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현실과 동떨어진 거품이 아니라 현실에 더 가까운 거품이다. 오늘날 격변하는 문화적 순간에 다양한 부족, 언어,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교회 외에 어디에서 그들의 다양성을 품어주는 공동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교회는 언제나 서로 간에 완전히 다른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가장 독특한 가정이었다. 분열의 거품이 우리를 더욱 더 소외시키는 오늘날이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모든 거품을 터뜨리는 권능과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긴장을 없애고 벽을 허무는 드문 공간이 될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원제: 3 Signs Your Church Is in a Bubble (and 3 Tips for Popping 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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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by Ellen Mary Dykas
2021-07-07
한번은 동성애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강의한 적이 있다. 강의를 마친 후에 ‘라이나’라고 하는 자매가 나를 찾아왔다(이는 실명이 아니다). 라이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 남성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이 순탄하진 않았다.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무려 3년 동안, 자신이 소속된 여학생 그룹의 리더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라이나는 수치와 혐오와 근심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에 압도되어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자신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며 그 고통을 지혜롭게 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다.나는 오랫동안 그야말로 아연실색케 하는, 끔찍한 성적 학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현재 내가 맡고 있는 사역은 성적인 죄악과 씨름하며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도움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 중 대다수는 자신이 성적으로 죄를 범했다기보다 그 죄의 희생양이 된 경우에 속한다. 그래서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어떤 때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도 있다.성적 학대는 개인의 인격에 깊은 상처를 주는 폭력이다. 다시 말해, 피해자의 육체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영혼에도 깊은 타격을 준다. 만일 당신이 성적 학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자 한다면, 굳이 나와 같은 상담사역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다 보면, 친구나 가족 또는 직장 동료가 우리를 신뢰하여 자신이 받은 학대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누군가 우리에게 자신이 받은 학대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야 한다. 우리를 신뢰하여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깊이 공감하며 돌봐 주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1.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라: 우리가 듣는 이야기는 현실이다나에게 상담 받으러 오는 여성 가운데 80퍼센트 정도는 어떤 형태로든 성적 학대를 당한 일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적 학대에 관한 뉴스나 통계를 접할 때, 우리 자신이 속한 교회나 일터에도 그러한 학대를 겪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안타깝게도, 최근 교회를 동요시킨 성적 학대에 대한 추문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학대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거나 신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용기 있게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나눈 이들은 재차 상처를 받게 되고, 또는 다른 피해자가 추가로 발생하기도 한다. 성적 학대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외면하는 일은 억압받고 힘없는 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적 학대가 어떤 형태의 고통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또한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심적인 부담을 함께 감당할 수 있도록 깊은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듣는 이야기는 현실이다. 피해자는 매주일 예배 시간이나 자매들이 모이는 성경공부반에, 또 형제들이 참석하는 수양회나 신학교 교실에까지, 아니 더 나아가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영역 속에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에겐 상처가 있다. 그러므로 깊은 공감으로 수용되는 경험이 그들에겐 필요하다.2. 귀를 기울이고 알아 가라: 답변을 주는 일부터 해서는 안 된다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 고통스런 경험을 이해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이때는 상대방의 경험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책이나 아티클로만 그러한 경험을 접했기 때문이다(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듯 말이다). 성적 학대는 쉽고 빠르게 극복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그 충격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알아 가기 위해서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행동이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품고 가장 먼저 보여야 할 태도이다.그러므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야기해 줄 수 있느냐고 부드럽게 요청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사랑의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상대방으로서는 오랫동안 마음에 묵혀진, 어쩌면 수십 년 간 어두운 내면에 감추어진 일을 빛 가운데 끄집어내어 말하기도 어려운 말을 전달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심한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치유에는 시간이 걸린다. 결국 예수님이 돌아와 만물을 회복시키는 그날이 오기까지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슬픔과 아픔 그리고 상처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계 21:1-5). 그러니 기억하기 바란다. 상대방을 치료하거나 고치려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귀를 기울여 그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데 우선적인 임무가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3. 실제적인 돌봄을 제공하라: 또 다른 도움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영적인 도움과 실제적인 돌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돌보신 예수님의 사역을 반영하며 전인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바로 ‘지금’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려 주는 단서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상대방에게 필요한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특히 성적 학대를 최근에 당한 경우라면(혹은 이미 수개월이나 수년이 흐른 경우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해 자문해 봐야 한다.- 상대방이 의학적인 처방을 즉시 필요로 하는 상태인가? 그럴 경우, 직접 상대방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야 하는가?- 상대방이 경찰에 신고해야 할 학대를 당했는가? 그럴 경우, 경찰서에 함께 가거나 상대방을 위해 신고해 줄 수 있는가?- 상대방이 혼자 있는 상황을 두려워하는가? 그럴 경우, 며칠이나 몇 달 동안 상대방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지낼 수 있는가?- 상대방이 자신의 경험과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곁에 있는가? 가령 교회 목사나 리더, 상담가나 친척 아니면 친구가 주변에 있는가? 그럴 경우, 그 사람의 도움을 구해 보도록 상대방에게 제안할 수 있는가?성적 학대의 피해자는 트라우마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상담가라든가 자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의 돌봄이 장시간 필요하다. 상대방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지막까지 그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4. 예수님을 의지하라: 그분의 도움 없이는 지혜롭게 사랑할 수 없다끝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또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의 손길을 구해야 한다.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빈약한 사랑과 의지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거나 충분히 그들의 아픔을 돌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 바깥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능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분의 성숙한 지체나 노련하고 지혜로운 상담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상처 입은 친구를 제대로 도와줄 수 있다.“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시 9:9). 깨지고 멍든 인생이 우리 앞에 있는가? 그렇다면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자.원제: Compassionate Care in a #MeToo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성적학대
동성애
상처
경청
돌봄
예수님
폭력
교회사역
교회
우리 교회는 싱글맘에게 힘이 되어 주는가
by Melissa LaCross
2021-07-06
내가 아들을 낳고 처음으로 간 주일 예배였다. 아기와 함께 예배 드리는 방에 앉아서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며 나는 스피커에서 들리는 설교를 듣고 있었다. 주일학교 시간이 되어서 나는 영아부에 가서 이름을 쓰고 아기를 등록하려는데, 봉사하는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보더니 “애 엄마가 되기에는 당신 너무 어린데?”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기가 막혔지만, “그래요? 하지만 내 아들 맞아요”라고 대답하고는 그냥 몸을 돌려서 교회를 나왔다. 그 교회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다닌 교회였다. 나는 아주 조용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방에서 자랐는데, 거기에서는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이 마치 유니폼을 입는 것처럼 옷을 빼입었다. 십대가 된 나는 교회에 빠진 적이 없었고 또 모든 과목에서 A를 받는 모범 학생이었다. 그랬기에 그런 내가 임신했다는 건 일종의 빅 뉴스였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내 앞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아들을 낳은 나는 자애롭고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동네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다. 시간이 지나다보니 어느덧 우리 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집을 나와 보다 큰 공동체로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어떤 어색함 아니면 침묵으로 대했다.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영아실에서 만난 여자 봉사자처럼 나를 대했다. 교회 안팎에서 내가 아기 엄마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말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내 아들을 동생으로 여겼다. 그들의 말은 내게 낙담을 주었다. 나는 싱글맘이라는 딱지 뒤에 있는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가까운 친구를 갈망했다. 감사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상황에 색안경을 끼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싱글맘으로 두 교회를 다녔는데, 거기에서 나는 나를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들의 모임을 만날 수 있었다. 싱글맘이라는, 결코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그 사람들 덕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싱글맘을 기꺼이 받아주는 교회를 위해, 나는 누군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다음 여섯 가지 수칙(practices)을 나누고 싶다. 1. 잘못된 것을 인정하라, 진실만을 말하라내게 멘토가 되어준, 교회에서 만난 여자들은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 쉬운 답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나의 어려움을 알고 내가 흘리는 실망과 두려움의 눈물을 나와 함께 나눴다. 그들은 내 아기를 안고 내게 커피를 따라주었고, 나는 내가 잃어버린 기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서 누리는 모험에 찬 인생을 생각하며 울었고,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지 못하는, 남들과 같은 번듯한 가정을 생각하면서 슬퍼서 울었다. 내 감정은 외로움의 정도에 따라, 내 또래와 비교할 때 느끼는 열등감에 따라 또는 엄마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사는 삶이 주는 피로감 때문에 들쑥날쑥이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서, 또 내가 품는 의심에 대해서 나의 멘토들은 아무런 정죄함이 없이 들어주었다. 그들은 종종 내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고, 내가 스스로 성경적인 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었다. 믿음이 부족한 내게 그들은 참고 인내하라고 격려했다. 2. 당신에게 붙은 딱지 너머를 보아라그들은 나를 고쳐야 할 문제거리 또는 구해주어야 할 멍청이라고 보지 않았다. 대신 나를 친구 그리고 같은 기독교인으로 보았다. 그들은 내가 느끼는 수치심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그렇다고 내게 어떤 딱지를 붙이지도 않았다. 나를 향한 그들의 이해심은 내가 더 진리를 믿을 수 있게 했으며 또한 사람들이 내게 갖고 있는 편견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했다. 한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죄에 빠졌던 나의 과거와 환경보다 나는 더 가치있는 존재이고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다. 3. 재미를 누려라멘토들과 보내는 시간이 항상 진지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카드 게임도 하곤 했다.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미드 “로스트”를 보았다. 퐁듀를 같이 만들고 각자의 레시피를 교환하기도 했다. 늦게까지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90년대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했다. 아이들 생일을 함께 축하했고 서로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자원했다.4. 아이를 사랑하라그들의 사랑은 나를 지나 내 아들에게로까지 미쳤다. 그들은 내 아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그들의 남편들은 내 아들을 그들의 자녀들이 가는 운동경기에 같이 데려 가거나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그들은 내 아들의 학교생활에도 관심을 가졌고 그 또래 아이들이 궁금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함께 할 수 없는 내 아들에게 또 하나의 남성 롤모델이 되어주었다. 5.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라나의 멘토들은 나를 알았기에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알았다. 내가 장을 보거나 학교에 가고 또 일터에 갈 때 그들은 내 아들을 대신 돌봐줬다. 베이비시터를 구해주기고 했고 또 아는 사람을 소개해서 뒷마당 치우는 것도 도와주었다. 내가 일하고 또 대학원에 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던 몇 달동안, 생각지도 못한 음식을 가져다주어서 나와 내 아들은 매일 밤 먹던 라면 대신 그 음식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6.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격려하라내가 중고등부에서 봉사할 때 그 부서의 책임자는 누가 봐도 너무나 뻔한 내 과거의 죄 때문에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격려했고 나만의 이야기를 학생들과 나누라고 말했다. 중고등부 봉사를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나는 보다 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갈등에 대해서 들을 때면 그런 상황에 통달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누가 봐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엄청난 환난을 만났을 때 그냥 아무 것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기는 쉽다.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게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라고 명한다. 외롭고 아버지가 없는 자들에게 공급처가 되라고 명한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믿는 자에게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라”고 명령하고 있다. 제발 교회가, 우리의 교회가 우리 중에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사랑을 베푸는 장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원제: How to Make Your Church an Encouraging Place for Single Mo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사역
싱글맘
하나님의자녀
교제
가족처럼
실질적인도움
봉사
격려
교회활동
교회에 담임목사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
by Gavin Ortlund
2021-06-22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라면 슬퍼하는 게 당연하다. 담임목사의 공석으로 인한 과도기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은 예상보다 더 자주 찾아올 수 있고, 또 훨씬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기간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있을까? 그런 시간조차 교회의 생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사용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나는 커버넌트신학대학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실천신학 교수이며 신학 석사과정의 학과장인 필 더글라스(Phil Douglass)에게 조언을 구했다. 과도기를 포함한 각종 도전이 난무하는 다이내믹한 교회의 수명과 관련한 실천적인 분야에 있어서 필은 내가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나는 이런 과도기를 단순하게 ‘물에 가라앉지 않고 견뎌야 하는 기간(tread water)’ 정도로 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런 과도기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당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을까?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있어서 과도기는 매우 가치있는 시간으로 쓰일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은 교회 지도자들이 과도기를 통해서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만 주신 하나님의 특정한 사역 방향을 보다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신다. 로마서 12장 4-6절을 보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우리는 보통 이 구절과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등을 엮어서 바울이 기술한 은사와 관련해서 해석한다. 물론 맞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구절 속에 있는 원칙은 교회 전체에 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200개가 넘는 교회를 조사한 결과에 비추어서 볼 때, 아무리 같은 지역에 있는,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교회라고 해도 다 동일한 은사나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니다. 대신 각각의 교회는 다 분명히 ‘주어진 은혜에 따라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각각의 교회는 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만의 특정한 사역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 개교회가 놀라운 집중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허락한 은사와 강점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 교회가 맺는 사역의 결실은 크게 증가한다. 나는 이 주제를 ‘당신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당신 교회의 사역 스타일을 찾아내고 개발하기’(What Is Your Church’s Personality: Discovering and Developing the Ministry Style of Your Church)에서 보다 더 심도있게 풀어냈다. 과도기에 직면한 교회라면 이 책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교회가 소유한 고유한 소명과 은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부록에 제공한 진단표는 특히 더 유용할 것이다. 교회는 언제 임시 목사를 고용해야 할까? 임시 목사가 가져다주는 유익한 점은 무엇일까?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은 만약에 전임 목사가 8년 이상 사역을 했다면, 임시 목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심각한 내분 또는 일종의 도덕적, 영적 위기를 겪은 경우에도 임시 목사가 도움이 된다. 임시 목사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임시 목사는 고통스럽고 힘든 과도기(보통 2년 정도 지속된다)를 거치는 동안 도움이 된다. 또한 특별히 교회의 약한 부분을 돕고, 갈등을 해소하고 또 사역과 재정에 필요한 안정을 가져다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임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교회가 앞으로 교회의 사역 방향과도 잘 맞지만 동시에 자신의 개성도 잘 살리는 후임 목사를 잘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면 장로들과 직원들은 이런 과도기에 교회의 필요를 가장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장로들과 직원들은 보다 더 명확한 비전, 강한 리더십, 그리고 지속적인 목양 사역을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불안한 시간에 꼭 필요한 안정감을 공급할 수 있다. 장로들과 직원들은 많은 교인들에게 담임 목사가 떠나는 것이 마치 죽음과도 같이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쿠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가 그녀의 고전, ‘죽음과 죽는 것에 관하여’(On Death and Dying)에서 제시한 슬픔 주기 모델(the grief cycle model)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슬픔을 견디는 과정의 몇몇 측면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목사님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거부. 이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목사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경우, 얼마간의 시간은 아예 그의 부재를 둘러싼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분노는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교회를 떠난 목사에게 화를 낼 수도 있고 또는 목사를 내보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를 품을 수도 있다. 이런 분노도 슬픔을 견디어내는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다른 사람들을 향해 훨씬 덜 정죄하게 된다. 수용은 마지막 단계다. 슬프고 후회되고 두렵고 그리고 불확실함은 이런 과도기에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목사가 떠나고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새로운 담임 목사가 오기 전에 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고, 새로운 담임 목사가 해결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문제는 어떤 것인가? 장로들과 직원들은 교인들 사이의 주요한 갈등, 특히 사역 스타일의 차이와 교회의 방향성에 관한 충돌과 관련된 분쟁의 경우에는 사전에 처리해야 한다. 또한 직원들을 교체해야 한다면, 장로들은 빨리 인사 문제를 정리하고 행여 사람이 바뀌는 데서 발생할지 모를 갈등도 사전에 해결해야 한다. 만약에 교회가 정체에 빠졌거나 쇠락하고 있다면, 장로들은 새로운 담임 목사를 격려해서 교회가 사역 방향과 관련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 보통 그런 변화는 부임 첫 해에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변화는 교회의 고유한 사역 스타일과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교회가 청빙 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는 게 좋을까? 청빙 위원회가 일으키는 실수는 뭐가 있을까? 청빙 위원회를 만들 때 가장 흔히 하는 실수는 교회가 지향하는 사역 방향 및 비전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청빙 위원회에 포함시키는 경우다. 그것은 청빙 절차에 지장을 준다. 장로들은 무엇보다 교회의 핵심이 되는 사역 스타일 및 교회의 비전을 명확히 하고 거기에 가장 잘 맞는 후보자를 교인들에게 내세워야 한다. 또 하나의 실수는 목소리가 크고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한 사람, 또는 어떤 개인적인 목적이 있는 사람을 청빙 위원회에 넣는 경우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청빙 위원회에 들어와서 기꺼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을 청빙 위원회에 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교회 전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더 내세우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교회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청빙 위원회에 넣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다. 원제: Your Church Is Without a Senior Pastor: Now Wha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생활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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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필더글라스
임시목사
청빙위원회
지도자
슬픔주기모델
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려야 할 기도
by Sam Allberry
2021-06-19
어떤 목회자가 언젠가 내게 말하길, 주일에 교회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너무도 자주 ‘목회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곧 덧붙여 말하기를 일단 예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고 했다. 그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교회에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나 그런 시기가 닥치면 너무도 쉽게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해버린다. 눈이 조금이라도 왔다거나, 목이 약간이라도 따끔거린다거나, 월요일까지 마쳐야 하는 일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교회에 가지 않을 이유들은 넘쳐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교회에 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0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두 가지다."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교회에 빠지는 습관은 오늘날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이천 년 전에도 언약 공동체에 참여하는 불편을 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있었다. 아주 오래전 매우 다른 상황 속에 살던 이들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습관이 있었다면 이는 현대인의 문제라기보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마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빠지고자 하는 유혹은 늘 있었다.하나님의 격려히브리서 10장 24–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우리를 믿음 안에서 격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를 통해 믿음 안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셨다. 다른 이들 역시 우리의 격려를 필요로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두 가지를 잃게 된다. 당신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를 받을 수 없고, 그들도 당신의 격려를 받지 못한다. 당신은 교회에게, 교회는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다. 이를 깨달으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에 빠지게 되는 두 가지 가장 흔한 원인에 대항할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교만과 낙심이다. 교만당신의 여생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그에게 쓰임 받는 데 당신의 삶을 보내고 싶은가?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신도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다른 이들 역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그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방식이다. 지역 교회를 벗어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격려를 충분히 얻을 수 없고,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도울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 없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이 지역 교회를 통해 내게 주시는 격려가 없어도 살 수 있어.’ 그 ‘격려’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이다. 사도 바울 역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몸의 각 지체에 비유했다. 어떠한 공동체에 가든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를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살아있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눈은 더는 볼 수 없고 머리 역시 기능하지 못한다. 이 지체들이 몸에 붙어있을 때는 아무도 그들의 유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다른 지체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눈이나 머리처럼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주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심지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교회도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의 지원과 도움 없이도 그들은 독자적으로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몸에서 떨어져 나온 눈이 뭔가를 볼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이다. 낙심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이’ 교회 공동체에 별 필요 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라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바울의 비유에 나온 눈이나 머리 같은 존재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몸에서 덜 중요한 지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도 잘 알고 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고전 12:15).이메일 쓰기, 장바구니 나르기, 먹기, 또는 피아노 치기처럼 손이 하는 일을 발이 하려고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 있어 발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손이 늘상 자기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발을 통해 몸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당신이나 다른 이들 모두 똑같이 교회에 중요하다. 하나님께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이 본문은 우리에게 서로 권하라고 한다. “영적으로 충분히 앞서 있는 이들로부터 권함을 받아”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라.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건 어리건, 우리의 재능과 은사가 어떤 것이건 누구나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존재다.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다. 당신은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똑같은 이유로 낙심한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기도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무관심하든, 얼마나 두렵게 느끼든 상관없이, 교회로 향하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기도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적어도 한 가지 일로 큰 격려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격려받는 일에 대해 ‘마음을 열라’. 그날 부른 찬양곡의 가사일 수도 있겠고 예배 중 대표 기도나 설교의 한 대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예배 전이나 후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준 한마디 말로 인해 격려를 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 이를 구하라.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격려하고자 하신다. 둘째, 적어도 다른 사람 한 명에게 당신이 큰 격려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당신이 해주는 말을 통해 그리 할 수도 있다. 내키지 않을 때에라도 신실하게 교회에 나와 섬기는 당신의 모습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될 수 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바로 떠나지 말고 적어도 한 사람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라.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와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커피나 간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회중석에 남아 주위에 있는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백성으로서 함께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도록 우리를 디자인하셨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고자 하신다. 교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분을 신뢰하라.원제: Your Church Needs You This Sunday: Two Prayers to Prepare for Worship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교회생활
격려
교만
낙심
기도
교회공동체
목회
사도바울
다원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by 고상섭
2021-06-17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영국 교회의 침체 원인이 세상은 다원주의 사회로 변했는데 교회는 여전히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있는 문화 참여’라고 말했다. ‘이미’ 임했다는 것을 강조하면 기독교 승리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에 집중하면 ‘기독교 염세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에서 오늘날 복음전도가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를 겸손, 소망, 사랑, 용기의 결핍 때문이라 분석한다. 이 네 가지 자질은 훈련을 통해 길러야 하는 습관이나 기술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히 이해할 때 우리에게 맺혀지는 은혜의 결과다. 즉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전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복음의 회복이 필요하다. 복음은 어떻게 네 가지 자질을 길러주는가?첫째, 복음은 교만을 제거함으로써 겸손하게 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이지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무례한 기독교’를 양산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은혜를 자신들만 특별히 받는 특권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무시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 민족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말씀은 먼저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라는 의미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사람들을 배척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의 결과이기에 아무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복음은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거나 더 도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라는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신자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탁월한 사람들이 있고, 인간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이 있음을 함유한다. 복음은 구원받은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정체성을 가진 겸손한 사람의 모습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말했다. 복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교만을 제거함으로써 낮은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겸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둘째, 복음은 냉소주의와 비관주의를 제거함으로 소망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은 도저히 안돼”라는 선입견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구원에서 소외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던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로 변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잔인한 범법자들도 감옥 안에서 복음을 듣고 회개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게 된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분이시다. 복음은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셋째, 복음은 무관심을 제거함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3~47).예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을 배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팀 켈러는 로마서에서 거짓된 사랑의 특징 중 하나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라 말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은혜를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고 좋아한다. 그러나 동일한 저자가 쓴 요한일서 3장 16절을 외우고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요한복음 3장 16절은 요한일서 3장 16절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는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형제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관용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준다. 넷째, 복음은 두려움을 제거함으로 용기를 준다. 복음을 전하기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복음을 전했다가 거절을 당한다면 자신이 쌓은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또 단순한 거절이 아닌 복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거절과 비판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더욱 위축시킨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상관없이 영원한 사랑과 안정감을 우리에게 공급한다.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사랑이며,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로마서 8장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랑의 확신이 사람들의 인정이나 박수가 없어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심지어 거절이나 비판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우리가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기뻐할 때 복음은 이 네 가지 자질을 우리에게 공급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질을 갖는다고 해서 복음의 열매가 저절로 맺혀지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분명 이렇게 물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을 겸손과 인내와 사랑과 용기로 대해도 그들이 분노와 독설로 대응하고 우리를 소외 시키려고 하면 어떻게 해 야 하나요?’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는 성공이 보장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옳은 길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반드시 사랑은 길을 찾기 마련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니다. 복음을 누리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고, 또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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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모임의 목적을 망각하는 여덟 가지 모습
by Kristen Wetherell
2021-06-12
목요일 저녁, 성경책을 펴고 남자 성도 여섯 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다. 한 사람이 시편 31편을 읽고 삶에 적용할 내용에 대해 나누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하다.점심 식사를 마친 주일, 바쁜 오전 예배와 모임 이후 교회는 조용하다. 옆 방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고 다섯 가정이 모여 주일 설교 말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에 굶주렸으며 목말라하고 있다.소그룹, 가정 모임, 라이프 그룹, 또는 선교 공동체... 가까운 성도들끼리 교회에서 공적 예배 이외에 모이는 모임들은 그 모임을 무엇이라 칭하든지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종종 왜 소그룹 모임을 하는지 그 모임의 목적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 세웠던 훌륭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곁길로 빠지기 쉽고, 왜 모이는지 그 이유조차 잊게 될 수도 있다. 때로 우리는 쉽고 편안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거나 구성원들을 서로 더 가까이 이끌 수 있는 변화의 추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소그룹 모임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모여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목표를 상실하는 여덟 가지 유형의 소그룹 모임이다.1. 성경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소그룹 모임에서 성경을 가장 중요한 중심이 아닌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경우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성경이 인생에 도움을 주거나 위안의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인생과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유용한 조언과 교훈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성경을 모임의 핵심으로 경외하기보다는 시간 여유가 있거나 누군가가 말씀에 대해 질문할 때만 성경을 참조한다.2. 모임을 사교클럽으로 변화시킨다예배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이라면, 소그룹 모임은 서로의 관계를 깊게 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논하는 뭔가 차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임의 초점을 살아 있고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기보다는 우정을 쌓고 친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3.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제한다새로운 사람들이나 뭔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에게는 모임의 문을 열지 않는다. 새로운 소모임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다른 그룹에서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모임은 그동안 구성원 간에 깊은 신뢰를 쌓아 왔고 이미 서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 곤란하다. 성장으로 인한 좋은 점들보다는, 모임이 너무 커지게 되면 그룹이 나누어질 수 있으므로, 이런 단점을 고려한다. 또한 모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배제한다.4. 교회의 예배보다 모임을 우선으로 한다주일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보다는 소그룹 모임을 중심으로 참석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이므로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통해 주신 설교를 들으며 회중과 함께 찬송하고 세례와 친교에 참여하며, 자신의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섬기는 것보다는 소그룹 참여를 더 우선시한다. 더 크고 영원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모임은 모임 그 자체에서 끝나도록 한다.5. 기도하지 않는다모임에서 기도를 주제로 이야기하거나 기도하고 싶은 느낌도 들지만, 실제로 기도하지는 않는다. 서로 친근하게 이야기하고 최근 근황도 물으며 심지어 기도 제목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기도 시간을 따로 갖지 않고 모임을 마무리한다. 기도는 모임의 마무리 전, 서둘러서 간단히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려고 고민하지는 않는다. 매주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한다.6. 정직하게 공유하지 않는다인생에 대해 새로 느끼거나 경험한 점들을 서로 공유하지만 이러한 나눔이 너무 깊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의심과 힘든 싸움, 특히 죄의 고백 또는 누군가를 여러 사람 앞에서 약자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나눔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나눔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들의 시선이나 사람들의 편안함을 훼방하기 때문이다.7. 그룹 시간 외에는 서로 교제하지 않는다소규모 그룹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중에 편안히 만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외의 시간을 함께 보내겠다고?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 일, 스포츠, 가족, 친구 및 끝없는 다른 약속들이 남은 시간을 다 차지할 것이다. 게다가 같이 교제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은 피하는 것이 좋고 각자의 일정에 충실하도록 한다.8. 상황이 어려워지면 모임에서 나간다자신의 소그룹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무게를 느끼거나, 예상하였던 것과는 다름으로 인한 실망, 또는 성장의 한계를 겪게 되면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냥 모임을 떠나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그룹을 찾는다.함께 나누는 생활내가 위에 언급한 내용이 어떤 면에서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 자체도 받아들이기 거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도들이 소그룹의 목적과 운영을 주제로 토의할 때 내가 들은 여러 가지 방법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중, 어떠한 내용이든 자기 생각이나 경험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면, 용기를 갖기 바란다! 다른 많은 형제자매처럼 나 역시 중요한 요점을 놓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을 찬양하라. 소그룹 모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며 그에 속한 생태계로서 예배 밖에서의 친교 모임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배 중, 회중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말씀은 우리의 소그룹 활동을 통한 생활 중 사람들의 마음과 여러 상황 가운데 풍성히 거하며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골 3:16). 하나님께서는 소그룹 모임이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성령에 점점 더 의존케 하시며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시작하신 자신의 사역을 완수하시면서 우리가 말씀에 따라 변화되고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원하신다.우리가 때로 요점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분의 은혜를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성도의 교제를 통해 더 많이 주시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우리가 각자의 본분을 지키며 예수님을 따르도록 독려한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원제: 8 Ways to Miss the Point of Small Grou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소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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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
목회
교회
라이프그룹
공동체
예배
예배를 위한 예배가 되지 않도록 하라
by Bob Kauflin
2021-06-06
거의 40년 전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교회에서의 저녁 모임이 끝날 무렵,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어진 헌신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Laurie Klein이 작사한 곡을 듣게 되었고, 이어 함께 찬양하였다.사랑해요 목소리 높여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내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단지 이 곡의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생에 있어서 나의 참된 소망은 주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세상을 향한 관심, 집중을 가로막는 감각적 유혹, 그리고 무관심의 끊임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했다. 나는 주님을 사랑했다.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우리가 주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부분이다.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분에 관해 선포하는 것은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 수 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우리에게 ‘애정이 결핍된 빛은 형식주의나 무신론으로 끝나버린다’고 경고한다.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상기시켜 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많은 열정적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노래하고, 그분을 찾으며, 목말라하고, 기뻐하고, 그분을 원하고, 또는 그 이상에 관한 여러 구절이다(시84:2; 63:1; 64:10; 73:25).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며 사람들을 책망하셨고(마15:8), 베드로는 “예수를 우리가 보지 못하였지만 사랑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라고 기록하였다(벧전1:8).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애정의 표현은 우리가 예배에서 부르는 곡들의 가사를 통해 의미를 찾아야 하며 그 가사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을 예배하며 찬양합니다. 당신 없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나의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참된 예배를 드리려면우리의 찬양과 기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바에 의해서만 지배되고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느끼고 계시는지에 대하여는 소홀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느낌만으로 감정을 채워 나갈 위험성이 있는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예배의 형식 자체를 예배하게 된다.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찬양으로 표현할 때 어떠한 생각을 통해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 다음 네 가지 정도를 고려해 볼 수 있다.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찬양으로 표현한 성경 기록은 많지 않다.의외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편에 시편 기자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명백하게 기록한 구절은 단 두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시편 18편 1절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이고, 두 번째는 시편 116편 1절의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라는 구절이다. 반면 시편 기자는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에 대하여는 백 구절 이상 기록하고 있다.2.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과거 주님에 대한 열정의 순간에 빠졌던 동일한 경험을 우리가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입술의 고백이 위선적으로 느껴질 경우에는? 이럴 때 특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분의 동일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분에 대한 나의 헌신은 이를 만족시키거나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죄에 대한 형벌을 견디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독생자를 통해 분명하고도 완벽하게 증명되었다.3. 찬양으로 예배하는 것은 단순한 반응 그 이상이다.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우리가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에베소서 5장 19절은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찬양은 배움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분의 성품, 그분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모든 진리가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의 찬양과 사랑과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깨우쳐주는지 서로에게 상기시켜준다.4.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단순히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 그분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낸다.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메모, 이메일, 전화 통화로 또는 얼굴을 맞대고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말이 상대방에 대한 즐거움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와 희생 또는 관용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의미 없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나타나는 우리 삶에서의 더 중요한 예배를 쉽게 대체해 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그분의 사랑 안에서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감격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들을 곰곰이 살펴보노라면 더 놀랍고 근본적인 사실은 그분께서 내 죄, 실패, 무관심, 산만함, 부적절함, 교만함, 자기중심적이고도 위선적이며 자기연민에 빠진 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우리는 반복적인 깨우침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주님, 사랑해요.”라고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능력을 주시는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는 시간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 4:10).원제: How Not to Worship Your Worship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명근
영성
예배
참된예배
그분의사랑
시편116
주님사랑해요
경배
존오웬
사랑안에서
자살 방지를 위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by Kathryn Butler
2021-06-03
운전하면서 지날 때마다 목이 조여 드는 느낌을 주는 고가도로가 있다. 가드레일을 잇는 체인 링크 사이에는 몇 년에 걸친 바람과 비 때문에 회색으로 바래고 곰팡이가 핀 조화가 여전히 놓여있다. 나는 그 꽃이 누구 때문에 거기 놓여있는지 알기에, 거기를 지날 때면 눈물을 참곤 한다.그는 걱정이라고 해야 농구 연습과 다음 수학 시험 정도에 국한되었어야 할 십대 소년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지금 조화가 놓인 바로 그 고가도로에서 그가 뛰어내려 응급실에 실려온 후였다. 그날 밤에 있었던 많은 기억이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주는 괴로움과 그의 어머니의 비명 또 아들의 사망 소식에 쓰러지던 모습.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그가 오로지 자살을 유일한 탈출구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계속되는 삶이 주는 고통이 생의 마지막이 주는 공포를 압도할 정도로 그를 괴롭힌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와 비슷한 어둠 속을 걸었던 경험자로서 그를 다시 빛으로 인도할 방법이 내게 전혀 없었던 것인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루 하루를 버티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또한 궁금하다. 커지는 비극자살 충동은 매년 미국에서만도 수만 명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자살이 앗아가는 생명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간다. 자살 발생률은 1999년부터 2017년까지 33퍼센트 증가했다. 자살은 이제 10-34세에서는 두 번째 주요 사망 원인이고, 35-54세에서는 네 번째 사망 요인이다. 이러한 통계 아래 숨은 사실은 자살이 실로 깊은 고통을 반영한다는 현실이다.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의 90퍼센트는 근본적인 정신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는데, 특히 우울증과 조울증 및 약물 남용이 그것이다. 사회 경제적 스트레스 요인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2000년 이후 백인 중년 미국인들, 특히 경제적 쇠퇴가 가장 가파른 농촌 지역 사회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COVID-19 위기 동안 자살 발생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빈곤층 사이에서는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는 히스패닉계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뿐 아니라 전염병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필수 근로자 및 무급 간병인이 포함된다. 자살 통계는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이 고문처럼 느껴지고 희망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처럼 보인다는 점을 암시한다. 고난에 휩싸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는 절망에 빠진 자들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그들을 다시 희망 속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교회 내 예방어떤 면에서 교회는 이미 돕고 있다. 규칙적인 교회 출석과 영적 대처는 모두 다 자살 위험을 낮추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2017년 라이프웨이(Lifeway) 연구에 따르면 교인 중 3분의 1이 가까운 친구나 가족 중에서 자살을 경험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살자의 3분의 1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지만, 교회 지도자나 교인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고작 4퍼센트에 불과했다.이런 단절은 교회가 놓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잠재적인 기회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삶을 이어간다. 교회가 자살 위기의 끔찍한 순간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그들도 얼마든지 회복하고 번성할 수도 있다. 열쇠는 교회가 이런 형제자매들과 계속 연결되어서 자살의 그림자가 언제 그들을 잠식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여 용기를 갖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다음의 간단한 지침은 자살 충동으로 고군분투하는 사람을 식별하고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도울까1. 연결되어야 한다내 자살 충동을 번번이 좌절시킨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이런 상황은 흔하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끊을 가능성은 적어진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지독한 외로움 때문인 경우가 많고 사실상 사회적 고립이야말로 자살로 인한 사망의 큰 위험 요소다.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다른 형제자매의 고통을 알 길이 없다. 한 몸이 된 지체로서(롬 12:5) 우리 모두는 서로 속해 있고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자살 예방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알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돌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참여하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만큼 충분히 돌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2. 경고 신호를 인식하기예측이 어렵기로 악명 높은 게 자살이지만 특정 경고 신호는 다가올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하면 주저하지 말고 대화를 나누라. - 특히 초조감이 동반된 악화된 정신 건강 (우울감, 불안 등)- 무모한 행동 (약물 사용 증가 등)- 사회적 활동 회피- 청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때- 죽음에 대한 이야기 또는 글쓰기- 자살하겠다고 협박- 우울증 기간을 겪은 후 극적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짐 (자살 시도를 의미할 수 있음)- 자살 수단의 모색- 구체적 자살 준비 행동 (귀중한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 등)3. 대화하라누군가의 행동이 염려된다면, 마음을 열고,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개인적인 대화를 먼저 가져라. 전문가들은 자살을 고려하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봐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질문은 환자의 머릿속에 자살에 대한 충동을 넣기는 커녕 오히려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고통받는 사람과 논쟁하거나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하거나 또는 어줍잖은 조언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냥 듣고 함께 있으라.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자살 생각을 비밀로 유지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는 경우에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비밀 유지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과 안전이다. 4. 위기의 심각성 정도를 판단하라 대화 중 자살 충동이 드러나는 경우라면 그 심각도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획과 수단 및 의도에 관해서 질문하라. - 이 사람은 자살할 계획을 갖고 있는가? - 자살할 수단이 있는가? - 정말로 자살할 생각인가?죽고 싶다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표현하면서 구체적인 계획과 수단 또는 실제 의도 자체는 거부하는 경우라면, 면허를 가진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적극적인 자살 생각과 더불어 명확한 계획 및 사용 가능한 수단뿐 아니라 강렬한 의도까지 표현한다면, 즉시 입원시켜야 한다. 당신의 눈에 상황이 확실하지 않다면 무엇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도움을 구하라구체적인 계획과 수단 또는 의도 없이 수동적인 자살 충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치료를 받도록 격려하고 의사나 심리치료사에게 연락하도록 권고하라. 계속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정기적으로 후속 조치를 통한 지원을 제공하라. 적극적으로 자살 의사를 밝히는 경우라면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한국)으로 연락하라. 또는 당장이라도 응급실로 데리고 가라.가능하면 그 사람이 손을 댈 수 있는 모든 치명적인 수단을 주변에서 제거하라. 미국에서는 전체 자살 사망의 절반 이상이 총기로 인한 것이며, 주변에서 총만 치워도 자살률이 급격히 감소한다. 슬퍼하는 자를 위한 도움자살의 비극은 피해자를 넘어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부주의한 말은 깊은 상처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라이프웨이 연구에 따르면 자살 피해자 가족 중 절반 이상은 사람들이 그들을 돕는 것보다 그 이야기를 가지고 잡담거리로 악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이 가져다준 엄청난 상실로 슬퍼할 때 복음이 주는 희망의 필요성은 더욱더 절실해진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자살과 관련한 바른 성경적 진리를 모르고 있다. 자살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자살했다면 그 사람이 결코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심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살이라는 죄까지도 덮는다고 주장하는 미구엘 누네즈(Miguel Núñez)의 심도 깊은 글을 적극 권장한다. ‘자살 예방: 목사와 목회 상담자를 위한 핸드북(Preventing Suicide: A Handbook For Pastors, Chaplains, And Pastoral Counselors)’은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다. 약한 사람들에게 어둠이 내리고 일상생활을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때 그리스도의 몸이 시원한 생수를 제공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로 서로를 격려하고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의지할 때 외로움은 우리 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빈약한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희망을 확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가장 깊은 어둠도 뚫어내는 한 줄기 빛이 우리 속으로 비춰진다. 원제: How The Church Can Help In Suicide Preven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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