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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매일 큐티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르치시다

7월 10일 말씀 QT_누가복음 4장 14-30절

2022-07-10

누가복음 4장 14-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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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능력 있는 말씀


전구보다 태양은 더 뜨겁고, 밝다. 인간의 능력은 약하나 성령님의 능력은 강력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철저히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신다. 


14절의 ‘능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뒤나메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특별히 기적적인 ‘능력’, ‘권능’, ‘전능한 일’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만이 지니신 신적인 힘이 느껴진다는 의미다.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셨다는 증거다. 그 결과 금방 소문이 난다.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능력 있는 말씀에 사람들이 칭송한다(14-15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높인다. 존중하고 환영한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도 영적 권위가 필요하다. 실제적인 권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날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아야 한다(엡5:18).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나 친밀하게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의식해야 한다. 존중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 자신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는가? 오늘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 


무서운 선입견


선입견을 버려야 선한 은혜를 받는다.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신다. 다음 구절을 계속 읽지 않으신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신다. 회당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주목한다(16-20절). 청중은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압도된다. 이때 21절에서 다시 말씀하신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깜짝 놀란다. 22절에 보면 ‘놀랍게 여겨’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에다마우존’이다. ‘놀라다’, ‘칭찬하다’, ‘칭송하다’, ‘경탄하다’라는 의미다. 즉,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성령님의 능력을 느낀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 발생한다. 예수님께서 이전과 다르게 고향에서 배척당하신다. 29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 출발은 무서운 선입견이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


오늘날 교회에도 성도나 리더들의 미성숙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10년이 지났어도 선입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성장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봐왔던 사람들은 선입견이 가득하다. 여전히 주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 그러나 듣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 다른 곳과 정반대다.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말씀은 상반된 반응을 일으킨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듣고 찔려 회개한다(행2:37-42). 하지만 스데반이 설교할 때 사람들은 듣고 찔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다(행7:54-60). 오늘날 말씀 앞에 회개와 결단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반응이든지 예수님 안에서 소망이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런 감정도 생긴다. 


나 자신은 선입견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은혜를 누리고자 버려야 할 선입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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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8시 말씀 QT가 현대인들이 성경을 쉽고 감동적으로 읽도록 제작한 오디오 성경 '드라마 바이블'과 함께 합니다.

    해당 본문 듣기를 클릭하면 본문 말씀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 :조태성(NEW LIFE 새생명교회)
출처 : Next세대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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