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

사랑을 베풀려면, 사랑이신 그분을 받아들여라

저자명 Tim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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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고상섭 목사(그 사랑교회) /  출판사 두란노 / 작성일 202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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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용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돌아왔다. 왜 이 시대에 하필 용서를 택했을까? 오늘날 용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지만 대부분 한 쪽 진리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팀 켈러는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또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에 대해 성경과 문화를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미투(Metoo)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2006년 성폭력 피해자인 타라나 버크가 비슷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공개 발언을 돕고자 만든 용어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다양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다. 직장에 새로운 규정이 도입되기도 했고, 학대 피해자를 위한 공식, 비공식 지원도 늘어났다. 그러면서 함께 대두된 것이 바로 용서의 문제였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피해들을 입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다.”는 메시지들이 기사를 통해 나오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교회 안에서 더 큰 피해를 받는 경우들도 생겨났다. 과연 기독교의 용서가 죄를 덮어두고 들추어내지 않는 정도인가? 


용서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 


오늘날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된다. 특히 용서에 대한 주제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용서(값싼 은혜)는 모든 문제를 개인화해서 사회적 이슈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한다. 또 거래적 용서(인색한 은혜)라는 개념도 있다. 피해자가 죄를 지적하고 가해자가 자백하고 사과하면 피해자가 그 감정을 정리한다는 개념이다. 마사 누스바움으로 대두되는 거래적 용서는 오늘날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재판과 징계의 심리를 과도히 드러내는 단점이 있다. 또 아예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은혜없음)는 의견들도 있다. 용서를 하면 피해가 반복되기 때문에 분명한 징벌을 통해 사회를 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속적인 용서의 모델로는 인간관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팀 켈러는 오늘날 용서라는 주제에 대해 빈약해진 이유를 개인주의적 접근을 하는 심리치료 문화와 새로운 수치와 명예 문화의 영향이라 분석한다. 오늘날은 개인이 사회의 기대와 역할과 구조에 억압을 받고 지배당한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나 다른 권력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피해자일수록 더 큰 명예와 도덕적 품성을 부여받는다. 기존 사회 위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명예가 더 커질 수 있다. 이렇게 뒤바뀐 명예문화는 힘 대신 허약함을 중시하고, 또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도 늘 선악으로 대치되는 사회를 낳게 된다. 이런 문화를 더욱 가중시킨 것은 SNS이다. SNS는 은혜없는 정의를 가속화 시켰고, 도덕주의자들에게 마약과 같이 악인을 벌하는 짜릿함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며 만족을 느낀다. ‘값싼 은혜’의 모델은 피해자의 내면치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책임이 사라지게 되고, ‘인색한 은혜’와 ‘은혜 없음’의 모델은 기본적으로 복수를 추구하기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의 균형을 이해하라 


용서에 대한 세속적 문화내러티브로는 오늘날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팀 켈러는 기독교적 용서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알리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의 성품에 주목하여 용서를 설명한다. 


오늘날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은 사랑과 진노의 한 쪽 측면만을 부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리면서도, 죄인을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임을 명확히 선포하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를 대립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진노와 사랑이 함께 있는 것은 이중인격이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인간의 분노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계획 등이 무산 될 때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분노는 다르다. 하나님은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사랑이 방해를 받을 때 분노하신다.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은 신 창조세계와 인류를 해치는 악을 향해 분노하시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하면 용서를 쉽게 생각하고 또 응석받이처럼 철없이 살아가게 된다. 또 진노의 하나님만 믿게 되면 학대받은 아이처럼 기쁨이 사라지고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균형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사랑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은 종존 진노로 표현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분별하게 행동하고 마약에 빠져간다면 우리는 가만히 두고 보아야 하는가? 아마도 분노를 쏟으면서 말릴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닌 사랑에 기반한 분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를 징계하시는 거룩을 나타내셨다. 동시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을까하는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다.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은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이 모든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신 것이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준다.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죗값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이중 상환을 요구하실 수 없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인간의 용서는 시작된다. 


팀 켈러는 용서를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첫째, 수직적 차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이다. 둘째, 내면적 차원, 우리가 가해자에게 베푸는 용서이다. 셋째, 수평적 차원,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짓이다. 결국 용서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자원은 수직적 차원의 용서인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용서를 내면화하라 


하나님으로부터 수직적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수평적 용서를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비유’(마 18:21~35)처럼 자신은 빚을 탕감받았지만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참된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짜 회개는 수직적 차원의 용서를 수평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흔히 우리의 생각을 교란시키는 가짜 회개 중에는‘은폐’ 하며 죄를 숨기거나, ‘책임회피’를 하기도 한다. 자신이 온전히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책임 전가’다. “당신이 더 나은 배우자였다면 내가~은 하지 않았을거야” 라고 변명한다. 또 자기 연민이라는 탈을 쓰고 가짜 회개가 등장할 때도 있다. 자기연민은 죄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슬퍼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은 회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자아도취이며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또 자학을 통해 회개를 가장하기도 한다. 자학은 하나님께 압력을 가해 비난 대신 두둔과 용서를 얻어내려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은폐(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와 책임 회피 (정말 내 잘못이 아니야)와 자기 연민 (내가 이게 웬 고생이람)과 자학(내가 비참해지면 아무도 날 비난하지 못하겠지)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P229)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나의 용서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원이 필요하다. 겸손과 기쁨과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영적 자원이다. 창세기의 요셉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창 50:19) 라는 고백으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마저도 죄인임을 자각하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재판관이 아니라 함께 죄인된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이 용서의 출발이다.


둘째, 요셉은 충분한 기쁨이 있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악행을 인정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요한 영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나를 용서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자원이 필요하다. 내가 희생적인 은혜의 수혜자임을 알 때, 내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게 되고 눈물과 경탄과 활력을 낳는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은 나를 겸손하게 하고, 또한 열등감과 자기연민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죄에서 승리하는 순종의 삶을 살게 한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 때 우월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용서의 문을 열 수 있다. 


결국 용서는 내가 죄인되었다는 겸손한 깨달음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풍성한 영적 부요가 합쳐질 때 내 삶 속에서 순종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죄값을 치르는 형벌이 내려졌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다. 그래서 사랑과 진노의 균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의 용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어떤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나를 먼저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나에게 피해를 준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했다고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회복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또한 그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론 


팀 켈러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10대 소녀와 상담을 했다. 그 소녀에게 팀 켈러는 용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잘못하셨네, 하지만 예수님이 널 용서하셨는데 넌 아빠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아빠가 널 지배할 힘을 주는 거야, 이제 너는 뭔가를 할 때도 그게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 그 일을 할 거고, 뭔가를 하지 않을 때도 아빠가 좋아할 만한 일이라서 안 할 거야, 그런 아이들을 여럿 봤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서도 즉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는 용서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이는 최소한 우리의 삶에서 복음의 실제효과를 막고 있다는 증거이다. 누군가에게 분노의 악감정을 품은 채 계속해서 상대를 마치 당신에게 의무와 빚을 진 사람처럼 여기면, 그때 생겨나는 자기중심성이 바로 감옥이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가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아무리 암시해도 힘들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앞에 설 때만 우리는 겸손히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수직적 차원의 용서가 내면적 차원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수평적 차원의 용서가 시작될 수 있다. 


“사랑을 노력으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을 베풀려면 먼저, 사랑이신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을 배우려면 먼저 사랑을 경험한 뒤 그대로 전달하면 된다. 인내심을 기르려면 가장 값비싼 인내로 당신을 구원하시고 운명의 순간까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당신을 용서하신 그분을 봐야만 한다. 그럴 때 당신은 변화될 수 있고, 실제로 변화된다.” (p294)